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평2025-02-10 13:14:08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모성에 관해
영화 <케빈에 대하여> 비평


에바는 행복해 보일 수 없다. 남들과 같은 평범하거나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대뜸 그녀의 뺨을 후려칠 수 있다. 또는 그녀가 사는 집 외관과 승용차에 빨간색 페인트를 흩뿌려 버린다. 장을 보기라도 하는 날이 되면, 그녀가 사려고 담은 달걀 한 판을 모두 박살 내야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는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에바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낙인과도 같은 화살들을 담담히 지고 나아가려고 한다.
어느 곳을 가든 자신을 감시하듯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집에 마구잡이로 뿌려진 붉은 페인트를 벗겨내려고 하는 것조차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케빈이 그녀의 아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들이 케빈을 증오할 수는 있어도, 그 부모와 가족까지 증오하고 그들의 삶마저 모두 이 세상으로부터 들어내려고 하는 전복적 시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케빈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재활하게 됐지만 우연히 에바를 만났을 때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한 소년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케빈에게 해를 당했음에도 에바를 증오할 마음 없는 그 당사자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결국은 모성만이 남는다. 모성의 형태가 어떻다고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자식을 위하는 마음과 어떤 일이 있든 그를 이해하려 하는 마음 자체를 모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의도치 않았지만 찾아온 케빈이라는 존재를 결국 낳았고, 후회했지만 결국 길렀다. 그 과정에서 여러 난관이 찾아왔지만, 에바는 포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저버리고 감옥에 수감된 케빈이지만 에바는 그를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대체 왜 그랬으며,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그렇지만 케빈은 여전히 에바에게 명백한 답을 전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닐까.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아야 이 영화가 완성될 수 있다고. 그렇게 흐릿한 마음과 시선을 안았지만, 모성을 숨기지 않으며 에바는 살아간다. 모험가로서 책을 출판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그 과거의 경험을 살려 여행사에 취직한다. 예전의 호화로운 저택은 더 이상 없지만 작은 주택에서 케빈을 다시 맞이하고자 한다. 이웃들이 자신에게 찍은 낙인을 지워내기 위해 조금씩 그 흔적들을 지워낸다. 영화는 에바를 주인공으로 선정함으로써 그렇게 ‘이해 불가능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시선으로 서사를 읽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모성에 관한 서사를 에워싸는 빨간색이 있다. 모험가이던 시절, 토마토 축제에 가서 자유를 만끽했던 순간의 빨강. 섣부른 판단으로 남편과 관계하고 아이를 가지게 됐던 순간 디지털시계가 시간을 알리던 그 빨강. 케빈이 에바의 개인 공간을 물감으로 더럽혔던 순간의 빨강. 그리고 케빈이 학교 친구들을 학살했던 그 순간을 목격한 에바를 감싼 빨강. 그 순간을 회상하고 모든 죄를 자신이 지고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빨간색이 있다.
빨간색은 후회와 불안정한 과거에 대한 에바가 ‘속죄해야 할 것’들이다. 에바는 케빈을 낳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후회는 계속해서 에바 자신을 칭칭 감아버린다. 후회에 둘러싸인 에바는 케빈이 일으킨 사건을 회상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화살을 맞고 죽는 것처럼 붉은빛 속에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케빈에게는 그런 붉은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케빈은 후회하고 속죄하지 않기 때문일까. 모든 죄를 에바가 짊어지기로 선택했기 때문인 것일까.
결국 에바는 속죄하기를 택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쏟아낸 혐오와 증오를 받아내고, 집과 자동차에 뿌려진 낙인과도 같은 페인트를 긁어내고 이내 파란색으로 그 흔적을 덮어낸다. 그 과정에서 케빈을 만나 그때를 이야기하는 것도 멈추지 않는다. 종반부에서 그 대화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결정적인 것은 여전히 에바는 이해하지 못하고 케빈은 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그 일말의 여지마저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고 에바는 케빈을 포기하지 않는다. 집의 한편에 있는 방을 과거 케빈의 방과 똑같이 꾸미고, 케빈의 옷을 다려 가지런히 캐비닛에 넣는다. 케빈이 어떤 행동을 하고 모습을 갖던, 에바는 있는 그대로 케빈을 볼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에바는 모성애가 강한 인물이다. 케빈에게 무관심했던 것은 에바가 그를 너무 사랑했기에 감싸지 못한 것이다. 사랑했기에 자신의 관심으로 그를 덮으려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집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지만 너무나 쉽게 망쳐버린 케빈의 흔적을 쉽게 뜯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에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할 수 있다. 작 중에서 에바 자신마저도 그런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자기 자신을 ‘그 현장’으로 다시 소환시킨다. 그리고 고통스러워 한다. 케빈을 자식으로서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케빈이 영원히 에바가 납득하지 못할 행동을 이어간대도 에바는 그 자리에 서서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다릴 것이다. 그것이 에바가 케빈을 ‘섣불리’ 낳았던 것에 대한 참회일 것이며 ‘서투르게’ 케빈을 교육했던 것에 대한 나름의 속죄다.
