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E2025-02-21 17:25:21
영원할 순 없지만, 영영 남을 이야기
영화 <로봇 드림> 리뷰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타인에게 기대와 실망을 경험해 본 만큼 스스로의 개인적인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수고롭게 느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회사와 집을 바쁘게 오가는 쳇바퀴를 돌아가는 듯한 생활 패턴도 한몫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법 성숙한 어른이니까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자기계발을 하며 혼자서도 곧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모이는 연말연시나 휴가철이 되면 창문에 홀로 비친 자기 모습과 마주할 때 묘한 씁쓸함을 곱씹게 된다. 마치 <로봇드림> 오프닝 속 도그의 모습처럼 말이다.
모든 인연이 그렇듯 조금씩 엉키며 둘이 다시 재회하기엔 점차 어려워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둘 곁에는 새로운 단짝이 생긴다. 그리고 앞서 계속 만나지 못한 둘이 비로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될 상황이 됐을 때 로봇은 그저 함께했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봇 드림>의 가장 큰 특징은 대사 한마디 없이 효과음 OST 그리고 조금은 유치하지만 볼수록 귀여운 애니메이션 그림이 스크린을 채운다는 점이다. 로봇의 기계음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도그의 숨소리는 왠지 모르게 서글픈 순간도 종종 있다. 둘이 다시 즐겁게 뛰어놀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지만 세상 일이 모두 마음처럼 잘 풀리지 않듯 둘의 관계도 변하게 된다. 그래서 꼭 슬픈 이별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엔딩에 삽입된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를 들으면서 코끝이 찡해지는 기운은 멈출 길이 없다.
<로봇 드림>처럼 사랑이든 우정이든 이별은 슬프지만, 우리에겐 기억이 남는다. 그 이별이 좋았던 나빴던 지 간에 그때 재밌었는데, 하고 입꼬리가 잠시나마 올라가면 그만이다. 곁에 있을 줄 알던 친구가 떠나고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끝나곤 한다. 아마도 우리는 은연중에 영원하지 않을 걸 알아서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때때로 서로의 시간에 잠시 살았다는 걸 기억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러니 부디 뜻하지 않은 이별에 짧게 슬퍼하고 종종 좋았던 날들을 떠올리며 틈틈이 웃길 바란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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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
운명이란 무엇인가. 이는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성경에서부터 공상과학소설까지 운명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왔다. 그리고 이는 문학에서 영화까지 매체를 달리하면서도 이어진다. 드니 빌뇌브는 운명이란 주제를 거듭해서 표현했다. 〈그을린 사랑〉(2011)부터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블레이드 러너 2049〉(2017)까지 오이디푸스 신화, 전쟁, SF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운명과 자아를 탐색해 왔다. 특히, 소설을 원작으로 한 〈컨택트〉(2017), 《듄》 시리즈(2021-2024)는 운명에 대한 탐색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특히, 〈컨택트〉, 《듄》 시리즈 모두 공상과학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각 작품에서 운명을 대하는 방식에서의 차이가 드니 빌뇌브의 운명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관점을 파악하는데 유의미하다. 그렇기에 이 두 작품을 바탕으로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을 탐색하고자 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을 통해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운명의 의미을 정의하고, 〈컨택트〉와 〈듄〉과 〈듄: 파트2〉에서 나타나는 운명 양상의 차이를 살펴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먼저, 〈컨택트〉, 《듄》 시리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운명의 양상을 살펴 드니 빌뇌브의 운명을 정의하자. 그의 운명론은 ‘예지자의 등장’, ‘상대 문화의 습득’, ‘수행의 서사’라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운명을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 차저.’라고 정의한다. 즉,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운명이라 부르기 위해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야 하고, 그것이 미래에 실현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예지자의 존재가 중요하다. 두 영화에서의 예지자의 등장을 살펴보면, 〈컨택트〉에서는 헵타포드, 《듄》 시리즈에서는 베네 게세리트가 그 예지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헵타포드는 외계 생명체로서, 인간과 다른 체계의 언어를 사용하고, 베네 게세리트는 그들만이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 두 존재 모두 외부의 독자적 문화를 가진 존재라는 측면에서 이방인이다.
또한, 헵타포드는 우주에서 온 존재이고, 베네 게세리트는 우주를 떠돌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두 존재 모두 지금 있는 곳 너머의 공간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다. 여기서 상상이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하다. 혹자는 인간의 특성을 상상력으로 정의할 정도로, 상상은 인류 문명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없는 것을 떠올리도록 하여, 욕구를 만들고 목표를 갖게 하며 변화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규칙과 사회를 만들고 체계화된 제도를 만든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하다. 이러한 상상을 자극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두 존재는 인간의 종적 성질 및 원초적 욕구와 맞닿아 있다.
게다가 두 존재는 모두 주인공을 각성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헵타포드는 언어를 전달함으로써, 베네 게세리트는 고통을 줌으로써 각 영화의 주인공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그 각성의 과정은 주인공이 이전에 겪어 본 적이 없는 무언가이며, 그것을 통해 극심한 감정을 겪는다. 딸의 죽음을 알게 된다거나, 죽을 듯한 고통을 겪는 것처럼. 그리고 이로 인해, 두 주인공은 새로운 선택의 문제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각성 또한, 이전에 두 주인공이 선택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각성 이전의 선택과 이후의 선택은 차이가 있다. 이전의 선택은 누군가에 의해 제안된 것 사이의 선택이라면, 각성 이후의 선택은 목적 의식을 기반으로 한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자발성에는 정해진 미래라는 외부의 압력이 존재하나, 그 순간만은 주인공이 스스로 선택하는 듯 보인다. 즉, 각성은 주인공의 선택의 결과이며, 그에 따른 대가를 만들고, 그 이후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즉, 드니 빌뇌브의 운명에서 상상과 결부된 존재로서 주인공을 각성시키는 이방인인 예지자는 필요조건인 것이다.
