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7-07 21:48:29
아름다움과 추함 그 너머
영화 <태풍 클럽> 리뷰
SYNOPSIS.
태풍이 불어 닥친 날, 미카미 쿄이치를 비롯한 6명의 중학생이 학교에 갇히고, 교이치의 절친 리에는 등교하던 중 홀연 방향을 바꿔 도쿄로 향한다. 고립된 상황 속에서 결핍과 욕망, 불안과 쾌락이 뒤섞인 이상야릇한 축제가 벌어진다.
POINT.
✔️ 1980년대 일본 영화계의 변화를 이끈 소마이 신지 감독의 대표작이 약 40년 만에 개봉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유명한 감독이라는데, 동양 영화를 일본 위주로 좁게 읽어온 경우가 많은 서구권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감독이에요.
✔️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류의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관심을 가져보실 만합니다.
✔️ 1980년대의 현란한 음악과 음향이 매우 매력 있게 쓰인 영화
✔️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잘 만든 영화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해요.
청춘은 늘 아름답게 혹은 위태롭게 혹은 둘 다로 그려진다. 소용돌이 치는 미완의 감정들이 어쩌지를 못하고 파들거리는 각자의 세계. 자기 자신만으로도 팽창하다 터져버릴 것 같지만 외부와 또 끊임 없이 잡음을 일으키는 일상. 차라리 태풍이라도 와서 이 모든 것이 깨쳐지길 바라게 되는 마음 같은 것들. 여기까지는 청춘을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로 미화하여 기억하는 사람조차도 쉬이 공감할 법하다.
이 영화도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영화 속 리에의 대사에서 표현되듯, 곧 올 거라는 태풍이 차라리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쩌다 학교에 남아 버린 아이들이 점점 거세지는 태풍 속에서도 굳이 집에 가거나 연락하려는 마음 없이, 교실에 남아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이 청춘이라면... 저는 그냥 한평생 응애 할랍니다.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다.
아름다운 시네마의 힘
이 영화가 아름답지 않았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에너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제각각의 이유로 학교에 남은 아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흔히 이 영화를 소개할 때 사용되는 불안이나 본능 같은 단어들 또한, 청춘이나 사춘기나 청소년기라는 단어들 또한, 이 영화 속 아이들이 표출하는 에너지를 적확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최선은 결코 최적에 닿지 못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말하고 쓰며 이 영화의 주변을 더듬거려 보고 싶다.
현란한 80년대 음악과 독특하게 사용된 음향, 공간 사용 하나하나 다, 영화를 잘 모르는 눈으로 보아도 잘 만들었구나 감탄하게 되기는 한다. 책상을 쌓아 올리고 종이학을 매달아 둔 교실의 풍경, 거기에 마치 아이돌 군무처럼 원자처럼 제각각 서 있는 아이들,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모습은, 그 장면이나 정서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장면적으로 힘이 있다. 마치 온도가 높아지면 활발해지는 원자의 운동 같다. 전자와 충돌이 증가하고 비저항이 커지는 원자의 모습처럼,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다.
태풍 안에서 제각각의 이유로 끓어 오르는 아이들의, 탁구공처럼 튀어오르는 에너지는 분명히 힘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8명의 아이들이 마치 하나의 사회를 표현한 것처럼도, 한 인간 안의 복잡다단한 정서를 표현한 것처럼도 보인다는 지점이다. 하나의 물체 안의 원자들처럼.
아름답지 않은 원시의 폭력
특히나 이 영화 속 아이들의 세계를 하나의 사회라고 한다면, 내 눈에 그것은 태곳적 원시의 사회로 보였다. 인간보다는 짐승의 그것과 조금 더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낳은 이들은 보호자로 기능하지 않거나 아예 부재한다. 아이들이 쌓아올린 보호의 수단은 그다지 보호할 만큼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책상을 바리케이드처럼 쌓아 올린 것은 물리적 충격을 막기 위함이고 종이학은 으레 소원의 상징이나, 둘 다 이 영화 속에서는 장난스러워 보인다고나 할까, 조개 껍데기 가면 정도의 선사 시대 주술 수준으로 무력해 보인다. 그 안에서 생의 감각은 통제되지 않는다. 노래와 춤, 웃음과 폭주, 그리고 폭력.
특히 미치코에 대한 켄의 폭력 장면은, 개인적으로 관객석에 앉아 있기 괴로울 정도였다. 너무 괴로워 속이 좋아지지 않았고, 주먹을 자꾸 불끈 쥐게 되었으며, '미치코 그렇게 밀어내면 네 코어가 흔들려... 코어를 다잡고, 있는 힘껏 한 대 치고 발로 차...'라고 생각하게 되는, 자꾸 극을 극으로 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장면에 얼마나 깊은 괴로움을 느끼냐에 따라서도 평가가 갈릴 지점이 있을 것이다. 유독 길고 집요했던 이 장면은, 명백히 성폭력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가해자의 입장을 고려한다. 그가 가정에서 겪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결여와 그로 인한 그의 정신적 불안정 상태, 좋아한다는 이유로 미치코에게 이미 저지른 일과, 그 일에 대한 면죄부의 의도로 해석될 자리까지 내어준다. (심지어 이 영화의 시놉시스에서 “소년은 짝사랑했던 소녀에게 마음을 고백“한다고 표현한 문장도 있다. 누가 썼는지 몰라도 이건 좀 많이 다르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 원색적인 세계에 출구는 있는가? 도쿄에서 태풍 속을 뛰어다니는 리에와 강당 앞에서 춤을 추는 아이들이 노래하는 '만약의 내일'에는, 출구가 있을까. 원시 사회를 벗어난다면, 이 미완성의 시기를 벗어난 '어른'의 세계에는 대안이 있는가.
