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2-25 17:07:15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 감흥 없는 번역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광풍에도 불구하고 농구와 복싱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2학년 '구진우'(진영). 어느 날, 그는 수업 시간에 장난을 치다가 걸린 나머지 벌을 받게 된다. 모범생 '오선아'(다현) 앞자리에 앉아서 특별 감시를 받으라는 것. 선아를 짝사랑하는 친구들은 진우를 부러워하지만,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진우는 그저 벌을 받아야 해서 불만스러워한다. 선아 역시 시끄럽기만 한 그의 존재를 불편해한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둘은 점차 가까워진다. 선아가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자, 진우가 자기 책을 선뜻 빌려주고 대신 벌을 받은 것.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는 선아와 진우. 선아는 진우에게 공부를 알려주고, 진우는 특유의 멋모를 자신감으로 선아를 웃게 만들면서 감정을 쌓아 나간다. 하지만 서로에게 끌리는 속마음과 달리 그들은 자기 마음을 좀처럼 속 시원하게 표현하지 못한 채 대학생이 된다.
리메이크 대신 번역을 선택하다
국내 영화 시장에서 중화권의 청춘 로맨스 영화는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100만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해도, 수십만 명의 관객을 꾸준히 동원하는 흥행력은 보장되는 장르니까. 2010년대에 개봉한 <장난스런 키스>, <나의 소녀시대> 모두 4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은 바 있다. 2023년 여름에 재개봉한 <여름날 우리> 역시 40만 명을 돌파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팬데믹 이후 침체기가 길어지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서는 이처럼 꾸준한 흥행력을 과시하는 중화권 청춘 로맨스가 돌파구로 여겨졌던 모양새다. 비슷한 시기에 과거 인기를 끌었던 대만 청춘 로맨스 영화 세 편이 일제히 리메이크됐기 때문. 작년에 개봉한 <청설>과 설날 연휴에 공개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각각 8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기록했다.
문제는 3번 타자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하 <그 시절>)다. 대만 영화 리메이크 열풍을 이어갈 매력이 안 느껴진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 시절>은 리메이크 대신 번역을 선택했기 때문. 앞선 두 영화는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따르되 플롯이나 감성을 차별화했다. 그에 반해 <그 시절>은 배경만 한국으로 바꾸는 데서 그쳤다. 그러다 보니 원작을 이미 본 관객으로서는 굳이 번역본을 읽을 필요성을 못 느낄 법하다.
그 시절의 소녀가 뇌리에 각인될 두 가지 조건
<그 시절> 원작을 본 관객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결혼식에서 커징텅이 션자이의 남편에게 키스할 때 스쳐 지나가는 평행 세계 시퀀스다. 그들이 연애할 때 마주한 몇 차례 분기점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다른 선택을 내리면 달라졌을 현재와 미래를 파노라마로 펼쳐 보여주는 순간의 임팩트가 핵심이다. <라라랜드>에서 남남이 된 세바스찬과 미아가 과거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결말과 유사하다.
이처럼 클라이맥스가 관객 뇌리에 각인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예뻐야 한다. 예쁜 대상은 다를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의 풋사랑이 귀여울 수도 있고, 연기와 재즈에 몰입하는 두 주인공의 열정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10년이 지난 후에도 두 주인공이 그 시기를 회상하면 다시 사랑에 빠질 정도로 강렬하게 예쁜 게 중요하다.
그다음으로는 이별에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명백한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함께 시간을 보낸 과거가 너무나도 찬란하고 아름다운 나머지, 그 시절로 돌아가거나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 싶더라도 그럴 수 없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제시되어야 한다. 과거는 과거에 묻어두어야만 할 때, 즉 가능성이 현실로 될 수 없는 한계와 제약이 있을 때 평행 세계는 간절한 만큼 강렬하니까.
예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하지만 <그 시절> 리메이크가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했다. 첫 번째 조건은 절반 정도만 갖췄다. 진우와 선아의 사랑이 시작되는 배경과 분위기는 예쁘다. 2000년대 배경의 고등학교 풍경은 관객에게 자기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교실이나 운동장처럼 한국적 배경에 맞게 바뀐 장소는 필연적으로 대만 원작보다 흡입력이 뛰어나다. 별다른 노력이 없어도 당시의 향취가 주는 아련함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작 그 안에서 피어나는 풋사랑이 부자연스럽다는 것. 두 주인공의 톤이 묘하게 어긋나 있다. 진우는 너무 가볍고 동적이며, 선아는 지나치게 정적이다. 그 결과 진우에게 '그 시절의 소녀'여야 할 선아의 매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공부할 생각이 아예 없는 진우와 모범생 선아가 처음부터 잘 어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두 주인공의 톤이 같은 층에서 만나지 못하니까 문제다.
