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4-05-19 16:55:12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더 에이트 쇼>
지난주 넷플릭스에 공개된 <더 에이트 쇼>는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특정 공간으로 삶의 패배자들을 몰아넣고 벌어지는 쇼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더 에이트 쇼>에서의 죽음은 곧 쇼가 끝나는 것이고, 등장인물들이 더 이상 그 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다. 1층부터 8층까지를 등장인물들이 무작위로 부여받으며 시작되는 이 쇼는 우리 사회에 관해 꽤나 많은 메시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우린 계층 없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최대한 공평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로, 어떤 사람들은 사업가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번다. 평등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그 시스템이 한참 돌아가고 나서 보면, 어느새 각자가 가진 돈은 모두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당 버는 돈의 양도 달라지고, 그 돈의 양에 따라 개개인이 가진 삶의 태도와 지위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평등했던 사회는 점점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간다.
<더 에이트 쇼>는 패배자 8명을 모아 특정 공간으로 넣는 순간부터 기존 사회에서의 직업, 계급, 자본 등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다. 만약 기존에 부자였거나 힘이 있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어도 그 쇼의 공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 여기에 한 가지 무작위로 자신이 지낼 공간을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방은 1층부터 8층까지 각 층마다 자리한다. 각 방은 1분이 지나면 특정 금액만큼 쌓인다. 그리고 쇼가 끝나면 그 금액을 현실로 받아갈 수 있다. 그 쇼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선 평등함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절망으로 가득한 8명이 모였다. 이들은 돈이 없거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별다른 힘이 없는 이들이다. 쇼의 주최자들은 이들의 옷을 똑같이 입히고, 똑같은 밥을 준다. 그리고 똑같은 노동을 하게 만들었다. 단 각 층의 방에 차별점을 두었다. 1분이 지나면 1층은 1만 원, 2층은 2만 원, 3층은 3만 원, 4층은 5만 원씩 올라가고 8층은 34만 원이 1분당 더해진다. 파보나치의 수열이라는 규칙을 통해 각 층마다 올라가는 금액을 한정했고, 방의 크기도 8층으로 갈수록 더 커지게 만들어두었다. 그러니까 그 쇼의 공간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무작위로 정해져 있는 불평등을 만들어둔 것이다.
사실 이 설정은 우리가 사회에 태어나 얻게 된 자신의 가족이 가진 지위나 자본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 가지게 된 배경환경은 나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그걸 다시 바꿀 수는 없다. 그냥 주어진 것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규칙에 적응해서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더 에이트 쇼>가 보여주는 쇼는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커지는 불평등
다른 모든 것이 평등하지만, 그 공간에 처음 부여받은 부의 조건이 다르다. 모두가 신사 같은 젠틀함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서로를 돌봐주지만, 맨꼭대기 층인 8층이 가진 힘이 그 평등함에 균열을 가한다. 8층에는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방이다. 그리고 하루 한 번씩 제공되는 물과 도시락 10개가 그 방에 최초로 배달된다. 방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줘야 모두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마치 스페인 영화 <더 플랫폼>의 설정처럼 위에서 먹고 남은 음식이 밑에 내려가는 구조다. 그래서 층이 높을수록 더 많은 걸 가지게 된다.
꼭대기 층의 주인인 8층(천우희)은 예측불가능한 인물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량을 내려보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다른 층의 사람들은 생사를 위협받게 된다. 그리고 방 안에서 해결하던 대변과 소변 봉투도 아래로 내려온다. 결국 최하층인 1층(배성우)이 그걸 도맡아 처리하지만, 위층에서 내려오는 부담을 아래층이 계속 나눠서 떠안아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방 안에서 원하는 물건을 인터폰으로 주문할 수 있는데, 지불해야 할 가격은 실제 금액의 100배 수준이다. 이건 결국 기존에 자본이 많았던 사람들에겐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릴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8층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춘다. 총 8부작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에서 이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8층은 여왕이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아래층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과 음식을 제공받는다. 이 쇼의 기본 룰에 누군가 죽음을 당하면 쇼가 끝난다. 그러니까 8층을 죽인다는 것은 모두가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마치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 기업이나 사회의 우두머리를 끝장내면 모두가 돈을 벌 수 없는 혼란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 쇼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춤으로서 이미 만들어진 계층 사회가 계속 지속되게 만든다.
착취로 이어지는 쇼
이 쇼에서 시간은 꽤 중요하다. 공용공간에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의 시간이 0이 되면 쇼는 끝나고 각자 방에 있는 전광판에 적힌 금액만 가져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그 시간을 늘리려고 최대한 애쓴다. 맨 처음 하는 것은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8층은 다른 사람들에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시간이 늘어난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몇 번하자 시간이 늘어난다. 이후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시간을 늘리는 노동을 시작한다.
노동 과정도 재밌다. 매일 모두가 하기 힘드니 4명씩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1층을 도와 대신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힘든 과정 이후 분란이 생기고 팀이 갈라진다. 계단 노동 이후엔 시간을 늘리는 행위가 무언가 재미있는 상황을 보여줘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장기자랑부터 다양한 게임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중요한 전환점이다. 노동이 재미로 대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인데, 애초에 노동은 모두가 같이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누군가를 위해 1층에서 4층까지의 인원이 대신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니까 착취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 행위가 게임이라는 행위로 대체되면서 재미로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잔혹하거나 선정성을 높여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폭력과 착취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각 층의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배신을 한다. 7층(박정민)이 대표적이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상황판단이 좋은 엘리트로 보였던 그가 8층과 6층(박해준)의 지배행위에 협력하면서 1층, 2층(이주영), 3층(류준열)이 속한 집단은 계속 가학적인 게임에 참여해 폭력을 당한다. 7층은 이 시리즈에서 강남 좌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7층은 가진 것이 많은 것에 비해 하층인 1-4층의 편을 많이 들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시리즈에서 7층이 누구 편에 서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돈과 판단력을 가진 7층의 선택이 무엇인지에 따라 시리즈 내내 이야기의 온도를 차갑게 하기도 하고 뜨겁게 하기도 한다.
