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9-19 09:39:34
9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주말 3일만에 200만 관객수 돌파한 <베테랑 2>
<베테랑2>가 개봉 5일 만에 300만 관객수를 돌파했습니다
손익분기점은 400만 관객으로 뚜렷한 경쟁작이 없는 추석연휴기간
어려움 없이 넘어설것으로 보입니다.
<베테랑2>의 3백만 관객 돌파 속도는 <파묘>, <서울의 봄>보다 빠른 속도며
<범죄도시2>와는 같은 속도를 보이고 있는데요.
이와같은 속도라면 1000만 관객 동원은 무리없이 끌어모을 수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극명한 호불호 반응을 보이고 있어 뒷심을 잡을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한편 북미 박스오피스에서는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1억 8천만 달러를 넘기며 저번주에 이어 1위를 유지했습니다. 그 뒤로 제임스 맥어보이 주연의 <스픽 노 이블>이 2위, <데드풀과 울버린>이 장기흥행을 이어가며 3위를 기록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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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으랬지, 우스우랬나?
이 글은 영화 [토르;러브 앤 썬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토르 시리즈는 마블에서도 조금 독특한 위치에 놓여있다.
어벤저스들 가운데 죽음에 대한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적어 그 어떤 위협에도 마지막 믿을 구석이 되어주는 동시에. 인간계의 문화에는 익숙하지 않아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는 토르의 모습이 그가 가진 지위(혹은 위치)에 비해 순수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 시리즈에서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거의 모든 것을 잃은 토르였지만.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해 밝고 키치 하면서도 조금 더 친근한 위치로 살짝 내려온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번 영화 [토르;러브 앤 썬더]에서는 옛 연인이었던 제인이 마이티 토르로 등장하기도 하고, 아스가르드의 왕이 된 발키리와 아주 잠깐이지만 등장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까지 합세해 마블 팬들의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다.
마블 특유의 시원한 액션과 볼거리들로 앞다투어 개봉하는 큰 영화들 사이에서도 묠니르 만큼이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팔 하나 정도의 거리는 필요해 보인다.;재밌으랬지 우스우라고 한건 아닌데.
사진출처:다음 영화
기존 토르 시리즈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무거움"에 있었다.
길고 장황한 대사. 북유럽 신화 속 신(God)을 모티브로 한 특이한 위치와 어두운 설정이 합쳐지면서 토르 시리즈의 시작은 그다지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또한 신이라는 위치만 빼면 햄릿을 연상시키기도 남을 정도의 기구한 운명을 겪는 토르를 보며. 히어로물에서 기대하는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또한 이 시리즈에는 약간의 심리적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벤저스라는 이름 하에 승승장구하는 다른 히어로들의 솔로 무비에 발맞추고자. 토르는 [라그나로크]에서 여태까지 가졌던 진중함을 약간 벗어던지는 작전을 선택했다. 눈에도 들지 못할 거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토르를 손에 닿을 만큼 친근하게 만든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소위 말하는 대박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어쩌면 거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된 듯하다.
가장 큰 적은 바로 직전에 거둔 승리라는 말을 이번 영화는 잊어버렸다. 승리의 늪에 빠진 채 나올 생각조차 없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이고. 이로 인해 주인공 토르는 가볍다 못해 경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덕분에 영화 속 토르를 상징하는 모든 것이 가짜, 혹은 장난처럼 보인다. 위엄과 강인함을 대변해야 할 토르의 갑옷마저도. 잘 봐줘야 아동용 완구 코너에서 파는 제품처럼 조잡해 보인다.
재밌으라고 했지, 우스워지라고 한 적은 없는데. 영화는 그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웃음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제멋대로 흐른다. 영화 대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팔 하나 정도의 거리는 있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지킬건 지켰어야 했다.;이건 신성 모독 아닌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저 막무가내 사이코패스의 살육극이 아닌 이상. 마블 시리즈의 빌런이라면 응당 그에 해당하는 서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무려 크리스천 베일에게 메인 빌런인 고르 역을 주고서. 악역에게 당위성을 주는데 완벽히 실패하는 그 어려운 것을 해내고야 만다. 고르가 신에 대한 분노를 축적하는 모든 과정이 잘못되었다.
비록 신화 속에서 제우스가 여색에 집착했던 것은 사실이나. 위엄마저 없지는 않았다. 토르가 제우스에게 썬더 볼트를 날리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가히 신성 모독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또한 제우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신들은 하찮다 못해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게 그려진다. 이토록 가볍고 엉망인 신(God)이라면. 없어지는 것이 맞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고르가 한 짓이 과연 “나쁜 짓”인가에 대한 의문도 슬며시 들기 시작한다.
고르가 신의 살육자라고 영화에서는 말하지만 정확하게 이로 인해 아스가르드를 포함한 다른 종족들에게 어떤 나쁜 일들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언급도 자세히 없다.
