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5-17 14:06:57
이 배우가 그 배우였다고? [우디 해럴슨] 편
<슬픔의 삼각형> <헝거게임><베놈2><혹성탈출3><지랄발광 17세>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많은 영화 작품 중 다양한 도전, 다채로운 연기력으로 보는 이에게 강렬한 잔상을 남긴 배우들이 참 많죠.
영화를 볼 때마다 '이 배우 어디에 나왔었지?' 회상하며 배우의 필모를 살펴본 경험이 참 많은데요.
이번 콘텐츠 큐레이션 주제는 바로 오늘, 5월 17일 '슬픔의 삼각형' 개봉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면모와 연기력을 보유한 '이 배우가 그 배우였다고? [우디 해럴슨] 편' 큐레이션 입니다.
<헝거 게임> 시리즈 헤이미치 역
ⓒ 네이버 영화
헝거게임 시리즈에서 주인공 캣니스를 멘토로서 지지하는 '헤이미치' 역을 맡은 우디 해럴슨.
<헝거게임 : 판엠의 불꽃>(2012)부터 <헝거게임> 시리즈에서 12구역 최초의 우승자이자 캣니스(제니퍼 로렌스)의 멘토 헤이미치 역을 맡아
<헝거게임 : 더 파이널>(2015)까지 활약하며 극 내 빼놓을 수 없는 명품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영화 <베놈 2> 카니지 역
ⓒ 네이버 영화
영화 <베놈 2>는 미워할 수 없는 빌런 히어로 '베놈'앞에 사상 최악의 빌런 '카니지'가 나타나
대혼돈의 시대를 예고하면서 피할 수 없는 대결을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 작품입니다.
우디 해럴슨은 영화 <베놈 2: 렛 데어 비 카니지> 에서 빌런 '카니지'역을 맡아 대중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각인 시킨 바 있죠.
<혹성탈출3> 대령 역
ⓒ 네이버 영화
'혹성탈출' 시리즈의 마지막 3부작인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 은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인간과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가족과 동료들을 무참히 잃게 된 유인원의 리더 시저와 인류의 존속을 위해 인간성마저 버려야 한다는 인간 대령의 대립, 그리고 퇴화하는 인간과 진화한 유인원 사이에서 벌어진 종의 운명을 결정할 전쟁의 최후를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 속 우디 해럴슨은 '시저'와 대립하는 인간군의 대령 역을 맡아 선악을 넘나드는 악명 높은 캐릭터로 분해 극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지랄발광 17세> 브루너 선생님 역
ⓒ 네이버 영화
영화 '지랄발광 17세'는 가족도 친구도 학교도 연애도 뭐 하나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
우울한 17세 소녀 네이딘(헤일리 스테인펠드)이 인생 최대 위기를 겪는 과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극 중 우디 해럴슨은 브루너 선생님 역을 맡아 주인공 헤일리 스테인펠드와 남다른 케미를 선보였죠.
<슬픔의 삼각형> 선장 역
ⓒ 네이버 영화
우디 해럴슨의 신작, 바로 오늘 개봉한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은 2022년 제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2023년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오른 작품으로 개봉전 부터 기대를 한가득 모으고 있습니다.
특히 우디 해럴슨은 크루즈에 탑승한 부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선장 토마스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 <지랄 발광 17세>를 재밌게 보셨다면 이번 우디 해럴슨이 맡은 '선장' 역 또한 유머러스하고 노골적인 코미디 면모가 부각돼 적극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이 배우가 그 배우였다고? [우디 해럴슨] 편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추후 더욱 유익하고 재미난 영화 소식으로 찾아오겠습니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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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4] 자살을 선택한 사람에 대한 세심한 접근
Rabbitgumi 입니다! 김혜수 배우가 주연한 영화 내가 죽던 날 을 보고 왔어요.
자살한 아이에 대한 수사를 종결시키기 위해 마무리 수사를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데요.
한 사람이 자살로 이르는 심리묘사가 탁월합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이 자살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사람의 믿음과 도움을 통해 보여주려 합니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좋은 드라마를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봐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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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명탐정 코난 : 범인 한자와 씨> 공식 예고편
여기는 범죄 도시, 베이커가. 세계 최고 수준의 범죄율로 악명 높은 이곳에 누군가가 칠흑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남자(혹은 여자?)의 목적은 ‘어떤 사람’을 살해하는 것. 그렇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에 없어선 안 될 그 녀석이 이번엔 주인공이다! 온몸을 감싼 검은 타이츠, 순백의 두뇌를 소유한 그(녀)의 이름은 바로... 범인 한자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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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원초적 본능>, 무릎 사이론 알 수 없는 것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드디어, 갑자기 본 영화. 이런 스릴러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봤을텐데. 해석의 재미가 쏠쏠하다. 여타 매혹적인 장면과 눈빛이 가득한 영화다. 제목은 원초적 본능이라 본능의 '끝까지 간다' 버전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줄 타기를 잘하고 있다. 형사 닉 커랜과 작가 캐서린 트라멜. 그들의 한 마디가 떠나질 않는다. 살인은 담배와 달라. 그만둘 수 있으니까, 라는 그녀의 말과 그의 말. 난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잡아넣을 거야. 캐서린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자신이 알려주지 않는 걸 절대 알 수 없을 거라면서. 영화가 끝나면 질문을 각자에게 하고 싶다. 닉에게 묻고 싶다. 정말 캐서린이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라도 알고 있는지, 그녀를 정말 잡아 넣을 자신이 있는지. 그리고 캐서린, 살인이 정말 담배와 다른가요? 그만둘 수 있는 건가요?
누가 취조 당하는 걸까? 이 장면으로만 기억되서는 안 될 영화
캐서린 트라멜을 '섹시한 악녀'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녀가 다리 한번 꼬았을 뿐인데 경찰들이 정신을 못차린다. 누군들 안그랬겠나. 아무것도 숨길 것 없다며 침착하게 사람을 당황시키는 말까지. 그렇다. 그녀를 '섹시한 악녀'라 한다면 있을 건 다 있는 말이다. 그녀는 섹시하고, 매력적이고, 악하고, 여자다. 하지만 뉘앙스가 좀 다르다. 그녀는 원한다면 언제든 섹시하기 보단 우아할 수 있고, 악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라면 그녀는 똑똑한 살인자라고 말하겠다. 섹시함 역시 그녀의 지능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에이미 던/캐서린 트라멜
영화를 보면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가 떠오르는데 좀 다르다. 에이미와의 공통점은 꽤 많다. 사람들의 심리 파악에 능하고,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라는 점. 어쩌면 에이미가 캐서린을 많이 닮은 후배일 수도 있겠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마치 세상을 자신이 쓰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만 차이는 명확하다. 에이미는 살인을 즐기진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 역시 죽음을 주로 다루지 않는다. 자신은 '어메이징 에이미'처럼 늘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원했다. 우아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로 보이더라도, 결국엔 해피엔딩. 몇 명이 알아차리는 것 정도는 상관 없다. 남편은 알고도 자신을 떠날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캐서린은 살인을 즐긴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해도 들키지 않을까? 가 궁금하다. 담배만큼 즐기지만 필요에 따라 절제하고 있다. 그녀의 모든 책에선 사람이 죽는다. 대체론 여자가 남자를 죽이고, 그 이야기를 위해서 그녀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 사람을 유혹하고 죽여야 하기 때문인지, 자신이 지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관능적인 모습을 유지하려 한다. 그걸 위해 돈도 시간도 공들이고 있다. 그녀에겐 즐거움이 중요하다. 사람과 죽음, 욕망 같은 것들. 사람이 이리 저리 게임판에 끌려다니는 게 재밌으니까, 그로 인해 충족할 수 있는 많은 욕망은 감칠맛이 난다. 에이미가 똑똑한 연기자라면, 캐서린은 똑똑한 살인자다.
닉과 캐서린, 베스를 둘러싸고 다양한 7건의 사고 혹은 사건이 나타난다. 배가 고장나 돌아가셨다는 캐서린의 부모님. 자동차로 추격하다 추락사한 캐서린의 연인 록시. 살인의 경우 흉기는 얼음송곳과 총이다. 얼음송곳으로 찔려죽은 세 사람. 캐서린과 베스의 지도교수. 캐서린과 만나던 은퇴한 로커. 닉의 동료 형사 거스. 총을 맞고 죽은 두 사람. 베스의 전남편. 닉과 날을 세우던 죽은 형사 닐슨.
