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0-14 10:52:02
10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대도시의 사랑법> 개봉 2주 차 흥행 역주행 시동!

<대도시의 사랑법>이 개봉 2주 차에도 열기를 이어가며 흥행 역주행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개봉 2주 차에 접어든 9일 5만 3,214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개봉 첫날 오프닝 스코어인 5만 2,696명을 넘어섰습니다.
개봉 후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 수가 감소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은 2주 차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관객 수가 증가하는 이례적인 흥행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높은 만족도가 반영된 실관람객 평이 입소문으로 이어져 앞으로의 추이가 기대되고 있습니다.

<베테랑 2>는 9월 개봉이었음에도 굳건히 1위를 지키고 있으며,
애니메이션 <와일드 로봇>이 <조커: 폴리 아 되>를 밀어내고 3위에 올랐습니다.

한편, 북미에서는 수위 높은 폭력, 살인 장면으로 화제가 되었던 슬래셔 무비 <테리파이어 3>가 개봉해 단숨에 1위에 올랐습니다. 뒤이어 2위를 차지한 <와일드 로봇>이 누적 수익 8,000만 달러를 달성하며 기분 좋은 속편 제작 소식을 전했습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던 <조커: 폴리 아 되>는 누적 수익 5,000만 달러라는 아쉬운 성적을 거두며 3위에 머물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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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개인의 기억에서 사회의 구조로
시놉시스
<증거>는 미국 정치 및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는 검은돈의 영향, 그리고 기업 투자에 대한 분석이면서 동시에 가족과 돌봄이라는 개념에 대한 개인적인 성찰이다.
영화 정보
감독: 리 앤 슈미트 (Lee Anne SCHMITT)
제작국가: 미국
제작연도: 2025년
상영시간: 76분
장르: 다큐멘터리
상영 형식: DCP, 컬러/흑백
상영 섹션: 영화보다 낯선
아시아 프리미어
리뷰
이 다큐멘터리는 감독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된다. 감독은 자신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며 영화의 첫 페이지를 펼친다. 무역회사에 다녔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다양한 인종의 인형들을 선물해주었고, 그녀는 그 인형들을 통해 세계를 처음 마주했다. 평범한 듯 보이는 이 회상은 곧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에 놓인 미국의 거대기업, ‘올린’이라는 실체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감독의 아버지가 일했던 무역회사의 주요 거래처는 바로 올린이었다. 세계 곳곳으로 제품을 수출하며 부를 축적한 이 기업은, 화려한 외관과 달리 내면에는 수많은 폐해를 숨기고 있었다. 올린은 수많은 공장을 개발도상국과 미국 내 저소득 지역에 설립했는데, 이들 중 다섯 곳 중 세 곳이 흑인과 히스페닉 인구가 밀집해 사는 지역이었다.
공장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 즉 인구 분포다. 왜냐하면 유해물질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그 피해가 누구에게 닿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철저한 계급과 인종적 계산이 깔린 결과다. 올린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오염된 곳에 모여 산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오염된 곳으로 가난한 이들을 몰아넣는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결국 그 지역의 사람들, 주로 흑인과 히스페닉계 주민들은 오염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며 건강을 잃고, 부를 축적할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이 구조 속에서 가난은 세습된다. 올린은 한편으로 대학 재단과 연구소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보수주의의 새싹’을 키워낸다. 이 기부는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확산시키고, 인종차별과 성차별, 동성애 혐오 등 극단적인 가치관을 세력화하는 데 사용된다.
이들이 펴내는 책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 ‘남성은 동성애를 기피해야 한다’, ‘복지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사유재산은 신성하다’. 이러한 주장들은 단지 의견이 아니라, 정치와 경제, 교육, 법제도의 재구성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논리로 발전된다.
보수집단은 복지제도를 공격한다. 왜냐하면 복지제도가 확대될수록, 사회적 약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곧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이는 강자들의 체계를 위협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족, 사유재산, 전통적 가치의 신성화를 통해 이 시스템을 방어하고자 한다.
