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롬2021-04-11 13:38:11
삶에 어퍼컷을 날리다
<파이트 클럽> ⭐⭐⭐⭐
제목과 브래드 피트만으로 영화를 접근했던 나에게 약간의 칭찬을 주고 싶다. 1999년 당시 젊은 브래드 피트의 연기 모습과 삶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이고 자칫 무식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배경 속 반전 결말과 함께 철학적이고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 더러 있는 영화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파이트 클럽> 네이버 스틸컷
파이트(Fight)
제목 그대로 <파이트 클럽>은 싸움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다. 스트레스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원초적인 수단으로 등장하는 파이트 클럽은 마치 우리가 UFC 경기를 보는 것처럼 폭력에 환호성 하고 희열을 느낀다. 사회에 반항하는 듯한 작은 규모의 파이트 클럽이 점차 미국 전역으로 성장 및 확대해가는 흐름을 볼 때 얼마나 반사회적인 감정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는지,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조금은 씁쓸한 영화 흐름이다. 파이트(Fight)라는 의미가 영화에서 단순히 사람과 사람 간의 주먹다짐만이 아닌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삶을 파이트(Fight)한다고 생각해도 된다. 그들이 이용하는 파이트 클럽은 바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새로운 힐링 모임이자 위로의 공간이 된다.
이후 영화는 파이트(Fight)의 영역을 키워나간다. 작은 주먹다짐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던 모임에서 전국적으로 활성화된 테러 조직으로 변질되어 사회에 저항한다. 인간이 가진 내재된 사회적 분노를 보여주는 것이 마치 테일러 더든이 <다크 나이트> 조커가 생각나게 한다. 이런 영화 흐름은 결말에도 영향을 끼친다. 테일러 더든이 신용 회사들의 폭파를 막기 위해 헐레벌떡 근처 빌딩으로 달려왔지만, 이후 폭파는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반사회적 요소가 들어간 영화에 어울리는 결말일 수도 있고,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라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영화 흐름과도 잘 맞는 결말 같다.
연출
<파이트 클럽>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에게 영화 촬영과 편집을 맡아준 거 같은 깨알 재미를 보여준다. 테일러 더든을 설명하는 배우 에드워드 노튼의 내레이션 장면부터 중간중간 테일러 더든이 영화 릴을 교체한 것처럼 등장하는 빠른 포르노 사진의 등장은 영화가 그 자체가 테일러 더든을 위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폭력 요소가 많은 영화라서 전체적인 톤이 어두워 보이는 촬영은 <파이트 클럽>과 어울리는 미장센을 뽐낸다. 그러나 암울한 색감이 드는 배경과 달리 빨강 가죽재킷이나 화려한 색상의 셔츠를 즐겨 입는 테일러 더든을 보면 그가 상상 속 인물이었다는 반전 결말에 납득이 가는 의상들이다. 이러한 연출을 볼 때,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엄청난 센스가 보이는 연출이다.
인생
당신에게 양자택일이 주어졌다. 안정적인 삶과 도전적인 삶.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파이트 클럽> 속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과감하다. 삶의 감사함을 얻기 위해선 죽음의 문턱 혹은 눈 앞에 다가온 위기를 지나야지 비로소 진정한 삶의 희망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것이 좋은 인생이고 올바른 인생이라는 답은 없다. "자기 계발은 자위행위일 뿐이야"라는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의 말도 이해가 간다. 한번뿐인 인생을 자기 계발로만 연연하기에는 허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 들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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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워즈 영화 랭킹 Star Wars Film Ranked
조지 루카스가 구상한 [스타워즈 9부작] 혹은 [스카이워커 사가]은 한마디로 '다스 베이더의 비극'라는 거대한 서사시다. 그 비극을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파토스(Pathos, 연민을 자아내는 힘, 측은지심)'을 자아내기 때문에 전설의 위치에 올랐다.
마블과 DC를 포함한 대부분의 장르물이 그렇듯이 [스타워즈] 역시 개연성을 지닌 영화는 아니다. 지난 42년간 [스타워즈]는 MCU처럼 독창적인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무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이전에 팬들에 의해 대중문화 최초로 ‘확장세계관(EU)’를 정립했다. 그런데 [시퀄 3부작]은 [스타워즈] 특유의 ‘설정 놀음’을 간과했다. 특히 캐슬린 케네디 루카스필름 대표와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이 그랬다.
◆평가 기준
1순위 시리즈로써 의의
2순위 공유 세계관 기여도
3순위 단일 작품으로써 완성도
#11 : 에피소드 9: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Episode IX: The Rise Of Skywalker, 2019)
디즈니는 ‘스카이워커 사가의 종결’을 홍보했지만, 9편의 실제 임무는 ‘브랜드 관리’다. J.J. 에이브람스의 최우선 과제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라스트 제다이]에 대한 팬들의 반발을 잠재우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이 던져놓은 7편의 떡밥을 회수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따지고 보면 라이언 존슨이 8편에서 7편의 떡밥을 싹 무시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제작을 맡은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이 ‘팬 서비스’를 핑계 삼아 8편의 아이디어를 깡그리 쓰레기통에 버린다. 속편이 나올 때마다 전편을 부정하는 [시퀄 3부작]은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팬들의 반응만 살피며 돌려 막기 하다 보니까 캐릭터, 설정, 세계관, 스토리 전부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거기다 캐슬린 케네디가 꺼내 든 황제 클론 아이디어는 그 자신이 2014년 4월 25일에 폐기한 레전드에서 가져왔다. 캐슬린 케네디의 '빈곤한 상상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라 포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만능키)' 되고, 레이는 '메리 수(천하무적)' 화 되어 시리즈 전통을 더더욱 망가뜨린다. 이게 다 라제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부 다 수습하려고 노력하면서, 9편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시퀄 3부작 내내 기존 시리즈에 대한 지나친 오마주를 하면서 전통 파괴를 일삼는 모순을 매번 일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통 [시퀄 3부작]의 주제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세 편 모두 제각각 따라 놀며 [시퀄 3부작]의 정체성과 주제를 전부 잃어버렸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는 빈곤한 상상력과 방향성의 부재다. 이것이 디즈니가 '새로운 스타워즈'를 내세우면서도 [스타워즈 6부작]을 의존하는 [시퀄 3부작]의 한계다. 고로 창의적인 비전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진이 [스타워즈] 시리즈 자체를 오독하고 있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실로 안타깝다.
