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tto2025-01-07 13:30:12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영화 <은빛 살구> 리뷰
바닥은 포셀린 타일로, 발코니 문은 폴딩 도어, 소파 옆에는 작은 아일린 그레이 테이블을 놓아야지. 방 한 개는 무조건 암막 커튼이 있는 서재로, 빔 프로젝터, 식기세척기, 건조기, 커피머신은 필수.
내게 마법처럼 수도권 신축 아파트 한 채가 생긴다면 이런 즐거운 고민에 빠지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비정규직 자리를 간신히 지키고 있고, 신혼부부가 되어야 겨우 주택청약에 당첨되는 데다, 계약금은 차치하고서라도 앞으로 내야 할 중도금이 산더미이다. 우리의 주인공 '정서'는 뒷바라지까지 해줬건만, 그는 꼭 절반씩 돈을 내길 원하고, 타일이 깔릴 아파트 한 칸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녀는 계약금 절반을 구해 와야 한다.
계약금을 구하기 위해서 그녀는 오래 만나지 않았던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생겼을 일들, 야근을 하는 척 하며 뱀파이어 이야기를 그려내기도 전에 포기해버렸을 예술과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본다. 그러는 동안 관객은 청약으로 당첨된 아파트 같은 건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서울로 돌아갈 때쯤엔 이 돈이, 아파트 한 채가, 그리고 결혼이 이렇게까지 해서 달성해야 하는 건지를 질문하게 된다. 그에 화답하듯이 영화의 결말은 결혼 상대였던 사람이 도덕적인 결함을 드러낼 때 정서를 폭발시키고, 진짜 굶주림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주인공이 거리를 지나다 운명처럼 스친 남자의 목덜미를 물어 갈증을 해소하는 낭만을 그려내기 위해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이전의' 낭만, 그러니까 달콤한 주택청약의 꿈으로 이루어진 가짜 낭만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아파트, 결혼식, 흰 돈봉투와 미래의 반려견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녀가 갈망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고, 우리가 쫓아야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겨우겨우 재현해 보려고 했던 평범함이 아니라 정서가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써낸 이야기처럼, 우리를 진정으로 배고프게 하는 것들.
그것을 얻어내는 순간이 엔딩을 장식하기 때문에 <은빛살구>는 끝내 주인공의 미래를 기대하도록 만든다.
*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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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2018) 비평
<앙: 단팥 인생 이야기>와 일련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출연하며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배우 기키 키린이 2018년 9월 15일 향년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30대부터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할머니 역할을 도맡아왔던 그녀는 유작 <어느 가족>에서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그녀는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실제 배우의 육체와 겹쳐 묘한 감상을 길어 올린다. 그러나 죽음을 암시하는 배우의 신체와는 별개로 시바타 하츠에의 죽음은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을 차근히 밟아온 나에겐 다소 의문스러운 죽음이다. 이전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사망한 가족의 자장을 좇거나, 결말부에 가족 구성원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담아왔다. <어느 가족>의 하츠에처럼 서사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은 그의 영화 목록에서는 이례적이다. 특히 그 대상이 그간 그의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온 어머니라는 점에서 더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하츠에는 왜 영화 중간에 죽어야 했으며, 왜 하필 그녀가 죽어야 했는지 영화 전반을 둘러보며 그녀의 사인을 밝혀보자.
히로카즈 감독은 국내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어로 ‘만비키’(万引き)라는 ‘shoplifters’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동시에 ‘그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있다.”(<씨네21>, 2018.5.30.)라고 밝혔다. 후자의 의미를 따르면, 원제 <万引き家族>은 ‘훔쳐진 가족’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훔쳐진 가족인가. 시바타 가족은 혈연이 아닌 사회 혹은 실제 가족에게서 버려진 구성원들로 이뤄진 유사 가족이다. 유리(사사키 미유)와 쇼타(죠 카이리)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를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진 않지만, 가족 외부의 사람은 쇼타와 함께 거리를 지나가는 노부요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의 형상을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형태만 충족한 이 가족은 사회 시스템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해진다. 사회는 영화 종반부에 그들을 프레임 속 각자 다른 자리에 불러 세우고 유사 가족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시바타 가족을 해체한다. 즉, 사회는 혈연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유사 가족을 훔쳐낸다. 그런데 그 역도 성립한다. 시바타 가족은 동기의 무고함을 차치하고 보면 진짜 가족에게서 구성원들을 훔쳐 온 가짜 가족이다. 오사무는 차에 방치된 쇼타를 주워오고, 노부요는 유리에게 폭력을 가하던 진짜 가족에게서 아이를 법적 절차 없이 입양한다. 하츠에 역시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전 남편의 손녀인 것을 알면서도 아키의 가족에게 묵인하고, 시바타 부부도 오사무가 노부요에게 폭력을 가하던 남편을 죽인 뒤 사회적 계약 없이 맺어진 관계다.
그런데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집으로 들인 사연은 불투명하다. 단지 하츠에가 그들을 선택했다는 대사만 주어질 뿐 구체적인 동기는 말해지지 않는다. 하츠에는 전 남편이 죽은 뒤에도 그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을 찾아가 위자료를 받아내는 속물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연금을 목적으로 집에 얹혀살며 그녀의 돈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시바타 부부를 가족으로 선택한 이유가 의뭉스럽다. 하츠에의 진짜 아들은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는 무심한 아들이고, 그녀는 보험을 들어서라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고를 전하고 싶어 한다. 정황상 그녀는 자신의 노후를 함께 해줄 가족이 필요했던 인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 가족에게는 '워크셰어(Workshare)'라는 공동의 규칙이 존재한다. 오사무가 쇼타에게 하는 “유리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같이 살기 편하지 않겠어?”라는 발언에서 시바타 가족은 암묵적으로 그 공모를 준거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금으로 경제적 자족성을 갖춘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받아들인 이유는 시바타 가족의 속물적인 규칙과 어긋난다. 이 불균질을 감수하고서라도 히로카즈 감독이 그녀를 유사 가족 안에 편입시킨 이유가 뭘까.