‘가족’은 이 서사의 또 다른 축이다. 감독은 가족이 신격화되는 구조를 비판한다. 부의 세습을 위해 가족이 필요하고, 자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은 혼자 살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에 보수집단은 불안을 느끼며, 가족이라는 형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폭력, 성폭력은 가족 내부, 혹은 아는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성역으로 간주되고, 문제를 숨긴다.
이 다큐멘터리는 ‘나의 가족’에서 출발하여, 미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자본의 논리를 하나하나 따라간다. 그리고 이는 결국 다시 ‘나의 가족’으로 되돌아온다. 이 순환의 구조는 단지 개인의 회고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의 재생산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다큐 속 내레이션은 차분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대신 각 장면마다 문헌과 기록, 논문과 기사, 인터뷰와 영상 자료 등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며 시청자의 사고를 이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이 상영될 수 있었던 의미는 크다. 그것은 이 영화가 단지 미국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한국 사회에도 깊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가족이 부의 재생산 단위로 기능하고 있다. ‘비혼’과 ‘1인가구’가 증가하면서 사회는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족 중심의 제도와 문화는 견고하다. 동시에 복지에 대한 혐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 성소수자 혐오 역시 한국 사회에서 점점 목소리를 얻고 있다. 미국의 문제는 한국의 문제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 다큐는 말한다. “나는 다양한 인종의 인형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인형들은 귀엽고, 색이 다르고, 머리 모양이 달랐다. 나는 그것이 세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인형들의 고향은, 올린이 만든 공장이 있는 곳이었다.”
이 말은 이 작품의 본질을 드러낸다.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며, 한 개인의 과거는 자본과 권력, 구조와 역사 속에 깊이 묻혀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를 낱낱이 파헤치며, ‘왜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진짜로 바꿔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작품은 단지 고발의 다큐가 아니다. 그것은 연결의 다큐이며, 성장의 다큐이고, 기억의 다큐이며, 결국에는 질문의 다큐다. 감독은 가족을 통해 세계를 보고, 세계를 통해 가족을 다시 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다큐가 존재하는 이유다.
상영 일정
2025년 5월 2일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
2025년 5월 5일 10:3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2025년 5월 9일 10:00
CGV 전주고사 8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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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프링 블라썸(2020)> 리뷰
-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 <스프링 블라썸>의 예고를 보았다. 내 흥미를 자극한 건 트레일러 속 짧게 스쳐 지나간 안무 영상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을 대사로써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이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이 제법 전위적이지 않은가 생각했던 것이다. <사랑은 부엉부엉(2016)> 등에서 보여준 프랑스 영화 다운 참신함에 대한 기대감도 물론 있었겠지만.일단 영화 외적인 것을 짤막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은 수잔 랭동 감독의 데뷔작이다. 하지만 그저 감독이라고 부르고 넘어가기엔 찝찝하다. 만일 <스프링 블라썸>이 하나의 음악이었다면, 수잔 랭동은 원 맨 밴드라는 말을 들었을 테니. 그는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듯 주연배우를 맡았고, 각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며, 엔딩 크레딧곡마저 직접 불렀다. 그야말로 영화계의 루키다. 다만 영화 각본을 쓰기 시작한 것이 15살이며 자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다시 말하자면, <스프링 블라썸>은 결과적으로 첫사랑의 시작과 끝을 다루면서도 첫사랑을 회고하는 데에서 나오는 쌉싸름함이나 약간의 안타까움이 누락되어 있으며, 주인공 수잔(수잔 랭동)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묘사는 퍽 서툴다. 그래서인지 <스프링 블라썸>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라이트한 버전에 가까워보인다.※ 스포일러 주의<스프링 블라썸>이 포착하고자 한 것은 삶의 한 순간이다. 따분한 일상이 급작스레 반짝이게 되는 어떤 순간. 이야기는 학교와 집, 관심사가 맞지 않는 주변인과 같은 일상에 질린 주인공 수잔의 눈에 우연히 연극 배우 라파엘(아르노 발로아)이 들어오는 순간 시작된다. 