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1-11 20:00:57
역사의 결절을 목도하는 눈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리뷰
SYNOPSIS.
위안부, 강제노역, 원폭 피해자…
일제강점기 조선인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재일조선인 2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
그의 집에 쌓인 작품화되지 못한 10만 피트, 약 50시간 분량의 16mm 필름
기억의 망망대해에서 수집해낸 역사가 강렬하게 들려온다.
잊혀진 피해자들의 표정을 되살려내고 식민과 전쟁으로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아간다!
POINT.
✔ 이렇게 멋진 기록자, 선구자, 영화인, 작가...를 왜 아무도 저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죠? 이제야 박수남 감독을 알게 된 게 너무 아쉬울 만큼, 그냥 인생 자체가 너무 압도적입니다.
✔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정말 귀한 풋티지를 보실 수 있는 작품을 놓치지 마세요
✔ 소수자성과 당사자성, 기억과 기록에 대해 사유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 영화는 11월 13일 수요일 개봉합니다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어두운 화면에서 목소리로 시작한다. 마의태자를 아느냐고 묻고, 딸의 이름도 마의태자에서 따왔다고 말한다. 영화 작업을 함께한 박마의 감독의 이름이 독특하더라니. 어떤 마음으로 딸의 이름을 마의라고 지었을까. 망국의 슬픔을 온몸으로 휘감고 사라진 왕자의 이름을. 그러나 마의태자에 관한 좋은 노래가 있다며 서정적으로 부르는 목소리는, 망국의 슬픔으로 이야기가 끝나게 두지 않는다. 마의태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싸매는 다정한 노랫말. 딸의 이름과 그 유래에 맺힌 노랫말. 슬픔의 자리와 그 자리를 혼자 두지 않는 마음. 박수남 감독의 인생처럼 느껴지는 오프닝 시퀀스다.
옛 사진 몇 장 위로 스쳐가는 몇 문장의 증언만으로도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을, 보통 사람이 아님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이 예감은 148분 동안 스크린 위에서 겹겹이 펼쳐지고 풀어진다. 수많은 테스트 영상들, 수많은 인터뷰들, 방에 있었던 50시간 분량의 필름 중 10시간 분량을 풀어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10시간 분량 안에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에 관한 기록유산으로 지정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 귀한 풋티지들 사이사이, 하나하나 기함할 사건들 사이사이, 박수남이라는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역사의 결절을 목격하고 지적하는 눈
잘나가는 고깃집 사장님으로 살면서 글을 쓰던 박수남 감독은 가게를 팔고 다큐멘터리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로 수많은 곳을 다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을 기록한다. 펜으로 담기에는 언어의 한계가 있었다던, 때로는 언어 바깥에서 더 선명하게 전해지던 떨림과 침묵을 담기 위해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었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박마의 감독과 대화하는 장면은 다분히 인상적이다. 젊은 사람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쉽게 설명해 주는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는 박마의 감독의 말 앞에, 박수남 감독은 단호하게 말한다. 알기 쉽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고. 두 사람의 대화는 이내 '카메라 앞'을 두고 더욱 단호해진다. 박수남 감독은 한 치의 타협도 먹히지 않을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카메라, 내가 영화라고.
오랜 세월 그가 들어온 목소리들은 마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엔딩에서 울려퍼지던 목소리처럼 그를 감싸고, 그는 이제 영화로 현현한다. 1인칭으로서의 카메라, 체화된 카메라. 키노 아이 그 이상의 카메라. 그는 기계적인 카메라의 정확성보다, 발군의 기억력과 소상한 기록의 힘으로 카메라를 역사의 경지에 끌어 올린다. 개인이 겪은 모욕과 수난의 증언들은 모여서 역사가 된다. 그가 그토록 열심히 기록한 것들을 결국 거칠게 요약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낯이다. 수탈하고 강제 연행할 때는 '내선일체'지만, 폭력과 피폭의 뒷수습을 할 때는 철저히 남, 아니 투명한 비존재 취급을 하는.
관동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부모님 아래서 태어나,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박수남이라는 사람은 작가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차차 기록자로 나아간다. 마침내 이 영화에 이르러서서는, '이 정도면 기록 계의 무형 문화재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는 관객이 생겨난다. 소수자로서 또 당사자로서 예리하게 포착한 감각들이 켜켜이 쌓여 여기까지 왔다.
역사의 결절을 목격하고 지적하는 사람, 스스로가 뚜렷한 사람. 사유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든 교실로 만들고, 그 교실에서 만난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 이 영화에서 내가 배운 건 다음과 같다.
ㅁ 기억도 기록도 힘이 세다
가끔은 이 말 자체가 구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현실 정치와 모략이 판치는 세상에서 기억이 과연 얼마나 힘이 셀 수 있을까. 힘이 셌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구호처럼 맺힌 문장은 아닌가. 그러나 평생 동안 삶으로 기억하고 기록한 사람을 보니 이는 허망한 구호가 아니다. 실제 그의 기록 중에는 역사 교과서의 몇 줄 행방을 가르는 주효한 대목도 있었다. 목격한 일을 전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는 말 앞에서, 기억과 기록은 단순히 내 주장을 뒷받침하고 내 목소리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참으로 인간 되기 위함임을 통감한다. 그러면 결국 생각이 다른 서로를 가르는 선은 딱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가?
ㅁ 피의 대립, 국적의 대립이 아닌 역사의 대립이다
그렇기에 이는 한국과 일본의 국가 대립도 아니고, 어떤 피를 타고났는가에 따라 답이 갈리는 문제도 아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 사이, 역사를 무엇이라 기록하고 싶어하는가의 차이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역사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과, 차마 그럴 수 없는 사람의 차이이다. 박수남 감독은 철저히 후자다. 눈물로 바다가 되도록 울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말로 못 다하는 말까지 다 담을 수 있다고 위로하는 사람.
ㅁ 인류애는 한 걸음부터
박수남 감독은 당시 소년이었던 고마쓰가와 사건의 이진우에게 편지를 쓰며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민족의 정체성은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전혀 다르다. 손을 떼라는 "상부"의 금지령을 듣지 않고, 반국가적 인물이 되기를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자신으로 살려면 어디에 살아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이므로, 민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친 끝에 소년 이진우가 발견한 것은 인류애다. 잘못되었으면 어쩌지, 하고 옆 사람을 걱정하기 시작할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범죄가 왜 잘못되었는지 받아들이게 된다.
