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병구(신하균 분)는 어느 날 유제 화학 사장 강만식(백윤식 분)을 납치하여 고문하기 시작한다. 병구에 따르면, 강만식은 지구 침입을 획책하고 있는 안드로메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다. 개기월식 전까지 지구를 지키기 위한 병구의 외계인과의 사투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병구는 지구를 지키지 못한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병구의 황당한 편집증적 망상과 함께 서사를 따라가던 관객의 불신과 감정 이입을 충격적 반전으로 전복하는 기묘한 영화다.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는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와 권력에의 의지, 그 너머의 초월적 인간의 형성 과정을 병구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몰라.”라는 병구의 첫 대사는 자신의 광기에 대한 병구의 자조적 고백이자 관객에게 일러주는 암시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망상에 사로잡힌 병구가 벌이는 황당하고 신체 훼손이 공공연한 장면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어간다. 잔인한 방법으로 강만식을 고문하는 병구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강만식의 사투는 영화 종반 자신의 정체를 밝힌 강만식이 (병구가 '믿는' 외계인의 실체) 강릉공장에서 지구의 파괴를 막으려 하나 이를 믿지 않았던 병구는 강만식과의 결투 끝에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나 했지만 여기서 감독은 반전의 카드를 제시한다. 실제로 강만식이 안드로메다의 외계인이었고 심지어 왕자였던 것. 병구가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의 삶은 인간이 가진 공격 유전자를 변형하여 지구를 지키기 위한 왕자의 실험이었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실험 표본 1787호' 병구의 실패로 왕자는 실험을 중단하고 지구를 폭파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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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구가 보이는 폭력성과 광기의 원인은 과거 그가 겪었던 끔찍한 폭력에 있다. 아버지는 탄광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가족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일삼다 병구의 종이우산이 머리에 박혀 죽는다. 같이 일하던 애인은 회사가 고용한 용역 깡패의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어머니는 같은 공장(강만식이 운영하는 유제 화학)에서 일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물질에 중독되어 5년째 식물인간이 되어 기약 없는 치료로 연명 중이다. 그 모든 사건을 눈으로 확인하며 납부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에게 매질을 당한다. 병구에게 이어진 폭력은 곧 병구의 폭력으로 전이된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건달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병구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살인자가 된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환된 것이다. 이후 감옥에서도 그는 교도관의 폭행에 시달린다. 강렬한 이미지로 재현되는 병구의 기억은 1980년대가 개인에게 가했던 끔찍한 폭력의 트라우마이다.
니체가 보기에 현대인의 고통의 본질은 염세주의 철학과 과민증이다. 하나같이 고통을 피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고통에 빠지고 길을 잃는다. 하지만 고통은 '삶에 이탈'함으로써 오는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부정과 거부는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라며 고통에 의연해질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지만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처방을 내린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보통의 인간들은 이러한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궁리에 낑낑대다가 그만 힘에 부치면 삶을 통째로 부정해 버린다. 니체는 현실적인 고통의 처방도 제시한다. 사상적 열광, 평온한 상황, 좋고 나쁜 추억들, 장래 계획, 희망, 거의 마취제 같은 효과를 지닌 수많은 종류의 자부심과 공감 등. 병구가 먹는 향정신성 약물 역시 이러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 해법일 뿐 본질적인 고통의 처방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병구는 암울한 세상 속 허무주의로 고통을 극복하려 한다. 흔히 현대사회를 허무주의의 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 세속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이 죽었다는 의미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믿고 있던 절대적 가치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믿어온 최고의 가치, 즉 신이 사라진 자리에 바로 허무주의가 들어오게 된다. 허무주의는 모든 손님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손님이라고 니체는 표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가 니체가 원하는 궁극적 삶의 목적이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나눈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무능력한 인간상을 표현한다. 이는 약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징후로서 정신력이 지칠 대로 지쳐버리고 고갈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상태이다. 왜 사냐는 질문에 이들은 생존 자체가 이유이자 최고의 목표라고 대답한다. 니체는 이들이 능동적 허무주의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는 목표나 의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가치는 전복되어 우리 곁에서 사라져 죽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능동적 허무주의자들은 이것이 비극적인 사건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Nothing is true.” 그 어떤 것도 진리는 아니다는 말은 동시에 내 삶의 목표와 진리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 없는 존재인 인간이 의미 있는 이유이다.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것, 진리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며 절대적이 아님을 깨닫는 과정이 능동적 허무주의의 입장이다. 고통과 폭력 속에서 극한의 좌절과 허무 속에 몸부림치던 병구는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외계인으로부터 푸른 별 지구를 지키는 새로운 삶의 목표이다.
