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3-10 19:53:17
인간이 인간 되는 힘, 상상력
영화 <미키17> 리뷰
SYNOPSIS.
“당신은 몇 번째 미키입니까?”
친구 ‘티모’와 함께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지고 못 갚으면 죽이겠다는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떠나야 하는 ‘미키’. 기술이 없는 그는, 정치인 ‘마셜’의 얼음행성 개척단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고,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로 지원한다. 4년의 항해와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뒤에도 늘 ‘미키’를 지켜준 여자친구 ‘나샤’. 그와 함께,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과 출력의 사이클에도 익숙해진다. 그러나 ‘미키 17’이 얼음행성의 생명체인 ‘크리퍼’와 만난 후 죽을 위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있다. 행성 당 1명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둘이 된 ‘멀티플’ 상황.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현실 속에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자알 죽고, 내일 만나”
POINT.
✔️ 봉준호 감독의 신작. 다른 말이 필요할까요?
✔️ 시작은 하이틴 스타였지만 어느새 모두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 있는 로버트 패틴슨. 그뿐 아니라 토니 콜레트, 마크 러팔로, 나오미 애키와 스티븐 연까지... 매력 있는 배우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 감독의 전작 중 <마더>나 <살인의 추억>보다는 <옥자>와 <설국열차>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
✔️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수많은 노동자 특히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을 언급했는데요. 막상 뚜껑을 열어본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독재자 쪽을 실재와 많이 연결하는 분위기...�
*<미키17>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후에 읽어주셔요.

봉준호가 '명징하게 직조'하는 세계
<미키17>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감독의 (영어 영화) 전작인 <옥자>와 <설국열차>를 떠올린다. 비록 입 안은 한강 <괴물> 쪽을 더 닮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옥자를 연상케 하는 친근한 외계 괴수가 등장하고, 망해가는 지구를 떠나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을 '개척'하러 떠난 우주선 내부는 어쩐지 얼음으로 뒤덮인 지구의 어떤 기차를 떠오르게 하니까. 한국 사회의 어떤 지점을 송곳처럼 좁고 집요한 시각으로 후비는 대신,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범세계적인 주제를 두루두루 두드리는 작품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서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 계열의 영화들을 선호한다면, <미키17>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 한결 독기가 빠진 느낌, 한결 초점이 여러 군데로 분산된 느낌에서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가 후벼파는 세계는 너무 정확하고 그래서 너무 보기 괴로웠으므로 (이는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마음에 공감성 수치 비슷한 마음을 뒤섞은 것이다) 한결 넓게 두드리는 세계를 보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그가 '명징하게 직조'해낸 세계에서 다루는 주제 의식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미키17>은 봉준호 감독 작품으로는 놀랍게도 사랑 영화다. 놀리는 거 아니고 진짜로 사랑 영화.

미키는 종이처럼 계속해서 재출력되는 '인간'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SPC 계열사) 제빵 기계에" 사고를 당한 이들을 말하며 "나열한 사건의 그 자리에 또 다른 분들이 일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미키가 복제되는 것이 판타지 같지만 김군 뒤에 박군이, 그 뒤에 윤양이... 일자리는 유지되고 인간이 계속 교체되"는 현실을 이야기한 바 있다.
친구와 마카롱 가게를 냈다가 쫄딱 망한 미키의 이야기는, 숱하게 유행 따라 깔렸다가 사라지는 가게 종목들 (<기생충>의 대만 카스테라는 물론, 그 이전에는 커피 번이나 슈니발렌 과자, 그 이후에는 탕후루가 있다.)을 생각나게 하는 동시에, 4대 보험도 되지 않는 다양한 일자리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망한 자영업자이며, 플랫폼 노동자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고용주가 그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은 작업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미키1에서 미키15까지의 시간은 영화에서 매우 빠르게 처리되지만, 그래서 마치 우주선의 탐험 목적과 우주선이 부여받은 임무를 스케치하는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그 과정에서 미키가 인간이라는 감각은 점점 희석된다. 망한 자영업자이자 4대 보험 안되는 노동자였던 그에게, 생체 실험 피해자라는 타이틀이 추가된다. 이쯤 되면 그의 일은 더 이상 노동법상 분류하는 노동에 속하지 않는다. 지구를 빠져나간 우주선에게 법을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는... 근로기준법상 그렇다. 근로기준법 제2조 1항에서 "근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으나, 죽음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존재와 그의 노동 모두, 법 바깥의 무엇이 된다.
미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극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미키에게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는다. 제니퍼를 생각해서 머뭇거리면서도 어렵게 말을 꺼내는 카이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딱히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물어본 질문이 아니다. 존재와 노동이 모두 법망 안에 있는 그들에게, 그 질문은 미키와 자신 사이의 선을 확인하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미키의 존재를 한 번 더 밀어내는 질문이다. 똑같은 우주선을 타고 있지만, 너는 여기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선포, 미키의 이름을 지워내는 명명(命名)이다.

여기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 타인의 환대 속에서만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키17은 필연적으로 무력하다. 절대 다수가 그에게 성원권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정체성 투쟁의 핵심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 있"고, 모독은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냐는 모욕 앞에 미키는 저항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짓눌려, 침묵으로 그 시간을 묵묵히 넘길 뿐이다. 이러한 폭력적 구조에 오랫동안 짓눌려온 미키는 크리퍼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구조에 억눌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며, 사회적으로도 계속 밀어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미키는 일종의 부관참시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마셜과 일파 부부다. 사실 이들이 미키만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어쩐지 현실 곳곳에서 많이 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름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제니퍼의 사망 앞에서 그들이 보인 반응은 '제니퍼'라는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 아니라 '자궁을 가진 가임기 여성'의 죽음을 아까워 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생명체에게는 '크리퍼'라는 집합명사를 붙인다. 그들에게는 자기들 두 사람 외 모든 인물들이 집합명사로 존재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바바처럼, 이들은 우주선에서 타인의 이름을 들이마셔 때로는 지우고 때로는 악마화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미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나샤 그리고 미키18이다. 미키1에서 미키17까지의 우주선의 탐험 역사와 과제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면서 관객이 이 모든 미키들을 한 사람으로 인지할 때, 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미키18이 등장한다. 마치 <서브스턴스>에서처럼 힘주어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고 말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색깔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수가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미키17과 미키18 또한 한 사람이다. 체제에 순응해야 했고, 법 바깥의 존재인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미키17과, 그런 미키17 안에 어딘가 쭈그러져 있었을 다른 마음이 전면에 나선 미키18이 있을 뿐.
