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1-30 11:14:31
주인공에게 보내는 편지
영화 [서브스턴스] 리뷰
이 글은 영화 [서브스턴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한국어를 매우 잘한다는 가상의 상황에서 편지를 받았다고 제발 믿어주라(?)

리지 씨에게.
안녕하세요.
우선 너무 늦게 당신의 이야기를 영화관에서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저 역시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라는 같잖은 헛소리를 최근까지도 들으면서 자란 사람이기에. 당신의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참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먼저 영화를 본 친구들은 분명 징그럽고 피 튀기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막상 영화관을 나올 때 저를 지배했던 감정은 당신을 향한 슬픔과 동병상련이었습니다. 이런 감정의 부조화는 마치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의 관계처럼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마음이 꽤 오랫동안 복잡했어요. 어쩌다 거울 속의 당신을 스스로가 미워하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에 제가 감히 답을 낼 수도, 내기도 어려웠거든요. 저의 얕은 생각과 비루한 기억력을 거스르고 또 거슬러 올라가서. 그 미움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를 더듬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답(?)이 나오더라고요.
단 한마디였습니다. 당신의 빛남(sparkle)을 가져간 것은. 타인. 그것도 당신보다 더 나이가 들었으면 들었지. 아니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남자의 단 한마디. 아마도 당신은 여태껏 스스로 빛을 내는 별(항성)인 줄 알고 살아왔을 텐데. 그 비수는 참 힘이 세서. 당신의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던 핵융합의 심장부에 꽂혀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당신 안의 반짝임을 스스로가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의 평판을 반사해야만 빛나는 행성이 되어버린 순간이라고 할까요. 아, 그리고 저는 당신이 새우를 씹던 하비의 입을 찢어놓지 않았다는 그 절제력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저였으면 포크로 아마 콧구멍을 후벼 팠을 거예요.

한국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은교]에서는 이런 문장(대사)이 있습니다. 너의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말이죠. 분명 당신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패배감과 상실감.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 빛날 수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도 없으니 반사되어 빛나기라도 할 수 없다는 초조함이 아마도 수의 탄생을 부추기는 힘이 되어버렸으리라고 생각해요.
나였어도 그랬을 것입니다. 저 역시 또 다른 나의 탄생을 막을 수 없었을 거예요. 과연 누가 당신의 선택에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그리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가정을 한다면. 차라리 저는 수의 탄생 이후에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어쨌거나 서브스턴스 제공사(?)측의 말처럼 당신과 수는 하나였으니까. 두 사람 간의 균형이 지켜질 것이라는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당신이 멍하니 TV앞에 앉아서 수의 탄생 전 보다 더 슬픈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과의 데이트에 앞서 스스로의 모습을 부정이라도 하듯 립스틱을 빡빡 닦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미워하는 듯한 당신의 모습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언젠가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거든요.
물론 그 어떤 위로도 당신에겐 통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수를 탄생시킨 것은 당신이고. 마르지 않을 것만 같은 젊음을 누리고 싶었던 것도. 그리고 그토록 증오했지만. 어쩌면 당신에겐 가장 필요했을 하비의 인정을 바랐던 것도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다시 한번 더 빛나고 싶다는 스스로의 욕망이 이토록 큰지. 당신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욕망이라는 게.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깊이의 우물 같은 것이니까요.

육신이라는 게 참 덧없지요.
분명 미워해 마지않던 50대의 당신이었잖아요. 하지만 그마저도 수에게 하루 이틀, 야금야금 빼앗기고 난 후의 당신의 눈빛은 참 아팠습니다. 그리워하고 있더군요. 커다란 액자 속 스스로가 미워했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절박감은 수에게도 찾아왔죠. 그녀가 늦게 깨달은 것인지. 당신이 일찍 깨달은 것인지. 줄 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의 치아가 뽑혀나가는 그 순간만큼은 그저 한 사람의 절박함과 공포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토록 기다렸던 시간의 정중앙에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기록되어야 할 그 순간에. 피를 흘리다 못해 분사하는 당신의 모습은 여태 하고 싶었던 본심을 모두에게 전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괴물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괴물인가. 아니지, 우리 모두 괴물인거지.라고 울부짖는 것만 같았어요. 마치 영화 [샤이닝]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 괴기스럽기도, 또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는 장면에서. 저는 허망하게 흩어지는 당신의 살점과 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어요. 주변 세탁소에서 기함을 토하며 그냥 이 옷을 버리라고 말할 것 같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꼭 당신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아 물론 정상적인?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피를 그만큼 흘릴 수도 없을뿐더러 그만큼 흘리면 명예의 전당까지 기어갈 힘도 없겠지만. 이것은 저의 직업병이며 영화적 허용이라 보고 넘어가도록 하죠(?)

마지막 인사를 뭐라 해야 할지 참으로 많이 망설였습니다.
당신은 그래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해한다 라는 뭉뚱그린 말로도 그간 입은 상처를 다 보듬을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동안 외로웠죠.라는 개똥철학도 건네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힘내라는 뻘소리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최후는 바닥에 묻은 케첩의 말로처럼 참 처참했지만. 그러면서도 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끝나버렸죠. 이 모든 것이 아 시발 꿈처럼 느껴지는 마지막이었기에 더 어떤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당신이 겪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절대 없어지지 않겠죠. 두 번째 당신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저 역시 그 푸른 드레스를 입은 살덩어리를 괴물이라 부르지 않을 자신은 없습니다. (아마 제가 제일 먼저 도망갈걸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기억될 거예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말이죠. 그게 정말 당신이 원했던 것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신.
그…. 주삿바늘은 한 번쓰고 버리신 거 맞죠? 어우.. 제발..
