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08-28 16:26:27
온기가 필요한 청춘의 파들파들 떨리는 날갯짓
영화 <한국이 싫어서> 리뷰
한국이 싫어서 (Because I Hate Korea, 2024)
온기가 필요한 청춘의 파들파들 떨리는 날갯짓
개봉일 : 2024.08.28.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청춘
러닝타임 : 107분
감독 : 장건재
출연 : 고아성, 주종혁, 김우겸, 이상희, 오민애, 김지영
개인적인 평점 : 3 / 5
쿠키 영상 : 없음
누군가는 이 영화를 뜬구름 잡는 청년의 이야기라 생각할 수도 있고 끝도 없이 징징대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주인공 계나와 그녀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자유다. 하지만 적어도 욕하고 짓누르려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다.
어딜 가든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니던 때가 있었다. 치솟는 물가와 집값, 점점 어려워지는 취업.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열심히 돈을 모아도 서울에 번듯한 내 집하나 사기 힘든 현실과 점점 삭막해지는 사회 속에서 청년들은 더 이상 멀리 있는 희망찬 미래가 아닌 가까이 있는 현재의 불행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 불행을 “다들 이렇게 사니까 괜찮다”라며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받아들이지 못해 죽음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탈출을 선택한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가장 후자, 살기 위해 탈출을 선택한 청년이다. 이 영화는 인생에 좀 더 많은 온기가 필요했던 청년 계나의 한국 탈출기다.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따뜻한 곳으로 이동해야 하니까. 계나에게 한국은 발걸음을 늦출 수 없는 추운 겨울 그 자체다.
계나는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녀는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야 했다. 공부도 홀로 척척 해내야 했고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또 취업을 한 후엔 돈을 아끼기 위해 매일같이 지옥철을 타고 긴 통근을 견뎌내야 했다. 이렇게 빡빡한 하루를 살아낸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나의 성공이 행복이라 말하는 엄마와 하나도 따뜻하지 않은 이불, 시야를 꽉 채우는 입김뿐이다.
사는 게 참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 힘들다고 발걸음을 늦추면 그 자리에서 얼어 죽는다. 계나는 이런 겨울이, 겨울이 지속되는 한국이 싫다. 그래서 한국과 정반대에 위치한 뉴질랜드로 떠난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 한국에서는 못 살겠다며 뉴질랜드로 떠난 청춘. 이 부분만 보면 외국과 이민을 찬양하고 한국을 헬조선이라 규정해버리는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이 싫어서>는 단순히 헬조선을 탈출해 새로운 삶을 사는 청년의 이야기가 아닌 어디서든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파들거리는 청년의 날갯짓에 대한 이야기다. 평생을 뭔지 모르겠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내 인생의 행복. 계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 아래 내용부터 스포 有
아름답고 따뜻한 땅에도 겨울은 온다
계나는 한국의 추위가 너무 싫다며 뉴질랜드로 향한다. 영화는 (중반부까진) 한국을 춥고 답답한 곳, 뉴질랜드를 온화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표현한다. 한국은 차갑고 딱딱한 색감으로 표현되고 뉴질랜드는 밝고 명료한 색감으로 표현된다. 계나의 옷차림과 행동 역시 뉴질랜드에선 더 가볍고 자유로워진다.
따뜻한 날씨와 만 원도 안 하는 와인과 과자, 아름다운 자연. 미래와 가족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이 정도면 지상낙원이 아닌가? 싶지만 이 완벽해 보이는 곳에도 어려움은 있다.
먼저 말 시켜놓고 냅다 영어부터 배우라고 구박하는 현지인, 인천 집처럼 바람이 슝슝 통해 침낭을 깔고 자야 하는 차고를 개조한 방, 신발 하나로 트집 잡는 인종차별주의자, 친구 앨리의 범법 행위, 커다란 자연재해. 한국을 떠나기 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온갖 문제들이 계나를 덮쳐온다.
추운 한국에도 언젠간 따뜻한 봄과 뜨거운 여름이 오듯 따뜻한 뉴질랜드에도 언젠간 추운 겨울이 오기 마련이다. 뉴질랜드에서도 다시 겨울(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계나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겨울과 여름을 살아본 계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 계나 가족의 집은 지하철역에서 먼 오래된 주택이 아닌 지하철과 가까운 신축 아파트가 되어 있었고 계절은 겨울을 지나 여름이 되어 있었다.
이제 집안, 결혼에 대한 부담은 대부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지만 계나는 여전히 한국에 정착하지 못한다. 그녀는 아직 행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나는 한국의 겨울과 여름, 뉴질랜드의 여름을 살며 다양한 행복과 죽음을 함께 목격한다. 한국의 겨울을 살면서도 희망을 외쳤던 희망 전도사의 죽음, 겨울을 지나 곧 여름을 맞이할 거라 믿었던 친구 경윤의 죽음. 희망만 가득할 것 같았던 따뜻한 뉴질랜드에서 일어난 하준이 가족의 죽음까지.
어떤 땅, 어떤 계절이든 나름의 불안과 슬픔이 있다. 계나는 이들의 인생과 죽음을 목격하고 느끼며 다시 한번 짐을 싼다. 다시는 춥지 않을 조금 더 따뜻한 곳을 찾기 위해서.