ㅁ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해
영화에 짧게 지나가지만, 지금도 원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본인들의 모임이 있다. 피폭 다시 히로시마에 재일 조선인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인터뷰하는 한 장애인 남성은, 감독과 자신이 차별 받는 존재라는 공통점으로 서로 공감할 수 있다고 밝힌다. 이 대목은 짧게 지나감에도 내게 너무나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우리가 서로 손을 맞잡는 방법은 그뿐이지 않을까? 뿌리는 다양성에서 찾아야 한다. 한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만 갖고 살지 않으므로, 어딘가에서는 다수파의 안온한 자리에 서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소수자의 자리에 선다. 이러한 소수자의 감각을 일깨우는 건 다양성이다. 그걸 토대로 우리는 좀더 쉽게 타인의 자리를 가늠해 보고,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이 영화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묻는 영화였다. 가끔 이렇게 내가 하고 있던 고민이나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지는 영화가 있다. 이런 영화를 적시에 조우하는 기쁨이 있다. 이런 영화들이 등불처럼 비추어 주는 길이라면, 걸어가 볼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이 영화의 엔딩 신은 내가 최근 몇 년 간 본 영화의 엔딩 신 중 가장 산뜻하고 말끔했다. 이렇게 마음을 놓게 해주는 엔딩이라니. 박수남 감독은 병으로 점차 시력을 상실해 가고 있지만, 투쟁의 도구이자 기계적 정확도를 가진 '키노 아이'를 넘어서는 눈을 우리에게 빛낸다. 발군의 기억력과 끈덕진 마음으로 오케스트라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이 더 큰 감각을 가져온다. 50시간 분량의 필름 중 10시간 분량을 이렇게 풀어냈으니, 남은 40시간 분량의 필름 또한 언젠가 또 볼 날을 기대한다.
**혹시 저처럼 지금부터 박수남 감독님의 작품과 궤적을 따라가보실 분들을 위해 남겨둡니다.
[박수남 감독 작품]
▶ <침묵>, 2017 (퍼플레이로 보러 가기 / 편당 결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이옥선 씨가 전후 50년, 긴 침묵을 깨고 14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본 정부에 사죄와 개인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그 과정을 동행하며 담은 기록입니다.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께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작품 중 굉장히 시각이 독특한 작품이라며 꼭 추천한다고 하셨어요.
▶ 또 하나의 히로시마 + 아리랑의 노래 /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 방문 관람 가능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이 터졌을 때, 당연히 그곳에는 조선인도 있었습니다. 강제 연행과 피폭으로 이어진 피해는 컸지만, 전후 보상 대상에서 이들은 빠졌습니다. 이들을 기록한 이 작품은, 일본이 내세우던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슬로건(?)에 균열을 내고, 현실에 변화를 이끌어낼 만큼 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 누치가후: 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 /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 방문 관람 가능
*한국어 자막 없음 (영, 일)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3월, 미군의 상륙 공격이 임박해오자, 오키나와에서는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굴 등의 은신처에서 일본인에게 받은 수류탄을 터뜨려 자결하거나 서로 목 졸라 살해하는 참극... 생존자들은 일본군의 명령과 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교과서에서 삭제하고 싶어하는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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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 체험으로 태어난 다중인격 히어로의 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런던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관 기프트샵에서 일하는 온순한 성격의 직원 '스티븐 그랜트(오스카 아이작)'. 이집트학과 고대 이집트의 신전, 그리고 신들에 대해 공부했지만 끝내 박물관 도슨트가 되지 못한 그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븐은 갑작스럽게 고대 이집트의 달의 신 ‘콘슈(F. 머레이 에이브러햄)’를 만나고, 그로부터 또 다른 자아이자 콘슈의 명령을 따라 그의 아바타인 ‘문나이트’로 활동해 온 '마크 스펙터'의 존재를 깨닫는다. 자신에게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있으며 마크와 몸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달은 스티븐은 마크의 아내인 '라일라(메이 칼라마위)'의 등장과 함께 죽음의 신 '암미트'의 힘을 빌리려는 빌런 '아서 해로우(에단 호크)'를 막기 위해 이집트로 향한다. 그렇게 마크와 스티븐은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 문제를 풀어감과 동시에 강력한 이집트 신들의 미스터리를 파헤칠 여정에 나선다.
등장한 히어로만 30명을 훌쩍 넘긴 가운데, 디즈니+를 통해 공개된 MCU의 새 히어로 '문나이트'가 유달리 큰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다름 아닌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지닌 히어로라는 이유가 커 보인다. 이는 다중인격 연기를 선보인 오스카 아이작의 퍼포먼스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식 억양과 미국식 억양을 자유로이 오갈 뿐만 아니라 불과 몇 초 사이에 전혀 다른 과거를 지닌 두 인격을 오가는 그의 연기는 극의 흡입력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오스카 아이작 연기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작품이 스티븐과 마크의 자아 분열을 다루는 방식이다. 그들의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초중반부 에피소드에서의 팽팽한 긴장감과 급박한 템포 덕분에 마크의 시점으로 전환되어 스티븐이라는 인격이 탄생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후반부 반전과 그 임팩트가 극대화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콘슈를 만나는 이 모든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니면 그저 마크/스티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를 두고 극 중 등장인물들과 시청자들을 모두 안갯속에 던져 놓는 구성 역시 극에 집중하게 만드는 용도로는 일품이다. 하얀 정신병원 시퀀스처럼.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크와 스티븐의 서사에 이집트 신화의 요소가 더해졌다는 점이다. 사실 서로 다른 두 인격의 화해를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하나 된 자아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어떤 MCU 작품보다도 종교와 신화의 분위기가 짙은 덕분에 <문나이트>는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개성을 뽐내고 있다. 단순히 이집트 신화의 신들이 등장하고,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기 때문은 아니다. <문나이트>는 모든 종교적 체험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신비 체험'과 마크와 스티븐의 이야기를 연결 짓고 있으며, 이때 이집트 신화는 가장 오래된 종교적 내러티브로서 모든 신비 체험을 상징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인간 의식은 고정불변의 단일체가 아닌 다양한 상태들로 구성된 일련의 ‘흐름’이다. 이때 평상시의 자아가 아닌 변형된 의식 상태에서 인간은 존재의 궁극적 원인, 궁극적 실재, 자신의 참된 본성 등을 체득하는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다. 갑작스럽게 신과 같은 존재를 만나거나 그와 하나 되는 경험을 통해 이전까지 알 수 없었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관상 기도, 만트라와 같은 진언 수행 등의 수행법은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려 또 다른 의식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또 신비 체험으로부터 체험적 앎과 지상적 삶을 연결시키고,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마크와 스티븐의 경험은 그 자체로 신비 체험이자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신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스티븐의 인격은 수행의 측면을, 콘슈와 직접 만나고 계약을 맺은 후 콘슈의 힘과 갑옷을 얻어 그의 아바타가 된 마크의 인격은 체험의 측면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마크가 입는 슈트와 스티븐이 입는 슈트가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니는 이유다. 특히 스티븐의 풍부한 지식 덕분에 암미트의 무덤을 찾을 수 있고, 콘슈와 하나 되어 수천 년 전의 밤의 모습으로 하늘을 되돌리는 장면은 마크와 스티븐이 콘슈와 한 몸이 되는 신비 체험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마크와 스티븐이 콘슈가 말하는 정의에 동의하여 암미트의 정의를 실천하려는 아서 해로우와 대립하는 것은 신비 체험으로 말미암은 사상적, 이론적 측면을 보여준다. 심판과 죽음의 신인 암미트의 저울을 이용해 세상에서 정의를 이루겠다는 아서 해로우는 사람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모든 악인과 악인이 될 가능성을 지닌 이들을 제거하여 세상에 균형을 가져와야 한다고 믿는다. 반면에 콘슈와 스티븐 그랜트, 마크 스펙터는 모든 사람에게는 미래에 어떤 선택을 내리고 행위를 할지 결정할 자유가 남아있기에, 오직 악행을 저지른 이들에 한해서만 단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들의 차이는 "콘슈가 복수의 주먹으로 벌할 때, 사람들은 이미 다친 뒤야. 암미트님은 이걸 너무 잘 알고, 나쁜 행동을 하기 전에 심판을 내려. 악의 근본부터 잘라내시지"라는 해로우의 대사에 집약되어 있다.
