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6-17 11:50:26
6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인사이드 아웃2>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 돌파
“어른이 된다는게 이런건가봐 기쁨이 줄어드는거”
어른들이 뭉클한 마음을 안고 나온다는 <인사이드 아웃 2>
<인사이드 아웃2>가 개봉 5일만에 200만 관객수를 돌파했습니다.
전편 <인사이드 아웃1> 기록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200만 명을
돌파하며 픽사 애니메이션 최고 속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북미 개봉 후 사흘간 2150억원의 티켓 수입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 영화 중 두 번째로 높은 개봉 첫 주 수입을 기록했으며
픽사의 29년 역사상 2위에 올랐습니다.
쏟아지는 극찬 후기로 지난해 700만 관객을 넘게 모은
<엘리멘탈>까지 뛰어넘을것으로 보입니다.
�<인사이드 아웃1> 이후 9년만의 후속작
�주인공 라일리가 13살이 도고 사춘기에 접어들자 감정 컨트롤 본부에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 등장하면서 큰 변화를 겼는다.
'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We love you just the way you are.'
-PIXAR-
<인사이드 아웃 2 > 줄거리
디즈니·픽사의 대표작 <인사이드 아웃> 새로운 감정과 함께 돌아오다!
13살이 된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매일 바쁘게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를 운영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그러던 어느 날, 낯선 감정인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가 본
부에 등장하고,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제멋대로인 ‘불안’이와 기존 감정들은 계속 충돌한다.
결국 새로운 감정들에 의해 본부에서 쫓겨나게 된 기존 감정들은 다시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작하는데… 2024년, 전 세계를 공감으로 물들인 유쾌한 상상이 다시 시작된다!
Relative contents
-
- 경찰을 처단하는 직쏘 모방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살아가며 누구나 하나 즘은 잘못을 하면서 살아간다. 아주 큰 범죄가 될 수도 있지만 말실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작은 무언가를 몰래 가져오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일들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면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잘못을 인지하고 사과를 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잘못을 인지했더라도 은근슬쩍 그냥 그 순간을 넘기기도 한다.
이런 혼란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따라야 하는 법을 만들고, 그것에 위반되는지를 사법기관에 판단을 요청한다. 그리고 잘못이 있으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이 일련의 과정은 수십 년 이상 인류가 사회에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 확립한 어떤 체계다. 하지만 모든 잘못을 법이 다 잡아낼 수는 없다. 어떤 잘못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고 그 잘못을 아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 잘못도 자연스럽게 묻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웅 같은 존재를 이상화한다. 경찰이나 검찰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의 잘못도 누군가가 바로 잡아 주길 원한다. 하지만 그 존재는 분명 인류가 만든 법의 테두리에서는 벗어나 있다.
영화 <스파이럴>은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 가지고 있는 잘못들을 바로잡는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다룬다. 경찰들의 잘못은 큰 것도 있고 사소한 것도 있지만 받는 형벌은 매우 가혹하다. 공포 스릴러 <쏘우>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는 극 중 유명한 연쇄살인범 직쏘(토빈 벨)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모방범을 등장시켜 비슷한 패턴의 연쇄살인을 묘사한다. 과거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은 잔인한 고문 기계에서 깨어나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테스트를 받는다. 원작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특정 신체를 절단하는 것과 목숨을 구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인데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서 잔인한 결과로 이어지고 이 장면들이 그대로 화면에 묘사된다.
비리 경찰을 처단하는 연쇄살인범 이야기
<쏘우>의 스핀오프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스파이럴>은 돼지 머리 인형을 내세우는 직쏘 모방범과 그를 쫒는 지크 형사(크리스 록)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지크 형사는 동료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지만 꽤 도덕적이고 믿을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과거 경찰서장이었던 마커스(사무엘 잭슨)의 아들인 지크 형사는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고, 새로 온 신참 파트너 윌리엄(맥스 밍겔라)만이 그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 상황에서 지크의 동료 형사들이 하나둘씩 직쏘 모방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결국 연쇄살인범과 직접적으로 대결을 벌이게 되는 것 지크 형사뿐이다. 다른 형사들도 같이 추적을 해나가지만 왠지 모르게 지크와 협력하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수사를 하며 움직인다.
경찰은 사회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잡아 처벌할 수 있는 집단이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도덕적인 신념은 중요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지크 형사는 도덕적인 신념이 꽤 명확한 인물이다. 주변 동료를 챙기면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동료라고 해도 동료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직언을 할 줄 아는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런 성향은 그에게 동료들이 등을 돌리게 만든다. 지크 형사는 동료들이 연쇄살인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찌 보면 그는 경찰 내부에서 마지막 남은 최후의 보루라고도 볼 수 있다.
