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6-17 11:50:26
6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인사이드 아웃2>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 돌파
“어른이 된다는게 이런건가봐 기쁨이 줄어드는거”
어른들이 뭉클한 마음을 안고 나온다는 <인사이드 아웃 2>
<인사이드 아웃2>가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를 돌파했습니다.
전편 <인사이드 아웃1> 기록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200만 명을
돌파하며 픽사 애니메이션 최고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북미 개봉 후 사흘간 2150억원의 티켓 수입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영화 중 두 번째로 높은 개봉 첫 주 수입을 기록했으며
픽사의 29년 역사상 2위에 올랐습니다.
쏟아지는 극찬 후기로 지난해 700만 관객을 넘게 모은
<엘리멘탈>까지 뛰어넘을것으로 보입니다.
�<인사이드 아웃1> 이후 9년만의 후속작
�주인공 라일리가 13살이 도고 사춘기에 접어들자 감정 컨트롤 본부에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겼는다.
'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We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PIXAR-
<인사이드 아웃 2 > 줄거리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 아웃> 새로운 감정과 함께 돌아오다!
13살이 된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매일 바쁘게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를 운영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그러던 어느 날, 낯선 감정인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
부에 등장하고,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제멋대로인 ‘불안’이와 기존 감정들은 계속 충돌한다.
결국 새로운 감정들에 의해 본부에서 쫓겨나게 된 기존 감정들은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작하는데… 2024년, 전 세계를 공감으로 물들인 유쾌한 상상이 다시 시작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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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내밀한 욕망으로의 여정
욕망: 우리의 가장 내밀한 본능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망한다. 아니, 이 지구상의 생명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탐하고, 더 즐겁고 행복한 것을 탐닉하고자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며, 이러한 본능은 우리들을 헤아릴 수 없이 번화하고 다채로워지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욕망의 종류는 다양하다. 꿈을 향한 야망, 야욕, 야심이 있는가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인 의욕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성적 욕망을 말하는 애욕, 정욕, 성욕 등도 있다. 사실, 욕망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욕망은 무엇으로든 이름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많은 욕구들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지만 가장 괄시 받는 것이 있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성욕을 꼽을 수 있겠다.
요즘은 꽤나 개방적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문화권에서는 성애를 쉬쉬하는 경향이 있다. 성행위는 암묵적으로 '많은 수가 수행하고 있으나' '차마 발설되지 못할' 욕망으로 치부되며, 그것은 나아 사람들로 하여금, 욕구 그 자체를 스스로 거세해 버리게끔 압박하기도 한다.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는, 가볍고, 방탕하고, 차마 상종 못할 '짐승'이 되기도 하고, '싸구려 인간'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것이 바람직한 성이라면, 우리는 그 욕망을 반드시 억압해야만 할까?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이런 의문에 대한 재치있는 답을 담고 있다.
1. 인생이 재미 없는 여자, '낸시'
'낸시'는 삶이 재미없다. 종교학 선생인 그는 평생토록 학생들에게 그들의 욕망을 단속하기를 강요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인생은 브레이크의 연속이었다. 이건 이래선 안돼. 이건 이렇게 보일 거야.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래, 나는 재미없어. 하지만 내가 ~할 순 없잖아. 이런 말들은 끊임 없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그것은 족쇄가 되어 그의 삶을 지치고 지루하고 지난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 대단한 오르가즘은 문턱에조차 다다른 적이 없었다.
남편을 잃고 선생 일도 은퇴한 어느 오십 줄. 그런 낸시는 오랜 결심 끝에 새로운 자유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방법이랄 것은 바로, 젊고 매력적인 남자인 '리오 그랜드'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2. 고지식함과 방탕함
그렇게 고심 끝에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시간을 샀는데, 낸시는 그럼에도 걱정할 것이 많다. 나이 들어 볼품 없어졌을 몸을 보이는 것도 걱정스럽고, 소위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수없이 갈등한다. 눈 앞에는 근사한 리오 그랜드가 앉아 있지만, 그는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욕망이라는 이름의 낯선 세계로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처음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허둥지둥한다. 초보 운전수가 운전을 할 때 손에 땀을 쥐는 것과 같이, 누구나 처음은 녹록치 않다.
그러니 낸시가 새파랗게 젊고 아름다운 청년인 리오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네 어머니는 네가 이런 일을 하는 거 아시니?" 같은 고지식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 뿐이었으리라.
한편, 리오 그랜드는 아주 능숙하다.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산 사람들을 그 각각에 맞추어 즐거움을 선사하는 법을 알았고, 그것에 그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는 여기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는 전문가답게, 조금 특별한 손님인 낸시를 차분히 기다린다. 이윽고 그는, 낸시와의 오랜 대화와 얼마쯤의 춤을 즐긴 끝에, 낸시가 바랐던 것을 선사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아름다우며, 얼마든지 원하는 바를 욕망해도 좋다고.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3. 무심한 어머니와 상처입은 아들
그러나 그 대단한 리오 그랜드조차도 완벽하지 않다. 끝없이 사적인 물음을 일삼는 낸시와의 대화를 통해 리오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아프고 쓰라린 기억을 자꾸만 떠올린다. 그는 어머니의 눈에 지나치게 방탕했던 탓에 미움 받았고, 그 탓에 많은 것을 숨기고 숨으면서 안전한 그만의 요새에 다다랐다. 그는 '리오 그랜드'라는 가면을 쓰고 손님들의 돈을 받음으로써 안전한 곳에서, 마음껏 방탕할 수 있는 시간을 영위한다. 그곳에서 만큼은 그는 탕아가 아니라 전문가가 되므로, 그는 그 안락함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그 밖과 안을 철저하게 유리시키고자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런 리오를 그만의 '방'에서 끄집어 낸 것은 다름 아닌 낸시다. 리오가 자유를 되찾아준 바로 그 손님 말이다. 낸시가 과격하고 무례한 방식으로 리오를 '커밍아웃'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이라고 한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있다. 바로 낸시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는 것.