하츠에는 이름의 존재에서도 다른 가족들과 궤를 달리한다. 하츠에를 제외하고 시바타 가족의 구성원들은 가족 외부에서 불렸던 이름과는 다른 가명을 하나씩 갖고 있다. 유리를 찾는 TV 뉴스를 보고 그녀를 몰래 키우기로 합의한 가족들은 유리에게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그녀를 숨긴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보다 전이지만, 친부모에게서 받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쇼타 역시 오사무로부터 그의 본명인 ‘쇼타’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 시바타 부부와 아키 역시 본명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쇼타-오사무, 유코-노부요, 사야카-아키. 숨겨야 하거나 숨기고 싶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본명이 사회와 진짜 가족에게서 밀려났을 당시의 이름이라고 본다면, 그들은 가명을 지어 과거의 이름을 숨기려 한다(가족이 해체되는 취조실에서 사회로부터 숨겨진 이름이 끄집어내지는 귀결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하츠에로부터 이어진 ‘시바타’라는 성으로 묶인다. 즉, 과거의 이름들을 은닉하기 위해 지은 새로운 이름들은 하츠에의 성을 받아 온전한 이름으로 기능한다.
이름 외에도 아이들은 어른으로부터 무엇인가 유전된다. 쇼타와 유리는 각각 가족을 부양하려다 다친 오사무의 오른발과 가족으로부터 받은 노부요의 상처가 유전처럼 전해진 아이들이다. 오사무는 공사현장 텅 빈 공간에서 “다녀왔어” “어, 쇼타”라고 자문자답한다. 오사무의 본명이 쇼타라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관객들은 그가 불이 꺼진 곳에서 자신을 반겨줄 누군가를 바라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빠라는 호칭에 집착하던 오사무는 버려진 아이를 어린 시절 외로웠던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어, 쇼타”라고 반겨줄 아버지가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서 폭력을 당한 기억이 있는 노부요는 유리가 친부모에게서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욕실에서 자신의 상처와 닮은 유리의 상처를 보고 아이를 끌어안아 몸에 품는다. 어쩌면 시바타 부부는 아이들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가역적인 가족력처럼 쇼타는 다시 고아가 되고 유리는 다시 폭력적인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남은 하츠에로부터 아키에게는 무엇이 유전되었을까. 쇼타와 유리가 다시 시바타 가족이 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키는 아무도 없는 하츠에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섹스 노동을 할 때 가명으로 동생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아키는 동생에게 악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녀는 하츠에가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금전적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진짜 가족이 아닌 하츠에의 집에 다시 돌아올 정도로 실제 가족에게 감정의 골이 깊다. 그래서 그녀는 하츠에와 같이 실제 가족이 존재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살아가려 한다. 애정결핍이 있고 속물적인 가족의 규칙에 반감을 표했던 아키는 하츠에에게서 집을 이어받아 새로운 대안 가족을 만들어 하츠에의 자리를 대신할 혐의가 있다. 즉, 집의 소유주이자 재개발을 넌지시 바라는 부동산 업자로부터 집을 사수하는 하츠에는 아키에게 다른 가짜 가족이 거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집을 물려준다.
<어느 가족>에서 버려질 법한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집의 풍경은 마치 버려진 시바타 가족의 은유처럼 보인다. 일본 가족영화의 뿌리인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방처럼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집은 미학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가족은 그 단어의 피상적인 뜻처럼 집으로 묶인 집단이다. 따라서 사회 시스템 속 가족의 형성과 위기를 탐구해온 히로카즈의 영화적 관심사에서 집은 포기할 수 없는 무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은 사회의 공간과 대비하여 의미를 형성해왔다. <어느 가족>의 집도 사회와 시바타 가족을 구분하는 경계처럼 존재한다. 영화 초반부 집 내부는 가족의 형성이 주는 안온한 기운이 형형한 공간이다. 오사무의 자상한 얼굴과 노부요의 모성은 관객에게 시바타 가족 사이에 복류하던 도덕적 균열을 가리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그들은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윤리를 비껴가지만,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집 안에서는 문제없는 가족처럼 보인다.
과거를 숨기려는 이름들에 성을 주고 가족을 사회와 경계 지어주는 은닉처를 제공하는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 구성원들에겐 집과 같다. 그래서 집 밖의 공간인 해수욕장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며 가족이 되려는 그들을 보면서 하츠에는 마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안녕을 고한다. 그 이후 집에 묻힌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이 사회로부터 해체되는 취조실 시퀀스 도중 그녀 역시 집에서 꺼내진다. 하츠에가 집이고 그 집이 사회로부터 시바타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였다면, 하츠에의 죽음으로부터 가족이 사회에 노출되는 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어느 가족>은 집 내부에 편재했던 따스한 온기를 결말까지 안일하게 이어가지 않는다. 영화는 하츠에의 죽음 이후, 피가 아닌 마음과 유대로 연결되었다고 말하던 가짜 가족들의 옆구리 바짝 서늘한 공기를 밀어 넣는다. 하츠에가 죽자 오사무와 노부요는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녀를 묻기 위해 욕실 바닥을 판다. 양심의 가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얼굴은 벽 너머로 할머니의 시체를 쓰다듬는 아키의 슬픈 손짓과 대비되어 섬뜩하다. 뒤이어 시바타 부부는 하츠에의 유산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방치한 어머니를 악인으로 비추지 않음으로써 사회 시스템의 부재를 지목했던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선 어른을 포함한 가족 안으로 카메라를 끌고 와 문제를 가족내부에서도 진단한다. 단순히 사회를 적으로 두고 투쟁하는 가족을 숭고하게 그리지 않고 가족 내에 산재한 위태로움을 기어코 들춰내는 이 영화는 가족의 실패를 사회 시스템만의 잘못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유사 가족의 나체는 아이 쇼타에 의해 드러난다. 늙은 하츠에가 불온한 가족을 지탱하는 온기였다면 어린 쇼타는 태만한 가족의 폐부를 찌를 냉기다. 홍수정 비평가의 “누군가는 가족 모두를 경찰 앞에 불러모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영화가 한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이 진정 어린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는 것뿐인가."(<씨네21>, 2018.08.16.)라는 의견에는 함께할 수 없다. 쇼타는 도덕적 규범에 게을렀던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가족 외부에 호기심을 피력하는 인물이다. 하츠에가 죽자 그녀가 가려주던 가족의 불온을 감지한 쇼타는 유리에게 도둑질의 전이를 한 차례 막아준 문방구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래서 이제 아이는 두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선다. 마트에서 유리의 도둑질은 들키지 않았지만, 쇼타는 양파를 들고 도망치며 주의를 끈다. 다시 말해, 쇼타는 유리가 걸릴 걸 두려워한 게 아니라 도둑질하는 행위 자체를 막기 위해 도망친다. 그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자문했을 것이다. 결국 아이는 가짜 가족의 집이 아닌 막다른 다리를 선택한다. 홍수정 비평가의 의문이 생긴 이유는 상처를 피해의 흔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쇼타의 상처가 시바타 가족이 편안하게 이어가던 잘못된 내력에서 절연하려는 결연한 성장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가족을 예비할 어린아이 손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쇼타의 환부다. 영화는 쇼타가 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발을 오사무의 다친 발과 같은 오른발로 슬며시 겹쳐둔다. 오사무의 발은 사회 서비스인 산재보험에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쇼타의 다친 발은 쇼타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방치된다. 그들의 환부는 부위만 같을 뿐 각각 사회와 대안 가족에 의해 곪아간다. 즉, 영화는 쇼타와 오사무의 환부에 외면하는 방관자를 다르게 지목한다. 이 뒤바뀐 진술 사이에 하츠에의 죽음이 있다. 사회 시스템의 부재가 가족의 내부결함으로 도치되는 경계에서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이어주던 집으로서의 하츠에가 사라지는 건, <어느 가족>이 함께 지목하려 했던 두 의문을 스크린 위에 세우기 위한 서사적 결단인 셈이다.
