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4-14 14:45:16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우리 곁에 돌아온다! <노예 12년> X <더 스파이>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우리 곁에 돌아온다!
" <노예 12년> X <더 스파이>
국내에서는 영국 드라마 <셜록>, <닥터 스트레인지> 등을 통해 많은 팬들에게 잘 알려진 매력적인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올 4월,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 곁에 돌아온다. 그동안 독특한 역할들을 통해 넘치는 존재감을 발산한 그가 이번엔 어떤 작품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지 함께 알아보자.
■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영화, <노예 12년>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첫 번째는 제 86회 아카데미와 제 71회 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하며 오는 4월 22일에 재개봉을 확정한 영화 <노예 12년>이다. <노예 12년>은 자유인 '솔로몬'과 노예 '플랫'이라는 두 인생을 산 한 남자의 12년간의 실화를 그린 대서사극이다. 배우 브래드 피트에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트로피를 안겨주며 세계적인 프로듀서로 인정받게 만든 경이로운 작품이며, 오스카에서만 3관왕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포함한 전 세계 243관왕을 기록하며 세계 영화계의 역사를 다시 쓴 바 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 치웨텔 에지오포, 마이클 패스벤더, 브래드 피트와 함께 <옥자>의 폴 다노, <런>의 사라 폴슨, <블랙 팬서>의 루피타 뇽까지 최정상급 배우들이 출연하며 영화의 감동을 더한다. 인권에 대한 관심이 날마다 높아져가는 지금, <노예 12년>은 미국의 노예 역사를 통해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 스마트한 첩보 스릴러, <더 스파이>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두번째는 1960년대 핵전쟁 위기를 막은 위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웰메이드 첩보 영화 <더 스파이>다. <더 스파이>는 1960년, CIA와 MI6의 스파이로 고용된 영국 사업가 '그레빌 윈'이 소련 정보원으로부터 핵전쟁 위기를 막을 중대 기밀을 압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작전에 뛰어든 역사적 실화를 담은 작품이다. 제 3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의 첩보전을 그린 만큼 생생한 스릴감을 선사할 예정이며, 1960년대의 시대상과 '첩보영화' 특유의 예측 불가능한 매력적인 스토리가 만나 탄생한 새로운 볼거리가 기대감을 자아낸다. 특히 탐정, 천재 수학자, 마법사 등 독특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 낸 드라마틱한 연기 변신의 귀재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이번엔 어떤 독보적인 연기를 보여줄지 이목이 집중된다.
같은 배우의 색다른 모습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움을 안겨준다.
조용하고 잔잔한 일상에 조금은 나른하게 느껴지는 올 봄, <노예 12년>과 <더 스파이>를 통해 소소하지만 확실한 활력과 에너지를 얻어보는 건 어떨까?
씨네랩 에디터 Jad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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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로맨틱 '모던타임즈'
* 이 글은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 참석한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람과의 로맨스는 많은 사람이 꿈꾸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온 세상이 새로운 사랑에 대해 노래하며,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장악하는 영화 중 적지 않은 수의 장르가 로맨스, 멜로, 로맨틱 코미디인 것만 보더라도 그러한 로맨스에 대한 우리의 환상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로맨틱 코미디는 우리가 가진 어떤 현실을 재치있고 로맨틱한 방식으로 재구성해낸다는 점에서 많은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코미디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로코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달콤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것이 기반한 현실이 어떻고, 감독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자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밀크 초콜릿이 될 수도 있고, 카카오 99% 초콜릿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전자를 향유해 왔지만, 때때로 어떤 영화는, 그것이 포함한 씁쓸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기억에 남곤 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후자에 속하는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헬싱키에 사는 안사와 홀라파는 어느 가라오케 바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렸다. 몇 차례의 우연 끝에 두 사람은 데이트를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서로에게 연락할 방법을 몰라서 몇 번이고 엇갈린다. 몇 번의 갈등과 우연한 재회가 반복되고, 두 사람은 마침내 연인이 된다. 우연과 필연을 통해 이런저런 헤프닝이 벌어지고 마치내 맺어지는 연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러한 로맨틱 코미디의 클리셰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마냥 낭만적이지 않다. 두 사람은 헬싱키의 가난한 노동자다.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나 버리는 빵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이유로 실직한다. 당장 빵 하나 살 돈조차 아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데이트는 커녕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대로 해야만 한다. 라디오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야기가 시종 울려 퍼진다. 낭만 한 조각 찾아보기 힘들다.
홀라파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다. 세상이 그를 슬프게 하고, 그는 슬픔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다시 슬퍼지고, 그것을 다시 지우려면 술을 마시는 수밖에 없어서 그는 술꾼이 되었노라 말한다. 직장에서는 개인의 안전보다 그들의 흠결을 찾기에 급급하다. 결국 홀라파는 다쳤으면서도 도리어 해고되고 만다.
상황이 이래서일까? 이 세계의 사람들은 시종 무표정하다. 재미있는 농담을 말하더라도 어투는 건조하기 짝이 없고 인물들은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격렬하게 분노하지 않는다. 사랑을 고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분히 '연극적'이다. 이런 작위적인 연출은 마치 그들이 헬싱키라는 거대한 사회의 태엽인형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는 인상마저 주는데, 이점에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를 연상케 한다. 부조리함을 내세우는 직장은 기꺼이 그만두겠노라 외치는 안사와 괴롭고 답답하기만 한 현실 속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술에 손을 대는 홀라파를 보면,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처럼 인물들이 자신이 부품으로 속해야만 하는 그 자본주의 세계에 대해 저항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토록 고달픈 현실이지만 두 사람은 그럼에도 사랑하고, 돕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아간다. 그들의 고달픔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을테지만 홀라파는 술을 끊었고, 안사는 그의 외로움을 덜어줄 가족(개)과 연인을 얻었다. 지극히 평범한 어느 소시민들의 로맨틱 코미디는 이렇게 마무리 지어진다. '모던 타임즈' 속 채플린의 말처럼, 그들은 그 무미건조함 속에서도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을 찾을 것이며, '어떻게든 버틸 것'이다. 이 무뚝뚝해 보이는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많이 고달픈 요즘이다. 물가는 치솟고 날씨는 이상하다. 멀지 않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이런저런 정치적 이슈들은 매일 같이 불거진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헬싱키에 사는 두 사람의 사정과 아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희망이 있듯, 우리의 삶에도 희망은 있기 마련이며, 우리는 그 희망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나아간다.