리오에게 낸시는 손님이기도 하고, 저를 매정하게 저버린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낸시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 다시 말해, '리오 그랜드'라는 인물을 속단하고 고지식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이 만든 어떤 '틀'에 밀어넣으려고 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너는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낸시는 리오가 자신을 달래며 해주던 다정한 말들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낸시는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리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스스로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남의 욕망을 서둘리 재단하던 과거의 일들을 반성했다. 그 고지식하던 사람이, 비로소 진솔한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어쩌면 낸시가 리오에게 해준 말은, 그가 어머니, 혹은 그밖의 많은 모진 말을 던지던 이들에게서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3. 우리가 외면해왔던 내밀한 욕망에 대하여
꼰대와 탕아의 만남은 썩 어울리지도 않은데다가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실은 낸시와 리오는 어떤 부분에서 닮아 있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욕망에 충실한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낸시와 리오는 서로를 만남으로서 각자의 구원을 받았다. 영화의 말미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그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의 짐을 벗어든 순간, 욕망을 마주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진다. 낸시는 마침내, 그가 50년이 넘도록 느끼지 못했던 오르가즘을 맞이한다.
4.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내내 말한다. 욕망은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좀 더 스스로와 세상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거울에 자신의 맨몸을 비춰보며 미소짓는 낸시처럼,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좀 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색안경을 끼는 일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유교걸이라 이 영화의 핵심적인 소재인 '매춘'(리오는 시간을 사고 파는 일이라고 했지만)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는 조금 더 고민된다. 이것은 보다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벗어 던져야할 족쇄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그걸 차치한다면, 글쎄, 영화 자체는 즐거웠다. 엠마 톰슨은 귀여웠고, 데릴 맥코맥은 섹시하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구원했으면서도, 고루한 로맨스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좋았다.
나는 나의 욕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오래 고민해 볼까 한다. 혹시 아는가? 나 또한 누군가에게서 구원을 받거나, 그를 구원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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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우리가 만날 때
오래 품은 소원에는 힘이 있다. 흩어지지도 해지지도 않고, 모양을 오래도록 유지했다는 그 자체로. 그 끝에 이루어진 소원은 거의 성공 신화가 된다.
그만큼 쉽지 않으니까. 소원이라는 단어는 얼핏 강해 보이지만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흐릿한 안개 같다. 흐지부지 밀려나기도 하고, 세파에 깨지기도 하고, 문득 스스로 폐기할 수도 있다. 오래 품은 소원을 이룬다는 것은 뚝심과 에너지, 자기 확신은 물론 행운까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이룬 이야기에는 거의 마법에 준하는 힘이 있다. 무심코 떠오른 강렬한 생각 하나를 한참 바라본 끝에 확장한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처럼, 남들에게 인정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끝내 꿈꾸던 장면을 만들어낸 영화 <라라랜드>처럼.
그런데 <매드 맥스> 시리즈로 이미 반열에 오른 조지 밀러 감독에게도 그런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20년 전 읽은 단편소설을 토대로 빚은 영화를 마침내 가지고 왔는데, 공교롭게도 소원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세상 모든 이야기를 섭렵한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가 학술 대회 차 방문한 튀르키예에서 기념품으로 작은 병을 구입한다. 그런데 별안간 병에서 지니가 튀어나오고, 세 가지 소원을 묻는다. 알리테아는 이런 이야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거절하려 하지만, 지니는 알리테아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세 번이나 병에 갇히게 되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건 환상일까 진실일까? 이야기는 크게 지니의 이야기 세 편과, 알레티아의 세 가지 소원 두 가지 축으로 굴러간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이 이야기를 만날 때
영화는 튀르키예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의 알리테아에서 시작한다. 오래전 이야기들처럼 ‘옛날 옛적에…’ 식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무미건조한 현대 사회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에 전혀 다른 색을 입혀, 마치 다른 시공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공항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기는 알리테아를 봐도, 온통 무채색 옷을 입은 사람 중 유일하게 다른 색깔 옷을 입은 사람이다.
서사학자로 학회 발표 자리에 선 알리테아는 정작 이야기가 이야기일 뿐이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일상의 태도를 보면 사실은 이야기 그 자체인 사람이라 물건을 고르는 기준조차 세간의 가치보다는 이야기가 묻어나는 지 여부를 본다. 빈티지 물건들이 다시 사랑받는 세상, 알리테아와 같은 이들은 여전히 꽤 많아 보인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할 영화다. 작은 물건 하나에 깃든 이야기로 기뻐하는.
그런 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가 튀르키예인 점은 매우 적절하다. 행정 수도로 기획된 도시 앙카라 말고, 천년 고도 이스탄불이어야 한다. 오래된 도시에는 골목마다 이야기가 숨어 있으니까. 벽면에도, 발코니에도, 옛 연인의 단꿈이나 누군가의 한숨, 피, 배신, 눈물 같은 것들이 속속들이 배어 있으니까.
