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1-30 11:14:31
주인공에게 보내는 편지
영화 [서브스턴스] 리뷰
이 글은 영화 [서브스턴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한국어를 매우 잘한다는 가상의 상황에서 편지를 받았다고 제발 믿어주라(?)

리지 씨에게.
안녕하세요.
우선 너무 늦게 당신의 이야기를 영화관에서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저 역시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라는 같잖은 헛소리를 최근까지도 들으면서 자란 사람이기에. 당신의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참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먼저 영화를 본 친구들은 분명 징그럽고 피 튀기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막상 영화관을 나올 때 저를 지배했던 감정은 당신을 향한 슬픔과 동병상련이었습니다. 이런 감정의 부조화는 마치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의 관계처럼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마음이 꽤 오랫동안 복잡했어요. 어쩌다 거울 속의 당신을 스스로가 미워하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에 제가 감히 답을 낼 수도, 내기도 어려웠거든요. 저의 얕은 생각과 비루한 기억력을 거스르고 또 거슬러 올라가서. 그 미움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를 더듬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답(?)이 나오더라고요.
단 한마디였습니다. 당신의 빛남(sparkle)을 가져간 것은. 타인. 그것도 당신보다 더 나이가 들었으면 들었지. 아니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남자의 단 한마디. 아마도 당신은 여태껏 스스로 빛을 내는 별(항성)인 줄 알고 살아왔을 텐데. 그 비수는 참 힘이 세서. 당신의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던 핵융합의 심장부에 꽂혀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당신 안의 반짝임을 스스로가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의 평판을 반사해야만 빛나는 행성이 되어버린 순간이라고 할까요. 아, 그리고 저는 당신이 새우를 씹던 하비의 입을 찢어놓지 않았다는 그 절제력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저였으면 포크로 아마 콧구멍을 후벼 팠을 거예요.

한국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은교]에서는 이런 문장(대사)이 있습니다. 너의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말이죠. 분명 당신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패배감과 상실감.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 빛날 수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도 없으니 반사되어 빛나기라도 할 수 없다는 초조함이 아마도 수의 탄생을 부추기는 힘이 되어버렸으리라고 생각해요.
나였어도 그랬을 것입니다. 저 역시 또 다른 나의 탄생을 막을 수 없었을 거예요. 과연 누가 당신의 선택에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그리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가정을 한다면. 차라리 저는 수의 탄생 이후에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어쨌거나 서브스턴스 제공사(?)측의 말처럼 당신과 수는 하나였으니까. 두 사람 간의 균형이 지켜질 것이라는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렇지 못했어요. 당신이 멍하니 TV앞에 앉아서 수의 탄생 전 보다 더 슬픈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과의 데이트에 앞서 스스로의 모습을 부정이라도 하듯 립스틱을 빡빡 닦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미워하는 듯한 당신의 모습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언젠가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거든요.
물론 그 어떤 위로도 당신에겐 통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수를 탄생시킨 것은 당신이고. 마르지 않을 것만 같은 젊음을 누리고 싶었던 것도. 그리고 그토록 증오했지만. 어쩌면 당신에겐 가장 필요했을 하비의 인정을 바랐던 것도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다시 한번 더 빛나고 싶다는 스스로의 욕망이 이토록 큰지. 당신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욕망이라는 게.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깊이의 우물 같은 것이니까요.

육신이라는 게 참 덧없지요.
분명 미워해 마지않던 50대의 당신이었잖아요. 하지만 그마저도 수에게 하루 이틀, 야금야금 빼앗기고 난 후의 당신의 눈빛은 참 아팠습니다. 그리워하고 있더군요. 커다란 액자 속 스스로가 미워했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절박감은 수에게도 찾아왔죠. 그녀가 늦게 깨달은 것인지. 당신이 일찍 깨달은 것인지. 줄 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의 치아가 뽑혀나가는 그 순간만큼은 그저 한 사람의 절박함과 공포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토록 기다렸던 시간의 정중앙에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기록되어야 할 그 순간에. 피를 흘리다 못해 분사하는 당신의 모습은 여태 하고 싶었던 본심을 모두에게 전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괴물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괴물인가. 아니지, 우리 모두 괴물인거지.라고 울부짖는 것만 같았어요. 마치 영화 [샤이닝]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 괴기스럽기도, 또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는 장면에서. 저는 허망하게 흩어지는 당신의 살점과 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어요. 주변 세탁소에서 기함을 토하며 그냥 이 옷을 버리라고 말할 것 같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꼭 당신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아 물론 정상적인?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피를 그만큼 흘릴 수도 없을뿐더러 그만큼 흘리면 명예의 전당까지 기어갈 힘도 없겠지만. 이것은 저의 직업병이며 영화적 허용이라 보고 넘어가도록 하죠(?)

마지막 인사를 뭐라 해야 할지 참으로 많이 망설였습니다.
당신은 그래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이해한다 라는 뭉뚱그린 말로도 그간 입은 상처를 다 보듬을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동안 외로웠죠.라는 개똥철학도 건네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힘내라는 뻘소리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최후는 바닥에 묻은 케첩의 말로처럼 참 처참했지만. 그러면서도 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끝나버렸죠. 이 모든 것이 아 시발 꿈처럼 느껴지는 마지막이었기에 더 어떤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당신이 겪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절대 없어지지 않겠죠. 두 번째 당신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저 역시 그 푸른 드레스를 입은 살덩어리를 괴물이라 부르지 않을 자신은 없습니다. (아마 제가 제일 먼저 도망갈걸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기억될 거예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말이죠. 그게 정말 당신이 원했던 것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신.
그…. 주삿바늘은 한 번쓰고 버리신 거 맞죠? 어우.. 제발..
[이 글의 TMI]
1. 이렇게 자도 될까 싶을 정도로 연휴 내내 자는 중.
2. 이럴 거면 그냥 겨울잠을 자라.
3. 노동요 추천받습니다.
#영화리뷰 #최신영화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서브스턴스 #데미무어 #영화리뷰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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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2021)
* 이 리뷰는 영화 <웬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웬디> 정보
감독: 벤 자이틀린 (대표작: 비스트)
출연: 데빈 프랑스, 야슈아 막, 개빈 나퀸, 게이지 나퀸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11분
개봉일: 2021.06.30 예정
피터팬 속 웬디의 재해석
시골 마을에서 식당일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어린 소녀 "웬디". 엄마의 식당 일을 도와주는 착한 아이이지만, 학교와 식당 일을 오가는 반복적인 삶에 바깥 세상과 새로운 모험에 궁금증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유령 기차와 함께 신비함을 품은 자유분방한 소년 '피터'가 웬디 앞에 나타나고, 웬디는 쌍둥이 오빠 "더글라스"와 "제임스"와 함께 뜻밖의 여정을 떠난다.
