선이정2024-05-15 18:57:41
아무튼 피어날 것은 피어난다
영화 <디피컬트> 리뷰
SYNOPSIS.
대출과 빚에 허덕이는 ‘브루노’와 ‘알베르’ TV 중고거래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공짜 맥주와 감자칩에 이끌려 얼떨결에 환경 운동에 동참하고,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블랙 프라이데이에 반대하는 ‘캑터스’를 만나 환경 운동에 점점 진심이 되어가는데… 살기는 어렵지만 사랑은 하고 싶은 두 남자와 환경 문제 외에는 모든 것이 무감각한 여자까지… 갓생을 꿈꾸는 파리지앵 3인의 동상이몽 라이프가 시작된다!
POINT.
✔️ 프랑스 영화는 난해하다는 인식을 깨고 한국에서도 흥행했던 <언터처블: 1%의 우정> 감독 작품이에요
✔️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사랑받은 <알로 슈티>처럼 가볍고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예요
✔️ 팬데믹과 기후위기 속에서 젊은 세대가 느끼는 감각을 전제로 한 작품이라서 흥미로워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노에미 멜랑 주연! 마티유 아말릭 등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 얼굴들도 반가워요

계절을 따라 부지런히 옷장 정리를 하다가 한숨이 나온다. 아직 멀쩡하다 못해 새 옷에 가까운 상태이지만 여태까지 손이 잘 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입을 것 같지 않은 옷부터, 마르고 닳도록 입었긴 해도 버리긴 애매한 옷까지...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 늘 고민하는 동안에도 옷장에는 새 옷이 들어오고, 더 이상은 공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큰맘먹고 옷을 덜어냈다. 그리고 이제 당분간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다. 내 돈 주고 산 옷이 나에게 짐이 되는 게 싫다. 그러는 동안 밖에는 종일 그치지도 않고 장마 같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강원도 어디에는 눈이 왔다고 한다. 지금 5월인데요.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텀블러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 단톡방에서 대놓고 부정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천 번을 써야 한다는둥 그건 의미가 없다는둥... 나는 더 이상 그 단톡방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텀블러에 대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 차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기후위기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몇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개인의 민감도 차이는 분명 존재하고, 거기에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엔 너무 바쁘고 지치고 화가 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산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런 우리 삶과 닮은 현실을 산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흥미롭다.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몰랐던 시절의 로맨스처럼 부요한 재정 상태나 환경 상황을 자랑할 수 없는, 낭비할 거라곤 없고 그래서 휘청거려도 기댈 데 없는 세대를 담고 있어서.

심지어 이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브루노와 알베르는 소액 대출을 계속하다가 파산에 이르른 사람들이다. 공짜 맥주를 따라가다 보니 환경 단체 사람들을 만났고, 지금껏 그래왔듯 어영부영 돌려막기 하는 태도로 이들의 활동에 합류한다. 닉네임제로 운영되는 환경 단체 규칙에 따라 '캑터스(Cactus, 선인장)'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여자를 보며 점차로 환경 운동에 진심이 되어가는데, 앞날은 여전히 캄캄하다. 브루노도 알베르도 각자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이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캄캄하고 답답한 상황임에도 어쩐지 실 없이 웃게 된다.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거예요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힘든 한 해 une année difficile'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가 익히 아는 프랑스의 대통령과 고위 정치인들이 나와서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같은 문장들을 말하는 장면들이 모여 나오는데 이 오프닝 시퀀스가 상당히 인상 깊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기의 어려움이 있고, 모든 세대는 각자의 어려움을 돌파하며 살아가야 한다. 캑터스와 친구들은 그 문제를 환경 문제로 정의했고, 그에 따라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시대에 맞선다.
이들에게는 낭비할 자원도, 기댈 환경도 없다. 그렇기에 과격해진다. 환경 문제보다 부동산과 주식이 더 중요한 한국의 기성세대에게는 믿고 싶지 않겠지만, 전세계적으로 청년과 청소년들은 이 불만을 말하고 있다. 신자유구의 구조에서 빈부격차는 점점 빅토리아 시대의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어 청년 세대는 점차 가난해지고 있으며 (이 부분은 한국 사회에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지만), 환경적으로도 기댈 곳 없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소리만 듣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앞에서 목소리를 냈지만 들리지 않아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며 입을 꿰매고, 환경 문제의 시급성을 가장 큰 소리로 외치기 위해 미술품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 속 환경단체 사람들도 가게를 막고, 차량 통행을 막고, 심지어는 비행기 출발까지도 막는다.

이들에 대한 관객의 반응 차이가 흥미로운데, 현실에서의 환경 단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폭도처럼 묘사하거나 오히려 이들 때문에 반감이 생긴다며 어깃장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 때문에 더더욱 채식하기 싫어. 식물은 안 불쌍하니? 같은 사람들 말이다. 골프장의 환경 오염을 지적 당하기는 싫어하면서, 환경 단체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씩 문제 삼는 사람들.
하지만 이 영화 속 마티유 아말릭이 분한 캐릭터를 보라. 그는 은행에서 일하는 기성세대이자, 파산 위기에 놓인 젊은이들을 위해 봉사활동까지 하는 훌륭한 어른이지만, 동시에 카지노 출입에 미련을 못 버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다 조금씩 모자란 채로 산다. 그것을 청년 세대만의 문제로 취급하거나,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의 유난으로 치부하는 자세는 별로 어른스럽지 못하다. 물론... 이 영화 속 청년들도 무분별한 소비를 그만두고 좀 미래 지향적인 재정 계획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게 꼭 골프장 부동산 주식으로만 귀결되는 모양새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우리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지향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조롱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바로 그런 자세들이 가뜩이나 힘든 올 한 해를 더 힘들게 해요...
올해도 힘든 한 해가 될 거라는 오프닝 시퀀스는, 역시나 2024년에도 들어맞는다. 우리 시대가 유독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지금 세대이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보면 과거의 '힘든 한 해'는 다 지나간 것들이기에 단순해 보인다. 1920년대는 독립운동이었겠지. 1970년대에는 민주화였겠지. 하지만 당대에도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립운동 하에 치열하게 갈라졌을 생각을, 민주화와 경제화 앞에서 각양각색으로 펼쳐진 담론들과 그 안의 우선순위 다툼들. 지금도 마찬가지다. 환경이 먼저냐, 경제가 먼저냐. 어려움조차 각자의 몫으로 흩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한 해, 역시나 올해도 힘든 한 해다.

하지만 유쾌하게 해나갈 수 있지
세상 모든 단체처럼 이들이 활동하는 환경 단체 안에서도 다양한 다이나믹이 펼쳐진다. 물론 환경을 위한 활동을 펼친다는 점은 다름이 없지만, 환경 외의 모든 것에 무감한 채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캑터스와 달리, 브루노와 알베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다른 감정들이 동기로 작용하기도 하고 결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OO에서 만나서 결혼하게 됐어요"라고 말하며 웃는 커플들 모두 그런 시간을 거쳤을 것이다.
