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3-10 19:53:17
인간이 인간 되는 힘, 상상력
영화 <미키17> 리뷰
SYNOPSIS.
“당신은 몇 번째 미키입니까?”
친구 ‘티모’와 함께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지고 못 갚으면 죽이겠다는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떠나야 하는 ‘미키’. 기술이 없는 그는, 정치인 ‘마셜’의 얼음행성 개척단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고,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로 지원한다. 4년의 항해와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뒤에도 늘 ‘미키’를 지켜준 여자친구 ‘나샤’. 그와 함께,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과 출력의 사이클에도 익숙해진다. 그러나 ‘미키 17’이 얼음행성의 생명체인 ‘크리퍼’와 만난 후 죽을 위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있다. 행성 당 1명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둘이 된 ‘멀티플’ 상황.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현실 속에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자알 죽고, 내일 만나”
POINT.
✔️ 봉준호 감독의 신작. 다른 말이 필요할까요?
✔️ 시작은 하이틴 스타였지만 어느새 모두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 있는 로버트 패틴슨. 그뿐 아니라 토니 콜레트, 마크 러팔로, 나오미 애키와 스티븐 연까지... 매력 있는 배우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 감독의 전작 중 <마더>나 <살인의 추억>보다는 <옥자>와 <설국열차>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
✔️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수많은 노동자 특히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을 언급했는데요. 막상 뚜껑을 열어본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독재자 쪽을 실재와 많이 연결하는 분위기...�
*<미키17>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후에 읽어주셔요.

봉준호가 '명징하게 직조'하는 세계
<미키17>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감독의 (영어 영화) 전작인 <옥자>와 <설국열차>를 떠올린다. 비록 입 안은 한강 <괴물> 쪽을 더 닮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옥자를 연상케 하는 친근한 외계 괴수가 등장하고, 망해가는 지구를 떠나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을 '개척'하러 떠난 우주선 내부는 어쩐지 얼음으로 뒤덮인 지구의 어떤 기차를 떠오르게 하니까. 한국 사회의 어떤 지점을 송곳처럼 좁고 집요한 시각으로 후비는 대신,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범세계적인 주제를 두루두루 두드리는 작품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서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 계열의 영화들을 선호한다면, <미키17>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 한결 독기가 빠진 느낌, 한결 초점이 여러 군데로 분산된 느낌에서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가 후벼파는 세계는 너무 정확하고 그래서 너무 보기 괴로웠으므로 (이는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마음에 공감성 수치 비슷한 마음을 뒤섞은 것이다) 한결 넓게 두드리는 세계를 보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그가 '명징하게 직조'해낸 세계에서 다루는 주제 의식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미키17>은 봉준호 감독 작품으로는 놀랍게도 사랑 영화다. 놀리는 거 아니고 진짜로 사랑 영화.

미키는 종이처럼 계속해서 재출력되는 '인간'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SPC 계열사) 제빵 기계에" 사고를 당한 이들을 말하며 "나열한 사건의 그 자리에 또 다른 분들이 일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미키가 복제되는 것이 판타지 같지만 김군 뒤에 박군이, 그 뒤에 윤양이... 일자리는 유지되고 인간이 계속 교체되"는 현실을 이야기한 바 있다.
친구와 마카롱 가게를 냈다가 쫄딱 망한 미키의 이야기는, 숱하게 유행 따라 깔렸다가 사라지는 가게 종목들 (<기생충>의 대만 카스테라는 물론, 그 이전에는 커피 번이나 슈니발렌 과자, 그 이후에는 탕후루가 있다.)을 생각나게 하는 동시에, 4대 보험도 되지 않는 다양한 일자리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망한 자영업자이며, 플랫폼 노동자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고용주가 그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은 작업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미키1에서 미키15까지의 시간은 영화에서 매우 빠르게 처리되지만, 그래서 마치 우주선의 탐험 목적과 우주선이 부여받은 임무를 스케치하는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그 과정에서 미키가 인간이라는 감각은 점점 희석된다. 망한 자영업자이자 4대 보험 안되는 노동자였던 그에게, 생체 실험 피해자라는 타이틀이 추가된다. 이쯤 되면 그의 일은 더 이상 노동법상 분류하는 노동에 속하지 않는다. 지구를 빠져나간 우주선에게 법을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는... 근로기준법상 그렇다. 근로기준법 제2조 1항에서 "근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으나, 죽음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존재와 그의 노동 모두, 법 바깥의 무엇이 된다.
미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극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미키에게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는다. 제니퍼를 생각해서 머뭇거리면서도 어렵게 말을 꺼내는 카이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딱히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물어본 질문이 아니다. 존재와 노동이 모두 법망 안에 있는 그들에게, 그 질문은 미키와 자신 사이의 선을 확인하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미키의 존재를 한 번 더 밀어내는 질문이다. 똑같은 우주선을 타고 있지만, 너는 여기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선포, 미키의 이름을 지워내는 명명(命名)이다.