영화는 계나의 성장을 눈에 띄게 보여주지 않고, 뉴질랜드의 장점만을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계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고 오랜만에 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과 뉴질랜드에 대한 자랑을 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종착지, 행복의 답을 찾지 못한 계나처럼 <한국이 싫어서>도 계나의 여정, 행복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 어디에나 나름의 아픔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영화는 그저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고 끝이 난다. 이 흐릿함은 정확한 답을 요구하는 현실에서 잠시 쉼표가 되어줄 수도 있고 답답함과 영화에 대한 불만족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누군가는 계나의 선택을 그저 외국병 걸린 사람으로 치부할 수도 있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어디를 가든 힘든 건 똑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계나의 선택을 존중하거나 부러워할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관객의 자유다. 계나에게 한국을 싫어한다고 말할 자유와 떠날 자유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상상의 자유, 너무나 모호한 의견을 남기고 간 영화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건 부정할 수 없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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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테스와 보낸 여름> 눈부신 싱그러움과 흐뭇한 성장기
테스와 보낸 여름 (My Extraordinary Summer with Tess , 2019)
<테스와 보낸 여름>은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떠난 바닷가 근처의 휴가지 여행을 떠오르게 합니다. 휴가지의 낯선 풍경과 함께 여름을 간 다양한 사람들,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이 주는 낯선 느낌은 이제껏 겪어왔던 세상과는 달랐던지라 신비스럽기도 하고, 다양한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아름다운 휴양지 테르스헬링에서 펼쳐지는 조금 엉뚱한 소년 샘과 그보다 더 엉뚱한 미지의 소녀 테스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함과 동시에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게 하고, 코로나로 집에 발이 묶여 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을 환기 시켜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영화일 것입니다.
포스터의 색감만 봐도, 눈이 정화되는 기분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온 샘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공룡이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궁금해하는 조금 엉뚱한 소년입니다. 자연의 시간 순리 상 부모님과 형이 먼저 떠나게 될 것이므로 나중에 자신이 홀로 남겨졌을 때를 대비하여 휴가지에서 휴가보다는 외로움 적응 훈련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던 와중 만난 소녀 테스!
만나자마자 샘에게 살사를 추자고 권하는 샘보다 조금 더 엉뚱하고 발랄한 이 소녀는 무언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테스의 엄마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어른 남자인 휘호를 숙박 이벤트 당첨자로 초대하고, 어쩐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은 테스가 야속한 샘. 그런 샘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그 비밀로 새로운 일들을 맞이하게 되는 두 사람. 생각지 못했던 테스의 비밀은 직접 확인해보시면 좋겠습니다. ?
(※ 아래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언젠가 혼자 남겨질 것을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걱정일까?
아쉽게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세상에 혼자 남겨질 운명입니다. 아마 샘처럼 가족 중 막내인 경우라면, 그럴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제 기억으로, 저도 이런 두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엄마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만큼은 무조건 나보다 하루 더 살아야 돼!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샘도 그런 두려움이 있었는지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느라 하루의 정해진 시간만큼 혼자 바닷가에서 놀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홀로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던 도중, 밀물이 들어오는 갯벌에 발이 빠져 그의 노력과는 다르게 갑작스럽게 모두를 두고 가장 먼저 떠날 뻔하게 되죠. 그때 만난 바닷가 근처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 혼자이지만 기억할 수 있는 행복한 추억이 많아 괜찮으니, 더 늦기 전에 많은 추억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죠.
외로움 적응 훈련중이랍니다.
아이가 하는 걱정이나 어른이 하는 걱정이나 맥락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은 세상에 혼자 남겨질 걱정을 하며 외로움 적응 훈련을 하진 않지만, 그와 비슷한 부류인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한 걱정,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등 매우 기우 스러운 걱정을 하며 현실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을 방해 받습니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면 이런 부류의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들에 노출되지만, 선택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것들을 걱정하며 지금 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그렇다면 그 걱정을 지속할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를요. 영화는 매일에 충실하고 순간의 추억을 만들며 기억할 수 있는 추억들을 쌓아가는 것의 중요함을 샘을 통해 묻고 있는 듯합니다.
▶ 사랑스러운 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이름도 어려운 두 배우, 소니 코프스 판 우테렌, 조세핀 아렌센은 영화 내내 사랑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이전 연기 경력이 없는 배우로 캐스팅했다더군요! 그래서인지 연기를 꽤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서툴고 풋풋하고 싱그러운 느낌이 들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주제와 잘 어울립니다.
주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사춘기 소년소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또 또래이더라 하더라도, 그 나이 때 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키가 더 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요,영화에서도 테스 역의 조세핀 아렌센이 키가 조금 더 큽니다. 감독의 디테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네덜란드 아동 문학가 안나 왈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2019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 국제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수상했고, 전 세계 영화제 통산 16개의 수상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제너레이션 K플러스 부문은 어린이 영화 대상으로,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심사위원들이 선정하는 상이라고 합니다.)
또 영화를 보는 내내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오게 하는 영화의 배경지, 테르스헬링 섬(Terschelling)도 분명 영화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전체 매력 포인트에서 약 1/3가량은 차지할 듯 ㅎ ) 네덜란드의 서 프리지아제도에 딸린 섬이라고 해요. 가져올 수 있는 이미지가 없는 게 아쉬운데, 그쪽으로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의 블로그에서 확인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멋져요!
▶ 한 줄기 영화
두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조조 래빗>입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소년단에 입단한 소년 조조와 그의 집에 몰래 숨어있던 소녀 엘사의 이야기가 담긴 영화입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2차 세계대전과 나치 통치하의 세상, 히틀러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시종일관 밝은 톤을 유지하고 있으나, 찬찬히 관찰해보면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극과 참상은 더 슬프고 잔인한 것 같습니다. 조조의 상상 속의 친구 히틀러를 연기한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유쾌한 연기가 더해져 제 기준 작년 최고의 영화로서 매우 강력히 추천해드리고자 합니다. ?