독재에 이어지는 혁명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3층이다. 가장 평범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이면서, 겁도 많고 가진 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각을 독백으로 관객에게 던진다. 즉, 관객이 3층의 입장과 거의 비슷하게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이야기 안에서 3층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다. 그저 당하고 또 당할 뿐이다. 하지만 최상위 계층인 8층을 시작으로 7층, 6층에 의한 독재가 시작되면서 그는 계속 방법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3층이 끝까지 중심 화자인 건, 그가 절망 속에서도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안다. 작은 욕심을 부릴 때도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 마치 밟아도 일어나는 민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리즈의 이야기가 후반부로 달려가면 점점 독재의 경향성이 짙어진다. 8층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모두에게 고문까지 하는 지경까지 간다. 이 잔혹무도한 독재는 결국 혁명을 부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3층과 같은 힘없는 민초, 그리고 그를 돕는 여러 사람들. 그들이 부른 혁명이 후반부를 장식한다.
그 혁명은 화려하지 않다.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잔혹한 쇼를 어떤 방식으로든 끝을 낸다. 더 잔혹한 행위들이 나오고 같은 편을 배신하는 반전들은 쇼의 시간을 늘리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결국 쇼는 끝이 난다. 단지,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원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하고 어쩌면 그 불평등함을 그저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에이트 쇼>를 다 보고 나서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불평등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미 높은 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이고,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민주적이고 평등을 내세우고 있는 정치인들과 상위계층들은 표를 얻기 위해 좋은 말들로 나쁜 행위들을 포장한다. 보이지 않는 착취와 고문은 계속 이어진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쇼를 끝낼 수 있는 건, 결국은 평범한 민초들일 것이다.
이 시리즈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은 <관상>, <더킹>, <비상선언> 연출 이후 이 시리즈를 만들었다. 잘 짜인 미장센과 독특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화면의 비율을 늘리고 줄이면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쇼의 축소판을 만들어냈다. 사회적인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시청률에 매몰되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대중매체의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시리즈다. 또한 설정뿐 아니라 각 캐릭터에 대한 해석도 각기 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나 8층 역할을 맡은 천우희는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가 얼마나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정민, 류준열, 박해준, 이주영, 이열음, 배성우, 문정희 배우들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를 보여준다.
한 번 시작하면 단숨에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달려갈 수 있는 시리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고, 담긴 메시지도 다층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최근 한국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사회적이고, 다층적이고, 흥미로운 시리즈가 등장했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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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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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를, 내가 짊어온 삶을, 들어준다면
보호자 대신 보호 시설 안팎에서 하루하루 살아내기 급급한 아이들의 불안정한 입지. 이곳, 벨기에 사람으로서 사업을 영위하는 어른은 겪을 일 없는 처지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주할 권리를 증명받지 못한 '로키타'와 체류권은 있어도 한낱 꼬마에 불과한 '토리'는 여전히 벨기에 시민에 속하지 못하기에 이 어른들의 이해타산과 딱 맞는다. 마약 거래상으로 뒷돈을 챙기는 일은 의심받기 쉬울뿐더러 시민인 이상 허락되지 않는 일이기에.
푼돈에 급급한 아이들은 군말 없다. 하물며 자신들이 수고스럽게 받아온 돈 뭉탱이에서 50유로 한 장을 받는다 하더라도. 기대나 실망이 담길 틈 없는 눈빛. 그러나 공허하진 않다. 토리와 로키타에겐 서로가 있기에. 지켜야 할 존재가 있다는 건 사람을 가장 강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가장 유약하게 만든다.
다 자라지 못한 어른들의 세상에 편입된 이미 다 커버린 아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요 줄거리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어른의 삶은 산다는 건 어떤 것인가. 정의할 말은 여럿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타인을 간단히 가늠하는 것 아닐까.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 가며 적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 내며 인간 사회의 규모가 점점 더 커졌으니까. 안타까운 건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엔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진위여부를 가리기에 급급하니 말이다. 이 말이 진짜인지, 거짓이 섞인 건 아닌지, 과장한 거라면 어느 정도가 진짜일지.
로키타가 거쳐온 인터뷰도 비슷한 양상일 테다. 어른들은 로키타가 살아온 보육원에 대해 질문하고, 토리와 만나게 된 경위를 묻는다. 하지만 로키타의 답변엔 관심이 없다. 그가 진짜를 말하고 있는지, 우리 어른이 듣기에 납득할 만한 타당한 사실인지를 확실히 가리고자 질문에 질문을 거듭한다. 취조 현장과 다를 바 없다. 잘못해서 불려 온 것도 아닌데.
마치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논리를 갖춘 구조로, 빈틈없이, 하나의 매끄러운 발표문처럼 말해야 하는 현실과 겹쳐진다. 일평생 더불어 살아온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소개하기도 어려운데, 그런 내가 겪은 한 사건의 특정 시점을 얼마나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질문하는 이가 만약 질문받는 입장이 느낄 당혹스러움과 혼란을 느껴봤다면, 결코 꼬투리 잡듯 묻지 못했을 거다. 결코 상대의 처지에 놓이리라는 생각을 못했기에 뾰족하게 콕콕 찌를 수 있을 테지.