무작정 기차에 몸을 싣은 웬디와 오빠들은 피터를 따라 바다를 건너 웅장한 화산이 있는 황량한 섬에 도달한다. 무인도 같은 섬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고는 피터와 몇몇 흑인 아이들, 그리고 몇 년 전 웬디가 살던 마을에서 사라졌던 '토마스' 뿐이다. 오직 아이들 뿐인 이곳은 늙지 않고 영원히 어린 아이로 살아가는 공간, 즉 동화 속 '네버랜드'다. 이곳에서 수장인 피터에 대한 믿음을 잃고, 슬픔과 현실적 감각이 머릿속에 드리우는 순간 급격히 늙어버리고 만다. 판타지 같은 공간에 쉽게 적응하며 하루하루의 모험을 헤쳐 나가는 웬디와 형제들 앞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네버랜드의 이면이 밝혀진다.
해체주의 수준의 원작 변형
디즈니 동화 속 <피터팬>을 재해석한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원작과 비교했을 때 영화 <웬디>는 외면적으로 딴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터팬'은 귀여운 초록색 의상에 짓궃은 장난기가 묻어난 순수한 소년의 모습이다. 하지만, 본작에 등장하는 '피터'는 캐릭터 설정부터 흑인 소년으로 바뀌었고, 성질 또한 포악하고 독선적이다. 동화 속 '네버랜드'로 비춰지는 섬의 자연 경관 또한 늙지 않는 어린 아이들의 동심으로 채워진 순수한 판타지의 공간으로 보기 어렵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은 아이들에게 위험천만한 순간들을 제공하고, 아이들은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시종일관 꾀죄죄한 모습으로 생활하며 생존을 위한 아이들의 의식 또한 잔혹하고 과격하다. 동화 속에서 한껏 포장되었던 '네버랜드'의 장면을 현실로 가져왔을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다. 사실상 '피터'와 '웬디'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가 <피터팬>과 관련된 작품이라는 것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수동적이었던 웬디의 변화
<웬디>는 2021년 작품인만큼 PC한 요소들을 가미하며 원작의 형태에 변화를 주었다. '피터'가 흑인 소년으로 바뀐 것도 시대적 반영의 산물이며 원작에서 수동적인 여주인공으로 그려졌던 '웬디' 또한 능동적인 여성상으로 변화했다. 원작에서는 피터가 후크 선장에게 납치된 웬디를 구출하지만, 본작의 웬디는 누군가의 도움이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중 가장 능동적이고 앞장 서서 움직이는 인물이며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피터에게 진정한 성장과 모험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시종일관 용감하고 씩씩한 소녀의 모습으로 그려진 '웬디'라는 캐릭터에 어느 정도 페미니즘적 요소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구형의 인물상을 현 세대에 맞게 적절한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자의식 과잉에 묻힌 화려한 CG
촬영과 편집에 굉장히 힘을 준 영화다. 인물들의 대화나 서사보다는 휴화산이 있는 섬을 배경으로 신비로운 자연의 배경을 조명하는데,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은 심오한 느낌을 선사한다. 피터와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믿는 심해 속 미스터리한 생명체를 중심으로 화산재로 뒤덮인 섬나라의 참상, 공포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바다와 해저 동굴 등 여러 자연적 요소들을 활용하며 메타포로 삼음으로써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이러한 메타포들이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들었다기 보다는 겉보기에만 그럴 듯하게 포장한 느낌이 강하다. CG로 멋지고 광활한 자연 경관의 모습을 구현해 관객을 압도하고 싶은 의도가 컸던 나머지 다양한 메타포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저 장치들의 나열에 불과하달까. 작품을 보면서 영화를 감상한다기 보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마음에 와닿지 않는 주제의식
외형적으로, 그리고 캐릭터의 성격 면에서 변화를 주었음에도 주제의식 측면에서는 원작의 메시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는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동심과 상상력을 일깨워주고 그와 동시에 하루하루 늙어가는 게 덧없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어른들에게 와닿을 만한 감정선을 형성하는데는 실패한다. <웬디>는 철저하게 아이들을 위한 꿈과 동화에 초점을 맞추며 어른들은 차마 공감할 수 없는 방향으로 스토리를 이끈다. 잔혹한 피터는 늙어가는 제임스의 손을 가차없이 자르고,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어머니라 믿는 아이들의 신념은 지극히 위험하고 맹목적으로 비춰진다. 현실적인 비주얼로 그려진 '네버랜드'에는 그림 같았던 낭만과 행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런 장면들에서 해방감과 자유를 느낄지 몰라도, 어른의 시각에서는 퍽 답답하기만 하다. <웬디>가 시사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함에도 감정적으로는 이입이 되지 않아 이내 공허함과 지루함만이 남는다. 어른들이 기억 속에 남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 거칠고 현실적인 모습이 반영된 그림의 형태가 아니었기에 영화는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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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기억하고 삶을 사랑하고 시간을 간직하라
“여자의 일생을 단 하루를 통해서 보여준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2002)는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한 작가에게서 출발한다. 바로 18세기의 현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다.
<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에 발표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세계관을 확장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준비하는 하루를 그렸다면 <디 아워스>는 다른 시대의 세 여성이 보내는 각기 다른 하루를 보여준다. 다른 공간,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세 여성의 삶은 만나고 겹쳐지며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각자의 하루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한 세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각 여성의 시간은 한 세대로 확장되어 보편성의 범위를 넓힌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지 않았다면 먼저 소설을 읽은 뒤 영화 <디 아워스>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는 소설을 읽은 이들을 전제로 만들어져서 소설 속 요소들이 영화에 어떻게 녹아있나를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소설이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삶'에 조금 더 집중되어 있다면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 혹은 리처드의 '죽음'에 더 많은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에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한다. 다만 '자살'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하거나 현재 심정적으로 좋지 않은 분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디 아워스
1923년 영국 리치먼드에서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고 있다. 그는 런던의 거친 생활을 그리워 하지만, 정신병 때문에 한적한 시골에서 요양을 해야 하는 처지다. 언니와 조카들을 맞이할 준비는 고용인에게 맡겨 둔 채 버지니아는 글을 쓰느라 여념이 없다. 195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다. 로라와 어린 아들은 남편 댄의 생일을 맞아 함께 케이크를 만든다. 케이크 만들기를 실패한 로라는 못생긴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웃에 사는 친구인 키티가 자궁에 문제가 생겨 입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라는 가슴이 답답해진다. 2001년 뉴욕에 사는 편집자인 클라리사 본(메릴 스트립)은 친구 리처드를 위해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처럼 아침부터 축하 파티 준비를 한다. 작가인 리처드는 에이즈로 인해 몸이 매우 쇠약해졌고,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었다. 그렇지만 클라리사는 그가 살아주었으면 한다.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닮은 듯 다른, 각자의 감옥
로라 브라운은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다. 아빠가 아들의 아침식사도 챙겨주는 모습이 화목한 가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라의 미소는 깨질 듯 불안하고, 댄이 보지 않을 때면 무기력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인다. 어린 아들은 그런 로라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누구나 케이크를 굽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말하지만 로라에게는 쉽지 않다. 댄을 사랑하고 결혼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로라는 아마 댄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케이크를 만들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연기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쉽고 당연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죽을 만큼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로라는 가정에서 아내와 엄마의 역할이 그러했다.