날도 추운데, 이런 영화 한 편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이 무뚝뚝한 핀란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빛나는 희망을 건져 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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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크리처 2 | 의도가 느껴지려면 일단 맛있어야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에 몸을 던진 후 나진이 뇌에 파고들어 초인적인 괴력과 불사, 불로의 능력을 갖게 된 '윤채옥'(한소희).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타인을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낸다. 대신 그녀는 능력을 살려 실종자를 찾아주는 뒷거래로 생계를 꾸린다. 어느 날, 의뢰를 받아 몰래 들어간 모텔 방에서 윤채옥은 놀라운 사람을 발견한다. 이미 죽었어야 하는 옛 연인 '장태상'을 똑 닮은 '장호재'(박서준)를 발견한 것.
절친한 형 '권용길'(허준석)과 함께 흥신소 일을 하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장호재. 밀린 월세에 의해 압박받던 그는 의뢰를 받아 향한 모텔 방에서 의뢰인 대신 사체와 윤채옥을 발견한다. 윤채옥이 곧바로 모습을 감춘 나머지 살인 혐의로 수사를 받던 호재는 윤채옥을 찾아 진상을 알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장호재와 윤채옥은 미처 몰랐던 진실과 그들을 노리는 과거의 적에게 한 걸음씩 다가선다.
맛을 빼먹은 의도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 성황리에 끝났다. 시청자도 많았고, 수많은 밈을 만들어냈다. '의도가 느껴져야 한다'는 안성재 셰프의 일관된 심사평도 그중 하나다. 음식을 먹는 순간 셰프의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져야 활용된 기술이 유의미하다는 그의 미식 철학은 공감 혹은 의문을 자아내며 화제가 됐다. 그런데 안성재 셰프의 말에는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기본적으로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것.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크리처 2>는 안성재 셰프의 심사평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듯한 드라마다. 창작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전편이 일제의 만행을 장르적으로 풀어내려 했다면, 이번에는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는 현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다. 문제는 전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의도를 보여주는 데 지나치게 힘을 쏟은 나머지 밑바탕이어야 할 맛, 곧 드라마의 재미를 놓쳐 버렸다.
분명한 의도
<경성크리처 2>가 겨냥하는 대상은 확실하다. '토착왜구'다. 일제를 미화하거나 일본의 정치적, 역사적 입장을 옹호하는 한국인 혹은 그러한 현상을 비판하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에도 친일파가 급변하는 세태에 발맞춰 부와 권력을 유지했으며,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세간의 인식과 현실을 시나리오에 녹여냈다.
악역 캐릭터만 봐도 의도가 보인다. '마에다'(수현)와 옹성병원 위에 지어진 전승제약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일본군 장교와 일본인, 친일파의 후손이 협력해 과거의 연구를 이어가는 이 조직은 토착 왜구의 정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들의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일제 패망 후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혼란했던 한반도. 마에다는 그 틈을 타서 장태상과 그의 동료들을 제거하고 재산과 영향력을 되찾았다.
이러한 전개는 한국전쟁을 지렛대 삼아 경제를 재건한 일본과 혼란을 틈타 과거를 씻어냈던 몇몇 친일파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정작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권준택'(위하준)의 자손은 임대료 걱정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다는 모습도 현대사의 비극을 환기하기에 충분하다.
더 나아가 그들의 대사에는 친일파, 뉴라이트, 일본 우익의 사관을 반영되어 있다. 마에다는 양아들이자 시즌 1 막바지에 사망한 명자의 아들 '승조'(배현성)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또 장태상에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이제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속삭이기도 한다. 마치 식민지 근대화론을 필두로 한 일본 측 사관을 요약해 보여주는 듯하다.
의도만 남은 디시
에피소드 7개에 꽉꽉 눌러 담은 메시지는 사실 비판하기 어렵다. 피식민지국 국민 입장에서는 항상 관심을 갖고 염두에 둬야 할 이야기가 맞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에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시의적으로도 적절해 보인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공조 긴밀해지는 만큼 한국, 일본, 미국의 협력도 중요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 <경성크리처 2>가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두고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논제를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메시지를 뻔하게 만드는 기제다. 기시감이 강한 클리셰의 반복은 의의가 중요한 의도마저도 거부감이 느껴지게 한다. 극 중 분량이 상당한 액션이 대표적이다. 나진을 맞은 이들의 초인적 괴력과 속도를 활용한 연출은 돋보이지만 구성은 식상하다. 한국 드라마 중에서는 <기생수>와 유사하고, MCU의 <시크릿 인베이젼>과도 흡사하다. 팔을 대신하는 촉수를 활용하는 식의 아이디어는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드라마의 정체성 문제와도 직결된다. '크리처물'을 표방하지만 전편의 세이싱 같은 괴물의 비중이 거의 없다. 크리처물에게 기대할 법한 시각적 쾌감이 사라지면서 차별점도 잃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퀄리티도 아쉽다. 어두운 복도, 공터, 폐공장에서 주로 액션이 펼쳐지다 보니 회차가 지날수록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는 인상이 짙다. 경성의 화려함과 옹성 병원의 스케일을 강조하며 눈을 즐겁게 한 지난 시즌과는 대조적이다.
