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2-25 17:07:15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 감흥 없는 번역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광풍에도 불구하고 농구와 복싱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2학년 '구진우'(진영). 어느 날, 그는 수업 시간에 장난을 치다가 걸린 나머지 벌을 받게 된다. 모범생 '오선아'(다현) 앞자리에 앉아서 특별 감시를 받으라는 것. 선아를 짝사랑하는 친구들은 진우를 부러워하지만,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진우는 그저 벌을 받아야 해서 불만스러워한다. 선아 역시 시끄럽기만 한 그의 존재를 불편해한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둘은 점차 가까워진다. 선아가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자, 진우가 자기 책을 선뜻 빌려주고 대신 벌을 받은 것. 이 사건을 시작으로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는 선아와 진우. 선아는 진우에게 공부를 알려주고, 진우는 특유의 멋모를 자신감으로 선아를 웃게 만들면서 감정을 쌓아 나간다. 하지만 서로에게 끌리는 속마음과 달리 그들은 자기 마음을 좀처럼 속 시원하게 표현하지 못한 채 대학생이 된다.
리메이크 대신 번역을 선택하다
국내 영화 시장에서 중화권의 청춘 로맨스 영화는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100만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해도, 수십만 명의 관객을 꾸준히 동원하는 흥행력은 보장되는 장르니까. 2010년대에 개봉한 <장난스런 키스>, <나의 소녀시대> 모두 4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은 바 있다. 2023년 여름에 재개봉한 <여름날 우리> 역시 40만 명을 돌파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팬데믹 이후 침체기가 길어지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서는 이처럼 꾸준한 흥행력을 과시하는 중화권 청춘 로맨스가 돌파구로 여겨졌던 모양새다. 비슷한 시기에 과거 인기를 끌었던 대만 청춘 로맨스 영화 세 편이 일제히 리메이크됐기 때문. 작년에 개봉한 <청설>과 설날 연휴에 공개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각각 8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기록했다.
문제는 3번 타자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하 <그 시절>)다. 대만 영화 리메이크 열풍을 이어갈 매력이 안 느껴진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 시절>은 리메이크 대신 번역을 선택했기 때문. 앞선 두 영화는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따르되 플롯이나 감성을 차별화했다. 그에 반해 <그 시절>은 배경만 한국으로 바꾸는 데서 그쳤다. 그러다 보니 원작을 이미 본 관객으로서는 굳이 번역본을 읽을 필요성을 못 느낄 법하다.
그 시절의 소녀가 뇌리에 각인될 두 가지 조건
<그 시절> 원작을 본 관객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결혼식에서 커징텅이 션자이의 남편에게 키스할 때 스쳐 지나가는 평행 세계 시퀀스다. 그들이 연애할 때 마주한 몇 차례 분기점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다른 선택을 내리면 달라졌을 현재와 미래를 파노라마로 펼쳐 보여주는 순간의 임팩트가 핵심이다. <라라랜드>에서 남남이 된 세바스찬과 미아가 과거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결말과 유사하다.
이처럼 클라이맥스가 관객 뇌리에 각인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예뻐야 한다. 예쁜 대상은 다를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의 풋사랑이 귀여울 수도 있고, 연기와 재즈에 몰입하는 두 주인공의 열정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10년이 지난 후에도 두 주인공이 그 시기를 회상하면 다시 사랑에 빠질 정도로 강렬하게 예쁜 게 중요하다.
그다음으로는 이별에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다르게 말하면 명백한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함께 시간을 보낸 과거가 너무나도 찬란하고 아름다운 나머지, 그 시절로 돌아가거나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 싶더라도 그럴 수 없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제시되어야 한다. 과거는 과거에 묻어두어야만 할 때, 즉 가능성이 현실로 될 수 없는 한계와 제약이 있을 때 평행 세계는 간절한 만큼 강렬하니까.
예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하지만 <그 시절> 리메이크가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지 못했다. 첫 번째 조건은 절반 정도만 갖췄다. 진우와 선아의 사랑이 시작되는 배경과 분위기는 예쁘다. 2000년대 배경의 고등학교 풍경은 관객에게 자기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교실이나 운동장처럼 한국적 배경에 맞게 바뀐 장소는 필연적으로 대만 원작보다 흡입력이 뛰어나다. 별다른 노력이 없어도 당시의 향취가 주는 아련함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작 그 안에서 피어나는 풋사랑이 부자연스럽다는 것. 두 주인공의 톤이 묘하게 어긋나 있다. 진우는 너무 가볍고 동적이며, 선아는 지나치게 정적이다. 그 결과 진우에게 '그 시절의 소녀'여야 할 선아의 매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공부할 생각이 아예 없는 진우와 모범생 선아가 처음부터 잘 어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두 주인공의 톤이 같은 층에서 만나지 못하니까 문제다.
