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0-05 17:45:58
[BIFF 데일리] 돌고 돌아 마음이 전해지면
영화 <아이미타가이> 리뷰
DIRECTOR. 쿠사노 쇼고
CAST. 쿠로키 하루, 나카무라 아오이, 후지마 사와코 등
PROGRAM NOTE.
인생의 어떤 갈림길은 찰나의 순간 결정된다. 몇 초 사이로 생사가 갈리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의 어떤 행동이 내 삶의 현재를 바꾸기도 한다. <아이미타가이>는 그런 인연의 연쇄 작용에 주목하는 영화다. 아주사와 카나미는 여고 시절부터 단짝인 친구. 카나미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은 뒤에도 아주사는 카나미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외로움을 달랜다. 카나미의 부모는 아주사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죽은 딸이 마음을 쏟았던 고아원을 찾아 딸의 선행에 감동받는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지만 그 흔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작은 선행들이 모여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든다. 『중쇄를 찍자』(2016), <오키쿠와 세계>(2023) 등에 출연했던 쿠로키 하루가 주인공 아주사의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2021)을 연출했던 구사노 쇼고의 정교한 화법이 매력적인 영화다. (남동철)

이 영화의 각본은 <칠석의 여름>으로 부산과도 인연이 있는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사사베 키요시 감독이 썼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나, 생전 인연도 없던 쿠사노 쇼고 감독이 그 각본을 세상에 데려온다. 그 작품이 바로 이 <아이미타가이>다.
얼핏 기억하기도 어려운 이름이지만, 일본어를 직역하는 대신 음차로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이미타가이’라는, 현대 일본에서도 잘 쓰지 않아 거의 사어가 되었다는 이 말은, 직독직해 혹은 사전적 설명으로 가 닿기보다 이야기로 풀어질 때 훨씬 더 쉽게 이해되는 말이다.
영화는 쿠로키 하루가 연기하는 ‘아즈사’라는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있다고 편의상 설명할 수 있지만, 어느 한 사람에게만 중점을 둔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친구 ‘카나미’가 사진 촬영 차 갔던 해외 출장에서 사망한 후 괴로워하는 아즈사, 아즈사의 남자친구 스미토, 카나미의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점점이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을 비추어 낸다. 등장인물이 많지만, 친절하게 여러 차례 겹치는 지점들을 보여 주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모세혈관처럼 사방으로 가늘게 퍼져 있는 이야기들이 드러날 때마다, 영화가 전하고 싶었던 온기가 느껴진다. 영화는 카나미의 죽음과 아즈사의 직업 안에서 새롭게 이어지고 또 확장되는 관계를 보이고, 그 안에서 관계의 면면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 준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 몰랐던 사실의 발견, 오래 간직했던 소중한 사실… 같은 것들이 우연처럼 보이는 인연을 드러낸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말할 수 없는 이런 우연과 인연은, 관점에 따라 무리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연의 형태를 질고 질긴 끈 모양보다 민들레 홀씨 같은 모양으로 이해한다면 납득이 된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씩 만들어내는 언행이 있으니까. 친구에게 가볍게 한 말, 매일 혼자 했던 일, 오랫동안 소중하게 보관한 성취, 가벼운 선행… 수많은 언행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다 멀리까지 전해지고 가 닿는다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믿고 싶어진다.

때로는 내가 뻗고 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손 끝이 우연히 상대에게 닿아 온기가 전해질 때도 있고, 있는 힘껏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조차 뒤늦게 어딘가에 닿아 그 응답이 훗날 멀리서 공명해올 수도 있다. 못 전한 마음이라도 언젠가 어디에선가 이어질 수 있다. 각본을 쓰고 사망한 사사베 키요시 감독의 마음이, 아는 사이도 아니었던 쿠사노 쇼고 감독의 마음으로 이어져, 지금 여기 당도한 것처럼.
이 마음을 받아 들고 나온 후, 어쩐지 세상에 조금 더 열려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등을 든든하게 받쳐 주며 깊은 신뢰를 주고받고 싶고,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다정을 건네고 싶다. 그런 관계야말로 생의 선물 같다.
그런 관계의 빈자리는 절대 채워질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사람의 흔적은 남고, 또 어딘가에서 새로운 인연의 홀씨로 피어난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꺾인 꿈도, 갑작스러운 비보도, 우연한 만남도. 그 모든 걸 모아 이 영화가 든든하게 등을 떠밀어 주는 걸 느끼며, 이제 앞으로 갈 시간이다.