이웃에 사는 친구인 사교적인 성격의 키티는 아이를 원하지만 자궁에 문제가 있어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키티를 향한 로라의 감정은 아마 사랑일 것이다. 로라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들이 힘든 전쟁을 치르고 돌아왔기 때문에 아내, 여성, 가정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남자들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로라의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 로라가 꿈꿔왔던 생활은 댄이 꿈꾸던 생활과 달랐을 것이다. 로라의 삶은 댄의 꿈을 위해 사라져야만 했다.
버지니아는 언제나 글에 몰두해 있어 주방 일에 소홀했다. 고용인들은 그런 버지니아에게 불만이 많다. 버지니아 역시 고용인들이 불편하고 무섭다. 남편인 레너드는 한가하게 산책이나 하는 버지니아가 부럽다고 하지만, 버지니아는 답답한 시골 생활에 숨이 막혀 죽기 직전이다. 분주한 런던의 거친 생활이 그립다. 버지니아는 그가 느끼는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를 소설에 담아낸다.
"당신을 만족시키는 게 내 유일한 생존 목적 같아"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파티를 열어주려 하지만 시상식과 축하 파티는 리처드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아침이 오는 것, 햇빛을 쬐는 일, 약을 먹는 일, 자부심과 용기를 연기하는 일은 리처드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자신의 병과 살아남은 몸을 강조하면 할수록 리처드는 죽음에 강하게 이끌린다.병에 걸린 리처드를 수년간 간호한 사람은 클라리사 본이었다. 그는 리처드가 부르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호칭에 갇혀 버렸다. 댈러웨이 부인이 되어버린 클라리사는 리처드를 떠날 수 없었다. 리처드가 싫어해도 파티를 열어야 했고, 그가 살도록 만들어야 했다.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속 첫 문장처럼 세 가정의 하루는 꽃과 함께 시작된다. 꽃은 집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화병에 꽂힌 아름다운 모습은 오래가지 못한다. 좁은 화병에서 며칠, 운이 좋다면 그보다 조금 더 살다 시들어 버린다. 그 유한한 활기와 생명력은 인간의 그것과 흡사하다. 클라리사는 인간의 꺼져가는 생명력을 꽃이 대신 채워주기라도 할 것처럼 리처드의 방을 꽃으로 채운다.
버지니아는 레너드를 위해 살았고, 로라는 가정을 위해 살았고, 리처드는 클라리사를 위해 살았다. '서로를 위해 산다'는 말은 서로를 에워싸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삶
영화의 가장 첫 장면은 1941년 영국에서 시작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결국 최선의 선택을 한다. 레너드는 좋은 남편이었고, 이들은 많은 역경을 넘어온 끈끈한 부부이자 동료였다. 버지니아는 자신 때문에 레너드의 삶이 힘들어지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그는 레너드에게 편지를 남긴 채 강가로 향한다. 편지에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얼마나 사랑했고, 행복했었는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버지니아의 죽음과 편지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한다.로라가 자살을 결심하고 이웃에게 리처드를 맡겼을 때 아이는 알았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짐작하고 있던 진실은 엄마가 자신을 떠나리라는 것이다. 로라는 결국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가족을 떠났다. 삶을 선택한 로라와 죽음을 택한 아들 리처드는 더욱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의 리처드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 속 셉티머스와 가장 흡사한 인물이다. 전쟁의 후유증과 의사들에게 고통받던 그는 아내 레치아 앞에서 창문으로 몸을 던진다. 리처드가 클라리사 앞에서 창문으로 몸을 던졌듯이 말이다.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상을 쓰려는 작가로서 리처드의 모습은 버지니아와 비슷하다.
반면 클라리사는 삶을 사랑한다. 세 명의 여성 중 소설 속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가장 비슷한 인물이다. 리처드의 죽음은 벅차다. 그렇지만 곁에 있어 주는 샐리와 딸이 있어 버틸 수 있다. 죽음으로 인해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들은 선명해진다.
로라와 클라리사는 어떻게든 삶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인물들이다. 로라는 엄마이기를 포기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감내해야 할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도 용서해 주지 않겠지만 로라는 삶을 선택했다. 리처드의 죽음은 로라에게 죄책감과 책임감이다. 클라리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선명하게 느끼게 한다.
버지니아의 죽음으로 시작해 인물들의 삶을 관통하고 다시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인 작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의 구성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고. 죽음 속에서 빛나는 삶의 소중함을 느끼라고 말한다.
결국 1800년 대 여성의 이야기는 2000년대 여성에게도 전해져 함께 흘러간다. 이는 <댈러웨이 부인>이 가진 메시지가 가진 보편성을 증명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대가 지나도 빛이 바래지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기나긴 소설의 생명력은 짧디 짧은 작가의 삶과도 대비된다. 버지니아는 죽었지만 <댈러웨이 부인>은 살아남았다.
영화 속 레너드가 '왜 누가 죽어야 하느냐'라고 묻자 버지니아는 '죽은 이들로 인해 살아남은 이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건 시인이자 선지자'라고 대답한다. 위대한 시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의 빛나는 메시지는 앞으로 100년은 더 남아 많은 이들의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것이다. 클라리사이자 리처드이자 셉티머스이자 로라인 버지니아 울프는 삶을 사랑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뒤 영원히 그 시간을 간직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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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트> 시대를 바꿀 개인의 역동성을 담은 액션의 향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 일정 중 예상치 못한 테러 공격을 받고 가까스로 범인을 제압한 안기부 해외팀 팀장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 팀장 ‘김정도’(정우성). 뒤이어 도쿄에서도 북한 고위 관리의 망명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직 내에 북한의 간첩인 '동림'이 침투했음을 확신한 박평호는 스파이 색출 작전에 돌입하고, 상부의 지시를 받은 김정도 역시 뒤질세라 동림을 쫓기 시작한다. 서로서로를 용의선상에 올려둔 채 조사에 박차를 가하던 해외팀과 국내팀은 먼저 찾지 못하면 첩자로 지목될 위기 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한다. 그러던 중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 숨기고 있던 은밀한 비밀에 접근하고,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의 실체를 깨닫는다.