가장 나쁜 짓이라고 해봐야 아이들을 납치했다. 정도가 될 텐데. 신에 대한 분노를 어째서 아이들에게 풀었어야 했는지에 대한 연관 고리도 약하게 느껴진다.
마블 영화에서 이제는 그만큼 일회성 악역이 난립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히어로의 대중화. 이대로 괜찮은가.;선택받음과 받아들임에 대해서.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웅의 탄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영웅으로 선택받는가. 와 더불어 그 간택의 순간을 당사자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이다.
배트맨 시리즈, 혹은 (이미 마블에서는 너무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아이언맨 시리즈를 보면 그 두 가지의 고뇌를 몇 편에 걸쳐 맺고 끊고 다시 연결하며 담아냈다.
선택의 과정에 있어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만 하는 고결함과. 영웅이 기꺼이 짊어져야 하는 짐에 대한 부담감은 오로지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함께 경험한 관객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은밀한 비밀 같은 것이다. 이 유대감 이야말로 마블을 지금껏 끌어온 가장 큰 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캡틴 아메리카가 엔드 게임에서 묠니르를 자유자재로 다루었을 때 의아해하지 않았다. 그는 토르 정도의 “고귀함”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었고.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가 가진 성품과 책임감을 관객들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제인의 손에 들린 묠니르는 더더욱 이질적이고 납득할 수 없다. 묠니르가 나를 선택했다.라는 말 한마디로 퉁치기엔 어벤저스가 쌓아올린 그 모든 것들은 비브라늄 만큼이나 견고하다.
그뿐인가. 아스가르드의 미래라는 말로 얼렁뚱땅 뭉뚱그려진 아이들에게 기꺼이 능력을 나눠주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으나. 토르가 여태 지켜온 묠니르로 대변되는 고귀함과 주특기가 사라진 이상. 과연 그의 존재 자체가 대체 불가능한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의 답은 그 누구에게 물어도 아니오. 일 것이다.
명품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은. 학생들이 그것을 소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전투(?)를 보면서. 이제는 Bring me Thanos를 외치며 묠니르를 내리꽂던 토르는 더 이상 볼 수 없음을 직감했다.
마치면서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여름에도 얇은 반팔을 입어야 합니다.
앞서 제작된 모든 마블 Phase 4영화에서 좋지 않은 요소들을 모두 끌어다 놓았다. 다시 말하면 여태 나온 마블 영화를 통틀어 가장 좋지 않은 영화라 말해도 손색이 없는 영화였다.
가벼움이 지나치다 못해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토르를 보며 미소는커녕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충성심 하나로 버텨온 많은 팬들에게도 이번 영화는 마블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속이 많이 상한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이 글의 TMI]
코로나가 얼마나 길고 힘들었는지를 정말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관이다. 집에서 OTT 서비스로 영화를 볼 때나 하던 행동들을 그대로 가지고 영화관으로 나온 사람들이 많다. 덕분에 흔히 말하는 "빌런"들을 최근 한 달 넘게 영화관에 갈 때마다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만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지켜야 할 규범을 숙지하는 것을 우리는 사회화라고 부른다. 코로나로 수많은 것이 리셋되었다고 해도 사회화만큼은 리셋 리스트에서 빠져야만 한다.
당신의 무례함을 참아줄 의무 따위는 다른 사람들에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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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불처럼 뜨거운 마감 직전의 마음
본 리뷰는 독립예술영화 활성화 캠페인인 '인디플렉스 시즌4'에서 제공된 관람권으로 관람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의 고민에 완전히 빠질 때가 있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큰 문제가 눈앞에 있을 때 주변을 바라보기 힘들다. 주변 사람이 건네는 도움의 손길도 귀찮은 손길로 보이고, 좋은 조언도 잔소리로 들린다. 그렇게 눈앞의 고민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이 하나 둘 왜곡된다.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 문제는 문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는 흔들림의 진폭을 늘려간다.
뭔가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더 시야는 좁아진다. 글을 쓰는 작가도 있겠지만 우리가 학교 다닐 때 해야 할 다양한 과제들과 시험들을 떠올리면 그런 일들이 무척 많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많은 사람이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그 문제가 다가올 때면 여유를 잃고 감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이런 히스테리컬 한 반응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나타나지 않고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이다.
마감을 위해 시골 별장에 방문한 레오와 펠릭스
영화 <어파이어> 속 주인공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글을 쓰는 작가다. 새로운 책을 쓰고 있는 그는 최종적으로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조용한 곳에 있는 펠릭스(랑스톤 위벨) 부모님의 별장으로 함께 간다. 별장의 분위기는 무척 조용하고 경관은 아름답다. 바닷가가 근처에 있어 수영을 하고 돌아오기도 무척 좋은 위치다. 그래서 그 별장은 레온이 글을 마무리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여기에 불청객이 있다. 먼저 여행객으로 머무르고 있던 나디아(파울라 베어)는 레온이 방문한 첫날부터 큰 소음을 내고 음식 먹은 그릇을 치우지 않은 채 생활하고 있다.