이 영화 내에는 없다. 대사 하나 없이 잠시 등장하지만 보호자 역할은커녕 스스로를 돌보는 일조차 버거워 보이는 켄의 아버지, 그의 함석지붕에 아들이 내리꽂는 돌멩이, 무책임하게 피하던 약혼녀의 가족과 함께 가라오케 노래를 부르며 무성의하고 무기력하게 술에 몸을 맡긴 교사, 문을 열어 몸을 적시는 이상으로 태풍을 맞이할 수 없는 그의 세계...
<일본산고>의 일침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원시 사회 같은 폭력을 보며 대문호 박경리 선생님의 <일본산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보다는 죽음, 희망보다는 절망을 향해 있다. 출구보다는 막다른 길처럼 느껴진다.
"비상을 꿈꿀 수 없는 사로잡힌 영혼에게 깃드는 것이 허무주의다. 그리고 쾌락이다. 남경 학살, 백주의 난행은 일본군의 전략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의 여실한 참극, 절망 없이 그 짓을 했을까.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또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추구야말로 문화의 시발점인 동시에,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박경리, <일본산고>. 이하 큰따옴표는 모두 같은 책 인용.)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원시적인 사회를 담고 있다고 느꼈다. 로망 포르노 (다시 말해 포르노) 연출로 감독 생활을 시작한 소마이 신지라는 감독에게서도 박경리 작가가 비판한 지점이 느껴졌다. "감각만 살아나서, 마치 달팽이처럼 축소되고 밀폐된 채 끈적끈적한 점액을 남기며 기어다니는 이런 형국에 불어닥친 세계의 바람" 앞에서 "기능 면으로는 재빠르게 받아들여 전환할 수 있었겠지만 의식세계는 일대혼란"이었던 나라의, 말초신경만 남아 버린 허무주의.
이 영화에서의 청춘은 결국 허무주의로 치닫는다. 1985년 작품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에로·구로(그로테스크)·난센스·칼과 무의미, 그것은 칼의 세계에서는 필연적인 것으로 황무지와도 같은 의식을 여실하게 드러낸" 유행이 1920년대의 것이었다면, 일본 문화에서 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진 작품 쪽이 더 보고 싶다.
아름다운 카메라의 움직임, 아름답지 않은 사상의 부재. 그곳에서 나는 내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절감한다. 나는 "인생은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며 보다 고통스럽게 무량한 우주의 비밀을 헤치고 나가는 과정"이라는 박경리 선생님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저는 일본의 민족성을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 스스로도 희생자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체제입니다. 체제가 뭐냐를 물어야지요."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본다.
누가 언제 청춘이 반짝반짝 솜사탕처럼 아름답기만 하다고 했나. 죽고 싶은 순간도 있고, 미완성의 감정들이 나를 추동해서 아주 기묘한 짓거리들을 하며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지만... 이 정도의 귀결이 보편적 청춘인가? 나와 주변인의 청춘에 그런 허무주의가 없었음이 단순히 우리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래 뭐 그랬나보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비릿한 것만이 청춘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야말로 진짜 청춘이고 다른 반짝거리는 영화들은 마치 가짜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커팅된 보석의 일면처럼 다양한 청춘이 있다. 이 영화는 그 중 하나를 너무나 잘 포착했을 뿐이다. 에너지는 아름다웠으나, 그 에너지 뒤에 어떤 사상의 결여가 있는가 생각하면 이 영화가 편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마지막 꼭 해두고 싶은 말은 결코 일본을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라는 박경리 선생님의 말을 생각하며 역시나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거 내 청춘 아니에요.
Relative contents
-
- 사랑은 결국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
난 두드러기가 있다. 자세히 말해보자면 '콜린성 두드러기'라고 한다. 다들 아우터 입는 4월에 나만 반팔에 얇은 겉옷을 입는다. 이 간지러움은 시도 때도 없이 겹친다. 가령 버스를 타고 갈 때나 매운 짬뽕을 먹을 때도 몸이 불편하다. 안그래도 잘 타는 더위 두드러기까지 겹치면 두배로 고통스럽다. 겨울에는 더울 일이 없어서 괜찮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히터를 빵빵하게 틀면 꼼짝 없이 몸이 간지러워진다. 그럼 한 3분동안 밖에 나가있어야 한다. 얼핏보면 일 땡땡이에 가까운 모습이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근데 이건 나만 그러지는 않을거다. 사람마다 말 못할 일상생활의 애로사항은 다들 있다.
이게 성격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도 두드러기때문에 운동하는게 한동안 싫을 때가 있었다. 이건 내 소심했던 모습과 관련이 있다. 몸이 간지러워도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서 병원에 안 갔다. 콜린성 두드러기 자체가 약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게 큰 의미는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만큼의 찜찜함은 남아있다. 그 때 미리 잡았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미리 내가 겪는 불편함에 말하고 다니던 사람이었으면 20대 중반의 내가 살기가 편했을까. 지금이야 이 문제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말하고 다닌다. 인터넷에 '온도 알레르기'라고만 검색해도 관련정보가 쉽게 나오기 때문에도 있지만 이게 남에게 피해주는 피부질환이 아닌게 큰 이유다. 따지고 보면 키가 작은것보다 훨씬 더 내 삶에 지장을 주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사는 수밖에. 나름 살다보며 느낀건 나를 이해해야 남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병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지는 오래 됐으니 이제 타인을 이해하며 살면 될 것 같다. 별거 아니라면 별게 아니고 심각하면 심각한 이 애로사항에 일상생활에 난감함이 많다. 에잉. 이 리뷰를 쓰면서도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왼쪽 팔로 오른쪽 팔꿈치 쪽을 벅벅 긁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이게 그냥 나인가보다. 안그래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못하는 나는 이런 사소함 하나때문에 점점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있다. 인정해야 한다. 나는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란걸.
