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11-05 23:46:42
시듦을 인정하며 완성되는 사랑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리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꽃다발의 의미
- 달라진 신발과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장
- 이어폰과 함께 듣는 음악의 의미
- 엔딩 결말 해석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We Made a Flower Bouquet, 2021)
시듦을 인정하며 완성되는 사랑
개봉일 : 2021.07.14.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로맨스, 드라마
러닝타임 : 124분
감독 : 도이 노부히로
출연 : 아리무라 카스미, 스다 마사키, 키요하라 카야, 호소다 카나타, 오다기리 죠, 토다 케이코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각자 다른 꽃을 꺾어 이리저리 배치하고 꾸미면 예쁜 꽃다발이 하나 완성된다. 색, 질감, 가지의 길이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다발 안 꽃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것들이 원래부터 하나의 덩어리였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이런 꽃다발처럼 보이는 사랑을 한 청춘 남녀의 이야기다.
무기와 키누는 막차가 임박한 지하철역 앞에서 처음 만난다. 서로 부딪히며 삐끗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막차를 놓치고, 어쩌다 보니 개찰구 앞에 있던 직장인 두 남녀와 함께 바에서 첫차를 기다리게 된다. 무기는 딱히 공감할 수 없는 직장인 남녀의 대화를 불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키누는 무기의 말과 표정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각자의 길로 찢어지려던 찰나. 공통점 하나로 말문을 트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운명임을 직감한다.
무기와 키누가 생각하기에 둘은 서로 공통점이 너무도 많았다. 처음 만난 날 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같은 작가를 좋아하고 같은 책을 읽었고, 같은 뮤지션을 좋아했으며 같은 날의 공연 표를 사놓고 가지 못한 것까지 똑같았다. 두 사람은 첫차가 올 때까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고 다음을 약속한다. 그리고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 설렘과 특별함을 느끼며 연인이 되고 나의 일부를 꺾어내 ‘똑닮은 우리’라는 하나의 꽃다발을 만들어간다.
무기와 키누는 이 꽃다발이 조화롭고 완벽하다고, 이대로 평생 가슴에 품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뿌리를 내리며 자라나는 화분 속 꽃과는 다르게 흙도 뿌리도 없는 꽃다발 속에 자리 잡은 꽃들은 각자의 속도로 시들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시들어가는 우리를 느끼며 이별을 생각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다발,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말을 이렇게 오목조목 곱상하게 펼쳐내는 영화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누군가의 이상행동, 문제를 만드는 제3자,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잉 감정 등 호불호 포인트가 될만한 것들을 싹 배제한 채 최대한 담백하게 사랑과 이별의 순간을 그린다.
시간의 흐름에 올라탄 연인
달라진 신발과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장
아르바이트와 학교 성적 유지 정도의 비교적 무겁지 않은 책임만 주어지는 나이에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라는 불안정한 흐름에 함께 올라탄다. 이들은 키누가 학교를 졸업할 때쯤, 부모님의 압박과 취업 문제, 작은 경제적인 문제를 맞이하지만 그것 또한 나름의 로맨스로 승화한다.
취업을 못해 집안에서 눈엣가시가 된다면 집을 나와 함께 살면 되고, 집이 역에서 멀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행복한 데이트 코스로 만들면 된다는 식으로.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점점 깊어지고 무기와 키누는 연인을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잠시 꿈을 접어두고 현실에 몰두하게 된다.
취업만 성공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더 멀리 벌어진다.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기는 장면들이 점점 줄어들고 키누는 거실 창문 너머에, 무기는 방 창문 너머에 담기는 장면들이 많아진다. 말하지 않아도 늘 함께 신었던 흰색 스니커즈는 문 안을 바라보다 문 바깥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끝내 사라져버린다. 흰색 스니커즈가 있었던 자리엔 다른 모양새의 구두 두 켤레가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무기는 ‘돈이 없으면 키누에게 밤일을 시켜보라’는 선배의 말에 자극을 받아 열심히 취업을 준비했지만 막상 취업을 하고 나선 키누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다. 키누에게 상처를 줬던 딱딱한 면접관을 욕하던 그는 어느덧 그 면접관처럼 이마무라 나츠코의 ‘소풍’을 읽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키누에게 상처를 준다. 일에 휩쓸리던 무기는 학생 때처럼 영화, 책, 게임을 사랑하는 키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몇 번의 갈등이 생긴다. 이때 각자의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엔 한때 즐거운 마음으로 공유했던 거대한 책장이 버티고 있다.
키누는 새로 나온 만화책이나 함께 보기로 했던 연극 등 예전에 무기가 좋아했던 것들을 주제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노력하지만 무기는 키누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일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키누는 이런 무기 앞에 앉아 빨래를 개고 옷장 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빨래와 함께 섭섭한 마음도 함께 접어 넣는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
하나의 이어폰을 나눠 쓰던 두 사람
오프닝신에 나온 무기와 키누는 “이어폰 하나를 나눠 끼고 듣는 건 둘이 다른 음악을 듣는 일”이라며 분개한다. 음악은 최소 스테레오 채널(2채널)로 구성되어 있는 콘텐츠라 왼쪽, 오른쪽에서 나오는 각자 다른 소리를 같이 들을 때만 그 음악을 제대로 들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모노 채널이 아니다. 연인이라 하여 사랑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할 순 없다. 다른 채널에 있는 연인이 어떤 사랑을 원하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고려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노력한 것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랑은 온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처음 고백하던 날, 무기와 키누는 한 이어폰을 끼고 레스토랑 점원 포린의 음악을 듣는다. 어렸던 무기와 키누는 한 이어폰으로 같은 음악을 듣고 ‘무기와 키누의 사랑’이라는 똑같은 꿈을 꾸며 노력한다.