또한 마지막 에피소드의 클라이맥스도 문나이트와 아서 해로우의 대결이 단지 히어로 대 빌런의 가치관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신과의 경험으로부터 말미암은 전쟁임을 환기시킨다. 문나이트는 카이로 시민들의 영혼을 일괄적으로 심판하여 암미트의 힘을 강화하려는 해로우 앞을 막아서는데, 이때 이들 뒤에서는 거대해진 콘슈와 암미트 역시 치열하게 싸움을 펼치기 때문이다. 이 혈투의 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암미트가 깨어날 기회조차 다시 주면 안 된다며 해로우를 단죄하라는 콘슈의 명령을 스티븐과 마크는 거부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미래를 단정 짓지 않고 그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악인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을 스스로 파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본인들도 콘슈로부터 자유의 몸이 된다. 즉, 콘슈와의 만남을 통해 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 스스로도 한 단계 성숙해진 인격으로 거듭난다.
이때 마크와 스티븐이 콘슈와 하나 될 뿐만 아니라 현실 너머에 실재하는 저승이라는 초월적 세계를 체험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릴 적 동생을 잃은 비극에 아파하고, 그로 인해 어머니에게 학대당한 마크. 그는 즐겨 보던 모험 영화의 주인공인 스티븐이라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세계가 아닌 오시리스의 저승을 마주하며 마크와 스티븐은 마침내 서로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두 인격이 몇십 년 간 이어온 갈등을 끝낸다. 그렇게 그들은 신을 매개로 한, 죽음과도 같은 신비적 체험 안에서 하나 된 존재로 거듭나며 자유로이 두 인격을 오가며 히어로의 역할을 완수한다. 이는 가톨릭의 성녀인 '아빌라의 데레사'가 저서인 <내면의 성>에서 "신의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느라 영혼은 육체를 떠난 듯한 감미로운 죽음"을 겪었고, 신과 하나 되는 체험 이후 "모든 일에 있어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느꼈고,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고생을 하더라도" 영혼의 본질이 분열되는 일이 없었다고 고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나이트>에서 엿보이는 신비 체험과 종교적 맥락은 단지 종교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인격을 오가며, 인격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는 스티븐과 마크의 모습은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그 정도만 상이할 뿐, 여러 개의 자아가 내재해 있는 ‘멀티 페르소나(Multi Persona)’ 현상을 공통적으로 겪는다. 고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착용한 가면인 페르소나는 사회가 요구한 도덕, 질서, 의무를 따르기 위해 타인에게 보일 이미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본캐 대신 부캐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볼 수도 있다. 반대로 보면 페르소나는 자신의 본성을 숨기거나 억압하는 기제로, 곧 정신분열의 한 양상을 야기할 수도 있다. 본캐인 마크가 엄마로 대변되는 사회적 질서와 억압으로부터 틈을 내서 부캐인 스티븐을 통해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지만, 그 결과 마크는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잃을 위기에 처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삶의 목표와 육체를 스티븐에게 빼앗기고, 거울 속에 갇혀서 진정한 자신의 인생이 아닌 삶을 구경하는 처지가 된다.
‘도구적 이성’과 근대 합리주의에 힘입은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면서도 그 피로감에 괴로워하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문수영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빠른 변화 속에서 표면적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사잇 사람'"이고, 이들은 본질적인 '나'와는 다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수많은 자아를 가진 것과 같이 분열된 삶을 산다. 따라서 현대인의 정신분열적 측면에 대한 경각심과 그로 인한 문제 및 해결책도 제시하는 마크와 스티븐의 서사는 신화와 종교의 내러티브를 빌렸을 뿐, 그 본질은 지극히 현대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겪은 콘슈와의 합일 경험, 그리고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경험은 통합되어 성숙해진 자아로의 성장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도구일 따름이다. 콘슈라는 신과의 만남 역시 분열된 인격 간의 인식과 소통을 가능케 한 계기일 뿐이다. 그보다 마크와 스티븐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방식이든 아니든 분열된 자아를 통합해야만 온전히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특히 쿠키영상에 드러난 세 번째 인격인 '제이크'의 존재가 미리 암시하는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나이트>의 액션 시퀀스에서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과 순간적으로 단절되는 장면 전환 이후 마크와 스티븐이 모두 의식을 잃은 사이 유혈이 낭자해진 싸움의 현장을 비추는 장면을 접할 수 있다. 이처럼 마크, 스티븐, 제이크 사이의 남은 이야기를 암시하는 편집과 연출, 그리고 쿠키영상의 조합은 분열된 인격의 위험성을 드러내기에 매우 효과적이며, 시청자들에게도 서로 다른 인격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과제의 중요성을 귀띔해주는 듯 보인다.
이처럼 <문나이트>의 주제의식과 메시지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의를 갖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액션이라는 영역에 한해서는 <팔콘과 윈터솔져> 혹은 <호크아이>와 같은 MCU 드라마들처럼 낮은 퀄리티를 보이기 때문이다. 거대해진 몸집으로 콘슈와 암미트가 육박전을 펼치고 있는데, 마치 옛날 괴수물을 보는 것처럼 지나치게 느리고 단순한 주먹싸움 식으로 연출되어 박진감이 부족한 게 대표적이다. 다양한 능력을 구사하는 문나이트, 라일라, 그리고 해로우 간의 액션씬과 교차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다만 이 아쉬움이 매번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연출, 예측 불가능한 스토리, 다른 작품들과의 적은 연계로 인한 낮은 진입장벽이라는 장점보다 크지는 않다. 그래서 단독 드라마로 <문나이트>의 완결성에는 호평이 아깝지 않다.