여기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 타인의 환대 속에서만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키17은 필연적으로 무력하다. 절대 다수가 그에게 성원권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정체성 투쟁의 핵심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 있"고, 모독은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냐는 모욕 앞에 미키는 저항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짓눌려, 침묵으로 그 시간을 묵묵히 넘길 뿐이다. 이러한 폭력적 구조에 오랫동안 짓눌려온 미키는 크리퍼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구조에 억눌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며, 사회적으로도 계속 밀어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미키는 일종의 부관참시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마셜과 일파 부부다. 사실 이들이 미키만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어쩐지 현실 곳곳에서 많이 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름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제니퍼의 사망 앞에서 그들이 보인 반응은 '제니퍼'라는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 아니라 '자궁을 가진 가임기 여성'의 죽음을 아까워 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생명체에게는 '크리퍼'라는 집합명사를 붙인다. 그들에게는 자기들 두 사람 외 모든 인물들이 집합명사로 존재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바바처럼, 이들은 우주선에서 타인의 이름을 들이마셔 때로는 지우고 때로는 악마화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미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나샤 그리고 미키18이다. 미키1에서 미키17까지의 우주선의 탐험 역사와 과제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면서 관객이 이 모든 미키들을 한 사람으로 인지할 때, 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미키18이 등장한다. 마치 <서브스턴스>에서처럼 힘주어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고 말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색깔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수가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미키17과 미키18 또한 한 사람이다. 체제에 순응해야 했고, 법 바깥의 존재인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미키17과, 그런 미키17 안에 어딘가 쭈그러져 있었을 다른 마음이 전면에 나선 미키18이 있을 뿐.
그리고 그 모든 미키를 순정으로 끌어안은 나샤가 있다. 특히나 피에타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정말 아름다워 울컥했다. 나샤에게 있어 미키의 존재가 법 안에 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미키를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계속 마주하는 것이 괴롭지 않았을 리 없음에도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 아름다운 순정이어서.

인간성이 메마른 지옥도에서 우리를 구하는 건 결국 사랑이다. 그것이 독점적 연애 관계든, 무어라 정의 내리기 이전에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든,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든. 오늘의 내가 하루를 살아가기 전에, 나를 끌어안고 내 아픔을 애정과 안타까움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 사랑이 있고.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잘 먹고 애쓰며 살아낸 과거의 내가 있다. 그리고 이런 내가 다가오기를 미래에서 (조금을 나를 답답해 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나도 있다. 이 모든 존재들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을 산다.

인간이 인간 되는 힘, 상상력
하지만 모든 사람과 자기애 같은 혹은 연인에 대한 사랑 같은 깊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인간성의 최소선을 우리는 도로시에게서 볼 수 있다. 나 자신과 연인. 가장 가까운 인물들을 제외하고 미키의 목소리, 더 나아가 크리퍼의 목소리까지 들으며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인물이자, 소통의 방식만 놓고 보면 마셜과 일파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도로시는 크리퍼의 반응에서 그들이 대화를 시도할 가능성을 상상하는 인물이자, 미키를 인간으로 대하는 유일한 과학자다. 미키의 손이 잘려 나가도 '와 대박' 이러고 있는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들에게 미키의 신체는 사물화되어 있다), 미키의 수명이 10분인지 15분인지까지 살뜰하게 신경 쓰고 있는 유일한 과학자다. 타인을 사물화하지 않는다는 건,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로시가 과학자로서 가진 가장 큰 힘은 아마도 바로 이 상상력이 아닐까. 가능성을 상상하고,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며, 지금 없는 것들을 그려 볼 수 있는 능력. 돌아보면 영화에서 마셜과 일파가 만든 세계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인물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대우받고 죽어가는 미키와 함께하는 매일을 상상하는 나샤도, 독재자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미키18도.