한편으로는 질문을 건네는 쪽의 최선이기도 하다. 비스름한 상황에서 엇비슷한 진술을 하는 수천수만 명을 상대로 어떻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진짜를 말하는 것인지 가늠하는 게 가장 빠르고 손쉽다. 증거의 적확함을 토대로 판결을 내리는 법이 그러하듯.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을 따라 모든 판단은 기출문제처럼 유형이 정해졌다. 그 형식에 능한 사람은 조금 더 유리한 판정을 얻어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순서가 뒤로 밀린다.
로키타는 후자에 속했다. 쉽게 당황하고, 말주변이 없고, 금세 패닉에 빠진다. 어찌 보면 그는 유약할 수밖에 없다. 온갖 궂은일을 제가 다 처리해 가며 동생인 토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동생과 함께 일하지만 직접 마약을 건네고 고객을 상대하는 건 로키타가 전담한다. 와중에 토리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돕기까지 하며.
다소 강박에 가까운 애씀. 이 책임감은 엄마의 불신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과 뒤섞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와 동생이 하루하루 모은 돈은 엄마와 다른 동생들이 있는 쪽으로 보낸다. 아니, 정확하게는 보내려고 했다. 브로커들이 낚아채지만 않았더라면. 로키타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과정은 또다시 진술의 형태를 띤다. 피해 사실의 보고. 그리고 역시나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가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 슬픔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그가 증거품목이라고 내밀 수 있는 건 오로지 그의 머릿속, 그의 마음속에 있기에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
로키타는 자신이 겪은 세계로부터 토리를 보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증명해야 하고, 거짓을 말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증명해야 하고, 그럼에도 반복해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이 나날에서. 이미 자신은 세상의 진흙탕에 굴러 너무 더러워졌다.
하지만 로키타가 토리를 신경 쓰는 만큼 토리 또한 로키타를 아끼고 챙기려 든다. 보호받는 동시에 보호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로키타보다 토리가 유리하다. 남자 어른은 여자 아이를 건들 생각만 하지, 남자아이에겐 새로운 일감을 주니까.
욕구와 요구만이 가득한 주변에서 그나마 잠시 반짝이는 빛이 그들에게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빛에 기대지 않는다. 우리를 믿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도움은 측은지심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반응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거나 낯선 느낌이 들면 내민 손을 금세 거둬들인다. 신기루에 이끌려 어느 하루를 버틸 생각보다는 서로에게 기대어 제 발로 이 땅을 디디고 서는 게 안정적이다.
살아가고자 하는 절박함과 간절함은 구린내가 나는가 보다. 생존 자체가 목적인 모습이 그들과 동등한 사람이라기보단 길들이고 사육할 동물로 보이는 것인지. 몇 마디의 협박과 위협적인 소음을 만드는 것을 생각하면 애석하게도 이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기죽지 않는다. 자신이 한 노동의 대가는 비합리적일지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필요한 것을 정확히 언급한다. 음식점의 남는 빵, 손님들을 위해 불러준 공연의 값, 하다못해 깨끗한 침대보라도. 최후의 보루였는지 모른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람임을 증명받기 위한.
이마저 통하지 않자, 둘은 그들이 함께 살아갈 새로운 방향을 찾아낸다. 머리가 지끈할 만큼 무모한 선택이다. 하지만 무어라 나무랄 수 있을까. 그 길은 막혔으니 다른 길로 가라고, 가리킬 대안이 없다. 최선의 선택은 최고의 선택이지 않다. 때로는 최선이기에 최악이다.
서로를 부르는 음성과 깊은 포옹. 그리고 목적지가 있을 수 없는 달음박질.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노랫말이 자꾸 귀에 맴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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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버 스케이트> 러시아의 낭만과 현실이 담긴 로맨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세기를 바라보는 1899년 겨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꽁꽁 얼어붙은 운하 위로 '마트베이(표도르 페도토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스케이트를 신고 빵 배달을 하며 살아가던 중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분노에 가득 찬 그는 공산주의에 심취한 '알렉스(유리 보리소프)'가 이끄는 소매치기 무리에 합류한다. 한편 상류층 귀족 영애 '알리사(소냐 프리스)'는 매우 보수적인 가풍으로 인해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한 채 마치 감옥에 갇힌 듯 답답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베이와 알리사는 우연한 만남을 갖고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6월 16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러시아 영화 <실버 스케이트>의 내용은 언뜻 보기에 평이하다. 근대 유럽에서 펼쳐지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와 그 멜로드라마 저변에 은은히 깔려 있는 여성 인권 신장 운동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이나 화제의 드라마였던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 더 나아가 셜록 홈즈의 여동생이 주인공인 <에놀라 홈즈>와 같은 영화를 자연히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실버 스케이트> 속 사랑은 손쉽게 예상할 수 있는 통속적이고 감정적인 로맨스와는 결이 다소 다르다. 그 중심에는 젠더 권력관계의 전환과 공간적 배경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가 있다.
앞서 예시로 언급한 작품 속 로맨스는 대체로 상류층 남성과 평민 여성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설령 남녀가 모두 귀족 집안의 자제라 하더라도 남성 측 가문이 혈통이나 전통, 권력의 측면에서 우위에 있는 상류층인 경우가 대다수다. <오만과 편견> 속 피츠윌리엄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베넷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브리저튼>에서도 나름 명문가라는 다프네의 가문이 자작 작위를 가진 것에 비해, 사이먼은 그보다 높은 공작과 백작 작위를 지니고 있다. 이때 여성이 남성의 신분이나 재력보다 그의 인품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는 전개는 결혼이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여겨지던 당시 시대상과 뚜렷한 대립각을 이루며, 주도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부각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하지만 <실버 스케이트>는 이러한 관습적인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 남녀 주인공 간의 권력관계가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인 마트베이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배달일을 하며 입에 간신히 풀칠을 하는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역시 거리 가로등 관리자에 불과하다. 반면에 알리사는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청장 혹은 행정안전부 장관에 가까운 고위직을 맡을 만큼 최고위층 귀족 가문 영애다. 이처럼 남녀 간의 권력관계가 명백히 뒤 바뀌어 있다 보니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 알리사가 내리는 결단은 단순히 여성 권익 향상의 범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신 젠더 권력 너머의 기득권과 비기득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회적 강자와 약자에 대한 담론으로 나아간다.