그리고 그 모든 미키를 순정으로 끌어안은 나샤가 있다. 특히나 피에타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정말 아름다워 울컥했다. 나샤에게 있어 미키의 존재가 법 안에 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미키를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계속 마주하는 것이 괴롭지 않았을 리 없음에도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 아름다운 순정이어서.

인간성이 메마른 지옥도에서 우리를 구하는 건 결국 사랑이다. 그것이 독점적 연애 관계든, 무어라 정의 내리기 이전에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든,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든. 오늘의 내가 하루를 살아가기 전에, 나를 끌어안고 내 아픔을 애정과 안타까움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 사랑이 있고.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잘 먹고 애쓰며 살아낸 과거의 내가 있다. 그리고 이런 내가 다가오기를 미래에서 (조금을 나를 답답해 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나도 있다. 이 모든 존재들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을 산다.

인간이 인간 되는 힘, 상상력
하지만 모든 사람과 자기애 같은 혹은 연인에 대한 사랑 같은 깊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인간성의 최소선을 우리는 도로시에게서 볼 수 있다. 나 자신과 연인. 가장 가까운 인물들을 제외하고 미키의 목소리, 더 나아가 크리퍼의 목소리까지 들으며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인물이자, 소통의 방식만 놓고 보면 마셜과 일파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도로시는 크리퍼의 반응에서 그들이 대화를 시도할 가능성을 상상하는 인물이자, 미키를 인간으로 대하는 유일한 과학자다. 미키의 손이 잘려 나가도 '와 대박' 이러고 있는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들에게 미키의 신체는 사물화되어 있다), 미키의 수명이 10분인지 15분인지까지 살뜰하게 신경 쓰고 있는 유일한 과학자다. 타인을 사물화하지 않는다는 건,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로시가 과학자로서 가진 가장 큰 힘은 아마도 바로 이 상상력이 아닐까. 가능성을 상상하고,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며, 지금 없는 것들을 그려 볼 수 있는 능력. 돌아보면 영화에서 마셜과 일파가 만든 세계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인물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대우받고 죽어가는 미키와 함께하는 매일을 상상하는 나샤도, 독재자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미키18도.

결국 사랑도 소통도 그런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다 보면 제일 끔찍한 것도 제일 애틋한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일 끔찍한 인간의 상태, 그저 인간성이 메말라 온 세상을 지옥도로 인지하는 상태를 벗어나려면, 소통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어디선가 다양한 의미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코처럼 고함을 질러 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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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포효 혹은 절규
감독: 루아나 바즈라미
출연: 안디 바이고라, 플라카 라티피, 에라 발라지, 루아나 바즈라미
시놉시스: 코소보의 한 작고 후미진 마을에 사는 세 젊은 여성은 자신의 꿈과 야망이 억압받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암사자들의 포효를 들을 시간이다.
<암사자들이 포효하는 언덕>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학교는 끝났다>, <레벤느망>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두각을 나타내는 중인 배우 루아나 바즈라미의 감독 데뷔작이다. 바즈라미 감독은 자신의 출신지인 코소보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로 이번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주간 최연소 감독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코소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세 친구 체, 리, 젬은 자신들의 꿈과 자유가 억압받는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한다. 언덕 위에서 시작부터 장난치듯 힘껏 내지르던 이들의 포효는 점점 절규로 들리는 듯하다. 이 영화는 코소보라는 특수한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영화이기도 한데, 물론 이것이 영화를 봄에 있어 필수조건은 아니겠지만 이들의 일탈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동하는 데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칠 것이다. 코소보는 전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고, 다수를 구성하던 알바니아계인들이 상대적 소수의 세르비아계인들을 대상으로 분리독립을 주장하면서 코소보 내전이 발발했다. 이에 세르비아군이 인종 청소로 대응하며 알바니아계인들을 학살하다시피 했고, 국제사회의 개입이 있고서야 코소보는 독립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독립을 지금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자치주로 인식하고 있고, 코소보는 그만큼 아픔을 가진, 과거의 폐허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나라다.
멀리 위치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그리 가까운 관계의 나라도, 잘 알 만한 나라도 아닐뿐더러 이 영화의 핵심이 여기에만 있지는 않지만 위의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코소보라는 배경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그렇다. 세 주인공 체, 리, 젬은 이런 나라 코소보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감독 자신이 등장해 연기하는 인물 '레나'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코소보에서 파리로의 실제 이민 경험과 흡사한 설정의 인물인 만큼 그 입을 빌려 직접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코소보 출신 이민자의 위치를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들과 달리 파리로 가 살고 있는 레나가 부럽다는 세 친구의 말에 레나는 파리보다 코소보가 좋다며 오히려 너희가 더 자유롭다 말한다. 이 말은 그의 위치를 동경하는 세 명에게는 와닿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파리에서 외지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의 입장에 대해 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코소보에 사는 이들이 동경하던 파리로 간 이민자 또한 더 나아 보일지는 몰라도 겪게 되는 차별과 억압이 있고 이들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스쳐 지나가듯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자전적 경험이 녹아들어 간 가장 특별한 장면이다.