<펀치 드렁크 러브>는 이해와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배리는 여자 형제가 7명이나 있다. 직업은 그냥 사업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이다.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20, 30대 남자 중 한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크게 틀린건 아니다. 가족이 많긴 하지만 또래 남자들과 유별나게 다른 건 없다. 그에겐 문제가 있다. 인생의 재미를 못 찾고 영 기를 못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도 부하 직원이 주인공 배리를 쪼는 모습이 나온다. 한 20분쯤 지나면 배리가 여자 형제들의 집들이에 가는 장면이 있다. 다 큰 베리지만 누이들은 베리를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 같다. 여자 형제 중 한명이 배리를 보자마자 느닷없이 '너 게이니?'라고 묻는다. 이 뿐일까? 비듬 많다는 지적부터 뜬금없는 망치 이야기까지 배리는 누이들에게 사람이 아니라 장난감 완구같은 느낌이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엄청 화가 나겠지? 배리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주인공은 느닷없이 유리창을 깨부순다. 배리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냥 소심한 남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주인공은 분노조절이 서툰 사람이었고 이 덕에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외로운 주인공은 말동무를 찾는다. 신문을 보다 찾은 말동무 프로그램(?)에 전화를 건다. 처음엔 사는 곳도 속이고 이름도 속이지만 결국 다 들통난다. 말동무 프로그램의 사장 트럼벨은 겉으로는 가구점을 운영하는 아저씨지만 사실 조폭 사장님이다. 트럼벨은 배리와의 통화내용을 바탕으로 조금씩 조금씩 배리의 신상정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트럼벨의 추적기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이어지기 전까지 영화는 남, 녀 주인공의 러브스토리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은 서로를 알아가며 점점 변해간다. 레스토랑에서 대화만 했을 뿐인데 서로의 벽을 넘어 키스한다거나, 푸딩 마일리지로 비행기를 산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며 '이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싶은 영화를 보여준다. 이런 클리셰를 비튼 플롯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감이다. 공감을 위해 캐릭터를 뒤집고 연출이 그걸 뒷받침하게 도와줬다.
우리라고 다를까?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니다. PTA는 연출법으로 플롯과 장면 연출이 절묘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 핵심 주제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닌 우리들'을 연출하기 위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만든(내가 생각하는) 중요 포인트 몇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주인공 배리에 대한 성격 제시다. 배리는 집들이 장면 처음에 이상한 말을 듣고 바로 화를 내지 않는다. 그 대신 감독은 배리가 무언가를 참고있고, 분노조절이 서툴러 사고를 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집들이 모임에서 배리를 비추는 카메라가 고정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감독이 배리가 지금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런 연출을 짰다고 생각한다. 또 화면 구도상에서 주인공이 딱 정가운데에 있다. 여자주인공이 함께 있는 경우나 트렘벨과의 대면같이 영화의 주요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 혼자서만 장면에 나온다. 나는 이것이 영화가 배리가 정신적으로 불안함에 처할 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뭐 이뿐만 아니라 두 주인공의 의상도 그렇다. 파란색 수트를 입는 주인공과 빨간색 옷을 입은 여자주인공은 빨간색과 파란색처럼 별개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서로에게 솔직해지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징에 의한 내용전개는 하나 더 있다. 도입부부터 와장창 보여주는 피아노는 사랑에 대한 간접적인 은유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갑자기 주운 사랑이지만 아무 음이든 눌러도, 그러니까 함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게 사랑이라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는 셈이다. 영화는 보편적인 로맨스코미디 장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 그리고, 이런 연출법과 플롯전개를 통해 우리의 삶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사랑이야기를 보여준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 문단을 쓰면서 느꼈다. 단어 몇글자만 바꾸면 배리의 이야기가 내가 된다는 것 말이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나의 공감를 샀다. 이건 내 웃어 넘길만한 짝사랑 흑역사와 어떤 목표를 향한 전진 둘 다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전자의 경우를 보자. 10대 때 나는 단순히 누군가를 예뻐서 좋아했던 적이 있다. 사진과 실물이 차이가 나는 여학생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사진을 보면서 '쟤 귀엽다'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다. 고3때는 걸그룹 마마무의 팬이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마마무를 위해 음원 플랫폼을 처음으로 정식 결제했다. 유투브로 마마무 나오는 영상은 다 찾아볼 정도로 덕후였다. 마찬가지로 굳이 이성을 좋아한다는 관점이 아니어도 된다. 누군가를 존경하게 될 때, '이 사람이 이래서 멋있어'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라고 생각하게 되면 나만 손해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체고 나에게 잘 보일 이유가 단 조금도 없다. 멋지면 그냥 그 사람이 멋있으니까 따르게 된다. 이는 내 삶의 많은 순간들과 비슷했다. 누군가를 멋있다고 따르게 될 때도 아니면 발로 이불 뻥뻥 차는 흑역사를 만들때도 나에겐 이유가 필요 없었다. 무언가에 사랑에 빠지면 나는 거진 대부분 미친놈이 됐다. 나는 이래서 이 영화를 통해서 이런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PTA는 이 영화에 나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공감을 받을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 같다. 누구나 자기 기를 죽이는 요소가 있을 것이고 또 둘이 함께이기 때문에 강해졌던 지점이 있었을 테니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명제를 아주 쉽게 받아들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각본과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사랑이 찾아오겠지? 꿈꾸게 되는 영화였다.