결국 사랑도 소통도 그런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다 보면 제일 끔찍한 것도 제일 애틋한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일 끔찍한 인간의 상태, 그저 인간성이 메말라 온 세상을 지옥도로 인지하는 상태를 벗어나려면, 소통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어디선가 다양한 의미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코처럼 고함을 질러 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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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한국에서는 <잠> 북미에서는 <더 넌 2> 3주째 호러, 스릴러 돌풍이 불고 있습니다. 새로 개봉한 <가문의 영광: 리턴즈>가 2위를 기록했다고 하는데요 9월 4주차 박스오피스 순위 같이 알아볼까요?✍�
[국내 박스오피스]
영화 <잠>이 개봉 이후 3주째 정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6번째 시리즈를 맞이한 <가문의 영광: 리턴즈>는 7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2위, 할리우드 레이싱 액션 영화 <그란 투리스모>가 5만여명을 동원하며 3위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가문의 영광: 리턴즈>는 개봉 첫 날 부터 혹평세례를 받고 있는데, 허술한 내용에 아쉬움을 표현하는 반응이 대다수였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더 넌 2>가 매출액 840만 달러를 기록하면서 3주째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익스펜더블4>는 매출액 830만 달러를 올려 2위로 출발,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이 3위를 기록했습니다. <더 넌>은 1956년 프랑스 한 성당에서 신부가 죽은 채 발견되고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아이린 수녀가 의문의 사건을 마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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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이와 사랑에 빠지고, 점차 무뎌지고, 또 다시 낯선 이가 되어가는 쌉사름한 인연(因緣)
소개
런던의 도심 한복판, 부고기자이지만, 소설가가 꿈인 ‘댄’(주드로)은 출근길에 눈이 마주친 뉴욕 출신 스트립댄서 ‘앨리스’(나탈리 포트만)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삶을 소재로 글을 써서 드디어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 ‘댄’은 책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앨리스’와는 또 다른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안나’ 역시 ‘댄’에게 빠져들었지만 그에게 연인이 있음을 알게 되고, ‘댄’의 장난으로 우연히 만난 마초적인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웬)와 결혼한다. 하지만 ‘댄’의 끊임없는 구애를 끊지 못한 ‘안나’는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이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앨리스’와 ‘래리’는 상처를 받게 되는데…
모든 인연은 우연이라 생각되기 쉽지만, 사실 필연일 것이다.
앨리스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은 영국과 미국의 차도가 반대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우측통행이라는 미국과는 반대되는 규율이 있기 때문에, 댄과 앨리스는 만났다. 영국에서 너드 같은 안경을 쓴 부고 기자 댄과 붉게 물들인 커트 머리의 미국인 스트립댄서 앨리스, 너무도 다른 사람이기에 충돌하여 만나게 된 것이다.
‘클로저’에서 4인의 관계는 엉키고 설킨다. 모두 한없이 이기적이다.
이방인을 마주친 첫 순간을 기록하는 안나. 그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섬세한 인물이다. 전형적인 성숙한 어른 여자로 보이지만, 사실 전형적인 회피형이다.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크게 말을 얹지는 않다가 저지르고 사과한다.
래리는 넷 중 가장 평범하다.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에, 마초적인 남성이다. 자신은 다른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도, 다른 남자와 만나는 부인은 용서할 수 없는 찌질한 남자. 순간의 감정을 누르지 못한다. 특히 남성성에 관해 예민하다. 댄과의 잠자리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누가 더 좋았냐고 취조한다. 안나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자, 분노에 휩싸여 ‘slag’라 칭한다. 댄을 처참하게 만들기 위해 복수의 방법으로 스트립 클럽에서 마주친 앨리스와, 그리고 이혼을 청하러 온 안나와 잠자리를 갖는다. 그것이 래리가 댄에게 느낀 가장 모욕적인 감정이고, 참을 수가 없던 것이기에. 또한, 댄 역시 그럴 줄 알기에.
댄은 섬세하고 다정하다. 작가를 꿈꿔왔고, 소설가가 된 만큼 감각에 예민하다. 영화 초반부, 담배를 끊었다던 댄은 앨리스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헤어진 후에도 담배를 끊지 못한다. 정작 흡연자던 앨리스는 끊었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댄은 끌림에 쉽게 매혹되기도,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있기도 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리는 면이 있다. ‘자신과 안나’의 관계는 ‘래리와 안나’의 관계와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같았다. 안나가 한 번 자주면 이혼해 주겠다는 래리의 부탁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너진다. 래리와 잤다는 말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은 앨리스에도 세상이 무너지고,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앨리스의 뺨을 친다. 섬세하고 다정하던 것이 매력이던 댄은 결국 래리와 다를 바 없었다.
<클로저>는 <졸업>(1967, 마이클 니콜스)으로 아메리칸 뉴웨이브에 한 획을 그은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이다. 마이크 니콜스는 해피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남녀가 식장에서 도망쳐 버스에 탄 것이 엔딩인 ‘졸업’에서조차 주연 배우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다. 결국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거라는 것을 암시한다. 비관적이다. 우리가 클로저를 보며 마음 어디 한 편이 불편한 것은 너무나도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와 내 친구와 나의 연인,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클로저>에서는 ‘앨리스’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추구한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평생 서로를 모른다. ‘클로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평생 서로에게 낯선 사람일 것이다. 온전히 나를 이해해 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조차도 모르는데 그 누가 알 수 있겠나. 하지만 점점 아는 체를 하게 된다. 인연을 맺고 긴 시간을 함께하고, 대화를 나누면 그 사람을 안다고 착각한다.
익숙함에 속지 않는 것.
미련이 남지 않도록 감정에, 그리고 현재 관계에 충실하는 것.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앨리스에겐 이 3가지가 있다. 댄이 간과한 점은 자신이 쓴 소설처럼 철없고 자유분방하고 그저 어리다고 생각한 것. 자신이 그려낸 ‘앨리스’인 줄로만 알았던 그는 ‘제인’을 모른다. 스트립 클럽, 래리는 자신을 제인으로 칭하는 앨리스에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격분하지만, 사실 그녀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입국 심사장에서 드러난 앨리스의 여권을 통해 알 수 있다.