코난을 10년 넘게 봐서 인지 사라지지 않는 찜찜함
일단 경찰에서 수사하던 형사 닐슨 및 거스 살인 사건(아마 은퇴한 로커 살인사건까지도)의 용의자는 베스로 결론내려졌다. 범인이 베스라는 결말은 충격적이긴 하다. 닐의 심리치료사였고 다른 형사들과 매일 얼굴을 맞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게 너무 완벽하게 다 맞아들어간다는거다. 범죄현장에서 멀지 않은 계단에 고이 모셔진 금발의 가발, 경찰들만 입는 우의와 얼음 송곳. 캐서린을 누명씌우려 했던 그녀의 의도가 이렇게 간단하고 투명하게 드러난다니. 그녀의 집에서 발견된 총과 서랍에 놓인 캐서린에 대한 사진, 살인을 다룬 캐서린의 책. 어째 그렇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증거를 보란듯이 집에 걸어뒀을까. 이건 하나 하나 흩어져있던 증거를 모아 범인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의 희열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증거는 베스가 범인이라는 걸 증빙하는 서류같다.
너무 완벽할수록 찜찜하다. 베스가 닐슨과 자신의 전남편은 총으로 죽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스는? 거스는 베스가 죽였는지, 캐서린이 죽였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닉은 캐서린이 이미 탈고해서 인쇄까지 한 미출간 신간 <Shooter>의 결말을 봤다. 책에선 주인공인 형사가 엘리베이터에서 살해된 동료를 찾으러 간다고까지 대본처럼 쓰여 있었고 이는 거스의 죽음과 일치했다. 물론 책에서 쓰여진대로 이미 그는 송곳으로 난도질 당한 후였지만.
베스(엘리자베스) 가너/캐서린 트라멜
베스와 캐서린 모두 거짓말을 했다. 베스는 전남편의 죽음도, 전남편과의 결혼도 닉에게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당시에 '여자친구'가 있었다는데 모를 일이다. 거스가 죽는 사건현장에서 만나자는 메세지가 있어서 왔다고 했다. 굳이 그녀는 총을 들고 자신을 의심하는 닉 앞에서 주섬주섬 열쇠고리를 꺼내다 총을 맞았다. 총을 가진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는데. 캐서린은? 그녀는 책에서 일어난 사건은, 실제 사건이 일어난 '후'에 썼다고 말했다. 배가 고장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책을 썼다고. 하지만 은퇴한 로커 살인사건이나, 형사가 죽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먼저 완성되었고 그 이후에 살인이 벌어졌다. 작가인 내가 이 그대로 하기엔 자신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이 걸 그대로 따라하는 멍청한 짓을 '누가' 한단 말인가?
베스가 생각보다 캐서린과 관련이 많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끼처럼 맞춰진 퍼즐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캐서린이 사랑에 빠져서 닉에게 한번도 안 하던 고백을 하며 자신을 따라하던 '리사 후버맨'을 말한 것도 이상하다. 베스는 이미 비슷한 얘기를 한참 전에 했고, 캐서린이 이렇게 말했을 거라며 나중엔 그대로 맞추기까지 한다. 캐서린에게 베스는 록시와는 다른 존재다. 록시와 캐서린이 성적으로 탐닉하고 관음하는 사이라면, 둘 사이는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이일 수도 있다. 책을 탈고한 그 짧은 시간에 베스가 캐서린의 책을 입수해서 있는 그대로 실현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캐서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베스가 캐서린에게 이용당해 꼭두각시처럼 범죄장소로 오게 되었다 해도, 어차피 캐서린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리는 없다. 사건 당일 그녀가 <shooter>라는 책을 다 썼으니 닉은 더 이상 필요헚다며 매몰차게 이별을 고한 건 왜일까. 거스가 살해되기까지 무대를 세팅했든, 직접 행동에 옮겼든 그의 시선을 벗어나 뭔가를 했을 시간은 충분하다. 자의든 타의든 베스는 캐서린의 책대로 사람이 죽는 멍청한 '짓'을 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 닉은 바보같은 형사, 그녀와 사랑에 빠져 눈이 멀어버린 멍청이로 남아있을까. 그도 곧, 혹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베스만 죽은 것으로 모든 게 끝났을까? 캐서린에 대한 의심은 이렇게 사랑의 힘으로 영영 이겨낼 수 있을까? 닉과 캐서린이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외모도 있지만 자신과 같은 류의 사람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살인자. 코카인과 담배를 즐기고 끊을 수 없고 거짓말 탐지기를 가볍게 통과할 수 있고, 들키지 않고 수사망을 빠져나와본 사람이다.
캐서린이 너무 무서운 사람이라고 잊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닉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5년동안 4건이나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인 경험이 있으니 괜히 별명이 'shooter'가 아니다. 코카인이 사람을 망쳤을 수도 있지만, 코카인을 한다고 사람을 다 죽이는 건 아니다. 사람을 죽게 한 건 그의 욕구였다. 모두가 신나서 베스가 범인이라고 할 때, 닉은 얼빠진 듯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뜻하지 않게 베스를 죽여서 범인을 죽인 의로운 형사가 된 순간에도 그는 그리 기뻐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진짜 친구인 거스를 잃은 슬픔에 잠겨서일 수도 있지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이상한 기분은 뭐지, 하고. 그는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등 뒤로 반짝거리는 얼음 송곳을 몰랐을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녀를 잡아넣을 방법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아주 위험한 방법이지만 그게 그가 범인을 잡는 방법이니까.
주도권을 얻은 것 같다고 생각했겠지
캐서린은 닉에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은 다 죽는다고 흐느꼈다. 처음엔 부모님, 그리고 지도교수, 소중하진 않지만 은퇴한 로커, 또다른 연인 록시. 그래서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자기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를 사랑하면 그 역시 죽을 거라는 말처럼. 혹시나 그녀가 안타까운 운명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형사로서의 안테나는 꺼진 셈이다. 사건에서만큼은 우연이란 없다. 적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데 있어선. 아, 그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 깨물어주는 대신 죽여버리고 싶어지는 사람이니까. 언제든 그녀는 그를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다 쓰면 그를 버릴 수도 있다. 언제든 그의 목에 송곳을 박아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닐 뿐. 소중한 것들은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낫다. 어차피 사람은 죽으니까. 그녀에게 기억되고, 책으로 기억되면 영원히 남을 수 있다.
'당신은 내가 알려주지 않는 건 아무것도 알 수 없을거야'
영화가 소름돋는 건 트레이드 마크인 무릎 사이에서는 알 수 없다. 캐서린이 무릎 사이를 들썩이며 그녀의 매력적인 몸을 보여주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늘 상위를 차지한 채 남자를 묶고 언제든 얼음송곳을 찔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섹스신 때문도 아니다. 죽은 이들의 목덜미에 사정 없이 박힌 송곳 때문에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서도 아니다. 결말처럼 그녀가 그의 등 뒤로 얼음송곳을 들었다 놨다해서도 아니다. 소름돋는 건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 주변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데 그녀는 들키지 않았다, 들키지 않아서 그녀로 인해 계속 죽게 될 사람들이 생겨난다. 사람은 어차피 죽으니까, 그녀는 글로 범인인 걸 숨기니까.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신을 거두고 죽어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으니까. 아무리 절제한다 해도 그녀가 살인을 그만둘 것 같아보이지 않는다. 무서운 건 얼음송곳이 아니다. 살아숨쉬는 그녀, 그녀의 살인이라는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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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로부터 '무민'을 그려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글입니다.
*글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민’ 캐릭터는 알고 있었지만, 책과 만화를 읽어 본 적은 없는 내게 무민 작가의 삶을 다룬 영화 〈토베 얀손 〉은 꽤 놀라웠다. 나는 캐릭터에 그를 창조한 작가가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얗고 동그라며 귀여운 트롤인 무민을 그린 작가 역시 아기자기하고 아담한 성품의 온화한 인물이었을 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그러나 완벽한 편견이었다. 토베의 삶은 격정적이었고, 무민은 굴곡진 그녀 삶의 순간들을 오롯이 품은 넓고 깊은 캐릭터였다.
영화 〈토베 얀손〉은 토베가 삶의 가장 중요한 두 영역인 일(예술)과 사랑 모두에서 실패를 겪었다고 말한다. 먼저 예술이다. 누군가는 무민이 토베 사후에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닌데 왜 그녀가 예술 영역에서 실패했다고 말하는지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베에게 예술적 성취는 유명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토베의 아버지는 핀란드의 유명한 조각가였다. 토베가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길 꿈꿨다면 조금은 수월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만약 그랬다면 무민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베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둘은 자주 갈등을 겪었다. 결국 토베는 집을 떠나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엉망이 된 허름한 집을 구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토베는 무민으로 성공을 거둘 때까지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무민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어도 기뻐하지 않는다. 토베가 무민을 ‘본업(그림)’에 방해되는 시시한 낙서, 제대로 된 예술이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민은 생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자신에게 사인을 받은 후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는 씁쓸한 토베의 표정은 그녀가 무민에 느끼는 거리감을 잘 보여준다.
