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2-05 09:56:54
한계가 없는 봉준호의 세계
필모그래피 완전 정복!

국내외를 종횡무진하며 다양한 장르를 다루는 한계가 없는 영화감독이자 한국 관객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이 오는 2월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영화와 만나기 전, 필모그래피 정주행 어떠신가요?
여러분의 최애 영화도 알려주세요!

줄거리
조용한 중산층 아파트, 백수와 다름없는 시간강사 고윤주(이성재 분)는 개소리에 괜히 예민해져서 방바닥에 엎드려서 소리를 들어보고 천장에서 소리를 들어보려고 하지만 개소리의 진원지를 알지 못한다. 할 수 없이 평소대로 버려도 아무도 안주워갈 슬리퍼에 츄리닝을 입고 밖으로 나가 분리수거를 하고 터덜거리며 들어오던 중 바로 옆집 문앞에 서 있는 강아지를 발견한다. 윤주는 그 개를 납치, 지하실로 뛰기 시작한다.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지하실에 가둬버리는 윤주.
한편 아파트 경비실엔 경리 직원 박현남(배두나 분)이 있다. 그날도 지루하게 낱말맞추기나 하고 있는 현남에게 꼬마 슬기가 삔돌이를 찾는 전단을 가지고 온다. 온 동네에 전단을 붙이는 현남. 어쩌면 교수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소식을 안고 한잔한 윤주. 집에 돌아와 임신한 아내의 배에 대고 속삭이고 있는데,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린다. 급하게 달려나간 아파트 사방에 강아지 찾는 전단이 붙어있고 이렇게 써 있다. "특징: 성대수술로 짖지 못함". 그러나 지하실의 강아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주인이 아래층에 사는 할머니의 강아지임을 알게 된 윤주는 호시탐탐 그 개를 노리는데.
점점 늘어가는 강아지 실종사건. 사건이 마구 번져 가는 듯 보이던 어느날, 친구 뚱녀에게 들은 현남은 망원경을 들고 옥상에 올라갔다가 건너편 옥상에서 한 사내가 개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용감한 시민상을 타서 텔레비젼에 출연하는 것이 꿈인 우리의 현남.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뚱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사내를 쫓기 시작하는데.

줄거리
1986년 경기도. 젊은 여인이 무참히 강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다. 2개월 후, 비슷한 수법의 강간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일대는 연쇄살인이라는 생소한 범죄의 공포에 휩싸인다. 사건 발생지역에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수사본부는 구희봉 반장(변희봉 분)을 필두로 지역토박이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과 조용구(김뢰하 분), 그리고 서울 시경에서 자원해 온 서태윤(김상경 분)이 배치된다. 육감으로 대표되는 박두만은 동네 양아치들을 족치며 자백을 강요하고, 서태윤은 사건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지만, 스타일이 다른 두 사람은 처음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용의자가 검거되고 사건의 끝이 보일 듯 하더니, 매스컴이 몰려든 현장 검증에서 용의자가 범행 사실을 부인하면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구반장은 파면 당한다. 수사진이 아연실색할 정도로 범인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살해하거나 결박할 때도 모두 피해자가 착용했거나 사용하는 물품을 이용한다. 심지어 강간사 일 경우, 대부분 피살자의 몸에 떨어져 있기 마련인 범인의 음모 조차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후임으로 신동철 반장(송재호 분)이 부임하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박두만은 현장에 털 한 오라기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 근처의 절과 목욕탕을 뒤지며 무모증인 사람을 찾아 나서고, 사건 파일을 검토하던 서태윤은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범행대상이라는 공통점을 밝혀낸다. 선제공격에 나선 형사들은 비오는 밤,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히고 함정 수사를 벌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돌아오는 것은 또다른 여인의 끔찍한 사체. 사건은 해결의 실마리를 다시 감추고 냄비처럼 들끊는 언론은 일선 형사들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형사들을 더욱 강박증에 몰아넣는데.

줄거리
햇살 가득한 평화로운 한강 둔치 아버지(변희봉)가 운영하는 한강 매점, 늘어지게 낮잠 자던 강두(송강호)는 잠결에 들리는 ‘아빠’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난다. 올해 중학생이 된 딸 현서(고아성)가 잔뜩 화가 나있다. 꺼내놓기도 창피한 오래된 핸드폰과, 학부모 참관 수업에 술 냄새 풍기며 온 삼촌(박해일)때문이다. 강두는 고민 끝에 비밀리에 모아 온 동전이 가득 담긴 컵라면 그릇을 꺼내 보인다. 그러나 현서는 시큰둥할 뿐, 막 시작된 고모(배두나)의 전국체전 양궁경기에 몰두해 버린다.