10/03 20:00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상영코드 014)
10/04 09:00 CGV센텀시티 5관 (상영코드 089)
10/06 09: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9관 (상영코드 255)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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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더 노비스>, 시사회 리뷰
몇 달 전 지인에게, 나는 완벽함을 추구당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 적 있었다. 며칠 뒤 생각해보니 나한테 완벽함을 요구하거나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완벽하게 일을 해냈을 때 주변에서 받았던 긍정적인 시선과 칭찬만 있었지 완벽을 몰아붙인 건 나 자신이었다. 오늘은 강박을 다룬 영화 <더 노비스>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novice [ |nɑːvɪs ] 1. 초보자 2. 수련 수사 3. 초보 경주마
대학 신입생 ‘알렉스'는 교내 조정부에 가입한 수 동급생 ‘제이미'에게 경쟁심을 느낀다. 늘 최고를 갈망하는 ‘알렉스’는 팀 1군에 들기 위해 훈련을 거듭하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기 시작하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신입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정팀 선생님은 신입생들에게 차례로 조정팀에 들어온 이유를 묻는다. 알렉스의 차례가 되자 선생님은 알렉스에게도 똑같이 묻는다. 알렉스가 대답하려는 찰나, 누군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레 알렉스의 답변은 증발한다. 조정팀 선생님도, 관객도, 알렉스가 조정팀에 들어온 이유를 모른 채 영화는 계속 이야기를 풀어간다. 알렉스가 조정팀 1군에 들기 위해 광기에 가까운 노력을 하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기에, 알렉스가 조정팀에 들어온 명확한 이유는 더더욱 중요하고 궁금한 요소가 된다. 사실상 영화는 '알렉스의 조정팀 가입 이유 찾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 이유를 찾으면 끝이 나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가장 주된 내용이자 영화를 이끌어가는 핵심이다.
(아래 문단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렉스는 매번 목표를 수정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듯 자신의 노트에 목표를 꾹꾹 눌러쓰고 누구보다 일찍 자체적으로 훈련을 하고, 계절학기에도 굳이 수업을 들으며 훈련실을 방문해 훈련을 지속한다. 꾸준히 목표를 새기고, 선생님이 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훈련을 하는 알렉스는 일종의 '올바른' 훈련생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알렉스보다는 타고난듯한 제이미는 선생님이 시키는 훈련을 열심히 하며 선후배를 포섭하여 1군으로 가는 일종의 정치질을 더하여 목표를 달성한다. 결론적으로, 알렉스가 1군 최고가 되기 위해 하는 노력은 모두 ‘올바르다'라는 점에서도 알렉스의 목표는 그저 ‘1등'이 아닌 본인의 완벽함이었음을 증명한다.
영화에서는 알렉스가 조정팀에 들어온 이유는 설명해내지만 그 강박의 원천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알렉스의 강박에 대한 구체적인 서사가 없는 탓에 강박은 다소 정신병의 일부처럼 다뤄지는 듯 보인다. 강박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감독이 굳이 알렉스의 강박에 대해 설명하려들지 않은 것엔 이유가 있다는 의견이다. '누구나 가진 강박이기에, 지나친 강박은 삶을 헤친다.'이것이야말로 감독이 관객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로런 헤더웨이(Lauren Hadaway)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위플래쉬>(2014), <헤이트풀8>(2015),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2021)의 음향 파트를 담당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감독이다. 이러한 경력들 덕분인지,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져주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풀어내며 구조적 완결성을 지닌다. 더불어,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 연기 천재로 이름을 알렸던 이사벨 퍼만이 주인공 알렉스를 연기한다. 놀라울 정도로 예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 새로운 역할에 몰입할 수 있지만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 보여줬던 눈빛처럼 <더 노비스>의 알렉스는 여전히 강렬했다. 또한 이사벨 퍼만은 이 영화로 작년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앞으로의 연기 행보가 기대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에서부터 인기몰이를 시작한 <더 노비스>는 오는 5월 25일 개봉에 더불어 6월 5일 무주산골영화제에서도 만날 수 있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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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메라>의 아무도 없음과 누구도 아님
얼핏 <행복한 라짜로>에 비해 계급성에 대한 고찰은 덜 두드러지고 로맨스 / 로드 무비의 모험적 속성으로 약간의 노선 변경을 감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서늘하고 직관적인 대비는 여전히 빛난다. 예를 들면 감독의 언니 알바 로르바케르가 연기한 부자 수집가 스파르타코의 대사 같은 것들.
더러운 옷을 입고 도굴꾼인 척 하지만 당신 본질은 그게 아냐. 저들을 봐. 자기가 예술품을 밀매하는 약탈꾼인 줄 알지만 사실 거대한 기계의 부속일 뿐이야. 우리 몸종들이지. 언젠가 완전히 녹슬어 기억 속에서 사라질 거야.
도굴로 먹고 사는 가난한 시골의 톰바롤리 친구들은 우연찮게 찾은 ‘진짜 보물’로 부자들의 유람선에 오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스파르타코의 저주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피로의 삼촌이 괭이를 빌려갈 때 “일만 하다 돌아버렸다”며 노인을 조롱하고 박대한 바 있다. 이 장면은 도시로부터 침투한 자본과 공장의 오염에 밀려나고 자리를 뺏긴 채, 전통적인 육체노동을 경시하며 한 탕을 노리는 80년대 이탈리아 지방 청년들의 세태를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전 세대 노인들에 비해 훨씬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됐지만, 바라던 대로 졸부가 되는 데엔 결론적으로 실패하는 젊은이들(애초에 그것은 아르투가 찾아준 기회일 뿐이었으니). 결국 노인의 운명이나 자신의 운명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단 걸 검은 머리의 에트루리아 후손들은 모르고, 오만한 금발의 스파르타코는 알았다.