무기는 키누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회사에 취업한다. 키누도 무기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취업을 하고 무기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취미 생활을 공유하려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인이 어떤 사랑을 원하고 있는지, 그가 이 사랑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진 헤아리지 못한다.
무기와 키누는 첫 만남부터 수많은 공통점을 공유했기에 자연히 연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보단 무기는 키누가, 키누는 무기가 취업, 지인의 죽음, 시간이라는 변화 앞에서 자신과 같은 태도를 취하길, 같은 결말을 바라길 기대한다.
하지만 무기와 키누는 많은 부분이 닮은 타인일 뿐,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무기는 키누가 열광했던 미라전을 무서워했다. 미라전을 보고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눌 때, 키누는 전시회 도록을 펼치며 흥분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무기는 애매한 표정으로 키누의 말을 듣다가 점원이 오자마자 재빠르게 미라로 가득한 도록을 덮어버린다. 키누는 무기의 가스탱크 영상을 보다가 깜빡 잠들어버린다. 무기는 키누가 가장 재밌는 장면에서 1시간 동안 잠들었다며 아쉬워한다. 두 사람은 이러한 사소한 다름을 알아채지 못하고 나와 다른 연인에 오래도록 실망하고 슬퍼한다.
무기와 키누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이별을 결정한다. 그리고 ‘똑닮은 우리’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고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라전과 가스탱크에 느꼈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지금껏 듣지 못했던 다른 채널에 담긴 소리를 들으며 ‘무기와 키누의 사랑’이라는 꿈의 마지막 소절을 완성한다.
시간이 지나며 무기와 키누의 꽃다발은 싱그러움을 잃어갔지만 그 과정은 전혀 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고 시들어갔다기보단 완성되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두 사람은 아름답게 말라붙은 우리라는 꽃다발과 함께 펼쳤던 베란다 커튼을 뜯어 정리하고 각자의 길로 향한다.
이별 후 두 사람은 각자의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듣고 다른 이와 각자의 연애를 이어간다. 현재의 연인은 음악을 듣는 방법부터 나와는 다른, 옛 연인처럼 나와 똑 닮았다고 말할 순 없는 사람이지만 무기와 키누는 그들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고 현실적인 사랑을 찾는다.
사랑한다고 꼭 하나의 이어폰을 갈라 같은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연인과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목표점을 가진 사랑을 하더라도 나의 것을 그에게 들려주고 그의 것을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 그것 또한 사랑임을. 무기와 키노는 어린 사랑의 끝에서 그것을 깨닫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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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퓨리오사가 지켜낸 희망의 씨앗
누구나 자신만의 희망이 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 줄 그 희망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몇 번이나 찾아오는 절망적인 상황은 삶을 더 이어나갈 힘을 빼놓는다. 더 나아갈 힘이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 마지막까지 감추어두었던 희망은 꺼내어들 수 있는 마지막 무기다. 그 희망을 생각하면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조금씩 되찾아간다. 만약 희망조차 없다면 그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먹고 자는 문제만 간단히 해결할 뿐, 나쁜 상황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2015년에 개봉했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희망을 무기로 꺼내든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퓨리오사(샤를리스 테론)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생명의 땅으로 가기 위해 임모탄(휴 키스번)에게 갇혀있던 여성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퓨리오사는 모든 여성들의 희망이었고, 그 희망의 여정에 맥스(톰 하디)가 우연하게 끼어들게 되면서 다각도로 전개되는 추격전이 펼쳐졌었다.
이번에 개봉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전편에서 희망의 전사였던 퓨리오사의 성장 서사를 다룬다. 사실 성장 서사라기보다는 그녀가 겪었던 모든 절망들을 보여주면서 그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과정을 보여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의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에게 행복한 순간은 어린 시절 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짧은 행복의 기억 때문에 그녀가 수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영화는 그녀의 어떤 감정들을 전달하면서, 그가 겪었던 수만은 절망들을 보여주고 있을까.