그곳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한강 둔치로 오징어 배달을 나간 강두, 우연히 웅성웅성 모여있는 사람들 속에서 특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생전 보도 못한 무언가가 한강다리에 매달려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냥 신기해하며 핸드폰, 디카로 정신 없이 찍어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은 둔치 위로 올라와 사람들을 거침없이 깔아뭉개고, 무차별로 물어뜯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하는 한강변. 강두도 뒤늦게 딸 현서를 데리고 정신 없이 도망가지만,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꼭 잡았던 현서의 손을 놓치고 만다. 그 순간 괴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현서를 낚아채 유유히 한강으로 사라진다. 어딘가에 있을 현서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갑작스런 괴물의 출현으로 한강은 모두 폐쇄되고, 도시 전체는 마비된다. 하루아침에 집과 생계, 그리고 가장 소중한 현서까지 모든 것을 잃게 된 강두 가족…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그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위험구역으로 선포된 한강 어딘가에 있을 현서를 찾아 나선다.

줄거리
읍내 약재상에서 일하며 아들과 단 둘이 사는 엄마(김혜자 扮). 그녀에게 아들, 도준은 온 세상과 마찬가지다. 스물 여덟. 도준(원빈 扮). 나이답지 않게 제 앞가림을 못 하는 어수룩한 그는 자잘한 사고를 치고 다니며 엄마의 애간장을 태운다.
어느 날, 한 소녀가 살해 당하고 어처구니없이 도준이 범인으로 몰린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엄마. 하지만 경찰은 서둘러 사건을 종결 짓고 무능한 변호사는 돈만 밝힌다. 결국 아들을 구하기 위해 믿을 사람 하나 없이 범인을 찾아나선 엄마. 도준의 혐의가 굳어져 갈수록 엄마 또한 절박해져만 간다.

줄거리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의 꼬리칸,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앞쪽칸. 열차 안의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17년 째,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긴 세월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킨다.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 꼬리칸을 해방시키고 마침내 기차 전체를 해방 시키기 위해 절대권력자 윌포드가 도사리고 있는 맨 앞쪽 엔진칸을 향해 질주하는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 그들 앞에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줄거리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에게 옥자는 10년 간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친구이자 소중한 가족이다.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글로벌 기업 ‘미란도’가 나타나 갑자기 옥자를 뉴욕으로 끌고가고, 할아버지(변희봉)의 만류에도 미자는 무작정 옥자를 구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여정에 나선다.
극비리에 옥자를 활용한 ‘슈퍼돼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옥자를 이용해 제2의 전성기를 꿈꾸는 동물학자 ‘죠니’(제이크 질렌할), 옥자를 앞세워 또 다른 작전을 수행하려는 비밀 동물 보호 단체 ALF까지. 각자의 이권을 둘러싸고 옥자를 차지하려는 탐욕스러운 세상에 맞서, 옥자를 구출하려는 미자의 여정은 더욱 험난해져 간다.

줄거리
전원백수로 살 길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송강호) 가족.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연결시켜 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수입의 희망이다.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이선균) 집으로 향하는 기우.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의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 연교(조여정)가 기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줄거리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소모품(익스펜더블)으로,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미키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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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96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작 만나보기
어젯밤 발표된 오스카 시상식 후보작 !
올해 96회를 맞이한 미국의 가장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 오스카
씨네픽 유저분들이라면 수상작쯤은 쉽게 맞추시겠죠?
감독상 후보
작품상 후보
최다 노미네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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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야?
인간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다양한 종족이 생겨나고 국가라는 집단이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같은 인간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 왔다. 그건 역사적으로 무수히 벌어진 일이고, 거짓과 정치적인 전략이 늘 존재해 왔다. 그래서 인류는 그런 위험성을 대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정보들을 전달해 왔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진심으로 믿는다. 그 싱대방을 위해 어떤 것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인간들끼리 가족이 되거나, 특정 집단을 형성하여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서로 공통점이 있거나 같은 생각을 하는 부류다. 그런 걸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인간들은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는 첫 번째 사례와 충돌한다. 인간은 믿을 수도 있고, 믿을 수 없기도 하다.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결론인가.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는 지난 세 편의 시리즈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100년 이상이 지난 시기를 다룬다. 인간은 지능이 거의 없는 존재로 소수만 살아남아있고, 지능을 가지게 된 유인원이 언어를 구사하면서 생태계의 최강자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에게 인간이란 지능이 낮은 동물이면서 믿을 수 없는 존재여서 접근을 피하고 있는 존재다.
첫 번째 감정 - 노아의 의심
영화의 주인공 노아(오원 티그)는 한 부족의 젊은 청년이다. 성인식을 해야 할 정도로 성장한 노아와 친구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받는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높은 절벽 위에 있는 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씩 가져온다. 노아와 친구들은 맨 처음 등장부터 높은 절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특히나 노아는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독수리 둥지까지 올라간다. 무사히 알을 가지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노아는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이후 인간을 추적하던 다른 유인원 집단에 의해 부족의 공간이 모두 파괴되고 만다.
