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12-24 15:16:41
다 괜찮아질 거야, 우린 <로지>
평범함이 이렇게 잔인하다니.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지 Rosie , 2018 제작
아일랜드 | 드라마 | 2019.05.16 개봉 | 12세이상관람가 | 86분
감독: 패디 브레스내치
다 괜찮아질 거야, 우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엄마는 오늘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이 가족은 하루아침에 집에서 쫓겨났다. 집주인이 그들의 집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던 이들은 작은 차에 짐을 싣고 호텔방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거리로 내몰리는 저소득층의 현실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와 반복적으로 "가족실 방이 있나요?"라고 묻는 로지의 다급한 전화소리가 그들의 현실을 대신 설명한다. 하룻밤 묵을 방도 찾기 힘든 로지에겐 딸 3명과 아들 1명, 그리고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하는 남편이 있다. 총 6명의 대가족에게 주어진 하루는 너무나 짧다. 더구나 그녀에겐 핸드폰만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아이들은 길바닥에 내몰린 자신의 상황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큰딸 케일라는 모든 게 다 쪽팔리고, 아들 알피와 딸 밀리는 차 안에만 있는 게 너무나 지루하다. 매일 같이 보던 강아지(너깃)도 보고 싶고, 얼른 집에 다시 들어가 마음껏 뛰어놀고 싶다. 가장 어린 막내딸은 피치(토끼 인형)만 있음 괜찮지만, 매번 사라지는 피치를 챙기는 건 역시 부모의 몫이다.
결국, 오직 로지만이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카드는 호텔에겐 대부분 환영받지 못하고 하필 대가족인 관계로 큰 방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된다. 어렵게 구한 호텔 방도 겨우 하룻밤만 보낼 수 있는데, 로지는 그마저도 편히 쉬지 못한다. 아마 집을 나온 후로 제대로 잠을 청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버린 아이들을 두고 마음 편히 자는 엄마는 이 세상에 드물 테니까.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며 잘자란 말을 해주는 건 더 이상 평범한 일이 아니다. 오늘을 힘겹게 버틴 그녀가 또다시 절망스러운 하루를 맞이하는 의식이니까. 로지는 부엌에서, 방에서, 화장실에서, 거실에서 바쁘게 움직였던 몸을 이젠 내일도 5인용 작은 차 안에 구겨 넣어야 한다.
로지의 충전식 핸드폰과 호텔의 번호가 적힌 장부는 평범함을 앗아간 비극의 출발선이다.

<로지>의 이야기는 단조롭다. 하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사회체제의 맹점을 가차 없이 드러낸다. 무엇이 진정 국민을 위한 일인지 알 수 없는 정부의 위급사항 대처능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다. 로지는 자신이 끊임없이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음을 정부에 확인시켜줘야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이 일을 하지 말라는 담당의사의 소견서를 품고서, 기초생활수급을 받기 위해 일자리용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처럼. 어처구니없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평범함을 담당하고 있었고, 여전히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 중이다. 남들과 똑같이 살기 위해 말이다. 그저 로지에게 더 가혹한 현실이 다가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평범함이 무엇인가?
<로지>에겐 쓸모없는 질문이다. 아마 로지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지금 그게 중요해? 빨리 여기 종이에 적힌 호텔 번호나 불러줘!"
<로지>가 관객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환상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니까.

로지의 마지막 자존심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다. 집은 그저 로지가 아이들을 위해 현실적으로 만든 건축물, 수단에 불과했다. 적어도 그녀는 차에 그들의 잠옷을 쑤셔 넣으면서 수십 번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그러나 로지의 현실엔 굳게 먹은 마음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산더미이다.
친구의 집에서 빨래를 하면서까지 아이들을 케어 하지만, 밀리는 학교에서 "쉰내 밀리"란 소리를 듣는다. 케일라는 더 이상 친구들 앞에서 지각한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이 없는 아이들은 어떡해서든 티가 났고, 케일라는 학교에서 사라져 버린다.
철옹성 같던 로지는 그제야 한 인간으로서 무너진다.
아는 모든 이에게 다음 주면 이사한다고 수백 번 거짓말하고, 동생 부부에게 강아지와 짐을 부탁한 대신 '노숙자'란 소리를 듣고, 아빠와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를 엄마에게 또다시 경멸스럽게 듣고도 두 발로 우뚝 서있던 그녀였다. 순식간에 터져버린 아이들의 문제는 로지의 핸드폰을 내려놓게 만들었고, 이는 곧 잘 곳을 구하지 못한 현실로 이어진다. 아마 로지에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시에서 제공하는 '노숙자 전담 번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였다. 무너지고 싶어도 주저 않을 수 없는 엄마. 그래서 그들은 주차장 한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그 안에서 밤을 지새운다.

아내와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차를 멀리서 홀로 비를 맞으며 지켜보는 남편의 뒷모습을 끝으로 <로지>는 끝난다. 그 씬이 <로지>의 명장면이다. 첫 씬과 시간대만 다를 뿐 모든 요소가 똑같지만. 낮에 내렸던 굵은 빗방울과 깊은 밤 남편이 홀로 맞고 있는 빗방울의 의미는 다르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지만, 어느새 서로를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 견고함이 강인한 로지를 만든 발판이겠지.
홀로 흐느껴 우는 로지보다도 케일라에게 "우린 다 괜찮을 거야."라 말하는 엄마가 기억에 남는다.
끝까지 희망을 얘기할 그들을 응원한다.
로지의 말처럼 그들은 다 괜찮아질 거니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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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적인 여성의 삶은 반복되는가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마지막에서 두번째 황후)인 엘리자베트의 삶은 오스트리아의 관광 상품이자 미디어에 끊임없이 소환되는 소재다. 당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극한의 미와 함께 비극적인 삶의 궤적은 많은 예술가들을 설레게 했을 테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tv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을 탄생시켰다. 귀족 혹은 왕족의 삶 자체가 서민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데다 호화롭고 화려하지만 자유를 빼앗긴 채 불행하게 살아간다는 서사는 실화 기반일 경우 그 비극이 극대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끊임없이 스크린으로 소환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대의 인물인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삶은 영화 <다이애나>, <스펜서>를 통해 이미 두 차례나 영화화되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영화 산업가들의 영감으로써 활동할 예정일 테다. 그런데 <코르사주>를 통해 영화화된 엘리자베트의 삶은 마치 <다이애나>와 <스펜서>를 섞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엘리자베트의 삶 자체가 다이애나의 삶과 평행이론을 이루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창작자들의 게으름이 기저에 놓인 탓일까.
20세기의 인물인 다이애나와 달리 엘리자베트는 19세기의 인물이기에 영화에 오스트리아 궁정을 화려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더해진다. 영상 매체에서 영상미를 뽐낼 수 있는 시대는 창작자의 구미를 자극한다. 이에 더불어 극단의 체중 관리로 인해 큰 키에 깡마른 몸매를 유지한데다 임신기간 이외에는 항상 코르셋을 착용한 탓에 암살당했을 때조차 칼에 찔린 줄도 몰랐다는 엘리자베트의 일화는 영화 미술팀을 설레게 하는 소재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클리셰적이게도 영화 제작자들은 이런 화려하고 아름다운 삶 뒤에 숨겨진, 자유를 빼앗긴 채 정신질환에 시달린 소녀감성의 소유자 황후를 소환하고 싶어한다. 근친에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자라면 더 좋다. <스펜서>의 다이애나는 헛것을 끊임없이 보고 <다이애나>의 다이애나는 진실한 사랑을 꿈꾸며 다른 남자의 품을 찾았다.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 모두 실존 인물이고, <스펜서>가 상당 부분 각색에 기대고 있긴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감안할 때 영화화 방식이 아닌 삶이 반복되는 것이라는 변명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는 분명히 별개의 인물이다. 두 인물의 일대기를 비교해 볼 때 다이애나비와 엘리자베트는 결코 평행이론에 등치시킬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부모로서는 실격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엘리자베트와는 달리 다이애나는 자신의 아이들이 유모와 더 친해지는 것을 싫어해 유모를 해고한 적이 있을 정도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남편에게 정부를 들여주고(영화에 이 장면이 등장한다) 호화로운 여행을 다녔던 엘리자베트와는 달리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자선 활동을 하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19세기의 인물인 만큼 20세기의 인물인 다이애나보다는 폐쇄적인 삶을 강요당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폐쇄적인 황실에서의 삶과 비극적인 죽음, 세간의 관심(특히 외모에 치우쳐진)을 제외하면 사실상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를 다루는 미디어의 방식은 놀라울 만큼 흡사하며, 방식을 떠나 미디어가 집중해온 삶의 시기마저 비슷하다.