[첫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절망
영화의 대부분은 절망으로 가득 차있다. 핵전쟁으로 황폐화된 지구는 끝없는 사막으로 바뀌었고, 그 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누군가의 물과 식량을 탈취한다.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 이 시기에 아직 푸르름을 간직한 공간이 있었다. 바로 퓨리오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그런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외부인을 강력하게 경계하지만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퓨리오사가 외부 침입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납치되면서 그녀의 절망이 시작되었다. 영화 초반 퓨리오사의 엄마가 납치된 퓨리오사의 뒤를 따라가는 길고 긴 추격장면은 절망을 맞이하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다. 여기엔 두 가지 절망이 섞여 있다. 유일하게 존재하던 푸른 지상 낙원이 외부에 노출되어 버렸다는 것과 그곳 출신 아이인 퓨리오사가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끝까지 퓨리오사를 찾기 위해 추적하지만 결국 그 집단의 우두머리인 디멘투스(크리스 햄스워스)에게 붙잡히고 만다. 퓨리오사는 바로 앞에서 엄마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퓨리오사는 행복의 상징인 낙원에서 멀어졌고, 점점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녀의 고통은 커진다. 초반의 긴 추격장면은 긴 안전끈이 늘어나가 끊어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가 죽임을 당한 후 십여 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퓨리오사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였던 잭(톰 버크)을 눈앞에서 잃게 된다. 그 역시 디멘투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퓨리오사에게 가장 큰 절망을 선사한 디멘투스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한 존재를 하찮게 보고 그저 자신의 재미를 위해 제거해 버렸을 뿐이다. 그렇게 퓨리오사의 절망은 더욱 커지고, 그 절망을 준 존재를 향한 복수심은 더욱 커져만 간다. 영화 내내 디멘투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자동차들로 퓨리오사와 일행을 누르고 파괴한다. 영화는 거대한 디멘투스의 차량이 퓨리오사의 자동차를 짓밟는 모습을 담으며 퓨리오사의 절망을 처절한 액션 장면에 담고 있다.
[두 번째 감정] 퓨리오사의 분노와 복수
절망은 당연하게 분노의 감정으로 바뀐다. 퓨리오사는 임모탄이 지배하고 있는 시타델에 숨어 살면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퓨리오사의 분노가 조금씩 쌓여가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그 과정은 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 것이어서 단번에 폭발적으로 쌓인 것은 아니다. 퓨리오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고,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복수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도 극단적으로 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고 시타델의 시스템 속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탈출의 기회를 엿볼 수 있는 위치를 노렸다. 결국 수송 트럭으로 탈출을 감행하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만난 잭은 <매드맥스> 시리즈의 모든 남자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인물이다. 그는 퓨리오사 내면에 숨어있는 분노를 발견해 내고, 그것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무심하게 알려주는 인물이다.
영화 중반부에 잭과 퓨리오사가 무기 농장에서 디멘투스 일행에게 습격을 받는 장면이 있다. 무기 농장의 거대한 탑이 무너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 그 상황을 겨우 벗어나지만, 그 액션 장면처럼 그 두 사람은 붕괴되고 있었다.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퓨리오사는 결국 마음속에 복수만이 가득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세 번째 감정] 모두의 희망이 된 퓨리오사의 희망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액션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비슷한 추격장면이다. 이 추격을 하기 위해 퓨리오사는 바퀴가 하나 없는 자동차를 타고 가게 된다. 마치 팔 하나가 없는 퓨리오사의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 그렇게 추격을 시작한 퓨리오사는 영화의 초반 자신의 엄마가 끝까지 자신을 추적해 왔던 것처럼 끝까지 디멘투스를 추격해 낸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 그리고 유일한 믿음을 주었던 잭의 복수를 하기 위해 애쓴다.
사실 이런 복수의 전체 과정에서 퓨리오사는 희망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준 복숭아나무 씨앗 하나를 잊지 않았다. 그녀가 입안에 넣어 보호하는 그 작은 씨앗은 그녀가 지켜야 할 최후의 희망이다. 이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이야기 직후에 벌어지는 내용을 다루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까지 이어서 보고 나면 퓨리오사가 지켜냈던 그 희망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희망이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그 희망을 지켜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희망의 동력을 나눠주었다.
영화 속 빌런인 디멘투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디멘투스는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또 다른 빌런인 임모탄은 정상적인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따라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독재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아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디멘투스에겐 그런 희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며 삶을 이어온 인물이다. 그가 잭을 죽이는 장면에서 혼잣말로 재미없다고 웅얼거리는 장면에서 그의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퓨리오사는 자신의 희망으로 무작위성, 혼란, 무계획의 대표적인 인물인 디멘투스에게 일종의 형벌을 내린 셈이다.
퓨리오사의 서사는 이번 영화로 완성되었다. 앞으로 <매드맥스> 시리즈가 더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2015년부터 시작된 <매드맥스 사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궁금한 인물이었던 퓨리오사에겐 숨겨진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도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담겨있고, 한 액션 시퀀스가 꽤 길게 이어진다. 전작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프리퀄 영화다. 전작이 액션으로 서사를 완성했다면, 이번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는 액션과 음악 그리고 퓨리오사의 성장이야기로 길게 서사를 이어 완성했다. 전편이 직렬로 이어진 영화라면, 이번 영화는 병렬로 펼쳐 다각도로 퓨리오사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한다. 퓨리오사의 희망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끝까지 시선을 잡아두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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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질문하는 심리 스릴러
6★/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청소년의 투표권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투표 제한 연령을 낮춰 청소년도 미래에 목소리를 내게 하자는 주장에는 호의적일 때가 많다. 청소년이 투표하기에 충분히 성숙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청소년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성적 보수주의, 엄숙주의 등의 이유도 있겠으나 최근 급증한 청소년 대상 그루밍 범죄 등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한 결과일 수도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심리 스릴러 〈메이 디셈버〉는 이 문제를 고민하는 데 하나의 참조점이 되어준다.
