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E2025-02-21 17:25:21
영원할 순 없지만, 영영 남을 이야기
영화 <로봇 드림> 리뷰
나이가 들수록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타인에게 기대와 실망을 경험해 본 만큼 스스로의 개인적인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수고롭게 느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회사와 집을 바쁘게 오가는 쳇바퀴를 돌아가는 듯한 생활 패턴도 한몫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제법 성숙한 어른이니까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자기계발을 하며 혼자서도 곧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모이는 연말연시나 휴가철이 되면 창문에 홀로 비친 자기 모습과 마주할 때 묘한 씁쓸함을 곱씹게 된다. 마치 <로봇드림> 오프닝 속 도그의 모습처럼 말이다.
모든 인연이 그렇듯 조금씩 엉키며 둘이 다시 재회하기엔 점차 어려워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둘 곁에는 새로운 단짝이 생긴다. 그리고 앞서 계속 만나지 못한 둘이 비로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될 상황이 됐을 때 로봇은 그저 함께했던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봇 드림>의 가장 큰 특징은 대사 한마디 없이 효과음 OST 그리고 조금은 유치하지만 볼수록 귀여운 애니메이션 그림이 스크린을 채운다는 점이다. 로봇의 기계음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도그의 숨소리는 왠지 모르게 서글픈 순간도 종종 있다. 둘이 다시 즐겁게 뛰어놀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지만 세상 일이 모두 마음처럼 잘 풀리지 않듯 둘의 관계도 변하게 된다. 그래서 꼭 슬픈 이별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엔딩에 삽입된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를 들으면서 코끝이 찡해지는 기운은 멈출 길이 없다.
<로봇 드림>처럼 사랑이든 우정이든 이별은 슬프지만, 우리에겐 기억이 남는다. 그 이별이 좋았던 나빴던 지 간에 그때 재밌었는데, 하고 입꼬리가 잠시나마 올라가면 그만이다. 곁에 있을 줄 알던 친구가 떠나고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끝나곤 한다. 아마도 우리는 은연중에 영원하지 않을 걸 알아서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때때로 서로의 시간에 잠시 살았다는 걸 기억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러니 부디 뜻하지 않은 이별에 짧게 슬퍼하고 종종 좋았던 날들을 떠올리며 틈틈이 웃길 바란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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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색감과 촬영, 눈을 사로잡는 도둑 같은 영화
'이 영화 뭐지?' 예고편으로 내용을 알 수 없고, 포스터로는 더더욱 알기 힘들어서 '이 영화 정체가 도대체 무엇일까' 싶어 보게 된 영화였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여럿 출연하기 때문에 흥미로움이 더해지긴 했지만 세간에 알려진 특별한 매력이나, 영화의 퀄리티 등에 대해서는 별 흥미를 가지지 못했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갖고 있는 습관 중 하나가 볼만한 영화가 생기면 이전 사람들이 남겨놓은 리뷰를 먼저 본다는 점인데 사람들 사이에서도 극한의 호불호가 나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지루한 데다가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팀 버튼의 기묘한 상상력과 샤갈의 색채감을 아우러놓은 환상의 명작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웨스 앤더스 감독의 작품은 <개들의 섬>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사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었던 터라 그냥 무작정 영화를 트는 것이 전부였다. 큰 기대 없이 영화를 틀고 난 뒤 100분 동안 마법같이 영화를 감상했다. 스토리는 빼더라도, 자꾸 보고 싶어 지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분명했다.