실제로 마트베이와 알리사는 서로에게 그간 알 수 없었던 각자의 세상을 보여주며 호감과 사랑이 될 동질감을 싹 틔운다. 대학에서 화학 공부를 하는 게 꿈이지만 보수적인 집안의 격렬한 반대에 시달리는 알리사. 그녀는 귀족 연회에서 도둑질 중이던 마트베이를 신고하지 않는 대신, 그를 남편으로 위장시켜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 찬 계획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마트베이는 마냥 강자로 보이던 귀족 중에서도 탄압받고 제약당하며 자유가 없는 약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편 마트베이는 운하 위에 열린 야시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를 알리사에게 보여준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들, 그러나 자신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고통받아 온 상인과 노동자, 농노의 삶과 그들의 민낯을 생애 처음으로 마주한다. 그들의 데이트는 단순한 불장난이 아니라 자신 외의 약자를 인지하고,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트베이와 알리사의 사랑, 그것의 씨앗이 되는 동질감이 다른 인물과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 묘한 연대감과 동질감은 소매치기단의 리더인 알렉스와 그의 동료들에게까지 확장된다. 마트베이가 알리사를 데리고 시내 구경을 시켜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마트베이의 소매치기 동료들을 만나 술집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알리사는 알렉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짧은 토론을 벌인후 그로부터 <자본론>을 선물로 받는다. 그 이후 마트베이의 동료들이 술집에서 자신에게 큰 무례를 범하고 마트베이와 주먹다짐까지 펼쳤는데도, 또 알렉스가 경찰의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인질로 붙잡았는데도 그녀는 <자본론>을 탐독함과 동시에 <자본론>을 자신의 과학책들과 함께 소중히 보관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에서 약자였던 이들이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이 있음을 서로 확인하고, 이러한 동질감을 토대로 연대할 기초가 만들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악역인 듯 보이던 알렉스가 예상과 달리 끝내 마트베이를 동료로 인정하고 알리사를 살려준 것과 달리, 정작 알리사의 약혼자이자 러시아의 평범한 귀족 군인으로 기득권층의 핵심에 위치한 '아르카디(키릴 자이체프)'가 최종적인 악역으로 설정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마트베이와 알리사의 사랑 중 계급을 뛰어넘은 빙상장 위에서의 만남이 러시아의 낭만이라면 마트베이의 말에 담긴, 농노의 삶은 비참하고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는 기계처럼 다루어지는 사회상은 러시아 혁명이 발생한 이유이자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실버 스케이트>는 이러한 사회적 약자 간의 동료애와 연대감에 공간적 배경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를 더해 더욱 강조한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고 지금도 러시아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바로 그 약자들의 피와 뼈로 만들어진 도시이기에 가능한 연출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토르 대제의 명령으로 1703년부터 만들어진 신도시로, 강 하구 쪽 둑 위의 습지를 매립해 만든 도시였다. 매립 작업을 위해서 표토르 대제는 9년 간 연 4만 명가량 농노를 비롯해 전쟁 포로들을 강제 노동에 투입했고, 그 결과 1712년에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이자 일명 '뼈 위에 세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새하얀 눈이 덮인 러시아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과 마찬가지로 하얀 뼈들이 토대를 이룬 현실이 영화의 공간에 이미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운하의 도시로 유명한 암스테르담을 모델로 삼아 건설된 역사는 스케이트가 영화의 주 소재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암스테르담 못지않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 덕분에 작중 대부분의 사건이 마트베이를 비롯해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인물들로부터 발생하고, 피겨 스케이팅 기술을 적용시킨 듯 화려하고 독창적인 스케이트 액션신이 대거 등장하는 것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히 도시의 상징성은 운하 위 스케이트 액션신에 새로운 의미도 불어넣기도 한다. 운하가 있어야 할 정도로 습한 땅에 노동자들이 피땀으로 제국의 수도를 건설했다는 역사는 그 자체로 사회적 불만이 가득한 스케이터 소매치기들의 활동이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라 제국에 불만을 품은 정치적 테러로 인식될 개연성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운하 위를 수놓는 소매치기와 경찰 기동대 간의 치열하고 필사적인 추격전이 기대 이상의 몰입감을 선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는 단지 배경으로 남을 뻔했던 공간적 배경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면서 도시를 마치 한 명의 캐릭터처럼 활용한다.
이에 더해 <실버 스케이트>는 스토리 전개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공간들의 전경, 부감을 군데군데 삽입하면서 분명 해피엔딩인 두 남녀의 로맨스를 일견 아련하고 가슴 먹먹하게 만든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 시절 건설되어 현재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겨울 궁전이라든가, 겨울 궁전 바로 앞에 위치한 궁전 광장과 알렉산더 원기둥이 유독 눈에 띈다. 왜냐하면 겨울 궁전은 문화적으로도 유럽 열강들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유럽의 예술품 수집하던 러시아 제국의 노력이 깃든 장소이자, 러시아 혁명의 서막을 장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소 불필요한 듯 보이는 이 장면들을 역사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1899년 겨울을 나는 인물들과 러시아의 모습에서는 그들의 씁쓸한 미래, 그 비극의 씨앗을 미리 맛볼 수 있다. 그렇기에 <실버 스케이트>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를 넘어서서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결코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러시아의 낭만과 현실을 모두 잡은, 러시아만의 아련함이 잔뜩 묻은 사랑 이야기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차갑게 뜨거운 낭만과 아파서 아름다운 현실을 모두 잡은 러시안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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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기작이 3개 이상인 배우 모아보기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차기작이 세 개 이상인 배우를 한번 살펴볼까 하는데요!
