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4-10-04 15:14:35
사랑 앞에 선 사회적 약자의 환상
- <조커: 폴리 아 되>(2024)
2019년 영화 <조커>는 한 사회적 약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심리적 파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외감, 무시당하는 상처, 그리고 이를 덮으려는 몸부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했고, 결국 그를 비극의 주인공, 조커로 만들어 갔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전작의 이야기를 잇는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허황된 욕망을 탐구한다. 이번 작품은 혁명의 영웅으로 떠오른 조커보다는 다시금 약자로 돌아간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라는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패배감
아서 플렉에게 패배감은 평생을 관통한 기본 정서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아본 적 없었고, 언제나 비웃음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이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패배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여러 번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감은 일종의 디폴트 상태였고, 이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패배감이 그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끝없이 패배감을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는 조커라는 가면을 쓰며 잠시나마 패배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감정] 조커의 분노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 아서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패배감을 분노로 감추고,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당당함을 얻는다. 이 순간의 조커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강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관객에게조차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듯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아서는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억압과 무시를 세상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당당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속에서 할리(레이디 가가)는 아서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조커였다. 즉,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의 분노와 그로 인해 얻어진 위태로운 매력을 사랑한 것이다. 영화는 조커로 변신한 아서의 모습을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장면으로 표현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남은 것은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아서의 현실과 그가 잠시나마 꿈꾼 조커의 허상을 동시에 보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억울함
아서의 삶에서 억울함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보호의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그를 소외시키고 억압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상황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의 친구조차도 아서를 무서워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아서 스스로 얻고자 해서 얻은게 아니며,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삶의 굴레들이다.
아서에게 억울함은 그가 조커라는 인물로 주목받을 때조차 여전하다. 그는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재판에 나서지만, 여전히 아서 플렉으로서의 자아는 조커가 얻는 주목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조커로서 사람들에게 환호받아도, 아서로 남아도, 결국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뿐이었다. 이러한 억울함은 그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 억울함은 그의 패배감, 분노와 뒤섞여 그를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락뿐임을 암시한다. 아서는 조커로서의 삶에서도, 아서 플렉으로서의 삶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그 억울함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도 그는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 그저 한 번 반짝했던 범죄자로 남을 뿐이다.
촬영이나 연기의 완성도는 높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몰락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의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아서는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며, 할리의 등장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서의 일생 중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조차도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들은 조커의 환상적인 모습이 아닌 아서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아서의 삶을 끝까지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의 서사를 마무리짓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까지 포함해 모두가 조커를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끝까지 아서의 현실을 강조하며 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의 연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뮤지컬 장르를 도입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장르적 도전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 뮤지컬 장르가 원래의 이야기와 잘 이어 붙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되어버렸다. 촬영이나 화면이 고급스럽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게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아서와 조커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레이디 가가 역시 할리 역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연기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사회 변혁 이나 사회 파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의 삶과 그가 꿈꾸는 허망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의 아름다움, 그리고 뮤지컬 장면의 독창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서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며, 그의 몰락이 결국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을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M8_51bz-c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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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톰과 제리 / Tom and Jer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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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경기력은 갖췄다면...
야구, 축구, 그리고 농구 같은 스포츠와 달리 "프로레슬링"은 경기력만으로 풀어가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거의 대명사급 "WWE"의 마지막 약자 "E"가 "오락"을 뜻하는 'entertainment'인 것을 생각하면, 접근하기가 어려운 스포츠인데요.
그런 점에서 영화 <톰과 제리>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먼저, 이들이 구사하는 "스턴트" 즉, 경기력에 있어서 이들에게 뭐라고 하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다만, 이들의 문제는 "프로모"를 찍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프로레슬링"은 여느 스포츠와 다르게, 합이 존재하는 데 이를 "스토리"라고 말합니다.
주로 "왜, 이들이 붙는가?"에 대한 동기인데, 1940년부터 나온 <톰과 제리>에서 이들이 붙는 경위는 돌고 돌아 "먹이 사슬"에 의한 본능이었습니다.
이에 이들에게 마이크를 쥐여줄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말하는 것에 이미 실패를 본 적이 있기에 이번 영화는 이를 "클로이 모레츠"를 비롯한 인간 캐릭터들에게 맡기는데요.
과연, 이들의 엔터테인먼트는 어땠는지? - 영화 <톰과 제리>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마다 꿈을 안고 뉴욕에 도착한 "톰"과 "제리"는 만나자마자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데요.
그러다가, 한 호텔에 입성한 "제리"는 그렇게 꿈꾸던 내 집 마련에 성공하나 "호텔"의 입장에서 쥐가 돌아다니는 것은 반갑지 않는 소식인데요.
이에 "카일라"는 "톰"과 함께 "제리"를 호텔 바깥으로 내보내려 계획을 짜지만, 번번이 막히고 마는데...
TV와 스크린은 많이 다르죠?
1. 그저, 실현이 외관에 그치지 않는다.
먼저, 영화 <톰과 제리>의 실사화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명탐정 피카츄2019>과 <수퍼 소닉2020>의 영화 제작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현시킬지는 영화 외적으로 가장 이슈였습니다.