사실 레온과 펠릭스의 별장 방문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차가 고장 나서 먼 거리를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야 했고 편하게 쉬어야 하는 첫날밤에 나디아가 내는 소음 때문에 편안하게 푹 자지 못했다. 여기에 꼭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할 원고는 손도 대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시종일관 주변에 짜증을 부리는 건 당연할 것이다.
영화 초반 차가 고장 나 산길로 걸어가다가 친구 펠릭스가 길을 확인한다며 먼저 뛰어갔다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레온은 산 중간에서 한참을 기다린다. 그러다 펠릭스가 소리 없이 다가와 레온을 놀라게 한다. 레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펠릭스의 목을 조른다. 한 편으론 장난처럼 보이지만 몇몇 순간에 레온의 얼굴에서 엄청나게 화난 모습이 보인다. 그건 실제로 놀라게 한 펠릭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때도 레온의 마음에는 그런 장난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레온은 주변을 세심하게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고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레온은 별장에 도착한 이후 며칠이 지나서야 나디아를 만나 인사하게 된다. 그리고는 나디아, 펠릭스와 별장 근처에 사는 데비트(엔노 트렙스)와 함께 식사도 하면서 관계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레온은 그들이 제안하는 대부분의 놀이나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는 반복적으로 일이 많아서 못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흥미로운 건 그가 혼자 남았을 때, 일을 진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혼자 공놀이를 하고 집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낸다.
일도, 노는 것도, 인간관계도 망치게 만드는 레온의 불안
영화 속 레온의 모습은 점점 지질해진다. 주변 사람에게 틱틱 쏘아붙이듯 말을 하거나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는 분명 비호감이다. 하지만 그의 그런 삐딱함은 이해할만한 범위에 있다. 마감을 앞두고 있는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집필이 거의 완료된 초고의 완성도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은 산불처럼 그의 마음속을 빨갛게 채우면서 불길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산불로 빨개진 하늘처럼 레온의 마음도 빨갛다.
레온은 시종일관 그 불안을 보고 있다. 주변에서 불쏘시개로 그 불안을 찌르면 과민반응을 한다. 그의 불안은 그가 쓴 초고에 대한 평가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 더욱 커진다. 영화 후반부 출판사 사장(매티아스 브랜트)과 나디아가 초고에 대한 평가를 할 때 레온의 마음의 불은 커지고 그 주변까지 태워버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산불은 마치 레온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산불은 갑작스럽게 레온 일행에게 다가와 레온의 주변을 망쳐버리고 떠난다. 레온은 그 산불에 집중하다 주변의 불행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불안을 가지고 있는 히스테리컬 한 레온의 주변 인물들은 대체로 따뜻하다. 그의 짜증을 받아주면서 그에게 휴식을 자꾸만 권하는 그들 속에서 레온의 모습이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결국 뒤늦게나마 자신이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를 알게 된다. 영화의 전반적인 전개 과정은 레온의 불안에서 짜증으로 넘어가 슬픔과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에는 우리의 젊은 시절 성장하는 과정도 떠오르게 하고, 어떤 일이 해결되기까지 겪는 심리적인 상태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레온은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야 주변 인물들의 진심을 보기 시작한다. 그건 마감과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압박을 잠시 내려두고 자신의 작품을 봤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주변 인물의 상실이라는 큰 트라우마도 큰 영행을 주었다. 큰 산불이 만들어낸 폐허가 된 산의 모습과 큰 불행이 겹쳐지면서 레온에게는 다시 온전한 상태가 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산불로 인한 붉은 노을처럼 위험해 보이는 레온의 복잡한 마음
영화 <어파이어>는 4명의 젊은 인물이 자신의 앞에 당면한 문제나 시험을 대하는 태도를 상반적으로 보여준다. 레온은 모든 일에 예민하고 시니컬 하지만 펠릭스는 놀면서 생각하고 영감을 받으려 애쓴다. 서로의 방법이 다를 뿐 두 사람 모두 무언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직면한 상태는 동일하다. 나디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졸업을 위해 논문을 준비해야 하지만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쉬고 있는 상태다. 그 역시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있지만 긴 호흡으로 그 과제에 천천히 정리하며 접근한다.