이는 영화가 진우 시점에서 전개되는 데서 기인한다. 진우 관점에서의 사랑 이야기이다 보니 영화 분위기는 자연히 그의 감정선에 따라 달라진다. 그 대가로 선아의 심리 묘사가 부족할 수밖에 없고, 그 공백으로 인해 선아와 진우의 연결점도 약화다. 그렇다고 <그 시절>이 데뷔작인 다현 개인의 역량으로 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 결과 두 주인공의 로맨스는 두고두고 그리울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끝내 못 보여준다.
명백한 이유 없는 이별
두 주인공의 이별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유치함을 못 견디겠다는 선아의 말에 내포된 본 이유를 못 보여줬기 때문. 선아는 진우에게 꿈이 뭐냐고 묻고, 진우는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답한다. 실제로도 그는 학생들을 함부로 다니는 교사에게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고, 2년만 공부해서 인서울 대학교에 입학하며 자기 포부를 증명해 낸다. 이에 선아는 진우에게 반한다. 그녀에게 꿈이란 삶의 지향점이었고, 그에게는 꿈이 있었으니까.
그다음이 문제다. 대학에 들어간 진우는 선아가 말리는 일만 골라 한다.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고, 취객과도 싸운다. 이에 선아는 진우에게 유치하다며 이별을 고한다. 그녀에게 유치함이란 꿈이 없거나, 자신과 맞지 않는 꿈을 꾼다는 표현이었던 것. 하지만 상술했듯이 극 중 선아의 감정선이 잘 드러나지 않다 보니 유치함의 속뜻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 결과 이별은 가슴 아프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에 더해 갈림길의 순간도 인상적이지 않다. 이별로 인한 진우의 흉터가 진할수록 클라이맥스에서 '그때 그랬을걸'이라는 회한의 파도가 더 강하게 밀려올 수 있는데, 정작 갈림길마다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하기 때문. 남산 데이트 직후 격투기 동아리 장면, 이별 후 입대로 이어지는 흐름이 대표적이다. 진우의 불안함과 아픔이 전해지기도 전에 유머로 상황을 무마한다. 그 대가로 파노라마 장면의 임팩트가 좀처럼 살지 못한다.
리메이크는 번역이 아닌데
사실 리메이크는 원작을 뛰어넘기 힘들다. 특히 추억이라는 최고의 아군이 함께하는 이상, 원작의 첫인상에 범접하기가 특히 어렵다. 오래전 작품일수록 관객은 그 영화의 장단점, 완성도보다는 그 영화가 남긴 추억을 간직하기 때문. 따라서 리메이크는 원작이 남긴 추억을 존중하되, 원작과는 또 다른 메시지나 의도가 담긴 포인트를 선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작 대신 리메이크를 보게 하는 소구력을 갖출 수 없다.
이 대목에 있어서 <그 시절>은 다소 안일해 보인다. 공간, 시대, 설정만 한국적으로 바꿨을 뿐, 알맹이는 원작 영화의 것을 고스란히 따왔다. 재구성 대신 번역만 한 셈이다. 원작을 재구성한 다른 리메이크 작품들과 비교하면 방향성 문제가 더 도드라진다. 일례로 <청설>만 하더라도 원작의 소재나 인물 관계는 유지하면서도 여름이라는 계절감을 강조하는 각색을 통해 원작과의 비교를 영리하게 피할 수 있는 작품이 됐다.
하지만 <그 시절>은 추억을 되살리고, 그 추억에 흠뻑 빠지게 만드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외에는 굳이 리메이크 영화를 보면서 예전 감성을 찾아야 하는 차별화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한국판 특별히 모난 구석이 없지만, 되려 그래서 특별한 것 없는 하이틴 로맨스로 귀결됐다.
Poor 형편없음
원작을 읽은 이상 사족인 번역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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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함과 맞바꾼 애틋함
* <동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동감 (2022)
감독: 서은영
출연: 여진구, 조이현, 김혜윤, 나인우, 배인혁
장르: 로맨스, 판타지
상영시간: 114분
개봉일: 2022.11.16
1999년의 대학생 ‘김용(여진구)’과 2022년의 ‘김무늬(조이현)’. 두 사람은 우연히 HAM 무전기를 사용하다가 23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거짓말 같은 통신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각자 95학번과 21학번이라고 주장하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그저 누군가의 심술 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차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며 얼굴도 모르고, 실제로 만날 수도 없는 교신기 너머의 상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두 남녀는 가까워진다.
‘김용’은 기계공학과 신입 여학생 ‘한솔(김혜윤)’에게 첫눈에 반한다. 여학생이 귀한 학과에 당돌한 성격에 예쁘기까지 한 학생이 들어왔으니 학교 생활에 따분함을 느끼던 ‘용’에게 활력을 가져다 주기 충분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성격까지 좋은 ‘용’은 나름 학교의 인싸지만 연애 앞에서는 숙맥이나 다름 없었고 20년이나 앞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무늬’는 무전을 통해 여심 저격 방법을 코칭해 준다. 조언은 성공적이었고, ‘김용’은 ‘한솔’과 꿈에 그리던 연애를 시작한다.