포스터만 보고 들어온다면 영화의 내용에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로맨스나 드라마를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이게 웬 걸, 범죄 추격 스릴러에 좀 더 가까운 영화였다. 물론, 스릴러라기 보단 미스터리 모험물에 좀 더 가깝지만 말이다. 그런데 영화 전반적으로 긴박감이나 긴장감은 거의 전무하다고 이야기해도 무리가 없다. 미스터리 모험물인데 과정이 긴박하지 않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 역설적인 장르를 가능하게 만든다. 영화의 배경이나 공간 자체를 아주 비현실적으로 비틀어놓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전개를 이어간다. 게다가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진행되기보다,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듯 흘러가고 각 지점마다 '막'을 만들어놓음으로써 마치 잘 짜인 연극을 감상하는 듯 한 기분을 들게 한다. 때문에 영화 중반부로 가는 데까지도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통 쉽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알 수 없는 영화인 데다가 현실감도 떨어지는데 어떻게 이 영화가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사랑받는 이유를 꼽자면 이 영화를 논할 때 가장 우선시되는 것. 바로 색감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바탕이 되는 분홍색과 더불어 연한 색감으로 도배된 영화는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타 영화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분홍색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오묘하고도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특정 장면들의 지점에서 색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하거나, 연속되는 장면들 속 전환 지점에서 색감을 유지하거나, 탈락시킴으로써 극적인 전환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영화 속 메인이 된 '분홍색'은 사랑과 순수함을, 호텔의 유니폼인 '보라색'은 신비로움과 고급스러움을, '푸른색' 계열의 차가운 색깔은 살인이나 추격 등 스토리의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도움을 준다. 영화 배경의 전체적인 톤은 '노란빛' 사실은 베이지에 더 가까운 색으로 구성함으로써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관객의 눈을 자극 없이 편안하게 이끌고 간다. 가히 색으로 시작해 색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되지 않을 영화이다.
색감만큼이나 다채로운 건 바로 촬영 기법이다. 대칭 구도와 평면적 화면 활용을 통해 비주얼적인 매력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또한,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1인칭을 활용하거나, 줌, 트랜지션(화면 전환 효과)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지루할 수 있는 전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인물에 포커스를 두는 장면이 유난히 많은데 전체적인 흐름으로 이야기를 이해하기보다, 인물의 표정과 대화를 통해 스토리를 전개함으로써 상세하고도 세밀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돋보인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점은 바로 화면 비율인데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대에 맞춰 환면 비율을 계속해서 바꾸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1930년대에는 1.37:1, 60년대에는 2.35:1, 80년대에는 1.85:1로 구성함으로써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는 시대 전환에 기본적인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시간의 순서에 압박받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다만, 현대 사회 영화 비율에 비해 좌우가 좁기 때문에 다소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배경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샷이나, 여백을 많이 두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색의 대비를 통해 인물의 성격과 존재를 부여하고, 각종 소품들을 활용해 인물의 가치관과 배경을 설명하는 방식은 기존 영화들도 자주 사용하던 연출 방법이다. 다만, 웨스 앤더슨 감독은 더 디테일하고 치밀하게 설계함으로써 관객이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영화 속으로 은연중에 빠져들게 만든다. 완벽한 미장센의 향연과 강박증을 의심케 하는 감독의 연출은 놀랍고도 소름이 돋는다. 대칭구조만 보더라도 철저하게 각이 잡혀있는 데다가, 소품과 도구 하나하나마다 배치 위치와 카메라와 맞춘 높이 등 섬세함이 돋보인다. 영화의 연출이나 구도가 가진 의미를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의식하지도 않은 채 홀린 듯이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하는 기법들은 영화가 가지는 의미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색감이나 촬영만큼 스토리도 매혹적이긴 하다.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누명과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설정이 다소 진부하긴 하지만 이만큼 매력적인 클리셰가 또 어디 있겠는가. 미스터리 모험물이라고 해서 으스스한 분위기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매료시키는 코미디 요소들도 영화 전반적으로 적절히 배치해놓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덜 한 편이다. 생각보다 놀랬던 점은 간혹 드러나는 장면 연출이 굉장히 원색적인데 손가락이나 목이 잘려 피가 튀거나, 성행위를 연상시키거나 하는 장면들이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여러 번 등장한다. 지루한 전개인가 싶어 넋 놓고 있다가 당할 수 있다는 것이 꽤 재미있었다. 초반에는 지루한 면이 있고, 중반부까지 흐름을 읽을 수 없는 다소 복잡한 불편함이 있지만,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속도감이 붙어 부담 없이 넘겨볼 수 있도록 스토리를 구성했다. 다만, 기승전결 중 전과 결 파트가 지나치게 허무한 감이 있다. 밀당없이 당기기만 하다가 영화가 끝나버린 기분이라 아쉽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미장센과 연출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호'의 평은 피한 듯하다.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지만 아마 '향수'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액자 속 액자식의 구성을 따라 인물들이 전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는 스토리 또한 아마 '과거'를 이야기하며 전해져 오는 향수에서 오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마지막, 노년의 모습으로 등장한 제로 무스타파(토니 레볼로리 분)의 '내 생각에 그의 세상은 그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사라졌네. 그는 그저 자신의 환상 속에서 멋지게 산 거지'의 말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향수는 결국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입을 거쳐오며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그 안에 투과되는 진짜 삶은 현대에 존재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각함으로써 허상이 아닌 현실에 살아가기를 바란 게 아닐까 싶다. 때문에 영화 속, 향수의 허상을 벗어난 진짜 그리움을 내비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했던 아가사(시얼샤 로넌 분)와의 실존하는 기억만을 추억할 수 있는 제로 무스타파뿐일 것이다.