이들이 주고받는 사랑 또한 여느 영화와는 다르다. 장미꽃과 안개꽃 뒤섞인 90년대 테이블 위의 로맨틱한 식사도 없는, 고급스러운 명품 선물도 없는 만남. 단지 스스로가 살기 위한 구호를 외치며 만나고, 스스로가 좀더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선물 하나를 고르거나 받을 때에도 신중하다.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든 구호들은, 가끔은 아주 비장하지만 또 매일 묵직하지만은 않다. 이들의 사랑도 이들이 외치는 구호도 삶에 그렇게 녹아든다. 투쟁과 경각심, 기후 우울의 세대이자 가난과 채무의 세대인 이들은, 그렇게 삶에 유쾌한 순간들을 녹여낸다.

동시에 이 영화는 사랑의 작대기에만 집중하지도 않는다. 동병상련 브루노와 알베르의 적당하고 느슨한 협력, 얼레벌레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모습. 전형적인 끈끈한 우정과는 거리가 있지만, 원래 우정이라는 게 그렇게 얼레벌레 쌓이는 경우가 더 많지 않나. 이따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보고 시원하게 깔깔 웃어버리기도 하고, 영웅 서사 같은 일을 겪기도 하면서, 이들은 하루씩 나아간다. 남들과 다른 감각으로, 그러나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그 즐거운 모습을 보다 보면 짙은 기후우울이 조금 달아나는 기분이다. 그치. 내일이 없는 삶 같은 기분이 들지만, 오늘을 차곡차곡 이어가는 거지. 비록 낭비할 낭만도 기댈 환경도 없이,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빈곤한 세대이지만. 이들의 투쟁이 아무리 불안하게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이들의 선택이 아무리 빈곤한 것처럼 보여도, 화낼 필요 없다. 아무튼 피어날 것들은 피어난다. 마음도, 사랑도 우정도, 그 안에서 내일도.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하여 시사회에 참석해 감상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은 5월 15일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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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가 작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익스펜더블(Expendable),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것. 미키는 죽는 것이 직업이 되어버린 한 인간이다. 쫓기듯 지구를 벗어나기 위해 제대로 읽지도 않고 지원해버린 미키. 그들은 인류 발전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목하에 인간에게 해로운 온갖 인체 실험을 한다. 그리고는 다시 똑같은 신체, 똑같은 기억으로 완벽하게 휴먼 프린트를 한다. 인간이 해낼 수 없는 ‘*뺑이’, 그것이 미키의 운명이다.
하찮은 독재자
마크 러팔로는 자신의 역할인 케네스 마샬 역으로 하여금 3년 전 촬영할 때는 너무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This is over the top), 이제 와보니 너무 약한 연기(It‘s totally underplayed)였단 걸 깨달았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성별은 오직 2개라며 정체성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없게 시행 중인 ‘트럼프’가 떠오르고, 한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지난 12월 3일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언자가 되어버린 것. 어느 나라에서 보아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형태는 보편적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권력 있는 자들의 하찮음, 낮은 계급의 사람들의 멍청함. 필모그래피 초기 단편작 <지리멸렬>부터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세팅이다.
미키 17과 미키 18
크리퍼(Creeper)들에 의해 생존한 미키 17은 본부로 돌아와 미키18을 만난다. “I’m Fine.”을 말하던 미키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게 되는 계기이다. 크리퍼에게 구해진 미키 17과 그 사실을 모른 채 프린트된 미키 18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분리된’ 존재이기에 여기서 죽는다면 ‘REAL’ 미키는 죽는 것이란 두려움을 가진다.
“미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영화 속 가장 많이 등장한 대사이다. 사람들은 그저 호기심에 도대체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잔혹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미키는 오직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이 아닌 카이(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에게만 이 질문에 답한다. 항상 무섭다고. 영화 후반부, 마더 크리퍼(Creeper)는 ‘공평’을 말하며, 잡아둔 아이를 데려오고, 이전에 죽인 아이에 대한 공평함을 위해 한 명의 인간의 희생을 요구한다. 강인한 미키 18이 케네스 마샬과 함께 자폭하려는 순간, 수많은 죽음을 겪어왔던 미키지만 버튼 누르기를 주저한다. 케네스 마샬이 말한다.
“너도 죽는 게 두렵구나?”
“네가 인간이라는 거지.”
인간이기에 죽음은 두렵다. 미키를 실험체, 그저 고깃덩어리로 보았지만 그도 소중한 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다.
소통과 사랑으로, 아이와 미확인 생명체 크리퍼(Creeper)
영화 속 도로시(팻시 패런)은 연구원 중 유일하게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그녀는 ‘생명의 존엄성’, 그리고 ‘소통의 고귀함’을 아는 인물이다. 미키에게 수명이 15분으로 연장되었다고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모두가 끔찍하게 여기는 미확인 생명체 크리퍼(Creeper)와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미키에게 완성되지 않은 통역기를 건넨다. 이는 그저 실험체, 고깃덩어리로 인식하는 익스펜더블 미키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미확인된 생명체인 크리퍼 역시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도로시’와 같은 존재가 현 시점 우리에게 꼭 필요하단 것을 표현한다. 좀처럼 로맨스 농도를 짙게 표현하지 않던 봉준호 감독이 나샤(나오미 애키)와 미키의 로맨스를 심도있게 그렸다. 어떤 성격의 미키든 간에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나샤, 같은 맥락이다. ‘대혐오의 시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갈라 치기가 만연한 세상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회의 반영이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체험해 보려는 시도이다. 작금과 같은 시대에 더 넓은 세상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다정한 노력만큼 의미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소통’과 ‘사랑’이라는 명확한 의미를 담은 <미키 17>로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 그리고 이런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선언한다. 약간의 다정함 말이다.
미키 17에서 미키 반스로
미키는 한 마디로 ‘주관’이 없었다. 친구 (스티븐 연)에게 속아서 마카롱 가게에 전 재산을 탕진하고, 보증인 역시 자신의 이름으로 올리는 데 단 한 번도 싸우거나 원망도 않았다. 후반부, 미키가 휴먼 프린터를 터뜨리기 전 미키의 환상이 나온다. 휴먼 프린터 앞에 선 소스를 만드는 데 집착하던 일파 마샬(토니 콜렛)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치 강인한 미키 18과 같이 “꺼져.”라고 확실히 말한다. 파이아키아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17에서 18로 넘어가는 나이가 성인이 되는 나이라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미키 17> 영화 전체가 멍청하고 찌질할뿐더러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던 미키가 1부터 18까지의 다양한 성격을 경험하며 자신의 소중한 자아를 확립시키기까지의 성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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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셜록과 왓슨을 뒤이을 추리 듀오 드라마 6
우리 때는 다 셜록이랑 왓슨 좋아했다 •••
셜록과 왓슨 듀오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위해 씨네픽이 준비했습니다!