자신의 감정에 직진할 줄 아는 ‘김용’과 달리 ‘무늬’는 2022년 현재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고민을 안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가면 인생이 잘 풀릴 줄 알았지만 대학에 가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진로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은 물론 오랜 남사친 ‘영지(나인우)’를 두고는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무전을 통해 고민을 토로하며 답답함을 털어내고, ‘김용’ 역시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다는 비슷한 고민을 듣고는 동질감을 느낀다. 쉽게 상념을 풀어 놓을 데가 없던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더 많은 시간을 무전으로 함께한다.
그러나 23년이라는 시간 차를 둔 소통은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무전 통신을 두고 대화만이 오갔을 뿐이지만 각자가 존재하는 시대상의 흔적들도 교신기를 따라 함께 이동했다. 처음에는 1999년도에 사는 ‘김용’이 이해할 수 없는 유행어 정도만이 이동할 뿐이었다. ‘김용’은 자신이 40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알 수 있을 법한 신조어를 이해하며 박장대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래에 벌어지게 될 일들을 선택적으로 들을 수 없던 ‘용’은 절대 미리 알아서는 안 될 사건까지 알게 된다. 과거 ‘김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쓰던 ‘무늬’는 ‘용’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고, 연애를 시작한 이후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그의 인생은 완벽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동감>은 2000년 개봉한 ‘유지태’, ‘김하늘’, ‘하지원’ 주연의 <동감>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남녀가 교신한다는 핵심적인 설정만 그대로 유지한 채 작중 배경만 ‘1979년-2000년’에서 ‘1999년-2022년’으로 바꾸었다. 또한 원작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은 ‘김하늘’이 과거를 살아가고, 남주인공을 맡은 ‘유지태’가 현재를 살고 있던 반면 리메이크 작에서는 남주인공인 ‘여진구’가 1999년 과거를, 여주인공 ‘조이현’이 2022년 현재를 맡았다.
중반까지의 진행은 매우 자연스럽고 캠퍼스 로맨스 장르의 풋풋함이 뚝뚝 떨어진다. 신입 여학우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랑꾼으로 분한 ‘여진구’와 수줍음과 당찬 면모를 모두 갖춘 매력적인 ‘한솔’ 캐릭터를 소화하는 ‘김혜윤’의 연기력은 작중 오글거리는 대사마저 매끄럽게 소화할 정도로 뛰어나다. 두 사람이 학생회관 건물 앞에서 처음 만나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썸을 타는 과정은 여느 캠퍼스 배경의 멜로 드라마와 다를 것이 없지만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이 익숙한 스토리라인 속에 재미를 불어넣는다. 특히 로맨스의 감정선을 단독으로 이끌어가는 ‘여진구’의 힘이 대단하다. (‘방가방가’ 같은 최악의 대사도 맛깔 나게 소화하는 치명적인 매력이란.)
문제는 <동감>이 단순 캠퍼스 로맨스 장르의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20년의 간극을 두고 있는 남녀가 짝사랑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동감’을 느끼고, 이 과정을 단 한 번의 대면 없이 오로지 무전 상의 목소리로만 교류한다는 점에서 애틋함을 자아내는 게 핵심 주제이자 중요한 감정선이다. 하지만 원작과 시간적인 배경만 다르게 설정했을 뿐인데 남녀 주인공의 소통은 그리 애틋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용’과 ‘한솔’의 로맨스는 풋풋하면서도 몰입감 있게 그려졌지만 ‘무늬’와 ‘용’의 소통은 전반적으로 어색하기만 하다. ‘베프’, ‘이불킥’ 같은 철 지난 유행어들로 세대 차이를 보여주려는 대사들은 억지스럽기까지 하며 ‘조이현’의 연기력이 ‘여진구’에 비해 부족한 탓에 집중을 흐린다. ‘김혜윤’과 ‘여진구’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감초 같은 매력을 더한 ‘배인혁’이 등장하는 과거 신은 캠퍼스물 특유의 유쾌함과 청춘의 건강한 에너지가 돋보이는 반면 ‘조이현’과 ‘나인우’가 합을 이루는 신은 완성도 낮은 웹드라마를 보듯 부자연스럽다. 후반부 ‘무늬’의 감정선이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은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1999년의 남자와 2022년의 여자가 오래된 무전기를 통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퍽 판타지 같은 설정이다. 2000년에 개봉한 원작 역시 이러한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낭만적인 색채를 부각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2022년의 <동감>은 기술이 너무도 발전한 세상의 ‘무늬’가 ‘김용’의 흔적을 척척 찾아내고, 비현실적인 상황의 흐름을 두 사람이 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판타지의 색깔이 옅다. 특히 ‘용’의 짝사랑 이야기와 달리 실제 있을 법한 Z세대 대학생의 고민을 다룬 ‘무늬’의 이야기는 낭만을 반감시키고 현실성을 덧입히는 요소다. ‘HAM 무전기’와 ‘공중전화’, 1990년대 음악 등 향수와 감성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품들만 들고 왔을 뿐 각 장치들은 애틋함이나 아련함을 연출하지 못한다. 특히 주인공이 소나기를 맞으며 이별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김광진’의 ‘편지’를 사운드트랙을 사용한 것은 촌스럽고 조악하기까지 하다.