-
- 자선이 아닌 연대
<나의 올드 오크>(2023)는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4), <미안해요, 리키>(2019)에 이은 영국 북동부 배경 3부작의 마지막 영화다. 기존 무대였던 뉴캐슬에서 더럼의 어느 폐광촌이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지역으로 옮겨간 영화는 마을의 유일한 펍 '올드 오크'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과 난민 이주자들 간의 갈등을 다룬다. 켄 로치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잠정적 은퇴를 선언한 만큼 빠른 판단일 수도 있겠으나 이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마지막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영화에서는 전작들보다도 직접적이고 직선적인 화법이 두드러지며 그와 대조되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주는 대비가 인상적이다.
소란스러운 다툼 소리를 배경으로 흑백 사진이 연속되는 오프닝부터 영화에서 카메라의 존재감이 종종 눈에 띈다. 시리아 난민들이 버스를 타고 와 마을에 내리고 마을 주민들은 이를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그러던 중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자신들을 찍던 야라를 발견하고, 그녀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몰래 꺼내 마음대로 사진을 찍다가 떨어뜨리면서 카메라는 망가트리고야 만다. 꽤나 강렬한 이 오프닝 씬은 카메라의 기능에 대해 상기시키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목격과 기록의 카메라. 피사체는 촬영자의 시선에서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담긴다. 오프닝에서 연속된 사진과 다투는 소리를 통해 우리는 야라의 눈에 비치던 당시 상황을 상상하며 야라의 시선에 좀 더 기울어 영화를 보게 된다.
마을의 유일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는 마을 사람 중에서도 난민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펍에 손님으로 와 그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말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나서지는 않는다. 단지 작은 단체 안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같은 것을 챙겨주고 관심 가질 뿐이다. 선한 소시민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일부를 제외하곤 그들 대부분은 난민들을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보며 적대시하지만 특별히 그들을 괴롭히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괴롭히는 이들을 막거나 크게 나무라지도 않는다.
그랬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난민들을 경계하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공적 대화의 공간이자 쉼터였던 올드 오크가 난민들에게도 열리게 되면서부터다. 이전까지는 TJ를 비롯해 난민들을 챙겨주는 이들이 탐탁지 않던 이들이었으나 그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TJ가 자신들에게는 빌려주지 않던 펍의 내부 공간을 난민들과 함께하는 행사의 공간으로 사용하면서 이에 반기를 들고, '올드 오크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것이 마을의 뜨거운 화두가 된다. 노동자의 입장에 대해 주로 찍던 사회주의 감독이 난민과의 갈등 속에서 또 다른 약자를 차별하는 노동자의 양상을 그려낸 것은 다소 이례적인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난민 집단 간의 이분법 갈등 구조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켄 로치 감독은 비록 차별하고 적대하는 이들일지라도 결국 잘못된 선택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들의 모습을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정부의 난민 수용지는 왜 하필 우리 마을이어야 하며, 우리도 살기 힘든데 당장 나와 관련도 없는 난민을 왜 도와야 하는지 불평하는 이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난민 수용에 대해 찬반의 입장이 갈려 토론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에는 결국 이들의 입장과 사정까지도 이해하도록 만든다. 보통의 사람이 문제에 부딪힐 때, 그 구조를 따라가며 전체를 파악하기란 힘들기 때문에, 내 삶조차 여유가 없어 타인에게 눈 돌리기란 어렵기 때문에 구조의 모순을 바라보기보다 당장 눈앞의 걸림돌을 비난하는 게 쉽다.
이런 모순은 TJ의 개 마라와 관련된 일화와도 상통한다. 마을 사람 중 누구도, 심지어 TJ까지도 그런 결말이 벌어질 걸 과연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했을까. 흥분했을 때는 주인조차 통제 불가능한 대형견을 불완전한 목줄 하나 채워 돌아다니는 시한폭탄 같은 상황. 이를 보며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더 안전한 방식으로 개를 기르는 것이 견주의 의무는 아니다. 국가의 권력과 체제 아래에서 국민은 상대적 약자로서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상승하는 물가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최저임금, 고용난 등의 최악의 환경에서 약자들은 그들 간 우위를 겨루며 자신보다 취약한 약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며 분풀이를 한다. 물론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반복될 때는, 어느새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고 방치하다시피 한 그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차별과 혐오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며 이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화해의 방법은 '연대'다. 해결책이 당장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게는 연대와 공감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선한 인간성이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다. 용기를 가지고 함께 연대하며 저항하기.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쉽게 행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감독의 전작들도 사회상을 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이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사회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다가오면서도 소위 말하는 치트키 장면은 적은 감이 있다. 당장 앞선 두 영화의 가슴을 울리던 장면들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누군가는 이 영화를 충분히 밋밋하게 느낄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책이 누군가에게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사회 영화의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를 지킨 켄 로치 감독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영화는 그가 마지막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여전히 남아있는 연대의 가능성을 다시금 되돌아볼 계기가 될 것이다.
