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4-12-26 13:49:10
밀정에게 뺏겨버린 암살의 무게
영화 [하얼빈] 리뷰
이 글은 영화 [하얼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려웠을 것이다.
항일투사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거의 제일 잘 알려져 있다고 해도 무방할 안중근이라 해도. 그에 대해 말하기 위해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을 할애한다는 것은.
액션이나 긴박감을 보여주기엔 그의 행위는 짧고 간결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미 [봉오동 전투]와 [암살]에서 더 많은 장면들을 보았다. 시대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려니 그는 애초부터 심성이 곧은 전형적 인물이었기에 [밀정]에서의 송강호 같은 임팩트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나 고통을 보여주기엔 그가 선사한 역사 속의 클라이맥스는 너무도 강렬했고, [동주]나 [항거]를 통해 무채색으로 경험한 바가 있다.
그러니 남은 것은 항일 투사로서 반드시 느꼈을 인간적인 고뇌와 거사를 앞둔 사람이 맞이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동지들을 실시간으로 잃는 와중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감.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불안함. 그런 일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아야 하는 비장함까지.
영화는 시종일관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장대한 스케일의 자연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위약한 존재로 보여준다. 그는 불안하게 얼어있는 강 위를 지나고 메마른 사막을 말 한 마리에 의존해 건너며 그 안에서 겨우 숨이 붙은 채 목표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목숨을 태워나간다.
문제는 이런 초반부가 마치 영화 [이터널스]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에서 통했던 방식이자 자기가 잘하는 것인 풍경 속에 위치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히어로 영화인 이터널스에서도 같은 테크닉을 썼다는 것에 있다. 말 그대로 필요하지도. 그렇다고 어울리지도 않았던 쓸데없이 아름다운 장면들만 늘어놓아 특정 장르가 가져야 하는 미덕은 줄어든 셈이다.
[서울의 봄] 제작진과 [남산의 부장들]의 감독이라는 이름값에서 기대하는 것들 중 하나가 웅장함, 혹은 비장함이었을 테지만. 초반부가 보여주는 영상은 그저 때깔 좋은 여행기 정도로만 보일 뿐. 안중근 개인으로서의 고뇌를 드러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로 인해 그가 한 인간으로서 느꼈을 유약함이나 외로움은 압도적인 광경에 짓눌려 희미해져 버린다.
게다가 후반부의 포커스마저도 밀정인 상현(조우진)과, 덕순(박정민)에게 양보한다. 반전이라 생각하고 심어놓았을 트릭은 너무도 뻔해, 플래시백으로 표현한 장면들에서 그 어떤 타격감도 없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영화 초반 묘사에서 안중근에 비해 조금은 비중이 떨어져 있는 두 인물들이 영화의 마지막으로 다가갈수록 힘겹게 존재감을 차지한 안중근의 엉덩이를 슬금슬금 자리에서 밀어낸다.
나 역시도 영화를 통틀어 가장 상징적인 장면을 말하라 한다면, 안타깝게도 안중근이 꼬레아 우라를 외치는 장면이 아닌, 상현과 다쓰오(박훈)의 식사(?) 장면을 꼽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쓰오는 상현을 밀정으로 삼기 위해 처음에는 그에게 스테이크의 한 조각을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준다. 아직까지는 사람으로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현이 체면(포크와 나이프)을 버리고 손으로 고깃 조각을 먹은 뒤에, 다쓰오는 손을 이용해 상현에게 나머지 고깃덩어리를 던져준다.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의 심복(개)으로 신분(?)이 격하되었음을 단 몇 초 사이에 보여주기에 충분했으며, 동시에 상현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리는 동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울부짖으며 고깃 조각을 씹어 삼키는 상현의 모습은 그저 사람을 끝까지 믿어보자는 안중근의 설득 보다도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물렸음을 확신하는 표정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다쓰오의 모습도. 분명 사막 탐험대(?)에서 맨 마지막에 말을 몰았던 상현이 다쓰오의 암살 뒤에 가장 먼저 앞장서 말을 모는 모습에서도.
안타깝지만 영화는 밀정에게 암살의 무게감조차 뺏긴 채 쓸쓸히 뒷모습을 보이며 막을 내린다.
[이 글의 TMI]
1. 두 번 다시 크리스마스에 영화관에 가지 않겠다. 사람에 깔려 시골쥐 죽을 뻔.
2. 내 사과 빨리 배송 와라.ㅠㅠ집에 사과 없다ㅠㅠ
3. 업무폰 배터리 충전 안 해놔서 졸지에 전화 안 받는 싸갈스 바갈스 됨.
#munalogi #최신영화 #영화리뷰 #하얼빈 #영화리뷰어 #내일은파란안경 #브런치작가 #네이버인플루언서
Relative contents
-
- 좀 비켜주실 수 있나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내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신작을 내놓았다.
바로 미국 어느 명문대 영문학과의 최초 여성 학과장이 된 '김지윤 박사'(산드라 오)가 겪는 좌충우돌과 고군분투를 그린 <더 체어>
주인공 이름이 '지윤'이라는데 안 볼 수가 있나. 이지윤 아니고 김지윤이라 아쉬울 뿐.