댓글로 여러분만의 듀오도 추천해 주시면, 씨네픽지기가 놓치지 않고 챙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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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너스> 속 뱀파이어화, 그리고 뱀파이어
<씨너스(Sinners)>(2025, 라이언 쿠글러)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씨너스>의 두 번째 오프닝은 위장이다. 먼저 영화는 (아마도 애니의) 스토리텔링으로 열린다.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물어 혼을 소환할 능력이 있는, 또한 악마도 불러들이는/매혹하는attracts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 이어 1932년 미국 남부라는 배경을 알리는 간결한 문구가 화면에 뜨고, 앞뒤 설명 없는 상황이 뒤따른다. 지옥을 뚫고 달려온 듯한 몰골의 소년이 손잡이만 남은 기타를 들고 교회로 들어선다. 목사는 그를 알아본다. 대립하듯 마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조명하는 숏들 사이에 이질적인 상이 끼어든다. 관람을 마친 후의 관객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되지만, 이 시점에서는 판별할 수 없다. 영화가 그 미지의 존재를 소년과 포개고 있다고 추측하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성직자가 십자가를 들고 기도문을 외우면 괴로워하는 악마의 상을 수없이 봐 왔다. 첫 시퀀스에서 ‘그 목소리The voice를 지닌 자가 악마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으므로, 관객은 기타를 쥔 소년이 위험한 존재라고 짐작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후 전개를 따라가며 전자의 일부가 다시 이해되고, 후자는 완전히 뒤집힌다. 영화 후반부에 이 교회 씬이 재등장하면 관객은 아주 다른 것을 읽어내게 된다.
사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세계를 대강이라도 안다면, 악마에 씌인 블루스 뮤지션이 십자가에 의해 구원받는 서사를 연상하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제스처에 다른 속셈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했을 수도 있겠다. 이 위장은 거기 속아넘어갔건 그 이면을 예상했건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미리 적으면, 악마에 맞서는 힘은 부두교와 블루스- 블랙 헤리티지에서 나온다. 러닝타임을 한참 건너뛰어 새미가 뱀파이어 수장 레믹에게 붙들리는 클라이맥스 씬을 보자. 프리쳐 보이인 새미가 기도문을 외우자, 레믹이 웃으며 그것을 따라 외기 시작하더니 뱀파이어들 모두가 합창한다. 이는 영화가 위장의 해체를 완료하는 장면이다.
환상을 퍼트리는 뱀파이어와 감염의 매개 - 메리와 그레이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목사가 소년에게 ‘기타를 내려놓고 악을 버리라’고 강력히 애원하는 와중 영화는 하루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이 다음부터 묘사되는 것은 스모크와 스택이 새미를 데리고 주점 오픈 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초점은 준비 단계 자체보다는 인물 소개에 있다. 오가는 대화와 행위로 과거사와 관계성이 드러난다. 보, 그레이스, 슬림, 메리, 콘브레드, 애니가 등장한 후,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신호처럼 뱀파이어 악마 레믹은 충격음과 함께 화면에 뚝 떨어진다. 그가 퍼트리는 뱀파이어화는 좀비화를 수반한다. 물린 자들은 피를 필요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을 감염시키기를 갈망하게 되며, 자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적으로 사고하고 움직이게 된다. 뱀파이어화와 함께 퍼지는 것은 “서로에게 무조건 친절한”, 피부색을 ‘인식하지 않는’ 거대한 연합체에 대한 환상이다. 이는 현재에도 All Lives Matter나 Equalism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뭉뚱그리고 차별을 덮는 ‘휴머니즘’적 태도들을 조롱하는 은유가 아닐까.
영화가 쌓아두었던 각 인물의 특징은 감염의 상대적 취약성, 그리고 누가 어떻게 감염되고 감염시키는가와 관련이 있다. 이를테면 동료에게 행사된 혐오성 법폭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슬림은 스스로를 희생해 타인을 지킨다. 뱀파이어에 관한 지식과 영적 능력이 있어 전략적 구심점이 되는 부두교 주술사 애니는 감염되면 자신을 죽여달라고 스모크에게 당부한다. 뛰어난 블루스 싱어/댄서인 펄린은 마늘을 먹기는 싫어했으나 결정적인 순간 새미를 구한다. 더 취약하다/덜 취약하다는 당연히 악에 가깝다/선에 가깝다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상대적이고 어느 정도 우연한 것이며, 경우에 따라 인물이 실제로 그러한가보다 영화가 인물에게 부여한 상징성과 더 관련이 깊어지기도 한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매개 역할로 배정된 메리와 그레이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뱀파이어인 상태로 처음 건물 안에 들어오는 자가 백인의 얼굴을 한 메리라는 점, 뱀파이어들을 건물 안으로 들이는 대사를 뱉는 자가 인종분리정책의 직접적 대상은 아닌 그레이스라는 점은 의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기차역 대화의 말미에 메리는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했고, 스택은 멀어져가는 메리를 향해 ‘네 자리도 마련해 둘게’라고 받아친 후 ‘내 바로 옆에’라고 속삭이듯 덧붙였다. 상대방에게 일부러 닿지 않도록 전달된 이 대사는 스택의 진심을 드러내는 와중 일종의 느슨한 복선 역할 또한 한다. 서로 사랑하는 매리와 스택의 관계는 복잡하다. 메리의 조상 중에는 흑인이 있으므로 당시의 원-드롭 룰에 따르면 그는 백인이 아니다. 그러나 인종은 (레이시스트들이 주장하듯)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계획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후에 우리는 메리가 부유한 백인 남성과 결혼하도록 스택이 주선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엔 (특히 부유한 백인)여성이 남성의 울타리 안에 포함되는 역학과 흑인이 여전히 명백히 차별받는 노예‘해방’ 이후의 역학이 있다. 후자를 피부에 샅샅이 감각하는 스택은 메리를 인격체로 존중함에도 전자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전자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메리의 지속적인 주장은 후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이 관계는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이 아닌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다. (가부장제는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아니니)이들의 사랑은 인종을 뛰어넘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관계를 맺을 때는 인종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메리는 스택으로부터 주점이 적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되고자 레믹 일행과 교류를 시도한 결과 감염된다. 