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1-14 15:11:20
청설 | 공감과 청량으로 빚은 계절감 충만 로맨스
<청설>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 졸업장은 손에 쥐었지만,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부모님 도시락 가게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용준’(홍경). 어느 날, 그는 배달 중 들린 수영장에서 완벽한 이상형 ‘여름’(노윤서)을 만난다. 청각장애인 수영 선수인 동생 ‘가을’(김민주)의 훈련을 돕던 여름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서툴지만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고, 행운까지 따른 덕분에 용준과 여름은 친구가 된다.
입이 아닌 손으로만 말하는 여름과 더 가까워지고, 소중한 사이가 되고자 노력하는 용준. 하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용준의 고백은 거절당한다. 미래와 꿈을 이야기하는 용준과의 만남이 청각장애인 동생과 부모님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여름에게는 충격이자 부담이었기 때문. 하지만 용준은 희망을 놓지 않았고, 초여름이 깊어지면서 여름도 서서히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20대라는 계절
어른들이 20대 중후반에 접어든 이들을 위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바로 인생을 시계에 비유하는 것. 100세 인생 중 20대 중후반이면 이제 1/4 정도 지났을 뿐이니, 시계에서는 새벽 6시 언저리이고, 막 해가 뜨거나 뜨기 직전의 새벽일 뿐이라고. 그러니 설령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서 좌절스럽더라도 무너질 필요는 없다고. 간 호흡으로 인생을 보면서 내실을 다지고, 다음 기회를 노려도 충분하다고.
이 비유는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다. 마라톤 같은 달리기 경주로 바꿔도 말이 된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미사여구를 더해도 된다. <다크 나이트> 중 하비 덴트의 대사처럼, 인생의 새벽인 20대는 해가 뜨기 직전이라서 더 어두운 것이라고. 계절로 대신할 수도 있다. 20대는 사계절 중 이제 막 초여름이 시작되려는 시기일 뿐이니 아직 열매를 수확할 가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1년을 마무리할 연말은 까마득하다고.
대만의 동명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 <청설>은 인생의 초여름, 20대 중반을 마주한 청춘들의 로맨스를 보여준다. 정확히는 로맨스를 곁들였다. '우리의 여름을 들어달라'(Hear Me: Our Summer)는 의미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다.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가 아니라 세 주인공이 각자의 여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원작과 리메이크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바로 이름이다. 특히 두 자매의 이름이 독특하다. 한국판 <청설>은 자매의 이름을 계절감 가득한 '여름'과 '가을'로 변경했다. 흥미롭게도 이 이름 덕분에 세 주인공이 마주하는 인생의 초여름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여름과 가을 자매의 이야기에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름과 가을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름의 인생은 철저히 가을이에게 맞춰져 있다. 동생이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뚫고, 함께 올림픽에 가는 게 그녀의 유일한 목표다. 그래서 여름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가을이의 훈련비로 투자하고, 시간을 쪼개서 국제 수화를 배우러 다닌다. 영준과 썸을 타고, 연인 관계로 발전을 하려는 순간마다 그 관계를 망설이거나 끊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을이와의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오히려 다그치는 것.
여름이에게 영준과의 만남은 터닝 포인트다. 영준은 대학 졸업 후 하고 싶은 일이나 진로를 아직 찾지 못한 평범한 20대다. 그는 도시락 배달을 갔다가 만난 여름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에게 같이 인생의 목표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정작 여름은 충격에 빠진다. 올림픽 출전이 가을이의 목표일 뿐 자기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 처음 깨닫고, 청각장애인인 부모님이나 동생과는 다른 인생의 가능성을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
여름의 깨달음은 메타적이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열매라고 생각했던 가을이의 올림픽 출전이 자신의 '가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으니까. 그렇게 여름이는 여름이 코 앞에 다가온 후에야 비로소 자기만의 가을, 새로운 인생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영준과 여름의 로맨스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여름을 마주하고는 각자의 가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격려와 위로에 가깝다.
착한데, 착하기만 한 로맨스
물론 <청설>에는 대만 로맨스 영화에 기대하는 순간도 나온다. 사랑이 시작되는 풋풋함, 착한 풋사랑이 끝나는 아픔 등. 특히 청각 장애라는 소재를 활용한 전자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영준이 여름에게 고백하는 순간은 유독 살랑거린다. 수영장에서 번호를 따거나 커피를 같이 마실 때 말을 하는 대신 전부 수화만 사용하다 보니 설렘과 떨림이 손짓과 몸짓만큼 크게 보이니까.
여름이 영준에게 빠져드는 과정도 흥미롭다. 호감은 느끼지만 그를 친구로만 생각하던 여름. 하지만 기분 전환 차 놀러 간 클럽에서 그녀는 시나브로 그에게 스며든다. 영준이 이끄는 대로 손을 스피커에 대고, 음악을 듣는 대신 느끼면서 비로소 그의 모습을 한 세상에 마음의 문을 연다. 수영장에서 영준의 말이 아니라 그가 보낸 물결을 느낀 후에야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장면처럼 비슷한 순간이 반복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다만 착하고 순수한 로맨스가 빛이 바래는 순간도 있다. 여름과 영준의 관계를 위기에 빠트리는 전개가 부자연스럽기 때문. 특히 여름과 가을의 자취방에 불이 나는 시점부터의 진행은 다소 갑작스럽다. 물론 세 주연의 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고, 그들의 성장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작위적인 전개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영화의 분위기는 끝내 불협화음을 내고 만다.