이는 영화가 진우 시점에서 전개되는 데서 기인한다. 진우 관점에서의 사랑 이야기이다 보니 영화 분위기는 자연히 그의 감정선에 따라 달라진다. 그 대가로 선아의 심리 묘사가 부족할 수밖에 없고, 그 공백으로 인해 선아와 진우의 연결점도 약화다. 그렇다고 <그 시절>이 데뷔작인 다현 개인의 역량으로 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 결과 두 주인공의 로맨스는 두고두고 그리울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끝내 못 보여준다.
명백한 이유 없는 이별
두 주인공의 이별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유치함을 못 견디겠다는 선아의 말에 내포된 본 이유를 못 보여줬기 때문. 선아는 진우에게 꿈이 뭐냐고 묻고, 진우는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답한다. 실제로도 그는 학생들을 함부로 다니는 교사에게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고, 2년만 공부해서 인서울 대학교에 입학하며 자기 포부를 증명해 낸다. 이에 선아는 진우에게 반한다. 그녀에게 꿈이란 삶의 지향점이었고, 그에게는 꿈이 있었으니까.
그다음이 문제다. 대학에 들어간 진우는 선아가 말리는 일만 골라 한다.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고, 취객과도 싸운다. 이에 선아는 진우에게 유치하다며 이별을 고한다. 그녀에게 유치함이란 꿈이 없거나, 자신과 맞지 않는 꿈을 꾼다는 표현이었던 것. 하지만 상술했듯이 극 중 선아의 감정선이 잘 드러나지 않다 보니 유치함의 속뜻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 결과 이별은 가슴 아프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분기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에 더해 갈림길의 순간도 인상적이지 않다. 이별로 인한 진우의 흉터가 진할수록 클라이맥스에서 '그때 그랬을걸'이라는 회한의 파도가 더 강하게 밀려올 수 있는데, 정작 갈림길마다 분위기를 가볍게 전환하기 때문. 남산 데이트 직후 격투기 동아리 장면, 이별 후 입대로 이어지는 흐름이 대표적이다. 진우의 불안함과 아픔이 전해지기도 전에 유머로 상황을 무마한다. 그 대가로 파노라마 장면의 임팩트가 좀처럼 살지 못한다.
리메이크는 번역이 아닌데
사실 리메이크는 원작을 뛰어넘기 힘들다. 특히 추억이라는 최고의 아군이 함께하는 이상, 원작의 첫인상에 범접하기가 특히 어렵다. 오래전 작품일수록 관객은 그 영화의 장단점, 완성도보다는 그 영화가 남긴 추억을 간직하기 때문. 따라서 리메이크는 원작이 남긴 추억을 존중하되, 원작과는 또 다른 메시지나 의도가 담긴 포인트를 선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작 대신 리메이크를 보게 하는 소구력을 갖출 수 없다.
이 대목에 있어서 <그 시절>은 다소 안일해 보인다. 공간, 시대, 설정만 한국적으로 바꿨을 뿐, 알맹이는 원작 영화의 것을 고스란히 따왔다. 재구성 대신 번역만 한 셈이다. 원작을 재구성한 다른 리메이크 작품들과 비교하면 방향성 문제가 더 도드라진다. 일례로 <청설>만 하더라도 원작의 소재나 인물 관계는 유지하면서도 여름이라는 계절감을 강조하는 각색을 통해 원작과의 비교를 영리하게 피할 수 있는 작품이 됐다.
하지만 <그 시절>은 추억을 되살리고, 그 추억에 흠뻑 빠지게 만드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외에는 굳이 리메이크 영화를 보면서 예전 감성을 찾아야 하는 차별화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한국판 특별히 모난 구석이 없지만, 되려 그래서 특별한 것 없는 하이틴 로맨스로 귀결됐다.
Poor 형편없음
원작을 읽은 이상 사족인 번역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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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 I want to know your parents, 2022
2017년. '디즈니의 20세기 폭스 인수'가 최종 결정되며 한국 영화의 투자도 자연스레, 철회되었다.
2016년 <곡성>을 제외하고는 흥행작이 없었으나 <황해, 2010>을 비롯해 <런닝맨 - 슬로우 비디오 - 나의 절친 악당들 - 대립군>까지 만든 것을 보면, 외국 회사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었으니 아쉬움이 컸다.
그렇게, 마지막 작품으로 예고되었던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개봉이 취소되었다.이런 이유에는 주연 배우 "오달수"분의 "미투"였고 "재촬영"까지 고려되었으나 결국, 이를 포기했다. (이미, 사업에서 손을 떼었으니...)
이후 "김지훈"감독은 작년 <싱크홀, 2021>로 <타워, 2012> 이후 9년 만에 복귀했으며, 이 작품으로 처음으로 합을 맞춘 "설경구 - 천우희"는 나중에 찍은 <우상, 2019>이 개봉하기도 했다.