영화는 메리를 영리하고 민첩하게 묘사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부주의했다고 평가할 여지를 차단한다. 메리가 매개로 선택된 것은 그가 지닐 수밖에 없는 특권 때문이다. 백인의 얼굴로 흑인들의 공간에 드나들며 “가족”으로 환영받는 메리는 분리정책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허나 한편으로 양쪽을 오가는 것은 그가 백인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세 백인의 선의를 믿고 밖으로 나간 메리는 ‘모두의 화합’이라는 사상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스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길 바라는, 백인이 아닌 인류human being로 인식되길 바라는 메리는 틀리지 않았다. 다만 영화는 메리의 감염을 통해, 그 바람이 시대 맥락과 사회적 상황을 무시하고 차별을 무화하는 막연한 관념, 심지어는 종교로 변질되는 모습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뱀파이어화된 메리는 별안간 그 복잡한 과거사가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 스택을 유혹한다. 스택은 메리를 거부한 상태에서 거기 넘어간다. 스택과 뱀파이어-메리의 베드신은 애니와 스모크, 새미와 펄린의 것과 달리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침을 줄줄 흘리는 메리를 보고, 스택은 ‘그거 침이냐’고 묻는다. 메리는 ‘좀 줄까?’라고 묻고, 스택은 달라고 한다. 이후 메리는 스택의 입 안에 침을 뱉는다. 이는 단지 페티시가 아니다. 이미 메리가 아닌 메리의/백인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것을 스택이 아래에서 받아먹는 일련의 행위에, 위계와 취약성에 대한 은유가 있지는 않은가? 이들의 사랑에 애초에 위계와 동경이 내포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감염되었고 감염시키는 백인과 감염되는 흑인 사이의 역학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가 1992년에 (레믹과의 끈은 끊어지고 뱀파이어화된 개별 신체만 남은, 햇빛은 보지 못해도 함께 펍에 입장할 수 있게 된 연인으로)스택과 메리를 재등장시킨 까닭은 어쩌면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오염시킨 것에 대한 사과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레이스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영화가 드리운 상징성 때문에 매개로 선택된다. 길을 사이에 두고 흑인 전용과 백인 전용 마켓을 운영하는 보와 그레이스 차우 부부 역시 양쪽을 오갈 수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자녀인 리사가 그레이스를 부르기 위해 흑인 전용 마켓에서 백인 전용 마켓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하나의 숏으로 연결해 촬영하며 이 점을 강조한다. 동시에 메리와 그들은 분명히 다르다. 아시안인 그들은 백인들의 공간에서 이를테면 ‘안 보이는’ 존재가 된다. 스모크가 총을 쏜 직후 백인 전용 마켓의 손님들은 카운터에 있는 그레이스를 ‘보지 않은’ 채 “유색인종”을 폄하하는 발언을 주고받는다. 반면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이 부부는 메리처럼 손님으로서의 가족보단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의 가족으로 간주된다. 새미의 노래로 과거와 미래의 예술혼들이 소환되는 ‘I Lied to You’ 씬에서 영화는 중국 전통 극예술 재현을 잊지 않는다.
한편으로 영화는 보와 그레이스의 캐릭터에 미묘한 차이를 심는다. 첫 등장에서 보는 흑인 전용 마켓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레이스는 백인 전용 마켓에서 흰 앞치마를 입고 일하고 있었다. 새미의 아버지를 비롯해 교회에서 예배를 보던 이들이 전부 눈이 시릴 정도로 흰 복장을 하고 있었음을 떠올려보자, <씨너스>에서 새하얀 옷은 단지 옷이 아니다. 스모크를 허물없이 반기는 보와 달리 그레이스는 총격 사건을 먼저 언급한다. 주크 조인트에서 스택이 메리에게 물렸을 때도, 보는 도우려 하고 그레이스는 선을 긋는다. 결정적으로, 그레이스는 건물의 봉인을 해제해 뱀파이어들을 안으로 들인다. 사실 부부의 반응이 다른 까닭은 성격의 차이나 자녀를 주로 누가 보살펴왔는가의 문제로 짐작된다. 뱀파이어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면 마을로 향했을 수도 있으므로 그레이스의 걱정은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허나 슬림이나 메리, 애니에 비해 얕게 다루어지는 그레이스가 ‘실제로 어떠한가’는 내 생각에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화가 보에 비해 그레이스를 조금 더 ‘백인적인 것’에 가까운 인물로 ‘정했기 때문에’, 그의 대사가 뱀파이어들을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그레이스가 정말로 백인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징성을 걸치고 있다는 뜻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감염을 품고 들어오는 메리의 경우 인물의 특권적 특성이 감염이라는 은유로 발현된다면, 제 의지로 뱀파이어들을 들이는 그레이스의 경우 영화가 부여한 상징성이 실제로는 그것과 상관없는 인물의 행동과 큰 그림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메리와 스택에게 불멸의 로맨스가 선사되었다면 그레이스에게는 이른 죽음이 배정된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화염병을 던지고, 한 뱀파이어의 심장에 말뚝을 찔러넣은 채 함께 활활 타오른다. (그 죽음은 자의로 보이기도 한다.) 그레이스를 뱀파이어화하지 않는 것은 관객의 미움을 받을 것이 분명한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을 수 있다.
신들린, 그리고 한이 서린 음악들 - 레믹과 새미(들)
<씨너스>는 델타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다른 공간을 번갈아 보여주는 한편 시간선은 분리하지 않는다. 인물의 과거 회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관객에게 공유하는 대신,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해 주위 인물들과 공유하게 한다. 스토리텔링이 영화 안 청자에게 들리고 울려퍼지는 것이 <씨너스>에선 중요하다. 스택, 새미와 차를 타고 가던 중 슬림은 아직도 노역을 살고 있는 동료를 마주친다. 그가 겪은 폭력에 관해 슬림이 털어놓는 동안 화면에는 청각적 재현이 배경 사운드로 깔린다. 슬림의 대사와 그가 떠올리는 과거의 소리가 겹치며 재생되는 것이다. 과거의 소리는 슬림과 관객에게만 들리는 것이겠으나, 슬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스택과 새미도 어쩌면 그것을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가지 사운드는 슬림의 신음으로 모이고, 그것은 싱잉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그것들은 블루스 ‘안에’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하려는 듯하다. 새미가 주크 조인트에서 아버지를 위해 쓴 곡을 부르는 것 또한 일종의 스토리텔링, 이 곡은 과거와 미래의 예술혼을 불러낼 뿐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모양대로 춤추게 한다. 뱀파이어를 매혹하는 블루스는 후에 그들에게 맞서는 무기가 된다.