소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유독 부각되는 단점도 있다. 바로 영화가 청각 장애라는 소재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청설>은 청각 장애인의 로맨스를 다루기에 독특한 작품이다. 소재를 강조하려는 노력은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상술했듯이 청각 장애인들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로 묘사하면서 고정관념을 빗겨 나간다. 또 템포가 늘어진다고 느껴지더라도 수화로 이뤄지는 대화를 가능한 끊지 않고 보여주려는 시도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하다. 여름이가 비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숨긴 반전이 특히 문제다. 영화적 재미는 더할지는 몰라도, 여름과 영준의 감정선을 어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주제와도 맞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비장애인의 로맨스였다는 점에서 청각 장애는 그저 도구로만 소비된 셈이다. 이는 사회적 소수자나 비주류 집단 배우나 캐릭터를 보여주기식으로만 활용하는 ‘토크니즘’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더 나아가 평면적인 청각 장애인 묘사도 구시대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청설>은 모든 청각 장애인을 착한 사람, 배려받아야 할 사람, 약자들로만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청각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뤄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코다>가 장애인들이 사업체를 소유하거나 지역 어업 공동체를 이끄는 식으로 그려낸 것과 비교하면 <청설>은 깊이가 얕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배우라는 눈속임
그런데 <청설>은 최소한 보는 동안에는 위의 단점이 생각나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바로 영화의 감성을 온전히 살린 배우들의 힘이다. 우선 홍경이 연기한 영준의 경우 사실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일반적이고 평이하니까. 하지만 그 인물을 숨 쉬는 듯 자연스럽게 표현한 홍경의 연기는 그가 주목받는 신예인 이유를 증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기 잘못과 마음을 무심하게 고백하는 수영장 씬만 봐도 느낄 수 있다.
여름을 연기한 노윤서는 기시감이 없지 않다. <일타 스캔들> 등에서 비슷한 결의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 그러나 익숙하고 편안하게 캐릭터를 관찰할 수 있다 보니 사소한 동작 하나 놓치지 않는 표현력이 더 돋보이는 측면이 있다. 일례로 그녀는 수화를 할 때 마치 말을 하는 것 같은 입모양을 만들 때가 있다. 이러한 디테일은 여름이 사실 청각 장애인이 아니라는 반전의 복선으로 이어지면서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마지막으로 김민주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이라는 캐릭터는 오로지 수화와 표정, 제스처만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대사가 단 한 마디도 없는 제한적인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혹시 모를 발성에서의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고, 아이돌다운 표정 연기와 제스처가 뛰어난 전달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언니에게 부담감과 불안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한 가지는 가려지지 않는다. 바로 개봉일이다. 물론 부산국제영화제를 기점으로 마케팅을 펼치고, 수능 특수를 노린 선택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주제와 분위기를 고려하면 최선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 관객을 매료하기에는 생각보다 진중하니까. 또 계절감이 충만한 영화인 만큼 초여름 분위기를 강조할 수 있는 개봉시기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Poor 형편없음
배우와 감성, 분위기만 빛나는 초여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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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로콜라는 살 안 찐다며
이 글은 영화 [야당]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재주가 없는 자의 영화 리뷰 쓰는 법은 제법 처절하다. 영화 속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것들 중 제일 큰 골자를 추려내야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해를 돕기 위한 모티프도 찾아내야 한다. 거기까지만으로도 이미 힘에 부치고도 남는데 그 두 가지를 엮어서 글을 쓰다 보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엉엉.
그렇다고 모티브나 레퍼런스가 쉽게 찾아지는 영화가 편한 것도 아니다. 바꿔 말하면 뻔하다는 뜻이니 그 단조로움을 뚫고 무언가를 써내려야 하는 고통(?)도 만만치만은 않다. 이번에 리뷰를 쓸 영화인 [야당]은 후자의 경우였다. 영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닮아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려 애쓰고. 익숙하다라던가 아는 맛이라는 표현들을 빼고 쓰려니 아주 고역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그래서 이 비루한 실력의 영화 리뷰어는 이 작품에 제로 콜라의 개념을 차용하기로 했다. 영화 자체도 빼야 할 것은 빼면서도, 기대하고 있는 어느 정도 수준의 쾌감은 주었으니까.
우선 영화는 이런 류의 작품에서 가장 관객을 해롭게 하는 설탕 같은 존재인 현실적인 참혹함이나 처참함을 덜어냈다. 덕분에 사회고발 성격을 띤 작품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무거움과 찝찝함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영화는 훨씬 유쾌하며 가벼웠지만, 자칫 잘못하면 펄럭거리면서 바람에 도망 다니기 바쁠 수도 있었던 흐름을 적당한 속도감으로 못 박아 고정시켰다. 이 덕에 영화는 매끄럽고 부드럽게 눈에 읽혀 들어가고, 관객들은 가벼운 마음과 자세로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제로 콜라임을 인지하고 마시는 것처럼. 영화에서도 관객들이 애초에 어느 정도 감안한 채 접고 들어가는 부분도 존재한다. 몇몇 등장인물들은 소모성에 가까울 것이라는 사실과, 반전의 힌트가 언제나 코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적정 수준의 통쾌함은 보장받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예상 앞에서 마냥 쾌재를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제로콜라의 안전성 혹은 의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우리는 콜라의 대안으로 제로음료를 찾는다. PH2 정도 되는 산도(Acidity)를 숨기기 위해 때려 넣은 무지막지한 설탕에서 오는 모든 성인병을 비롯한 그 외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나 과연 제로 음료가 완벽한 대체제, 혹은 건강한 음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정답은 당연히 아니오 혹은 대답을 유보하는 것에 가깝다.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제로 음료가 장내 미생물의 질서에 혼란을 주는 것은 물론. 일부 설탕 대체제들의 경우는 설탕만큼은 아니라 해도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속속들이 발표되고 있다. (참고 1)
그리고 근원적으로. 제아무리 제로 음료라 할지라도 단맛이라는 감각에 대한 중독까지는 뿌리 뽑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 또한 여기에 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티프들을 그러모아 만들어진 이런 영화가 관객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과연 이에 기대 만들어진 앞으로의 후속 작품들이 과연 한국 영화 자체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잘은 모르겠다. 는 답변을 내뱉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우후죽순처럼 깡패 영화가 만들어질 때가 있었다. 그 시대를 거치며 얻은 결론이라고는 자가복제에 지쳐 씁쓸해진 관객들의 입맛뿐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아는 맛은 이렇게 무섭고, 제로 콜라도 길고 넓게 보면 비만에 동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참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탕 대체제들과 함께 포함되어 있는 요소들도 혈당을 올릴 수 있음. 몇십 캔을 먹어야 설탕이랑 비슷하다는 둥의 말하지 마라. 애초에 가장 위험한 것은 단맛에 대한 중독성 그 자체임.