가게를 터는 등 점점 강도 높은 일탈을 즐기며 마음껏 포효하던 세 친구는 결국 자신들의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유일한 '실수'라 칭해지긴 하지만 이들이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다는 전개는 인상적인데, 이 점은 두 가지로 읽혔다. 하나는 결국 고향을, 정체성을 잊을 수는 없다는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실패'의 의미였다. 마지막의 현실인지 가상인지 모를 핏빛 엔딩으로 미루어봤을 때 이들의 복귀는 후자의 의미로써 다가왔다. 그래서 이들의 복귀는 이들이 유일하게 가진 곧 터져버릴 심장 즉, 젊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최후의 유일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마치 시작부에서 힘껏 내지르던 언덕 위 포효 혹은 절규처럼.
데뷔작에서만 느낄 수 있을 법한 날 것 가득한 이미지들이 좋게 다가오면서도 영화 자체는 예상보다 평이해 아쉽게 느껴지지만, 이 영화를 봄으로써 감독 루아나 바즈라미의 차기작이 궁금해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Schedule2022-08-27 10:00-11:24 <암사자들이 포효하는 언덕>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2022-08-41 16:30-17:54 <암사자들이 포효하는 언덕>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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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코엔 형제 영화. 오래 전,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내용이 조금 황당해서 코엔 형제의 영화로는 조금 실망스러운걸,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수 많은 영화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취향의 영화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코엔 형제'를 든다. 좋아하는 감독도 많고, 훌륭하고 뛰어난 작품도 많지만, '내 취향'은 '코엔 영화'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면 볼수록 매료되는 특이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를 한번만 보고 그만두지 않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다시 보면, 같은 영화임에도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모든 훌륭한 영화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데,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영화들이 그렇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도 그렇다. 관객은 영화를 처음 볼 때 주로 이야기(서사)를 따라가게 된다. 이야기만 따라가는 것도 벅찰 때가 많아서, 영화의 여러 요소들 - 미장셴, 음악, 배우, 미술, 의상, 배경, 촬영, 음향 등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것 - 을 꼼꼼히 살필 여유가 없다.
훌륭한 작품은 이야기도 훌륭하지만, 앞에서 말한 영화 요소들을 하나씩 세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영화 마니아들은 한 영화를 열 번, 스무 번 이상도 보는데, 나는 코엔 형제 영화를 모두 여러 번 봤지만, 특히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를 몇 번씩 보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이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도 처음 봤을 때와 지금 다시 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코엔의 영화는 역시 훌륭했다. 다만 내가 이 영화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것 뿐이었다. 주인공 에베레트 율리시즈 맥길의 이름은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이의 희랍어 이름이다.
영화 타이틀에서도 밝혔듯이 이 영화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기본 모티프를 가져왔다. 즉, 주인공 오디세이아가 트로이 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1937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새롭게 해석해 만든 코미디 영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서양 문학의 원형이며, 영웅 서사의 시작이고, 서양의 모든 문학 작품에 영향을 준 중요한 작품이다. 오디세이아는 영웅이며, 그가 고향(집)으로 귀향하는 과정은 '영웅 서사'의 모델이다. 즉 영웅은 수많은 고난과 비극을 겪으며 시간과 공간을 뚫고 귀향하는데, 이때 영웅이 겪는 고난은 모험이 되고, 영웅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며, 비극은 영웅의 내면을 단련하는 과정이 된다.
영웅은 불사조가 아니기 때문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지만, 그때마다 도와주는 인물이 등장하고, 영웅은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이런 기본 틀을 가지고 분석하게 되면, 기독교의 중요한 인물인 '예수'도 오디세이아적 영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는 탄생부터 특이하다.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는데, 그것도 마굿간이다. 그는 자라면서 아버지를 쫓아 목수가 되지만, 곧 집(고향)을 떠나 사막에서 신을 만난다. 영웅의 고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는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나 여기저기 떠돌며 자신의 신념을 설파한다. 그를 따르는 사람도 있지만, 가는 곳마다 예수를 비난하고 비웃으며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결국 예수는 유다의 배신으로 로마군에게 잡혀 골고다 언덕에서 죽는데, 사흘만에 부활한다. 예수가 죽을 줄 알았던 가족들은 살아온 예수를 보고 놀라고, 예수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사라진다. 고난과 비극을 겪으며 성장하는 영웅의 서사와 매우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율리시즈는 죄를 짓고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다. 그는 함께 쇠사슬로 묶인 두 명의 동료-피트, 델마-와 함께 탈출한다. 이들은 달리는 기차를 타려다 실패하고, 기차 선로를 고치는 수레를 발견하고 올라탄다. 수레를 끄는 사람은 흑인 노인인데, 맹인이다. 이 노인은 세 사람을 향해 이상한 말을 하는데, 노인은 영웅의 앞길을 예언하는 예언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세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어떨지 모르는 상태에서, 예언자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다.
셋은 숲속을 헤매다 우연히 피트의 사촌 워시를 만난다. 그곳에서 쇠사슬을 끊고, 밥을 얻어 먹으며 하룻밤을 보내는데, 워시가 현상금이 탐나서 추격대에게 이들의 위치를 알린다.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헛간 건물을 포위하고 항복하라는 추격대를 피해 달아날 때, 워시의 어린 아들이 도와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영웅을 돕는 것이다.
이들이 다시 숲속을 지날 때, 흰옷을 입은 마을 주민들이 수십 명 강물 있는 곳으로 걸어오더니 강에서 세례식을 시작했다. 세 명 가운데 두 명 - 피트, 델마 -은 그 장면을 보고는 목사에게 달려가 세례를 받는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이제 신에게 용서를 받았으므로 결백하다고 외친다.
세 명은 다시 시내 가게에 들렀다가 다른 사람 자동차를 훔쳐 타고 가는데, 중간에 흑인 토미 존스를 태운다. 토미 존스는 기타 가방을 들고 있었고, 자기가 지난 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대신 기타 연주를 배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악마는 백인이며, 눈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명백한 메타포다. 흑인은 영혼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미국 사회현실을 비꼬고 있는 것이다.