[이 글의 TMI]
1. 이렇게 자도 될까 싶을 정도로 연휴 내내 자는 중.
2. 이럴 거면 그냥 겨울잠을 자라.
3. 노동요 추천받습니다.
#영화리뷰 #최신영화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서브스턴스 #데미무어 #영화리뷰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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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지켜온 침묵을 벗어나게 해 준 것
숲 속
밖으로 나오기 싫었다. 분명히 자기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던 코오트. 그냥 무시할까 싶었지만 소녀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점점 더 굽어지는 허리. 집 안에 들어가도 숨고 싶은 기분이다. 침대 밑 공간으로 들어가는 코오트. 유달리 말이 없는 소녀 코오트에게 가족이란 족쇄 같은 존재다. 사실 이 집에 엄청난 경사가 있다. 바로 코오트의 동생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래도 코오트는 영 기쁘지 않다. 어두운 낯빛. 가족 안에서 유달리 겉돌던 코오트. 학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코오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에게 뭔가를 빌려 뭔가를 마시고 싶었던 코오트. 음료수 마시려고 책상에 놨다. 남자 애들이 그 찰나도 허락하지 않았다. 책상을 퍽 치고 지나간 아이들. 잔에 동동 띄어놓은 음료수가 모두 옷으로 튀었다. 화가 난 코오트. 하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코오트에게 침묵은 익숙했으니까.
아버지에게로 향한 코오트. 차에 탔다. 누군가를 태우는 코오트의 아버지. 어머니는 아니다. 젊은 여자였다. 이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더라도 아버지의 내연녀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리는 건 ‘경마 책 좀 읽으면 안 돼?’라는 말이다. 여전히 어두운 조명이 드는 집 안.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던 도중 부모님의 대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다. 바로 코오트의 동생이 나오기 전까지 주인공이 친척 집에 머무르기로 한 것이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집 하나. 중년의 여자가 환한 표정으로 코오트를 반긴다. 그 순간, 메말랐던 코오트의 삶에 화사한 빛이 내려온다.
밝거나 어두운 집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부분은 조명이었다. 글쓴이는 집의 대비를 어떻게 줬는가? 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도입부. 코오트가 처해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어두운 집. 가난한 집안이라는 경제적인 세팅이 있지만 한낮에 어두울리는 없다. 이야기에서 코오트의 원래 집이 언제 들어가는지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 연출은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어두운데 사람에 물건에 화면에 온갖 것이 다 들어가니 안 그래도 갑갑한 기분이 더 한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집에서 빛이 향하는 방향에 대해서 써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사촌 에블린에 집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이다. 주인공이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층계를 올라간다. 빛이 들어가는 방향은 환하지만 그 아랫부분은 어둡다. 이 색채 대비는 사실상 코오트의 내면세계와 대비된다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공간에 왔기 때문에 빛이 들었지만 아버지가 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둡다. 또 다른 연출요소로는 ‘속박’을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라는 점이다. 이는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다. 왠지 모르게 자유로워지는 느낌에 임팩트를 준 연출 역량이 돋보인다. 이렇게 영화는 소담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꼼꼼하고 섬세하게 미장센에 힘을 줬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영화에서 강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은 화법이다. 영화는 디테일한 부분을 잘 살려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글쓴이는 이 근거로 코오트의 캐릭터 세팅을 꼽고 싶다. 말이 없다는 것. 그동안 코오트 가족이 주인공을 기죽게 키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설정이 유효하다. 이 속성은 주인공의 어떤 특징과 이어질까? 사회성과도 이어진다. 이 인물은 이야기를 전개하며 부족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영화 내내 노출한다. 이 부족한 사회성에 관한 인물들의 리액션이 아주 흥미롭다. 또 부족한 소통방식으로 인해 에블린 가족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어떻게 대비되는지를 봐도 역시 흥미롭다. 단순히 기능적으로만 딱 갔다 붙여 놓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가족 설정 역시 이에 대한 리얼리티를 살리는 방식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말이 없다는 것. 왜 말이 없을까? ‘어떤 것’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반대로 주인공을 향한 어떤 종류의 말은 많다. 이런 요소들을 종합해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것은 주인공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말과 ‘어떤 것’이 동격에 놓이는 연출에 유심히 집중하신다면 감상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또 소소하게 살리는 요소들이 아주 흥미로웠다. 바로 말과 소의 대비다. 당연히 코오트가 시골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농장 묘사가 들어가기에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것은 도박을 묘사하는 방식이 되고 다른 것은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기능하게 한다는 점이 대비된다. 이는 후반부에서 비슷하게 대비된다. 두 가족의 입장? 후반부에 드러난다. 이 가족이 처해있는 상황이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극 중에서 물을 활용한 방식도 마찬가지다. 가장 결정적인 대비는 엔딩에서 드러나는데 이 부분까지 집중한 채로 보신다면 영화의 연출이 얼마나 꼼꼼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영관 좀 늘려줘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야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다. 이 부분은 역시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작동한다. 이 장면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짜여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확히 의/식/주의 요소를 영화에서 다 품고 있다. 우선 옷의 관점. 이 옷에 관한 연출은 이야기에서 핵심으로 작동하고 강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식과 주에 관한 부분이다. 먹는 것. 초반부 카이트에게 동생이 생긴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에서 가족들이 뭔가 먹고 있다. 여기서 어두운 조명 탓에 뭐 먹는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듯한 느낌이 있다. 초중반부를 넘어서 보면 숀이 카이트에게 주는 것들이 화면비에 비해 두드러지게 촬영한 부분이 이에 대한 예시다. 촬영으로 카이트의 내면 묘사를 구성한 것이다. 다음은 집에 대한 부분이다. 영화에서 카이트는 어떤 일을 벌인다. 당황하는 에블린. 이 사건에 대해 잘 생각해 본다면 역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어떤 집에서는 이런 행동을 벌이지만 자기 집에서는 침대 밑에 숨는다. 