다이애나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이혼, 그리고 수많은 염문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며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다이애나>다. 혹평 세례로 마무리되었던 이 영화는 불행했던 다이애나비의 삶에서 한 줌의 위안을 주었던 비밀 연인을 다룬다는 점에서 <코르사주>의 엘리자베트가 사촌과 승마 친구 등과 바람을 피우는 장면에 등치된다. 감독의 상상력이 많이 덧붙여지긴 했지만 영국 황실의 비합리성(
추운 겨울에도 그놈의 전통을 들먹이며 애들도 있는데 난방도 안해준다든지..)을 폭로하며 다이애나비의 불행했을 황실에서의 삶을 묘사한 영화가 <스펜서>다. <다이애나>와는 달리 호평받았고 주연으로 열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가 특히 찬사를 받았지만 호화로운 삶 뒤에 숨겨진 다이애나비의 불행한 삶을 묘사하는 데 정신질환을 이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는데 이는 평생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며 정신병동의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코르사주> 속 엘리자베트의 모습과 겹친다. 20세의 나이로 결혼해 아이를 둘 낳을 때까지 아이들만을 바라보며 혼인 생활을 유지했고, 결코 놓아줄 것 같지 않았던 영국 황실을 떠난 후에도 자선 활동을 이어갔던 다이애나비의 행적을 고려해 볼 때 정신질환을 앓을 만큼 다이애나비가 나약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펜서>는 불행한 다이애나비의 삶을 그리기 위해 다이애나가 낡은 스펜서 저택에서 헛것을 본다는 쉬운 설정을 선택했다.왕족 혹은 귀족 출신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여성들의 삶을 그려내는 데 있어 영화들이 지겨울 만큼 비슷한 전략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조차 여성의 신분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불행 포르노를 취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거부하고(자식들 입장에서는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겠으나) 경호원 하나 없이 시녀들만을 거느린 채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다는 엘리자베트나 스펜서 가문의 부와 엄청난 이혼 위자료를 갖고도 자선 행적을 보인 다이애나비의 삶은 다채롭게 그려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드라마를 위시한 온갖 미디어는 이들의 불행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하지만 왕족과 귀족이 아니라도 사람의 삶은 행복과 불행의 집합체다. 그 중에서 무엇을 골라 집중할 것인지는 온전히 창작자의 역량이며, 여성 인물들이 유독 불행에 포커스가 맞춰진다면 그 진의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화려한 왕실을 떠나 다양한 세상을 구경한 엘리자베트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려 했던 다이애나비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소환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여성 작가들의 전기를 그릴 때 유독 로맨스나 어머니로서의 삶에 포커스가 맞춰져온 것처럼(<비커밍 제인>, <메리 셸리>, <아스트리드>) 여성 귀족들의 삶은 화려함과 불행이라는 단어에 방점이 꽂힌다. 하지만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실은 매우 검소한 왕비였으며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다른 인물을 놓고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면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조력을 의심해야 하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중들은 역사 교육을 의심해야 한다. 엘리자베트도 다이애나비도 결국은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으며, 그 인간의 삶은 깊고 넓은 행복과 불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머리칼을 자르고 자유롭게 춤을 추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을 대체 역사로 선택한다고 해서, 결혼 전 성인 스펜서를 자의로 선택하는 다이애나비의 모습을 상상한다고 해서 창작자의 나태가 가려질 수는 없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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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선택이 만든 현재, 이단 헌트의 마지막 선택
이단 헌트(톰 크루즈)는 첫 번째 이야기인 <미션 임파서블>에서 모든 팀원이 죽는 경험을 한다. 완벽했던 팀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그는 그 죽음의 책임자처럼 몰렸다. 누명을 벗기 위해,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다시 팀을 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미션은 3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단은 줄곧 달리고, 매달리고, 뛰어내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지며 세상을 지키는 선택을 반복해왔다.
이단은 팀원이 희생되는 것에 무척 예민하다. 아마도 첫 이야기의 시작에서 모든 팀원이 죽는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전 시리즈에 이어진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는 시리즈 내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뛰지만, 그 여러 미션 속에서 팀원이나 자신의 주변 사람이 다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해왔다. 그게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당시에 크게 고려하지 않았지만 그 수많은 선택들이 이번 시리즈에서 총합이 되어 결과로 나타난다. 이번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의 빌런인 AI 엔티티는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을 보게 되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선택들을 보지는 못한다. 그 인간만의 선택은 이단 헌트가 주도하게 되고, 그래서 관객들은 그의 선택을 집중해서 볼 수 밖에 없다.
[첫번째 감정] 이단의 선의
시리즈 전체를 보면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이단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다. 이단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직업으로서 IMF라는 조직에서 첩보원 활동을 하지만, 그가 하는 대부분의 임무는 세상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다. 조직에서 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예측을 벗어나는 상황이나 적이 나타나면 그것도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 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미션 임파서블> 이라는 영화 시리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장면은 아마도 이단 헌트가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일 것이다.
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동료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린다. 이번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에서는 스스로 선택하여 극단적인 임무를 수행한다. 차가운 배링해 깊은 바다속으로 들어가고, 비행기에 맨몸으로 매달린다. 그의 선의가 특히나 이번 영화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왜냐하면 이번 영화에선 그의 팀을 제외하면 그의 선의를 믿어주는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AI가 만들어낸 극단적인 상황속에서 다른 인물들은 최대한 공격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구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단은 모두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선택을 생각해낸다.
그건 이단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어쩌면 이단 스스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 선택에 대해서 이단은 망설이지 않는다. 희생되는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시리즈에서 가장 이단의 선의가 돋보인다. 지난 30년동안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이단도 나이가 들어왔다.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이단의 얼굴을 보면 세월이 느껴진다. 이제 조금은 힘들어보이는 그 외모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던의 에너지는 변함없이 선의를 위해 불타오른다.
[두번째 감정] 이단의 믿음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특별한 이유는, 이단이 혼자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벤지와 루터를 비롯해, 그의 곁에는 늘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단은 그들을 깊이 믿는다. 그 신뢰는 언제나 양방향이다. 벤지는 이단의 달리는 길을 위해 가장 정확한 타이밍으로 문을 열고, 루터는 목숨을 걸고 해킹을 감행한다. 그들은 수많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서로를 향한 믿음으로 살아남았다.
이 믿음은 단순하게 동료애라고 할 수 없다.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 함께할수록 더 강해지는 연대다. 이단은 그 믿음을 전제로 어떤 결정도 감행한다. 팀을 믿기에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 있고, 위험한 공간으로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이 미션은 단 한 번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강력한 믿음은 때로 이단의 약점이 되기도 한다. 그 믿음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상처받고, 더 쉽게 무너진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그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믿음과 선의, 이단의 두 가지 무기는 AI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선택을 이끌어낸다. 이단은 이번에도 그 믿음으로 세상을 구하고, 자신의 세계를 지킨다.