그레이시와 조는 부부다. 그러나 부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레이시는 36살에 조를 처음 만났다. 조가 13살일 때였다. 그레이시는 조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고,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조의 아이를 낳았다. 출소 후 이전 결혼 관계를 깨고 조와 결혼해 부부가 되었다. 그레이시가 첫 결혼에서 얻은 손자와 조와 결혼해서 얻은 아이는 같은 날, 같은 학교에서 졸업한다. 그레이시와 조가 사건 이후, 결혼 이후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엄청난 비난 속에서도 둘은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버텼고 마을에 정착했다.
그런 부부에게 엘리자베스가 찾아온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레이시와 조 사건을 영화화하는 작품에서 그레이시 역을 맡은 배우다. 엘리자베스는 영리한 사람이다. 부부와 함께 머물며 많은 것을 보고 들을 뿐 아니라 그레이시의 전남편과 변호사, 그레이시가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자 조의 친구인 조지도 만나본다. 모든 극적인 사건이 그러하듯, 그레이시가 강조하는 ‘사랑’만으로 두 사람의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연기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 이면의 감정과 맥락을 알아야만 깊어질 수 있다. 그래서 타고난 영리함과 작품에 대한 집요함으로 두 사람 사이를 계속 파고든다.
그레이시는 내내 엘리자베스가 불편하다. 엘리자베스가 관계의 다른 가능성을 파헤쳐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는다는 건 그가 수십 년간 지켜온 관계와 평판이 다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레이시는 점차 예민해지고 조에게도 이 감정을 드러낸다. 조는 달래지지 않는 그레이시의 불안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엘리자베스와 조 두 사람만 함께 있는 자리가 생기고, 조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그레이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제안한다. 조가 그레이시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려서다. 조는 혼란스럽다. 엘리자베스의 말이 맞다. 하지만 자신이 떠나면 그레이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조는 그레이시와 가족에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물꼬를 튼 조의 마음은 결국 그레이시에게도 흘러간다. 조가 그레이시에게 묻는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겪어내며 결정할 때 내가 너무 어렸다면? 그레이시는 무너져 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둘이 처음 관계를 가진 날 누가 리드했느냐고 반문한다. 함께한 20여 년의 세월을 한쪽은 가스라이팅으로, 다른 한쪽은 사랑으로 의미화하며 충돌한다. 영화는 그레이시를 절대 악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레이시의 예민함이 트리거가 되어 조가 오랫동안 그레이시의 입장을 ‘자발적 강제’로 수용한 듯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일궈온 모든 것이 그레이시의 의지만으로 가능했을 수는 없다. 그레이시는 자신의 믿음을 현실로 만드는 일에 진심을 다했고, 조 역시 ‘진심’을 다해 짝을 맞췄다. 한편 조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질문한 엘리자베스는 맡은 배역을 ‘진실하게’ 연기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조는 잠시나마 엘리자베스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조는 그저 적당히 호감 가는, 스쳐 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 결과로 조는 (어쩌면 성장의 근거가 될지도 모를) 혼란에 빠졌고, 그레이시는 조와 자신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평생의 믿음이 깨졌다. 그렇다고 엘리자베스에게 조를 책임지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관계 이면의 무언가를 들추어냈을 뿐이다. 영화는 조의 억눌린/뒤늦은 성장통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끝난다. 생각과 감정에 남은 여운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시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돌아와보자. 청소년에게 성적 자유를 보장할 혹은 자유를 제한할 적정 연령은? 알 수 없다. 그저 한순간의 ‘자발성’이 어떤 맥락에서 구축되고 지속되는지를 면밀하게 읽어낼, 성적 자기결정권이 손쉽게 단정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데 둔감하지 않은 섬세한 해석틀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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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의 천국은
자유와 번영의 나라가 반듯하게 서 있는 곳. 이곳은 불과 몇 백 년 전까지 황량한 땅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이들 바로 뒤에는 경제적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미국은 그렇게 태어났다. 다른 모든 건국처럼 이 건국에도 명과 암이 있었다.
자유와 금을 향한 거침없는 행보는 명암 모두 강렬했다. 역사책뿐 아니라 영화사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서부의 휑한 땅에 있는 마을, 주로 보안관으로 묘사되는 총잡이 히어로, 문제를 일으키는 무법자, 풀이 굴러가는 벌판에서의 결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거나 술잔을 들이키거나 석양 너머로 떠나는 히어로…
역사는 흘러가고 영화도 그렇다. 카우보이나 보안관이 총을 쥐고 나서는 서부극은 이미 클리셰가 되다 못해 비틀고 뒤집는 것조차 유형화되었다. 서부극에서 새로운 것이 더 나올 수 있을까 싶지만, 서부극의 영향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점점이, 새로이 흐르고 있다. 서부극의 장르적 재미를 영화사에서 제할 수는 없지만, 서부 개척시대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지는 이들의 눈에는 반가운 흐름이다. <노매드랜드>나 <미나리>에서 서부극의 냄새를 (기존 서부극에서라면 절대 등장하지 못했을 이들의 얼굴이기에 더욱) 신선하게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부드러운 우유를 붓는 <퍼스트 카우>를 만난다.
영화는 서부 개척시대를 정면으로 마주본다. 하지만 여기에 낭만의 색깔은 한 겹 사라져 있다. 서부 개척시대는 황금과 총으로 거침없이 나아간 이들만 존재한 시대가 아니다. 광야에 가까운 땅을 밟는 이들의 신발 밑창이 진흙탕뿐 아니라 어떤 이들의 삶까지 짓밟는 시대였다. 기존 서부극에서는 진흙탕보다 크지 않은 존재감으로 그려지던 이들의 삶.
