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2024-08-19 21:13:35
내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당신께
임선애, <세기말의 사랑>
<헤어질 결심>과 <미쓰 홍당무> 그 사이 어드메를 노니는 영화가 2024년에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재소환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그 전에 그런 혼종적인 게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레 존재할 수 있을까?
포스터만 보고는 노인 성폭행 피해를 다룬 <69세>의 임선애 감독이 묵직하고 깔깔한 전작에 비해 산뜻하고 푸근한 사랑 영화를 만들려던 줄로만 알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당도한 것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밀도 높은 감정의 홍수다. 둘러가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아서 선명도가 아주 높은 서사와 대사들, 박찬욱이나 이경미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한 스토리텔링, 천재적인 리듬감, 두 눈의 연기만으로 일렁이는 마음들에 함께 올라탈 수 있게 해주는 매력적인 배우들까지. <세기말의 사랑>은 정말이지 감탄밖에 안 나오는 영화다. 그리고 임선애 감독은 단순 '유망주'로만 불리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아깝다. 연차만 낮을 뿐 (한국에서 여성 감독의 권위가 아직 없다는 것은? '그런' 감독의 '이런' 영화에만 유독 젠체하고 가르치려 드는 이들의 저평가를 몇 년이고 버텨야 한다는 의미) 이미 한국 영화계 거장의 반열에 성큼 올라설 수 있는 포텐셜을 다 갖추었기 때문. 윤가은, 이옥섭, 김초희에 이어 이지은과 임선애를 차세대 한국 영화의 희망으로 믿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정말로 간만에 너무 좋은 사랑 영화였다(지금의 여성 관객에게 국내 제작+로맨스 영화가 좋게 다가오기란 거의 바늘구멍 뚫는 일에 가까운데도). 그리고 이때 사랑은 영미와 도영 사이 이상하고 풋풋한 긴장, 유진과 영미의 아웃사이더 연대를 거쳐와서, 기어이 도영과 유진의 눈물로 완성되는 삼각관계 속 연인 간의 애달픈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유전병 발현으로 목 아래 몸이 모두 굳어 혼자 힘만으론 꼼짝할 수도 없는 조유진에겐 친한 푼수떼기 동생 오준과 가출한 조카 미리와의 투닥대는 사랑이 있다. 못나고 외롭고 놀림받기 일쑤인 데다 튀어나온 앞니를 목도리 사이에 푹 파묻고 다녀 '미쓰 홍당무' 양미숙을 연상시키는 회계과장 '세기말 Miss Apocalypse' 김영미에겐... 원래는 아무도 없었다가, 유진과 오준 그리고 도영이 생긴다. 또 영미의 실패한 (줄 알았던) 사랑은 도영만을 향하지 않으며, 부모 잃은 그애가 평생 돌보았던 큰엄마와 그 큰엄마의 짝사랑이던 사촌오빠가 보답해주지 않은 가족 간의 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토록 다양한 사랑이 영화 내내 말 그대로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며, 그 사랑들은 자주 내 눈과 뇌가 성급히 직조했던 적당한 상식선의 예상을 배반하기도 한다. 미리의 친아빠와 친엄마가 누구인지 너무나 갑작스럽게 툭 던져지던 씬처럼. 유진의 명품 구두가 왜 모두 '짭'이었는지, 누가 유진의 장애 '덕'을 봤는지, '지랄 1급'이라던 유진에게 들러붙어 있었던 처연한 체념의 그림자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까지, 역시 예고도 없이 우르르 한 방에 깨닫게 해주던 오준의 미용대회 시퀀스의 폭풍우 같은 흐름처럼.
어쩌면 이런 예측 불가성을 즐기지 않는 이에게, 혹은 특정한 '부류'의 돌출성을 불편해하는 이에게 영화의 화려한 곁다리들은 일면 산만하거나 심지어 불필요해 보이기까지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곁다리' 즉 삼각관계와 무관하면서도 구구절절 늘어지는 각 인물들의 사연은 모두 하나의 다정한 진리로 수렴한다.