그다음은 사랑이다. 영화 마지막에 토베가 평생을 함께할 레즈비언 파트너 투티키를 만났다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영화가 비추는 생애 기간에 토베는 늘 사랑의 실패자였다. 토베의 사랑이 향하는 첫 번째 대상은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유부남 국회의원 아토스다. 그는 다정하고 사려 깊으며 토베를 이해해준다. 그런데 토베가 아토스를 사랑하는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토베의 두 번째 사랑은 헬싱키 시장의 딸, 연극 연출가, 레즈비언인 비비카다. 비비카는 저돌적으로 토베를 유혹하여 사로잡는다. 아토스는 비비카에게 마음을 빼앗긴 토베를 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그는 토베와 비비카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걸 견디기 어렵다. 한 명의 마음속에 두 명을 향한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에게 생경하다. 아토스와 토베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진다.
문제는 비비카와의 관계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 있다. 바람둥이인 비비카는 속박받는 관계를 싫어한다. 욕망이 이끄는 곳을 따라다니는 그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비비카에게 상처 받은 토베는 충동적으로 아토스에게 청혼하기도 한다. 동성애 사랑 실패의 보상으로써 이성애 결혼으로 도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토베의 양심은 이러한 도피가 오래도록 지속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청혼에 행복해하는 아토스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아토스는 또 한 번 좌절한다. 둘이 한 때 사랑하는 사이였기에, 아토스의 좌절은 토베의 좌절이기도 하다. 사랑의 실패는 쌓여만 간다.
비비카를 향한 토베의 마음은 그 이후로도 오래 이어진다. 토베가 최종적으로 비비카를 단념하는 건 그녀가 영원히 자기 손에 잡히지 않을 사람이란 걸 분명히 깨달은 후다. 토베는 비비카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여러 파트너 중 한 명으로 머무는 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아니다. 토베가 평생을 함께할 연인 투티키를 만나는 건 이 모든 혼란과 상처가 지나간 후다.
요컨대, 토베 얀손은 예술가를 지향했으나 도달하지 못했고, 사랑을 갈구했으나 안착하지 못했다. 이중의 실패는 경제적 윤택과 그녀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게 만들었다.
무민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토베는 좌절과 고난의 순간에 틈틈이 무민을 그렸다. 스너프킨은 아토스, 토프슬란과 비프슬란은 각각 토베 자신과 비비카를 형상화한 캐릭터라고 한다. 항상 파이프를 물고 있는 스너프킨과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토프슬란·비프슬란은 모두 토베가 가장 깊게 사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착안한 캐릭터였다. 무민은 토베 삶의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다.
무민이 끝내 토베와 세상을 화해시킨다는 점이 흥미롭다. 늘 세상에 거부당했던 토베는 자기 내면의 분노, 좌절, 고집, 사랑, 행복의 감정을 쏟아 무민을 창조했다. 얄궂게도 그런 무민은 토베를 밀어낸 세계에서 환대받는다. 토베가 열렬히 갈망했던 대상은 토베를 외면했지만, 자신이 부정당했다는 마음을 담아 먹고살기 위해 만든 캐릭터는 토베에게 오래도록 지속될 명예를 선물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는 토베로부터 삶이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임을 배운다. 이처럼, 때때로 ‘실패한 삶’은 예술이 된다. 생애사의 중요한 대목을 전부 담아내야 한다는 전기 영화의 의무감이 헐거운 감정선으로 이어진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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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형상은 언제나 만족스러울까? 지금 내 모습은 다른 갈림길을 택했던 수많은 다른 나와 비교해서 얼마나 괜찮은 삶인가? 마블에서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등장시켰던 것은 향후 전개될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였지만, 다중우주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영화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제목으로는 전개를 가늠하기조차 어렵고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인 영화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감정이 너울너울 파도를 친다. 이 상상력의 폭발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끈다.
1. 세탁소
에블린은 남편인 웨이먼드와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는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세금 처리를 위해 영수증을 들고 직접 국세청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시작했던 세탁소는 다사다난했다. 업장을 운영하며 겪는 사건 사고들은 오전 시간만 하더라도 몇 건씩 발생했다. 세금 처리에 자잘한 실수들도 있었고, 소통을 원활하게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국세청 직원이 깐깐하게 군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영화에 드러나진 않지만 이런 과정이 단지 올해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세금 징수는 매년 있는 일이고 올해 무사히 신고를 마치고 나면 내년의 몫이 남아있다. 인생에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세금과 죽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세탁소에 맡겨진 옷은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친다. 옷을 맡기고 찾아가는 과정들, 매번 보는 단골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반복적이다. 이러한 반복은 지극히 권태롭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지만 우린 결코 매일매일이 똑같은 하루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시시때때로 무의식에 스며든다. 변화는 의식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하고 미세하다. 일상은 감정을 무뎌지게 한다. 가끔은 가족 간의 약속, 기념일, 의미 있고 중요한 대화도 일상에 무너진다. 그러니 가족회의를 소집하는 순간은 대개 정말로 중요한 대화들의 유통기한이 끝난 이후가 된다.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도 그랬다. 크고 작은 오해들은 대화로 풀어낼 타이밍을 놓친 채로 일상 속에 숨겨진다.
2. 새해맞이 기념행사
세탁소에서는 새해맞이 기념행사를 연다. 가족끼리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을 초대해 다 같이 편하게 노는 자리다. 맛난 음식도 있고 분위기도 좋다. 올해는 세무처리 때문에 예년처럼 즐겁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매년 맞이하는 새해지만 우린 그 반복되는 순간을 기념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해 다시 1년 전의 그 자리로 돌아오면 우리의 삶도 다시 시작된다. 다시금 생일을 기다리고, 공휴일을 기대하고, 작심하고 3일을 버텨낼 의지를 얻는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인위적으로 반복되는 주기를 적어두는 것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일이다. 인간은 무한함을 견딜 수 없으니까.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어도 남은 삶이 유한하기에 우린 지금 이 날들을 기념해야만 한다.
기념일은 표지판 같은 역할이다. 올해는 얼마나 남았는지 돌아보고 무엇을 해왔는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일상 속에 남겨진 날들에 의미를 덧붙이려는 노력은 그간의 과정에 대한 축하인 셈이다. 기념일의 좋은 점은 딱히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해내지 않더라도 날짜가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냥 그 시간에 그때에 있었기 때문에 기념일을 맞는다. 매년 반복되는 삶 속에서 권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히도 1월 1일에는 결심을 불태울 의지 또한 충전된다. 변화를 만들어낼 의지를 사랑하고 긍정해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꼭 인간만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식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3. 웨이먼드와 에블린
거대한 악에 맞서기 위한 선함은 물리력이 내포된 수단이 아닌 친절한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몰라서 지나치게 가혹해질 때가 있으니까. 싸움이 발생하는 와중에 혼란스러워하는 웨이먼드는 간절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외친다. 우리가 더 다정해져야 한다고 간절하게 소리친다. 내내 철없는 것처럼 굴었던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상황을 바꿔낸다. 몇 마디 진솔한 설명과 약간의 호의를 통해 마술처럼 분위기가 바뀐다. 웨이먼드는 특히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혼란스러울 때는 다정해지라는 이야기를 건넨다. 아주 사소한 일상 속의 웃음, 실없는 장난들과 대화. 애정이 만들어내는 관심은 세계를 바꾼다. 다정함에는 그런 힘이 있고 다른 세계의 웨이먼드는 그걸 '전략적 친절함'이라 말한다. 무언가를 무작정 교정하거나 구제하려는 시도보다 애정 어린 관찰과 소통이 해결에 적합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다.
조부 투바키는 그런 일순간의 감정을 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얻어낸 세계의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주변 어느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극심하게 고통받았다. 가장 유능했기 때문에 한계를 넘어서게끔 자극하고 몰아붙였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에블린이 했던 말과 행동은 그녀를 위로한다. 이 세계의 딸이든 다른 세계의 거대한 악당 조부 투파키든. 궁극적인 공허와 허무를 이야기한들 크게 상관없었다.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여기 있고 싶다'는 답이면 충분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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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 하나를 마주한 두 개의 선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묵직한 물음처럼 보이지만, 사실 삶만큼 단순한 게 있나 싶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 자라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 '나'의 개념이 생긴다는 건 곧 '남'을 인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래엔 다른 이들이 모인 세상을 지각하게 된다. 성장하는 과정은 얼마나 바쁘던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들의 투성이. 외부의 모든 일들에 자극하고 반응하다 보면 어느샌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렴풋이 나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느꼈다가 문득, 거대한 깨달음처럼 다가오는 때를 맞닥뜨린다. 나는 언제나 나였는데, 나는 나를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무얼 좋아하고, 어떤 걸 원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내 삶은 나의 것이고, 그래서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나를 끌어안아야 한다.