<퍼스트 카우>의 두 주인공 쿠키와 킹 루도 어쩌면 그런 존재들이다. 쿠키는 사냥꾼들과 함께 다니며 식사 담당을 맡고 있는데, 사냥에도 그들이 퍼붓는 폭력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덫을 놓아 동물을 사냥하기보다는 숲 속을 걸으며 버섯을 딸 때 전심으로 집중한 모습이고, 그때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러시아 강도들에게 쫓기던 초면의 킹 루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와줄 만큼 따뜻한 사람이다.
킹 루는 서부극에서는 드문 황인종의 얼굴을 하고 있다. 거기에도 중국인이 사냐는 질문에 "모두가 살지", 사실상 "아무나 다 살지"에 가까운 현답을 덤덤하게 던진다. 인종적으로도 홀로인데다 쫓기는 신세지만, 기회를 보아 영민하게 움직일 줄 알고 강단 있는 성격이다.
쿠키와 킹 루는 어느 마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킹 루는 생명의 은인이 된 쿠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술을 나눠 마시고 묵묵히 집안일을 함께 돌보던 두 사람은 어느새 같이 지내게 된다. 그때 마을의 유지 팩터 대장은 제대로 된 티 타임을 갖겠다고 암소를 데려오고, 쿠키와 킹 루는 거기서 돈 벌 기회를 모색한다. 우유가 없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우유를 넣은 케이크라면 떼돈을 벌 수 있겠지. 두 사람은 밤에 몰래 우유를 짜 와서 반죽에 넣고 튀겨 튀김빵 같은 케이크를 만들어 판다. 꼬리가 길어져도 밟히지 않을 수 있을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얼핏 야심차 보인다. 그러나 백인 남성들이 총 들고 싸우던 배경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비주류 인종의 두 사람이니, (영화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쿠키의 성은 '피고위츠'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쿠키가 유대인임을 밝혔다.) 사실 그렇게 대단히 야심찬 이야기도 아니다. 게다가 이야기는 잔잔한 우정의 빛깔을 하고 풍광에 스며든다.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영화 시작 시 나온 윌리엄 블레이크의 구절은 이들의 행동 곳곳에서 묻어난다. 인간에게는 우정이야말로 집이 되어준다는 포근한 구절은 쿠키와 킹 루의 관계뿐 아니라, 쿠키와 젖소 사이에도 존재한다. 사람에게 말을 걸듯 소에게도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감정을 전하는 쿠키의 다정한 눈은 소의 그것과 닮아 있다.
게다가 영화 중간중간 비춰지는 '인디언' 원주민들의 모습은 착취나 왜곡 없이 잔잔하기만 하다. 말간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어린아이부터 덩치 큰 팩터 대장의 집사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한다'. 이야기 진행을 위한 도구가 아닌, 그 땅의 거주자로.
“런던의 맛”과 “파리의 유행”에 곁눈질하며 몸만 여기 있는 ‘나으리’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이들이 사람을 보는 시선은 딱 두 가지다. 상위의 사람이라면 정치의 상대고, 하위의 사람이라면 그저 당연히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이다. 모두 제 배를 불리기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돈을 추구하는 것은 킹 루나 쿠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타인의 자리까지 빼앗으며 돈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으리’들은 총과 칼로 황야를 “개척”하고 그 자리에 당연하다는 듯이 군림한다. 팩터 대장의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도 이들이 상위를 차지하고 앉은 계층도가 층층 드러난다.
소를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런던에서처럼 티 타임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우유 맛이 그리워서 소를 들여왔지만 팩터 대장에게 그 소는 혈통의 산물이다. 무슨 혈통과 무슨 혈통을 교배한, 우수한 소. 소의 본질은 바라보고 있지 않다. 킹 루나 쿠키, 잠깐씩 등장한 인디언들처럼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는 눈은 이들에게 없다.