-
- 집이 없을 때 불안감이 만드는 모습
우리 사회에서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살아가는 공간만 의미하지 않는다. 집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투자의 대상이 되었고 부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으로 재산을 늘리려 하고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한참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부터 집값은 빠른 속도로 뛰었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하나 마련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돈을 벌어 저축해야 했다. 그렇게 저축해서 집을 사는 기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길어져만 갔다. 그렇게 집에 대한 인식이 투자의 수단으로 변하면서 절망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집 한 채를 사기도 버거웠다. 집값이 오르면서 전셋값과 월세값도 늘어났다. 그렇게 집을 소유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인식 전환에도 불구하고 집은 우리가 가장 편하게 쉬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집을 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집을 사지 못하더라도 전세나 월세로 지낼 안정적인 공간을 마련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더 심각한 절벽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곰팡이로 가득한 집에서 생활해야 하거나 아주 작은 평수의 공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공간에서 아이를 키우고 가족과 살아가야 한다면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좀 더 나은 공간으로 가고 싶지만 당장은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까. 이들은 매 순간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보증금 사기로 살 집을 잃어버린 부부의 이야기
영화 <홈리스>는 보증금 사기를 당해 집이 없는 처지에 있는 한결(전봉석)과 고운(박정연)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보증금을 잃은 후 한순간에 갈 곳을 잃었다. 찜질방에서 숙박을 해결하지만 매일 쉴 공간을 찾기 벅차 보인다. 그들에게는 갓난아이가 있다. 그래서 이 가족에게는 집이 필요하다. 당장 생활비도 부족한 그들에게 보증금이 있는 월세집은 바로 들어가기 어렵다. 초반에 영화가 비추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 우울해 보인다. 그래도 한결은 배달 일을 하며 하루하루 일당을 받고, 고운은 아이를 케어하며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들은 도움받을 가족도 마땅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제도적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마땅치 않다.
한결과 고운 부부의 고민은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겪는 주거 문제를 좀 더 극적으로 영화에 담겼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조금씩 최악의 상황으로 빠진다. 사기를 당한 상황에서 아이가 다친다. 안 그래도 돈이 부족한데 돈이 필요한 일이 자꾸만 생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려 겨우겨우 하나의 상황을 해결하고 나면 그다음에 또 다른 문제가 그들의 앞에 나타난다. 그 상황에서 그들에게 집이라는 안락한 공간은 도저히 꿈꿀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꿈꾼다. 하지만 여전히 집값은 높고 은행 대출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자신만의 집을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좀 더 공격적으로 투자를 시도한다. 코인이나 주식에 들어간 돈이 불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한 순간에 그 돈이 없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대부분의 자산을 잃은 그들에게 결혼이나 출산은 먼 일이다. 만약 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다면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영화 <홈리스>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들이 부정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자신들 만의 집을 만들 수 있을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영화 속 주인공들은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그 집에 대한 비밀이 영화에 미스터리 한 느낌을 만든다. 그들이 그 집에서 아이와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는 내내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불안감은 관객의 마음도, 주인공들의 마음도 오염시킨다. 이들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하지 못할 행동을 하나씩 하기 시작한다. 남편인 한결 뿐만 아니라 부인인 고운도 당장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건 합법적인 선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집은 생존을 의미하고 그 생존을 위해 마음속에 자리한 '도덕과 상식'을 포기한다.
집이 없다는 불안감을 부부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영화
이런 주인공들의 선택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것 이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은 궁지에 몰렸다. 이 가족이 꿈꾸는 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영화의 말미 이들이 할머니의 빈 집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주 평범한 가정처럼 편안하게 보인다. 한결과 고운은 그들의 선택의 끝이 어떤 것일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충격적인 선택을 할 때마다 무척 마음이 무거워 보인다. 아이에게 자신들의 고통을 전달하지 않고 키우고 싶은 이들의 욕심은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그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한결을 연기한 배우 전봉석과 고운을 연기한 배우 박정연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최선을 선택을 하지만 한가닥 남은 양심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무척 잘 표현해냈다. 영화에서 이들이 고민하고 절망하는 순간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절망적인 상황을 해결하려고 뛰는 한결의 모습, 할머니 집을 자신의 집으로 만들려고 할머니의 집을 버리며 멍한 표정을 짓는 고운의 모습은 이들의 절망감을 무척 잘 전달하고 있다.
영화 <홈리스>는 21회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CGV 아트하우스상을 수상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는 일처럼 현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사지 못해 절망하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필요한 주거 공간은 가지고 있는 돈에 비례해 그 등급이 나뉜다. 혼자라면 어디에서라도 살 수 있겠지만 아이가 있다면 어느 정도 좋은 환경이 뒷받침되는 곳을 택해야 한다. 여기에 집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사건들이 무작위로 찾아온다. 어떤 방법으로도 구할 수 없는 주거공간에 대한 고민이 이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투자용으로서의 집도 요원하지만 주거공간으로서의 집에 다가서는 것도 무척 쉽지 않다. 영화 속 한결과 고운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마치 집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의 절망감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1개월 구독 체험 행사중입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아래 링크에 댓글로 남겨주시면 한 달간 뉴스레터를 보내드립니다 :)
https://brunch.co.kr/@moviehouse/545
-
- 영화에서 마주친 연극
영화와 가장 비슷하고도 다른 예술,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에디터는 가장 먼저 ‘연극’이 떠올랐는데요.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도 연극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자주 보이곤 합니다.
무대 위를 오르는 배우를, 글을 적어내는 작가를, 극을 완성시키는 연출을 비추기도 하죠.
그럼, 영화 속 연극을 마주하러 떠나볼까요?