타인에게 친절하라.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당신이 모르는 싸움을 치러내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랑(들)의 경중을 가리면서 너무 많은 인물의 너무 많은 이야기가 혼란스러우니 어떤 것은 받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 인간이 살아간다는 게 그렇게 복잡한 일이므로. 같은 남자를 사랑한 영미와 유진이 처음엔 너무 다른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도영에게 부인이 있다는 형사의 말에 절망으로 물들던 영미의 표정과, 들들 볶이던 자원봉사자 학생의 “우리 엄마 죽었다 미친년아”에 남몰래 무너지던 유진의 표정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보면 그 둘이 얼마나 닮은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미리의 이기적인 가출과 카드 도용을 힐난하더니 실은 저도 유진의 장애 등급을 이용해 몰래 차를 샀다던 오준의 욕심과, "지금 누나한텐 나밖에 없으니까" 곁을 지켜야 한다는 오준의 강인한 책임감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처럼. 각자의 바닥은 다 너무 깜깜하고 처량해서 가끔 거기 떨어진 채로 만난 사람에겐 뭐든 다 말하고 날 내맡기고 싶어질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경계하되 타인을 밀어내지 않을 수 있고, 이해하되 섣불리 다 안다고 말하지 않는 신중함을 발휘할 수 있다.
돌봄노동에 최적화된 영미의 성실한 다정과 경청 그리고 손길이 필요했던 거면서 오로지 돈 때문에 같이 있는 거라고 처음부터 스스로를 속이던 유진이의 위악을 나는 알고,
“끝까지 버텨보는 거 나쁘지 않던데요. 그래서 저는 감옥엘 갔지만. 후회는 안 해요.”라며 이상하리만치 끝까지 가보고 싶은 충동을 참지 않는 영미의 달콤한 자포자기도 나는 알지.
그래서 내겐 유진의 영미를 향한 “화상이 맨드라미 닮았네”가 이 시대 최고의 인류애를 함축한 대사 같았다. “그 화상 만져본 적 있어? 내가 한 번 만져봐도 돼?”라는 유진의 묘한 요청. 물렁한 영미의 수락에 유진이 상처를 보듬으며 "생각보다 부드럽네"라고 말하자 영미는 설핏 웃으며 “하여튼 이상해”로 화답한다. 그 욕조 옆에서, 또 미용대회 대기실에서 넘어진 유진의 휠체어 옆에서, 영미는 몸을 낮추어 유진과 시야의 높이를 맞춘다. 제 몸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여자가 멸시받던 여자를 똑바로 바라볼 때, 그늘진 유진의 앞에 놓인 건 환히 쏟아지는 빛처럼 다가오는 영미의 옅은 눈동자와 상냥한 미소다.
회사 돈을 빼돌리는 남자가 제게 조금 다정했단 이유만으로 지구가 망하기 전날 밤에 같이 있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게 된 이상하고 대책 없는 외로운 여자. 그런 여자를 두고 맨드라미의 꽃말이 '치정'인 걸 아느냐고 놀려대던 역시 이상하고 화가 많아진 외로운 여자. 소시지 반찬, 모기 물린 자국 위의 십자가, 그게 뭐라고. 그게 다 뭐라고, 사랑하는 이를 구하지도 못하는 내가 나인 게 너무 싫었을 여자들이 서로를 죽어라 질투하면서도 그 '구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줄 유일한 상대를 마음 속으론 악착같이 갈구한다.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는 게 얼마나 불가사의하고 어려운 일인지, 결국 영미의 '저 사람 나 아니면 어떡하나'가 유진의 짐을 덜고 유진은 도영에게 "그 여자 보니까 처음으로 네가 마음 놓이더라"라고 말한다. "저는 아직 유진 씨가 마음 놓이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도영의 말은 온라인 접견 시간 종료로 뚝 끊기고 말지만, 그 이후로 유진은 완전히 퇴장하고 도영과 영미가 꾸준히 재회해 채무 관계를 핑계로 '다시' 친해지는 에필로그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도영과 영미처럼 유진은 잘 살아갈 것이다 꿋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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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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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나이브스 아웃2>, 12월 23일 공개
ⓒ 넷플릭스
2019년 개봉한 추리 스릴러 <나이브스 아웃>의 후속편이 넷플릭스에서 오는 12월 23일에 공개된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억만장자의 ‘살인 사건 게임’이 예고된 그리스 외딴섬에
초대되지 않은 뜻밖의 손님 브누아 블랑이 나타나 진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리하는 영화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부국제 오픈시네마 첫 상영작 선정
ⓒ 네이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그간 부산국제영화제가 거리두기와 인원 제한 등으로
정상 개최할 수 없었던 ‘오픈 시네마’의 첫 상영작으로 선정되었다. 영화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이 어느 날 자신이 멀티버스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주인공임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정재, 스타워즈 주연 발탁
ⓒ 아티스트컴퍼니
배우 이정재가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 내용과 이정재가 맡은 캐릭터 등에 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공조2: 인터내셔날>, 개봉 첫 주 260만 관객 돌파
ⓒ 네이버 영화
유쾌하면서도 압도적인 볼거리로 호평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공조2: 인터내셔날>이 개봉 첫 주에
누적 관객수 260만 명을 돌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5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극장가를 완전히 점령했다.