클래식하고도 세련미가 넘치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오래간만에 눈이 즐거운 영화를 봤다. 앞서 말했지만 100분의 러닝타임 동안 시선을 빼앗긴 채로 영화를 봤다. 다른 일을 하면서 영화를 보려고 해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장면들로 시간을 빼앗는 감각적인 영화이면서, 동시에 집중해서 보면 볼수록 뜻을 알 수 없는 호기심 가득한, 말 그대로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진 영화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색감으로 시작했지만 영화 속 바니쉬 향수만큼이나 깊은 향을 남긴 영화. 여담이지만, 영상을 공부하는 나로선 이처럼 반가운 영화가 또 없다. 구도나 기법에 대해서 어떻게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려고 하는지,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짜낼 때 어떤 고민이 필요한지, 마지막으로 우스꽝스럽고 키치 한 감성 속에서도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영화였다. 부담 없이 보기엔 지루한 감이 있지만, 미스터리하면서도 몽환적인 극 전개를 좋아한다면 주저 없이 이 영화를 추천하게 될 것 같다.
사진 출처 : <The Grand Budapest Hotel>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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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의 이반
공포의 이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1984년 4월, 미국 클리블랜드 세븐힐즈 마을에서 포드 공장에서 오래 일하고 퇴직한 한 백인 노동자가 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이름은 존 뎀얀유크.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었다.
그의 혐의는 나치 부역자이면서 전쟁범죄자, 유대인 수용소에서 학살을 실행한 살인자였다. 평온하고 조용한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던 이웃 주민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사람 좋고 이웃들과 잘 지내고, 공장에서도 동료들 사이의 평판이 좋고, 가족들에게도 존경받는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던 사람이 입에도 담기 어려운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자라니.
1940년대 폴란드에는 독일이 만든 유대인 수용소가 여러 곳이 있었고, 이곳에서 무려 17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다. 그리고 뎀얀유크가 있었던 소비보르 수용소와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만 65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미국 사법부는 존 뎀얀유크의 전쟁범죄 가담에 대한 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하고, 미국 추방령을 내린다. 미국 내부에서는 나치 전쟁범죄를 재판할 수 있는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추방령과 동시에 이스라엘에서 뎀얀유크를 전쟁범죄자로 체포했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게 된 뎀얀유크는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가 확실한 '공포의 이반'이라고 주장했다. 생존자들이 말하는 '공포의 이반'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칼과 몽둥이로 유대인을 찔러죽이고, 때려죽이고,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공포의 이반'으로 지목된 존 뎀얀유크는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 자신은 '공포의 이반'이 아니며, 잘못된 정보로 억울하게 잡혀온 피해자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존 뎀얀유크를 변호해 줄 변호사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그 가운데 변호를 자처한 이스라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이 있었다.