[이 글의 TMI]
1. 하이퍼 나이프 리뷰도 써야 하는데...
2. 보물섬 리뷰도 써야 하는데...
3. 회사 가기도 귀찮은 휴먼이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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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용주의 스승과 이상주의 제자의 이야기
삶은 배움의 연속이다. 유치원을 시작으로 정규 교육과정에 들어가서는 초중고등학교를 지나면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해 나간다. 그렇게 알게 되는 지식은 개인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준다. 다양한 종류의 책과 이론들을 배워나가면서 사람마다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배워 나간다는 것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선택지를 하나씩 줄여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던 조금씩 앞으로 나가다 보면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를 어느 순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에 또다시 향후의 방향성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놓인다. 그래서 무언가를 평생 배워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지를 계속 늘려가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배움의 한가운데에서 누구나 인생의 스승을 하나쯤은 만난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이나 동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스승과 깊은 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그것을 관찰하면서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그렇게 스승을 삼을 무언가를 만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 배움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시각을 알 수 있게 되는 기회가 된다. 만약 그 스승 또한 사람이라면 스승도 제자를 만나 다른 시각을 보게 된다. 제자가 가진 새로운 관점의 질문들과 패기, 열정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그것에도 무언가 다른 것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서로 한 뱡향으로 배움을 전달한다기보다 서로 상호 작용하며 각자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자산어보>는 흑산도 유배지에서 생활하는 정약전(설경구)과 흑산도에서 물고기로 생계를 이어가는 창대(변요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약전은 그의 동생인 정약종, 정약용(류승용)과 함께 그 당시 실학과 같이 들어왔던 천주교의 교인이 되었는데 이후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시작된 신유박해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반면 창대는 흑산도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틈틈이 혼자 여러 책을 읽으면서 지식을 탐구하는 청년이다. 그는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점점 난이도 높은 책을 읽음으로써 향후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길 원하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 이 두 인물은 서로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 정약전에게 창대는 그저 섬에서 일하는 젊은이로, 창대에게 정약전은 조정에 반하고 성리학을 욕보인 죄인으로만 보인다.
영화 속 정약전과 창대의 만남은 실용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만남같이 보이기도 한다. 유배 전까지 다양한 정치활동을 해왔던 정약전은 이미 성리학의 이상적인 길을 가려고 노력한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여러 가지 정치적 경험을 한 이후, 그가 흑산도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학문적인 탐구보다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나 활동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으로 유배 갔던 정약용이 올바른 정치에 대한 글을 무수히 써나갈 때, 좀 더 실용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대한 글을 썼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다 생물들에 대해 정리한 자산어보(玆山魚譜)다.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반면 창대는 글을 읽고 배우면서 성리학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길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대는 책과는 다르게 하찮게 보이는 백성을 위한 서적을 만드는 것처럼 다른 접근을 하는 정약전이 못마땅하다. 성리학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창대에게 정약전은 그저 잘못된 길을 가는 정치인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다. 정약전은 다양한 바다 생물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그것에 대한 책을 써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 작업을 하는 데에는 창대가 가진 바다 생물에 대한 지식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창대는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책에 대해 배우고자 한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는 데에는 그것을 쉽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에겐 박학다식하고 경험이 많은 정약전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 지식에 대한 배움은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성리학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는 생각과는 다르게 조금씩 가까워지게 된다. 이들이 가진 배움의 열망은 그들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의 색안경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보이는 지식과 인간적인 면들을 온전히 바라보게 만든다.
창대는 정약전에게 여러 책에 대해 배워 나가며 자신 만의 지식을 쌓아간다. 그러면서 그는 성리학에서 내세우는 것을 바탕으로 좋은 정치를 실제로 행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영화 속에서 창대는 양반인 아버지(김의성)의 혼외 자식이다. 하위 계층인 그에겐 관직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과거 시험 조차 볼 수가 없어 계속 공부를 해나가서 자신의 배움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시험의 기회가 주어져 관직에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창대가 보기에 그저 앉아서 쓸데없어 보이는 책을 쓰고 있는 정약전이 답답하기만 하다. 반대로 창대를 바라보는 정약전의 마음엔 성리학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그런 정약전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
스승은 제자에게 다양한 지식을 알려주지만 그것을 활용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결국 제자의 몫이다. 그것에 대해 스승이 어떤 의견과 방향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제자는 그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 정약전의 지식과 혜안에 감탄하며 책을 배우던 창대는 스승으로 삼은 정약전의 총명함에 완전히 빠져든다. 하지만 한참을 그에게 책을 배운 이후 그가 선택한 삶은 스승 정약전이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둘은 서로 아주 먼 관계였다가 조금씩 가까워져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가, 이내 결국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영화 속에는 크게 위기상황이 있지는 않지만 이 스승과 제자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그 상황 자체가 두 사람에게 닥쳐오는 가장 큰 위기이자 또 다른 배움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보는 관객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유배시절 쓴 자산어보의 서문에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을 가미해 구성한 영화다. 서문에 등장하는 창대는 물고기에 대하여 박학다식하다고 적혀있고 자산어보를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둘이 실제로 스승과 제자 관계였는지 그리고 각자 어떤 길을 가게 되었는지는 상상의 영역이다.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흑산도(黑山島)의 모습을 아주 정갈하고 깨끗하게 담는다. 마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영화에는 흑과 백으로 구성되어 빛바랜 앨범을 꺼내어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흑백으로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비추는 흑산도 주변의 모습이나 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을 비추는 카메라는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친다.
