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4 15:25:07
[BIFF 데일리] 130년의 고독을 건너 울려 퍼지는 역사에 관한 물음
영화 〈다호메이〉 리뷰

다호메이 Dahomey
France/Benin/Senegal/2024/68min
*시놉시스
영화는 파리 케 브랑리 박물관이 보유했던 다호메이 왕국의 보물 26점을 본국으로 반환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베냉으로 송환된 보물은 방문자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박물관에 진열해야 할까, 아니면 본래 종교적 오브제로서의 기능을 살려 대중에게 돌려줘야 할까?

130년 동안 태어난 땅에서 단절되어 어둠 속에서 존재하던 무언가가 있다. 그는 내내 침묵을 강요당해 자기 의사를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견뎌야 했던 고독은 가혹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그는 다시 빛의 세계, 즉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의 고독은 낯섦과 현기증으로 바뀐다.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곳, 자신이 떠나올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진 곳이 야기하는 감정이다.
그는 다호메이 왕국 출신의 조각상이다. 현재는 아프리카의 베냉 공화국이 있는 자리다. 다호메이의 문화재 7천여 점은 프랑스에 식민 통치를 당하던 시절 바다를 건너 강탈당했고, 그중 26점이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다호메이〉의 영화적 성취는 인간이 아닌 이들 문화재에 목소리를 부여한 데서 나온다. 프랑스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상어 문장(紋章)을 한 반인반수 조각상의 모습을 한 다호메이의 왕은 이 귀환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까?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호메이 왕(조각상)의 목소리는 영화의 질감과 정서를 단번에, 그리고 근본적으로 주조한다. 그는 동시대 베냉‧프랑스 역사의 주인공이자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다호메이 조각상의 귀환은 단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저 제국주의자들에게서 빼앗긴 문화재를 돌려받았다는 단선적인 설명은 그의 낯섦과 현기증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감동적인 귀환이 마무리되고, 다호메이를 국가 차원에서 환영하는 대대적 행사가 영화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낯섦과 현기증은 본격화된다.
먼저 지금 프랑스에서 다호메이를 돌려받는다는 것의 의미다. 이야기의 주체는 다호메이 조각상이지만, 그를 운반하는 주체는 국가다. 베냉 공화국에서 다호메이 조각상은 순식간에 국가, 민족, 역사, 문화의 상징이 된다.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상징물로서 집단적 피식민 주체성을 주조하는 수단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낯섦과 현기증이 파생된다.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의 의미에 대한 토론회에서는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폭발하듯 분출한다. 누군가는 현 대통령의 조상이 프랑스 편에 섰던 자였다는 점을 들어 위정자의 역사 세탁을 고발한다. 누군가는 수천 점의 문화재 중 26점만 반환된 것에 강한 불만을 표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번 반환이 프랑스의 이미지 정치의 일환일 뿐, 베냉이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제국주의 역학의 문제를 짚는다. 돌려받은 문화재를 어떻게 교육하고 관리할 것인지도 문제다. 다호메이가 국가적 상징이라면, 도시에 사는 사람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접근성 격차는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이들 문화재는 각각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번 반환을 출발점 삼아 변화를 모색하자는 희망파와 오만한 프랑스에 또 한 번 놀아났다는 비관파 등등 논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다호메이의 목소리는 동시대 베냉 공화국 시민들의 목소리와 공명하며 낯섦과 현기증의 세계로 진입한다. 130년 만의 귀환이라는 초현실적 판타지가 자아내는 낭만은 다층적 권력 관계가 어지러이 교차하는 현실의 한복판에서 희미해진다. 그 대신 첨예해진다.
다호메이 조각상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인가?” 이 말은 자신을 마냥 환영해주지 않는 후손들에 대한 한탄일까? 그렇지 않다. 또 다른 목소리를 들어보자. “나는 당신들을 통해 나를 선명하게 본다.” 다호메이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행이, 프랑스에서 베냉으로의 이동이 온전한 기쁨과 승리의 역사일 수만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130년을 고독 속에 있던 만큼, 자신이 의탁할 곳이 자신을 둘러싸고 폭발하는 담론의 바다에서 지난한 시간을 거쳐 마련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베냉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얼굴을 비추는 영화의 시선은 후손을 바라보는 다호메이 조각상의 시선이다. 그 다양한 삶에서 솟아나는 치열한 토론과 논쟁 끝에 이른 합의의 지점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명을 드러내는 시선 말이다. 하나의 목소리지만 여러 목소리가 혼재된 듯하고, 누군가 꿈과 환상으로부터 말을 걸어오는 듯한 조각상의 목소리도 같은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약탈과 반환, 지배와 피지배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역사를 이해하고 논쟁하는 법에 관한 〈다호메이〉의 물음은 베냉만의 것이 아니다. 다호메이의 목소리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모두에게 역사에 대한 복잡한 사유를 긴급하게 요청한다.
*영화 상영시간
10-03/10:0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10-04/10:3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10-09/20:30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https://www.biff.kr/kor/html/schedule/date.asp?day1=2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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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트이어의 이름만 남은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 (Lightyear , 2022)
"라이트이어의 이름만 남은 영화"
개봉일 : 2022.06.15.