본래 중심이 반듯하게 잡힌 사람이라면, 혹은 '그래도 해야지 뭐' 같은 담담함으로 고민을 가벼이 넘길 수 있다면, 삶이 괴롭다 못해 무서운 느낌은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는,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도 내가 나를 끌어안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다만 느꼈을 뿐이다.
무겁다.
나는 나를 견디기가 너무 무거웠다.
얘가 너무 까탈스럽고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나는 나로 살아가면서 생을 견디라는 걸까. 두려움에 내몰린 존재가 가장 흔히 반응하는 건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이다. 세상 모든 게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고쳐야 할 것들밖에 없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그건 내가 바라보는 나의 표상이었다.
우리 각자는 평생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없다지만, 거울처럼 간접적으로 인지할 방법은 많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나의 태도와 생각, 선입견, 느낌. 그 모든 게 나였다.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 유난히 거슬리는 상황이나 사람, 추구하는 방향, 원하는 세상.
그런데 여기서 한 겹 더 벗겨야 한다. 단순히 어떠한 태도, 물건, 상태 따위는 가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걸 가짐으로써 얻게 될 감정이나 시선, 느낌들을 얻고 싶은 거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건 결국 결핍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없다고 생각하니까 갈망한다.
그러니까, 삶의 본질은 단순하다. 이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투영이기에 내가 오늘 세상과 교류하며 반응한 모든 것들에 '왜?'를 묻다 보면 꽁꽁 숨겨둔 나의 갈망, 나의 결핍을 마주한다. 그걸 바꾸려고 애쓸 것도 없이, 그저 관망하면 된다. 그렇구나, 하면서.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건 부족함을 채우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를 자연스럽게, 가능하다면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보면 또 다른 것이 보이고.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는 게 삶이다.
새삼스럽게도 삶을 되돌아본 건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고 온 후였다. 특정 갈래로 압축할 수 없는, 쉽게 말해 주제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영화.
'섭식장애'와 '모녀', '다큐'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는 이 영화를 표현할 순 있어도 정의할 수 없기 때문 아닐까. 사람을, 특히 사람 둘의 관계에 집중한 영화-그것도 실제인물이 주인공인-는 필연적으로 중구난방이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삶은 계획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하다. 대개 뜻밖의 일은 터닝포인트가 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끼치므로, 굉장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변화는 나 자신만 알 수 있고, 이를 언어로 발화하기란 쉽지 않다.
픽션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다.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그 서사의 논리구조가 맞게끔 보여줄 수 있다. 오히려 납득 가능한 말과 행동, 태도 따위를 보며 사람들은 공감하며 응원한다. 하지만 우리도 알지 않는가. 어떤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바람에 계기를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그저 일이 벌어졌고, 그 안에서 변화했고, 결과로써 지금을, 동시에 과정으로써 앞으로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니 영화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내가 써오던 리뷰는 영화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그와 타인과의 관계를 풀어내고 해석하고 의미를 덧대어 매듭짓는 행위였기에. 지금은 무엇도 설명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바라게 된다. 칠흑 같은 영화관에 들어서, 앉고.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과거의 연이 떠올랐다면 그때에 잠시 잠겨있다가 다시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왠지 모를 감정이 올라오면 흘려내고, 그렇게 90분을 머물러 보기를. 그 마음을 담아 끝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시와 산문을 오가는 짤막한 글로 정리해 본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는 각자의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이 놓였다. 혼자서는 너무 심심하거나 혹은 헛헛할까 봐 함께 나눌 반찬거리도 준비해 뒀다.
나란히 마주 앉은 두 사람. 영원히 하나가 될 일 없는 평행선. 이 얼마나 다행인가. 공유할 수 있는 것과 온전한 나만의 것 모두를 지녔다는 게. 원하는 만큼 원하는 때에, 원하는 대로 맞닿으면 된다. 가끔은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삐걱대겠지. 어설프게도. 서로를 할퀴며 만든 생채기가 도리어 서로를 존중할 선을 만들어낸다.
완벽히 겹쳐지는 때. 거기엔 나도 너도 없다.
그러나 이건 다 지나간 이야기.
닿았던 순간도, 맞잡은 순간도, 떨어진 순간도, 결국 찰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걸까? 가까웠다가도 금세 멀어져 각자의 길을 걷는 걸 보면. 그렇게 평행선은 계속된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가 서로의 존재가 콩알만큼 보였다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눈앞에, 빼꼼.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 후 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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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추천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내일 드디어 대한민국 대표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을 하는데요!
코로나 이후 3년 만에 정상적으로 개최됐으며, 그동안중단되었던 프로그램도 모두 재개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티켓 예매는 이미 진행되었지만, 현장 예매도 가능하니
오늘 씨네랩에서 추천하는 작품 외 다른 작품들도 한번 살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추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문 앞에 두고 벨 x (2022)
ⓒ 부산국제영화제
SYNOPSIS큰맘 먹고 마련한 중고 자전거를 끌고 배달 일에 나선 지호는 어느 밤 우연찮은 배달 실수로 동분서주하게 된다. 일을 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지는 역설적인 날. 골목 어귀마다 배달 라이더와 마주칠 수 있는 시대에 어딘지 익숙한 상황, 있을 법한 일들이 펼쳐진다.CINE PICK!
독립영화를 시작으로 상업영화 그리고 드라마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있는 이주영 배우의 감독으로서 첫 번째 연출작인만큼 많은 이들에게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품이다.
나의 작은 나라 (2022)
ⓒ 부산국제영화제
SYNOPSIS도쿄에 인접한 사이타마현에 사는 17세 쿠르드인 소녀 사랴는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여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청춘을 보내왔다. 하지만 가족의 난민 신청이 인정받지 못하고, 아버지가 입국관리국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CINE PICK!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끄는 회사인 분부쿠에 소속된 가와와다 에마의 상업 장편 데뷔작이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초청되어 엠네스티 국제심사위원 특별언급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 (2021)
ⓒ 부산국제영화제
SYNOPSIS동물들의 영화관이 열리고 스크린에는 인류의 역사가 펼쳐진다. 히틀러, 베트남전, 원폭, 나치수용소, 내전, 학살 등 인간이 자행한 비극의 역사를 관람한 동물들은 거기서 무얼 배울 것인가?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에서 리티 판은 동물들이 권력을 쥐게 된 세상을 상상한다.CINE PICK!
동물이 권력을 쥐게 되는 세상을 스톱모션으로 담아낸 영화이다. 화면 분할, 내레이션 등을 통해
독특한 감독의 스타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칼렛 (2022)
ⓒ 부산국제영화제
SYNOPSIS어느 날 한 마법사가 훗날 줄리엣이 하늘을 나는 주홍 돛을 단 배에 납치될 거라는 예언을 하고, 줄리엣은 이 예언을 굳게 믿으면서 왕자를 기다린다.CINE PICK!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은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작품으로 칸영화제 감독주간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감독 특유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디셈버 (2022)
ⓒ 부산국제영화제
SYNOPSIS7년 전, 고등학생이던 딸이 친구의 손에 살해당했다. 딸을 잃은 부모는 이혼하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 채 남은 삶을 분노와 슬픔에 빠져 보낸다. 어느 날, 살인을 저질렀던 딸의 친구가 주어진 형량이 부당하다는 소송을 낸다. 아버지는 지금은 재혼한 어머니를 만나 딸을 죽인 살인자를 사회로 복귀시켜서는 안 된다고 설득한다. 둘은 법정에서 딸을 죽인 살인자와 대면한다.CINE PICK!
스틸샷 속 배우의 눈빛이 강렬해 영화에 대한 궁금증 불러일으킨다. 청소년 범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전작에 이어 구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6명의 등장인물 (2022)
ⓒ 부산국제영화제
SYNOPSIS긴장감이 감도는 영화 세트. 호러영화를 촬영하려는 감독(마리오 마우러)은 무척이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제멋대로인 배우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와중에 갑작스럽게 정체불명의 여섯 명이 등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죽은 작가가 남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CINE PICK!
태국의 초호화 캐스팅으로 올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이탈리아의 극작가 루이지 피난델로의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을 각색한 작품이다.
슬픔의 삼각형 (2022)
ⓒ 온피프엔
SYNOPSIS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인 모델 커플이 탑승한 호화 크루즈가 좌초되면서 무인도에 남겨진 사람들의 생존기CINE PICK!
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자,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두 번째 황금종려상이다.