이전 시리즈가 그랬듯이 지크 형사는 늘 범인보다 한 발씩 늦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아주 잔혹한 묘사를 하는 시리즈의 특성을 조금은 완화시켜준다. 또한 범인의 단서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도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다. 과거 시리즈보다 속도감은 조금 떨어졌지만 논리적 서사를 보강했고, 무엇보다 영화를 끝까지 흥미롭게 보도록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지크 형사 캐릭터에 대한 신뢰감 때문일 것이다. 그는 최대한 동료를 구하려고 뛰어다니고 단서를 찾아 결국 모든 살인의 범인을 찾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정의 딜레마에 빠지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그래서 긴장감이 높아진다.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스파이럴>은 일그러진 영웅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쇄살인범 직쏘가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인 원한으로 시작된 살인은 비리나 잘못함 일이 있는 경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형벌을 준다. 과거 언젠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고문 기계에서 눈을 뜬 순간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모든 것을 나열하며 생각할 것이다. 거기에 살인범이 들려주는 특정 사건에서 자신의 죄를 마주하고 결국 형벌에 처해진다. 아주 잔인한 살인범의 형벌은 세상을 위한 정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반론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으므로 올바른 정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영웅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 자신이 행하는 정의에 이유와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그저 잔혹한 악당으로만 보인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
또한 연쇄살인범은 돼지 가면과 인형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스코트만 바뀌었을 뿐, 직쏘가 이용했던 방식 그대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살인범 역시 새로운 직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동일한 방식과 메시지는 <스파이럴>의 이야기가 <쏘우> 시리즈의 동어반복처럼 느끼게 한다. 이미 했던 이야기를 다른 캐릭터를 가져와 재구성하여 풀어가기 때문에 스핀오프라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리부트로 보이기도 한다.
감독 대런 린 보우즈만은 공포영화 전문 감독으로 <쏘우 2> 편으로 연출 데뷔를 한 이후, <쏘우 3>. <쏘우 4>까지 연출하여 <쏘우> 시리즈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이후 여러 가지 공포영화들을 연출하고 있지만 만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은 많지 않다. 이번 <스파이럴>로 다시 <쏘우> 시리즈의 연출을 맡게 되면서 자신이 가장 잘했던 영화를 다시 한번 만들어냈고, 팬들이 만족할만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기시감을 느끼게 하지만 과거 시리즈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고, 서사의 구멍도 그렇게 많지 않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스릴러로 탄생시켰다.
영화 주인공 지크 형사를 연기한 크리스 록은 <쏘우> 시리즈의 팬으로 <스파이럴>의 기획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각본 작업에도 참여하여 이 시리즈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코미디 배우로 많이 알려져 우스꽝 스러운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되는데, 이번 <스파이럴>에서는 과거와 다르게 심각하고 진지한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배우를 비롯해 감독까지 시리즈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 <스파이럴>은 여러 가지 단점을 보여주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시리즈가 이어갈 동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스파이럴 리뷰>
-
- [JIFF 데일리] 아동권리 그리고 영화
세상엔 생각보다 영화제가 많다. 크고 작은 영화제가 많아지는 건 분명 기뻐할 일이나, 다 갈 수 없어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게 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동종업계 인간으로서) 몇 년째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영화제가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운영하는 ‘아동권리영화제’다.
처음에는 ‘아동 권리’라는, 사실 내용은 대강 알아도 용어로서는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은 말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하기 위한 좋은 단발성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15년에 시작한 영화제는 코로나19를 넘어 지금껏 계속되었다. 아동권리 주간이 있는 매년 11월에 개최하는데, 2023년 11월에도 멋지게 진행했다.
2015년 초기부터 라인업이 막강했다. <자전거 탄 소년>, <아무도 모른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등 아동을 주제로 잘 큐레이션된 작품들에, 천근아 소아정신과 교수 같은 아동 전문가, 이동진 평론가 같은 영화 전문가를 고루 패널로 초청하여 균형을 잡았다. 2019년에는 ‘아동 권리 관련 영화’ 하면 누구나 첫 손에 꼽을 <가버나움>에, <플로리다 프로젝트>, 촬영 과정에서도 아동 권리와 연결해 나눌 얘기가 많은 <우리들>, 개봉작도 아닌 <브레드위너> (넷플릭스에 <파르바나>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까지 골고루 챙겼다. 패널도 어느 한 명 빼놓을 수 없이 대단하다. 또한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이 나와서 진행한 행사도 있고, 초등학교 교사와 함께 진행한 행사도 있어, 아동과 영화 두 가지 주제를 다 만족시키려고 노력한 점이 엿보인다.