1편에 30분씩 6편이라, 재미있어서인지 진짜 짧아서인지는 몰라도 금방 볼 수 있다. 짧게 끝난 게 아쉬웠던 걸 보니 재미있었던 걸로. <더 체어>는 180분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인종차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세대갈등, 언론과 SNS, 입양가족의 어려움 등 정말 많은 것들을 다룬다. (온갖 PC란 PC는 다 나온다고 보면 됨)
동양인 여성이 학과장을, 그것도 영문학과 학과장이라니. 내 편견 탓인지 몰라도 산드라 오가 영문학을 강의하는 모습은 꽤나 낯설았다. 그러나 그래서 더 멋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훌륭한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윤'은 영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기에 결혼하고 계약직 시간강사가 되기보다는 결혼을 포기하더라도 학교에 계속 남을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딸(주희)을 입양했는데 입양기관에서 매칭해 준 딸은 멕시코인이다. 아이는 세상을 떠난 친엄마처럼 엄마가 떠나버릴까 봐 무섭고, '지윤'은 남편도 없는 자신이 너무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무섭다. 일이 많은 '지윤'을 대신해 외할아버지가 주희를 키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한국과 멕시코의 문화를 보여주는데 둘 다 너무 반가웠다. 민지's birthday party(돌잔치ㅋㅋ)에서는 심지어 고개 돌리고 소주 마시는 장면까지 나온다.문학사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기긴 했지만 40년째 학교를 떠나지 않고 '고인 물'이 된 노교수들도 내가 학교 다닐 때 만난 몇몇 교수님들이 떠올라 흥미로웠다. 40년째 똑같은 강의를 하면서 '뭘 모르는 요즘 것들'이 수강신청을 안 해서 폐강 위기에 처할 정도인데도 기존 방식만을 고집하는 꼰대들을 보며 인생에서 만난 라떼를 외치던 많은 꼰대들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교수는 학문적 연구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가르치는 것도 함께 해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기에 그들은 교수법(가르치는 방법)도 연구해야 하지 않겠나.
세대갈등 문제의 원인 중 하나가 늘어난 수명으로 인해 기존의 윗사람들이 나가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자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구나 싶다. 물론 다들 인문학보다는 코딩에 관심 있는 것도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었음.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선배들은 대리 정도는 정말 큰 하자가 없으면 다들 어렵지 않게 진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리되기도 힘들어졌다. 아직도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체된다. 비단 어느 사기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에 뉴스 보니 국회도 고령화는 마찬가지. 50대 이상이 70%가량인 조직에서 청년을 위한 정책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미친 짓처럼 느껴진다.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졌다. 민감한 이슈들을 다루긴 하지만 웃긴 장면들도 많이 나와 부담 없이 볼 수 있는데, 아래 대사가 인상 깊었다.
지윤이 수강생 5명이라 학교에서 내쫓길 위기에 놓인 엘리엇(고령의 백인 남성, 40년 전 학과장, 종신)에게 인기강사인 야즈(젊은 흑인 여성, 계약직, 종신 아님)는 트위터 팔로어도 8,000명이라 얘기하니 엘리엇 왈"예수는 제자가 12명이었는데 그럼 예수도 루저?"
-
- 어차피 일어날 일 따위는없다
이 영화를 보긴했는데, 리뷰를 쓸까 말까 고민했던 이유는 내가 이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던진 떡밥에 대한 글은 충분히 많으니까, 이 글은 그저 어려운 영화 좀 봤다고 누군가가 주절주절 떠드는 것을 글로 옮겨온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이 영화의 시작은 미국의 특수부대 요원들이 한 남자를 구하는 임무를 맡고, 임무 수행 중 밀고를 한 사람에 의해 임무가 발각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모든 고문들을 견뎌낸 남주는 테넷 작전에 합류하게 되고, 그 때, 인버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닐을 소개받는다. 두 사람은 미래를 보는 기계를 가졌다는 한 남자, 사토르의 행방을 찾고, 그가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멸망하게 하려는 계획을 막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과연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악당 사토르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을까?
영웅과 조력자 포맷
이 영화는 세상을 지켜내는 영웅 남주와 인버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그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닐의 버디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두 캐릭터의 차이점이 있다면, 남주는 임무수행에 있어서 인버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움직여야 하는데, 본인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본인의 행동이 인버전된 상황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까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면 불가능해보여도 정면돌파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에 반해, 닐은 인버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물리학 박사랬나)하기 때문에 현재에 행한 일들이 인버전된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해 현재에 어떤 결론을 도달하게 할지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둘의 관계는 흡사 유비와 제갈공량 혹은 아이언맨과 자비스 정도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스토리 포맷에서 조력자들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통계적으로 확률이 높은 선택을 리더에게 제시하지만 리더는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선택, 위험 가능성이 높은 선택들을 하고, 결론적으로 그 선택들을 성공시켰을 때, 비로소 그 리더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주는 현재에서 가장 불리했던 상황(인버전에 대한 지식 전무, 사토르에 대한 정보 전무, 사토르의 계획과 그를 잡으려고 하는 단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지식 전무)에서 시작했지만 닐과 그 외 수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위험한 선택들을 했음에도 그 선택들을 모두 성공시켜 다가올 미래에 테넷 작전의 주도자가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미래의 남주가 과거의 남주에게 닐을 보내서 테넷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에 그를 잘 인도하도록 명령한 것을 암시하는 대사가 마지막에 나온다.