[세번째 감정] 이단의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 시리즈에서 종종 감춰져 왔다. 하지만 이단은 늘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는 약혼자가 있었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관계를 끊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밀어낸다. 그게 이단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에서 이단이 약혼자와 재회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찡하다. 그 순간에도 이단은 말을 아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말한다. 여전히 상대방의 안전을 바란다고.
그 이후, 이단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은 일종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동료에게, 팀원에게, 그리고 자신이 책임졌던 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영화 속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들을 아끼고, 지키고자 한다. 그래서 이번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에서도 그는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팀원을 먼저 생각한다.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동료를 지키는 것이 먼저인 사람. 그게 이단 헌트다.
사랑은 결국 그가 가진 모든 감정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하지 않지만, 늘 사랑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 그는 그 사랑으로 선택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바로 그 사랑이다. 이단은 이번에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방식으로 미션을 완수한다.
마지막 선택은 모든 선택의 총합이다
<파이널 레코닝>은 제목 그대로, 지금까지의 모든 미션에 대한 결산이다. 처음부터 함께해온 사람들, 첫 시리즈의 떡밥들,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약속들까지. 모든 것이 이 이야기 안에 있다. 이단은 과거의 선택들로 인해 지금의 상황을 맞닥뜨리고, 또 새로운 선택을 한다. 그건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모든 과정이 낳은 새로운 시작이다.
지금의 우리 모두의 현재는 과거의 선택이 만든 결과다. 그 선택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단의 미션은 언제나 불가능했지만, 그는 그 불가능한 임무를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선택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이단 헌트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결국 이단 헌트에 대한 헌정이다. 그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이 여정을 이렇게 정성껏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시리즈가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톰 크루즈의 얼굴로 끝나는 영화
액션의 스케일은 시리즈 사상 최고다. 비행기에 매달리고, 절벽을 오르고, 잠수함으로 들어가는 장면들 모두가 놀랍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대단한 이유는, 톰 크루즈의 얼굴 때문이다. 그 얼굴엔 모든 선택이 담겨 있다. 고통도, 후회도, 믿음도, 사랑도. 그 모든 것이 담긴 얼굴이 이단 헌트라는 인물의 마지막 선택을 대변한다.
사이먼 페그, 빙 라메스, 헤일리 앳웰 등 배우들의 연기도 빛났다. 팀원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영화는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강력한 빌런 대신, AI라는 무형의 존재를 빌런으로 삼은 점도 흥미롭다.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인지, 선택이란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아이맥스로 촬영된 영화이기에, 아이맥스 혹은 4DX로 감상하면 이단의 마지막 선택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팬이라면, 이 영화를 끝까지 함께해줄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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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별에 필요한 | 한국형 우주 로맨스 애니의 명과 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엄마의 뒤를 이어 NASA 화성 연구원이 되고 싶은 '난영'(김태리). 최선을 다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에 걸친 그녀는 부족한 연구 실적도 쌓고, 약간의 휴식도 즐길 겸 한국으로 되돌아온다. 오랜만에 들린 집을 정리하던 중 엄마의 유품인 턴테이블을 고장 내 버린 난영. 그녀는 턴테이블을 고치기 위해 나선 길에서 우연히 음향 기기 수리 아르바이트 중이던 '제이'(홍경)를 만나고, 얼떨결에 그에게 턴테이블을 수리받는다.
우연한 만남은 이내 운명적인 사랑이었음이 드러난다. 난영이 미국에서 지낼 때 반복 재생할 정도로 좋아한 미완성곡의 주인이 제이였던 것. 남다른 접점과 비슷한 취향을 발견한 난영과 제이는 빠르게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시련이 닥친다. 화성 연구원으로 발탁된 난영이 엄마와 자신의 꿈을 위해 화성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지구에 홀로 남은 제이는 난영이 좋아하던 곡을 마저 완성하면서 그녀의 귀환만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명암이 확실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도전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한 이후 큰 변화 중 하나는 한국 영화 및 드라마 크리에이터들의 도전 정신이 아닐까 싶다. 제작 과정에 간섭하지 않는 환경이 조성된 덕분에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와 소재를 다룬 작품이 다수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내에 국한된 변화가 아니었다. <킹덤>, <인간수업>, <오징어 게임> 등의 성공에 자극받은 다른 OTT나 방송국도 변화의 물결에 올라탔으니까.
한지원 감독의 신작, <이 별에 필요한> 또한 넷플릭스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증명한다. <이 별에 필요한>은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 드물었던 애니메이션 영화이기 때문. 세계 5위권을 오가는 한국 영화 시장의 규모를 고려하면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는 철저한 비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저연령층 애니메이션은 <사랑의 하츄핑>처럼 흥행력을 보여준 사례가 있지만, 고연령층 애니메이션 중에는 흥행에 성공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제작된 <이 별에 필요한>은 한국 영화계에 남아있는 또 하나의 벽에 도전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빛을 강조한 그림체만큼이나 명과 암이 뚜렷하다. 마치 사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을 보는 듯한 작화는 그 자체로 눈을 즐겁게 한다. 그에 반해 기존 로맨스와 SF 작품을 답습한 서사는 개성이나 독창성을 살리기에는 짜임새가 부족하다.
눈이 즐거운 기술적 성취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중에서도 셀 애니메이션 영화는 특히 찾아보기 어려운 장르다. 3D 애니메이션 중에는 최근에 개봉한 <퇴마록> 같은 사례가 있지만, 셀 애니메이션으로는 그나마 <마당을 나온 암탉>,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이나 <사이비> 정도가 있을 뿐이다. 척박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이 별에 필요한>은 존재 자체로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특히 미래의 서울 풍경을 그려낸 배경 작화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한국 영화 속 미래의 서울은 디스토피아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던 반면, <이 별에 필요한>은 낙관적인 희망이 담긴 2060년대 서울을 그려냈다. 종로나 청계천, 세운 상가 등 익숙한 풍경을 큰 틀에서는 유지하면서도 홀로그램 간판이나 고가도로, 고층 빌딩 등을 덧대서 현재와 미래의 분위기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에 더해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유사한 연출 방식은 로맨스 영화에 적합한 청량한 분위기를 빚어낸다. 풍경을 묘사할 때 렌즈 플레어를 활용하고, 캐릭터와 배경에 동일하게 초점을 맞추는 식이다. 배경 음악을 적극적으로 삽입해서 두 주인공의 감정선을 고조하고, 카메라를 360도로 회전하며 그 감정선을 강조하는 방식 또한 <너의 이름은.>과 같은 작품에서 효과가 검증된 연출법을 빌린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기술적으로 100% 만족스러운 영화는 아니다. 일부 장면에서는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때 표정 표현이 어색한 지점이 노출되기도 한다. 이에 더해 전문 성우가 아니라 배우에게 더빙을 맡긴 것도 물음표를 남긴다. 영화 캐릭터의 개성보다는 배우의 존재감이 먼저 각인되다 보니 다소 따로 노는 영상과 음성으로 인해 몰입감이 순간적으로 저해하는 때도 있다.
익숙하다 못해 궁금하지 않은 로맨스
반면에 <이 별에 필요한>의 서사는 새로운 성취를 보여주지 못했다. 흔히 한국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도전적인 작품은 외관에 비해 알맹이가 아쉬운 경우가 많은데, <이 별에 필요한>도 예외는 아닌 셈이다. 우선 로맨스 영화로서 <이 별에 필요한>은 클리셰를 답습한 결과 지나치게 무난하다. 지구와 화성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한 나머지 평범한 롱디 커플의 연애사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구와 화성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로맨스는 그 자체로 여러 변수를 상상할 수 있는 소재다. 그런데 <이 별에 필요한>은 정작 그 공간적 특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난영과 제이의 우연한 만남, 연애의 시작, 화성으로 떠나려는 난영과 만류하는 제이의 갈등 등 대부분의 이야기가 지구에서 펼쳐지기 때문. 난영이 화성이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미의 오지로 떠나는 것으로 설정해도 둘의 로맨스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지구와 화성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오히려 서사의 균형감이 무너뜨리기까지 한다. 화성이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두 연인의 갈등 상황에서 한쪽의 문제나 입장은 너무 사소하게 느껴진다. 난영은 고민은 가족의 역사가 걸린 결단이다. 그녀는 화성에서 사망한 어머니의 꿈을 대신 이뤄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지녔다. 그렇기에 운명처럼 만난 제이와의 관계가 무너질 각오를 하고서라도 화성으로 떠난다.