원작에 비해 풋풋하고 밝은 색감을 더하는 데는 성공 했는지 몰라도 판타지 로맨스의 애틋함을 살리는 데는 실패했다. 원작의 장치들을 그대로 따라가느라 리메이크 작품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는데 일부 한계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후반부에 갑작스레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것도 뜬금없다.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 첫사랑에 실패한 ‘용’의 이야기를 보여주고는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진심은 언제나’라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게 과연 맞는 것일까. ‘영지’를 향한 ‘무늬’의 진심이 통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작중 단 한 번도 아련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등장인물들만이 ‘동감’을 느끼고, 관객은 작품에 전혀 ‘동감’할 수 없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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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야기는 내가 직접 만들어주지
여기.
잠들지 못하고, 밤마다 뺏벌을 걸어다니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박인순.
뺏벌이라 불리는 미군 기지촌에서 양공주로 살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은 동료들과 함께 기지촌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죽음을 많이 보았으며, 늘 죽음 가까이에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튼튼한 두 다리로 이 세상에 굳건히 서 있다.
밤새 뺏뻘을 돌아다니는 인순을 보며, 저승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죽어야 잠들 수 있겠군”
그러나 평생을 비가시적(서류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이중으로 은폐된) 존재로 살아온 인순에게는 저승으로 가는 길도 그리 간단치 못하다. 이승에서의 호적은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기에 저승 명부에도 그녀의 이름이 없으며, 저승길에 필요한 ‘그녀만의 이야기’ 또한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과거 여러 차례 문서와 미디어를 통해 기록되고 재현되어왔지만, 그 이야기들은 그녀의 진짜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 오래된 편견으로 만들어진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고자 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메인 포스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큐멘터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김동령 감독과 박경태 감독이 기지촌 여성인 박인순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두 감독은 이미 각자 작업한 <나의 부엉이(2003, 박경태)>, <아메리칸 엘리(2008, 김동령)>와 공동연출한 <거미의 땅>(2016)을 통해 박인순의 이야기를 담아온 바 있으며, 이 같은 작업을 통해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또한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감독들의 앞선 작업들과 분명한 차별점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다. 감독들이 이전까지는 ‘기지촌이란 무엇이며 기지촌 여성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탐구하였다면,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는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는 왜 살아남지 못했는가?’를 탐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동령 감독은 이 영화가 “기지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기지촌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만들고 그러나 어떻게 사라지는가에 관해 탐구하는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가상 캐릭터와 실존 인물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재현되는 이미지들 속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판명하는 일은 무의미한 행위일 것이다(심지어 이러한 판단은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 와해되고 중첩된 영화적 공간 속에서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이야기’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밤마다 뺏벌을 돌아다니는 '인순'(논픽션/실제인물)과 뺏벌의 유령들을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저승사자들'(픽션/허구의 캐릭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박인순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드는 과정을 중심으로 하지만, 그녀가 재현하는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오히려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 시작부터 영화는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되는 나레이션이 삽입된다. 그리고 구술 채록을 위해 인순을 찾아온 교수와 뺏벌을 자신의 작품 소재로 사용하고자 하는 대학원생이 등장하여, 그녀들의 삶이 어떻게 타인에 의해 이야기로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살해된 기지촌 여성의 기사 사진과 인순의 과거 인터뷰 장면을 통해 그녀들의 삶을 기술하는 미디어의 방식을 폭로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감독 자신이 (아마도 과거에) 핸디 카메라로 촬영하였던 다큐 영상들도 포함된다. 이러한 재현들은 모두 4:3의 답답한 화면비로 삽입되어, 인순을 비롯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떠한 프레임 속에 가두고 있음을 은유한다.
필자는 태어나서부터 출가를 선언한 27살 이전까지 의정부에서 살아왔다. 그 때문에 뺏벌이라는 공간의 지리적 위치 정보가 등장하기 전부터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곳이 의정부임을 금새 알아차렸다. 남들보다 먼저 알아보았음을 자랑하기 위해 나의 출신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고, 나 또한 영화 속 대학원생과 같은 마음, 즉 그녀들의 이야기를 이용해보려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났음을 고백하려 함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 속 대학원생 아해는 인순을 인터뷰하러 온 교수를 따라 뺏벌에 오게 되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인순과 뺏벌에 흥미를 갖게 된 아해는 홀로 인순을 찾아왔다가 인순이 집에 없자 폐허가 된 기지촌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작품 소재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기지촌의 여러 공간을 카메라로 담아내기도 하고, 기지촌 내 클럽에서 술잔과 벽에 붙은 기지촌 여성들의 사진을 몇 장 챙겨가기도 한다. 이러한 수집행위와 더불어 아해는 “이번 전시는 기억과 공간에 관한 작품으로 기획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작가가 이곳을 발견하기 전에 빨리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덧붙인다.