"내 우정은 여기서 끝이지만 자네의 우정은 이제 시작이야"
이 대사는 닐이 주인공과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주인공에 의해 인버전되어 과거로 온. 인물이 아닐까 예상해 볼 수 있는 대사였다. 닐은 미래에서 과거로 온 사람이기 때문에 마지막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주인공이 사토르 일당과 최후의 싸움을 하던 그 상황에 주인공의 눈을 사로잡은 가방고리는 그 상황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닐의 가방 고리임이 밝혀지며, 닐이 작전 도중 인버전해서 주인공을 도왔고, 끝까지 주인공을 무지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유도해서 최종적인 작전 성공의 키를 쥐고 있던 캐릭터였음을 증명해냈다.
"무지가 우리의 무기야."라고 믿었던 그의 대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스터리한 닐의 대사 중에
"또다른 과거를 구하러 가야지."는 닐에게 있어서 이 여정의 끝이 주인공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닐과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인도에서의 첫 만남 씬이 되겠구나 예상해볼 수 있게 한다.
테넷과 비슷하지만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포맷의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일본 영화 중에서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장르가 로맨스인만큼 테넷과는 연관없는 영화같아 보이지만 이 영화의 여주인공도 테넷의 관점에서 보면, 인버전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 주인공이 과거에서 미래로 향해 가는 사람일 때, 여주인공은 미래에서 과거로 향해가는 시점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를 가지고도 이렇게 다른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비교하자면, 테넷에서 닐의 역할이 일본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같고, 일본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테넷 속 주인공과 같은 시간 차원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일본 영화에서는 이런 시간 차원의 뒤바뀜이 애절한 사랑의 기폭제가 되지만 테넷에서는 악당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일본 영화에서 인물들의 시간 차원이 뒤바뀌는 설정은 일반적인 러브 스토리 포맷에 시간 차원만 비틀었는데도 주인공들 사이의 사랑의 애절함의 크기가 커지는 효과를 보여주고, 테넷의 경우는 일반적인 어벤져스 영화같이 영웅이 악당이 해치우는 스토리 포맷에 시간 차원이 자유자재로 뒤바뀌게 만드는 설정은 영화의 결말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 것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버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인물들도 각기 다른 차원에 시간에 살고 있고, 그 시간 차원을 필요에 따라 바꾸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뇌피셜)
이미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 뿐이야.
영화 속 주인공은 인버전하는 능력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캣을 이용해 미래를 바꾸려고 하는 사토르의 계략에 당한다. 그 결과, 캣은 중상을 입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그러면서 닐과 했던 대화 중에서 닐은 "이미 일어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라며,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주인공은 이미 일어날 일도 과거를 어떻게 바꾸냐에 따라서 충분히 바뀔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닐의 주장은 시간을 뒤바꿔서 과거-미래 순이 아니라 미래-과거 순으로 시간이 바뀌어서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똑같은 결말이었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반면, 주인공은 인버전되어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미래도 바뀔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 중에서 주인공의 말이 이긴 것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이 영화는 결국 테넷 작전을 주도한 최종보스는 주인공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미래도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끊임없이 그에게 반론을 제시하며, 그의 행동을 제어하려고 한 닐의 행동이 있었지만 아마 닐은 그에게 위험하다고 말려도 자신의 뜻대로 강행했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그렇게 해야 테넷 작전이 성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 테니, 어차피 발생할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발버둥쳐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결국 주인공의 미래를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더 다지고, 그게 과거를 바꾸는 것에 박차를 가하도록 묘하게 자극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주인공이 테넷 작전의 주도자였다면, 닐은 이 테넷 작전이 무사히 마칠 수 있게 중도를 지키며, 성공을 향해 항로를 조종하는 항해사, 설계자 같은 존재라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결국 이 영화가 어려운 과학적 개념들까지 동원해 가며 말하고자 했던 바는 아마도 발생할 일은 발생할 거다라는 운명론 같은 건 믿지 말고, 당신이 지금 현재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따라 미래는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운명의 개척자가 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인버전할 수는 없지만 미래에 뭐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를 충실히 살아놔야 한다는 미션을 안고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가진 정답이 아닐까. 그러니 모두들 하루하루 너무 우울하지도 않고, 적당히 행복하게, 그리고 하루를 알차게 보내시라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늘이 쌓여 마일리지가 되면 그 마일리지들이 쌓여 다른 내일을 만들 거라고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으니, 혹시라도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면 고치려는 노력을 한다든지 새로이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배워보는 것도 내일을 변화시키는 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 나의 섬뜩한 감시자, <그린 나이트>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린 나이트 The Green Knight, 2021
미국 외, 판타지 외, 130분
감독: 데이빗 로워리
나의 섬뜩한 감시자, <그린 나이트>
우린 가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두 물음 사이에서 방황한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다니는 친구이지만, 현실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목적을 잃고 떠도는 방랑자였으면 하니까. 누군가에겐 길고 누군가에겐 짧은 어둠을 뚫고 나오면, 두 물음표가 사실은 하나의 느낌표였음을 깨닫는다. 이내 스스로 다시 묻게 된다. "난 이 세상을 살다 갈 나만의 주체적인 방식과 길을 갖고 있는가!" <그린 나이트>는 이 무시무시한 질문을 위해 탄생한, 매력적인 동시에 무서운 걸작이다.