등급 : 전체 관람가
장르 : 애니메이션, 액션, 모험
러닝타임 : 105분
감독 : 앤거스 맥클레인
출연 : 크리스 에반스, 타이카 와이티티, 피터 손
개인적인 평점 : 3.5/5
쿠키영상 : 3개
버즈 라이트이어 줄거리
우주 저 너머 운명을 건 미션, 무한한 모험이 시작된다!
미션 #1
나, 버즈 라이트이어.
인류 구원에 필요한 자원을 감지하고 현재 수많은 과학자들과 미지의 행성으로 향하고 있다.
이번 미션은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쓸 것이라 확신한다.
미션 #2
잘못된 신호였다.
이곳은 삭막하고 거대한 외계 생물만이 살고 있는 폐허의 땅이다.
나의 실수로 모두가 이곳에 고립되고 말았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놔야 한다.
미션 #3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탈출 미션을 위해 1년의 준비를 마쳤다.
어쩌다 한 팀이 된 정예 부대와 이 미션을 수행할 예정이다.
우주를 집어삼킬 ‘저그’와 대규모 로봇 군사의 위협이 계속되지만
나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긴 또 어디지? 시간 속에 갇힌 건가?
To Infinity and Beyond!
용감히 우주를 누비는 우주탐사 대원 버즈 라이트이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가 개봉했다. <토이스토리> 시리즈를 좋아하는 어른이로서, 그중에서도 버즈 라이트이어를 가장 좋아하는 덕후로서,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를 통해 마블에 처음 입문했던 덕후로서! 크리스 에반스가 연기하는 버즈 라이트이어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이스토리>에서 어느 정도 손때가 탄 앤디의 장난감들 사이에 새롭게 등장한 버즈 라이트이어는 멋진 최신식 장난감이었고, 오래된 카우보이 인형 우디의 가장 좋은 파트너였으며 책임감과 용기가 넘치는 친구였다. 앤디는 버즈를 좋아했고, 나 또한 버즈를 정말 좋아했다. 지금은 공간 확보를 위해 장난감을 많이 정리했지만, 1-2년 전까지만 해도 색색깔의 버즈 피규어가 책장 한층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을 만큼.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는 장난감 버즈 라이트이어의 이야기가 아닌 앤디가 본, 앤디가 좋아하는 캐릭터 버즈 라이트이어의 이야기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토이스토리> 속 버즈를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면 약간 실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의롭고 책임감 있는 버즈의 모습이 닮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토이스토리 시리즈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영화의 장점
<버즈 라이트이어>의 장점은 대략 버즈가 나온다는 것, 크리스 에반스가 버즈를 연기한다는 것, 시각적인 재미가 있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에 나오는 버즈를 통해 지구에 머물고 있는 장난감 버즈 라이트이어가 우주에선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저그와 버즈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항상 상상만 해오던 우주인 버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고 할까. <토이스토리 4> 이후로 왠지 다신 버즈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웠는데 그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 같다. 영화의 오프닝에 '앤디가 본 영화’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토이스토리 1>이 개봉한 당시(1995년)에 앤디가 본 영화라기엔 조금 괴리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버즈니까!…
두 번째 장점은 크리스 에반스가 버즈를 연기한다는 것이다.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력을 의심했던 건 아니지만 크리스가 얼마나 버즈와 어울릴지 궁금증 반, 의심 반…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처음으로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어간 영상을 보고 그를 믿게 되었고, 캐릭터를 계속 보다 보니 크리스와 버즈가 서로 너무 닮아있어서 슬쩍 웃기기도 했다. 더빙은 정말 기대 이상으로 자연스럽고 훌륭했고, 이전 작품들에선 크게 느끼지 못했던 크리스 에반스의 목소리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각적인 재미! 는 애니메이션의 명가로 불리는 픽사답게 볼거리가 많다. '우주’라는 무한한 소재를 100% 활용했다고 말하기엔 슬쩍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작화의 디테일은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우주복과 삭스의 질감, 우주복 유리에 비치는 얼굴,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와 빛나는 별. 첫 관람을 커다란 스크린(용아맥)에서 했기 때문에 더 극적으로 느낀 걸 지도 모르겠지만, 눈이 지루할 틈은 없었다. 참고로 <버즈 라이트이어>는 확장비로 상영되는 화면(1.43:1)의 비율이 꽤 높으니 기회가 된다면 꼭 아이맥스관에서, 아니면 밝고 커다란 화면에서 보시길 추천한다.
