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09-07 21:11:54
달라지는 관점 덕에 즐거운, <굿모닝 에브리원>
<굿모닝 에브리원>은 베키의 성장담을 그린 것이 아니다.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굿모닝 에브리원 Morning Glory, 2010
미국 | 코미디 외 | 2011.03.17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07분
감독: 로저 미첼
달라지는 관점 덕에 즐거운, <굿모닝 에브리원>
<굿모닝 에브리원>는 '사악', '어둠'과 같은 부정적인 언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언제든 볼 수 있고, 영화 끝까지 그 마음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품이 들지 않는 마법 같은 영화랄까. 말 그대로 참 보기 쉽다. 특히 정신적, 감성적으로 목화솜의 촉감처럼, 안정감과 기분 좋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수다쟁이 베키 풀러(레이첼 맥아담스)의 쉼 없는 말과 행동에 잠깐 집중력과 흥미를 잃을 수도 있고, 자칫하면 '그들만의 세상'이란 관점을 관객에게 심어 그들에게서 완전히 도태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맹점이 너무 드러나있는 점이 살짝 아쉬움을 남기지만, 무료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은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봐도 좋을 영화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조화로워 메인 주인공 베키의 변화하는 감정선이 잘 보인다. 스토리의 모든 요소에 깃든 유머가 꽤 매력적이고, 아침 방송국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이 충분히 시각적인 즐거움을 채운다. 마이크(해리슨 포드)의 무표정과 한쪽 눈썹을 씰룩거리는 불만 가득한 표정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또 사실상 베키의 수다가 아니었다면, <굿모닝 에브리원>은 시작하자마자 풀썩 주저앉았을 것이다.
<굿모닝 에브리원>이 흥미로운 점은 관객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외면과 내면을 동시에 성장시키는 것을 초점으로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형식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표면적 측면일 뿐이다. 베키의 바쁜 삶을 시작으로 그녀가 악명 높은 방송국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동시에 사랑을 어떻게 쟁취하고 지켜가는지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와 똑같다. 하지만 <굿모닝 에브리원>가 온전히 베키만을 내세우고 있는가? 그녀는 앤드리아와 달리 홀로 해낼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주인공이다. 방송 PD란 직업은 본래 다른 이들과의 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니까. 시청률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사라질 위기에 놓은 아침방송 프로그램 '데이 브레이크'를 되살린 건 베키 혼자가 아니다.
따라서 <굿모닝 에브리원>이 내세운 첫 번째 관점은 '나'가 아닌 '우리'다.
베키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열정을 다 쏟으며, 자신의 존재가치와 위치를 증명하는 데 성공한다. 고집불통인 마이크까지 변화시키는 사건은 베키의 새로운 성장을 위한 서사적 장치였기에 실패는 더더욱 예견되지 않았다. 망해가는 '데이 브레이크'를 살린 건 포기하지 않는 베키의 열의와 그녀의 역량을 진작에 알아차린 마이크와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데이 브레이크의 소속 스텝들의 합심이었다.
그녀가 일 중독자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꿈을 가진 건 좋아.
여덟 살 때는 귀여웠지.
열여덟 때는 당차 보였어.
스물여덟 먹고도 그 모양이니 창피해 죽겠다.
상처 받기 전에 현실에 눈뜨란 말이야.
베키의 엄마는 베키가 지방방송 PD에서 해고당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속마음을 딸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과 욕심을 자식이 대신 성취해야만 하는, 그런 전형적인 부모의 입장으로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방송일을 꿈꿨던 소녀가 꿈을 이룬 후, 더 이상 꿈이 주는 희열감과 행복감에서 빠져 살 수 없었던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란 얘기다. 따라서 베키는 자신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닌 일자리임을 엄마의 현실에서 또다시 깨닫게 된다.
다 좋다. 바쁘게 사는 것도, 쉼 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도 전부다. 하지만 베키는 점점 지쳐갔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렵게 들어온 회사에서는 프로그램 폐지를 하겠다고 통보까지 하니 말이다.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다. 그리고 때마침, 마이크가 등장한다. 그는 베키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말라 조언한다. 일에 미쳐 가족에게 소홀했던 자신이 지금 얼마나 외로움과 사투를 하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말이다. 또한 평생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뉴스를 진행하며, 영향력 있는 앵커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될 거라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단편적인 인간이었는지를 털어놓는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 중 세 번째란 타이틀을 가진 것도 올라가는 것만 인생의 값진 보물이라 생각한 마이크 본인 탓임을 시인한 것이다.
이후, 베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고민이다. 베키는 그를 보며 자신의 삶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을 해야만 한다. 그게 보통 이야기들의 흐름이니까. 가령, '정말 나에게 일이 전부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일에 미쳐있는 걸까?'란 생각에 묻혀, 일과 개인생활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매번 순기능을 하지 못하는 '자기 검열' 말이다.
여기서 <굿모닝 에브리원>의 또 다른 관점이 등장한다.
사랑스러운 베키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개인적 시선은 그저 시선으로만 기능했다는 점.
희한하게도 베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보다 직접 행동하는 방식을 취한다. 마이크의 조언과 애인의 배려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일과 삶의 균형점을 찾는 게 아니라 '조정'한다. 균형을 찾는 것은 베키 개인의 몫이니까. 그녀가 일에 더 미친다고 해서 베키의 삶이 불행할 거란 예측은 아주 불필요한 선입견이란 얘기다. 일과 사랑을 모두 충분히 만족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타인에게 확인시킬 이유가 베키에겐 전혀 없다. 베키는 정말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도, 매번 사랑에 조급해하는 마음도 그녀의 삶을 유지하는 투명하고 깨끗한 사이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키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상적인 삶의 균형을 섬세하게 조정하면서 완벽한 '나'로 변화한다.
베키 스스로는 변화했다고 느끼지만, 타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키포인트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카메라 앞에서 앞치마를 결코 두르지 않겠다는 고집쟁이 마이크를 카메라 앞에 세운 장본인은 '마이크나 애인에게 영향을 받아 180도로 바뀐 베키'가 아니라 '처음부터 한결같았던 베키'인 셈이다. <굿모닝 에브리원>은 베키의 성장담을 그린 것이 아니다. 베키의 진면목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면서, 결정적인 순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친절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보이지 않던 계획이 본 작품의 힘이란 자신감까지 덧붙인다.