-
- 메이저 독립영화제 선댄스 출신 띵작.zip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로 여겨지는 선댄스 영화제는 매년 1월, 미국 유타주에서 개최되는 축제 같은 영화제입니다. 선댄스 영화제는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이자, 감독으로 유명한 '로버트 레드포드'가 이름 없는 한 영화제를 후원하면서 시작되었는데요. '선댄스'(Sundance)라는 이름은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에서 레드포드 본인이 맡은 배역의 이름을 본따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인들의 '축제'처럼 여겨지던 '선댄스'가 세계적인 영화제로 급부상한 것은 1989년, 선댄스 출품작이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부터인데요. 이후, 코엔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등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배우 및 감독들을 배출해내며 신인 감독의 등용문으로 불리기도 하는 영화제입니다.
이렇듯, 많은 씨네필들에게는 선댄스영화제 출품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데요. 작년 한 해 국내외를 크게 들썩인 작품 <미나리> 역시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으로, 국내 관객들에게 '선댄스' 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켰죠.
올해도 어김없이 많은 '선댄스' 출신 작품들이 국내 극장을 찾아준다고 하는데요! 과연, 선댄스 출신 작품 중 국내 관객들에게 친숙한 작품은 어떤 작품이 있으며, 올해 개봉하는 선댄스 출신 기대작으로는 어떤 작품들이 있을지! 지금부터 같이 한 번 살펴볼까요
잇츠 CINE PICK!!<저수지의 개들>, 1992년 제8회
범죄, 드라마 | 미국 | 99분 | 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 쿠엔틴 타란티노 | 출연 : 하비 케이틀, 스티브 부세미, 쿠엔틴 타란티노, 팀 로스씨네pick : 비디오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시절 하루 종일 비디오를 보았다는 소문난 영화덕후 '쿠엔틴 타란티노'는 1990년,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대본 고료로 16mm 흑백판 <저수지의 개들>을 제작하고자 마음먹지만, 그의 시나리오에 매료된 '하비 케이틀'의 제작 지원과 출연까지 얻어내게 됩니다. 마침내 92년 선댄스 영화제에 그의 작품을 선보인 이후, 전 세계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영화를 홍보한 타란티노 감독은 이후 <펄프픽션>으로 곧바로 '명감독'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요. 하지만, 정작 92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작품은 따로 있으니! 그 작품은 바로 <인 더 수프>?! <저수지의 개들>에도 출연한 스티브 부세미와 세이무어 카셀, 스탠리 투치, 제니퍼 빌즈에 짐 자무쉬까지 화려한 출연진 속, 눈에 띄는 인물이 또 있습니다. 선댄스 띵작 <미나리>의 일꾼 할아버지 역의 '윌 패튼' 배우! 이쯤 되면, 그는 독립영화의 역사 그 자체가 아닐까요?
<500일의 썸머>, 2009년 제25회
코미디, 드라마, 멜로/로맨스 | 미국 | 95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마크 웹 | 출연 : 조셉 고든 레빗, 주이 디샤넬
씨네pick : 750만 달러의 제작비로 전 세계에서 6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작품이자, 국내 로코 추천 모음에 절대 빠지지 않는 영화 <500일의 썸머> 역시 독립영화로써 '선댄스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를 가졌습니다. 10년 넘게 회자되며 몇 차례 재개봉까지 이끈 영화는, 당시 호평과 함께 '골든 글로브'에 노미네이트되었고, 마크 웹 감독 역시 소니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감독으로 낙점되며 상승세를 탔습니다. 2009년 선댄스에는 <500일의 썸머>의 '조셉 고든 레빗'이 연출한 24분짜리 단편영화 <스팍스> 또한 출품되었는데요. 그 외에 눈에 띄는 작품으로는 바로 한국 다큐멘터리 <워낭소리>가 있습니다. 이충렬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는 개봉 당시 290만 명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하며,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특성과 독립 영화의 한계를 극복하며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하였는데요. <워낭소리>는 국내 다큐멘터리 작품 최초로 선댄스 다큐멘터리 부문 본선에 진출한작품이기도 합니다.
<위플래쉬>, 2014년 제30회
드라마 | 미국 | 106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데미언 샤젤 | 출연 : 마일즈 텔러, J.K. 시몬스씨네pick : 선댄스 영화제와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처음 공개된 이후, 전 세계 씨네필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독립영화계의 전설 같은 영화입니다. 데미언 샤젤 감독이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든 <위플래쉬>의 단편이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과 함께 미국단편 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투자 지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요. 그리고 <위플래쉬>가 아카데미 시상식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이후, 본인이 진정으로 만들고 싶었던 영화 <라라랜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위플래쉬>는 2014년, 선댄스 심사위원대상은 물론, 관객상까지 수상하며 평론가부터 대중까지 모두를 사로잡았는데요. 그해 선댄스에서 주목받은 또 다른 '음악' 영화로는 에밀리 브라우닝 주연의 <갓 헬프 더 걸>이 있습니다. 펀딩을 통해 12만 달러의 모금에 성공하며 제작된 <갓 헬프 더 걸>은 선댄스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하며 베를린 영화제에도 초청된 작품입니다.