해외
<썬더볼츠>, 플로렌스 퓨·세바스찬 스탠 주연 확정
ⓒ 마블 인스타그램
10일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D23 엑스포에서 케빈 파이기는 <썬더볼츠>의 캐스팅을 발표했습니다.
블랙 위도우 역의 플로렌스 퓨, 윈터 솔져 역의 세바스찬 스탠, 레드 가디언 역의 데이비드 하버 등이 출연을
확정했다. 영화는 내년에 촬영 예정이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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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의 사랑법
해당 리뷰는 씨네랩 초청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나를 모르는 그녀의 세계에서>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등 이미 다수의 로맨스 영화를 감독한 미키 타카히로 감독님의 신작이다.
주인공인 리쿠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대학시절 운명적으로 만난 아내 미나미와는 결혼한지 8년차. 리쿠는 글을 쓰고 미나미는 음악을 하며 다정히 사랑했던 연애 초반과는 다르게, 이제 그에게 미나미의 내조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미나미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그였지만, 사회적인 성공을 얻기 시작하며 그때의 마음은 퇴색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탈고를 앞두고 있던 시점, 엔딩을 보여 달라던 미나미의 말을 무시하고 잠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알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평행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리쿠. 아내 미나미가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오히려 성공한 싱어송라이터로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세계이다. 리쿠는 다시 한 번 그녀와의 사랑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처음부터 다가간다.
평행세계라는 소재를 끌어왔어도 판타지 영화보다는 로맨스 영화에 훨씬 큰 축을 둔 듯 하였다. 특히 로맨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클리셰적인 연출은 자칫 과하다 느껴질 정도로 부각된 편이다. 클리셰적인 연출이 가장 기능적으로 유려하게 쓰인 부분은 단언컨대 오프닝 타이틀이다. 리쿠와 미나미의 연애 과정은 첫 만남의 파트를 제외하고, 타이틀이 뜨는 동안 전부 관객들에게 보여진다. 뻔하다 느껴질 수도 있으나, 대신 대사 한줄 없어도 '리쿠와 미나미의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이 리쿠의 사회적 성공과 함께 빛바랬다'는 긴 시간의 압축을 관객들은 놓침 없이 따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수없이 다른 영화에서 반복 되었던 클리셰들로 예측 가능한 전개를 만들어내는 이 영화는, 로맨스 장르로써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서브 인물들의 레이어를 통해 만들어낸다. 주인공들 만큼 조연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지는 영화. 주인공들이 메인 스토리를 끌어가는 사이에 조연들이 다채로운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조연들의 이야기는 이 영화가 단순히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도록 깊이를 더한다. 리쿠가 도달한 평행세계는 그냥 우연히 생긴 곳이 아니다. 누군가는 슬픔을 껴안고, 누군가는 자신의 상실을 견디며 끝내 이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세계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인물은 리쿠의 선배이다. 이 세계의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그 고통을 세상과 단절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그의 존재는 말하지 않아도 리쿠에게 이렇게 전하는 듯하다. “다시는 사랑할 수 없더라도, 그 사람을 기억하며 살아갈 수는 있어.”
그는 자신의 삶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리쿠가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다. 리쿠는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선택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아간다.
더불어 미나미의 할머니는 이 세계의 또 다른 축을 담당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꿈을 내려놓고, 가족의 탄생을 선택한 인물이다. 결국 선대에 존재했던 그녀의 희생 덕분에 미나미가 살게 되고, 리쿠와 만나고, 리쿠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워진 선택들, 화려하지 않아도 단단한 선택들이 쌓여, 이 세계의 미나미가 지금의 자리에서 노래할 수 있게 되고 저 세계의 리쿠가 미나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촘촘한 주변 세팅을 통해 이 영화는,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여겼던 순간들조차 사실은 누군가의 포기와 헌신, 배려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감성적으로 되짚는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결국 리쿠가 도달한 진실은, 자신이 돌아가고 싶어 했던 원래의 세계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세계는 누군가의 눈물과 결단, 그리고 사랑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였고, 그는 그 안에서 단지 소비자처럼 사랑을 받아왔을 뿐이라는 자각에 다다른다. 이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모든 세계는 결국 누군가가 사랑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고.