특히, <수퍼 소닉>은 개봉일을 연기하면서 디자인을 전면 수정하는 일까지 일어났으니 이는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톰과 제리>는 기존 영화들이 "진짜"에 가깝게 만들었다면, 기존 작품에 있는 것을 꺼내오기로 선택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클로이 모레츠"를 비롯한 사람들과 건물과 같은 공간들은 그대로 두고, "톰과 제리"를 비롯한 동물들은 그대로 애니메이션과 유사하게 영화는 전개하는데요.
어색하게 보일 법도 하지만, 이는 되려 장점으로 적용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질감 없는 모습도 있겠지만, 이 영화의 액션도 이에 적지 않는 영향이 미칩니다.
기존 작품들을 본 팬들은 알겠지만, 단출한 제목에 비해 이 영화가 꺼내는 액션의 수위는 꽤 있습니다. 앞에서 "WWE"가 "의자"와 "오함마(?)", "사다리", 그리고 "테이블"이 전부라면 <톰과 제리>는 미사일까지 나오는데요.
이처럼 극 중 프라이팬에 맞게 몸이 변형되거나 번개에 맞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의 실사화는 캐릭터의 외관 말고도 액션에도 큰 영향이 있음이 확인될 겁니다.
2. 여전한 실력과 진화된 동작들
흔히, "프로레슬링"에서 선수들이 자신의 승리를 확정시키는 기술을 "피니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주 쓰는 기술을 "시그니처 무브"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톰과 제리>의 피니시와 시그니처 무브가 무엇인지를 확인해봐야겠죠?
그런 점에서 영화는 기존 작품을 따라 하면서도 시대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의 장점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 확인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톰과 제리"의 효과음이 클래식 음악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존 작품에서 몇몇 효과음과 음악에 맞게 액션을 취하는 것이 <톰과 제리>가 자주 선보이는 모습입니다.
이전 작품이 "클래식"에 한정되었다면, 이번 <톰과 제리>는 시대가 바뀐 만큼 "R&B"와 "힙합"같은 비교적 최신 트렌드까지 반영해 처음 보는 관객들에게도 흥미를 일깨웁니다.
이외에도 함정을 이용한 모습들도 종종 보여주는데요.
초반 공원에서 "제리"가 보여주는 주먹이나 문 뒤에 있는 "스파이크", 그리고 쥐덫을 이용한 장면들은 저와 같은 올드팬들에게 예우를, 새로운 팬들에게는 관심을 충분히 이끌만한 장면이라 생각할 만큼 좋았습니다.
3. 마이크를 쥐여주면 안되는 건가...
이렇게, 외관과 액션에서 합격점을 받은 <톰과 제리>의 입담은 어땠을까요?
결과부터 말하면, 경기력에 비하면 형편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근데, 이런 문제는 이전 시리즈에서도 확인이 된 겁니다.
그렇기에 "카일라"를 맡은 "클로이 모레츠"를 매니저 삼아 이를 대체하려 한 건데, 그마저도 신통치가 않습니다.
영화 <톰과 제리>가 관객들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갈등"입니다.
이를 "클로이 모레츠"와 "마이클 페냐", 그리고 "톰과 제리"까지 각각의 입장 차를 보여주며, 각 캐릭터들을 연결 지어 다른 에피소드로 흥미롭게 전개하는데요.
하지만 후반부 "카일라"가 "톰과 제리"의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신기하게 쳐다보는 직장 동료처럼 관객들도 그렇게 바라보게 될 만큼 급박스럽게 얘기됩니다.
비록, 영어를 할 줄 아는 동물들은 아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영화 <톰과 제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굉장히 쉬운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알아듣지 못하는 건 이를 연결 지으려는 솜씨가 "메주"라는 것인데, 이런 이유에는 갈등을 빚어냈던 인물들이 너무 쉽게 힘을 합친다는 것입니다.
"톰과 제리"를 비롯하여 "카일라"와 "테렌스"도 극과 극의 캐릭터임과 동시에 이야기 내내 갈등을 비치는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이내 화해하니 흔히, 말하는 선역과 악역이 어쩔 수 없이 힘을 합치는 클리셰가 쉽게 성사되니 아쉬움이 컸습니다.
4. 자막을 읽지 말고, 더빙으로 들어라!
그럼에도 이번 <톰과 제리>의 2회차는 저번 1회차보다 더 만족스러운 느낌입니다.
그 이유에는 아는 만큼 보이는 장면들입니다.
"디즈니랜드"를 염두에 둔 "쥐들의 세상"이라는 단어에 "저작권"을 의식하는 대사나 극 중 초반 톰이 지하철에 올라오는 간판에 "조커"가 있다거나 "배트맨"을 대사나 장면에서 보여주는 오마주가 상당히 많았는데요.
이외에도 "한니발 렉터"를 연상하는 강아지의 모습은 "씨네필"들의 2회차를 유도하기에 충분할 겁니다.
그리고 "더빙"에 대한 만족감이 큽니다.
이전 1회차가 4DX로 몸이 바쁜 것도 있지만, 자막으로 보아 눈도 그에 못지않게 많이 바빴습니다.
근데, 자막의 문장들이 가독성이 자연스럽게 떨어지지 얹아 이를 되짚으니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었는데요.
하지만 번 더빙은 대사들을 "구어체"로 번역해야 하기에 진짜 대화하는 느낌이라 의미 전달이 이전 자막보다 더 좋았습니다.