존 뎀얀유크 사건은 1961년 같은 이스라엘 법정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과 비교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재판 참관과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내면서 '악의 평범성'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한 '아이히만 재판'은 확실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62년 5월 31일, 사형집행으로 전쟁범죄자를 처형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 자신이 직접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하고 싶다고 '뉴요커'에 요청했고, '뉴요커'가 받아들여 특파원 자격으로 이스라엘에서 머물며 재판을 참관하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으로 재판 과정을 책으로 펴냈으며, 그 내용에 '악의 평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즉, 아이히만은 독재, 관료주의 체제에서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는 관료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 아이히만이라는 '개인'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정체를 몰랐거나, 속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아이히만은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 다양한 증거 자료로 확인되고 있다. 즉, 아이히만은 히틀러 독재, 전체주의 체제에서 단순히 주어진 명령에 충실한 관료가 아니라, 그 자신이 유대인 말살에 확신을 갖고 실행한 확신범이라는 것,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믿었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절멸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했으며, 자발적, 능동적으로 학살을 지휘했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이동기 교수는 학살자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략)전체주의 체제든 아니든 독재와 억압은 단순히 지배 이데올로기나 관료제 또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인식 전제다. 그것에는 지배 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의 능동적인 집단적 자기 형성의 과정이 항시 존재한다. 억압과 폭력의 가해자들 또는 가해 가담자들은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관료제적 구조하에서 ‘선이냐 악이냐’ 식의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지배는 익명의 체제나 관료제적 기제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지배는 항상 집단적 실천을 전제하고 폭력은 항상 구체적 가해자를 필요로 한다. 그 실천과 가해 행위는 대개 명령과 지시를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넘어 점차 자신의 일을 정확히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심지어 관료제나 위로부터의 명령을 초월하고 경계를 뛰어넘는 행위자들에 의해 더욱 광폭하게 이루어진다.(후략)
즉,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학살 행위를 하는 인간이 반드시 존재하며, 나치 학살자들이 바로 그런 신념을 가진 자들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존 뎀얀유크도 아이히만과 같은 인물이다. 존 뎀얀유크는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그는 독일군 부대에 들어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운 인물이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모두 같은 증언을 했고, 재판 과정에서 존 뎀얀유크의 나치 당시 사진과 나이 들어서의 사진을 분석한 전문가의 견해, 쏘련에서 나온 2차 세계대전 당시 존 뎀얀유크의 신분증 원본, 미국 이민국에서 작성한 존 뎀얀유크의 인터뷰 내용 등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는 증거는 충분했다.
하지만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은 생존자 로젠베르크의 증언을 뒤집는 문서를 제출한다. 로젠베르크는 '공포의 이반'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가 저지른 만행을 고발했고, 그의 눈을 보고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지목한 사람이었는데, 1947년에 작성한 문서에서 1943년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공포의 이반'이 살해당했다고 자필로 쓴 내용이 나온 것이다.
로젠베르크는 딜레마에 빠졌다. 증언대에서는 분명 존 뎀얀유크가 '공포의 이반'이라고 지목했으나, 그가 1947년에 자필로 쓴 진술서에는 '공포의 이반'이 폭동의 와중에 살해당했다고 썼으니 말이다. 로젠베르크는 그 진술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쓴 것이며, '공포의 이반'이 살해되었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은 것이었다고 진술한다.
결국 1988년 4월 18일, 이스라엘 법원은 존 뎀얀유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존 뎀얀유크와 변호사들은 즉각 항소하고, 그 사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쏘련 KGB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비밀문서를 공개하는데,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은 모스크바와 키에프를 다니며 KGB 담당자를 만나 트레블링카 수용소와 관련한 비밀문서를 받아낸다.
요람 셰프텔이 받은 비밀문서에는 트레블링카에서 유대인 학살에 부역했던 부역자들이 남긴 진술서가 많았는데, 그 진술서에 '공포의 이반'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들의 진술에 의하면 '공포의 이반'과 존 뎀얀유크는 닮지 않았다. 요람 셰프텔은 이 문서를 증거자료로 법원에 제출했고, 1993년 7월, 항소법원은 존 뎀얀유크와 그의 변호사 주장을 받아들여 존 뎀얀유크를 석방한다.
이 항소심 재판의 문제점은, 검사 쪽에서 제출한 수많은 증거자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가 제출한 나치 부역자들이 남긴 진술서를 증거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 나치 협력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생존한 유대인의 증언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매우 무능했거나, '미국시민'을 사형시키는 것에 크게 부담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무려 8년을 끈 이 역사적 재판에서 존 뎀얀유크는 전쟁범죄 가담 여부와 상관 없이 그가 '공포의 이반'이라 볼 수 없다는 판단으로 풀려난다. 이 재판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은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 요람 셰프텔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국민의 비난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유대인 학살자로 지목된 돈 뎀얀유크의 변호를 자처했고, 항소심에서 결국 무죄를 받으면서 크게 성공한다. 그는 변호사 수임료를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략 50만달러 이상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며, 이 재판과 관련한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큰 돈을 번다.
존 뎀얀유크는 미국으로 돌아와 평온한 일상을 보내지만, 미국 법무부는 그가 '공포의 이반'은 아닐지 모르지만, 독일 전쟁범죄,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증거는 확실하므로,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아닌, 독일 법정에 세울 계획을 세운다.
1999년 미국법무부와 이민국은 증거자료를 통해 존 뎀얀유크가 전쟁범죄 혐의가 있다고 판단해 독일로 추방한다. 그리고 2009년 독일 뮌헨 법정에서 전쟁범죄, 유대인 학살에 단순가담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는다. 존 뎀얀유크의 변호사는 항소를 결정하고, 존 뎀얀유크는 감옥에 가지 않고 법정에서 풀려난다.