주인공 가웨인은 뭐 하나 자의로 결정한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서왕의 조카로서, 왕의 자리에 오를 기회가 있는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명예와 무용담도 없다. 그는 수많은 전쟁 속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제집 드나들듯 했던 기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어린애'다. 그렇다고 가웨인이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가? 아니다. 현재로서 그에겐 애인 에셀의 따뜻한 품과 술만 있으면 된다. 물론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잘 알고 있는 눈치 빠른 자다. 하여 최대한 모른 척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말 그대로 '어떠한 준비도 하고 싶지 않은' 어린 가웨인으로 살고자 한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자신의 이야기를 묻는 아서왕에게 말씀드릴 이야기가 없다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 가웨인.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도 없는 왕의 핏줄, 아니 한 인간. 그건 곧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영화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무용담이 없는 왕의 핏줄'이란 결핍을 덥석 받아들이는 순간을 포착한다. 반드시 걸릴 수밖에 없는 덫을 놓고, 그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길 끈질기게 기다린 결과다.
가웨인의 손에 들린, 피 묻은 아서왕의 엑스칼리버. 그 검에 참수당한 그린 나이트는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1년이다."란 말을 남긴 후 유유히 떠난다. 어린 가웨인은 다들 가진 전설적인 무용담을 얻기 위해 그린 나이트의 게임 조건을 승낙했었다. 그러나 게임의 승자가 됐음에도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원탁의 기사들이 보내는 박수와 함성을 들으며 자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버렸단 직감만 가질 뿐이다. 어떻게 살 거란 결정을 미루고 또 미뤄왔던 그는, 단 한 번의 감정적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1년 동안 가웨인의 일격은 노래가 되고, 시가 되어 나라 전체로 퍼져나갔다.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더는 어린애로 살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 가웨인은 자신의 즉흥적이고 가벼웠던 행동이 불러올 비극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웨인의 다리를 움켜쥔 덫은,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뒤흔드는 초자연적인 힘과 같다. 그건 우리가 선택한 길인 걸 알면서도, 때론 신의 횡포라 믿고 싶게 만드는 '운명'이다. 죽음이란, 이미 정해진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따라 삶의 가치와 의미는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의 가웨인은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의 운명은 녹색 기사, 일명 '그린 나이트'와의 독대 말곤 없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1년은 짧았지만 빛을 집어삼키며 어둠을 낳는 이끼가 가여운 가웨인의 마음을 잠식하기엔 충분했다.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왕은 그에게 그린 나이트를 찾아갈 것을 권한다. 그는 가웨인이 위업을 달성할 것을 원했고, 그 목표를 위해선 반드시 목숨을 건 모험이 전제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가웨인은 1년이란 시간 동안 내면 깊숙이 깔린 이끼가 뿜어내는 두려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이겨내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까 봐 초조하기만 한, 여전히 자기 삶에 대책 없는 인간이었다.
어머니가 주술을 걸어 만든 녹색 허리띠와 연인 에셀이 준 사랑의 증표(방울), 그린 나이트가 남긴 도끼를 갖고 긴 여정에 오른 가웨인. 크리스마스 날에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이 1년 전 그린 나이트의 목을 벤 것처럼 똑같이 목을 내어주면 되는 게임. 단순한 게임일 뿐이지만, 그의 소극적인 삶의 태도를 바꿀 절호의 기회다. 가웨인은 다섯 가지의 시련(기사의 덕목)을 맞닥뜨린다. 잘 와닿지 않는다면 왕, 기사, 왕위, 명예 등 영화가 제시한 (인간의 가치를 명예로 내세운) 특수한 시대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자. 가웨인이 겪는 고통이 우리가 매일 밤잠을 설친 이유와 같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삶은 고난과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과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린 인간답게 살 수 없다.
그 말은 인간답게 죽을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이 이를 깊이 깨우치길 바란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사기꾼 소년에게 베푼 작은 친절을, 배신으로 돌려받은 가웨인은 처음으로 극한의 순간을 경험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빼앗기고 온몸이 묶인 그를 중심으로, 카메라가 360도로 회전하자 해골로 싸늘한 시체가 돼버린 가웨인이 등장한다. 이후 카메라는 다시 반대로 회전해 사력을 다해 떨어진 칼로 기어가는 가웨인을 보여준다. 생을 향한 포기와 집착. 이 상반된 두 장면은 교차로 인해 더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힘겹게 죽음의 끝에서 벗어난 그를 보며, 우린 언제든 내 삶을 끝낼 수 있는 건 '내 인생의 주인인 나, 자신'밖에 없음을 다시금 유념할 수 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도 자기 자신뿐이다.
가웨인은 마침내 가장 나약한 상태로 고난의 길을 걷는다. 성 위니프레드의 시험을 통과해 도끼를 되찾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우와 동행한다. 미지의 존재(거인)와의 만남에선 여우의 도움으로 자신의 길을 잃지 않는다. 쉼터를 제공해 자신의 발을 묶은 버틸락성 성주에겐 잡혔던 여우를 돌려받고, 성주의 아내에겐 어머니의 허리띠를 받는다. 얼핏 보면, 그가 다섯 가지의 관문을 잘 통과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그는 다섯 관문을 통과하면서 지나치게 감정적이었고 중심이 흔들렸으며, 원초적인 본능에 무릎을 꿇기도 했고,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크리스마스 당일까지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지만 반드시 아서왕의 기사가 되어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였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성 위니프레드의 머리를 찾아준 건, 이후 똑같은 신세가 될 자기를 향한 연민과 동정의 읍소였다. 성주와 한 '획득물 교환 게임'에선 호의를 받았음에도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에셀의 얼굴을 한, 성주 아내의 유혹에 넘어갔다. 결전의 날 아침엔 그녀에게서 녹색 허리띠에 걸린 마법(허리띠를 하고 있으면 어떠한 외상도 입지 않는) 얘기를 듣고, 유일하게 꿋꿋이 지켜왔던 사랑의 지조마저 굽혔다. 그린 나이트의 도끼에 잘릴 자신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성주 아내의 비난에 정신이 번쩍 든 가웨인.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여우의 마지막 유혹을 뿌리치고 녹색 예배당에 들어선다. 왜? 여기까지 와서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는 이미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다. 아서왕 앞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무릎을 꿇고, 이끼로 더럽혀진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없었다. 말하는 여우는 신의 뜻이 아니라 가웨인이 은연중에 남겨둔 그의 여지, 도망갈 구멍이었다.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을 1년 동안 기다린 그린 나이트를 보며 가웨인은 비로소 삶의 끝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운명의 시간, 그린 나이트는 무릎을 꿇은 가웨인에게 말한다. "자네가 했던 것처럼 한 번 내리치지." 그러나 여전히 죽음이란 공포에 휩싸인 가웨인은 정말 이게 끝이냐고 절규하며 되묻지만, "그럼 뭐가 또 있나?"란 차갑고 날 선 대답만 듣는다. 그래, 죽으면 끝이다. 무엇이 더 생의 공간에 남아있을까, 역사? 명예? 솔직해지자, 그런 건 모두 남은 자, 산 자들을 위한 위로와 희망의 노래이며 그들의 몫이다.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안돼, 죄송합니다!!"