더없이 적절한 풍경에서 알리테아와 지니는 만나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에 의존해 영화는 진행된다. 지니의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시대가 등장한다. 시바 여왕의 시대, 오스만 제국의 시대, 제피르라는 여자가 살았던 중동의 어느 시공간까지. 각 시대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뒤섞어 매끄럽게 연출되어 있어, 눈과 귀에 화려하게 감긴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다)
실제 역사에 마법이 존재하던 시대 같은 것은 없지만, 그저 꿈에 불과하지만, 지니의 이야기 속 세계는 마치 "옛날 먼 옛날 어딘가"에는 마법이 존재했을 것만 같아 보인다. 생각해 보면 이야기란 원래 존재였다. 아직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않고 전쟁과 기아가 코앞에 있던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황금빛 이야기를 통해 괴로움과 척박함 속에서 살아 버텼을 것이다. 병 속의 지니처럼.
불안한 미지의 세계에서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힘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 과학은 이야기를 대체했는가? 어떤 설명은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었겠지만, 여전히 이야기는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기 이야기는 별로 없다는 알리테아에게 지니는 정색하고 말한다. It’s always a story.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써내려 가고 어떤 식으로 편집할지 차이가 있을 뿐, 이야기가 아닐 수는 없다. 삶의 이야기, 그것은 과학이 대체할 수 없는 이야기의 영역이다.
애당초 이야기와 과학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가 아니라 연결된 별개의 무언가이다. 지니의 이야기 속 제피르를 보아도, 최초의 영화와 상당히 닮은 것을 만들어냈다. 이야기와 과학이 만나는 지점에 영화도 있고 인간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날 때
알리테아는 자기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고 파악하고, 요약하고 정리하여 갈래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떠나버린 사람의 기억은 상자 하나에 말끔하게 담아 넣고, 상처로 기억되는 순간들도 담담하게 축소해서 기술한다.
반면 이야기를 풍성하게 풀어내는 지니는 상대적으로 더 인간 같다.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이라 하나,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다. 더 강한 존재에게 붙잡히기도 하고, 미래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모르고 갈망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다운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이야기의 매력이 있다. 사실 세 가지 소원에 대한 이야기는 알리테아가 말하듯 흔한 장르다. 우리도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오래된 이야기가 여전히 흡입력을 갖는 이유는 거기에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소원이란 결국 마음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게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질문이다.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라는 점에서 더욱 세밀하게 속내를 드러낸다. 위험을 느끼면서도 끝내 손을 뻗게 만드는 것, 그 손끝에 무엇이 닿을지 집중하고 보게 되는 것. 마음이 편하기보다 외줄 타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위태롭다. 어쩌면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하은 지니 또한 이야기를 괴로워한다. "희망은 괴물 같고, 이야기는 희망의 노리개"라는 그의 대사에서, 우리의 이 괴로운 갈망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인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끝내 희망을 찾아 헤매 온 것이었다.
절망의 중심을 직시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희망의 한 갈래 길을 찾는 것. 이야기는 이야기를 믿는 인간에게만 그렇게 존재한다. 그냥 인간이 그렇다. 인정 없이는, 사랑 없이는, 대화 없이는, 그래서 그것들로 희망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이 어둠을 헤치고 살아갈 길을 알지 못한다. 힘들어 죽겠는데 한 번 더 무릎을 펴게 만드는 것이 "괴물 같"은 희망. 포기할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 이야기는 그래서 존재한다.
이 점은 현대 사회가 이야기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깨닫게 한다. 이야기조차 그저 지식의 파편으로 간주하며, 재산화되어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세상. 이야기는 갈망의 산지가 아니라 무수한 심심풀이 도구 중 하나로 간주되어 간다. 화려한 보석 같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굴러다니는 돌이 된다.
현대 사회는 이야기의 찬란한 빛이 많이 감춰진 시대다. 사람들은 “콘텐츠를 소비”하지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지 않는다. 괴로워도 희망을 향하기보다, 그저 아는 절망을 늘어놓으며 절망을 절망의 핑계로 삼는 게으른 창작도 "콘텐츠"로 훌륭하게 기능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식과 이야기의 의미는 변한다.
옛날 같았다면 환영받았을, 이야기가 풍요로운 땅에서 온 이들은 불청객 취급을 받고 있다. 알리테아가 사는 런던의 길거리에도 터번을 쓴 남자와 차도르를 두른 여자가 돌아다니는 세상인데, 알리테아의 이웃집 할머니들은 자기네 문화권이 아닌 이야기를 찾아 다닌다며 알리테아를 못마땅해 한다. 이들은 모른다. 자신들의 조상이 게으르게 그려낸 이야기가 그들의 절망에 기여했다는 걸.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금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만날 때
그러나 이 척박해 보이는 시대에도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여전히 이야기를 들이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로 의미를 찾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어떤 부재 가운데서도 그 위로를 찾아 버틸 수 있는 사람. 이를 위해 이야기 끝을 뾰족하게 다듬고 섬세하게 방향을 잡는 사람. 괴로워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심지어 이야기를 사랑하다 못해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은 광인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알리테아의 이야기도 그렇다. 사실 모든 이야기는 진실인 동시에 광기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방황한다 해도, 언젠가 어떤 이야기와 반드시 공명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마주친 누군가의 눈이 반드시 알아볼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살아 버텨야 한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기꺼이 기립근에 힘을 주고 끝도 없이 영화를 보며, 나의 영혼에 다정하게 공명할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마침내 만날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And yet here you are, my Impossible.”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의 개봉일은 2023년 1월 4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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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정도 똘끼는 있어야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유분방하게 사는 여자, 소피아. 이 여자는 대체 왜 이럴까 싶을 정도로 자기 맘대로다. 윗사람, 아랫사람 구분은 당연히 없고, 도벽에 욕지거리, 다혈질까지 거의 뭐 인성파탄 콜리보레이션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한 가지 재능이 있는데, 헌 옷을 꾸며 새 것처럼, 새 것보다 더 스타일리시하게 리폼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어느 날, 퇴사를 갈기고 온 날에 퇴사 기념으로 산 자켓이 이베이에서 몇 십배의 웃돈으로 돌아온 그 날,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알았다. 그리고 윗사람의 참견으로 인한 퇴사에 신물이 났던 그녀는 "이제 누군가에게 수그리고 살 수 없다면 내가 당신들을 수그리게 해주지 라는 마인드"로 빈티지 리폼 사업을 시작한다.