심지어 자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대비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의식주에 대한 부분을 어떻게 펼쳤는가? 주인공의 위치로 인한 대비(집)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전적으로 카메라의 방향과 관련이 있다. 주인공은 말이 없다. 왜 말이 없을까? 자기를 둘러싼 폭력은 잦지만 반대측면에서 부족했던 뭔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말이 없으면 어떻게 주인공의 심리를 보여주지? 주인공의 시점 쇼트다. 주인공이 어느 것을 바라보는가. 주인공의 표정은 어떤 형태인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주인공은 어떤 모습인가. 친절하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보다 코오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 것이다. 이는 각자가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와도 관련이 있다. 왜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전달이 이뤄지는가?를 보여준 이 영화가 수작으로 뽑힐 만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은 이렇게 우리가 그 감정에 동참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상영관이 터무니 없이 부족한 작품이지만 마석도의 주먹 한 방에 묻히기엔 아쉬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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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찾아온 토네이도와 함께 옛 기억을 쫓다
다시 찾아온 손님
이 영화의 주인공은 기상청 직원 케이트(데이지 에드가 존스)다. 평범한 직장인인 케이트. 하지만 이런 케이트에게는 거대한 상처가 있다. 어렸을 때 케이트의 꿈은 토네이도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케이트. 하지만 토네이도에 친구들을 잃고 나서 케이트의 마음에는 거대한 폭풍이 있었다. 하지만 애써 눈 감는다고 해서 뉴스를 안 볼 수가 있나? 여기저기에 들이닥치는 토네이도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케이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친구 하비(앤서니 라모스)다. 토네이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케이트. 하비에겐 빵빵한 팀이 있다. 본인과 함께 토네이도를 연구하자고 제의하는 하비. 케이트의 마음이 흔들리고 오클라호마로 향한다. 거기서 만난 토네이도 인플루언서 타일러(글렌 파월)와 함께 사소하게 부딪히는 케이트 일행. 이런 세 사람에게 초거대한 토네이도가 주인공 일행을 습격했다. 토네이도 전문가 세 사람과 각 팀원들은 이 자연재해에 맞서기 시작한다.
반복과 차이
이 영화는 훌륭한 재난물이면서 따뜻한 내면을 다룬 휴먼드라마이기도 하다. 우선 첫째. 영화 자체가 과거라는 모티브를 다뤘다는 점에 있다. 우선 케이트. 케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둘리는 인물이다. 이 설정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을 토네이도에 의해 잃었으니까. 그럼 극복하고 싶은 내지는 여전히 큰 상처로 남은 과거가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으니 이걸 극복해야겠지? 그런데 영화는 판에 박힌 듯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성장물로서의 장르적인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영화는 여러 요소를 덧붙였다. 이 성장서사가 1차원적이었으면 영화의 몰입감이 분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을 재난이라는 배경 하에 섬세하게 붙여놓았다. 글쓴이는 인간관계를 서로 엇갈리게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는데, 토네이도를 다루면서 인간 내면에 있어서도 탄탄한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온기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이 인간 관계성 묘사는 <미나리>가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불의 이미지를 가족 간의 연대와 병치시킨다는 점에서 극이 문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둘째. 이 영화는 인간관계성을 묘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여러 가지를 덧붙여 관객을 격려한다. 어떻게? 이 영화는 현재의 나를 통해 과거의 나를 극복하는 영화다. 한 마디로 성장서사다. 이 성장서사가 굳이 이런 플롯으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와 다른 예시인 <데드풀과 울버린>도 일종의 성장영화다. 둘은 과거와 유사점이 없는 사건을 마주하고 진짜 슈퍼히어로가 된다(MCU에 편입한다). 이 <트위스터스>는 <데드풀과 울버린>과 다르다. 오클라호마로 돌아온다는 공간적 설정, 케이트가 과거에 했던 시도, 케이트-타일러의 관계, 다시 찾아온 친구 하비, 어머니의 대사들까지 과거와 묘하게 다른 차이를 반복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 인물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과거를 현재로 돌아와 다시 겪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은 정말 중요하다. 왜?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 필연적으로 과거의 일이 맞는다는 보장이 없다. 영화는 이 간단한 명제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토네이도도 휘몰아치고 두 남자도 등장시키고 하비를 핵심인물로 내세우며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토네이도도 이런 우리의 모습과 별 다르지 않다. 토네이도가 인류에 등장한 지 굉장히 오래됐을 것이다. 그 원인을 몇 백 년 동안 조사해 온 인류라면 그걸 막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자연재해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런 토네이도의 속성은 글쓴이가 앞에 쓴 영화의 핵심과도 닿아있다. 과거에 겪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오늘은 다르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
이 영화를 보며 느낀 것은 정이삭 감독의 덕업일치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이야기 외 내적으로 핵심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첫째. 외적인 부분. 어떤 영화 든 간에 연출자가 지닌 과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점이다. 글쓴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향취가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재난을 보여주는 카메라가 그렇다. 영화 중후반부에 숙박업소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다. 이 장면은 스필버그의 <쥐라기 공원>과 <죠스>에서 봤던 연출법이다. 뭔가 기괴한 이미지를 보여준다던가 사운드로 관객들을 휘어잡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클래식한 이미지들이다. 무언가를 꽉 잡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타이타닉>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2024년에 구현했다. 그리고 영화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타일러를 묘사하는 방식도 고전적인 섹시가이(?)다. 이 고전적인 섹시가이가 무슨 말이냐. 뭔가 비주얼이 깔끔하지 않다(대표적으로 수염자국). 성격도 잘난 체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나르시시스트다. 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여주인공을 단단하게 사로잡으며 스트레이트로 직진한다. 겉으로 단단한 내면을 그대로 노출하며 직진하는 서양 사나이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매그놀리아>, <탑건>에서 톰 크루즈나 <델마와 루이스>에서의 브래드 피트를 떠올렸다. 두 영화를 참고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감독이 과거의 것들을 가져온 근거가 된다.