자산어보가 흑산어보가 아닌 이유는 창대라는 인물의 의견이 영향을 주었다고 실제 자산어보의 서문에 적혀있다. 흑(黑)은 검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어둡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검다는 뜻을 가지면서 부정적 의미가 없는 또 다른 글자인 자(玆)를 가져와 자산어보라는 이름으로 책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책의 제목까지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정약전이라는 인물은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일 줄 아는 학자였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전반에 걸쳐 보이는 정약전의 모습은 일반인들의 삶과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들 또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이런 생각을 가진 정약전이 만인이 평등하고 모두가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약전이 최하층 계급인 창대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최대한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의 됨됨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정약전의 열린 생각은 가거댁(이정은)과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가거댁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수발을 드는 가거댁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양반이지만 집의 청소를 하려고 한다거나 최대한 빚을 지지 않으려고 돈을 건네는 등의 행위가 그것이다. 또한 관련하여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가거댁과 창대가 이야기하는 장면인데, 그때 가거댁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씨만 중하고 밭은 귀한 줄 모른다”. 실제 농사에서 좋은 씨앗 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 가거댁이 한 말이다. 여기에는 그 당시 아이를 낳는 여자는 홀대받고 씨를 뿌리는 남자들만 대우를 받는 그 시대 상을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거댁의 말을 들은 정약전은 그에 대해 특별히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 당시 하찮게 취급받던 여인의 말에도 반발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영화적 설정일지라도 그런 정약전의 열린 모습은 보는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창대, 즉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로 보인다.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가르쳐주고, 제자가 품고 있는 이상향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그가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있다. 이번이 첫 사극 연기인 설경구는 열린 생각을 가진 정약용처럼 보이고, 변요한은 그가 가진 퉁명스럽지만 총명한 이미지로 청년 창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영화의 이야기에 허구가 다수 섞여있다 할지라도 이 영화가 담은 내용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감정과 지식을 담고 있다.
영화는 정약전과 가까웠던 정약용이 서로 주고받았던 시를 배우의 목소리를 빌어 들려주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동안 관객들에게 그 시의 한자를 그대로 화면에 보여준다. 그 한자로 된 시의 구절들을 실제로 모든 관객이 이해하며 읽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화면으로 제시되는 한시는 실제로 감정을 담아 그 한시를 읽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 화면과 함께 하나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런 한시와 어우러진 이 영화는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를 담은 수묵화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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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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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하지만 기괴한, 기괴하지만 평범한
경고: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 속에서 누구를 괴인이라 생각해야 할까. 주인공 기홍(박기홍)은 감정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인물이긴 하다. 그러나 목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돈이 입금이 안 되면 화가 나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고맙다 이야기하면 설레기도 하고. 기홍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말, 행동 하나하나가 타인의 일상을 어떻게 침범해가는가. 일상과 비일상이 얽힌 기묘함을 괴인은 훌륭하게 잡아낸다. 독특하지만 밸런스가 미쳤다.
처음 영화는 기홍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런 와중에 자기가 세들어 사는 집 주인 정환(안주민)과 친해진다. 정환이 먼저 다가선 게 살짝 이상하긴 하지만. 그런데 어느 날 기홍의 차가 누군가로 인해 찌그러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정환이 자기가 같이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 현장에 같이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이 사고는 주인공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침범했는지 더 명확히 드러낸 장치에 불과했단 것을.
괴인의 동력은 처음부터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인물들 간의 일상적인, 말을 통해 영화를 훌륭하게 이끌어간다. 자극적인 장면, 말도 전혀 동원하지 않고 긴장감을 만들어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놀라운 점은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들이 대부분 전문 배우가 아니었던 점이다. 주인공부터 감독의 친구 목수고, 정환 역할을 맡았던 안주민은 피자 굽는 셰프다. 그런데 연기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일반인을 쓰니 괴인 속 이야기가 더욱 일상처럼 느껴졌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괴인 속 세계에선 누가 괴인일까. 내 생각에는 모든 사람이 괴인이라고 생각한다. 지독하게 일상적인 말, 행동이 언제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일상까지 뒤흔드는 사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 등장인물 각자가 지니고 있는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잔잔함을 유지하는 이유는 영화 속 기괴한 모습이 영화 바깥의 인간관계에서도 맞닥뜨릴 일상적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은 뒤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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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년이 되어도 계속되어야 할 드라이브를 위해
'나~의 모든 사랑이 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 뒤에서 함께 하는데' 김현식의 노래가 길거리에서 들린다. 왠지 아이브와 뉴진스의 음악이 들려야 할 것 같은 길거리. 낯선 목소리에 놀란다. 요즘 걸그룹은 저 둘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장원영과 안유진은 알아도 뉴진스 멤버 개개인은 사실 잘 모르겠다. 갑자기 내 플레이리스트를 확인했다. 죄다 듣던 곡이었다. 영화 나오는 건 제때제때 봐도 음악은 듣는 것만 듣고 있구나. 나는 20대 중반에서 후반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나름 젊은 사람 아닌가. 김현식과 김광석이 노래 제목으로 보인다는 것은 이런 나도 슬슬 서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2022년이고 12월 말이다. 올해는 어떤 해인가 생각해 봤다. 나름 원하던 것들이 많이 이루어진 해였다. 그중 역시 최고는 6개월 남은 이 일상이다. 20대 초반의 나는 이 노예 생활을 기꺼이 원했던 사람이다. 막상 하면 열심히 할 거야. 그런데 막상 그 중간에 들어와 보니 이런 세상 개 같은 시스템이 없다. 그러나 얻은 것도 있다. 여러모로 날 귀찮게 하던 사람들은 사실 가짜 광기였다는 걸 깨닫는 사회복무요원 생활. 난 사실 며칠 전에 내가 아는 사람의 선을 훌쩍 넘는 '돌아이'의 규격 외로 존재하는 인간을 봤다. 내 바로 옆에 심연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서 이제까지의 인간들은 지극히 정상이었다는 느낌이 들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안전하게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인 셈이다.