이렇게 훌륭한 큐레이션으로 영화제의 규모가 점점 커지더니, 출품을 받기 시작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아동권리 보호에 진심인 아동단체이지 영화단체가 아님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아동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아동의 눈높이에 있는 작품의 적은 파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세이브더칠드런은 2019년부터 파트너십 관계를 맺고 있어, 영화제 곳곳에서 빨간 세이브더칠드런 부스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동권리영화제 수상작과 함께하는 특별상영에 이어, 씨네아동권리토크도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2023년 수상작인 홍승기 감독의 <알록달록>과 김슬기 감독의 <한 숨> 두 작품, 전북 고창 책마을 해리 이대건 대표를 초청하여,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진행으로 토크가 진행되었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알록달록>은 남다른 시각을 가진 다홍이가 보는 색이 진짜 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펼쳐지는, 정말 ‘알록달록’한 이야기이다. 색맹은 일상에 지장을 주는 문제로 분류되지만, 바로 그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한 숨>은 반대로, 모든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프지 않고 건강한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다. 환경 오염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미세먼지 같은 문제도 너무 심해서, 아프지 않은 게 오히려 보편적인 세상이라는 가정은 오싹하지만 조금씩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처럼 느껴진다. 설정 자체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두 작품이다.
이대건 대표와 이다혜 기자는 입을 모아, “이전 세대는 이전의 기준으로 ‘아 나도 다 경험해 봤지’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쉽게 재단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경험과 감각은 이전 세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영화를 통해 어른들을 가르쳐야 하고, 어른들이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동의 관점을 반영하고 아동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이토록 적다는 것은 그 배움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부족한 것을 반증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대표적인 예시가 <한 숨>에서도 다룬 환경 문제이다. 그레타 툰베리의 “어떻게 감히(how dare you) 그럴 수 있”냐는 질문까지 빌려오지 않아도, 미래 세대는 이전 세대가 어렸을 때에 비해 환경 문제를 훨씬 예리하게 감각하고 이에 반응한다.
아동의 관점과 시선을 배워야 한다는 한 문장은 명쾌하지만 사실 현실에서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제작한 두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공유되면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한 숨>의 김슬기 감독은 보육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그 시간을 통해 아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옆에서 많이 들었고, 실제로 미세먼지 등으로 인해 야외 놀이를 할 기회가 줄어드는 아이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알록달록>의 홍승기 감독은 어린 시절 흰 쌀밥을 분홍색으로 칠했을 때 어머니께서 “이 분홍색 쌀은 어디서 구할 수 있어?” 하며 다정한 관심을 보여주셨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 말이 지금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따뜻하게 받아주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한 것이다.
교육은, 성장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오는 과정이므로 성장통이 수반한다. 아이가 아파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응당 보호자의 마음일 것이며, 때로는 아이가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고 엉뚱해 보여, 바쁜 일상 속에서 ‘그냥 내가 해주고 말지’ 하고 넘어가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아동권리, 아동의 시선을 반영하는 일은 결국 아이들의 방식과 속도를 존중하며 기다리고, 그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기를 기다리는 여유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유를 찾기 너무 어려운 어른들을 위해, 이대건 대표가 인용한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선언문 한 구절로 마무리한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
- 지나치게 정직했던 뮤지컬의 영화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와 가족의 품을 떠나 일제와의 전투에 나선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정성화)'. 몇 차례의 전투에서 패전을 맛본 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한가지 맹세를 한다.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며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3년 이내에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결의한 것.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안중근은 오랜 동지 ‘우덕순(조재윤)', 명사수 ‘조도선(배정남)', 독립군 막내 ‘유동하(이현우)', 독립군을 보살피는 동지 ‘마진주(박진주)'를 만나 이토를 죽일 거사를 획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안중근은 이토에게 접근한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김고은)'로부터 이토가 하얼빈에서 회담을 가질 예정이라는 첩보를 입수한다. 1909년 10월 26일,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긴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하는 데 성공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법정에 선다.