#10 : 에피소드 8 : 라스트 제다이 (EPISODE VIII - THE LAST JEDI, 2017)
당연하게도 시리즈물은 단 한 편의 완성도로 평가할 수 없다. 라이언 존슨은 우리가 익히 알던 스타워즈의 영웅 서사를 해체시킨다. 영화 전체에 걸쳐 낡은 스타워즈를 새롭게 갈아엎지만, 5편 [제국의 역습]처럼 하는 일마다 죄다 실패하는 통에 다 보고 나면 허무하다. 왜 [제국의 역습]을 레퍼런스한 [라스트 제다이]는 감흥이 적을까? 비극은 공포와 연민을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 [제국의 역습]은 '부살(父殺·Patricide)' 모티브를 차용해 루크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지만, [라스트 제다이]의 성장 자체가 없는 레이에게 어떻게 연민과 공포를 가지겠는가?
라이언 존슨이 전통에만 기반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는 '미래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건 좋다. 해체하기에 앞서서 우선 시리즈의 본질을 제대로 통찰했어야 했다. 아니면 아예 과거와는 선을 긋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덧붙여서 차라리 [라스트 제다이]를 첫 번째 영화로 내세워 [시퀄 3부작]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되었다면, 훨씬 순조로웠을 것이다. 결국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일부터 저지르는 8편은 J.J. 에이브람스를 포함한 스타워즈 팬들에게는 40년 동안 쌓아왔던 공유 세계관에 대한 '반달리즘'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라이언 존슨은 제다이와 시스로 구분 짓지 말자고 계속 설득하지만, 정작 '저항군 VS 퍼스트 오더' 선악구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또, 영화 내내 탈영웅 서사를 부르짖지만, 결국 시련과 고초를 한 번도 겪지 않는 완전무결한 레이의 영웅 서사를 보면 자기모순처럼 읽힌다. 거기다 서스펜스에 약한 라이언 존슨의 약점이 겹치면서 저항군을 계속 위기로 몰아넣지만,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서 긴박감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나이브스 아웃]을 보면 그는 미스터리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다.) 전부 라이언 존슨이 별다른 설득 없이 시리즈의 요소들을 본인 입맛대로 취사선택하고 변용한 결과였다. 왜 그랬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두, 자크 데리다는 흔히 '선과 악' 같은 이항대립 체계를 종언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 가르침대로 라이언 존슨 역시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을 종식시키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사실 데리다는 이항대립의 경계, 울타리를 이야기할 뿐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 데리다는 이항대립을 해체하되 이항대립 그 자체가 종결될 수는 없다고 봤다. 왜냐하면 성경을 포함한 서구인의 사고체계 전부를 뜯어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언 존슨도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맹점에 빠졌던 것이다.
결국에는 괜찮은 완성도임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그 즉시 기록 말살 형에 처해진다. 이제 루카스 필름 내부에서조차 ‘흑역사’로 공인된 셈이다. 그러나 조만간 재평가 받을지도 모른다. 현재 라이언 존슨이 집필하는 구 공화국 시점의 신규 3부작(10,11,12편)이 2022년 12월, 2024년 12월, 2026년 12월 개봉 예정으로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케빈 파이기가 제작하는 스타워즈 작품 역시 2022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어 동일한 프로젝트로 예상된다.
#9 : 에피소드 7 : 깨어난 포스 (EPISODE VII - THE FORCE AWAKENS, 2015)
첨 볼 때는 클래식 느낌이 나서 반가웠다. 다시 보니 [깨어난 포스]는 [에피소드 4·5]을 리뉴얼했을 뿐 아니라 개봉 당시 과대평가보다 실제 완성도가 떨어지고, 의미 없는 서사가 많았다.
물론 당시에는 이러한 구멍들이 차기작을 위한 떡밥으로 간주하고 넘어갔었는데, 라이언 존슨의 8편 [라스트 제다이]이 떡밥 자체를 무시하고, 세계관 자체를 붕괴시키는 바람에 에이브람스가 직접 연출한 9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망가진 세계관을 수습하고, 설정 구멍을 막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문득 왜 에이브람스가 ‘떡밥의 제왕’이 되었을까? 가 궁금해진다. ‘쌍제이 특유의 떡밥 투척’은 독창성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다, 맥거핀(떡밥)을 많이 설정해서 재빨리 흥미를 유발하고, 연속된 위기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며 돌려 막기일 뿐이다. 7편과 9편에서 쌍제이의 단점이 크게 부각되는데, 새로운 맥거핀이 파생될 때마다 또 다른 플롯 포인트가 생긴다는 점이다. 무언가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긴 하는데 전체적인 흐름은 전진된 게 없다. 게다가 쌍제이가 캐릭터들조차 도구적으로 정보와 아이템을 주는 용도로 쓴다. 아마 데이지 리들리조차도 레이가 어떤 역할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3편 내내 자꾸 설정이 바뀌니까 말이다. 핀과 포 다메론도 마찬가지다.
디즈니가 안정된 돈벌이를 위해 ‘추억 팔이‘에 안주한 결과, 시리즈로의 신규 관객 유입에 실패한다. 진부한 [시퀄 3부작]으로 스타워즈를 처음 접한 세대들에게 "개연성도 부족하고 재미없는" 시리즈로 받아질 수밖에 없다. '영혼 없는' 팬 무비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시퀄과 프리퀄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깨어난 포스]에서 레이가 모아 온 고물을 수거하는 배급소 주인 '운카 풀럿'은 뚱뚱한 구두쇠 정도로 단편적으로 묘사한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부품가게 주인으로 나오는 '와토'는 어떤가? 이방인 '콰이곤 진'을 경계하지만 장사치답게 흥정을 건다. 자신의 노예인 아나킨의 포드 레이싱 재능을 인정해서 포드를 제공해준 적이 있으며, 경주 도박을 하기도 한다. 또, 자바 더 헛을 두려워하고, 세불바가 아나킨에게 해코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루카스는 '단역'이라고 해도 그 전후 배경와 상호작용을 미리 설정해둔다.
그렇기에 루카스의 형편없는 연출력에도 불구에도 [스타워즈]가 확장세계관의 선구자로 매김 할 수 있었다. 간과하기 쉽지만, 조지 루카스 세계관과 캐릭터를 설정할때 입체적 사고로 그린다. 거대한 세계관을 창조하려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언뜻 별 관계가 없는 대상과 우리는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 표시되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와 관습이 있지 않은가? 제임스 카메론도 조지 루카스처럼 인류학적·미학적 맥락을 철저히 따진다. 그는 [아바타]를 제작할 때 나비족 언어와 종교, 규범, 문화, 지리까지 미리 설정한 다음에야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6편 [제다이의 귀환]에서 은하 제국이 멸망하고, 들어선 신 은하 공화국이 어떤 과정으로 붕괴되었는지 7편 [깨어난 포스]가 전혀 설명하지 않아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즉, 정체불명의 퍼스트 오더가 왜 위협적인지를 관객 입장에서 와닿지 않기에 [시퀄 3부작] 내내 ‘긴장감의 부재’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부실한 세계관 구현이 2020년 현재 [시퀄 3부작] 관련 작품보다 이전 [프리퀄 3부작] 혹은 [클래식 3부작]에 기반한 미디어 믹스 및 파생상품이 더 많은 이유다.