에트루리아의 동물, 풍요, 번성의 여신 키벨레 상으로 인해 톰바롤리도, 스파르타코도 일확천금의 기회를 쥐지만 돌연 환멸을 느낀 아르투는 “인간이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야“라며 상의 얼굴 부분을 바다로 던져버리고 만다. 과거에 얽매인 그는 잃어버린 연인 베니아미나와 곧 잃어버릴 키벨레의 얼굴을 동일시한지 이미 오래다. 한순간에 절망한 피로와 친구들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아우성이지만 스파르타코만은 단말마처럼 숨을 들이킨 후 가라앉는 상을 바라보며 오히려 살며시 웃고 있다. 이천 년 넘게 땅 속에 있었고 이제 일부를 영영 유실한 여신상은 영원히 얼굴 없는 아무개, ‘누구도’ 될 수 있고 ‘아무도’ 아닌 상에 머무를 수 있다. 그 편이 ‘더 낫다’는 건 아르투에겐 고대의 예술을 향한 본능적 감각이었고, 스파르타코에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업가로서의 이성적 판단일 테다.
이쪽과 저쪽. 지상과 지하. 아르투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꿈속 저승과 그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이승. 배 위의 부자를 위해 일하는 큐레이터들과 산 아래 동굴의 도굴꾼들. 아르투가 수맥을 찾을 때 쓰는 Y자의 나뭇가지와, 이탈리아가 “사람이 머리부터 거꾸로 꽂힌 것 같다”고 웃어댄 나무의 수형(Y자를 반대로 꽂아둔 듯한).
플로라 부인은 폐쇄된 기차역에서 “이쪽은 시골, 저쪽은 도시”라고 반대 방향을 가리켰지만, 실상 불행과 빈곤은 언제라도 구분 없이 공평하게 찾아들며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다. <행복한 라짜로>의 귀족 부인이 과거에 가둬둔 자기 소유의 소작농들을 바라보며 “나는 저들을 착취하고 저들은 가장 약한 소년(라짜로)을 착취한다”고 말했듯이. 반세기 후 그의 아들 탄크레디 역시 귀족 집안의 부와 명예를 이어받지 못하고 문서 몇 장에 집안 땅을 모두 뺏겨 도시 빈민이 되었듯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전했으며 기원전부터 이어진 에트루리아 문명도 로마에 흡수됐다. 파비아나가 장난스레 부르짖은 “통일 이탈리아”를 구축하기 위해 지역 특색의 문화와 언어는 통제되고 소실되며 가치를 잃는다. 과거의 영광은 빛바래고 외부 자본에 의해 싸구려 ’평민의 일상품‘이라며 멸시받는다. 아르투 일생의 마지막 도굴에서 먼저 사금을 찾아낸 젊은이가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아르투와 같은 이방인(아마도 동유럽의 언어를 쓰는)이었던 것처럼, 주인 아닌 자들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더 빨리 알아보고 정작 주인된 이탈리아 인들은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해 외부의 도움을 빌려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이 에트루리아인들이 남긴 무덤 위에서 뛰놀며 자랐다는 알리체 로르와커가 애수를 품고 조망한 이야기의 첫 번째 골자다.
여기저기 평을 읽다가 이탈리아라는 인물 자체를 그냥 싫어하거나, (그렇게 말하긴 아무래도 너무 여혐적이었는지) 아르투가 이탈리아와 호감을 나누는 관계가 되는 게 거부감이 든다는 반응을 꽤 많이 보았다. 나도 첫 관람 때는 이입하기 힘든 인물이란 인상 정도는 받았지만,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싫어했단 점에서 오히려 갑자기 흥미가 생기고 복잡한 인물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아르투가 가진 매력의 대부분은 삶에 전혀 집착하지 않는 듯한, 덤덤하고 버석버석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이 범상치 않은 초연함에 자꾸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삶의 미련과 생동감을 불어넣고야 마는 이탈리아를 대번에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베니아미아란 과거의 사랑이 너무 선명히 버티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만큼 강력한 순정을 가진 아르투에게도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접근하는 (아이 둘 둔) 여자라는 점, 푼수 같기도 당돌하기도 한 성격과 눈치 보지 않는 제멋대로인 면까지. 누군가는 이탈리아를 무척 피하고 싶은 여자, 대책 없이 해맑은 사람으로 기억할 게 뻔하다.