벌써 차기작이 세 개 이상이 뜬 배우에는 과연 누가 있을까요?
그럼,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하늘
ⓒ 티에이치컴퍼니
차기작 목록
<스트리밍>
<이재 곧 죽습니다>
<30일>
차기작 관련 소식
<스트리밍>
영화 <스트리밍>은 '구독자 수 1위의 미스터리 스트리머 우상이 풀리지 않는 연쇄살인사건의
단서를 파헤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이다. 강하늘은
영화에서 범죄 프로파일링 전문 방송을 하는 구독자 수 1위의 미스터리 스트리머 역을 맡았다.
<30일>
영화 <30일>은 '로맨스로 시작했지만 스릴러가 되어버린 결혼 생활의 끝을 딱 30일 앞두고
뜻밖의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노정열과 홍나라의 로맨틱 코미디'이다. 주연 배우 강하늘과
정소민은 영화 <스물>에 이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게 되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태리
ⓒ 제이와이드컴퍼니
차기작 목록
<외계+인 2부>
<악귀>
<정년이>
차기작 관련 소식
<악귀>
장르물의 대가 김은희 작가의 복귀작 SBS 드라마 '악귀'는 문을 열면 악귀가 있는 다른 세상,
악귀에 씐 여자와 그 악귀를 볼 수 있는 남자가 다섯 가지 신체를 둘러싼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드라마다. 드라마에는 배우 김태리, 오정세, 홍경이 출연한다.
<정년이>
드라마 <정년이>는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로 1950년대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단에 관해 다룬 작품이다. 실제로 원작 웹툰 작가가 주인공 정년이의 초기
이미지를 잡을 때 <아가씨> 속 김태리의 이미지를 많이 참조했었다고 밝히며 기대를
더욱 높혔다.
한선화
ⓒ KEYEAST
차기작 목록
<교토에서 온 편지>
<걸스 인 더 케이지>
<놀아주는 여자>
<달짝지근해>
차기작 관련 소식
<교토에서 온 편지>
가족 안에서 자신을, 그리고 뿌리는 찾아가는 세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는 영화제에서 공개 됐지만, 아직 극장 상영은 하지 않았다. 배우 한선화는 둘째 혜영
역을 맡았다.
<달짝지근해>
영화 <달짝지근해>는 독적인 맛을 개발해온 천재적인 제과회사 연구원 치호가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대출심사회사 콜센터 직원 일영을 만나게 되면서 달짝지근한 변화를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3개월 간의 촬영을 마치고 작년 10월에 크랭크업했다.
박규영
ⓒ 사람엔터테인먼트
차기작 목록
<셀러브리티>
<오늘도 사랑스럽개>
<스위트홈 시즌2>
<스위트홈 시즌 3>
차기작 관련 소식
<셀러브리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셀러브리티>는 명해지기만 하면 돈이 되는 세계에 뛰어든 아리가
마주한 셀럽들의 화려하고도 치열한 민낯을 담은 드라마이다. 박규영 배우는 셀러브리티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인생이 바뀐 '서아리' 역을 맡았다.
<오늘도 사랑스럽개>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오늘도 사랑스럽개>는 키스를 하면 개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여자와,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치트키지만 개를 무서워하는 남자의 예측불허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이다. 박규영 배우는 키스를 하면 개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한해나' 역을
맡았다.
유태오
ⓒ 씨제스
차기작 목록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패스트 라이브즈>
<연애대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소년>
차기작 관련 소식
<패스트 라이브즈>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할리우드 신작 영화로 해외 유명 배급사 A24와 CJ엔터테인먼트가
공동 투자 및 제작을 맡았다. 영화는 한국에서 만난 어린 시절 연인이 어른이 된 후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연애대전>
<연애대전>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남자에게 병적으로 지기 싫어하는 여자와 여자를
병적으로 의심하는 남자가 사랑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는 모습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유태오
배우는 연애라면 질색인 '남강호' 역을 맡았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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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그보다 늦게 태어난 것은 행운이었다
7★/10★
영화만큼이나, 때로는 영화보다 더 유명한 영화 음악(혹은 음악 감독)이 있다. 영화를 본 후 누가 연출했는지보다 음악 감독이 누구인지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그리고 엔리오 마리꼬네야 말로, 이 두 사례의 가장 적합한 예다.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는 2020년 타계한 전 세계적인 영화 음악가 엔리오 마리꼬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고백하자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해 2017년까지 엔리오가 음악 작업을 한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시네마 천국〉, 〈헤이트풀 8〉 두어 편에 불과하다. 내겐 곱씹다 보면 여운을 자아내는 그와의 추억이 없다. 그러나 156분의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현대 영화 음악이 그에게 빚진 것이 너무나도 많고,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온 음악이 그의 성과라는 점을 새로이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엔리오는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음악을 시작했다. 이후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고프레도 페트라시에게 작곡을 배웠다. 엔리오가 ‘순수 음악’의 테두리 아에서 음악을 배웠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장점은 탄탄하고 체계적인 기본기를 바탕으로 영화 음악을 작업해 다채로운 작업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 단점은 동료들이 엔리오의 영화 음악 작곡을 하찮게 대했다는 것이다. 영화 음악은 순수 음악보다 한참 격이 떨어지는 장르로 여겨졌다. 엔리오가 동료들에게서 고립된 이유다. 