블루스를 비롯한 블랙 헤리티지 뮤직들 말고도 영화에는 또다른 음악, 뱀파이어들이 합창하는 포크송이 등장한다. 이는 영화가 오프닝에 소개한 미디엄의 기원 중 하나이며 블루스와도 관련이 있는 아일랜드 포크다. 이와 더불어 영화가 숨겨둔 결이 드러난다. 레믹은 단지 미국의 백인이 아닌 상당히 나이든 아일랜드인 뱀파이어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기억하고 미국 내 차별을 겪었을, ‘터전을 빼앗긴’ 적이 있음을 언급하는 레믹은 1932년 델타에서 오히려 흑인들, 특히 자신과 같은 음악가인 새미에게 공감한다.(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레믹이 “그가 도달한 시점에 이 장소에 있던 인종적 정의가 존재하기 이전 시대를 살아온 자”라고 말한다.[Indiewire]) 그가 처음 등장해 조안과 버트에게 애원하는 씬으로 돌아가보자. 집 안쪽에 있는 KKK단 복장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잡히는 숏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레믹의 시점숏이다.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델타의 동료가 덮어쓴 누명과 유사한 인종차별적 망상 서사다. 다만 대상이 흑인에서 아메리카 선주민, 촉토 “인디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뒤이어 찾아온 선주민들은 정중하게 위험을 경고하지만, 문을 연 조안은 불안해하면서도 겨눈 총을 내리지 않는다. 레믹이 백인성을 꾸며내 KKK단 일원인 백인을 먼저 감염시키는 것은, 전략적 선택이면서 일종의 대리 복수 겸 조롱(제 ‘종’차별에 제가 넘어가도록 하는)이 아닐까.
주크 조인트 입구에서 가로막힌 레믹은 제 손등을 쓸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듯 “이거?”라고 뱉고 실소한다. 처음엔 이 반응의 원인을 그는 스스로의 피부색을 인식하지 않아도 되는 백인이기 때문으로 읽었다. 허나 레믹의 헤리티지를 알고 나니 그에게 있어 그 ‘분리’는 ‘정말로 이상한 것’인 동시에 이해가능한 것이리란 판단이 든다. 스모크와 스택이 알 카포네 밑에서 일했었다는 점, 아일랜드 맥주와 이탈리아 와인을 훔쳐 주점을 꾸리고는 양쪽이 싸우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점을 기억해보자.(그저 범법적 비즈니스 전략일까, 혹시 어떤 복수의 일환일까.) 이와 더불어 20세기 미국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비롯한 가난한 유럽인들은 한때 백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흑인을 노예화하는 시스템에 포섭되고 동참하며 ‘백인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소수적 인종/민족을 분리하거나 묶으며 착취 피라미드를 만드는 인종주의의 역학, ‘아닌 것을 골라냄으로써 제 1의 종을 형성하는’ 종차별. 레믹은 이 구조를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미 증오에 사로잡힌 그의 목적은 흑인들과 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 고통을 다들 느끼라’,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라’고 강제한다. 회유를 위한 위장처럼 들렸지만 레믹은 원하는 바를 순순히 밝혔다. KKK단, 그리고 사실상 KKK단을 허용하는 지배세력의 말살. ‘우리를 핍박한 저들’을 전부 해하려 한다는 면에서, 레믹은 <블랙팬서>의 에릭 킬몽거와 닮은 데가 있다. 이들은 ‘적들’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수단화할 준비가 돼 있다. 레믹은 자신이 퍼트리는 ‘모두의 화합’ 사상을 스스로 믿지 않는다. 그가 상상하고 원하는 그림은 ‘I Lied to You’ 씬의 말미에 카메라를 등진 그가 바라보고 있는 상-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모든 것이 불타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다.
레믹이 새미를 붙들고 목을 대뜸 물어뜯는 대신 구구절절 과거사를 늘어놓는 까닭은, 새미야말로 그가 이해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 갈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을 지닌 이였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레믹은 새미의 음악적 상징-기타로 인해 치명상을 입고 스모크에게 심장을 뚫린다. 그가 증오에 사로잡힌 악마가 되면서도 지켜온 단 하나가 음악이었기에, 뱀파이어화된 채 오랫동안 살아온 그를 죽이는(해방시키는) 것 또한 음악이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새미는 레믹의 증오에도, ‘모두의 화합’ 사상과 닮은 종교에도 포섭되지 않고 기타 조각을 꼭 쥔 채 제 길을 떠난다. 60년 후 새미가 펄린의 이름을 걸고 공연하는 장면, 재회한 스택과 메리가 그의 음악에 감동받는 장면은 슬림, 펄린, 새미와 같은 이들이 전해 온 음악의 유산이 현재로 이어짐을 긍정한다. 분노에 매몰돼 너의 주변을 불태우지 말라, ‘모두의 화합’이라는 예쁘장한 환상에 빠져 인종주의의 역사와 현존하는 차별을 무화하지 말라, <씨너스>의 자발적 ‘죄인들’이 블루스로 전하는 말씀은 2025년에 너무나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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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자 하는 내용이 주로 흑인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것이어서 스모크와 애니의 이야기가 빠졌는데, 연결… 보단 비교해야 할 지점이 있어 엔딩만 언급한다: 스모크의 복수는 레믹의 파괴와는 다르다. 영화가 플래시백으로 강조하듯 그 스스로 한 말을 지키는 행위이며, 극단적인 저항이다. 영화는 픽션이라는 전제 하에 이 반격을 긍정한다. 죽어가는 스모크 앞에 나타난 애니는 “연기smoke가 아이에게 닿는 게 싫다”는 언어 유희로 “스모크”의 정체성을 내세에 가져오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도(그는 늘 스모크를 ‘일라이자’라는 본명으로 부른다), 그가 호그우드를 쏘는 행위는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하나 더, 크리스천이 아닌 애니가 입은 흰색은 교회 신도들이 걸쳤던 흰색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승에서 바라보고 상상하는 막연한 구원과 순수, 믿음의 (어쩌면 백인성 추구의) 상징이 아닌, 사후에 다다른 낙원에서 얻은 평화를 반영하는 흰색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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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의 색을 말하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포스터
플로리다 프로젝트 (The Florida Project, 2017)
제작 : 미국, 드라마 │ 감독 : 션 베이커
출연 : 브루클린 프린스(무니), 브리아 비나이트(핼리), 윌렘 대포(바비)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1분" 꿈과 환상의 나라 옆에는 빈민가가 있다네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미국의 남동쪽 플로리다 주에는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월드가 있다. 여느 관광지나 그렇겠지만 디즈니월드의 주변에도 관광특수효과를 노리며 화려한 외양의 숙박시설들이 지어졌다. 예닐곱 살쯤 된 아이 '무니'가 사는 곳도 그런 곳의 일부다. 이름하야 '매직캐슬'. 몽환적인 연보라색 페인트로 뒤덮인 이곳은 동화 같은 분위기나 이름과는 달리, 홈리스(homeless)들이 모여 장기투숙을 하는 싸구려 모텔이다. 무니는 스물두 살 엄마 '핼리'와 함께 그곳에서 살고 있다.