두 소년소녀의 싱그러움에 흐뭇하고, 그들을 보며 나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는 <테스와 보낸 여름>, 코로나로 따로 멋진 휴가지를 가지 못하셨다면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예쁜 이야기들과 경치에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처럼 좋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주관 가득 별점 : ★★★★
- 여름 휴양지, 못 다녀오셨다면 꼭 보세요!
- 음악, 색감, 연기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눈도 마음도 즐겁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그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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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를 이겨내는 우주적 다정함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
인생의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은 우리를 다른 인생으로 이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무술 고수, 영화배우, 맹인 가수, 요리사 등등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돌이 되는 인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미국에 건너와 코인 세탁소를 운영하며 힘겹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 중국인 이민자 에블린(양자경)의 삶이 있다. 수북이 쌓인 영수증 더미에 깔리기 직전의 그는 쇠약해진 아버지(제임스 홍)를 돌봐야 하고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쿠안)와는 이혼하기 직전이다. 세무당국의 세무조사와 남편의 이혼 요구 그리고 딸 조이(스테파니 수)의 여자친구 문제가 에블린에게 한꺼번에 덮쳐온다. 이런 에블린에게 모든 우주를 구하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모든 우주를 혼돈에 빠뜨리려 하는 ‘조부 투파키’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단다.
에블린은 여러 우주 중 하나에서 각 우주의 기술과 기억, 감정을 불러올 수 있는 ‘버스 점프’의 알고리즘을 개발한 인물이다. 알고리즘을 개발한 우주의 에블린은 능력이 출중했던 한 아이의 버스 점프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그 아이는 모든 우주의 자아를 동시에 경험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무한한 다중우주를 혼돈에 빠뜨린 빌런 ‘조부 투파키’가 탄생한다. 이 조부 투파키가 세탁소를 운영하는 우주의 딸 조이다. 에블린은 다중우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딸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조부 투파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우주의 자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된 그는 엄청난 지식과 힘을 얻었다. 무료하던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베이글 위에 올려버렸다. 가운데가 뻥 뚫린 검은 베이글 위에 온 세상을 올리자 그는 어떤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것은 ‘무’이며, 부질없다는 진실을. 조부 투파키가 원하는 것은 이 부질없는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진정한 죽음이다. 검은 베이글은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부 투파키의 블랙홀이다. 또 한 가지 조부 투파키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이 자신과 같은 것을 보는 것이다.
조부 투파키 혹은 조이는 끝없는 버스 점프에 갇혀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힘과 지식을 얻었을지 모르나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며 혼란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버스 점프에 갇혀 있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는 것이다. 조이 역시 이 윤회와도 같은 끝없는 굴레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원>)의 플롯을 간단하게 보자면, 모녀간의 싸움이다. 그렇기에 단 한 사람의 이해와 공감이면 딸이 가진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된다. 바로 엄마다.
우주의 진짜 적은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다. <에에원> 속 베이글은 이 세상의 허무를 상징한다. 새하얀 공간에 둥실 떠있는 까맣고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 말이다. 에블린이 싸워야 하는 것은 조부 투파키나 딸 조이가 아니라 세상의 폭력과 허무함 그리고 염세주의다. 이에 맞서는 단서는 남편 웨이먼드가 준다. 평소 웨이먼드가 세탁소 곳곳에 붙여놓은 하얀 바탕에 가운데가 까만 장난감 눈알은 베이글에 대항하는 다정함의 상징이다. 폭력과 고통 앞에서 자비와 연민을 가지라는 불교의 가르침처럼 에블린은 미간 근처 이마에 장난감 눈알을 붙이고 다정함의 방식으로 싸운다. 다른 우주의 어떤 누구라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손가락이 핫도그가 되어버린 우주일지라도.
멀티버스다운 영화적 스펙터클을 경험한 끝에 도달하게 된 곳은 다정함이다. ‘우리는 다정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어쩌면 이처럼 거창해야만 풀릴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현재의 삶은 쳇바퀴 돌듯 반복되고, 세탁하고 세금 내는 일이 지긋지긋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우주의 또 다른 나, 멋진 삶을 사는 나를 꿈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여기의 사랑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 모든 우주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코인세탁소에서 세금을 내며 살아가는 이 삶을 사랑할 수도 있다. 에블린은 모든 우주의 자신을 보고 왔고,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조이와 여기 있는 삶을 선택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평범하게 여겨지는 현재, 여기의 사랑을 멀티버스의 차원에서 설명해냈다. 무한한 다중우주를 거쳐 온 우리의 지금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현재 여기에서 서로 다정함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곧 기적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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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크맨>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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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사격수로 미국에서 3번째로 높은 ‘은성훈장(Silver Star)’을 받은 예비역 군인 ‘짐(리암 니슨)’은 애리조나 국경지역을 지키며 조용히 말년을 보낸다.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내고, 90일 안에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목장은 압류될 위기에 처한다. 어느 날 우연히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쫓기는 모자를 구해지만, 조직원의 총격에 소년의 어머니가 숨을 거둔다. 소년(제이콥 페레즈)을 시카고에 있는 친척에게 데려가 달라는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짐`이 길을 나서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일흔을 코앞에 둔 리암 니슨과 소년이 유사 할아버지와 손자관계를 맺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 대목에서 아마 비슷한 내용의 영화들이 많이 떠오를 것 같다. 그리고 <어니스트 씨프>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아내를 일찍 떠나보낸 홀애비로 나오며, 전직 군인출신이며, 액션보다 드라마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 그렇다.