1.빈티지라는 흥미로운 업계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소피는 너무 심하게 기분파에다가 일이 안 풀리면 여기저기 시비걸고 다니는 일종의 아이다. 아직 덜 자란 어른 아이.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빈티지 업계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다르게 흥미롭다. 소피아는 남들이 하는 주류보단 비주류를 좋아하고, 그 비주류 감성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타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남들과 다른 이들은 좀 튀어보이고, 시키는대로 안해서 막무가내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소피아를 그렇게 이기적으로 보이게 그려낸 것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도벽은 좀 심하지 않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한 때 빈티지가 가진 특이함에 매료됐던 사람으로서, 빈티지 사업 업계가 생각보다 견고한 업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라는 가치를 중요시하고 출처 모를 옷을 가지고 각자의 상상에서 비롯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업계가 이쪽인가 싶었다. 어쩌면 명품이 가득한 세상에서 주관적인 미의 기준을 가지고 나만의 명품, 개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집단이긴 한 것 같았다. 특히 이베이에서 빈티지 사업자를 낸 사람들의 온라인 채팅방을 묘사한 장면이 너무 웃겼는데, 인터넷 상의 말을 직접 입에 올리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피아의 패션이 은근 볼 맛이 난다. 레트로하고 대충 입은 것 같지만 그 어느 하나도 치밀하지 않은 요소가 없다. 내추럴하게 실생활에서 적용 가능한 독특한 패션이다. 패션 영화하면, '저렇게 예쁜 사람이 입으니 예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소피아의 패션은 나도 한 번 시도해볼까 싶은 느낌이 든다. 어, 나 빈티지 쇼핑 영업당한 건가.
2. 왕따 중에서 제일 인기많은
소피아는 확실히 아웃사이더다. 그래서 친구가 많이 없지만 그렇다고 외롭지는 않아 보인다. 마치 왕따인데, 왕따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왕따 같아 보인다. 소피아가 자기 멋대로 살긴 하지만 자신의 사업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 소피아에게는 주체성 있는 사업이 필요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지시받는 삶보다 망해도 직접 망하는 어쩌면 용기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지점이 소피아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다가 조금이나마 인정하게 된 모습이었댄 듯하다. 이 이기적인 여자에게서 주체성이 결여된 우리들의 삶을 봤다.
그리고 왕따를 당하면 어떠랴. 내가 세상을 왕따시키면 되는 것을, 과거엔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새카맣게 잊어버린 나를 발견한다. 소피아를 통해 아웃사이더라고 자책하며 사회에 끼워맞출 필요가 없다고 내 자신을 다독인다. 그냥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다만, 도둑질과 욕지거리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리고 소피아가 불안감에 괴로워하다 더 많은 일을 하며 극복한 것처럼 옆 신경쓸 시간에 내 자신을 혹사시켜봐야 겠다. 정신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일이든 취미든 몰두해 봐야 겠다고 느낀다. 이 막무가내 여자가 날 설득할 줄이야.
3. 총평
이 드라마는 아직 사람이 덜 된 한 철부지가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연애, 사업, 관계 면에서 크고작은 일들이 발생하고 회차가 지나갈수록 그녀의 대처는 더욱 성숙해진다. 그 모습을 보는 것도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라면 포인트랄까.
뭐, 조금 캐릭터가 이기적으로 그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뭔가에 꽂히면 앞뒤안 재고 그냥 해버리는 그녀, 남친이 바람피워서 속 끓이다가도 어느 순간 사자후 소리지르며 털어내는 솔직한 그를 보며 조금은 닮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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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른인가 아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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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비리 사건이 터진다. 이 남자는 죄책감 때문인지 회피하고 싶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족들을 남겨두고, 죽어버린다. 유일하게 집에 남은 딸아이는 경찰의 표적이 되어 중요한 참고인이 된다. 경찰은 아이가 아버지의 남은 비리 재산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아이를 보호라는 명목 하에 감시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미성년자이지만 이미 다 커서 알 거 다 아는 어른 이임을 감안하고 이 아이에게서 아버지가 남긴 남은 지산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아이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그런 그 아이는 자살을 기도하고, 그 자살사건에 현수가 투입된다. 그런데 과연 이 아이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이 답을 하기 전에 우린 이 18살을 더 자세히 이해해보아야 할 것 같다.
1. 어른 아이, 18세를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대사가 있었다.
"18살이면 다 큰 거죠."
"아직 어린애잖아요."
비리 사업가의 딸을 두고 내린 상반된 평가. 과연 이 아이는 정말 다 큰 걸까.