아, 그리고 이를 제외하고 <버즈 라이트이어>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새로운 버즈의 파트너 삭스가 나온다는 점이다. 가장 귀엽고 가장 유능한 신스틸러… 이 영화를 보고 삭스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대했던 픽사 영화와의 거리감
픽사와 디즈니가 합병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팬들이 픽사 영화가 예전 같지 않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팬들은 픽사의 대표작 <토이스토리>와 <업>, <코코>, <인사이드 아웃>과 같은 영화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며 픽사에 대해 실망을 하면서도, 또 픽사라는 이름에 다시 기대를 걸며 픽사의 신작을 기다려왔다. 그래도 작년에 공개되었던 <루카> 같은 경우엔 꽤 괜찮은 픽사 영화라는 평을 많이 봤는데, <버즈 라이트이어>는 평이 영 좋지 않다. 물론 <버즈 라이트이어>가 훌륭한 퀄리티의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 영화엔 우리가 '픽사’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없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게 보이지만 그 과정이 다소 답답하기도 하고 너무 노골적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전체 관람가라는 관람 등급을 감안해도 어딘가 아쉽다. 이 정도면 이제 이전의 픽사를 기대하기보단, 팬들이 스스로 '픽사’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이미지를 바꿔야 할 차례가 아닐까 싶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미지의 행성에서 찾아가는 적절한 무게의 책임감
영화의 주인공 버즈는 인류 구원에 필요한 자원을 찾기 위해 새로운 행성으로 향한다. 그는 유능한 탐사대원으로 뛰어난 능력과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있다. 항상 자신의 능력을 믿고 최선을 다하던 버즈는 임무를 완료하기 위해 확신을 갖고 비행을 감행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기고, 버즈를 포함한 탐사 대원과 동료들은 삭막해 보이는 행성에 고립된다. 버즈는 모든 것을 되돌려놓고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욕심과 책임감으로 시험 비행을 반복하고, 그의 동료들은 행성에 남아 새로운 삶을 꾸린다.
아무것도 없었던 삭막한 행성에 하나 둘, 건물과 기지가 만들어지고 동료들은 그곳에 적응하고 있지만 버즈는 여전히 나 혼자 짊어져야 할 과거의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버즈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탐사 대원이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단 한 번의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시험 비행을 반복한다.
6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임무를 완수하나 싶었는데, 저그의 등장으로 버즈의 계획은 또 한 번 틀어지고 만다. 방어벽 밖에서 함께 싸울 인력이라곤 앨리샤의 손녀인 이지와 훈련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모, 집행유예 중인 다비뿐이다. 어리바리한 신입의 실수 하나도 용납하지 않았던 깐깐한 버즈인데, 신입조차도 안 되는 팀원들과 함께하는 임무라니. 한숨이 푹푹 나온다.
버즈와 다르게 작전 경험도 없고, 전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지, 모, 다비는 얼렁뚱땅 어떻게든 버즈와 함께 발걸음을 맞춘다. 이들은 이마를 탁 짚게 만드는 실수를 하고, 일을 더 크게 벌리기도 하고, 타이밍을 잘 못 맞추는 부족한 팀원이지만 그 대신 버즈에게 작은 여유를 선물한다. 혼자서 임무를 완수하고, 모두를 구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시달리던 버즈는 팀원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선 직접 도움을 청하며 팀원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
우리는 이름값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특정 이름에 쌓인 이름값은 직접 쌓아온 명성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가족이 쌓은 명성일 수도 있다. <버즈 라이트이어>에는 두 개의 유명한 이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주인공 '라이트이어’와 '호손’이라는 이름(성)이다.
버즈는 라이트이어라는 이름에 유능한 탐사대원이라는 명성을 쌓았고, 앨리사는 호손이라는 이름에 훌륭한 사령관이라는 명성이 쌓았다. 버즈는 라이트이어 답게 실수 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싶어 하고, 이지는 호손 답게 멋지게 적들과 맞서고 싶어 한다. 두 사람은 실수 하나에도 크게 절망하며 이 이름을 쓸 자격이 없다는 듯 우주복에 붙은 이름표를 뗀다. 하지만 누구든 실수를 할 수 있다. 업계의 저명한 인사여도, 전설로 남은 인물이라 해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실수를 인정하고 흘려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채로 명예와 지나간 실수에만 집착하다 보면 자신을 깎아먹을 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실수 한번 한적 없는 완벽한 명예를 바라던 나이 든 버즈(저그)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처럼 말이다. 실험 비행을 성공한 시점에서 이지와 모, 다비를 만나지 못한 저그는 팀원과 함께 위기를 헤쳐나갈 기회도, 위로를 받을 기회도 없었기에 실수에만 집착하다 결국 이기적인 빌런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얼렁뚱땅 굴러가는 완벽하지 않은 팀이지만 버즈는 이 팀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새로운 행성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다. 실수를 만회하겠다며 무한한 우주를 붕붕 떠다니는 대신 마침내 땅에 발을 붙이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쿠키 영상을 보면 아마도 이 얼렁뚱땅 우주 탐험대의 뒷 이야기가 더 있는 듯한데, 후속편이 진짜 제작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만일 제작된다면 버즈에 대한 의리로 한 번쯤은 더 볼 것 같다. 버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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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지난 6일 개봉한 영화 <청설>이 기분 좋은 출발을 했습니다. <베놈: 라스트 댄스>를 밀어내고 누적 관객 수 23만 명을 돌파하며 주말 관객 수 1위에 등극하였습니다. 그러나 손익분기점이 약 120만 명이기에 앞으로의 추이가 중요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수능이 끝난 수험생들이 가볍게 보러 오기 좋은 영화인만큼 금주 성적도 기대되고 있습니다.
한편, <베놈: 라스트 댄스>가 주말 관객 수 16만 명, 누적 관객 수 150만 명으로 2위를, <아마존 활명수>가 주말 관객 수 7만 명, 누적 관객 수 52만 명으로 3위를 차지했습니다.