하지만 이 실패한 사랑의 시작을 이탈리아의 시점에서 다시 쓴다면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초목이 우거진 걸 빼곤 좋아할 수 없었던 고향을 떠나, 아버지가 다를지도 모르는 두 아이를 낳고, 그다지 잘할 생각도 없는 노래를 배우는 체하며 딸을 잃고 정신 나간 늙은 여자의 집에 입성해 아이들을 숨겨 키우고, 결국 들켜서 쫓겨났지만 굴하지 않고 같은 마을의 버려진 역을 고치고 꾸며 제 살 곳을 마련하고 같은 처지의 여자들을 불러 모은다. 이 영화는 아르투의 입장에서 보면 방황하고 회피하며 끝내 치유받지 못하는 여정에 관한 비극적 로드무비지만, 이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난 고향으로부터 유리된/쫓겨난 이가 끝끝내 자기만의 새 집, 새 고향을 일구어내고 새 가족을 만드는 일종의 개척자 영웅 서사다.
고향에 자카란다 나무가 많았다는 언급이나, 라틴 또는 아프리칸계 혼혈로 추정되는 외모의 아이들 콜롬비나와 치릴로의 외모로 미루어보아 그가 떠나온 고향도 어쩌면 타국일지 모른다. 혹은 포르투갈, 멀게는 남미까지도 떠돌며 살아온 (아르투 못지않은) 방황의 시절이 있었을지도.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근거는 이탈리아가 확실히 ‘이방’의 인물에 끌려한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는 음악 선생의 죽은 딸의 남자친구라는 영국인 - 보다도 그가 이방인이라는 점 그 자체, 그가 움막을 살기 좋게 꾸미는 능력, 언어적 소통에 서툴다는 점 등등 -을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그 남자는 짜증스럽게도 돌아왔다가 떠나고 찾아왔다가 버리고 가기를 반복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뿐인데도 이탈리아는 평정과 긍정을 유지하는 드문 사람이다. 아르투를 비롯한 톰바롤리 남자들이 별다른 직업도 없이 스파르타코의 탐욕에 기생하며 과거에 속박된 도굴꾼에 머무르고, 플로라 부인이 페르세포네를 잃은 데메테르처럼 정신을 놓고 딸에 집착할 때, 이탈리아는 홀로 현실을 책임지고 미래를 도모한다. 누구 못지않게 신산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는데 그에겐 과거가 별로 중요치 않은 듯도 하다.
영화 중반부쯤, 스파르타코의 조카 멜로디에가 돌연 제4의벽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 “에트루리아 인들이 로마 제국에 흡수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엔 마초가 없었을 거래요”라고 말하고 에트루리아 민족은 모계 사회였다는 점을 피로에게 일러주는 재미난 순간이 있다.
이 서술은 영화 전반에 존재감을 행사하려 애쓰는 피로의 분투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그처럼 마초가 되려 하는 근현대 이탈리아 남성들의 폭력적 문화를 - “여자가 오줌 눴을 때 모양이 동그랗다면 결혼하라고 했다”는 말에서 즉각 감지되는 ‘처녀성’에의 집착, 카니발에서 춤추는 이탈리아의 모습에 동해 ‘발가벗기자’고 달려드는 관습적 성희롱 등등 - 야릇한 방식으로 조롱하고 있다. 영화가 그 대신 가만히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은 시끄럽고 하찮은 남성 조연들에 비해 훨씬 인상적인 방식으로 ’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여성 조연들이다.
빼앗긴 힘의 자리로 가장 먼저 소환되는 건 베니아미아의 어머니 플로라 부인의 기이한 권위다. 플로라는 딸 뿐인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며 딸들과 제자를 함부로 대한다. 딸들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낡은 집을 팔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그는 집과 가구들을 팔지 못하게 하며 죽은 막내딸(베니아미나란 이름은 야곱이 요셉만큼 사랑한 유일한 아들이자 막내인 베냐민에서 따왔을 게 분명하다)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버티기 위해 건강과 경제권 그리고 정신을 놓지 않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막내딸의 연인이었던 아르투는 오페라 가수였던 플로라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워도 되는 유일한 사람인데, 딸들은 ‘남자만/남자라서 가능하다’며 차별 대우에 대놓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실 아르투가 대접받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베니아미나가 죽은 것을 부정하려는 플로라의 절박함에 군말 없이 동조하는 체라도 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후 스파르타코가 자기 직원들을 손짓 하나로 몸종처럼 부리는 모습에서도 플로라와 유사한 권위가 발견된다. 스파르타코란 이름을 여성이 쓰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주로 이탈리아 남성형 이름에 붙이는 어미(-co)로 끝나는 점, 그 유명한 투쟁가 스파르타쿠스 또는 아테네를 이긴 스파르타의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란 점도 그의 특수한 위치성을 짐작케 한다. 그와 친지, 직원들이 전원 새하얀 금발 벽안을 가진 것은 그들이 토종 에트루리아 혈통이 아닌 역사적 침략자의 혈통이리란 사실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가 일군 대안 가족의 그림을 통해 에트루리아의 모계 사회는 다시 한번 불려 나온다. 이탈리아가 ‘누구의 것도 아니며 모두의 것이기도 한’ (유적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공간을 쓸만한 집으로 만들어내자 그처럼 아비 없는 자식들을 홀로 키우는 젊은 여자 친구들이 모여 거대한 양육 공동체를 이룬다. 