사극이나 시대극을 보다 보면 유달리 영상화가 잘 되는 특정 시기가 있다. 여말선초가 대표적이다. 조선이라는 새 국가가 설립되던 혼란기를 배경으로 정도전, 이방원, 이성계, 정몽주와 같은 인물들의 피 튀기는 암투는 수없이 조명되고, 또 재조명되었다. 사무라이의 전성기가 열렸던 일본의 전국시대, 한나라가 무너지고 긴 혼란기의 시작을 알린 중국의 삼국시대, 이에 더해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도 수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시대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질서가 무너지고, 국가와 법의 영향력보다 주먹과 칼, 총의 힘이 더 강하며, 개인들의 역동성이 두드러지는 시기다. 격동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본래 지녔던 신념과 명분을 고수하거나 포기하는 이들의 대립, 과거의 질서를 따르는 이와 새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갈등. 이러한 분열과 싸움은 심지어 한 개인 안에서도 치열하게 펼쳐진다. 그저 시대에 순응하여 장기 말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설령 꺾기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주체로서 시대에 맞설 것인지. 그 덕분에 이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는 감독 이정재의 첫 연출작인 첩보 액션 영화 <헌트>에서 화려한 액션보다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두 주인공의 에너지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이유다. 1980~83년을 관통하는 팩션 영화인 <헌트>는 '이웅평 대위 미그-19기 귀순 사건'과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사건들을 선보인다.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도 잠시 스쳐 지나가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 역시 한 축을 차지한다. 이에 더해 작중 북측 간첩을 지칭하는 암호명 동림은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간첩 조작 사건인 '동베를린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들은 여말선초만큼이나 혼란했던 전두환 신군부 초반부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안기부의 고문 및 간첩 조작은 전두환 정권 치하의 불안정성을 상기시킨다. 간첩을 침투시키고 전면전을 준비하는 북한은 군사 정권을 위협하면서도 그들에게 명분을 주는 양날의 검이다. 대학 운동권들은 뚜렷한 목표나 수단에 대한 합의도 없는 뜨내기일 뿐이고, CIA로 대변되는 미국은 인권보다는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유지에만 관심 있는 존재다. 이들은 한데 모여 좀처럼 올바른 선택지를 알 수 없는 카오스와도 같은 무채색의 시대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헌트>는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이지 않는다. 영화는 특정 사건에 대한 정치적 입장에 관심이 없다. 그저 사건에 휘말린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고, 그들이 어떻게 시대의 풍파에 맞서고 있는가에 주목한다.
덕분에 <헌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파도를 헤쳐 나가는 개인들의 발버둥에 주목할 수 있다. 당장 <1987>, <택시 운전사>, <화려한 휴가>, 그리고 살짝 앞선 시간대의 <남산의 부장들> 등만 보더라도 생사와 옳고 그름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개인들을 그려낸 바 있다. <헌트>도 다르지 않다. 그 결과 <헌트>는 첩보 액션 영화 중에서도 <007> 시리즈보다는 시대극과 스파이 장르물을 오가면서 개인의 고뇌와 선택에 주목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 가깝다.
이 혼란의 중심에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가 위치한다. 안기부 해외팀 팀장인 ‘박평호’는 조직 내 침입한 스파이 동림으로 인해 도쿄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실체를 맹렬히 쫓는다. ‘김정도’는 안기부 국내팀 팀장으로, 안기부 내에서의 스파이를 색출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이행한다. 박평호는 김정도를 동림으로 몰아가기 위해, 김정도는 박평호를 동림으로 몰아가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본 적 있는 2인자가 되기 위한 두 세력의 다툼이 이어진다. 이때 <헌트>는 영화 내외의 다양한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갈등의 양상을 다채롭게 변주한다. 우선 스타의 존재감을 활용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23년 만에 한 작품에서 조우했다는 화제성을 오프닝부터 영화의 동력으로 삼아 두 주인공의 관계를 단숨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첩보 영화의 정체성을 모범적으로 살려낸 구현해낸 구성과 연출도 인상적이다. '첩보'는 '상대편의 정보나 형편을 몰래 알아내어 보고'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잘 만든 첩보 영화는 극 중 인물들에게 언제 정보를 공개할지 그 타이밍을 정확히 잡아, 긴장감을 지속시킬 줄 안다. 또 스토리텔링이 결국 관객들에게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걸 고려하면, 정보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첩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그래서 안기부 내의 첩자인 동림의 정체를 두고 전반부와 후반부가 극명히 갈리는 <헌트>의 구성은 영리하다. 서로 다른 의미의 '사냥(hunt)'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대책 없이 부딪히는 전반부의 박평호와 김정도는 양극단에 서서 다른 극단을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된 권력의 장기짝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림의 정체라는 정보가 공개된 이후 그들은 같은 목적을 쫓는다. 서로가 감추고 있던 '불꽃 작전'과 '베드로 사냥' 계획의 일부에 대해 알게 된 두 주인공은 이제 동시에 1호라는 사냥감을 추적한다. 그런데 박평호와 김정도가 한 팀이 되었는데도 영화의 갈등선은 오히려 입체적으로 변한다. 북한의 전면전 계획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마지막 사냥의 목적과 의미를 두고 서로 다르게 판단하고 선택한다. 두 인물 간의 외적 갈등에 자기 자신을 쫓는 내적 갈등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사건 사이에서 권력의 장기 말이었던 이들이 시대를 거스르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움직이는 새로운 페이지의 시작을 알린다. 그렇기에 영화가 박평호와 김정도의 비밀을 공개할 때 그들이 문자 그대로, 또 상징적으로 손을 맞잡으며 사냥의 의미가 달라지는 장면의 임팩트는 대단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 사냥의 중심에 위치한 두 인물의 타협할 수 없는 신념 간의 충돌, 곧 영화의 메시지에는 자연히 힘이 실린다. 남한과 더 나은 평화 협상을 끌어내기 위해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북한 간첩 동림과 대통령을 암살하고 독재를 청산하여 광주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넋을 달래주고 민주주의 실현을 꿈꾸었던 군인. 이들은 정당하지 않은 국가의 폭력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고, 대규모 유혈 사태가 필연적인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도 남북의 군사적 대립과 유신정권의 붕괴, 쿠데타와 실패로 귀결된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헌트>가 진정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저 한 명의 독재자가 아니다. 서슬 퍼런 권력과 혼돈 앞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한 개인의 무기력함이야말로 숨어 있던 진짜 내부의 적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방콕 테러 사건은 이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풀어낸다. 블록버스터에 걸맞은 액션으로 가득한 클라이맥스이자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한 곳으로 집약된 고통의 현장을 그려낸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인물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기는 데 실패한다. 한 명은 우려했던 대규모 살상 사태를 막아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온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는 실패한다. 다른 한 명은 죄책감을 씻어낼 암살 미션의 성공을 목전에 두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모래 마냥 놓치고 만다. 하지만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너져 잿빛 가득한 테러 현장에서 기어코 다시 총을 쥐고, 또 총을 쥔 이를 막아서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신념이 강렬하게 전해진다. 권력에 충실했던 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동적인 개인들의 에너지가 스크린 위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박평호와 '조유정(고윤정)'이 바통 터치하는 <헌트>의 에필로그는 희망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혼란한 시대의 파도 앞에서 개인의 신념과 뜻이 꺾이는 듯 보이더라도, 끝내 한 발 더 나은 세상과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포기하지 않으며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줄 아는 개인들의 역동성을,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를 극복하지 못한 개인들의 실패가 담아낸다. 이처럼 1980년대라는 시대의 틀에 갇히지 않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확장되는 영화의 끝은 강렬한 액션만큼이나 여운이 길다.