그리고 2012년, 항소심이 열리기 전에 독일에서 사망한다. 항소심 판결이 나지 않았으므로 존 뎀얀유크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무죄인 상태로 죽은 것이다.
미국에 전쟁범죄자가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서류가 1973년에 드러났는데, 미국 이민국은 나치, 나치부역자,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자들이 미국으로 이민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즉, 미국 정부가 독일의 전쟁범죄를 눈감아 준 것이다.
나치는 '반공주의자'라는 이유에서 미국 정부는 오히려 공산주의자와 투철하게 싸울 수 있다는 이유로 나치와 전쟁범죄자들의 이민을 묵인하고 허용했다. 존 뎀얀유크도 이민국 서류를 작성할 때, 자신이 소비보르에서 거주했다는 사실을 기록했고, 자기의 이름이 존 뎀얀유크이기도 하지만, 전쟁 당시에 '이반 마르첸코'라는 이름을 썼다고 자필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반 마르첸코'는 나치 협력자들이 모두 동일하게 진술한 기록에 '공포의 이반'이라는 자의 본명이었다. 즉, 존 뎀얀유크와 이반 마르첸코는 같은 인물인 것이다.
존 뎀얀유크는 확실하게 '이반 마르첸코'이며 '공포의 이반'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할아버지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존 뎀얀유크의 반인륜범죄를 부인하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은 결국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역사에 묻히게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유대인의 처참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 참혹한 장면은 그러나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어떻게 저렇게 참혹하게 학살할 수 있을까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절멸하겠다는 발상도 비현실적이지만,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긴 나치의 만행은 문명사회라는 20세기를 순식간에 야만의 시대로 만들었다.
유대인이 독일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며, 세계 역사에서 뼈아프게 기록해야 할 중대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세워 독립하면서 그들이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 국가에게 저지른 만행은 유대인의 고통에 연민과 동정을 갖던 마음을 사라지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더 참혹하게 학살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힘을 갖게 되자, 약자를 짓밟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피해자였던 유대인이 가해자로 탈바꿈하고, 자신들이 당했던 탄압과 학살을 그대로 팔레스타인에게 저지르는 착란적, 도착적 상태에 빠진 것이 마치 광기에 빠진 정신병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엽기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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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5000년 전 신화 이야기를 21세기에 적용한다면?
키즈도슨트라는 프로그램으로 초등학생들이 해당 영화가 어떤 내용이고 자신의 해석을 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던 영화 <비스트 오브 아시아>. 초등학생의 시선으로 바라본 신화 이야기는 어떨지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짧은 소개였지만 아이들의 고민과 그 나이대만이 가질 수 있는 가족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영화 <비스트 오브 아시아> 시놉시스
영화 <비스트 오브 아시아>는 EBS에서 기획한 12개국 국제공동제작 어린이청소년 시리즈물이다. 각 나라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3개의 단편 영화를 묶어놓은 이번 상영에서는 한국의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건강한 경쟁관계를 그린 <페어트레이닝>과 인도의 선악신화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핸드폰>, 부탄의 검은목 두루미 신화 모티브로 가족의 부재를 위로하는 <새엄마>까지 총 3개의 단편 작품이 소개되었다.
* 해당 내용은 서울국제영화제 공식홈페이지 소개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비스트 오브 아시아>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2등을 하면 공부도 그만둘꺼야?
올림픽에서 선수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어가고 있지만, 과거에는 금메달만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오죽하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있을까. 양궁선수 은호와 루나는 소년체전과 전국체전에서 나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단군신화 속 곰과 호랑이처럼 짝이 되어 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페어 트레이닝을 하면서 라이벌이자 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저 아이가 나를 이겨 버린다면 나는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고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파괴적인 경쟁심에 빠져버린 은호와 루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의 친구가 한 마디를 한다. ‘양궁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양궁 그만두면 뭐할껀데?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2등을 하면 그것도 그만둘꺼야?’ 이 말 한 마디가 경쟁이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경쟁이라는 것이 결과적인 목표가 남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를 이겨야한다는 목표는 자기 파괴적으로 이어질 뿐이고, 타인과 겨루는 과정에서 승부가 아닌 전보다 더 성장한 나에 방점을 찍어야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이 말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실행할 수 없는 말이긴 하다. 남과 겨루어서 진다는 것이 나의 실력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그 패배감에 휩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졌.잘.싸’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졌지만 잘한 싸움. 결과가 아닌 그 과정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지더라도 그 속에서 조금 더 발전하고 그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면 이를 받아들이고 또 다른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긍정적인 경쟁의 자세를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일까?