부족의 대부분이 납치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기절했다 뒤늦게 깨어난 노아는 곧바로 다른 부족원을 찾아 나선다. 이 과정에서 노아는 다른 유인원 라카(피터 메이컨)와 인간 메이(프레이아 앨런)를 만난다. 처음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난 노아는 메이를 무척 경계한다. 노아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인간은 위험하고 교활해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정보는 부족의 나이 든 장로로부터 교육받은 정보이고, 그것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과의 첫 만남부터 의심으로 시작한 노아는, 메이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지능이 있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더 크게 의심하게 된다. 물론 노아의 부족 사람들이 갇혀있는 곳과 메이가 가고자 하는 곳이 같고 목적이 같기에 힘을 합하지만, 노아의 마음속에 자리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의 말미 노아와 그의 부족에게 한 메이의 행동은 노아의 의심을 더더욱 부정적인 쪽으로 만들어간다. 이 영화 내내 노아의 의심은 조금 작아질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감정 - 메이의 두려움
그럼 반대로 유인원인 노아를 보는 메이의 감정은 어떨까. 메이의 진짜 생각은 영화 후반부가 되면서 더 크게 드러나게 된다. 영화 초반 메이가 처음 노아와 라카의 앞에 등장했을 때, 메이는 자신이 지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숨겼다. 지능이 낮은 존재처럼 행동해 먹을 것을 얻어내고, 따뜻한 담요까지 얻어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준다. 그렇게 지능을 가진 유인원들이 안심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메이는 자신의 똑똑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위기가 더 커지고 머리를 써야 하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온다. 바로 ‘노아’ 다. 마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주인공 시저가 유인원으로써 처음 입 밖으로 내뱉었던 ‘NO'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메이는 유인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거의 멸망직전에 있고, 인간보다 강력한 존재가 된 유인원은 인간에게 믿을 수 없는 존재다.
메이는 노아와 그 부족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은 모든 유인원들을 향하고 있다. 그 두려움은 메이가 가진 비밀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노아가 나쁘지 않은 유인원의 리더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그 두려움을 거두지 못한다. 그녀는 노아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권총을 숨긴 채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노아와 그 부족을 속였다. 이 영화 안에서 메이는 그 두려움에 완전히 종속된 인간이라고 느껴진다. 그 유인원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인간이 가진 지식과 기술들을 완전히 숨기는 행동으로 귀결된다.
세 번째 감정 - 프록시무스의 욕망
이 영화의 빌런인 프록시무스(케빈 듀런드)는 적어도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안에서 만큼은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목표가 뚜렷하다. 바다 옆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사용했던 벙커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여러 지식과 정보 그리고 무기들을 차지하는 것이 목표다. 그의 욕망은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한 번쯤 욕심낼만한 것들이다. 그는 영화에 등장해서 다른 유인원들을 향해 이야기한다. 힘을 합치면 강하다. 그 말을 토대로 조금은 강압적이지만, 다른 유인원들의 힘을 이용해 낸다.
그 말은 사실 과거 시저가 살아있을 때 유인원 집단이 가진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의 정치적 용어다. 과거 시저의 말이 모든 유인원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프록시무스의 그 말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의 목표대로 벙커를 열어 인간의 지식을 이용하게 되었을 때, 다른 유인원들도 잘 살게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프록시무스의 몫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프록시무스는 두려움과 의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모든 유인원을 통제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지능이 있는 인간들까지 차지함으로써 못하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타입인 그는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적어오 이 영화 안에서 목표가 드러나는 건 프록시무스와 노아뿐이다. 프록시무스는 자신의 욕망, 노아는 부족의 부활이 그 목표다. 개인의 목표와 집단의 목표가 충돌하고, 그것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 메이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건 이 영화가 끝까지 숨기다가 이야기가 끝나기 직전에 털어놓는다. 그건 인간의 생존욕망과 메이의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표출된다. 그 모든 설명을 보고 나면 맨 처음 메이가 등장했을 때부터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목표 역시 노아와 마찬가지로 인간 부족의 부활이다. 당연히 유인원 노아와 인간 메이의 목표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다시 시작되는 이 시리즈의 동력은 바로 그 목표의 충돌이다.
영화는 끝나기 전 다시 묻는다.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질문을 더한다.
‘유인원과 인간은 같이 살아갈 수 있는가’.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아마도 다음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을 것 같다. 이 영화를 연출한 웨스볼 감독은 영화 <메이즈러너> 3부작을 완성하면서 액션이나 CG연출을 매끄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수많은 유인원들의 모습을 화면에 자연스럽게 펼쳐놓는다. 특히나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이 바닷가 절벽에서 펼쳐지는데, 이 영화에 딱 맞는 완벽한 로케이션이었다. 노아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절벽 그리고 바다에서 들이치는 수많은 난관인 거센 파도, 댐의 붕괴로 인한 홍수는 노아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화면으로 펼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야기 구조도 노아가 한 부족을 살리는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서사의 구조에 그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는 건,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다. 영화관람을 모두 마친 관객에게 영화는 묻는다. 인간을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철학적 질문을 블럭버스터의 형식을 빌려 최첨단의 기술력으로 훌륭하게 던지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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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년을 기다려 깨달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약간 스포 있음)
세상 모든 이야기를 연구하는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한 고물상에서 우연히 구매한 유리병을 통해 정령 지니를 깨운다.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단 세 번. 마음속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랫동안 바라온 소원을 말하면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알리테아는 '소원에 관한 이야기는 경고가 담겨 있다'라며 그에게 소원 빌기를 거부하는데........ 지니는 무슨 사연으로 그 병에 갇혀 있었으며 알리테아는 무슨 소원으로 지니를 구원할까?