북미에서는 누적 수익 1억 달러를 돌파한 <베놈: 라스트 댄스>가 여전히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2위를 차지한 <The Best Christmas Pageant Ever>는 바바라 로빈슨의 1972년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장난꾸러기 여섯 형제가 교회에 몰래 들어갔다가 마을의 연례 크리스마스 연극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코미디 배우 피트 홈즈와 앤트맨 출연진 주디 그리어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아트하우스 영화의 명가 A24가 제작하고 휴 그랜트가 출연하는 스릴러 공포영화 <Heretic>이 3위에 올랐습니다. <Heretic>은 잘못된 문을 두드려 사악한 미스터 리드(휴 그랜트)와 마주하게 된 두 젊은 선교사들이 그와의 치명적인 생존 게임에 휘말리며 신앙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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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여성, 침묵을 끝내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이란의 평범한 한 가족을 내세워 신권 정치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가부장적 아버지 이만이 아내와 두 딸에게 휘두르는 억압과 폭력은 이란 사회의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를 상징한다. 이만은 이란 정부의 얼굴을, 그에 맞서거나 타협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각기 다른 이란 국민들의 양상을 대변한다.
이 가족은 이란 사회를 압축해놓은 작은 세계다. 그리고 동시에 신권 정치가 일상 깊숙이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까지 분명히 보여준다.
이만 – 가부장으로 상징되는 권력, 신권정치의 은유
초반의 이만은 양심과 권력 사이에서 흔들린다. 정부의 사형 명령 앞에서 주저하던 그의 손에 권력이 쥐어지자 또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승진과 함께 지급받은 총 한 자루가 사라진 일로 그는 가족을 의심하고, 딸과 아내를 강압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권력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극이 끝날 무렵 우리는 이만을 통해 이란 정부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그는 점점 자국민, 특히 여성과 청년을 폭력으로 억누르려는 국가 권력의 전형으로 변모한다.
사다프 - 억압받는 이란의 현실
이야기의 전환점은 레즈반의 친구 사다프가 시위에 휘말려 산탄총에 맞는 사건이다. 2022년 이란에서 일어난 마흐사 아미니 사망 사건과 그에 따른 히잡 시위를 떠올리게 한다. 국가는 진실을 은폐하고, 젊은 세대는 분노한다. TV 뉴스는 사건을 왜곡하지만, SNS 영상으로 시위의 실상을 목격한 레즈반과 사나는 각성한다.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진실을 기록하고, SNS를 통해 세상에 퍼뜨릴 수 있다. 정부가 아무리 은폐하려 해도 폭력은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고, 그것은 결국 사람들을 거리로 향하게 만든다.
나즈메 – 중재자 혹은 현실과 타협하는 자
어머니 나즈메는 사다프와 엮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딸들의 행동이 남편의 입지에 방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녀는 레즈반의 부탁에 따라 지인을 통해 사다프의 행방을 알아보려 한다. 그녀는 완전히 순응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이중적인 위치에 머물지만, 결말에 이르러 두 딸과 연대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보인다. 이러한 나즈메의 모습은 이란 사회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사나 - 침묵의 파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바로 동생 ‘사나’이다. 사다프의 일에 분노하고 행동했던 인물은 레즈반이었지만, 결국 변화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침묵의 사나였다. 염색을 하고 싶어 하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싶어 했던 사나.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억압 속에서도 자유를 향한 작은 불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늘 소극적으로만 보였던 사나는 마침내 총을 들고 아버지 앞에 선다. 침묵 속에 숨겨졌던 그 불씨는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폭발한다. 그 장면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란의 희망을 엿본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된다 - 변화는 침묵을 깨는 여성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여성, 삶, 자유(Zan, Zendegi, Azadi) - 여성의 연대
초반에는 가부장제에 순응하던 나즈메 역시, 후반부엔 딸들을 지키기 위해 남편에 맞선다. 나즈메, 레즈반, 사나가 함께 이만과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이 셋의 연대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이는 2022년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을 계기로 일어난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연대야말로 이란 사회 변화를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이란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조명한다. 억압과 침묵 속에서도 변화를 향한 희망과 침묵을 깨려는 용기가 영화 전반에 흐르며, 여러 인물을 통해 연대와 저항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란 사회의 이야기는 결코 우리와 동떨어진 것만은 아니다. 언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침묵할 것인가, 연대할 것인가?
*본 언론배급 시사회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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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형 좀비 영화, #살아있다 / 반도 후기
코로나 걱정으로 영화관을 가지 못했던 근 몇 달, 오랜만에 영화관을 방문했습니다. #살아있다 vod가 나오고 반도가 한참 상영관에 걸려 있는 요즘, 그래도 좀비 영화를 즐겨 보던 저로서 두 영화를 놓칠 수가 없었기에 먼저 #살아있다(이하 살아있다)를 집에서 보고 반도를 영화관에서 봤습니다.
부산행과 킹덤 등 ‘K-좀비’물이 몇 년 사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중 흥행세를 이어 살아있다와 반도까지 나와 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밀폐된 아파트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좀비와의 사투와 스릴을 예고편을 통해 느꼈던 살아있다와 부산행의 후속편이자 보다 넓어지는 세계관을 다루는 반도가 같은 해에 상영한다니 기대감은 키워갔습니다. 그 기대감이 제 가슴을 후벼 팔 거란 건 생각도 못 했지만요.