초현실적인 코미디를 그린 작품으로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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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연과 상상(2021)> 리뷰
-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을 감상했다. 러닝타임은 두 시간가량이지만 세 개의 옴니버스가 엮인 영화이기에 각 단편은 30-40분쯤 된다. 이것은 각본이 의도적으로 특정 주제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실제로 영화는 각기 다른 상황의 인물이 ‘우연’ 속에서 ‘상상’하는 모습을 거듭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끊임없이 기대 지평을 배반하는 각본을 통해 관객 역시 영화를 감상하는 도중 여러 상상을 하고, 자신에게 이러한 우연은 없었는지 생각하게 되기에, 제목 자체가 적지 않은 확장성을 지닌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우연과 상상이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보편 경험일 테니.앞서 언급했듯 <우연과 상상>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기묘한 애정 전선을 통해 우연이 낳은 상상을, ‘문은 열어둔 채로’는 앙심을 품은 개인의 상상과 우연이 맞물리며 맞이하게 되는 어떤 파국을, ‘다시 한번’에서는 우연과 상상이 동시 결합하여 빚어낸 가슴 아린 재회를 그린다. 모든 에피소드는 단절되어 있으나 대다수의 장면이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선 분명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특별한 액션이나 빠른 화면 전환조차 없어 단조로워지기 쉬운 세 개의 단편에 감독은 121분 동안 ‘우연’과 ‘상상’을 예상치 못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매번 새로운 활력과 긴장감을 불어넣는데, 이 솜씨가 정말이지 굉장하다. 상영관에서 다른 관객과 웃음과 탄식을 공유하는 건 참 오랜만이었지 않았나, 생각했을 만큼.※ 이하 스포일러 주의세 에피소드각 에피소드의 플롯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우연히 태어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츠구미(현리)는 업무를 통해 친해진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에게 최근 만난 한 남자,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에 대해 말한다. 그는 아직도 2년 전 헤어진 전 여자 친구를 떠올릴 만큼 순정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순간을 말하는 츠구미의 이야기가 너무도 따뜻한 탓에 그와 카즈아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 즈음, 영화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카즈아키의 전 여자 친구가 바로 메이코라는 사실이다.두 번째 이야기인 ‘문은 열어둔 채로’ 역시 첫 번째 에피소드처럼 세 사람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취업이 예정되었던 사사키(카이 쇼마)는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가 재학 중 취업자에 대한 특례 인정을 해주지 않아 유급생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그러진 것에 대해 세가와를 원망하고,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자 불륜을 저지르는 파트너이자 늦깎이 대학생인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교수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오는 문이 열린 세가와 연구실에서 그의 신작 소설(심사위원조차 노골적인 행위 묘사라며 지적했던 페이지)을 낭독한다. 연구실의 문이 열려있는 동안엔 그 누구도 나오와 세가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나오의 녹음 파일이 타인의 손에 떨어짐에 따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운명을 겪게 된다.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번’은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의 이야기다. 동창회에 어울릴만한 타입이 아님에도 그는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향을 찾는다. 허탕을 쳤다고 생각했으나, 우연히 나츠코는 기차역 앞에서 아야(카와이 아오바)를 마주한다. 아야의 집에 초대된 후에야 나츠코는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유키)이 아닌 걸 알고, 아야 역시 도쿄로 갔던 다른 동창과 나츠코를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둘의 이야기는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한다.우연/상상을 포용하는 인간의 선택우연이란 무엇인가? 하마구치 감독은 "우연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라고 말했다는데, 운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입장에선, 완전한 필연이란 조작된 가상의 세계 – 시나리오 따위 – 에서만 허락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 중 결국 우리가 ‘기억하기로 선택'하여 우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일련의 사건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무엇이지 않을까.만일 우연을 관계에 기초한 불확실성, 그러니까 타인과 자신이 유관하다는 전제 하에서 발생하는 불확실한 사건들의 연속이라 정의한다면,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메이코는 우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메이코는 자꾸만 모르겠다는 말을 거듭한다. 무책임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메이코에게 있어 ‘모르겠다’는 고백은 자신이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런데 메이코가 츠구미의 이야기를 듣고서 카즈아키를 2년 만에 찾아갔을 때, 관계의 주도권이 옮겨간다. 카즈아키는 분명 헤어진 후에도 메이코를 잊지 못했지만, 최근 관심이 생긴 사람이 그가 아니라면 메이코를 따라가지 말라는 부하직원의 충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산재한 우연이 인간에게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생각하지만 우연은 기실 우리가 인지하고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순간 발생한다는 것을 이보다 더 근사하게 비유할 수 있을까. 결국 메이코는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홀로 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찍는 것은 완공되지 않은 거리의 풍경이며 나뭇가지로 막혀 트이지 못한 하늘이다. 메이코는 예기치 않게 진실을 발견하였을지라도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불확실성을 확언하는 데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메이코이기에 그가 사랑을 인식하는 데에 시간이 소요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순간이 자신만을 위해 적절하게 찾아오지는 않는 법이니, 상실 역시 마땅한 결과물로 받아들여야 하리라.이렇게 우연 자체의 속성을 파고든 이후 등장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감독은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가 우연이라 적당히 부르는 사건이, 사실은 스스로가 뿌린 씨앗의 결과물이 아닐까 의심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나오와 세가와의 이혼/지위 박탈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사사키의 비대한 자아(자신은 이보다 더 나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를 접점/시발점으로 하여 파생되었을지라도, 뜯어보면 인물 각자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사키는 자신이 프랑스어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으며, 나오는 가족이 있음에도 내연관계를 저버리지 않았고, 세가와는 나오에게 녹음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나. 그리고 5년 후, 나오와 사사키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속성조차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인생에서 필요하다고 말한 세가와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인지 나오는 사사키를 껄끄럽게 대하던 태도를 철회하고 자신의 명함을 건넨 후 세가와와의 관계를 회복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이는 이전보다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사사키는 거부한다. 나오의 손을 빌려 세가와를 응징하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사사키는 자기 우월감에 도취된 상태에서 답보하는 셈이다. 이에 나오는 자발적으로 유혹을 선택한다. 그저 한 번의 마주침으로 끝날 수 있었던 긴장은 그리하여 연장되고, 우연이란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동일한 패턴으로 영원 회귀할 수 있음이 암시된다.마지막 에피소드는 '당신은 분명히 내 기억 속 누군가일 것'이라는 믿음이 부른 상상의 부산물이다. 충분히 어색해질 수 있음에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완전히 정립한 중년은 흔들리지 않는다. 서로를 나츠코의 옛 연인/아야의 친구라 상상하며 역할극을 진행함으로써 나츠코는 하지 못한 말을 토해내고, 아야는 자신조차 바라보지 못했던 내면을 이끌어낸다. 마음 깊은 곳의 공허를 메웠다기보다는 공허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은 두 사람은 묘한 연대를 이룩하고, 이는 역 앞에서 헤어지던 순간 아야가 동경했던 20여 년 전 동창의 이름을 나츠코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 아야가 기억해낸 이름이 노조미(소망)이라는 점은 퍽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우리는 우연을 통해 후회를 털어내거나 잊었던 꿈을 되찾음으로써 성장할 수도 있는 셈이니,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에게 덤블도어가 건넨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해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거란다."영화를 본 후, 우리네 일상을 시나리오로 만든다면 이보다 더 엉뚱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촌극에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영화든 현실이든 기대를 배반당하는 지점은 한결같이 우스꽝스럽다. 역시 삶은 원경에서는 비극처럼 보일지언정 가까이에선 희극인 모양이며, <우연과 상상>은 그런 점에 있어 더없이 훌륭한 리얼리즘 영화일 것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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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4] 자살을 선택한 사람에 대한 세심한 접근
Rabbitgumi 입니다! 김혜수 배우가 주연한 영화 내가 죽던 날 을 보고 왔어요.
자살한 아이에 대한 수사를 종결시키기 위해 마무리 수사를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데요.
한 사람이 자살로 이르는 심리묘사가 탁월합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이 자살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사람의 믿음과 도움을 통해 보여주려 합니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좋은 드라마를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봐주세요!^^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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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명탐정 코난 : 범인 한자와 씨> 공식 예고편
여기는 범죄 도시, 베이커가. 세계 최고 수준의 범죄율로 악명 높은 이곳에 누군가가 칠흑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남자(혹은 여자?)의 목적은 ‘어떤 사람’을 살해하는 것. 그렇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에 없어선 안 될 그 녀석이 이번엔 주인공이다! 온몸을 감싼 검은 타이츠, 순백의 두뇌를 소유한 그(녀)의 이름은 바로... 범인 한자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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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원초적 본능>, 무릎 사이론 알 수 없는 것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드디어, 갑자기 본 영화. 이런 스릴러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봤을텐데. 해석의 재미가 쏠쏠하다. 여타 매혹적인 장면과 눈빛이 가득한 영화다. 제목은 원초적 본능이라 본능의 '끝까지 간다' 버전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줄 타기를 잘하고 있다. 형사 닉 커랜과 작가 캐서린 트라멜. 그들의 한 마디가 떠나질 않는다. 살인은 담배와 달라. 그만둘 수 있으니까, 라는 그녀의 말과 그의 말. 난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잡아넣을 거야. 캐서린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자신이 알려주지 않는 걸 절대 알 수 없을 거라면서. 영화가 끝나면 질문을 각자에게 하고 싶다. 닉에게 묻고 싶다. 정말 캐서린이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라도 알고 있는지, 그녀를 정말 잡아 넣을 자신이 있는지. 그리고 캐서린, 살인이 정말 담배와 다른가요? 그만둘 수 있는 건가요?