그들이 보는 빨간 하늘은 아름다운 노을 같기도 하지만 뜨거운 젊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뜨거운 산불이 위험한 것처럼 그들의 젊음이 가져다주는 감정도 무척이나 뜨겁고 위험하다. 이 영화를 연출한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이 영화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받았다. 과거 <운디네>, <트랜짓>, <파닉스> 같은 사회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영화를 주로 연출했는데, 이번 <어파이어>는 좀 더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들어 가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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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속으로...스웨덴] 사랑이라는 모순에 대해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트와일라잇>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뱀파이어의 인기를 체감케 한 소설로도 잘 알려진 <렛 미 인>은 두 차례 리메이크 될 정도로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서정 뱀파이어물에 그 이름을 당당히 올리는 작품 중 하나이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해당 영화는 원작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스톡홀름 외곽의 소도시 블라케베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년 소녀의 사랑 이야기로 단순 로맨스를 넘어 관객들로 하여금 갇혀있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된 일종의 성장과도 같은 묘한 감상을 갖게 한다는 작품으로도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이야기는 일 년 중 반절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눈이 내리는 그야말로 열기의 화창함과는 상반된 곳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온 세상의 소음을 흡수할 정도의 눈이 내린 어느 날, 고요 속에 살아 숨쉬던 도시는 소녀 '이엘리' 를 맞이하게 되고 소년 '오스칼'은 그녀의 비밀에 점차 다가가게 된다.
혹시 누군가와의 사랑이 세계를 바꿔놓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여기 소년 오스칼의 세계가 그러하다. 이엘리라는 소녀와의 만남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그녀가 단순히 뱀파이어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스칼은 지속적인 학교 폭력에 노출되어있는 인물로 유일한 여가라고는 단조로운 아파트를 뛰쳐나가 자신을 괴롭히는 상대를 흉내내며 그를 찌르는 상상을 하는 것이 전부이다. 눈 내리는 고요한 놀이터를 배경으로 그렇게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던 두 소년과 소녀는 만나게 된다.
오스칼이 이엘리에게 빠지게 된 계기는 아주 단순하다. 오스칼에게 이엘리는 외톨이었던 자신의 새로운 친구일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가해의 흔적을 발견하는 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어른들이 제안하는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다름 아닌 폭력이다. 밤이 찾아오면 더욱 고요해지는 이 곳에서 두 사람의 세계는 그렇게 맞물린다. 그야말로 더 큰 성찰로 나아가지 못한 단순한 아이들의 해결책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유혹적이다. 오스칼은 어쩌면 어른 그 이상을 웃도는 나이이나 영원히 12살로 살아가는 이엘리에게서 폭력 이라는 구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오스칼은 그런 이엘리의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시간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겪게 된다.
영화는 그야말로 이러한 모순의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채 조용하나 거침없는 전개를 선보인다. 냉전 이후 처절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치열하지도 않는 삶을 사는 후기 산업 사회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여가라곤 산책과 수다가 전부인 삶을 산다. 이를 배경으로 폭력으로 하나가 되는 두 아이는 모순적이다. 폭력을 통해 폭력 속에서 구원 받는다는 서사는 물론 그들을 둘러 싼 한 밤 중 눈부신 눈더미와 같은 배경 역시 아이러니의 이미지를 갖는다. 제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엘리라는 비극은 초대 받아야 들어올 수 있는 존재이다. <렛 미 인>은 극중에도 강조되어 등장하지만 뱀파이어인 그녀가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지만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인다. 이엘리의 보호자였던 호키는 물론 오스칼 역시 그녀를 자진해 맞이한다. 그렇게 의도된 모순들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말 마저 이엘리가 과연 오스카를 이용하는 것인지 사랑하는 것인지 의문을 남기는 와중 그들이 결국 알면서도 선택한 비극이라는 모순이 갖는 의미와도 같은 지점이 강조되기에 서정을 자극한다 볼 수 있다. 순리는 납득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큰 울림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예외는 그 자체로도 모순을 품고있으나 특별함을 갖고 있다. 영화 <렛 미 인>이 보여주는 서사 또한 그러하다. 더불어 12살 아이인 오스칼의 시점이기에 관객은 일정 부분 그의 나이대로 돌아가 잘못된 것임에도 그 선택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다시 주요 소재를 살펴본다면 왜 모순이 갖는 단점이 해당 영화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지 알 수 있다.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은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뱀파이어라는 특정 설정 역시 모순의 일종으로 십분 작용한다. 사실 뱀파이어는 근사한 외모와 비극적 배경으로 여러 콘텐츠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어주나 현실을 사는 뱀파이어는 어쩌면 그 환상과는 꽤 큰 차이를 보일지 모른다. 우선 콘텐츠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이들은 피를 섭취하며 그 외의 음식물에는 몸이 먼저 거부감을 보인다. 그렇기에 늘 살인이 따라 다님으로 유랑이 불가피하다. 또한 대체로 평생을 살며 이들의 시간은 추정컨대 죽음을 맞이한 날에 멈춰져있다. 그것을 장점으로 부를 쌓는 류의 스토리도 다수 존재하나 이엘리의 시간은 12살에 멈춰져있다. 경제 활동은 물론 법적으로 홀로 살아가기에 장벽이 존재하는 나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엘리는 보호자 호킨의 사냥을 통해 피를 공급 받으며 살아간다. 여기서 이 호킨과 이엘리의 관계성이 영화 속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소녀인 이엘리에 비해 호킨은 아버지로 보일법한 외모의 어른이다. 그는 이엘리를 위해 낯선 곳에서 사냥을 시작하지만 어쩐지 그의 행동은 허술하기만 하다. 제대로 된 피를 구하기도 전에 사람들에 의해 장비를 잃어버리기도, 제대로 된 사전 조사 없이 사냥감을 구하려다 모든 것을 망쳐버리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고마움은 커녕 이엘리는 모질게 대하기 일쑤이다. 하지만 호킨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 어떤 감정의 표현 없이 이엘리만을 위한다. 그가 딱 한 번 자신의 의견을 소리내 말하는 것은 오스칼과의 만남을 중단하라는 때 뿐이다. 그리고 그는 실패한 사냥을 책임지기 위해, 더 나아가 이엘리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얼굴 위로 염산을 부어 끝내 이엘리의 허기를 채워주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관계성은 영화 속 서사에 왜 들어가게 된 것일까.