우리나라에서도 B급 장르라 불리는 좀비물이 흥행하고 있다는 건 무척 행복한 일입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흥행했던 영화는 깡패나 범죄와의 전쟁을 다루는 액션이나 감동을 일으키려는 신파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 외에도 흥행했던 영화들은 있지만 감독 타는 영화거나 어느 정도 흥행 공식에 맞춘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다와 반도는 그런 한국 영화시장에 색다른 활기를 불어 넣어줄 거라 기대했고요.
개인적으론 살아있다가 반도보다는 재미있었습니다. 초반부터 그 차이를 명확히 느낄 수 있는데, 살아있다는 초반 쉴 틈 없이 좀비가 나타나고 고립이 된 유아인의 고군분투와 감정 연기가 영화에 몰입감을 더해줍니다. 반면 반도는 초반부터 이 영화는 가족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었죠. 가족 간의 사랑을 다룬다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부산행에서도 공유와 딸의 부성애를 중심으로 풀어나가지만 보다 장르에 집중했기에 재미있었던 것입니다. 장르적 특성을 생각한다면 사랑, 부성애, 모성애 보다 좀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제겐 살아있다는 반도보다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가 된 거고요.
좀비 장르의 즐거움 포인트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주로 이런 포인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좀비에게 쫓기는 스릴감, 시원하게 좀비를 도륙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액션의 통쾌함과 같은 것이거나 혹은 좀비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등장인물들의 간절함, 좀비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드러나는 인간 본연의 모습 등 좀비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성에 대해서 볼 수도 있죠. 좀비 영화들은 크게 이 두 가지를 쟁점으로 다루곤 합니다. 살아있다는 좀비 장르에 좀 더 충실한 반면 반도는 스케일만 커졌을 뿐 좀비보다 가족의 사랑에 더 중점을 두면서 부산행에 미치지 못하는 영화가 되었을 뿐이죠.
영화의 장르에 좀 더 충실했을 때 영화에 몰입할 수 있고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가 더욱 와닿기 마련입니다. 살아있다가 공간이 분리된 아파트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부재와 SNS에서 맺는 관계를 보여주면서 결국 생존은 방법은 달라도 소통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지만, 떨어지는 개연성과 PPL이 판을 치는 영화에 몰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도 역시 역경을 이겨내는 방법이 사랑이며, 사랑이 위대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지나친 강조와 끝없이 이어지는 신파(특히 슬로 모션), 역시나 떨어지는 개연성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 상황을 뚫고 개봉한 영화 치고 둘 다 나름 선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살아있다는 거의 200만 명을 들였고 반도는 현재 3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들였으니까요. 선방과는 별개로 영화의 완성도는 참 아쉽습니다. 좀비라는 장르가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키워가고 있기에 최근에 나오는 좀비 영화들의 완성도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더욱더 많은 팬을 확보하고 보다 넓은 장르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다음에도 좀비 영화가 나올 수 있다면 장르에 충실하면서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부산행과 킹덤 등을 통해 충분히 가능성을 봤으니 다음 차례에 나올 좀비 영화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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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해라, 너희 둘은 반드시 단 하나다
서브스턴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왕년의 스타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이다. 카메라 앞의 엘라지베스. 체조복을 입고 율동 같은 운동을 하고 있다. “Pump it up!”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덧붙이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던 대배우다. 압도적인 연기력과 고혹적인 비주얼로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엘리자베스. 지금은 인기가 한 풀 꺾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날. 엘리자베스의 유일한 일거리였던 에어로빅 쇼 진행자 역할에서 해고당한다. 해고만 당하면 모르겠는데 쇼의 총책임자 하비(데니스 퀘이드)의 험담마저 듣게 된다. “아카데미고 나발이고. 걔(엘리자베스)는 이제 끝났다고.” 심지어 면전에다가도 “50 넘은 여자는 끝났다”라는 막말까지 듣는다. 외로운 엘리자베스. 분명 세상 사람들이 날더러 아름답다고 해줬는데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겉돌던 엘리자베스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정밀검사를 받는 엘리자베스. 큰 문제는 없었지만 외상보다 그녀 마음에 있는 상처가 엘리자베스에게 더 치명적이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보던 남자 간호사.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 ‘서브스턴스’라는 것을 밀어 넣는다. ‘잘 되길 바랍니다’라는 쪽지와 함께 달려있던 usb. 엘리자베스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USB에 있는 영상을 재생해 본다. USB에 있는 영상은 허무맹랑했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내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뭔 소리야? USB를 버리는 엘리자베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선 왕년에 잘 나가던 내 모습이 반복재생되고 있다. 새로운 시작이 필요해. 다시 USB를 주섬주섬 꺼내는 엘리자베스. 서브스턴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육체의 이미지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육체의 이미지다. 육체를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는 영화의 주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와 추, 두 가치는 과연 별개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경계를 구분하는 행위의 타당성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 스파클이 체조를 하는 영상은 단순한 신체적 움직임을 넘어선다. "아름다운 육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각적으로 던지기 위함이다. 이는 반대편에 서 있는 수 역시 체조 같은 안무를 통해서 스파클과 대비되는 것을 택한다. 이들이 비슷한 의상과 동작을 반복하며 대조를 이루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두 인물의 신체를 클로즈업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둘 중 무엇이 더 아름다운가?*를 판단하게 만든다. 이러한 판단은 영화 후반부와 결말로 이어지며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한다.