<영웅>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본래 2019년에 촬영 후 2020년 3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영향 때문에 개봉이 연기되었고, 3년 만인 2022년 12월에 마침내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원작이 있는 영화는 언제나 같은 시험에 빠진다. 영화의 작법과 다른 예술의 작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간과하면 욕심이 너무 과해지고, 영화로 재해석된 결과물로 인해 원작의 매력을 잃을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원작을 의식하면 그저 아류작에 불과해진다. 원작의 가치는 느껴질지 몰라도 굳이 영화로 만든 이유를 알 수 없다. JK 필름에서 제작한 윤제균 감독의 <영웅>은 후자에 부합하는 영화다. 가지고 있는 장단점 모두 원작 뮤지컬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라는 매체로 극을 옮기는 과정에서 붉어진 문제점도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영웅>은 클리셰를 남발하고 수많은 웃음과 눈물 포인트를 삽입하는 JK 필름의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시아주의자 안중근을 조명하는 입체성
<영웅>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안중근의 의거가 목표한 바와 배경, 그리고 의의를 전달하는 기본적인 목적에 충실하다. 예를 들어 그가 의병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으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군사 작전의 일환이었음을 강조한다. 특히 이 작전의 의의를 설명하는 데 예상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게 눈에 띈다. 흔히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독립투사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의거는 의외로 더 큰 목적을 지닌 작전이었다. 안중근은 단순히 조선의 독립을 바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협력을 희망하는 아시아주의자였다. 그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한중일 3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협력하여 동양의 평화를 일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마치 지금의 유럽 연합과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어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존재감 덕분에 '아시아주의'라는 이상을 둘러싼 두 인물의 사상적 대립은 더욱 부각된다. 이토가 부르는 넘버 '출정식'과 안중근이 노래하는 '동양평화'의 대조가 단적인 예시다. 이토는 하얼빈 시찰이 "극동의 평화와 문명을 여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라면서 "평생을 바쳐왔던 꿈 아시아는 낙후되었다. 아시아는 위태롭다. 막강한 일본을 만들어 아시아를 통일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 대동아공영!"이라고 노래한다. (비록 '대동아공영'이라는 표어 자체는 태평양 전쟁 당시부터 사용되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시아를 무력으로 통합하여 서구 열강에 대적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자 이토의 사고를 잘 보여준다.
반면에 안중근은 "서로서로 인정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 서로 자리를 지키며 조화롭게 사는 것. 그게 바로 동양 평화 모두가 더불어 사는 지혜"라고 읊조린다. 현실에서 아시아주의를 실천하는 것만이 한중일 모두의 이익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셈이다. 즉, 안중근의 시각에서 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왜곡해 조선 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토는 죽어야만 했다. 조선의 독립은 물론,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인물이기에 처단 대상이었다. 이처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길을 걷지 않은 덕분에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에는 강력한 당위성과 설득력이 생긴다. 평범한 반일 영화나 평면적인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인이나 일본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일부 제국주의자가 싫다는 안중근의 말은 1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충분히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뮤지컬과 영화의 차이를 간과한 결정적인 실수
하지만 <영웅>의 장점은 온전히 빛나지 못한다. 뮤지컬의 배경을 확장, 확대하는 데 그친 전반적인 구조와 구성이 <영웅>의 매력을 가리기 때문이다. 거사 직전, 등장인물 모두의 감정선이 고조되는 "그날을 기약하며"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마진주 등 작전에 참여할 인물들은 차례대로 거리에 등장한 후 각자의 심경을 노래한다. 마치 어벤져스처럼 원을 그리며 노래하는 그들 주변에는 수많은 한인이 등장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 함께 거리를 행진하면서 거사의 성공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다. 이때 영화의 카메라는 뮤지컬 관객들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의 담아낼 뿐이고, 도시의 거리 역시 뮤지컬 무대 배경이 넓어진 것에 불과하다.
분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른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오프인 시퀀스인 "단지동맹" 장면이나 또 다른 하이라이트인 "영웅" 시퀀스에서도 배경인 설원과 자작나무 숲은 그저 인상적인 배경에 불과하고, 무대장치의 확장일 따름이다. 클라이맥스인 "장부가" 시퀀스도 뮤지컬을 재현하고 카메라에 옮겨 담는 데에만 주력한 영화의 지향점을 재확인시켜준다. 이 대목에서 카메라는 교수대에 올라선 안중근을 그저 정면에서 담아내며, 사형집행을 지켜 보는 이들은 뮤지컬 객석 관객들처럼 느껴진다. 영화 관객들도 뮤지컬 관객의 연장선상에 위치할 따름이다.
따라서 <영웅>이 원작 뮤지컬 무대를 영상화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영화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영화'로서의 특이점이 없다는 점이다. 넘버의 연속으로 구성된 뮤지컬은 근본적으로 노래마다 응축된 감정이 터져 나와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도 중요하지만, 그 지점에 다다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따라서 뮤지컬 영화는 뮤지컬의 한계를 영화적 내러티브 구조나 다른 방식의 장치들을 더해 해결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웅>의 한계점은 명확하다. 어색한 화면분할이나 조악한 추격전, 하얼빈역 전경이나 설원처럼 과장된 CG의 활용 등으로는 이야기 사이 사이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 즉, 뮤지컬의 영화화에 실패한 <영웅>은 '뮤지컬' 영화일지언정 뮤지컬 '영화'는 아니다.