왜 늦었을까. 아니 사실 늦지 않았다. 여기서 하는 이 생활도 내가 원했던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노트북도 원래 바꾸고 싶었다. 동아리방에서 낑낑거리며 내 전 노트북과 모니터를 연결하고 싶었다. 그런데 연결이 안 됐다. 딱히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있었나?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신형 노트북을 끌고 다니면 뭐랄까 새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따라오는, 뭔가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강박처럼 늘 있었다. 진작에 살 기회가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지르느라 기회를 놓쳤다. 역시 인생은 필요한 것들만 먼저 사야 나중에 돈이 궁하지 않는다. 아무튼 겨울의 초입이었던 그때 노트북을 연결하기 어려운 것이 너무 짜증 나서 새로운 제품을 하나 사고 싶었다. 나의 새로운 노트북은 역시 거금을 투자한 값을 했다. 금세 영수증이 생각나서 현기증이 나지만 2015년 형보다 나은 사양과 깔끔한 화질이 만족도를 올려준다. 너무 늦지 않게 잘 산 것 같다.
이렇게 인생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렵지 않게 들어준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가 있다. 정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억지가 아닌 선에서 다 이뤄진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 이 말이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는 물음표를 띄운 채로 살았다. 역설적으로 이 말을 그 어느 때보다도 믿던 시기는 원하는 게 이뤄지지 않았던 19살이었다. 그런데 이 역설이 오히려 굳은 믿음을 안겨줬으니 과연 절대적인 명제로 삼을만하다. 이후부터는 내 인생은 바람과 현실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어느 날 일어났는데 내 키가 180cm이 된다던가 하는 억지만 아니면 다 이뤄졌다. 역시 인생은 말하는 대로의 연속이야. '너 마음대로 하면 돼'라는 조언은 5분도 안돼서 나에게 무색해진다. 이미 그렇게 살아도 다 살아진다는 걸 알고 있거든.
아닐걸?
영화 같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각자의 곡진한 삶이 있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후회 속에서 그리워하기도 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기도 한다. 여기에 우선순위는 없을 것이다. 불행에는 등수가 없으니까. 이런 이유로 가끔 내 목소리에 힘을 꽉 주어 '나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라는 걸 홍보하는 것이 어린애 같은 행동으로 느껴진다. 2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생기는, 다들 있는 마음속의 구멍이 인간을 더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나만 유별난 인간으로 대접받자고 구는 꼴 같거든. 흑역사를 깨닫고 발로 찬 이불들이 갑자기 생각난다.
분명히 그 흑역사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생을 살았는데 말이다. 그때 했던 찌질이 같은 행동들. 지울 수 없는 상처들. 아니지. 이 상처는 누가 나에게 준 상처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다. 물론 상대의 입장으로 받아들여도 할 말은 없다. 억울하다는 말은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내린 문답은 간단했다. 이런 개 같은 짓을 하고도 살아가야 한다는 게 가장 큰 형벌이었다. 그 이면에 내 우울하고 뒤틀린 사건 몇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나의 어떤 것도 바꿀 수는 없었으니까.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서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애덤 프로젝트>나 <어벤저스 : 엔드게임> 같은 시간여행은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다. <인터스텔라>처럼 소리를 못 질러서 책 몇 권 떨어트리는 것도 그냥 불가능하다.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최악의 선택지는 논외로 두고, 어쨌든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언젠가 이 길을 넘으면 다 잘 될 거야. 막연한 기대감이 생긴다. 다 잘 되겠지? 어림없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무뎌져도 같은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수수께끼 같은 생각들. 생각은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내 의지랑 상관없이 과거의 어떤 것에 대해 따져 묻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질문들. 잘 때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누워서 딴생각을 한다. <탑>의 건물에 손님들이 찾아왔던 것처럼 미래에 바라는 것들이 구체적인 것들로 점점 변한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은 현재다. 만약에?라는 질문은 옳았다. 틀린 건 단 하나. 그 바라던 순간 외의 나머지는 전부 다 이뤄지지 않았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다시 화살표로 바뀌어 나를 공격한다. 걔보다 내가 못한 게 뭐야. 왜 나는 가질 수 없는 걸까. '이랬으면 좋겠다'가 열등감으로 바뀌는 것이 5초도 걸리지 않는다. 5초에서 한 3초만 더 붙이면 더 깊은 결론까지 닿을 수 있다. 왜 무언가를 원했나. 다신 반복하기 싫으니까. 그렇지만 어떤 것을 소모값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잃은 것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 나라는 인간 자체가 문제다. 소심한 모습, 나마저도 두려운 나의 눈치 없음,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 나쁜 말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의 뻔뻔함.. 해가 바뀌었다. 새로운 나로 태어나기로 결심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세상에게 좋은 것을 주고 잃어버린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강력한 어떤 것을 해도 빈 구멍은 채워지지 않았다. 인생은 그렇게 나라는 인간이 파놓은 끝없는 구덩이를 스스로 채우는 일이었다.