마냥 재미있기만 한 영화가 아니다. 분명 당신의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끝내 '데이 브레이크'를 떠나지 않는 의리의 베키가 <굿모닝 에브리원>의 뻔한 결말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 영화를 본 이들은 알 것이다.
Relative contents
-
- 내 생각보다 더 컸던 내 맘 속 너의 자리
너는 내 세상이었어
레오와 레미는 둘도 없는 단짝친구다. 매일 붙어 다니는 레오와 레미. 넓은 세상으로 나 아길 길이 없다. 당연하지. 매일 학교 다니고 집에 오는 일상의 반복인데. 둘은 둘에게 세상을 만들어준 사람이다. 그러나 애들이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면 애들아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관심이 너무 많은 아이들. 같은 반 친구들은 툭툭 한 마디씩 던진다. ‘너희 둘 사귀어?’ 발끈하는 두 사람.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이 둘을 멀어지게 한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흠집이 간다. 13살인 레오와 레미. 인생의 10%는 함께 쌓아온 셈이지만 사이가 깨지는 건 이렇게나 쉽다. 원래 서로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각자를 기다렸던 레오와 레미. 레미는 어느 날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 레오의 얼굴을 확인하고 서운한 감정을 토로한다. 서서히 멀어지는 두 사람. 두 사람은 다시 가까워(close) 질 수 있을까?
각본의 섬세함
<클로즈>는 두 아이의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다. 레오와 레미가 서로의 관계를 겪으며 감내하는 일들을 영화의 중심 서사로 삼은 것이다. 퀴어 코드가 영화의 핵심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묘사하는 데 있어 무조건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이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에 대한 것이다.
영화를 지켜보는 시선은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레오-레미를 영화가 어떻게 바라보는가? 와 두 주인공을 다른 인물들이 어떻게 바라보는가? 에 대한 것이다. 글쓴이는 둘 다 영화의 강점으로 뽑고 싶다. 첫째. 레오와 레미 사이에 불필요한 장면이 없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느닷없이 볼에 뽀뽀하는 신이 없다. 여기서 두 사람이 스킨십을 하면 영화의 핵심인 선 타기가 무너진다. 우정과 사랑 사이 자기 자신도 모르는 마음이 영화에서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미스터리가 유지되어야 2부의 이야기전개에 감정전달이 성립한다. 이 선 타기는 단순히 스킨십을 들어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절묘하게 친구사이와 사랑사이의 간극을 타는 듯 보인다. 여기서 뭐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보이고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해피 투게더>나 <우리, 둘>같이 기존에 나왔던 퀴어 로맨스의 방식이 일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레시피로 맛없게 만드는 경우는 허다하다. 이 영화가 다른 퀴어 로맨스/성장서사와는 살짝 다른 지점은 여기에서 온다. 두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과 나이에서 오는 특성은 한 세트처럼 느껴지는데, 이 부분이 관객에게 있어 강렬한 여운과 설득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 레오와 레미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도 영화에서 강점으로 뽑을 수 있다. 이런 영화를 볼 때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라 빌런 유형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몇 있다. 대표적으로 <파벨만스>에서 새미를 괴롭히던 아이들이 몇 있었다. 물론 <파벨만스>에서 빌런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영화의 핵심과도 닿아있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들아가야 하는 연출이다. 대신 이런 10대 성장서사에서 자극적으로 퀴어를 소비하거나 폭력적인 시선이 들어갈 법도 하다. 비단 퀴어 소재를 다루지 않았더라도 <7번 방의 선물>같이 자극적인 소재에서 최대한 인물을 깎아내리는 연출방식이 기억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이들이 레오와 레미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센 단어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센 한방을 때리는 듯하다. 진짜 이걸 염두하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 것들로만 대사를 구성한 것이다. 각본 역량이 빛났다. 뭐 이외에도 인물들이 등장하고 퇴장한 다음 다시 나타나는 형태도 섬세한 터치로 구성되어 있다.
무너지다
영화 자체가 소담한 작품이다. 거리 이동이 별로 없는 느낌? 뭐 13살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엔딩 와서 느끼는 여운은 아주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왜일까? 영화는 장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장소를 활용하는 방식이 눈에 띈다. 장소를 어떻게 활용했나? 바로 반복이다. 영화는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두 상황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일례로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인물들이 '왜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근거가 된다. 또 이 장소는 후반부에 다시 돌아와 인물의 정서를 나타내는 도구가 된다. 스포일러가 돼서 자세히 쓸 수 없지만 영화의 두 장면에서 그렇게 엄청난 무언가가 없음에도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이 장면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반복이 안 됐다? 그러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사실 사랑이란 건 그런 게 아닐까. 익숙했던 것들이 색다르게 다가오는 것. 그게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 이런 사랑의 속성을 장소로 표현한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이를 돋보이기 위해서 인물들의 리액션에 집중한 촬영 방식이 영화의 미장센이라는 측면에서도 나름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영화는 비움과 채움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제목이 왜 'close'인가를 생각해 보면 되는 문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왜 이 인물이 앞으로의 삶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작품 자체가 처연하고 외롭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그러니까 그땐 왜 몰랐을까? 에 괜한 것들이 사람을 앞으로 살아가게 만든다는 아이러니를 잘 담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런 영화에도 아쉬운 지점은 있다. 잘 만든 영화고 여운도 길게 남지만 영화의 이야기 전개가 전형적인 느낌이 좀 있다. 사실 영화 보기 전에 포스터 보고 대충 예상한 바가 있다. 아. 이거 아마 섬세한 화법으로 이야기 전개할 거야. 퀴어 소재인 것 같으니 자극적이지도 않겠지. 아마 인물들 이렇게 될 듯. 촬영으로 임팩트 딱 주겠지? 정확히 그대로 흘러간다. 대신 후반부에 어떤 장소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 인상 깊긴 했지만 영화가 약간 강박적으로 짜여있다는 느낌은 아쉽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도 봤었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우리, 둘>의 감정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에 따라서는 좀 지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
- 사실적 토대 위에 구축한 새로운 세계, <언컷 젬스>
1. 들어가며
조쉬 사프디와 베니 사프디는 근래 들어 가장 주목받는 뉴욕 출신의 영화 연출가들이다. 사프디 형제의 주요 작품들에선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사프디 형제는 사실적 질료를 가공하여 영화를 만든다. 각본에 자전적인 경험을 반영하기도 하고, 현장감을 위해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하는 이들의 영화에선 존 카사베츠나 다르덴 형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와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프디 형제는 이처럼 사실주의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기초를 교란하는 형식주의적인 스타일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바로 이 점이 이들의 영화를 전형적이지 않게 만들어준다.