라파엘이 일하는 극장이 수잔이 좋아하는 하교길에 있다보니 둘의 동선은 거듭 겹친다. 자꾸만 시야에 들어오는 알 수 없는 남자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수잔은 점차 그의 영역에 자신을 들여보내고, 안면을 트며,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간다.두 사람의 관심사는 꽤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수잔과 라파엘이 가장 크게 공통점을 느낀 부분은 권태로움이다. 다만, 수잔과 라파엘의 권태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언정 속사정이 꽤 다르다. 작품이 재현하는 수잔의 권태는 기실 수잔이라는 인물의 자아/독특함을 부각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예컨대 수잔의 대사, "나는 또래 남자애들이 따분해요"는, 기실, 자신의 특별함을 인지하는 상대의 부재에서 비롯된 불만이다. 그가 말하는 '남자애들'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또래 전체를 뜻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그는 여자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파티에서 어울리지 못하며, 수업 시간 중 수준 낮은 질문을 하는 친구에게 큰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 즉 수잔이 겪는 일상의 무료함은 평균적인 또래 집단과 수잔 본인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해석한다.반면 라파엘이 겪는 권태로움은 일종의 번아웃으로 보인다. 같은 배역이 반복됨으로써 작품을 계속하고픈 열정이 희미해진 시간만이 지속되고 있다. 넌덜머리가 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오페라 아리아곡과 같은 작은 요소에 기대어 일상을 이어나간다. 이런 순간 만난 사람이 바로 수잔이다.수잔 랭동 감독은 <스프링 블라썸>을 찍는 동안, '러브 스토리 자체보다 사랑에 빠지는 감정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명확하게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는 모습을 끊김없이 그리기보단 감각적인 연출을 통해 두 사람의 흔들리는 감정을 충실하게 묘사한다. 속절없이 라파엘에게로 향하는 수잔의 시선이나, 잠들지 못하는 새벽 따위의, 사랑에 휩싸인 선명한 순간을 꾸밈없이 모아둔 것 같단 생각마저 든다.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두 주인공은 (첫)사랑의 열병에 빠져 일상의 리듬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토록 지난한 일상이었음에도 그것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으며 특별한 순간을 공유한다. 두 사람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플라토닉적 관계에 기초한 둘의 감정은 일상을 조금쯤 살 만한 것으로 변화시킨다. 이렇듯 기존의 로맨스와 다른 문법을 사용하기 때문일까. 감독은 두 사람의 교감을 무용 시퀀스를 차용하여 표현하였다. 트레일러에서 보았던 장면이었음에도 영화를 통해서 만난 카페 씬은 두 사람의 감정을 그저 사랑이라는 단어로 재단하기엔 너무 얕지 않은지, 인간이 맺는 무수한 관계를 고작 몇 개의 단어로 가두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될 만큼 훌륭했다.영화의 모든 장면은 놀라우리만큼 감각적이었으나 이외 부분에 있어선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자전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수잔을 제외한 주변인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담겨 영화의 설득력이 반감된다는 점이나, 또래 집단과 수잔의 다름을 표현하는 데에 보다 적절한 소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첫사랑으로 인해 생기는 주인공의 변화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면모가 있어 수잔의 스탠스가 흔들릴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조금의 고민과 주저함이 없었던 점이 퍽 아쉬웠다. 사랑은 일상을 반짝이게 수놓기도 하지만, 수놓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기도 하니까. 수잔이 경험한 변화를 한 두 발짝 물러나 깊이 있게 묘사했다면 보다 좋았을 듯 하다.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수잔 랭동을 알게 된 건 분명 큰 기쁨이었다. 그가 펼쳐보일 또다른 시네마를 기대해본다. 그때 즈음엔 <스프링 블라썸>이 내게도 첫사랑처럼 남을 지도 모른다. 어설퍼보이더라도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엔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로 남고야 마는 첫사랑처럼.★★*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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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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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왕 썅년일 거면 간지나는 썅년으로
1980년대 초, 노출 연기로 주목받고 톱스타가 된지 어연 10년 정도가 된 희란은 진짜 ‘연기’와 진짜 ‘영화’에 대한 굶주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배우들을 벗기기만 하는 각본들에 신물이 나던 중, 거장 작품 <육식의 밤>을 읽게 되고, 간절함에 눈을 반짝이게 된다. 신성영화사에서는 새 작품을 위해 신인 오디션을 개최한다. 그리고, 밤무대에서 활약하던 신주애는 본격 성애 영화 <애마부인>의 주연으로 발탁된다.