#8 : 솔로 : 스타워즈 스토리 (SOLO: A STAR WARS STORY, 2018)
크리스 밀러 & 필 로드의 급작스러운 해고로 말미암아 캐슬린 케네디가 싹 다 갈아엎도록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워즈] 간판을 떼고 보면 괜찮은 하이스트 무비다. 다만, 구원투수로 등판한 론 하워드가 산으로 갈 뻔한 작품을 겨우겨우 수습한 티가 난다. 예를 들면, 항공권이 없는 한은 제국군에 의해 수배령이 내려지지만, 정작 제국군 입대 담당관은 그에게 성을 붙여준다. 이렇듯 얼렁뚱땅 넘어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베테랑 론 하워드가 촉박한 제작 기한 내에서 균열을 최소화했다.
해리슨 포드를 닮지 않은 엘든 이렌리치는 차분하게 연기를 잘했고, 까칠한 드로이드 L3-37과 도널드 글로버의 랜도 칼리시안은 씬 스틸러다. 그럭저럭 즐길만하지만,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되어서 그런지 속 시원한 기원담을 들려주지 않는다. 꽁꽁 싸맨 채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다 보니 자꾸만 여타의 SF 영화들이 연상될 뿐 특별한 인상을 안겨주지 못한다. 문제작 [라스트 제다이]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프랜차이즈 최초로 적자 흥행을 기록하게 된다. 이 사단의 원흉인 캐슬린 케네디는 어쩔 수 없이 한 솔로의 속편 계획과 [오비완 케노비], [보바 펫]의 앤솔로지 시리즈를 취소한다.
그러나 [더 만달로리안]에 앞서 시리즈 최초로 '암시장의 밀수와 범죄'를 조명한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자바 더 핫이 이끄는 핫 카르텔, 코렐리아 행성에서 제국 전함이 건조되는 장면, 우주 공항의 묘사, 코악시움 광산의 묘사, 츄바카와 우키 종족의 묘사 등 [시퀄 3부작]이 등한시했던 세계관 구현에 노력했다.
#7 :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 (EPISODE I - THE PHANTOM MENACE, 1999)
[프리퀄 3부작]의 밑바탕을 깔기 위한 거대한 예고편에 불과하다. 포드 레이스 장면과 다스 몰과의 검투신만 보거나 [보이지 않는 위험]을 통째로 건너뛰더라도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시퀄 3부작’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위험]의 세계관 확장이 긍정적인 평가로 돌아섰다. 살다 살다 [프리퀄 3부작]을 응원하는 날이 오다니
무역협상, 분리주의 연합 등 진지한 정치적 담론, 자자 빙크스의 고통스러운 CG 슬랩스틱, 부재한 주인공, 처참한 대사, 느슨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3부작과는 확연히 차별화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바로 로마 공화정이 제국화되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결함으로 인해 자신과 주변인이 파멸로 치닫는 셰익스피어리언 비극을 시리즈에 훌륭하게 이식시켰기 때문이다.
또, [클래식 3부작] 과는 이질적이었던 디자인이 클래식의 변영에 지나지 않는 진부한 디자인을 선보인 [시퀄 3부작]으로 말미암아 지금에 와서는 과감한 도전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끝으로 미디클로리언을 통해 '기(氣)'에서 착안한 포스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 개념으로 노예 신분인 아나킨을 '선택받은 자'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8편 이전부터 누구나 포스를 가질 수 있다는 '포스 에브리웨어' 설정은 이미 존재했었다.
#6 :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EPISODE II - ATTACK OF THE CLONES, 2002)
[클론의 습격]은 조지 루카스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사와 형편없는 연출, 헤이든 크리스텐슨의 발성 문제가 겹치면서 '역대 최악의 로맨스 영화'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100% 디지털 촬영으로 완성된 첫 블록버스터이며, 이 영화를 기점으로 영화 산업은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다와 두쿠 백작의 라이트세이버 결투, 제다이 기사단와 분리주의 연합의 드로이드 간 전투 등으로 액션을 강화했으며, 의회를 장악한 팰버틴 의장이 무역 연합에 대항하고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은하 공화국을 방어할 목적으로 비상 권한을 부여받는다거나 보바 펫과 클론 트루퍼를 결부 짓는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이다. 루카스의 탁월한 기획력에 비해([시스의 복수]을 위해 아껴둔) 드라마의 부재를 막을 캐릭터 묘사에 실패하면서 시리즈 사상 가장 지루하다는 혹평을 면치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조지 루카스가 프리퀄을 만들게 된 직접적인 동기인 '클론 전쟁'의 개전만을 알린다는 점이다. 추후 전쟁의 진행 상황은 [클론 전쟁(2003/2008)]로 대체됐다. 있으나 마나 한 ‘제다이의 결혼 금지 규율’ 따위보다 '클론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뒀다면, [에피소드 1·2]가 이리 허무하게 낭비되지 않았을 터, 무척 안타깝다.
하지만 2편의 숨은 장점은 비극의 단초인 ‘하마르티아(Hamartia)’를 제공했다는 데에 있다. '하마르티아’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가다’ ‘길을 잃고 헤매다’이지만, 하마르티아는 주인공이 지닌 결함으로, 아나킨은 금혼 계율을 어기고 파드메와 결혼하고, 제다이답지 않게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이것이 아나킨의 하마르티아다. 그의 판단 실수는 '비극'이라는 커다란 기계를 작동시킨다. 마치 브레이크 페달이 고장 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자동차의 결함처럼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2편의 빌드업이 있었기에 3편에서 극적으로 반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 (EPISODE VI - RETURN OF THE JEDI, 1983)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처럼, 3부작을 마무리 짓는 일은 어렵다. [제다이의 귀환]은 전편 [제국의 역습]이 근사하게 던져놓았던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고, 지금까지 끌어온 시리즈의 결말을 내야 하는 힘겨운 미션이 남아있었다. 그럼 [스타워즈]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동일하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어떻게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제다이의 귀환]라는 제목은 아나킨이 메피스토펠레스(팰 버틴)을 원자로에 던져버리며, 인간성을 회복하는 걸 의미한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들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부자간의 화해가 이뤄진다. 여기서 그리스 비극과 [스타워즈]의 차이점이 발견한다. 그리스 비극은 신이 정한 운명론에 의존하지만, 팰버틴에게 끌려다니던 다스 베이더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금 아나킨 스카이워커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타락한 영웅이 스스로 선택해서 악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포스의 균형'이다.