형제의 공동 연출작 중에서는 2014년 개봉한 <헤븐 노우즈 왓(Heaven Knows What)>부터 본격적으로 전자 음악의 과도한 배치, 다채로운 질감의 조명을 활용하는 미장센 등 특유의 접근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굿타임(Good Time)>(2017)의 놀이 공원 시퀀스, 극 전개를 보조하는 전자 음악의 활용을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넷플릭스(Netflix)가 배급을 맡은 <언컷 젬스(Uncut Gems)>(2019)는 숱한 단편과 굵직한 장편 등을 통해 쌓아 온 사프디 형제의 연출력이 집약된 작품이다.
이 글은 <언컷 젬스>에서 독특하게 드러나는 사프디 형제의 접근법을 관찰하려는 시도이다. <언컷 젬스>는 사실주의적인 토대에 기초한 영화다. 각본, 촬영 장소 등을 살피면 현실적 질료를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사프디 형제는 이러한 영화 요소들을 전형적인 방법으로 활용하지 않고, 어딘가 독특한 방식으로 영화에 활용한다. 이들은 단순한 현실의 재현을 넘어 현실과 허구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적 현실을 창조해냈다. 이 글은 그러한 작업들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살피는 시도이다.
2. <언컷 젬스>의 사실적 영화 요소
우선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이 형제의 자전적 요소를 반영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사프디 형제는 유대계 혈통이고, 뉴욕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들의 아버지는 보석상 관련 업종에 종사했던 경력이 있다. 사프디 형제는 영화의 주인공인 뉴욕에 몸담은 유대인 보석상 하워드 래트너 역에 아담 샌들러를 내세운다. 자전적 경험을 각본에 녹여냈다는 점은 이 영화를 사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실화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거나 이 영화처럼 자전적 요소를 살려 영화적 소재로 활용하는 방식은 사실성을 강화하는 접근법이다.
<언컷 젬스>에서 하워드 역을 맡은 아담 샌들러. 그는 실제로도 유대인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미국의 유명 배우인 아담 샌들러는 여러 비전문 배우와 호흡을 맞춘다. 하워드의 내연녀 역의 줄리아 폭스(Julia Fox)는 <언컷 젬스>가 첫 연기 데뷔작이며, 극 중 이름 줄리아는 실제 배우의 본명이기도 하다. 하워드가 운영하는 보석상 직원 중에 여시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배역은 실제 주얼리 관련업에 종사했던 막수드 아가자니(Maksud Agadjani)가 연기한다. 실제 삶의 경험을 반영할 수 있는 비전문 배우의 기용은 사프디 형제의 영화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이 영화에서 전문 배우와 비전문 배우가 주고받는 호흡으로 빚어내는 전개 양상은 극을 효과적으로 지탱하기도 한다.
한편 사프디 형제는 현장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형제가 각각 대학 시절부터 연출한 단편부터, 공동 장편 데뷔작인 <아빠의 천국(Daddy Longlegs)>(2009) 등을 거쳐 <언컷 젬스>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현실 속 뉴욕을 무대로 삼아 영화를 만들어냈다. 현장 촬영이 불러오는 효과는 익히 알려져 있다. 생생한 현장감을 스크린으로 구현할 수 있고, 실제 삶의 단면과 맞닿은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도 적합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도 하다. <언컷 젬스>는 정밀하게 세트로 구현된 하워드의 보석 가게를 제외하면, 전부 현장 로케이션을 바탕으로 기획된 작품이다. 그마저도 형제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실제 점포를 찾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세트를 활용하게 되었다.
3. <언컷 젬스>의 세계: 사실적 토대 위에 구축한 새로운 세계
<언컷 젬스>에서 사프디 형제가 구축한 세계는 현실을 재료로 하지만, 온전한 현실 세계가 재현되는 곳이 아닌, 새로운 개념이 정립되는 공간이다. 영화에서 중계되는 전 NBA 선수 케빈 가넷(Kevin Garnett)의 농구 경기는 사프디 형제가 지은 각본이나 촬영한 필름들과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그 경기가 영화에 사용되면서 서사가 굴러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스크린 외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과거의 일(실제 농구 경기)이 스크린 내부에서 현존하는 영화적 세계와 호응하게 된다. 즉, 이런 연출은 사프디 형제가 실험적인 시도에 목말라 있다는 걸 드러내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가넷은 이 영화에서 본인 역을 맡아 연기한다. 즉, 영화의 배역을 맡아 본인을 연기하는 가넷과 실제 선수로서의 가넷, 중계 속의 가넷이 공존하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기용된 배우는 가넷 외에도 몇 명 더 있다. 영화에는 미국의 알앤비(R&B) 가수 위켄드(The Weeknd)도 본인 역으로 출연한다. 위켄드 역시 극 중 DSLR 카메라에 찍힌 사진 속의 위켄드, 자신을 연기하는 위켄드와 실제 가수 위켄드 사이를 기묘하게 유영하는 존재다. 래퍼 캐시 아웃(Ca$h Out)도 본인을 연기하며 하워드의 가게에서 보석류를 구매하고자 한다. 한편 하워드가 줄리아와 살던 아파트에 아들과 함께 찾아가는 신에서도 흥미로운 점이 드러난다. 화장실이 급하다는 아들을 데리고 하워드는 옆집을 찾아가 화장실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하워드가 아들에게 옆집 이웃을 왕년에 유명한 작품에 출연했던 코미디 배우라고 소개한다. 출연진 정보에는 33F의 이웃으로만 나오는, 존 아모스(John Amos)라는 배우는 실제로 하워드가 영화에서 언급한 작품에 출연했다.[1] 존 아모스도 본인을 연기한 셈이고, 하워드의 대사는 허구적인 각본이 실제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가 이렇게 독특한 형태로 허물어진다.