기지촌에서 작품의 소재를 물색하는 '아해'와 클럽 안에 산재한 '그녀들의 흔적'
여기서 필자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니, 나는 의정부에 30여년간 살면서 왜 저곳을 직접 들어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가... 내가 먼저 발견했으면 나는 지금쯤 엄청난 작가가 되어있었을 텐데...’라고. (참고로 필자는 의정부에 살 때까지만 해도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삶을 산 바 있다. 지금은 아님.)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라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깨달았을 때, 잠시 저런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넘어, 나 또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만들고, 변형시키고, 제거하는 행위에 동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부끄러움과 성찰의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박인순이 우리에게 보내는, 그리고 멋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대었던 세상을 향한 통쾌한 복수극일테니.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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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새로운 물결 <절해고도>
ⓒ 네이버 영화
정보
개요 드라마 | 한국 | 110분
감독 김미영
출연 박종환, 이연, 강경헌 등
줄거리
윤철(박종환)은 조각가이지만 주로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 생활을 유지한다.
그는 이혼한 아빠인데, 딸 지나(이연)는 아빠를 닮아 미술에 소질이 있지만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며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한 편 윤철은 영지(강경헌)라는 매력적인 여인을 만나 늦은 나이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절해고도>의 T.M.I
ⓒ 전주국제영화제
이연 배우가 극을 위해 한 노력
이연 배우는 극 중에서 맡은 '지나' 역을 실제로 삭발까지 감행했으며,
스님 역할을 위해 김미영 감독과 함께 템플 스테이를 했다고 합니다.
멧돼지
<절해고도> 후반에 산 속에서 멧돼지가 등장하며 이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원래 이 멧돼지와 함께 새끼 멧돼지도 넣으려고 했지만, 아쉽게 넣지 못했다고 한다.
"인간관계"
ⓒ 네이버 영화
영화의 제목이 이 영화를 정말 잘 표현해줬다고 생각한다. '절해고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절해고도의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서로 소통이 잘 안되고, 외로워 보이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설픈 관계 속에서 좌절을 하던 이들은 어느 순간 다시 그 관계 안에서 회복을 한다.
한 GV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이연 배우는 이러한 말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절해고도와 같이 될 때 진짜 관계가 시작되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 도맹은 중국에서 모르는 여행자에게 도움을 받고, 윤철을 모르는 낚시꾼이 구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절해고도와 같은 외딴 섬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누군가와 짧은 인연을 만들기도 하고,
기존의 관계를 회복하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영화에서 '관계'에 대해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하게 풀어내 많은 생각과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많은 관객이 여운에 젖어 있는 게 느껴졌다.
감독님이 주고자 한 깊은 메시지를 많은 배우가 진정성 있게 풀어나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영화였다.
"이런 분들께 추천 해드립니다"
-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이 있다?
- 예술 분야를 꿈꾸고 있거나 예술 분야 직업을 가지고 있다 ?
- 따뜻하고 잔잔한 영화를 찾고 있다?
복합적인 감정이 들며,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 <절해고도>.
영화 <절해고도>는 11월 개봉 예정이라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럼, 지금까지 영화 <절해고도>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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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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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2020)
* 이 리뷰는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정보
개봉: 2020.12.18
감독: 조지 C.울프
출연: 비올라 데이비스, 채드윅 보스만, 글린 터먼, 콜랜 도밍고, 마이클 포츠, 테일러 페이지 등
원작: 어거스트 윌슨의 희곡 <Ma Rainey's Black Bottom>
블루스의 어머니, 그리고 흑인문화
1927년, 미국 남부에서 '블루스의 어머니'로 통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마 레이니(비올라 데이비스)'는 음반 녹음을 위해 시카고의 녹음실을 찾는다. 그녀는 굉장히 거만하고, 괴팍하며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1세대 블루스 음악의 대가로서 상업적인 인기를 크게 누리고 있기에 백인 음반 제작자들마저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녀의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레비(채드윅 보스만)'는 자신의 음악에 엄청난 포부와 자신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마 레이니'는 물론, 밴드의 일원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작곡도 할 줄 알고, 트렌디한 편곡까지 가능한 능력캐임은 분명하다.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마 레이니', 그리고 '레비'를 비롯한 밴드의 일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음반 녹음을 하는 과정이 그려질 뿐 뚜렷한 사건 전개와 줄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한된 장소에서 짤막한 스토리가 이어질 뿐이지만, 인물들이 내뱉는 수많은 대사와 감정 표현들을 통해 당시 흑인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줄거리보단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다.