<이터널스> 개봉 당시 케빈 파이기는 MCU를 현대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 만들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그 포부는 진정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대신하겠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수천 년간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처럼 마블 역시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는 고전이 되어 길고 큰 문화적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의미가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문나이트>의 등장은 케빈 파이기의 포부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간 MCU에는 다양한 영웅들이 있었다. 사익만 쫓았던 방탕한 인물은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고(아이언맨), 국가의 도구에 불과했던 이는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갔으며(캡틴 아메리카), 타고난 신분과 운명의 무게에 짓눌리던 이(토르)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찾아 우주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마냥 비장하거나 엄숙하지만은 않은 영웅상은 알렉산더 대왕이 트로이의 성문 앞에 선 아킬레우스를 동경했듯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각기 삶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 마크와 스티븐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성장 이야기는 분열된 자아 때문에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게 <문나이트>는 수많은 히어로들의 활약상으로 가득 채워진 마블 스튜디오의 로고, 곧 현대의 판테온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문명, 종교, 신화의 시작점에서 과거의 활기와 신선함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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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그의 쓰레기에는 품위가 있다”
사랑에 배신 당한 지수는 타인의 쓰레기를 뒤지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날, 최선을 다해서 깔끔하게 버린 쓰레기가 눈에 띈다. 옆집 남자 우재의 것이다. 지수는 그가 궁금하다. 지수는 쓰레기 정보로 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우재와의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의 밝고 따뜻함, 그리고 상처들. 지수는 점차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예고편│Trailer
영제: Flowers of mold│감독: 심혜정│각본: 심혜정, 이수진
원작: 하성란 소설집 ‘옆집 여자’에 수록된 단편 ‘곰팡이꽃’
출연진: 김재경, 현우 외 多│장르: 드라마│상영 시간: 104분
국가: 대한민국│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왓챠피디아 2.6
초청·수상 내역: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경쟁 부문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 CGV상)
“버려지는 것들이 그 사람에 대해 더 솔직하게 말해”
사람들이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내용물을 통해 이웃들의 성향과 취향을 기록하는 특이한 버릇 혹은 습관을 가진 지수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지금 사회의 인간 관계를 들여다보며 나아가 특별한 사랑까지 파고듭니다. 시점에 따라 쓰레기를 뒤지는 행위가 범죄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버려진 것을 통해 진짜 모습을 접근하는 방식은 굉장히 독창적이게 다가옵니다. 밀키트 마케터이자, CS라는 직업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 그녀의 성향을 보여주며 치장된 말과 행동으로는 알 수 없는 진짜 모습을 판단하는 그녀만의 소통법임을 알려주죠. 그리고 깔끔한 일처리로 인정받는 직장과 180도 다르게 소심하고 내성적인 모습은 왜 그런 행위를 하였는지 궁금증을 일으킵니다.
호실별로 쓰레기를 찾아 세세히 사진과 매일 기록을 꼼꼼히 남기며 타인에게 벽을 느끼는 일종의 정신병처럼 비치는데, 과거 연인의 잘못된 행위가 남긴 상처에 대한 자기방어적 트라우마이자, 보호 본능이었습니다. 다시 상처받기 싫은 그녀의 단단한 잠금장치, 영화는 그것을 해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게 새로운 관계라 여겼는지 낯선 우재와의 만남으로 전반부의 긴장감과 새로운 출발의 애틋함 사이에서 묘한 기류로 뒤엉키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람의 문제는 사람으로 해결돼야 하고 진정한 관계는 진실한 소통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시선을 애둘러서 보여주며 우리 사회가 만든 단절된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누구에게나 실시간으로 자신을 뽐내지만, 양면이 다른 동전처럼 전혀 알 수 없는 속마음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른 이들을 따라 마치 내 취향인 양 똑같은 모습으로 동질감과 유대감, 관심에 목메는 사회이기 때문에 지수처럼 꾸밀 것 없이 버려진 쓰레기들을 봐야 진짜를 볼 수 있는 가짜로 가득 찬 안타까운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너를 줍다〉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묘하면서도 진지한 시선을 던지며 나아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남깁니다. 지수의 화사해진 스웨터처럼 우재와의 새로운 출발을 통해 더 이상 남들의 흔적이 그녀의 쓰레기봉투에 없길 바라면서 말이죠.
한 줄 평: 피상적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사회를 쓰레기봉투에 담은 재밌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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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정말 모든걸 내려놓고자 해
이 영화의 엔딩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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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어느 한 한인민박이었다. 내 앞에는 홍대에서 명예교수를 했던 분이 앉아있었다. 와인이라는 걸 살면서 세번째로 먹어본 날이었다. 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물셋이요. 군대는? 먼저 해야 할게 있어서요. 왜 한인민박에 왔어? 가격이 싸서요. 돈 아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죠. 프라하 어때? 일단 사람이 많네요. 넌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 같아보여. 있다면 있죠. 없는 사람이 있나요. 멋쩍게 웃었다. 왜 유럽에 왔어? 왜 유럽에 왔냐는 말을 들었다. 음.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같은 말을 두번 들었다. 달라진다는게 뭐지? 별거 없어요. 뭔가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후회하는 일이 많아서요. 아. 후회. 뭐를 후회하는데? 그냥. 좀 더 잘 살지 못한 것?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14시간에 환승까지 하며 비행기를 탄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전직 교수는 나에게 계속 물었다. 영어는 좀 하나? 좀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된거 아냐? 혼자 돈 모아서. 살면서 해본 적 없는걸 도전하겠다는건데. 유럽에 와서 의사소통에 무리 없으면 괜찮은거지 뭘. 하하. 아직 토익 시험 본 적 없는걸요. 교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현재를 사는데 무리가 없는데 왜 과거를 마음에 품고 있냐 이 말이야. 아이 뭐. 그럴수도 있는거죠. 그럴수도 있는거죠? 음. 너 내 동생같아서 말해주는건데. 후회는 네 삶을 갉아먹을거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와인 반 잔을 들이켰다. 내 삶을 갉아먹는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어떤 건 마음에 품고 사는게 더 나은 것 같더라구요. 그래. 다 좋아. 20대 청춘 다 괜찮은데. 이별해야 할 때를 아는 것도 멋진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부분이지. 네 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알아. 이미 잘 하고 있으니까. 여기 온 것만으로도 네가 원하는건 다 얻었다는 뜻이니 걱정하지 마라. 너 20대의 나같아서 말해주는거야.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은 건 생각이 많은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때도 있지만 역효과도 있다는 거 알아둬라. 