토미 존스는 티샤맹고에 가면 깡통에다 대고 노래하고 기타를 치면 돈을 준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다. 세 사람도 토미 존스의 말을 듣고 함께 가기로 한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허허벌판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 WEZY였다. 이 방송국은 미시시피주 밸리 파크에 세트로 지었고, 1930년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율리시즈와 세 명은 방송국으로 들어가 대놓고 말한다. 여기가 깡통에다 대고 노래하면 돈 주는 곳이냐고. 방송국이라야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사장 혼자 운영하는 곳이었고, 싱글 레코딩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비가 있는 곳이었다. 사장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이들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옛날 노래를 불러달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나오는 노래가 '슬픔에 잠긴 남자(I Am A Man Of Constant Sorrow)' 다. 이 노래는 남부에서 오래 불리운 전통 음악으로 음악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알고 있고, 좋아한다는 건 분명하다.
이 음악이 처음 방송을 통해 알려진 건 1913년이었고, 처음 노래를 부른 사람은 딕 버넷(Dick Burnett)이었다. 최초의 노래 제목은 'Farewell Song'으로 발표되었고, 나중에 Man of Constant Sorrow 로 바뀌었다가 이 영화에서처럼 I Am A Man Of Constant Sorrow 라는 제목이 되었다. 1928년에 Emry Arthur가 녹음을 했고, 이후 이 노래는 The Stanley Brothers, 밥 딜런, 주디 콜린스, 피터 폴 앤 메리 같은 유명한 가수들이 불렀으며, 빌보드 차트 85위까지 오른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배경인 1937년이라면 이 노래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최초의 가수였던 딕 버넷이나 스탠리 브러더스의 노래는 창법이 옛날 방식이어서 흥겹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율리시즈와 친구들이 부른 - 이들은 노래하는 팀 이름을 급조했는데, '밑바닥 아이들'이라고 했다 - 노래는 슬픈 가사이면서 리듬은 흥겹다. 메인 보컬인 율리시즈(조지 클루니)가 부른 목소리는 조지 클루니 본인이 아니고, 포크 가수인 Dan Tyminski의 목소리다.
이들이 부른 노래에 기분이 좋아진 방송국 사장은 각각 10달러씩을 주면서 계약했고, 이들은 거액 10달러를 받아 몹시 기분이 좋았다. 방송국에서 나오는 길에 건물 앞에서 우연히 잘 차려 입은 백인들을 만나는데, 이들은 미시시피 현 주지사 페피 오데니얼 일행이었다.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라디오 유세를 하려고 방송국에 들른 것이다.
세 명은 토미 존스와 헤어저 다시 길을 떠나고, 중간에 혼자 은행강도를 하다 도망치는 조지 넬슨을 만난다. 조지 넬슨과 읍내에서 은행을 털고, 조지 넬슨은 밤에 갑자기 훔친 돈을 세 명에게 모두 주고 숲속으로 사라진다.
세 명은 차를 훔쳐 길을 떠나다 피트가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서 목욕을 하는 세 명의 여인을 발견하고 달려간다. 세 명의 여인은 고혹적인 모습으로 세 남자를 유혹하고, 이들은 정신을 잃는다. 여기서 세 명의 여성이 '인간'인지, 요정인지, 악마인지 확실하지 않다. 나중에 율리시즈는 이 여성들을 두고 '바빌론의 창녀들'이라고 비난한다. 이들이 깨어났을 때, 피트만 사라졌고, 피트가 입었던 옷에서 개구리가 나오자 피트가 개구리로 변한 것이라고 델마가 말하며, 개구리를 소중하게 데리고 다닌다.
율리시즈와 델마는 식당에서 우연히 사기꾼 대니얼 티그를 만난다. 성경을 판매하는 사업을 한다는 이 사기꾼은 두 사람을 때려눕히고 돈을 빼앗아 달아난다. 이 시간, 피트는 추격자들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다. 사기꾼에게 강도를 당해 돈을 다 뺐긴 율리시즈와 델마는 트럭을 얻어 타고 길을 가다 우연히 죄수들과 노역을 하고 있던 피트를 발견하고 놀란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율리시즈는 아내와 딸들을 만난다. 아내는 내일 약혼자와 결혼식을 한다고 말하고, 율리시즈는 아내의 약혼자 버논 월드립과 싸우다 얻어 맞기만 하고 쫓겨난다. 율리시즈와 델마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단체관람을 하러 온 죄수들 사이에서 피트를 발견한다. 그날 새벽, 피트를 구한 두 사람. 율리시즈는 피트와 델마에게 보물은 없었고,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한다. 탈옥한 이유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은 보물보다 값진 우정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숲속에서 우연히 KKK단 집회를 발견하고, 그 집회에 잡혀온 토미 존스를 구출한다. 이들이 읍내 마을회관에서 분장을 하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다시 I Am A Man Of Constant Sorrow 가 흘러나온다. 사람들의 열광적이고 폭발적인 반응에 놀라는 세 사람. 이들이 방송국에서 녹음한 노래가 그 사이 엄청난 히트를 한 것이다.
이때 KKK 집회에서 돌아온 주지사 후보 호머 스톡스가 노래하는 네 명을 지목하며, 그들은 백인이 아니고, 유색인종이며 없애야 하는 것들이라고 소리지른다. 호머 스톡스는 개혁적 인물로 알려졌지만, 알고보면 인종주의자에 백인우월주의자였던 것이다.
반면, 현 미시시피 주지사이면서, 선거에서 매우 불리했던 페피 오데니얼은 '밑바닥 아이들'의 인기에 편승해 시민들의 환심을 사고, 즉석에서 네 명의 죄를 사면한다. 이들이 마을회관에서 나오자 은행강도 조지 넬슨이 체포되어 거리를 지나가는데, 자기가 전기의자에 앉아 죽을 거라고 떠든다.