더욱이 6편은 분명히 4편 [새로운 희망]의 아이디어를 재탕하고, 인물 간의 갈등구조가 할리우드 영화답게 안전하다.
그것이야말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게 [배트맨 비긴즈]을 참고하라는 교훈으로 받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제다이의 귀환]는 클래식 3부작이 남긴 수많은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무용담을 장중하고 우아하게 마무리했다. 이후 루크와 레아를 중심으로 레전드 확장 세계관(EU)이 진행되고, 팬들로 하여금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악당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뒤에 팬들의 소원은 마침내 이뤄진다.
#4 :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 (ROGUE ONE: A STAR WARS STORY, 2016)
드디어 디즈니 스타워즈가 재탕을 멈추고, [스타워즈]의 감춰진 이면을 파헤친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저항군 특공대들의 희생을 다룬다. 원래 [스타워즈] 자체가 제2차 대전 전쟁 영화들에게서 착안한 작품이었다. 은하제국 군복은 나치 독일과 매우 유사하며, 저항군은 연합 군을 연상시키지 않은가? [로그 원]은 한발 더 나아가 ‘레지스탕스‘의 이미지를 덧입힌다.
다시 말해 스타워즈 특유의 유치한 가족영화의 틀을 버리고, 본래 스타워즈 세계관에 지니고 있던 2차 대전 특공대를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스타워즈 6부작]과 연결성을 중시한다. 무엇보다 가렛 에드워즈의 장단점이 다 발휘됐다. 무미건조한 캐릭터 구축과 초반부의 산만한 드라마가 아쉽지만, 스펙터클하게 규모를 살리는 연출이나 사실성을 강조한 서사구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요즘 미드 [만달로디안]가 호평을 받는 이유는 [로그 원]과 동일하다. 기존 스타워즈 설정을 존중하면서도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참신한 시도가 병행되었다는 점이 성공 비결이다.
#3 :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EPISODE III - REVENGE OF THE SITH, 2005)
조지 루카스의 여전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선다. 아나킨은 한 개인이 막을 수 없는 불행이 연달아 닥치며 타락하게 되고, 공화국 역시 멸망하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가지게 한다. [프리퀄 3부작]을 통해 ‘제다이 vs 시스’로 세계관이 확장하게 되면서 클래식 3부작의 ‘부자간의 골육상잔'은 수 천 년간 이어진 제다이와 시스의 대립 중 하나로 재정립한다.
시스 로드인 황제가 제다이 기사단의 '선택받은 자'를 회유하며 시스의 복수를 완성한다. 스타워즈 팬들은 아니킨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가 되는 결말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창시자가 새롭게 공개한 사실들에 놀람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승과 제자의 처절한 혈투는 물론이고, 요다가 황제 암살에 실패하면서 은거한다거나 오더 66에 의한 제다이 기사단이 몰락하고, C3P3와 R2D2가 기억을 잃는 과정, 오비완이 포스의 영이 되는 법을 요다에게 전수해준다거나 파드메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들쑥날쑥한 [프리퀄 3부작]을 매끄럽게 마무리하면서도 [클래식 3부작]에서 빠진 빈틈을 세심하게 메웠다.
또, 시리즈 최초의 배드 엔딩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세이버가 누군가에 전해지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다. 서사와 액션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유일한 스타워즈 작품이며, 밝고 유쾌한 [클래식 3부작]과는 180도 다른 어둡고 진지한 [프리퀄 3부작]을 성공적으로 완결 지었다.
만약 ‘현자 다스 플레이거스의 비극’이 없었다면 9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의 황제 클론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될 만큼 확장 세계관과 캐릭터 정립에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2 :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EPISODE IV - A NEW HOPE, 1977)
대중문화를 영원히 바꾼 영화다. 처음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정의 내리고, '콘텐츠 산업'으로의 패러다임을 바꿔, 부가상품을 대중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산업 역시 [스타워즈]를 기점으로 현실의 영역에서 ‘판타지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국내에서 [스타워즈]가 유치하다고들 하는데, 실제로 그러하다. 원래 조지 루카스가 어릴 적 즐겨본 코믹스 [플래시 고든],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 조지프 캠벨의 원형 신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동양의 '기(氣)' 개념을 서양식으로 재해석한 포스 등의 철학적 우화, 전쟁영화, 갱스터, 호러, 뮤지컬, 서부극의 요소를 섞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가족영화이자 밝고 경쾌한 어드벤처 SF 영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복합장르 전략은 이후 영화 제작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스타워즈]는 조지프 캠벨의 원형 신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칼로 총알(빔)을 막거나 우주가 배경인데 18세기 라인 배틀을 펼치는 광경이 의아할 것이다. 이는 시대와 문화권에 구애받지 않는 원형 신화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편부터 '다스 베이더'를 그리스 비극처럼 그리면서 시리즈로써 환골탈태한다. 이때부터 할리우드 극작술에 '원형 신화'가 도입된다.
#1 : 에피소드 5 : 제국의 역습 (EPISODE V - THE EMPIRE STRIKES BACK, 1980)
루소 형제의 말마따나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이 관객의 예상과 기대를 배반한 용기는 [제국의 역습]에서 배웠다. 당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도대체 뭘 본 거지?" 싶었다고 한다. 악에게 패배한 주인공, 어긋난 로맨스, 새드 엔딩은 상업영화의 오래된 금기들이었다.
전편 [새로운 희망]이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완결성을 갖춘 반면에 [제국의 역습]은 어떻게 이야기를 확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선례로 여전히 남아있다. 스타워즈 9부작의 밑그림은 여기서 출발했다. 한편 팬들은 [새로운 희망]과 [제국의 역습] 사이의 설정 구멍을 메우며 [확장 세계관 (EU)]를 만들고 놀았다. 바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기원’인 것이다, 이것이 ‘스타워즈’를 신화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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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도를 위한 애도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Show Me the Way to the Station, 2019
일본 | 드라마 | 126분
감독: 하시모토 나오키
애도를 위한 애도,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다분히 감정적이다. 관객에게 집요하게 잊고 있던 이별을 떠올리게 하고 상실에 허우적대던 과거를 다시 경험하게 한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왔던 슬픔과 아픔을 꺼내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 원했던 것처럼 묻게 한다. 이미 알고 있지만, 어렴풋이 다들 짐작하고 그러려니 하던 '역'의 존재를 아이와 같은 입장에서 되묻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대체 그 역은 어디 있는 걸까? 또 어디로 가는 걸까?"
여기서 우린 사야카가 말하는 '역'의 존재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가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절대 갈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는 장소, 산 사람들은 결코 밟을 수 없는 영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야카의 옆에 서서 묻는 거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그럴 수 없는 아이러니함,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명제 때문이다.