그에 반해 제이는 밴드 멤버들과의 의견 차이로 그만둔 음악을 다시 시작할지를 고민한다. 물론 자아실현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가족사가 얽힌 도전과는 그 층위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SF적인 배경까지 더해지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꿈을 응원한다는 연결고리가 있더라도 제이의 서사는 서서히 난영의 서사에 가려진다. 결국 <이 별에 필요한>의 로맨스는 보기에만 예쁜, 마치 향기 없는 모란꽃과 같아진다.
물리법칙을 뛰어넘는 사랑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 별에 필요한>의 SF적인 전개 또한 좋게 말해 무난하고 나쁘게 말하면 기시감이 진하다. 난영이 화성에서 고립되듯이 우주를 탐사하는 우주비행사가 조난되는 전개는 사실 SF 작품들에 없어서는 안 될 클리셰다. 화성이 배경이라는 점은 리들리 스콧의 <마션>을 연상시킨다. 여성 주인공이 조난됐다는 점에서는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다만 <이 별에 필요한>에서는 특히 <인터스텔라>와의 유사점이 두드러진다. 우선 상황이 비슷하다. 두 영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 우주로 떠난 뒤 연락이 끊겼고,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또 두 작품은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 사랑을 상징하는 명확한 오브제가 등장하고,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도 비슷하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매튜 매커니히)는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지구에 있는 딸 '머피'(맥켄지 포이/제시카 차스테인)에게 자신이 관찰하고 알아낸 데이터를 알려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블랙홀 속에 진입한다. 5차원 세계에서 깨어난 후 그는 중력을 이용해 딸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그가 우주로 떠나기 직전에 선물한 손목시계 초침을 조작해서 데이터를 모스 부호로 표현한 것.
이처럼 쿠퍼와 머피에게 손목시계가 있다면, 난영과 제이에게는 턴테이블이 있다. 화성에서 조난된 뒤 의식을 잃었던 난영은 마치 턴테이블처럼 생긴 우주 속에 빠지고, 제이의 음악을 들으면서 턴테이블의 중심에 있는 지구를 향해 우주를 거스르는 환상 끝에 의식을 되찾고 생존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턴테이블 때문에 성사된 두 사람의 우연한 첫 만남을 <인터스텔라> 속 손목시계처럼 활용한 묘사라 할 수 있다.
<인터스텔라>가 되지는 못했다
다만 <이 별에 필요한>은 <인터스텔라>만큼의 감동이나 전율까지는 안기지 못한다. 오브제를 활용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 상대적으로 덜 정밀했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는 쿠퍼와 머피 모녀의 애증을 손목시계 하나로 보여주기 위해 여러 단계의 설계를 해놨다. 쿠퍼가 머피에게 손목시계를 선물로 남기는 장면을 초반부의 하이라이트에 배치하고, 손목시계에 관련된 복선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식이다.
그에 반해 극 중 턴테이블은 난영과 제이의 관계 시작점이기는 하나, 손목시계만큼 뇌리에 각인되는 오브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둘의 사랑이 시작된 후로는 우산처럼 턴테이블을 대신하는 소재도 등장하고, 턴테이블보다는 난영이 반복 재생할 정도로 좋아한 제이의 음악 그 자체가 더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턴테이블처럼 생긴 우주가 등장하는 장면은 다소 급작스럽게 느껴질 여지가 존재한다.
부족한 짜임새는 작품을 관통하는 '아날로그'라는 주제 의식을 약화하기에 더욱 아쉽다. <이 별에 필요한>은 초반부터 의식적으로 디지털 세상을 거스르는 아날로그 기기를 등장시키며 손과 마음이 직접 닿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화상채팅으로 모든 의사소통을 하는 난영과 턴테이블로 음악을 듣고 종이와 펜으로 메모하는 제이를 반복해서 대비하는 식이다.
아날로그 기기의 역할은 후반부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난영이 화성에서 조난당했다는 뉴스를 본 제이가 난영의 아버지에게 빌린 안테나를 설치해서 난영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오래된 무전기를 통해 극적으로 재회한 둘이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우주를 턴테이블처럼 묘사하고, 미래 시점인데도 2020년대 풍경을 섞은 작화의 특징과도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 별에 필요한>의 극본이 이 주제 의식을 구조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인터스텔라>를 볼 때와는 다르게, 제이와 난영이 무전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감동보다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의구심이 먼저 들기도 한다. 이는 그만큼 충분히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나 다름없다.
첫술에 배부르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이 별에 필요한>은 군더더기 없이, 상당한 세련미를 자랑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삼각관계처럼 답답한 클리셰는 꺼내지 않기 때문. 영화 곳곳에 짧게 삽입되어 임팩트를 주는 밴드 음악도 청량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에 더해 구도적으로도 신선한 그림이 있다. 우주로 떠나는 사람을 여성, 지구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남성으로 설정한 덕분에 일반적인 SF 구도를 탈피할 수 있다.
단지 기시감이 짙은 플롯의 구조와 짜임새가 부족한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고유의 개성과 장점이 돋보이지 못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종합하면 <이 별에 필요한>은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속담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삭막한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의 현실을 고려하면 기술적으로는 분명히 가능성을 보여준 도전이기에 인상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첫술'이라는 한계에 안주한 것은 아닌가 싶은 아쉬움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Acceptable 무난함
도전이라는 지구와 안정감이라는 화성 사이에서 빛이 바랜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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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의 차원을 넘어서라
인간은 몇 차원에 살고 있을까? 또한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는 얼만한 크기일까? 인간은 우주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SF소설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아시아 최초로 받은 류츠신의 <삼체>. 요새는 SF소재를 단순하게 미래에 대한 상상력, 혹은 판타지 수준에서 채용하는 소설과 영화들이 대부분이라면, <삼체>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 차원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주고, 1,2,3부로 이어지면서 그 차원의 세계는 지수함수 그래프처럼 무한히 위로 올라가 버린다. 차원의 깊이가 우주만큼 깊고 넓어, 책을 다 읽고 다시 지구의 작은 집에 앉아있는 나를 인식하면 한없이 작아진 나를 느끼게 된다. <삼체>는 '삼체문제' 그 자체보다, 우주의 다차원을 다루며 차원과 차원사이에 일어나는 일, 고차원과 저차원의 인식, 차원끼리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삼체문제'는 그저 다차원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러면 <삼체>에서 보여주는 '삼체문제'란 무엇이며, 차원이란 무엇인가?