<언컷 젬스>에서 본인 역을 맡은 농구 선수 케빈 가넷
이제 사프디 형제가 뉴욕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삼는다는 사실이 영화 내적으로 크게 강조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도입부에 ‘2012년의 뉴욕’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명시하는 문구가 삽입되기는 하지만, 영화 자체는 뉴욕을 배경으로 삼는 수많은 영화들(<스파이더맨> 시리즈, 우디 앨런의 작품이나 각종 로맨스 영화 등)과 비교했을 때 공간 특성을 전혀 살리지 않는다. <언컷 젬스>에선 맨해튼(Manhattan)의 다이아몬드 지구(Diamond District)가 뉴욕이라는 장소 정보를 제공하지만, 이는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접하는 관객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서는 파악하기 힘든 요소들이다. 뉴욕 맨해튼에 자주 갔거나 그곳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관객은 논외로 하자.
결국, 피상적으로는 사프디 형제의 뉴욕이 현실을 옮겨놓은 듯한 현장감 있는 장소로 보일 수 있겠으나, 이들 영화의 뉴욕은 극도의 사실성 재현을 위한 공간보다는 극적 효과를 불러오는 서사적 도구로서 작용한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 있다. 게다가 잦은 비전문 배우의 기용 역시 얼핏 보기엔 영화를 통한 사실주의적 재현을 위한 노력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영화 속 비전문 배우는 앞서 언급했듯 대개 자신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연기에 활용할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각본에 구현된 캐릭터를 표현하는 작업을 수행 중인 셈이다. 이는 사프디 형제가 이전에 연출했던 <헤븐 노우즈 왓>의 홈즈(아리엘 홈즈)도, <굿타임>의 닉(베니 사프디)의 치료 의사도, <언컷 젬스>의 아가자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언컷 젬스> 속 비전문 배우의 기용(특히 본인을 연기하게 하는 방식) 및 현실을 스크린에 재소환하는 방식을 다른 영화와 유사한 전형적인 접근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언컷 젬스>의 가넷과 위켄드를 유사한 특성을 가진 다른 사람―예를 들어, 농구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나 알앤비 가수 크리스 브라운(Chris Brown) 등―으로 교체한다고 해서 극의 흐름이 달라지거나 영화를 지탱하는 요소가 사라지는가? 그렇지 않다. 결국, 저들은 본인을 연기할지라도, 영화적 허구에 구속된 캐릭터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2] 그런데 허구의 인물을 연기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본인을 연기한다는―일종의 정체성에 관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가넷의 실제 경기나 카메라에 찍힌 위켄드의 모습은 허구적 특성을 살려 연기하는 인물과 같은 영화에서 공존한다. 즉, 영화에 현존하는 인물들은 영화를 통한 현실의 사실적 재현의 주체도 아니고 허구적으로 표현된 내러티브에 종속된 도구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발현된다.
4. 나가며
현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으로는 <언컷 젬스> 속 등장인물이 자리 잡은 뉴욕의 특성을 규정할 수 없다. 즉, 이런 모호한 인물들이 유영하는 사프디 형제의 뒤틀린 뉴욕은 전통적인 유형으로 범주화하기엔 상당히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사프디 형제의 뉴욕은 뉴욕이지만 뉴욕의 특성이라고는 딱히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영화 서사를 위한 공간으로 작용한다. 가넷이나 위켄드는 본인을 연기하는데, 이는 실제 현실에서의 본인과는 다른 속성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지만, 이들이 각각 중계화면에서 경기를 뛰는 모습과 셀러브리티(Celebrity)로서 카메라에 찍힌 모습은 그 자체로 이들의 현실성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사프디 형제는 영화 속 현실에 종종 허구적 요소를 첨가하여 스크린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략을 보여준다. 단편 <검은 풍선(The Black Balloon)>(2012)에서 자의로 움직이는 풍선이 그러하고, <헤븐 노우즈 왓>에서 일리야(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던진 휴대폰이 폭죽이 되어 터지는 쇼트 편집을 예로 들 수 있다. <언컷 젬스>는 단순히 현실에 허구를 더하는 시도를 넘어선다. 사실적 요소들에 충실하고, 현실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영화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은 현실과 허구를 모두 점유하는 기이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프디 형제는 활발히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재능 넘치는 젊은(두 사람 모두 아직 삼십 대 중반이다) 영화 연출자들이기 때문에, 추후 제작될 영화들에서 <언컷 젬스>의 독특한 접근을 어떤 방식으로 변주해나갈지 기대가 많이 된다. 이들의 영화 세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언컷 젬스>에 출연한 배우들의 모습. 좌측부터 줄리아 폭스, 케빈 가넷, 아담 샌들러, 위켄드
[1] 극 중 하워드는 코미디 영화 <구혼 작전(Coming To America)>(1988)과 텔레비전 시트콤 <굿 타임스(Good Times)>(1974-1979)를 언급한다.
[2]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문헌을 참고하라. 오몽(J), 베르갈라(A), 마리(M), 베르네(M), 『영화미학』, 이용주 옮김, 동문선, 2003, pp.89-90.
사진 출처: IMDb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드플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서로에게 멀어질수록 완전해지는 두 여자.