1. 내용은 많지만 어딘가 빈약한 스토리 라인
이 영화의 장점은 옛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려낸 미술에 있다. 전설 속 시바 여왕의 이야기부터 페르시아의 왕가의 생활상, 제피르의 발명품 등 흥미를 자극하는 신비로운 배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영화의 ost도 정말 좋아서 다시 듣고 있다.또한 이 영화에는 '알라딘'처럼 지니가 등장하는데 이번엔 램프가 아닌 유리병 안에 들어가 있다는 차이점도 재미있다.
여기서 지니는 정령으로서 등장하는데 알리테아는 정령은 실제로 있다고 믿고 있기에 지니가 등장했을 때 그는 지니의 천일야화에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흥미로운 세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떤 소원을 빌게 될지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게 왠걸 알리테아의 소원이 드러나는 순간 이 영화의 대한 기대가 하락한다. 이 때부터 갑자기 지니와 알리테아의 로맨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알리테아는 지니의 이야기를 잘 듣다가 뜬금없이 지니에게 사랑 고백을 해 당황스럽기만 했다. 알리테아의 소원은 '나를 사랑해달라'라는 것이었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녀가 사랑을 느꼈는지도 아이러니했다. 심지어 내 옆에 있던 어떤 관객 분이 '엥?' 하시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으니 이 의아함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겠거니 했다. 이후 두 캐릭터가 연인이 되면서 이야기의 국면이 전환된다. 고백씬이 뜬금없어서였는지 뒤이어 등장하는 연인으로서의 알리테아와 지니의 일상 장면에서도 이들의 사랑에 감정 이입하기가 힘들었다.
2. 사랑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일 때 성공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예상해본다면 '인생에서 사랑은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라는 것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던 듯하다. 그래야 상대를 자신의 열등함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온전히 상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니가 유리병 속에 3번이나 갇혀 있었던 이유는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바 여왕에게는 유일무이한 사랑이 되고 싶어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방해하기도 하고 한 번은 죽을 운명이었던 한 페르시아의 시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한다. 또한 가장 사랑했던 여인 제피르를 떠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소원을 말하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하지만 지니를 가두었던 세 여자들 모두 궁극적으로 지니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니의 사랑은 그들의 갈망을 이뤄주는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고 그들의 목적은 지니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다. 세 여자들은 지니를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도구로서 사용했을 뿐 목적이 아니었기에 관계 속에서 을일 수밖에 없었던 지니는 항상 관계에서 패배해 유리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지니는 소원을 통해 남을 구원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그를 사랑하겠으니 나를 사랑해달라는 직접적인 고백만이 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는 사랑 빼고 모든 것을 이룬 알리테아 뿐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것 빼고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던 그녀였기에 지니를 더이상 도구로써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서로의 이해 관계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3.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
사람들은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점들을 상대에게서 찾으며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은 이런 사람들이 찔릴 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의 부족함을 상대에게 채워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그저 온전히 나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것이다.결국 알리테아와 지니가 나눈 길고 긴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그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이 하고 싶다면 상대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일어서고 자립할 것, 그것부터가 사랑의 시작이다.
영화의 전개가 급작스러운 면이 있어 관객마다 해석이 다를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리뷰도 찾아보려고 한다. 왠지 내가 놓친 영화의 메타포가 있을 것 같고 정령인 지니가 전자파로 이뤄진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 남겨주시기를 바란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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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메이크하며 바뀐건 시대랑 소품, CG뿐?
리뷰하기에 앞서, 본 영화는 1984년 영화인 '초능력 소녀의 분노'를 리메이크한 영화이다.
제작사는 블럼하우스인데 1933년 영화 '투명인간'을 리메이크 겸 재해석해 만든 '인비저블맨'이 정말 만족스러운 공포영화였기에 이번 작품을 기대한 부분이 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감상해보니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우선 리메이크를 하면 팬들은 재해석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사이코'가 혹평을 받은 이유가 말 그대로 원작을 똑같이 따라갔기 때문인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파이어스타터도 필자가 1984년 작품을 안 봤지만 "대체 현대로 리메이크하면서 뭐가 바뀐거지?" 이런 생각이 든다.
원작 줄거리를 보니 캐릭터 일부 추가되고 전개가 좀 바뀌고 했는데, 후술하겠지만 줄거리가 아쉬웠어서 괜히 바꿨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외에 바뀐 거는 솔직히 시대가 바뀜에 따라 추가된 소품들(CCTV가 사용된 연출, 스마트폰 얘기 등), CG가 사용됐다는 거 정도밖에 없어보인다.
그리고 줄거리는 상당히 아쉽다.
등장인물들이 가진 초능력을 너무 편의적으로 전개하는데 남발되고, 특히 마무리는 대체 뭐지 싶을 정도로 주인공과 등장인물의 행동에 납득이 안 간다.
후속작 제작 의사가 있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으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개인적으로는 억지로 떡밥 남기는 거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라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볼거리도 나쁘진 않지만 그렇게까지 훌륭한 것도 아니다.