누가 취조 당하는 걸까? 이 장면으로만 기억되서는 안 될 영화
캐서린 트라멜을 '섹시한 악녀'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녀가 다리 한번 꼬았을 뿐인데 경찰들이 정신을 못차린다. 누군들 안그랬겠나. 아무것도 숨길 것 없다며 침착하게 사람을 당황시키는 말까지. 그렇다. 그녀를 '섹시한 악녀'라 한다면 있을 건 다 있는 말이다. 그녀는 섹시하고, 매력적이고, 악하고, 여자다. 하지만 뉘앙스가 좀 다르다. 그녀는 원한다면 언제든 섹시하기 보단 우아할 수 있고, 악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라면 그녀는 똑똑한 살인자라고 말하겠다. 섹시함 역시 그녀의 지능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에이미 던/캐서린 트라멜
영화를 보면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가 떠오르는데 좀 다르다. 에이미와의 공통점은 꽤 많다. 사람들의 심리 파악에 능하고,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라는 점. 어쩌면 에이미가 캐서린을 많이 닮은 후배일 수도 있겠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마치 세상을 자신이 쓰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만 차이는 명확하다. 에이미는 살인을 즐기진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 역시 죽음을 주로 다루지 않는다. 자신은 '어메이징 에이미'처럼 늘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원했다. 우아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로 보이더라도, 결국엔 해피엔딩. 몇 명이 알아차리는 것 정도는 상관 없다. 남편은 알고도 자신을 떠날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캐서린은 살인을 즐긴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해도 들키지 않을까? 가 궁금하다. 담배만큼 즐기지만 필요에 따라 절제하고 있다. 그녀의 모든 책에선 사람이 죽는다. 대체론 여자가 남자를 죽이고, 그 이야기를 위해서 그녀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 사람을 유혹하고 죽여야 하기 때문인지, 자신이 지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관능적인 모습을 유지하려 한다. 그걸 위해 돈도 시간도 공들이고 있다. 그녀에겐 즐거움이 중요하다. 사람과 죽음, 욕망 같은 것들. 사람이 이리 저리 게임판에 끌려다니는 게 재밌으니까, 그로 인해 충족할 수 있는 많은 욕망은 감칠맛이 난다. 에이미가 똑똑한 연기자라면, 캐서린은 똑똑한 살인자다.
닉과 캐서린, 베스를 둘러싸고 다양한 7건의 사고 혹은 사건이 나타난다. 배가 고장나 돌아가셨다는 캐서린의 부모님. 자동차로 추격하다 추락사한 캐서린의 연인 록시. 살인의 경우 흉기는 얼음송곳과 총이다. 얼음송곳으로 찔려죽은 세 사람. 캐서린과 베스의 지도교수. 캐서린과 만나던 은퇴한 로커. 닉의 동료 형사 거스. 총을 맞고 죽은 두 사람. 베스의 전남편. 닉과 날을 세우던 죽은 형사 닐슨.
코난을 10년 넘게 봐서 인지 사라지지 않는 찜찜함
일단 경찰에서 수사하던 형사 닐슨 및 거스 살인 사건(아마 은퇴한 로커 살인사건까지도)의 용의자는 베스로 결론내려졌다. 범인이 베스라는 결말은 충격적이긴 하다. 닐의 심리치료사였고 다른 형사들과 매일 얼굴을 맞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게 너무 완벽하게 다 맞아들어간다는거다. 범죄현장에서 멀지 않은 계단에 고이 모셔진 금발의 가발, 경찰들만 입는 우의와 얼음 송곳. 캐서린을 누명씌우려 했던 그녀의 의도가 이렇게 간단하고 투명하게 드러난다니. 그녀의 집에서 발견된 총과 서랍에 놓인 캐서린에 대한 사진, 살인을 다룬 캐서린의 책. 어째 그렇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증거를 보란듯이 집에 걸어뒀을까. 이건 하나 하나 흩어져있던 증거를 모아 범인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의 희열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증거는 베스가 범인이라는 걸 증빙하는 서류같다.
너무 완벽할수록 찜찜하다. 베스가 닐슨과 자신의 전남편은 총으로 죽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스는? 거스는 베스가 죽였는지, 캐서린이 죽였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닉은 캐서린이 이미 탈고해서 인쇄까지 한 미출간 신간 <Shooter>의 결말을 봤다. 책에선 주인공인 형사가 엘리베이터에서 살해된 동료를 찾으러 간다고까지 대본처럼 쓰여 있었고 이는 거스의 죽음과 일치했다. 물론 책에서 쓰여진대로 이미 그는 송곳으로 난도질 당한 후였지만.
베스(엘리자베스) 가너/캐서린 트라멜
베스와 캐서린 모두 거짓말을 했다. 베스는 전남편의 죽음도, 전남편과의 결혼도 닉에게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당시에 '여자친구'가 있었다는데 모를 일이다. 거스가 죽는 사건현장에서 만나자는 메세지가 있어서 왔다고 했다. 굳이 그녀는 총을 들고 자신을 의심하는 닉 앞에서 주섬주섬 열쇠고리를 꺼내다 총을 맞았다. 총을 가진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는데. 캐서린은? 그녀는 책에서 일어난 사건은, 실제 사건이 일어난 '후'에 썼다고 말했다. 배가 고장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책을 썼다고. 하지만 은퇴한 로커 살인사건이나, 형사가 죽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먼저 완성되었고 그 이후에 살인이 벌어졌다. 작가인 내가 이 그대로 하기엔 자신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이 걸 그대로 따라하는 멍청한 짓을 '누가' 한단 말인가?
베스가 생각보다 캐서린과 관련이 많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끼처럼 맞춰진 퍼즐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캐서린이 사랑에 빠져서 닉에게 한번도 안 하던 고백을 하며 자신을 따라하던 '리사 후버맨'을 말한 것도 이상하다. 베스는 이미 비슷한 얘기를 한참 전에 했고, 캐서린이 이렇게 말했을 거라며 나중엔 그대로 맞추기까지 한다. 캐서린에게 베스는 록시와는 다른 존재다. 록시와 캐서린이 성적으로 탐닉하고 관음하는 사이라면, 둘 사이는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이일 수도 있다. 책을 탈고한 그 짧은 시간에 베스가 캐서린의 책을 입수해서 있는 그대로 실현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캐서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베스가 캐서린에게 이용당해 꼭두각시처럼 범죄장소로 오게 되었다 해도, 어차피 캐서린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리는 없다. 사건 당일 그녀가 <shooter>라는 책을 다 썼으니 닉은 더 이상 필요헚다며 매몰차게 이별을 고한 건 왜일까. 거스가 살해되기까지 무대를 세팅했든, 직접 행동에 옮겼든 그의 시선을 벗어나 뭔가를 했을 시간은 충분하다. 자의든 타의든 베스는 캐서린의 책대로 사람이 죽는 멍청한 '짓'을 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 닉은 바보같은 형사, 그녀와 사랑에 빠져 눈이 멀어버린 멍청이로 남아있을까. 그도 곧, 혹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베스만 죽은 것으로 모든 게 끝났을까? 캐서린에 대한 의심은 이렇게 사랑의 힘으로 영영 이겨낼 수 있을까? 닉과 캐서린이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외모도 있지만 자신과 같은 류의 사람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살인자. 코카인과 담배를 즐기고 끊을 수 없고 거짓말 탐지기를 가볍게 통과할 수 있고, 들키지 않고 수사망을 빠져나와본 사람이다.
캐서린이 너무 무서운 사람이라고 잊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닉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5년동안 4건이나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인 경험이 있으니 괜히 별명이 'shooter'가 아니다. 코카인이 사람을 망쳤을 수도 있지만, 코카인을 한다고 사람을 다 죽이는 건 아니다. 사람을 죽게 한 건 그의 욕구였다. 모두가 신나서 베스가 범인이라고 할 때, 닉은 얼빠진 듯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뜻하지 않게 베스를 죽여서 범인을 죽인 의로운 형사가 된 순간에도 그는 그리 기뻐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진짜 친구인 거스를 잃은 슬픔에 잠겨서일 수도 있지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이상한 기분은 뭐지, 하고. 그는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등 뒤로 반짝거리는 얼음 송곳을 몰랐을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녀를 잡아넣을 방법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아주 위험한 방법이지만 그게 그가 범인을 잡는 방법이니까.