또한, 이 각성의 과정에서 드니 빌뇌브는 플래시 포워드를 사용한다. 드니 빌뇌브는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플래시 포워드를 독특하게 사용한다. 그의 플래시 포워드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 영화의 시작에서 플레시 포워드를 플래시 백처럼 시킨다. 그로 인해, 그것이 단순한 환상인지, 과거에 있었던 일인지, 미래에 있을 일인지 관객을 한번에 인지할 수 없다. 둘, 클로즈업 쇼트나 롱 쇼트로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제공한다. 그는 플래시 포워드로 각성의 순간을 표현하며, 운명을 보여주는데, 이는 시퀀스가 아닌 쇼트로 단편적으로 표현되며, 일상적인 스케일의 화면이 아닌, 극도로 확대되었거나 축소된, 그리고 극도로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화면으로 표현하여 이질성을 극대화한다. 마지막으로 내레이션의 존재다. 그의 플래시포워드는 예지자에 의한 각성으로 야기됙기에 보여지는 이미지와 다른 음성이 삽입된다. 그리고 이는 주로 내레이션으로 삽입되며, 영상과 음성의 격차가 발생한다. 이러한 특징은 각성 순간의 혼란을 표현하며, 예정된 미래로 인해 관객이 느낄 허무와 수동성을 옅게 하고, 모호함에 의한 긴장감과 주인공의 적극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다음으로, 상대 문화의 습득을 살펴보자. 이는 앞선 예언자에 의한 각성과 연결된다. 하지만 단순히 예언자에 의한 각성을 넘어 더 능동적인 문화 습득이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다. 예언자에 의한 각성은 앞선 문단에서 살폈으니, 후자만 다뤄보자. 먼저, 〈컨택트〉를 보면, 가장 두드러지는 문화 차이는 헵타포드의 문화와 인간의 문화다. 그리고 이들의 소통은 언어를 매개로 이뤄진다. 그런데 이 외에 또다른 문화 차이의 축이 존재한다. 이는 물리학자와 언어학자의 차이다. 이는 물리학에서의 관점 차이와 언어학에서의 음성-문자 차이로 나타나며, 소설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먼저, 관점 차이를 살펴보면 언어학자와 물리학자는 페르마의 원리를 통해 소통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페르마의 원리는 빛의 굴절 현상을 다른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이 또한 문화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는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 사이의 차이가 나타난다. 소설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설명되며,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게 다뤄지나, 영화에서는 그 과정까지 세세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으로 실현되지 못한 몇 가지의 문화 차이가 있으나, 어찌하였든 이 차이를 담은 원작을 선정하였다는 점에서 드니 빌뇌브는 문화 수용이 운명을 수용하는 과정과 연관됨을 명백히 밝힌다.
역시나 《듄》 시리즈에서도 문화 수용이 드러난다. 오히려 상대의 문화 수용은 《듄》 시리즈에서 더 잘 드러나는데, 특히 눈에 띄는 문화의 수용은 프레멘과의 교감이다. 그 외형이나, 영화에서의 설정을 살펴보면 주인공은 과거 유럽 가문의 후계자를 상징하고, 프레멘은 그들이 침략한 곳의 원주민을 상징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가문이 멸하자, 프레멘의 터전으로 들어가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운다. 이처럼 두 영화에서 모두 다른 문화를 수용함으로서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수행의 서사를 살펴보자. 드니 빌뇌브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운명을 받아들인 이후의 과정에서 수행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컨택트〉는 그 영화 전체가 수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헵타포드에게 가기 전, 언어학자는 외계 생명체가 출몰했다는 뉴스가 나와 학생들이 강의에 나오지 않는데도 강의를 하러 대학에 나가는 사람이다. 그것을 수행해야만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헵타포드에 의해 비극적인 미래를 알게 되었을 때조차, 그 행위를 기꺼이 수행한다. ‘그럼에도 하는’ 사람인 것이다.
《듄》 시리즈에서도 미래를 수행하는 행위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듄〉에서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 전인 주인공은,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듄: 파트2〉에서는 이 모습이 더 흥미로운 양상을 띤다. 〈듄: 파트2〉에 오며, 주인공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은 심화되고, 지금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지 고민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 반복된다. 즉, 지금의 수행과 미래의 수행 사이의 갈동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써 끝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지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점이 나타난다. 바로, 이 운명을 거스르는 수행을 하려는 자의 등장이다. 변화한 주인공으로 인해 조력자가 반동 의지 가져 발생하는 변화는 운명에 의한 수행의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지껏 수용적 수행만이 강조되다, 소설에서 영화로 재창작하며 비중이 확대된 인물이 반동적 수행을 하려는 의지를 품는 것으로 마무리됨으로써 또다른 차원의 운명론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확신의 수행이든 의심의 수행이든 간에, 그리고 수용의 수행이든 반동의 수행이든 간에, 어찌하였든 드니 빌뇌브는 운명에 의한 실천, 즉 수행을 강조한다. 행위로 이어짐으로써 운명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 영화 모두 운명을 수행하는 서사를 갖추는 것이다.
즉,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은 운명을 예지하는 자에 의한 운명의 시작, 차이 수용으로 인한 운명의 과정, 수행으로 인한 운명의 완성으로서 정의될 수 있다. 특히 이 세 요소 중, 앞의 두 전제 예지자의 존재와 상대의 문화 수용은 모든 작품에서 비슷한 양상을 띤다. 이는 운명의 ‘예정된 미래’의 가정인 내재적 의미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을 실현하는 ‘수행’의 측면에서 〈컨택트〉, 〈듄〉, 〈듄: 파트2〉는 서로 다른 태도를 견지한다. 그로 인해, 세 영화는 하나의 영화가 아니라 각자의 서사를 쌓아가는 다른 영화로서 존재한다. 먼저, 〈컨택트〉를 살펴보자. 〈컨택트〉에서의 수행은 ‘행위적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행위적 태도란 말 그대로 ‘하는 것’,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행하는 것 자체가 운명의 완성이라는 것이며, 이는 이후 언급될 다른 태도에 비해 다소 조작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컨택트〉에서 드러나는 행위적 태도는 실존주의와 연관이 있다. 드니 빌뇌브는 이 영화에서 인간 개인과 개인의 주체성과 존재성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행위는 ‘선택’이 되고, 영화의 끝에 다다라 자유의지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컨택트〉는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의 등장과 함께 시작한다. 소설에서는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이유가 설명되는데, 이는 “지구에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다. 또한 ‘행동’이 원서에서 ‘연기’라는 의미도 갖고 있는 “performance”로 표현되며, 모든 것이 정해진 미래로의 착실한 수행이며, 이는 정해진 각본대로의 연기와 닮았음를 의미한다.