<팜 스프링스>, 2020년 제36회
코미디, 멜로/로맨스, 판타지 | 미국 | 90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맥스 바바코우 | 출연 : 앤디 샘버그, 크리스틴 밀리오티, J.K. 시몬스씨네pick : 역대급 띵작을 배출해낸 '선댄스'에서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로도 잘 알려진 배급사 '네온'에 2,250만 달러에 판매되며 선댄스의 최고 판매가를 경신한 영화 <팜 스프링스>가 올 8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요. 타임루프 코미디 <팜 스프링스>는 북미 OTT 플랫폼 'Hulu'에서 공개된 이후, <기생충>의 기록을 넘어 역대 훌루 영화 최고 스트리밍 기록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선댄스 이름에 걸맞는 코믹 로맨스 영화 <팜 스프링스>는 멋진 결혼식이 열리는 팜 스프링스의 어느 리조트에서 항상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세상에 갇히게 된 남녀의 예측불가 코믹 로맨스를 그리는데요. TV 시리즈 "브룩클린 나인나인"의 '앤디 샘버그'와 앞서 소개한 <위플래쉬>의 교수님 J.K. 시몬스가 출연하며 올여름 더위를 신박하게 날려줄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같은 해 심사위원대상은 <미나리>에게 돌아갔지만, 수상과 흥행은 무관하다는 선례가 있었기에 기대해볼 만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8월 19일, 올여름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줄 영화
<팜 스프링스>의 개봉을 기다리며,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
- <호크아이>의 페이소스를 다방면으로 밀어붙이는 뚝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클린트 바튼(제레미 레너)'은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하는 뉴욕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중 과거 범죄자들을 죽이고 다녔던 과거의 자신, '로닌'이 목격되었다는 뉴스를 접한다. 이에 클린트는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가짜 로닌을 찾아 나서고, 불법 경매장에서 우연히 로닌 슈트를 갖게 된 22살짜리 궁수 '케이트 비숍(헤일리 스타인펠드)'를 만난다. 본래 클린트는 슈트를 회수한 후 가족에게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케이트가 목격한 범죄 현장 속 로닌과 관련된 미스터리가 끝내 그의 발목을 잡는다. 한편 아버지를 죽인 로닌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마야(알라콰 콕스)'의 조직인 트랙수트 마피아와 나타샤 로마노프의 복수를 하려는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는 점차 클린트를 위협해오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가족에게 돌아가는 대신 다시 한번 히어로 호크아이가 되기로 결정하고, 평소 호크아이를 동경해오던 게이트와 파트너가 되어 새로운 임무에 나선다.
서른 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를 제작한 MCU에는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슈트를 입거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능력을 지니거나, 아예 신이나 다름없는 수많은 히어로가 공존한다. 그들에 비하면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활과 화살만 들고 히어로 활동을 하는 호크아이는 너무나도 약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어벤져스> 1편부터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이르기까지 원년멤버로서 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클린트 바튼이라는 평범한 인간이 호크아이라는 히어로로 활동할 때 느껴지는 페이소스(pathos)에 있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보자. 도저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동료들마저 울트론을 대적하기 버거워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가족을 이룬 히어로인 호크아이는 어벤져스의 일원이었기에 가족을 뒤로하고 활과 화살만을 든 채 전장으로 나서야 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가족을 잃고 범죄자를 죽이고 다니는 로닌이 되었다가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시간여행에 자원하는 <엔드게임> 속 호크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즉, 특수한 능력이 없더라도 목숨이 위험한 전쟁터에 나아갈 수 있는 정의감과 용기라는 히어로의 미덕과 자격을 희생을 감수하고 온몸을 던져 보여주는 것이 호크아이의 힘이자 정체성이고 매력이었다.
이러한 호크아이의 캐릭터성은 디즈니+에서 공개된 MCU의 네 번째 드라마 <호크아이>에서도 든든하게 극의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 무엇보다도 리빌딩이라는 MCU 페이즈 4의 대전략이 페이소스라는 캐릭터성을 통해 영리하게 실행된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페이즈 4의 작품들은 대체로 기존에 미처 풀어내지 못한 히어로의 서사를 정리하고,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 또는 후계자들을 소개하며, 그 과정에서 다양성의 관점을 녹여내고자 노력 중이다. 이때 클린트의 페이소스는 <호크아이>가 페이즈 4에 속한 작품으로서 이 모든 역할을 해내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당장 드라마 속 호크아이의 이야기는 눈물겹다. 지구와 우주를 구한 영웅이지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감정은 자부심이나 뿌듯함도 아니고, 다른 동료들에 비해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도 아니다. 그저 극심한 상실감이다. <어벤져스>의 뉴욕 전투를 묘사한 뮤지컬 '로저스'를 보더라도 호크아이는 스스로를 희생한 나타샤 로마노프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처음으로 어벤져스가 결성된 현장의 기념비 앞에서도 그는 나타샤와 다른 동료들의 희생에 빚을 지고 있다며 눈물을 쏟는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죽거나, 은퇴했거나, 극심한 부상을 입었거나, 우주로 떠나버린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어벤져스의 일원으로서 그 무게감을 온전히 지탱해야 한다.
드라마는 이러한 호크아이만의 페이소스를 다방면으로 확장시키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후계자이자 동시에 파트너인 케이트 비숍과의 관계 형성이 대표적이다. 뉴욕 전투 도중 호크아이 덕분에 목숨을 건진 후 호크아이를 아이돌로 여겨온 케이트. 우연히 로닌의 슈트를 갖게 된 그녀는 자신이 목격한 범죄 현장의 미스터리를 풀어내기 위해 로닌 슈트를 매개로 클린트와 동행하게 되고, 각자의 이유로 클린트에게 복수하려는 마야, 트랙수트 마피아, 그리고 옐레나에게 쫓겨다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케이트는 그녀를 보호하고 또 범죄에 맞서기 위해 가족과 함께하는 수년만의 크리스마스도 뒤로 한 채 임무에 나서는 클린트로부터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던 히어로가 갖추어야 할 자격을 배운다. 그래서 그녀를 둘러싼 여러 위협과 복잡한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임무에 나설 수 있겠냐는 클린트의 질문에 케이트는 다음처럼 답한다. "오직 날 수 있고 레이저를 쏴야만 영웅이 되는 건 아님을 당신이 보여줬으니까요. 어떤 대가가 따르든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누구든 영웅이 될 수 있다고요". 이렇게 클린트의 페이소스가 보여준 히어로의 자격이 케이트 비숍에게도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면서 드라마는 깔끔하게 세대교체를 진행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클린트의 슬픔은 영화 <블랙 위도우>의 쿠키 영상에서 암시된 옐레나의 갈등이 해소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 마블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클린트와 옐레나는 나타샤라는 가족을 잃었다는 아픔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단지 클린트의 아픔은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나타샤를 끝내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모습으로, 옐레나의 아픔은 나타샤의 죽음을 클린트의 탓으로 돌리는 복수심의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옐레나는 과거 나타샤와 자신의 추억을 클린트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와 자신이 같은 처지에 놓여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둘 간의 오해와 갈등도 일단락된다.