유사 가족의 무력함 이전에 가족 내에 떠돌던 생기를 목격했던 나로서는, 취조실의 조사관이 시바타 가족에게 묻는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킨 게 양심에 걸리지 않았나요?”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해요.”와 같은 선명한 발언들이 시바타 가족에게 심정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사관의 물음은 언젠가 시바타 가족이 스스로 물었어야 하는 지연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오사무의 “가르칠 게 도둑질밖에 없었다.”와 노부요의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워왔을 뿐이다.”라는 답변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오사무가 아버지로서의 해야 한다고 믿었던 역할이 오인된 착각이었고, 자신의 상처가 아이에게 이어지지 않게 하려던 노부요의 애처로운 자기방어였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끝끝내 가족으로 불리지 못하고 다시 부모를 잃어버린 쇼타와 아파트 난간으로 내몰린 린의 얼굴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가족의 형성과 해체만 보여줄 뿐 아이들은 시작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이 막을 내린다.
<어느 가족>의 돌아온 결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바타 가족은 쇼타를 버리고 도주하려다 한 빛에 포착되는데, 조명을 든 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마치 객석에서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쇼타를 버리려는 시바타 가족의 이기심이 관객에게 들킨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 이어서, 취조실 장면에서도 시바타 가족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흡사 그들이 관객에게 답변하는 듯 보인다. 사회와 유사 가족, 두 집단 모두의 불완전함을 전시하며 끝나는 영화는 막연한 낭만주의적인 희망을 품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시작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리가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하고 스스로 난간 밖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쇼타가 이제는 아빠를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유리를 구해줄 새로운 가족의 부재와 쇼타의 속삭임이 오사무에게 닿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쇼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유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목격자로서 관객이 존재한다. 시바타 가족의 자기변호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언급한 영화는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유리와 쇼타가 자라 오사무와 노부요가 될지도 모르는 심증만 남은 재판에서 유일한 증인인 관객이 발언할 차례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헤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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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트릭트9> - '다른 것을 바라보는 잔혹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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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9 (District 9)
개봉일 : 2009. 10. 15 (한국 기준)감독 : 닐 블롬캠프
출연 : 샬토 코플리, 바네사 헤이우드, 제이슨 코프, 데이빗 제임스
다른 것을 바라보는 잔혹한 시선
“디스트릭트9엔 비밀이 많죠.”평소와 같던 하루, 갑자기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커다란 우주선이 불시착한다. 우주선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나 지구인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떠있는 우주선이 위협적이라며 닫혀있는 우주선 문을 연다.
<디스트릭트9>는 SF의 옷을 입은 현 사회 비판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불공정 조약, 일부 인간들의 잔인함과 모든 생물들을 지배하고 그 위에 서야 한다는 폭력성까지. 외계인에게 붙인 이름 ‘프런’에서부터 그들이 외계인들을 얼마나 하찮게 보고 혐오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상공에 머물러있던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에게 공조의 손을 내밀지, 무기를 내밀지 조금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구인들은 선재적인 공격을 감행하며 외계인들을 우주선에서 끄집어내고 ‘구호한다’는 핑계를 대며 가두고 이용한다. 나보다 약한 존재 또는 나의 땅에 들어온 다른 존재에게 자비 없이 행해지는 폭력과 차별로 일궈진 지저분한 죽음의 땅. 그것이 외계인들의 구역 ‘디스트릭트9’이다.
사람들은 디스트릭트9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디스트릭트9을 넘어 말썽을 피우는 프런을 몰아내거나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뿐, 그들이 왜 날뛰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디스트릭트9>의 주인공 비커스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디스트릭트9에 들어가 그들의 유기체를 맞고 나서야 진실을 알게 된다. 디스트릭트9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폭력의 힘. 그리고 새로운 생명체를 잔혹하게 학대하는 잔혹함. 유기체를 통해 프런들과 비슷한 존재가 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커스는 변화한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다면 돕고 싶지만 어딨는지도 모르는걸요.”라는 식으로 진실을 외면하고있다.
<디스트릭트9>을 보면서 프런을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있는 어떠한 존재로 대체해 생각해 보았다. 이 이야기는 아주 먼 어떤 미지의 땅에서 펼쳐지는 영화 한 편이 아니다. 어쩌면 바로 옆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디스트릭트9 시놉시스
남아공 상공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은 요하네스버그 인근 지역 외계인 수용구역 ‘디스트릭트 9’에 임시 수용된 채 28년 동안 인간의 통제를 받게 된다. 외계인 관리국 MNU는 외계인들로 인해 무법지대로 변해버린 ‘디스트릭트 9’을 강제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중 책임자 비커스가 외계물질에 노출되는 사고를 당한다.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면서 외계인으로 변해가는 비커스. 정부는 비커스가 외계 신무기를 가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정부의 감시시스템이 조여오는 가운데, 비커스는 외계인 수용 구역 ‘디스트릭트 9’으로 숨어드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외계인들은 못 돌아갑니다.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나타난 우주선의 존재에 지구인들은 공포에 떤다. 우주선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지구인들은 머리 위에 드리운 그늘에 공포감을 느끼고 프런들을 통제한다. 처음엔 아사 직전인 외계인들을 구해주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지구인들과 다른 모습을 가진 그들에게 혐오와 실험 욕구를 느끼고 그들을 디스트릭트9에 가둔다.프런들은 지구인들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구해달라고, 우리와 함께하자고, 전쟁을 하자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인들은 이미 프런들을 지구인보다 낮은 등급에 깔아놓고 ‘도움을 준다.’ ‘관리를 한다.’고 말한다. 지구인에게 프런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외계인들의 무기 기술을 탐내면서도 그걸 배우고 공유하기보단 일방적으로 빼앗고 싶어하고 통조림 한 캔을 던져주며 조롱한다. 디스트릭트9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디스트릭트9>은 디스트릭트9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잔혹한 실험을 통해 우리의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디스트릭트9의 존재를 알면서도 진실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무관심한 시선을 꼬집는다. 외계인 관리과 사람들에 의해 외계인의 알이 불에 타고, 외계인들이 학대나 괄시를 받는 장면, 주인공 비커스가 외계인의 팔로 실험을 당하고 쫓겨나는 장면 등에서 CCTV 또는 TV 너머 다큐나 뉴스 속보로 그 순간을 지켜보는 관점을 사용한다. 어느 정도 궁금증이 있고 렌즈 너머로 지켜보고는 있으나 현장에 달려가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진 않는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추후에 푼디수와(비커스의 동료)의 고발로 MNU(외계인 관리과)의 추악한 행태가 세상에 밝혀지지만 비커스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은 “돕고야 싶지만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다”라며 그의 행방에 대해 더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비커스가 행방불명되고 집에 홀로 남은 아내 타냐는 남편의 물건과 어느 날 문앞에 놓여있던 쇠로 만든 꽃을 보며 그를 떠올린다.