이는 실존적 측면에서 자유의지의 문제를 야기한다. 아무리 현재에서 바꾸고자 노력해도 어차피 올 미래가 있다면, 그 미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과로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정된 미래를 가정하는 운명의 개념은 실존적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정해진 미래에 대한 수행을 자유의지의 결과로 해석한다. 이는 주인공의 선택을 통해 드러낸다. 이를 관찰하기 전에 영화에서 운명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야 한다.
영화의 시작, 아이의 웃음 소리와 함께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어느 정보 없이 첫 장면을 마주한 관객은 자연스레 이것이 플래시 백이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을 거쳐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첫 장면이 플래시 백이 아닌 플래시 포워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순환하는 구조를 갖춘 영화의 형식은 운명의 ‘이미 예정됨’을 구조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순환하고 예정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영화의 구조 안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우리가 보는 주인공의 모습은 주체적이다. 그녀는 강의를 나가고, 정부의 요청에 응대하고, 매일같이 우주선에 올라가는 ‘그럼에도 하는’ 사람이고, ‘기꺼이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든 사람은 외계 생명체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지, 우주선에 어떤 사람을 보낼지, 어떤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할지를 선택한다. 이는 그들이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최선의 결과을 얻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끝내 운명을 맞닥뜨렸을 때, 다시 첫 장면의 내레이션을 떠올리며, 플래시 포워드로 묘사된 그 미래는 운명에 대한 막연한 수행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행임을 알게 된다. 비로소 관객은 이를 통해, 일종의 투쟁처럼 보이기도 하는 영화 속 인물의 적극성이, 운명에 대한 수행이 수동적 행위가 아닌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며, 기꺼이 운명을 행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드니 빌뇌브는 이를 통해 운명 수행의 행위적 태도를 드러내며, 운명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수 있음을 밝힌다.
《듄》 시리즈는 〈컨택트〉와 달리 보다 가치가 개입된 측면의 수행을 다룬다. 각자의 수행에는 목적이 있으며, 그 의도성에 따라 옳고 그름이라는 가치판단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때의 양상이 〈듄〉과 〈듄: 파트2〉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기에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두 편의 영화는 운명의 측면에서 따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먼저, 〈듄〉을 살펴보자. 〈듄〉에서 묘사되는 운명의 수행은 메시아적 태도다. 메시아적 태도란 종교적 의도성을 갖춘 운명관으로, 구원을 목적한다.
〈듄〉은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받아들이는 과정을 주요 골자로 한다. 성경을 모티프로 가지고 와, 진행되는 서사는 점지된 운명과 그를 수행해야하는 인물의 갈등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성경에서 묘사되는 운명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드니 빌뇌브는 주인공을 예지자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태어난 구원자로 설정하며, 운명이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즉, 운명은 거시적으로는 예지되는 반면, 미시적으로는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운명의 벗어남은 주인공의 부모, 즉 개인의 의지의 산물로서, 개인의 욕망과 의지를 통해 바뀔 수 있는 운명의 불완전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묘사되는 주인공은 예수적 인간으로,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진 인간이다. 또한 그의 운명은 구원을 목적으로 하며, 가장 성스럽고 완전에 가까운 존재로서 묘사된다. 하지만 그는 통제에서 벗어나 의도와 다르게 태어난 존재란 점에서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괴리에 의해서 주인공은 혼란을 겪는다. 결국 운명에 대한 부정에서 인정으로 넘어가는 이 서사에서는 운명을 인식하는 수준에서 멈추고, 이를 온전히 수용하는 것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운명의 존재를 인지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갖기 시작하는 데서 멈추는 이 영화의 운명관은 이후 〈듄: 파트2〉에서 발전된다.
〈듄: 파트2〉에서는 운명에 수용적 태도와 거부적 태도의 갈등으로서 수행에 대한 태도가 설명될 수 있다. 주인공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며 이를 수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 갈등은 운명에 의해 연결된 두 여성 캐릭터로 표항된다, 수용적 태도는 어머니로서, 거부적 태도는 챠니로서 드러나며 운명에 대한 내적 갈등을 심화한다. 끝내 수용을 택하는 주인공의 자세는 햄릿적 인간을 닮았으며, 운명에 대한 고민은 말 그대로 “to be or not to be”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선택한 수용적 태도는, 퀴사츠 해더락을 낳는 계획된 운명을 바꾸려 했던 자인 어머니로서 상징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거부적 태도를 드러냈던 예지자로서, 예지의 각성제인 ‘진실을 밝혀주는 독약’을 마심으로서 수용적 인간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운명에 대한 상반된 태도를 흥미롭게 표현한다. 특히, ‘진실을 밝혀주는 독약’을 마시는 것이, 주인공 또한 운명에 대한 수용적 태도를 견지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각성제로 인한 운명의 수용을 시각적, 서사적으로 짜임새 있게 표현한다. 게다가 수용적 태도를 상징하는 그녀는 선택 주체인 주인공의 어머니로서, 애인보다 더 강력한 운명이라 할 수도 있을 혈연으로 연결된 자라는 점에서도 수용적 수행의 상징으로서의 흥미로운 점을 지닌다.