아무튼, "신세계"의 자회사 "마인드 마크"에 이관된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4년 만에 극장에 걸게 되었다.1. 그가 쭉 만들어왔던 작품
앞서 말한 <싱크홀, 2021>과 <타워, 2012>말고도, <7광구, 2011>와 <화려한 휴가, 2007>까지 "김지훈"감독은 큰 규모의 영화들을 만들어 온 연출가이다.
무엇보다 해당 영화들은 재난 및 사고들을 소재로 만든 작품들로 이번 작품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제작 규모는 작을지언정, 그가 만들어왔던 영화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점에서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가 '보여줄 사고는 어떨지?'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공존했다.해당 작품은 한 아이가 "학교폭력"에 의해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부모들로 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소위, "고구마"와 같은 전개에 많은 걱정도 있을 텐데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은 가해자들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이에 답답함은 더 배가 되지만, 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몰입보다 "제3의 입장"을 취하게 만들어 객관성을 갖추게 한다.2. 늑대는 했지만, 부모님은 못했다.
영화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2013>도 적법한 행위를 저지르는 캐릭터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해당 작품에서는 "데드풀"처럼 "제4의 벽"을 깨는 방법까지 추가해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는데, 이로써 얻어 가는 것이 뭘까?
'그들보다는 낫다'라는 "도덕적 우월감"이 우선되겠지만, 위법한 행동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배덕감"은 오묘한 재미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니 부모의 얼굴이 보고 싶다>의 자세는 두 번째까지 이어지지 않는다.이런 이유에는 해당 작품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담임교사 "정욱"과 피해자 "건우 엄마"의 시점에 있다.
앞서 가해자들에게는 관객들의 몰입보다 "제3의 입장"으로 객관성을 갖추게 하는 것과 달리, 몰입시키려는 카메라를 보여줘 논리보단 감정을 먼저 읽게 만드는 일정하지 못한 설명은 답답함으로 연결된다.
이런 가운데, 영화의 설명력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한다.3. 아쉬운 설명들과 장면들
여기, 설명의 차이 외에도 해당 가해자들의 부모가 "병원 이사장 - 변호사 - 전직 경찰청장 - 교사"와 다르게 피해자의 부모는 "사회 배려자"로 소개된다.
그러면서, 이들의 논리는 '약자는 무조건 선(善)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惡)하다'는 "언더도그마"로 보인다.
물론,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관객의 입장에선 그들의 행동에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척점에 서있는 입장에도 우는 것이 전부일만큼 할애되지 못한 분량과 설명력은 아쉬움을 넘어 안타까운 현 모습이 아닌가?결국. 영화는 가장 눈살이 찌푸리게 만드는 "학교폭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해당 작품의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불가피한 부분이겠지만, 고통을 가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설명이 설명으로 쌓여질까?
앞서 말했듯이 눈살이 찌푸려지듯이 불쾌한 감정부터 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장면들이다.
이미, 영화의 첫 시작에서 물에 건져낸 "건우"와 병상에 누워 관들과 몸에 있는 상흔만으로도 유추도 가능한데도 말이다. - 너무 친절하다.4.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
밝은 거울과 정지된 물이라는 뜻으로,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
명경지수(明鏡止水), 한자사전앞서 "건우"를 건져올린 강부터 "조정"과 '다 같은 배를 탔다'라는 비유까지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 물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재밌는 건 "물"은 식물들을 성장시키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 요소임에도 "공무도하가"와 "스틱스 강" 등의 일부 문학과 설화에선 "죽음"을 뜻한다.여기, '씨도둑은 못한다'라는 어른들의 말은 점점 닮아가는 외면도 있지만 자식들이 보여주는 행동에도 있다.
이런 이유에는 자녀들은 부모들을 보면서 그 행동을 따라하기 때문이다.
결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마지막 거울과 같은 뿌연 물속에서 "호창"이 바라본 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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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소리없이 나빌레라
음악의 정의는 무엇일까. 음악은 정상 청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청각장애인 무용수 고아라는청음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지만 직업적인 특성으로 인해, ‘듣기를 거부하‘기 보다는 ‘듣고자 노력하는’ 위치에 있다. 고도 난청을 가진 그에게 소리의 울림은 미약하게 다가오고, 음악은 춤을 추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로 여겨질 뿐이다.
고아라 무용수는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창피를 당한 후로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다던 그는 아기를 재우기 위해, 아기와 함께 놀기 위해, 다시 노래를 시작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청력의 범주는 다양하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음악의 범주는 다양하다. 고아라 무용수는 마이크를 들고, 헤드셋을 낀 채로 그의 청력에 음악처럼 들리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춤을 출 때 발로 바닥을쓰는 소리,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그가 마이크를 통해 전하는 모든 일상 속 소리들은 음악적 리듬을 가진다. 관객은 고아라 무용수의 삶을 가차이서 조망하고 긴밀하게 소통하며, 그가 표현하는 몸짓에 따른 음악을 상상하게 된다.