요주의 아이, 세진은 경찰의 시선으로는 다 큰 아이로 간주되어 어른의 세계로 인도되었다. 경찰은 세진을 다 큰 아이로 간주되었지만 여전히 어린 나이로 인해 어른에게 물어보듯이 취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진에게 뭔가 더 확실한 정보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세진이 머무는 집 곳곳에 cctv를 심어놓았다. 하지만 세진은 사생활 침해라며 항의했지만 정보가 더 나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진의 이런 항의는 세진에 대한 의심만 더 높아지게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경찰의 입장에서는 세진을 섬으로 보내 요양도 시켜주고, 원하는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작 cctv 단 거 가지고 항의를 하는 세진이 정말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찰은 참고인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다 커서 알 거 다 알만 틈 성장한 세진이 어린 나이를 내세워 미운 어린아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진이의 자살 소식에 태풍을 핑계로 시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귀찮은 아이니 빨리 사망 처리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아이가 죽은 이유에 경찰의 지분이 아예 없지 않음을 경찰 집단이 이미 빨리 간파하고, 이 아이의 잔상을 빨리 잊고 싶은 진짜 다 큰 어른들의 비정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어른들은 고등학생 나이 때의 아이들의 성장을 평가할 때, 어른 특유의 '내가 다 살아봐서 알아'라는 식의 관점과 함께 상황적 요소와 자신의 주관을 섞어 평가한다. 예를 들면, 집안의 웃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혹시 웃어른이 유산 상속자를 18세 미성년자 손자에게 몰빵하셨을 때, 18세 아이에게 무엇인가 설득하려는 주위 친척 어른들이 이 아이를 회유하는 타이밍에 잘 나오는 멘트 중에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알 거 아니냐"라는 뉘앙스의 멘트를 날리시는 분들이 있다. 요맘때 학생들이 주요하게 쓸모가 있을 때에는 머리는 커버렸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임을 어른들은 잘 인정하려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세진이를 두고 보이는 경찰의 태도를 두고, 이 미성년자가 필요한 존재일 때에는 어른 취급을 해주며 존중하는 척해주다가도 아이의 쓸모가 다하면 버려버리는 모습에서 아직 완벽하게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어른에게 느꼈을 환멸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세진을 아껴주던 형사 형준마저 자신을 이용했고, 새엄마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 이 상황에서 18세 아이가 느꼈을 좌절을 그 시기를 거쳤지만 그 시기에 대해 잊어버린 어른들은 이해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어른들의 비정함과 다 컸지만 아직 어른이 되진 않은 18세의 연약함을 비교하게 만들어 준다.
필요에 의해 어른들은 18세 미성년자를 다 컸으니, 어른의 세계에 협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 다 큰 아이는 여전히 아이였고, 어른이 요구하는 덕목은 아직 갖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어른들은 ' 다 컸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어 본인이 18세였던 시기를 망각하고, 세진을 다 큰 '아이'임을 무시해 버렸고, 그 무시의 결과는 아이에게 더한 못을 박았음을 세진의 경찰에 대해 표시한 반감을 통해 알 수 있다.
2. 아무것도 몰랐냐는 말의 비정함
이 영화에서 세진과 그녀의 죽음을 쫓는 경찰, 현수는 비슷한 심리적 상태를 보인다.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고자 자신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정신을 차려보려고 하고, 악몽을 꾸면서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고, 허한 동공으로 분노에 이글거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세진을 통해 현수는 자신의 과거를 본다. 그래서였는지 직감적으로 이 아이는 다른 경찰의 예상과는 다르게 경찰이 혹할 만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아빠가 비리를 저지르고, 오빠가 감옥에 가있는 상황에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만 살아온 자신의 잘못도 일정 부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으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음을 알았다.
"너는 내가 어떻게 남편이 그렇게 오래 바람나도록 아무것도 모를 수 있냐고 물어봤었지. 근데 있지, 나 진짜 아무것도 몰랐었다. "
이 현수의 대사에서 정말 모르고 살았던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모를 수 있냐는 상식 가득한 주변인의 대사는 참으로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내 바보 같음을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거니와 해맑게 살았던 나 자신을 자책하며 반추하게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진의 경우도 같았다. 아빠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오빠가 감옥에 갈 만한 일을 저지르는 줄도 모르고 나만 행복하게, 해맑게 살아온 것에 대해 어린아이가 얼마나 자책을 하고 살았는지 세진의 cctv 속 얼굴과 팔에 상처가 그 시간의 암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나마 새엄마는 세진의 연약함을 잘 알았지만 본인의 상황의 불안정함을 이겨내는 데에 치중하느라 세진은 잠시 뒤로 미루어진 존재였다. 오히려 마주한 적도 없는 현수만이 세진의 외로움, 자책감, 무력감을 이해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을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도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데, 다 큰 사람 취급을 당한 아직 어린아이는 주변 사람들의 배신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 것인지 우리도 예상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공감까지는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겪어보지 않는 한.
사건의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은 생각보다 상처가 많이 된다. 당하고만 있었던 나의 바보 같음을 저주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주변 사람들의 위로라는 가면을 쓴 팩트 폭력들은 생각보다 위로가 안된다. 이처럼 다른 이들이 그들이 살아온 인생에서 기반한 편견이 담긴 팩트 폭력은 전혀 상처 받은 이에게 위안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큰 현타를 얻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사람에게는 각자의 상식을 담은 충고, 조언보다는 그저 입을 닫고,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다. 혹시 당신의 인생에도 아무 충고, 평가도 없이 밥 먹자고 끌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내 사람이니, 붙잡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3. 내 몸에 흐르는 피를 확인해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현수와 세진 모두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자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 타인이 바라볼 때, 팔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자살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놓고, 자신의 몸을 해하는 정신병적 행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수의 대사를 보면, 자해성 행위의 또 다른 정의를 고려해보게 된다.
"넌 내가 죽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 징계 피하려고 내 팔을 그렇게 찧었던 것 같아? 아니, 일이라도 해야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는데, 마비 때문에 일까지 못하면 나 진짜 어떻게 될까 봐. 제발 마비가 풀렸으면 해서 그랬어. 죽으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랬다고. 그 애도 그랬을 텐데, 아무도 없어."