비커스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프런들을 혐오하긴 했으나 생체 실험에 살아있는 프런이 동원되었을 때 “살아있는 프런을 쏠 순 없다”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비커스의 어머니, 아내, 동료들의 증언과 영상에 남아있는 그의 말과 웃음을 보면 절대로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프런들의 유기체를 맞게 된 게 비커스여서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일 프런들의 무기를 탐내던 갱단이 유기체를 맞았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똑같아요.
비커스는 유기체를 맞고 프런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마음도 조금씩 변화한다. 비커스는 프런으로 변하는 자신을 혐오하기도 하고 3년의 치료 기간에 눈이 돌아 크리스토퍼를 배신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크리스토퍼를 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배신’을 감행한다. (누군가는 비커스의 행동을 배신이라 칭하기도 했다.)처음 프런의 팔을 갖고 디스트릭트9에 갔을 때, 크리스토퍼의 아들은 비커스의 팔을 보며 “우리 똑같아요.”라고 말하는데, 비커스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손가락을 자르고 꺼지라고 욕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커스는 다시 인간이 되는 치료를 받기 위해 크리스토퍼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MNU의 생체 실험 사실을 알게 된 후 받게 된 충격과 더불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프런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프런들도 각자의 생각과 감정이 있는 소중한 생명체임을 느끼게 되고 그들을 돕게 된다. 팔과 눈, 등의 생김새가 프런과 동일해지고 DNA가 프런들과 비슷하게 변해가는 동안, 비커스의 혐오와 폭력성은 점점 사라진다.
<디스트릭트9>에서 외계인과 지구인은 다르지 않았다. 프런들은 지구인들과 같은 언어를 쓰며 소통할 수 있었고 비슷한 모양새로 걷고 행동했으며 가족애와 동료애, 고통과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지구인과 달랐던 건 생김새뿐이었는데, 지구인들은 그걸 이유 삼아 프런들을 잔혹하게 학대하고 죽인다. 결국 프런으로 변한 비커스가 고철들을 주워 꽃을 만들고 아내에게 선물한 마지막 장면은 이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어필한다. 프런으로 변했음에도 다시 아내에게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담아 꽃을 만드는 비커스의 모습. 그들도 사랑을 하고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또 다른 생명체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혹시 크리스토퍼도 먼 고향에서 “3년 후에 오겠다.”고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구인이지만.. 크리스토퍼가 다시 돌아와 디스트릭트10을 없애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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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피커] 촬영팀 세컨드 / 촬영팀, 그리고 나
씨네피커는 7월 한달 간, 현재 방영중인 tvN 드라마 <감사합니다>에서 촬영팀 세컨드로 참여하고 있는 형정훈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있어요. 오늘은 그 세번째 시간입니다. 아버지와 영화를 보던 청소년에서, 영화과에 진학하고 이제는 촬영현장에서 일한 지 5년차가 되었는데요.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Q. 어떤 일을 하든 3년차가 지나면, 슬럼프가 찾아오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이제 5년차가 되었어요. 혹시 촬영팀을 하면서 그만두고싶었던 적이 있나요?
A. 저는 오히려 드라마 첫 작품 시작할 때 그 생각을 좀 많이 했어요. 저는 학교에서도 선배들이 ‘열심히 하는 친구다’ ‘잘하는 친구다’라는 소리를 들었고 동기들 사이에서도 ‘촬영을 잘하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래 나는 잘하는 친구야, 열심히 하는친구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근데 드라마 현장을 갔는데 너무 부족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위에 있던 형님에게 ‘이렇게 하면 안된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 라는 꾸중을 많이 들었거든요. 저는 정말 이 촬영 일을 하면서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힘들어도 뿌듯함이나 행복함을 느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처음으로 그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아, 내가 정말 행복하고 좋아하던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더 자괴감이 드는 느낌이었죠. 주변 친구들한테도‘너무 힘들다’ ‘그만둬야하나?’ 하고 상담도 많이했구요. 그러다가 깨달은 순간이 한 번 있어요. 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저 사람이나를 미워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의 어떤 행동이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 즈음에 다른 분들이 ‘정훈이 고생한다’ ‘제일 막내 고생하네’라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그게 정말 위안이 되었어요. 그 작품이 끝나고 지금 촬영팀으로 이직을 했는데 이직을 하고 나서 꾸중했던 그 형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다음 작품같이 해줄 생각 없냐” 라고. 그때 그렇게 나한테 부족하다고 하면서도 연락을 준 건 ‘내가 잘 못했던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이 팀에서 막내로 있고 성장을 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는데. 그 때가 좀 다시 회복을 한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잘했구나, 잘했었구나.’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때가 저 스스로 이겨낸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Q 처음이라, 그 상황이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A. 힘들다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당시엔 힘들었겠지만, 이게 내 직업이나 장래를 흔들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리고 어느 정도 전우애라고 해야 하나? 옆에 사람도 버티고,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나 나보다 체격이 작은 누나나 이렇게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연한 느낌같은 것도 있었어요. 처음 1년은 적응하는 게 힘들었는데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서 계속하다 보니까 이제는 적응이 된 것 같아요. 잠을 못자고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적응이 되었고요.
Q 가끔 메이킹 영상을 보면, 촬영팀은 거의 대부분 남자 같았는데, 촬영팀에도 여자스태프들이 많이 있는지 궁금해요.