그를 영영 잊어버릴까 봐 절절한 그리움과 괴로움조차 함부로 놓을 수 없는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우린 그 행위와 시선, 모든 마음의 조각들을 엮어 시간의 길을 만들고 이를 '애도'라 부른다.
출처: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컷(다음)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장면 곳곳에 감정의 활력을 불어넣지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사실 언어(음성)가 제거된 무성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대사보다 인물의 행동으로 사건을 강렬하게 그리는 방식이 이 작품만의 남다른 표현 방식이다. 감독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음성언어보단 인물들의 손짓과 눈빛으로 차근차근 전개하면서, 상실과 그리움을 화면 가득 채워 넣는다. 섬세한 몸의 언어와 절제되어있지만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출 방식으로 관객의 공감과 감동 포인트를 쉽게 점령한다. 이 지점엔 반드시 영화의 스토리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명확하게 이해했다는 전제조건이 필수인데, 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철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사야카가 전철이 지나간 뒤 철로에 난 길을 건너는 장면까지 단 3분.
이 짧은 장면엔 길을 걷는 내내 허공에 팔을 뻗은 사야카의 모습이 전부다. 그러나 우린 아이를 통해 영화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눈치챈다. 아이는 아직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며, 이별로 인해 극심한 슬픔을 겪고 있다. 결국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누군가를 잃은 이별'을 겪어내는, 인물의 애도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출처: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컷(다음)
루는 사야카에게 언제나 멋진 선물을 해준 존재다. 자신과 같은 외로움을 가진 반려견이었고, 하나뿐인 친구였으며 늘 곁에 있는 가족이었다. 말 그대로 루는 사야카에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사야카는 단호하게 말한다.
"루는 절대 죽지 않았어!"라고. 심장병으로 죽은 반려견을 잊지 못해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는 사야카의 현재는, 루와 함께 했던 과거의 추억과 끊임없이 교차된다. 계속 반복되는 과거 회상으로 우린 루가 사야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점점 더 사야카가 느끼는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사야카는 다시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이는 이미 부모에게 강아지가 최대 1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준비된 이별과 그렇지 못한 이별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보이는 행위의 준비가 아니라 남들은 결코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마음의 준비. 사야카는 루가 자신이 체험학습을 갔을 때 갑작스럽게 떠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의 죽음은 사야카에겐 정말 먼 미래였으니까. 결국 환경적, 시간적 요인에 의한 죽음이란 불길하지만 예정된 조짐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던 아이는 결코 루를 떠나보낼 마음이 없다.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자연재해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 사야카에게 애도란 그저 '어른들의 거짓말', '부정' 그 자체였다.
출처: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컷(다음)
오래 살면 살수록 인간은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지고 무뎌진다는 말을 나무라듯,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어린아이의 상실과 노인의 상실을 구분 짓지 않는다. 후세는 오래전 사야카 또래, 어린 아들(고이치로)을 사고로 잃었고, 사야카의 할아버지는 아내를 떠나보냈다. 두 사람 모두 사야카와 같은 준비된 이별이 아니었다. 사야카는 자신의 마음을 찌르는 고통이 후세와 할아버지가 느끼는 고통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들 역시 강하게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돌연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갑자기 돌변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슬픔과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야카는 그들을 보며 조금씩 자신을 둘러싼 상실을 풀어낸다.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후세에게 루와 함께 한 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추억하고, 반대로 자연스럽게 후세에게 그의 죽은 아들에 대해 듣는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박꽃을 심었던 때를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조용히 그의 손등에 손을 포개며 그를 위로하고, 또 할아버지에게 위로받는다.
서글프기만 했던 어린아이가 위로받고, 반대로 타인을 위로하는 장면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고통을 이겨내는 가슴 벅찬 장면으로 연결된다. 영화는 이 따뜻하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한 스푼의 환상과 버무리며 이야기의 몰입감을 높이고, 주제를 더 빛나게 한다. 길고 은은하게 퍼지던 루를 향한 사야카의 진심은, 고이치로와 캐치볼을 하는 후세의 기다렸던 웃음으로 인해 묵직한 파동을 만든다. 그리하여, 사야카가 후세를 보며 "무언가 굉장히 소중한 걸 본 것 같았다."라고 말한 대사는 모든 이의 마음에 돌고 돌아 끝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만다.
출처: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컷(다음)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애도를 위한 방식으로 '함께'하는 애도를 선택했다.
사야카는 후세와 함께 루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를 그대로 '공석'으로 둘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한다. 둘은 슬픔과 두려움은 나누고 따뜻한 온기로 마음을 채우며,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밀려가지 않도록 서로를 붙잡는다. 홀로 남겨진다는 불안과 다가올 외로움에 맞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일, 그리하여 남겨진 자에게 주어진 삶을 씩씩하고 담담히 살아가는 일.. 사야카는 사라지는 것이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다시 미소를 되찾는다. 아이는 기억하기 시작하면서, 영원의 의미를 깨닫는다. 루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 영원을 말이다.
애도는 반드시 애도로 작별해야 한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어두웠던 방문을 열고 나와야 한다. 그 방이 자신의 마음속에 늘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언제든 들어가 울고 웃을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후세가 말한 역은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영화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야카에게 직접 끊어진 기찻길을 발견하게 했다. 그리고 모르는 척 사야카와 루의 비밀 장소를 우리에게 노출했다. 나만의 비밀 장소를 선정하는 건 애도를 향한 첫 번째 걸음이 분명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사야카는 전철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작별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덧붙으면, 아름다운 작별이 된다.
고맙게도 후세도, 할아버지도, 사야카도 모두 아름다운 작별을 했다.
출처: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스틸컷(다음)
우린 기억하는 일을 지겨워하지 않기에 늘 자신이 정한 중심을 잃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한 뒤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던 사야카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어른의 목소리로 변한 걸 눈치챈다면,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아이였던 사야카가 어른이 되어 '나의 중심, 루'를 추억하는 이야기였다.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과거로 내일을 말하는 법을 잘 아는, 능숙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에, 귀를 쫑긋거리기보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사야카를 바라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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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칸토>, 대들 수 있는 자녀가 온 집안을 구한다!
# 뭘 해도 부족하기만 한,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자녀
<엔칸토 : 마법의 세계>가 제기하는 문제제기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어떤 자녀가 진짜 영웅이 될 수 있는가
자녀는 언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주인공,
뭘 해도 늘 가족들 기준에 못 미치는, 가문의 '아픈 손가락', '미라벨'!마법의 힘이 유전되는 '마드리갈' 패밀리 중에서 유일하게 마법 능력을 받지 못한 '미라벨'
마법의 힘으로 만들어진 마을 '엔칸토'와 그 엔칸토를 이끌고 가는 '마드리갈 가문'.