오히려, <톰과 제리>를 재밌게 보시려면 "더빙"을 보실 것을 꼭 추천하는 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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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원래 무거운 거야
여기, 자신의 삶을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으로 멋 부린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하울. 금발에 파란 눈, 반짝이는 장신구와 화려한 패턴의 옷, 여유로운 모습까지. 그럴싸한 겉모습을 가졌는데도 사람들은 몰려들지 않는다. '조심해. 하울은 심장을 잡아먹는대.' 흉흉한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피하기도 하지만, 하울 또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다. 언덕 너머 매서운 바람이 부는 광활하고 어둑한 들판,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노인. 걸음은 느려도 한 순간의 주저함이나 멈칫거림 없는 소피 '할멈'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주에 걸려서 신체 나이가 아흔 살이 된 소피겠다.
입구에 닿을 듯 말듯하던 소피 할멈을 하울의 성이 마치 퍼올리듯이 움직인다. 이 움직임의 원동력은 캘시퍼, 하울의 심장을 계약조건으로 성의 형태를 유지하는 악마다.
하울이 저주를 풀어주길 바라며 찾아온 소피 할멈. 그런데 저주가 걸렸다기엔 너무 씩씩하고 쾌활하다. 청소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얼굴은 편해 보이기까지 한다. 앳된 모습으로 모자 가게에서 일할 때엔 상상할 수 없던 표정과 말투.
함께 놀러 나가자는 다른 이들의 제안에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일을 마저 하겠다며. 시끌벅적한 무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소피는 모자를 몇 번 뒤적이곤 자리를 뜬다. 모자 가게는 소피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마냥 해맑은 동생과 엄마 사이에서 아버지의 가게를 이어가야 한다는 중압감이었을 뿐.
해야 하는 일에 오래 골몰한 사람은 점차 자신을 잃는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고 무서워하는지.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까지 사라진다.
자신의 내면이 외적으로 드러난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피는 밀대를 가져와 바닥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싹싹 밀고, 옷가지들을 모아 빨래하고, 캘시퍼 주변에 한가득 쌓인 재를 퍼올린다.
방 청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하울의 심장(캘시퍼)은 소피를 퍼올리듯이 안으로 들여보냈다. 반대로, 소피는 하울의 성 안을 가득 메운 먼지와 쓰레기, 재를 퍼올려서 내다 버린다. 어쩌면 하울이 소피에게 허락한 영역은 캘시퍼가 있는 1층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피는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청소한다. 하울이 아름다움을 위해 마법을 걸어두었던 선반까지도.
마법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하울은 말 그대로 '녹아내린다'. 무언가를 집어던지고 부수며 분노하지 않고 축 늘어진다. 이렇게나 유약한 자가 어떻게 전쟁의 최전선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일까.
하울의 오랜 고용주, 설리만은 말했다. 하울은 어려서부터 실력이 뛰어났다고. 어린 시절의 인정은 양날의 검이다. 용기를 북돋아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지만, 어른들의 입맛에 자신을 맞추는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 하울은 후자였다. 어떤 일을 시키든 잘 해내고, 성과를 인정받고, 더 큰 일을 받고, 굴레는 반복된다.
많은 가명을 만들어 각 이름마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연기하던 하울.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모두 똑똑하고, 기품 있고, 아름답다. 이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한 가지를 없애야 한다. 하울 자신. 그 열망이 너무 큰 탓이었을까. 조금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선택을 내린다. 어린 시절, 하울은 심장을 꺼내어 악마에게 주었다.
소피는 텅 빈 내면이 외적으로도 드러났고, 하울은 사람들이 혹할 만한 '좋은' 것으로 빈 공간을 숨겼다.
소피의 내면이 아흔 살 노인으로 드러났다면, 하울의 내면은 영화 끝자락에서 나온다. 하울의 심장의 초대를 받아 하울의 내면을 청소하고, 이윽고 가장 깊은 곳, 하울의 본모습을 마주한 소피. 방문을 열자 하울의 방 대신 동굴이 나오고, 그 끝에 온몸을 움츠린 커다란 새가 공포에 떨고 있다.
새보다는 공에 가까운 모양새. 타인의 기대와 욕망이 덕지덕지 묻은 깃털들이 하울을 무겁게 짓이긴다. 소피는 자신의 내면을 겉으로 드러낸 후 한 차례도 망설이지 않는다. 무수한 남색 깃털까지도 털어낸다. 그제야 하울이 보인다. 남색 머리와 그와 비슷한 색을 담은 눈, 흰 티, 까만 바지. 단조롭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처음과 모습이 다르다. 금발에 반짝이는 보석, 분홍색 제복의 하울은 수수한 차림새로 바뀌었다. 갈색머리의 소피는 '별빛'색의 단발로, 황야의 마녀는 커다랗고 위엄 있는 모습에서 작고 하찮은 모습으로, 캘시퍼는 자유로운 불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마르클은 어린 아이다.
"마음은 원래 무거운 거야."
어른들은 그 무게를 잊고 산다. 해야 하는 것들에 둘러싸이느라 하고 싶은 것을 모르고, 들끓는 정보를 쫓아가기에 급급하고,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불안과 걱정을 분노로 치장하고, 분노를 힘으로 치환해 과시하려 든다.