김세인 감독님의 첫 장편 영화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우리가 고민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잘 풀어냈다. 전작의 '불놀이', '컨테이너'가 보여줬던 것처럼 영화에 나오는 이들의 모든 감정을 여과없이 화면 위에 담아낸다. 그 감정이 만들어내는 뜨거움에 데일 것 같다가도 이런 솔직함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이 우리를 '이해'의 공간으로 이끌어낸다.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결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을 '속옷'에 빗대어 표현하여 이 지독한 관계의 시작과 끝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웃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한 웃음소리는 끝내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모습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괜스레 궁금해진다. 같은 속옷을 공유하지만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지 않는 두 사람은 일반적인 모녀의 관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회가 부여한 보통의 모성애, 가족의 형태, 모녀의 관계가 이 두 사람 앞에 존재할 때는 마구 일그러진다. 어떤 호칭도 오가지 않은 이들의 관계는 평온함보다는 치열함으로 가득 찼으며 언제부터 시작됐을지 모를 긴장감과 불안으로 이 공간을 메웠다.
침묵을 유지하던 두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칠 때가 되어서야 말을 내뱉는다. 그동안 담아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산처럼 쌓여 이 관계가 찢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귀를 찌를 듯한 소음이 좁은 공간을 메우고 무차별적인 폭언과 일방적인 폭행이 이루어진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계속해서 부딪혀온다.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경쟁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이정에게는 더욱 힘든 순간의 연속이었기에 폭력의 상흔이 가득함에도 이정은 그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사랑 받은 그 순간을 놓지 못해서 사랑해주길 바라는 그 마음만이 남은 것이다. 그렇게 그 마음을 끊임없이 표현해 보지만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고 끝끝내 마음을 돌려받지 못한다.
지독한 집이지만 그곳을 나가면 나를 온전히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형체없이 사라진다. 타인은 타인이고 가족은 가족이며, 가족도 타인이기 마련이다. 수경이 양육의 의무를 저버리자 이정은 부양의 의무를 저버린 것처럼 가족은 존재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와 존중을 토대로 한 관계라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그렇게 달리던 관계의 평행선은 끊임없이 이어져 다른 이름으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관계처럼 폭력의 물건이 되어버린 물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엉킨 것이 통째로 뽑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0여 년간 이어온 이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를 한순간에 정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여자는 서로를 끊임없이 잘라내고 멀어짐에 따라 완전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모녀의 관계를 떠나 개별적인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나 또한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에 적응이 되어있어 영화의 모든 부분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으나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서툰 마음만큼이나 서툰 관계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그 상처를 통해 '행동'하는 우리를 발견한다.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따스함을 의외의 사람에게서 받기도 하고 정말 가까운 곳에서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하곤 했다. 집에서는 부모님께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고 학교에서는 친구와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지속될수록 '착한 아이' '성실한 아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족쇄가 되어 나를 죄어왔고 여전히 그런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이정도 나와 같이 익숙함을 미처 쳐내지 못해 완전히 미워하지도 못한채로 그러한 상황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한 속옷을 골라 앞으로 나아갈 이정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
- 하이재킹 | 역사와 상상 사이에서 항로를 지켜내는 뚝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9년, 동해 상공을 비행하던 공군 파일럿 '태인'(하정우)은 비상사태를 맞이한다. 남파 간첩이 납치한 한국 민항기가 휴전선을 넘기 직전이 되자 민항기를 사격해 엔진을 멈추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것. 하지만 그는 전역한 자기 사수가 파일럿임을 확인한 후, 승무원과 승객의 안전을 우려해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결국 비행기는 그대로 북한에 억류되고, 태인은 군복을 벗는다.
2년 후 민항기 부기장이 된 태인'(하정우)은 기장 '규식'(성동일)과 함께 속초 공항에서 김포행 비행에 나선다. 승무원 '옥순'(채수빈)의 안내에 따라 승객들이 탑승한 후 이륙한 비행기. 그러나 '용대'(여진구)가 사제폭탄을 터뜨리자 기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용대는 조종실을 장악한 후 북으로 기수를 돌리라 협박한다. 폭발 충격으로 규식마저 한쪽 시력을 잃은 가운데, 태인은 비행기와 승객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과거의 힘을 살린 항공영화
하이재킹. 운항 중인 항공기를 불법으로 납치하는 행위. 미 연방항공청에 따르면 하이재킹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 5년간 325건에 달할 정도. <1987>의 김경찬 작가가 각본을 맡고, 당시 조감독이었던 김성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하이재킹>은 바로 그 시기에 발생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1971년 1월, 속초공항발 김포공항행 여객기가 이륙 30분 만에 홍천 상공에서 납치범 김상태에게 납치당했고, 이강흔 기장과 전명세 조종사는 협박범의 요구대로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비행기는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무사히 비상착륙했고, 승객도 전원 생존했다. 이강흔 기장이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를 북한의 미그기라고 속이는 기지를 발휘하고, 전명세 조종사가 폭탄을 몸으로 덮는 희생정신을 보여준 결과였다.
<하이재킹>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1987> 느낌이 물씬 나는 역사적 상상력이다. 사람보다 이념이 우선시되던 시대의 그림자와 과거라서 오히려 신선한 당시 시대상을 버무려 기존 항공 영화의 한계를 피하려 했다. 과하지 않게 감정선을 살짝 '넛지(Nudge)'하는 화법도 관객을 승객 중 하나로 만드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덕분에 <하이재킹>은 난기류를 만나고도 목적지까지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의 것은 역사에게, 상상의 것은 상상에게
실화 사건을 다룬 작품의 관건은 각색의 정도와 방향성이다. 상상과 왜곡은 한 끗 차이니까. 그런데 <하이재킹>은 그 어려운 일을 비교적 잘 해냈다. 역사적 사실을 부각하는 대목과 상상력을 발휘할 대목을 철저히 분리한 선택이 장르적인 측면과 스토리텔링 양쪽에서 득이 됐다.
사실 항공 영화는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다. 시간대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그렇다. 숱한 사고를 겪으면서 보안 규정이 나날이 철저해졌기 때문.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만 해도 '류진석'(임시완)이 비행기 표를 사는 첫 장면부터 기내에서 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전개가 어색하다는 평가를 피하지 못했다.