율리시즈는 아내와 다시 사이가 좋아졌지만, 다시 결혼식을 하려면 집에서 반지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한다. 율리시즈는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고향집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추격자들에게 다시 체포된다. 율리시즈와 동료들이 주지사에게 사면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추격자들은 이들을 교수형으로 죽이려고 밧줄을 묶는다. 이때 계곡을 따라 급류가 쏟아져 내리고, 율리시즈의 고향집은 물에 잠긴다. 이곳에 댐이 생긴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렇게 다시 구사일생한 율리시즈와 친구들은 도시에 있는 율리시즈의 아내를 만나고, 처음 탈옥했을 때 만났던 기차 선로 수레를 끄는 흑인 노인이 다시 등장해 서서히 멀어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등장하는 배우들은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데, 조지 클루니는 나무랄 데 없는 미남이지만, 존 터투러(피트), 팀 블레이크 넬슨(델마)의 표정 연기는 압권이다. 여기에 시작 부분에 잠깐 나온 흑인 노인, 은행강도 조지 넬슨, 방송국 사장, 아내의 약혼자 버논 월드립, 성경 사기꾼 존 굿맨 등 배우들 각자 개성 있는 연기로 영화가 다채롭게 채워지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들은 포크송, 컨트리송들인데, 특히 남부 미시시피가 흑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고, 과거에는 목화 농장이 많던 지역이라 흑인들의 노동요가 발달한 지역답게 흑인 음악과 블루스에서 파생하는 컨트리 음악, 포크 음악이 낯설지 않고 우리의 정서와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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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앞에 선 사회적 약자의 환상
2019년 영화 <조커>는 한 사회적 약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심리적 파탄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무관심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외감, 무시당하는 상처, 그리고 이를 덮으려는 몸부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했고, 결국 그를 비극의 주인공, 조커로 만들어 갔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 전작의 이야기를 잇는다. 여전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가 꿈꾸는 사랑과 인정에 대한 허황된 욕망을 탐구한다. 이번 작품은 혁명의 영웅으로 떠오른 조커보다는 다시금 약자로 돌아간 아서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라는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다룬다.
[첫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패배감
아서 플렉에게 패배감은 평생을 관통한 기본 정서였다. 그는 태어나 한 번도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받아본 적 없었고, 언제나 비웃음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이상한 순간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증상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소외되었다. 그는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의 패배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여러 번 시도하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더 깊은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감은 일종의 디폴트 상태였고, 이로 인해 그는 점점 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감은 그가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이러한 패배감이 그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의 위치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끝없이 패배감을 체화하며 살아간다. 그는 조커라는 가면을 쓰며 잠시나마 패배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 번째 감정] 조커의 분노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 아서는 더 이상 아서 플렉이 아니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패배감을 분노로 감추고,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당당함을 얻는다. 이 순간의 조커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강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관객에게조차 매력적으로 비춰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듯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아서는 조커라는 가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억압과 무시를 세상에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통해 세상에 맞서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당당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표출은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영화 속에서 할리(레이디 가가)는 아서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조커였다. 즉,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닌 그의 분노와 그로 인해 얻어진 위태로운 매력을 사랑한 것이다. 영화는 조커로 변신한 아서의 모습을 뮤지컬과 같은 화려한 장면으로 표현하며 그를 영웅처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 화려함 뒤에 남은 것은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온 초라한 모습이다. 이 순간 관객은 아서의 현실과 그가 잠시나마 꿈꾼 조커의 허상을 동시에 보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감정] 아서 플렉의 억울함
아서의 삶에서 억울함은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그저 사회적 보호의 부족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언제나 그를 소외시키고 억압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며, 상황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의 친구조차도 아서를 무서워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건 아서 스스로 얻고자 해서 얻은게 아니며, 우연히 그에게 찾아온 삶의 굴레들이다.
아서에게 억울함은 그가 조커라는 인물로 주목받을 때조차 여전하다. 그는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이용해 재판에 나서지만, 여전히 아서 플렉으로서의 자아는 조커가 얻는 주목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조커로서 사람들에게 환호받아도, 아서로 남아도, 결국 그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뿐이었다. 이러한 억울함은 그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게 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이 억울함은 그의 패배감, 분노와 뒤섞여 그를 점점 더 깊은 나락으로 몰아넣으며 결국 그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몰락뿐임을 암시한다. 아서는 조커로서의 삶에서도, 아서 플렉으로서의 삶에서도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하며, 결국 그 억울함 속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그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도 그는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한다. 그저 한 번 반짝했던 범죄자로 남을 뿐이다.
촬영이나 연기의 완성도는 높지만...
<조커: 폴리 아 되>는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몰락의 과정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의 서사를 다루기보다는, 아서 플렉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아서는 태어나서부터 사회적 차별과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으며, 할리의 등장은 그에게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아서의 일생 중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조차도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관객들은 조커의 환상적인 모습이 아닌 아서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는 감독이 아서의 삶을 끝까지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의 서사를 마무리짓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까지 포함해 모두가 조커를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끝까지 아서의 현실을 강조하며 이 이야기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전작의 연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뮤지컬 장르를 도입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장르적 도전을 통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그 뮤지컬 장르가 원래의 이야기와 잘 이어 붙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되어버렸다. 촬영이나 화면이 고급스럽고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게 이야기와 잘 연결되지 않으면서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아서와 조커 사이의 심리적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레이디 가가 역시 할리 역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그녀의 연기는 영화에 감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이번 영화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사회 변혁 이나 사회 파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의 삶과 그가 꿈꾸는 허망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영화의 완성도는 배우들의 연기, 미장센의 아름다움, 그리고 뮤지컬 장면의 독창성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조커라는 인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서의 고통을 마주하게 하며, 그의 몰락이 결국 우리의 사회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을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DM8_51b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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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어른들은 이제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의 고독
감독: 다미앵 마니벨, 이가라시 고헤이
출연: 코가와 타카라
시놉시스
아버지가 새벽같이 일터로 나간 어느 날, 한 소년 타카라는 자주 만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전해주기 위해 일탈 여행을 떠난다. 아무도 모르게, 용감하게. 눈길을 헤치고 아버지를 찾아나서지만 아버지는 찾지 못하고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갇히고 만다. 타카라의 모험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대사가 없는 영화
이 영화는 굉장히 불친절하다 . 대사가 없고 아이의 표정만 보이며 아이의 행동들이 단편적으로 편집되어 있다. 영화 내에서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 타카라는 명랑한 아인지, 말을 잘 안듣는 유형인지 등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그저 타카라에게는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있는 전형적인 가족 관계가 있다는 존재 사실만 보여준다. 가족 간의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모든 포커스가 타카라의 여정에만 맞춰져 있다. 타카라의 여정에 관계 없는 부가적인 설정은 설명이 배제되어 있다. 그래서 타카라의 행동과 표정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 장면마다 하나의 사진집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였을 때의 기억을 장면장면으로 편집해 기억하고 있는 어른의 관점으로 말이다.