이러한 구성과 주제, 메시지는 <헌트>가 상당히 영리한 영화이기에 더욱 눈에 띈다. 사실 <헌트>는 단점도 적지 않다. 전반적인 이야기 구조가 꽤 복잡할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한국 현대사를 일정 수준 알지 못하면 100%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또 쉬어가는 틈이 없이 전력으로 내달리는 영화라서 피곤할 수도 있다. 스릴러라 하더라도 긴장감과 압박감을 조절하는 리듬감이 있어야 마지막까지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데, 끝없이 정보와 사건이 쏟아지기에 벅차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이에 더해 폭발음과 총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사를 알아듣기 힘든 고질적인 음향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는 데 온 힘을 쏟은 결과 위와 같은 단점은 눈에 크게 띄지 않는다. 액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헌트>의 액션은 기본적으로 양도 많고, 현장감을 잘 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부닥친 주인공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채 상황에 끌려가는 장면이 대다수라서 긴장감도 상당히 높다. 보여주기 위한 액션이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암시와 복선을 액션에 담아낸 것도 인상적이다. 액션씬을 보다 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의문점이 있는데, 그 의문점들이 한데 모이다 보면 영화의 반전과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에 더해 핵심적인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에 변화를 주는 분기점을 액션으로 표현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대표적인 것이 박평호와 김정도가 한데 뒤얽혀 싸우고, 계단을 뒹굴며 떨어지는 모습으로 끝나는 사내 난투극이다. 작중 유일한 일대일 맨몸 액션으로, 둘 중 누가 우위에 있고 누가 감정적으로 쫓기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의 모든 메시지가 집약된 방콕에서의 테러 장면도 개인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숱한 폭발 장면을 통해 분출시킨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자연히 숨어 있는 단점을 굳이 들춰내는 것보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장점에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감독 이정재의 데뷔작은 묵직하고 씁쓸한 첩보 액션의 참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총성과 폭발음 안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장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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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적 세계에서 몸부림치는 실존, <파닥파닥>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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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부터 이어집니다.)
그 고등어가 재수 없는 이유
<장면 5>
“빨리 우리들처럼 죽은 척 해. 이렇게 해야 살 수 있어요.”
수조 속 물고기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가장하는 것이다. 살아있을수록, 더 싱싱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죽은 척하기.’ 그들은 배를 까뒤집고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겨우겨우 삶을 부지한다. <장면 5>, 고등어의 1인칭 시점 카메라로 본 수조 속 물고기들의 생존법은 기괴하다. 고등어가 노래한 OST ‘악몽’의 가사 일부는 아래와 같다.
“그들이 나를 데려간 그곳엔
많은 이들이 죽어있었어, 아니 살아있었어.”
그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철학자 야스퍼스로 바라본 벗어날 수 없는 수조 안, 그리고 곧이어 들이닥칠 죽음의 예고는 수조 안 생선들이 맞닥뜨린 한계상황이다. 죽음의 순간을 잠시 미루는 것에 불과한 ‘죽은 척하기’ 생존법으로는 그들을 둘러싼 한계상황을 근본적으로 타파할 수 없다. 이 한계상황에서의 대처방식을 두고 고등어와 다른 수조 속 물고기들은 사사건건 부딪힌다. 야스퍼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수조 속 물고기들과 고등어가 추구하려는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당장의 배고픔과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한 수조 속 물고기들. 이들의 생존법은 오히려 죽음을 안일하게 망각하는 회피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상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안주하는, 비(非)본래적인 삶에 그쳐 있는 것이다.
“살아남으면, 그 다음은요?”
이들에게는 다음이 없다. 잠깐 죽음을 피해봤자 그뿐. 그들은 여전히 수조라는 절망적인 한계상황에 머물러 있다.
반면 수조를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무작정 몸을 불사르는 고등어, 고등어에게 바다가 아닌 수조 속에서의 삶은 다른 의미로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에게 유리벽에 가로막혀 바다를 포기하고 죽은 척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파닥파닥’에서 고등어가 그토록 염원하는 바다는 자유이자, 본래적 삶이자,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실존 그 자체를 상징한다. 고등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실존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삶의 본래적인 가치를 수조 속 물고기들에게도 계몽시키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계몽이라는 작업은 마음만큼 쉽지 않다. 당장 눈앞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인 물고기들에게 고등어는 언제나 붕 뜬소리만 해대는 눈엣가시다. 자꾸만 이룰 수 없는 목표에 몰두하고 도전하려는 고등어의 모습이 다른 물고기들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비본래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만 매몰된 그들에게, 고등어가 본래적 삶의 가치를 계몽하려는 시도는 안주하고 있던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채찍질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장면 6>
그러나 이토록 바다를 갈망하던 고등어의 희망찬 탈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말끔히 손질되어 접시에 오른 고등어. <장면 6>의 카메라 앵글은 인간의 시점에서 여러 밑반찬과 함께 식탁에 오른 고등어를 내려다보며 그가 더 이상 실존을 외치던 존재 ‘고등어’가 아닌, 그저 ‘고등어 회’라는 섭취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비극의 정서를 심화시킨다. OST ‘용서해요’ 뮤지컬 시퀀스 직후, 음악 없이 식탁에 접시를 올리는 ‘달그락’ 효과음으로 시작되는 <장면 6>은 직전의 시퀀스에서 고등어와 올드넙치가 죽음의 순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장면과 대조적으로 매정한 현실의 상황을 부각시킨다. 인간의 기호와 즉흥적인 선택으로 뒤바뀐 올드넙치와 고등어의 생사의 갈림길. 장난삼아 그 입에 담배를 물리는 남자는 눈앞의 생선이 얼마나 자유를 부르짖으며 몸부림치다 죽어버렸는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강압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고등어의 죽음은 진정한 삶을 향한 실존의 추구가 종종 극복할 수 없는 숙명과 권력 아래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래도 몸부림쳐야 삶이지
영화 ‘파닥파닥’은 횟집 수조 속 생선이라는 독특한 화자의 시선을 빌려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불평등, 그리고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를 갈망하던 고등어의 죽음을 통해 영화 ‘파닥파닥’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제 포기하고, 저항하지 말고, 늘 그랬듯 수조 속에서의 삶에 안주하라는 회유일까?