<하이재킹>은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 함정을 피했다. 항공 보안 관련 규정이 미비했던 70년대를 배경 삼아 자칫 억지스러울 상황을 납득시켰다. 선착순으로 비행기 자리를 고르거나 용대가 보안 검사를 뚫고 폭탄을 반입하는 장면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역사의 빈틈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실제로는 없었던 민항기 격추 명령, 알려진 바 없는 범인의 범행 동기 등을 잘 짜 맞춰서 태인과 용대 사이에 진한 감정선을 불어넣었다. 그 덕분에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에서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는 '이한열'(강동원) 열사와 '이연희'(김태리) 사이의 가상 로맨스를 활용해 6월 민주 항쟁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한 <1987>의 장점과도 유사하다.
피해자 VS 피해자
그 덕분에 <하이재킹>은 단순한 항공기 납치 스릴러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 전혀 접점이 없는 태인과 용대의 이야기는 대조될 때 함의가 드러나기 때문. 용대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전형이다.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 장교가 된 형 때문에 반공분자로 몰려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 사이에 어머니까지 죽은 그는 2년 전 납북 사건 주동자가 북한에서 영웅 대우를 받는다는 소식에 착안해 하이재킹 범죄를 저질렀다.
반면에 태인은 피해자이지만 가해자는 되지 않았다. 그는 2년 전 휴전선을 넘어가는 민항기의 엔진을 쏴서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군에서 사수였던 파일럿과 승무원, 승객 모두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 대가로 강제전역 당한 후에도 그는 군복을 벗긴 휴머니즘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전투기 사격을 피하고, 한쪽 손만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면서 2년 전과는 달리 승객도, 승무원도, 자기 부사수도 지켜냈다.
이렇게 보면 두 주인공의 공통점과 차이는 분명하다. 국가 권력의 횡포로 인해 피해자가 됐지만 전혀 다른 답을 볼 수 있으니까. 용대는 피해의식과 정부를 향한 불신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은 물론 무고한 이들의 인생까지 파괴하려 든다. 반면에 태인은 그 불이익을 오롯이 감내하면서 자기 신념을 증명해 보인다. 북한에서 송환을 거부한 파일럿 사수의 가족을 자기 자족처럼 돌보고, 부기장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그래서일까? 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순간은 <하이재킹>에서 볼 거라 예상한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처럼 피해자로서 고통받은 이를 마주한 후에야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마침내 자기 잘못을 깨닫는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용대는 자기처럼 무고한 피해자는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태인의 설득에 비로소 흔들린다. 여기에 다소 잔인한 과감한 연출이 더해지면 둘의 관계는 의외로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압축과 절제의 미학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사건에만 집중하는 구성도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담긴 감흥을 극대화한다. <하이재킹>은 압축과 절제의 미학을 살려 이야기를 러닝타임 100분 안에 눌러 담고, 빠른 템포로 전개하면서 사건과 주인공 둘에게만 시선이 쏠리게 한다.
사실 <하이재킹>의 구성은 자칫 익숙한 신파로 빠지기 십상이었다. 갑작스레 납치된 승객 하나하나의 사연을 풀어놓으면 눈물을 짜내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신혼여행 가는 부부, 아픈 딸 병간호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할머니 등. 하지만 영화는 승객에게 그다지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타이밍마다 장면 하나하나를 알뜰하게 활용하면서 분위기를 고조한다.
감정을 강요하는 대신, 관객이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상황만 조성하고 뒤로 물러나는 셈이다. 사법고시 붙은 아들과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검사가 된 아들이 자랑스러운 어머니와 수화 쓰는 어머니를 창피해하는 아들. 납북을 대비해 신분증을 파괴해야 상황에서 아들은 차마 검사 신분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히려 신분증을 찢으려 하고, 잘 찢어지지 않자 아예 삼켜 버린다.
부메랑이 된 상상력
다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상상력은 부메랑이 되기도 한다. 특히 과욕처럼 보이는 볼거리가 적지 않다. 물론 인상적인 대목도 있다. 용대가 폭탄을 터뜨려 조종실을 장악하는 장면은 마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속 뉴욕 타임스 스퀘어 장면을 연상시키는 슬로 모션 효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록 같은 퀄리티는 아닐지언정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담한 시도 자체는 놀랍다.
하지만 비행 시퀀스로 서스펜스를 쌓는 장면은 다소 무리수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기체에 구멍이 나서 비행기가 급낙하 할 때나, 한국 공군이 민항기를 사격하고 이를 피하는 장면이나, 여객기가 배면비행을 보여주는 것까지. 영화적으로는 긴장감을 극대화하지만, 잠깐이라도 현실성을 따지는 순간에는 맥이 뚝 끊길 수 있는 상황이다. 마치 <비상선언>에서 항공자위대가 민항기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순간처럼.
또 비행기 내부 전개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승객들이 용대를 덮치고, 부기장이 휴전선을 넘은 척 용대를 속이고, 어떻게든 난기류를 이용해 보려는 식으로 여러 사건을 만들어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결국 큰 틀에서는 겁에 질린 승객과 난폭한 납치범이라는 구도를 벗어날 변곡점이나 제3의 인물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중반부는 같은 장면이 반복되어서 비교적 지루할 수 있다.
배우들의 퍼포먼스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하정우와 성동일만이 이름값을 해냈다. 배우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극본의 한계가 드러난 지점에 가깝다. 여진구가 맡은 용대의 경우 태인과 대조되는 사연만 돋보일 뿐, 악역으로서의 카리스마나 매력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채수빈이 연기한 옥순은 단순히 시나리오의 도구에 불과하다. 없어도 이야기 전개에 문제가 없을 정도다.
이에 더해 <하이재킹>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기술적인 아쉬움도 크다. 대사가 잘 안 들리는 한국 영화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비행기 외부 소음과 대사가 섞이거나 파일럿끼리 무전을 할 때는 OTT 자막 기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국내 배급사가 아닌 컬럼비아 픽처스가 직접 배급하는 작품인데도 고쳐지지 않은 문제라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실화에 상상을 더해 어찌어찌 목적지에는 착륙하다
-
- 안보면 후회 할 영화들로 가득! 넷플릭스 6월 종료작
여러분! 하나씩 공개되는 6월 넷플릭스 영화, 잘 보고 계신가요?