다른 이들은 자신의 몸을 해하는 일은 죽을라고 하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을 해하는 이유 중에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에 상처를 내서 피를 봐서라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경우도 꽤 많다. 정신의학에서도 이런 분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오래도록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공허함에 시달린 이에게, 자해를 할 때의 고통과 피가 흐를 때 느껴지는 일련의 자극적인 감각들은, 마치 살아있음을 깨닫는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마치 죽은 듯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스스로를 상처 내고 다치게 하는 행위,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행위로 인한 자극이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자각을 되살려 주는 것이다.
[출처] 내 몸에 피가 흐르면, 나는 살아있음을 느껴요.; 자해 속에 숨겨진 마음|작성자 두두
그리고 비슷한 예시로, 일본 소설 중에서 스트로베리 나이트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야구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해본 적이 없었지만 눈동냥으로 배운 기억을 되살려서 가슴을 공이라 상상하고 있는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방망이는 쩍 인지 철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멋지게 가슴 위를 떄리고 정확히 턱에서 멈췄다.
“으아아아아아아!”
덜커덩덜커덩, 침대 채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자는 거칠게 몸부림쳤다. 왼쪽 가슴은 한입 베어 먹은 토마토처럼 살덩이가 쑹덩 날아가고 없었다.
환호성과 피비린내가 뒤섞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색이었다. 나도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출처]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데쓰야
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살인자가 살인을 저지를 때에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현수와 세진은 자신의 몸을 해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그 반대로 살인자가 사람을 죽일 때에 느끼는 쾌감의 근원이 피를 보고, 피의 색깔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현수와 세진이 살인자와 같은 부류로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현수와 세진이 자기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점과 몸을 해쳐서 피를 보고서라도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이 살인자가 피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부분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이나 자신의 몸을 해쳐야만 볼 수 있는 피라는 존재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색깔 때문인지, 인간의 몸속에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 기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을 죽이는 일이 나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현수와 세진은 희미해져 가는 맨 정신을 붙잡기 위해서 피라는 매개체를 생각해낸 거라면, 살인자의 경우, 피를 자신의 쾌락으로 여기는 점이 다르다. 현수와 세진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면, 살인자에게는 쾌락의 도구인 것이다.
4. 그럼에도 살아가다.
영화 속에 이런 대사가 있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다.
이 대사가 결국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다. 인생이 잠시 망가졌을지언정 당신의 전체 인생은 아직 진행형이다. 자신이 문제 생겨 곪아 터질 때까지도 해맑게 모르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한 다른 이에게 맞설 힘을 길러야 함을 이 영화는 외치고 있다. 내가 나를 해하고 싶을 만큼 자괴감이 드는 문제는 분명 나만 잘못해서 생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 탓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해할 만큼 자책만 하는 것도 결코 손뼉 쳐 줄 일은 아니다. 자책하고, 자신을 해할 시간에 문제를 이렇게 만든 다른 인간들을 응징하거나 문제를 말끔히 잊고 살아갈 깡, 패기, 똘끼가 조금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다른 이들도 함께 만들어낸 문제에 본인만 파괴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나에게 해를 끼쳐 존재 이유를 찾지 말고, 이젠 소소하더라도 꾸준한 성과로 존재 이유를 찾으시길. 우린 아직 죽을 이유보다는 살 이유가 더 많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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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로애락이 교차되어 빛나는 삶의 순간
2007년 장편 데뷔작 ‘모두 용서했습니다’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 세자르상 최고데뷔작상 후보에 올랐고,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2009년 ‘내 아이들의 아버지’,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 2015년 ‘다가오는 것들’ 등 섬세한 연출로 사랑받는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 영화 어느 멋진 아침을 보고 왔습니다. 2021년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오가는 ‘베르히만 아일랜드’로 칸영화제 경쟁부문 후보에 오른데 이어 마침내 제75회 칸영화제 독립 부문 감독주간 최우수유럽영화상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프랑스 대표 감독으로 우뚝 선 그녀의 최신작이죠.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담는 그녀의 시선 덕분에 국내에도 많은 팬들을 확보해 지난 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이 밖에도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작품성과 화제성을 다시 한번 보여준 작품입니다. 근래 극장가가 조용한데, 얼마나 관람하실지 궁금해지네요. :)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요양원의 할아버지보다 이 책들에서 할아버지가 더 느껴져”
시놉시스: 여덟 살 난 딸, 투병 중인 아버지와 파리의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산드라는 어느 날 오랜 친구 클레망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일과 가족, 사랑 사이에서 삶은 계속되고 때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지만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찬란하게 찾아온다.
예고편│Trailer
원제: Un beau matin, 영제: One Fine Morning│감독·각본: 미아 한센-로브
출연진: 레아 세이두, 멜빌 푸포, 파스칼 그레고리, 니콜 가르시아, 카미유 르방 마르탱 외 多
장르: 멜로/로맨스, 드라마│상영 시간: 113분
국가: 프랑스, 영국, 독일│등급: 15세 이상 관람가│수입·배급: 찬란
평점: 평론가 7.0, 왓챠피디아 3.3, 로튼토마토 신선도 92% 팝콘 69%, IMDB 7.0, 메타 스코어 86점
개봉일: 2023년 9월 6일
“삶은 어디에나, 언제나 존재한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스타일이 늘 그러했듯, 이번에도 파리에 사는 주인공 산드라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희로애락을 이끌어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은 상실과 슬픔이 존재하고 다른 쪽에는 사랑과 행복이라는 상반된 감정선이 흐르는 그녀의 모습에 빠져들 수밖에 없죠. 자전적 경험을 확장시키는 그의 스타일상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삶을 상기시키는데, 이번에도 ‘베르히만 아일랜드’ 집필 이후 깊어지는 아버지의 병세에서 영감을 얻어 직접 깨달은 가치와 진심을 담은 스토리는 더욱 친밀하게 와닿습니다.