네가 해준 이야기가 너의 삶의 좋은 방향이 될거라고 생각해. 그냥 단순히 유럽 여러나라를 다니는게 여행의 목적은 아닐테지. 생각해봐. 이별해야 할 때가 언제고 또 무엇과 작별해야 할지. 다시 받아들여야 할 건 무엇인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이별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먼이 감독을 맡았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기엔 사실 영화는 매우 불친절하다. 그래서 내가 쓴 감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쓰고 싶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다 나왔다. 제시 플레몬스, 제시 버클리, 토니 콜렛, 데이빗 듈리스가 주인공을 맡았다. 우선 찐따연기라면 헐리웃에서 둘째가면 서러운 제시 플레몬스가 이번에도 어딘가 기가 죽은 남자 역할을 300% 어울리게 소화해냈다. 하지만 더 눈에 띄는 연기를 한 배우가 있다. 토니 콜렛이다. 이 영화의 역할과 <유전>과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어머니 연기는 결이 다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배우는 이걸 성공해낸다. 주변에 있을 또 다른 어머니상을 완벽하게 보여줬다. 이에 대한 이유는 극에서 제이크의 부모가 가져야 할 역할 때문이다.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 상 어머니와 아버지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조금 있어야 한다. 이 여배우는 그런 역할 구분을 무의미하게 극을 장악하며 '이 영화가 대체 뭐지?'라는 혼란을 가중시키는게 크게 기여한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제이크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소개하는 신이다. 케이크에 대해 말하다가 이명이 있다는걸 스스로 여자친구에게 털어놓는데, 이 부분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하는 대화에는 두서가 단 1도 없다. 예를 들어보면 케이크가 손가락을 닮았다고 말하고, 귀에 이명이 있다고 답한다. 그러고 이명이 재미없다고 답한 다음, 거지같은 일은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다음 이명 증상에 대해 말한다. 이후에 왜 귀가 불편한지 일관성있게 말할까? 아니다. 이것에 대한 이유에 우주의 비밀과 주식 시장 정보가 관련있다고 답한다. 이런 식으로 대체 뭔 소리지 싶을 대화를 감정연기와 표정으로 공포 분위기로 만들어버린다. 이 영화가 당연히 가져야 할 연출 지점 중 하나는 개연성의 붕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에서 오는 부작용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로 유지된다. 물론 다른 배우들도 연기가 좋았지만 난 이 부분에 있어 토니 콜렛이 엄청났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토니 콜렛의 연기에 대해 말하며 애초부터 이 영화는 말이 안되야 한다고 썼다. 배우들이 이걸 완벽하게 이해하고 감독도 각본을 이 개연성의 붕괴를 위해 각본을 만든 것 같다. 즉 난 플롯이 왜 불친절한지와 이 영화의 메세지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우선 전자를 생각해봤다. 이 영화가 왜 불친절한지에 대한 이야기다. 제이크가 누구인지에 대해 먼저 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제이크가 누구냐? 학교에 근무하는 노인 경비원이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물리학도로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지나가다 본 예쁜 여학생에게 반해 연애도 해보고 싶었고 건강한 부모님과 함께 하하호호 웃으며 살고 싶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모든 걸 다 이뤄주진 않는다. 사실 이 인물은 영화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도 이런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 영화가 주는 서늘한 공감이 오래 갔던 이유가 있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때문이다. 엔딩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이 영화 전부가 제이크의 망상이다. 제이크는 꽤나 오랫동안 이 꿈(망상)을 꾸며 살았다. 그냥 단순히 '좋은 부인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가 아니라, 여자친구의 외모부터 시작해서 이름, 전공학도, 여자친구의 성격과 우리 부모님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상상을 꽤나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난 이게 제이크의 일생이 꽤나 비극적이었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기에 망상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상이 깊어지니까 점점 자세해지는 것이다. 이런 가정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비참해진다. 왜? 현실이 아니니까. 망상이 구체적일수록 초라한 현실이 대비될 뿐이다. 이에 마찬가지로 제이크의 엄마 대화같이 인물들이 대사를 하는 순서가 두서없고 일반적인 서사를 따르지도 않는 이유도 감독 찰리 카우프먼이 이 비참함이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인물이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또 논리순서에 맞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정리 할 필요도 없고 한다 해도 아무 쓸모 없다. 왜? 보여줄 일이 없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거다. 영화가 이것을 의도한 이유는 분명하다. 개인의 내면이 어디까지 붕괴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는게 나의 생각이다. 어차피 주인공은 우리와 대화 할 생각이 없었다. 할 필요가 없을만큼 이미 제이크는 무너져있었던 존재였다. 매일을 망상 덕에 하루하루를 살던 사람에게 대화가 필요할까.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자아가 붕괴된 인물이 갖는 혼란스러움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떤 인물에 대해 고유의 방식으로 표현하며 이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했던 방법이 여기에 있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이런 상상을 해봤다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무엇에 대해 후회하며 늘 가정을 만들었다. '아. 이 때 이러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텐데'식의 상상이다. 그게 두서가 있었나. 아니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처럼 원인과 결과를 분류하지도 않았고 그럴려고 해본 적도 없다. 남에게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보통 그런 미련들은 나 혼자서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 영화의 엔딩이 되어 이 각본이 갖는 강력한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아. 이거 내 머릿속을 영화로 옮긴거구나. 찰리 카우프먼은 좀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구나. 난해한 영화지만 주인공의 엔딩신에서의 선택은 분명한 이유도 이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감독은 삶에서 생기는 후회를 이렇게 멋지고 불친절하게 표현했고, 이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너 이러는거 나도 알아. 그래서 네가 끝내고 싶은건 무엇인데? 이렇게 묻는거다. 이 질문에 대해 말하는 건 또 다른 결이 있다. 난 이게 영화가 주는 메세지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끝내고 싶은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영화의 갈등이 어디에서 왔을까와 같다고 생각한다. 여자 주인공에게 끝내고 싶은건 연인관계다. 여자친구는 이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또 얼른 마무리하고 집에 가고싶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런 고민으로 영화가 시작해서 주인공 제이크가 마무리지은 선택지로 마무리된다. 이는 처음과 끝의 대비가 '여자주인공이 끝낸 것의 결과가 제이크의 처지와도 같다'라는 암시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여주인공이 반복해서 하는 독백도 감독이 갈등의 원인(연인관계에서의 결별)과 끝내고 싶은게 무엇인가(영화의 메세지)를 동격으로 놔둔 것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독백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여자친구는 제이크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에 관련한 혼잣말을 하면서 같은 계단을 반복하며 돈다. 이 독백의 근원지는 어디냐? 제이크와의 관계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제이크의 여자친구는 실존하는 존재인가? 아니다. 제이크가 어느 날 봤던 여자 중 한명을 망상으로 발달시킨것이다. 