아이도 남편도 없는 파비아나가 “짜증만 내고 지시만 하며 부려먹었“던 피로와 남자들을 떠나 여성과 아이뿐인 집에 합류한 결정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알아서 집을 고치고 먹을 것을 구하고 자급자족 노동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탈리아의 모습은 앞서 ”가서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내. 뭐라도 하면서 노래를 불러“라며 온갖 가사노동을 시킨 플로라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만든다. 클래식하고 권위 있는 음악을 가르치면서도 육체가 깨어 있어야 소리가 잘 나온다고 강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 그가 직접 몸으로 배운 교훈 때문일 것이다. 플로라와 이탈리아에게 예술과 생활, 음악과 노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이는 inestimable한 것을 기어이 estimate하겠다는 외지의 자본, 남성들이 추구하는 협소한 의미의 성공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미학이다. 버려진 기찻길 옆에서 일정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노동은 그 자체로 저항 예술의 성격을 띠게 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르투는 톰바롤리와 플로라 대신 이탈리아의 집을 찾아가며 처음으로 ‘다른 미래’를 꿈꾸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베니아미아의 망령을 그리워하며, 사람 대신 새 떼가 노니는 명계의 꿈과 망자들의 부름에 강렬히 사로잡혀 있는 운명이라 이탈리아가 마련해 준 현실 세계의 유토피아에 편히 머물지 못하고 떠나간다. 결국 부장품 하나 없이 제 발로 들어간 무덤에서 그는 비로소 진짜 웃음을 짓고 마음 저린 행복을 찾는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 도굴꾼의 재능이 발견되기 전까지 측정될 수 없는 것, 훼손할 수 없는 것들은 영영 보존될 것이다.
그가 묻힌 땅 위에서 플로라는 계속 베니아미나와 아르투를 기다릴 테지만, 이탈리아는 계속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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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심이든 현실이든 하나만 해.......
경고: 스포일러 있습니다!
벤 자이틀린 감독의 <웬디>를 씨네랩의 초청 덕에 보게 되었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웬디>가 최신 기술을 앞세워서 동심의 세계를 펼칠 거란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디즈니가 만든 <피터 팬>을 어릴 적에 재밌게 본 기억이 있어서다. 그러나 내 눈에 펼쳐진 것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약칭: <매드 맥스>)에서 볼 수 있을법한 황량한 네버랜드와 흑인으로 변한 피터 팬이 어떤 아이가 손이 말라가는 것을 보고 그걸 잘라버린(!) 사이코패스적인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내가 <피터 팬>에 가지고 있던 긍정적인 이미지를 모두 부셔버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피터 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고 싶었는지 여전히 동심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어정쩡한 모습을 보여준다.
<웬디> 속에서 동심을 대표하는 인물은 피터 팬(야슈야 막)이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네버랜드를 책임 지는 꼬마이다. 그런데 그 꼬마의 마음 속에는 네버랜드에는 동심밖에 없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네버랜드의 황량한 모습만 <매드 맥스>를 닮은 줄 알았더니, 피터 팬의 성격도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메인 빌런이자 독재자인 임모탄 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 탓에 그는 조금이라도 늙은 티가 나는 아이들은 가차없이 내쫓는다. 이들은 노인이 되어 동심을 되찾기 위해 아이들을 위협하는 적이 되고 만다. 충격이었던 것은 디즈니 버전 <피터 팬>에서 멋있는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르고, 손에 낀 갈고리를 뽐내는 후크 선장이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것.
여기서 웬디(데빈 프랑스)는 피터를 비판하는 역할을 새롭게 부여 받았다. 공교롭게도 이 점도 <매드 맥스>와 똑같다. <매드 맥스>의 주인공도 퓨리오사(샤릴리즈 테론)라는 강인한 여성이었으니. 그녀는 피터가 본색을 드러내자 노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리고 같이 노래를 부르고, 피터와 노인들의 화해를 주선하는 데에도 성공한다. 노인들이 다시 아이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간 건 덤이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웬디의 어릴 적 사진들이나 어른이 된 웬디가 기차에 올라탄 피터 팬을 쫓아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왜 기껏 웬디를 어른이 되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사람으로 삼아놓고 여전히 동심을 잊지 못하는 캐릭터로 결론 짓는지 모르겠다.