호킨의 마지막 대사가 '이엘리' 였음으로 미루어보건데 이들은 부녀지간이 아닌 연인 사이였음이 암시된다. 호킨 역시 오스칼의 나이에 그녀를 따라 나섰던 것일지 모르며 그렇게 호킨의 시간 역시 이엘리와 만나는 그 순간 멈춰버렸을지 모른다. 끝까지 이엘리에게 헌신하는 감정이 사랑이라면 어쩌면 결국 이엘리에게 구원 받았음으로 함께 길을 떠나게 된 오스칼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 역시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렇게 호킨과의 관계성을 통해 한 차례 그들의 미래가 예고된 바와 달리 결말은 기차 차장 너머 한껏 들어오는 햇살을 강조하며 아름다운 새출발로 묘사된다. 오스칼은 그 환한 빛을 맞이하며 어둠 속에 잠긴 자신의 사랑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내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아침과도 같은 사랑의 시작이 결국 밤의 희생양이 되는 호킨의 결말처럼 끝나리라는 일종의 예고, 순환의 흔적은 잔인하나 동시에 찬란하기도 하다.
엔딩 크레딧 역시 마찬가지이다. 눈을 꽉 감은 채로 강한 빛을 마주하면 눈 앞을 가득 채웠던 어둠은 점차 붉은 색의 빛으로 물든다. 검은 엔딩 크레딧의 배경은 꽉 감았던 오스칼의 시야를 대변하듯 칠흑같은 어둠의 색이었다가 점차 피붉은 색으로 변화한다. 오스칼이 최후가 어쩌면 호킨의 최후처럼 반복되는 일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오스칼의 세상, 권태와 폭력에 노출되어있던 세상은 이엘리라는 광폭적인 사랑에 의해 변화를 맞이했다. 이는 명백한 구원이다. 눈부시도록 밝은 수영장에서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오스칼이 이엘리를 바라보기 훨씬 이전부터 구원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오스칼 뿐일까? 더 짙은 어둠을 찾아, 더욱 긴 겨울을 찾아 유랑하던 이엘리는 이제 어둠 속에서 먼저 오스칼을 향해 신호를 보낸다. 어쩌면 오스칼의 존재는 단순 호킨의 대체제가 아닌, 다시 시작된 시간 즉 영원을 사는 이가 다시금 맞이하는 원형의 시간일지 모른다.
눈 부시도록 시린 스웨덴의 눈은 아이러니 하게도 긴 밤과 함께 찾아온다. 추위도 잊은 소녀에게 오스칼은 과연 무엇을 깨닫게 해준 것일까. 찬안한 밤의 설원은 그렇게 두 사람을 방관한다. 관객들 역시 그 끝이 비극일지 찬란할지 알 수 없으나 소년과 소녀를 다른 시간으로 보내줄 수 밖에 없다.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알고 있으나 그 끝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소재이기도 하다. 사랑의 모순됨은 그렇기에 우리가 가장 열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가장 많은 색을 띄고 있는 것 역시 그때문일지 모른다. 내 삶이 슬펐기에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노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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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침묵하지 않는 카메라는 마침내
SYNOPSIS.
어느 겨울밤, 주연은 아빠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아빠는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목소리로 주연에게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그날 40년 전 자살한 고모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주연은 가족의 수치스러운 비밀이 된 고모의 흔적을 추적한다. 주연은 그동안 역사 속에서 지워져 온 여성들을 기억하며, 애니메이션을 통해 고모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간다.