주도권을 얻은 것 같다고 생각했겠지
캐서린은 닉에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은 다 죽는다고 흐느꼈다. 처음엔 부모님, 그리고 지도교수, 소중하진 않지만 은퇴한 로커, 또다른 연인 록시. 그래서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자기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를 사랑하면 그 역시 죽을 거라는 말처럼. 혹시나 그녀가 안타까운 운명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형사로서의 안테나는 꺼진 셈이다. 사건에서만큼은 우연이란 없다. 적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데 있어선. 아, 그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 깨물어주는 대신 죽여버리고 싶어지는 사람이니까. 언제든 그녀는 그를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다 쓰면 그를 버릴 수도 있다. 언제든 그의 목에 송곳을 박아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닐 뿐. 소중한 것들은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낫다. 어차피 사람은 죽으니까. 그녀에게 기억되고, 책으로 기억되면 영원히 남을 수 있다.
'당신은 내가 알려주지 않는 건 아무것도 알 수 없을거야'
영화가 소름돋는 건 트레이드 마크인 무릎 사이에서는 알 수 없다. 캐서린이 무릎 사이를 들썩이며 그녀의 매력적인 몸을 보여주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늘 상위를 차지한 채 남자를 묶고 언제든 얼음송곳을 찔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섹스신 때문도 아니다. 죽은 이들의 목덜미에 사정 없이 박힌 송곳 때문에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서도 아니다. 결말처럼 그녀가 그의 등 뒤로 얼음송곳을 들었다 놨다해서도 아니다. 소름돋는 건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 주변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데 그녀는 들키지 않았다, 들키지 않아서 그녀로 인해 계속 죽게 될 사람들이 생겨난다. 사람은 어차피 죽으니까, 그녀는 글로 범인인 걸 숨기니까.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신을 거두고 죽어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으니까. 아무리 절제한다 해도 그녀가 살인을 그만둘 것 같아보이지 않는다. 무서운 건 얼음송곳이 아니다. 살아숨쉬는 그녀, 그녀의 살인이라는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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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로부터 '무민'을 그려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글입니다.
*글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민’ 캐릭터는 알고 있었지만, 책과 만화를 읽어 본 적은 없는 내게 무민 작가의 삶을 다룬 영화 〈토베 얀손 〉은 꽤 놀라웠다. 나는 캐릭터에 그를 창조한 작가가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얗고 동그라며 귀여운 트롤인 무민을 그린 작가 역시 아기자기하고 아담한 성품의 온화한 인물이었을 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그러나 완벽한 편견이었다. 토베의 삶은 격정적이었고, 무민은 굴곡진 그녀 삶의 순간들을 오롯이 품은 넓고 깊은 캐릭터였다.
영화 〈토베 얀손〉은 토베가 삶의 가장 중요한 두 영역인 일(예술)과 사랑 모두에서 실패를 겪었다고 말한다. 먼저 예술이다. 누군가는 무민이 토베 사후에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닌데 왜 그녀가 예술 영역에서 실패했다고 말하는지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베에게 예술적 성취는 유명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토베의 아버지는 핀란드의 유명한 조각가였다. 토베가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길 꿈꿨다면 조금은 수월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만약 그랬다면 무민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베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둘은 자주 갈등을 겪었다. 결국 토베는 집을 떠나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엉망이 된 허름한 집을 구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토베는 무민으로 성공을 거둘 때까지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무민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어도 기뻐하지 않는다. 토베가 무민을 ‘본업(그림)’에 방해되는 시시한 낙서, 제대로 된 예술이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민은 생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자신에게 사인을 받은 후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는 씁쓸한 토베의 표정은 그녀가 무민에 느끼는 거리감을 잘 보여준다.
그다음은 사랑이다. 영화 마지막에 토베가 평생을 함께할 레즈비언 파트너 투티키를 만났다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영화가 비추는 생애 기간에 토베는 늘 사랑의 실패자였다. 토베의 사랑이 향하는 첫 번째 대상은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유부남 국회의원 아토스다. 그는 다정하고 사려 깊으며 토베를 이해해준다. 그런데 토베가 아토스를 사랑하는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토베의 두 번째 사랑은 헬싱키 시장의 딸, 연극 연출가, 레즈비언인 비비카다. 비비카는 저돌적으로 토베를 유혹하여 사로잡는다. 아토스는 비비카에게 마음을 빼앗긴 토베를 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그는 토베와 비비카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걸 견디기 어렵다. 한 명의 마음속에 두 명을 향한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에게 생경하다. 아토스와 토베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진다.
문제는 비비카와의 관계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 있다. 바람둥이인 비비카는 속박받는 관계를 싫어한다. 욕망이 이끄는 곳을 따라다니는 그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비비카에게 상처 받은 토베는 충동적으로 아토스에게 청혼하기도 한다. 동성애 사랑 실패의 보상으로써 이성애 결혼으로 도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토베의 양심은 이러한 도피가 오래도록 지속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청혼에 행복해하는 아토스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아토스는 또 한 번 좌절한다. 둘이 한 때 사랑하는 사이였기에, 아토스의 좌절은 토베의 좌절이기도 하다. 사랑의 실패는 쌓여만 간다.
비비카를 향한 토베의 마음은 그 이후로도 오래 이어진다. 토베가 최종적으로 비비카를 단념하는 건 그녀가 영원히 자기 손에 잡히지 않을 사람이란 걸 분명히 깨달은 후다. 토베는 비비카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여러 파트너 중 한 명으로 머무는 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아니다. 토베가 평생을 함께할 연인 투티키를 만나는 건 이 모든 혼란과 상처가 지나간 후다.
요컨대, 토베 얀손은 예술가를 지향했으나 도달하지 못했고, 사랑을 갈구했으나 안착하지 못했다. 이중의 실패는 경제적 윤택과 그녀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게 만들었다.
무민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토베는 좌절과 고난의 순간에 틈틈이 무민을 그렸다. 스너프킨은 아토스, 토프슬란과 비프슬란은 각각 토베 자신과 비비카를 형상화한 캐릭터라고 한다. 항상 파이프를 물고 있는 스너프킨과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토프슬란·비프슬란은 모두 토베가 가장 깊게 사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착안한 캐릭터였다. 무민은 토베 삶의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다.
무민이 끝내 토베와 세상을 화해시킨다는 점이 흥미롭다. 늘 세상에 거부당했던 토베는 자기 내면의 분노, 좌절, 고집, 사랑, 행복의 감정을 쏟아 무민을 창조했다. 얄궂게도 그런 무민은 토베를 밀어낸 세계에서 환대받는다. 토베가 열렬히 갈망했던 대상은 토베를 외면했지만, 자신이 부정당했다는 마음을 담아 먹고살기 위해 만든 캐릭터는 토베에게 오래도록 지속될 명예를 선물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는 토베로부터 삶이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임을 배운다. 이처럼, 때때로 ‘실패한 삶’은 예술이 된다. 생애사의 중요한 대목을 전부 담아내야 한다는 전기 영화의 의무감이 헐거운 감정선으로 이어진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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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해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형상은 언제나 만족스러울까? 지금 내 모습은 다른 갈림길을 택했던 수많은 다른 나와 비교해서 얼마나 괜찮은 삶인가? 마블에서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등장시켰던 것은 향후 전개될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였지만, 다중우주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영화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제목으로는 전개를 가늠하기조차 어렵고 설명은 최소한으로 줄인 영화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감정이 너울너울 파도를 친다. 이 상상력의 폭발은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끈다.
1. 세탁소
에블린은 남편인 웨이먼드와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는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세금 처리를 위해 영수증을 들고 직접 국세청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시작했던 세탁소는 다사다난했다. 업장을 운영하며 겪는 사건 사고들은 오전 시간만 하더라도 몇 건씩 발생했다. 세금 처리에 자잘한 실수들도 있었고, 소통을 원활하게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국세청 직원이 깐깐하게 군 것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영화에 드러나진 않지만 이런 과정이 단지 올해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세금 징수는 매년 있는 일이고 올해 무사히 신고를 마치고 나면 내년의 몫이 남아있다. 인생에서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세금과 죽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세탁소에 맡겨진 옷은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친다. 옷을 맡기고 찾아가는 과정들, 매번 보는 단골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반복적이다. 이러한 반복은 지극히 권태롭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지만 우린 결코 매일매일이 똑같은 하루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시시때때로 무의식에 스며든다. 변화는 의식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하고 미세하다. 일상은 감정을 무뎌지게 한다. 가끔은 가족 간의 약속, 기념일, 의미 있고 중요한 대화도 일상에 무너진다. 그러니 가족회의를 소집하는 순간은 대개 정말로 중요한 대화들의 유통기한이 끝난 이후가 된다.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도 그랬다. 크고 작은 오해들은 대화로 풀어낼 타이밍을 놓친 채로 일상 속에 숨겨진다.