그러나 에바에게 그 속죄의 무게를 모두 짊어지게 하는 것이 옳은지는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사회에서 흔히 중범죄의 가족은 ‘연좌제’의 개념으로 낙인찍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제는 고루한 개념이 돼 사라져 버린 그 연좌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정말 납득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에바가 짊어질 수 있는 그 정도는 어느 정도라고 보아야 할까. <케빈에 대하여>는 미스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미스터리를 다시 한번 전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겠느냐고. 그렇다면 생각해 볼 때다. 우리는 에바와 케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케빈이 악한이 된 것에 대해 에바에게 그 짐을 모두 짊어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에바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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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아동권리 그리고 영화
세상엔 생각보다 영화제가 많다. 크고 작은 영화제가 많아지는 건 분명 기뻐할 일이나, 다 갈 수 없어 아쉬움에 발을 동동 구르게 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동종업계 인간으로서) 몇 년째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영화제가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운영하는 ‘아동권리영화제’다.
처음에는 ‘아동 권리’라는, 사실 내용은 대강 알아도 용어로서는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은 말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하기 위한 좋은 단발성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15년에 시작한 영화제는 코로나19를 넘어 지금껏 계속되었다. 아동권리 주간이 있는 매년 11월에 개최하는데, 2023년 11월에도 멋지게 진행했다.
2015년 초기부터 라인업이 막강했다. <자전거 탄 소년>, <아무도 모른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등 아동을 주제로 잘 큐레이션된 작품들에, 천근아 소아정신과 교수 같은 아동 전문가, 이동진 평론가 같은 영화 전문가를 고루 패널로 초청하여 균형을 잡았다. 2019년에는 ‘아동 권리 관련 영화’ 하면 누구나 첫 손에 꼽을 <가버나움>에, <플로리다 프로젝트>, 촬영 과정에서도 아동 권리와 연결해 나눌 얘기가 많은 <우리들>, 개봉작도 아닌 <브레드위너> (넷플릭스에 <파르바나>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까지 골고루 챙겼다. 패널도 어느 한 명 빼놓을 수 없이 대단하다. 또한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이 나와서 진행한 행사도 있고, 초등학교 교사와 함께 진행한 행사도 있어, 아동과 영화 두 가지 주제를 다 만족시키려고 노력한 점이 엿보인다.
이렇게 훌륭한 큐레이션으로 영화제의 규모가 점점 커지더니, 출품을 받기 시작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아동권리 보호에 진심인 아동단체이지 영화단체가 아님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아동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아동의 눈높이에 있는 작품의 적은 파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혔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세이브더칠드런은 2019년부터 파트너십 관계를 맺고 있어, 영화제 곳곳에서 빨간 세이브더칠드런 부스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동권리영화제 수상작과 함께하는 특별상영에 이어, 씨네아동권리토크도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2023년 수상작인 홍승기 감독의 <알록달록>과 김슬기 감독의 <한 숨> 두 작품, 전북 고창 책마을 해리 이대건 대표를 초청하여,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진행으로 토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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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은 남다른 시각을 가진 다홍이가 보는 색이 진짜 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펼쳐지는, 정말 ‘알록달록’한 이야기이다. 색맹은 일상에 지장을 주는 문제로 분류되지만, 바로 그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펼친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한 숨>은 반대로, 모든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프지 않고 건강한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다. 환경 오염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미세먼지 같은 문제도 너무 심해서, 아프지 않은 게 오히려 보편적인 세상이라는 가정은 오싹하지만 조금씩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처럼 느껴진다. 설정 자체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많은 두 작품이다.
이대건 대표와 이다혜 기자는 입을 모아, “이전 세대는 이전의 기준으로 ‘아 나도 다 경험해 봤지’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쉽게 재단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경험과 감각은 이전 세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영화를 통해 어른들을 가르쳐야 하고, 어른들이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동의 관점을 반영하고 아동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이토록 적다는 것은 그 배움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부족한 것을 반증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실제로 대표적인 예시가 <한 숨>에서도 다룬 환경 문제이다. 그레타 툰베리의 “어떻게 감히(how dare you) 그럴 수 있”냐는 질문까지 빌려오지 않아도, 미래 세대는 이전 세대가 어렸을 때에 비해 환경 문제를 훨씬 예리하게 감각하고 이에 반응한다.
아동의 관점과 시선을 배워야 한다는 한 문장은 명쾌하지만 사실 현실에서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제작한 두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공유되면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한 숨>의 김슬기 감독은 보육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그 시간을 통해 아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옆에서 많이 들었고, 실제로 미세먼지 등으로 인해 야외 놀이를 할 기회가 줄어드는 아이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알록달록>의 홍승기 감독은 어린 시절 흰 쌀밥을 분홍색으로 칠했을 때 어머니께서 “이 분홍색 쌀은 어디서 구할 수 있어?” 하며 다정한 관심을 보여주셨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 말이 지금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따뜻하게 받아주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한 것이다.