그러니 이 영화를 본 우리도 기꺼이 사랑하고, 기꺼이 나를 던져, 누군가의 세계가 되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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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사고로 감추기엔 매혹적인 '악마와의 토크쇼'
악마와의 토크쇼
이 영화의 주인공은 1970년대 미국 토크쇼를 진행하던 아나운서 잭 델로이(데이빗 다스트말치안)다. 유명인사인 잭 델로이. 젠틀한 목소리 톤과 말끔한 매너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쇼는 1971년이었다. 꿈을 이룬 잭 델로이. 코미디부터 가족드라마, 연극까지 다양한 소재를 포용하는 토크쇼를 진행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1970년대의 미국인들은 그의 토크쇼에 큰 위안을 받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잭 델로이. 당시 최고의 토크쇼였던 조니 카슨 쇼와 맞대결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그래미 상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밝은 빛과 어둠은 함께 따라온다고 했던가. 높은 인기 덕인지 톱스타 여배우 매들린(조지나 헤이그)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잭이 사이비 종교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서서히 치닫았던 위기는 잭의 인생의 큰 장애물이 된다. 비흡현자였던 매들린. 폐암에 걸렸다. 그리고 잭의 곁을 떠났다. 슬픔 속에 잠긴 잭. 하지만 잭에게 쉬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서서히 낮아지는 시청률. 그리고 더 침몰하는 잭. 다양한 논란에 그의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는 듯하다. 묘수가 필요하다. 색다른 토크쇼 콘텐츠를 기획하는 잭 델로이. 그가 꺼낸 아이디어는 악마와의 토크쇼다. “잭. 걱정하지 말아요. 이 토크쇼는 분명 유명해질 테니.”
이런 장르물 기다려왔어
이 <악마와의 토크쇼>는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왜 훌륭해? 아주 재미있기 때문에. 왜 재미있을까? 그러니까 글쓴이가 이 영화에 애착이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 굳이 생각을 두, 세 번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더 큰) 영화 노동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나는 감상에 있어 이런저런 사소한 부분까지 캐치해야 한다. 작은 부분까지 눈에 담아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마와의 토크쇼>는 이 과제들을 염두할 틈도 주지 않고 내내 강력하게 몰아친다. 영화가 몰입감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사소한 부분을 챙겨가며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왜? 영화가 에너지의 근거를 친절하게 다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영화의 톤 측면에서 기괴한 톤을 유지한다. 그 근원지가 어디일까? 바로 우리가 아는 공포영화의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을 비틀어서 기괴함을 증폭시킨다. 글쓴이는 크리스투(파이살 바지)의 역할이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이 캐릭터는 메시지의 측면이나 이야기의 측면이나 영화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인데 <악마와의 토크쇼>를 안 본 분들도 이 캐릭터에 매혹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장르영화의 팬이라면 살짝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영화가 강력한 미스터리로 똘똘 뭉친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 미스터리 영화 안의 기괴한 톤과 시너지가 있기 때문에 미스터리물로서의 쾌감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그 내실을 따져보면 영화 안의 형식만 신선하고 원래 기획의도였을 것 같은 호러영화로서의 톤은 부실하다. 왜? ‘어떻게’는 충분히 신선하지만 ‘무엇’의 결과물이 이에 호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유전> 같은 장르물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특히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핵심을 보여주고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에 호러영화로서의 장르적인 특성은 포기한 흔적이 보인다.
있는 그대로를 믿을 것?
이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에 카메라를 비추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 핵심을 위해 영화가 설정한 것 중 가장 강력한 부분은 주인공 잭 델로이다. 잭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100% 적합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왜? 이 왜 적합한지에 대한 부분이 영화 초반부에 나온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잭의 태도가 진지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잭의 여러 히스토리들이 영화의 배경처럼 제시된다. 이 장면들은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가 초반부부터 메시지의 측면에서 근거를 깔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통해 인물이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영화가 코멘트한다는 점을 주의 깊게 염두하고 보시길 바란다. 그리고 어떤 매개체가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지가 이 작품의 진주인공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극 중 토크쇼를 관객이 초대받은 것 같은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이면을 탐구해야 한다. 누굴 위한 토크쇼일까? 사실상 이 영화 안의 토크쇼는 단 한 사람의 리액션을 위해 설계되어 있는데 그게 누구이며 또 그 과정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택이 제시되는데 이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또 주인공 외의 인물 관계도 이야기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가령 주인공의 보조 mc 거스(리스 오테리)의 모습이 영화에 전면에 등장한다. 이 거스를 대하는 인물들은 무대 안에서나 밖에서나 일관성을 가진다. 이 일관성을 흐리는 선택이 아주 흥미로운데 이 둘의 공통점을 묘사하는 연출에 어떤 것이 들어갔는지 염두하고 보면 재미있으실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어떤 존재에 의해 영향받는지도 이야기 안에서 굉장히 진하게 밑줄이 그어져 있다. 이 존재를 오고 가는 연출이 사실상 영화를 이끄는 플롯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현실과 그 나머지의 세상을 잇는 감독의 박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러닝타임이 다 끝나있다. 이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은 거스가 아닌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이 인물들은 어떤 존재 때문에 특정한 사건을 겪는다. 영매사 크리스투, 초능력자 사냥꾼, 모녀관계라고 볼 수 있는 릴리(잉그리트 토렐리)와 준(로라 고든)의 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인공 잭까지. 인물들은 미디어라는 틀을 넘어 현실의 우리에게 침입한다. 가령 릴리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은 기괴해서 장르적 원동력이 될 뿐만 아니라 핵심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순한 이야기에서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인 비유를 새겨놓은 각본가와 감독의 능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미디어 = ?