더 나아가 다양성의 관점에서도 <호크아이>는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데, 구체적으로는 '다름'의 의미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준다. 어벤져스 활동으로 인해 왼쪽 청각을 거의 상실한 클린트는 보청기 없이는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다. 이때 드라마는 클린트의 청각장애를 잠시나마 체험할 수 있도록 연출한다. 보청기가 없는 클린트의 관점에서 주변 소음이나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저 웅웅 거릴 뿐이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케이트의 도움 없이는 집에서 걸려온 막내아들의 전화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클린트의 모습은 연민을 자아낸다.
이러한 클린트의 서사는 빌런인 마야가 청각장애에 접근하는 방식과 대조를 이루기에 더욱 흥미롭다. 마야는 어려서부터 일반 학교에 다니며 청인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입 모양을 읽거나 순간적인 표정의 변화를 포착해 청각정보의 빈자리를 시각정보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대한다. 이런 마야의 관점에서, 청각의 부재는 결손이나 단점이 아니라 그냥 다른 것에 불과하다. 전투 도중 보청기를 잃고 허둥대는 클린트에게 “당신은 기계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청인의 상태가 정상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장애와 비장애는 어떤 위계도 없이 그저 '다르다'라고 인식할 수 있을 때 가능한 표현이다. 이렇게 호크아이의 정체성, 곧 그만의 페이소스를 서로 대비되는 농인의 시점과 이야기로도 확장시키면서 <호크아이>는 지난 십 년간 한 캐릭터를 착실히 빚어온 MCU의 저력을 증명해 보인다.
다만 중심 주제로부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인상적인 스토리텔링과 별개로, 슈퍼히어로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호크아이>는 기대 이하이 액션이라는 결정적 문제를 노출한다. 두 히어로의 특출 난 궁술 실력과 그에 준하는 격투 실력, 그리고 특수 화살의 다양한 기능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액션씬이 지나치게 비슷한 장면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트랙슈트 마피아를 다리 위나 주차장, 빙판 위로 모두 모아놓고 특수 화살의 효과를 이용해 다수의 적을 한 번에 처치하는 식의 장면이 연이어 등장하다 보니 드라마가 말미로 향할수록 액션신은 크게 기대되지 않는다.
후반부에 캐릭터의 서사나 그들의 갈등이 갑자기 마무리되는 것도 단점이다. 특히 주인공 일행에 비해 다소 빈약하게 묘사되었던 빌런들의 이야기가 빈약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데어데블을 MCU로 합류시켰듯이 <호크아이>도 에코의 삼촌이자 넷플릭스 드라마 <데어데블>의 빌런이었던 킹핀을 등장시켰는데, 킹핀이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퇴장하다 보니 그 의미가 퇴색되는 감이 있다. 다만 디즈니+에서 공개된 다른 마블 드라마들도 전반적으로 빈약하고 성급한 마무리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이는 <호크아이>만의 문제로 보기도 애매하다. 그렇기에 MCU 작품이라는 한계만 감안할 수 있다면, <호크아이>는 여전히 그 안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깊이와 무게감 있는 이야기로 무장한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캐릭터의 정체성과 서사에 깃든 힘을 일깨우다
-
- [주토피아]닉 그자체 정재헌 성우님의 이야기!!닉과 주디는 사랑일까?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씨네마사지 인스타그램 구독
??https://www.instagram.com/cine_massage/
EP.29
꿀보이스 정재헌 성우님과 함께하는 주토피아 리뷰 첫번째 시간!
출연
황보 라이언 정재헌
-
-
- 넷플릭스 <우먼 인 윈도>
[2021년 5월 14일, 넷플릭스 공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세상은 창문 너머로 바라봐야 안전하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에이미 애덤스). 그녀가 건넛집에 이사 온 러셀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목격한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지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광장 공포증으로 집에서만 지내는 정신과 의사. 그녀는 건넛집에 이사한 가족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창문 너머 잔혹한 범죄를 목격한다. 진실을 찾으려는 그녀의 집착, 그 끝은 어디일까.
-
- 영화 <크림> 메인 예고편
줄거리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매일 눈물로 지새우던 비련의 여인 ‘도라’.
설상가상 삶의 유일한 낙인 디저트 카페 ‘크림’까지 잃을 위기에 처한다.
카페를 되살리기 위해 타개책으로 ‘가족 사업 대상 지원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도라’는 치과 의사 ‘마르시’, 이웃집 꼬마 ‘라시카’와 계약 가족을 급조해
상금을 획득하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전 남친과 그의 부인이 경쟁자로 등장하는
웃픈 상황 속에서 ‘도라’는 ‘마르시’에게 점점 끌리기 시작하는데…
우리의 달콤한 사랑이 이뤄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