아무도 없어, 네가 지구를 지켜야 해.
식물인간인 어머니가 일어나 병구에게 말을 건네는 상상의 장면은 어머니가 대신 전하는 병구의 내면의 소리를 지지하는 자신과의 대화이자 다짐이다.
모든 세상의 고통과 불행은 외계인의 소행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병구는 외계인에게 광적으로 연구하고 파헤친다. 대부분의 일상은 집 안에서 지낸다. 깊은 산속에서 양봉을 하고, 마네킹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가고 '외계인'을 잡아 고문하며 연구하는 일이 병구의 일상이다. 관객의 눈에는 그야말로 광인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 행위다. 하지만 니체의 입장은 다르다. 진리 탐구의 끝은 자기 삶을 의미 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니체는 진리보다 진실성을 더 높이 평가한다. 위험을 직시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온전히 알고 따라가는 것이 진실성의 요체이다. 그는 실존에 대한 불쾌가 예전보다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악, 즉 실존 속에 들어있는 의미에 대해 의심하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지금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극단적으로 된다는 뜻은 내가 가진 문제의 뿌리까지 파고듦을 의미한다. 삶의 문제를 내 안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며 존재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거나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사유하는 것이다. 왜 사는지에 대한 삶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지 신이 죽었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병구의 집착은 삶의 실존적 의미와 목표가 있기에 허무주의에서 탈피하게 된다.
맹목적으로 추구하여 온 절대적 가치가 더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자아를 찾게 된다. 즉 자아를 찾기 위해 병구는 외계인을 믿는 것이다. 여기에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없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병구는 외계인을 선택했지만, 외계인이 있고 없고는 병구에게 중요하지 않다.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결국 '자신의 삶의 예술가가 되어라'라는 말로 대치된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충동, 본능,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본래의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 강만식과 병구의 관계는 본래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 관계는 갑을 관계를 넘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심화한다. 그를 외계인으로 믿는 이유 중에는 그와의 악연도 포함되어 있다. 병구는 강만식의 공장에서 연인과 어머니를 잃는다. 보상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던 강만식에 대한 증오는 점점 고통과 외계인, 그리고 강만식을 함께 엮는다. 이렇게 둘의 악연으로 이어진 권력관계는 납치와 감금으로 역전된다.
자아탐구의 과정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고통의 뿌리까지 들여다보면 그 아래 숨겨진 지배계급의 부정한 권력을 쉽게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정치적 관점에서 인간은 권력의 유무에 따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혹은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여기서 소위 '99%'는 지배받는 자, '1%'는 지배하는 자이며 약자는 항상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순응하고 복종하는 개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권력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권력을 추구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부분에서 니체는 다수가 생각하는 권력의 속성을 전복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악하냐는 의문에 니체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권력은 악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 전체의 생명을 지탱하는 속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권력의 내면적 요소에 주목하였다. 진정한 힘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권력의 내적 동기인 욕망, 충동, 생존은 삶에의 의지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권력에의 의지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과 관계 맺고 동화한다. 니체는 생명에의 의지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인간 내면의 본질에 담긴 권력은 악하지 않다. 단지 생명의 근본적 속성일 뿐이다.