교육은, 성장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오는 과정이므로 성장통이 수반한다. 아이가 아파하거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응당 보호자의 마음일 것이며, 때로는 아이가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고 엉뚱해 보여, 바쁜 일상 속에서 ‘그냥 내가 해주고 말지’ 하고 넘어가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아동권리, 아동의 시선을 반영하는 일은 결국 아이들의 방식과 속도를 존중하며 기다리고, 그들이 스스로 해답을 찾기를 기다리는 여유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유를 찾기 너무 어려운 어른들을 위해, 이대건 대표가 인용한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선언문 한 구절로 마무리한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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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워야 한다는 강박만 없었어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9년, 전북 삼례 우리 슈퍼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책임 형사 '최우성(유준상)'의 지휘 하에서 무고한 소년 세 명이 용의자로 지목되고, 강압수사 덕분에 사건은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그렇게 우성은 특진하고, 사건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다음 해 '황준철'(설경구)이 부임하기 전까지는.
진범에 대한 제보를 받은 진철은 기존 수사 기록을 검토한 후 '미친개'라는 별명에 걸맞게 재수사를 결정한다. 용의자 세 명의 자백과 지인들의 진술이 모순됐기 때문. 그러나 우성과 담당 검사 '오재형'(조진웅)의 방해 때문에 재수사는 취소되고, 진철은 좌천되어 섬을 떠돈다. 그리고 16년이 지나 목격자였던 윤미숙'(진경)과 소년들이 진철을 찾아온다. 재심을 도와달라고.
여운과 잔상이 <소년들>에는 없다
한국 영화를 보다 보면 비슷한 인상이 남는다. 뜨거워야 한다는 강박이다. 주인공은 클라이맥스에 모든 감정을 문자 그대로 '토해낸다.' 관객이 그 장면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지친 끝에 눈물을 흘리게 만들려고 사력을 다한다. 혹자는 이를 한국인의 정서라고 이야기한다. 그럴 수 있다. 나라마다 고유한 감동 코드가 있으니까. 실제로 근래 한국 영화를 접한 외국 관객이 한국 영화의 '감정 과다'를 인상적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감정 과다 상태의 부작용이다. 감정을 토해내는 데 집중하는 사이 많은 영화가 납작해진다. 이야기, 그 속에 숨은 메시지, 이야기를 감싼 사회적 맥락을 곱씹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 대신 일회성으로 휘발되는 강렬함, '사이다'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가가 이 방식을 애용한다. 작가가 뱉고 싶은 사회적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므로.
올해로 데뷔 40주년인 정지영 감독의 신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9년 발생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스크린에 옮긴 <소년들>은 검경의 잘못된 수사 관행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 법정 영화 <부러진 화살>, 금융당국의 문제점을 비판한 <블랙머니>와 비슷한 결이다.
의도는 스크린 위에 성공적으로 구현됐다. 17년이라는 시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했다. 의인의 사투와 악인의 악행도 명확히 전달됐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강박을 버리지 못했다. 목적과 메시지를 낱낱이 설명하기 위해서 사족을 붙인다. 그러다 보니 관객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소화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여운과 잔상이 없는 이야기인 셈이다.
구성과 배우의 힘
물론 노장의 저력은 느껴진다. 특히 세 시간대를 넘나드는 초중반부가 인상적이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신선하거나 흥미로운 소재라고 할 수 없다. 관객에게 많은 정보가 노출됐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스테디셀러였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필두로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 같은 범죄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덕분이다.
정지영 감독은 편집으로써 이 한계를 극복했다. 영화는 세 시간대를 번갈아 보여준다. 황준철 시점에서 2000년 재수사 과정과 2016년 재심 과정이 무게를 잡은 가운데, 1999년 사건 당시 정황이 플래시 백으로 삽입된다. 이러한 구성은 감정폭을 극대화하는 데 용이하다. 재심을 포기하라고 세 소년을 설득하려던 황반장이 그들을 도와주기로 결심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계곡에서 물놀이하는 세 사람. 황반장은 그들의 어릴 적 물놀이 장면을 겹쳐 본다. 재수사 과정에서 품었던 의구심과 분노, 재심 과정에서 되살아난 죄책감과 희망이 응축되며 교차편집의 힘이 정점에 이른다. 페이드 아웃되는 화면 전환이 올드하고 투박하나 힘이 있는 이유다.
배우들도 한 몫한다. <소년들>은 등장인물이 많다. 주요 선역과 악역만 합쳐도 5명가량 되고, 진범이 3명, 누명을 쓴 소년들이 아역과 성인역 합쳐서 6명이다. 그 외 조연이 더해지면 20명 가까운 인물이 과거와 현재에 뒤엉켜 있다. 관객 입장에서 충분히 혼란스러울 상황이다. 하지만 조진웅, 진경, 허성태, 하도권, 서인국 등 설령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익숙할 배우들이 곳곳에 포진한 덕분에 관객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화법과 메시지의 모순
다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서서히 힘을 잃는다. 황준철과 최우성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순간부터 아이러니하게도 긴장감이 서서히 사라진다. 여러 이유가 있다. 악역만 등장하면 어두워지는 조명, 음영이 도드라지는 연출, 이마에 '나 악역이요'라고 쓰여 있는 배우들의 연기.