장점마저 퇴색시킨 수많은 의문점
결국 <영웅>은 곳곳에서 문제를 노출하며 무너진다. 노래 전후로 시퀀스와 시퀀스, 장면과 장면이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까닭이다. 안중근과 설희, 동지들의 넘버는 그들의 기개를 보여줄 뿐, 이야기 전개를 위한 디테일을 담지 못한다. 실제로 하얼빈역과 채가구역으로 나누어 작전을 준비하는 것 외에 거사를 위한 계획이나 이토의 눈앞에서 정보를 캐내는 설희의 활약 등은 자세히 묘사된다고 보기 어렵다. 일례로 설희가 민비의 죽음 때문에 이토를 향한 원한을 키웠다면, 원한 자체는 노래에 담더라도 이토에게 접근하고 그의 신임을 얻는 과정은 더 정교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하다못해 이토가 당시 일본인들도 비판할 정도로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다는 점만 언급했어도 설희의 스토리가 더 입체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대신 영화는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 채 빈자리를 윤제균 감독 특유의 유머로 채운다.
이에 더해 자기 손으로 자기 장점을 퇴색시키기도 한다. 영화는 안중근이 조선의 독립보다 더 원대한 이상을 좇게 된 이유를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함경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다가 크게 다치는 장면 이후로 영화의 배경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전환된다. 이 시점부터 안중근은 거리 연설에서 아시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이토를 죽이기 위한 작전에 몰두한다. 하지만 다시 등장한 안중근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안중근이 어떻게 동양평화론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괴리감을 피할 수 없다. 변화의 연속성을 부각할 수 있는 시퀀스를 중간에 하나 추가하는 스토리텔링의 디테일이 부족한 결과인 셈이다.
스토리의 한쪽 기둥을 맡고 있는 설희를 다루는 방식도 아쉽다. <영웅>은 안중근과 동지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설희가 각기 한 축을 이루는 영화다. 특히 설희의 경우 단독 넘버를 두 개나 가져갈 정도로 주역인 안중근과 이토와 맞먹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캐릭터들과 호흡을 맞추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설희의 비중은 조금 조절되더라도 전개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설희의 비중을 줄이고 안중근의 비중을 좀 더 늘려 주인공의 내면을 더 깊이 묘사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빈약한 스토리를 음악과 배우의 열연으로 덮는 것보다는 영화적으로 더 적절한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웅>은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은 무대 뮤지컬 같다는 인상을 좀처럼 깨지 못한다.
부족한 디테일이 낳은 신파
이처럼 허술한 만듦새는 끝내 감정의 과잉과 신파로 이어진다. 그래도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신파가 적절히 활용된 듯 보인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항소와 아들의 목숨을 포기하는 어머니의 아픔과 그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아들의 고통을 애절한 선율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또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아내와의 갈등과 사별은 모든 독립 운동가의 숭고함을 오히려 감정적으로 부각해 준다.
반면에 안중근을 제외한 다른 인물은 대부분 신파를 위해 희생되고 만다. 당장 진주의 오빠인 '마두식(조우진)'의 운명이나 진주와 동하의 로맨스에서는 관객을 울음바다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느껴진다. 앞서 보았듯이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디테일이 부족하다 보니 그 허술함을 신파로 대신한다는 인상이 진하게 남는다. 그러면서 정작 신파적 연출이 일관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또 다른 조력자인 우덕순과 조도선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웃음을 위해 단편적으로 활용되고 소비될 뿐 진중하게 조명될 기회를 잡지 못한다. 채가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하던 이들이 안일하게 작전을 철회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는 개그성 장면이 대표적이다. 안중근과 달리 법정에 선 우덕순과 조도선의 모습이 어색할 정도다.
<영웅>의 기술적 성취는 본작의 장단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웅>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 시도된 바 없는 촬영 방식이 도입된 영화로 알려졌다. 촬영 현장에서 직접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녹음 방식을 채택해 70% 이상의 분량을 현장 녹음 버전으로 담아냈다. 이 대목은 뮤지컬을 단순히 촬영했을 뿐인 영화의 본질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가상의 현실감을 살리되, 더 커지고 정제된 형태로 다시 태어난 뮤지컬 영화 <영웅>의 필연적인 장점이자 한계가 고스란히 노래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P(Poor, 형편없음)
뮤지컬 '영화' 대신 '뮤지컬' 영화를 선택한 안일함의 대가.