무법자outlaw만이 악당은 아니다. 치안이 불안한 서부극의 세계에서 법망을 어그러뜨리고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들만이 악당은 아니다. 때로 악당은 가장 견고한 치안의 얼굴, 가장 단정한 법망의 얼굴을 하고 올 수도 있다. 이분법적으로 선악을 분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서부극의 세계에서 배제되던 인물들이 둥실 떠올라 있는 이 영화를 보다 보면 현실의 서부세계에서 과오를 저지른 얼굴들이 떠오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토해냈던 마음처럼, 어디선가는 토해져야 할 마음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이 마음을 그저 서부 백인 남성들의 것만으로 치부하고 마음 편하게 다리 뻗을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동물을 혈통으로 이름 붙이는 데 익숙해진 현대인으로서, 19세기 서부극에서 동시대의 무언가를 본다. 이들이 총과 칼로 이룬 “당신들의 천국” 한구석에 나도 살고 있다. 어쩌면 이 당신들의 천국은, 누군가가 바람처럼 가만히 존재하던 자리를 짓누르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꿈꾸던 이들이 잠자는 위에 쌓아 올린 것인지 모른다. 발끝을 내려다 본다. 내 디딘 발 아래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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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넷 - 더 탐닉하거나 도망치거나. 선택은 당신의 몫
코로나로 인해 많은 영화가 개봉을 연기하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개봉을 강행하는 경우로 나뉘어졌다. 개봉을 강행하는 경우는 대부분 저예산이나 독립 영화였는데, 블록버스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을 강행한 영화가 있었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이다. 감독의 전작들의 평과 흥행에 과연 코로나 시국에도 흥행을 할 수 있을까, 극장가를 살릴 구원자가 될 것 인가 라는 의견들이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넷이 의미 없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흥행과 평가는 별개이기에, 테넷 또한 감독의 전작들과 함께 주목할만한 영화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유료 시사회로 개봉 전에 관람했는데, 당시에 영화가 어렵다는 평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나오는 주요 용어들에 대해 개념을 숙지하고 관람을 하러 갔으나, 결국 영화에게 패배했다. 여기에서의 패배란, 이해를 못 했다는 것이다. 분명 초반부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중반부부터 난이도가 갑작스럽게 상승한다. 비유를 들어보자면, 수학 문제를 푸는데 처음에는 기초 맛보기 문제 한 두문제 설명하다가 갑자기 블랙라벨 몇권을 통째로 갖고와서 무작정 설명하는 느낌이랄까. 예고편에서 중심적으로 보여주는 인버전이라는 개념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이 응용되면서 어려워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객은 둘로 나뉘어 질 것이다. 더 파고들어 테넷을 탐닉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도망치거나.
테넷은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랑은 다르다. 통상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는 많은 관객들을 포용해야 하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테넷은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본 관객이 테넷 관계자이거나 천재가 아닌 이상 첫관람에 완벽한 이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처음봤는데 다 이해했다고 하는 사람은 천재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영화를 재관람함으로서 이해하는 재미, 공부하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맞춰지지 않는 퍼즐이, 다시 볼 수록 테넷이라는 이름의 퍼즐이 맞춰지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힘든 특성이기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둘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탐닉하는 자는 영화를 다가가기를 원하는 이들이고 도망치는 자는 영화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이들일 것이다.
영화 평론가들은 관객이 다가가는 영화를 통해 진보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나도 그것을 동의하는 이들중 한 명이지만), 그렇다고 다가오기를 바라는 이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영화란 보편적인 잣대도 존재하지만, 취향으로 갈리는 영역임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둘로 나눠지기에, 테넷은 더더욱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탐닉한자와 포기한자, 두 그룹의 대조. 다만 확실한 것은 이번 영화도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영화들 답게 본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는 이번의 '매력'을 탐닉하는 자와 쟁취하지 않는 자로 나뉨으로서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는 것이다. 또 확실한 것은 이렇게 갈리기는 하지만,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이 한번 봐볼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확실하게, 또 강력하게 매혹한다는 것이다. 어딘가 모를 은밀한 유혹.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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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를 통해 경청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를 전달한 영화 《라따뚜이》
쥐라는 생명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영화 《라따뚜이》는 쥐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꿔준 작품이었다. 쥐에게서 이렇게 사랑스러움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 《라따뚜이》 시놉시스
파리에서 날아온 '니모를 찾아서' & '인크레더블' 제작진의 달콤한 상상
절대미각, 빠른 손놀림, 끓어 넘치는 열정의 소유자 ‘레미’.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를 꿈꾸는 그에게 단 한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주방 퇴치대상 1호인 ‘생쥐’라는 것! 그러던 어느 날, 하수구에서 길을 잃은 레미는 운명처럼 파리의 별 다섯개짜리 최고급 레스토랑에 떨어진다. 그러나 생쥐의 신분으로 주방이란 그저 그림의 떡. 보글거리는 수프, 둑닥둑닥 도마소리, 향긋한 허브 내음에 식욕이 아닌 ‘요리욕’이 북받친 레미의 작은 심장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쥐면 쥐답게 쓰레기나 먹고 살라는 가족들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주방으로 들어가는 레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요리에 열중하다 재능 없는 견습생 ‘링귀니’에게 ‘딱’ 걸리고 만다. 하지만 해고위기에 처해있던 링귀니는 레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의기투합을 제안하는데. 과연 궁지에 몰린 둘은 환상적인 요리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레니와 링귀니의 좌충우돌 공생공사 프로젝트가 아름다운 파리를 배경으로 이제 곧 펼쳐진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라따뚜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쥐가 이렇게 귀여우면 곤란한데
쥐를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고, 한편 학교에서 쥐를 본 적이 있었는데,, 절레절레,, 소오름,,, 몸서리,,,, 크기로 따지자면 쥐들이 나를 무서워 해야하지만 나는 쥐고 무섭고 싫다. 그런데 영화 《라따뚜이》에서는 쥐에 대한 매력을 굉장히 다채롭게 뽐내고 있었다. 영화 《라따뚜이》를 보고 퇴근하는 길에 호도도도돋도도 지나가는 쥐를 봤는데 쟤도 뛰어나닐 때 호도도도도돋 레미처럼 귀여운 소리가 나겠지 하고 실제하는 쥐를 귀엽게 보기 시작했다.
사실 쥐라는 동물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천대받고 더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그런 존재를 역으로 가장 청결해야할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는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기존의 통념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실제하는 쥐마저 귀엽게 인식하도록 그 시선마저 바꿔버린 영화의 능력에 놀랐다.