그러니까 제이크의 연애(끝내고 싶은 것)를 주인공 스스로의 자아존중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의문점(끝내고 싶은건 무엇인가)이 분명해진다. 제이크가 끝내고 싶었던 건 후회와 미련일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은 이 감정에 지배됐으며 그걸 끝내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를 골랐다. 즉 제이크가 겪는 갈등 그러니까 내적 혼란은 본인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난 감독이 이걸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럼에도 난 감독이 따뜻함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이 해결책 제시를 통해 영화의 메세지는 간단하다. 네 후회와 미련을 이 인물에 투영해서 이제 그만 끝내버리라는 뜻이다. 이에 대한 근거도 있다. 어느 부분은 망상이고 남자, 여자주인공이 나온다. 반면에 어느 지점이 끝나고 주인공의 선택을 보여줄 때 할아버지의 모습이 직접 나온다. 나는 이것이 망상/현실을 감독이 구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 문단에서 '왜 감독이 플롯을 복잡하게 설정했는가'와도 이어진다. 이게 만약 네 이야기가 맞다면, 네 후회와 미련과 닮아있다면 내가 그냥 끝내버리겠다. 난 이렇게 받아들였다. 차 타고 시작했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탐방하는 여행이 차 안에서 정리된다는 것도 이에 대한 다른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영화를 시작했던 이유와 작품 내부에서 마무리 된 것이다. 후회와 미련이 자아안에 가득했던 사람이 행복해진다는건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감독 찰리 카우프먼은 이를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관객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시켰다. 그리고 이 인물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영화 엔딩으로 보여준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작품을 만든 의도다. 난 놓친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나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타인의 기준이 내것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이유로 사람들을 상처주기도 했으며 이런 내 자신이 격하게 싫을 때도 많았다. 그런 생각에 빠질때마다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난 근본적으로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기혐오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이 없어진다. 이 생각을 멈추는 법은 간단하다. 이런 후회와 미련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선택지같은건 없다는걸 깨닫는거다. 또, 여기에 같혀있다가는 앞으로는 못 나아갈 것 같다는 위기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을 돌린다는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내가 선택할 선택지는 무엇인가. 영화가 말하는게 맞다. 이것들은 애초부터 불필요한 망상이다. 눈 안에서 고립될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엔진을 키고 달리는게 우리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다 본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아니 사실 확실하게 답해야 한다. 날 괴롭히던 것들과 이별해야 할 때가 됐다. 이제 그만 끝낼 때도 됐다.
할말이 많은 영화라 글을 길게 썼다. 난 이 영화에 그정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를 차갑고 서늘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던데, 나는 <이터널 선샤인>이나 <아노말리사>와 같이 이 작품이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불친절한 영화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본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으며 처음 완주하고 한 일주일 내내 여운이 남았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프라하에서의 경험이 생각나는 작품이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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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 퍼만의 최고를 향한 강박와 광기, 그리고 집착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 제임스 완의 ‘컨저링 2’,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와 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향믹싱상을 포함해 3관왕을 기록한 ‘위플래쉬’까지 40여 편의 사운드 에디터로 참여하며 빛나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로런 해더웨이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더 노비스 리뷰입니다. 대학 시절 조정 선수로 활동한 자신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출, 각본, 편집까지 도맡아 스포츠의 매력을 기본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극한의 상황들을 감각적인 촬영과 스타일리시한 음악 등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 표현합니다. 의도였겠지만, 성공과 우승의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전달하는 기존의 스포츠 장르와는 달리, 완벽이라는 자학적 세상에 빠져버린 한 인간의 집착과 광기에 집중해 섬찟한 스릴러 느낌을 충실히 전달합니다. 살짝 어긋나는 부분도 존재하지만, 기존의 틀을 파괴하는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신선함과 패기에 다음이 너무 기대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마 ‘블랙스완’을 좋아하신다면 재미있게 보시리라 생각되네요.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더 노비스 정보
난 수재가 아니라 노력파야
가장 못하는 과목인 물리학을 전공으로 택할 만큼 늘 최고를 갈망하는 웰링턴 대학 신입생 알렉스는 교내 조정부에 가입한 후 동급생이자,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온 제이미에게 경쟁심을 느낍니다.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농구, 배구 등 학교 대표팀을 해왔던 제이미에 비하면 체력이나 자질 면에서 부족한 것이 확실한 상황, 그럼에도 알렉스는 조정부 1군에 들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거듭하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기 시작하죠. 그리고 강박에 가까운 심리적 압박과 한계에 다다른 육체를 넘어서려는 그의 행동들은 주변 부원들로부터 서서히 자신을 소외시키는 발단이 되어가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THE NOVICE│감독·각본 : 로런 해더웨이│출연진 : 이사벨 퍼만, 에이미 포사이스, 딜론 외 多│장르 : 드라마, 스포츠, 스릴러│상영 시간 : 97분│개봉일 : 2022년 5월 25일│국가 : 미국│등급 : 15세 관람가│평점 : 기자·평론가 5.67, 로튼 토마토 신선도 93% 팝콘 74%, IMDB 6.5, 메타 스코어 85점│수상 내역 : 20회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촬영상, 최우수여우주연상, 최우수장편영화상)│수입·배급 : 영화사 진진│시청 가능 서비스 : 현재 극장 상영 중
영상, 음향, 오리지널 스코어까지.. 현란합니다
# 더 노비스, 무엇 좋을까요?
주목받는 신예 제작진들의 조합
애플, 구글, 페이스북, 나이키, 보그 등 세계 최고 브랜드의 광고와 제이 지, 이기 팝, 라디오헤드, 제이 콜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해온 촬영 감독 토드 마틴은 알렉스에게 초점을 맞춘 클로즈업과 접사, 강 위의 풍경과 함께 이어지는 롱샷 등 다양한 방법과 각도로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보여주고 중심이 되는 캐릭터가 처한 극한의 상황과 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더불어 조정이라는 스포츠의 호흡을 전달하는 빠른 시퀀스 편집은 극의 몰입과 긴장감을 배가시키죠. 여기에 입봉작이긴 하나 이미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로런 해더웨이의 능력이 빛을 발하며 보편적인 틀을 깨부순 획기적인 음악으로 역동성과 독창성을 부여합니다. 60년대 빈티지 팝을 사용해 조정에 빠져버린 알렉스를 표현하고 이후 광기와 집착에 빠져 주변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스스로 파묻혀가는 숨 막히는 완벽주의를 ‘페어웰’ OST의 알렉스 웨스턴이 맡아 고전 클래식의 섬세한 현악으로 이어가죠. 떠오르는 신예들이 뭉친 현란한 영상미와 독창적인 사운드가 부여하는 몰입감은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일 것입니다.