아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영양가 없는 와플이나 피자로 끼니를 때우고, 길거리에서 향수를 팔아 힘겹게 방세를 치르는 등, 무니의 엄마 '핼리'는 아이를 키우기에 너무나 무지하고 가벼워 보인다. 무니를 둘러싼 열악한 환경도 문제다. 방세를 못 내면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는 허름한 모텔에는 투숙자들의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고, 공용으로 쓰는 수영장에서 가슴을 내놓고 선탠을 하는 할머니가 사는가 하면, 아이들 곁에 얼쩡거리며 성범죄의 기회를 노리는 남성도 있다. 하지만 무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이므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그저 즐겁고 흥미로울 뿐이다.
" 관여하지 않고 보여주어 드러내는 휴머니즘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사실 영화 초반부까지만 해도 '핼리'에게 엄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런 엄마와 함께 저런 환경에서 쭉 큰다면 어쩌면 아이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교육이나 복지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엄마처럼 길거리를 전전하며 사는 빈민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니 모녀의 이 미래 없는 삶에도 그들 나름의 일상과 사랑이 있다는 걸 서서히 영화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핼리는 정기적 일거리가 없지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방세를 내려고 노력하고, 스물둘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를 거부하는 남자와는 데이트하지 않는 엄마이다. 아무리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핼리는 핼리 나름대로 딸 무니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매직캐슬의 매니저 '바비'도 그런 의외성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바비는 겉으로는 방세를 내지 않으면 쫓아낼 듯 구는 딱딱한 관리인이지만, 실제로는 무니와 핼리가 처한 상황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도우려고 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알게 모르게 그에게 의존하는 무니와 핼리는,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무심한 척 하지만 바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아무리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의 막장 라이프인 듯해도, 카메라는 그 안에 우리가 모르는 구석을 샅샅이 들추어 따스함을 발견한다. 그런 카메라의 시선에는 섣부른 동정이나 비난이 없다. 그저 매직캐슬의 투숙자들이 겪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자 나는 이 무심한 듯 비추는 이 휴머니즘적인 이야기에 완전히 젖어들었다.
" 그 엄마가 틀렸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이런저런 사정으로 더 이상 방세를 내기 힘들어진 핼리가 결국 성매매에 발을 들였을 때에도, 마냥 그녀를 욕할 수 없었던 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방세를 내야만 무니와 함께 살 수 있고 밥을 먹일 수 있다는, 엄마 핼리의 일념이 느껴졌으니까. 단칸방인 그곳에서 몸을 팔며 돈을 받는 동안, 무니는 엄마가 크게 틀어놓은 힙합을 들으며 오랜 목욕을 한다. 욕실 밖에서 엄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른 채, 매일 그렇게 목욕이 반복된다. 핼리는 잘못된 일을 하고 있으며, 어린 무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카메라는 모녀의 삶을 우리에게 알리되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의 신고로 아동보호국에서 결국 무니를 데리러 왔을 때, 그 복잡한 심경은 피크를 쳤다. 절대로 아이를 뺏기지 않으려는 핼리의 발악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무니의 몸부림은 너무도 슬펐다. 그러나 이 열악한 환경에서는 아이가 분리되는 게 맞다는 어른으로서의 판단도 내 안에 존재했다. 핼리가 나쁜 엄마여서가 아니라, 핼리가 처한 환경이 아이를 해칠 것을 알기에. 이 모든 감정이 얽기고 설켜 마음속에서 싸움이 일었다. 이런 환경에서라도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와 두는 게 맞는가, 아니면 더 좋은 환경으로 아이를 보내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답은,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영화가 어느 한쪽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사실만을 비추는 까닭은 아마도 그런 이유였을 테다. 자본주의의 가난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기 때문에. 어린 딸을 두고 성매매를 하는 핼리에게 잘못이 있음을 알면서도, 가난한 모녀에게 별다른 구제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던 사회를 탓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지 개인의 무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홈리스 현상 역시 같은 선상의 문제다. 그러니 동정을 하면 핼리의 잘못된 선택을 지지하는 꼴이 되고, 비난을 하면 사회의 불평등을 외면하는 꼴이 된다. 영화는 그저 적절한 리얼리즘을 통해 관객이 이 양가감정을 충분히 느끼게 하고 싶었으리라.
" 수많은 '무니'와 '핼리'가 진짜 퓨처랜드에 이르기를 "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영화의 마지막. 아동보호국으로부터 분리되기를 거부하며, 무니는 단짝 '젠시'에게 찾아간다. 젠시는 근처의 모텔 '퓨처랜드'에 살며 무니와 매일매일을 함께했던, 마찬가지로 홈리스의 딸이다. 가난을 대물림받을 미국 극빈층의 아이들. "이제 너를 못 볼지도 몰라"하며 무니가 울먹이자, 젠시는 무니의 손을 와락 잡고 있는 힘껏 뛰어 디즈니월드로 향했더랬다. 디즈니월드 옆에 살면서도 가난해서 정작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그곳에, 숨기 위해 뛰어들어간 아이들. 그 모습은 너무나 귀엽고 발랄했지만, 한편으론 슬프고 미안했다. 아이들에게 펼쳐질 현실이 동화가 아니란 걸 알고 있기에.
눈부신 연보라색 건물 외벽, 매직캐슬이니 퓨처랜드니 하는 웅장한 이름들. 그러나 그 안에는 당장 이번 주 방세로 걱정하는 여러 삶들이 모여있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르는, 막연한 동정이나 막연한 비난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삶이.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다소 무력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세상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은 가져봐야 되겠지. 아이들이 디즈니월드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플로리다에 있는, 또는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많은 무니와 핼리들의 안녕을 막연하게나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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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환상적인 섬에 다다를 그 날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는 짧은 전문(全文). 순하고 다정하게 마음에 쏙 들어오는 시구지만, 의미를 들여다보면 문득 이 얼마나 이르기 어려운 경지인가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자세히 보고 오래 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세상 아주 많은 것들은, 어쩌면 모든 것들은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그 진의를 드러낸다. 자세히 보아야 어여쁜 것은 풀꽃만이 아니다.
영화 <우리, 둘> 인물에 대해서 얼핏 들으면 어쩐지 풀꽃처럼 은은한 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짧은 아파트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이웃집에 사는 '20년째 연인' 니나와 마도. 은퇴한 후에는 두 사람이 사랑하는 도시 로마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영화의 배경 또한 한국이 아니라 프랑스니까, 조금은 편안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영화는 "노년 여성, 오랜 연인의 사랑"이라는 데서 떠올린 나의 편견 어린 기대를 장렬히 부순다. 영화가 니나와 마도의 공간을 비출 때, 일상적인 물건들이 클로즈업되고 일상의 소리들이 증폭될 때, 그 안에서 아른거리는 것은 무엇인가.