고아라 무용수가 준비한 음악은 기존의 정상성의 틀을 깬다. 리듬감을 가지는 단순한 숨 소리에 맞추어그의 온몸은 유연하게 일렁인다. 인간 본연의 소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호흡의 박자는 그가 선택한 음악이다.
춤을 추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던 음악을 새로이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그는 한 단계 성장한다. 음악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정상 청력이 필요하지 않다. 고아라 무용수는 청각장애라는 정체성을 간직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재해석하고, 주체로서 기능한다.
질서 없는 소리가 나열되며 혼란을 주었던 오프닝 시퀀스와는 대조적인 엔딩에서, 온전한 자신만의 음악을 발견한 그의 몸짓은 보다 찬란히 빛난다. 고아라 무용수가 찾은 음악은 그를 한계짓는 것이 아닌, 그의 존재의 가치를 부각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유랑하듯 흐르는 움직임에 청력의 정도는 중요치 않다. 해당 무용은 그와 관객의 감각을 하나되게 묶는다. 함께하는 감각은 공감을 통해 예술의 가치를 입증한다.
2024.09.27 (금) 20:00 메가박스 킨텍스 7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 : 09월 26일 - 10월 02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크리에이터 기자단 씨네랩 정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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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수없이 추락하는 사람들, 붙잡지 않는 사람들?
숨 막히는 일상,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지지 않는 현재. 그보다 더 막막한 것이 또 있을까. 끝없는 굴레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늪에서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라우라 카헤이라 감독의 데뷔작 <추락에 대하여>는 이민 노동자의 현실과 시스템의 사각지대에서 위태위태하게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부문에서 상영되는 작품으로 '독립적이고 도발적인, 새로운 시선을 드러내는 영화'에 걸맞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정보
라우라 카헤이라
Laura CARREIRA
United Kingdom, Portugal
2024
104min
DCP
Color
Fiction
12세 이상 관람가
Korean Premiere시놉시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물류창고에서 피커로 일하는 포르투갈 이민자 오로라의 이야기. 광대한 유통 센터와 고립된 자신의 침실 사이 굴레에 갇힌 오로라는 소외감과 외로움으로부터 자기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떤 기회든 잡으려 한다.
영화리뷰
오로라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물류창고에서 피커로 일한다. *피커(picker)란 고객의 주문에 따라 창고에서 상품을 찾아내는 작업자를 뜻한다. 우수사원으로 뽑힐 정도로 성실하지만 늘 빠듯한 생활의 연속이다. 집세, 생활비, 유류비를 다 내고 나면 남은 돈이 없어 잼에 빵을 발라 먹거나 그마저도 없어 과자를 '훔쳐' 먹을 때도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 되는 건 휴대폰 화면 속의 수많은 동영상이다.
위태위태하게 일상을 유지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애써보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이끌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물러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이 순간, 오로라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오로라는 수많은 노동자 중 한 명이다. 실제로도 많은 청년들이 생활고로 인해 목숨을 끊는 일이 다수 발생했고 며칠 전, 함께 대화를 나누던 사람의 부고 소식을 듣기도 했다. 그 후, 오로라는 고객이 주문한 노끈을 발견하여 상품 바코드를 조작해 노끈 대신 베이킹 책을 발송하기도 한다. 절대적인 '을'로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락을 막아보려 하지만 그녀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조차도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고질적인 사회적인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영화 속의 '오로라'는 끝없이 추락하지만 올라갈 길이 없어 막막한 모습이다. 보는 이 마저도 답답할 만큼 희망도, 해결책도 마련되지 않는다.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의 어려움과 더불어 현대인의 단절의 모습을 깊이 있게 담아냈지만, 구체화되지 않는 비극에 조금은 지루해졌다. 어떠한 방식으로 헤쳐나가야 할지, 또 어떻게 힘을 합쳐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다루어지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그럼에도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노동자의 하루, 그리고 무기력함과 고립으로 물들어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잘 다루어내고 있어 인상 깊었다. 돈도 없고, 무기력한 현대인. 그 단어는 참으로 익숙하다. 벼랑 끝에 내몰려 '추락'의 선택에 내몰린 이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현실적이어서 씁쓸해진다. 벌면 벌수록 마이너스가 되어가는 통장,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구조적인 가난은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정서적 고립. 소통에서 고립되며 스마트폰 속의 쇼츠 그리고 릴스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반복되는 노동과 벗어날 수 없는 가난, 고립과 무기력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벼랑 끝에 서있다. 그래서 더는 누군가가 추락의 선택에 내몰리지 않도록 더 이상 외면하지 않아야 하며, 근본적인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영스케줄