저번 콘텐츠에서 소개해드린 <새콤달콤>이 현재 넷플릭스 영화 한 국 순위 TOP10 순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6월 종료작 또한 같이 찾아왔습니다. :(
이번 종료작에는 명작들이 너무 많아 뽑을 수 없어 다 가져왔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영화는 무엇인가요? 저는 <터미널>,<타이타닉>이 제 최애 영화입니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가 있다면 관람을, 여러분의 최애 영화가 있다면 n차 관람을 놓치지 마세요!
넷플릭스 6월 종료작, 함께 보시죠!
'
6월 18일 종료
▶ 장고 : 분노의 추적자 (2012) - 쿠엔틴 타란티노
6월 30일 종료▶ 포레스트 검프 (1994) - 로버트 저메키스
▶ 투모로우 (2004) - 롤랜드 에머리히
▶ 터미널 (2004) - 스티븐 스필버그
▶ 타이타닉 (1997) - 제임스 카메론
▶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2015) - 매튜 본
▶ 캐치 미 이프 유 캔 (2002) - 스티븐 스필버그
▶ 이지 A (2010) - 윌 글럭
▶ 아메리칸 뷰티 (1999) - 샘 멘데스
▶ 빅 피쉬 (2003) - 팀 버튼
▶ 블랙 스완 (2010) - 대런 아로노프스키
▶ 라이프 오브 파이 (2012) - 이안
▶ 미션 임파서블 : 로그네이션 (2015) - 크리스토퍼 맥쿼리
▶ 인 디 에어 (2009) - 제이슨 라이트먼
▶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2013) - 루이스 리터리어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 - 웨스 앤더슨
▶ 블레이드 러너 (1982) - 리들리 스콧
▶ 다이 하드 4.0 (2007) - 렌 와이즈먼
▶ 제이슨 본 (2016) - 폴 그린그래스
▶ 루시 (2014) - 뤽 베송
▶ 사랑에 대한 모든 것 (2014) - 제임스 마쉬
▶ 그린 존 (2010) - 폴 그린그래스
▶ 언브로큰 (2014) - 안젤리나 졸리
▶ 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 - 샤론 맥과이어
▶ 러블리 본즈 (2009) - 피터 잭슨
씨네랩 에디터 Ria
-
- 엄청나게 야심차고 믿을 수 없게 지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벽한 세계 바비랜드에서 매일 같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던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 어느 날 바비는 갑작스럽게 변한 자기 자신을 깨닫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하이힐을 신기 위해 까치발이었던 발이 평발은 됐으며, 다리에는 셀룰라이트가 생겼기 때문.
이에 전형적인 바비는 이상한 바비를 찾아가 해결책을 구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에게 변화가 생겼으니, 현실 세계로 넘어가 그 아이를 직접 만나라는 것. 이에 전형적인 바비는 현실 세계로 넘어 가 사태를 바로잡고 다시 완벽한 바비가 되려 한다. 그녀 없이는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는 '켄'(라이언 고슬링)과 함께.
영화와 메시지
봉준호 감독은 "영화는 메시지를 담는 도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영화든 메시지가 있으면 좋지만, 메시지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 영화는 선동을 위한 프로파간다와 다를 게 없기 때문. 즉, 영화는 일단 흥미로워야 한다. 그래야 감독, 작가, 배우 등이 심어 놓은 메시지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잘 전달될 수 있을 테니까.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감독인 그레타 거윅은 위의 예술관에 부합하는 여성 감독이었다. 거윅의 영화는 주로 페미니즘 메시지로 무장했다. 하지만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는 않았다. 전작인 <작은 아씨들>만 봐도 그렇다. 거윅은 고전 소설의 매력을 한껏 살리면서 그 안에 핵심적인 목소리를 물 흐르듯 담아냈다. 어떤 모습의 삶을 살든 여성들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고.
그레타 거윅의 신작 <바비>는 반대다. 화려한 분홍빛 바비랜드는 여러 메시지로 가득하다. 가부장제를 깨뜨려야 한다, 현시점 페미니즘은 문제가 있다, 백래시를 극복해야 한다, 남성에 대한 역차별도 해결해야 한다... 제각기 자기주장이 가장 중요하다며 일방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메시지를 쏟아내기 급급하다. 그 결과 이 야심차고 화려한 영화는 점차 지루해진다. 마치 대학 교양 강의를 듣는 듯한 인상까지 남는다.
바비랜드, 바비가 바꾼 세상
첫 장면부터 <바비>는 야심을 드러낸다. 바비 인형의 명암을 조명하고, 바비의 이상적인 의미를 찾아내겠다고 선언한다. 우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오마주한 오프닝은 바비의 등장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을 상기시킨다. 아기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엄마라는 꿈만 꿔야 했던 여자 아이들. 그들은 바비를 만난 이후 엄마가 아닌 다른 삶도 살 수 있다고 깨닫는다.
전 세계의 분홍색 페인트를 모두 가져다 쓴 '바비랜드'는 여성의 가능성이 완전히 꽃 피운 세상을 보여준다. 작가, 대통령, 대법관, 우주비행사, 과학자 바비 등 여성이 주도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바비랜드에서는 인종과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같은 바비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세계를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자화자찬한다.
이는 바비의 역사를 요약하는 대목처럼 보인다. 그간 마텔은 고정된 성 역할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간호사, 항공 승무원 등 여성 비율이 높은 직업뿐 아니라 의사, CEO, 파일럿, 경찰관 옷을 입은 바비도 출시했다. 문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수용해 히스패닉 계 바비, 아프리카계 미국인 바비, 블랙 바비를 연달아 선보였다. 최근에는 다운증후군 바비 인형도 등장했다.
미처 바꾸지 못한 현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바비>는 바비 인형에 내재한 모순을 마냥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형적인 바비를 현실 세계에 던져 놓으면서 전면에 부각한다. 일단 영화는 바비 인형에게 늘 따라붙는 가장 일반적인 비판부터 짚고 넘어간다. 아이들이 바비를 자신의 롤모델로 여기고, 바비처럼 되고 싶어 할 거라는 우려를 투영한다.