다른 부분. 글쓴이는 이 영화가 자연에 대해서도 어떤 걸 말하고 싶었던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정이삭 감독이 어렸을 때 경험했던 두 가지가 그대로 핵심이 된다. 첫째는 어렸을 때 구경했던 토네이도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어렸을 때 구경했던’이라는 뜻이다. 좀 찾아보면 정이삭 감독이 어렸을 적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때 토네이도를 구경했던 기억이 선명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동경했다고 전해진다. 이 관점이 영화 안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토네이도에 도전하는 인간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자연재해의 공간적 배경인 오클라호마가 <미나리>의 일부 공간과 겹쳐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 토네이도에 대한 경외감은 엔딩 하이라이트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토네이도가 이 공간을 공격하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감독이라는 점은 창작자가 ‘이곳’과 토네이도를 동일시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둘은 하나가 되어 <트위스터스>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도착했기 때문에.
토네이도가 뭐게
이 영화에서 글쓴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장르적인 재미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재난영화다. 그럼 그 재난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 몫을 철저하게 해낸다. 이게 토네이도를 실제로 만들었을 리는 없다. 그건 크리스토퍼 놀런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하다. 그럼 VFX로 구현했다는 의미인데. 이 자세한 부분들을 어떻게 구현했는지는 관객들이 다 다른 장점을 말할 것 같다. 정말 잘 만들어서 토론의 여지가 다분한 토네이도였다는 뜻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장점은 물건이나 사람이 날아가는 방향이다. 이게 터무니 없으면 맥없이 날아갈 것 같은데 빠른 속도와 정확한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어 아주 생생하다. 이 토네이도가 인물들의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재난 외적인 이야기도 잘 만들었지만 내적인 이야기도 잡았으니 장르물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이 장르적인 재미로서의 토네이도는 후반부에 이르러 어떤 변화를 표현한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에서의 토네이도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암시하고 있다. 어리면 잘 모른다. 저거 할 수 있겠는데? 객기 부린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처가 늘어나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에게 치유받는다고 했던가. 과거에도 ‘이 것’이었고 지금 현재도 ‘이 것’을 만났지만, 또 둘 중 뭐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토네이도처럼 피할 수 없이 사람에게 다가오고 강력한 상처를 만든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영화를 다 본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토네이도와 ‘그 어떤 것’ 역시 위의 문장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엔딩에서 특히 이것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 이 연출이 이물감이 없이 자연스럽다는 점은 재난영화로서의 특징과 변화구를 둔 영화의 선택 둘 다 빛내는 좋은 선택이었다.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지어진다.
아는 것 그 자체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타일러 일행 묘사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이 인물의 설정을 잘 살린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일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크리에이터이면서 섹시가이다. 그럼 뭐가 필요할까? 비전문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전문성 중 하나인 경험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영상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준비단계에 대한 부분이 더 들어갔어야 했다. 만약 글쓴이가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면 카메라 장비에 관한 부분을 더 보여주면서 타일러의 과거 서사를 더 넣었을 것 같다. 영화가 불필요한 걸 다 잘라내고 간단한 플롯으로, 고전적인 영웅서사로 질주하기 때문에 이 선택은 당연하게 따라오는 단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런 초거대한 자연재해에도 의외로 무덤덤한 타일러의 행보가 의아하기도 했다. 또 섹시하다는 이미지도 정이삭 감독이 자기 것이 아닌 걸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글쓴이라면 영화에서 타일러의 피지컬적인 능력이나 리더십을 더 부각하는 장면을 넣었을 것 같다. 인물의 개성이 납작하기 때문에 초반부가 진부해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후반부의 장르 변주가 이 인물의 다양한 내면에서 온다는 점을 생각해 봐서도 그렇다.