마드리갈 가문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모두 자기만의 '마법의 힘'을 갖게 된다.
이런 대단한 가문에서 유일하게 '마법의 힘'을 전해 받지 못한 '미라벨'.
미라벨의 두 언니, 엄청난 힘을 가진 '루이사'와 손으로 온갖 아름다운 꽃과 식물을 만들어내는 '이사벨라'
특히 미라벨의 친언니 '루이사'와 '이사벨라'는 특출 난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미라벨의 비교 대상이 된다. 친언니들뿐 아니라 미라벨은 대단한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엄마, 친척들과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며 집안의 아픈 손가락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멋진 미라벨! 언제나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씩씩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씩씩하고 당찬 미라벨이 유일하게 눈치를 보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마드리갈 집안의 가장, '아부엘라', 할머니다!
마드리갈 가문의 가장, 할머니 '아부엘라'
오래전 갓난아이 셋을 안고 남편과 함께 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던 '아부엘라'(할머니).
도망가는 피난민들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아부엘라의 남편이 군인들을 막아섰고,
군인들은 아부엘라의 눈앞에서 남편을 죽인다.
절망에 빠진 순간, 아부엘라는 강에서 '마법'을 선물 받는다.
그 마법으로 '엔칸토'라는 마을이 세워지고, 그때부터 아부엘라는 마법의 힘으로 마드리갈 가문과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살아간다.
마드리갈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모두 특별한 '마법의 능력'을 받게 되었고,
마법의 능력을 받는 의식은 할머니 아부엘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 의식에서 마법을 받는 것에 실패한 자녀가 바로 '미라벨'.
할머니 눈에 미라벨은 '가장 약하고, 부족하며, 전혀 특별하지 않은 자녀'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머니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미라벨은, 할머니 앞에만 서면 작아지곤 하였다.
# 강력한 권위에 유일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자녀!
그러던 어느 날, 마법으로 지어진 마드리갈 가문의 집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집에 금이 가면서, 가족들의 능력도 약해진다.
마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집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 마법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 바로 미라벨!
미라벨은 할머니와 가족들에게 경고하지만, 아무도 미라벨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할머니는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는 미라벨을 비난한다.
하지만 마법은 정말로 사라지고 있었고, 미라벨만이 그 사실을 직시하고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미라벨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일은 꼬이고, 집은 점점 망가져 갔다.
마법이 사라지면서 점점 무너지는 마드리갈 '집'과 '엔칸토'
할머니는, 마법이 사라지는 이유가 바로 '미라벨'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미라벨의 삼촌 '브루노'는 앞으로 일어날 안 좋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예지력이 있었다.
오래전 '브루노' 삼촌은 마법의 능력을 통해 언젠가 마드리갈 집이 무너지고,
그 무너지는 집 가운데 '미라벨'이 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가족들에게 늘 안 좋은 소식을 전하며 미움을 사던 브루노도 그 예지를 본 이후 집안에서 사라진다.)
그러한 <브루노 삼촌의 예지 + 미라벨의 설치고 다니는 모습>이 결합하여,
미라벨은 마법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여겨지며, 할머니의 비난을 받게 된다.
미라벨 때문에 집이 무너지고 마법이 사라진다고 믿는 할머니
할머니는 모든 것을 미라벨 탓으로 돌린다.
벽의 금들은 너와 함께 시작됐어.
브루노도 너 때문에 떠났어.
루이사는 힘을 잃었고, 이사벨라는 통제불능이야. 너 때문에.
네가 능력을 못 받은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게 가족을 괴롭힐 핑계는 안 되는 거야!할머니는, 미라벨이 자격지심으로 가족들을 괴롭힌다고 몰아세운다.
집이 무너지는 것도, 마법이 사라지는 것도, 다 미라벨 때문이라고!
미라벨은 그때 깨닫는다!
끝까지 제가 못마땅하신 거죠?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머니 눈에 루이사는 힘이 모자라고,
이사벨라는 늘 완벽하지 않겠죠.
브루노 삼촌도 할머니가 나쁜 면만 봐서 떠났어요.
삼촌도 저도 우린 이 가족을 사랑해요.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건 할머니라고요.할머니는 늘 자녀의 '부족한 모습, 모자란 모습'에 더 집중했다는 것!
힘이 센 루이사도, 완벽한 이사벨라도, 나쁜 미래를 보던 브루노 삼촌도..
가족을 위한다며 가족에게 행한 할머니의 행동은, 사실 진짜 가족을 위한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래서 미라벨은 외친다!
할머니가 집을 부수고 있어요. 기적은 할머니 때문에 죽어가는 거라고요!!
그 누구도 할머니에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
어느 누구도 감히 할머니에게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
미라벨은 유일하게 할머니에게 대들었다!
# 부모의 잘못에 맞서고 다시 부모를 감싸안는 자리, 마법의 탄생!
집은 무너진다.
철저하게.
집도 사라지고, 마법도 사라진 후, 할머니는 깨닫는다.
그리고 미라벨에게 고백한다.
난 기적을 받았다. 두 번째 기회라는 기적을.
그걸 잃을까 봐 너무 두려워서 누굴 위한 기적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지.가족을 지키기 위해 얻었던 마법의 힘,
그 마법의 힘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정작 그 마법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잊어버렸다는 고백.
할머니는 깨닫는다.
기적은 자녀들이 받은 마법이 아니라 바로 자녀들 그 자체라는 것.
미라벨은, 할머니의 고백을 조용히 듣고 깨닫는다.
이제야 알겠어요. 할머니는 집을 잃고 모든 걸 잃으셨죠.
모든 괴로움을 혼자 견뎌오신 거예요.
우린 할머니 덕분에 구원받았고,
할머니 덕분에 기적을 받았고,
할머니 덕분에 가족이 됐어요.
그 어떤 게 무너져도 함께라면 고칠 수 있어요.어느 순간 집안의 '빌런'이 되어버린 할머니,
그러나 그러한 할머니는 혼자 모든 괴로움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왔으며,
가족의 탄생과 유지, 평화를 지켜왔다.
미라벨은 할머니의 상처를 알아보고, 할머니의 마음을 위로한다.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할머니를 감싸 안는다.
마법을 잃은 마드리갈 가문은, 엔칸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시 집을 세운다.
그리고 다시 세워진 집에 미라벨이 문고리를 거는 순간, '마법'은 되살아난다!
이것이 미라벨이 가진 진짜 마법의 힘이었다!
모두가 기존의 권위에 억눌려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나서 그 강력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부모의 잘못을 모른척하지 않고,
그 잘못한 것을 넘어서 감춰져 있던 부모의 진심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감싸안는 용기.