A. 제가 지금까지 했던 촬영팀은 다 여자 스태프들이 있었고 지금도 같이 하고 있는 누나도 있고, 생각보다 여자 촬영팀이 많이 있어요.
Q 촬영 감독을 꿈꾸는 여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여자 촬영팀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안되는데, 체격이 작은데? 체력이 못 버틸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더라구요. 그런데제 전 작품을 같이 했던 세컨드 누나의 키가 152cm? 153cm? 굉장히 작고 여리여리한 몸이었는데도 카메라를 잘 들었어요. 저는 그런 장비를 드는 건 노하우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오히려 제가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저보다 같이 했던 누나가 장비를 번쩍 잘 들었던 기억이 나요. 신체적인 부분은 노하우를 통해서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걸 이겨내지 못하면 촬영팀을 하는 건 어렵겠죠. 어느 정도 본인의 노력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 누나도 체력 기르기 위해 유도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본인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을 하신 것 같고요. 또 여자 촬영팀의 장점은 (물론 남자분들의 개인차도 있겠지만) 세심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장비를 체크한다거나 아니면 정리를 한다거나 이런 부분에서 강점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인의 단점은 보완을 하고, 장점을 부각시키면 좋은 자리를 오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조건 신체적인 부분이 부족하다고 해서 이 자리에 들어서지 못한다는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고,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만큼 인정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기때문에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Q. 촬영팀에 일하고 싶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에게 구직 꿀팁을 알려주실수 있나요?
A. 솔직히 지인이나 학교나 이런 인맥이 대표적인 것 같아요. 왜냐면 직접 면접이나 이력서를 올리는 시스템이 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학교나 지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좋은 건 우선 학교에 진학을 해서 선배들의 인연을 가지는게 좋긴한 것같아요. <필름메이커스>에서 올라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보는데 메이저 급의 드라마나 영화팀은 아마 필름메이커스에서 구하지 않는 편이어서 어쨋든 차근 차근 인맥을 쌓아서 메이저 팀으로 옮기는 방법도 있구요. 처음에는 촬영과 관련된 네이버 밴드나오픈 채팅방같은 것을 찾아보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Q. 혹시 나중에 촬영 메인 감독이 된다면 하고 싶은 장르가 있나요?
A. 제가 지금까지 한 작품들이 거의 장르성이 부각되는 작품들이거든요. <다크홀>은 좀비물이었고, <더 글로리> <마당이 있는 집>도 <유괴의 날>도 다 장르물이었어요. 미스터리, 스릴러, 아니면 범죄 이런 장르물을 많이 했는데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로맨스 코미디나 화사한 분위기의 작품도 해보고 싶어요. 설레는 장면들을 직접 보고 싶고, 그런 분위기도 안해 봤으니 궁금해서 그런작품을 하고 싶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약 메인이 된다면 장르물을 찍고싶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로맨스 코미디물은생각보다 카메라로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 장르물과 달라서 내가 잘 찍을 수 있는 게 뭘까 생각을 하면 장르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Q. 요즘은 정말 콘텐츠가 많잖아요. 형정훈님이 생각하는 좋은 콘텐츠란 무엇인가요?
요즘 나오는 콘텐츠들이 유튜브나 아니면 쇼츠에 대중들이 익숙해져서 짧은 시간 안에 강한 재미 혹은 강한 임팩트를 원하는 영상들이 많아지는 것 같은데 그런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저는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또 어떤 드라마를 보고 생각을 가질 수 있는시간을 준다면 저는 그게 좋은 콘텐츠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사운드와 스크린을 보기 위해서 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작품 내용 보다는 기술 적인 것을 많이 봤었는데, 영화 <괴물>을 보고 나서 ‘아 정말 좋은 영화 봤다’ ‘나를 흔드는 영화를 본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재밌고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도 좋지만 다시 한번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하고 본인에 대해서 생각하는 영화가 저는 좋은 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촬영팀 형정훈님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목표는 저는 항상 모두에게 다 이야기를 하는데 제 친구들 혹은 지인들이 TV나 영화를 보는데 ‘저거 내 친구가 한 거야’가 제 목표예요. 그래서 모두가 알 만한 작품을 제가 직접 카메라 잡고 찍는 게 제 목표입니다.
넘쳐나는 콘텐츠 속에서 생각의 여지를 주는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사람. 자신이 촬영한 콘텐츠가 사람들에게 자랑이 될 수 있는 콘텐츠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인터뷰내내 형정훈님은 작품을 사랑하고, 작품에 진심을 다하는 바른 사람이라는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형정훈님이 앞으로 더 성장해 촬영감독 형정훈으로써 참여할 작품이 더 기대가 됩니다. 첫번째 씨네피커 형정훈님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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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근도 양심도 꽉꽉 찼네
이 글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은 미천한 창작자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사진출처:매일경제 TV버젓이 방송에 나와 전세사기를 고백하는 것이 덤덤해진 시대가 와버렸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모은 돈으로 계약을 했을 집이었기에. 피해자에게 주어질 보상금 정도로 그들의 다친 마음에 밴드 하나 못 붙여줄 것은 뻔하디 뻔하다. 잡혀야 할 사람들은 잡히지 않고. 피해자들은 이 모든 사태에 괴로워하며 목숨을 버리는 일까지 생긴다. 그뿐인가. 인생으로는 모자라 영혼까지 끌어다 은행에 저당을 잡히고 들어왔을 집인데, 반드시 박혀 있어야만 했을 철근조차도 제대로 박혀있지 않단다. 어째서 피해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내 이야기는 아니고 뉴스에서 나오는 남의 이야기이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한숨을 몰래 내쉬어 보기도 한다.
영화는 정확히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
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한국 사람이라면 폭발적으로 떠올릴 수 있을 온갖 미묘한 생각들과 서러움을 영리하게 이용하기까지 한다. 덕분에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아파트의 역사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동산의 가격이 폭주하는 것을 보여주는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관객들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영화의 상황 속으로 순순히 빨려 들어간다.
덕분에 영화가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이 모든 아파트를 날려버리고, 덩그러니 황궁 아파트만을 중심에 남겼을 때도. 관객들은 당황하지 않는다. 이미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황궁아파트 속으로 들어가 문을 꽁꽁 걸어 잠근 뒤 이므로.
사진출처:다음 영화영화가 영리하다 못해 섬뜩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두 번째 지점은 바로 입주민회의다.
남은 주민들이 느끼고 있는 마음. 어떻게 보면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못했을 뿐, 위기 상황이라면 그런 생각을 가진다 해서 욕할 수 없는 마음속 이야기들을 입주민 회의라는 형식으로 빌어 귀로 전달한다. 모든 아파트가 무너지고 달랑 자신들의 집만 남은 상황이지만. 이 무심하면서도 일상에 착 달라붙어 있는 상황 덕에. 여태껏 드림팰리스 주민들에게 받아왔던 차별들에서 오는 서러움을 얘기하는 장면들 조차 낯설지 않다.