2025.05.0110:00
CGV 전주고사 2관
2025.05.02
20:00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2025.05.03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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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티아스와 막심 (2019), 사랑 앞에 무의미한 당위적 개연성
마티아스와 막심 (2019)
“사랑 앞에 무의미한 당위적 개연성”
▶ 자비에 돌란의 10년, <마티아스와 막심>
<아이 킬드 마이 마더>를 시작으로 <하트비트>, <로랜스 애니웨이>, <마미>, <단지 세상의 끝> 등으로 이어진 '자비에 돌란' 감독의 필모그래미는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을 채우게 되었고, 그 10년이라는 시간을 <마티아스와 막심>을 통해 마무리 짓는다. 돌란 감독과 가장 온전히 닮아 있는 작품이라고 하며 앞으로는 감독보다는 배우로서의 활동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고 밝힌 만큼 그가 걸어온 필모그래피의 역사를 담담하게 정리하려는 느낌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칸의 총아'라는 호칭을 얻은 이후 스타 감독에서 내리막길을 타는 듯 했지만, <마티아스와 막심>은 그가 최근에 내놓은 작품들 중에서는 그의 강점이 제법 잘 드러난 작품이다. 돌란만이 갖고 있는 연출적 매력에는 남들이 낼 수 없는 뚜렷한 무언가의 개성이 분명 촘촘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꼈다.
▶ 친구와의 키스,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캐나다 퀘백에서 어려서부터 함께 나고 자란 '마티아스(가브리엘 달메이다 프레이타스)'와 '막심(자비에 돌란)',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무리 중 한 명의 별장에 모여 파티와도 같은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친구의 여동생이 이들에게 자신이 촬영하는 영화에 배우로 출연해줄 것을 부탁한다. 별다른 고민없이 출연에 응한 막심과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반강제로 끌려온 마티아스. 별다른 생각 없이 카메라를 마주하고 앉는데, 두 사람이 연기해야 하는 장면은 진한 키스신이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키스신을 연기하지만, 이 찰나의 순간이 두 사람의 관계를 요동치게 만든다.
▶ 사랑에 빠진 이유가 뭔데?!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오며 깊은 우정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단 한 순간의 키스 장면으로 인해 관계가 완전히 뒤틀린다. 특히나 마티아스는 막심과의 키스 이후 그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이상하리만큼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한다. 아마 키스를 하면서 막심을 대상으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꼈고, 이러한 경험이 처음이었던 그에겐 상당히 큰 혼란으로 다가왔던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왜 마티아스가 막심에게 그러한 감정을 느낀 것인지, 왜 친구를 사랑하게 된 것인지와 같은 당위적 측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두 인물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고 나타나는지 그 감정의 흐름과 과정 자체를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많은 퀴어영화들은 주인공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거나, 동성에게 사랑을 느낄 때, 왜 그렇게 된 것인지 그 '이유'에 유독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이야기 전개가 쉽고, 관객을 이해시키기에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란은 이러한 쉬운 길을 지양하고 이성애건, 동성애건 사랑은 형언할 수 있는 이유만으로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개연성을 따지지 말라고 주장한다.
▶ 부족한 빌드업, 답답한 구조
잘 만든 퀴어영화는 굳이 '왜'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조명하지 않아도,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의 감정선이나 스토리의 전개를 이해시키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마티아스와 막심>은 인물들의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한 빌드업 과정이 너무나 부실하고 구조적으로 답답한 전개를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이 '어떻게'를 조명했음에도 관객들은 '왜'를 자꾸만 궁금해 하게 된다.
키스 이후 마티아스가 감정의 요동을 크게 느끼게 되면서 마티아스와 막심이 함께 붙는 씬은 후반부 절정에 이르기 전까지 매우 적게 등장한다. 즉, 이 작품을 이끌어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을 철저하게 분리시켜놓고 전개를 해나간다는 셈이다. 이는 혼란을 느낀 마티아스가 막심과 거리를 두게 될수록 오히려 그에 대한 마음이 더 커진다는 심리적 아이러니함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인물의 지나친 거리두기는 설령 이것이 의도된 장치였을지언정 답답한 구조에 지나지 않는다. 두 인물이 분리된 채로 관객들은 따로 노는 듯한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려다 보니 영 맥이 제대로 안 잡히고, 이들의 감정에 공감하기조차 어렵다. 솔직히 극 중반부에는 두 인물이 서로 다른 영화에 출연한다고 느꼈을 정도로 분리감이 극에 달한다.