리암 니슨의 고령의 연세를 고려해서 액션은 '저격 장면' 위주로 짜여져 있다. 잔잔하지만, 소년과 교감을 나누는 이야기가 제법 볼만하다. 투덜대며 소년을 챙겨주는 할아버지와 가족은 잃은 소년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드라마에 가깝다. 특별한 서사는 없지만, 사람 냄새가 풀풀 나서 좋았다. 다만, 긴박감 넘치는 추격 장면이나 인상 깊은 액션영화를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 (2.7/5.0)
Good : 무난한 로드무비
Caution : 심심한 내용!
●북미에서 박스오피스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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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권 당첨자의 추락으로 인한 부서진 삶의 파편들을 주워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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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싱글 맘인 레슬리는 펍에서 산 복권에 당첨되어 19만 달러를 받는다. 레슬리가 복권에 당첨되어 하고 싶은 일은 집을 사는 것과 락스타가 꿈인 자신의 아들 제임스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레슬리는 복권 당첨금을 다 잃고 방세도 못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집주인에게 쫓겨난 레슬리는 아들인 제임스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제임스의 집에서 머물지만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술 마시는 버릇 때문에 아들인 제임스에게도 쫓겨나게 되고 더치와 낸시의 집에서 신세를 진다. 결국 그곳에서도 쫓겨나게 되고 어느 모텔 바깥에서 노숙을 한다. 그 광경을 본 모텔 관리인 스위니는 레슬리에게 일자리를 주는데... 과연 앞으로의 레슬리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레슬리에게 복권이 당첨되는 커다란 행운이 있었지만 술과 마약으로 모두 날려버렸다. 그렇기에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아들인 제임스가 13살일 때 혼자 두고 떠나게 됐다. 제임스는 웨일런과 같은 락스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자신의 엄마인 레슬리 때문에 그 꿈을 접고 공사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레슬리를 보고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권한다.
그런데도 레슬리가 하는 건 제임스의 방에서 숨겨진 돈을 훔쳐서 술을 마시는 것과 담배를 피우는 것 밖에 없었다. 레슬리에게는 도벽 행위도 있었고 노숙 생활은 기본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고향으로 가게 되어 굴러들어 온 복을 얻게 되는데 그건 바로 모텔 관리인 스위니와 로열을 만난 것이다.
그런 레슬리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스위니는 모텔 청소를 하면 1시간에 7달러를 준다고 하지만 처음에는 일을 열심히 안 하나 자신의 여행 가방에 있는 어린 제임스의 사진을 보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된다.
인생의 목표가 없었던 레슬리는 복권에 당첨되어도 막 살았지만 모텔 관리인 스위니를 만나고 점차 변하면서 부서진 식당을 복원하고 10개월 후 식당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앙금의 사이였던 낸시에게도 사과를 받고 제임스를 만나게 된다. 아들인 제임스가 원했던 건 알코올 의존증으로 아무렇게 살았던 자신의 엄마인 레슬리가 새 인생을 사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아들과 엄마의 만남으로 영화는 감동적인 엔딩으로 끝나게 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제2의 레슬리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실수로 인해 망가졌어도 다시 복구할 수 있다는 메세지이다. 아무리 망가진 인생이라도 차근차근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면 100% 원상복구는 안되어도 어느 정도는 복구가 될 수 있다.
알코올 의존증이었던 레슬리도 해냈듯이 과거의 실수로 인해 많은 걸 포기하지 말라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실패를 한다 해도 다시 일어나는 꺾이지 않는 정신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삶을 포기했던 레슬리에게도
한 줄기 희망은 있었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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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당신을 채울 수 없다는 것, 영화 <님포매니악 1,2>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포스터를 보면 뭐 이런 영화를 다 만들었네 싶을 수도 있다. 또 영화의 결말을 보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다. (결말 밖에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그러나 두가지 '뭐 이런게 다 있다'는 평을 하는 느낌은 영 다르다. 포스터는 마치 이런 영화를 보면 내가 '님포매니악'이 된 것처럼 볼까봐 걱정이 들 수도 있겠다.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성에 개방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건 여전히 어색함이 더 크다. 그러나 주의할 건 포스터가 보여주는 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원초적 본능>과 그런 면에선 맥락이 같다. 화끈하고 질펀한 걸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보면 볼수록 허전하고 쓰라리다.
제목은 아무 잘못이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이 영화를 못살게 군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바닥에 널부러진 조와 우연찮게 길바닥에서 만난 샐리그먼이 밤새 이야기하는 것이 영화의 전부다. 다만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님포매니악(여성 색정증 환자)라고 불렀고 그는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칭한다는 것. 섹스 중독자와 섹스가 1도 동하지 않는 두 사람의 섹스에 대한 대화.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만나면 이렇게 차분한 대화가 가능하다니 신기하다. 조의 일대기는 꽤 길고 복잡하다. 그녀의 생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그녀는 차를 마시며 침대에 누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샐리그먼은 그녀의 '경험'을 그래서 자신의 '지식'으로 공감하고 이해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낚시, 음악 등 각종 지식으로 맞장구를 친다. 때때로 이야기가 끊어지면 그들을 둘러싼 방의 인테리어, 벽에 남아있는 자국, 방의 구조, 조명 등으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됐다. 만담이라기엔 잔잔하고 대담이라기엔 독백이 길고, 독백이라기엔 응하는 사람이 있는 독특한 밤이었다. 샐리그먼의 뜬금없고 박학다식한 지적 공감은 자칫 19금썰 혹은 사랑과 전쟁이 될 뻔한 한 이야기를 꽤 담백하고 흥미롭게 탈바꿈해준다. 다른 남자였다면 이렇게 클래식 평론하듯이 말하진 못했겠지. 그는 영화를 끝까지 흥미롭게 만드는 존재인데 그건 차차 얘기하는 것으로.