저예산으로 잘 뽑아내는 블럼하우스 답게 CG는 괜찮게 나와서 보는 맛은 있다.
그런데 영화의 볼거리를 담당하는 방화 능력이라는게, 지금 와서 보면 꽤 진부하다.
공중부양, 변신 같이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능력과는 다르게 어떻게보면 그냥 불일 뿐이기 때문이다.
막말로 영화에서의 방화 능력을 직접 보고 싶다면 그냥 어따가 기름 좀 붙고 라이터로 불 붙이면 된다.
방화가 무슨 불을 뿜어내고 손에 불이 나오고 그런게 아니라, 그냥 말그대로 소환 시키는 거라, 수많은 초능력물들이 나온 현대에 봐서는 꽤진부하게 느껴진다.
필자의 평을 보면 흔히 말하는 '망작'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 정도 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가끔씩 선사하는 볼 거리가 괜찮고, 줄거리도 급전개나 편의적인 전개가 보일 뿐이고 마무리가 황당한거지 처참한 수준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러닝타임도 1시간 반 정도로 짧아서 킬링 타임용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
보면서 따분하거나 지루하지는 않다만, 강력히 추천하기는 어렵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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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퀄의 함정에 걸려들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캐피톨과 12개 구역 간의 전쟁 때문에 아버지와 재력을 잃은 명문가 자제 '코리올라누스 스노우'(톰 블라이스). 남은 건 자존심과 출세욕 밖에 없는 그는 사촌누나 '티그리스'(헌터 샤퍼)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품위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게임메이커 '골 박사'(비올라 데이비스)가 주관하는 제10회 헝거게임 멘토로서 멘티를 우승시키면 거액의 장학금을 탈 수 있기 때문.
그러나 희망도 잠시, 그는 12구역 여자 조공인 '루시 그레이 베어드'(레이첼 지글러)가 자기 멘티라는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그녀는 노래만 부를 줄 알지, 싸움이나 생존에 유리한 능력은 일절 없기 때문. 그렇지만 스노우는 포기하지 않는다. 루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헝거게임 규칙을 새로 만드는 것은 물론, 반칙도 서슴지 않는다. 그녀의 우승과 생존은 그의 성공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기도 하니까.
8년 만의 프리퀄, 그런데 재미가 없다?
반쯤 무너지고 폐허가 된 경기장을 돌아다니는 20명가량의 십 대 소년 소녀.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눈으로는 피할 곳을 찾으며, 귀로는 혹시 모를 선물 소리를 기다리면서 입으로는 비명을 지른다. 단 한 명에게 주어진 생존의 기회를 잡기 위해. 이 광경을 생중계로 보는 금발머리 소년. 그의 시선은 무지갯빛 드레스를 입은 12구역 소녀에게 꽂혀 있다. 그녀가 살아남아야 멘토인 자신이 출세할 테니. 또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므로.
<헝거게임: 더 파이널>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프리퀄,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이 영화에는 시리즈의 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원초적이고 잔인한 피, 땀, 눈물, 그리고 쇠맛이 있다. 비극 속에서 피어나는 청춘의 로맨스도 있다. 뒷배경에는 이 모든 이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정치 논리도 깔려 있다. 더 나아가 <헝거게임> 4부작과의 연결고리도 숨어 있다.
그런데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흥미롭지 않다. 원작자 수잔 콜린스가 제작에 참여했고,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과 제임스 뉴튼 하워드의 음악이 돌아왔는데도. 제10회 헝거게임은 보이는 것보다 치열하지 않고, 스노우와 루시의 사랑은 캣니스와 피타의 로맨스만큼 애절하지 않다. 스노우의 고뇌와 성장도 캣니스의 고통만큼 진하지 않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프리퀄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헝거게임>의 묘미, '보여주기'
잠깐 <헝거게임>으로 되돌아가보자. 이 시리즈는 4편의 영화로 30억 달러에 가까운 흥행을 기록했다. <헝거게임>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힘은 뭘까? 인간성에 대한 고찰,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 미디어의 영향력 같은 철학적, 사회적 함의 등을 거론할 수 있겠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답이 있다. 헝거게임 그 자체다. 구체적으로는 캣니스의 시점에서 헝거게임에 함께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줬기에 <헝거게임>은 성공했다.
그렇다면 관객은 왜 캣니스에게 이입했을까? 영화가 캣니스라는 인물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헝거게임>에는 흐름이 끊기는 듯한 지점이 있다. 일부러 호흡을 고르고, 템포를 죽인다. 캣니스의 상황이나 심경을 애써 설명하는 대신 그저 보여준다.
예를 들어 1편 도입부에서 캣니스는 악몽을 꾼 여동생을 달래고 숲에서 사냥을 한다. 암시장에서 먹거리를 구하고, 추첨에 참여한다. 카메라는 끔찍한 하루를 보내는 한 소녀의 하루를 그저 보여준다. 게임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규칙, 설명 등은 스치듯 등장하고, 암시될 뿐이다.