한동안 ‘007’ 시리즈, ‘프렌치 디스패치’, ‘프랑스’, ‘디셉션’, ‘내 아내 이야기’까지 뇌쇄적이고 몽환적이며 혹은 화려하고 강렬한 인물을 연기했던 프랑스 대표 배우 레아 세이두는 주인공 산드라로 변신해 자신의 가치를 빛냅니다.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캐릭터를 맡아 몸짓과 표정 하나하나까지 생생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로 그녀가 겪는 슬픔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해줍니다. 기본의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듯 수수한 스타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싱글맘으로 변신해 매 순간 변화를 맞이하는 산드라의 심경을 전달합니다. 배우 본연이 가진 신비로운 눈빛과 말투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감정의 연장선을 더욱 깊게 연결해 주는 듯했습니다. 그만큼 산드라로 분한 레아 세이두의 연기가 친근함, 그 이상을 이끌어낸 것이라 생각됩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삶에서 찾은 작은 변화로 상실의 빈자리를 극복해 가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따스한 시선으로 완성한 영화 어느 멋진 아침이었습니다. 일과 가족, 사랑 사이에 놓인 평범한 일상이 담긴 인생의 한 페이지를 통해 여러 순간들을 거쳐 위로와 희망을 얻고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고 있죠. 노쇠한 아버지를 향한 상실감, 새로운 연인 클레망과의 사랑 등 쓰디쓴 인내의 시간을 지나 다시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내일을 향한 기대와 위로를 전하면서 말입니다. 관객과 함께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공유하는 미아 한센-러브, 다음엔 또 어떤 장면을 담아줄지 기대해도 좋을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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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약한 연민이 이어지는 밤
나는 항상 좋은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철없는 나를 보듬어 주고, 다양한 선택지를 알려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그런 어른은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이미 내가 (사회적인) 어른이 된 후였다.
나는 타인의 못남을 어루만지지도, 먼저 손을 내밀지도 못하는 그저 그냥 그런 어른으로 자라났다. 아직도 나를 돌보기에도 능력과 시간이 부족하다.
타인을 위한 마음을 내는 것은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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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슬립, 2023> 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배우상을 수상한 독립영화로, 우연히 마주치게 된 길호(최준우)와 기영(김영성)이 서로 부딪히며 함께 살아가 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특별할 것 없는 캐릭터에, 평범한 이야기를 하며 새롭지 않은 메시지를 던진다. 그냥 지나가면서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묻는 사람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과하지 않은데 따뜻하고, 얕은 것만 같은데 묘하게 진정성이 느껴지는 그런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담배와 식물
처음으로 피식거렸던 장면은 기영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면서 식물들에 물을 주는 씬이었다. 이 장면 하나로 별다른 설명 없이도 기영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한 핑크색 슬리퍼를 대충 구겨 신고, 앞에서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물을 챙겨주는 사람이라니.
어머니가 남겨준 식물들이 죽지 않도록 정성껏 돌봐주는 행위 그 어디에도 진한 애정은 보이지 않는다. 잘 자라길 바란다거나, 어느 식물은 어떤 주기로 물을 주어야 한다거나 그런 깊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흙이 마르면 물을 준다. 그게 다다. 그냥 거기에 식물이 있으니까, 할 만큼 한다. 기본적으로 기영은 생명에 대한 연민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심지어 길호에게 식물에 물을 주는 방법을 알려줄 때는 뿌듯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물을 주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기영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안 느꼈을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가 알려주고자 한 것은 물을 주는 방법이라기보다는 일상에 대한 사소한 부채감과 비슷한 어떤 기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주는 대상이 꽃에서 길호로 옮겨간 것은 기영의 성장과도 맥락이 이어진다.
#2. 야, 일어나봐
집 앞 평상에 자는 (누가 봐도) 가출 청소년을 건드리는 건 좋지 않다. 요즘처럼 무서운 세상에, 굳이 타인과 엮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기영은 그냥 '일어나'라는 말로 길호를 툭툭 건드린다. 그리고 그냥 으레 그렇듯이 잔소리만 하고 제 갈 길을 가버린다.
기영이 아마 길호에게 1mm의 마음의 틈을 열게 된 건 길호가 기영이 시킨 대로 평상의 쓰레기를 싹 치웠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 말을 따르는 구석이 있는 아이들은 티가 난다.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어딘가 보살펴 주고 싶은 구석이 보인다.
기영은 본가에서 반찬을 얻어오던 날 길호를 집으로 초대한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기영의 본가에는 '아줌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아버지를 돌봐주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기영은 꼬박꼬박 아줌마라고 부르면서도 겉옷을 사 입으라며 돈뭉치를 억지로 쥐어주고, 아줌마는 도망치다가도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별다른 부연 설명이 없어도 알 것 같았다. 그냥 그런 평범한 가족이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런.
순간적인 연민이 불쑥 커진 그날 밤부터, 기영은 길호를 조금씩 돌보기 시작한다. 마른 흙에 물을 주듯, 서툴고 천천히 양육이 시작된다.
하지만 당연히 양육은 쉽지 않다. 길호는 기영이 집을 비운 날 친구들에게 휩쓸려 집에 패거리들을 재우고 만다. 이 상황에서 길호가 잘못한 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기영이 혼자 집을 비운 것부터 부주의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또 기영도 서투른 어른일 뿐이니까. 아버지의 똥을 열심히 닦고 와보니 또 길호가 똥을 싸놨다. 기영은 남의 똥을 치우기만 해야 하는 사람은 아닌데, 자꾸 주위 사람들이 똥만 싼다.