두 사람은 남들이 보기엔 평범한 이웃이다. 마도의 자식들은 니나의 성씨를 깍듯이 붙여 '돈 부인'이라고 부른다. 니나 또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도를 부를 때 처음에는 '지라르 부인'으로, 절친한 이웃 사이였음을 강조한 후에는 '마들렌'이라는 본명 그대로 부른다. '마도'는 마들렌의 애칭이니까.
평범한 이웃의 깍듯한 호칭 뒤에 연인의 애칭이 가려져 있다. 거실에서 추억 어린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로마의 아파트를 사기 위해 돈을 세고, 함께 옷을 사러 가서 안 어울릴 것 같다고 갸웃대는 옷에 "날 믿고 입어보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사랑과 신뢰로 서로를 꼭 붙은 연인이다. 강산이 두 번은 바뀔 20년 동안 서로를 연인이라 불러온 사이. 둘은 이제 은퇴 후 로마의 아파트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거침없는 성정을 가졌을 뿐 아니라 딸린 가족이 없는 니나와 달리, 한 번 실패한 결혼생활의 기억뿐 아니라 자식들까지 있고 심지어 남편과의 소원했던 관계에 대해 아들의 원망을 받고 있는 마도는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어려운 마음으로 지내던 중, 예기치 못한 병마가 갑작스레 마도를 찾아온다. 뇌졸중으로 말마저 잃은 마도를, 자식들은 최선을 다해 돌본다. 간병인을 들이고, 딸이 수시로 드나들며 살핀다. 표면적으로 단지 이웃일 뿐이었던 니나는 마도에게서 자연스럽게 실은 갑작스럽게 차단당한다. 니나는 본인 성격대로 거침없이, 그리고 무엇 하나 자유롭지 못한 일상 속에서 마도를 되찾기 위한 액션을 취하기 시작한다.
일면 거칠고 비상식적인, 파격적으로 보이는 니나의 행동들은 사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마음을 기반으로 한다. 오랜 연인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불안해져 버린 연인의 뇌리에 가장 깊이 박힌 기억들을 재차 들이대서 어떻게든 그를 돌이키고 싶은 절박한 마음.
반면 영화 속에 놓인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은 낯설게 비친다. 두 사람의 아파트 곳곳에 놓인 오브제를 클로즈업해서 여러 차례 보여주는데,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다시 보게 된다. 무난한 장식물들이었는데 원래 저렇게 소름 돋게, 마치 누군가를 비웃는 것처럼 생겼던가. 사무적이고 능숙한 간병인의 둥근 눈이, 엄마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딸의 눈이, 그토록 평이한 눈빛들이 왜 스릴러 영화의 그것처럼 심장을 옥죄어 올까.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눈물을 왈칵 쏟아내게 만들었던, 선우정아의 <도망가자>와 콜라보 뮤직비디오소리들도 마찬가지다. 소녀의 목소리를 삼키고 울리는 까마귀 소리, 불안하게 맴도는 연기와 함께 프라이팬이 타오르는 소리. 유리창처럼 얇고 투명한 거짓을 부술 기세로 맹렬하게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 평범한 매일의 소리들이 증폭되어, 어쩐지 멈추지 않고 계속 들려올 때 덜컥 불안해진다. 의식하지 않고 들으면 편안한 소리들이, 의식하고 듣는 순간 서스펜스의 요건이 된다.
이런 서스펜스가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누군가가 위협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일상을 과연 평범한 일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이제 바라는 건 행복했던 기억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겠다는 것뿐인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그 기본적인 것도 어려운 이곳, 우리가 일상이라 믿는 곳은 정말 일상이 맞는지? 영화는 큰 소리 내지 않고 울림을 건넨다. 편견과 혐오의 소리는 일상에 깊이 뿌리 박혀 있어, 우리는 이따금 물속의 물고기처럼 느끼지 못하곤 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같은 물 안에서 익사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의 상식이란 뭘까. 어떤 상식들이 스릴러가 되는 모습을 보는데, 한편에서 그를 성큼성큼 뛰어넘는 마음이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오래도록 아낀 마음은 마치 햇볕과 파도에 맨질맨질해진 조약돌 같아서, 부드럽고 따뜻하게 손안에 착 감겨드는 것만 같다. 눈빛만으로도 전해진 두 사람의 사랑은, 육체의 병과 사회의 제약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닿으려는 두 사람의 몸짓은 그 모든 서스펜스적인 요소들을 뛰어넘는다.
사랑은 그렇게 모든 것을 유유히 뛰어넘어 흐른다. 눈빛 속에서 흘러나와 무너지는 것들 너머까지 흘러간다. 이 사랑이 스릴러 없는 일상을 살 수 있는 날, 두 사람이 소중하게 들으며 춤추는 노래 가사 속의 그 날이 아닐까. 상식과 일상을 넘어서서 언젠가 환상적인 섬에 다다를 그 날.
Se verrai con me
sul mio carro tra le nuvole
più avanti del caldo del sol
sull’ultima stella lassù
se verrai
당신이 나와 함께 가준다면
내 마차에 올라 구름을 지나
태양의 열기 바로 앞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별 위로
당신이 가준다면
Tu vivrai con me in un’isola fantastica
e un mondo vedrai di lassù
un mondo nascosto nel blu
tutto nuovo per te
당신은 환상적인 섬에서 나와 함께 살 거예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볼 거예요
푸른 하늘에 숨겨진 세상을
당신에게는 모든 게 새롭겠죠
La terra, la terra, la terra sarà senza frontiere
la terra, la terra ci porterà fortuna
la luna, la luna per noi sarà il domani
se m’ami, se m’ami
이 세상의 대지에는 경계가 없어질 것이고
대지는 우리에게 기회를 가져다주겠죠
달, 저 달은 우리의 미래가 될 거예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대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하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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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 아빠가 인간이었을 때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자타공인 '지브리 스튜디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 덕후다. 일본 방송에 지브리 매니아로 두 번이나 방송에 나간 적도 있다.
영상을 보면서 환경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클지도 모른다.
<벼랑 위의 포뇨>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에 4년 만에 들고 온 신작이었다. 은퇴한다고 했었는데 새로운 작품이 나온 것도 기대되었지만 이번에는 어떤 내용으로, 어떤 캐릭터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줄까 매우 기대가 되었다.
포뇨를 본 뒤, 어른을 위한 동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팬과 평론가들에게는 실망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귀여운 포뇨와 소스케 때문이 아니라 포뇨의 아빠 때문이었다.