-
- 내 이름은 리들리 스콧. 거장이죠
이 글은 영화 [글래디에이터 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결혼이나 승진 같은 이벤트일 수도 있고, 인생의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얻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순간이 만약 배우에게 다가온다면. 당연히 자신의 존재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역할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러셀 크로우라는 배우에게는 극 중에서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원수인 황제 앞에서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내뱉는 순간이 바로 그렇게도 기다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검투사들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모습은, 화면상에서 봤을 때 상대 배우들에 비해 비교적 작은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압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의 극 중 이름에도. 그리고 배우로서의 이름에도 남다른 무게감이 생긴 뒤에 느낄 수 있는 후광효과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후광 효과를 만들어 낸 위대한 감독 리들리 스콧에게도 [글래디에이터]는 매우 특별한 영화다. 24년이 지난 지금에도 막시무스의 이름을 들으면 전율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속편을 선보이며 자신의 이름값뿐만 아니라 영화의 이름값도. 게다가 불세출의 영웅 막시무스에게도 톡톡이 값을 치러줘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님 개연성 어디 갔어요
사진출처:다음 영화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말 잘 만든 영화라고 해도 겨우 본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그 우려(?)는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현실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1편에서 따왔지만 안타깝게도 개연성과 임팩트는 24년 전 영화에서 신나게 써 버려 이미 멸종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루시우스(폴 메스칼)의 눈에 분노가 있다고 말한다. 전쟁 중 자신의 아내를 비롯한 시민들을 잃었으니 분노의 계기는 명확하다. 그러나 분노의 방향과 깊이는 애처로울 정도로 얕아서 영화 상에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힘들다. 그나마 쌓아 올린 나노단위의 분노조차도 결국 마르쿠스(페드로 파스칼)를 경기장에서 만나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덕분에 영화의 초반부에는 이렇게 말 잘 듣는 전쟁노예가 있었던가.라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하게 한다.
초반부에서 자신의 뿌리를 다시 한번 알게 된 각성한 주인공이 후반부에는 독자적으로 "로마황제 프로듀스 101"을 찍고 있는 마크리누스에게로 칼끝을 겨누는 과정도 그다지 인상적이라거나 매끄럽지 않다.
그 연결고리로 선택한 것은 쌍둥이 황제의 존재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 해봐야 화장을 무당처럼 하는 바람에 밤에 마주치면 무섭게 보이겠다 정도일 뿐. 인간성의 잔인함을 강조하는 것 외에 주인공과 크게 관련된 이벤트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 황제의 존재 이유는 마크리누스의 귀걸이보다도 작고 하찮게 보이고, 그로 인해 과연 그만큼의 품을 들여서 이들을 없앨 이유가 있었던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진출처:다음 영화
또한 2편이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주인공의 태생적인 한계에서부터 온다.
주인공에게 고유함과 더불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막시무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루시우스는 자신의 이름보다는 아버지의 이름 덕에 조금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등장하는 극초반부의 장면은 정말 많은 정보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것도 전장을 둘러보는 막시무스를 향해 인사하는 동료 병사들의 표정으로. 그를 향한 믿음과 존경. 전우애와 의지를 꽉꽉 채운 눈빛으로 말이다.
막시무스는 촉망받는 장군이었으며 분노를 장착한 정치게임의 패배자였고. 죽음이 그를 덮친다 해도 무릎 꿇기는커녕 어서 나를 갈기갈기 찢어보라며 포효할 인물이었다. 잔인한 전투 장면이 없이도 그의 걸음걸음마다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루시우스에게 주어진 서사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너무도 옅은 데다 유약했고. 그 덕분에 루시우스는 아버지에게 그저 만담실력을 물려받은 호탕한 사람 정도로만 느껴진다.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힘이 실리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그는 로마 제국의 단 하나 남은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핏줄을 아무리 영화라지만 살해할 리는 없다.
우리는 막시무스가 그토록 살아남기를 원했고. 화면 속에서 시간이 흐를 때마다 죽어가는 그를 보며 눈물과 안타까움을 삼켰지만. 아들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온 세상 인물이 다 죽는다 해도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테니. 믿는 구석이 애초에 있는 사람의 전투가 간절해 보일 리가 없다.
거장의 장기자랑 타임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이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십분 살려내 화면과 남은 시간 가득 채워내는 것.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운 초반부가 지나고 나면 후반부에는 우리가 감독에게 기대했던 모든 장면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관객의 눈에 안긴다. 소위 "큰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가진 요소들인 거대한 스케일과 장엄한 장면에서 갖추어야 할 카타르시스들을 모조리 느낄 수 있다. 기존의 검투 장면들 역시도 작정한 듯 화려하게 준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거의 장면들은 아름답다 못해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하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독은 지구상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 밖에 없을 것이며. 그의 존재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후반부 덕에 앞부분의 불쾌함이 조금은 날아간다.
물론 영화가 주는 장대함과 압도당하는 힘이 스토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면 자체가 주는 웅장 함이라는 것은 아쉽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보상은 완벽히 가능하고. 정해진 결말로 가는 그 길마저도 조금은 기대로 채울 수 있다.
마치면서
내가 존 스노우 시절(대충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뜻) 두려움이 너를 구할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꽤 오랫동안 내겐 미스터리와도 같았다.
한낱 평범한 사람인 나 조차도 두려움을 이토록 피하고 싶은데.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버린 작품의 감독에게 이번 영화는 얼마나 피하고 싶은 과제였을까.