영화 안에서 흥미로웠던 세 번째 지점은 핵심과 장르를 겹치게 연출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야? 이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토크쇼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거대한’이다. 이 영화의 틀을 이루고 있는 미디어, 그러니까 토크쇼라는 존재는 관객에게 초자연적인 일을 묘사하는 원동력임과 동시에 이야기의 형식이다. 무슨 말이냐? 초반부에 1970년대 미국의 정치사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사실적인 맥락을 넣은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무리를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틀을 부순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카메라로 담는다. 이 모든게 토크쇼인 것이다. 이 두 요소로 인해 영화의 톤이 상충하는 듯 하지만 이야기에는 걸림돌이 없다. 왜? 카메라의 존재 때문이다. 카메라의 의미가 영화의 플롯을 이끄는 것과 동시에 초자연적인 행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카메라의 존재는 영화가 왜 영화인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2024년의 관객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한다.
또 <악마와의 토크쇼> 안의 토크쇼 관객과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관계가 흥미롭다. 이 둘은 사실상 동일시되기도 하고, 전후관계에 있어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무슨 말이냐? 각각의 관객(토크쇼/영화)의 성격을 미디어의 성격을 통해 분류한 것이다. 토크쇼의 관객은 쇼를 만드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제작자들의 이해관계가 관련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영화의 관객들은 카메라가 이끌리는 대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를 엇갈리는 연출이 흥미로웠다. 이 엇갈리는 연출이 무엇인지 딱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장면이 무엇인지를 애둘러 써보자면, 이야기의 폭력적인 것을 지양한답시고 그 전부를 담는 뉴스를 여러분도 본 적 있지 않나? 이 영화의 카메라는 그런 느낌이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서 이야기의 외면을 비추다가 어느 지점을 벗어나 시점을 급격하게 바꿔버린다. 이건 중요하다. 관객들의 관계를 영화가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급격하게 바꾸는 시점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대단한데, 토크쇼가 존재했기 때문에 1977년부터 2023/2024년에 이르는 영화의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는 것이고 ‘악마와의 토크쇼’가 가능했으며 관객을 향한 무언가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이 장면이 중요하다는 것은 여러분 모두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전달하기 위해 어떤 분들은 영화의 엔딩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의 이런 마무리야 말로 꼭 필요했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언론홍보학과 출신 글쓴이가 전공 공부를 하며 배운 것이 있다.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이것이야 말로 미디어가 관객에게 끼치는 영향 그 전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이 서브리미널 효과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리가 봤던 미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삶에 틈입하고 있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영화인 셈이다. 어쩌면 이런 미디어의 속성이야 말로 진짜 공포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범죄도시 4>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극장 나들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강력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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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DIRECTOR. 네오 소라
CAST.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외
SYNOPSIS. 점멸등이 일렁이는 근미래의 도쿄. 음악에 빠진 고등학생 ‘유타’와 ‘코우’는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나날을 보낸다. 동아리방을 찾아 늦은 밤 학교에 잠입한 그들은 교장 ‘나가이’의 고급 차량에 발칙한 장난을 치고, 분노한 학교는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다. 그날 이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POINT.
✔️ <사카모토 류이치: 오퍼스>를 연출한 네오 소라 감독의 장편 극영화 첫 연출작.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다운 감각이 돋보입니다. 음악, 미술 모두 아름다워요.
✔️ 최근 일본 영화의 경향성에서 현실과 공명하는 부분들을 봅니다. 솔직히 한국 영화가 이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한국 사회의 맥락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어요.
✔️ 얘들아 너희 우정 정말 너무... (울컥)
✔️ 연기가 처음이라는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는 그냥 유타와 코우로 태어나서 자란 존재들처럼 보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말대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요.
✔️ <썸머 필름을 타고>에서 블루 하와이 역할을 맡았던 이노리 키라라, 다양한 일본 영화에서 봐온 나카지마 아유무의 얼굴도 반갑습니다.