영화의 부제를 짓는다면 <님포매니악: 어느 고독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붙이고 싶다. 주인공 조는 성보다는 사람을 탐닉하고, 쾌락보다는 외로움을 채우려 애썼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부제를 지어본 건 갑자기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가 떠올랐기 때문. 주인공 외의 등장인물, 심지어 관객들마저 주인공과 자기 자신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암만, 우리는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처럼 살인자도 아니고, 조처럼 님포매니악도, 섹스중독자도 아니니까. 그러나 정말 전혀 다른가. 외로움과 공허함이 비슷해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면 이상한걸까. 조는 유일하게 사랑했던 제롬에게 속마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자신의 모든 구멍을 채워달라고 하면서. 애틋한 말이었다. 늘 내 빈 곳을 누군가 채워줄 수 없다고 수없이 회의적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더 슬펐다. 정말 섹스로, 혹은 제롬같은 누군가가 내 안의 모든 빈 곳들이 채워진다면 같은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걸 걸고서.
조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모르고 시작하는 바보가 어딨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욕구란 끝이 없고 만족을 느끼는 만큼 허전함 역시 크다. 맛있는 음식들, 아는 맛이지만 그 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이는 사람들. 바깥에서 사먹는 음식 중에서 나에겐 떡볶이가 늘 그렇다. 치킨도, 피자도, 그 무엇 보다도. 정말 아는 맛이지만 집집마다, 가게마다 다르다. 내 입맛에 찰떡인 떡볶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숙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떡볶이 비유는 너무 가볍나.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는 사랑에 대한 욕구도 있겠다. 외로워서, 궁금해서, 이유가 뭐든간 다신 사랑하지 않겠다면서 그 달달하고 몽글거리던 날이 그리워 다시 찾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이 사랑에 함몰되어 있는 동안 조에겐 섹스가 그랬을 것이다. 아는 즐거움이었지만 즐거웠고 쉼없이 필요했다. 하루에 7-8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만나 늘 그 사람들에게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그건 분명 본인도 많이 노력해야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아는 맛의 끝을 보고 싶었던 것, 그게 조와 우리의 작은 차이점일 것이다.
유부남이 아내와 함께 찾아왔다(feat. 질척거림)
그녀를 철면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 갈수록 그런 생각은 잦아든다. 죄의식이나 자책감 따위는 저버린 듯이 말했지만 그녀는 아주 오래 자신의 삶을, 자신의 선택을 '죄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와 '미끼'가 되어 누가 더 기차에서 많은 사람과 잤나 내기하느라 유부남을 유혹할 때도, 사랑하지도 않는 유부남이 자신 때문에 20년지기 아내와 아들 셋을 버리고 왔을 때도, 음성사서함에 올라온 수많은 남자들과 만날지 말지를 주사위를 굴려 결정할 때도, 그녀에게 닥친 불감증이라는 위기에 다시 쾌락을 되찾기 위해 폭력적인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아이와 남편을 버릴 때도. 그녀가 사랑한 제롬이 자신과 함께하는 여자아이와 엮이게 되어서 질투심에 총으로 쏘려고 했을 떄도. 그게 다 죄라면서.
그녀가 여러 사람을 만났던 것은 그녀가 사랑한 대상이 섹스가 주는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흥분은 섹스에 필요한 기본적 요소였고 사랑마저도 그녀에게 섹스를 완성해주는 비밀의 레시피였다. 그럼에도 샐리그먼에게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배수진을 친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들릴 이야기는 부도덕하고, 저는 나 좋자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못돼 처먹은 사람이에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도 아닌데. 죄라고, 부도덕하다고, 못된 사람이라는 인식은 전부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정말 못된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인간의 본성을 위선이라고 말하는 건 그런 그녀가 위선적이라는 것에부터 출발 한 것은 아닐까.
젊은 여자 둘이 기차에 타면
모르는 사람에게 한두번 해본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샐리그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는 자신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된다. 샐리그먼은 그녀에게 '날개가 있는데 좀 날면 어떤가'라며 여성으로서,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서 조를 긍정적으로 해석해주었다. 조가 남자였다면 이 모든 건 지금보다 큰 문제가 아니었을거라면서. 젊은 여자 둘이 기차에 타면 눈을 맞추고 웃기만 해도 남자와 잘 수 있지만 젊은 남자 둘이 그러면 똑같이 가능하겠냐면서. 아이를 버리고 자신을 택한 건 그녀의 남편 제롬도 마찬가지였다고 말이다. 하다 못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제롬에게 총을 쏘려다 실패한 것 역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죽일 생각이 없어서 총을 제대로 장전하지 않은 것이라고 답해준다. 그러니 죄책감 갖지 않아도 된다고.