이것이 가장 어렵고 힘든 마법.
세상의 법칙이 가진 부정적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고 탓할 수 있는 용기,
거기에 더해 그 너머의 긍정적 가치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미라벨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 마법은 무너진 한 집안을,
마을을,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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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프링 블라썸(2020)> 리뷰
-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 <스프링 블라썸>의 예고를 보았다. 내 흥미를 자극한 건 트레일러 속 짧게 스쳐 지나간 안무 영상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을 대사로써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이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이 제법 전위적이지 않은가 생각했던 것이다. <사랑은 부엉부엉(2016)> 등에서 보여준 프랑스 영화 다운 참신함에 대한 기대감도 물론 있었겠지만.일단 영화 외적인 것을 짤막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은 수잔 랭동 감독의 데뷔작이다. 하지만 그저 감독이라고 부르고 넘어가기엔 찝찝하다. 만일 <스프링 블라썸>이 하나의 음악이었다면, 수잔 랭동은 원 맨 밴드라는 말을 들었을 테니. 그는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듯 주연배우를 맡았고, 각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며, 엔딩 크레딧곡마저 직접 불렀다. 그야말로 영화계의 루키다. 다만 영화 각본을 쓰기 시작한 것이 15살이며 자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다시 말하자면, <스프링 블라썸>은 결과적으로 첫사랑의 시작과 끝을 다루면서도 첫사랑을 회고하는 데에서 나오는 쌉싸름함이나 약간의 안타까움이 누락되어 있으며, 주인공 수잔(수잔 랭동)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묘사는 퍽 서툴다. 그래서인지 <스프링 블라썸>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라이트한 버전에 가까워보인다.※ 스포일러 주의<스프링 블라썸>이 포착하고자 한 것은 삶의 한 순간이다. 따분한 일상이 급작스레 반짝이게 되는 어떤 순간. 이야기는 학교와 집, 관심사가 맞지 않는 주변인과 같은 일상에 질린 주인공 수잔의 눈에 우연히 연극 배우 라파엘(아르노 발로아)이 들어오는 순간 시작된다. 라파엘이 일하는 극장이 수잔이 좋아하는 하교길에 있다보니 둘의 동선은 거듭 겹친다. 자꾸만 시야에 들어오는 알 수 없는 남자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수잔은 점차 그의 영역에 자신을 들여보내고, 안면을 트며,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간다.두 사람의 관심사는 꽤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수잔과 라파엘이 가장 크게 공통점을 느낀 부분은 권태로움이다. 다만, 수잔과 라파엘의 권태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언정 속사정이 꽤 다르다. 작품이 재현하는 수잔의 권태는 기실 수잔이라는 인물의 자아/독특함을 부각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예컨대 수잔의 대사, "나는 또래 남자애들이 따분해요"는, 기실, 자신의 특별함을 인지하는 상대의 부재에서 비롯된 불만이다. 그가 말하는 '남자애들'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또래 전체를 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그는 여자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파티에서 어울리지 못하며, 수업 시간 중 수준 낮은 질문을 하는 친구에게 큰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 즉 수잔이 겪는 일상의 무료함은 평균적인 또래 집단과 수잔 본인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해석한다.반면 라파엘이 겪는 권태로움은 일종의 번아웃으로 보인다. 같은 배역이 반복됨으로써 작품을 계속하고픈 열정이 희미해진 시간만이 지속되고 있다. 넌덜머리가 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오페라 아리아곡과 같은 작은 요소에 기대어 일상을 이어나간다. 이런 순간 만난 사람이 바로 수잔이다.수잔 랭동 감독은 <스프링 블라썸>을 찍는 동안, '러브 스토리 자체보다 사랑에 빠지는 감정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명확하게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는 모습을 끊김없이 그리기보단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두 사람의 흔들리는 감정을 충실하게 묘사한다. 속절없이 라파엘에게로 향하는 수잔의 시선이나, 잠들지 못하는 새벽 따위의, 사랑에 휩싸인 선명한 순간을 꾸밈없이 모아둔 것 같단 생각마저 든다.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두 주인공은 (첫)사랑의 열병에 빠져 일상의 리듬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토록 지난한 일상이었음에도 그것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으며 특별한 순간을 공유한다. 두 사람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플라토닉적 관계에 기초한 둘의 감정은 일상을 조금쯤 살 만한 것으로 변화시킨다. 이렇듯 기존의 로맨스와 다른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일까. 감독은 두 사람의 교감을 무용 시퀀스를 차용하여 표현하였다. 트레일러에서 보았던 장면이었음에도 영화를 통해서 만난 카페 씬은 두 사람의 감정을 그저 사랑이라는 단어로 재단하기엔 너무 얕지 않은지, 인간이 맺는 무수한 관계를 고작 몇 개의 단어로 가두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될 만큼 훌륭했다.영화의 모든 장면은 놀라우리만큼 감각적이었으나 이외 부분에 있어선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자전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수잔을 제외한 주변인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담겨 영화의 설득력이 반감된다는 점이나, 또래 집단과 수잔의 다름을 표현하는 데에 보다 적절한 소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첫사랑으로 인해 생기는 주인공의 변화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면모가 있어 수잔의 스탠스가 흔들릴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조금의 고민과 주저함이 없었던 점이 퍽 아쉬웠다. 사랑은 일상을 반짝이게 수놓기도 하지만, 수놓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기도 하니까. 수잔이 경험한 변화를 한 두 발짝 물러나 깊이 있게 묘사했다면 보다 좋았을 듯 하다.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수잔 랭동을 알게 된 건 분명 큰 기쁨이었다. 그가 펼쳐보일 또다른 시네마를 기대해본다. 그때 즈음엔 <스프링 블라썸>이 내게도 첫사랑처럼 남을 지도 모른다. 어설퍼보이더라도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엔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로 남고야 마는 첫사랑처럼.★★*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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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버나움(Capernaum/2018/레바논, 프랑스)
-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
<무정지옥(無情地獄)>
가버나움은 이스라엘 북부의 도시이름이다. 예수 당시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세관도 있어 제법 큰 도시였다. 예수가 이곳에서 가르침과 기적을 많이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 예수는 가버나움의 멸망을 예언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배경은 가버나움이 아니라 레바논의 빈민촌이다. 멸망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렇게까지 가난하고 피폐할 수 있을까 싶은 동네여서 '가버나움'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 같다.
빈민촌의 한 소년이 친부모를 고소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소년의 이름은 자인. 출생증명서가 없어 존재와 삶이 입증될 수 없는 어린 아이.