<벼랑 위의 포뇨>는 호기심이 어마어마한 물고기 소녀 포뇨가 육지의 소년 소스케를 만나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마 인어공주를 재해석하여, 혹은 모티브로 하여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다른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과거로의 회귀', '자연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그 깔려있는 스토리는 포뇨의 아빠가 끌어가고 있다. 포뇨의 아빠라고 부르고 있지만 엄연히 '후지모토'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그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리뷰라고 하지만 상상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 같다. 후지모토는 인간이었다. 아니, 아직까지 바닷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지 못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애를 잃고 바다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다. 인간인 소스케를
좋아하는 딸 포뇨가 육지로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그는 딸바보, 극성 아빠라며 수많은 욕을 먹었지만 그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주는 이는 없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포뇨의 등장은 쓰레기가 가득한 바다로부터 시작한다. 인간들은 바다에 쓰레기를 마구 버렸고 그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배는 그물을 이용해 바다의 바닥을 긁어낸다. 쓰레기만 치우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다 보니 바다의 생물들은 쓰레기 때문에 피해를 받고, 쓰레기를 치우는 과정에서도 또 피해를 받는다. 인간으로 인해 자연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후지모토가 육지로 올라갔을 때 깨끗한 물을 주위에 뿌리는 행동이나(물론 제초제로 오해받았지만) 소스케와 차를 타고 가는 포뇨를 따라가면서 바닷속의 쓰레기에 계속 맞는 모습으로도 확인할 수도 있다. 후지모토가 더러워진 모래와 뻘에 질색팔색 하는 것은 덤이다.
후지모토가 말하길 그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는 언제부터 인간이길 포기했고, 언제 바다의 여신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까?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일까? 이는 그는 말한 것으로 조금은 추론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물과 공기는 더럽고 인간은 어리석은 생물이다. 인간은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갈 뿐이다."
"나도 한때는 인간이었고, 인간을 그만두기 위해 얼마나 노력..."
아마도 그는 어느 사건으로 인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바다의 여신과도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 인해 죽을 위기였으나 바다의 여신이 구해줬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포뇨의 현재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는 그는 떨린다며 혼잣말을 했다. 그 떨림은 과연 설렘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이 의문 역시 그가 바다의 여신을 만났을 때 그녀의 손길이 그에게 닿았을 때 확신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 모습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두려움 혹은 경이로움에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떨어진 생명의 물을 먹으러 바다 생물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바다의 결계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한다. 후지모토는 인간이 망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인간이 너무 우점해 있고, 그로 인해서 다른 자연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되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아놓는 우물의 방의 번호는 1907이다. 1907년은 환경운동의 역사에 한 축인 '레이첼 카슨'이 태어난 해이다. 방 안에 있는 병에 쓰인 숫자인 1957년에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민간 환경운동 단체인 '시빅 트러스트'가 만들어졌고, 세계기상기구가 주관하여 체계적으로 오존량을 관측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병의 숫자인 1871년은 찰스 다윈은 식물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친구인 조셉 달톤 후커에게 진화론의 가설을 편지에 써서 보낸 해이면서 '인간의 유래'라는 책을 출판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후지모토가 언제부터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인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이 오래되었다면 후지모토는 환경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던 해의 생명의 물을 소중히 모아 놓았을 것이다.
결국 후지모토도 아버지이기는 한 것인지 자녀인 포뇨의 성장 과정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난다. 포뇨가 소스케의 피와 오랜 시간 모아놓은 생명의 물을 먹어서 파워업되었다고도 알린다. 5살의 사리 분별 못 하는 않는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무기를 맡긴 것 같은 말 그대로 긴급상황이다.
하지만 바다의 여신은 딸과 인간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마법의 힘이 가득 차 있고, 데본기의 바다로 돌아간 것 같다며 그 상황을 즐기고 좋아한다. 만약에 후지모토가 바다의 여신을 사랑해서 오로지 그 이유로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었다면 여신의 이 한 마디는 뿌듯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뇨를 걱정한다. 인간이 싫다면서도 '브륀힐트'라는 딸의 이름을 놔두고 소스케가 지어준 이름인 '포뇨'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알 만도 하다. 후지모토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한다. 실제로 인류애를 잃은 것이라면 그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딸 덕분에 그 멸망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다만 사람으로 인해 훼손된 자연이 그 옛날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고 있었다.
딸이 사랑을 얻는 것에 실패해서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후지모토다. 엄마인 바다의 여신은 '원래 물거품이었는데 뭐'라면서 아주 쿨하게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남은 자식이 많더라도 오래된 마법에 자식의 생사를 결정하도록 하는 건 너무 매정한 엄마다.
소스케와 포뇨를 약속의 장소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도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토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속아서 갔다고 했지만 후지모토는 그냥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회유책을 썼을 뿐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다리가 나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이동하는데 더 편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데 머리 좀 길고, 스모키 화장을 했고, 화려한 옷을 입고 귀걸이를 했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후지모토는 가엽기까지 하다. 그리고 요놈 딸내미 아무리 남자 친구가 좋아도 그렇지 아빠한테 물이나 뱉고 있으니 약간의 무력은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지구에 가까이 온 달 때문에 지구의 중력은 달라졌고, 쓰나미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 포뇨 자체가 쓰나미라는 해석이 많다.
결국 소스케의 사랑이 포뇨를 지켰다. 그리고 지구와 세계를 지키게 되었다. 후지모토는 인간의 소스케의 배를 찾아주고, 인간이 소스케에게 악수를 청한다. 지상의 공기와 땅을 더러워하던 그인데 정말 큰 변화이다. 인간이길 포기하기까지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는 그이기 때문에 사실 안타깝기도 하다. 그는 쓰나미 즉 자연재해로 인해 자연의 위대함과 두려움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을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가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들의 삶의 회복을 위해 '급진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후지모토는 한발 물러섰다. 딸의 행복을 위한 아빠의 마음이었을 수도 있으나 남편을 부르는 리사의 오른쪽에 보이는 산에 꽂힌 송전탑을 보면서 생태주의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캄브리아기로 바꾸려고 했었는데, 그보다 이후 시대인 데본기로 바뀌어도 인간이 살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안 후지모토는 다른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후지모토는 환경운동가였던지, 생물학자였던지, 역사학자였을 것이다. '별의 중력장 붕괴 제2단계' 같은 걸 얘기하는 걸 보면 과학자였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가 인류애를 잃고 지구와 바다를 과거로 회귀시키고 싶게 된 사건은 결국 알지 못한다. 사실 지금의 행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바다의 여신이 심심할까 봐 혹은 자신의 마력을 높이기 위해 후지모토에게 일거리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바다의 여신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생각보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인간들 중에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후지모토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환경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으면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의외로 외로운 싸움이기 때문이다.
후지모토를 포함한 이 온 세상 환경운동가들, 힘내시고 평화가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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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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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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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언더그라운드> 티저 예고편
모두가 잰걸음으로 땅 위 삶을 향해 지하를 거쳐만 갈 때
'언더그라운드'에는 이 반듯한 공간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시끄럽게만 돌아가는 세상 아래
지하에서의 삶은 어떠한지 그들에게 다가간다
도시를 지탱하는 지하의 노선도, 언더그라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