더 큰 문제는 악역 활용법이다. <소년들>은 입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경찰의 무책임한 수사, 검찰의 방관, 사회적 신뢰를 핑계 삼아 개인의 무고함을 짓밟는 치밀함. 결국 영화의 칼날은 수사기관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겨냥한다.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경찰과 검사는 아무도 없다는 자막을 마지막에 달아둔 이유다.
그러나 메시지의 중요도에 비해 경찰의 구조적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악역이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거짓 자백을 유도하려는 고문과 증거 인멸은 몇몇 경찰과 검찰의 일탈에 그친다. 묘사도 일차원적이다. 그들은 두 시간 내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협박하고 전전긍긍한다. 경찰서장이나 다른 이들이 옛 동료를 옹호하는 장면도 지나가듯 등장하는 데서 그치고 만다. 마음껏 미워하고 비난하라고 설정한 표적에 불과한 셈이다.
자연히 메시지는 힘이 없다. 그나마 유준상이 경찰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는 대사를 내뱉기는 한다. 그가 경찰 행정력을 악용해 가족을 괴롭히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그전에 황준철과 최우성의 개인적인 대립이 먼저 부각되다 보니 한계가 명확하다. 둘의 몸싸움도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변호인>이 되지 못한 <소년들>
법정 시퀀스에서는 모든 문제가 일거에 터져 나온다. <소년들>은 구조적으로 <변호인>과 유사하다. 앞서 피해자의 상황을 제시하고, 후반부에서는 억울함을 해소한다. 국가 폭력에 대항해 정의를 지키려는 의인들의 용기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전환점이자 클라이맥스인 법정 시퀀스에서는 2시간 동안 쌓아 올린 모든 감정이 카타르시스로 승화돼야 한다.
<소년들>은 카타르시스를 터뜨리는 데 실패했다.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뽐내는 <변호인> 속 차동영(곽도원) 같은 캐릭터가 없다 보니 긴장감과 울분이 좀처럼 쌓이지 않는다. 차동영은 진심으로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위한다고 믿는 공안 경찰이었다. 그 독특한 캐릭터성 덕분에 "국민이 국가"라는 상식적이고 헌법에 입각한 주장을 하는 송우석 변호사와의 대립이 불꽃 튀었다.
반면에 <소년들>은 일방적이다. 경찰도, 검찰도 신념이나 소신에 입각한 채 변론하지 않는다. 그저 능글맞게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만 보인다. 재판을 대하는 태도, 절실함에 있어서 피해자 측과의 균형이 잡힐 수가 없다. 검사 쪽이 억지를 부리면, 변호인 측에서 철저하게 논박하니 긴장감이 있을 수가 없다.
결국 카타르시스를 토해내는 결말은 올드하다. 판에 박힌 전개와 연출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정적인 증인은 소란을 부리다가 법정에서 끌려 나간다. 세 피해자는 무죄를 주장하며 법정에서 울부짖는다. 슬로 모션과 구슬픈 음악이 이 장면을 장식한다. 그렇게 피해자의 절실한 항변마저 당연한 이야기를 길게 늘인 것처럼 느껴진다.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가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토리텔링을 하는 예술은 정보를 주지 않을 때, 서사적 긴장을 고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설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이미 이야기하기 예술의 절반을 완성한다.”
<소년들>은 벤야민의 의견과 정확히 반대되는 길을 걷는다. 사건의 전개와 의의까지 모든 과정을 설명한다. <소년들>이 <그것이 알고 싶다> 특별판처럼 보이는 이유다. 방점을 찍는 때 잠깐 힘을 뺄 줄 알았다면, 너무 잘 알려진 사건인만큼 의외의 순간을 몬들 수 있었다면 더 세련된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Poor 형편없음
여운과 잔상 대신 강박을 택한 또 한 편의 한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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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한 장르, 뻔한 소재라고 함부로 쓰지 마세요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친구: 별로인 영화를 보면 어떻게 해?
나: 음... 솔직하게 쓰려고 해.
친구: 솔직하게?
나: 거짓말할 순 없으니까. 요즘은 영화 값이 15,000원인걸!
영화관람료 15,000원 시대를 맞아 이상한 책임감이 솟구치는 요즘입니다. 사실은 걱정에 조금 더 가까운 감정입니다. "나의 리뷰를 읽고 영화를 봤다가 ‘돈 날렸다’고 느끼면 어쩌지?" 물론 제가 그렇게 영향력 있는 영화 리뷰어는 아니지만, 지인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제 리뷰를 읽은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더라도 최대한 솔직하게 리뷰를 쓰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모든 영화에는 좋은 점이 있다는 신념 아래에서 말이죠.