어머니의 운명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챠니와 겹쳐 보이며, 마치 챠니 또한 이러한 변화를 겪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야기한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챠니가 운명에 대한 거부적 수행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영화를 마침으로서, 새로운 태도의 가능성을 남기고, 운명에 대한 수용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아님을 밝힌다. 소설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었던 챠니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괄목할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 편의 영화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드니 빌뇌브의 운명 수행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컨택트〉와 《듄》 시리즈 사이의 시간 간격이 있었따는 점과 〈듄〉과 〈듄: 파트2〉는 함께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즉, 운명에 대한 행위적 수행에서 의도적 수행으로의 변화는 그의 운명관의 변화로서 이해할 수 있는 반면, 메시아적 수행과 상반된 수행은 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
《듄》 시리즈에서의 〈듄〉과 〈듄: 파트2〉 서사적, 주제적 측면에서 분석했을 때, 〈듄〉은 〈듄: 파트2〉를 위한 준비 단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드니 빌뇌브의 운명관은 메시아적 태도를 통해 운명 수행에서의 의도 개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햄릿적 태도를 통해 상반된 수행의 포용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운명 그 자체도 ‘절대로 변화할 수 없는 것’에서, ‘변화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하지만 변화할 수도 있는 것’으로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드니 빌뇌브의 운명론에서 자유의지 개입의 여지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컨택트〉에서 《듄》 시리즈로 넘어오며, 백인 서사 비틀기가 강화되었음을 확인함으로서도 알 수 있다. 백인,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외부인, 여성 중심의 서사를 강화하는 것은 그의 영화 전반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주로 소설보다 남성 인물의 비중이 줄고, 여성 인물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계인의 언어를 습득하고, 원주민의 문화를 습득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강탈의 서사와 백인에 의한 원주민 구원 서사를 해체하고 소통과 화합의 서사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컨택트〉에서는 외계의 언어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외계어와 인간어 사이의 약화된 우열관계가 묘사되고, 상호 간의 문화 공유이기보다는 선물주기식의 일방적인 공유에 그친다는 점에서 운명에 대한 단편적인 측면만을 보여준다는 한계가 발생한다. 반면 《듄》 시리즈에서는, 한편에서 프레멘과의 상호작용에서 단순히 언어 공유를 넘어 그들의 지역에서 생활하고 문화에 융화된다는 점에서 비튼 서사를 보여주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결국 백인 남성 메시아와 그를 추종하는 원주민의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그 신념 또한 백인에 의해 주입된 신념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백인 중심의 서사를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복합적인 운명관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는 주인공과 거부하는 챠니를 통해 백인 남성 중심 서사와 운명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렇기에 드니 빌뇌브는 〈컨택트〉에서는 자유의지를 수용의 측면에서만 다룬 것을 넘어, 《듄》 시리즈에서는 메시아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등 거부의 측면에서도 운명의 수행을 탐구한다.
이처럼 드니 빌뇌브는 두 편의 공상과학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를 통해, 자신의 운명론을 드러냈다. 그는 예지된 미래를 수행하는 수행자로서의 역할을 살피며, 개인의 자유의지를 깊이 있게 이야기했다. 예정된 것 속에서, 예정된 것을 기꺼이 해내기도 하고, 예정되지 못한 것을 열렬히 해내기도 하며, 운명을 수용하든 그렇지 않든 기꺼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인물을 통해, 그는 운명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성립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렇기에 그의 운명론은 공허하지 않고 투쟁적이며 적극적이다. 살아있는 자들의 살아있는 운명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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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과 전두환을 반추하기에는 너무 얕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불법 운송 사업을 하며 돈을 벌던 레이서 '동욱(유아인)'과 엔지니어 '준기(옹성우)'. 그들은 양손에 큰돈을 쥔 채 올림픽을 앞둔 1988년 서울로 돌아온다. 그러나 절친 '복남(이규형)'을 비롯해 동욱의 여동생인 '윤희(박주현)'과 디제이 '우삼(고경표)'를 만난 반가움도 잠시, 상계동 판자촌을 무단으로 철거하는 등 기대와 다른 서울의 모습에 그들은 실망을 금치 못한다. 그러던 중 동욱과 '상계동 슈프림팀'의 행보를 눈여겨보던 '안 검사(오정세)'는 전두환의 비자금을 추적하는 비공식 작전을 그들에게 제안하고, 일생의 꿈인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기회를 잡기 위해 상계동 슈프림팀은 서울 도심을 질주하기 시작한다.
상업 영화의 예술성은 대중의 열망이 반영되는 지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상업 영화는 최대한 많은 관객을 유인해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때 개봉 당시 다수의 대중이 공유하는 감정과 열망, 환상을 화면에 녹여내면 자연히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상업 영화는 공동체의 집단적 경험을 비추는 창이 된다. 예를 들어 <터널>, <판도라> 같은 한국의 재난 영화는 세월호 사고를 다양한 방식으로 소환한다. 정부와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할리우드식 구원자를 기대할 수 없다는 대중적 인식을 스크린 속에 녹여낸다. 최근 흥행에 실패한 <비상선언>의 사례는 세월호 사고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과 열망이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역으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상업 영화의 특성은 정치적 맥락에서도 유효하다. 실제 역사 속 정치적 인물이나 사건과는 별개로 해당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을 영화는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 씨가 대표적이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정당성 없는 대통령이자 자국민을 학살한 독재자인 그는 사망 전까지 추징금도 다 갚지 않았고, 광주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사죄의 뜻을 밝힌 적도 없다. 또 이미 사망했기에 그에게 죗값을 물릴 수단도 없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과오를 심판할 수 있다. 그의 사망 전에 제작된 작품이기는 하나 <26년>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이야기를 다룬다. 최근에 개봉한 <헌트>만 하더라도 그를 처단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온당한 처사임을 암시한다.
서울 올림픽과 전두환의 관계를 되짚다
8월 26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서울대작전>도 같은 맥락 내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끝내 환수하지 못한 그의 추징금을 탈취하는 카 레이싱 액션은 판타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의의 심판이나 다름없다. 특히 영화가 88년 서울 올림픽을 배경으로 삼은 것은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단지 작품의 핵심 포인트인 레트로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부각하게 적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 올림픽은 전두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본래 전두환 정부는 쿠데타로 인한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권의 2인자인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투입하며 올림픽 유치에 몰두했다. 그러나 정권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했던 서울 올림픽은 오히려 전두환 정부를 찌르는 칼이 되어 버렸다. 올림픽을 위해 많은 외신이 서울에 들어와 있던 관계로 87년 항쟁 당시 개최가 취소되거나 개최지가 변경될 것을 우려한 정부는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이는 민주화 개헌과 전두환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올림픽 유치에 전념했던 전두환이 정작 개회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은 서울 올림픽과 전두환 정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서울 올림픽 개막을 목전에 둔 시점을 배경으로 비자금을 몰래 빼돌려 피신하려는 전두환을 끝까지 추격해 심판하는 스토리는 합당한 역사적 심판이자, 많은 이들의 공감을 끌어낼 영화적 상상력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중반부가 대체 역사물 같은 인상을 주며, 실제 역사와는 달리 모든 비자금을 잃고 백담사에 갇힌 그의 무력한 모습이 냉소를 자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음새가 헐거운 스토리텔링
그러나 <서울대작전>은 과거의 무게를 짊어지기에는 부족했던, 깊이가 얕은 액션 영화라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흡입력 있는 소재의 잠재력을 설득력 있게 구체화하는 데 실패한다. 문제는 스토리텔링의 측면과 장르적 관습 두 가지다. 우선 <서울대작전>은 동욱을 비롯한 상계동 슈프림팀의 아메리칸드림과 전두환의 비자금이라는 상이한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올드카를 사랑하고 카 레이싱을 즐기며 힙합에 빠진 만큼이나 화려한 뉴욕 브롱스 힙합 패션을 입고 다니는 이들. 그들은 필(Feel)과 소울(Soul)이 넘치는 문화의 본거지 미국을 동경하며, 자유와 멋이 가득한 아메리칸드림을 꿈꾼다.