나니까 그런 거다. 내가 문제니까. 나라는 인간이 갖는 이 끔찍한 과거와 성격들이 나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태어나지 말 걸 그랬나. 왠지 모르게 나만 안 되는 것 같은 사랑과 연애. 어떤 사람들은 다가가기도 무서울 때가 있다. 믿음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다가가는 법은 모르는 것이다. 혼자 생각하는 두려움. 내 마음을 알지 못해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리고 운동을 한다. 어쩌겠어. 내 인생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 같은데. 내 마음을 물어도 나 자신의 답이 뻔해서 그냥 그렇게 클리셰를 따라간다. 하지만 이 클리세의 엔딩은 역시 비슷하다. 아무것도 나를 채울 수 없었다는 공허함과 허무함이다. 어느덧 연말이다. 새해가 돌아온다. 2023년은 다를까. 아마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년도 끝없는 외로움과 싸워야 한다. 나라는 사람이 써온 어떤 역사에 문답하며 살아야 한다. 문득 드는 생각. 이 구멍에는 끝이 없다. 영원히 반복되는 질문에 소리지르며 답하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난제다.
너니까 그런 거야.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 남자와 그의 운전기사에 관한 영화다. 누가 봐도 사이좋은 부부. 남자는 아내를 깊게 사랑하고 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잠자리를 가졌다. 아침이 밝았다. 해외로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남자. 차로 운전하는 도중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남자. 느닷없이 들리는 신음소리. 아내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이유를 묻고 싶었다. 상처를 간직하는 남자. 그렇게 아내에게 이유를 물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마음속에 찍 그어진 상처가 점점 벌어지는 남자. 남자 가후쿠는 그렇게 표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공연 기획자이자 배우인 가후쿠. 가후쿠의 고도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지 않았다. 가후쿠가 기다렸던 고도는 영화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그 대신 가후쿠는 머릿속에서 절대 풀 수 없었던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새해가 밝았다. 뭔가 다를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12월 23일인 어제와 1월 5일인 오늘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른 시작을 맞이했다. 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읽힌다. '새로운' 시작? 그런 건 없다. 끝없는 여정 속에 놓여있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닌가. 이 인생이 가진 문제들 중 2023년이 되더라도 우리가 갖고 있는 몇 개는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떤 하루를 살든 간에, 치열하게 버틴 이들은 감당해야 할 것이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드라이브를 아주 적절히 잘 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난 건 죄다. 그렇지만 그 죄와 함께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인간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인생은 혼자 지나가는 오렌지색 터널이라고 했던가. 맞는 말이다. 목적지도, 쉼터도, 출발지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느 날 터널이 끝나는 시기가 오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이기 때문에 생겼던 후회와 미련들, 미스터리들 모두 다 각자를 더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는 이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렇게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한 번 내놓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 다시 한번 운전대를 잡을 시기가 왔다. 졸음쉼터에서 충분히 쉬었으니 이제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너무 운전사를 미워할 필요 없다. 언제든 도착지는 있다. 그럼 위에서 누군가에게 고통받았다고 성토할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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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애라는 금기에 갇힌 욕망을 마주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로스트 도터>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그리스로 혼자 휴가를 떠난 대학 교수 '레다(올리비아 콜맨)'. 바닷가에서 유유자적하던 그녀의 눈에는 마찬가지로 해변에 놀러 온 젊은 엄마 '니나(다코타 존슨)'가 계속해서 들어온다. 딸 엘레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딸과 잠시 떨어진 사이에 꽤나 힘들어하는 니나의 모습을 보면 레다는 자신의 두 딸을 떠올리기 시작하고, 그렇게 평화롭던 레다의 휴가에 조금씩 균열을 생긴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이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던 차에 갑자기 엘레나가 실종되고, 레다는 해변가 숲에서 그녀를 찾아 니나에게 되돌려 보낸다. 그리고 레다는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과거의 자신(제시 버클리)'을 니나와 겹쳐 보면서 상념과 혼란에 빠져든다.
<다크 나이트>, <크레이지 하트>, <나의 작은 시인에게> 등에 출연한 배우 매기 질렌할의 연출 도전작인 <로스트 도터>. 소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영상화한 작품인 <로스트 도터>는 감독의 데뷔작인 것을 고려할 때 상당히 화려한 실적을 자랑한다. 이 영화는 2021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후,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다만 수상실적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비해 <로스트 도터>의 도입부는 좋게 말하면 평이하고, 나쁘게 말하면 재미가 없다. 그리스로 휴가를 온 레다가 숙소에 짐을 넣고, 바닷가에서 햇살을 쬐며 책을 읽고, 바다를 보며 식사하는 장면들은 대체 왜 이 작품이 찬사를 받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롭고 또 지루하다. 그나마 몇몇 관광객들과의 불화, 해변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인 '윌(폴 메스칼)'과의 대화만이 그 지루함을 견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러나 평이함이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제목에 걸맞은 사건이 발생함과 동시에 영화는 마치 이 순간을 위해 감추어 왔다는 듯이 강렬한 서스펜스가 자아내는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관객을 빠뜨린다.