한마디 더해 '혼자 박수칠 수 있던가'라고 곁들여주고 싶었다. 그녀를 함부로 말할 수 있겠나.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이건 단독범행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착각아닌가. 자기 자신 좋자고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했다는 말. 그녀만 좋자고 했나, 상대방도 좋자고 했지. 그 사이에 상처가 있었다면 그건 둘의 책임이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다. 그녀가 추구하는 섹스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근데 그 섹스가 그녀 말대로 쉬웠다. 그건 그녀가 사람 환장하게 하는 팜므파탈이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늘 응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이상해하는 사람들보다 그녀에게 이끌리듯 응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를 싫어하는 건 여자들이었다. 그 이유가 신기했다. 자기 남자들을 건드릴까봐. 그녀를 거절하려던 철벽 같던 유부남도 있었다. 똑같이 신기했다. 그녀를 피하려던 이유가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끊으려고도 해볼만큼 해봤거든요
조가 변하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건 청춘을 다바쳐 쾌락을 좇아 해볼 만큼 해보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누가 섹스 중독을 고쳐보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몸이 아프게 되어 '못'하게 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섹스 때문에 사랑하던 제롬과 극단으로 치닫고 상처를 받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자고 올 땐 보이지 않던 게, 눈 앞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여자와 그가 자는 걸 보면서 제대로 상처받았을 것이다. 제롬은 그녀의 이야기 중에 유일하게 F, G, K, B 같은 이니셜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였다. 그리고 처음 만난 샐리그먼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지 않았나. 자신이 그렇게 견딜 수 없었던 욕구 없이도 사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편견 없이 보아주는 사람이 있고,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사회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녀 역시 사회를 받아들일 수 없다 생각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친구가 생긴 것이다. 처음으로.
그러나 그 스펙타클한 조의 연대기보다도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몇 분에서 볼 수 있다. 샐리그먼은 아주 대단한 역할을 맡게 된다.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친구, 외로움과 중독을 벗어나보겠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보고 다짐하는 조를 짓밟아 버린다. 역설적이게도 님포매니악이던 조가 섹스 없이 있는 힘껏 살아보겠다고 말한 그 직후, 평생 섹스와 담 쌓고 살아온 무성애자 샐리그먼이 그녀와 섹스하고 싶어진 것이다.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욕망의 전이?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가 정말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건 수많은 남자들이랑 자지 않았냐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는 그녀 앞에서 '남자'가 되었다. 과거 그녀가 자동문처럼 가리지 않고 남자들과 잤다고 해서 지금 이순간, 그와 거리낌없이 잘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와 그녀는 방금 전 이야기 하듯이 '인생 최초의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는 믿을 수 있는 친구 대신 욕망에 가득한 어느 남자가 된 것이다. 방금까지 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사랑하던 제롬을 죽이지 않아서, 안도하던 조는 망가졌다. 총은 제대로 작동했고, 친구라 부르던 셀리그먼이 그 총을 맞았다. 어쩌면 그녀는 살인자가 되었겠다. 혹은 급소가 아닌 곳에 총알이 박힌 채 그가 신음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총소리에 가장 많이 아파할 사람은 조일 것이다. 동이 텄고 문이 닫혔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녀의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을까.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그녀의 평생을 바친 단 하나의 실험, 단 하나의 목표가 얼마나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지. 누구도 그녀의 구멍을 채워 줄 수 없었다. 채우려 애쓸수록, 기대하면 할 수록, 그녀에겐 짙은 외로움이 피어나는 구멍들이 커질 뿐이었다.
* 섹스 중독자와 님포매니악이 무엇이 그렇기 다르기에 조는 거듭 강조를 했나. 의미상 여성이란 점을 부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성 색정증은 사티리어시스라는 다른 표현을 쓰고 있으니까. 단어 중 님프는 영화에서 유충이란 뜻으로도 설명되었다. 실제로 낚시를 할 때 이 님프를 본따 님프 낚시를 하기도 한다고. 미끼가 되어 사냥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섹스중독자라고 칭하며 중독을 끊으려 할 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마음을 바꾸는데 그 때 그런 생각이 스쳐가지 않았나 한다. 자신이 여성으로서, 섹스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들과 다르다고. 그게 그녀를 흔하고 광범위한 섹스중독자가 아니라 '님포매니악'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라고.
* 조의 아버지의 '소울 트리'. 내 나무 찾기 이야기가 은근히 흥미롭다. 조도 절벽 위에서 그 나무를 찾게 된다. 아직 그런 느낌이 드는 나무를 찾지는 못했는데 나무를 찾았을 때 기분이 기대된다. 꽃을 들자면 제비꽃은 가능할 것 같다. 왠지 모르게 매년 반갑고 애틋하다.