앨리스의 진짜 이름은 ‘존스 제인 레이첼 ’이다.
영화 초반부, 앨리스는 댄과 함께 공동묘지에서 ‘타인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묘비를 본다. 엔딩, 댄은 앨리스와 처음 갔던 세 명의 아이를 구하고 죽었다는 묘비를 발견한다.
‘앨리스 에이리스 – 벽돌공의 딸’ '불속에 뛰어들어 아이 셋을 구하고 숨지다'
앨리스는 불같이 거침없이 관계를 향해 달려들었고, 끝이라고 생각된 순간에는 깔끔히 놓았다. ‘순수한 사랑’ 말이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어른스러운 사람은 스트리퍼에 어리다는 취급을 받던 ‘앨리스’이다. 앨리스는 성숙한 체하는 세 명의 아이 댄, 안나, 래리를 구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간 제인(나탈리 포트만)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낯설고 매력적이다. 완벽한 Stranger로. 묘비명은 앨리스 캐릭터를 투영한 함축된 글인 것이다.
"where?"
사랑은 형체가 없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느낄 수 있다.
어느 순간엔가 사랑이 어디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결국 이별이 다가오는 것이다.
교통사고처럼 예기치 못하게 만났으니, 헤어짐 역시 그렇지 않을 이유 없다.
댄은 앨리스에게 눈을 떼지 못했던, 낯설기만 하던 첫 순간을,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주던 두 눈을
다른 낯선 이를 만나더라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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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너를 닮은 사람>
<너를 닮은 사람> 포스터 (사진출처 : JTBC)
너를 닮은 사람 (2021)
편성 : JTBC, 16화 완결 │ 장르 : 한국, 드라마·멜로
연출 임현욱 │ 극본 : 유보라 │ 출연 : 고현정(희주), 신현빈(해원), 김재영(우재) 외
등급 : 19세 이상 관람가 │ 원작소설 : 정소현 소설집 <너를 닮은 사람>매혹적이고 특별한 무드의 드라마
길고 풍성한 머리에 창백한 화장의 고현정 배우를 보고 처음 이 드라마의 특별한 무드를 느꼈다. 왜 창백한 것일까. 울적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드라마의 색감은 또 뭐지. 마찬가지로 울적한 음악까지 맞물리면서 나는 깊게 드라마에 빨려들었다. 음울하고 슬픈데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분위기였다. 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이다.
<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사진출처 : JTBC)
원작 소설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렸다
드라마의 원작은 젊은작가상, 김준성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의 수상 작가인 ‘정소현’의 첫 소설집 <너를 닮은 사람>이다. 8가지 이야기를 다룬 소설집에서 한 편의 짤막한 단편소설이었던 이 이야기는, 드라마 작가 ‘유보라’에 의해 각색되어 영상으로 재탄생했다. 유보라 또한 이 소설에서 어떤 치명적인 흡입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소설이 끝나고도 계속 곱씹게 되는 강력한 서사의 힘을, 나는 보았다”라고 말한다. 궁금했던 나는 드라마에 이어 원작 소설까지 섭렵했다. 두 이야기를 모두 읽어본 결과, 소설과 드라마는 어느 하나가 덜하고 못하고 없이 공통의 무서운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놀라운 건, 짧은 소설에 비해 드라마는 16화라는 긴 호흡이었으나, 원작의 그 음울하고도 파괴적인 분위기를 손색없이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사진출처 : JTBC)
어느 날, 과거가 나를 찾아왔다
주인공 ‘희주(고현정 분)’는 재력이 든든한 남편을 만나 물질적 안정 속에 살아가고 있는 여자다. 그녀는 유년시절 몹시도 가난했기 때문에 인과적으로 물질적 안정을 추구했던 것 같다. 좋은 집, 화가라는 멋진 직업, 물심양면 지원해주는 남편, 바르고 예쁜 두 아이들. 그녀의 인생은 어디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느 날 ‘해원(신현빈 분)’이 희주의 집으로 찾아온다. 그녀는 희주의 오래전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다. 한때 희주는 그녀에게 그림을 배웠고, 자신과 달리 가난함에도 위축되지 않고 밝고 씩씩했던 그녀를 몹시도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다시 나타난 해원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희주가 사 준 10년도 더 된 낡은 코트를 떨쳐 입고 ‘과거에 붙들린 망령’처럼 서있는 그 장면은, 소설에서도 드라마에서도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해원이 희주를 망치러 왔다는 걸.