삼체문제
삼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세 물체를 말한다. '삼체문제'라는 것은 세 물체 간에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그에 따라 세 물체는 어떤 궤도운동을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인간은 삼체문제를 그다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즉 이체에 가까운 세상인 지구에 살고 있다. 태양계는 태양이 압도적인 질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궤도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각각 행성의 위성들도 모성과 질량차이가 커서, 대부분 안정적으로 돌고 있다. 다만 지구의 위성인 달이 일반적인 위성보다 비정상적으로 커서 둘 궤도의 중심점이 지구 중심에서 좀 많이 비켜나 있기는 한데, 역시나 안정적이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평면적인 공전궤도면을 따라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사는 태양계의 태양이 하나가 아니라 비슷한 크기 두 개인 쌍태양이라면, 행성들의 움직임은 이보다 더 복잡한 면을 그리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태양이 쌍성이 아니라 세 개여서 삼체가 된다면, 그 세 태양의 움직임은 계산이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이 이체세상에 살고 있다면, 삼체세상은 어떤 의미로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세상인 셈이다. 더군다나 4체, 5체, 다체로 가게 되면 아예 궤도를 알아내기가 불가능하다. 양성자와 전자 한 개로 이루어진 가장 기초적인 원자인 수소 말고, 전자가 하나 더 늘어난 그 이후 원자부터는 궤도모델을 만들 수 없는 것도 그 이유다.
<삼체>에 나오는 삼체인들의 항성은 지구에서 대략 4광년 떨어진, 가장 가까운 항성들인 센타우르스의 알파성을 모티브로 했다. 알파성은 하나의 별인 줄 알았지만 관측결과 2개의 항성으로 된 쌍성계이고, 조금 더 태양과 가까운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적색왜성이다. 이 세별은 서로 중력의 영향을 받는 삼연성계이다. 이 삼연성계에 생물이 사는 행성이 있다면, 거기에 사는 생명의 우주관은 우리와 아주 다를 것이다. 지구는 아주 오랫동안 일정하게 도는 달과 태양 때문에 하늘을 평면적인 둥근 천장이라고 생각하는 '천구'개념이 있었지만, 삼체운동을 하는 항성들이 하늘을 돌고 있다면 하늘을 처음부터 3차원 입체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지구의 인간은 독특한 음양론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태양과 달의 크기가 우연히도 정확히 같아 보이기 때문에 생긴 철학이다. 이런 행성은 아마 삼체성계만큼 엄청나게 드물 것이다.
삼체의 궤도를 표현한 애니메이션. 너무 불규칙한 데다 항상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삼체문제가 아예 해가 없는 것은 아니고, 특수한 상황에서의 해는 밝혀졌다. 위는 동일한 질량, 각운동량이 없는 상황에서의 해 중 하나인 8자 모양의 해.
인식의 한계차원
1차원은 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입체. 우리는 흔히 인간은 3차원, 시간까지 더해서 4차원을 우리의 차원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크기에 대한 제한적 차원이다. 우리는 인간세상이 입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적인 위치에서 보면 거대한 지구라는 행성표면에 붙어살고 있는 2차원 생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차원을 진정한 3차원으로 한 단계 높여주는 행위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지구를 넘어서서 태양계도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거대한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점도 벗어나지 못하는 0차원의 존재인 셈이다.
인간보다 거대한 차원이 아니라 작은 차원은 어떨까? '그래핀'은 탄소원자 한 겹의 배열로 이루어진 2차원 물질이다. 인간이 볼 때 그것은 2차원이다. 하지만 더 미시적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원자 속 에는 양성자와 전자가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 그보다 더 작게 들어가면 초끈이론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11차원이라고 하고, 여분의 차원은 작게 말려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우리보다 더 작은 차원들, 혹은 더 큰 차원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지구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일 뿐이다.
차원에 대한 소설은 1884년 에드윈 A. 애보트의 <플랫랜드>가 가장 유명하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인 2차원 정사각형이 1차원과 3차원으로 갈 때의 묘사가 훌륭하다. <플랫 랜드>에 나온 바에 의하면, 2차원 생물은 상대방을 위에서 볼 수 없기 때문에 원이든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선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중간에 3차원 구가 나타나면, 선이 점점 커졌다가 작아지는 구의 단면만을 인식한다. 이 흥미로운 차원 간 세계의 설정은 <삼체> 전체에 깔려있다.
또한 인간이 지동설이 검증하는 과정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대해 큰 교훈을 준다. 처음 지동설을 주장할 때, 교회에서는 무작정 천동설을 믿고 탄압한 게 아니다. 당시 신부들은 가장 머리가 좋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지구가 태양의 궤도를 돈다면, 반대편에 있을 때 별들의 위치가 달라져서 연주시차가 나타나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인간의 관측기술로는 연주시차를 측정할 수 없었고, 별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결국 지동설이 연주시차로 검증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망원경과 천체관측기구가 발달하고 나서다. 위에서 언급한 태양과 가장 가까운 항성계여서 연주시차가 가장 큰 센타우르스의 알파성 연주시차는 2/10000도이기 때문에, 맨눈으로는 전혀 관측할 수 없다.
최근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 대한 가장 큰 과학적 성과는 중력파의 검증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질량은 공간의 휘게 만드는데, 이것이 곧 중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질량에 변화가 생기면 그 시공간의 휘어짐이 빛의 속도로 파동처럼 전달되는데, 그것이 중력파다. 하지만 이 시공간의 휘어짐은 중력 변화에 비해 너무나도 작아서, 이 중력파를 검출하기 위한 장치 LIGO를 만들기 전까지 측정한다는 것은 꿈의 과학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시로 중력파를 검출하고 있고, 소설 <삼체>에는 나중에 중력파를 통신기술로 이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중력파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우리가 우주를 보는 눈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 한 차원 높은 우주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주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른다. 우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으며, 인간이 관측한 100년 남짓한 데이터로 우주의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과학들이 밑바닥부터 모두 허물어진다면, 우주의 별이 사실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스크린이어서 마음대로 깜빡일 수 있다면, 오늘부터 1+1이 2가 아니게 된다면, 인간은 벌레처럼 주저앉게 될 것이다. <삼체>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드라마 vs 소설
소설 <삼체>는 나왔을 때부터, 영상 매체로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다른 대하소설처럼 물량이 많고 이야기가 복잡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을 글로 풀어서 썼기 때문이다. 요즘 소설에 비하면 진행이 느리고 묘사가 많은 데다, 많은 부분을 이미 만들어진 클리셰를 거부하고 작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미래 세계를 새로 구축해 나간다. 요즘 SF작법으로 비유하자면 글 쓸 때 하지 말라는 짓은 다한 소설이나 다름없다. 만들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이걸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가 있긴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시즌1은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인다. 일단 중국인 위주로 흘러가는 1,2,3권의 주인공들을 '옥스퍼드 동기 과학자들'로 모두 한 곳에 모아놨다. 그중에도 주요 인물들은 중국인으로 유지하고, 3권의 주요 캐릭터인 토마스 웨이드가 다른 캐릭터들과 합쳐진 모습으로 등장해 매력을 뽐낸다. 게다가 소설대로 진행했으면 조금 느리고 지루할 수 있는 흐름을, 1,2,3부의 내용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빠른 전개를 보여줬다. 그리고 일반인에게 어려울 수 있는 과학은 많이 간략화했다. 드라마는 소설보다 더 쉽고, 전개가 빠르며, 거기에 '영국 이민자들의 서사'를 추가로 부여해 더 글로벌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 축약해 버려서, 인류 전체가 하는 다양한 고민들이나 캐릭터의 서사들은 많이 없어졌다. 특히 소설 2권의 주인공인 '뤄지'를 대체한 사울은 나중에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인데, 그의 가벼운 캐릭터가 많이 아쉽다. 원래 사울의 역할은 우주 사회학 교수로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고, 상상력과 내면이 굉장히 강한 사람인데 그런 서사가 시즌 1 동안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설 3권의 주인공을 대체하는 진 청과 윌리엄 다우니의 서사만큼 쌓았으면 좋으련만.