*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욕망과 외로움을 어떻게 대할지가 아닌가 싶다. 욕망과 외로움의 방법론. 욕망의 끝을 알기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확실한 건 몸을 직접 내던지는 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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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번 자라나는 풀잎들처럼
더운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워졌다. 앞의 남자는 요즘 유행하는 나이키 덩크와 아이앱 후드를 입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누구는 서울 덩크를 신었다. 나도 집에 저런 거 있는데
.항상 어디서 일을 하면 무언가를 사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술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하는 나는 돈 쓰는 것에서 재미를 찾아야 했다.근데 요즘은 또 다르다. 익숙한 것들에서 아무 재미도 찾지 못하겠다. 뭘 원해서 이렇게 살았던 걸까? 열심히 외웠던 단어도, 대비하고 싶던 파트 5도 영 시원찮으니 하루 사는 낙이 뚝뚝 떨어졌다. 영화도 재미가 없다. 돈이 있어도 하루에 쓸 수 있는 범위가 좁고 뭐 좋은 것 사도 입을 일이 없으니 아무 쓸모가 없는 셈이다. 모든 게 식상해진 나는 늘 항상 하던걸 한다. 위로가 되는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나 <소울>을 볼까 생각한다. 아. 이거만 있으면 안 되지. <꿈의 제인>도 있다. 막상 재생하려니 손이 안 간다. 리뷰를 한번 더 써볼까? 할 말은 많은데 다루고 싶은 작품이 없다. <중경삼림>과 <노매드랜드>가 같은 궤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써내려 보고 싶었는데 막상 하려니 다른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운동도, 공부도, 그 무엇도 나를 채워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천천히 걸었다. 찬바람이 드는 가을 왠지 모르게 시든 풀잎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건 다 정해져 있다. 영원한 관계는 애초에 불가능한 개소리고, 많이 사랑한 사람은 무조건 지게 되어있으며 영화는 러닝타임이 있어 언젠가 끝나게 되어있다. 모든 생의 과정이 계단을 오르락 내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이 들 때 나는 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풀잎들>은 식물 같은 영화다. 영화는 '끝'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나간다. 영화는 이 감독의 초기작들처럼 인물의 위선이나 욕망을 조명하지 않는다. 홍상수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끝이 난 후의 정서다. 이후의 허무함과 우울함을 바탕으로 각본을 썼는데, 이는 끝이 난 다음의 사람들과 흑백영화라는 연출 의도가 버무려져 시너지를 낸다. 홍상수는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영화화하는데 능한 예술가라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깨달은 인물인 것 같다. 예쁘고 멋진 사람들이 거대담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물론 매력 있지만 홍상수는 이와는 반대로 셔츠에 와이드 슬랙스만 입고도 조곤조곤한 톤으로 깊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풀잎들> 이런 특장점이 더 부각되는 영화다. 이 영화는 흑백영화다. 장면 변환도 잘 없고 롱테이크가 주요하다. 간단하다는 뜻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식물들도 이 특성들이 적용된다. 식물을 오랫동안 째려보면 일단 눈이 아플 것이다. 당연하다. 풀들은 조용히 부대끼며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풀잎들처럼 잔잔하다. 조용히 러닝타임 1시간이 지나간다.
근데 이 영화는 절대 조용한 사운드만 품고 있지는 않다. 첫 번째. 두 남녀는 죽은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클래식 소리만큼이나 선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난 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란 말이 들린다. 둘 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큰 소리가 오간다. 마음이 아파 카페 밖을 나가는 남자. 밖에서 담배 한 개비를 핀다. 아름은 그걸 바라보고 있다. 지켜보는 아름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겠지? 아름은 혼잣말을 한다. 사연이 있겠지. 누군 없을까? 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마치 우리에게 반문하듯 내레이션을 읆는다. 다음 사연이 비친다. 중년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는 세상을 뜨려고 했었나 보다. 원인은 누군가와의 사랑이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갔는데도 남자는 아직 정신 못 차렸다. 이 악물고 대화 파트너의 집에서 살고 싶어 하던 남자. 같이 대화하던 중년 여자는 당연히 거부한다. 동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정리를 해야 할 때'에 관해 논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어차피 끝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인 셈이다. 아름은 이 중년 남자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하다. 갈 데도 없고 돈도 없고 일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 남자를 보며 '산다는 건 이런 것이다'라고 체념한다. 카메라는 다음 두 사람으로 넘어간다. 다른 중년 남자와 20대 후반쯤 되는 여자가 카페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고 있다. 남자는 배우 일을 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남자의 제자쯤 되는 것 같다. 여자는 웃으며 남자에게 '저 연애해요'라고 답하고 남자는 환하게 '그래, 사랑이 최고야. 나머지는 다 사랑이 안 돼서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방금 남자는 아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대시한다. 둘이 같이 동거하자는 제의다. 남자는 시나리오를 쓰고 싶나 보다. 아름은 정중하게 거절하고 동생이 있는 쪽으로 이동한다. 아름은 가는 동안 제일 처음 지켜봤던 커플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휙 지나간다.
동생 커플을 만난 아름. 아름이는 동생과 이야기하다 갑자기 화를 낸다. 사랑은 개뿔. 누군지도 모르면서 연애를 하니? 갑자기 동생 커플에게 비난을 쏟아낸다. 그 옆자리에선 젊은 여자와 중년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중년 남자의 친구는 교수고, 이 여자와 불륜관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교수의 친구는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 교수의 친구가 여자에게 '당신은 그 사람을 갖고 놀았어.'라고 말한다. 여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지 시선 피하며 여자를 추궁한다.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바로 다음 장면. 카페 밖에서 중년 남자와 만났던 여자가 느닷없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마치 올라가서 봤던 것들을 부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듯, 여자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온다. 무의미한 행동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여자. BGM으로는 클래식이 나온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이 끝나고 나서 아름은 동생을 호명한다. 뒷골목에서 동생에게 화를 내는 아름. '넌 누군지 알고 걔를 만나는 거니?'라고 말한다. 동생은 누나에 대해 '좀 힘든 구석이 있어'라고 말한다. 아름은 어느 가게에 들어와서 앞의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맥북에 글을 쓴다. '사람들이 만나는구나. 서로 감정이 부딪히고. 서로 힘을 내고. 서로 같이 서서 있게 되는구나. 숨겨서 먹는 소주가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일까.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그럴 일이 있을까. 왜 저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까. 저게 정말이면 정말 좋겠다. 결국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귀하고 싸구려고 너무 그립다.'라고 답한다. 다시 첫 번째 남녀로 돌아간다. 한바탕 불타오르고 난 후 둘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둘은 소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같이 한 잔 들이켜게 되고, 분위기가 무르익는 클래식과 함께 사랑을 약속한다. 그리고 아름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죽은 사람을 팔아서 지금을 행복하려 하는 거니.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지금은 너무 귀한 거니까. 너희들이 부럽다. 다 죽을 거면서. 죽은 친구가 옆에 있어서 내가 죽는 건 생각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단정하구나. 예쁘고 단정하게 잘 놀자.' 아름의 독백이 끝나고 카메라는 동생 커플이 한복을 입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낸다.