<장면 7> <장면 8>
여기서 영화의 마지막, 올드넙치의 탈출이 가지는 상징성에 주목해야 한다. 올드넙치의 탈출에서 ‘모형 칼’은 중요한 모티프다. <장면 7>에서 인간 병사 장식품의 손에 들려 있던 모형 칼은 저항하는 고등어를 찌르며 상처 입힌다. 이는 인간의 막강한 권력이자, 실존의 추구를 좌절시키려는 불평등한 현실의 제약이다. 그러나 고등어의 몸에 박힌 칼은 이제껏 죽음을 회피하며 숨기에 급급했던 올드넙치에게로 전달된다. 탈출하기 직전 인간의 손아귀에 붙잡힌 절망적인 상황, <장면 8>에서 올드넙치는 숨기고 있던 모형 칼을 인간을 향해 날리며 마침내 자유를 손에 얻는다. 고등어로부터 전해져 올드넙치를 바다로 이끌어준 모형 칼은 곧 자유를 향한 갈망이자 저항의 상징이다. 작은 모형 칼은 결코 인간을 해칠 수 있는 대단한 도구가 못 된다. 생선에게 인간은 언제나 압도적인 포식자이자 뒤집을 수 없는 서열. 그럼에도 그는 고등어로부터 이어진 그 칼을 인간에게 겨눔으로써 비로소 죽음의 수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인간과 생선의 서열이 뒤바뀌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불평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저항을 통해 올드넙치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올드넙치의 삶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변화했다는 것이다.
“운명이 짓궂은 장난을 치네요, 바보처럼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해낼 수 있어요…내가 항상 같이 할 테니.”
<장면 9> <장면 10>
OST ‘용서해요’의 뮤지컬 시퀀스 속. 좁은 정육면체에 갇혀 있던 <장면 9>에서 그것이 해체되며 자유로워지는 <장면 10>으로의 이행은, 비단 올드넙치뿐만 아니라 고등어 또한 탈출에서 정신적 주체로서 함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고등어는 육체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했으나, 결국 그 죽음이 누구보다 비관적이고 비본래적인 삶에 매몰되었던 올드넙치를 변화시켰다. 올드넙치와 고등어는 정신적인 동반의 관계를 맺어 함께 바다로 나아간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이어받은 올드넙치의 탈출은 고등어가 지향했던 실존적인 삶의 추구를 계승한다. 바다를 향해, 진정한 삶을 향해 저항하고 몸부림치는 그 과정 자체가 실존이다. 그 점에서 고등어는 이미 실존을 완수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개인이 처한 절망적인 현실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필연적인 숙명이라는 한계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외친다. 언뜻 비극적으로 보였던 고등어의 죽음은 올드넙치의 탈출을 통해 그 의지를 계승하며, 충분히 우리가 우리의 삶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제 ‘파닥파닥’은 단순한 의태어가 아니다. 온갖 불평등과 극복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삶을 소망하는 실존적인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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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고, <3000년의 기다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000년의 기다림 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 2022 제작
호주 외 / 판타지 외 / 108분
감독: 조지 밀러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고, <3000년의 기다림>
삶은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야 하는 '일'이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게 사람이자, 인간을 대표하는 개인으로서 갖는 숭고한 의무다. 거창한 의식이기도 하고 과제도 맞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무게 잡거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삶과 삶을 잇는 방식을 찾는 건 내 몫이니까. '각자의 몫'에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관한 수단과 방법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 잘 알고 있으면 된다. 그래야 타인에게 나를 공유해도 쉽게 꺾이지 않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다.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걸 내 옆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게 흘러간다. 공유가 공존이 되는 지점이다. 필요한 건, 헤쳐 나가기 바쁜 마음에 지치지 않는 활력을 주는 것이다. 활력, 이미 우린 오래전부터 그것을 탐구하고 또 원해 왔다. 적당히 행복하고 충분히 여유 있는 삶을 사는 '알리테아'마저도, 사실은 진심으로 가슴 깊숙이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처럼. 지니가 말했듯, 갈망이 없는 인간은 없다. 인간에게 갈망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내면의 주머니이자 삶의 수단과 방법이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은 그것을 '이야기'라고 말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알리테아는 서사학자로 수많은 이야기를 해석하고 풀어내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전시하듯 설명하며 살고 있다. 모든 이야기에서 하나의 공통된 이야기를 찾는 일을 홀로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직업적 쾌락이자 참견쟁이 옆집 할머니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안전장치다. 겉으론 냉철하게 이야기가 가진 한계를 논하지만, 자기 일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이야기를 귀히 여긴다. 다만 쉽게 흥분해 자신을 이야기 홍수에 던지지 않을 뿐이다. 현재 그녀는 자기 의지대로 삶의 항로를 정해 흘러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원하는 기억과 원하지 않는 기억을 구분해, 후자를 상자에 넣고 봉인한 뒤 앞으로의 희망과 현재의 기쁨만을 누리고 사는 사람, 그게 바로 알리테아다.
정령 지니의 등장은 우연을 가장한 영화적 필연이다. 그걸 알면서도 우린 딴지 걸지 않는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라 인식한다. 영화가 가진 본연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이란 창구로 보면 새롭다. 영화가 감동과 즐거움을 위한 영상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걸 경험하기 때문이다. 알리테아가 기념품을 사는 순간, 우린 영화를 산다. 그녀가 유리병을 씻을 때 우린 지니를 피부로 느낀다. 영화가 이야기로 읽히고 들리고 보이는 시작점이다. 그럼 어떤 이야기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다. 지혜가 될 수도, 경고, 위로, 나아가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이야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수 요소임을 영화(이야기)가 다시 한번 친절하게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더구나 <3000년의 기다림>엔 거부할 수 없는 묵직하면서도 유연한 리듬이 있다. 그냥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과 같다. 모든 현상을 이성적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에 감성이 충만한 동화는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흔히 얘기하는 '옛날 옛적에-' 감수성이 병 속에서 나온 지니의 거대한 발바닥으로 실체화되다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우연인가.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정령 지니의 등장으로 알리테아는 자신이 단칼에 끊어냈다고 자부하던 악몽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 과거를 잊는 게 그녀의 진짜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알리테아는 끝까지 고집스럽게 결혼, 유산, 이혼이란 간단한 키워드로 자기의 어둠을 나열한다. 별것이 아닌 건 아니지만, 이미 넘어온 파도이며 다신 넘을 일 없는 파도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자신의 고통을 단 몇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그녀는 분명 여기에 존재하는 인간이지만, 그 누구도 알리테아를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자, 이름이 있지만 아무도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여인. 알리테아는 스스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결정했기에 여전히 고여있다. 지니는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한 그녀에게 자신의 장대한 흔적들을 쭉 늘어놓는다. 늦은 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정적인 언어에 말맛을 추가하고 그때 그 감정을 흠씬 버무린다. 인간이 가진 갈망에 대해, 그 갈망에 빠진 인간을 사랑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 그리고 마침내 알리테아에게 요구한다, 나의 이야기를 위해 소원을 빌어 너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라고.