영화 <핸드폰>은 반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 비말에 대한 이야기다. 공부를 잘하는 그는 공대생이 되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소년이지만 정작 그는 즐겁지 않고 스트레스만 가득하다. 그런 그에게 친구 아미트는 그의 브이로그를 찍으면서 비말이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그 가족은 아이들의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데, 오은영 교수님은 소중한 가족 관계지만 그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인생은 별개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고, 영화 <핸드폰>에서도 이 문제가 고스란히 등장한다. 비말의 아버지는 자수성가를 하면서 공과대학이 성공을 하는데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임을 몸소 깨달았고, 자식인 비말이 빠르게 성공할 수 있길 바라며 비말의 의사는 묻지 않고 무조건 공과대학으로 진학하라고 강요한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사랑일 수 있다. 자신처럼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은영 교수님이 누누이 말하는 것이 있다. 자식에게 부모의 주관적인 경험을 알려주고 이야기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내가 50년 넘게 살면서 이것저것 해봤는데 이게 맞더라. 그러니 너도 이렇게 해라’는 식의 교육방법은 자식이 작은 실패조차 경험할 수 없게끔 만들고 자식의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선택은 언제나 자식의 몫이다. 그저 다양한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이다.
영화 속 비말은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고, 그저 부모가 제시하는 공과대학 진학이라는 길만 있었을 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보내지 못했고, 친구 아미트를 만나면서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가족이 된다는 것
떠나간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도하는 소남. 그런 소남에게 새엄마, 데키가 찾아온다. 소남은 새엄마 데키의 존재를 껄끄러워 하지만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는 데키에게 점차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점차 가족으로 받아들이다. 이 과정에서 조금 놀랐던 것이 서로를 딸과 엄마로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엄마 아빠 자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이 드러난 지점이랄까?
소남은 데키와 함께 지내면서 두루미 축제에서 선보일 두루미춤을 연습한다. 데키는 소남에게 왜 두루미춤을 잘 춰야하는지 물어보고, 소남은 데키에게 엄마가 돌아와서 아빠랑 나랑 같이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새엄마인 데키는 그런 소남의 모습에 실망한다기 보다는 소남에게 친절하게 두루미춤을 알려준다. 이 장면에서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다. 새엄마면 엄마인데 그런 사람 앞에서 사라진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소남을 보며 관객인 나는 혼자 데키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데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새엄마라는 위치에 있더라도 꼭 소남에게 친엄마의 존재를 반드시 자신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뭔가 이마를 탁 치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감에 있어서 기존에 있었던 누군가와의 추억과 기억을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가족 구성원이 그저 추가되었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면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신화라는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낸 영화 비스트 오브 아시아. 기존 개념에 대해 조금 더 건전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교훈을, 그리고 어른들에게는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줄 수 있었던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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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새로운 감정들이 전주에 등장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인사이드 아웃 2> 개봉을 기념하여 픽사 in 전주 이벤트를 개최했습니다.
노은영 전주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디즈니,픽사의 다양한 작품과 곧 개봉 예정인 <인사이드 아웃 2>의 풋티지를 국내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특별행사를 전주시에서 진행함으로써 전주를 찾은 방문객들과 시민들에게 관광거점도시 전주의 매력을 알리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는데요.
이번 픽사 in 전주 with <인사이드 아웃 2> 행사는 영화제 기간 중에서도 5월 2일(목) 부터 10일(금)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더불어, 지난 5월 2일(목)에는 국내 최초로 언론 매체를 대상으로 34분 가량의 <인사이드 아웃 2> 풋티지 상영회가 진행되었는데요. 풋티지 상영 이후 화상 기자회견을 통하여 <인사이드 아웃 2>의 연출을 맡은 켈시 만 감독과 마크 닐슨 프로듀서가 참여하여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눴기에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날짜는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는데요. 영화제에 참석한 분들 뿐만 아니라 많은 전주 주민들이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참석하였습니다. 시네필들을 사로잡은 이벤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할 체험 이벤트도 진행되었는데요.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OST 오케스트라 공연, 버블 벌룬쇼, 컬러링, 틀린 그림 찾기, 미로, 타투 스티커, 페이스페인팅 체험, <인사이드 아웃 2> 액티비티 북 제공 등의 다양한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캐릭터(감정)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인사이드 아웃 2>의 새로운 캐릭터를 먼저 볼 수 있는 행사였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5월 1일(수) ~ 5월 10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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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정에게 뺏겨버린 암살의 무게
이 글은 영화 [하얼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어려웠을 것이다.