<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사진출처 : JTBC)
내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 너다
희주는 해원에게 죄를 지었다. 해원에게 전부였던 그녀의 연인 ‘우재(김재영 분)’와 과거 밀회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주에겐 지나가는 사랑이었다. 불안정하고 동화 같은 사랑보단 물질과 풍요가 중요했던 희주는 결국 우재를 떠났고, 두고두고 그 일을 후회했다. 해원만 몰라준다면 영원히 묻고 싶은 과거의 일이었다. 그러나 희주에게 스치는 바람에 불과했던 그 일이 해원의 인생을 뒤흔들었고, 건강하게 빛나던 해원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 희주를 겁박한다. 나도 망했으니 너도 망해보라고. <너를 닮은 사람>의 긴장감은 바로 그 두 여자의 숨 막히는 심리전과 비밀스러운 과거에 포진되어 있다.
클라인, 그건 분명 너였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과 다시 인연이 닿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먼지 쌓인 박제 같은 외양 때문이었는지 불쾌하고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원작소설 <너를 닮은 사람> 中<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사진출처 : JTBC)
정소현의 중반부, 유보라의 중후반부
소설과 드라마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과거에 머물렀던 우재가 드라마에서는 현재의 희주 앞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거기서부터 드라마는 소설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은 중후반부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숨 막히고 아름다웠다. 희주의 안정을 위협하는 해원과 우재, 과거에 붙들린 두 망령들로부터 벗어나려는 희주. 그러나 여전히 과거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까지. 그 모든 캐릭터와 이야기들이 폭죽처럼 터지며 파국으로 치닫는 걸 보고있자면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너와 달리 그는 모든 것이 지나쳤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했고, 지나치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모순적인 감정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에 아름다웠다. …
그는 너 몰래 찾아와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하며 나를 그리곤 했다.
원작소설 <너를 닮은 사람> 中<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사진출처 : JTBC)
나는 당신을 경멸합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해원보다는 희주에 가깝다. 친구랑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과거에 붙들려 현재의 나를 돌보지 않는 일은 너무 미련한 것이라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에게 집착하고, 과거에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느라 현재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희주의 잘못이 가벼웠던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빛을 잃고 낭떠러지로 돌진하는 해원의 모습이 안타깝고 불행해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불행을 인지하지 못한 채 긴 세월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며 살아온 희주 또한 안타깝고 불행해 보인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는 동시에, 스스로가 스스로를 파괴했던 게 아닐지.
<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사진출처 : JTBC)
과거의 것들과 결별할수록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드라마의 후반부, 희주는 점점 옥죄어오는 과거의 위협이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에게까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던 자신의 욕망, 한 사람에겐 전부였던 사랑을 가볍게 탐한 죄, 그 모든 것들의 무게가 희주의 가족을 망치려 할 때 희주는 결심한다. 그 과거를 끌어안고 자신이 사라져야겠다고. 그러나 왜인지, 자신의 뜻대로 희주가 파멸하자 해원은 행복해하는 대신 울음을 터뜨린다. 모든 게 끝나고서야 해원은 깨달은 걸까. 비이성적인 앙갚음이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는 걸.
철드는 건 나쁘거나 대단한 게 아니에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원작소설 <너를 닮은 사람> 中<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사진출처 : JTBC)
모든 욕망을 내려놓은 자에게 들리는 종소리
푸른 파다, 푸른 초원과 함께 절경을 이루는 아일랜드의 모허(Moher) 절벽. 희주와 우재가 서로의 가족과 연인을 속인 채 밀회를 나눴던 그곳에서, 우재는 이런 말을 했었다. “수도원에 있던 한 은종이 호수에 빠졌는데, 맑은 영혼한테는 그 종소리가 들린대” 희주는 자신이 욕망으로 가득한 존재라는 걸 알았기에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결국 죽게 된 우재의 시신을 유기할 때까지도 당연히.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우재를 없애고 현실로 돌아가고자 했던 계획마저 수포로 돌아가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적했을 때. 희주의 귓가에 별안간 희미한 종소리가 들려온다. 물질, 탐욕, 이기심을 모두 내려놓은 그 끝에였다. 그 장면은 너무도 인상 깊은 장면이자, 소설에는 없지만 소설의 메시지를 가장 명확하게 짚은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희주가 결국 그 종소리를 듣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것이 구원이라면 말이다.
<너를 닮은 사람> 스틸컷 (사진출처 : JTBC)
선악을 모두 품은, 인간이라는 존재
<너를 닮은 사람>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나뉘어있지 않다. 희주와 해원과 우재 모두가 서로에게 죄를 짓고 죄를 당하며 얼기설기 얽혀있을 뿐이다. 내 안에도 해원과 우재와 희주가 있다. 시기와 질투, 물질과 안정에 대한 욕망, 잘못된 징벌의 심리까지도. 모두 서늘하게 나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그 선과 악에 대해, 그것이 끊임없이 공존하고 교차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에 대해, 이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이야기를 써낸 정소현 작가와 유보라 작가가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가 끝난 뒤에는 정말이지 열렬히 바라게 됐다. 파멸과 자멸의 끝에, 희주와 해원 그리고 우재가 자신들을 옥죄던 그 무엇들로부터 해방되었기를.