그나마 멜로는 살았다
그래도 마지막 보루를 지켰다는 점은 위안이다.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세밀해진 덕분에 로맨스의 완성도가 높아졌기 때문. 사실 지난 시즌은 장태상과 윤채옥의 멜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첫눈에 빠진 운명적이 사랑이라는 클리셰를 답습했고, 둘이 사랑을 싹 틔우는 과정도 못 보여줬다. 로맨스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옹성병원에 갇힌 채 각자 사투를 펼쳤으니까.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에 자연히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시즌 2는 두 주인공 간의 감정선을 영리하게 그려냈다. 10부작에서 7부작으로 분량을 줄이고, 각자의 서사를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시키면서 아련함을 극대화했다. 전반부는 윤채옥이 이끌어 나간다. 그녀는 어머니 세이싱으로부터 나진을 이식받아 불로 및 불사의 존재로 79년간 홀로 지냈다. 시즌 1에서의 첫 만남과 같은 구도로 이뤄지는 윤채옥과 장태상의 재회는 그녀의 그리움과 쓸쓸함을 극대화하고 뇌리에 각인시킨다.
중반부부터는 장태상이 극을 이끈다. 그는 마에다가 억지로 투여한 나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겨우 나진을 적출하고 기억을 잃은 채로 1년간 장호재로 살아왔다. 과거의 악연과 비극을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윤채옥과 재회한 후로 점차 기억을 되찾고 끝내 장태상으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전승제약이 잡아간 윤채옥을 구출하러 간다.
그 끝은 다크 초콜릿 같다. 윤채옥은 나진을 제거당하고 기억을 잃은 상태로 평범한 대학생활을 영위한다. 반면에 장태상은 장호재라는 이름으로 죽지 못하는 삶을 홀로 살아간다. 그들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순간, 서로 맞바꾼 삶의 궤적은 한눈에 들어온다. 해피엔딩 같지만 정반대의 상황을 마주한 쌉쌀한 멜로를 완성한다. 이러한 결말은 <경성크리처 2>가 최소한의 몫은 해냈다는 평가가 아깝지 않은 이유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경성크리처 2>는 예술 작품의 본질을 간과한 여러 작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은 창작자가 미적 감각 속에 의도를 숨겨서 전달하고, 수용자는 미적인 즐거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의도를 발견 혹은 체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경성크리처>는 창작자의 의도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미적 감각과 기술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나머지 역효과가 발생한 듯 보인다.
이는 쿠키 영상대로 시즌 3가 나오더라도 기대가 크지 않은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쿠키 영상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시즌 3은 나진이 세상에 퍼짐으로써 그 유산을 비로소 사람들이 직시하고 맞서는 전개를 보여줄 듯 싶다. 나진을 현재까지 남은 일제의 유산이나 저주로 이해한다면, 지난 두 시즌 동안 보여준 의도의 연장선상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시즌 3만큼은 철저히 장르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반일이라는 가치와 메시지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 달리 말해 두 주인공의 멜로와 액션, 그리고 크리처물의 정체성만 살아나도 작가의 의도가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
Poor 형편없음
반일이라는 의도를 감싸지 못한 액션과 크리처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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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과 매국 사이 애매한 줄타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국 군벌, 마적, 일본군과 일본 경관, 조선인과 독립군이 엉켜 살아가는 1920년대 간도. 그곳에 한 남자가 도착한다. 일본 군복을 벗고 죽기 위해 간도로 향한 '이윤'(김남길). 10여 년 전 남한 대토벌 작전에 참전했던 그는 작전 당시 자기 때문에 가족을 잃어야 했던 의병장 '최충수'(유재명)를 만나 목숨으로 사죄하려 한다. 유일한 사랑 '남희신(서현)'도, 친구이자 한때 주인님 '이광일'(이현욱)과의 인연도 뒤로 한 채.
하지만 이윤은 조금씩 생각을 고쳐 먹는다. 경성에서 볼 때는 기회의 땅이었던 간도가 무법천지의 땅이었기 때문. 자기를 죽이러 온 총잡이 '언년이'(이호정)를 만나고,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아 무기력하게 죽어 나가는 조선인을 보면서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생겼음을 깨닫는다. 독립군도, 마적도 아닌 도적이 되어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결심한다.
만주 웨스턴의 부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웨스턴은 할리우드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돼 관객과 만났기 때문.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은 미국 정통 서부극을 대신할 정도로 인기였다. 원주민과 개척지라는 조건이 미국과 같은 호주에서는 '미트파이 웨스턴'이 제작됐다. 심지어 소련에서도 중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레드 웨스턴'이 냉전 동안 인기를 모았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일제강점기 만주를 배경으로 중국군, 일본군, 독립군, 마적, 그리고 조선인이 얽힌 만주 웨스턴이 있다. 물론 본고장 미국에서도 서부극 인기가 시든만큼 만주 웨스턴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장르로 보기는 어렵다. 김지운 감독의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하 <놈놈놈>) 이후 흥행한 사례도 많지 않다. 그나마 윤종빈 감독의 <군도: 민란의 시대>가 사극과 스파게티 웨스턴의 퓨전을 선보인 정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도적: 칼의 소리>는 이처럼 보기 드문 만주 웨스턴의 명맥을 잇겠다고 선포한 작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적: 칼의 소리>가 만주 웨스턴의 부흥을 이끌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장르의 근본적인 한계를 깨부수는 데 실패한 나머지,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본분에 충실한 액션
<도적: 칼의 소리>는 분명 반갑다. 본분에 충실하다. 만주 웨스턴은 철저히 오락적인 이유로 등장한 장르다. 국내에서 서부극에서 볼 수 있는 총격전과 기마 추격전을 맛보고 싶은 욕구가 낳은 장르이기 때문. 즉, 황량한 배경에서 화끈한 액션과 볼거리만 보여주면 만주 웨스턴은 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놈놈놈>만 해도 일제 강점기 간도라는 시공간을 빌려 주인공 3명의 캐릭터쇼로 승부를 보는 액션 활극이었다.