소피가 대단한 게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으로 보였으면 하는지, 왜 그러고 싶은지, '현실적'이라는 말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다 보면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청소의 시작점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박윤혜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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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친절로 난해한 <서스페리아>
무용단에서 벌어지는 일이 궁금
맨 처음에 나온 패트리샤 (클로이 모레츠) 관련 내용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먼 내용임이라는 생각이 시작부터 나왔다.그러고 수지 역을 맡은 다코타 존슨이 등장하여 무용단에 대한 내용이 이어지는데 블랑 (틸다 스윈튼)과 수지가 어떠한 연결고리가 될지 점차 궁금해졌다. 그리고 무용단에 있었던 패트리샤에 관한 내용 또한 이어졌으나 중간에 나온 정치적? 내용이 사실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수지에 대한 내용이 꿈과 중간 어머니에 관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의 탄생 비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꿈을 통해 한 장면만 똭똭 팩트로 보여주어서 자세히 나오지 않아 그녀와 어머니가 어떠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이 무용단과 패트리샤의 노트를 통해 그녀들이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되어 수지도 같은 동급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후반에 보여준 급 각성?은 생각지도 못했고 곰곰이 생각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이 부분은 통쾌감이 있어 좋았는데 그 뒤로 보여준 닥터 할아버지 이야기는 별로였다.
틸다 스윈튼이 1인 3역
생각해보니 틸다 스윈튼이 다 역했다고 하던데 그 다 역이 누구였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못 찾았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좀 특이했다고만 생각했지 틸다 스윈튼이라고 생각도 못 했고,3번째 인물은 후반에 나오는데 아마도 다들 못 찾지 않을까 싶다.
틸다 스윈튼은 1인 3역으로 전혀 다르게 나왔고 난 블랑 역이 독특했었고 그 중심으로 보여주었기에 제일 기억에 남은 것 같았다.
틸다 스윈튼에 이어 기억난 배우가 있었는데 수지 역을 맡은 다코타 존슨이었다.
꿈을 통해 보여준 그녀의 어머니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지만 무용 장면과 숨소리가 뭐랄까 성적인 느낌이 들어서 묘하게 야한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후반에 나온 공연 장면에서 숨소리와 시각적이 묘하게 다가왔다.깜툭튀 같은 공포가 아니라 묘하고 기괴하며 고어 같은 느낌인 영화였다.
그 속에서 보여준 상징, 은유가 있어 딱 보는 순간 해석이 어렵지만 내용 또한 불친절하기에 난해하여 호불호가 크다.
개인적으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지만 <마더>처럼 불쾌하지는 않았고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주면서 닥터 할아버지 이야기 보다 수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넣었더라면 이해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은데,<서스페리아> 보면서 아무래도 난해한 느낌은 들 수밖에 없었고 그 통쾌한 장면 이후에 보여준 내용은 길게 느껴지면서 지쳐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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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세한 화법은 어디 가고 두루뭉술 넘기기로?
청천벽력
이 영화의 주인공은 승무원 정인(배수지)이다. 멀지 않은 미래. 끔찍한 사고가 있기 전까지 정인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던 남자친구 태주(박보검)가 사고가 일어난다. 뜨겁게 사랑했던 두 사람. 혼자가 됐다는 외로움에 정인은 '원더랜드' 서비스를 알아본다. 원더랜드 서비스는 간단하다. 일종의 멀티버스에 사랑하는 사람을 구현시켜 그 인물과의 영상통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서비스를 관리하는 사람은 (정유미)와 (최우식)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고고학자 바이리(탕웨이)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딸을 잃은 바이리. 바이리는 딸이 살아있다는 일념 하에 원더랜드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간절한 그리움에 있는 사람들.
SF적 상상력으로 만들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건 질문이다. 어떤 질문? 이 영화가 나누는 세 가지 챕터에 따라 각기 다르다. 첫 번째 질문은 정인과 태주의 서사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인 설정. 정인과 태주는 서로 알콩달콩 예쁜 연애 중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나 태주가 식물인간이 된다. 정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원더랜드를 통해 가짜 태주를 만든다. 이 말은 곧 ‘사랑하는 사람을 같은 존재로 대체하겠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네’ 같은 노래가사 같은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람의 빈자리를 그 사람으로 메울 수 있을까?라는 사랑의 난제에 도전한 것이다. 이 <원더랜드>는 전적으로 영화 같은 정인의 사랑에 대해 질문한다. 글쓴이 생각엔 이 질문 던지기가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 같다. 왜? 이 질문이 정인의 입장에서 딜레마가 되는 데 있어 SF적 상상력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진짜/가짜 태주 사이의 갈등은 (보통의 sf가 다루는) 철학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뭐가 진짜 사랑이야?’라는 로맨스적인 요소가 된다. 이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윤리적인 문제가 로맨스, SF장르 모두를 꿰뚫는 좋은 수가 됐다. 인간을 복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와 사랑을 같은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를 동시에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덕에 <원더랜드>는 이 장르를 고른 당위성을 어느 정도는 챙겼다.