드라마가 아직 시즌1 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전개나 주제, 철학까지 다루기는 어렵다. 하지만 등장하는 몇 가지 과학기술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수는 있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입자 가속기/카미오칸데
베라 예는 옥스퍼드 입자가속기에서 일하고 있다가, 멍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고 뒤돌아 나가는데 금색 구슬이 가득 있는 거대한 구 모양의 공간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이건 여러모로 전혀 맞지 않는 연출인데, 베라 예가 떨어져 죽는 곳은 카미오칸데라고 하는 일본의 중성미자 검출장치이기 때문이다. 입자가속기는 입자를 고속으로 운동하게 만들어서 충돌시켜 중성미자 등 다양한 입자들을 검출해 연구하는 곳인데, 거대한 도넛처럼 생겼다. 카미오칸데는 일본에 있는 우주에서 날아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다. 그냥 두 개가 같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중성미자를 만드는 장치와 우주에서 오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장치가 같이 있는 건 사실 말이 안 된다. 그건 지하철 옆에 지진계를 설치한 것처럼 이상한 짓이다. 아마 제작진이 그냥 멋으로 넣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 유럽 입자물리연구소-세른이 나오는데 정문에 파괴의 신인 시바신 동상이 있는 것은 진짜다. 실제로는 선물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 때문에 입자가속기가 블랙홀을 만들어 세상을 파괴할 것이라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유럽의 강입자가속기 CERN에 있는 시바신
입자 가속기는 입자를 충돌시켜 연구하는 곳인데, 유럽의 CERN처럼 도시만 한 것도 있지만 정말 다양한 크기의 입자가속기가 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병원에도 사이클로트론이라는 원형 입자가속기가 한국 최초의 입자 가속기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입자로 PET촬영을 했었다. 입자가속기로 다양한 입자의 성질과 발견을 해왔고 쿼크나 힉스입자의 발견 등 아주 중요한 연구와 발견을 하는 장치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실험결과가 누가 장난친 것처럼 모두 틀어진다면, 인간은 지금까지 헛된 것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마치,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먹이를 주는 주인을 본 칠면조가 지금까지의 논리로 '이 시간에 먹이를 주러 오는 사람'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했는데, 어느 날 먹이를 주는 줄 알았던 주인이 칠면조를 잡아 죽였고 그날은 추수감사절이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지자(智子, Sophon)
위에서 언급했듯, 초끈이론-M이론에서는 세상이 11차원으로 이뤄져 있다고 할 때 다른 차원들은 작게 말려있다. 그 차원을 2차원으로 모두 펼친 다음, 그곳을 컴퓨터로 만들어 넣고 다시 차원을 말아 넣어 양성자로 만든 것이 지자이다. 전자, 양성자와 같은 소립자가 지혜를 가졌다 해서 智(지혜 지) 자를 붙여 지자(智子)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영어이름인 sophon도 지혜를 뜻하는 sophia를 붙여 만든 이름이다. 고차원을 저차원에 펼치면 전개도가 되는데, 차원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 전개도의 모양도 아주 복잡해지며 펼쳤을 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이론으로 만들어진 소립자 컴퓨터다. 이런 저차원 펼침, 고차원 말림, 차원과 차원이 만나는 것, 고차원이 저차원을 해부하고 들여다보는 것은 <삼체>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주요 소재다. 특히 지자가 가상현실에서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고 다시 펼쳐졌던 양성자를 축소시키는데 그건 칼라비-야우 다양체의 모습이다. 칼라비-야우 다양체란 M이론의 대가인 에드워드 위튼이 말한 여분의 6차원을 시각화 한 형상이다.
6차원을 말아서 구현한 칼라비-야우 다양체
또한 지자는 쌍으로 만들어져, 양자 얽힘을 이용해 거리에 관계없이 4광년이나 떨어진 삼체 본대와 소통할 수 있다고 나온다. 이 부분이 과학 매니아들에게서도 오해받는 부분인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양자 얽힘으로는 빛보다 빠른 통신을 할 수 없다. 얽혀있는 양자의 하나의 상태를 확인하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얽힌 다른 양자의 상태가 반대로 나오는 것이 양자 얽힘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양자의 상태를 바꾼다고 해서 나머지가 변하는 건 아니다. 그저 관찰을 시작할 때의 상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미래에 양자 얽힘으로 무언가 통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진 작가의 상상력이다.
어떻게 이 지자는 사람의 눈에 카운트다운을 새기고, 별을 깜빡이게 만들고, 전 세계의 통신을 장악할 수 있을까? 지자는 양성자의 크기이므로 양자역학이 적용된다. 즉 어느 한 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게 가능하며 질량이 0에 가까우므로 광속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인간의 망막에서 별빛을 사라지게 하는 게 가능하고, 카운트다운을 망막에 새기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과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지금까진 전기로 하는 통신장치(스피커)가 필요하다.
혹여나 양자역학이 현대 물리학을 깨는 게 아니냐고 오해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덧붙이면, 양자역학은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뿐이지, 수학적으로는 너무도 명확한 현대물리학이다. 현대 과학은 이미 양자역학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원자와 원자가 결합해 분자를 만들 때, 전자를 공유하는데 그것도 양자역학이다.
나노 섬유
나노 섬유는 나노미터 굵기의 섬유를 말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온 분야로, 지금은 탄소나 아라미드, 금속 등 다양한 소재로 나노 섬유를 만들고 연구하고 있다. 나노미터가 얼마나 가는 것인가 하면, DNA가 3 나노미터의 굵기이고 탄소 나노튜브는 1 나노미터이다. 현재 개발된 탄소 나노튜브등은 철의 100배의 강도를 가졌지만, 원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무언가를 자르기보단 전기전달효율이 높고 작은 곳에 배치해 만들 수 있어서 초소형 회로나 가볍고 강한 섬유를 만드는데 주력하는 물질이다. 강도가 강하면 다이아몬드도 자를 수 있지만, 잘 휘어지지 않아 끊어지기가 쉽다. 또 드라마 <삼체>의 하이라이트인 '나노 섬유로 적들을 동강내기'에 나오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다. 배가 잘릴 것인지 섬유를 묶은 기둥이 먼저 잘릴 것인지도 여러 계산과 연구가 필요하다.
탄소 나노튜브는 2차원 물질인 그래핀을 말아서 만든다.
이 부분은 나노 섬유에 대한 과학도 과학이지만, 1차원 물질에 가까운 나노 섬유가 3차원 물질과 닿아서 파괴해 버리는 '차원의 맞닿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3차원 생물을 4차원의 생물이 들여다본다면, 3차원 생물이 2차원 생물을 위에서 바라본 것처럼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지구인보다 고차원의 세상 - 삼체성계를 가진 곳에서 더 높은 차원의 과학을 가진 삼체인이 보기에, 비록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벌레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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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삼체>는 소설의 긴 흐름을 흥미 있게 각색해 연출했지만, 그래도 시즌1이 다 가도록 외계인이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아 의아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지구가 멸망하려면 400년이나 남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삼체>의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다른 여타 이야기가 인간끼리 벌이던 함대전쟁을 빗대어 '외계인과의 전쟁'을 묘사하는 게 대부분이라면, <삼체>는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의 차원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동양에서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순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는 우주가 팽창했다 수축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예원제는 그저 모든 것을 끝장내려는 억하심정으로 삼체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삼체인 들은 자신들의 항성계를 떠나 지구에 살려고 오는 것이지만,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정이 있다.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은 선이 아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
아직까지는 꽤나 잘 각색했다 생각하고, 스케일이 너무 작아지지 않게, 동양철학을 놓치지 않고 다음 시즌을 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왕좌의 게임> OST를 만들었던 라민 자와디의 <삼체> 메인 테마를 들으며 삼체인들을 기다려볼까. <삼체> 답게 3박자에 화음을 엇갈리게 넣어놔서 삼체성계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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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를 번역할 때, 영어로 3-body라고 하지 않고 중국어 발음인 Santi를 그대로 썼다. 단체를 만든 예원제가 중국인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공교롭게도 Santi는 산타클로스의 애칭인 santy와 발음이 같다. <삼체> 드라마에선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비유로 중간에 산타클로스가 등장한다.