하지만 전두환을 잡아들이려는 야망 가득한 안 검사에게 사우디에서 벌어들인 불법 외화를 비롯한 여러 범죄 행각을 들킨 후 그들은 전두환을 심판하는 비밀 작전에 투입된다. 이때 영화는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지고, 동료가 납치당하는 와중에도 목숨을 걸고 전두환의 비자금을 쫓는 그들의 동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안 검사에게 코가 꿰였다고 한들, 그들은 이미 당대의 사회적 고찰, 인식, 성찰과는 거리가 먼 행적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들이 돌연 역사에 먹칠한 독재자를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정의감을 발산하게 된 계기는 쉬이 납득되지 않는다. 작중 불과 1년 전인 87년 항쟁과 관련해 어떠한 언급도 등장하지 않기에 레이싱 패밀리가 정의의 화신이 되는 전개는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이미 갖고 있던 좋은 패를 영화가 활용하지 못했기에 더욱 의아하기도 하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경기장 건설 및 달동네 환경정비 및 재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주민을 길거리로 내몬 바 있다. 성화 봉송 중 불량주택이 보이면 안 된다는 이유로 판잣집을 무단으로 철거하기도 했으며, 그중에는 상계동 천막촌도 포함된다. 사우디에서 귀국한 동욱과 준기가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상계동이 초토화된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도입부는 이 사건을 반영한다.
이 장면은 전두환 대 상계동 패밀리의 대립을 더 직관적이고, 감정적이고, 무게감 있게 묘사할 기회였다. 주인공들이 무력한 약자이자 피해자임을 강조해 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절실함을 더 부각할 수 있었다. 올림픽을 이유로 장애인과 노숙자를 탄압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등과 연계해 정의감에 기대는 대신 더 날카롭게 비판을 가할 수도 있다. 이에 더해 라이벌이자 앙숙으로 등장하는 동욱과 '갈치(송민호)'가 협력하게 되는 계기를 더 자연스럽게 풀어낼 윤활유가 될 수도 있었다. 이 기회를 모두 놓쳤기에 <서울대작전>의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이음새가 헐겁다는 인상을 준다.
과해 보이는 장르적 유사성
한편 장르적으로 독창성이나 신선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특히 레이싱 액션의 대표주자인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그림자가 짙다. 일례로 작중 카 레이싱이나 체이싱 시퀀스 속 장면은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매우 유사하다. 전두환의 조직에 가담하기 위한 시험으로 등장한 도심을 가로지르는 레이싱 장면은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다. 작중 남서울 공항에서의 액션 시퀀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 구성과 순서가 시리즈의 6편인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의 공항 액션 시퀀스와 흡사하다.
또한 캐릭터의 구성도 <분노의 질주>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동욱은 단단하고 뜨거운 가족애와 동료애로 무장한 리더 '도미닉 토레토(빈 디젤)'와 역할이 같다. 동욱의 여동생인 윤희는 도미닉의 여동생인 '미아(조다나 브루스터)'를 연상시키며, 그녀가 유달리 오토바이를 애용한다는 점은 토레토 크루의 다른 여성인 '지젤(갤 가돗)'과 닮았다. 동욱의 절친인 복남은 리더 못지않게 뛰어난 레이싱 실력을 바탕으로 그를 충실히 보좌한다는 점에서 <분노의 질주>의 또 다른 진주인공 '브라이언(폴 워커)'과 대동소이하다. 기술자인 준기나 DJ인 우삼은 쉴 틈 없는 개그 콤비인 '로만(타이리스 깁슨)'과 '테즈(루다크리스)'를 보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비공식 수사를 펼치는 안 검사는 작전 기획부터 정보와 차량 지원에 이르기까지 '미스터 노바디(커트 러셀)'를 빼닮았다.
이에 더해 80년대 음악으로 가득한 카세트테이프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 것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음악과 드라이브의 조화를 강조하는 연출은 또 다른 카 레이싱 액션 영화인 <베이비 드라이버>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 속 장면을 배경만 바꾸어 활용하는 연출은 한국 영화의 고질병 중 하나다. <탑건>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R2B: 리턴 투 베이스>, <300>과 <킹덤 오브 헤븐>의 액션 시퀀스를 그대로 가져와 배경만 고구려로 바꾼 <안시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기술력이 좋아졌다 한들 독창성이 느껴지지 않는 문제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서울대작전>의 만듦새와 구성은 자연히 얄팍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서울대작전>은 전반적인 설정과 톤을 잘못 맞춘 듯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작중 동욱과 그의 팀, 갈치와 그의 팀은 제각기 카센터를 운영하는 자동차 마니아들이다. 이는 미국의 차고 문화를 한국에 맞게 현지화한 듯 보인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차고 문화는 보편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차를 매개로 맺어진 우정이나 가족 의식, 연대감은 자세한 설명 없이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고, 관객의 입장에서 주인공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도 힘들다.