더불어 그는 늘 예술적 정체성과 ‘순수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배신자’, ‘매춘’, ‘천박하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순수 음악계 출신으로 이와 같은 시선을 어느 정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던 엔리오는 오랜 세월 이 문제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 음악 쪽에서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영화 음악은 천편일률적인 배경 연주곡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엔리오는 전통적인 사운드에 실험적인 요소를 결합해 영화 음악을 별 의미 없는 부가 요소로 취급하는 현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캔 소리, 첨벙거리는 소리, 휘파람 등을 음악에 더해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사운드를 만들었고, 영화는 그 덕에 더 큰 몰입감을 가질 수 있었다.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에는 그가 작업한 영화 음악과 해당 음악이 사용된 장면이 여럿 소개된다. 본 적도 없는 영화의 짧은 장면이, 마찬가지로 짧은 음악과 함께 소개될 뿐인데도 배우의 감정과 영화의 분위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엔리오의 음악이 화면 속 여러 요소와 만나 극적인 시너지를 내기 때문이다. 미처 영화 음악인지 몰랐던, 귀에 익숙한 곡도 꽤 많다. 엔리오의 작업이 얼마나 큰 문화적 파급력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그의 음반은 전 세계에서 7,000만장, 한국에서는 200만 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작업한 영화마다 자신의 인장을 새긴 엔리오. 엔리오는 이내 영화 음악계의 스타가 되었다. 보통 음악 감독이 영화를 먼저 보고 그에 맞는 음악을 작업하는 데 반해, 엔리오의 음악을 먼저 들은 몇몇 감독은 자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요소를 그로부터 찾아내 이를 보완하는 연출을 하기도 했다. “영화 음악은 감독의 역량 바깥에 있다”, “곡 자체가 의미가 있어야 영화에 기여할 수 있다”라는 엔리오의 말에서 자기 일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프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늘 혁신의 전위이기를 멈추지 않은 엔리오. 그의 이런 면모가 ‘영화 음악에 관한 영화’를 가능케 한다. 때로는 관객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분야에서도, 누군가는 장인정신을 발휘해 영화에 기여하고 있고, 〈엔리오: 더 마에스트로〉가 입증하듯 이런 헌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가 된다. 영화를 아끼는 동시대 관객이 이 위대한 장인보다 뒤늦게 태어나 그가 이뤄놓은 것들을 누리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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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다섯 스물하나>정답보다 풀이가 중요한 순간이 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이라는 난적을 극복하기 위해 애써 온 수많은 이들은 아마 다음 두 문장을 숱하게 들어봤을 것이다. "풀이를 쓰면서 문제를 풀어라." 그리고 "정답은 중요하지 않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답을 찾아내는 게 지상 최대 과제인 한국의 학생에게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사실 머나 먼 안드로메다나 아스가르드 마냥 낯설기만 한 조언이었다. 그저 조금 더 꼬고 길어진 풀이를 요구할 뿐, 같은 개념과 원리를 요구하는 문제들을 줄줄이 틀리기 전까지는. 이는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되는 듯했던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범한 패착이기도 하다. 답을 위해 과정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한 <스물다섯 스물하나> 역시 정답에 도달했는데도 허탈하고 공허하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했다. 바로 한국의 <라라랜드>였다. 이미 그 정답은 드라마의 시작에서 다 알려져 있었다. 나희도의 첫사랑인 백이진과 딸인 김민채의 성씨가 다르다는 점은 90년 말, 2000년대 초의 청춘을 추억하는 드라마의 로맨스가 결코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라는 암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즉,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커플의 완성 혹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로맨스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 대신, 사랑과 꿈이라는 갈림길을 함께 걸은 두 청춘의 동행을 보여줄 것임을 일찌감치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두 주인공의 관계는 <라라랜드> 속 세바스찬과 미아와 꼭 닮아 있으며, 그래서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한국의 <라라랜드>라 할 수 있다. <라라랜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재즈와 연기를 할 이유와 열정이 되어줬던 세바스찬과 미아.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서로 다른 꿈을 좇는 현실 앞에서 갈라진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은 배우인 미아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해 "리허설 같은 건 아무데서나 할 수 있으니 함께 가자"라고 말한다. 반대로 미아 역시 세바스찬의 세계를 모르기에 밴드 투어가 언제 끝나는지를 묻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다고 해서 <라라랜드>가 그저 연애에 실패한 청춘의 새드엔딩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꿈을 이루는 데 성공했으니 한편으로는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물다섯 스물하나> 역시 두 인물의 세계와 두 세계의 충돌에서 비롯된 갈등,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그들의 세계를 포기하지 못할 것임을 보여줘야 했다.
실제로 초반에서 중반부로 흐르는 전개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나희도와 백이진 사이에 흐르는 감정선을 단순한 연애 플래그로 활용하는 대신, 사랑과 우정 혹은 사랑과 동지애 사이를 줄 타는 미묘함으로 남겨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펜싱과 기자라는, 전혀 다른 두 세상이 만나서 서로를 성장시키는 서사에 더 가까웠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누명을 쓴 나희도의 억울함을 백이진이 기자로서 풀어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패배가 눈앞까지 온 상황에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희도를 보면서 기자로서 버틸 힘을 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발전했던 이들의 관계가 각자의 꿈과 커리어라는 목표를 넘어서지 못해 갈라지고, 서로를 응원하는 사이로 남는 것도 놀랍지는 않다.