영화 잘하시네
<트위스터스>에 대한 글쓴이의 총평은 좋은 장르영화라는 것이다. 초반부가 납작해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영화 전부를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나리>처럼 소담한 이야기를 바란 관객이 있을 수도 있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미나리>와 비슷하면서 아예 다른 점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나리>를 넘은 정이삭 감독의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러웠다. 8월 14일 4편의 영화가 대규모로 개봉하며 빅매치가 예고된다. 이 빅매치에서 의외의 복병이 되기 충분한 <트위스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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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거기까지
요즘의 마블은 앞선 비전을 제시할 때보다 그들이 세운 과거의 영광을 반추할 때 빛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그랬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그랬으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도 그랬다. 데드풀은 현재를 살아갈 때 가장 빛난다. 데드풀이 생사가 오가는 액션 상황에서 그런 농담들을 뱉는 것은 그가 현재에 충실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뱉어내는 농담이 바로 지금, 그 상황에 충분한 재미를 제공한다면 그 농담이 여태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설정에 미칠 영향에 상관없이 그냥 뱉어내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데드풀 시리즈는(물론 이 영화 이전까지 두 편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한 번도 발전을 보여주거나 매너리즘을 타파한 적이 없다. 그것은 데드풀 시리즈의 태생적 한계이다. 그리고 데드풀도 거기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을 것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에는 다양한 맥락들이 관여되어 있다. 디즈니가 20세기폭스를 인수합병하며 폭스의 히어로들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편입되었고, 폭스의 히어로 영화들 중에는 엑스맨 시리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잊혔거나 망한 영화들도 많았으며 이러한 상황에 유용하기 그지없는 마블의 멀티버스 전략은 이미 실패만을 거듭했고, 뿐만 아니라 디즈니의 폭스 인수합병 과정에서 수많은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은 일도 있었기에 디즈니는 폭스와 그들의 여태까지의 작업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보여주어야 했다... 등등. 이 영화를 둘러싼 이러한 복잡한 영화 외적 맥락들을 고려할 때 <데드풀과 울버린>의 대답은 꽤 슬기로운 대답이다. 이 영화엔 엑스맨 시리즈 최악의 작품이라 평가받는 <엑스맨3> 속 뮤턴트들이 대거 등장하며, 그야말로 '실패한' 히어로들인 갬빗과 엘렉트라, 이제는 잊힌 히어로인 웨슬리 스나입스의 블레이드와 같은 캐릭터들이 마침내 제대로 된 엔딩을 맞이한다. 말하자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실패한 영웅담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여태까지의 폭스의 히어로 영화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이 영화는 실패한 영웅담에 대한 헌사라는 주제의식의 연장선으로 마블의 실패한 멀티버스 사가에 대한 자조까지 다룬다. 데드풀의 입으로 그것을 직접 언급하기도 하고, 후반부 데드풀과 울버린이 수많은 데드풀들을 피 튀기며 해치우는 장면은 멀티버스 설정에 대한 자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데드풀과 울버린>의 이러한 발걸음은 이 영화에 주어진 일종의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영리하고, 마블 팬들이 가장 가려워했던 곳을 긁어주었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이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사실 바라볼 생각이 없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지닌 (결국 데드풀 시리즈라는)태생적 한계이다. 이 영화가 디즈니의 폭스 인수를 둘러싼 복잡한 맥락들을 창의적으로 오락에 이용하고, 멀티버스 프로젝트를 툭 까놓고 자조한 것은 철저히 농담의 방식을 통한 것이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다면 곤란하다. <데드풀과 울버린>이라는 선언을 끝으로 마블은 앞으로의 멀티버스 사가를 완전히 엎어버릴 수 있을까? 물론 마블이 이후의 방향성을 바꾸는 과정 속에서 필모그래피상의 위치를 고려할 때 <데드풀과 울버린>이 상징적인 분기점으로 남을 순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드풀과 울버린>이 어떤 대안을 제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데드풀과 울버린>은 마블의 구세주인가?'라는 질문은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데드풀은 그 말 자체를 농담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의 재미는 여전히 과거의 순간에 골몰하는 마블과 역시 현재의 쾌락에 몰두하는 데드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둘 중 미래를 보는 쪽은 없다. 조금 신선해질 뻔했던 <데드풀과 울버린>은 거기서 멈춘다. 물론 데드풀은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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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인간에서 인간까지
SYNOPSIS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 커스틴 존슨이 25년간의 촬영 경력 동안 포착해 낸 푸티지 영상을 직조하듯 풀어 낸다. 영상 제작자와 대상들 사이의 관계, 카메라의 객관성과 개입 사이의 긴장, 그리고 날것의 현실과 가공된 이야기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영화.
PROGRAM NOTE
감독으로서 영화는 곧 ‘이야기’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감독은 이야기 안에서 배제된 촬영 현장의 목소리에 대해 늘 아쉬움과 한계를 느끼고는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영화 〈카메라를 든 사람〉은 무엇보다 예외적이며 뛰어난 작품이다. 이는 25년 동안 촬영감독으로 활동한 커스틴 존슨만이 가지는, 감독과는 다른 시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영화는 오랜 기간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를 통해 만난 사람과 감정을 주고받았던 순간을 엮어서 만든 커스틴 존슨만의 자서전이다. 마치 잘려진 천 조각들이 ‘퀼트’라는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본 듯하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5년 만에 다시 찾은 보스니아의 한 가족과의 대화와 ‘작은 상영회’는 이야기에서 놓쳐버린 현장의 순간들이 어떻게 환생되고 의미화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다큐멘터리를 하다 보면 감독의 그릇만큼 세상이 보일 때가 많다. 현장에서 만난 이들에 대한 깊은 탐색과 교감이 쌓여 결국 자신의 아이들과 치매를 가진 어머니에게로 카메라가 향할 때, 어떻게 카메라가 한 개인에게 역사가 되어 성숙한 시선을 갖게 하는지, 또한 그것이 관객에게 어떠한 울림을 주는지, 이번 영화제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권우정]일전에 넷플릭스에서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주변에서 알음알음 추천을 받고, 왓챠피디아도 내가 4.1점을 줄 거라고 했으므로. 역시나 좋았다. 딕 존슨의 죽음을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딕 존슨의 딸이자,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으로 25년을 살아온 감독 커스틴 존슨의 작품이 상영된다고 해서,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첫 영화로 냉큼 골랐다. 그리고 역시나, 좋았다.
이 작품은 25년 동안 수많은 작품에 참여하면서 그가 촬영한 풋티지 영상을 모아모아 새로이 편집한 것이다. 커스틴 존슨 감독은 이것을 자신의 회고록처럼 여겨 달라고 했다. 타이틀이 떠오르기 직전 보이는 장면은 도로만이 펼쳐진 넓은 평원에 번개가 치는 순간과 우렁찬 천둥 소리가 포착되는 것, 그리고 관객인 나와 동시에 깜짝 놀란 숨을 들이켜는 촬영자의 소리. 기둥 뒤에 공간 있듯, 카메라 뒤에 인간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굉장히 다양한 영상이 조각조각 모여 있다. 스레브레니차 집단 살해의 기억이 남아 있는 보스니아처럼 역사의 어떤 순간도 들어 있고, 복싱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담는 장면도 들어 있다. 복싱 코치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가까이서 찍는 게 진리라고 말한다. 복싱도 촬영도 가까운 데서만 가할 수 있는 일격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그 가까운 촬영의 일격을 연타로 날리는 걸작이다.