연극식 전개, 대화에 중점
앞서 언급했듯이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극을 관통하는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의 원작이 극작가 '어거스트 윌슨'이 쓴 동명의 연극이고, 영화 역시 원작의 연극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다. 마치 연극처럼 등장하는 공간도 녹음실과 연습실 단 두 곳 뿐이고, 인물들이 겪어온 과거의 삶이나 사건사고들이 단 하나의 회상 장면도 없이 오직 대사로만 풀어진다. 따라서 극의 재미가 상당히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사건의 공백을 인물들의 입체적인 연기만으로 충분히 채워나간다. 특히 관록의 연기력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비올라 데이비스'와 대사만으로 '레비'라는 인물의 아픈 역사를 가늠시켜주는 '채드윅 보스만'의 연기는 가히 탁월하다. 대사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연극을 관람하는 기분으로, 조금씩 극에 빠져들게 된다.
음악영화라고만 생각하면 오산
이 작품은 음악영화라고 생각하고 접근하기 쉽지만, 극을 감상해보면 음악은 그저 재료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극에 등장하는 블루스 음악은 음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노예해방이 이뤄졌음에도 백인들의 착취로부터 완연히 벗어나지 못한 미국의 흑인문화를 상징한다. 흑인문화에서 비롯된 블루스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백인 음반제작자들이 '마 레이니'를 비롯한 밴드의 재능을 착취하고, 차별을 일삼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인종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 레이니'의 태도다. 그녀는 오만방자하고 고집불통인 모습으로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며 눈쌀을 찌푸려지게 만들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다 이유가 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인 아티스트들과 차별받아왔던 오랜 세월, 자신을 아티스트가 아닌 노동력 착취의 대상 정도로만 바라보는 업계 백인 종사자들의 거슬리는 태도.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해왔던 그녀이기에 그녀의 확고한 신념과 거친 언행은 백인이라는 타자에 대한 증오와 자신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대변한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분노를 터뜨린 직후 그녀의 표정에서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자신이 돈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었을 테니까.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게 되면, 왠지 모르게 씁쓸해지고 덩달아 함께 분노하게 된다.
채드윅 보스만, 신들린 연기
"마 레이니"를 연기한 '비올라 데이비스'의 연기력도 훌륭하지만, 극의 에너지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은 '채드윅 보스만'이다.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벗어나지 않는 제한적인 공간 속에서 그는 가장 많은 대사를 소화하며 극을 진행하는데, 말과 표정만으로 서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그 어떠한 회상 장면 없이도 어린 시절 자신과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과 백인으로부터 받았던 수모의 역사를 설명하는 장면은 그의 연기만으로 당시 상황에서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는 제한적인 공간 내에서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팔색조 같은 매력적인 연기를 선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음악에 들뜬 재능 있는 청년부터 '듀시 메이(테일러 페이지)'에게 플러팅을 거는 매력적인 남성, 가족의 아픔에 분노하는 아들, 백인으로부터 받은 핍박에 열변을 토하는 저항자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캐릭터의 유형이 허름한 연습실 단 한 공간에서 모두 나타나는데, 단순히 그의 연기력 하나만으로 모든 캐릭터를 소화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채드윅 보스만'의 명연기에 상당 부분 기댄 채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괜히 어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이 그의 손에 쥐어진 게 아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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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히림의 전쟁 | '반지의 제왕'이라서 눈감는 안일함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주로서의 삶을 답답해하며 전사가 되고 싶어 하는 로한의 공주 '헤라'(가이아 와이즈). 어느 날, 그녀는 소꿈친구이자 웨스트마크 영주 '프레카'(숀 둘리)의 아들 '울프'(루크 파스콸리노)의 구혼을 받는다. 그러나 곤도르와 혼약을 맺은 로한의 왕 '헬름'(브라이언 콕스)도, 연심이 없었던 헤라도 구혼을 일언지하로 거절한다. 헬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낀 프레카는 결투를 청하고, 헬름은 결투 중 예기치 못하게 프레카를 죽이고 만다.
이에 격분하며 복수를 다짐하며 자취를 감췄던 울프. 그는 수년 뒤 로한의 적인 던랜드인을 이끌고 나타나 로한의 수도 에도라스를 습격한다. 헬름과 두 아들 ‘할레스’(벤자민 웨인라이트)와 ‘하마’(야즈단 카푸리)는 기마대 로히림과 함께 전투에 나서지만, 내부의 배신이 겹치면서 대패한다. 두 왕자를 모두 잃은 헬름과 헤라는 울프의 군세에 밀려 나팔 산성에 그대로 고립되고,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방도를 찾기 시작한다.