▶ 절제를 습득한 돌란
장점보다는 단점이 좀 더 크게 드러나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돌란의 발전을 찾을 수는 있다. 기존의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감정이 과하면 과했지, 절제와는 대부분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마티아스와 막심>은 감정적 과잉보다는 절제미가 유독 강하게 느껴진다. 물론, 주인공과 어머니의 갈등적 요소,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감성적인 영상과 음악의 결합과 같은 돌란의 요소들을 여전히 반영하고는 있다. 하지만, 사랑과 우정에서 비롯된 관계의 미학을 다루는 데에 있어 굉장히 조심스러운 슬로우 템포로 다가간다. 격동의 감정을 맞이한 인물들의 심리 상태 역시 특이점 이상으로 치솟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티아스와 막심>은 한층 편안해진 돌란의 모습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실제로 극중 등장하는 막심의 친구들은 돌란의 고향 친구들이고, 온전히 자기 자신과 가장 닮은 작품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기존 작품들보다는 훨씬 담백하게 접근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의 연출적 매력인 폭발적 감정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나 임팩트는 없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요인이 불필요했을 것 같다. 절제를 택했기 때문에 분리된 구조 속에서도 그나마 두 인물의 복합적인 감정을 천천히 따라갈 수는 있었다. 절제를 습득하고, 안정감을 얻었다는 점에서 결국 10년동안 돌란 감독 스스로도 정서적으로 성장을 거듭했다는 것을 보여준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겔겔겔스타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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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적 세계에서 몸부림치는 실존, <파닥파닥>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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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부터 이어집니다.)
그 고등어가 재수 없는 이유
<장면 5>
“빨리 우리들처럼 죽은 척 해. 이렇게 해야 살 수 있어요.”
수조 속 물고기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가장하는 것이다. 살아있을수록, 더 싱싱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죽은 척하기.’ 그들은 배를 까뒤집고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겨우겨우 삶을 부지한다. <장면 5>, 고등어의 1인칭 시점 카메라로 본 수조 속 물고기들의 생존법은 기괴하다. 고등어가 노래한 OST ‘악몽’의 가사 일부는 아래와 같다.
“그들이 나를 데려간 그곳엔
많은 이들이 죽어있었어, 아니 살아있었어.”
그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철학자 야스퍼스로 바라본 벗어날 수 없는 수조 안, 그리고 곧이어 들이닥칠 죽음의 예고는 수조 안 생선들이 맞닥뜨린 한계상황이다. 죽음의 순간을 잠시 미루는 것에 불과한 ‘죽은 척하기’ 생존법으로는 그들을 둘러싼 한계상황을 근본적으로 타파할 수 없다. 이 한계상황에서의 대처방식을 두고 고등어와 다른 수조 속 물고기들은 사사건건 부딪힌다. 야스퍼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수조 속 물고기들과 고등어가 추구하려는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당장의 배고픔과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한 수조 속 물고기들. 이들의 생존법은 오히려 죽음을 안일하게 망각하는 회피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상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안주하는, 비(非)본래적인 삶에 그쳐 있는 것이다.
“살아남으면, 그 다음은요?”
이들에게는 다음이 없다. 잠깐 죽음을 피해봤자 그뿐. 그들은 여전히 수조라는 절망적인 한계상황에 머물러 있다.
반면 수조를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무작정 몸을 불사르는 고등어, 고등어에게 바다가 아닌 수조 속에서의 삶은 다른 의미로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에게 유리벽에 가로막혀 바다를 포기하고 죽은 척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파닥파닥’에서 고등어가 그토록 염원하는 바다는 자유이자, 본래적 삶이자,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실존 그 자체를 상징한다. 고등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실존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삶의 본래적인 가치를 수조 속 물고기들에게도 계몽시키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계몽이라는 작업은 마음만큼 쉽지 않다. 당장 눈앞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인 물고기들에게 고등어는 언제나 붕 뜬소리만 해대는 눈엣가시다. 자꾸만 이룰 수 없는 목표에 몰두하고 도전하려는 고등어의 모습이 다른 물고기들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비본래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만 매몰된 그들에게, 고등어가 본래적 삶의 가치를 계몽하려는 시도는 안주하고 있던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채찍질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장면 6>
그러나 이토록 바다를 갈망하던 고등어의 희망찬 탈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말끔히 손질되어 접시에 오른 고등어. <장면 6>의 카메라 앵글은 인간의 시점에서 여러 밑반찬과 함께 식탁에 오른 고등어를 내려다보며 그가 더 이상 실존을 외치던 존재 ‘고등어’가 아닌, 그저 ‘고등어 회’라는 섭취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비극의 정서를 심화시킨다. OST ‘용서해요’ 뮤지컬 시퀀스 직후, 음악 없이 식탁에 접시를 올리는 ‘달그락’ 효과음으로 시작되는 <장면 6>은 직전의 시퀀스에서 고등어와 올드넙치가 죽음의 순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장면과 대조적으로 매정한 현실의 상황을 부각시킨다. 인간의 기호와 즉흥적인 선택으로 뒤바뀐 올드넙치와 고등어의 생사의 갈림길. 장난삼아 그 입에 담배를 물리는 남자는 눈앞의 생선이 얼마나 자유를 부르짖으며 몸부림치다 죽어버렸는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강압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고등어의 죽음은 진정한 삶을 향한 실존의 추구가 종종 극복할 수 없는 숙명과 권력 아래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래도 몸부림쳐야 삶이지
영화 ‘파닥파닥’은 횟집 수조 속 생선이라는 독특한 화자의 시선을 빌려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불평등, 그리고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를 갈망하던 고등어의 죽음을 통해 영화 ‘파닥파닥’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제 포기하고, 저항하지 말고, 늘 그랬듯 수조 속에서의 삶에 안주하라는 회유일까?