근미래라는 단어는 분명 “앞으로 다가올 가까운 미래”라고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지만, 나는 일상에서 이 단어를 써본 적이 없다. 한국어의 어미는 시제보다 다른 것들을 더 중시하는 느낌이고, (예컨대 “하다”와 “했다”의 차이보다, “하다”와 “한 것 같다”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서양의 언어를 배우면 오히려 시제가 명확했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어는 단순미래와 근접미래, 복합과거, 반과거, 단순과거, 대과거를 촘촘히 쪼갰다.
일본어는 과거와 현재를 나누지만 미래 시제를 따로 두지는 않는다. 현재시제가 미래시제를 대체할 수 있고, 시간 표현이나 문맥, “~할 생각이다” 같은 표현들로 미래를 담아낸다. 미래의 어미가 존재하지 않는 언어. 그 언어 안에서 근미래는 어쩌면 현재의 탈을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예감 안에서 근미래를 담은 일본 영화들을 본다. 노인 안락사를 국가 정책으로 지원하는 영화 <플랜75>는 다소 극단적인 설정이지만 작금의 약자 혐오 맥락을 보면 현재의 고민과 담론이 녹아 있다. 그리고 여기 빨간 불빛 사이를 달려, 우리에게 <해피 엔드>가 찾아왔다. 그렇다면 <해피 엔드>가 근미래를 통해 비추는 현재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판옵티’라는 회사의 AI 감시 체계가 도입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세계관은 이미 감시사회다. 미셸 푸코가 말한 감시사회는 단순히 365일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물리적 존재보다, 그 느낌을 받은 개인이 결국 자기 행동을 검열하게 되어 굳이 물리적인 통제까지 가하지 않아도 되는 쪽에 방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기계의 도입 여부는 마치 버튼 하나를 누르는 정도의 변화이다. 그저 인물들의 내면에 있던 생각들, 이미 느끼고 있던 감정들이 외부로 표출되는 계기.
경찰관이 얼굴을 찍는 것만으로 이름과 민족 정보까지 나오고,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코우는 유타보다 더 많은 차별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위기 시 내각의 권한을 강화할 수 있도록 개헌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 어쩌면 나는 이 말이 얼마나 민주주의에 큰 위기를 만드는 문장인지 즉각적으로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마치 2024년 12월 3일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어떤 일처럼, AI 감시 체계의 도입은 그간 사람들 안에 있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털털하게 다녔지만 코우의 내면은 차별로 상처받아 왔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음악에 취해 살았지만 유타는 사실 불안과 절망을 너무나 깊이 느낀 존재였고 (그의 안에 있을 ‘탄광 속 카나리아’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침묵하고 있던 파시스트들도 그제야 목소리를 낸다. AI 감시 체계 도입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기존에 존재하던 모든 의견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버튼이 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묵음으로 처리된 지진은, 수도 없이 개인의 내면에서 굉음을 내며 이루어지는 어떤 붕괴들과 얼마나 다를까. 가끔은 오보이기도 하고, 또 가끔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틀어놓는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그 점조차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과 닮아 있다. 미약한 지진을 그냥 내 경련이나 어지럼증으로 오인하기도 하는 경험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지진 오보가 늘어난 데에는 어떤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그 거짓 뒤에는 거짓을 튀어나오게 만드는 잘못된 시스템이 있다. 교장 선생님은 AI 체계에 항의하는 아이들에게 사회는 훨씬 더 차가운 곳이라고 계속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학교 교육의 목적은 감시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정도 시스템은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 감시 시스템은 결코 자기들의 말대로 “공정과 상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교사의 말에 순응해 교실 바깥으로 나온 ‘비-일본국민’ 학생들에게는 벌점이 부여되고, 똑같은 잘못으로 불려간 후미와 코우의 보호자들은 전혀 다른 태도로 교장실에 들어선다. 법적 의무가 아님에도 달라고 하면 따라가야 하는 경찰들의 태도 또한 이를 드러낸다.
이런 사회는 누가 언제 내 눈앞에 나타나 권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는 사회로, 그건 마치 코앞에 총구를 들이대는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례로 어둠 속에서 설왕설래하는 코우와 어머니의 대화를 끊고 다가오는 자경단의 불빛은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물을 때에야 그 공포는 희석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감시사회는 공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공포의 ‘전짓불’이 자신을 향할 일 없다 믿는, 작은 박스 안에서의 삶에 순응하면서 살아감으로 충분하다 믿는 이들만이 캐비닛에 갇힌 채로 안심한다.