그 중심에는 인형이 있다. 해변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니나는 딸 엘레나를 잃어버리고, 레다는 다른 해변가 관광객들과 함께 그녀를 찾아 나선다. 해변 옆 숲에서 그녀를 발견한 레다. 그녀는 니나에게 엘레나를 돌려보내는 한편, 엘레나가 들고 다니던 인형을 남몰래 가져간다. 흥미로운 것은 엘레나의 인형이 레다의 현재와 과거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가 된다는 점이다. 레다가 충동적으로 훔친 후 극진히 돌보는 이 인형은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던 그녀의 죄책감과 모성을 포기했던 과거에 대한 회한을 스크린으로 불러온다.
젊은 시절 교수가 되기 위해 학업에 열중해야 했던 레다는 첫째 딸 비앙카에게 자신이 아끼던 인형 미니 마마를 물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일반적으로 인형에 담긴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부정적인 의미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보통 인형은 부모의 사랑이 담긴 선물이다. 그러나 인형에는 동시에 부모를 괴롭히거나 방해하지 말고 알아서 시간을 보내라는 속뜻도 담겨 있다. 사랑의 증표로 보이면서도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하는 이중적인 물건인 것이다. 실제로 엄마의 속뜻을 알아챈 비앙카는 서운함과 미움을 인형에게 표출한다. 이에 레다는 인형을 아끼지 않는 비앙카에게 오히려 화를 내며 인형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인형은 도로 위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이렇게 부서진 인형은 아이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엄마 레다의 모성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이 순간을 기점으로 <로스트 도터>는 단순히 '딸을 잃어버린' 이야기가 아닌, '딸을 포기하는' 이야기가 된다. lost가 lose의 과거형인 만큼, 단지 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딸을 포기했던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엘레나의 인형이, 그리고 부서져 버린 레다와 비앙카의 인형이 바로 그 계기다. 실제로 인형을 만남과 동시에 레다는 막 엄마가 되어야 했던 과거의 자신을 회상하고 마찬가지로 처음 엄마가 된 니나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옛 기억과 새로운 만남 사이에서 영화는 모성애라는 이름의 금기가 숨기고 있던 여성의 욕망을 가감 없이 스크린에 펼쳐놓으며 평화롭던 이야기에 긴장감과 불편함을 불어넣는다.
이때 <로스트 도터>에서 긴장감과 동시에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은 세 엄마의 교집합이 고루한 엄마의 이미지를 다방면에서 파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제시 버클리의 젊은 레다는 딸들과의 전화가 그녀를 지루하게 하고, 그녀 또한 딸들을 재밌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파괴한다. 올리비아 콜맨의 레다는 아이들을 떠날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며 펑펑 울고, 이런 그녀는 희생적인 어머니 상과는 거리가 멀다. 다코타 존슨의 젊은 엄마 니나는 결혼 후 가족과 완전히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자신의 존재감을 잃은 채 방황한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육아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는 어머니상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때 세 엄마의 교집합은 희생 대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이기심이며, 그렇기에 그들은 고정된 이미지 안에서 각자의 이유로 괴로워한다.
이처럼 다른 것을 욕망하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레다와 니나의 관계 쉬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니나의 고모를 필두로 니나의 가족들은 레다를 의심한다. 그들은 자신이 타고난 엄마가 아니란 걸 인정하고, 어머니가 희생정신으로 무장해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레다가 니나를 추동할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니나의 가족은 그녀가 레다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을 방해하며 레다를 유달리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일례로 레다는 영화관에서 난동을 부리는 남자들에게 항의하지만, 그들은 관리인이 올 때만 조용히 하며 그녀가 유달리 예민한 인물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레다는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과거의 자신을 니나와 겹쳐보기 시작한다. 니나 또한 레다에게 결혼과 육아에 지친 자신을 고백한다. 여기서 영화는 외도라는 소재를 이용해 그들의 연대에 임팩트를 준다. 물론 외도와 불륜 그 관계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으며, 젊은 레다와 니나 모두 이것이 잘못된 관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애인의 존재는 단순히 섹스가 아니라 아이들과 육아로 인해 사라질 듯한 자신들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레다가 자신의 학문적 능력과 업적을 알아주는 하디 교수와 사라에 빠지고, 니나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인정해주는 윌과 눈이 맞는 이유다. 이렇게 레다는 휴가지 바닷가에서 만난 한 여성과의 관계 안에서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딸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모성애의 가치와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당장 레다가 만들어낸 니나와의 연대와 관계는 분노, 질투, 회한, 죄책감이 뒤얽힌 레다의 감정 때문에 붕괴된다. 피 흘리는 레다가 두 딸과 통화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기적인 엄마였던 레다마저도 결국에는 완전히 모성애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파괴하거나 거부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영화의 가치는 비록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일시적으로나마 모성애를 둘러싼 금기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 그 자체에 있다. 사실 모성애는 그간 인류를 지탱해 온 신화 중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당장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를 비롯해 수많은 고대적 여신들의 역할이 출산을 통한 우주와 생명의 창조로 여겨졌다. 이처럼 인간에게 여성의 출산, 그리고 이후 어머니가 되어가는 여성의 변화는 항상 신성시되었고,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질서로 여겨졌다.