항일투사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거의 제일 잘 알려져 있다고 해도 무방할 안중근이라 해도. 그에 대해 말하기 위해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을 할애한다는 것은.
액션이나 긴박감을 보여주기엔 그의 행위는 짧고 간결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미 [봉오동 전투]와 [암살]에서 더 많은 장면들을 보았다. 시대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려니 그는 애초부터 심성이 곧은 전형적 인물이었기에 [밀정]에서의 송강호 같은 임팩트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나 고통을 보여주기엔 그가 선사한 역사 속의 클라이맥스는 너무도 강렬했고, [동주]나 [항거]를 통해 무채색으로 경험한 바가 있다.
그러니 남은 것은 항일 투사로서 반드시 느꼈을 인간적인 고뇌와 거사를 앞둔 사람이 맞이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 동지들을 실시간으로 잃는 와중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감.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불안함. 그런 일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아야 하는 비장함까지.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는 시종일관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장대한 스케일의 자연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위약한 존재로 보여준다. 그는 불안하게 얼어있는 강 위를 지나고 메마른 사막을 말 한 마리에 의존해 건너며 그 안에서 겨우 숨이 붙은 채 목표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목숨을 태워나간다.
문제는 이런 초반부가 마치 영화 [이터널스]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에서 통했던 방식이자 자기가 잘하는 것인 풍경 속에 위치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히어로 영화인 이터널스에서도 같은 테크닉을 썼다는 것에 있다. 말 그대로 필요하지도. 그렇다고 어울리지도 않았던 쓸데없이 아름다운 장면들만 늘어놓아 특정 장르가 가져야 하는 미덕은 줄어든 셈이다.
[서울의 봄] 제작진과 [남산의 부장들]의 감독이라는 이름값에서 기대하는 것들 중 하나가 웅장함, 혹은 비장함이었을 테지만. 초반부가 보여주는 영상은 그저 때깔 좋은 여행기 정도로만 보일 뿐. 안중근 개인으로서의 고뇌를 드러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로 인해 그가 한 인간으로서 느꼈을 유약함이나 외로움은 압도적인 광경에 짓눌려 희미해져 버린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게다가 후반부의 포커스마저도 밀정인 상현(조우진)과, 덕순(박정민)에게 양보한다. 반전이라 생각하고 심어놓았을 트릭은 너무도 뻔해, 플래시백으로 표현한 장면들에서 그 어떤 타격감도 없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영화 초반 묘사에서 안중근에 비해 조금은 비중이 떨어져 있는 두 인물들이 영화의 마지막으로 다가갈수록 힘겹게 존재감을 차지한 안중근의 엉덩이를 슬금슬금 자리에서 밀어낸다.
나 역시도 영화를 통틀어 가장 상징적인 장면을 말하라 한다면, 안타깝게도 안중근이 꼬레아 우라를 외치는 장면이 아닌, 상현과 다쓰오(박훈)의 식사(?) 장면을 꼽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쓰오는 상현을 밀정으로 삼기 위해 처음에는 그에게 스테이크의 한 조각을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준다. 아직까지는 사람으로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현이 체면(포크와 나이프)을 버리고 손으로 고깃 조각을 먹은 뒤에, 다쓰오는 손을 이용해 상현에게 나머지 고깃덩어리를 던져준다.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의 심복(개)으로 신분(?)이 격하되었음을 단 몇 초 사이에 보여주기에 충분했으며, 동시에 상현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리는 동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울부짖으며 고깃 조각을 씹어 삼키는 상현의 모습은 그저 사람을 끝까지 믿어보자는 안중근의 설득 보다도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였다.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물렸음을 확신하는 표정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다쓰오의 모습도. 분명 사막 탐험대(?)에서 맨 마지막에 말을 몰았던 상현이 다쓰오의 암살 뒤에 가장 먼저 앞장서 말을 모는 모습에서도.