높고도 험한 <반지의 제왕>이라는 벽
영화팬들 사이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도는 말이 있다. 20년 전 <반지의 제왕> 포스터가 과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팩트였더라. 아직까지도 '21세기 최고의 판타지 영화'라는 마케팅 문구는 <반지의 제왕> 몫이기 때문. 피터 잭슨 본인이 만든 <호빗> 삼부작도, 아마존 프라임이 심혈을 기울인 <힘의 반지> 드라마도 10억 달러 흥행과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동시에 달성한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는 비견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판타지 영화 팬들은 <반지의 제왕>을 늘 그리워한다. 이 시리즈를 처음 본 전율을 언제 다시 느껴볼까 궁금해하면서. 이는 <반지의 제왕: 로히림의 전쟁>(이하 <로히림의 전쟁>)이 낯선 외양에도 불구하고 특히 궁금한 이유였다. '반지 전쟁' 250여 년 전 로한의 왕 헬름과 그의 딸 헤라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피터 잭슨과 앤디 서키스가 제작할 영화 <반지의 제왕: 골룸 사냥>에 앞서서 팬들을 가운데땅으로 초청했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약 한 달 늦게 공개된 결과물은 다소 실망스럽다. 원작에서는 이름조차 없었던 주인공 '헤라'의 서사는 평범하고, 그녀의 활약상을 보각한 각색은 부자연스럽다. 카미야마 켄지가 맡은 애니메이션 작화도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그러나 판타지와 <반지의 제왕>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로히림의 전쟁>을 싫어할 수 없다. 곳곳에 삽입된 <반지의 제왕>과의 연결고리를 찾다 보면 아쉬움이 절로 잊히기 때문이다.
에오윈을 넘지 못한 헤라
<로히림의 전쟁>의 성패는 헤라에게 달려 있었다. 애초에 원작에 없는 인물의 재조명이 기획 의도니까. 그런데 정작 헤라는 새로울 게 없다. 그녀는 공주로서의 삶을 답답해하며 전사가 되길 꿈꾼다. 공주로 태어났기에 다른 왕족과의 혼인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헤라는 모든 구혼을 거절한다. 대신 그저 말을 달리며 모험을 떠나는 삶을 꿈꾼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주 접한 말괄량이 공주가 바로 헤라다.
문제는 헤라와 똑같은 캐릭터가 이미 20년 전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등장했다는 것. 로한 제2왕조의 마지막 왕인 세오덴의 조카딸이자, 제3왕조의 첫 번째 왕 에오메르의 동생인 '에오윈'(미란다 오토)이 주인공이다. <로히림의 전쟁>에서 내레이션도 맡은 그녀는 전투에 나선 남자들을 기다리기만 하는 처지를 답답해하며 남몰래 무술을 연마했다. 심지어 왕명을 어긴 채 '펠레노르 평원의 전투'에 나서서 마술사왕까지 죽였다.
그런데 두 캐릭터가 겹쳐 보일수록 헤라는 에오윈에 비해 매력이 부족하다. 에오윈과 달리 헤라는 완성형 캐릭터이기 때문. 에오윈은 공주에서 전사로 변모해 가는 인물이었고, 관객도 그녀의 좌절과 성장을 함께 겪으면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헤라는 이미 완성된 전사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그녀의 감정선에 이입하기 어렵고, 그저 활약상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 헤라에게서 에오윈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는 이유다.
<반지의 제왕 2> 다시 보기
그 결과 <로히림의 전쟁>에서는 프리퀄 겸 스핀오프만의 매력이 돋보이지 않는다. 사실 영화가 다루는 사건 자체의 한계가 명확하다. 사건의 전개나 세부적인 전투 양상이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이하 <반지의 제왕 2>을 반복하기 때문. 아이센가드의 적, 수적 열세 상황에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는 주인공, 그 순간 헬름 협곡 위에서 등장하는 로히림 등.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적군이 오크가 아닌 인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헤라는 이처럼 <반지의 제왕 2>의 반복에 불과한 이야기에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원작 소설은 그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으니까. 그저 헬름에게 딸이 있었고, 그녀를 향한 울프의 구혼을 거절했다는 내용만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헤라를 어떤 캐릭터로 묘사하고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붙여주느냐에 따라 <로히림의 전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극 중 헤라는 기존 캐릭터들의 조각모음에 불과하다. 그녀는 그저 세오덴처럼 농성하고, 아라고른처럼 최후의 돌격을 결심하고, 레골라스처럼 숱한 적군을 무찌르고, 간달프처럼 지원군을 끌고 온다. 기존에 못 본 역할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여러 캐릭터가 맡았던 역할을 혼자 해낼 뿐이다. 결국 <로히림의 전쟁>이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반지의 제왕 2>를 일본풍 애니메이션으로 그린 것에 불과해 보인다.