어른은 아이를 다 알지 못합니다.
감독은 "타카라의 여정에 초점을 맞춰 어른의 개입이 없는 세상 속 아이들의 모험"을 그려내고 싶었다. 위험해 보일 수 있는데도 어떤 어른도 "아이야, 무슨 일이니" 묻는 어른이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른에게는 위험이지만 아이의 시각에서는 모험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핵심이었다.
아이들의 삶은 어른들에 의해 재단된다. 정작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표현할 기회가 없다.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시각에서 아이의 삶은 끊임없이 평가당한다. 어른들과 완벽하게 소통을 해내지 못하는 나이이기에 아이는 고독을 느낀다. 그 고독은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어른들을 향해 자신의 고독을 말할 능력과 의지의 부족함에서 나온다.
부모는 자식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반만 알아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의 관점에서 평가당해온 삶 속 진짜 내 이야기를 했을 때 부정당했던 경험이 상처로 남았다면 '아이 시절의 고독'을 잘 숨겨온 사람은 아니었을까.
이처럼 타카라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그 어떤 가족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아이의 웃는 낯 속 숨겨진 진실은 아이가 표현할 때까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타카라가 그런 모험을 자처할 만큼의 표현 말이다.
영화의 비하인드
감독에 따르면 상황 설정은 있었지만 전적으로 실제 타카라의 행동을 따라가며 찍은 다큐적 속성의 영화라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아이가 개와 목소리로 다이다이 뜰 때 그렇게 순수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건 연기라기 보단 찐텐이었을 테니까.
영화가 끝났는데도 수영을 했다는 제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산 시장 그림을 그렸기 때문인 걸까 생각했는데 관객과의 대화 중 한 의견을 듣고 아하! 했다. "설원에서 아이가 뒹구는 게 마치 수영하는 것 같았다"는 말이었는데 훨씬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집단지성이 중요한가 보다.
영화 속 타카라는 꽤 오랜 시간 잔다. 그걸 보며 이 모든 모험이 사실 꿈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컷이 그토록 단편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했는데 감독이 이에 대해 확신을 줬다. '꿈에 대한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어른에게 아이 시절은 꿈같이 희미해져 버렸으니 그런 연출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총평
영화가 대사가 없지만 내용은 명확한 편이다. 하지만 이해가 단박에 되진 않아 생각의 여지를 많이 주는 영화다. 영화 내용과는 별개지만 감독이 "타카라가 정말 눈 속에서 매번 뒹굴어 신기했다"라는 코멘트가 진심 너무 귀여워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의 천진난만함과 그런 아이를 데리고 영화 한 편 찍겠다고 달려든 어른들의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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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등 (2015)
영화 <4등>의 중심 인물은 모두가 피해자다. 이미 첫 아시안 게임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다가오는 아시안 게임의 유망주로 떠오르는 젊은 수영 천재 ‘광수’,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으나 매번 4등만 하는 ‘준호’, 기자이자 준호의 아버지인 ‘영훈’, 악착같은 준호의 어머니인 ‘정애’. 간략한 소개로만 보아선 이들이 무슨 피해자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영화속 이들을 지긋이 바라보면 그들이 어딘지 말도 안되는 선택을 하며, 그 선택의 원인을 좀처럼 찾을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속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중력을 행세하는 힘의 주체는 대체 무엇인가? 쉽게 보이지 않는 이 희미한 중력장의 실체는 영화속 인물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
1-1. 광수
가장 먼저, 광수의 경우는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태릉으로 출발하는 날 그의 오래된 고향의 폐건물에 들러서 광수는 불법 도박을 하고 있는 고향 선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폐건물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광수의 뒤에 떨어진 말. “내일 가도 되잖아, 너 천재잖아”라는 그 말이 광수를 다시 도박판으로 불러들인다. 서울로 떠나려던 광수는 뒤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시고 뒤돌아서더니, 다음 컷에는 어느덧 광수가 도박판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컷으로 이어진다. 광수는 이 지점에서 어촌 마을의 도박에 빠진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진 셈이다.
광수는 몇날며칠을 도박에 빠져 태릉선수촌에 늦게 들어가게 되고, 뒤늦게 들어간 광수를 본 선수촌 코치는 대걸레 자루로 광수에게 체벌을 가한다. 대걸레 자루로 백 대. 그 체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광수의 몸은 분명 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광수는 저항하고, 저항은 코치의 심기를 건드린다. 곧 체벌은 감정적인 폭력으로 변질되고, 광수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선수촌을 떠난다.