2편도 마찬가지다. 호수와 숲에서 평상시처럼 사냥을 하지만, 활을 쏘는 순간 자기가 죽인 조공인의 환상을 보며 PTSD를 겪는 캣니스를 보여준다. 3편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치료받는 캣니스를 비춘다. <헝거게임> 본편에는 캣니스의 일상에 자연히 스며들 여백이 있었다. 경기장이나 전쟁터에서 관객이 그녀와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며 활시위를 당긴 이유였다. 현실에서도 '세 손가락 경례'를 사용할 정도로.
'보여주기'는 없고 '설명'으로 가득하다
안타깝게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본편의 미덕을 살리지 못했다. “게임의 초기, ‘판엠’의 권위주의 기원, 순종적인 사회를 만들게 된 의식을 되짚고 싶었다"는 원작자의 말대로 헝거게임의 탄생을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있다. 스노우의 삶은 세 챕터로 분해된다. 그의 윤리적 딜레마, 변화와 깨달음이 헝거게임의 뼈대를 이루게 된 과정을 낱낱이 분석한다.
챕터 1 "멘토"에서 스노우는 누구보다도 헝거게임 멘토 역할에 진심이다. 성과를 보여주고 장학금을 받아야 집 월세를 내고 대학에 갈 수 있으므로. 두 번째 챕터 "수상"에서 그의 절박함은 두 감정으로 분화한다. 루시와 서로를 구해주며 믿음을 쌓고, 사랑을 싹 틔운다. 동시에 친구 '세자누스'(조쉬 안드레스 리베라)를 구하기 위해 들어간 경기장에서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할 만큼 강렬한 생존욕구를 체감한다.
챕터 3 "평화유지군"에서는 그의 사랑과 출세욕이 충돌한다. 루시를 살리려고 반칙을 저지른 대가로 12구역에서 군복무하는 벌을 받은 스노우. 그는 고향에 돌아온 루시와 재회하고, 연인이 된다. 하지만 그는 끝내 출세욕을 버리지 못했다. 같이 군복무 중인 세자누스와 12구역 사람들의 반역행위를 고발해 캐피톨로 돌아갈 기회를 잡는다. 연인과 함께 숲으로 도망가 자유롭게 살려했던 루시는 그런 스노우의 곁을 떠난다. 루시는 실종되고, 스노우는 애인에게 버려졌다는 배신감과 고통 속에 남겨진 채로 로맨스는 파탄 난다.
캐피톨로 복귀한 스노우는 게임의 존재 이유를 묻는 골 박사에게 답한다. “이 세상 전체가 헝거게임의 경기장"이라고. 사람을 죽이는 생존욕, 친구를 배신하는 출세욕, 인생도 포기하는 사랑과 자유를 향한 열망. 이 욕망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고 혼란과 고통을 초래하는지 직접 목격하고 느꼈기 때문.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욕망과 희망을 교묘하게 조종하도록 헝거게임을 가다듬는다. 판엠을 지탱할 유일한 질서를 만들기 위해.
프리퀄의 함정에 빠지다
이처럼 157분을 꽉 채운 세 개의 챕터는 프리퀄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한다. 게임 전 행진, 인터뷰, 점수 평가를 비롯해 선물 낙하산, 스폰서 제도, 시체 처리 방법까지. 본편에서 등장한 헝거게임이 그 모습을 갖춰야 했던 모든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헝거게임의 역사는 알 수 있어도 정작 스노우라는 캐릭터와 그의 이야기는 뇌리에 남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대목이 없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처음부터 스노우의 서사를 설명하기 바쁘다. 불우한 가정환경, '하이바텀 총장'(피터 딘클리지)을 비롯한 대인 관계와 아카데미 내 입지까지. 모든 정보를 대사에 담아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캣니스를 소개할 때 보여준 여유는 없다. 가능한 분량을 아껴서 스노우를 사건 속에 계속해서 던져놓는 데 몰두한다. 그가 헝거게임을 구상할 계기를 많이 마주칠수록 본편과 프리퀄의 연계는 강화될 테니.
그 사이 스노우는 매력을 잃는다. 캣니스와 달리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그의 삶과 일상에 스며들 여유가 없으니 관객은 그에게 공감할 수 없다. 그의 고뇌도 단순히 제시될 뿐, 관객과는 분리되어 있다. 그가 악인으로 변해갈수록 괴리감은 더 커진다. 즉, 그의 서사는 헝거게임이라는 시스템을 만드는 재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셈이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헝거게임 설정집에 불과해진다.
바로 이 대목이 프리퀄의 함정이다. 프리퀄은 언제든 독립된 이야기가 아닌 설정놀음으로 전락할 수 있다. 세계관과 역사를 설명하느라 캐릭터의 개성이나 서사보다 메시지에 힘을 주기 쉽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흥행 시리즈 <스타워즈> 프리퀄과 <호빗> 삼부작만 해도 캐릭터가 평면적이고, 이야기도 평범하며, 기존 시리즈와의 연결고리만 부각된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 바 있다.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도 마찬가지다.