PROGRAM NOTE.
양주연 감독의 <양양>은 가족사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양 씨 집 안의 첫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남동생이 가족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익숙한 만큼, 가족 안에서 자기 자리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가족의 풍경’이다. 그런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누나가 있음을 고백했고, 그렇게 40년 전에 사라진 고모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1975년, 대학교 4학년이었던 감독의 고모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할머니가 남겨 놓은 고모의 사진을 발견한 뒤,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고모가 자살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고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사라진 고모의 자리‘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 늘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던 ‘양주연 감독의 자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진수)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박형규 역, 문학동네 버전) 문학사 안팎에서 길이길이 회자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이다. 처음 들을 땐 그렇지 뭐, 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이 문장이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서 부스스 일어난다. 과연 그러한가? 정말 그러한가?
세월을 머금은 색감의 홈 비디오에서 부드럽게, 고화질의 결혼식 영상으로 넘어가며 시작하는 이 영화 또한 그렇다. 내레이션 속 감독도 스스로 인정할 만큼 화목한 가정, 부족한 것 없이 딸과 아들을 길러낸 집. 90년대에 홈 비디오로 풍성한 일상을 담을 만큼, 그 영상 안에서 생일 파티를 즐기는 아이의 웃음만큼, 밝고 환해 보이는 집.
이런 집들만 보다 보니까 가정에 고민이 있는 사람들은 "왜 우리 집만 이렇지? 왜 나만 이렇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 전,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남긴, 딱히 내게 던진 것도 아니었던 한 마디가 내겐 잊히지 않는다. "모든 가정에는 다 문제가 있어요. 문제 없는 집은 없고, 그러니까 상처 없는 가정도 없어요."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문장인데 우리는 그 말을 잊고 산다. 슬픈 일은 가슴에 묻고, 남부끄러운 일은 적당히 묻어 두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단란한 일상을 바지런히 꾸린다. 그러나 문제 없는 집도 없고 상처 없는 집도 없으니, 감독이 어느 날 알게 된 사실,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난 고모의 이야기도 그렇다.
감독은 고모 주변 사람들에게 고모의 이야기를 묻고, 고모의 죽음을 파헤친다. 그간 감독이 카메라에 담아 왔던, 보고 듣고 이야기해 온 것들이 고모의 이야기와 공명한다. 다만 이번에는 그 '고모 주변 사람들'에 감독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포함될 뿐이다.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게, 하지만 자식의 작품 앞에 최선을 다해,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마찬가지로 조금 어색한 듯 이런저런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감독의 목소리. 어쩐지 사랑스러워서 조금 웃음도 나왔다. 그러나 이내 이야기가 나아가면서 감독의 목소리는 점차 진중해진다.
힘들다고 덮어둔 기억을 감독은 부감한다. 자기 가족의 일을, 극화하지도 않고 민낯 그대로 인터뷰를 하면서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카메라는 끝내 침묵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두라는 말에도 꿋꿋하게, 고모의 죽음을 따라간다. 그건 탐정의 자세나 경찰의 태도와도 다른 그 누군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누군가의 자세와 태도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죽음. 타살인지 자살인지도 불확실한 정황. 오래 전의 아픈 일에 대해 바래고 조각난 기억들. 그 안에서 감독은 사회에 끊임없이 익숙하게 찍히는 사건들의 발자취를 본다. 그리고 그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자신이 가족 안에서 겪어왔던 일들이나 익숙하게 들어왔던 말들도 길어 올린다. 아무 악의 없이 부드럽게 놓인 말들, 어쩌면 감독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런 말들. 그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일상의 작은 말 한 마디에서 누군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모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이 영화는 탐정이나 경찰이 아닌, 감독이 찍은 작품이니까. 고모의 죽음이 타살이었는지 자살이었는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알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각조각 드러난 진실 속에서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보면서 어쩌면 감독의 고모의 죽음과 아주 닮아 있었을 어떤 죽음들을 생각했다. 몇 시간에 하나 꼴로 새로운 기사가 뜨는 그런 사건들. 요즘 또 부쩍 많이 보이는 사건들. 피해자의 생명보다 가해자의 수능 점수 같은 것이나 주워섬기고 있는, 악의 없이도 충분히 악독해지는 얄팍한 담론들.