<웬디>의 문제는 디즈니 버전 <피터 팬>과 다른 결을 보여준 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재해석은 환영할 만하다. 문제는 <웬디>가 동심을 비판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으면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결말이 갑자기 방향을 정반대로 틀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니 화려한 CG가 만들어준 몰입도 모두 산산조각났다. <신과 함께>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부터 몰입이 안 되는데, 눈요기를 제공해줌으로써 그걸 무마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요한 설정으로 나오는 '어머니'라는 물고기는 왜 나왔는지, 왜 노인들이 '어머니'를 잡으려고 안달을 했는지 모르겠고. 영화를 봤을 때 처음 느낌은 좋았지만 그 경험을 곱씹을 수록 아쉬움만 남게 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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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 위한 나의 백야행
가난한 집안 환경, 장및빛 미래라는 미끼로 아이들을 성적 경쟁으로 몰아넣는 선생님, 성적 경쟁 속에서 생겨나는 집단의 서열, 이런 시궁창 속에서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는 첸니엔, 빛의 영역에서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길에서 양아치에게 잡혔는데, 그 과정에서 함께 맞고 있는 샤오 베이를 만난다. 시궁창 속에서도 빛을 쫓아가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시궁창에 적응하며 살고 있는 베이를 한심하게 여기며 무시하지만 동급생의 폭력이 점점 더 심해져 갈 곳 잃은 첸니엔은 베이에게 자신을 지켜달라 요청하게 된다. 그렇게 내심 니엔에게 호감이 있었던 베이는 니엔을 도와주는 음지의 보디가드가 된다. 하지만 동급생의 괴롭힘에 견디지 못한 그녀는 결국 일을 내고야 마는데, 그녀는 과연 꿈에 그리던 베이징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
1. 어른들이 외면한 세계에서 사는 아이, 첸니엔과 샤오 베이.
첸니엔과 샤오 베이의 첫 만남은 폭력 현장이었다. 맞고 있는 샤오 베이를 보고, 양이치들을 신고하려다 덩달아 붙잡혀 버린 첸니엔은 함께 구타당하다 양아치들이 뽀뽀하라고 강요하자, 첸니엔은 뽀뽀로 그 끔찍한 상황을 모면한다. 이렇게 두 아이는 그저 어른들이 외면한 세계 속에서 하루하루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첸니엔은 학교 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해 봤지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아주 미미했기 때문에 여전히 가해자의 협박, 폭력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상황이 시사하는 점은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빛을 쫓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지만 그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관리하지 못해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들은 철저하게 교사가 아니라 공무원이 된다는 것이다. 학교는 피해 학생을 보호하려는 조치보다는 가해 학생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려는 결정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서 살던 첸니엔은 어른들의 가해자 한정 인도주의적인 결정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 경찰에 신고한 이후로, 동급생이 첸니엔을 괴롭히는 수위는 점점 심해지고, 과감해진다. 더 이상 이들은 학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체계적인 입시 제도에 아이들이 잘 맞춰주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아이들을 현혹한다. 하지만 어른이든 어린 아이들이든 사람이 많이 모여들어 집단이 되면 그 집단 안에서 서열이 생겨난다. 나이가 각각 다른 집단은 나이로 서열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지만 같은 또래가 모인 집단일 경우, 집단에서 가장 영악한 아이들이 집단 장악의 우선권은 획득한다. 그렇게 한 세력이 장악하면, 그 세력의 지도자가 던진 조그만 돌에 유독 세게 맞는 불가촉천민 계급이 생겨난다. 그 계급을 사회에서는 왕따라고 칭한다. 한 세력의 지도자가 그 집단에서 가장 엘리트라면, 어른들은 그 집단에서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맹신한다. 지도자는 선생님 앞에서는 모범생인 척 위선적인 행동으로 선생님을 속이고, 불가촉천민은 보복이 두렵기 때문에 지도자의 눈에 띌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첸니엔은 그 반에서 불가촉천민이었다. 공부를 가장 잘 하던 웨이 라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반 친구들은 모두 알지만 그걸 막으면, 첸니엔에게 향하던 화살이 자신에게 올 것을 알기에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방관할 뿐이다. 어른들은 학교라는 집단을 아직 때묻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사회에 나갈 공부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학교에서 학생들은 특정한 지식보다 더 절실히 배우는 것은 부당한 일이 발생했을 때, 적당히 눈치게임을 해야 내가 이 집단에서 매장당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어른이 되면서 잊었을 지도 모르고,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학교에서 한 번이라도 집단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눈치 게임을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영화는 그저 아이들의 집단도 어른들이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아이들도 자기 나름대로 학교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을 아주 극적인 요소를 담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샤오 베이도 엄마의 부재로 인해 미성년자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불법을 서슴치 않고, 행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13세 아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길거리의 양아치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어둠 속에서 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첸니엔은 순수한 존재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때란 때는 다 묻어버린 그에게 여전히 유토피아는 있다고 믿으며 공부에 매진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꽤 신기한 존재였을 테니까.