<도적: 칼의 소리>는 좋은 선례를 착실히 따라간다. 우선 각 인물별로 확실한 캐릭터를 부여하면서 서부극에서 기대하는 볼거리를 충실히 보여준다. 일본군 출신 총잡이, 궁수, 호랑이 잡던 포수, 도끼 든 광대, 괴력의 거한, 암살자까지. 특징이 확실한 이들이 팀을 이뤄 싸우는 액션은 꽤 인상적이다. 물론 캐릭터 설정이 신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수위가 높고 각자의 역할이 잘 살아있다 보니 액션 보는 맛은 확실하다.
이에 더해 웨스턴 영화로서 갖출 것도 다 갖췄다. 총격전, 기마 추격전은 당연히 등장한다. 말 탄 도적이 기차를 쫓거나 총잡이들끼리 일 대 일로 총을 겨누는 클리셰도 빼먹지 않는다. 일본군과 독립군, 도적과 일본군, 도적과 마적 등 믿을 사람 없이 서로 싸우는 장면도 만주 웨스턴답다. 만주 웨스턴은 기본적으로 군상극인 스파게티 웨스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액션 활극이기 때문.
나라가 아닌 사람을 지키다
시공간적 배경을 적극 활용한 스토리텔링도 눈길을 끈다. 사실 1920년대 간도는 피카레스크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최적화된 혼돈의 공간이자 시대다. 1920년대에 일제는 문화 통치를 통해 일본과 조선의 물지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을 추구했다. 자연히 해방 대신 자치를 요구하는 조선인이 늘었다. 간도라는 공간도 혼란스럽다. 중국 군벌, 일본군, 조선인과 독립군까지. 누구 하나 실질적인 행정력과 통제력을 지닌 주체가 없었다.
<도적: 칼의 소리>는 변절자가 늘고 선악 구분이 무의미한 시공간적 배경에 걸맞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역사적 당위성에 회의감을 표한다. 한국인이라면 일제의 침탈을 막고, 일제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명제를 거절할 수 없다.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다. 노비나 백정이었던 사람이 조선과 독립운동에 긍정적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 초이나 구동매가 그러했듯이.
그래서 <도적: 칼의 소리>는 나라를 구한다는 추상적인 대의 대신 눈앞의 목표에 일신을 던진 이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대한 독립 대신 개인, 가족, 친구의 생존이 우선순위인 이들을 비춘다. 이윤이 대표적이다. 그는 시대적 대의와 개인의 욕망 중 항상 후자를 고른다. 그가 희신을 돕는 이유도 그저 사랑 때문이다. 남한 대토벌 작전에 참여한 후 일본군에서 전역한 것도 민족 감정이 아닌 개인적인 죄책감이 주된 원인이었다.
이는 의병장이었던 최충수가 독립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언년이가 시니컬한 암살자가 된 이유, 더 나아가 그들이 도적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독립군 대신 '도적(刀嚁)', 칼 휘두르는 소리로서 지켜야 할 사람들만 보호하자는 것. 또 이광일이 메인 빌런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영달을 위해 숙부도, 약혼자도, 오랜 친구도 일제에 팔아넘기거나 죽일 각오가 된 인물이니까. 이윤과는 정반대로.
장르와 역사의 충돌
하지만 <도적: 칼의 소리>의 스토리텔링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만주 웨스턴의 기본적인 한계를 깨려는 시도가 없기 때문이다. 대의 대신 생존을 택한 도적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만주 웨스턴의 묘미에 부합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만주 웨스턴의 선조 격인 스파게티 웨스턴은 선악 구분이 확실한 정통 서부극과 달리 군상극에 가깝기 때문이다.
선택지도 많았다. 도적을 독립군과 차별화하고, 난세에서 살아남는 민초로 그리고 싶었다면 굳이 독립군이 완벽한 선일 필요도 없었다. 독립군이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을 탄압한 '빈주 사건'처럼 독립군과 도적 간의 갈등을 강조할 수도 있었다. 마적과의 갈등, 이윤과 이광일의 개인적인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방법이었다.
<도적: 칼의 소리>는 상상력을 펼칠 기회를 포기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타란티노가 보여준 배짱과 비슷한 용기는 없다. 독립군 대 일본군의 전형적인 구도를 답습한다. '십오만원탈취 사건', '간도참변', '훈춘 사건', '미쓰야 협정', '길회 철도 부설 반대 투쟁' 등 실제 사건을 변용한 대목은 선악구도를 강화한다. 마치 <봉오동 전투>를 보는 듯하다. 생존을 위한 사투도 알게 모르게 독립군 정신과 합쳐진다. 극이 진행될수록 도적들이 독립군보다 더 독립군스럽고, 일본군에게도 더 많은 피해를 준다.
그렇게 웨스턴 장르의 매력은 급감한다. 피카레스크적인 요소가 곁들여진 장르적 쾌감도,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서사의 매력과 개성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스토리는 다른 길로 흘러 버린다. 이윤-이광일-남희신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이윤과 희신의 사랑이 싹피는 멜로드라마가 메인 요리가 된다. 액션도 쾌감을 잃는다. 시퀀스만 떼어 놓고 보면 즐기기 충분하지만, 전체 맥락에서는 미묘하게 어색함이 느껴진다.