그래서였는지 얼마 전 영화관에서 <나는 여기에 있다>를 보는 와중에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딱 하나만 찾자. 좋은 점 딱 하나만!’ 영화 제목처럼 이 영화의 좋은 점이 “나 여기에 있어!” 하고 소리쳐주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단 하나의 좋은 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고작 몇 문장 만에 신념을 저버리고 말았네요. 그래도 영화 리뷰어로서의 책임감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영화관람료 15,000원을 지켜드리기 위한 리뷰를 시작합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4월 7일(금)에 진행된 <나는 여기에 있다>의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는 2023년 4월 12일 국내 개봉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
I AM HERE
<나는 여기에 있다>는 살인자의 폐를 이식받은 형사 '선두'가 살인자의 심장을 이식받은 연쇄 살인범 '규종'을 쫓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장르물이죠. 그것도 추적 스릴러입니다. '추적 스릴러' 하면 긴박하고, 박진감 넘치며, 심장이 쫄깃해지는 영화가 절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에는 추적 스릴러의 장르적 특징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형사와 범인이 치열한 수 싸움을 하며 긴장감을 끌어올려도 모자랄 판에, <나는 여기에 있다>의 캐릭터들은 정말 하나같이 멍청하기만 합니다. 덕분에 이 영화의 장르가 추격 스릴러라고 선포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처참히 실패해버렸죠. 영화는 연쇄 살인범 '규종'의 살인 장면이 찍힌 술집의 CCTV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CCTV 화면에는 '규종'의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찍혀있죠. 형사들은 그 CCTV 화면을 '규종'의 집에서 그의 아버지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오면 꼭 신고하라는 말을 던지고 떠나죠. 그런데, 그 집안에는 '규종'이 있었습니다. 천장이나 비밀공간에 숨은 것도 아니고, 그냥 방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방문만 열어 봤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죠. 살인범의 집을 찾아왔으면 수색부터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요? 혹시 CCTV에 살인범의 얼굴이 정확하게 찍혔는데 영장도 없이 방문한 건 아니겠죠? 멍청한 형사들의 활약으로 '규종'은 도망치고, 이렇게 긴장감 하나 없이 영화는 막을 올립니다.
이후 '규종'은 마스크나 모자도 쓰지 않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여자친구도 활짝 공개된 장소에서 두 번이나 만납니다. 평범한 아르바이트생인 여자친구는 건장한 남자 형사 두 명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죠. '규종'은 형사들이 도청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공중전화로 아버지와 통화도 합니다. 공중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건 그 공중전화의 위치를 안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규종'과 아버지가 1분이 훌쩍 넘도록 눈물겨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형사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습니다. 중간에 덮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요? 게다가 형사들은 '규종'의 다음 타깃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규종'이 다음 타깃을 무조건 죽이러 오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죠. 그리고 예상대로 '규종'은 그 타깃을 죽이러 옵니다. 타깃을 지키던 형사 2명과 '선두', 그리고 '선두'의 파트너까지, 총 4명의 형사가 달려들었지만 또 놓칩니다. 이쯤 되면 러닝타임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범인을 놓치도록 설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선두'의 파트너 '영조'는 폐를 이식한 '선두'에게 현장에서 물러나길 거듭 권합니다. 그러나 '선두'가 현장을 떠나야 하는 이유로는 건강보다도 형사로서의 자질 부족이 더 커 보입니다. 허술한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추적 스릴러의 장르적 특징에 관해서는 지금부터도 한참을 더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제 다음 문제점을 이야기해야 하니까요.
⊙ ⊙ ⊙
스토리텔링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구멍 가득한 이 영화의 설정입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의 소재는 '살인자의 폐와 심장을 나눠 가진 형사와 범인', 그리고 '사이코패스 장기 기증자의 성격과 특징이 전이되어 사이코패스가 되어버린 수혜자'입니다. 장기 기증자의 성격이 전이되는 일은 흔치 않지만, 장기 기증 수혜자가 기증자의 가족을 만나게 되면 세포에 축적된 기억이 되살아나서 성격이 전이될 수도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설명입니다. 장기 기증 코디네이터가 논문도, 학계 보고도 아닌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낸 이 정보가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설정이죠.
물론, 장기 이식 수혜자가 기증자의 성격, 습관 등을 닮을 수 있다는 이론이 실제로 존재하긴 합니다. 또 이러한 소재를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루기도 했죠. 그러나 의학적, 과학적 근거가 없고, 상식적으로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설정을 가져다 쓰려면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말이 되게끔 만들어놔야 하죠. 이런 걸 우리는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꼭 거창한 마블 영화에서만 세계관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 안에서만 허용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반드시 그 이야기를 뒷받침할 세계관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있다>는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몰입감도, 흥미도 떨어질 수밖에 없죠.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요.
아마도 감독은 스릴러의 틀 안에서 '장기 이식'과 '성격 전이'라는 소재를 통해 기증자 가족과 장기 이식 수혜자 사이에서 형성되는 유대를 그려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기 기증자도 살인범, 장기 이식 수혜자도 살인범인지라 그들의 유대가 공감으로 이어지긴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살인자의 장기를 이식한 형사('선두')와 나쁜 사람의 장기를 이식한 착한 사람('규종')의 내적 고뇌와 혼란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더라면, 전체적인 만듦새가 조금 허술했더라도 볼만한 작품이라 평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심리 묘사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나쁜 놈의 장기는 이식해선 안 된다. 그럼 나쁜 놈 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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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공들여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단 한 순간도 들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연기 교실에서 한꺼번에 섭외한 듯한 배우들, 현장음 하나 없이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처럼 지나치게 깨끗하고 조용한 음향,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화면, 하나하나 꼽기 어려울 만큼 많았던 세심하지 못한 연출 등 그 밖에도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찌 됐든 영화 감상은 취향의 영역이기에 지금까지는 아무리 영화가 별로여도 웬만하면 영화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했는데요. 그러나 앞으로는 예외를 두어야겠습니다. 기준은 정성입니다. 지금은 영화관람료 15,000원 시대니까요.