2. 영화 속에서 보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이 났던 한 소설이 있는데, 그것은 일본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백야행이었다. 이 소설 속의 두 주인공 유키호와 료지의 경우, 료지는 유키호를 지키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고, 유키호는 료지의 희생을 발판삼아 빛의 영역에서 고고한 백조처럼 살아간다. 이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긴 하지만 영화 속 두 인물과 소설 속 두 인물이 비슷해 보였던 이유가 뭘까 고민해보니, 베이도 료지처럼 첸니엔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너는 세계를 지켜, 난 너를 지킬게
더 이상 어른을 믿지 못하게 된 두 커플은 서로만을 의지하기로 한다. 어른들은 료지와 베이에게 묻겠지. 그렇게까지 유키호 그리고 첸니엔을 지켜서 얻을 수 있는 게 뭐냐고. 그렇다면 그들은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유키호와 첸니엔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어둠 속을 걷더라도 값진 인생이 될 거라고.
영화 속 형사가
"남을 위해 그렇게까지 희생하는 사람은 없어."
라고 했지만 시궁창 아래만 바라보며 한숨 쉬던 베이에게는 같은 어둠 속에서 살면서 하늘 위를 바라보는 그녀를 지지하며, 도와주어 그녀가 성공하면 자신도 조금은 행복해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녀를 통해 자신이 대리만족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은 찾아볼 엄두도 나지 않는 그 유토피아를 찾는 과정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세상의 비정함에 실망했을지라도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는 아직 어린 청춘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그에게 첸니엔은 그의 암울한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줄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녀가 무너지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을 테니, 어른들은 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희생이 가능했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그 여형사는 첸니엔을 투영시켜 그렇게 무대뽀로 누군가를 지켜야할 만큼 결핍이 있는 베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화 속 대사
"엄마는 나이들면 좋은 게 있대요. 다 잊어버린다고.
어쩌면 그 여형사도 어른이 되어갈수록 과거를 빨리잊어버리기 마련이기에 자신도 한 때, 다른 사람들에겐 쓸데없을지도 모를 무언가에 집중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대사가 베이가 여형사와 대비되어 아직 청춘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했던 것 같다.
어떤 어른들은 뉴스에서 발생하는 왕따 사건, 자살 사건 등을 보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요즘 애들은 우리 때 같지 않게 영악하다고. 아니면 요즘 애들은 우리 때 같지 않게 의지가 약하다고.
그렇게 요즘 애들은 어떻고, 옛날에는 어떻고를 따지기 전에 한 번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정말 옛날엔 학교 내에서 알력 다툼이 없었냐고, 유달리 약한 아이들이 없었냐고. 그냥 잊으신 거 아니냐고.
"나는 원래 자는 걸 싫어했는데, 요새는 좀 자고 싶을 때가 있어.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보기 싫은 세상이 가끔 있거든."
영화 속 형사의 말처럼 여러번 잠을 잔 결과로 시간이 흐르니, 잊혀진 거 아니냐고.
3. 이 영화에 대한 평가
이 영화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빛의 세상에서 어둠 속을 기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굉장히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른에게 보호받지 못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야 했던 또다른 유키호, 료지와 첸니엔, 베이는 지금도 이 세상 도처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매스컴이든 주위에서 듣게 된다면, 괴롭힌 아이든,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든 아이들을 탓하지 말고,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깊게 고찰해 주십사 하는 요청이 담긴 영화라고 생각한다. 학교 생활은 좋은 성적을 가져야 좋은 인생이라는 프레임을 걸고, 지식이 가득한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라고들 생각하지만 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교내정치, 사회생활 등을 배우기도 한다. 따라서 교내 왕따 사건이 발생하면, 아이들도 잘못했지만 어른들도 아이들의 잘못을 방치했다는 점에서 책임이 있기에 이 영화는 학생들에 대한 조금 더 사려깊은 관찰과 왕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어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배우의 연기도 너무 좋고, 내용도 좋기 때문에 이걸 왜 영화관 가서 보지 못했나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고민하게 되는 영화였다.
※ 해당 영화는 왓챠(Watcha)에서 시청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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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을 불어넣어 줄 아티스트 다큐
15년 만에 화해한 오아시스 축하 기념
뮤직 아티스트 다큐 9선
아티스트의 깊은 내면과 음악을 만들어내는 과정,
사생활까지 풀어낸 레전드 다큐들을 소개합니다.
싸우지마요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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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같이 밥 먹자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언젠가 제주 공항 활주로 밑에 묻혀 있는 유골에 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처음 마주했던 4.3은 교과서 속 문장 한 줄이었다.
아직 제대로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아픔에 우리가 어떤 말을 쓰고 지울 수 있을까.
재일 조선인 2세인 양영희 감독은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랑하는 만큼 이해하기 어려웠던 어머니 강정희 씨를 담는다. 늘 한국은 잔인하다 말해왔던, 오빠들을 모두 보낼 정도로 북한을 믿고 지지하시는 어머니의 속내엔 4.3의 아픔이 있다. 발 디디고 살아온 제주와 일본이 정말 집일 수 없었기에 북한을 이상으로 여기고 살아오신 어머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딸이 데려온 일본인 사위를 위해 속이 꽉 찬 백숙을 끓인다.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이 가족들은 그럼에도 같이 밥을 먹고, 웃고,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 다른 세 사람이 같은 장소와 기억, 제주를 향해 가는 이 다큐멘터리의 여정은 계속해서 기억될, 기억되어야만 하는 한순간에 닿는다.