전형적인 바비의 몸에 문제가 생기자 다른 바비와 켄이 깜짝 놀라거나 구토를 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마치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듯이. 이처럼 <바비>는 바비가 젊은 여성에게 비현실적인 신체 이미지를 홍보한다는 비판을 스토리의 시작점부터 수용한다.
이에 더해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를 대조하며 바비의 한계도 지적한다. 바비들 생각과 달리 영화 속 현실은 바비랜드와 많이 다르다. 마텔 본사에 고위급 임원 중 여성은 없고 경찰도 성희롱 발언을 일삼는다. 바비랜드에서 완벽한 여성이었던 바비는 현실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바비 인형의 여러 변화가 현실에서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일각의 지적도 반영된 셈이다.
바비와 켄, 페미니즘과 휴머니즘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의 괴리감은 켄에게도 투영돼 있다. 그의 이야기에는 바비 인형의 모순과 다소 가려져 있던 현실이 깃들어 있기 때문. 바비랜드에서 켄은 바비만 바라보고 사는 부속품이다. 그녀가 말을 걸어주고, 쳐다봐 주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를 맛본 뒤로 켄은 바뀐다. 말, 자동차, 맥주로 대변되는 남성성의 신봉자가 된다. 가부장제를 도입하고 바비랜드가 아닌 켄덤을 세운다.
켄의 행보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백래시'라고 규정하는 사회적 반발을 반영하는 듯 보인다. 다만 바비랜드가 바비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극단적인 여성 중심 사회라는 점을 고려하면 켄의 저항은 단순히 치기 어린 반발이 아니다. 오히려 바비랜드도 텐덤도,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진 사회에서는 누구나 차별 또는 역차별당할 수 있다는 지적에 가깝다. 이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비랜드와 같은 이상향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라는 기대는 잘못됐다고.
이에 <바비>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휴머니즘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바비는 완벽한 여성이라는 한계를, 켄은 바비의 부속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자고 말한다. 바비와 켄 모두 원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또 누가 더 우월하고 낫다고 싸울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자고 덧붙인다. 영화는 바비는 바비, 켄은 켄, 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막을 내린다. 마고 로비가 "완벽히 페미니즘 DNA에 기반하고 있고, 환상적인 휴머니스트 영화"라고 <바비>를 소개한 이유다.
메시지와 메신저의 부조화
문제는 메신저다. 전개와 연출이 메시지와 잘 이어지지 않으면서 영화를 혼란스럽고, 지루하게 만든다. 비중 있게 다룬 켄의 이야기와 충돌하는 후반부 전개가 대표적이다. 종국에 바비랜드는 처음 바비랜드로 되돌아온다. 모든 권력은 바비에게 넘어간다. 켄들은 약간의 권리를 얻어내지만,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정반합(正反合)이 아닌 정반정(正反正)이라 해야 할 마무리다.
메시지를 보여주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벡의 명성을 생각하면 의아할 정도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바비랜드를 되찾는 과정에서 바비와 글로리아는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가부장제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읊는다. 이는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처럼 관객에게 모든 메시지를 떠먹여 주려는 듯 느껴진다. 즉, 영화와 프로파간다 사이에서 주객이 전도될 여지를 남긴다.
더 나아가 장르적 기반도 흔들린다. <바비>는 외관과 달리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그런데 <바비>의 풍자는 풍자가 아니라 비웃음이나 조롱차럼 느껴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여성과 남성, 바비와 켄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바비의 시점에서 켄만 웃음거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켄끼리 전투를 버리는 장면, 남자다운 척하도록 유도해서 켄을 속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블랙 코미디는 민감하고 불편한 소재를 당사자가 자조적으로 풍자할 때 성립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비>는 이 대목에서 불협화음이 들린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메시지는 정리가 안된다. 내용과 메시지가 따로 논다. 페미니즘과 휴머니즘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 하지만 정작 결론은 한쪽으로 애매하게 치우친다. 그러니 바비와 켄이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말도 서서히 공허해진다. 바비 인형의 역사와 모순을 파고들다가 스스로 발이 꼬인 형국이다.
빛 좋은 개살구
배우들의 연기력과 그레타 거윅의 개성이 느껴지는 연출도 이 모순과 부조화를 끝내 메꾸지는 못한다. 사실 <바비>는 분명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마고 로비는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형적인 바비 인형의 이미지를 잘 재현했다. 무엇보다도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예고편에서 마냥 병맛 캐릭터 같아 보였던 켄은 온몸으로 감정 변화를 전달하며 주인공인 바비보다도 더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 분홍빛으로 가득한 바비랜드의 풍광은 현실과 분리된 인형 세계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긴장이 풀릴 법하면 등장하는 화려한 뮤지컬, 내레이션을 통해 제4의 벽을 넘나드는 메타적인 요소 역시 재기 넘친다. 마치 아담 맥케이의 <빅쇼트>나 <바이스>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이미지와 퍼포먼스는 그저 휘발된다. 메시지 이전에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를 잡아야 한다는 전제를 <바비>는 끝끝내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Acceptable 무난함
메시지는 문제없다. 메신저가 문제다.
-
-
- 영국의 전설적인 왕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킹아더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메인 예고편
샤오미만 사랑해 온 직진남 샤오룬 하지만 청혼하려던 순간 갑작스런 사고로 저승에 간다. 환생하고 싶으면 붉은 실로 커플 매칭을 하는 월하노인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느데, 하필 사사건건 부딪히던 핑키와 파트너가 된다. 드디어 이승으로 내려온 '월하노인' 샤오룬과 핑키. 그런데 이게 웬 운명의 장난? 우리가 인연을 맺어줘야 할 인간이 샤오룬이 평생 사랑했던 단 한사람. 샤오미란다!
-
- 넷플릭스 <오사카 나오미: 정상에 서서> 공식 예고편
테니스 챔피언이자 떠오르는 리더, 오사카 나오미.
다양한 문화유산을 타고난 그녀가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
스포츠 스타의 외면과 내면을 밀착해서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