#3. 머리 위의 랜턴
영화를 보면서 랜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길호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도둑질을 할 때나, 어두운 굴다리를 걸어갈 때 주로 랜턴을 끼고 나오는데, 마치 길호의 시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랜턴이 있으면 눈 바로 앞은 밝게 잘 보인다. 내가 보고자 하는 건 잘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곳의 시야는 막상 가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어딜 봐야 하는지 당최 파악을 할 수는 없다. 길호도 마찬가지다. 길호의 눈앞에 당장 필요한 것은 잘 곳, 먹을 것, 그리고 있을 곳이다. (잘 곳과 있어야 하는 곳은 다르다)
하지만 길호는 랜턴을 벗고 싶어 하는 의지를 가진 아이다. 나쁜 일이란 걸 알고 있고, 벗어나고도 싶지만 랜턴을 벗으면 어둠뿐인 것을 알기에 벗지 못한다. 당장 먹고 자기 위해서라도 랜턴을 껴야만 했다, 기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영은 길호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집도 기영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라면도 있고 TV도 있고, 서로 결혼을 못 할거라는 사소한 악담도 나눈다. 마지막에 길호가 기영을 찾아가면서 친구들과 반대로 걷는 장면이 매우 인상 깊고 좋았다. 드디어 길호는 랜턴을 본인이 정말로 가야 하는 길을 찾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다. 길호가 랜턴이 필요 없는 일상을 보내기를 바란다.
#4. 연민의 확장
기영은 길호랑 지내는 기간 동안 직장에서도 한층 밝아진 모습을 보인다. 우는 모습도 못 본 척하며 무관심하던 기영은 어느새 초은(이랑서)과 조금씩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고, 집에 데려다준다는 전에 없던 다정한 태도도 드러낸다.
참 조그맣던 기영의 세계는 본인도 모르게 길호로 인해 조금씩 넓어지고 밝아진다. 아마 길호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길호를 내쫓은 후 기영이 일하는 모습이 첫 장면과 비슷하게 나오는데, 지게차를 모는 장면은 같은 장면을 두 번쓰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똑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달라 보였다. 원래 사람은 잃어봐야 그게 마음에 있던 거라는 것을 알아챈다고, 사실 예전 일상과 다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영은 많이 허전하고 공허했을 것이 분명하다. 같이 돌을 던지는 장면에서, 그 호수가 기영과 길호의 마음이라는 건 스크린에서 본 나도 알겠으니까. 던진 돌은 결코 다시 안 던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5. 빅슬립
기영은 길호에게 '불쌍한 척 하지마, 그럼 진짜 불쌍해지는 거야'라며 충고한다. 기영은 스스로를 불쌍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현실에 타협하지도, 반항하지도 않는 적당한 사람. 여러 사회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관객이 보기에도 그는 불쌍하지 않다. 그냥 하루를 적당히 잘 보내고, 할 만큼 하고,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사람.
영화는 매우 남성적이다. 영화 보는 내내 여자 두 명의 이야기였으면 갈등부터 해결까지 단 하루밖에 안 걸렸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으로 소통이 불가한 캐릭터 두 명을 갖다놓으니 이해가 가면서도 너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유일한 여자 캐릭터인 초은이 등장해 명확한 의사 표현을 할 때는 마치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으니.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출과 꽤 높은 수준의 음향, 그리고 무엇보다 연기력이 놀라웠다. 평범한 이야기를 하면서 몰입도를 끌어낼 수 있는 건 독립영화에서 약간 과장해서 8할은 배우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역 배우가 나온다면 연기력에 대한 기대는 사실 반쯤 내려놓고 보는 편인데, <빅슬립>의 두 배우 모두 캐릭터 그 자체로의 모습이어서 연기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앞으로도 어디에 나온다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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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불쌍해하지 않으면서 대가 없는 식사 한 끼를 대접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을까.
내가 받았었던 약한 연민들의 순간, 그리고 그 찰나들이 지탱해 준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해 보면서 오늘은 잠을 청해봐야겠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크리에이터 시사회에 참석하여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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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에서 227일 동안 호랑이와 동거한 남자 #6
환몽(幻夢) CINE 리뷰 6화_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해석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스토리가 마음에 드나요?”
(“So which story do you prefer?”)3.14159265358979...
원주율(Pi, π)만큼이나 무한한 이 영화의 해석!
이 영화가 질문하는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안 감독 외계인설?!
- 하나의 사건, 두 개의 이야기
- 예민한 당신을 위해 준비한 교묘한 복선
- “당신은 어떤 스토리가 마음에 드나요?”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환줄평 / 몽줄평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라이프오브파이 #영화추천 #환몽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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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주 최신개봉영화(경관의 피, 씽2게더, 해탄적일천, 전장의 피아니스트, 원샷)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1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경관의피 #씽2게더 #해탄적일천 #전장의피아니스트 #원샷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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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은혼 더 파이널> 메인 예고편
사무라이의 영혼을 건, 최후의 난리법석이 시작된다!
해결사 긴토키 일행이 뿔뿔이 흩어진 지 2년 후,
지구 멸망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부활한 ‘우츠로’를 막기 위해
긴토키 3인방과 예전의 동료들, 라이벌들까지 모두 합세하는데.
모두의 운명을 건 최후의 결전!
복근과 눈물샘을 파괴하는 美친 연출!
SF판타지 대환장 블록버스터
은혼, 그 마지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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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쿄 리벤저스> 30초 예고편
기대 없는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20대 청년 타케미치는
어느 날 뉴스를 통해 첫사랑 여자친구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유일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었던 그녀를 떠올리던 타케미치는
특별한 타임리프를 통해 10년 전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이 변해야만 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