<장면 7> <장면 8>
여기서 영화의 마지막, 올드넙치의 탈출이 가지는 상징성에 주목해야 한다. 올드넙치의 탈출에서 ‘모형 칼’은 중요한 모티프다. <장면 7>에서 인간 병사 장식품의 손에 들려 있던 모형 칼은 저항하는 고등어를 찌르며 상처 입힌다. 이는 인간의 막강한 권력이자, 실존의 추구를 좌절시키려는 불평등한 현실의 제약이다. 그러나 고등어의 몸에 박힌 칼은 이제껏 죽음을 회피하며 숨기에 급급했던 올드넙치에게로 전달된다. 탈출하기 직전 인간의 손아귀에 붙잡힌 절망적인 상황, <장면 8>에서 올드넙치는 숨기고 있던 모형 칼을 인간을 향해 날리며 마침내 자유를 손에 얻는다. 고등어로부터 전해져 올드넙치를 바다로 이끌어준 모형 칼은 곧 자유를 향한 갈망이자 저항의 상징이다. 작은 모형 칼은 결코 인간을 해칠 수 있는 대단한 도구가 못 된다. 생선에게 인간은 언제나 압도적인 포식자이자 뒤집을 수 없는 서열. 그럼에도 그는 고등어로부터 이어진 그 칼을 인간에게 겨눔으로써 비로소 죽음의 수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인간과 생선의 서열이 뒤바뀌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불평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저항을 통해 올드넙치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올드넙치의 삶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변화했다는 것이다.
“운명이 짓궂은 장난을 치네요, 바보처럼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해낼 수 있어요…내가 항상 같이 할 테니.”
<장면 9> <장면 10>
OST ‘용서해요’의 뮤지컬 시퀀스 속. 좁은 정육면체에 갇혀 있던 <장면 9>에서 그것이 해체되며 자유로워지는 <장면 10>으로의 이행은, 비단 올드넙치뿐만 아니라 고등어 또한 탈출에서 정신적 주체로서 함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고등어는 육체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했으나, 결국 그 죽음이 누구보다 비관적이고 비본래적인 삶에 매몰되었던 올드넙치를 변화시켰다. 올드넙치와 고등어는 정신적인 동반의 관계를 맺어 함께 바다로 나아간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이어받은 올드넙치의 탈출은 고등어가 지향했던 실존적인 삶의 추구를 계승한다. 바다를 향해, 진정한 삶을 향해 저항하고 몸부림치는 그 과정 자체가 실존이다. 그 점에서 고등어는 이미 실존을 완수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개인이 처한 절망적인 현실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필연적인 숙명이라는 한계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외친다. 언뜻 비극적으로 보였던 고등어의 죽음은 올드넙치의 탈출을 통해 그 의지를 계승하며, 충분히 우리가 우리의 삶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제 ‘파닥파닥’은 단순한 의태어가 아니다. 온갖 불평등과 극복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삶을 소망하는 실존적인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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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그 땅에 영화가, 사람이 있다
DIRECTOR. 가자의 영화감독들
SYNOPSIS. <그라운드 제로로부터>는 팔레스타인 영화감독 스물두 명이 전쟁 중인 가자 지구에서 그들 각자의 삶을 포착한 이야기의 모음집이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픽션의 혼합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인간 정신의 굳건함을 강력하게 증언한 작품.
“내가 죽는다면, 세상에 울림이 있는 죽음이 되길 바란다. 그저 한 줄 속보에 실리거나, 희생자 숫자로만 남고 싶지는 않다. (…) 나는 세상이 듣는 죽음,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묻히지 않을 불멸의 이미지로 남고 싶다.”