두 번째 질문. 이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해리와 현수의 서사로 읽을 수 있는 질문이다. 이 두 인물은 이 영화에서 돋보여야만 하는 캐릭터다. 왜? 이 두 사람의 속성 때문에. 이 인물들을 거칠게 말하면 '복제인간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 설정은 해리와 현수가 영화 안의 인물들의 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설정이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원더랜드 안의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키면 두 캐릭터가 해결책을 고심하는 장면이 있고, 이 부분은 두 사람의 서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이런 행보가 윤리적으로 옳은가?라고 질문한다. 또 인간이 인간에게 개입할 수 있는 선이 실재하는가?라고도 묻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질문을 구현하는 것이 할머니와 손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이 연애하는 것을 그릴 수도 있고 원더랜드를 운영하는 애로사항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굳이 이 사건을 골랐다. 할머니와 손자 간의 사건에 개입하는지를 고민하는 모습을 중요하게 보여준다. 이 고민은 영화 안에서 강조되다 해리와 현수가 후반부에 고른 선택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데,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인간의 내면에 도전하는 난제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장르를 잘 골랐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세 번째 질문. 바이리의 서사에서 읽을 수 있는 질문은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을 정말 사람이라고 인식해도 될까?'에 대한 부분이다. 바이리는 죽은 사람이다. 해리와 현수가 프로그래밍을 통해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가상세계를 뒤흔드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뒤흔든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영화가 정말 중요하게 밑줄 그은 부분은 딸 바이지아의 리액션이다. 바이리만 일방적으로 뒤흔들지 않는다. 바이지아도 이 행보에 호응하는 형식으로 플롯이 짜여 있다. 두 사람이 선을 직접 넘어드려고 노력한다는 것. 이 의미는 영화가 이 선에 대해 응시하고 싶었다는 의미기도 하다. 더 나아가 바이리와 함께 등장하는 성준(공유)의 캐릭터는 이 선 그 자체를 암시하는 인물이다. 후반부에 이 인물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이 인물의 동선으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가로지르며 이야기를 연결하고 있다. 이 SF의 장르적인 특성을 살린 선택은 두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가족드라마적 특성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바이리라는 인물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SF적 상상력으로 구현하면서, 장르가 가진 윤리적인 부분도 건드리는 것이다.
맥 빠지는 전개
하지만 영화의 축을 이루고 있는 세 이야기 전부 뒷심을 보여주지 못한다. 첫째. 태주와 정인의 로맨스와 관련된 부분에는 각본 상 결함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태주가 오랜 시간 동안 식물인간이었다고 하는 건 충분히 납득할만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설정에 지나치게 기대 영화의 무리수로 돌아오는 장면이 몇 있다. 가령 영화 안에서 정말 태주의 행동인지 아닌지 관객에게 묻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태주라는 인물의 추후 행보가 가능한가?라는 점에서도 의문이고 이게 두 사람의 사랑과 뭔 관련이 있는가?라는 점에서도 단점으로 돌아온다. 정인의 내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줌과 동시에 더 나아지는 것을 애초에 포기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인물의 방향성을 초반부터 딱 정해놓고 외부가 끼치는 영향을 전부 차단했기 때문에, 정인이는 옛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인물인 것처럼 묘사된다. 두 사람의 로맨스가 여운을 만들며 사랑영화가 가진 힘을 보여줘야 하는데 '쟤 왜 저래'만 남는 것이다. 로맨스와 SF의 공존에 대해서만 연구하고 정작 자세한 부분을 채우지 못한 패착이 느껴졌다.
둘째. 바이리와 현수/해리의 서사에 관한 부분이다. 두 서사는 결합하지 못하고 서로 붕 떴다. 이 부분은 다양한 예를 들어 쓸 수 있겠지만 글쓴이는 바이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시놉시스에도 언급됐듯이 바이리는 복제인간이다. 실제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캐릭터가 실제 인간과 차이점을 더 부각하는 연출이 이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진다는 의미다. 왜? 실존이라는 조건이 아니더라도 가족의 유대감을 ai가 구현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토의를 자유롭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이 캐릭터는 인간과 다를 바 없어요'라고 강조하고 있는 듯했다. 이건 두 사람 현수/해리에게 몰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왜? 이 연출은 영화가 가진 모순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AI로 만든 세상이라고 공언했는데 이 인물이 이렇게 행동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프로그래머가 만든 프로그램을 통제하지 못하는 게 현실성이 있을까? 글쓴이가 이런 의문이 든 이유는 감독이 '바이리의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라고 생각한다. 그 무엇보다 바이리의 숭고한 무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오히려 현수와 해리의 개성을 납작하게 만드는 악수처럼 느껴졌다.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윗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성준, 해리, 현수의 캐릭터 세팅은 끝마무리가 이상하다는 점에서 과연 기획의도를 잘 살렸을까? 의문이 들게 만든다. 우선 해리와 현수는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다. 영화 안에서 뭐 이렇다 할 그게 없다. 큰 문제는 '이렇다 할 그게 없다'는 점에서 온다. 이 둘은 가족이 원더랜드와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실제로 분량도 크다. 하지만 이 사건은 나열에서 그치고 플롯의 선후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후반까지 가면 이 무의미한 설정들이 더 크게 다가오는데, 영화 안에서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남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 <원더랜드>는 그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상한 대사를 넣기도 했다. '우리 잠깐만 사귈래요'같은 대사가 있었는데 이 문장이 이후에 두 사람 간의 관계에 유효타를 끼치지도 못했으며 현수와 해리 사이의 로맨스의 ㄹ자도 없었다는 것이 부실한 서사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악수였다.