희란과 주애, 그리고 미나
3S, Sports, Sex, Screen이라는 정부의 정책에 맞게 영화계에선 성애 영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배우들은 해방을 느낄 수 있는 연기에 진심이었으며 식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꿈에 발을 디딜수록 어찌할 수 없는 권력에 좌절할 뿐이다.
에로 그로 넌센스, 에로틱하면서 그로테스크한 풍자.
<애마부인>을 본격 성애 영화가 아닌, 본격 예술 영화로 만드려던 감독과 희란, 주애의 바람과 달리 구중호에 의해 그저 유희거리에 그치는 편집본으로 개봉한다. 주애는 모든 걸 다 바쳤음에도 친구들에게 부끄럽다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훔친다. 한편, 첫 개봉 편이 대히트를 치자 본 편집본인 <애마부인: 오리지날레>의 개봉을 약속받은 감독이 희란에게 기쁘게 이 소식을 전한다. 하지만, 희란은 다른 결심을 했다.
계약과 접대
신성영화사는 정부에서 열리는 남모를 연회에 여자 배우들을 제물로 바쳤다. 온갖 약과 술, 섹스가 난무하는 현장에 입을 여는 사람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협박을 받고서. 주애가 영화 기자 접대 판을 깽판 치고 오자, 곧바로 ‘밤무대 출신, 손님들과의 만남’이란 타이틀로 신문이 도배된 것은 큰일조차 아니었다.
미나는 이런 구조적 악습에 길들여져버린 피해자이다.
희란과 같은 멋있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에 온 미나는 제작사 대표 구중호와 동거한다. 그렇게 약과 술, 그리고 관심을 갈망하며 살았다. 그저 성적 착취를 당하며 촬영장이 아닌 연회에만 투입된 미나. 어느 순간엔, 자신을 왜 파티에 부르지 않냐며 조르기에 이른다. 그렇게 참석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죽게 된다.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않던 그녀가 그날 섭취한 건 대마초가 아닌 코카인. 하지만, 신문에선 그저 우울증으로 인한 죽음이라고 말한다. “나 여배우야.”는 그녀가 뱉었던 말 중 가장 진실된 한 마디었을 것이다.
미나의 죽음으로 분노 스위치가 켜진 희란과 주애. 희란은 이 더러운 악습을 폭로하겠다는 다짐으로 ‘대종상 영화제’에 참석한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까발린 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주애의 말에 함께 올라타 자리를 뜬다.
살아남으려면 멋진 썅년이 되어야 했던 그녀들. 주애는 희란의 응원으로, 더 단단한 여배우로 승승장구하고 희란은 영화계에서 사라진다. 시리즈를 다 본 후에 끝끝내 <육식의 밤>을 찍지 못한 희란이 안쓰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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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는 죽지 않았어!
하시모토 나오키 / 일본 / 2022 / 126분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루가 봄과 함께 떠났다 사야카는 처음 겪는 이별이 낯설기만 하다 오래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와 함께 헤어진 이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그곳에서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재일 한국인 2세인 작가 이주인 시즈카(본명 조충래)의 동명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아쿠타가와상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대중소설 작가에게 수여하는 가장 높은 상이기도 한 나오키상 수상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단행본 소설이다. 하시모토 나오키 감독은 소설을 처음 접하고, 영화화하기까지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마음을 아리게 만들기에 변함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는 죽지 않았어-
영화는 난생처음 상실과 이별을 경험하게 된 8살 소녀 사야카(니이츠 치세)와 오래전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 후세(오이다 요시)의 만남을 10년 후 사야카의 내레이션(아리무라 카스미)을 통해 들려준다. 소중한 관계의 상실과 이별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야카가 맞이하는 이별은 작별인사 기회조차 주지 않는 어린이에겐 너무 어려운 경험의 연속이다. 이렇게까지 잔인한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기엔 영화는 슬프고 우울한 분위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살랑한 봄의 여행길 같다.