글쓰는 우두미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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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가 된 공주의 평범한 클리셰 도장 깨기!
“공주는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댐즐>은 수동적인 공주가 살아 숨 쉬는 동화 속 이야기에 반기를 든 작품이다. 전사로 거듭난 공주의 이야기인 <댐즐>은 왕자의 도움 없이 위험에 빠진 공주가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자신이 잡은 검으로 클리셰의 심장을 찔러버리는 공주의 대찬 모습은 시선을 사로잡지만, 아쉽게도 그 칼날은 평범해 보인다.
엘로디(밀리 바비 브라운)는 도끼질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배고픔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안위를 걱정하는 추운 북쪽 왕국의 공주다. 어느 날 생소한 이름의 왕국에서 혼담이 오가고, 엘로디는 백성들을 위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왕자와 결혼하기로 한다. 결혼 당일 성대한 식을 치른 그녀는 왕자 측 전통에 따라 왕국 뒤편에 있는 산 중턱 동굴에서 기묘한 의식을 치른다. 이상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 엘로디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듯 왕자에게 배신당하고 동굴에 갇힌다. 그곳에 사는 용은 그동안 제물로 바쳐진 공주들처럼 그녀를 잡아먹기 위해 혈안이 되고, 엘로디는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댐즐>의 지향점은 명확하다. 위험에 처한 공주가 자신을 구해줄 왕자를 기다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살아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를 강조하기 위해 감독은 동화가 가진 클리셰를 전복시킨다. 공주의 손에 검을 잡게 하는 건 물론, 왕자는 공주를 구하기는커녕 낭떠러지에 던져버리고, 엘로디의 계모는 위험을 빠뜨리는 게 아닌 오히려 벗어나게 도와준다. 빌런인 용 또한 공주를 위험에 빠뜨리기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댐즐>은 클리셰 도장 깨기를 해나가며, 현시대에 맞게 동화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그 중심에는 엘로디가 있다. 첫 장면부터 매서운 도끼질 신공을 펼치는 그녀는 자신의 지혜와 생존을 해서 가족과 백성에게 돌아가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용과 왕자 집안에 맞선다. 특히 거추장스러웠던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이를 생존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장면은 자주적인 여성으로서 엘로디의 자아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캐릭터를 완성하는 건 넷플릭스의 딸 밀리 바비 브라운의 연기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 <에놀라 홈즈> 시리즈를 통해 강한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던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를 엘로디에게 투영한다. 홀로 동굴에서 탈출하고, 불을 내뿜는 용과 맞서는 과정에서 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흡사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을 연상시킨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캐릭터의 느낌을 재차 활용한다는 점은 장단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는 단점보단 장점에 무게 중심을 둘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댐즐>은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로 인상깊지는 못하다. 클리셰를 전복시켜 얻는 쾌감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펼쳤던 <겨울왕국> <말레피센트>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 자장 안에 머무는 느낌이다. 너무 안정적으로 가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오히려 영화가 가진 힘을 무디게 한 느낌이랄까. 클리셰는 타파하지만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진부한 설정을 가져가는 탓에 결말 부분에서 여성 연대를 이루고, 왕자 집안에 빅 엿을 날리는 사이다 장면에서 쾌감은 반감되고, 결국 아쉬움이 남는다.
<댐즐>은 지난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에 공개되었다. 이 기념일에 맞춰 넷플릭스의 기획용으로 공개된 <댐즐>은 재물로 바쳐진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그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수많은 무고한 여성들의 희생을 말한다. 이어 엘로디로 하여금 여성들의 힘과 연대를 보여주지만, 킬링타임용으로 그치는 영화의 한계는 의미 있는 기획 작품으로서 그 빛을 발하지는 못한다. 이 작품을 마주한다면 완성도를 떠나 이름 없이 사라져간 여성들을 한 번쯤 생각하면 좋을 듯싶다.