감정에 따라 걷는 방식이 달라지는 레미
영화 《라따뚜이》에서 레미에 관한 연출 중 특징이 가장 드러났던 부부은 레미가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이다. 쥐들은 4발로 기어서 움직인다. 하지만 레미는 자신의 앞발로 요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4발로 걸어다닐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렇게 요리와 사람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레미는 아주 위급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항상 두 발로 걸어다닌다. 하지만 링귀니의 배신(?)으로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쥐가 사람을 대신해서 요리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네 발로 기어서 이동한다.
항상 자신은 두 발로 걷겠다며 굳은 의지를 보여주던 레미였는데 자신의 신세를 체념하면서 네발로 달려갔을 때는 그 눈빛하며 버림받은 듯한 어조가 레미 입장에서는 세상이 무너진 것과 같겠구나 하는 감정이 확 다가왔다. 그래서 그 감정과 태도의 변화를 구분되는 장치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경청할 줄 안다는 것
영화 《라따뚜이》를 보면서 느꼈던 점은 경청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무너져가는 신뢰 속에서 그 신뢰를 붙잡은 것은 경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미가 다시 요리를 힘차게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레미의 능력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링귀니를 말을 듣던 레미의 아버지가 그동안 인정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며 자신의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 말해달라고 한다. 쥐다운 삶이 아니라고 레미를 혼냈던 아버지지만 레미의 친구라도 볼 수 있었던 링귀니의 말을 경청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킨다.
더불어 독설적인 비평가인 안톤 이고 역시 자신이 본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레미와 링귀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한다. 아무말 없이 돌아선 그는 다음 날 이제껏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던 음식이었고, 이제까지 날선 비판만을 해온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과 후회의 글을 남겼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아는 자세가 우리의 삶 속에 필요하다는 것을 잘 전달해주는 작품이었다.
재미와 함께 감동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었던 영화 《라따뚜이》. 편협한 시각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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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위적이라 더 인간적인, 짐작으로부터의 이별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최악의 하루〉의 은희는 온종일 거짓말을 하다 하루가 간다. 하지만 영화 속 저 연극 대사 장면 속 은희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친구 현오 앞에서는 적극적인 청춘의 발랄함을, 운철 앞에서는 비극적 사랑에 가슴을 졸이는 애달픔을 연출하던 그가, 유독 남이 써 놓은 대사를 그저 연기할 뿐인데 그게 진짜 같다니. 남산 벤치 건너편에 그럴듯한 소품이나 상대 배우는 없다. 오로지 혼자서 극의 상황에 몰입한다. 어쩌면 일상이 연기이고, 연기가 진실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 본다. 내 앞에 거를 것 없는 바로 그 순간 오롯이 등장하는 나의 모습은 이 모든 게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숨길 수 없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사회에서는 때에 걸맞은 가면을 챙겨야 한다. 그게 나쁘다기보다는, 일부 불편함을 감수한 채 모두와 공생하는 방법은 종종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당위적 명제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약간은 편하게 대해도 되는 상황에서 본래의 모습은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 혼자일 때가 아니라면 아마 가족과 함께일 때였을 것이다.
다시 은희에게 돌아가서, 이렇게도 생각해 보자. 은희의 대사가 모두 진실이라면, 자기 전 죄 없는 이불만 연거푸 걷어찼을 그날의 은희는 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진실은 뭘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야만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는 그 어려운 퀘스트를 은희는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영화 속 남자들이나, 바깥의 관객 모두 은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심사에 ‘백 퍼센트’란 없다. 오직 가능성과 짐작만 있을 뿐. 은희는 거짓말을 했지만, 그 안에는 다소간의 진실이 담겨있다. 우리는 모두 진실이면서 거짓인 삶을 산다. 똑 부러지는 이분법은 적어도 사람 사이에는 없어 보인다.
길었던 서론을 마치며, 영화 〈페어웰〉의 거짓말은 가족이라는 가능세계에서 지극히 인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사흘간의 모험을 장식한다.