물론 이처럼 정답이 이미 반쯤 공개된 상황에서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시청자들을 유인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정답에 이르는 풀이 과정에서 클리셰를 파괴하는 신선한 매력을 선보이며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자칫 흔한 트렌디 드라마의 전철을 밟을 뻔한 전개에 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적절히 혼합해 차별화시킨 점이 대표적이다. 백이진의 경우, 그는 사실 나희도와 고유림이라는 두 여성 주인공 사이에서 백마 탄 왕자님의 위치에 있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IMF라는 시대적 맥락은 그룰 <상속자들>의 '차은상' 못지않은 캔디로 만든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희도의 성장을 위해 기능적으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흩어진 가족을 다시 모으고, 또 기자로서 성장하는 본연의 서사를 충실히 보여준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지만, 그 시절을 재현하는 데에만 집중한 안일함은 없는 것이다.
또한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스포츠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부각하면서 뻔한 삼각관계를 비튼다. 나희도와 고유림은 백이진을 두고 연적으로 부딪힐 수도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드라마는 두 여성 간의 분노와 질투의 감정 대신 동병상련에서 기인하는 연대에 주목한다. 그들은 펜싱 선수이기에 서로가 서로만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지점들을 공유하고, 그 결과 서로에게 선의의 라이벌이자 단짝 친구로 우정을 쌓는다. 이는 익명의 온라인 채팅에서 만난 친구의 정체가 공개되는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다. 그 덕분에 나희도와 백이진의 관계에서 동지애가 부각되듯이 고유림과 백이진의 관계에서는 남매의 정이 두드러질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는 고유림이라는 캐릭터의 주체성과 입체성이 극적으로 살아난 배경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주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발악하는 대신, 현실적인 고민 앞에서 수많은 좌절과 성장을 경험한다.
이처럼 클리셰를 벗어날 줄 아는 과감함과 로맨스에 함몰되지 않는 각 캐릭터의 성장 서사의 시너지 덕분에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련한 청춘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다섯 주인공이 각자 마음에 한 구석에 가진 어둠을 신파나 눈물로 들추어내기보다는, 미소 끝에 머금고 다시 정진하는 전개가 반대로 돌린 수도꼭지 같은 청량함을 선사한 것이다.
그러나 신선함, 청량함, 아련함과 같은 장점은 후반부에 들어 극의 기본적인 짜임새가 무너지자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초여름의 밤을 떠올리게 하는 청춘물이자 성장드라마는 어느 순간 사랑에 울고 웃기를 반복하는 익숙한 멜로드라마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 클리셰를 주도적으로 파괴하던 매력은 찾아볼 수 없다. 신파와 눈물의 진부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망설임을 모르던 나희도는 남자 친구를 위해 모든 것을 인내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다. 백이진이 사랑 대신 커리어의 성공을 택하는 변화 과정은 울음과 소주로 가득하다. 현실에서도 만날 수는 있겠으나 꽤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고유림의 이민 사연 역시 눈물로 점철되어 있다.
그 결과 명쾌하고 탄탄했던 캐릭터의 서사는 붕괴되고, 나머지 극의 개연성에도 큰 구멍이 뚫리고 만다. 엄연히 성장 서사여야 할 드라마에서 정작 주인공인 백이진의 성장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대표적이다. 희도는 학교 펜싱부가 해체하고 우상이었던 이에게 냉대를 받는 와중에서도 끝내 금메달과 친구를 모두 얻는다. 유림은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러시아행을 선택한다. 지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연애를 지켜내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분야에서의 성공을 거둔다. 승완은 학교 측의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 쉽게 끝낼 수 있었던 입시의 길을 굳이 돌아간다. 반면에 이진은 줄곧 상황에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모습을 보였고, 이는 결국 희도와의 이별로 귀결된다.
그러니 이들이 예상했던 답을 향해 나아간다 해도,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에는 자연히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서로의 감정선을 설명하느라 긴 분량과 대사를 할애한 마지막 화가 그 방증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가장 큰 힘은 젊음과 청춘의 판타지를 화면 가득 생생히 살려 놓은 데 있다. 그리고 그 판타지는 분명 영원할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빛바래고 흐릿해진 기억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달콤함 끝에 느껴지는 약간의 쓴 맛은 드라마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히 넷플리스 TOP10에서 1위 경쟁을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일 것이다.
그러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을 믿어야 했다. 클리셰를 비틀어 만들어낸 시원하고 청량하며 아름다웠던 판타지를 지켜야 했다. 한국의 <라라랜드>가 되겠다며, 현실적이고 알싸한 사랑이라는 정해 놓은 답으로 가기 위해서 늘어지고 진부해질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훌륭했고 또 좋았기에, 기꺼이 일주일을 기다릴 수 있었기에, 더더욱 휘황찬란한 용두사미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P(Poor, 형편없음)
나쁜 정답은 아니었다. OMR이 아니라 서술형이었던 답안지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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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짓기 세상에 등장한 AI라는 존재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린 종종 사람들 최대한 간단하게 구분해 보려 애쓴다. 남녀를 구분해서 성향을 쓰기도 하고, 혈액형 같은 이해하기 쉬운 구분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MBTI 같이 조금 더 세분화된 구분법을 이용해 각자의 성향을 내세운다. 이런 구분 짓기는 너무나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 사람들을 조금은 편하게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상대방의 성향을 대략 이해하고, 나 자신의 성향도 상대방에게 인식시킴으로써 불필요한 충돌이나 오해를 없애고 좀 더 빠르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생겨난 것일 것이다.