왕의 후계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맥 빠지는 말 한마디만 녹색 예배당에 남긴 채 가웨인은 도망친다. 이후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돌아와 모든 이의 보살핌을 받아 건강을 회복한다. 왕에게 기사 칭호를 받고, 죽은 왕을 대신해 새로운 왕위에 오른다. 사랑했던 연인 에셀에겐 돈 몇 푼으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들을 빼앗고 그녈 버린다.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그는 신분이 확실히 보장된 왕비를 얻고,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택한다. 수없이 이웃 나라와 전쟁을 하고, 전쟁에서 아들을 잃는다. 마지막 왕국마저 적에게 함락되고, 그는 홀로 남아 그동안 자신을 지켜왔던 녹색 허리띠를 제거한다. 그린 나이트에게 도망친 이후로 일어난 비극은 전부 선택의 결과이자 책임이란 걸 가웨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은 주인 잃은 괴물의 폭주로 망가졌고,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어른 가웨인'의 이야기는 실패했다. 쿵! 마침내 가웨인의 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진다. 그 움직임이 너무도 간결해 슬픔과 연민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대신 초점을 잃은 그의 동공이 읊조린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다시 녹색 예배당.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 앞에서 눈을 번쩍 뜬다. 도망친 자의 말로를 보고 온 그는, 망설임 없이 녹색 허리띠를 제거한다. 달라진 그의 얼굴. 가웨인은 당당히 그린 나이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한다. "이제 준비됐다!" <그린 나이트>의 첫 장면과 대비되는 순간이다. 스스로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실토하는 가웨인이 변화한 것이다. 그린 나이트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짓는다. 잘했다 격려까지 한다. 그러나 그린 나이트의 손에 여전히 들린 도끼. "이제 네 머릴 가르마." 가웨인은 자신의 결함을 정면으로 마주했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겐 어리석었던 그가 선택한 결과가 남아있었다. 그린 나이트와의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거다. 게임을 끝낼 방법은 성공 아닌 실패, 단 두 가지 옵션뿐이다. 정도란 없는, 상승과 하강으로 우리 인생의 굴곡을 책임지는 희극과 비극처럼.
출처: 영화 <그린 나이트> 스틸컷, 다음
<그린 나이트>는 처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을 찾는 데 성공한 가웨인의 목에 다시금 도끼를 들이밀며 막을 내린다. 가웨인은 이제 막 한 걸음을 뗐으며, 그의 이야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 바로 그의 두려움인 그린 나이트에게서 발휘됐다. 녹색 기사는 가웨인이 스스로 극한의 공포심에 휩싸인 채 만들어낸 존재였다. 지금까지 가웨인은 내면의 자아와 싸운 셈이다. 이후로도 그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기에 또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린 나이트 역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기 주인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직하게 기다리겠지. 그게 제대로 사는 방식이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왕좌에 앉은 그의 머리를 불태우며 강력하게 말했다. "이 영화는 왕의 이야기도, 왕을 노래한 이야기도 아니다."라고. 그렇다, <그린 나이트>는 왕이 아닌 죽음 앞에 놓인 인간, '가웨인'의 여정을 지켜본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떻게 자기 삶을 살고 있는지,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지, 계획되지 않은 일과 새로운 일에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는지, 선택의 순간마다 그린 나이트를 만났는지, 이후 어떻게 죽음의 선로에서 빠져나와 다시 살아남고 있는지.
인간은 죽음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자신만의 목적과 가치를 세우고 이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얼마든지 잔인한 게임을 피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나의 진정한 삶이 되고, 나의 유일한 죽음을 안내할 표지판이 된다. <그린 나이트>는 이를 확실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마지막 한 장면까지 모든 힘을 짜내 완성했고, 목적을 달성했다.
혹여라도 철학적이고 난해한 이야기에 파묻힐까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이야기를 쏙 빼놓고 봐도 눈과 귀를 황홀하게 하는 포인트를 무수히 갖고 있다.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영상미와 장엄한 기운을 내뿜는 음악에만 집중해도 좋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웨인의 여정에 동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그의 무용담 곳곳에 뿌려놓은 <그린 나이트>만의 향기가 너무나 매혹적이라 일부로 지나치기도 어려울 거다.)