얼핏 평이해 보이는 장소에서도 ‘흥미로운 요소’를 찾는 것이 카메라의 힘임을 느끼게 한다. 얼핏 단조로워 보이는 도시의 풍경에서, 벽의 포탄 자국이, 93-94년 사이에 사망한 사람들의 묘비가, 스레브레니차를 잊지 말라는 그라피티가, 카메라에 점점이 담기면 그곳은 더 이상 평이한 도시가 아니게 된다.
세계 곳곳, 각기 다른 세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성실히 따르며, 카메라는 다양한 것을 담는다. 삶의 ‘흥미로운’, ‘독특한’ 이야기가 있는 단면마다 커스틴 존슨의 카메라가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조각조각들이 모인 곳, 소실점에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바로 인간을 담기 위해 그의 카메라는 그토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 차창 너머로 찍을 수밖에 없는 나라들도 있다. 알 자지라 주요 인물들이 수감된 예멘의 감옥 앞이나 카불처럼 위험한 곳들이 있다. 그러나 거기서도 유리창을 닦는 손이 흥미롭게 담겼다고 말하는 ‘기술 전문가’인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잊지 않는 ‘예술가’가 있다.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익명성을 위해,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손과 목소리만 담은 인터뷰 영상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전해진다. 인터뷰의 가장 앞 단어를 건네주면서, 공감하고 경청한다. 카메라의 역할은 결코 응시에만 그치지 않는 것이다. 기술과 예술을 동원하여, 담고 전달하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어머니의 모습도, 집단 살해의 기억 이후에 살던 곳으로 돌아온 가족들이 거둔 알알이 보석 같은 열매도, 눈을 다쳤지만 똑똑한 소년으로만 보였던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증언도… 촬영자에게나 감상자에게나 뚜렷하게 각인되는 이런 영상들은, 카메라의 역할이 응시에만 그쳤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 흘렀던 역사의 기억들과, 그 자리들이 오늘날은 평화로워진 장면을 대조해서 보여주는 것도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편집한 손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의 보여주기는 사실 적극적인 말하기이다. 무수한 이들의 피가 흘렀던 초원에 오늘날 얼마나 햇살이 곱고 들꽃이 살랑거리고 있는지, 단지 고운 들판을 보여줄 뿐인데 왜 우리는 참담해지는지. 이 적극적인 말하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 기록의 행위가 없다면 우리 눈에 그저 예쁜 초원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그토록 거대한 기억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기록하고 전달하는 한, 조각도 이야기가 된다.
커스틴 존슨의 작업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이것이 팩트와 기록이 모여 역사가 되는 과정과도 비슷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각조각 모인 이야기들이 새로운 진실을 그려내고, 풋티지 영상이 모여 새로운 작품이 되는 과정이다.
영화는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도 함께 담았다. 현장 프로듀서 겸 통역으로 보스니아에서 내내 동행한 이의 말처럼. 우리의 선택이지만, 더 오래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해소도 필요하다는 것을.
때로는 몰랐던 이야기 앞에서 눈물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대답을 회피하는 인터뷰이에게 다른 주제로—이를 테면 옷 같은 얘기로— 말을 돌리기도 하는 커스틴 존슨의 모습을 보며… 전문가가 된다는 건 단순히 기존 하던 일에 노련해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기 하는 일 안에서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직면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흔히 전문가가 된다고 하면, 마치 감정은 무디게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감정을 잘 해소하고 정돈하는 것이 오히려 필요한 것 같다. 꼭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배우나 소위 ‘감정 노동’으로 일컬어지는 일들이 아니어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대부분 감정을 사용하며 일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인간의 시선에서, 시선 끝의 인간까지. 다큐멘터리는 결국 그런 작업이 아닐까.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경계를 넘어서서, 보여지지 않는 그 너머까지, 그 소실점에 있는 인간에까지 시선이 미친다면 그 사람이 어느 직군에 있든 전문가 소리를 들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 나의 조각 모음은 어떤 회고록의 모양이 되어 있을까. 커스틴 존슨의 인생 thanks to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엔딩 크레디트가 쭉 올라가는 동안 생각했다. 나의 크레디트에 남기고 싶은 이름과 마음들을. 이 영화에서 보고 배운 아름다운 시선이 거기에도 한 자락 묻어나 있다면 참 좋겠다.
2023.08.25. 14:00-15:43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6관
2023.08.28. 19:30-21:13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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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워 오브 도그> 리뷰
<파워 오브 도그>(감독 제인 캠피온)
베네딕트 컴버배치, 커스틴 던스트, 제시 플레먼스 등 출연
2021.11.17 개봉
<파워 오브 도그>를 연출한 제인 캠피온 감독은 뉴질랜드 출신으로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여성 영화 감독 중의 한 명이라고 알려져있다.
전작으로는 <피아노>, <내 책상 위의 천사>, <여인의 초상>, <브라이트 스타> 등이 있다.