자신들이 받았던 차별들을 오롯이 돌려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서도. 입주민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을 바퀴벌레라고까지 부르며 소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올라오지 않는다. 영화는 너무도 정확히 한국 사회가 집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까발리고 있고. 또한 쓸데없이 정의로운 인물을 대놓고 앞장 세워 교훈질을 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들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경험들도 함께 끌어올려 저 말도 맞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렇게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바퀴벌레 소탕 작전을 시작한다. 본인들은 그것이 자정작용이라 믿었고 자신들은 이제 이곳에서 행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난리 법석 속에서도 꿋꿋하게 우뚝 서 있는 황궁 아파트만큼. 자신들도 그렇게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아파트와 자신의 존망(Johnna 망함 아님)을 동일시한다.
사진출처:다음아파트 주민들의 은은한 광기에 팔에 돋은 소름이 겨우 가라앉을 때가 되어서야. 그들이 간과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게 한다. 바로 모든 닫힌 시스템은 부패한다는 것.
이대로만 가면 남들이 죽건 말건 영원히 안전할 것만 같던 황궁 아파트는 고인 물이 되기를 자처하더니 그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씩. 천천히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아파트 단지를 커다란 고름주머니로 만드는 것도, 그러면서도 가장 지키려 애쓰는 사람도. 바로 영탁(이병헌)이다. 그는 황궁 주민의 DNA가 전혀 없으며, 극우뇌를 가진 사람도 아닌 일명 "바퀴벌레"에 불과했지만. 주민들의 집을 향한 열망에 올라타, 실컷 가짜이면서도 진짜인 행세를 한다. 그것도 꽤나 훌륭하고 성공적으로.
어리바리했던 영탁이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로 변화하기까지 겪는 아주 극단적인 감정의 변화를 이병헌이라는 배우는 정말 점진적으로. 하지만 이질감 하나 없이 절묘하게 이뤄낸다. 그 어떤 주민의 욕망보다도 강렬하면서 그 어떤 바퀴벌레보다도 맹렬하게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애쓰는 모든 모습을 보면서. 이 배우의 연기 스펙트럼은 끝이 없겠구나. 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디스토피아적이지만 너무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들었던 영화 전체에 비해, 마지막 부분은 누가 보아도 희망이라는 게 있기는 하다.라고 말해준다는 점은 통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뻔하게 헬기를 타고 온 구조대에 의한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나, 눈물파티를 하려는 시도조차 없다는 점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모든 껍데기들은 황궁아파트와 함께 조용히 마지막을 맞이한다.
황궁 아파트는 망했지만(?) 영화 자체는 마치 황궁 아파트와 같았다. 건축물로 치자면 아낌없이 들어갔어야 할 철근들이 제자리에 굳건하게 박혀있고. 모든 것이 설계도대로 맞아떨어져서 자아내는 탄성도 영화 중간중간 가감 없이 흘러나올 만큼 훌륭했다. 모조리 쓰러진다 해도, 저 멀리서도 보일 만큼 듬직하게 제자리를 지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소한 이 영화만큼은, 철근도 양심도 꽉꽉 차 있는 셈이다.
[이 글의 TMI]
1.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아마도 시간이 된다면 한국영화 빅 4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 같다.
2. 다음 주부터 휴가 아아아악!!!!
3. 휴가비 받은 걸로 일단 책부터 사봅니다.
#콘크리트유토피아 #엄태화 #최신영화 #영화리뷰 #브런치작가 #이병헌 #박보영 #박서준 #김선영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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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설 | 공감과 청량으로 빚은 계절감 충만 로맨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 졸업장은 손에 쥐었지만,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부모님 도시락 가게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용준’(홍경). 어느 날, 그는 배달 중 들린 수영장에서 완벽한 이상형 ‘여름’(노윤서)을 만난다. 청각장애인 수영 선수인 동생 ‘가을’(김민주)의 훈련을 돕던 여름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서툴지만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고, 행운까지 따른 덕분에 용준과 여름은 친구가 된다.
입이 아닌 손으로만 말하는 여름과 더 가까워지고, 소중한 사이가 되고자 노력하는 용준. 하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용준의 고백은 거절당한다. 미래와 꿈을 이야기하는 용준과의 만남이 청각장애인 동생과 부모님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여름에게는 충격이자 부담이었기 때문. 하지만 용준은 희망을 놓지 않았고, 초여름이 깊어지면서 여름도 서서히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20대라는 계절
어른들이 20대 중후반에 접어든 이들을 위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바로 인생을 시계에 비유하는 것. 100세 인생 중 20대 중후반이면 이제 1/4 정도 지났을 뿐이니, 시계에서는 새벽 6시 언저리이고, 막 해가 뜨거나 뜨기 직전의 새벽일 뿐이라고. 그러니 설령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서 좌절스럽더라도 무너질 필요는 없다고. 간 호흡으로 인생을 보면서 내실을 다지고, 다음 기회를 노려도 충분하다고.
이 비유는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다. 마라톤 같은 달리기 경주로 바꿔도 말이 된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미사여구를 더해도 된다. <다크 나이트> 중 하비 덴트의 대사처럼, 인생의 새벽인 20대는 해가 뜨기 직전이라서 더 어두운 것이라고. 계절로 대신할 수도 있다. 20대는 사계절 중 이제 막 초여름이 시작되려는 시기일 뿐이니 아직 열매를 수확할 가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고, 1년을 마무리할 연말은 까마득하다고.
대만의 동명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 <청설>은 인생의 초여름, 20대 중반을 마주한 청춘들의 로맨스를 보여준다. 정확히는 로맨스를 곁들였다. '우리의 여름을 들어달라'(Hear Me: Our Summer)는 의미의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다.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가 아니라 세 주인공이 각자의 여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원작과 리메이크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바로 이름이다. 특히 두 자매의 이름이 독특하다. 한국판 <청설>은 자매의 이름을 계절감 가득한 '여름'과 '가을'로 변경했다. 흥미롭게도 이 이름 덕분에 세 주인공이 마주하는 인생의 초여름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여름과 가을 자매의 이야기에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름과 가을에 대해서도 곱씹어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여름의 인생은 철저히 가을이에게 맞춰져 있다. 동생이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뚫고, 함께 올림픽에 가는 게 그녀의 유일한 목표다. 그래서 여름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가을이의 훈련비로 투자하고, 시간을 쪼개서 국제 수화를 배우러 다닌다. 영준과 썸을 타고, 연인 관계로 발전을 하려는 순간마다 그 관계를 망설이거나 끊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을이와의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오히려 다그치는 것.