게임도, 로맨스도 무미건조하다
이처럼 메인 플롯이 중심을 못 잡으니 다른 문제도 튀어나온다. 우선 제10회 헝거게임은 흡입력이 부족하다. 이번 게임은 일종의 베타 버전이기 때문이다. 스노우의 이야기처럼 헝거게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하기 위해 소비되는 재료일 뿐이다. 그러니 조공인이 잔인하게 죽어도, 루시가 위험에 빠져도 긴장감이 고조되지 않는다. 외부자인 스노우 시점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연출이 많은 것도 도움이 안 된다.
이에 더해 루시의 존재감도 약하다. 물론 몇몇 장면에서 루시는 캣니스와 겹쳐 보이는 임팩트를 순간적으로 준다. <헝거게임: 모킹제이>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노래 "매다는 나무 (The Hanging Tree)"를 부르거나, 게임 전 인터뷰에서 헝거게임과 캐피톨을 은연중에 비판하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미 2021년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인정받은 레이첼 지글러의 가창력도 한몫한다.
하지만 루시가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은 구조적인 한계가 분명하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인물이다. 갑작스레 헝거게임에 휘말리고, 후반부에는 스노우의 변화를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헝거게임은 몰입도가 약하고, 스노우 캐릭터는 매력이 없다. 자연히 그녀가 게임에서 활약할 수단도, 스노우와 루시의 로맨스가 임팩트를 남길 방법도 마땅치 않다.
종합하면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팬들을 위한 잔치에 가깝다. 팬이라면 캣니스와 스노우, 캣니스와 루시 사이에서 이스터에그를 찾는 재미가 있다. 반면에 일반 관객이라면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운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버겁다. 이는 챕터 2에서 제10회 헝거게임이 끝나면, 팬과 일반 관객의 반응이 나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프리퀄 작품 중에서도 유달리 확장성이 부족한 영화인 셈이다. 애석한 일이다. 애초에 <헝거게임> 시리즈가 8년 전에도 100만 관객을 넘지 못했던 역사를 고려하면, 수능 특수를 맞는다 해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의 앞날은 밝아 보이지 않으니.
Poor 형편없음
비대해진 욕심과 반비례하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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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계몽’될 수 있을까
주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소년의 시간〉에 관한 요란한 상찬이 이어졌다. 원래 인기 있는 드라마는 나중에(심지어는 몇 년 후에) 시차를 두고 보는 걸 좋아하는 터라 버텼다. 그러나 도저히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느낌에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했다. 작품에 쏟아진 엄청난 반응에 과장이나 부풀림은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화제가 된 글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이었다. 전 세계가 청소년 남성의 극우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총 4회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모든 회차가 원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실제 원테이크로 촬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렇다. 원테이크의 강점은 화면 속 인물들의 경험을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접해 몰입감을 높인다는 점이다. 축약된 시간을 수동적으로 전달받는 게 아니라 주인공들과 ‘함께’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듯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청(소)년 남성의 극우화라는 시급한 주제에 걸맞는 연출 기법이다.
열세 살 난 청년 제이미가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되고 경찰 조사를 받는다(1화). CCTV 등은 확보되었지만 범죄에 쓰인 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건의 동기가 오리무중이다. 이 앳된 얼굴의 남자아이가 도대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담당 형사가 단서를 찾기 위해 제이미의 학교로 가서 그와 피해자 케이티의 친구들을 만난다(2화). 드라마가 학교를 그려내는 방식을 눈여겨보자. 학교는 처참하고 황량하며 절망적이다. 학교에서는 구토, 양배추, 정액 냄새가 난다. 학생들은 통제 불능이다. 선생님은 그런 학생을 윽박지르거나 어수룩하게 끌려다니기만 한다. 지옥이다. 학교는 “카오스”고, “동물 우리”다. 정말 학교가 저런 곳이었나? 드라마는 자극적인 뉴스로만 접하던 학교 현장을 ‘증명’한다. (다른 시공간에 사는) 내 학생 시절의 기억과 경험이 붕괴되는 듯했다.
학생들을 어찌할 줄 모르는 건 선생님뿐만이 아니다. 경찰, 부모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학생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독해할 능력이 없다. 참다못한 경찰의 아들이 몰래 그를 찾아온다(그는 ‘유능한’ 경찰인 아빠에게 “아빠는 애들이 뭐 하는지 못 읽어”라고 말한다). 경찰의 아들을 통해 인스타그램에서 제이미와 케이티가 주고받은 댓글과 게시물이 남성성에 관한 잔혹한 조롱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들 또래의 세계관에서는 80퍼센트의 여성이 20퍼센트의 남성을 좋아하는데, 제이미는 그 20퍼센트에 들지 못했다. 케이티를 포함한 많은 또래 학생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제이미를 조롱했다는 것도 밝혀진다. 고작 열세 살짜리 남자애가 여자를 ‘갖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했고, 그 절망이 조롱당하자 사람을 죽였다. 능력주의 경쟁 사회에서 학교는 지옥이고, 어른은 무능하며, 학생들은 능력주의에 연동된 젠더 질서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서로를 혐오한다. 이것이 ‘교육’ 현장 학교의 모습이다. 2화의 마지막, 부감 숏으로 학교를 비추던 카메라가 케이티가 살해당한 곳으로 추정되는 주차장으로 클로즈업된다. 그곳에는 죽은 케이티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너무 늦은 ‘클로즈업’은 아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어느 ‘유능한’ 형사의 무력감을 대변한다.