틈으로 새어 나오는 완성도
장르와 스토리의 지향점이 충돌하는 사이로 부족한 짜임새도 노출된다. 우선 전반적으로 루즈하다. 액션 시퀀스와 대본에 문제가 있다. 액션씬의 경우 과하게 분량을 차지한다는 인상이 짙다. 장르 특성상 이해할 수 있지만, 흐름을 끊는 것은 사실이다. 대본의 경우 동어반복인 대사가 많다. 조금 더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풀어냈다면 1시간에 육박하는 각 에피소드 분량을 줄여서 긴장감을 더 끌어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도적: 칼의 소리>는 많은 넷플릭스 작품처럼 도전 그 자체에 박수를 보내는 데서 만족해야 할 작품처럼 보인다. <고요의 바다>, <택배기사>, <승리호>처럼 과감한 장르 영화가 많아지는 가운데, 시도라는 의의를 넘어서서 어떻게 열매까지 딸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Poor 형편없음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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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은 어떻게 거장이 되는가?
이 시사회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하였습니다.
천재에 대한 일화는 언제나 대중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가 다다른 '거장'의 지위가 눈부셔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러한 천재들이 그 나름대로의 탁월한 방식으로 한 분야의 새 지평을 여는 순간들이 짜릿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들의 남다름은 매력적이고, 그들의 열정은 경탄을 자아낸다. 대개 그들의 삶에는 혁신이 있고,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그 삶의 흐름은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그러한 천재의 반열에 오른 거장 중의 하나다. 그가 영화에 담아낸 음악들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일이 없더라도 그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사실, 내가 그랬다.) 거친 황야 너머로 울려퍼지는 팬플루트 소리라든가, 낯선 남미 땅에서 울려퍼지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오보에 연주('넬라 판타지아'라는 음악으로 더 알려져 있다.)는 한국인들의 귀에도 너무나도 익숙한 곡들이 아닌가. <시네마 천국>, <황야의 무법자>, <피아니스트의 전설> 등 제목만 말해도 '아!'하고 탄성이 절로 나오는 영화들 역시 그의 음악을 말미암아 빛을 발했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엔니오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불후의 명곡들을 만들었을까? 우리는 운 좋게도 오는 7월에 나오는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에서 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거장의 삶을 추적하며 그가 음악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조명한다. 그와 동시에, 거장이 거장으로 불리기까지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그는 천재이자 혁신가이고, 또 한편으로는 한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낸 개인이기도 하다. 천재를 감히 평범하다고 일컫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삶은 분명 눈부셨지만 사람다운 구석이 있었고, 바로 그 점이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스크린 너머에서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거장은 그저 거장으로 태어나 거장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끝없는 노력과 열정, 실험 정신, 그리고 좌절을 말미암아 진정한 '마에스트로'로 거듭난다.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던 그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혹은 정해진 길만을 걷기를 거부했다. 트럼펫 연주자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작곡가가 되었고, 현대 음악을 경시하던 기존 클래식 학계에 기꺼이 반기를 들었다.
그는 나아가 그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상업적'이며 음악의 고유한 가치를 떨어트린다는 평을 받던 영화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가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을수록 클래식계에서의 비난은 거세어졌지만 그는 꿋꿋이 그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는 클래식계와 영화계 양쪽 모두에게서 인정 받는 음악가이자 영화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언제든지 거만해질 수 있었고, 언제든지 그가 뿌리를 둔 고전 음악계나,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 음악을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대신 젊은 날의 그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매순간을 절실하게 살았다. 그는 혁신과 변화, 새로움을 꿈꾸는 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음악 선배들이 수 백년에 걸쳐 전해 온 규칙을 계승하고자 했고, 바로 이 점이 그를 한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가 되게 했을 것이다.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의 이름이나 아주 단순한 화성학이니 뭐니 하는 음악 용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사실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그의 삶은 충분히 눈부시고, 그가 기울인 탁월하고도 성실한 노력들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 동안 나는 나의 삶은 어땠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처럼 천재가 아니고 그만큼 탁월하거나 성실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매일매일을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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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 뿐만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영화관에서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시간이 난다면 가능한 음향 시설이 좋은 시설에서 마음껏 그의 음악을 즐겨보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탁월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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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질타의 행방,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 그리고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연애편지 (1953)Love LetterSYNOPSIS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온 레이키치는 일본 여성들이 미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번역하는 일을 하며, 한편으로 잃어버린 옛 연인을 찾고 있다. 일본의 대배우 다나카 기누요의 연출 데뷔작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여성의 시선으로 담고 있다.감독TANAKA Kinuyo(다나카 기누요)출연MORI Masayuki(모리 마사유키), KUGA Yoshiko(쿠가 요시코), MICHISAN Shigesan, UNO Jukichi(우노 쥬키치), KAGAWA Kyoko(카가와 쿄코), SEKI Chieko(세키 치에코)1:1 정방형의 프레임을 영화관에서 본 건 오랜만이었다. 첫 장면은 일본어가 수 놓인 종이와 한 송이의 꽃. 컷을 바꾸어가며 글자와 꽃의 위치가 오묘하게 바뀌다가 꽃은 점점 그림자로 변해갔다. 꼭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처럼. 