강렬하다는 말로 부족할 만큼의 연기 고작 97년생...
이사벨 퍼만, 무섭도록 몰입한 연기
그리고 무섭도록 완벽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알렉스를 연기한 이사벨 퍼만의 소름 돋는 연기는 인간적인 야망으로 가득 찬 캐릭터에 빛을 불어넣습니다. 졸업까지 전액 장학생이라는 사실에도 가장 자신 없기에 물리학을 전공하고, 모든 시험을 세 번이나 풀며, 빈약한 체력 조건에도 조정부 경쟁자들의 기록을 하나 둘 깨부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죠. ‘오펀: 천사의 비밀’에서부터 남다른 떡잎을 보여줘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너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인물로 그려져 그런 행동에 대한 연민이나 동요보다는 1등에 사로잡혀있는 정체성 따윈 없는 좀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자기만족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과 강박은 음성이 파열되고 찢어지는 듯한 청각적 효과와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예사롭지 않은 영상들이 가세해 더욱 인물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자신의 상처와 웃음을 보이며 퇴장하는 뒷모습이 묘한 여운을 남겨주니 주인공의 완벽함만큼이나 연기 또한 물샐틈없었다는 게 확실하죠.
넌 네가 잘하는 것만 계속하는 게 문제야
초보자라는 뜻의 원제처럼 그것이 단순히 대학 조정부의 이름이나 운동 경기에 한정되어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드라마가 끝을 향할수록 오늘날 우리들이 겪는 성취와 만족감,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 연결되는 삶과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성공적인 미래와 행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미쳐가는 상태를 빗대어 점점 심해져 가는 이기주의와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 구조를 느슨하게 연결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인공처럼 정상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한다는 완벽주의적 삶의 가치관, 무조건 1등을 해야 되는 세상이 낳은 폐해의 흔적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그래서 기록을 깨고 자기 자신을 이겼음에 웃으며 떠나는 모습이 더 쓸쓸하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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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지루하지 않는 일상의 변화가 주는 행복
▷영화 :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2024
▷평점 : ★★★★
▷한줄평 : 누군가에게는 무가치해 보이는, 그러나 나의 존재를 충만하게 채우는 일상들
‘완벽한 일상’(퍼펙트 데이즈)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
하루하루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열정과 에너지를 쏟는 삶,
무가치해 보이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집요하게 도전하고 이뤄내는 삶,
우리가 속한 세상 속 성공의 방정식에서는 으레 그런 것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루 일과를 반성하고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강요된 일기 쓰기에 익숙한 우리의 ‘충실한 하루 살기’는 충효(忠孝) 사상만큼이나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의 방식이다.
열심히 살지 못한 것 같은 날은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다'라는 경구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가 우리 일상을 ‘완벽하다’, ‘완벽하지 않다’고 평할 수 있을까?
늘상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완벽주의'게임의 올가미에 또다시 갇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이런 의심에서부터 출발한다.
영화는 도쿄 시부야 공공시설 청소부(The Tokyo Toilet)인 '히라야마'(야코쇼 코지)의 단조로운 일상을 지루하리만큼 반복적으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히라야마(야코쇼 코지) /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이른 새벽 동네 주민의 빗질 소리에 깨어나기, 가지런히 이부자리 정리하기, 화초에 물 주기, 집 앞을 나서면서 하늘 쳐다보기,
주차장 한 켠에 있는 자판기 캔 커피 사기, 출근길 자동차 안에서 카세트 테이프로 팝송 듣기, 점심시간에는 근처 공원에 가서 샌드위치 먹기,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일본어로 ‘코모레비’라고 함)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 퇴근 후에는 단골가게에서 생맥주 한잔하기,
휴일에는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하기, 잠들기 전까지 책 읽기 등 뭐라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하루하루 반복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화장실 청소부라는 본업에는 마치 장인의 면모를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최선을 다한다.
세면대 뿐만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지기 꺼려 하는 좌변기, 소변기 구석구석을 정성스럽게 청소하고, 비데 노즐에 묻어 있는 오물도 깨끗이 제거한다.
청소도구도 직접 제작해서 사용할 만큼 애정을 쏟아붓는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조차도 피해 가는 청소부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하루를 충실하게 채울 수 있는 일상이 너무나도 만족스럽다.
습기를 머금은 화초가 싱그럽고, 차 안에서 듣는 올드팝들에 흥이 나고, 샌드위치를 먹는 공원 벤치에서 만나는 아가씨가 반갑고,
인화된 나뭇잎 사진을 서류함에 분류해서 놓는 일도 뿌듯하고, 화장실 사용법이 서툰 외국인을 잘 안내한 일도 보람차다.
이 모든 일이 하루를 풍요롭게 하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그러나, 가끔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일상을 깨뜨리는 일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뺀질이 스타일의 젊은 청소부 동료인 다카시의 갑작스러운 퇴사, 오랫동안 왕래를 하지 않던 조카의 예기치 않은 방문과 여동생과의 재회,
단골 선술집 여주인의 전 남편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이러한 일들조차 잠깐의 흔들림이 있긴하지만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세상엔 수많은 세상이 있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세상이 있지."
히라야마(야코쇼 코지) / 영화 <퍼펙트 데이즈>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타인과의 ‘관계’(Relationship)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렇기에 번화한 도시 한복판에서도 고립된 은둔자처럼 살아가는 ‘군중 속의 고독자’ 히라야마도 어찌 보면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인생의 패배자처럼 보인다.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보듯 그가 도망쳐온 복잡한 세계가 있었을 듯싶다. 그렇게 지금의 단순화된 삶의 방식은 지나온 삶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반복에서도 나뭇잎에 비추는 햇살의 변화를 관찰하는 일조차도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치있는 일이 되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단조로움은 타인의 시각일 뿐, 자신만의 의미있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특별한 것은 가치 있는 것일까? 특별하다,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의 판단일까?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기보다는 단조로운 일상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 자신 스스로의 기쁨을 충만히 발견해 낼 수만 있다면, 누가 특별하지 않다 평가할 수 있을까?
언제나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의 규칙적인 리듬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사소한 것들이 똑같지 않으며 매번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빔 벤더스 감독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적 능력일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Feeling Good'을 들으며 출근길로 향하는 히라야마의 변화무쌍한 표정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삶을 지배하는 ‘희로애락’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순간순간 드리웠다 사라지고, 다시 생겨났다가 지워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 우리네 삶 아니던가?
(링크) Feeling Good : https://youtu.be/oHRNrgDIJfo?si=kzA5YAj-S2dv_Jz8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영화 마지막 장면 얼굴에 희노애락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일상에 만족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를 지켜내는 방법이다.
"다음은 다음이고, 지금은 지금이고!"