2. 새해맞이 기념행사
세탁소에서는 새해맞이 기념행사를 연다. 가족끼리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을 초대해 다 같이 편하게 노는 자리다. 맛난 음식도 있고 분위기도 좋다. 올해는 세무처리 때문에 예년처럼 즐겁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매년 맞이하는 새해지만 우린 그 반복되는 순간을 기념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해 다시 1년 전의 그 자리로 돌아오면 우리의 삶도 다시 시작된다. 다시금 생일을 기다리고, 공휴일을 기대하고, 작심하고 3일을 버텨낼 의지를 얻는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인위적으로 반복되는 주기를 적어두는 것은 철저히 인간을 위한 일이다. 인간은 무한함을 견딜 수 없으니까.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어도 남은 삶이 유한하기에 우린 지금 이 날들을 기념해야만 한다.
기념일은 표지판 같은 역할이다. 올해는 얼마나 남았는지 돌아보고 무엇을 해왔는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일상 속에 남겨진 날들에 의미를 덧붙이려는 노력은 그간의 과정에 대한 축하인 셈이다. 기념일의 좋은 점은 딱히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해내지 않더라도 날짜가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냥 그 시간에 그때에 있었기 때문에 기념일을 맞는다. 매년 반복되는 삶 속에서 권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히도 1월 1일에는 결심을 불태울 의지 또한 충전된다. 변화를 만들어낼 의지를 사랑하고 긍정해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꼭 인간만의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식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3. 웨이먼드와 에블린
거대한 악에 맞서기 위한 선함은 물리력이 내포된 수단이 아닌 친절한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몰라서 지나치게 가혹해질 때가 있으니까. 싸움이 발생하는 와중에 혼란스러워하는 웨이먼드는 간절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외친다. 우리가 더 다정해져야 한다고 간절하게 소리친다. 내내 철없는 것처럼 굴었던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상황을 바꿔낸다. 몇 마디 진솔한 설명과 약간의 호의를 통해 마술처럼 분위기가 바뀐다. 웨이먼드는 특히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혼란스러울 때는 다정해지라는 이야기를 건넨다. 아주 사소한 일상 속의 웃음, 실없는 장난들과 대화. 애정이 만들어내는 관심은 세계를 바꾼다. 다정함에는 그런 힘이 있고 다른 세계의 웨이먼드는 그걸 '전략적 친절함'이라 말한다. 무언가를 무작정 교정하거나 구제하려는 시도보다 애정 어린 관찰과 소통이 해결에 적합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다.
조부 투바키는 그런 일순간의 감정을 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얻어낸 세계의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주변 어느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극심하게 고통받았다. 가장 유능했기 때문에 한계를 넘어서게끔 자극하고 몰아붙였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에블린이 했던 말과 행동은 그녀를 위로한다. 이 세계의 딸이든 다른 세계의 거대한 악당 조부 투파키든. 궁극적인 공허와 허무를 이야기한들 크게 상관없었다.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여기 있고 싶다'는 답이면 충분했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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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 하나를 마주한 두 개의 선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묵직한 물음처럼 보이지만, 사실 삶만큼 단순한 게 있나 싶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 자라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 '나'의 개념이 생긴다는 건 곧 '남'을 인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래엔 다른 이들이 모인 세상을 지각하게 된다. 성장하는 과정은 얼마나 바쁘던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일들의 투성이. 외부의 모든 일들에 자극하고 반응하다 보면 어느샌가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렴풋이 나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을 느꼈다가 문득, 거대한 깨달음처럼 다가오는 때를 맞닥뜨린다. 나는 언제나 나였는데, 나는 나를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무얼 좋아하고, 어떤 걸 원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내 삶은 나의 것이고, 그래서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나를 끌어안아야 한다.
본래 중심이 반듯하게 잡힌 사람이라면, 혹은 '그래도 해야지 뭐' 같은 담담함으로 고민을 가벼이 넘길 수 있다면, 삶이 괴롭다 못해 무서운 느낌은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는,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도 내가 나를 끌어안는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다만 느꼈을 뿐이다.
무겁다.
나는 나를 견디기가 너무 무거웠다.
얘가 너무 까탈스럽고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나는 나로 살아가면서 생을 견디라는 걸까. 두려움에 내몰린 존재가 가장 흔히 반응하는 건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이다. 세상 모든 게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고쳐야 할 것들밖에 없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그건 내가 바라보는 나의 표상이었다.
우리 각자는 평생 자기 스스로를 볼 수 없다지만, 거울처럼 간접적으로 인지할 방법은 많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나의 태도와 생각, 선입견, 느낌. 그 모든 게 나였다.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 유난히 거슬리는 상황이나 사람, 추구하는 방향, 원하는 세상.
그런데 여기서 한 겹 더 벗겨야 한다. 단순히 어떠한 태도, 물건, 상태 따위는 가지고 싶은 게 아니다. 그걸 가짐으로써 얻게 될 감정이나 시선, 느낌들을 얻고 싶은 거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건 결국 결핍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없다고 생각하니까 갈망한다.
그러니까, 삶의 본질은 단순하다. 이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투영이기에 내가 오늘 세상과 교류하며 반응한 모든 것들에 '왜?'를 묻다 보면 꽁꽁 숨겨둔 나의 갈망, 나의 결핍을 마주한다. 그걸 바꾸려고 애쓸 것도 없이, 그저 관망하면 된다. 그렇구나, 하면서.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건 부족함을 채우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를 자연스럽게, 가능하다면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보면 또 다른 것이 보이고.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는 게 삶이다.
새삼스럽게도 삶을 되돌아본 건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보고 온 후였다. 특정 갈래로 압축할 수 없는, 쉽게 말해 주제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영화.
'섭식장애'와 '모녀', '다큐'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는 이 영화를 표현할 순 있어도 정의할 수 없기 때문 아닐까. 사람을, 특히 사람 둘의 관계에 집중한 영화-그것도 실제인물이 주인공인-는 필연적으로 중구난방이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삶은 계획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하다. 대개 뜻밖의 일은 터닝포인트가 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끼치므로, 굉장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변화는 나 자신만 알 수 있고, 이를 언어로 발화하기란 쉽지 않다.
픽션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다.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그 서사의 논리구조가 맞게끔 보여줄 수 있다. 오히려 납득 가능한 말과 행동, 태도 따위를 보며 사람들은 공감하며 응원한다. 하지만 우리도 알지 않는가. 어떤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바람에 계기를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그저 일이 벌어졌고, 그 안에서 변화했고, 결과로써 지금을, 동시에 과정으로써 앞으로의 삶을 이어간다.
그러니 영화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내가 써오던 리뷰는 영화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그와 타인과의 관계를 풀어내고 해석하고 의미를 덧대어 매듭짓는 행위였기에. 지금은 무엇도 설명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바라게 된다. 칠흑 같은 영화관에 들어서, 앉고.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과거의 연이 떠올랐다면 그때에 잠시 잠겨있다가 다시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왠지 모를 감정이 올라오면 흘려내고, 그렇게 90분을 머물러 보기를. 그 마음을 담아 끝으로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시와 산문을 오가는 짤막한 글로 정리해 본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는 각자의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이 놓였다. 혼자서는 너무 심심하거나 혹은 헛헛할까 봐 함께 나눌 반찬거리도 준비해 뒀다.
나란히 마주 앉은 두 사람. 영원히 하나가 될 일 없는 평행선. 이 얼마나 다행인가. 공유할 수 있는 것과 온전한 나만의 것 모두를 지녔다는 게. 원하는 만큼 원하는 때에, 원하는 대로 맞닿으면 된다. 가끔은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삐걱대겠지. 어설프게도. 서로를 할퀴며 만든 생채기가 도리어 서로를 존중할 선을 만들어낸다.
완벽히 겹쳐지는 때. 거기엔 나도 너도 없다.
그러나 이건 다 지나간 이야기.
닿았던 순간도, 맞잡은 순간도, 떨어진 순간도, 결국 찰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걸까? 가까웠다가도 금세 멀어져 각자의 길을 걷는 걸 보면. 그렇게 평행선은 계속된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가 서로의 존재가 콩알만큼 보였다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눈앞에, 빼꼼.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 후 작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