거짓말의 거짓말에 대하여
〈페어웰〉은 오프닝 크레디트부터 ‘Based on an actual lie’를 전제한다. 룰루 왕 감독은 자전적 이야기이자 그 소재가 거짓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친절한 설명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할머니의 시한부 사실을 숨긴 채 마지막 가족 모임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고군분투와, 생각의 차이가 만드는 다각적인 갈등의 스토리는 거짓말이 초래한 진땀 빼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 속 거짓과 노골적인 거짓말을 해 보겠다는 앞선 선언조차도 실은 거짓말이다. 〈페어웰〉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란 ‘거짓말의 거짓말’, 즉 가족과 정에 대한 이중부정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가족에게는 내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가족만큼이나 진실한 나를 보여주기 힘든 존재도 없다. 그래서 서로의 감정은 쉽게 토라지고 상처 받는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는 우리 역시 명절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묘한 기싸움이나 고부간의 갈등을 보고 자랐으니, 영화의 장면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멀리 있으면 신경 쓰이고, 가까이 보면 또 다투고 마는 가족의 모습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관 앞에 혼란스러운 빌리의 시선에서 더욱 이질적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미덕인 행위가 뉴욕 출신 빌리에게는 불법이 되어 버리는 상황은 낯선 충격이다. 다만 감독은 가치나 성격, 입장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심지어 거짓의 상황에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출처: 다음 영화
〈페어웰〉은 거짓말과 진실을 적절히 섞은 끝에 따뜻하며 엇나간, 진심 어린 소동극을 만들어낸다. 영화 초반 식사 장면에서는 빌리의 아버지가 전하는 죽음에 관한 짧은 농담이 등장한다. 그 내용이란 한 가족이 죽음이라는 소재를 돌려서 말하려 노력하다가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인데, 이는 영화에서 할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합심하여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과 일치한다. 거기에 어머니가 이미 그 농담을 들고 먼저 웃는 장면은 부모를 먼저 떠나보낸 비슷한 경험을 먼저 겪은 어머니의 상황과도 들어맞는다. 이렇듯 실없이 던지는 장난이란 의미의 농담에도 진실은 반드시 숨어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창춘의 할머니는 뉴욕의 손녀에게 염려의 말을 건넨다. 이런저런 거짓말로 할머니의 걱정을 둘러대며 전화통화를 하던 빌리는 길을 가다 잠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 통화 중에 누구와 얘기했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빌리는 ‘친구와 대화를 했다’라고 말한다. 이는 거짓말이지만 또한 진실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관객은 빌리에게 누구보다 온 마음을 주고, 빌리 역시 가득히 담은 사랑을 보냈던 친구는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모할머니가 언니의 병명을 숨기기 위해 지어낸 ‘양성 음영’은 현재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양성’과 별것 아닌 거짓 병명인 ‘음영’의 합성어이다. 아프긴 하지만 또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복합적 의미처럼, 영화 곳곳에는 이렇게 수많은 거짓말 속 진실이 담겨있다.
진심의 역설, 짐작하는 우리
할머니 한 명을 속이기 위해 빌리의 가족이 실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는 가족의 진심을 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고모와 어머니 간의 신경전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생활환경의 차이와 함께 자녀 교육으로 이어진다. 자식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타국에 보내는 부모의 심정은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애써 밝아야 하는 자식의 마음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 안에 정작 할머니는 없다. 슬픔을 감추고 행복한 여생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무지의 상태로 두는 것은 좋은 의도지만 당사자가 빠진 당사자의 삶이다. 모르는 척하며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의 선택은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주의적인 사고다. 아무것도 모르고 정리도 못 한 채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 할머니의 생각을 누구도 물어봐 주지 않는다. 오직 빌리만 할머니의 입장에 관심을 두고 함께 눈을 맞춘다. 할아버지의 묘 앞에서 마치 살아 돌아온 것처럼 대하듯 영화의 가족은 죽어가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더 신경을 쓰고, 점차 모인 이유보다 모임 자체에 더 몰두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산 사람의 일상보다 기계적인 예식 절차에 주인공이 될 사람들은 뒷전으로 치이고 마는 관혼상제의 역설을 마주한다.
논리학의 가능세계에서는 단언할 수 없는 명제에 새로운 진리의 양상을 적용한다. 형식적으로 참과 거짓을 정하던 기존의 추론이 들어맞지 않은 경우가 생겨서다. 우리의 현실은 여러 가능성이 담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을 세계도 있으며 빌리가 미국인이 아닌 세계도 있을 것이다. 단언하기 어렵다면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흔히 참이면서 거짓인 것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삶이 언제는 뜻대로 돌아간 적이 있던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시공간에 사는 인간은 높은 확률로 가족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할머니의 삶이 삼 개월 남짓 남았다는 확률을 단언할 수 없듯 말이다. 어디든 완벽한 것은 없다. 행복도, 거짓말도, 사람도 활짝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리고 섣불리 짐작하지 않아야 한다고도. 하지만 빌리의 가족만 보아도 그렇게만 살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결론 내려고 하는 사람의 노력조차도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밤길에 은희와 료헤이는 거짓 같은 ‘최악의 하루’를 지나 해피 엔딩을 꿈꾼다. 걱정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조차 거짓말로 들리는 건, 완벽한 것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 그러니 거짓과 진심이 얽힌 서로에게 구십 구 퍼센트의 가능성을 들고도 YES OR NO를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모든 가능성의 끝에서 단언해도 좋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능한 행복이란 복잡한 계산보다 단 한 번의 기함으로 탄생할지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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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수란잔 Best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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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수란잔 BEST 10
(1 ~ 10위)
1. 새벽의 모든 (2024) - 미야케 쇼
2. 가여운 것들 (2024) - 요르고스 란티모스
3.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4) - 하마구치 류스케
4. 추락의 해부 (2024) - 쥐스틴 트리에
5. 독립시대 (1994) - 에드워드 양
6. 안티크라이스트 (2009) - 라스 폰 트리에
7. 우나기 (1997) - 이마무라 쇼헤이
8. 노 베어스 (2024) - 자파르 파나히
9. 나의 올드 오크 (2024) - 켄 로치
10. 시빌 워: 분열의 시대 (2024) - 알렉스 가랜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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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와 함께하는 우주 최고의 '갓'매치! ❤️+⚡ 올 여름 가장 짜릿한 사랑과 강렬한 액션을 만나고 싶다면 7월 6일, 극장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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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고의 시리즈, 인디아나 존스의 귀환!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티저 예고편 공개 6월, 그가 선사하는 짜릿한 모험을 마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