컷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내내 흐르던 서정적인 멜로디가 사라지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스포일러 있습니다.번듯한 차림새의 남자. 바삐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이 익숙해 보였다. 아주 잘 아는 길을 습관처럼 걷는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도착지는 집이었다. 번역가로 일하는 자신의 형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곧장 그의 손에 일감을 쥐어준다. 방 안에서 번역 일만 하느냐는 가벼운 타박에 멋쩍게 웃는 남자, 레이키치는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인다.그에겐 작은 방이 생활 반경 전부일 것 같았는데 곧, 변화가 생겼다. 친구의 제안으로 이제는 논문 같은 서적이 아니라 편지글 번역을 맡는다. 어디에서 어디로 부쳐지는 편지인가 하면, 미군과 사귀는 여성들의 재촉과 질타 따위를 영어로 보내는 일이다. 대개 양육비를 제때 내지 않는 등 벌인 일을 책임지지 않은 것에 화를 내는 편지였다.여기서 주목할 건 질타의 방향이다. 1953년 영화인만큼 시기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일본과 일본의 적국인 미국.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니 오묘한 감정선을 타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의연하다. 편지 번역을 의뢰한 여성의 한숨 섞인 말에도 레이키치는 헤실대는 웃음이 전부였다. 전후의 분위기가 담기지 않은 걸까, 혹은 일이기 때문에 감정의 분리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사람이 의연한 걸까.약간의 의구심을 일으킨 채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바로 미치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치코의 목소리였다. 마유키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 미치코를 찾는다. 하지만 이미 그가 떠난 후였다. 온화한 미소와 점잖은 말씨, 그리고 묘하게 기품 있는 지적인 레이키치의 모습이 한 번 깨진 순간이다. 레이키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는 사람, 그것도 오래 기다려왔던 미치코라는 걸 알게 된다.미치코는 이혼 후 혼자 지내고 있는데 레이키치는 자신의 첫사랑인 미치코를 잊지 못해서 주변의 재촉과 물음에도 시종일관 웃음으로 대응하며 그를 기다려 온 것이다. 지극한 순애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이 모든 건 레이키치의 생각이자 바람이고, 자신이 타인에게 관철시키고 싶은 뜻일 뿐. 다만 지식인처럼 보이는 번듯한 겉모습에 그의 요상스러운 집착은 그럴싸하게 포장된다.두 사람은 결국 조우하고, 서로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면서 레이키치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레이키치는 그렇게 그리던 미치코를 단 한 번에 내팽개친다. 미군에게 편지를 보내려는 의뢰인으로 미치코가 나타난 것이다. 레이키치가 상대했던 여성 의뢰인들은 대개 미군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던 여성이었으므로 그가 꿈에 바라던 '순결한' 미치코는 영영 사라진 것이다.레이키치 마음 한 편에 있던 아이러니가 그제야 가시화된다. 미군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실 책망과 불안이 뒤섞인 내용이어야 한다. 양육비는 결국 생활에 필요한 최소 비용의 일부이자 무엇보다 미군이 벌인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므로. 회유나 설득으로 점철되어야 할 언어는 레이키치의 손을 거쳐 로맨틱한 것, 그러니까 '연애편지'로 왜곡된다.그 여성들이 바라는 건 다정한 말을 속삭이는 연애가 아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경고이지. 그러나 와 편레이키치지의 수신인들에겐 상냥한 말씨로 다정히 말하는 '여인' 쯤으로 다가올 뿐이다.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위계가 미군-일본 여성부터 일본 내 남성 지식인-하층 여성으로 확장되어, 영화에서는 개인의 모순으로 드러난다.미치코는 자신은 그들과 다르며, 미군과는 진지한 만남을 가진 것이지 몸을 판 게 아니라고 그의 오해를 풀고자 한다. 영화는 그의 말이 변명인지 해명인지 파헤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듯 미치코의 진위여부는 조명하지 않는다. 대신 레이키치의 동생을 내세워 한쪽에서는 설득과 거절을 반복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상황 설명과 이해를 표하려 한다.끝으로 치닫은 영화는 다시금 우연을 활용한다. 미치코와 레이키치의 재회가 그랬던 것처럼. 미치코를 자신들과 동류라고 말하는 성매매 여성들을 만나고, 힘겹게 그들을 뿌리쳐 낸 미치코와 레이키치의 동생. 미치코는 자신의 억울함을 표명한다. 동생은 이에 동조를 표하고, 레이키치는 미치코와 대화를 하고자 그의 집에 찾아간다. 그를 '용서'할 가능성을 생각하며.레이키치의 행태는 볼수록 아리송했다. 과연 이 남자가 느끼는 배신의 근원이 뭘까? 미치코가 '미군'과 얽혀있어서 그 자신의 애국심을 무한히 발휘한 것일까, 혹은 '순결함'을 잃었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낀 것일까, 둘 다일까. 한 사람의 명확한 계기는 알 수 없으나, 분노의 감정이 치솟은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이, 그리고 사회가 규정한 올바르고 좋은 상태의 여성을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상정했고, 이를 타인에게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자신만의 판타지를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이를 현실로 소유하고자 했음을.이러한 꽉 막힌 시선에서 벗어나는 건 어째서 또 다른 고통뿐인지. 또 '우연한' 교통사고로 미치코는 레이키치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병원에 실려간다. 이윽고 전보를 받은 레이키치 또한 병원으로 향하는데, 차 안에서 그의 친구가 말했다.일본인 모두 전쟁에 책임이 있어.전쟁이 끝난 뒤 다들 힘들게 살고 있는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어?이야말로 영화 전체, 특히 레이키치를 꿰뚫은 말이다. 대체 누가 누구를, 무엇을 근거로 탓하는가? 레이키치 자신이 참전군인이라고 해서 자신의 기준대로 타인을 재단할 순 없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채 더 약해 보이는 존재에게 화풀이하는 꼴이다.전쟁은 끝났는데 왜 홀로 전쟁 속에 갇혀있는가.Schedule in SIWFF2022-08-27 | 20:30 - 22:05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2022-08-30 | 13:30 - 15:05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서울국제영화제 SIWFF8/25(THU) ~ 9/1(T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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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코엔 형제 영화. 오래 전,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내용이 조금 황당해서 코엔 형제의 영화로는 조금 실망스러운걸,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수 많은 영화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코엔 형제'를 든다. 좋아하는 감독도 많고, 훌륭하고 뛰어난 작품도 많지만, '내 취향'은 '코엔 영화'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 볼수록 매료되는 특이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를 한번만 보고 그만두지 않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다시 보면, 같은 영화임에도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모든 훌륭한 영화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데,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영화들이 그렇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도 그렇다. 관객은 영화를 처음 볼 때 주로 이야기(서사)를 따라가게 된다. 이야기만 따라가는 것도 벅찰 때가 많아서, 영화의 여러 요소들 - 미장셴, 음악, 배우, 미술, 의상, 배경, 촬영, 음향 등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것 - 을 꼼꼼히 살필 여유가 없다.