사진 제공: 넷플릭스
평점: 2.5 /5.0
한줄평: 국제 여성의 날 기념 무색무취 넷플용 기획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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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없는 명예 속에 남은 상처
덧없는 명예 속에 남은 상처
영화리뷰 <파더 앤 솔져>감독] 마티유 바데피드
출연] 오마르 사이, 조나스 블로켓, 알라산 디옹, 바마르 칸
시놉시스] 1차 대전 당시 프랑스령 세네갈. 프랑스인들은 세네갈인들을 징집하여 유럽의 끔찍한 전쟁터로 보낸다. 척박한 땅에서 아들 티에르노와 가축을 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 바카리는 프랑스 군인이 나타난다는 소문만 들리면 징집 대상인 아들을 은신처로 보내 숨어 있도록 하지만 아들은 결국 세네갈에 있는 신병교육대로 끌려간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탈출하기 위해 자원입대를 하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부자는 유럽 전선으로 끌려간다. 한 전투에서 100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곳, 같은 아프리카인들끼리도 서로를 속이고, 강도 행각을 벌이는 전선에서 어떻게든 아들을 찾아 탈출하려는 아버지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휘관의 눈에 들어 영웅이 되려는 아들은 서로 다른 전쟁을 겪게 된다. 2022년 칸영화제 Un Certain Regard 섹션의 개막작이었던 이 작품은 아버지의 애틋한 정과 덧없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여주는 휴먼 드라마다.(출처 : 전주국제영화제)
#스포일러 유의
허황된 권력과 지위
아들 티에르노는 세네갈인이지만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끌려온 전쟁터에서 장교의 눈에 빠르게 들 수 있었다. 말단 이병이었던 그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상급자가 죽을 때마다 일병으로, 상병으로 부사관으로 점차 승진하면서 권력의 맛을 깨닫는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군대에 자원입대한 아버지 바카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전쟁터에서 탈출을 하고자 뒤에서 수많은 애를 쓰고 있지만, 권력과 지위에 맛을 알아버린 아들 티에르노는 아버지의 탈출 작전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는다. 이젠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계급으로써 군대라는 사회 속에서는 아버지에게 지시를 내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지시에 복종을 해야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이에 아버지는 어떻게든 비참한 마음 속에서도 단지 아들을 살려서 지옥같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아들을 계속해서 설득해서 탈출을 진행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보다 간부의 인정에 더 고팠던 티에르노는 상관이 지시한 침투조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중간에서 탈출하여 다시 전쟁터로 돌아간다. 그렇게 선발대로서 적진으로 침투한 티에르노는 결국 적의 함정에 빠져 죽을 위기에 놓이고, 아들을 버리고 혼자 탈출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뒤를 쫓아 아들을 위기 상황 속에서 구해내지만 정작 자신은 총에 맞아 죽고 만다.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아들 티에르노는 적진에서 도망쳐나오며 명예롭게 싸웠다는 훈장을 받는다. 당장의 안위와 가족의 염려보다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있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꿈. 하지만 이것은 모두 허황된 것에 불과했다. 군대라는 사회 속에서의 인정에 매몰되면서 결국 아들 티에르노는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영화 파더 앤 솔저는 전쟁이 결국 인간에게 남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통제된 사회라는 군대 속에서 통제를 잘 받아들이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거나 라인을 잘 타면 빠르게 진급해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 군대의 모든 구성원에게 이를 알림으로써 보다 더 충성적인 복종을 자연스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신기루는 군대 구성원들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존엄에 대해 망각하게끔 만든다. 지위체계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면서 이와 동시에 다음날 죽을 수도 있다는 죽음의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굉장히 본능적으로 행동을 하게 된다. 각자의 삶에서 무엇이 우선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생존과 권력이라는 2가지 본능적인 욕구에만 집중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 본능 속에서 살다가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는 해체되어 버린 군대에서의 명예가 과연 남을까.빠르게 진급하면서 당시에는 느꼈을지 모를 성취감은 이제 자신을 찾지 않는 떠나간 군대를 보며 과연 그 감정이 오롯이 남겨져 있을까. 모두 허탈함으로 바뀌어져 있을 것이다. 매순간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애썼지만 시간이 흘러 전쟁이 끝나고 개별 군인에게 남는 것은 혼자 살았다는 죄책감, 이제는 사라진 조직 등 과거의 감정들이 신기루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영화 파더 앤 솔저는 훈장을 받고 터덜터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혼자 돌아왔다는 자책감과 그토록 진급에 기뻐했던 과거가 덧없음을 티에르노의 눈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 파더 앤 솔저는 전쟁이 얼마나 인간 개개인을 활폐하게 만드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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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네뜨> -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본 상실의 쓰라림’
뽀네뜨 (Ponette)
개봉일 : 1997.11.08 (한국 기준)
감독 : 자크 도일론
출연 : 빅토와르 띠비솔, 자비에 보브와, 클레르 노보, 마리 뜨랭띠냥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본 상실의 쓰라림
잔인한 말이지만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우리는 아무리 혼자가 좋다고 말하더라도 살면서 적어도 한두명쯤은 마음을 다 내어줄만큼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언젠가는 그를 잃는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누구나 겪을 수 있기에 무엇보다 두렵고, 또 그만큼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바로 이 ‘상실의 고통’이다. 지금껏 사랑하는 연인, 가족, 친구와 이별하는 아픔을 담은 영화를 수없이 봤지만 이 영화처럼 조용하게, 낮은 시선으로 상처를 건들이는 영화는 없었다.
<뽀네뜨>는 작은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실의 아픔을 담아낸 영화다. 어린 뽀네뜨와 엄마는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하게 된다. 뽀네뜨는 팔 한쪽에 깁스를 했고 엄마는 사고의 충격으로 인해 생긴 머리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뽀네뜨의 아빠는 아내를 잃은 충격을 수습할 틈도 없이 아이를 안고 친척집으로 향한다. 아빠로서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출장을 가야했기때문이다. 엄마의 빈자리엔 ‘사랑하는 이가 언제든 떠날수 있다’는 불안감이 자리했고 뽀네뜨와 아빠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절대 죽지 않기로”.