뭐 캐비닛에 갇혀 괴롭힘을 당하는 데에 익숙한 누군가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런 사회 안에서 심경이 복잡해진다. 아이들은 작은 새들처럼 예리하게 그 복잡한 감각을 받아들이고 또 내뿜는다.
톰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 유타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톰은 마치 유타를 달래듯 미국’도’ 끔찍하다는 말을 한다. 이 절망에 혼자 버려지고 싶지 않은 유타와, 친구들을 부드럽게 어르는 힘을 가진 톰의 사이에는 ‘주의’라고 적힌 기둥이 놓인다. 무엇을 주의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다 나중에 유타와 코우가 대화하는 그림자를 보고 깨닫는다. 기둥 위에는 거울이 있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바로 그 볼록거울.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들은 거울 속에, 가만히 바라만 보는 눈 속에 있다. 방관 속의 침묵으로 드러난 파시즘이 대를 잇는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다만 그 파시즘을 깨뜨리는 것은 결국, 아주 오래 같이 걸어온 사이의 사랑이다. 언제부턴가 사랑은 연애감정의 동의어로 쪼그라들었고, 심지어 그조차 사치라는 듯 연애 관계조차 규약처럼 바뀌어 간다. 이러한 시대에, 제각각의 생각으로 박터지는 세상에서, 서로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고서도 유타와 코우는 서브 우퍼를 같이 옮긴다. 음악을 같이 듣고, 땀을 같이 흘린다.
<해피 엔드>가 그리는 현실은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다. 난카이 대지진이 발생한다면 그때 1923년이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실제로 감독은 그 질문을 품었고, 영화 속 캐릭터 후미 또한 가네코 후미코에서 따왔다고 밝혔다. 세상은 멈추고 또 흔들리고, 상처를 남기고,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음 그대로가 우리의 싸움이다. 때로는 깊은 절망 안에서 회피하고, 때로는 투사처럼 싸운다. 다시 만날 수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함께 부르는 노래가 있고, 나누어 먹는 김밥이 있고, 과거에 빚진 멋진 음악도 있다. 절망하지도 희망하지도 못하는 채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채로,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혼란한 이 마음으로, 우리는 앞으로 간다. 거울은 맞세워 놓으면 무한 확장되는 세계 같지만, 깨지면 아무 것도 아닌 세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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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 너무 소문만 무성한 잔치 아니오!
이 글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시즌3]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즌2]의 리뷰도 읽어봐 주세요.
사진 출처:보그 코리아
일단. 재미가 없다.
새로운 시즌의 시작부터 기훈이 형은 한 번 삶은 시래기처럼 시들시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려 주인공의 공백을 채워 줄 누군가가 바로 튀어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 기훈이 형의 눈치만 보며 다음 게임을 기다리기만 한다. 명색이 오징어 게임인데 게임을 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게임을 기다리는 동안 오징어라도 말려야 할 것만 같은데 보고 있는 사람의 피만 마르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투표를 하는데도, 편을 뽑는데도 시간이 너무 걸려서 시즌 2 이후의 긴장감이 단 한순간도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마지막 시즌에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려다 보니, 갑자기 거의 모든 인물들이 연사가 되어버린다. 쓸데없이 비장함에 휩싸인 인물들의 입장들을 듣고 있자면. 이게 지금 내가 오징어 게임 마지막 시즌을 보고 있는 건지 한 달 전에 끝난 대선 토론회를 듣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사진출처:데일리 뉴스
원초적인 잔인함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가 없다. 첫 번째 시즌에서 폭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을 때부터 이 시리즈의 한계이자 숙제는 정해져 있었다. 뒤로 갈수록 반드시 잔인하고 잔혹한 게임이 나왔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시즌3에서 선택한 방법이 참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임의 결과가 아닌 과정에 계획적인 살인과 자살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았던 룰의 "애매함"을 이용해서.
이로 인해 관객들은 시즌2의 타노스 같은 돌발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배틀 로열 같은 일대 다수, 다발적인 살해현장을 지켜봐야 한다. 물론 의도가 무엇인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돈과 자신의 목숨 앞에서 인간성이 몰락하는 과정을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또한 성기훈을 포함한 모든 참자가 들도 결국은 요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와 연결되는 점이 몇몇 참가자들의 자살이라는 점과, 자살의 동기에 모성애를 엮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역겹다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생사를 놓고 벌이는 게임판이라는 설정에서 이토록 안전하면서도 안일하고 뻔뻔한 선택을 하다니.