또한 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성하더라도 충분히 다루고자 했던 이야기를 소화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프닝부터 엔딩 크레디트에 이르기까지 빼곡히 삽입된 힙합 음악의 분위기처럼 <서울대작전>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과시적이고 과장된 멋을 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에 비해 캐릭터들은 붕 뜨고, 송민호를 위시한 여러 배우의 연기도 부자연스러우며, 특히 '강인숙(문소리)' 회장이나 '이현균(김성균)' 실장처럼 무게감을 잡아야 할 악역들은 우스워진다. 그 결과 전두환에 대한 가상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클라이맥스는 기대에 비해 쾌감이 그리 크지 않다. 이처럼 그럴싸한 아이디어에서 힘차게 출발한 <서울대작전>의 질주는 역사의 무게 앞에서, 그리고 잘못된 튜닝으로 인해 간신히 결승선에 도착하는 데 그치고 만다.
D(Dreadful, 끔찍한)
실패하는 지름길만 골라 달려 나가는 88년도 한국판 <분노의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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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가 말하는 '민족'
켄 로치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보여주듯, 민족은 단결의 이름이자 분열‧적대의 이름이다. 먼저 단결이다. ‘민족’은 아일랜드인들이 독립이라는 공동의 꿈을 가졌음을 표지하는 범주다. 아일랜드인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독립을 꿈꾸며 ‘하나’가 된다. 하지만 민족은 아일랜드인 사이의 차이를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아일랜드인에게는 독립 이후에 대한 다양한 꿈이 있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누군가는 전통적 권위에 기댄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꾸는 동안 이 차이는 논의되지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는 치열하게 조정‧경합되었어야 할 차이들이 민족이란 이름 아래 억눌린 채 쌓여 있다가 끝내 폭발해 버리고 마는 과정이 담겼다. 우리와 비슷한 아일랜드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민족’이 무엇을 가능케 했고 또 무엇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난민, 이주민 혐오의 시대에 굉장히 시급한(혹은 이미 늦은) 작업이다.
1920년대 아일랜드의 한 마을. 영국 군인이 불시에 들이닥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하키를 치는 게 집회를 금지한 조치에 위반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과정에서 17살 청년 미하일이 영국군에게 반항하다가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하일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공통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모두의 슬픔 속에서 주인공 데미엔의 고민은 깊어진다. 데미엔은 의사 자격증을 딴 시골 마을의 드문 엘리트인데, 이제 막 런던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곧 마을을 떠날 참이었기 때문이다.
고민을 품은 채 런던행 기차를 기다리던 기차역에서, 데미엔은 영국군에게 두드려 맞는 아일랜드인 기관사를 본다. 그리고 미하일과 기관사, 자신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아일랜드가 자유를 얻지 못하는 이상, 아일랜드인은 어디서든 구타당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이 데미엔의 인생 경로를 바꾼다. 데미엔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아일랜드인의 ‘공통의 비애’를 극복하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기로 한다. 마을 청년들과 함께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든 데미엔은 게릴라 부대를 꾸려 영국과 치열하게 싸운다.
영화가 의미심장해지는 건 이 공통의 비애가 위기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다. 첫 번째 사건은 어릴 때 함께 자란 동네 꼬마 크리스를 밀고자란 이유로 처형한 일이다. 망설임‧괴로움 끝에 크리스를 총으로 쏜 데미엔은 이 사실을 직접 크리스의 어머니에게 전한다. 데미엔 일행에게 줄 음식을 만들고 있던 크리스의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다시는 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어리숙하고 순박한 동네 소년이었던 크리스의 죽음은 모든 아일랜드인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묶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드러낸다. 크리스 총살과 그 어머니의 슬픈 눈빛은 모든 아일랜드인의 자유를 위한다는 데미엔의 정당성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두 번째는 고리대금업자와 가난한 노파의 대립이다. 둘은 모두 아일랜드인이다. 하지만 계급이 다르다. 마을 사람들은 고리대금업자가 노파를 착취하도록 둬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고리대금업자가 독립군에 무기 자금을 대는 사람이기에 그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나뉘어 갈등한다. 데미엔과 그의 동지이자 친형인 테디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데미엔은 가난한 노파의 편에, 테디는 고리대금업자의 편에 선다. 아일랜드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적 조건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민족이라는 ‘동질적’ 집단이 무엇을 배제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인지를 고민케 한다.
가장 결정적인 세 번째 사건은 아일랜드의 자유국 지위 확보 이후에 일어난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평화 협정을 맺고 아일랜드의 자유국 지위에 합의했다. 아일랜드가 일정 정도의 자치를 보장받은 것이다. 평화협정 이후, 데미엔과 테디 그리고 아일랜드인들은 둘로 쪼개진다. 제한된 자유나마 수용하자는 사람과 완전한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된다. 둘 사이의 대립은 격화되어 영국군이 아일랜드인을 핍박할 때와 다름없는 정도의 폭력이 오고 간다. 아일랜드인들은 절망한다. 어제까지 밥을 지어 주고 무기를 숨겨 주었던 자국의 군대가 둘로 나뉘어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 그들이 느낀 분노와 슬픔, 좌절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일지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다.
급진적 자유를 갈망하던 데미엔은 결국 온건한/제한된 자유에 만족하자는 테디의 군대에 붙잡히고, 무기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살당한다. 데미엔 총살 명령을 내리는 건 그의 친형 테디다. 영화는 테디가 죽은 데미엔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같은 꿈'을 꾸던 형제가 정작 ‘내부’의 차이를 조율하지 못해 마주한 비극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역사의 특정한 국면에서 민족은 분명 저항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범주가 된다.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이 모이고, 경험‧감정을 공유하며, 투쟁할 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면이 전환되고 민족이 더 이상 저항의 범주로만 작동하지 않을 때, 문제는 시작된다.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 담론이 내부의 차이를 삭제하고 진압하는 폭력의 명분이 되는 것이다.
폭력을 극복하자는 명목하에 부상한 민족 범주가 폭력의 주체가 된다는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테디와 데미엔의 갈등이 본격화되기 전, 데미엔은 연인 시네드가 영국군에게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데미엔은 시네드를 구하려 하지만 테디가 막는다. 위치가 노출될 경우 전 부대원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데미엔은 결국 형 테디의 말을 따른다. 그리고 주저앉아 “느끼는 법을 잃었다”며 오열한다. 데미엔의 눈물은 위기에 빠진 연인을 향한 공감보다 ‘합리적 선택’을 우선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이다.