1-2. 어머니 정애
정애는 아들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아들 준호는 매번 4등만 하고, 정애는 준호의 성적이 아쉽기만 하다. 정애는 준호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기꺼이 악역이 되고자 한다. 준호에게 일부러 밉살스럽게 ‘4등’이라고 부르는 모습, 준호에게 대놓고 “엄마가 싫지? 그러면 수영할 때 엄마가 뒤에서 쫓아온다고 생각하고 해 봐”라는 식의 말들을 하며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다. 정애가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첫째로 아들이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애가 열정을 부을만한 것이란 이제 아들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심한 교육열로 유명한 한국사회 수많은 어머니의 초상을 담은 것이 영화 <4등> 속에서 그려진 정애의 모습이다. 특히나, 그 자식에게 거는 간절함의 깊이는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가 낮을수록 짙어진다. 출산과 육아후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의 삶만을 좇는 정애에게는 사회적 지위가 없다. 그녀가 사회속에서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아이들의 교육밖에 없다. 이는 한국사회의 구조, ‘여성’에게 부과되는 독박육아와 강력한 사회적 단절의 탓이다. 이런 구조 탓에 어머니 정애는 자기 자신에게서 더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두 아들을 다그친다. (자신처럼)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으면,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1-3. 아버지 영훈
아버지는 수영 천재이자 유망주인 광수를 만나고 이 유망주를 일찍이 알아보고 친해진다. 영훈은 광수의 성적을 묻고 광수가 높은 기록을 세웠다는 대답을 듣고는 광수에게 기대를 걸며 명함을 건네준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광수에게 호의적이다. 기자인 그가 수영 유망주와 친해지고자하는 목적은 어느정도 알 법하다. 그리고 이런 가벼운 인간관계는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져내린다는 사실 또한 충분히 알 법하다.
광수가 태릉을 박차고 전화를 건 것은 ‘영훈’의 번호였다. 광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대걸레 자루로 100대를 맞으라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신이 있어서 늦게 간 겁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1 주일 늦었습니다. 그리고 광수의 절박한 전화를 받은 영훈의 대답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였다. 그리고 이런 영훈은 후에 자신의 아들 준호가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에게 체벌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광수를 찾아가 그에게 아이에게 체벌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를 통해서 영훈은 분명하게 체벌에는 반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체벌에 반감을 갖고 있는 영훈은 광수의 전화를 외면하는데, 이 행동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란 영화를 통해서 다 알 수 없기에 추론만 가능할 뿐이지만, 가장 높은 가능성을 가진 이유를 제시해보자면, 영훈이 광수를 두둔한다고 하여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자신의 업으로 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영훈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비주류의 물결에 몸을 떠맡기라는 선택은 어렵다. 영훈에게는 일단 제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의무는 전적으로 영훈에게만 짊어져 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영훈은 다소간에 뻔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역시 그 기형적인 한국 사회의 구조탓이라고 하겠다. 여성에게는 독박육아가, 남성에게는 생계유지의 의무가. 한쪽 성별에게 주어지는 전적인 의무들이 그 의무를 짊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고, 망쳐놓는다.
1-4. 준호
“형. 1 등하면 무슨 기분이에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4등 준호는 1등을 해낸 초등 수영부 선수에게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묻는다. 이런 준호는 광수의 과거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준호는 그저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고, 엄마는 성적이 나오지 않는 준호탓에 애가 타서 새로운 코치 광수에게 준호의 지도를 맡긴다. 그리고 광수는 준호에게서 재능을 발견한다. 광수는 재능있는 준호를 키우고자 체벌로 엄하게 가르치며, 어린 준호는 당연히 맞는 게 싫다. 하지만, 준호는 가정으로 돌아와 어느순간 자신의 동생에게 자신이 받은 체벌을 그대로 재현하며 동생의 울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광수처럼.
역설적으로도 준호는 새로운 코치인 광수에게 ‘엄하게’ 교육을 받으면서, 성적은 점차 좋아진다. 하지만 성적과는 반대로 준호는 점차 코치의 체벌이 두려워 수영에서 느꼈던 순수한 흥미와 즐거움을 점차 잃게되고, 급기야 광수의 체벌 탓에 더 이상 수영을 하지 못하겠다며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수영장을 떠난다.
2. 기성 사회의 구조와 구조속의 피해자들.
이 네 명의 중심인물을 정리하다보면, 영화가 그려낸 그들의 삶은 도덕적 딜레마에 의한 긴장의 장력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광수는 태릉으로 떠아냐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장에 남고, 모욕적이고 감정적인 체벌이 싫어 태릉을 떠났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며, 정애는 자신이 악역을 맡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악행을 중단하지 않고, 영훈은 타인의 고통은 외면하더라도 자기 자식의 고통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준호는 마찬가지로 체벌이 싫었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고 권위적으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이 도덕적 딜레마들은 모두 어떤 원인에서 부터 발생하고 있는데, 이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귀납적으로 접근하면 그 원인을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영화속의 모든 문제는 불합리한 기성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어촌마을의 기성세대인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도박판에 어쩔수 없이 빠져드는 광수, 그리고 잘못은 체벌을 통해 몸속에 교훈을 새겨야 한다는 기성의 교육 방식, 양심적인 비주류에 휘말리면 생계를 보장할 수 없는 사회속에서 생계를 위해 뻔뻔해져야 했던 영훈, 이 사회속에서 이젠 자신이 무엇도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자식들은 무엇이라도 근사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애.