글쓴이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단점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성준 서사다. 이 영화에서 성준이가 왜 필요했을까? 글쓴이는 단지 바이리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서 단지 바이리의 존재만을 부각하기 위한 것 말고는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왜? 성준이 바이리에게 그 어떤 존재도 되지 못한다. 대신 다른 주인공과의 공통점은 있는데, 이 공통점도 이야기에서 핵심을 드러낸다거나 하는 설정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인물이 겉돈다. <가족의 탄생>에선 1인 2역으로 구현하던 캐릭터의 생동감이 본작 <원더랜드>에선 죽은 것이다.
조악한 시각화
이야기에서 몰입감을 잡지 못하다 보니 CG의 상태에 대해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실 극후반부 전까지는 시각화를 따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이 영화는 윤리적인 문제를 장르적인 특성과 결합시켜서 관객에게 던지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비판하고 싶다면 작품이 던지는 화두에 대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라고 맞는 게 적절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 영화가 그 부분은 나름대로 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최무성 배우의 캐릭터가 속해있는 세계가 풍기는 이질감이나 가짜 태주가 있는 우주의 어색함을 일일이 따지지 않는다면 보는데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시각화의 퀄리티가 영화의 엔딩에게 칼끝을 겨누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글쓴이가 이 영화의 엔딩을 보고 든 생각. <가족의 탄생>과 지나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의 엔딩을 생각해 본다. 그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가족의 탄생>이 그린 가족 구성원과 유사하게 닮아있다. 그리고 엔딩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그 영화의 플롯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탐탁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정을 주고받는 가족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 <원더랜드>는 뭘 추구했을까? SF와 가족드라마의 접합을 시도했다. 어떻게? <가족의 탄생>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핵심은 '어설프게'라는 점이다. 이야기의 구조를 엔딩에서 집약시킨 것도 아니고, 어설픈 VFX로 시각적인 설득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며 가족영화로서의 감동도 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엔딩에서의 사건이 치밀한 핍진성을 통해 구현된 것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1차원적으로 보면 그 사건 자체는 합리적이지만 인물의 내면을 촘촘하게 묘사하지는 못했다는 점과 성준의 동선이 꼬인다는 점에서 마무리를 잘 짓지 못했다. 반대로 바이리가 그 장면에서 특정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서 영화가 핍진성이 무너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글쓴이는 아닌 것 같다. 영화 전체적인 아이디어 '결핍을 SF적 상상력으로 채운다'라는 것을 해치지도 않는 것 같다. 어차피 이 '원더랜드' 서비스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못한 채 진부한 방식으로 마무리짓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부분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극의 몰입을 깬다. 전반부야 그럴 수 있다지만 후반부에서는 확실하게 힘을 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억에 남는 건 바이리 역의 탕웨이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다.
적당히 잘 만든걸 기대할리가
어떤 관점에선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스크린에서 오랜만에 보는 박보검 배우의 해사함이나 이제 베테랑이 된 배수지 배우의 경험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람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 김태용이라는 이름이 한국영화에 <만추>와 <가족의 탄생>이라는 선물을 두고 갔던 것 치고는 너무나도 부실한 결과물이다. 솔직히 감독 이름 가리고 냈으면 누군가의 입봉작일 거라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한 것이 이 <원더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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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투게더> -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가볍지만 아팠던 사랑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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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투게더(春光乍洩, Happy Together)
개봉일 : 1998.08.22 (한국 기준)
감독 : 왕가위
출연 : 장국영, 양조위, 장첸, 관숙의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가볍지만 아팠던 사랑의 단면’
“다시 시작하자” 보영의 한마디에 아휘는 흔들린다. 보영과 아휘는 연인이지만 연인이 아니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전부 내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깨지고 짧은 한마디로 겨우 다시 접합해놓은 사랑.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균열을 풀칠 몇 번으로 이어온, 어쩌면 지겹게도 느껴지는 사랑. 충분히 아프고 또 아팠으니 이 또한 사랑이었겠다.
1995년.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흘러가고 있던 시간을 이 영화를 통해 붙잡아본다. 저녁 8시, 도시는 바쁘게 반짝이고 보영과 아휘는 작은 집안에서 몸을 밀착한 채 춤을 추고, 사랑을 하고, 갈라서고, 다시 시작한다.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라곤 한 손에 꼽는 낯선 도시에서 다시 돌아갈 고향을 꿈꾸며 아휘는 보영을 놓지 못한다.
보영 역을 맡은 장국영과 아휘 역을 맡은 양조위의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 펼쳐지는 97분의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며칠 전 4월 1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로 영혼을 탈탈 털어가며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잡아탄 택시 라디오에서 장국영의 To You가 흘러나왔고, 저녁 7시 반쯤이 되어서야 알았다.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사실 난 장국영이라는 배우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다. 그는 내가 10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말하기에도 어딘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근데 난 왜 성장기를 같이한 것도, 동시대를 살아본 것도 아닌 저 먼 곳에 있는 그의 눈을 보며 슬픔을 느끼고 있는 걸까. 기분이 묘하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시대를, 발 한번 붙여보지 못한 도시를,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랑의 형태를 내가 받아들이기 버거울 만큼 아련하고 반짝이게 표현해낸 영화였다. 갖고 싶지만 외면하고 싶었고, 가볍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아프게 가슴을 찔렀던 사랑이 속절없이 절벽 밑으로 추락한다. <해피투게더>는 그 사랑의 단편적인 조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해피투게더 시놉시스
홍콩을 떠나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보영’과 ‘아휘’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던 중 두 사람은 사소한 다툼 끝에 이별하고 각자의 길을 떠난다. 얼마 후 상처투성이로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 ‘보영’은 무작정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서로를 위로하며 점차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두 사람. 하지만 ‘보영’의 변심이 두려운 ‘아휘’와 ‘아휘’의 구속이 견디기 힘든 ‘보영’은 또다시 서로의 마음에 상처 내는 말을 내뱉은 뒤 헤어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다시 시작하자”
보영은 속절없이 깨져버린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다시 시작하자.”.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다 길을 잃은 이별을 선택하지만 보영은 아휘의 앞에 다시 나타난다. 아휘는 당연하게도 보영의 한마디에 휘둘린다. 사랑하니까, 잊을 수 없으니까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아휘는 보영과 이별을 하고 탱고바에서 일하며 보영보단 고향인 홍콩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때 두 사람의 순간들은 흑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아휘의 곁을 맴돌던 보영이 아휘의 삶으로 다시 들어온 순간, 화면에 청록빛의 색채가 드리운다.