안타깝지만 영화는 밀정에게 암살의 무게감조차 뺏긴 채 쓸쓸히 뒷모습을 보이며 막을 내린다.
[이 글의 TMI]
1. 두 번 다시 크리스마스에 영화관에 가지 않겠다. 사람에 깔려 시골쥐 죽을 뻔.
2. 내 사과 빨리 배송 와라.ㅠㅠ집에 사과 없다ㅠㅠ
3. 업무폰 배터리 충전 안 해놔서 졸지에 전화 안 받는 싸갈스 바갈스 됨.
#munalogi #최신영화 #영화리뷰 #하얼빈 #영화리뷰어 #내일은파란안경 #브런치작가 #네이버인플루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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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앞에 선 사회적 약자의 환상
2019년 영화 <조커>는 한 사회적 약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심리적 파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외감, 무시당하는 상처, 그리고 이를 덮으려는 몸부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했고, 결국 그를 비극의 주인공, 조커로 만들어 갔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전작의 이야기를 잇는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허황된 욕망을 탐구한다. 이번 작품은 혁명의 영웅으로 떠오른 조커보다는 다시금 약자로 돌아간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라는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패배감
아서 플렉에게 패배감은 평생을 관통한 기본 정서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아본 적 없었고, 언제나 비웃음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이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패배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여러 번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감은 일종의 디폴트 상태였고, 이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패배감이 그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끝없이 패배감을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는 조커라는 가면을 쓰며 잠시나마 패배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감정] 조커의 분노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 아서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패배감을 분노로 감추고,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당당함을 얻는다. 이 순간의 조커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강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관객에게조차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듯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아서는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억압과 무시를 세상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당당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속에서 할리(레이디 가가)는 아서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조커였다. 즉,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의 분노와 그로 인해 얻어진 위태로운 매력을 사랑한 것이다. 영화는 조커로 변신한 아서의 모습을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장면으로 표현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남은 것은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아서의 현실과 그가 잠시나마 꿈꾼 조커의 허상을 동시에 보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억울함
아서의 삶에서 억울함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보호의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그를 소외시키고 억압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상황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의 친구조차도 아서를 무서워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아서 스스로 얻고자 해서 얻은게 아니며,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삶의 굴레들이다.
아서에게 억울함은 그가 조커라는 인물로 주목받을 때조차 여전하다. 그는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재판에 나서지만, 여전히 아서 플렉으로서의 자아는 조커가 얻는 주목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조커로서 사람들에게 환호받아도, 아서로 남아도, 결국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뿐이었다. 이러한 억울함은 그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 억울함은 그의 패배감, 분노와 뒤섞여 그를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락뿐임을 암시한다. 아서는 조커로서의 삶에서도, 아서 플렉으로서의 삶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그 억울함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도 그는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 그저 한 번 반짝했던 범죄자로 남을 뿐이다.
촬영이나 연기의 완성도는 높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몰락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의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아서는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며, 할리의 등장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서의 일생 중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조차도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들은 조커의 환상적인 모습이 아닌 아서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아서의 삶을 끝까지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의 서사를 마무리짓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까지 포함해 모두가 조커를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끝까지 아서의 현실을 강조하며 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의 연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뮤지컬 장르를 도입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장르적 도전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 뮤지컬 장르가 원래의 이야기와 잘 이어 붙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되어버렸다. 촬영이나 화면이 고급스럽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게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아서와 조커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레이디 가가 역시 할리 역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연기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사회 변혁 이나 사회 파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의 삶과 그가 꿈꾸는 허망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의 아름다움, 그리고 뮤지컬 장면의 독창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서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며, 그의 몰락이 결국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을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M8_51b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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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권의 고수 견자단 이번엔 핵주먹 타이슨과 대결 엽문3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3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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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스타일의 리메이크 / 말할 수 없는 비밀 / 판타지 로맨스 멜로 / 도경수, 원진아 주연 / 행복한 잔상의 수작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말할 수 없는 비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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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로키 앤 키 시즌2> 티저 예고편
곧 공개 예정인 《로크 앤 키》 시즌 2의 공식 티저 예고편. 아버지가 살해된 후, 가족의 옛날 집으로 이사한 세 남매. 엄청난 힘과 능력을 주는 마법의 열쇠가 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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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배드 가이즈> 1차 예고편
사상 초유! 바른 생활 #갓생프로젝트 ON!
최고로 나쁜 녀석들의 짜릿한 미션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