영화 <4 등>속 인물들을 통해서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구조주의 이론에 따라 잘못된 기성의 구조속에서 상처받는 이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쩔수 없이 잘못된 구조를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개별적인 의미와 신념을 잃고, 사회 주류의 신념과 구조를 따르는 이들의 삶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사회적 지위와 계급이 낮을 수록 구조의 요구와 강요에 더욱 순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이 기성 사회를 만든 기성 세대들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아픔은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대적 상처이며, 일반적인 역사적 기류에 의한 것이지 특정한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기성의 세대를 비판하는 것이아닌 기성의 사회 구조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되돌아보며 무엇을 고쳐나가야 할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3.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들
영화 <4 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현재까지 앓고 있는 상처를 재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몇몇 사람들에게는 지난한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처지와 영화속 불합리한 상황들을 동일시 여겨볼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 <4 등>속 인물들은 구조에 의해서 요구된 악역을 어느정도 떠맡는다. 이를 통해 관객은 상처를 지닌 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역설적인 비인간성을 영화속에서 목격하며, 이 영화가 마냥 통렬한 사회비판의 영화로만 다가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아마도 비판만을 담은 영화였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테지만, 영화 <4등은> 사회구조의 문제성에 대한 비판만을 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한 줄기의 희망을 예술적으로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4 등>은 조금 높게 평가하고 싶은 영화다.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은 개별체의 순수한 특성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의 지문과 홍채가 다르듯이 인간이 가진 개별성은 인간 종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이 모인 사회의 다양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때때로 ‘구조’는 구성원들에게 특별한 지위와 책무를 떠맡기거나 강요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순수한 특성, 개별성과 주체성을 잃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강요와 구조가 정의한 개체성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순수한 개체성을 추구할 때 아름답게 빛난다. 영화 <4등>에선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사회적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는 체벌이 두려워 수영장을 떠난 준호가 다시금 수영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늦은 새벽에 수영장을 찾아와 홀로 어둡과 차가운 물속에서 빛을 따라 헤엄치는 장면에서 그렇다.
이 씬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어둑한 새벽, 어둑한 물속에서 감감히 출렁이는 빛의 주변을 헤엄치는, 절대적인 어둠속 희미한 빛의 주위로 떠도는 여리고 어린 피사체의 모습이 씬에 아름답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본래 밝기만 해서는 그 밝음의 정도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인지라, 어둠속에서의 그 희미한 빛을 향해 헤엄치는 준호의 모습은 그 어떤 희망적인 언어보다도 강렬한 희망의 언어로 읽힌다. 비록 그 빛이 준호를 수영장에서 꺼내올리는 빛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그 결과로만 축약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4 등>은 이렇게 구조속에서 피해받는 이들의 고통과 초상들을 보여주는 한편으로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사회구조 내의 개별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에서 탈피하여 개별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과정이 지닌 순수함의 미학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희미하지만, 희미하기 때문에 강렬한 희망의 메세지를 유려하게 그려내어, 작금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판의 메세지와 함께 영화의 미학적인 추구 또한 충실히 따르고 있는 꽤나 괜찮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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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를 넘은 우정
2024년 9월 7일 토요일 20시에 은평 롯데몰 9층 스카이필드 야외 풋살장에서 잔디극장 야외 상영회가 개최되었다. 제12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선착순 무료로 진행한 상영회였다. 영화는 <숀더쉽 더 무비: 꼬마 외계인 룰라!>(2020)이 상영되었다.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은 바람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품으며 날아가는 밤이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IMDB
<숀더쉽 더 무비: 꼬마 외계인 룰라!>는 아드먼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최신작이자 ‘숀더쉽’ 두 번째 시리즈 영화다. 점토를 사용하여 스톱 플레이 모션을 활용하는 연출 방식은 아드먼 애니메이션의 아이덴티티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우주를 넘나드는 내용이므로 점토 방식을 넘어 UFO나 로봇의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다. SF 소재 활용뿐만 아니라 작품 전반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E.T>(1982), <월-E>(2008), <아마겟돈>(1998) 등 SF 영화의 오마주를 영화에 담아낸다. 특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OST와 함께 표현하는 오마주 연출 방식과 <월-E>의 오마주 캐릭터는 직관적이다. SF영화 오마주를 통해 제작자는 고전 영화의 존경심을 전하고, 어른들에게 친숙한 장면을 전하며, 아이들에게 재미를 전한다.
소재의 활용으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화는 캐릭터의 시너지를 더한다. 꼬마 외계인 룰라의 신비스러운 능력과 귀여운 외모는 ‘숀더쉽’ 시리즈에 어울리는 캐릭터로 소화된다. 초반부, 숀과 친구들이 벌이는 엉뚱한 장난과 사고들이 무색하게 룰라의 사고 역시 만만치 않다. 숀이 피곤한 안색을 보일 정도로 벌이는 룰라의 장난과 ‘에이전트 레드’ 일당의 추적을 피하며 UFO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둘은 우정을 쌓아간다. 한편, 비처의 우정은 특별하다. 숀과 친구들의 장난을 제어하는 양치기 개로 숀과 대립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룰라를 함께 집으로 데려가 주겠다는 공통된 목표로 대립자에서 협력자로 변하는 과정은 관객의 감정도 변한다. 숀과 비처는 피자를 통해 룰라를 만난다. 룰라를 무사히 집으로 바래다주는 결말처럼 피자로 처음 연을 닿은 이들의 둥근 우정은 달처럼 아름답다.
※본 영화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으로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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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팬, 웬디의 시각으로 새롭게 재해석되다-영화 웬디
올해가 피터팬 탄생 110주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피터팬을 재해석한 웬디 라는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개봉 전 시사회에 참석하여 영화를 관람하고 왔어요!
원작과 마찬가지로 판타지 장르의 성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조금 다른 영화로 만들어졌는데요.
웬디가 중심 인물이 되어서 피터를 만나면서 한 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어요.
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에요.
나이 듦에 대한 생각과 아이와 노인을 대비시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냅니다.
특히나 아름다운 섬의 풍경과 신비로운 고래의 모습이 눈길을 잡아두는 영화입니다.
단, 일반 판타지 물의 오락적인 성향은 적은 영화에요. 잔잔하고 진중합니다.
그래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조금 심심한 듯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우들은 유명한 배우가 나오지는 않지만 웬디 역을 맡은 데빈 프랑스의 좋은 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봐주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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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언차티드> 15초 예고편
누구나 꿈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요? 억만장자 돼서 꼭 뜨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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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실크 로드> 메인 예고편
지금 당장 마약을 흔적 없이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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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X를 날렸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정체불명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