또 하나, 그저 사망한 존재로서만이 아닌, 삶을 영위하던 순간들의 고모를 감독은 그려낸다. 그렇게 단지 죽은 사람, 마음 아프니 덮어둘 사람만이 아닌, 살아 있었고 살아가고 있었던 존재로. 피해 대상으로서만 피해자를 묘사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예를 들어 피해자가 수능 만점의 의대생이었으니 그 죽음이 얼마나 아깝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피해자로서도 지워지는 경우가 허다해 더 끔찍한, 그래서 가끔 어떤 유가족들이 사진을 공개한다는 선택지를 끄집어 들게 만드는 이 사회의 서술 방식을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의 서술 방식 앞에 감독의 말하는 방식은 경종을 울리는 바가 크다. 나직나직한 감독의 내레이션이 더 많은 상영관에서 울려퍼지면 좋겠다. 침묵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되면 좋겠다. 이 감독의 시간이 쌓이고 또 쌓여,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달되면 좋겠다. 침묵하지 않는 카메라는 마침내 부감에 성공하고 마니까. 더 많은 이야기가 그 부감의 시선에 밝히 드러나길.
어떤 죽음으로 떠나간 사람들, 어쩌면 나였을 수도 내 친구였을 수도 있는 그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2024. 05. 03.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229)
2024. 05. 05.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411)
2024. 05. 07. 21: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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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길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H
카를로스 파르도 로스|Carlos PARDO ROS
Spain|2022|68min|DCP|Color|Fiction|12|Asian Premiere
시놉시스
1969년 7월 12일, 산 페르민 축제의 황소 몰이 행사 도중 H는 황소에게 심장을 찔려 죽는다. 오늘, H의 유령들은 죽음을 앞둔 육신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바로 그 거리에서 웃고, 마시고, 춤을 춘다.
프로그램 노트
“이 영화는 머리가 아닌 뱃속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카를로스 파르도 로스 감독이 영화를 소개하며 언급한 말이다. 영화는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개최되는 산 페르민 축제를 배경으로 감독의 삼촌인 H가 황소 돌진으로 사망한 사건을 조사하는 내용이다. 가족 구성원이 사건을 추적하는 전형적인 다큐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상황을 배치해 감독의 소개말이 사실로 증명됨을 보여준다. H는 기억의 공백을 채우는 영화이자,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교차하며 서로의 공간을 완성하는 미스터리에 대한 탐구이다. 다양한 스토리텔링과 영화의 형식이 쌓여 마침내 우리는 하나의 삶과 밤의 끝으로 향하는 진정한 탐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문성경)
우주 속을 부유하듯, 길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듯
H는 황소 몰이 행사 중 갑자기 돌진한 황소에게 심장을 찔려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런 H의 영혼을 찾아 축제의 현장으로, 취한 사람들이 잔뜩 있는 길거리로 나선다. 이 영화는 단순히 줄거리를 보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삼촌의 죽음에 대해 파헤치는 작품이 아니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우리는 주인공을 따라 우주 속을 부유하듯 조금은 붕 뜬 느낌으로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술 취한 사람들이 잔뜩 있는 축제 현장의 길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단순히 축제 속의 사람들을 지켜 보는 것을 넘어서서 관객인 '내'가 이 축제의 현장에 있는 느낌을 준다. 시각적인 것을 넘어서 체험적인 작품이다. 영화제에서 먼저 접할 수 있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영화이다.
시놉시스에서는 H의 유령들이 죽음을 앞둔 육신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축제의 광란의 현장에서 웃고, 마시고, 춤을 춘다며 이 작품을 소개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폭력적이다. 왜냐면, 그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몸을 벗어나기 위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H>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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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로부터 '무민'을 그려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글입니다.
*글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민’ 캐릭터는 알고 있었지만, 책과 만화를 읽어 본 적은 없는 내게 무민 작가의 삶을 다룬 영화 〈토베 얀손 〉은 꽤 놀라웠다. 나는 캐릭터에 그를 창조한 작가가 어느 정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얗고 동그라며 귀여운 트롤인 무민을 그린 작가 역시 아기자기하고 아담한 성품의 온화한 인물이었을 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그러나 완벽한 편견이었다. 토베의 삶은 격정적이었고, 무민은 굴곡진 그녀 삶의 순간들을 오롯이 품은 넓고 깊은 캐릭터였다.
영화 〈토베 얀손〉은 토베가 삶의 가장 중요한 두 영역인 일(예술)과 사랑 모두에서 실패를 겪었다고 말한다. 먼저 예술이다. 누군가는 무민이 토베 사후에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닌데 왜 그녀가 예술 영역에서 실패했다고 말하는지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베에게 예술적 성취는 유명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토베의 아버지는 핀란드의 유명한 조각가였다. 토베가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길 꿈꿨다면 조금은 수월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만약 그랬다면 무민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베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둘은 자주 갈등을 겪었다. 결국 토베는 집을 떠나 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엉망이 된 허름한 집을 구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토베는 무민으로 성공을 거둘 때까지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무민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어도 기뻐하지 않는다. 토베가 무민을 ‘본업(그림)’에 방해되는 시시한 낙서, 제대로 된 예술이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민은 생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자신에게 사인을 받은 후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는 씁쓸한 토베의 표정은 그녀가 무민에 느끼는 거리감을 잘 보여준다.