줄거리에 대해 쭉 썼다. 사실 이것은 그냥 내가 노트북을 가져가서 카페를 관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상은 이렇게나 심심하고 별 것 아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영화를 좋아하는 모두들은 이미 우리 삶에서 반전 같은 건 드물다는 걸 알고 있다. 전적으로 영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뜻이다. 원래 필연적인 결말이 있어서 인생은 허무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감정을 쓴다. 맛있는 건 언젠가 다 먹게 되어있고 돈도 다 쓰게 되어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난다. 빛나던 커리어도 언젠가 끝이 있다. 그걸 애써 부정하면 나 자신만 추해지는 것이다. 근데 나는 항상 더 욕심을 냈다. 결과는 참혹하다. 번번이 좌절한다. 이렇게 나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은데 타인은 어쩌겠는가. 내 아빠가 대통령이건 법무장관이건 검찰총장이건 원래 자식들은 아버지를 오롯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도 사실 우리 아빠의 전부를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안다는 게 원래 그런 거고, 우린 절대로 타인의 입장에 서 있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지나가다 본 풀잎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다. 엄연히 남이기 때문이다. 갈라지는 것은 다 이런 이치가 아닐까. 우습게도 우리는 이런 삶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영화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듯 초반부터 죽음에 대해 제시한다. 근데 이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다방면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남녀는 '죽은 후에도 함께 사랑을 약속하는 이들'이라는 키워드로 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남녀는 '죽었어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남녀는 '죽음이 드리우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남녀는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고 쓸 수 있지 않을까. 세 번째 남녀를 제외하곤 이 들의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첫 번째 남녀는 이내 커플이 되어 서로의 굳건한 사랑을 재확인한다. 네 번째는 후의 미래를 보여주진 않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함께 동석을 하며 술을 마신다. 그러니까 후회와 미련으로 보냈던 사람들의 후는 보여주지 않은데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동석을 시켜 엔딩부에 풀잎들과 함께 노출시킨 것이다. 분명한 연출 의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홍상수가 허무함을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쪽이다. 간단하다. 미래를 바라보지 않은 쪽의 사람들은 말 그대로 미래가 없고, 큰 사건이 있는 후에도 본인의 모습과 변함없이 사는 사람들은 그 후가 있는 것이다. 이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대칭을 이루는 것과도 닿아 있다. ‘주변인의 죽음을 경험한 남녀’에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 누나인 커플’로 전환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아름이 ‘잘 알아보고 연애를 해야지’라는 훈수를 뒀다. 완벽한 대칭이다. ‘주변인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상대를 잘 모르면서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동격으로 놓인 것이다. 애초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정확히 안다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닐까라는, 그런 홍상수의 세계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감독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었으니까. 그리고 이 첫 번째 연출 의도와 두 번째 연출 의도는 병렬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두 남녀 중 세 번째, 김새벽과 정진영 배우가 나온 부분들을 보자. 둘은 현재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글은 원래 혼자 쓰는 거예요. 사랑이 최고야. 뭐 이런 주제로 말을 이어간다. 이 현재를 주제로 대화하는 사람들 중 여자가 극의 중반부 즈음에 느닷없이 계단을 왔다 갔다 한다. BGM은 바그너가 만든 ‘탄호이저’와 관련된 음악이 나오는데, 나는 이 탄호이저와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행위도 연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일단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건 사실 되게 해석하기 쉽다.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가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이런 필멸의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거겠지? 또 바그너가 쓴 탄호이저 극본은 ‘희생에 의한 구원’이 주요 모티브라고 한다. 한 여성이 타락한 남자를 위해 희생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다. 뭐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것도 이 <풀잎들>을 관통하는 키워드 아닌가? 현재의 문제는 끊임없이 반복되고(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를 피할 수 없기에 현재에 있는 관계 속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뭐 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첫 번째 ‘원인에 대해 모르면서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이 죽음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가 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 홍상수는 반복이라는 모티브를 본인의 필모그래피에서 흥미롭게 끌고 가는 감독이었는데, 이런 부분 역시 풀잎이라는 식물의 속성과 계단이라는 도구의 특징을 활용해서 삶에 은유했다. 참으로 홍상수스러운 연출법과 감정 활용이다.
후반기의 홍상수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심심할 정도로 잔잔하지만 지켜보는 우리에게 또 다른 메세지를 전한다. 당신은 풀잎이 될 것인가, 지는 꽃이 될 것인가. 우리는 사실 이 답을 알고 있다. 모두 다 언젠가 다시 사라질 운명인데 항상 무언가를 꿈꾸고 있다. 아니, 홍상수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꿈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게 미련 가득한 과거였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났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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