앞서 언급했듯, 데미엔은 마을 청년 미하일의 죽음과 아일랜드인 기관사가 영국군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며 분노와 슬픔을 ‘느꼈고’ 이를 동력 삼아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정작 투쟁의 과정에서 그는 느끼는 방법을 잃고 말았다. 이는 데미엔만의 문제가 아니다. 데미엔이 동네 청년 크리스를 총살한 후 괴로워했듯, 테디도 친동생 데미엔을 총살한 후 눈물을 흘린다. 분명하게만 보이던 자유의 길이 점차 어렵고 불투명해진다.
이 모든 비극과 혼란은 느낌에 기반한 열린 공동체가 민족이라는 이름의 닫힌 공동체로 전환될 때 일어난다. 느낌의 공동체는 포용적이다. 아일랜드인을 향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분노한다면, 영국인도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민족 공동체는 이 분노한 영국인을 포용하지 못한다. 나아가 ‘민족적 대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는 내부 구성원들을 ‘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민족 범주는 저항의 공동체로 출발한 스스로가 억압의 이름이 되는 모순을 피할 수 없다. 데미엔과 테디가 비극을 비껴가지 못한 건 모두 이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슬펐던 건,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익숙해서였다. 지금 우리의 민족 담론은 어디에 와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도 힘든데 무슨 난민이고 이주민이냐는 말이 횡행하는 지금, ‘한민족’의 서사에 이 슬프다는 ‘느낌’의 자리가 보장되길, 그럼으로써 열린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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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뷰] 소울 (SOUL)
소울
감독 피트 닥터
출연 제이미 폭스, 티나 페이
네이버 평점 : 9.32 / 10 (네티즌 평점 기준 참여인원 8,230명)
왓챠 평점 : 4.1 / 5 (참여인원 4.8만 명)
개인 평점 : ★★★★★ (5 / 5)
소울 리뷰 3줄 요약
1. 영화가 끝나고 여운이 남는 작품
2. 사후 세계 내용 같지만 주로 생전 세계(?)와 삶의 의미를 다룬다.
3. 픽사 작품 중 가장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
+ 소소한 쿠키영상 있음
(큰 의미 없는 쿠키영상이지만 크레딧이 내려갈 때에도 귀여운 영혼 캐릭터가 꾸준히 등장하니 보고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음)<소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소울>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 픽사의 22번째 작품
소울은 픽사의 22번째 작품으로 이를 기념해 작중 어린 영혼 주인공의 이름 역시 22번이다.
픽사의 역대 장편 영화 중 가장 어른스러운 작품으로 직전 작품이었던 온워드가 굉장히 어린이용 작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 피트 닥터와 그의 전 작품 [출처: 씨네 21 인터뷰, 네이버 영화]
- 픽사 3 대장 피트 닥터
픽사에는 토이스토리 1편부터 작업을 해왔던 3명의 애니메이터 겸 감독들이 있는데 이들이 감독, 원안 등에 참여한 작품을 모두 나열하면 전체 작품의 70%에 다다른다.
그들이 바로 피트 닥터(업, 인사이드 아웃), 앤드류 스탠튼(니모, 월 E), 존 라세터(토이스토리, 카)로 존 라세터는 2018년 파문을 일으켜 현재는 퇴출당했다. 그리고 피트 닥터는 현재 퇴출당한 존 라세터의 뒤를 어이서 픽사의 CCO(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를 담당하고 있다.
<소울>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생전 세계를 다룬 스토리
보통 영화의 소재로 많이 사용되는 건 사후 세계지만 소울에서 주로 다뤄지는 배경은 생전 세계이다.
즉,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메인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영혼을 소재로 하는 작품치고 이런 독특한 설정들이 뻔할 수 있는 소재를 신선하게 담아내는 지극히 픽사스러운 상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영혼들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자들의 묘사를 추상화스럽게 표현한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인상적이었다.
<소울>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재즈는 언제나 즐겁다
주인공이 재즈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인물이기 때문에 영화 속 노래들이 거의 재즈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재즈가 흐르는 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재즈 영화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재즈의 멜로디는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게 있어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영화 속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여운을 느껴보기 좋다.
- 소울 메인 예고편
<소울> 메인 예고편 [출처: 디즈니 공식 유튜브]
H, E, (LL) 두 개의 하키 스틱ㅋㅋㅋㅋㅋㅋ
찐 새로운 인생과 리뉴얼 새로운 인생이랄까
※이후부터 스포일러
+글쓴이의 생각의 흐름
스포 방지 용 <소울>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르키메데스 때부터 살아온(?) 그리고 그 무수한 멘토들과 함께 보내본 22번에게도 모르는 세상(현실의 지구)이 있다는 것에서 경험의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그 즐거움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할 때 온전히 즐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해준다.
살아가는 태도는 굉장히 중요한 영역이다.
마음가짐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 낡을 만큼 낡아버린 예시지만 원효대사 해골물이 꾸준히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찰떡 비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원효대사는 '속았다!'라고 느껴지는 느낌이 강하지만 우리가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가 우리의 평가와 판단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긍정적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실제로도 하루 동안 생기는 많은 이벤트들이 긍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물론 무조건적인 긍정이 답은 아니기 때문에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부분(주식이라던가... 주식이라던가...)에서는 예측된 긍정론을 경계하는 것도 좋은 판단에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결론은 조금 더 우리 일상 속 순간순간의 경험을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 소소한 경험, 지나가는 삶에 지나치게 무심하곤 하다.
예를 들면 출근길에 바라보는 창밖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누군가에겐 감동을 줄 수 있는 풍경이고
누군가에겐 힐링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좋아하는 포인트들을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마치 사탕을 좋아해서 한 움큼 집어 올 줄 아는 22번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주인공에겐 재즈였고 22번에겐 재즈한 행동들이었다면 우리가 즐거워지는 순간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물건들, 행동들에 대해 잘 알고 그것이 일상에 녹아내려있을 때 한층 풍부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굉장히 몰입해도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느끼는 부분이 현저하게 적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반대로 풍부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하루가 너무 긴 것도 좋지만은 않겠지만 가끔 하루 속에 풍부하고 풍성한 순간이 숨어있는 것은 굉장한 힐링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것이 여행이기도 하고 그런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재충전과 에너지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소울이 품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약간의 사담을 더하자면 소울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우리 일상 속에는 혼, 영혼과 관련된 표현들이 많다. 예를 들면 혼을 담다, 영혼이 없다, 혼이 나갔다.