최근의 구분 짓기는 상대방을 좀 더 편하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역사적으로 구분 짓기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나치가 유대인을 구별해 폭력을 저지르기도 했고 흑인과 아시아인들은 차별을 받았다. 여전히 이런 구분 짓기는 유효하다. 과거처럼 폭력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런 구분은 암묵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저런 차별과 구분 짓기에 대한 뉴스를 보다 보면 듣는 의문이 있다. 왜 이렇게 구분을 짓는 걸 좋아할까. 같이 잘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구분 짓는 세계에 등장한 AI
영화 <크리에이터>는 AI의 등장 이후, 고도화된 AI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크게 충돌하는 부분은 AI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서는 AI를 적으로 간주한다. 미국 LA에 AI가 쏜 폭탄이 터지면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AI는 그들에게 적이 되었다. 반면 아시아 지역에서 AI는 위험하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AI를 받아들이면서 같이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사람 몸의 일부를 기계가 대체하기도 하고, 때론 몸 전체가 로봇이지만 기억이나 정신만 인간의 것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 아시아에는 AI와 인간의 혼합형인 시뮬런트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영화는 서두부터 서구와 아시아를 구분 짓는다. 이 구분은 전쟁이라는 극한 대립으로 이어지고, 서구는 AI의 창조자이자 리더인 니르마타를 찾으려 애쓴다. 아시아는 이 신적 존재를 최대한 보호하려 노력한다. 서구는 니르마타를 찾기 위해 특수부대 요원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를 니르마타가 있다고 확인된 아시아 지역으로 보낸다. 하지만 조슈아는 임무 중 만난 마야(젬마 찬)와 사랑에 빠지면서 스파이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조슈아와 마야가 같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대립하는 집단을 대표하지만 그들은 외모나 추구하는 가치에 의해 그 관계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온전한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평온한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러니까 구분 짓지 않는 삶을 통해 평온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서구는 조슈아와 마야가 살고 있는 섬에 니르마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과감하게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이 둘의 평화는 깨져버린다. 다시 한번 강력한 구분 짓기 체제가 공생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조슈아가 수행하는 임무
영화는 이 일로 마야가 세상을 떠난 몇 년 후 조슈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그룹도 선택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아가는 그는 어느 날 서구에서 방문한 조직의 리더들에게 니르마타가 개발한 신종 무기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만남에서 조슈아는 화면 속 마야와 똑같은 모습을 한 인물을 보게 되면서 다시 전장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조슈아는 이 임무에 참여하면서도 그 어떤 편도 들지 않았다. 외형적으로 서구의 무기와 옷을 입고 있지만, 머릿속은 자신이 사랑하는 마야만을 생각하고 있다.
서구의 군인들은 증오의 시각으로 아시아를 바라본다. 개개인이 겪은 경험도 과거 AI로부터 당한 상처나 희생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AI를 포용하는 아시아는 적국으로 간주된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침략하는 서구를 방어하기에 급급하고 가능하면 큰 확전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시아는 상대방을 적으로 생각하는 구분 짓기가 종료되고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이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서구와 아시아는 계속 강력하게 대립한다. 그래서 이들 간에 정치적인 합의점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 보인다.
AI라는 존재가 등장했고 그 기계인간 안에는 분명히 위험이 도사린다. 서구는 그 위험을 경험했고, 그것을 오롯이 AI의 탓으로 돌렸다. 만약 아시아에서 그런 위험을 경험했다면 구도는 AI와 인간의 구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크리에이터> 속 세계는 AI를 적으로 보는 집단과 반대의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여기에 새롭게 개발된 새로운 AI는 더욱더 그런 대립을 키운다. 아이 모습을 한 고도화된 AI는 모든 전자제품을 직접 원격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 집단은 그 AI를 무기로서 바라보고 한쪽은 제거하려 하고 한쪽은 그것을 이용해 전세를 역전시키려 한다.
그 구분 짓기에서 희생당하는 건 결국 수많은 일반 사람들이다. 전쟁은 멈출 수 없고 거기엔 수많은 자원과 목숨이 희생된다. 안정적인 경제 발전이나 사회 발전은 꿈꿀 수도 없다. 마치 지금 벌어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처럼 리더 집단들도 그 구분 짓기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 AI라는 새로운 기술 혹은 인류의 등장은 그런 기술을 아직 인류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진중하게 자신의 말과 고민을 쏟아내는 영화
영화 <크리에이터>는 구분 짓기가 극대화된 사회를 보여주면서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AI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의 모습을 한 그 AI는 악의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AI와 시뮬런트들의 모습에서 비도덕적이거나 악의가 있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모든 문제들의 시초는 바로 인간들의 구분 짓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구분 짓기의 비극은 이 영화 속 세계 전체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조슈아는 AI 아이를 통해 자신의 아내를 찾으려 하고 아이는 그것을 돕는다. 영화 속 주인공인 두 존재는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지만 결국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결국 인간이 개발한 AI와 인간이 같이 공생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선택인지를 두 존재를 통해 되묻는 것 같다.
영화 <크리에이터>를 연출한 가렛 에드워즈 감독은 <고질라> 나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훌륭한 영상과 진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적이 있다. 이번 <크리에이터>에서 등장하는 AI의 모습이나 거대한 우주선이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 훌륭하다. 또한 이 영화가 던지는 이야기도 좋다. 새로운 존재의 등장을 각 국가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구분 짓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금 느린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화면에 담았다.
구분 짓기는 여전히 현대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꾸준히 인간은 세부적으로 상대방을 구분 지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구분 짓기로 인한 혼란과 대립은 현대에 계속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AI 기술은 우리가 그 새로운 존재들을 어떤 식으로 봐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그 질문을 관객에게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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