두려움에서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거장은 스스로가 가진 모든 "치트키"를 활용했다. 주어진 두려움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한 덕에. 이 두려움의 바다에 빠졌을(?) 거장은 뭍까지는 떠밀려 올 수 있었다.
머금은 모래를 내뱉고 따끔거리는 바닷물이 코에서 흐르는 걸 느끼며 진절머리를 쳤겠지만. 비로소 폐 한가득 신선한 공기를 마실 때는 안심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결과 또한 아마도 조금은 매콤하지만 다행인 평이될 것이다.
또한 다음번에 두려움의 바다에 빠졌을 때 무사할 행운이 다를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의 TMI]
1. 베이글 그만 먹고 싶은데 그게 안 됨
2. 아침 운동 너무 힘들다.
3. 너무 추워서 난로를 사고 싶은데 전기세가 걱정된다.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munalogi
-
- 첫사랑 이야기는 거들 뿐
경고: 스포일러 주의!
폴 토머스 앤더슨이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했을 때 들었던 걱정. 유열의 음악앨범 같은 로맨스 영화처럼 추억팔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리코리쉬 피자는 표면적으로는 첫사랑에 대한 풋풋함을 담고 있는 영화다. 그러나 그 껍질을 벗겨보면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모습과 남녀끼리 벌이는 처절한 투쟁들로 가득하다.
두 주인공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개리(쿠퍼 호프먼)의 사이는 키싱구라미 같다. 영화 쉬리에서 암수가 서로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사랑의 상징이 된 물고기다. 그러나 이 두 마리는 키스가 아니라 영역 다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쪽 물고기가 죽으면 잡아먹는다고 한다. 사랑이라곤 1도 없는 모습이다.
리코피쉬 피자는 표면적으로는 개리와 알라나의 서툴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내세운다. 그러나 추억팔이를 핑계 삼아 문제 있는 남자들을 닮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 개리, 그리고 당시 사회의 한계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능력 있는 여자 알라나를 통해 그 속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영화는 그녀가 만나는 문제적인 3명의 남자를 통해 그 한계를 보여준다. 술을 먹고 다른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영화 제작자, 알라나가 다침에도 오토바이 경주를 하는 늙은이 등. 문제적인 남자들 뿐이다. 그 탓에 개리가 정말 착한 남자로 보일 지경이다. 개리도 알라나와 의견이 안 맞았던 탓에 계속 다퉜음에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결국 개리가 지닌 야망은 성취된다. 알라나는 개리의 부인이 되고, 그들은 함께 거리를 달려나가며 그들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개리의 뒤에는 여전히 3명의 문제적인 남자들이 남아 있다. 개리가 변하지 않는 한 알라나는 이후 개리의 꼭두각시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씁쓸함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그 씁쓸함은 사랑이 언제나 우리의 뜻대로 될 수 없다는 보편적인 결론을 전달한다. 그러나 폴 토머스 앤더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시대적 한계와 씁쓸한 현실도 같이 드러낸다. 마치 감초(licorice)와도 같은 달콤씁쓸함이다. 그 감초 껍질 뒤의 달콤씁쓸함을 맛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 영화를 꼭 보길 바란다.
-
- JOHN NA 기대한 이 영화, 아쉬운 이유는…
6★/10★
〈남자사용설명서〉의 이원석 감독이 돌아왔다. 장르는 마찬가지로 로맨틱 코미디. 〈킬링 로맨스〉는 〈남자사용설명서〉의 길을 계승한다. 남성과 여성이 불균등한 권력을 가진 사회에서 평등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를 감독 특유의 B급 코미디로 유쾌하게 질문하는 그 길 말이다.
주인공은 톱스타 여래와 그녀의 남편 조나단 나(JOHNathan Na) 그리고 여래의 팬클럽 회원이자 4수생인 범우다. 여래는 CF 스타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큰 투자를 받은 SF 작품 〈낯선자들〉에서 발 연기를 선보인 후 조롱에 시달린다. 그러던 중 상심한 채로 ‘콸라’ 섬으로 떠난 여행에서 환경 운동가이자 동물권 운동가, 부동산 개발업자인 조나단을 만나 결혼한다.
그렇게 7년이 흘렀다. 여래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다. 환경‧동물권 운동가인 동시에 부동산 개발업자는 존재할 수 없다. 이 공존은 둘 사이의 모순이 완벽히 감춰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조나단이 겉으로는 다정한 남편인 척 굴지만 실은 여래를 정서적‧신체적으로 완벽히 통제하는 남자이듯 말이다. 조나단은 여래가 환각, 조울증 증상이 있다는 이유로 약을 먹이고 자신의 취향에 맞춰 여래의 몸무게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녀가 먹는 것을 통제한다. 요컨대, 조나단은 미쳤다는 낙인에 여래를 가둔 후 그녀를 자신만을 위한 액세서리로 만드려고 한다. 남자들이 오랫동안 여자를 길들여온 방식이다.