이때 모성애가 성스럽고 거룩하게 여겨진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금기이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위험하거나 성스럽고 거룩한 금기의 대상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금기가 특정한 의미 체계와 사회 질서를 설정하기에, 카오스(Chaos)를 초래하려는 욕망은 통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사회적 금기는 범람하는 강물을 제어할 둑을 쌓듯이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이 표출될 통로였다. 아이를 기르는 데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는 모성애라는 금기가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통제하며 희생을 요구하듯이. 대신 모성애라는 금기가 만든 통로 안에서 여성은 엄마가 되어 새로이 정체성을 획득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듯이. 이렇게 금기는 욕망으로 인한 일상의 해체를 막으며, 이는 모성애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러한 안정성은 일시적으로 파괴될 때 역설적으로 재확인되고 강화된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안정적으로 구축되었던 일상을 헤집어놓으며 그간 허용되지 않은 경험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위반은 안정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일상의 근간이 되는 금기의 존재에게 더 강한 권위를 부여한다. 강렬한 축제를 통해 일탈을 맛본 후에 일상적 삶에 더 집중할 수 있듯이 금기를 일시적으로 깨고 표출된 욕망은 도리어 삶을 안정적으로 만든다. 이는 불륜의 장소로 낙점된 레다의 휴가 숙소에서, 엄마로서의 자격을 던져버리고자 했던 니나와 그런 니나에게 공감해주던 레다 간의 연대가 깨어지고, 레다의 휴가도 끝나며 그들이 다시금 각자의 엄마로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로스트 도터>는 여성이 고통 속에서 자녀를 포기하더라도 죄책감에 빠지는 대신 온전한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렇기에 희생적인 모성애가 지탱하던 안정된 세계가 주던 평화로움은 이기적인 모성애와 일탈로 인한 불안정성과 긴장감을 거쳐 다시금 회복된다.
이는 매기 질렌할 감독이 “엄마, 연인, 여성으로서 느낀 은밀한 감정들이 책 속에 표출되었다. 기이하고 고통스럽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느꼈다”라고 말한 것과 맞닿아 있다. 영화는 특정한 모습의 엄마를 묘사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숨 막히는 압박을 느끼는 엄마의 모습도 긍정하고, 그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는 엄마도 긍정하며, 그 순간들을 견뎌낸 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자부하기도 하는 엄마의 모습도 긍정한다. 그래서 <로스트 도터>는 성별에 따라, 아이의 유무에 따라, 육아 경험의 정도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는 영화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모습의 엄마에 자신이 가깝든 간에, 모성애라는 금기를 깨는 이들의 용기를 부정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이렇게 <로스트 도터>는 모성애를 둘러싼 신화에 도전하며, 그 금기에 숨겨져 있던 격동의 현실을 스크린 위로 끄집어 올린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성애라는 금기의 명암 사이에 숨어 있는 폭풍우를 끄집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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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시사회에서 호평을 받았던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개봉 후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습니다.
전작들에 대한 다양한 오마주와 클래식한 분위기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며, 실관람객들의 호평을 이끌고 있습니다.
광복절 연휴를 겨냥해 4편의 신작이 같은 날 개봉했지만, 한국 신작들을 모두 제치고 1위에 오른 작품은
<에이리언: 로물루스>였습니다.
작품은 <에이리언: 커버넌트> 이후 7년 만의 신작으로, ‘에이리언’ 1편과 2편 사이의 시간을 배경으로 합니다. 같은 날 개봉한 <행복의 나라>는 박스오피스 3위로 출발했으며, <파일럿>이 2위를 차지했습니다.
리들리 스콧 제작 · <맨 인 더 다크> 페데 알바레즈 감독의 숨 막히는 서바이벌 스릴러로 돌아오다
줄거리
2142년, 부모 세대가 맞닥뜨렸던 암울한 미래를 피하려는 청년들이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식민지를 떠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버려진 우주 기지 ‘로물루스’에 도착한 이들은 악몽과도 같은 에이리언의 무자비한 공격에 쫓기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그들의 절규를 들을 수 없는 우주 한가운데,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사투를 벌여야 하는데... 폐쇄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압도적인 공포를 느껴라!
로맨스 영화로 돌아오는 김고은 <대도시의 사랑법>
김고은과 노상현이 주연을 맡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이 최근 공식 1차 포스터와 예고편을 공개했습니다.
이 영화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재희와 세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데 익숙한 흥수가 함께 살아가며 펼치는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었으며, 오는 10월 2일 극장에서 개봉을 확정 지으며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 신작 <어쩔 수가 없다> 8월 17일 크랭크인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가 오는 17일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한다고 12일 발표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성공적인 삶을 살던 회사원 유만수가 갑작스러운 해고 이후 가족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재취업을 준비하며 겪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병헌과 손예진에 이어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유언석 등이 캐스팅되며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8월 23일 공개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스틸 이미지가 공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한여름, 수상한 손님의 등장으로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김윤석, 윤계상, 고민시, 이정은이 주연을 맡았으며, <부부의 세계>의 모완일 PD가 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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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보다 별로라고? / 여전히 기발한 연출의 병맛 영화 / 웹툰 암살요원 준 시즌 2 / 권상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히트맨 2"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따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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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루시드 드림> 예고편
제작자에게 잔소리를 듣던 감독은 조명사고로 인해 쓰러지게 되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여러 장르의 꿈을 꾸게 된다.
기쁜 날을 빙자해서 돈을 사기 치려는 세계, 분노로 직장 상사를 죽이는 범지진, 사랑으로 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엄마, 기사가 실종되는 노선을 운행하게 된 아총의 공포가 즐거움으로 뒤바뀌는 꿈.
감독은 이 네 가지의 꿈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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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임 유어 맨> 메인 예고편
페르가몬 박물관의 고고학자 ‘알마’는 연구비 마련을 위해
완벽한 배우자를 대체할 휴머노이드 로봇을 테스트하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오직 ‘알마’만을 위해 뛰어난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된
맞춤형 로맨스 파트너 ‘톰’과
3주간의 특별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