얼마 후 심리 전문가가 보호 시설에 수감된 제이미를 면담한다(3화). 전문직 여성인 그녀는 노동 계급에서 태어나 자신을 ‘무시’한 또래 여성을 살해한 제이미와 정반대에 있는 인물이다. 두 사람의 숨 막히는 공방이 이어진다. 제이미는 자신을 ‘파악’하려 드는 전문가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궁금해한다(‘전문직’과 ‘노동 계급’ 사이의 긴장은 상담사와 보호 시설의 경비원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제이미는 다른 성별인 그녀가 자신의 범행 동기를 ‘이해’할 수 있을지 우려하기도 한다. 당신이 남자의 박탈감을 아느냐는 것이다. 면담이 진행되며, 제이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노동 계급 남성성을 갖춘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가 들어 있다는 점이 점차 드러난다. 다르게 말하면 ‘루저 남성성’이다. 제이미는 계급, 지위, 연령 등 여러 측면에서 여성 전문가와 대등하게 맞설 수가 없는데, 그는 특유의 영민함과 살인을 저지른 남성이라는 데서 오는 공격적 남성성으로 종종 상황을 반전시키기도 한다.
제이미는 이 대화가 불편하면서도 즐겁다. 대화를 이후에도 계속 이어가고 싶다. 그가 지금껏 해보지 못한 진솔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이해’받는 느낌을 얻고, ‘전문직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루저 남성성의 결핍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는 몇 번의 긴장감 넘치는 밀도 높은 대화로 자기 일을 끝낸다. 그래서 더는 제이미를 만날 필요가 없다. 그녀는 면담을 마친 후 힘든 과제를 마쳤다는 듯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다시 제이미를 마주할 필요는 없다. 제이미는 폭주한다.
이 드라마에서 3화가 제일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의 글쓴이와 3화의 전문가는 같은 입장을 취하고, 같은 정보를 전한다. 그들은 묻는다. 저 남자아이들이 도대체 왜 저러지? 대화 후 ‘이해’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거나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남자아이는 다시 외롭게 남는다. 기존의 분노와 박탈감은 더욱 커진다. 이 회차를 보고 나서, 수많은 글의 ‘분석 대상’이 되는 남자아이들이 왜 자신들을 ‘이해’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커다란 반감을 갖는지 ‘이해’가 됐다. 누군가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퍼즐 조각처럼 활용된다면, 나 역시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제이미의 분노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과 접속하고 대화하며 관계 맺을 필요성을 분명하게 환기한다. ‘계몽’의 의도를 내포한 접근이 아닌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서 출발하는 내재적 접근, 즉 카메라의 방향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드라마는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4화). 아빠의 생일날, 누군가가 가족의 자동차에 ‘강간범’이라는 낙서를 남긴다. 제이미의 가족들은 평생을 살아온 곳에서 낙인과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빠는 비눗물로 이 낙서를 지우려다 실패하고, 결국 분노에 차 페인트를 통째로 낙서 위에 쏟아버린다. 깔끔하지 않게, 얼룩덜룩 지워져버린 낙서는 이 가족이 마주한 현재와 미래의 은유다. 자동차가 달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 저 차는 왜 저렇게 더럽냐며 수군거릴 것이다. 엔딩은 그래도 자동차가 ‘달릴 수 있다’는 데 더 초점을 둔다. 부모는 이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 아닐까 자책하고, 특히 아빠는 남성성의 ‘건전한’ 계승이 실패했다는 데 좌절한다. 그러나 그 자책과 좌절 속에서도 남은 가족이 어떻게 용기와 희망을 길어낼 수 있는지를 작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어느 청소년 루저 남성과 연관된 하나의 세계(학교, 가족, 남성성, 범죄)가 갈무리된다.
〈내 아들을 극우 유튜버에서 구출해왔다〉의 글쓴이는 아들을 ‘구출’했고, 〈소년의 시간〉에서 남은 가족은 아들과 떨어진 채로 힘겹게 자기 자신을 지탱한다. 현실과 드라마라는 각자의 무대에서, 계급적·문화적 자원의 차이로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이 두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물음과 과제를 남긴다. 내가 얻은 결론은 이렇다. 〈소년의 시간〉과 같은 드라마는 카메라의 방향을 바꾸어서, 즉 ‘루저 남성’이 그에게 박탈감을 주는 대상을 바라보는 방향으로도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이해’ 혹은 ‘공감’ 혹은 ‘계몽’이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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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엘비스> 2차 예고편
2022년 가장 폭발적인 무대가 시작된다!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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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피 아워> 메인 예고편
30대 후반에 접어든 네 명의 친구 아키라, 사쿠라코, 준, 후미.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준은 이혼 소송 중이라는 폭탄선언을 하고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그러면서 이들은 "진짜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자신을 솔직히 들여다보며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