알리테아는 정령에게 사랑을, 아니 시바와 제페르를 향한 그만의 정열을 소원한다. 지금까지 살아있고, 존재하는 사랑의 역사를 통째로 원한 걸 보면, 그녀의 진짜 소원은 외로움과 허무, 고통을 말끔히 잊게 해줄 충만한 사랑임이 틀림없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정도로 헌신적인 그의 사랑은 알리테아에겐 악몽을 담는 또 다른 상자였다. 그날 밤, 지니는 소금 통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알리테아와 런던으로 떠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하지만, 모든 이야기 끝엔 무시무시한 경고장이 붙는다. 이를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모를 리 없다. 점차 몸이 약해지는 지니를 보며 그녀는 깨닫는다. 이 이야기의 진짜 끝을 말이다. 이 세계가 버거운 지니에게 필요한 건, 알리테아로부터의 자유뿐이다. 정령의 이야기는 정령이 주인공이다, 알리테아의 소설 주인공이 그녀 자신인 것처럼. 그리고 주인공은 언제나 자기 의지로 마지막 선택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결정한다.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디든 당신이 있던 곳으로 가 자유롭게 살라고 소원을 빈다.
다시 그녀의 어둠, 지하 공간이 등장한다. 지니의 흔적을 봉인한 상자를 들고 지하로 내려가는 알리테아. 지니의 상자가 지하에 선반에 자리한 순간, 한 챕터를 마무리하듯 불이 딱 꺼진다. 그 힘찬 신호탄으로 두 인물의 이야기는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알리테아는 이제 안다, 어떤 것이든 상자에 평생 봉인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오랜 머뭇거림 끝에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그녀는 글을 쓰며, 자신을 찾아오는 지니와 순간순간을 함께한다. 그의 기운을 느끼고 그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서, 그것이 앞으로 펼쳐질 자기 삶의 충분한 원동력임을 선언한다.
출처: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다음)
이야기는 이야기로 끝난다. <3000년의 기다림> 역시 3000년의 기다림으로 끝난다. 거대한 대서사시로 느껴지는 이 웅장함과 원대함이 서늘함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힘을 아는 자에겐 거부할 수 없는 숨결로 남는다. 소원을 빌고 싶은 마음을 앞지른 설렘과 카타르시스 덕이다.
삶, 활력, 소원, 이야기. 뒤집어도 무방하다. 이야기, 소원, 활력, 삶.
<3000년의 기다림>은 전부 다른 우리의 노선을 존중하면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를 끄집어낸다. 삶의 탄생과 죽음, 그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웅덩이까지 단 하나의 줄로 꿸 수 있는, 끊기지 않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줄기 바로 계속 되뇌고 읊조렸던 '이야기'다. 결국 삶과 이야기는 하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죽음에서 벗어나 죽지 않는 이야기로 계속 살아 숨 쉬는 것이다.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인간에겐, 잠들지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낼 인간이 필요하다. 이 인물 혹은 이야기, <3000년의 기다림>과 같은.
그녀와 그처럼, 우리도 언제 어디서든 기념품을 사고 내 이야기를 하면 된다.
어떤 이야기든 좋다, 다만 다시 시작할 마지막이 오면 끝에 꼭 이 말을 덧붙이자.
"내 이야기는 실화다. 하지만 동화라 해야 믿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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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했던 비극보다 더 뜨거운 해방을 이끄는 크리스틴 스튜어트
어색한 행동부터 불안한 눈동자까지 완벽하게 한 인물에 녹아든 포스터부터 해외 언론 매체들의 극찬까지 완벽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전 세계 각종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27개를 석권하고 곧 있을 2022년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까지 오르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열연이 빛나는 故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전기를 다룬 영화 스펜서 리뷰이자, 시사회 후기입니다. 작품은 그녀 인생 전체가 아닌 1991년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노퍽 해안의 왕가 저택인 샌드링엄 하우스에서 보낸 3일의 시간을 담으며, 가문의 성씨를 그대로 가져온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왕실의 강박적인 생활에 얽매인 채 고통받는 그녀가 한 사람으로 존엄성을 추구하며 스스로 나아가는 상징적 모습을 그립니다. 더불어 전형적인 전기 드라마의 형태보다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심리 스릴러나 일종의 다큐멘터리처럼 관찰하고, 그 외 주변의 소재나 인물들을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녀의 마음을 투영해 보여줌으로써 상업성보단 예술성에 치중했다고 보시면 좋습니다. 만약 소재가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더 크라운’이나 ‘더 퀸’, ‘The Story of Diana’ 등 많은 영상매체들이 나와있으니 관람 전 미리 감상하시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실 거라 생각됩니다. 세상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온 다이애나 비, 어떤 모습이 담겼기에 많은 호평들을 받았는지 본격적인 후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영화 스펜서 정보
그 누구도 전통 위에 군림하지 않습니다
‘A fable from a true tragedy’이라는 문구와 함께 군사훈련을 방불케하는 분위기 속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식재료들을 옮기고
왕궁 수석 주방장 대런의 지시 아래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합니다.
1991년 영국 왕실의 크리스마스 디너가 진행되는 샌드링엄 별장,
왕실 가족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이제 남은 이는 엘리자베스 2세와 다이애나만이 남았습니다.
한편, 직접 운전해 오던 다이애나는 길을 잃고
주변 카페에서 들려 길을 물어보며 찾아오는 중이었죠.
묘연한 행방에 대런이 찾아 나서며 결국 만나게 되지만,
재촉하는 그에게 자신이 자란 곳에 헤맸다는 푸념을 하며
지각한 자신에 대한 식구들의 원망이 있을지 걱정하죠.
작은 해프닝과 함께 결국 가장 늦게 도착하며,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는 왕실의 크리스마스가 시작됩니다.
