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남규2024-10-03 22:46:53
[위국일기] 밴드에 베이스가 필요한 이유
베이스를 치며, 일기를 이어가며, 소나기를 감상하며
위국일기
갑작스러운 사고로 엄마,
아빠 두 분 모두를 떠나보낸 ‘아사’는 하나뿐인
소설가 이모 ‘마키오’를 만납니다. 얼떨결에 함께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합니다. 국내에서는
10월 2일 수요일 개봉한 순정 만화 원작 일본 영화 ‘위국일기’입니다.
우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화력이 강력한 폭탄이길 거부합니다. 오히려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주제 측면에서 제이크 질렌할 주연 ‘데몰리션’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데몰리션’은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제이크 질렌할이 아내의 죽음 이후, 어딘지 붕괴하기 시작하는 평화로운 삶의 모순과
아픔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대한 이질감을 차분하지만 거대한 파도로 덮치듯 그린 작품입니다. 많은 관객은
슬픈 장면이 많음에도 슬퍼할 수 없고, 제이크 질렌한이 춤을 추며 대중을 지나가는 장면에서 재미보다
해학을 느낄 수 있었죠.
이번 ‘위국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손을 쓸 수 없는 거대한 파도에
잠식당한 소녀 ‘아사’의 심리적 상태에 집중합니다. 부모님, 두 분 동시에 치러지는 상갓집에서 ‘아사’에게 전해지는 위로나 걱정, 염려, 응원은 진심으로 ‘아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사를 외톨이의 구렁텅이로 강제로 집어넣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죠. 영화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아사의 심리 상태, 마키오의 감정
상태 등 등장 캐릭터가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마음을 화면에 투영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 작품
‘괴물’이 생각나는 장면도 주인공의 속마음을 알 수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이야기적으로도 떠나간 이에 대한 얽혀 있는 두 사람의 사슬이 마주쳤다는 점에서 흥미로웠고요.
그렇다고 해서 마냥 어둡지만도 않습니다. 부모님이 떠난 후, 함께 살기 시작한 아사와 마키오가 보여주는 낯선
일상은 어딘지 모르게 웃기지만 슬퍼 보였죠. 특히 직업이 소설가, 나름
유명한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찾는 팬들이 많은, 마키오는 인간과의 관계 자체가 폭이 좁고 경계가 짙은
성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감정적인 상황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우선시하는 합리적인
성격이죠. 이와 반대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입학한 10대
소녀 아사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우정, 사랑, 변화에
집중하고 매번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각각의 인물의 감정에 집중합니다.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아사는 마키오의
기분에 집중하고,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마키오는 매번 아사에게 직설적이며 현실적인 상황에 관해
설명합니다. 성격이나 행동에 있어서 극명하게 갈리는 두 사람의 에피소드를 감상하는 것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하나의 포인트였습니다.
영화는 140분으로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갖고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러닝타임이 긴 영화를 선호하시지 않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을 관람하는 것이 굉장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일단 영화가 시작하고 아사와 마키오에게 집중하기 시작하면 도전보다는 감상에 가깝게 변할 겁니다. 저는
씨네랩 덕분에 9월 30일 시사회에서 먼저 본 작품을 수백
명과 함께 관람했습니다. 관람 중 문득 아래를 바라보니 단 한 분도 졸거나 주무시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건 영화 자체가 흥미롭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돼버린 주인공과 떠나가 버린 부모, 아사의 엄마를 증오하는 마키오의 입장에서부터
극적인 흥미는 시작합니다. 마키오 입장에서도 언니를 잃어버린 것이 맞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언니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언니의 자식인 아사를, 하나뿐인 조카를 거둬드리고 함께 생활하죠. 언니에
대한 분노는 언니에게만 적용하고, 조카는 조카대로 사랑하는 처절히 이분법적으로 나눈 판단을 내린 것이죠. 이런 마키오를 아사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의 엄마를 미워하는
이유에 집착하고 마키오 이모를 조심하게 되는 이유로 굳어지죠. 이처럼 영화의 이야기는 철저히 분리했던
사촌지간 가족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남아 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분명 아쉬운 점은 존재합니다. 러닝타임 자체도 길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도 차분하며 후반부에서 다뤄질 엄마에 대한 비밀과 이것을 풀어가는
방법도 반전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매 순간 영화의 모든 장면이 후반부를 위한 떡밥이거나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을 영화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견은 없습니다. 오히려 영화 스스로 추모와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로운 관점에서 다양한 각도로
다루고 있습니다. 졸지에 부모의 그늘에서 한참을 어리광 부리거나 사춘기를 겪어야 할 고등학생 소녀는
모두의 측은지심 속에서 홀로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했죠. 언니에 대한 굳은 증오심이 뿌리 깊게 박힌
소설가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천천히 사그라트리며 자신과 부모 그리고 사랑에 대해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설명해 가는 전개나 방법이 다소 예상이 간다는 점만 빼면, 분명 흥미로운 영화가 맞습니다. 특히,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자녀가 있으신 부모님이라면 정말 강추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단절하며 시작합니다. 어차피 남이니까, 어차피 친구니까,
어차피 피로 이어진 관계이니까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이자 사건의 중심점에 존재하는 ‘아사’에게 손을
뻗는 건 ‘마키오’와 몇몇 친구들뿐입니다. 그들조차도 정확히 ‘아사’의
창백한 얼굴에서 피어나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사’가 비행 청소년이 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릴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더더욱 ‘아사’에게는 ‘마키오’와 친구들이
함께한다는 것이 소중해집니다. 그녀의 마음을 진정 이해할 수 없을지언정 그저 비를 가려줄 우산처럼, 슬픔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는 존재들이죠. 오히려 ‘아사’를 위한다며 심심한 위로를 전하거나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위선적으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아사와 마키오가 의도하지 않게 풀어가는 가족에 대한 정과 삶의 이유 그리고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