보영은 아휘에게 담배를 빌리고, 아휘의 담배로 불을 붙이고, 아휘의 침대를 차지한다. 아휘는 보영을 집에 들이긴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휘둘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자신은 소파에, 보영은 침대에. 크지 않은 집이지만 서로의 영역을 명확히 나눠 두려 한다. 하지만 보영은 아휘가 집을 비운 사이 침대와 소파를 붙이고, 좁은 소파에 누운 아휘의 옆을 파고든다.
보영과 아휘의 사이는 단적으로 말하면 갑과 을에 가까웠다. 헤어지는 것도 다시 만나는 것도 보영의 뜻이었고, 아휘는 그에 따를 뿐이다. 근데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휘는 손을 다친 보영을 보살폈고, 돈이 없는 보영에겐 아휘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휘는 보영의 옷 안에서 여권을 발견하고 그것을 숨겨놓는다. 보영이 가진 대부분의 것들이 아휘의 영역 안에 들어온 것이다.
아휘는 보영을 보살피며 지겨울 만큼 끈덕진 사랑을 느낀다. 감기 몸살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날에도 밥이 필요하다는 보영의 한마디에 일어나 밥을 볶았고, 밤중에 담배가 다 떨어졌다는 보영의 말을 듣고 선반에 담배를 한 움큼 쌓아놓는다. 탱고바에서 일하는 게 싫다는 보영의 말에 설거지 일을 구했고, 아픈 보영을 보살피는 게 행복했다. 손이 낫고 나의 도움이 필요 없어지면 그가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차라리 보영의 손이 낫지 않았으면 하는 슬픈 바람도 가져본다.
“넌 항상 제멋대로 하잖아.”
여러 번 깨어진 사랑에 단단한 신뢰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아휘는 여권을 찾는 보영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여권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아휘는 처절하게 사랑의 환부를 잡아보지만, 보영은 그를 외면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이별을 맞이한다. 몇 번째 이별이었을까.
“네가 불행한 게 느껴져.”
아휘의 친구이자 동료인 ‘장’은 어릴 때 눈이 아팠던 경험 때문에 사람의 소리에 집중하게 된 인물이다. 그는 곧 일을 관두고 세상의 끝에 있는 등대에 갈 거라는 목표를 가진 청년이다. 장은 아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목소리에 묻어나는 슬픔을 가늠해본다. 사랑하는 연인도 들어주지 않았던 아휘의 슬픔. 장은 그것을 담아 세상의 끝으로 향한다. 세상의 끝이라는 우수아이아 등대에 도착한 장은 아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녹음기를 틀어본다. 녹음기 안에 담긴 건 흐느끼는듯한 소리뿐이었다. 그 흐느낌이 말하고 있는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장은 아휘의 흐느낌을 들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아휘가 이별의 아픔을 담은 흐느낌을 녹음기 안에 담아내고 있을 때, 보영 또한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린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은 끝났다. 아휘는 도살장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물로 씻어내며 보영의 지겨운 에피소드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완전한 끝을 맞이했음을 알게 된 보영은 담배를 잔뜩 사들고 아휘의 집을 찾아가지만 아휘는 떠난 뒤였다. 보영은 담요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아휘는 보영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그대로 내려놓은 채 혼자 이과수 폭포로 떠난다. 테이블에 놓인 이과수 폭포 램프 안엔 다정하게 앉아있는 두 사람이 그려져있지만 진짜 이과수 폭포 앞엔 아휘 혼자 서있다. 반짝이는 이과수 폭포 램프를 보며 상상했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아휘는 보영을 생각하며 슬픔을 말한다.
보영과 아휘의 사랑은 서로의 스텝이 맞춰지지 않은 탱고 같았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춤을 추지만 아휘는 스텝을 자꾸 헷갈린다. 보영은 그런 아휘에게 다시 연습해보라며 홀로 연습할 시간을 주고, 다시 탱고를 춘다. 보영과 아휘는 손을 맞잡고 사랑하다가도 스텝이 엇갈리면 가차 없이 손을 놓았고, 아휘가 다시 스텝을 맞춰오면 잠시 함께 춤을 췄다가, 엇갈리면 다시 놓았다. 지금껏 아휘가 보영의 스텝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휘가 그 노력의 끈을 놓은 순간, 사랑은 정말 끝나버린다.