지난 4월 가자지구 북부에 있는 자택에 있던, 이스라엘군의 로켓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성 파티마 하수나(25세)의 말이다. 그는 사진 기자인 동시에 다큐멘터리 작가로, 그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칸영화제 독립영화 병행 섹션에 초청된 다음 날 사망했다. 일곱 명의 일가족이 함께. 영화 <그라운드 제로>를 보며 얼마 전 보도로 접한 그의 소식을 떠올린 건, 마치 그에 이어지는 느낌의 편지로 이 영화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익명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상정한 <셀카>는,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 편지가 상대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멋지게 살았던 걸 알아 줬으면 해. 그곳의 삶과 사랑을 사랑했음을.”이라는 말은 파티마 하수나의 말에 화음처럼 울린다.
사실 22개의 작은 이야기 조각이 모여 있는 <그라운드 제로> 자체가 거대한 화음처럼 울려퍼진다. 뉴스 보도 속 숫자와 통계, 머나먼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 쉬운 가자의 소식은 22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피부에 서늘하게 와 닿는다. 그 중에는 땅에 떨어진 밀가루를 두 손으로 주워담으며 스스로의 삶을 비참하다 말하는 순간, 폭격으로 시신이 분해될 경우에 대비해 아이들의 팔과 다리에 이름을 굵직하게 남기며 우는 엄마들의 마음 (그리고 그건 이름이 아니라 죽음임을 알고 함께 우는 아이들의 마음), 24시간 안에 3번이나 폭격을 당해 몇 번이나 구조된 사람의 마음, 종일 줄을 서고 또 서도 물과 음식과 전기를 얻지 못한 하루를 보내는 마음, 건물 잔해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울부짖는 마음, 심지어 가족의 죽음 소식을 듣고 영화 촬영을 멈출 수밖에 없던 감독의 코멘트로 영화를 닫는 (그야말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마음…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는 깊은 절망과 참담함도 있다.
이 절망은 아주 거대하지만 동시에 아주 미시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폭격을 피해 도망가느라 두고 갔던 고양이를 다시 만났을 때 터지는 눈물, 좋은 평가를 받았던 미술 과제들을 먼지 덮인 잔해 속에서 하나씩 끄집어내는 착잡한 손길, 과거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현실에서 재현되는 기분이 들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주인공들의 상황에 자꾸 내 상황이 겹쳐 보이는 공포, 설거지와 목욕과 청소 마지막으로 변기 물까지 한 동이 물을 여러 차례 재활용하는 손길…
재난은 언제나 거시적인 동시에 미시적이다. 산불 피해가 닥쳤을 때 사라진 건 집과 과수원만이 아니었던 것처럼, 가자지구를 덮친 전쟁은 건물을 부수고 가족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당장 얼굴에 바를 로션이 없는 것, 피난하느라 두고 온 책이 생각나는 것, 아침에 마실 차 한 잔이 없어진 것, 북적거리는 텐트 한가운데서 아침을 맞는 것… 삶에서 사라진 것들을 추어 보면 언제나 손끝에 닿는 작은 것까지 변해 있다. 그곳에서 절망은 일상 언어이고, 현실이 악몽처럼 느껴지는 날들은 너무나 많다.
22개의 작품 절대 다수가 3개 로케이션으로 거칠게 요약되는 상황은 이 제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건물의 잔해로 덮인 길거리, 텐트촌, 그리고 잃어버린 시절을 상징하는 듯한 바다. 허락된 장소가 없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가자지구 사람들의 삶이 집약된 장소들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영화인들은 목소리 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달려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꼭 쥐고 있었고, 모든 것이 한정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삶이 어떠한지, 가자지구가 지금 어떠한지를 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여주려 애썼다. 다큐멘터리도, 극영화도, 아이들과 함께 만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나 인형극도 모두 마찬가지다.
22개 중 편지를 상정한 <셀카>를 상영 첫머리에 넣은 것은 아무래도 이 영화가 하나의 유리병 편지로 이곳에 도달했다는 의미 아닐까.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차라리 기억을 잃고 싶을 만큼 끔찍한 현실, 악몽 같은 현실, 눈뜬 이곳이 어제의 미래인지 과거인지 헷갈리는 현재를 노래로 덮으며 마무리한다. 평화와 꽃, 음악과 예술 안에서 아이가 천천히 글쓰기를 배우고 노래는 계속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하나의 선언이다. 그 땅에 영화가 있다. 목소리가 있다. 사람이 있다. 너와 나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이 목소리, 이 선언은 더 울려 퍼져야 할 것이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목소리는 기이하리만큼 그 비극에 대해 침묵하고 있거나, 아니면 인간의 생명과 가장 먼 이야기를 끌어오며 과장된 크기로 발화되고 있지만… 이제는 이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the untold stories from Gaza”, 가자 지구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이제는 말해져야 할, 이야기들이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29-05.09) 상영일정]
2025.05.01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160)
2025.05.05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519)
2025.05.09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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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시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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