우리의 의지는 권력을 향해 있다. 약자 역시 권력을 추구한다. 그 가치를 창조하는 방식이 강자와 다를 뿐이다. 니체는 도덕 현상을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나누었다. 주인 도덕은 명령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다. 지배하는 자의 발현 방식은 능동적 active 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 노예 도덕은 복종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며 상대적으로 반동적 reactive이다. 실질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는 반란을 꾀하는 것이다. 이때 노예들이 반란을 꿈꾸며 ‘원한’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원한은 지배받는 사람들의 핍박이 권력에의 의지로 뭉쳐져 창조적인 가치를 창출해 낼 때 실제적인 반응으로서 발현한다, 즉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복수’이다. 병구의 원한 감정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자신을 지배해 온 주인이자 지배자인 자본주의와 이와 수반된 파편화된 인간성에서 기인한다. 병구는 그 원한을 납치와 감금으로 실현한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권력, 다시 말하면 생존을 위해 물리적, 정신적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병구는 강만식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많은 '외계인들'을 잡아 왔다. 영화는 그들의 잔혹한 최후를 보여주며 병구가 가진 원한의 실체를 극대화한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 정도를 확인한 다음 '권력 감정'으로 드러난다. 권력 감정은 저항을 느끼면서도 결국 이를 관철했을 때의 뿌듯함 내지 희열로 나타난다.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권력은 진정으로 이를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병구는 고문을 통해 권력 감정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 하나둘씩 자신에게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구걸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모습을 보며 병구가 느낀 권력 감정은 지속적인 외계인 납치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의지의 정도를 알고, 그 권력에 대한 감정을 느끼고, 더 나아가 지금의 감정을 넘어 더 큰 권력을 가지려는 권력 증대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는 다시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존재할 때 가능하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병구가 양봉하며 꿀벌이 모아 놓은 꿀을 채취하듯 결국 누군가의 것은 나의 것으로 넘어와야 생존할 수 있고 이것이 생존하는 모든 것들의 정신적, 물리적 운동의 삶이다. 권력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생명의 근본 현상이기도 하다. 권력은 그 속성에 따라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생성되며 팽창하는 과정을 지속한다. 그렇다면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는 어떤 인물인가. 복종의 구조 속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약자는 항상 자유의지를 추구하고 이를 꿈꾸며 산다. 니체가 생각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이 흘러넘쳐서 상대방이 아무리 저항을 하고 복종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관용하고 허용할 수 있는 정도의 넉넉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고 포용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권력자이다.
이는 지독히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긴 싸움이다. 무수한 수수께끼와 느닷없이 덮친 우연을 '의미'로 재창조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수반한다.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의 지난한 과정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창조의 고통'이다. 삶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자, 고통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다. 이를 이루는 인간인 초인 Übermensch은 형이상학적 가치와 결별한 사람이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가치를 창조하는 능동적인 삶을 살고 고통의 무의미성, 고통마저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아모르파티 Amor Pati에 이른다. 하지만 병구는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안드로메다 왕자 강만식은 병구의 삶을 두고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한 실험을 진행한다. 병구에게 내린 고통은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는 니체의 '창조의 고통'과 맥을 같이 한다. 고통을 통해 강만식과 니체는 인간의 생의지를 판단한다. 강만식은 개기월식이 일어나기 직전 병구에게 마지막 실험 과제를 부여한다. 진정으로 생의 의지를 갖고 나의 가치 창조를 믿고 고통마저도 초월한 초인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 병구는 자신 설정한 삶의 의지와 목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통을 초월하지 못하고 강만식이 외계인임을 부정하며 순이의 죽음이라는 극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인류의 미래를 둔 마우스 버튼으로 표현했지만, 이는 니체의 말을 빌리면 초인의 경지에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다. 결국, 병구는 고통을 넘어 사랑하고 관용하지 못한다.
여기서 순이는 병구의 조력자이자 그를 초인과 짐승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 순이는 병구의 계획에 눈물을 흘리며 두려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순이는 영화에서 계속 외줄을 탄다. 니체는 평범한 인간과 초인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인간들에게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선언한다. 외줄 위 인간은 두렵고 약한 존재이지만 순이는 인간과 초인 사이 그 긴장을 감수하면서 병구에게 계속 외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순이의 죽음으로 병구는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된다.
강만식은 병구가 초인이 되어 위태로운 고통의 푸른 별 지구를 지키길 바랐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영화는 지구 멸망이라는 자극적인 결말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그 모든 고통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을 엔딩 크레디트에서 병구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