그다음은 사랑이다. 영화 마지막에 토베가 평생을 함께할 레즈비언 파트너 투티키를 만났다는 언급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영화가 비추는 생애 기간에 토베는 늘 사랑의 실패자였다. 토베의 사랑이 향하는 첫 번째 대상은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유부남 국회의원 아토스다. 그는 다정하고 사려 깊으며 토베를 이해해준다. 그런데 토베가 아토스를 사랑하는 동시에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토베의 두 번째 사랑은 헬싱키 시장의 딸, 연극 연출가, 레즈비언인 비비카다. 비비카는 저돌적으로 토베를 유혹하여 사로잡는다. 아토스는 비비카에게 마음을 빼앗긴 토베를 보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그는 토베와 비비카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걸 견디기 어렵다. 한 명의 마음속에 두 명을 향한 마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에게 생경하다. 아토스와 토베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진다.
문제는 비비카와의 관계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 있다. 바람둥이인 비비카는 속박받는 관계를 싫어한다. 욕망이 이끄는 곳을 따라다니는 그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비비카에게 상처 받은 토베는 충동적으로 아토스에게 청혼하기도 한다. 동성애 사랑 실패의 보상으로써 이성애 결혼으로 도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토베의 양심은 이러한 도피가 오래도록 지속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청혼에 행복해하는 아토스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아토스는 또 한 번 좌절한다. 둘이 한 때 사랑하는 사이였기에, 아토스의 좌절은 토베의 좌절이기도 하다. 사랑의 실패는 쌓여만 간다.
비비카를 향한 토베의 마음은 그 이후로도 오래 이어진다. 토베가 최종적으로 비비카를 단념하는 건 그녀가 영원히 자기 손에 잡히지 않을 사람이란 걸 분명히 깨달은 후다. 토베는 비비카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여러 파트너 중 한 명으로 머무는 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아니다. 토베가 평생을 함께할 연인 투티키를 만나는 건 이 모든 혼란과 상처가 지나간 후다.
요컨대, 토베 얀손은 예술가를 지향했으나 도달하지 못했고, 사랑을 갈구했으나 안착하지 못했다. 이중의 실패는 경제적 윤택과 그녀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게 만들었다.
무민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토베는 좌절과 고난의 순간에 틈틈이 무민을 그렸다. 스너프킨은 아토스, 토프슬란과 비프슬란은 각각 토베 자신과 비비카를 형상화한 캐릭터라고 한다. 항상 파이프를 물고 있는 스너프킨과 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토프슬란·비프슬란은 모두 토베가 가장 깊게 사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착안한 캐릭터였다. 무민은 토베 삶의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다.
무민이 끝내 토베와 세상을 화해시킨다는 점이 흥미롭다. 늘 세상에 거부당했던 토베는 자기 내면의 분노, 좌절, 고집, 사랑, 행복의 감정을 쏟아 무민을 창조했다. 얄궂게도 그런 무민은 토베를 밀어낸 세계에서 환대받는다. 토베가 열렬히 갈망했던 대상은 토베를 외면했지만, 자신이 부정당했다는 마음을 담아 먹고살기 위해 만든 캐릭터는 토베에게 오래도록 지속될 명예를 선물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는 토베로부터 삶이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임을 배운다. 이처럼, 때때로 ‘실패한 삶’은 예술이 된다. 생애사의 중요한 대목을 전부 담아내야 한다는 전기 영화의 의무감이 헐거운 감정선으로 이어진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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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어] 끝장(p)리뷰 | *전용예매권 이벤트* | 여섯 가족 중 X맨은 ?! | Here 의미 | 세 개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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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예매권 이벤트 공지
안녕하세요 수란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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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이 작품은 인간이라는 보편성과 미국이라는 특수성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운 영화였는데요. 개인적인 추천작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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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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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2025)에 대한 헐거운 프리뷰
Chapter 1 X맨은 누구인가?!
Chapter 2 Here?, 세 개의 공간
00:00 로버트 저메키스
02:55 X맨은 누구?
07:49 Here란?
09:59 세가지 공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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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섀도우 앤 본>
[2021년 4월 23일, 넷플릭스 공개]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희망. 빛의 힘을 지닌 소녀여, 어둠의 공포를 몰아내라. 그리샤버스로 들어갈 준비를 하라.
전쟁과 어둠으로 찢긴 세계. 그곳에 빛의 힘을 지닌 소녀가 나타난다. 평범한 고아 알리나는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하지만 사악한 힘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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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무파사: 라이온 킹> 예고편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아에서 세상을 지배한 위대한 왕이 되기까지👑 라이온 킹, 그 시작의 이야기 [무파사: 라이온 킹] 12월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