실수는 반복된다
오히려 헤라의 존재가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는 구간도 적지 않다. 기존 서사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헤라의 활약상을 부각하려다가 전개가 꼬이기 시작한다.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헤라의 활약상을 덧댄 흔적이 가려지지 않은 셈이다. 이는 <호빗> 3부작에서 소설에 없던 오리지널 캐릭터, '타우리엘'이 중심이 된 로맨스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의 흐름이 끊겼던 문제점과도 유사하다.
특히 헤라가 등장할 때마다 전투 시퀀스의 흐름이 꼬이는 경우가 잦다. 아이센 여울목에서 펼쳐진 전투와 수도 에도라스의 함락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시퀀스에서는 크게 세 주체가 등장한다. 헬름과 군대는 전투를 펼치고, 울프와 그의 본대는 헬름의 군을 우회해 수도 에도라스로 진격하고, 헤라는 울프의 공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대피시키며 수도를 방어한다.
그런데 전투가 진행될수록, 특히 헤라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시점부터 세 주체의 행적은 꼬이기 시작한다. 분명 여울목에서 부왕 옆에서 전투 중이었던 헬라스가 에도라스로 먼저 진군한 울프를 갑자기 앞지르는 식이다. 본편에서 엘프인 레골라스가 간신히 대적한 무마킬을 헤라가 혼자 죽이는 과장된 묘사도 시리즈의 일관성을 저해한다. 헬름 협곡에서 헤라와 그녀의 시녀 올윈이 숱한 적군을 대적하는 전개도 같은 맥락에서 의아하다.
프리퀄을 지탱하는 각색과 작화
안일하게 전편의 영광에 기댄 것 같은 헤라 캐릭터의 만듦새는 군데군데 몰입도를 높인 장점과 대조되기에 더욱 아쉽다. 각색한 울프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원작에서 그는 아버지를 죽인 헬름을 향한 복수심 때문에 로한을 침략한다. 반면에 영화는 울프의 동기를 더 구체화한다. 그가 헤라에게 품은 연심이 집착으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덕분에 승전하기 직전 그가 헤라를 놓지 못해서 패배하는 전개도 그저 허망하지는 않다.
헬름의 아들 하마의 최후를 변경한 각색도 인상적이다. 원작에 그는 나팔 산성 앞에 주둔한 울프의 군대를 기습하다가 사망한 반면, 영화에서는 울프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헬름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한다. 이는 헬름의 좌절감, 광증, 복수심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 헬름 협곡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이유를 알려주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처럼 <로히림의 전쟁>은 원작이 간략히 다룬 감성적인 측면을 깊이 파고든다.
각색 외에는 작화가 놀랍다. 카미야마 켄지가 본래 배경을 그리는 미술 스태프 출신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경에서 보여주는 가운데땅 풍경은 그림인지 실사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밀하다. 일례로 오프닝의 경우 평원에서 말을 타는 헤라와 그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순간적으로 실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시를 유발한다. 나팔 산성의 전경을 비추는 순간도 실사 영화 부럽지 않은 장엄함이 느껴진다.
다만 전투 시퀀스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로히림의 전쟁'이라는 부제만 보면 실사영화 속 로한의 기병대의 웅장한 돌격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림만으로 실사영화 수준의 장대한 전투 시퀀스를 보여주기에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나마 보름달을 배경으로 프레알라프가 이끌고 온 지원군이 울프의 군대를 공격하는 장면만큼은 명장면으로 뽑기에 손색없다.
가운데땅은 여전히 반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히림의 전쟁>에는 <반지의 제왕> 팬이라면 아쉬운 대목이 눈에 밟혀도 모른 척 넘어가 줄 수밖에 없는 포인트가 적지 않다. 사루만의 재등장 때는 작고한 크리스토퍼 리가 <호빗> 촬영 당시 더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헤라가 반지만 찾는 모르도르의 오크들을 만나고, 그 순간을 궁금해하는 간달프와 헤라가 연락을 취하는 대목 또한 '반지 전쟁'과의 연결고리를 암시하기에 흥미롭다.
전반적으로는 <호빗: 다섯 군대 전투>와 유사하다. <반지의 제왕>에 못 미치는 완성도가 아쉽지만, 아라고른과 레골라스의 우정을 암시하는 대목이나 노년의 빌보 배긴스를 연기한 이안 홈이 출연한 순간에 결국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사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뉴라인 시네마 로고가 등장하고 로한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올 때부터 예견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Acceptable 무난함
'반지의 제왕' 향이 소량 첨가된 판타지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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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웃브레이크>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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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순간, 당신 가족의 목숨마저 앗아간다!유례 없는 최악의 바이러스가 발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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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감염병 전문의이자 보건 응급연구소 소장 ‘앤 마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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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의 끝, 그곳에 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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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으로 요양을 위해 내려온 상류층 부인 ‘샬럿’을 만난다.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거친 해안에서 화석을 찾으며, 그렇게 기적처럼 서로를 발견하고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신의 마음에 각인될 강렬한 러브 스토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