Summary
과거, 살인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폐를 찔린 후 장기 이식을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난 형사 ‘선두’(조한선). 수사 일선에 복귀한 그는 연쇄 살인범 ‘규종’(정진운)을 쫓던 중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아승’(노수산나)을 통해 ‘규종’이 자신과 같은 공여자의 장기를 이식받은 것은 물론 공여자가 과거 자신이 검거했던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신근호
출연: 조한선, 정진운, 정태우, 노수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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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은 리들리 스콧. 거장이죠
이 글은 영화 [글래디에이터 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결혼이나 승진 같은 이벤트일 수도 있고, 인생의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얻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순간이 만약 배우에게 다가온다면. 당연히 자신의 존재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역할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러셀 크로우라는 배우에게는 극 중에서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원수인 황제 앞에서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내뱉는 순간이 바로 그렇게도 기다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검투사들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의 모습은, 화면상에서 봤을 때 상대 배우들에 비해 비교적 작은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압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의 극 중 이름에도. 그리고 배우로서의 이름에도 남다른 무게감이 생긴 뒤에 느낄 수 있는 후광효과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후광 효과를 만들어 낸 위대한 감독 리들리 스콧에게도 [글래디에이터]는 매우 특별한 영화다. 24년이 지난 지금에도 막시무스의 이름을 들으면 전율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속편을 선보이며 자신의 이름값뿐만 아니라 영화의 이름값도. 게다가 불세출의 영웅 막시무스에게도 톡톡이 값을 치러줘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님 개연성 어디 갔어요
사진출처:다음 영화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말 잘 만든 영화라고 해도 겨우 본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그 우려(?)는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현실이 되어버렸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1편에서 따왔지만 안타깝게도 개연성과 임팩트는 24년 전 영화에서 신나게 써 버려 이미 멸종한 것처럼 느껴진다.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루시우스(폴 메스칼)의 눈에 분노가 있다고 말한다. 전쟁 중 자신의 아내를 비롯한 시민들을 잃었으니 분노의 계기는 명확하다. 그러나 분노의 방향과 깊이는 애처로울 정도로 얕아서 영화 상에서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힘들다. 그나마 쌓아 올린 나노단위의 분노조차도 결국 마르쿠스(페드로 파스칼)를 경기장에서 만나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덕분에 영화의 초반부에는 이렇게 말 잘 듣는 전쟁노예가 있었던가.라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하게 한다.
초반부에서 자신의 뿌리를 다시 한번 알게 된 각성한 주인공이 후반부에는 독자적으로 "로마황제 프로듀스 101"을 찍고 있는 마크리누스에게로 칼끝을 겨누는 과정도 그다지 인상적이라거나 매끄럽지 않다.
그 연결고리로 선택한 것은 쌍둥이 황제의 존재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 해봐야 화장을 무당처럼 하는 바람에 밤에 마주치면 무섭게 보이겠다 정도일 뿐. 인간성의 잔인함을 강조하는 것 외에 주인공과 크게 관련된 이벤트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 황제의 존재 이유는 마크리누스의 귀걸이보다도 작고 하찮게 보이고, 그로 인해 과연 그만큼의 품을 들여서 이들을 없앨 이유가 있었던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진출처:다음 영화
또한 2편이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주인공의 태생적인 한계에서부터 온다.
주인공에게 고유함과 더불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막시무스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루시우스는 자신의 이름보다는 아버지의 이름 덕에 조금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등장하는 극초반부의 장면은 정말 많은 정보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것도 전장을 둘러보는 막시무스를 향해 인사하는 동료 병사들의 표정으로. 그를 향한 믿음과 존경. 전우애와 의지를 꽉꽉 채운 눈빛으로 말이다.
막시무스는 촉망받는 장군이었으며 분노를 장착한 정치게임의 패배자였고. 죽음이 그를 덮친다 해도 무릎 꿇기는커녕 어서 나를 갈기갈기 찢어보라며 포효할 인물이었다. 잔인한 전투 장면이 없이도 그의 걸음걸음마다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루시우스에게 주어진 서사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너무도 옅은 데다 유약했고. 그 덕분에 루시우스는 아버지에게 그저 만담실력을 물려받은 호탕한 사람 정도로만 느껴진다.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힘이 실리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그는 로마 제국의 단 하나 남은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핏줄을 아무리 영화라지만 살해할 리는 없다.
우리는 막시무스가 그토록 살아남기를 원했고. 화면 속에서 시간이 흐를 때마다 죽어가는 그를 보며 눈물과 안타까움을 삼켰지만. 아들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온 세상 인물이 다 죽는다 해도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테니. 믿는 구석이 애초에 있는 사람의 전투가 간절해 보일 리가 없다.