가웨인의 새로운 선택을 앞둔 채 극장에서 돌아선 순간, 섬뜩함에 사로잡히더라도 당황하지 말자.
자기 내면의 감시자, 그린 나이트와의 만남이 번뜩! 떠오른 것뿐이니까.
-
- 호러 '지알로' 장르 3대 거장 영화
이탈리아어로 노란색을 뜻하는 ‘지알로’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스릴러와 미스테리물 같은 장르 소설을
부르는 은어였는데, 당시 출판한 장르 소설들의 표지가 주로 노란색 계통의 색이 많아서였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지알로는 여타 호러영화와 차별점을 두고 있는데요 잔혹함과 예술성이 짙은, B급 스토리, 엉성한 더빙의 이탈리아 호러영화가 지알로 무비를 뜻합니다.
지알로 영화는 전반적으로 개연성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영상미와, 음악, 고어연출기법이 빼어나
상당한 골수팬들을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팀 버튼 감독은 지알로 장르를 탄생시킨 ‘마리오 바바’감독을 가장 진실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했고,
박찬욱 감독 또한 본인의 저서에 ‘마리오 바바’ 감독의 <블랙 선데이>를 걸작이라 극찬,
쿠엔틴 타란티노는 ‘루시오 풀치’의 오랜 팬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영화사를 통해 <비욘드>를
재개봉시키기도 했습니다.
한국 호러 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알로 장르’ 3대 거장 ‘마리오 바바’ ‘루시오 폴치’ ‘
다리오 아르젠토’의 대표작들을 가져왔습니다. 이번 여름은 지알로 무비 어떠세요?
마리오 바바 Mario Bava
<사탄의 가면> La maschera del demonio
19세기에 한 젊은 의사가 유령이 출몰하는 몰다브의 한 마을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카티야 바이다라는 여상속인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녀는 마녀로 처형당했던 조상 아사 바이다의 혼령에 사로잡혀 있다.
<킬... 베이비 킬!> Operazione paura
경찰에 자신의 살인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어떤 여자가 죽자,
검시의인 에스웨이 박사와 크루거 경위가 마을에 파견된다. 에스웨이 박사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연속살인의 범인이 20여년전에 죽은 그랍스 남작부인의 딸 멜리사의 유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을에 돌아온 의대생 모니카가 다음 표적이 되자, 그는 동네 마녀 루트와 함께
그랍스 부인의 저택으로 뛰어드는데..
<피와 검은 레이스> Blood And Black Lace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살인마가 패션 모델들을 죽이고 다닌다.
루시오 풀치 Lucio Fulci
<좀비 2> Zombi 2
표류되어 뉴욕 앞 바다까지 들어온 보트에서 좀비가 발견되자 이를 조사하러 행방된 아버지를 찾는 딸과 신문 기자가 함께 섬으로 떠난다. 그곳에는 섬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 좀비가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을 먹으려 달려들고, 먹힌 사람들은 곧 좀비가 되어버린다. 이 기이한 일들은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 그저 부두교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하는데, 이미 온 세상은 좀비로 가득차게 된다.
<시티 오브 더 리빙 데드> Paura Nella Citta Dei Morti Vivent
뉴욕의 한 아파트.메리는 영매술사들과의 모임에서 의식을 잃는다.의식을 잃는 중에 죽음을 체험하게 되는 메리. 그 죽음 속에서 던위치라는 저주 받은 도시에서 모든 성인의 날 자정, 지옥문이 열려 목을 메고 죽은 신부가 악령으로 되살아 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무덤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메리는 기자인 피터와 함께 신부가 자살한 던위치 마을을 찾는다. 그러나 이미 악마로 부활한 신부가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데…
<비욘드> ...E tu vivrai nel terrore! L'aldilà
1927년 루이지아나. 어느 마을의 외딴 호텔에 투숙한 사람들이 차례차례 실종된 사건이 있은 후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호텔에 투숙한 화가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사지를 못박아 벽에 발라버린다. 그에 따르면, 4000년 동안 대를 거쳐 물려진 에이번이라는 책을 통해 이 호텔이 7개의 지옥으로 통하는 문 위에 세워졌다는 것. 그후 세월이 흐른 1981년. 폐쇄된 이 호텔의 상속자인 라이자가 그곳에 호텔을 다시 짓는데, 공사장 인부들의 의문의 죽음이 잇달아 일어난다. 이 호텔이 저주받은 지옥의 땅 위에 지어진 것이ㅊ라는것을 알게 된 라이자에게도 죽음의 악령이 다가오는데.
다리오 아르젠토 Dario Argento
<수정 깃털의 새> The Bird with the Crystal Plumage
로마에 사는 미국인 작가 샘은 우연히 비옷을 입고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남자가 화랑 주인 의 아내를 살해하려는 광경을 목격하지만 결국 그녀를 돕지 못한다. 다행히도 이 여자는 살아남아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의 희생자들 가운데 최초의 생존자가 된다. 사건 해결에 진전이 없자, 샘은 혼자 힘으로 용의자에 관해 조사하며 범인을 잡아보려 하는데...