(곤도와 곤도, 이마와 이마!)
히라야마(야코쇼 코지) / 영화 <퍼펙트 데이즈>
하루하루를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채워 살아가는 우리에게 <퍼펙트 데이즈>가 던지는 메세지는 분명하다.
"당신의 하루는 어떤 기쁨으로 채워져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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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를 갱신한 감독과 배우, 몰아치는 장르영화의 쾌감
7★/10★
우리는 심각한 얼굴을 한 남성 배우들이 포스터 가운데에 큼지막이 자리한 ‘두 글자 영화’, ‘세 글자 영화’를 참 오래도록 봐왔다. 그중에는 언젠가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영화도 있었고, 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식상한 영화도 있었다. 문제는 개별 영화의 완성도와 성취를 떠나, 이런 콘셉트의 영화가 기시감‧피로감을 준다는 점이다. 포스터만으로 이미 그 영화를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포스터만이 아니다. 전개도 마찬가지다. 몇 장면을 보면 이미 결말이 예측되고, 그 결말로 어떻게 나아갈지가 뻔히 보인다. 지루함에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 영화를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국 상업영화의 성장이 안전한 공식의 확립으로 귀결되어 반복적으로 소비된 결과다.
〈밀수〉도 그래 보였다. 닳고 닳은 포맷에 여성 배우를 끼워 넣었다는 것만으로 새로움을 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밀수〉는 성급한 단정을 기분 좋게 배반한다. 첫 번째 포인트는 케이퍼 무비, 즉 장르 영화로서의 재미다. 영화의 전개는 굉장히 빠르다. 문제가 되는 갈등 사건이 빠르게 전개되며 관객을 순식간에 영화 속 세계로 몰입시킨다. 화학 공장의 폐수로 바다가 오염되어 생계가 막막해진 어촌의 해녀들이 밀수에 뛰어들고, 그들 사이에서 오해가 생겨 사이가 벌어지며, 얄궂게도 엇갈린 이들이 다시 얼굴을 마주하기까지의 초반부를 보자. 본격적인 판이 벌어지기까지의 전사(前史)를 속도감 있게 설명해주는 초반부는 ‘먹고살기(이왕이면 더 잘 먹고살기)’가 최고로 중요한 문제였던 1970년대의 시대정신을 파노라마로 펼쳐낸다. 초반부를 본 관객은 이제 인물들이 그 어떤 비도덕적인 일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조금 덜 나쁜 사람이든 다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퍼 무비를 위한 제대로 된 판이 벌려진 것이다.
무대가 마련됐으니, 이제 그 위에서 뛰어놀 캐릭터의 차례다. 웰메이드 케이퍼 무비가 그러하듯, 개별 캐릭터들은 다채롭게 날뛰는 동시에 앙상블을 이룬다. 김혜수는 〈타짜〉, 〈도둑들〉에서 보여주었던 연기로 장르 영화의 긴장을 생산하며 중심을 잡는다. 김혜수의 캐릭터와 연기는 그 자체로 관객에게 영화를 설명하는 장치가 된다. 김혜수의 파트너이자 자존심 강한 해녀를 연기한 염정아는 현실적 연기 톤을 선보인다. 〈밀수〉가 동떨어진 세계의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건너온 실존하는 과거의 이야기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다방 마담을 연기한 고민시는 예쁘고 요염하게만 소모되다 사라져버리는 다른 영화의 선배 레지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기가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보란듯이 활개하며 인상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어리바리’한 악당을 연기한 박정민, 공권력이라는 막대한 힘을 가진 세관을 맡은 김종수 역시 가진 것 없는 해녀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역할을 얄미울 정도로 능숙히 소화한다. 이들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가 유리한 1970년대의 생존경쟁에서 ‘남자’라는 특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피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권 상사를 연기한 조인성. 사실, 우리는 이미 스타가 된 미남 배우들의 멋짐에 무던한 경향이 있다. 처음 그의 멋짐을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조금씩 휘발되고 어느새 그저 익숙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멋짐은 당연하지 않다. 류승완 감독은 〈밀수〉에서 작정하고 조인성을 멋있게 연출했다고 인터뷰했는데, 이 말은 허언이 아니다. 권 상사는 모두가 생존을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는 전쟁터의 꼭대기에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다른 남자들이 갖지 못한 낭만이 있다. 속된 말로, ‘치인다’. 〈밀수〉의 조인성은 캐릭터와 액션에서 모두 기존의 매력을 완벽히 갱신하며 그의 멋짐을 새삼 뽐낸다. 물론 〈밀수〉의 캐릭터 활용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해녀로 출연하는 박준면, 김재화 등 이미 다른 작품에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배우들의 활용도가 더 컸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뛰어난 존재감을 뽐내는 캐릭터들의 각축전이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외에도 해녀들의 특성을 반영한 수중 액션, 음악과 의상으로 연출한 시대적 분위기 등 〈밀수〉를 즐길 만한 요소는 많다. 화룡점정은 메시지다. 남성 이익 카르텔에게 모든 것을 털린 해녀들이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자신들만의 의리‧패밀리십‧해녀 정체성을 무기 삼아 빼앗긴 것들을 되찾는 과정은 영화의 장르적 쾌감과 만나 폭발한다. 현실에서는 가진 자들이 연대하고 없는 자들이 갈등하지만, 〈밀수〉에서는 없는 자들이 뭉쳐 가진 자들의 칼끝이 서로를 향하게 한다. 식민자 남성의 전략인 ‘이이제이’를 피식민자 여성의 반격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베테랑〉, 〈모가디슈〉 등에서 남성들의 연대와 갈등으로서의 세계에 천착하던 류승완 감독이 이토록 완성도 높은 여성 케이퍼 무비로 돌아왔다는 게 놀랍다. 숨통이 트이는 해녀들의 숨비 소리에 하루 빨리 동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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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생각의 여름> 런칭 예고편
뒹굴뒹굴 무기력증에 빠진 시인 지망생 ‘현실’.
공모전에 내야할 마지막 시가 데굴데굴 산으로 가자,
새로운 영감을 찾아 집을 나선다.
시가 산으로 가면, 산으로 가는 게 답?
‘현실’은 생각의 여름 속에서 집 나간 영감도 찾고,
호구 잡힌 자신도 찾을 수 있을까?
남다른 현실의 한여름 기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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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빌리 홀리데이> 티저 예고편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 놓은 재즈의 초상 ‘빌리 홀리데이’
무대 위에선 모두의 박수를 받는 ‘레이디 데이’였지만
무대 아래에선 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끝없이 시달렸다.
도망칠 곳 없이 어둠으로 내몰린 삶 속에서도
그녀가 포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노래
그녀를 위한 단 하나의 사랑.
Stay tuned for LADY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