굉장한 집중을 이루어냈을 때 소위 하얗게 불태우면 혼을 담았다고 한다.
나의 혼이 담길 만큼 그것과 밀접하게 교류했다는 의미이다.
영혼이 없다. 말 그래도 아무런 느낌 없이 감정 없는 표현에 쓰이는 말이다.
혼이 나갔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실제로는 보고 들을 수 있지만 혼이 나가서 봐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혼내다의 어원도 영혼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생각보다 많은 단어에 있었다는 게 조금 신기하더라.
이렇게 생각하면 영화 속 영혼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어린 영혼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성격 가치관 등을 장착한다.
앞서 살펴본 단어만 보더라도 우리는 영혼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생각, 성격을 담고 있다고 여기고 굉장한 몰입을 영혼과 연결시킨다
또한 감정적인 포지션을 느끼는 역할을 영혼에게 주어주고 있기 때문에 영화 속 소울에 대한 묘사가 꽤나 원초적인 영혼에 대한 생각들을 잘 표현해 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잘 하진 못하지만 소울과 관련된 영어 표현들을 찾아봐도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게 아무래도 혼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은 문화를 벗어나서 다르지 않은 주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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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꾸고 있어.
얼마전 일하는 엄마들과 밥을 먹다가 육아와 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보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엄마들이 사회생활을 한참 하던 때, 그러니까 불과 10년전만 해도 육아휴직이라는게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디 여자애가 서울로 학교를 가냐는’ 외할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외할머니집에서 걸어서 10분거리의 대학교를 가야 했다. 불과 25년전이었는데 외할머니는 아들이 아닌 ‘가시나’를 대학에 보내는 것도 못마땅해 하셨다. 아주아주 보수적인 지역의 보수적인 어른이었지만, 엄마와 아빠가 강력히 주장해서 대학을 보낸 것이다.
‘여자도 전문직을 해야해.’ 결혼해서도 원가족인 외할머니의 투병생활을 돌보고, 남동생들을 케어하며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지만, 내 딸만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겠다는 엄마의 결연한 의지 덕에 나는 외할머니가 그렇게 싫어 하셨던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직업인 PD가 될 수 있었다. 꽤나 진취적인 직업군에 속하지만, 그래도 여자 PD가 육아휴직을 하고 다시 복직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 된 것은 1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2000년 초에 결혼 한 여자선배들을 떠올려 보면 결혼과 출산으로 일을 그만 둔 선배가 더 많다. 회사에서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쓰고 돌아온 선배가 나보다 한살 많은 선배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엄청난 변화 속에 놓여 있는 중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미국의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 씬에 직접 출연한다 )1950년대 하버드 로스쿨엔 전체 학생의 2%에 해당하는 9명의 여학생 밖에 없었고, 심지어 여자 화장실도 없었다고 한다. 수석졸업을 하고 두아이 까지 키웠지만, 로펌에서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거절하는 이유도 가지 가지다. 애나 돌봐야지 일은 언제 할거냐. 이미 작년에 여자를 뽑았다. 회사의 다른 여자들이 질투할거다? 등등 )그녀는 로펌 대신 결국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 남성보육자와 관련된 한 사건을 접하고 이것이 남성의 역차별 사건이며, 성차별의 근원을 무너뜨릴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할때. 긴즈버그는 남편과 딸의 지지에 힘입어, 성별을 근거로 한 (On The basis of Sex (원제)) 178건의 합법적 차별을 무너뜨릴 재판을 시작하게 된다.
“백 년 동안 계속 져 왔다고 해도 이기려고 노력하는 걸 멈출 이유는 없죠.”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에서 딸 제인이 엄마 루스에게 하는 말이다. 이 대사는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그러고 보면 인종차별만큼이나, 성별에 근거한 차별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인지… 의의도 정당하고, 의뢰인도 정당하지만, 여성들을 한세기 넘게 같은 논쟁에서 져왔다는 루스에게 딸 제인이 하는 저 말이 이 영화를 다 말해주는 것 같았다.
둘이 함께 택시를 기다릴 때 성추행 발언을 하는 남자들을 향해
“엄마, 남자들이 여자에게 저런식으로 말하게 두면 안돼.” 라고 시원하게 욕을 하는 딸을 보며,
“넌 자유롭고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 여성이야. 20년 전엔 이렇게 행동하지도 못했어.시대가 이미 변했어.“ 하고 말하는 엄마 루스.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모르고 지나왔던 시대를 지나, 우리 자녀들의 열망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는 조항을 다시 검토하여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 달라고 주장했던 법정씬에서는 여지 없이 또 울컥했다. 실패하고 절망하더라도 결국엔 변화한다는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영화.나는 어쩌면 이런 변화의 역사에 살아있는 증인일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자라며 차별을 받았지만, 그걸 깨려는 엄마, 이모와 같은 어른들의 도움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고, 이제 딸을 낳고 엄마가 되고 또 나의 일을 하는 이 시간 속에서, 내 딸을 위해 나 역시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싸움을 계속 해오고 있는 중이니까.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작은 행동이 모여 세상을 바꾼 다는 것을 이미 겪었으니까. 승리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나아가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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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병 환자들의 이선생 찾기는 계속된다
?Rabbitgumi 입니다!
지난 주 영화 독전2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습니다.
1편의 하이라이트와 결말부 사이의 일을 다루고 있어요.
감독이 바뀌었지만 등장인물은 그대로 입니다.
형사 원호와 락 그리고 브라이언이 극을 이끌죠.
큰칼이라는 강력한 캐릭터도 있죠.
그런데 영화가 많이 느슨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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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 티저 예고편
지금까지 마블과는 전혀 다른 세계 그야말로 판.타.스.틱.한 티저 예고편 최초 공개!🌠 "가족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 👦 👦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 7월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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