사랑은 “다시 시작하자”라는 말 한마디로 붙일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같이 있으면 좋다고,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그 한마디를 왜 그리 아꼈던 것일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것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지독하게 아픈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엔 사랑하는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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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하지 않는 오락 바구니
다소, '힘이 떨어졌다'라는 평가들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디즈니"를 먹여살리는 데에 'MCU(마블)만한 것이 없다'라는 것에 이의를 걸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경쟁자 "워너"도 "DC 코믹스"를 통해서 다양한 작품들과 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DCEU(확장 유니버스)"라는 큰 핵심만큼은 빗겨나가고 있다.
본 작품을 보기에 앞서 <블랙 아담>에 올라간 "드웨인 존슨"이라는 이름을 보는 관객들과 회사의 입장은 똑같을 거다. - 부디, 기본만 해달라고!오래전, 마법사들에게 선택된 "아담"은 그 힘으로 백성들을 핍박하는 왕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나라가 위험에 빠지면, 다시 나타나겠다'라는 예언과 함께 사라진 "아담"은 이내 다시 나타나고 막을 수 없는 위기를 바라본 "저스티스 소사이어티"가 그의 앞을 막아서는데...1. 더 락의 영화엔 지루함이 없지!
낯선 제목이지만, <블랙 아담> 역시 "DCEU(확장 유니버스)"라는 단어에서 보듯이이 "슈퍼 히어로"이다.
새로운 인물인 만큼 소개말과 함께 익숙한 레퍼토리를 읊겠지만,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석양의 무법자, 1966>를 보여줘 우리의 예상을 달리한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웨스턴 무비"와 다르게, 선과 악이 없는 주인공이 총알을 퍼붓는 "스파게티 웨스턴"처럼 이를 틀어줬다는 건 뭘까?
눈치 빠른 관객들이라면, 이번 <블랙 아담>의 방향성이 뭔지를 알아챘을거다!설정부터 "신"이라서, 흠집도 안 나는 "먼치킨"스러운 모습에다가 팡팡 터지는 액션은 비현실적이라 해도 시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외에도 5천년 전의 사람이다 보니 낯설기만 한 현대 물건들과 "반어법" 등. 여타 영화들에서도 볼법한 장면들을 보여줘 웃음과 함께 익숙하게 다가선다.
이만해도, 오락 영화로서의 본분을 다한다고 하나 작품에서 보여주는 그의 힘은 아무도 건들 수 없으니 시큰둥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등장은 반가울 따름이다!2. 주인공을 받쳐줄 조력자는 어디에?
결론부터 말하면,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는 "블랙 아담"과의 대결에 승패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보여주는 가지각색 능력들은 볼거리에 목마른 관객들의 눈을 충족시키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들의 설명이 없다는 거다!
그중 "닥터 페이트"가 그러한데, 극 중. 트라우마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후반부에 모든 감정을 터트리는 캐릭터로 설명이 전혀, 없음에도 "피어스 브로스넌"의 연기력으로 팬들의 인상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그렇기에 뒤 설명이 조금만 받쳐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생긴데,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모든 캐릭터들이 그러하다.
"닥터 페이트"는 이름부터 경쟁사의 인물이 연상되고, 몸이 커지는 "아톰 스매셔"도 "앤트맨"이 연상된다.
여기에 선과 악을 구분 짓는 데에 진심인 "호크맨"부터 "사이클론"은 또래 "아톰 스매셔"와의 커플을 이루니 단면적 이미지에만 그쳐 "트위너"에 위치한 "블랙 아담"의 비중은 줄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3. 이야기까지 바란 건 너무 욕심인가?
근데, 이야기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블랙 아담>을 단순하게 오락 영화로만 만들려는 건 아니라고 본다.
극 중. 배경이 되는 가상의 국가 "칸다크"는 특수한 자원때문에 "인터갱"이라는 군부에 의해 나라가 넘어간다. - 아프리카 어느 국가를 해도 어색하지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블랙 아담"을 하나의 구세주로 보는 "칸다크"의 시민들과 이를 저지하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모습은 "전 세계의 경찰"이 되려는 어느 국가의 모습을 겹치게 한다.마지막에 다다르면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는 장면까지 스크린 너머 사건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캐릭터들(aka. 발암캐)의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은 관객들의 화를 돋운다.
이런 이유에는 외부의 사실들을 이야기 자체로 녹여내지 못한 점이 큰데, 125분이나 되는 분량에도 소화하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아쉬울 따름이다.· tmi. 1 - 쿠키 영상 1개가 있는데, 그동안 "DC 코믹스"에서 교체설에 확정설 등. 맘 고생했던 캐릭터의 등장이라 마음 졸일 이유 없겠다!
· tmi. 2 - 당초 "R(성인)"로 설정되었으나 4번의 재편집을 거쳐 PG-13, 국내는 12세 이용가가 되었다!
· tmi. 3 - 2009년부터 "드웨인 존슨"은 "블랙 아담"에 대한 캐스팅되었다. (무려, 13년이나 준비했다고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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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웬디> 스페셜 예고편
‘피터팬’ 탄생 110주년 기념,
새로운 주인공, 새로운 시각의 All New ‘피터팬’!기찻길 옆,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는
내면에 차오르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매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나타나고
‘웬디’와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 ‘제임스’를 이끌고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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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 파이널 예고편
반드시 막아야 한다! ?전 세계를 구하기 위한 위대한 여정의시작!?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 파이널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