*지자가 동양인에 사무라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인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智子이기 때문이다. 智子는 토모코라는 일본 여자이름이기도 하다. (영어로도 Sophia는 여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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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자 리포트 | 방벌 대신 치료를 위한 복수극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복수와 사적제재
재벌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다가 퇴사 위기에 몰린 기자 '선주'(조여정). 그녀에게 제보가 하나 들어온다. 11명을 죽였다고 주장하는 정신과 의사 '영훈'(정성일)이 인터뷰를 요청한 것. 만약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면 한 명을 더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특종을 따려는 욕심과 살인을 막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선주는 인터뷰를 수락하고, 호텔 스위트 룸에서 살인자를 만난다. 연인이자 형사인 '상우'(김태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주는 영훈에게 묻는다. 왜 사람을 죽였냐고. 영훈은 고백한다. 복수심 때문이라고. 강간 피해자였던 아내가 자살한 뒤, 영훈은 범인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범인이 교도소에서 이미 죽은 나머지 그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폐인으로 지낸다. 어느 날, 음주 운전자 때문에 가족을 잃은 환자가 그의 병원에 내원한다. 환자의 복수심을 발견한 영훈은 그에게 제안한다. 가슴에 사무친 복수, 자기가 대신해 주겠다고.
여기까지만 보면 <살인자 리포트>는 디즈니+ 시리즈 <비질란테>나 <베테랑2>처럼 사적제재를 다룬 작품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다. 모종의 이유로 공권력과 사법 체계를 불신하게 된 주인공. 그는 자기 복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복수도 대신하기 시작한다. 그의 행동은 갑론을박을 낳는다. 누가 그에게 범죄자를 처단할 권리를 줬는지, 그도 일반적인 범죄자처럼 처벌해야 할지 등.
<살인자 리포트>의 특이점
하지만 <살인자 리포트>는 그다음 대목에서 차별화된다. 영훈은 자신의 살인을 치료행위라고 설명한다. 근거도 확실하다. 음주 운전자를 죽인 뒤 시체 사진을 보여줬을 때 활짝 웃더니 정상 상태로 회복된 환자 반응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는 것. 이를 계기로 영훈은 다른 범죄 피해자들을 상담한 뒤, 그들이 원하면 복수를 대행한다. 형사적 처벌만으로는 회복되지 않았던 그들과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이 대목은 색다르다. 자신의 복수와 폭력은 사회 정의를 바로잡고, 지연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정당화하는 기존 영화 속 자경단과는 논리가 전혀 다르다. 그 덕분에 <살인자 리포트>는 자유를 얻는다. 만약 사적제재를 정의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면, <살인자 리포트>도 자경단과 공권력의 관계를 다뤄야 했다. 일례로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핵심 주제는 자경단 배트맨과 검사 하비 덴트의 대립이었다.
<살인자 리포트>는 영훈의 살인을 정의 실현이 아니라 치료라고 말하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펼쳐 보일 공간을 확보한다. 그 이야기는 바로 윤리적, 규범적 차원 대신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사적제재를 풀어내는 것이다. 실제로 <살인자 리포트>는 등장인물의 직업부터 공간의 색깔에 이르까지 의도에 충실하게 설계되어 있다. 그 중심에는 프로이트가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원초아(이드), 자아(에고), 초자아(슈퍼에고)로 나뉜다. 원초아는 성적, 파괴적 충동 같은 원초적 본능이다. 초자아는 사회적 관념과 도덕 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다. 자아는 초자아의 도움을 받아 원초아를 통제한다. 만약 초자아나 원초아가 주도권을 잡으면 개인의 정신 건강은 유지될 수 없다. 전자라면 도덕적 자기 검열이 심해져 강박증이 나타나고, 후자라면 자해하거나 범죄를 저지를 테니까.
인터뷰가 그저 인터뷰가 아닌 이유
흥미롭게도 <살인자 리포트> 속 세 주인공의 역학관계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원초아, 자아, 초자아의 관계가 정확히 대응한다. 자아와 초자아가 원초아를 통제하려 하듯이, 선주와 상우는 영훈을 통제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호텔 스위트 룸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카드키도 복사한다. 영훈이 돌발행동을 벌이면 아래층 객실에서 대기 중인 상우가 언제든 진입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다.
즉, 영훈이 자신의 파괴적 충동을 좇아 살인을 저지른 원초아라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언제든 그를 통제할 준비가 된 선주는 자아이고, 선주의 뒤를 받쳐주는 상우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는 세 인물의 정체성과도 결부된다. 사회를 한 개인의 의식에 빗댄다면 사회적 질서보다는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범죄자와 사회 규범을 지키려는 경찰은 각각 원초아와 초자아의 역할은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같은 관점에서 보면 기자의 책무는 자아의 역할과 유사하다. 일방적으로 범죄자를 통제하는 경찰과 달리, 기자는 범죄자의 사연으부터 유의미한 메시지를 끌어내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서도 범죄 예방과 질서 유지를 위해 경찰과 협력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경찰이 강제력을 과하게 행사하지는 않는지 감시한다. 원초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자아의 일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살인자 리포트>의 인터뷰는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다. 사회 질서를 놓고 자아와 원초아가 벌이는 줄다리기에 가깝다. 세 주인공은 인터뷰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선주는 영훈이 잠재적 피해자의 안전을 확인해 주지 않으면 인터뷰를 진행할 수 없다며 어깃장을 놓는다. 상우는 인터뷰 전부터 영훈을 체포하려 든다. 이에 맞서 영훈은 선주에게 최면을 걸고, 선주의 딸을 언급하면서 그녀를 감정적으로 무너뜨린다.
무너진 균형
안전한 인터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선주. 그녀는 상우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감춰둔 무기로 영훈을 제압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가 수포가 되면서 인터뷰의 주도권은 영훈에게 넘어간다. 그 결과 영훈의 공간이 된 스위트 룸에서 선주와 관객 눈앞에는 도덕적 양심과 사회적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원초적 충동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영훈에게 주도권이 넘어간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상우의 이탈이다. 상우는 두 가지 이유로 더 이상 인터뷰에 관여하지 못한다. 우선 물리적으로 차단된다. 영훈이 미리 호텔 보안 시스템에 손을 쓴 나머지 미리 복사한 카드키가 먹통이 되고, 상우 본인도 아래층 객실에 갇히기 때문. 선주로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방어막이 무력화된 셈이다.
심리적으로도 차단된다. 영훈은 상우의 범죄 행각을 폭로하며 선주와 상우의 유대감을 근본적으로 끊어 버린다. 선주가 준비한 재벌 비판 기사의 핵심 증거를 상우가 돈 받고 빼돌렸다는 것. 이처럼 사회적 규범을 대변해야 할 초자아의 타락과 자기모순이 드러난 이상, 자아도 원초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래야 잡을 수 없다.
자연히 인터뷰의 주도권은 원초아에 넘어가고, 이 순간부터 인터뷰는 정신과 상담으로 돌변한다. 내원한 환자들의 복수심을 찾아내고 자극해서 살인의 이유를 만들었듯이, 영훈은 선주의 내면을 파고든다. 상우가 그녀에게 저지른 더 엽기적인 잘못을 열거하면서 그녀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파괴적 충동을 자극한다. 결국 선주는 기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영훈과 다른 환자들처럼 복수를 꿈꾸는 원초아의 충동에 충실해진다.