또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몸을 보여주는 영화기도 하다. 특히 스파클과 수의 관계를 보여주는 특정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서 두 인물을 카메라가 어떻게 비추는지가 영화의 후반부를 위해 중요하다. 카메라는 어떤 장소를 탐구하듯 인물들을 다룬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를 보여주듯 여기저기 자세하게 찍는다. 이 호기심을 형상화한 카메라 워킹이 두 인물의 처지를 동격으로 만들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수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스파클이 사실상 인간으로서 같은 처지에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나체의 인물들을 서서히 쌓아 올린 영화는 엔딩부에서 강력하게 폭발하며 그 모든 에너지를 분출한다. 두 인물이 나타내는 나이 듦과 젊음이 특정 인물의 핵심과도 닮아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할리우드
이 영화에서 역시 중요한 것은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 스파클이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순간이다. 글쓴이 같은 사람들에겐 인스타그램 릴스로만 볼 수 있는 별로 된 시그니처가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한다. 스파클이 단지 '이런 사람이었어'를 보여주려고만 묘사하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스파클은 아직도 엔터테이너 산업의 현역으로 뛰고 있고 하비와 함께 일하고 있다. 이 기본적인 설정을 중심으로 영화의 플롯이 정확히 할리우드의 룰 따라 움직인다. 이 장면들이 익숙하기도 하지만 두 인물 간의 처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켜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부각하기도 한다. 두 인물의 엇갈린 희비가 '원래 연예계란 그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좋은 것만 보는 연예계'와 '그를 뒷받침하는 할리우드의 룰'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수많은 스캔들이 할리우드를 오고 간다. 그 스캔들을 따라 수많은 팬들이 스타를 공격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를 생각해 볼 필요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면을 보고 스타를 지지하는 걸까? 엔터테이닝 산업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깊은 이해를 방해하는, 그러니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아닐까? 예쁜 것과 잘생긴 것 말고 나머지를 고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게 할리우드 아닐까? 하는 질문을 영화가 던진다.
실제로 이 질문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역할이 흥미로웠다. 글쓴이는 이 영화를 보면서 미의 기준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을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에서 시점쇼트가 등장하는 장면이 이야기 상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주제로서나 이야기 전개상으로나 영화 안에서 밑줄 쫙 그 여질 때마다 영화 안의 판단을 유발하는 장면에 시점쇼트가 등장한다. 마치 '이 건 어떤데?'라고 관객에게 묻는 것처럼. 이 관객을 판단 대상으로 끌고 들어오는 연출은 엘리자베스와 수가 고르는 모든 선택을 인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와 관련 있다. 엘리자베스와 수 역시 이 할리우드 시스템의 일부분으로서 그 룰을 철저하게 따른다. 이 선택이 영화에서 폭발하는 연기력, 또 야자나무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힙한 이미지와 함께 인물들을 틀 안에 가두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와 수가 별개의 인격처럼 느껴진다는 설정은 영화 안에서 공-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둘이 기억을 100% 공유한다고 생각해 본다. 이미 이 영화와 모순된다. 왜? 이 영화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영화니까. 어떤 것을 배격하고자 하는 태도와 이어지지 않는다. 또 이 영화에 존재하는 수많은 객체들과의 연결성과도 맞닿아있는 부분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똑 떼고 두 사람만 이어진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수와 엘리자베스로 국한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후반부로 대표되는 한 인물과 그 나머지 사람들은 사실상 동격으로 묘사됐다. 애초부터 별개로 설정했기 때문에 비유가 엄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면에서는 이 할리우드를 비판한다는 아이디어가 좀 얄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약물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라는 현실적인 문제는 아예 차치하기로 한다. 중요한 건 이 약물의 존재로 인해 나타나는 인물들의 행동이다. 엔딩으로 전력질주하는 영화의 에너지에 후반부의 전개가 보는 데 있어 큰 무리가 아니다. 연출의 통일성으로도 잘 살렸고, 논리적으로 어그러지는 연출도 아니며 감정선을 잘 탔다. 그런데 인물들이 1차원적이다. 특히 수의 내면이 그랬다. 나이가 엘리자베스에 비해 어려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엘리자베스에게 몇 장치를 부여한 것 치고 수는 빈약하다. 또 어떤 장면들은 여성의 성상품화를 목표로 짠 장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폭력을 고발하면서 오히려 인물을 폭력적으로 대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영화 밖의 세계를 비판하고, 내적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쌓아 올린 이미지를 폭발시키는 영화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자기혐오다. 이 영화는 자기혐오의 근원을 질문해 ‘당신은 당신과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나요?’라고 묻는 영화다. 이 영화가 이 질문을 보여주는 방식은 역시 연출력 덕이다. 영화 템포가 초반부부터 폭주해서 사운드와 카메라 숏으로 자극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템포를 늦출 때는 늦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어떻게 보면 이질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두 장면이 등장한다. 첫 장면은 초반부에 나온다. 이제 역사의 뒤안길이 된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바라는 것은 다시 거대한 명예를 되찾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런 줄 알았다. 이 영화의 사실상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 장면이 후반부로 돌아와서 극 중에서 가장 관객들의 마음을 깊게 찌른다. 동시에 이 인물과 장면들은 영화가 배태하고 있는 거대한 질문과도 이어진다. 