예고편│ Trailer
원제 : SPENCER │감독 : 파블로 라라인│각본 : 스티븐 나이트│출연진 : 크리스틴 스튜어트, 샐리 호킨스, 티모시 스폴, 숀 해리스, 잭 파딩, 잭 닐렌, 프레디 스프라이, 스텔라 고넷 외 多│장르 : 전기, 드라마│상영 시간 : 116분│개봉일 : 2022년 3월 16일│국가 : 영국, 독일, 미국, 칠레│등급 : 12세 관람가│평점 : 기자·평론가 7.0, 왓챠피디아 3.4, 로톤 토마토 신선도 83% 팝콘 52%, IMDB 6.7, 메타 스코어 76점│수상 내역 : 34회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여우주연상, 의상상) 포함 총 38개 영화제 수상(이 중 여우주연상 27개)│시청 가능 서비스 : 3월 16일 개봉 예정
# 영화 스펜서,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
저는 현미경 샬레 안에 놓인 곤충이에요
객관적으로 보자면 단순히 다이애나와 왕실 가족들이
함께한 3일간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그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어지러운 심중을 대변하듯 부산한 재즈 멜로디의 오프닝부터
삭막한 저택 내부의 분위기는 답답한 공기에 둘러싸여
마치 공황장애를 겪는듯한 공포감마저 조성합니다.
왕실이라는 이름 아래 규율과 억압으로 각자의 개성은
말살당하고 생각과 표현의 자유는 박탈당한 채 시종일관
불안한 시선으로 관객을 바라보는 처연함만이 상황을 대변할 뿐이죠.
빡빡한 일정에 맞춰 정해진 옷을 입고 의무를 다해야 하는 생활은
악몽처럼 묘사되고, 찰스 왕세자와의 갈등과 냉담한 왕가의 반응은
그녀의 섭식 장애와 공황 등의 병적 증세를 극심하게 만드니
이 자체만으로도 영국 왕실 안에서의 느꼈을 감정이 절실히 전해집니다.
작품은 이 같은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구속과 해방이라는 큰 주제를 두고
상당히 많은 은유적 표현을 곳곳에 뿌려두고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달려나갑니다.
왕실의 에스코트 없이 길을 헤매는 시작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기 위해 벗어나고픈 열망을 드러내며
과거 자신이 입혀주었던 허수아비의 옷을 벗겨 챙깁니다.
이는 결혼 이전 자유로웠던 자신을 되찾겠다는 행동으로,
결말에 이르러 왕실에서 주었던 옷을 걸어두며
허수아비처럼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또 한 번 드러내죠.
이 같은 메타포는 왕실의 부속품으로 묶어두는 상징적인 진주 목걸이,
자신을 옭아맨듯한 옛집 사이의 철조망 등
여러 형태로 구현되는데 하나같이 왕실이라는 큰 규제에
억압되어 있는 자신의 불행함을 그리는 데 활용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자란 옛날 집을 향하면서 상황은 바뀝니다.
본인의 처지처럼 폐가로 변해버려 더는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에 계단 아래로 떨어지려는 순간, 앤 불린의 환영이
나타나 유년 시절부터 청년, 성년의 그녀가 들판 위를 뛰는 장면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며 스스로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들판이 존재하는 한 왕실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리고 자신처럼 사랑에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가문의 옛집은 사라졌지만 자신만의 삶을 찾아 떠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죠.
그리고 다음날 이어진 꿩 사냥을 막아서는 순간을 통해
찰스 왕세자와 자신의 아들들을 분리시킴으로서
더 이상 지옥 같은 왕실에서의 성장을 목도하지 않겠음을 확연히 드러냅니다.
아마도 앤 불린과 다이애나라는 두 캐릭터가 가진 역사 속 상징성을 통해 그녀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발판이 되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It's not just me who loves you!
샐리 호킨스, 티모시 스폴, 숀 해리스 등 연기력에서 정평이 난 배우들과의
호흡들이 든든히 떠받치며 때로는 주인공의 마음을 건드리고,
클래식과 재즈의 기묘한 만남이 돋보이는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가
올곧이 그 감정들을 탁월하게 표현해 주는 가운데, 역시나
불안과 혼란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다이애나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그녀가 왕실에서 느꼈을 모든 감정들을
대사나 작은 행동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며
왜 수많은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열연을 펼쳐줍니다.
일대기 전체를 바탕으로 삶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순간과 불안정한 한 심리를 바탕으로 한 전개되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온갖 화려한 장식들과 음식들로 꾸며진 별장에서
그만이 느꼈을 불행과 외로움, 답답한 심정을 세밀한 연기를 통해
극대화하며 꾸며진 현실임에도 동조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깊게 남겨주죠.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은
특히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전날 밤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과
폐허가 된 옛날 집에서 새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되돌아가듯
과거 필름을 스쳐가는 독백 장면에서 두드려집니다.
여기에서 왕실의 아이가 아닌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은 물론, 어린 시절 자신이 꿈꾸었던 삶에 대해
파노라마는 강한 여운을 남기고 이제 더 이상 억눌려사는 왕세자비가
아닌 다이애나로 돌아갈 것을 보여주죠. 이러한 함축적인 의미에서
클래식하게 드레스 입은 채 고개 숙인 포스터는 근래에 본 것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 같습니다. 실제 영상에서는 힘겹고
버거운 가족 식사 후 구토하는 장면이지만, 결과적으로 왕가에 속한
모든 것을 뱉어내는 중의적 표현을 심고 있기 때문이죠.
정말 그녀의 연기는 실로 놀라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 때문인지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연출적인 특징이 큰 힘을
발휘한다기보단 원 맨 쇼를 묵묵히 지켜보는 관찰자의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재키’, ‘네루다’와 같이 실제 인물 그려왔던 전작들에서
보여준 대칭 구도의 촬영 기법이나 화면 질감과 색감을 활용한 연출,
과거처럼 느껴지는 그레인 필름 등은 오래된 동화 같은 영상미를
남기며 날카로운 현악기의 연주가 깔리는 음향과 함께
다이애나의 불안과 공포를 선명하게 대변해 주지만,
그녀의 연기를 뒤따라가며 앙상블을 맞춘다는 느낌이랄까요?
더불어 마지막 엔딩에 이르러 두 아들을 사냥터에서 구출한 뒤
도로를 달리며 자유를 만끽한 뒤 패스트푸드 KFC에 들려 드라이브스루 주문에서
마침내 자신의 이름인 ‘SPENCER’를
당당히 외치는 모습은 해방이라는 묵직함으로 기억됩니다.
허수아비처럼 영국 왕실에 다 빼앗겼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정체성이자,
그 자체를 되찾아 온 그녀, 슬프지만 그 고귀한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습니다.
매기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처럼 그녀를 사랑하는 것 저뿐만이 아닐 테니까요.
ps. 근래 대다수가 그렇듯 이것 역시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취중해있습니다. 그렇기에 취향에 따라 지루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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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메인 예고편
- 시를 엮은 책을 만드는 유쾌하고 솔직한 ‘그레이스’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조용하고 신중한 ‘에드워드’
그리고 감정 표현이 서툰 하나뿐인 아들 ‘제이미’
성격은 다 다르지만 평범하게 29년을 함께 한 가족.
어느 날, ‘에드워드’가 아내를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사랑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진 ‘그레이스’는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에 빠진다.
한편 멀어져가는 부모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제이미’는
각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감정을 이해해가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