특히 <피아노>(1993)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인 명성을 알리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파워 오브 도그>로 돌아온 제인 캠피온은 역시나 그의 명성을 증명하듯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진출, 은사자상을 수상하여 다시 한번
그를 기다려온 많은 영화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파워 오브 도그>는 1925년 미국 몬타나에서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을 중심으로 그의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와 주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필은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여 막대한 재력은 물론 위압적이고 마초적인 매력으로 주변엔 늘 그를 따르는 동료들이 있다.
어느 날 그의 동생 조지는 로즈(커스틴 던스트)라는 과부와 결혼하게 되고 로즈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를 가족으로 맞이한다.
갑작스런 동생의 결혼으로 인해 왠지 모르게 필은 분노하게 되고, 그 분노는 로즈와 그의 아들 피터에게 향한다. 영화는 바로 그들 관계에서는 오는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주된 영화의 장치로 극을 이끌어간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서부터는 주의 부탁드립니다*
[필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필은 표면적으로는 마초적이고 위압적이고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로 나온다. 열댓명의 무리를 이끄는 리더로 보이며 로즈를 처음 만난 식당에서도
로즈와 그의 아들 피터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비아냥대며 놀려대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필의 전사를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그는 오래 전 그가 존경하고 추앙했던 '브롱코 헨리'라는 남자 인물이 언급된다.
단순히 한 인물을 존경하는 것을 넘어서 필이 사랑하는 남자였던 걸로 예상이 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20년대는 환영받지 않고 배척되었을 감정이었을 것이며 '브롱코 헨리'가 세상을 떠난 후 필은 극심한 외로움을 겪었을 것이다.
예상컨대 그 후, 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본색을 감추기 위해 더욱 마초적이고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인물로 변해갔을 것이다.
[필은 로즈의 아들 '피터'와 어떤 관계였을까]
필은 갑자기 결혼 소식을 전한 조지와 그의 가족(로즈와 피터)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자신들의 재산을 위협하는 경계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지만, 비교적 우애가 깊었던 동생 조지를 빼았겼다는 일종의 질투심이 더 컸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필은 피터를 놀려대고 괴롭히지만 점차 그 둘은 가까워진다. 필은 피터에게 승마를 가르쳐주고 밧줄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하며 피터와 점차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예전에 필이 존경하는 '브롱코 헨리'와의 관계처럼 필과 피터는 어느새 가까운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필의 입장으로 본다면 예전 브롱코 헨리를 떠올리게 되는 '사랑'의 감정을 암시하게 된다.
[로즈와 그의 아들 피터의 입장으로 바라보다]
로즈는 조지와 결혼하고 필과 조지 가족의 구성원이 되면서 가장 심리적인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그는 필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부터 불안해하며 급기야는 알코올에 의존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로즈와 조지의 결혼 생활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기도 하다.
필과 자신의 아들 피터가 점차 가까워지는 모습을 목격하기 시작하면서 로즈의 불안한 감정은 최고조에 이른다.
피터는 겉보기에도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영화 초반부에는 필과 그의 무리들에게 놀림을 받으며 상처 받기도 한다. 피터 역시 조지의 가족 구성원이 되면서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피터는 어머니 로즈를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괴롭히는 필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피터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필과 가까워지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며, 그 계획은 복수의 형태가 될 것이고 차근차근 계획을 실천하기에 이른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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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베르헤르의 <로봇 드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리듬감이라고 생각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영화라면 카메라가 놓일 공간과 조명의 위치로 인해 인물 동선과 장면화의 많은 제약들이 애니메이션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른데 픽사, 디즈니,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 모두 그들만의 독특한 리듬감이 전달하는 감흥은 꽤나 아름답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로봇 드림> 또한 그 특유의 리듬감이 꽤나 아름답다. 하지만 이 리듬감에는 독특한 무언가가 숨어있다고 느껴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감독이 영화를 사랑한다고 느껴지는 어떤 확신에서 오는 감흥일 것이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많은 오마주들을 확인시켜준다. <이터널 선샤인>, <오즈의 마법사>은 감독이 인정한 레퍼런스고 관객들은 <A.I> 같은 영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가장 중요한 레퍼런스는 뮤지컬 영화인 <파리의 아메리카인>이다. <오즈의 마법사>와 동시에 떠오른 이 뮤지컬 영화가 기억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외에도 <첨밀밀>이나 <라라랜드>, 자크 타티 영화의 면면들이 보이고, 핼러윈 날에는 <샤이닝>, <나이트메어>, <뱀파이어> 등이 보인다. 물론 <사이코> 같은 영화들은 분명하다. 이 레퍼런스들은 단지 씨네필들을 위한 숨은 그림 찾기는 아니다.
두 번째로는 <로봇 드림>에서 대사는 들어오지 않는다. 무성 영화의 리듬감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그와 로봇의 움직임과 쇼트들의 결합은 꽤나 인상적이다. <Septepber>가 흘러나올 때의 몽타주 시퀀스는 흥미롭다. 특히 이 음악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딸 생일이 9월이어서 사용한 음악이라고 밝혔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물론 가사에서 명확하게 가리키는 날짜가 9월 21일이고, 감독의 딸 생일도 9월 21일이다. 영화에서 해수욕장이 폐장되는 건 9월이다.
우선 영화 제목부터 보자. 로봇 드림. 로봇의 꿈.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이 제목에 의아했다가 수긍했다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도그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외로운 도그, 옆에 있어줄 누군가를 찾다가 로봇을 주문한다. 로봇은 친구가 되고, 특이한 사정으로 인해 헤어진다. 그 뒤로는 도그와 로봇의 시간을 각각 보여준다. 하지만 제목이 로봇 드림인 것은 로봇의 꿈은 세 번 나오고, 도그의 꿈은 한 번 나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로봇의 꿈은 세 번 나오고, 도그의 꿈은 한 번 나오는가.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의 질문이었다.