아빠가 출장을 떠나고 어린 뽀네뜨는 엄마의 부재를 느끼면서도 이전과 같이 일상을 살아간다. 친척들과 함께,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하지만 상실의 아픔은 갑작스러운 순간에 툭툭 아이의 마음을 건들인다. 아이가 눈물을 터트릴때, 친구들 사이에서 잠시 웃음을 보일때,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홀로남아 부활의 주문을 외칠때. 모든 순간이 아팠고, 아이에게 한아름 희망이 주어졌을때 나는 비로소 조금 웃을 수 있었다.
뽀네뜨 시놉시스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뽀네뜨는 단지 왼쪽 팔만 조금 다쳤을 뿐인데, 차를 몰던 엄마는 너무 크게 다쳐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네 살짜리 뽀네뜨로서는 죽음을, 그리고 엄마를 영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회사일로 출장가는 아빠는 뽀네뜨를 고모에게 맡기지만, 엄마잃은 슬픔에 빠진 뽀네뜨는 사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혼자 방안에 쳐박혀 인형과 대화만 나눈다. 꿈속에서 엄마와 만나던 뽀네뜨에게 어느날부터인가 엄마가 나타나지 않는다. 낙담하고 있는 뽀네뜨에게 고모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엄마도 분명 예수님처럼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그때부터 뽀네뜨는 밖에 나가 엄마 오기만을 기다린다. 아빠나 고모가 아무리 달래고 알아듣도록 타일러도, 뽀네뜨는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낮엔 여기서, 밤엔 엄마랑. 난 밤이 좋아.
며칠전만해도 함께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오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뽀네뜨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아빠의 대답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있다고 대답하면서도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의 빈자리는 뽀네뜨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자리잡는다.
일때문에 뽀네뜨를 친척집에 맡겨야만했던 아빠는 애써 슬픔을 억누르며 먼저 떠난 아내를 탓해보지만 어린 딸은 빈틈없이 엄마의 존재를 감싸 안는다. 뽀네뜨는 낮엔 또래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밤이면 엄마를 만난다고 말한다. 사촌 마티아스와 델핀, 아빠는 뽀네뜨의 말을 믿어주지 않지만 뽀네뜨는 고집을 꺾지않는다.
뽀네뜨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린 이유는 그저 '엄마를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부활할때 사용했다는 주문 '타리타쿰!'을 외치고, 엄마를 기다리는것만이 뽀네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뽀네뜨는 엄마가 묻힌 무덤가에서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나쁜 마음씨의 아이가 엄마를 욕하고, 누군가 엄마의 부재를 강하게 각인시켜도 울지 않고 맞서던 뽀네뜨가 엄마의 옆에선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마치 꿈, 기적처럼 엄마가 뽀네뜨의 앞에 나타난다.
엄마가 행복을 배우랬어. 난 행복을 배울거야.
뽀네뜨는 엄마가 챙겨준 붉은 니트를 입고, 엄마 대신 요요떼를 안고, 연약한 손목에 아빠의 시계를 감는다. 그리고 행복을 찾을것이라 다짐한다. 엄마의 따뜻한 사랑 한주먹 아빠의 흔들림 없는 사랑 한주먹은 뽀네뜨를 단단히 감싸줄것이다. 다친 팔의 상처가 나을때까지 튼튼하게 감싸주는 깁스처럼 말이다.
뽀네뜨가 언제나 곁을 지키고 있는 엄마의 존재를 느끼며, 가끔 공기중을 떠다니는 엄마와의 추억을 붙잡을 수 있길. 엄마의 존재가 상실의 흉터가 아닌 사랑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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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감정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긴 영화! 스펜서!
다이애나 황태자비에 대한 영화 스펜서가 개봉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한 영화라기보다는 실제 그녀가 이혼 전 느꼈을 감정을 압축해서 담은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고독과 외로움이 영화 전반에 강하게 묻어나고 있죠.
그 외로움이 이렇게 제대로 표현된 건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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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키싱 부스 3> 공식 예고편
[2021년 8월, 넷플릭스 공개]
엘, 아직도 학교를 결정 못 한 거야?
멋진 남친 노아와 평생 절친 리 사이에서 예비 대학생 엘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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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뉴욕 42번가 기타샵> 메인 예고편
어서오세요, 카마인 기타샵입니다 뉴욕 그리니치빌리지 42번가에는 릭 켈리의 아주 특별한 기타샵이 있다 밥 딜런, 루 리드, 짐 자무쉬... 많은 이들이 찾는 이곳은 기타의 선율이 늘 함께 한다 - 감독: 론 만 - 출연: 릭 켈리, 신디 훌레즈, 도로시 켈리 - 수입/배급: 영화사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