상대를 전부 안다는 건 환상일 뿐이다. 가족은 처음부터 가족일 수 없다. 함께 밥을 먹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해 애를 쓴다. 조금씩 멀고 가까운 이들과 가족으로 함께 하기 위해 끓인 따뜻한 닭백숙 한 그릇에 얼마나 큰마음이 들어 있는지. 양영희 감독은 20대 후반까지 아버지와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이념을 가진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게 된 것은 서른, 가족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였다. 감독은 함께하는 식사와 카메라가 아버지와 가족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일본인 사위 아라이 카오루 씨는 이들과 가족이 되기 위해 마늘을 깐다. 어머니의 곁에서 졸고, 평범한 대화를 나눈다. 카메라는 평범한 일상을 담으며 가족을 이루는 건 거창한 이념의 통일이 아닌 함께하는 사소한 시간의 축적임을 보여준다.
영화가 진행되며 조금씩 4.3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제주 4.3 연구소 관계자들의 방문에 어머니는 흩어져 있던 제주의 기억을 들려준다. 1945년 제주로 피난을 간 강정희 씨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제주 4.3이 발생하고 어린 동생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오게 된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제주는 학교에서 사람을 쏴 죽이는 경찰들, 냇가에 흐르는 핏물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감히 상상하기도 괴로운 이 역사는 이후 찾아온 치매와 함께 그녀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흐려져 간다. 2018년,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세 사람은 제주를 찾는다. 악화되는 치매로 당시의 기억을 더 떠올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감독은 슬픈 일은 담아두고 있으면 힘드니, 잊는 것도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에 4.3을 기록한 그녀는 이가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제주 4.3을 다룬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의 말에서, 한강 작가는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고 말했다. 국가 폭력에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역사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 마음들은 영원히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억하고, 기록하고 그날에 다가가야 한다.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기억에는 힘과 책임이 있다. 사랑으로 이어진 수많은 마음들이 한 밥상에 앉을 수 있다면, 제주의 봄에도 이름 붙을 날이 분명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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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가디슈」예고편 1초 단위 분석 그리고 소말리아 내전 핵심요약ㅣ모가디슈 예고편ㅣ모가디슈 김윤석 조인성ㅣ모가디슈 1차 예고편ㅣ소말리아 해적 아덴만ㅣ
? '모가디슈(2021 여름)' 예고편 1초 단위 분석
그리고 영화의 배경인 '소말리아 내전' 역사 소개- 모가디슈 영화정보
장르: 드라마, 액션
감독: 류승완
각본: 류승완
제작: 강혜정
출연: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김소진, 정만식, 구교환, 김재화, 박경혜 외
촬영: 최영환
조명: 이재혁
편집
미술
음악
의상
주제곡
촬영 기간: 2019년 11월 ~ 2020년 2월
제작사: 대한민국 외유내강, 덱스터 스튜디오, 필름케이
배급사: 대한민국 국기 롯데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대한민국 국기 2021년 7월
화면비
상영 시간: 121분
제작비: 240억 원
- 시놉시스
내전으로 고립된 낯선 도시, 모가디슈
지금부터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생존이다!대한민국이 UN가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기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일어난다.
통신마저 끊긴 그 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의 직원과 가족들은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한 대사관의 일행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문을 두드리는데…목표는 하나, 모가디슈에서 탈출해야 한다!
- 캐릭터
대한민국 대사관
한신성 대사 (김윤석 분)
강대진 참사관 (조인성 분)
김명희 (김소진 분)
공수철 서기관 (정만식 분)
조수진 대사관 사무원 (김재화 분)
박지은 대사관 막내 사무원 (박경혜 분)
북한 대사관
림용수 대사 (허준호 분)
태준기 참사관 (구교환 분)
2021년 개봉예정인 대한민국의 영화. 류승완 감독의 11번째 연출작.
1991년 소말리아 내전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남북대사관 공관원들이 목숨을 걸고 함께 탈출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영화 제목이 캐스팅 과정에서는 '탈출' 이라는 가제로 알려졌으나, 이후 '모가디슈'로 확정되었다.
2020년 여름 성수기 개봉작품으로 준비중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봉이 1년 가까이 지연되었다.
영화의 배경은 소말리아 모가디슈지만 현재까지도 위험이 발발한 지역인지라 실제 촬영은 모로코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모가디슈 #모가디슈_예고편 #모가디슈_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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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택배기사> 티저 예고편
"산소 배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산소가 통제되는 세상, 생존을 배달하는 기사가 온다! 세상을 무너뜨릴 유일한 희망 《택배기사》 5월 12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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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경관의 피> 1차 예고편
경찰 잡는 경찰의 위험한 수사. 조진웅X최우식의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강렬한 범죄드라마 [경관의 피] 1차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