여름이에게 영준과의 만남은 터닝 포인트다. 영준은 대학 졸업 후 하고 싶은 일이나 진로를 아직 찾지 못한 평범한 20대다. 그는 도시락 배달을 갔다가 만난 여름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녀에게 같이 인생의 목표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정작 여름은 충격에 빠진다. 올림픽 출전이 가을이의 목표일 뿐 자기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 처음 깨닫고, 청각장애인인 부모님이나 동생과는 다른 인생의 가능성을 비로소 발견하기 때문.
여름의 깨달음은 메타적이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열매라고 생각했던 가을이의 올림픽 출전이 자신의 '가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으니까. 그렇게 여름이는 여름이 코 앞에 다가온 후에야 비로소 자기만의 가을, 새로운 인생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영준과 여름의 로맨스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여름을 마주하고는 각자의 가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격려와 위로에 가깝다.
착한데, 착하기만 한 로맨스
물론 <청설>에는 대만 로맨스 영화에 기대하는 순간도 나온다. 사랑이 시작되는 풋풋함, 착한 풋사랑이 끝나는 아픔 등. 특히 청각 장애라는 소재를 활용한 전자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영준이 여름에게 고백하는 순간은 유독 살랑거린다. 수영장에서 번호를 따거나 커피를 같이 마실 때 말을 하는 대신 전부 수화만 사용하다 보니 설렘과 떨림이 손짓과 몸짓만큼 크게 보이니까.
여름이 영준에게 빠져드는 과정도 흥미롭다. 호감은 느끼지만 그를 친구로만 생각하던 여름. 하지만 기분 전환 차 놀러 간 클럽에서 그녀는 시나브로 그에게 스며든다. 영준이 이끄는 대로 손을 스피커에 대고, 음악을 듣는 대신 느끼면서 비로소 그의 모습을 한 세상에 마음의 문을 연다. 수영장에서 영준의 말이 아니라 그가 보낸 물결을 느낀 후에야 그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장면처럼 비슷한 순간이 반복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다만 착하고 순수한 로맨스가 빛이 바래는 순간도 있다. 여름과 영준의 관계를 위기에 빠트리는 전개가 부자연스럽기 때문. 특히 여름과 가을의 자취방에 불이 나는 시점부터의 진행은 다소 갑작스럽다. 물론 세 주연의 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고, 그들의 성장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작위적인 전개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영화의 분위기는 끝내 불협화음을 내고 만다.
소재의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유독 부각되는 단점도 있다. 바로 영화가 청각 장애라는 소재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청설>은 청각 장애인의 로맨스를 다루기에 독특한 작품이다. 소재를 강조하려는 노력은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상술했듯이 청각 장애인들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로 묘사하면서 고정관념을 빗겨 나간다. 또 템포가 늘어진다고 느껴지더라도 수화로 이뤄지는 대화를 가능한 끊지 않고 보여주려는 시도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한계도 명확하다. 여름이가 비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숨긴 반전이 특히 문제다. 영화적 재미는 더할지는 몰라도, 여름과 영준의 감정선을 어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주제와도 맞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게 비장애인의 로맨스였다는 점에서 청각 장애는 그저 도구로만 소비된 셈이다. 이는 사회적 소수자나 비주류 집단 배우나 캐릭터를 보여주기식으로만 활용하는 ‘토크니즘’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더 나아가 평면적인 청각 장애인 묘사도 구시대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청설>은 모든 청각 장애인을 착한 사람, 배려받아야 할 사람, 약자들로만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청각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뤄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코다>가 장애인들이 사업체를 소유하거나 지역 어업 공동체를 이끄는 식으로 그려낸 것과 비교하면 <청설>은 깊이가 얕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배우라는 눈속임
그런데 <청설>은 최소한 보는 동안에는 위의 단점이 생각나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바로 영화의 감성을 온전히 살린 배우들의 힘이다. 우선 홍경이 연기한 영준의 경우 사실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일반적이고 평이하니까. 하지만 그 인물을 숨 쉬는 듯 자연스럽게 표현한 홍경의 연기는 그가 주목받는 신예인 이유를 증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기 잘못과 마음을 무심하게 고백하는 수영장 씬만 봐도 느낄 수 있다.
여름을 연기한 노윤서는 기시감이 없지 않다. <일타 스캔들> 등에서 비슷한 결의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 그러나 익숙하고 편안하게 캐릭터를 관찰할 수 있다 보니 사소한 동작 하나 놓치지 않는 표현력이 더 돋보이는 측면이 있다. 일례로 그녀는 수화를 할 때 마치 말을 하는 것 같은 입모양을 만들 때가 있다. 이러한 디테일은 여름이 사실 청각 장애인이 아니라는 반전의 복선으로 이어지면서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마지막으로 김민주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을이라는 캐릭터는 오로지 수화와 표정, 제스처만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대사가 단 한 마디도 없는 제한적인 환경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혹시 모를 발성에서의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고, 아이돌다운 표정 연기와 제스처가 뛰어난 전달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언니에게 부담감과 불안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한 가지는 가려지지 않는다. 바로 개봉일이다. 물론 부산국제영화제를 기점으로 마케팅을 펼치고, 수능 특수를 노린 선택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주제와 분위기를 고려하면 최선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 관객을 매료하기에는 생각보다 진중하니까. 또 계절감이 충만한 영화인 만큼 초여름 분위기를 강조할 수 있는 개봉시기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Poor 형편없음
배우와 감성, 분위기만 빛나는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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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의 정서로 감동을 주는 드라마 <겨우, 서른>
넷플릭스에서 어느 날 중국 드라마 하나를 발견했다. <겨우, 서른>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는 넷플릭스의 다른 중국 드라마와는 왠지 달라 보였다. 중국인인 아내에게 물으니 이미 중국에서는 꽤 많은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라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최근 대부분의 중국 영화나 드라마가 그렇듯 또 실망스러울 거라는 예상을 하며 보기 시작한 드라마를 모두 시청했다. 총 43편이라는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다.