거장의 장기자랑 타임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장이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을 십분 살려내 화면과 남은 시간 가득 채워내는 것.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운 초반부가 지나고 나면 후반부에는 우리가 감독에게 기대했던 모든 장면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관객의 눈에 안긴다. 소위 "큰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가진 요소들인 거대한 스케일과 장엄한 장면에서 갖추어야 할 카타르시스들을 모조리 느낄 수 있다. 기존의 검투 장면들 역시도 작정한 듯 화려하게 준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거의 장면들은 아름답다 못해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하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독은 지구상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 밖에 없을 것이며. 그의 존재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후반부 덕에 앞부분의 불쾌함이 조금은 날아간다.
물론 영화가 주는 장대함과 압도당하는 힘이 스토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면 자체가 주는 웅장 함이라는 것은 아쉽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보상은 완벽히 가능하고. 정해진 결말로 가는 그 길마저도 조금은 기대로 채울 수 있다.
마치면서
내가 존 스노우 시절(대충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뜻) 두려움이 너를 구할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꽤 오랫동안 내겐 미스터리와도 같았다.
한낱 평범한 사람인 나 조차도 두려움을 이토록 피하고 싶은데.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버린 작품의 감독에게 이번 영화는 얼마나 피하고 싶은 과제였을까.
두려움에서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거장은 스스로가 가진 모든 "치트키"를 활용했다. 주어진 두려움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한 덕에. 이 두려움의 바다에 빠졌을(?) 거장은 뭍까지는 떠밀려 올 수 있었다.
머금은 모래를 내뱉고 따끔거리는 바닷물이 코에서 흐르는 걸 느끼며 진절머리를 쳤겠지만. 비로소 폐 한가득 신선한 공기를 마실 때는 안심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결과 또한 아마도 조금은 매콤하지만 다행인 평이될 것이다.
또한 다음번에 두려움의 바다에 빠졌을 때 무사할 행운이 다를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 글의 TMI]
1. 베이글 그만 먹고 싶은데 그게 안 됨
2. 아침 운동 너무 힘들다.
3. 너무 추워서 난로를 사고 싶은데 전기세가 걱정된다.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munalo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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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영원을 향해
영화를 처음 여러 번 보게 만든 영화가 매트릭스였다면, 영화를 보고 난 후 후유증이 이렇게 오래갈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던 첫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였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책 보다 영화가 더 재밌어져 소위 명작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을 하나씩 찾아보던 때가 있었다. 그중 나에게는 박찬욱 감독 영화가 가장 여운이 길게 남았고 항상 지루하지 않게 보았다. 영화 개봉 전 인터뷰에서 감독이 자극적인 장면이 는 15세 관람가에, 자신의 영화가 아닌 순수한 로맨스 영화로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면서도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 같다. (이후 스포일러)
출처: 유튜브 영화
영화에서 드러나는 내용만을 단순하게 따져보면, 이 영화는 불륜 영화에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계속 등장하는 자극적인 영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본 이후 든 생각은 '나는 왜 이런 영화를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였다. 라라 랜드, 어바웃 타임, 혹은 건축학개론 같이 정말 유명한 영화들을 볼 때 보다도 더 두근거렸다. 아무래도 영화를 여러 번 볼수록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배우들의 표정 연기에 압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유튜브 영화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여운이 길게 남을까를 생각했을 때, 가장 큰 이유는 영화에서 시종일관 흘러나오는 '안개'라는 노래인 것 같다. 음악 자체가 눈으로 보이는 장면들에 너무 잘 어울리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두 배우의 분위기와 감정이 노래의 음과 가사에 딱 맞아서 묘한 감정으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노래 때문인지 영화 속에서 계속 비가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출처: 유튜브 영화
영화 속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을 꼽자면 초반에 해준이 서래를 취조하고 감시하는 장면이다. 만약 내가 경찰과 용의자의 로맨스를 다루는 글을 쓰게 된다면 수사와는 관련이 없는 장소를 배경으로 할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취조의 과정은 소개팅처럼 보이고 감시의 과정은 데이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해준이 냄새를 맡는 장면을 봤을 때 사랑이 서로의 향기를 맡는 거라는 버스커버스커 '향수' 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안개와 같은 상황에서 대화와 관찰, 기록을 통해 끝없이 파고들고자 하는 것은 수사와 사랑이 맞닿아있는 지점일 수도 있겠다.
출처: 유튜브 영화
여주인공이 중국인인 이 영화는 서래가 '붕괴'라는 말의 뜻을 알게 됨으로 1부를 끝낸다. 후반 해준은 자신이 언제 사랑한다는 말을 했냐고 다그치지만, 서래에게 있어 해준이 했던 붕괴되었다는 말은 곧 사랑한다는 말 이상의 말이었을 것이다. 사랑 고백도 아닌 말을 녹음해 힘들 때마다 듣곤 했다는 것만 봐도.. 이 지점까지 보았을 때는 둘 사이 타이밍이 어긋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들었다.