복기해 보면 로봇의 첫 번째 꿈은 도그를 찾아가지만 도그가 집에 없다. 두 번째 꿈은 도그를 찾아가서 그를 보게 되지만 그는 다른 로봇과 있다. 세 번째 꿈은 위에서 언급한 <파리의 아메리카인>처럼 뮤지컬 시퀀스로 진행되면서 하나의 화폭 안의 꽃들이 도그의 형상으로 끝맺음을 한다. 혹은 <오즈의 마법사>로 이야기해도 될 것이다. 이 꿈들을 이어붙여보면 도그를 찾아갔지만 없었고, 배신당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도그를 기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그의 꿈은 어떠한가. 도그의 꿈은 로봇의 꿈보다는 훨씬 꿈처럼 느껴진다. 눈사람을 만나고, 그와 함께 볼링을 치러 간다. 볼링장에서 웃음거리가 된 도그는 꿈에서 깬다. 마치 악몽을 꿨다는 듯. 도그의 꿈엔 로봇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를 원하지만 미끄러진다. 이건 마치 도그가 로봇과 헤어진 뒤에 겪는 일들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도그는 로봇의 구조를 실패한 뒤 스키장에서 친구를 사귀어보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덕이라는 멋진 오리를 만나 사랑하지만 이 역시 실패한다.
여기서 <로봇 드림>의 제목이 왜 도그 드림이 아니라 로봇 드림인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도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지만 로봇은 도그를 사랑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잔인함 중 거의 대부분은 로봇이 당하는 폭력에 맞춰져 있다. 로봇은 다리가 잘리고 폐기처분된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살해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인 것인데 그렇게 잔혹한 행위에서 자신을 살려낸 또 하나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애인(?)이다. 로봇은 아직 도그를 그리워하지만 새로운 사랑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로봇은 이제 꿈을 꾸지 않는다. 상상을 한다. 아니, 정확히는 가정을 한다. 자신이 도그와 재회를 하게 된다면 관계가 꼬일 것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그렇기에 로봇은 도그와의 재회를 포기한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플래시 포워드는 그들이 함께 했을 미래를 그린다. 하지만 로봇의 가정은 그들이 함께 한다면의 미래를 그린다. 함께 한다면이라는 가정은 함께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가정이다. 나는 여기서 위험한 혹은 어쩌면 소설일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나 이야기하고 싶다.
왜 배경이 1980년대 뉴욕인가. 감독은 왜 뉴욕에 보내는 러브 레터라고 이야기했을까.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곱씹어 보면 이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들과 예쁘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서 불길한 이미지들 몇 가지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히치콕의 <사이코>,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시리즈를 낳은 <나이트메어>의 이미지들과 함께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우디 앨런의 <맨해튼>이 나왔던 것도 빼놓을 순 없겠으나 감독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양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여기에다가 하나 더. <Septepber>는 9월이다. 9월과 세계무역센터. 그리고 80년대는 중동의 전쟁이 미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그때가 아닌가.
미국의 1980년대는 60년대부터 이어진 불바다의 시대를 지나 안정된 시기로 일컬어지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백래시 현상부터 시작하여 무수히 많은 내적 갈등을 지닌 시기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는 바는 <로봇 드림>은 뉴욕이라는 도시가 또 하나의 주인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로봇이 해수욕장에 있을 때 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태어난 아기 새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연상한다. 이 희망찬 동화 아래에는 물질주의가 팽배하게 자리 잡는다. 이제 곧 고물상이 다가와 로봇을 수거해 만신창이를 만들고 분해할 것이다.
도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멋진 덕을 만난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고, 멋있게 질주를 한다. 게다가 성격도 아주 쿨하다. 마치 그녀가 진정한 사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떠나버린다. 아메리칸드림의 허상. 결국 도그는 생명체를 만나지 못하고 방수 로봇을 구입(!) 한다. 이 영화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고 동물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우리는 동물과 로봇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한다. 만약 로봇이 생명체라고 인지되었다면 그는 폐장된 해수욕장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혹은 다리가 잘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분해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가 끝나고 든 즉각적인 생각은 성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왜 4인의 결합은 불가능 한가였다. 너무 보수적인 시각 아닌가. 인간 세상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인데 왜 그것이 불가능하냐는 불만에 툴툴거렸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제는 알겠다. 4인의 결합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곳이 뉴욕이기 때문이다. 도그가 로봇을 구해내지 못한 것이 도시의 규율 때문인 것처럼 로봇은 뉴욕의 규율 때문에 도그와 재회하지 못한다. 80년대 뉴욕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굉장히 엄격한 곳이다. 희망찬 곳이었지만 눈물이 들어찰 공간이다.
2024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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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질 결심, 사랑의 시간차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영화
?Rabbitgumi 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이 개봉했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탔던 영화인데요.
탕웨이와 박해일이 주연을 맡았죠.
이번에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는 다르게 좀더 말랑말랑한 영화에요.
여전히 미장센은 아름답고 화면전환도 무척 좋습니다.
두 배우의 연기도 좋죠!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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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결말포함 #영화리뷰 #위커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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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험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는 이름난 무녀 ‘모화’
아들 ‘욱이’를 절에 보내고 아픈 딸 ‘낭이’를 애지중지 키우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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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 자신의 삶을 점점 흔들기 시작하는데...
스러지는 모화의 삶, 마지막 굿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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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텍사스 전기톱 학살 2022> 공식 예고편
텍사스의 외진 마을에서 살가죽 가면이 사라진 지 50여년. 꿈에 부풀어 이곳에 도착한 젊은 친구들이 그가 숨어 살던 은신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이제 다시 깨어난 살인마가 무시무시한 정체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