이제 막 서른 살 즈음이 된 세 여자가 나온다. 구자(퉁야오)는 폭죽 회사를 운영하는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사는 인물이다. 늘 남편이 하는 폭죽 공장에서 사고나 날까 노심초사하며 가능하면 안전하게 운영하길 원한다. 무엇보다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도 좀 더 좋은 집에서 살기 원한다. 이야기 안에서 못하는 것이 없고 침착한 인물이다. 만니(장수잉)는 럭셔리 브랜드를 취급하는 미실의 판매원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상하이에 정착해 직업적으로 성공하길 바란다. 상하이라는 큰 도시에서 잘 적응하는 것 같지만 늘 외로움을 느끼고 미혼은 그에게 연애도 쉽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샤오친(마오샤오퉁)은 방송사 편집자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지만 시시때때로 남편과 부딪친다. 평범한 사무직에 있는 그는 일과 가정에서 큰 욕심이 없다. 드라마 속 세 인물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절친이 되고 서로를 의지한다.
나는 왜 이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을까. 아마도 이 드라마는 어떤 인생의 분기점에서 만날 수 있는 고민들을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대사와 연기로 잘 전달된다. 친구 한 명이 괴로워할 때, 옆에서 안아주는 친구들을 보면서 보는 나도 어떤 위로를 받았다. 각자가 느끼는 고민과 어려움은 다 다르다. 특히나 서른이라는 나이는 이제 삶이 정해져야 한다거나 끝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나이다. 물론 한국에선 아마도 그 나이가 마흔으로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캐릭터들의 상황들로 어떤 이야기를 던진다. 만니의 이야기로는 미혼 상황인 여자의 결혼, 연애에 대한 고민 그리고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만니는 서른이라는 나이를 의식하기보다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무엇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 전통적으로 결혼에 얽매이기보다는 조금 힘들더라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도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바로 서른 즈음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만니는 지방에서 대도시로 와서 혼자 도전하는 인물인데 그가 중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겪는 일들도 담는다. 마치 영화 <브루클린>의 주인고이 다시 대도시로 돌아가는 것처럼 만니도 고향이 자신이 살 터전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그런 만니의 심리와 생각도 차분히 잘 담겼다.
샤오친의 이야기로는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어떤 걸 결정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다. 샤오친은 우유부단하고 커리어에 대한 욕심도 없다. 그리고 아직은 철이 덜 든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결혼도 부모님의 중매로 하게 되었다. 같이 사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지만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샤오친의 고민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남이 자신의 결정을 하게 만드는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공감할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구자의 이야기는 결혼과 이혼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사실 구자는 비현실적으로 슈퍼우먼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도 잘 보고 요리도 잘하고 회사 경영에도 소질이 있다. 인간관계도 잘해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육아 때문에 커리어를 잠시 중단한 그는 다시 자신만의 커리어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고, 문제가 있으면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줄 아는 어찌 보면 완벽한 캐릭터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 인물에 대한 글이나 리뷰를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겨우, 서른>을 검색해보면 다양한 리뷰와 글들이 검색된다. 대부분 세 인물 어딘가에 자신들의 고민과 삶들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드라마에서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샤오친을 보면 결혼 전 연애하던 아내의 모습이 보이고, 만니를 보면 결혼 후 자신만의 커리어를 만들기 위해 애쓰던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구자를 보면 지금의 아내가 보였다. 어쩌면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향과 순서가 다를 뿐 이 드라마 안의 세 인물에 자신과 주변 사람의 모습이 스며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드라마를 보는 많은 이들이 어떤 모습에서는 공감하고 또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볼 것이다.
이 드라마는 재미도 있지만 좋은 대사들도 많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대사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자식은 우리 전생의 업보라고 하잖아요. 능력이 없으면 우리가 나룻배가 되어 죽기 전까지 자식들을 태워줘야죠. 능력이 있으면 자식들은 커다란 크루즈가 되고 우린 그 크루즈의 구명 보트가 돼야 해요. 만일 일이 터지면 우리가 마지막에 자식들을 해안가로 데려다줘야 해요.
구자의 아빠가 친구와 이야기하다 하는 말이다. 부모가 된 입장에서 이미 자녀를 다 키운 선배 부모가 해주는 이야기로 들렸고 공감이 되었다. 나도 부모니까.
상하이에 있을 때 전 거기가 저의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집으로 돌아왔는데 여기가 더 나의 집이 아닌 것 같아요.
만니가 고향에 돌아갔다가 부모님께 다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 말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있는 곳이 진짜 집이라는 이야기를 꽤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지금까지 전 결혼생활이란 서로 완전히 다른 물고기 두 마리를 억지로 한 어항에 넣어서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30살이 되고 나서야 좋은 배우자와 포근한 가정이 멀리 떠날 수 있는 충분한 용기와 힘을 준다는 것 깨달았죠. 진심으로 대해야만 행복하게 지낼 수 있어요. 행복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길 바랄게요.
샤오친이 출판 기념회 때 거의 드라마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말이다. 결국 이 드라마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이다. 철부지 아이 같았던 샤오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밖에도 좋은 장면들이 많다. 마지막 구자가 남편의 바람 때문에 힘들어 다른 도시로 혼자 여행을 가서 시간을 보낼 때, 연락 없이 떠난 구자를 걱정하는 남편이 여러 개의 메시지를 보내며 걱정한다. 그때 구자는 남편의 걱정 문자를 받고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려고 한다. 공항으로 향한 그는 티켓 검사대에서 불꽃놀이 광고를 본다. 그리고 다시 원래 머물던 호텔로 돌아간다. 남편과 행복하게 지냈던 과거의 10년이란 시간이 그립고 또 붙잡고 싶지만 남편으로 인한 상처는 구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렇게 구자는 이혼을 결정한다. 이 장면이 좋은 건 이혼에 대한 결정에 대한 마음을 정말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는 연애와 커리어, 결혼생활 그리고 육아에 대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고 이들이 하는 고민을 보면서 공감을 이끌어낸다. 다양한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하는 선택이 수긍이 가게 구성되어 있다. 이 드라마가 약간의 막장 요소도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드라마를 추천하고 싶다. 꼭 여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상황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본 드라마의 한 회가 끝나면 마지막 30초 정도는 길거리에서 총유빙을 파는 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대사가 없이 그들의 일상과 일하는 모습 그리고 결국에 자신의 가게를 차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굉장히 감동적이다. 안 보신 분들은 꼭 챙겨보면 좋겠다.
드라마의 가장 마지막, 세 주인공이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우리에게 던지는 말이 참 좋다.
30살, 허둥지둥하며 한 해를 겨우 보냈어요. 하지만 과거를 바라보고 앞날을 바라보면 어느 해나 그렇게 보낼 테죠. 30살은 시간이 우리의 청춘을 조금 앗아간 나이일 뿐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경험을 주죠.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할 동력을 줘요. 인생은 아마 편도 여행일 거예요. 특정한 숫자가 우리가 앞을 향해 나아갈 속도와 멈출 순간을 정할 수 없어요. 우리 모두가 '다만'이라는 용기를 갖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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