출처: 유튜브 영화
1부는 삶의 목적이 없거나 결핍이 있어 불면증에 시달리고 졸음운전을 하고, 드라마를 보다가 소파에 앉아서 졸던 두 사람이 서로가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되어 자신의 존재 이유나 다름없던 직업윤리를 버리면서 붕괴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후 둘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살지만, 결핍이 채워졌던 곳은 더 크게 비어 이전보다도 못한 생활을 이어간다. 서래는 드라마의 대사처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수 없을' 방법으로 해준을 찾아가며 2부가 진행된다.
출처: 유튜브 영화
작중에서 해준은 해결하지 못한 미결 사건들의 사진을 방에 붙여놓고 잠을 잔다. 서래가 해준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 서래는 처음으로 미결사건의 뜻을 알게 되었다. 둘의 마지막 대화 때, 서래는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었다.'는 말을 한다. 해준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소유보다는 사랑이 더욱 커졌기 때문에 더 이상 상대를 붕괴시킬 수 없던 서래는 자기 자신이 미결 사건이 되어 영원한 사랑을 만드는 마지막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출처: 유튜브 영화
핸드폰을 바다에 버리는 것이 1부에서 해준의 사랑 방식이었다면, 2부에서는 서래가 똑같은 말을 하는 것도 영화의 핵심인 것 같다. 1부에서 녹음하는 사람은 해준이었고 2부에서 녹음하는 사람은 서래였던 것처럼. 결국 서래는 자기 자신을 바다에 버림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최후에 최후에야 해준은 상대의 의도를 깨달아 해가 질 때까지 서래를 찾으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한다'는 대사를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계획을 다 이루고 바다를 택한 서래와 산으로 대표되는 '친절한 형사님'인 해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통화에서 서래가 가장 중요한 대사를 중국어로 말했던 것은 항상 해준의 얘기를 번역하고 붕괴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랑을 키웠던 자신의 입장을 해준도 겪었으면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유튜브 영화
영화의 주인공이 살인범과 불륜 남인 것은 변함없지만 피를 싫어하는 상대를 위해 수영장의 피를 다 빼고 청소하고, 삶의 근간이 되는 직업윤리를 버리기도 하며, 상대를 만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면서 가장 낭만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가..
출처: 유튜브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떠올랐던 시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낮은 곳으로 - 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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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와 용기를 주는 영화 추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신청 받은 주제는 바로 '위로와 용기를 주는' 영화입니다.
이 게시물 혹은 씨네픽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동일 내용의 콘텐츠 게시물에
자신이 보고싶은 영화에 대해 적어주신다면 다음 콘텐츠를 올릴 때 여러분들의 댓글을 바탕으로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작해볼까요?٩( ᐛ )و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네이버 영화
synopsis
이태리에서 돌아온 성환이 교환과 재회한다.
cine pick!
꿈,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는
2x9의 색깔로 무겁고 진지한 위로보다는 가볍게 위로를 전한다.
싱 스트리트
ⓒ 네이버 영화
synopsis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라피나에게 첫눈에 반한 코너. 잘 보이고 싶어서 밴드를 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한 코너는 덜컥 라피나를 뮤직비디오에 섭외하고, 그날부터 코너는 급하게 밴드 멤버를 모으기 시작한다.cine pick!
<원스> <비긴 어게인>에 이은 존 카니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인 <싱 스트리트>는
도전을 하라는 용기와 함께 노래 가사로 위로를 주기도 한다. 도전을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예스 맨
ⓒ 네이버 영화
synopsis
대출회사 상담 직원 칼 알렌(짐 캐리)은 ‘NO’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매사 부정적인 남자. 하지만 친구의 권유로 ‘인생역전 자립프로그램’에 가입하면서 그의 인생이 180도 뒤바뀐다!
cine pick!
YES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 <예스 맨>은 긍정의 힘을 보여주며 용기를 내서 도전하다 보면
많은 경험과 하루 하루 새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기력함에 빠진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 네이버 영화
synopsis
공부와 담을 쌓은 구제 불능으로 학교에서 낙인찍힌 사야카. 하지만 그녀를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엄마와 포기를 모르는 츠보타 선생을 만나 명문대 진학 도전을 선포하게 된다.
cine pick!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는 깊은 위로를 주는 명대사가 많은 영화이다.
성장 영화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관객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
ⓒ 네이버 영화
synopsis
좋아하는 남자친구에게 고백하기 위해 고양이가 된 소녀의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
cine pick!
부드러운 따뜻한 색감과 작화로 호평을 받은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는
고양이 가면이라는 색다른 소재를 사용하여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주는 영화이다.
영화 속 OST 역시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았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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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비한 동물사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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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러브하드는 공개된 이후 큰 반응없이 사라진 영화에요.
특히나 한국에서는 아주 빠르게 사라져갔죠.
하지만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가족, 애인과 함께 보기에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아주 뻔한 이야기이지만 따뜻하고 꽤 유머러스하거든요.
아직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제 리뷰를 보고 영화를 찾아봐주세요!
그리고 따뜻한 연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한 해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제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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