색깔의 심리학
<살인자 리포트>의 전개는 자칫 도식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세 캐릭터가 특정한 개념, 메시지를 대변하는 장치로 활용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짜맞추는 듯한 인상이 남기에 충분하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상황은 영훈에게만 지나치게 유리하다. 10명이 넘게 죽여도 아무런 증거가 없다거나, 대형 호텔의 보안 시스템을 외부인이 혼자 통제할 수 있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살인자 리포트>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해 단점을 가린다. 그 중심에는 호텔 스위트 룸의 조명이 있다. 약속 시간에 맞춰서 방에 들어온 영훈은 가장 TV의 배경화면을 검은색으로 바꾼다. 살인의 동기를 고백한 뒤에도, 상우와 선주를 제압한 뒤에도 그는 TV 배경화면을 바꾼다. 이때 영훈이 선택한 색들은 영화의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각 색의 특징이 선주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인터뷰 시작 전부터 인터뷰 초반까지 스크린을 지배하는 검은색 조명은 선주의 불안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검은색은 모든 색을 섞었을 때의 상태로, 모든 가능성을 포용하는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훈과 줄다리기하면서 누가 인터뷰를 주도하고, 어떤 내용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할지 모르는 선주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인터뷰 도중 선주가 동요하기 시작하자 영훈은 TV 화면을 파란색 배경으로 바꾼다. 파란색은 안정감과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심리적 효과가 있으니까. 이렇게 선주를 안심시킨 뒤 기습적으로 최면을 걸어버리면서 영훈은 인터뷰의 주도권도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그는 분노와 공격성을 뜻하는 빨간색 조명의 방에서 선주와 단둘이 대화를 나눈다. 이는 선주가 원초아의 욕구, 곧 복수심에 충실해진 상태임을 말해준다.
'살인자 리포트'의 결론
선주는 영훈의 손을 빌려 상우에게 복수한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는 선주에게 영훈은 제안한다. 복수를 맡겼던 다른 환자들처럼 자기한테 치료를 받으라고. 그러면 죄책감도 덜고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하지만 선주는 죄책감을 없앨 치료를 거부한다.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고 믿었던 대상은 잃었지만, 새하얀 진료실 속 선주는 어느 때보다 단단해 보인다. 다채로운 색깔의 호텔방에 있을 때와는 달리.
그녀는 영훈에게 반문한다. 그만 멈출 때도 되지 않았냐고. 선주가 떠난 뒤, 영훈은 실제로 손에 피가 묻은 것처럼 떨기 시작한다. 그의 복수심도, 분노도 한계인 것처럼. 그 순간, 그에게는 새 의뢰가 들어온다. 영화는 그의 선택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관객에게 묻는 것 같다. 상우로 대변되는 도덕 윤리와 양심, 사회적 규범의 역할이 사라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영훈에게, 그와 같은 처지의 피해자들에게 최선이냐고.
결국 <살인자 리포트>는 '범죄자의 처벌'이 아니라 '범죄 피해자의 회복'을 다루는 영화이기에 색다르다. 자경단이 없어도, 결과가 100%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범죄자는 처벌받는다. 그러나 판결 후에 피해자들은 알아서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그들의 회복을 책임질 주체는 없다. 피해자들의 불안한 심리를 해부하듯 보여주면서 <살인자 리포트>는 공백을 채운다. 영훈의 복수가 다른 자경단의 폭력과는 다른 결의 설득력이 있는 이유다.
Acceptable 그럭저럭
궤변 같은 논리를 구조와 색채로써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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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지고 또 던져라, <야구소녀>
‘수인(이주영 扮)’은 고교야구선수이자 야구부의 유일한 여자 선수이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재능을 인정받는 선수였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남자 선수들과의 신체적 격차가 벌어지며 경쟁이 어려워졌다. 선수로서 실패를 겪고 고등학교 야구부의 코치가 된 ‘진태(이준혁 扮)’는 수인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코치도, 팀 동료들도, 심지어 엄마도 수인의 꿈을 응원해 주지 않는다.
이 영화는 수인이 자신을 막아서는 악역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성공하는 영화가 아니다. 수인이 무언가를 깨닫고 변화하거나 성장하는 영화도 아니다. 수인은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한다. ‘야구선수’로서 수인이 할 일은 공을 잘 던지는 것이고, 수인은 그것에 전념한다. 손에 피가 나도 수인은 공을 던진다. 그리고 계속해서 공을 던지고자 한다. 그 땀방울과 핏방울의 연속에 수인의 주변이 변화한다.
수인이 계속해서 공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조력자는 야구부 코치 진태이다. 진태는 자신과 수인을 겹쳐 본다. 수인이 과거의 자신처럼 허황된 꿈을 꾼다고 생각하며 수인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러나 수인은 벌칙에 가까운 진태의 훈련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계속해서 공을 던진다. 수인이 공을 던지는 모습이, 계속해서 던지려는 모습이 진태의 마음을 바꾼다. 진태는 야구부 코치로서 야구선수 수인에게 가르침을 준다. 진태가 가르쳐 준 구종은 수인이 공을 계속해서 던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영화는 ‘야구선수’ 외에도 누군가의 딸로 수인을 그려낸다. 수인의 엄마는 현실적,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수인이 야구를 계속하는 것을 반대한다. 수인의 아빠는 수인의 꿈을 응원하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 수인의 엄마는 수인을 억지로 공장에 다니게 하고, 그럼에도 수인이 야구를 포기하지 않자 글러브를 불에 태워 버리기까지 한다. 엄마의 완강한 반대를 꺾은 것 또한 수인이 공을 던지는 모습이다. 처음으로 수인이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본 엄마는 수인에게 사과한다.
이 영화를 ‘여성 영화’나 ‘임파워링 무비’ 등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여성이 프로의 벽을 넘는 데 성공한다는 점에서 그런 표현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영화는 수인이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는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 수인의 구속은 여전히 낮다. 다만 낮은 구속이라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구종인 너클볼을 꾸준히 연습했고, 이 노력이 빛을 발했다. 감독은 수인이 신체적 한계가 아닌 사회적 한계를 넘게 했다. 수인은 ‘유일한’ 여성 고교야구선수였고, 이제는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선수가 되었다.
영화의 뒷맛이 좋지만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만약 수인이라는 개인이 신체적 한계를 넘어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꽂아 넣었다면, 개운한 결말과 멋진 여성 캐릭터를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택한 결말을 보고, 관객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실제로 수인처럼 꿈을 꾸는 여성이 있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그 여성의 꿈과 노력을 똑바로 들여다볼까? 공을 던지러 나온 그 여성을 비웃거나, 장난이라고 취급하거나,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그 여성이 ‘선수’로서 던지는 공을 진지하게 평가하려 할까? 이 영화는 여성들에게 꿈을 꾸고 노력할 것을 말하는 동시에, 사회에 대고 여성들의 꿈과 노력이 만든 결과를 똑바로 바라볼 것을 말한다. 여성들이 던진 공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오는지 눈을 크게 뜨고 직시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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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실화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보시면 압니다.[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헌팅 오브 힐하우스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배급사)의 사용 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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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팬, 웬디의 시각으로 새롭게 재해석되다-영화 웬디
올해가 피터팬 탄생 110주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피터팬을 재해석한 웬디 라는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개봉 전 시사회에 참석하여 영화를 관람하고 왔어요!
원작과 마찬가지로 판타지 장르의 성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조금 다른 영화로 만들어졌는데요.
웬디가 중심 인물이 되어서 피터를 만나면서 한 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어요.
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에요.
나이 듦에 대한 생각과 아이와 노인을 대비시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냅니다.
특히나 아름다운 섬의 풍경과 신비로운 고래의 모습이 눈길을 잡아두는 영화입니다.
단, 일반 판타지 물의 오락적인 성향은 적은 영화에요. 잔잔하고 진중합니다.
그래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조금 심심한 듯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우들은 유명한 배우가 나오지는 않지만 웬디 역을 맡은 데빈 프랑스의 좋은 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봐주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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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랑 그녀의 얼굴을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이 작은 우연이 40대가 된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내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반짝였던 90년대 그 시절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분노》의 모리야마 미라이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