과연 우리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 어디에 화려하게 쿵쿵쿵거리며 잔인한 장면만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 개인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마무리를 담당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감독의 연출도 훌륭했지만 이것을 뒷받침하는 데미 무어와 마가렛 퀄리의 연기가 압도적이었다. 마가렛 퀄리가 수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아노라>에서의 미키 매디슨이 슬쩍 겹쳐지기도 했다. 왜? 영화 후반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기가 서서히 등장한다. 납작한 캐릭터의 수를 마가렛 퀄리의 개인기가 살렸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마가렛 퀄리보다 더 강력한 존재감을 펼치는 건 역시 데미 무어다. 데미 무어의 연기는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데미 무어의 모습 그 자체다. 또 조디 포스터 같은 무어의 또래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와는 색달랐다. 특히 혼란스러워하는 연기가 압도적인데,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 다가왔던 관객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연기를 감독과 폭넓은 논의로 구현한 데미 무어의 역량은 충격적이다. 글쓴이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양자경이 키 호이 콴과 <화양연화>를 오마주 하던 장면이 생각났다(물론 데미 무어의 본작에서의 연기와 양자경의 연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간단한 상황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복잡하고 어두운 내면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구현했다. 아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너희 둘은 반드시 단 하나다
이 영화에 대한 글쓴이의 총평은 ‘나는 과연 어떤가’라는 반문이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사람을 볼 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같은 사람이 비단 나만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나도 마음 한 구석에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아름답다에는 정의가 없다는 것이다. 100만큼 예쁜 사람. 1000만큼 예쁜 사람. 30만큼 예쁜 사람이라고 수치화를 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장원영 씨가 예쁜 건 장원영처럼 예쁜 거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내가 이 기준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는 예쁘고 누구는 안 예쁘고 선을 그으며 타자화를 하는 순간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고 문득 들었다. 이 비극을 돈으로 환산시킨 산업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 영화 산업의 일부일지도 모르고. 이런 씁쓸한 성찰을 이면에 깔고 하드고어와 코미디 사이에서 내내 광폭하게 질주해 우리 모두가 엘리자베스와 수가 되게끔 만드는 충분한 수작이라고 생각하는 <서브스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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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이와 사랑에 빠지고, 점차 무뎌지고, 또 다시 낯선 이가 되어가는 쌉사름한 인연(因緣)
소개
런던의 도심 한복판, 부고기자이지만, 소설가가 꿈인 ‘댄’(주드로)은 출근길에 눈이 마주친 뉴욕 출신 스트립댄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삶을 소재로 글을 써서 드디어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 ‘댄’은 책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앨리스’와는 또 다른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안나’ 역시 ‘댄’에게 빠져들었지만 그에게 연인이 있음을 알게 되고, ‘댄’의 장난으로 우연히 만난 마초적인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웬)와 결혼한다. 하지만 ‘댄’의 끊임없는 구애를 끊지 못한 ‘안나’는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이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앨리스’와 ‘래리’는 상처를 받게 되는데…
모든 인연은 우연이라 생각되기 쉽지만, 사실 필연일 것이다.
앨리스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은 영국과 미국의 차도가 반대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우측통행이라는 미국과는 반대되는 규율이 있기 때문에, 댄과 앨리스는 만났다. 영국에서 너드 같은 안경을 쓴 부고 기자 댄과 붉게 물들인 커트 머리의 미국인 스트립댄서 앨리스, 너무도 다른 사람이기에 충돌하여 만나게 된 것이다.
‘클로저’에서 4인의 관계는 엉키고 설킨다. 모두 한없이 이기적이다.
이방인을 마주친 첫 순간을 기록하는 안나. 그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섬세한 인물이다. 전형적인 성숙한 어른 여자로 보이지만, 사실 전형적인 회피형이다.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크게 말을 얹지는 않다가 저지르고 사과한다.
래리는 넷 중 가장 평범하다.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에, 마초적인 남성이다. 자신은 다른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도, 다른 남자와 만나는 부인은 용서할 수 없는 찌질한 남자. 순간의 감정을 누르지 못한다. 특히 남성성에 관해 예민하다. 댄과의 잠자리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누가 더 좋았냐고 취조한다. 안나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자, 분노에 휩싸여 ‘slag’라 칭한다. 댄을 처참하게 만들기 위해 복수의 방법으로 스트립 클럽에서 마주친 앨리스와, 그리고 이혼을 청하러 온 안나와 잠자리를 갖는다. 그것이 래리가 댄에게 느낀 가장 모욕적인 감정이고, 참을 수가 없던 것이기에. 또한, 댄 역시 그럴 줄 알기에.
댄은 섬세하고 다정하다. 작가를 꿈꿔왔고, 소설가가 된 만큼 감각에 예민하다. 영화 초반부, 담배를 끊었다던 댄은 앨리스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헤어진 후에도 담배를 끊지 못한다. 정작 흡연자던 앨리스는 끊었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댄은 끌림에 쉽게 매혹되기도,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있기도 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리는 면이 있다. ‘자신과 안나’의 관계는 ‘래리와 안나’의 관계와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같았다. 안나가 한 번 자주면 이혼해 주겠다는 래리의 부탁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너진다. 래리와 잤다는 말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은 앨리스에도 세상이 무너지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앨리스의 뺨을 친다. 섬세하고 다정하던 것이 매력이던 댄은 결국 래리와 다를 바 없었다.