부동산 개발을 위해 오랜만에 콸라 섬을 나와 한국으로 돌아온 조나단과 여래. 그 옆집에는 온 가족이 서울대에 갔는데 혼자만 그러지 못해 4수 중인 수험생 범우가 산다. 범우는 자기 옆집에 오랫동안 동경해오던 여래가 산다는 사실에 흥분하지만, 곧 그녀가 남편에게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여래에게 자유를 선물하기 위해 조나단을 죽이려는 음모에 가담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시작된 B급 ‘병맛’ 코미디는 조나단을 죽이기 위한 기상천외한 작전까지도 이어져 관객을 홀린다. 〈남자사용설명서〉에서 꼴 보기 싫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승재’를 연기했던 오정세 배우의 특별 출연도 반갑다.
영화는 끝까지 B급 병맛 코미디를 고수하며 조나단에게는 몰락을, 여래와 범우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여래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여래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범우가 여래를 돕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그는 조나단을 죽일 수 있는 몇몇 결정적인 기회에서 머뭇거리다 일을 망친다. 하지만 끝내 누군가를 죽일 수 없다는 그 선한 마음으로 여래를 돕는다. 그가 3수에 실패하고 4수에 들어가면서 동물과 대화하기 시작했다는 설정에서 범우의 ‘실패’ 경험이 여래에게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실패 경험이 또 다른 취약한 존재의 아픔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간 것이다. 요컨대, 〈킬링 로맨스〉는 남자의 폭력으로 결혼에 실패한 여자가 수험 생활에 실패한 남자의 도움을 받아 성공을 독식하는 남자를 물리치는 이야기다. 연대가 억압을 이긴다.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남자사용설명서〉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유쾌하게 풍자하여 평등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넓힌 이원석 감독이 비슷한 결의 영화로 돌아온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다만 〈킬링 로맨스〉는 호불호가 크게 갈릴 영화로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자신이 애초에 마음먹었던 영화의 톤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그의 코미디에 익숙하거나 그의 코미디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참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도대체 2시간 동안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황당해할 수도 있다. 내내 코미디에 힘을 주다 보니 드라마에 힘이 들어가야 할 순간에 힘이 빠진 듯한 느낌도 있다. 코미디 연출이 핵심이라도 〈킬링 로맨스〉 서사의 근간은 자유를 위해 남편을 죽이고자 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분명 어떤 순간에는 코미디 톤을 죽이고 서사의 힘을 키웠어야 했다는 소리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씨가 마른 시대에 의미와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감독이 10년 만에 같은 결의 영화로 돌아왔다는 데서 〈킬링 로맨스〉에 대한 기대감은 ‘JOHN NA’ 컸다. 그러나 결과물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물론 나는 이 영화를 적당히 재밌게 즐겼다. 하지만 다른 관객 역시 그럴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의 비타협적 실험이 뚝심이 아닌 자기만족에 그칠지도 모르겠단 불안이 들었기 때문이다(코미디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자기감정보다 타인의 반응을 먼저 떠올린다는 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원석 감독과 그의 지향을 ‘JOHN NA’ 응원하지만 말이다.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의 로맨틱 코미디'(https://brunch.co.kr/@cyomsc1/253)
-
-
-
- 영화 <파이프라인> 2차 예고편
목표는 하나, 목적은 여섯!
화끈하게 뚫고, 완벽하게 빼돌려라!손만 대면 대박을 터트리는 도유 업계 최고 천공기술자 ‘핀돌이’는
수천억의 기름을 빼돌리기 위해 거대한 판을 짠 대기업 후계자 ‘건우’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빠져 위험천만한 도유 작전에 합류한다.
프로 용접공 '접새', 땅 속을 장기판처럼 꿰고 있는 '나과장',
괴력의 인간 굴착기 '큰삽', 이 모든 이들을 감시하는 '카운터'까지!
그러나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속고 속이면서
계획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데...
인생 역전을 꿈꾸는 여섯 명의 도유꾼들
그들의 막장 팀플레이가 시작된다!
-
- 영화 <영화감독 노동주> 메인 예고편
“사랑에 대한 힘이, 힘에 대한 사랑을 능가할 때 세계 평화가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시각이 단절된 채 시각적인 예술인 영화에 도전하는 ‘노동주’ 감독, 그가 도전하는 건 세상의 편견과 장벽들이다. 인간 노동주의 삶과 감독 노동주의 영화 제작기를 통해 바라본 우리 사회의 편견과 시선은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