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비됴2024-06-06 21:17:28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K 엄마의 독립선언!
다큐 <다섯 번째 방> 리뷰
살고 있는 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 있나? <다섯 번째 방>의 주인공인 김효정씨는 그렇다고 말한다. 3대가 사는 집에서 겪은 30년간의 시댁살이, 여기에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삶 속에 놓인 그녀는 안타깝게도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 이 부재는 눈덩이처럼 커져 본인 자체가 내 집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알게 모르게 김효정씨와 비슷한 삶을 산 엄마들은 이 부분에 고개를 끄덕일 듯. 이같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보통의 K 엄마의 특별한 독립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것도 딴 사람이 아닌 실제 딸이.
김효정씨가 사는 집은 시부모 소유의 2층 양옥집이다. 여기서 30년 동안 시부모, 남편, 그리고 3명의 아이와 함께 살았다. 살고 있으니 내 집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그녀지만, 이게 바보 같은 자기 합리화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계기는 남편의 소파 사업이 실패하고, 전문 상담가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면서다. 일을 하면서 자신만의 업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녀는 자신만의 방이 필요했고, 힘든 설득 후 2층에 그 공간을 마련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불쑥불쑥 그곳을 침범하는 일이 잦아지고, 급기야 실소유주인 시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집 지분을 상속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가장임에도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이 집과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독립을 선언한다.
날 돌봐주는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어.
김효정씨의 이 말 한마디가 다큐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뼈 있는 말을 듣는 순간 카메라를 든 전찬영 감독은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몰랐던 엄마를 카메라에 담았다. 단편 <바보 아빠> <집 속의 집 속의 집> 등 아빠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들과 달리, 감독은 이 집에서 위기에 처한 엄마를 보여준다. 보통의 엄마, 가족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이지 않았던 가족간의 미세한 균열이 보이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진짜 엄마, 아니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렸던 김효정이란 여성을 마주한다.
김효정씨가 자아를 찾는 방법은 ‘방’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다섯 번째 방’은 비로소 엄마가 찾은 자기만의 공간을 뜻한다. 시댁살이를 하면서 타의로 방을 3번 옮겼고, 자의의 노력으로 2층 방을 사무 및 휴식 공간으로 만든 그녀이지만, 결국 자기만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사랑하지만 너무나 가까워서 그 공간을 엄마의 방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침범은 이 공간과 공간의 주인인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아이러니 한 건 엄마가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끄는 주체가 되었음에도 가족들은 이를 인식하거나 인지했어도 그렇게 행동하기를 꺼린다는 것에 있다. 가부장적 체계에 익숙해져 있는 구성원들에게 엄마는 돈을 버는 가장인 동시에 집안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설거지도 안 하는 가족들의 모습, 노동을 하고 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하는 엄마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의 독립은 자기 공간을 갖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도 보인다. 자신의 욕망을 잠재우고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가장의 역할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녀의 울분은 후반부로 갈수록 이내 폭발한다. 시어머니에게 집 처분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친정아버지 장례식에서 술 마시고 소란을 핀 남편에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퍼붓는다.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후반부를 보면 전반부는 태풍의 눈 안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집에서 비일비재한 사건처럼 보이는 작품 속 이야기지만, 이 다큐가 조금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뒤늦게라도 가부장적 제도에 용기 내 목소리를 낸 엄마와 이를 카메라로 독려하며 연대의 손을 내민 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사이자 가정폭력 예방 강사인 김효정씨는 많은 이들 앞에서 얘기하는 바를 비로소 실천한다. 견고하게 쌓인 가부장적 제도에 맞서 내는 작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는 여성인 딸의 카메라에 가감없이 담긴다. 화려한 카메라 워킹이나 편집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지는 엄마의 모습은 그 자체로 큰 울림을 준다. 피하지 않고 부딪히고, 어떻게든 소통하며 합일점을 찾는 그 과정을 결혼 후 30년 만에 처음한 그녀는 비로소 자유를 찾고, 자기 공간을 찾는 동력을 얻는다. 한 명이 희생하면 가족 모두가 편하니까 딸이자 여성임에도 엄마의 책임과 힘듦을 묵인했다 말한 감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듯 딸로서, 여성으로서 그 누구보다 강한 엄마와 김효정씨의 모습을 오롯이 담는다.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 관객심사단상, 제20회 EBS국제다큐영화제 시청자&관객상을 받는 등 <다섯 번째 방>은 보편성의 힘이 강한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를 공감케 하는 인물은 악역을 자처하는 아버지 덕분이다.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이 집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엄마, 아빠를 객관화하기 어려웠다는 감독은 최대한 부모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이들을 대하는데, 이 노력으로 아버지는 단순히 문제의 온상으로만 비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서는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이 다큐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족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보편성을 확보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 애정과 애증의 눈빛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김효정씨의 인생이자 전찬영 감독의 가정사이며,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씨네소파
평점: 3.5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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