훌륭한 작품은 이야기도 훌륭하지만, 앞에서 말한 영화 요소들을 하나씩 세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영화 마니아들은 한 영화를 열 번, 스무 번 이상도 보는데, 나는 코엔 형제 영화를 모두 여러 번 봤지만, 특히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몇 번씩 보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이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도 처음 봤을 때와 지금 다시 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코엔의 영화는 역시 훌륭했다. 다만 내가 이 영화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것 뿐이었다. 주인공 에베레트 율리시즈 맥길의 이름은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이의 희랍어 이름이다.
영화 타이틀에서도 밝혔듯이 이 영화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기본 모티프를 가져왔다. 즉, 주인공 오디세이아가 트로이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1937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새롭게 해석해 만든 코미디 영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서양 문학의 원형이며, 영웅 서사의 시작이고, 서양의 모든 문학 작품에 영향을 준 중요한 작품이다. 오디세이아는 영웅이며, 그가 고향(집)으로 귀향하는 과정은 '영웅 서사'의 모델이다. 즉 영웅은 수많은 고난과 비극을 겪으며 시간과 공간을 뚫고 귀향하는데, 이때 영웅이 겪는 고난은 모험이 되고, 영웅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며, 비극은 영웅의 내면을 단련하는 과정이 된다.
영웅은 불사조가 아니기 때문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지만, 그때마다 도와주는 인물이 등장하고, 영웅은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이런 기본 틀을 가지고 분석하게 되면, 기독교의 중요한 인물인 '예수'도 오디세이아적 영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는 탄생부터 특이하다.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는데, 그것도 마굿간이다.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를 쫓아 목수가 되지만, 곧 집(고향)을 떠나 사막에서 신을 만난다. 영웅의 고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는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나 여기저기 떠돌며 자신의 신념을 설파한다. 그를 따르는 사람도 있지만, 가는 곳마다 예수를 비난하고 비웃으며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결국 예수는 유다의 배신으로 로마군에게 잡혀 골고다 언덕에서 죽는데, 사흘만에 부활한다. 예수가 죽을 줄 알았던 가족들은 살아온 예수를 보고 놀라고, 예수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사라진다. 고난과 비극을 겪으며 성장하는 영웅의 서사와 매우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율리시즈는 죄를 짓고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다. 그는 함께 쇠사슬로 묶인 두 명의 동료-피트, 델마-와 함께 탈출한다. 이들은 달리는 기차를 타려다 실패하고, 기차 선로를 고치는 수레를 발견하고 올라탄다. 수레를 끄는 사람은 흑인 노인인데, 맹인이다. 이 노인은 세 사람을 향해 이상한 말을 하는데, 노인은 영웅의 앞길을 예언하는 예언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세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어떨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언자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셋은 숲속을 헤매다 우연히 피트의 사촌 워시를 만난다. 그곳에서 쇠사슬을 끊고, 밥을 얻어 먹으며 하룻밤을 보내는데, 워시가 현상금이 탐나서 추격대에게 이들의 위치를 알린다.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헛간 건물을 포위하고 항복하라는 추격대를 피해 달아날 때, 워시의 어린 아들이 도와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영웅을 돕는 것이다.
이들이 다시 숲속을 지날 때, 흰옷을 입은 마을 주민들이 수십 명 강물 있는 곳으로 걸어오더니 강에서 세례식을 시작했다. 세 명 가운데 두 명 - 피트, 델마 -은 그 장면을 보고는 목사에게 달려가 세례를 받는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이제 신에게 용서를 받았으므로 결백하다고 외친다.
세 명은 다시 시내 가게에 들렀다가 다른 사람 자동차를 훔쳐 타고 가는데, 중간에 흑인 토미 존스를 태운다. 토미 존스는 기타 가방을 들고 있었고, 자기가 지난 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대신 기타 연주를 배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악마는 백인이며, 눈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명백한 메타포다. 흑인은 영혼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미국 사회현실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토미 존스는 티샤맹고에 가면 깡통에다 대고 노래하고 기타를 치면 돈을 준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세 사람도 토미 존스의 말을 듣고 함께 가기로 한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허허벌판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 WEZY였다. 이 방송국은 미시시피주 밸리 파크에 세트로 지었고, 1930년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율리시즈와 세 명은 방송국으로 들어가 대놓고 말한다. 여기가 깡통에다 대고 노래하면 돈 주는 곳이냐고. 방송국이라야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사장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고, 싱글 레코딩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비가 있는 곳이었다. 사장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이들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옛날 노래를 불러달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나오는 노래가 '슬픔에 잠긴 남자(I Am A Man Of Constant Sorrow)' 다. 이 노래는 남부에서 오래 불리운 전통 음악으로 음악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알고 있고, 좋아한다는 건 분명하다.
이 음악이 처음 방송을 통해 알려진 건 1913년이었고, 처음 노래를 부른 사람은 딕 버넷(Dick Burnett)이었다. 최초의 노래 제목은 'Farewell Song'으로 발표되었고, 나중에 Man of Constant Sorrow 로 바뀌었다가 이 영화에서처럼 I Am A Man Of Constant Sorrow 라는 제목이 되었다. 1928년에 Emry Arthur가 녹음을 했고, 이후 이 노래는 The Stanley Brothers, 밥 딜런, 주디 콜린스, 피터 폴 앤 메리 같은 유명한 가수들이 불렀으며, 빌보드 차트 85위까지 오른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배경인 1937년이라면 이 노래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최초의 가수였던 딕 버넷이나 스탠리 브러더스의 노래는 창법이 옛날 방식이어서 흥겹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율리시즈와 친구들이 부른 - 이들은 노래하는 팀 이름을 급조했는데, '밑바닥 아이들'이라고 했다 - 노래는 슬픈 가사이면서 리듬은 흥겹다. 메인 보컬인 율리시즈(조지 클루니)가 부른 목소리는 조지 클루니 본인이 아니고, 포크 가수인 Dan Tyminski의 목소리다.