<클로저>는 <졸업>(1967, 마이클 니콜스)으로 아메리칸 뉴웨이브에 한 획을 그은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이다. 마이크 니콜스는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녀가 식장에서 도망쳐 버스에 탄 것이 엔딩인 ‘졸업’에서조차 주연 배우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결국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거라는 것을 암시한다. 비관적이다. 우리가 클로저를 보며 마음 어디 한 편이 불편한 것은 너무나도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와 내 친구와 나의 연인,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클로저>에서는 ‘앨리스’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추구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평생 서로를 모른다. ‘클로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평생 서로에게 낯선 사람일 것이다. 온전히 나를 이해해 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조차도 모르는데 그 누가 알 수 있겠나. 하지만 점점 아는 체를 하게 된다. 인연을 맺고 긴 시간을 함께하고, 대화를 나누면 그 사람을 안다고 착각한다.
익숙함에 속지 않는 것.
미련이 남지 않도록 감정에, 그리고 현재 관계에 충실하는 것.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앨리스에겐 이 3가지가 있다. 댄이 간과한 점은 자신이 쓴 소설처럼 철없고 자유분방하고 그저 어리다고 생각한 것. 자신이 그려낸 ‘앨리스’인 줄로만 알았던 그는 ‘제인’을 모른다. 스트립 클럽, 래리는 자신을 제인으로 칭하는 앨리스에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격분하지만, 사실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입국 심사장에서 드러난 앨리스의 여권을 통해 알 수 있다.
앨리스의 진짜 이름은 ‘존스 제인 레이첼 ’이다.
영화 초반부, 앨리스는 댄과 함께 공동묘지에서 ‘타인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묘비를 본다. 엔딩, 댄은 앨리스와 처음 갔던 세 명의 아이를 구하고 죽었다는 묘비를 발견한다.
‘앨리스 에이리스 – 벽돌공의 딸’ '불속에 뛰어들어 아이 셋을 구하고 숨지다'
앨리스는 불같이 거침없이 관계를 향해 달려들었고, 끝이라고 생각된 순간에는 깔끔히 놓았다. ‘순수한 사랑’ 말이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어른스러운 사람은 스트리퍼에 어리다는 취급을 받던 ‘앨리스’이다. 앨리스는 성숙한 체하는 세 명의 아이 댄, 안나, 래리를 구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간 제인(나탈리 포트만)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낯설고 매력적이다. 완벽한 Stranger로. 묘비명은 앨리스 캐릭터를 투영한 함축된 글인 것이다.
"where?"
사랑은 형체가 없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느낄 수 있다.
어느 순간엔가 사랑이 어디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결국 이별이 다가오는 것이다.
교통사고처럼 예기치 못하게 만났으니, 헤어짐 역시 그렇지 않을 이유 없다.
댄은 앨리스에게 눈을 떼지 못했던, 낯설기만 하던 첫 순간을,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주던 두 눈을
다른 낯선 이를 만나더라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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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힘드시다구요? 나보다 더할까ㅠㅠ[영화리뷰/결말포함]
#매즈미켈슨#조난영화#영화추천
이 영화는 조난 영화이며 '매즈 미켈슨'의 주연의 영화입니다. 전성기를 맞은 중년 배우 '매즈 미켈슨'의 내면 연기가 100만 점인 영화입니다
이 분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시청하시기 바랍니다구독?부탁드려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영화'아틱'
네이버별점 8.91#무비워크#영화추천#영화#재미있는영화#영화리뷰#최신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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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7] 정말 우리 엄마 맞아? 엄마와 딸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 런
Rabbitgumi 입니다.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 런을 보고 왔습니다.
배우 사라폴슨이 주연을 맡은 스릴러에요.
영화 서치를 연출했던 아니쉬 차칸티 감독이 연출한 두 번째 영화입니다.
굉장히 스릴있고 재미있는 영화에요.
집이라는 공간과 장애인으로 가지는 제약을 잘 활용하고 있죠.
엄마와 독립직전 딸과의 관계를 풀어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세요! ^^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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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미래일기> 공식 예고편
《미래 일기》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담긴 러브 다이어리다.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두 사람에게 건네진 다이어리. 드라마처럼 짜여진 이벤트지만, 그 안의 대사는 두 사람의 몫이다. 다이어리에 적힌 대로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며 점점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두 사람. 정해진 미래가 있는데도, 둘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20년 전 방영된 전설의 연애 리얼리티 시리즈가 다시 돌아온다. MC: 다이고 / 스튜디오 패널: 사토 타이키(EXILE/EXILE TRIBE의 FANTASTICS 멤버), 사야(LALANDE), 스미 레이나, 나쓰나 테마송: SEKAI NO OWARI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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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위트홈 시즌3> 공식 티저 예고편
괴물화의 끝이자 신인류의 시작을 비로소 맞이하게 된 세상, 괴물과 인간의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이들의 더 처절하고 절박해진 사투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 시즌3 7월 19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