좁은 문을 통해 강아지 루를 따라 들어간 벽으로 둘러싸인 들판은, 말 그대로 둘만의 공간이었다. 유일한 친구인 루만이 함께하는 공간은 그 어디보다 외롭지 않고 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가장 자유로운 공간처럼 느껴진다. 벽 너머로 수평선까지 보이는 듯한 바다조차 맑은 하늘에 푸르게 반사되지만 사야카 혼자 다시 들판에 갔을 때는 벽의 헤드룸을 좁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일반 공터로 만들어버린다. 그만큼 세상을 다르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에 대해 보여준 덕에 사야카의 상실감의 폭은 더욱 크게 와닿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첫 장면이다. 첫 장면이 강렬한만큼 후반부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사야카가 느끼게 된 소외의 너무 짧은 전사나 스토리 전개의 속도, 카메라를 바라보는 듯한 사야카의 시선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적어도 루와 사야카의 관계는 의심할 수 없는 꾸밈없는 관계였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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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 있는 청춘들의 묵묵히 살아가는 이야기
공석우는 버스 운전기사이며 소심한 성격으로 친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터미널에서 누군가 고장 난 mp3를 놓고 간 것을 보고 주인을 찾으려 유실물 보관소에 가지만 여기 있는 물건들은 주인이 버리고 간 것이라는 매표소 직원인 양영애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 mp3의 주인을 꼭 찾으려는 공석우는 양영애와 함께 수리점을 여러 곳 찾아다닌다. 둘의 사이는 예전보다 가까워지고 서로가 가진 사연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는데... 과연 무슨 사연들이 있길래 그러는 걸까?
공석우와 양영애는 둘 다 사연이 있었다. 결국 이 둘이 친해지기 전까진 몰랐을 뿐...
각자마다의 사연이 있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청춘들을 위한 영화!
공석우는 버스 운전기사 일을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자신이 수집한 영화 DVD들은 방에 보관해놓고 있었다. 그런 공석우에게는 사연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졸혼을 했고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잠시 꿈을 접어두고 버스 기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한다. 양영애도 학창 시절에 탁구 선수로 활동했고 자신의 아버지가 엄격한 훈련을 강조해서 탁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둘은 탁구를 치면서 자신들이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대회까지 나간다. 그러나 공석우는 대회 첫날에 온 전 여자친구의 문자로 괴로워하면서 출전을 포기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그에게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건 얼마나 괴로웠을지 이해가 간다. 왜 보통의 청춘들이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타협하여 살아가는 걸까? 마지막에 공석우가 영화와 관련된 수집품들을 버리는 것처럼 과거의 사연이 자신을 옭아맸나 보다.
그렇게 청춘은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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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리뷰 - 내 청춘을 꽃 피워 줘서 고마워
#꽃다발같은사랑을했다 #일본영화 #로맨스영화
여기 누구보다 잘 맞는 한 커플이 있습니다
그렇게 설레는 시간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게 아쉬움만 커져가는 연인들
이제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가장 화사하던 날의 사랑 이야기
7월 14일 개봉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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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데스데이 1편과 2편의 감독이 새로운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프리키 데스데이라는 영화로 지난 영화들과 비슷하게 코믹호러에 드라마적인 요소도 가미가 되어 있는 영화에요. 전작들과 코드가 맞았던 분들은 관람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잔인하고, 적당히 웃겨서 너무 타협한 것이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들을만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적정 수준의 재미를 보장하고 있어요.
여주인공 릴리 역을 맡은 캐서린 뉴튼이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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