이들이 부른 노래에 기분이 좋아진 방송국 사장은 각각 10달러씩을 주면서 계약했고, 이들은 거액 10달러를 받아 몹시 기분이 좋았다. 방송국에서 나오는 길에 건물 앞에서 우연히 잘 차려 입은 백인들을 만나는데, 이들은 미시시피 현 주지사 페피 오데니얼 일행이었다.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라디오 유세를 하려고 방송국에 들른 것이다.
세 명은 토미 존스와 헤어저 다시 길을 떠나고, 중간에 혼자 은행강도를 하다 도망치는 조지 넬슨을 만난다. 조지 넬슨과 읍내에서 은행을 털고, 조지 넬슨은 밤에 갑자기 훔친 돈을 세 명에게 모두 주고 숲속으로 사라진다.
세 명은 차를 훔쳐 길을 떠나다 피트가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서 목욕을 하는 세 명의 여인을 발견하고 달려간다. 세 명의 여인은 고혹적인 모습으로 세 남자를 유혹하고, 이들은 정신을 잃는다. 여기서 세 명의 여성이 '인간'인지, 요정인지, 악마인지 확실하지 않다. 나중에 율리시즈는 이 여성들을 두고 '바빌론의 창녀들'이라고 비난한다. 이들이 깨어났을 때, 피트만 사라졌고, 피트가 입었던 옷에서 개구리가 나오자 피트가 개구리로 변한 것이라고 델마가 말하며, 개구리를 소중하게 데리고 다닌다.
율리시즈와 델마는 식당에서 우연히 사기꾼 대니얼 티그를 만난다. 성경을 판매하는 사업을 한다는 이 사기꾼은 두 사람을 때려눕히고 돈을 빼앗아 달아난다. 이 시간, 피트는 추격자들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다. 사기꾼에게 강도를 당해 돈을 다 뺐긴 율리시즈와 델마는 트럭을 얻어 타고 길을 가다 우연히 죄수들과 노역을 하고 있던 피트를 발견하고 놀란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율리시즈는 아내와 딸들을 만난다. 아내는 내일 약혼자와 결혼식을 한다고 말하고, 율리시즈는 아내의 약혼자 버논 월드립과 싸우다 얻어 맞기만 하고 쫓겨난다. 율리시즈와 델마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단체관람을 하러 온 죄수들 사이에서 피트를 발견한다. 그날 새벽, 피트를 구한 두 사람. 율리시즈는 피트와 델마에게 보물은 없었고,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한다. 탈옥한 이유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은 보물보다 값진 우정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숲속에서 우연히 KKK단 집회를 발견하고, 그 집회에 잡혀온 토미 존스를 구출한다. 이들이 읍내 마을회관에서 분장을 하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다시 I Am A Man Of Constant Sorrow 가 흘러나온다. 사람들의 열광적이고 폭발적인 반응에 놀라는 세 사람. 이들이 방송국에서 녹음한 노래가 그 사이 엄청난 히트를 한 것이다.
이때 KKK 집회에서 돌아온 주지사 후보 호머 스톡스가 노래하는 네 명을 지목하며, 그들은 백인이 아니고, 유색인종이며 없애야 하는 것들이라고 소리지른다. 호머 스톡스는 개혁적 인물로 알려졌지만, 알고보면 인종주의자에 백인우월주의자였던 것이다.
반면, 현 미시시피 주지사이면서, 선거에서 매우 불리했던 페피 오데니얼은 '밑바닥 아이들'의 인기에 편승해 시민들의 환심을 사고, 즉석에서 네 명의 죄를 사면한다. 이들이 마을회관에서 나오자 은행강도 조지 넬슨이 체포되어 거리를 지나가는데, 자기가 전기의자에 앉아 죽을 거라고 떠든다.
율리시즈는 아내와 다시 사이가 좋아졌지만, 다시 결혼식을 하려면 집에서 반지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한다. 율리시즈는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고향집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추격자들에게 다시 체포된다. 율리시즈와 동료들이 주지사에게 사면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추격자들은 이들을 교수형으로 죽이려고 밧줄을 묶는다. 이때 계곡을 따라 급류가 쏟아져 내리고, 율리시즈의 고향집은 물에 잠긴다. 이곳에 댐이 생긴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렇게 다시 구사일생한 율리시즈와 친구들은 도시에 있는 율리시즈의 아내를 만나고, 처음 탈옥했을 때 만났던 기차 선로 수레를 끄는 흑인 노인이 다시 등장해 서서히 멀어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등장하는 배우들은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데, 조지 클루니는 나무랄 데 없는 미남이지만, 존 터투러(피트), 팀 블레이크 넬슨(델마)의 표정 연기는 압권이다. 여기에 시작 부분에 잠깐 나온 흑인 노인, 은행강도 조지 넬슨, 방송국 사장, 아내의 약혼자 버논 월드립, 성경 사기꾼 존 굿맨 등 배우들 각자 개성 있는 연기로 영화가 다채롭게 채워지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은 포크송, 컨트리송들인데, 특히 남부 미시시피가 흑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고, 과거에는 목화 농장이 많던 지역이라 흑인들의 노동요가 발달한 지역답게 흑인 음악과 블루스에서 파생하는 컨트리 음악, 포크 음악이 낯설지 않고 우리의 정서와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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