<서스페리아> Suspiria
독일의 유명한 발레 학교로 유학 온 미국인 소녀 수지는 도착 첫날 밤, 겁에 질려 학교에서 도망쳐나오는 학생을 목격하고, 이튿날 아침 도망치던 학생과 다른 여학생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수지는 발레 학교에 적응하려고 애쓰지만 이상한 선생과 학생들, 밤에 기숙사에 울려퍼지는 기이한 소리들 때문에 힘들다. 그 지방 전설로 내려오는 마녀 이야기와 살인 사건이 관련있으리라 추측하던 수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흑마술의 표적이 되는데…
<딥 레드> deep red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낼 줄 아는 한 영매가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살인자의 생각을 읽어낸다. 그러나 영매는 곧 살해되고 만다. 영국인 재즈 피아니스트 마크 데일리(데이빗 헤밍스)는 그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신문기자 자나 브레지(다리아 니콜로디)와 함께 사건의 비밀을 캐기 시작한다. 새로운 살인자들로부터 사건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얻어나가는 동안에도 사건의 열쇠를 쥔 사람들이 한 명씩 살해당한다. 살인자가 그 실마리에 따라 새로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마커스는 살인자가 자기 주위에 있음을 느끼고 주변을 조사해 나가는데...
-
- 유치한데... 재밌어... 당신의 길티플레져 영화는?
❣️Cinelab Curation❣️
여러분의 길티플레져 영화는 무엇인가요?
유치하지만.. 심장이 울리는 그런 영화요!
절대 안 볼 것 같았지만, 나도 모르게 이끌려 어느새 엔딩크레딧을 보게 되었던 영화들이 있지 않나요?
제게는 어릴 때 봤던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그랬는데요!
너무 유치해서 입을 틀어막고 보다가,
나중에 시리즈 마지막 편을 보고 나오는 길에는 너무 섭섭했던 거 있죠?😅
오늘은 이런 유치하고도 사랑스러운 영화들을 모아보았는데요🤍
여러분의 길티플레져 영화도 추천해 주세요!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
-
- 애나의 선택
<메모리(Memory)>(2023, 미셸 프랑코)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새 사랑을 찾은 주인공의 십대 자녀는 ‘방해’ 요소로 그려지기 쉽다. 반대로 부모의 연인이 십대 주인공이 겪는 갈등의 주 원인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허나 <메모리>의 애나는 엄마 실비아의 연애를 응원한다. 엄마의 연인 사울에게 제 방을 내어주고,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자 이모 집에 묵겠다고 하며, 나중엔 사울을 몰래 엄마에게 데려다 주기까지 한다. 줄거리만 기계적으로 나열한다면 마치 해피엔딩을 위해 작가가 그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맥락에서 관람하면 ‘그럴 만 하다’고 받아들일 확률이 높고, 더 나아가 애나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그 까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메모리>가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을 살필 필요가 있다.
오프닝 씬은 대조 메테리알에 가깝게 다가온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찍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 같기도 하다. 실비아의 금주 13주년을 축하하며 경험이나 심경을 털어놓는 AA(Alcoholics Anonymous) 미팅 맴버들의 옆얼굴과 함께 그들의 감정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배경은 이 다음에야 등장한다. 이후 <메모리>의 장면들은 대개 공간을 먼저 파악하고 발화자 클로즈업을 자제한다. 실내라면 고정된 롱테이크로 촬영하는 일도 잦다. 미셸 프랑코의 전작들에서도 자주 관찰되며, 때로는 감독 “자신도 놀라게 만드는” 관계 역학을 포착하는 방법이다. 이를 테면 <크로닉>(2015) 속 환자를 돌보는 데이비드를 비효율적으로 오래 촬영하는 씬들은 일상적인 노동과 더불어 방안에 쌓이는 유대를 담아낸다. 긴 숏이 이어지는 동안 화면에 드나드는 환자의 가족은 손님처럼 보인다. 와중 화면 구석이나 바깥에 몸을 숨기는 데이비드의 행동에서 그가 환자와 맺는 실질적 관계와 형식적 관계 사이 괴리가 나타난다. <메모리>는 비혈연 관계의 친밀함을 인식하는 <크로닉>보다 본격적으로 ‘선택 가족family’을 탐구하며, 공간을 기준으로 구성된 롱테이크에 가족relative 내 위화감을 담는다. 실비아의 동생 올리비아의 집이 대표적인 장소다. 올리비아의 가족과 애나가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 화목한 거실을 예로 들어 보자. 실비아가 들어오면 그와 다툰 상태의 애나는 짐짓 모른척한다. 엄마가 선물을 건네자 활짝 웃지만, 순간 올리비아의 남편 로버트의 낯에 한숨이 지나간다. 그는 아내가 실비아에게 종종 돈을 빌려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애나의 어린 사촌들은 별안간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침묵과 응시 또한 장면의 구성 요소다. 카메라는 발화자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정된 채 모든 인물을 균일하게 촬영한다. 감독의 말을 변형해 빌려오면 “관객이 감각하고 생각할 공간을 남기는” 연출, 각 인물을 이해하는 가운데 그럼에도 어긋나는 것들을 담는다.
영화가 남겨둔 공간에서 중요하게 감각되는 것은 ‘방을 읽는read the room’ 애나다. 영화 후반 올리비아의 집에 방문한 실비아는 엄마 사만다와 사고처럼 마주친다. 그가 아빠의 성폭력과 엄마의 적극적인 방관을 폭로하는 와중 거기 있는 모두를 가만히 바라보며, 카메라는 애나와 함께 방을 읽는다. 실비아가 과거 가정과 학교에서 견뎌 온 공기를 가늠하고,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아동 성폭력을 사만다가 모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한참 만에 전환된 숏에는 줄곧 카메라에 등을 보이고 있던 사만다의 정면이 포착된다. 그가 가장 보이고 싶지 않아할 얼굴이다. 죄책감,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2차 가해를 무방비하게 드러내며, 영화는 인물의 악마화를 지양하는 동시에 ‘관계 회복’은 늦었음을 설득한다.