사진 출처:스포츠 조선
첫 번째 시즌을 준비할 때. 치아가 여섯 개 빠질 만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이 이토록 세계적인 인기를 누릴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고 했다. 그러니 후속 시즌의 제작이 확정되었을 때의 부담감은, 끽해봐야 일할 때 데드라인 지키는 부담감 외엔 느낄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은 감당조차 하지 못할 만큼 무겁고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감독이 만들어 놓은 작품 속의 설정이 그다지 시즌을 거듭할 만큼 다채롭지는 않다는 점. 그리고 시즌 1의 너무 심한(?) 인기 덕에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고 만들었을 것임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 시즌 3으로 막을 내리는 이 무자비한 게임이 결국은 모두의 패배로 종결되었음을 선언하는 것만 같다.
안 가겠다고 떼를 써도 그렇게 손에 고이고이 초대장을 쥐어 주며 오라고 하더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혀를 끌끌 차며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씁쓸한 최후가 이 시리즈에게도 찾아오게 될 줄이야.
[이 글의 TMI]
1. 노재원=새로운 OTT공무원의 탄생
2. 너무 덥다 진짜.
3. 쥐포 먹으려고 다이어트 하는 인간 나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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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배우가 그 배우였다고? [우디 해럴슨] 편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많은 영화 작품 중 다양한 도전, 다채로운 연기력으로 보는 이에게 강렬한 잔상을 남긴 배우들이 참 많죠.
영화를 볼 때마다 '이 배우 어디에 나왔었지?' 회상하며 배우의 필모를 살펴본 경험이 참 많은데요.
이번 콘텐츠 큐레이션 주제는 바로 오늘, 5월 17일 '슬픔의 삼각형' 개봉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면모와 연기력을 보유한 '이 배우가 그 배우였다고? [우디 해럴슨] 편' 큐레이션 입니다.
<헝거 게임> 시리즈 헤이미치 역
ⓒ 네이버 영화
헝거게임 시리즈에서 주인공 캣니스를 멘토로서 지지하는 '헤이미치' 역을 맡은 우디 해럴슨.
<헝거게임 : 판엠의 불꽃>(2012)부터 <헝거게임> 시리즈에서 12구역 최초의 우승자이자 캣니스(제니퍼 로렌스)의 멘토 헤이미치 역을 맡아
<헝거게임 : 더 파이널>(2015)까지 활약하며 극 내 빼놓을 수 없는 명품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영화 <베놈 2> 카니지 역
ⓒ 네이버 영화
영화 <베놈 2>는 미워할 수 없는 빌런 히어로 '베놈'앞에 사상 최악의 빌런 '카니지'가 나타나
대혼돈의 시대를 예고하면서 피할 수 없는 대결을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 작품입니다.
우디 해럴슨은 영화 <베놈 2: 렛 데어 비 카니지> 에서 빌런 '카니지'역을 맡아 대중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각인 시킨 바 있죠.
<혹성탈출3> 대령 역
ⓒ 네이버 영화
'혹성탈출' 시리즈의 마지막 3부작인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 은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인간과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가족과 동료들을 무참히 잃게 된 유인원의 리더 시저와 인류의 존속을 위해 인간성마저 버려야 한다는 인간 대령의 대립, 그리고 퇴화하는 인간과 진화한 유인원 사이에서 벌어진 종의 운명을 결정할 전쟁의 최후를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 속 우디 해럴슨은 '시저'와 대립하는 인간군의 대령 역을 맡아 선악을 넘나드는 악명 높은 캐릭터로 분해 극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지랄발광 17세> 브루너 선생님 역
ⓒ 네이버 영화
영화 '지랄발광 17세'는 가족도 친구도 학교도 연애도 뭐 하나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
우울한 17세 소녀 네이딘(헤일리 스테인펠드)이 인생 최대 위기를 겪는 과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극 중 우디 해럴슨은 브루너 선생님 역을 맡아 주인공 헤일리 스테인펠드와 남다른 케미를 선보였죠.
<슬픔의 삼각형> 선장 역
ⓒ 네이버 영화
우디 해럴슨의 신작, 바로 오늘 개봉한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은 2022년 제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2023년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오른 작품으로 개봉전 부터 기대를 한가득 모으고 있습니다.
특히 우디 해럴슨은 크루즈에 탑승한 부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선장 토마스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 <지랄 발광 17세>를 재밌게 보셨다면 이번 우디 해럴슨이 맡은 '선장' 역 또한 유머러스하고 노골적인 코미디 면모가 부각돼 적극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이 배우가 그 배우였다고? [우디 해럴슨] 편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추후 더욱 유익하고 재미난 영화 소식으로 찾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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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도 못 쉬고 봤습니다..... 충격 결말, 시간 순삭 영화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세인트아가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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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도쿄가 또 한번 폭발한다! 미래를 예언한 혁신적인 명작 애니메이션! #아키라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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