원고와 피고, 피고의 변호사 등이 법정에 속속 도착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법원은 취재진들로 둘러싸여 이 재판이 세간의 눈길을 끄는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자인의 부모는 무지하고 무능하며 가난하다. 7-8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출생 신고도 하지 않았을 정도. 자인은 약국을 전전하며 거짓으로 약을 처방 받아 동생들과 함께 '마약주스'를 만들어 판다. 그리고 자인의 집 주인인 아사드의 가게에서 일을 한다. 그의 몸무게 보다 더 나갈 듯한 가스통을 끌차에 싣고 힘겹게 끌며 이리저리 배달하는 자인의 뒷모습은 비극 그 자체이다. 언뜻 보기에 아사드가 자인에게 친절한 것 같지만 그에게는 속셈이 있다. 자인의 어린 여동생 사하르를 탐내고 있었던 것. 이것을 이미 눈치 챈 자인은 사하르가 생리를 시작하게 되자 동생의 앞날이 걱정되어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선물로 닭을 들고 자인의 집에 들른 아사드는 집세를 올리지 않는 조건으로 사하르를 요구하고 자인의 부모는 이를 수락한다. 싫다고 울며 부르짖는 사하르를 강제로 아사드에게 보내는 부모에게 격분한 자인은 가출을 하고 만다.
집과 멀리 떨어진 좀 번화한 동네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미성년인 자인에게 차례가 올 리 없다. 거리에서 방황하다가 에티오피아 여성 이주 노동자 라힐을 만난다. 라힐에게는 젖먹이 아들 요나스가 있었다. 테마파크의 잡역부로 일하던 그녀는 짐에 숨겨 아들을 일터에 데려가 화장실에 가둬놓고 몰래 젖을 먹이며 키우고 있었다.
라힐이 밖에서 일하는 동안 자인이 그녀의 판잣집에서 요나스를 돌보기로 하고 함께 지내게 되지만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가짜 체류증이 만료되어 새 체류증을 만들어 보려고 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그녀는 불법체류자로 체포되고 만다.
라힐이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자 집에 있는 것들을 팔고 마약주스도 만들며 자인은 버텨보지만 집세가 밀려 쫓겨나고 보니 도무지 헤쳐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시장통에서 만난 난민 소녀에게 돈이 있으면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한편 불법 체류증을 팔면서 인신매매를 하던 시장의 상인 아스프로가 집요하게 요나스에게 눈독을 들이며 감언이설로 자인을 꼬드기자 해외로 나갈 돈이 필요했고 요나스를 돌보기에 힘이 부쳤던 자인은 요나스를 아스프로에게 넘긴다.
해외로 가려면 출생증명서가 필요하다는 아스프로의 말에 서류를 가지러 집에 들른 자인은 동생 사히르가 너무 어린 몸으로 임신을 하게 되어 합병증으로 죽고 말았음을 알고는 아사드를 칼로 찌르고 체포되는데 바로 그 구치소에서 라힐을 만난다. 자인의 끔찍한 삶이 라디오 방송에 소개되었을 때 그에게 소원을 묻는 진행자에게 자인은 '내 부모를 고소하는 것'이라는 답을 하게 되어 그의 비극적인 삶이 법정에서 파헤쳐지게 된것이다.
<가버나움>은 무정한 사회에서 어린이라는 약자가 겪게 되는 비참한 현실을 그린 사회고발 영화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역할에 해당되는 일들을 실제 경험한 비전문 연기자들이라고 하며 감독 나딘 라바키는 "가버나움재단"을 세워 이 비전문 연기자들의 어려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일을 하고 있다니 그녀는 영화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이상주의자인 모양이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서 노동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일이 없으니 가난의 자리에 주저앉게 되고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는 시도로 감독은 자식이 친부모를 고소한다는 극적인 소재를 선택한 것 같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처지라고 하여도 부모가 자식을 팔며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는 상황만큼 무정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자식이 열 두 살인지, 열 세 살인지도 모르는 부모.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돌봄도 받지 못해 비쩍 마른 몸으로 생계의 전선으로 내몰리는 어린 소년. 생리를 시작하게 되자마자 준비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결혼'이라는 이름아래 팔려가는 어린 소녀. 난민들에게는 구호단체의 손길이라도 미치지만 보호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자국의 어린 아이들은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딜 수 밖에 없다는 감독의 직설적인 고발이 비현실로 다가와 죄책감이 들 정도이다.
도시의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옳으냐.
앵벌이나 노숙자에게 돈을 주는 것이 옳으냐.
관료주의적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옳으냐.
이러한 의문이 타인을 돕는 행위를 가로막는 질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나보다 힘들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과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편이, 답하기 어려운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들을 외면하고 지나가는 것보다는 인간적이지 않을까(©2020.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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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이라는 활로 쏘아올린 사회비판의 화살
촬영
<괴물>은 주로 수평과 수직 관계가 많이 등장한다. 주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괴물이 살고 잇는 하수구나 지하는 수평의 촬영으로, 높은 빌딩이나 괴물이 등장하는 다리 사이의 공간을 촬영할 때는 수직의 촬영을 이용하여 보는 이가 괴물의 위압감이나 등장 전의 긴장감을 이어가는 중요한 포인트를 촬영이 짚어준다.
비
'비' 라는 존재는 어떨까 생명의 힘이 깃들고 차분해지는 이미지도 있다마는 이 영화에서는 신비롭고 영롱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어둡고 잔잔한 분위기에서 괴물이 깜짝 등장했다고 생각해보자. 공포나 긴장감이 두 배로 나올 것이고, 괴물이라는 소재에 은연히 드러나는 사회 비판에 대한 어두움을 표현하기에 비 만큼 어울리는 배경은 없을 것이다.
사회비판
처음에 봤을 때는 그냥 괴물에 맞써 싸우는 가족들의 사투와 애환에 관한 내용일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고 예민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걸 영화를 다 보고 깨닫게 되었다. 한강에 독극물을 타는 초반 시퀀스는 실제로 2000년에 있었던 독극물 무단 방류 사건을 생각내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밖에도 정부의 미흡한 대처능력과 괴물이라는 소재가 아니라도 충분히 갈등이 벌어지는 문제들을 <괴물>에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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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퍼펙트 스틸> 30초 예고편
비슷한 일상에 지쳐 있는 국선 변호사 ‘캐시’.
어느 날, 그의 클라이언트인 ‘리아’가 찾아와
경매에 나온 수상한 SUV의 이야기를 해준다.
SUV에는 1,500만 달러 어치 마약이 숨겨져 있다는 것.
이에 ‘캐시’는 아무도 모르는 새에 마약을 챙기는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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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원피스> 공식 티저 예고편
오다 에이이치로가 그린 사상 최고 인기 만화를 실사로 옮긴 작품, 그 대망의 첫 영상을 지금 공개한다. 《원피스》, 8월 31일 출항.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