애나는 거실 구석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다. 그는 할머니의 입장을 엄마의 폭로보다 먼저 접했다. 사만다가 자신이 하는 (‘휠체어 기증자를 찾는’) 일을 애나에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보여주고자 하는’ 영상 자료는 클로즈업되고, 이어 사만다는 실비아에 대한 선입견과 자기변호를 말한다. 애나와 사만다가 대화하는 장면들에서 영화는 스크린에 둘만 남겨놓거나, 여럿과 함께 있더라도 오로지 둘에게만 선명한 포커스를 둔다. 손녀가 제 말만을 듣기를 원하는 사만다의 심리, 위선을 은유하는 연출일 수 있다. 애나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물로, 상대방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보다는 ‘자연히 드러난 것’에 주목한다. 엄마의 트라우마를 알게 된 후 ‘집에 들일 가족’을 결정하는 이는 애나다. 실비아가 올리비아의 집을 뛰쳐나가며 뒤틀린 혈연에서 한 차례 벗어난다면, 애나는 집 현관에서 올리비아를 막음으로써 그 관계가 자신과 엄마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한다.
다음으로 애나가 하는 선택은 친동생과 조카에 의해 자택에 감금된 ‘친구’ 사울을 구출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 실비아가 우울해하며 침대에 파묻혀 있을 때 애나가 음식을 가져다주는 씬이 있었다. 그 구도는 사만다와 대립하고 귀가한 실비아를 애나가 꼭 끌어안고 있을 때 사울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씬의 것과 유사하다. 이 찰나에 애나는 어쩌면 ‘다른 가족’의 그림을 보았을 수도 있다. 하나 더, 애나는 엄마의 통제가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사울과 실비아가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다면, 타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대가로 애나는 약간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해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실비아와 애나의 상호 보호 관계는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실비아는 타인을 들이기를 주저하며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곤 했다. 엔딩에서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문을 활짝 열어두고 청소기를 돌린다. 애나와 사울이 도착한다. 실비아는 빽빽한 소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애나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뒤돌아 깜짝 놀란다. 재회를 예상치 못했던 실비아와 여기까지 이른 과정을 잊은 사울은 포옹하고, 애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실비아의 시끄러운 기억에 애나와 사울은 틈을 만든다. 애나는 결정적인 순간 두 사람을 잇는다. 포스터에는 둘만이 있지만 주제에 가까운 스틸을 고른다면 이쯤이다. 최선이나 이상이 아닌 하나의 안, 해피엔딩보단 열린 결말이다. 여기서 영화가 ‘작은 곤란’의 찰나들을 놓치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사울은 실비아의 집 앞에서 쓰러졌고, 실비아는 사울과 처음 사랑을 나눌 때 응하면서도 불편해했다. 애나는 옷 입기를 잊은 사울을 목격하고 놀랐고, 사울은 한밤중 화장실에 다녀오며 어느 방문을 열어야 할지 몰라 주저앉았다. 위험과 불편의 가능성을 인지하는 채로, <메모리>는 현재 이들이 찾은 집home은 세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미셸 프랑코는 꾸준히 ‘정상 가족’의 분열에 관한 인상을 표현해 온 감독이다. 이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 선택의 사례를 제안한다. 피가 항상 물보다 진한 것은 아니며, 너무 진한 피는 때로 독이 된다. 이 잔잔한 치유의 멜로드라마에는 택하지 않은 가족의 끈을 끊어내는 칼이 숨어 있다. 가장 마지막에 그 자루를 쥐는 이는 다름아닌 애나다.
* 참고 인터뷰
https://filmhounds.co.uk/2024/02/i-never-over-direct-them-director-michel-franco-talks-memory/
-
- 드림 시나리오 - 니콜라스 케이지의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투영한 영화
-
소심하고, 한심하고, 평범 그 자체여서 언제 어디서나 존재감 없는 ‘폴’로 인해 온 세상이 떠들썩해진다! 왜? 그가 지구상 모두의 꿈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실존 인물 맞나요? 왜 당신 꿈을 꾸죠? 도대체 누구세요?” SNS 메시지 폭주, 인터뷰 출연, 광고 모델 요청은 물론, 심지어 꿈속 만남이 현실로 이어지는 기막힌 일까지! 꿈속 남자에서 모두가 꿈꾸는 남자로 거듭난 ‘폴’! 하지만 갑자기 그가 등장하는 모든 꿈들이 악몽이 되는데…
-
- 스파이더맨 톰 홀랜드의 마블 스포일러 모음집!
-
"본 영상은 산돌구름에서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
2020. 04. 09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무비필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oviephileof...
무비필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marvelersst...
-
- 영화 <턴: 더 스트릿>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춤에 미친 청춘들의 무대가 펼쳐진다!
-
- 영화 <이상존재> 메인 예고편
인기 개그맨 유세윤은 14살의 어느 날 이상한 동작을 반복하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는 등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행동은 점점 사라졌지만 그 당시의 세윤을 목격한 가족들과 그의 지인들에겐 여전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세윤에게 또다시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오고… ‘그것’은 점점 더 그를 괴롭히기 시작하는데… 인기 개그맨 유세윤을 둘러싼 15일간의 기록! ‘그것’의 충격적 정체가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