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us2025-03-26 00:26:13
인생을 스윙할 수 있다면
영화 <스윙 걸즈> 리뷰
청춘물이라는 환상
중학생 때 재활용 작가의 웹툰 <연민의 굴레>를 무척 좋아했다. 허술한 반항아 ‘차련’과 그녀의 소꿉친구이자 완벽한 모범생 ‘안민’이 주인공인 성장만화로, 차련은 불량 학생 소굴로 알려진 ‘미스터리 클럽’에 들어가서 거창한 꿈 대신 소소한 일상을 돌보며 살아가도 되는 점을 배우고, 학생회 소속의 안민은 몰래 차련과 친동생(안미나)가 가입된 미스터리 클럽을 보호하면서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다.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미스터리 클럽과 학생회의 다른 인물들도 저마다의 성장을 이루는데, 그 과정이 정말 감동적이다.
당시 <연민의 굴레>는 고입을 앞둔 내게 동아리의 환상을 심어주었다. 고등학교에 가면 저렇게 다양한 동아리가 있고, 동아리 활동을 통해 친구를 사귀고 여러 경험을 쌓으면서 자아를 탐구하고 실현할 수 있겠다는 그런 환상. 딱 <연민의 굴레> 같은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부푼 꿈을 안고 고등학생이 된 나는 동아리 활동은커녕 무한 자습 지옥에 빠진 나날만 보내며 10대를 마무리했다.
이제는 안다. 청춘물은 어른의 환상이다. 현실의 10대는 마냥 아름답고 눈부시지 않다. 아름다운 청춘을 누리기엔 10대의 정신은 연약하고 제약도 많다. 이제 나는 청춘물을 보면 설렘에 빠지는 대신 회한에 젖는 사람이 되었다. 분명 나도 지나온 시기인데 어쩜 저렇게 다를까. 어쩜 저렇게 눈부실까….
<스윙걸즈>의 눈부신 여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한 시사회에서 본 영화 <스윙걸즈>도 내겐 환상 같은 청춘물이다. 따분한 보충수업으로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아이들은 지루한 수학 수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밴드부를 위한 도시락 배달을 자처한다. 그러나 무더위와 험난한 여정을 견디지 못한 도시락은 상해버리고, 배달했던 아이들은 단체로 식중독에 걸린 아이들을 대신해 갑작스럽게 악기를 손에 쥐게 된다. 보충수업을 피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밴드부 활동은 어느새 일상의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
청춘물은 나라별로 그 매력이 다 다른데, 내겐 유독 일본의 청춘물이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다. 정서적으로 우리나라와 제일 유사하면서도 동아리 활동이 특화되었다는 특이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실제 일본의 10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겠지만, 공부와 스펙 쌓기에 짓눌린 채 10대를 보낸 나 같은 한국인에게 <스윙걸즈>의 세계는 현실과 유사해 보이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와 같다.
<스윙걸즈>의 10대들은 조금도 무겁지 않다. 그들이 피하고 싶은 건 지루한 보충수업뿐이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기 그지없다. 소리내는 것부터 쉽지 않아 폐활량을 늘려야 한다며 운동을 시작한 그들은 고된 훈련에 보충수업이나 들을 걸 그랬다며 후회한다. 그러나 후회도 잠시, 점점 악기에서 소리다운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음악에 눈을 뜬 그들은 보충수업을 듣는 것보다 훨씬 바쁜 여름방학을 보낸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새로운 경험, 예상치 못하게 발견한 즐거움, 친구들과 함께 꽃피우는 열정. 그들의 여름을 수놓은 모든 것이 너무 반짝반짝 빛나서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보상이 없는 열정이어도
<스윙걸즈>의 눈부신 여름은 식중독에 걸린 밴드부 멤버들이 예상보다 빨리 퇴원하면서 처음으로 위기를 맞는다. 밴드부를 대신해 시합 응원에 나서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던 건데 ‘진짜’ 밴드부가 돌아왔으니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단기간에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엉성한 그들의 연주보다는 능숙한 밴드부의 연주가 훨씬 시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잠깐의 백일몽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은 허무한 마음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처음부터 악기 연주는 관심도 없었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미련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시합’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없어도 다시 연주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 악기를 사고 연습할 공간을 찾아 떠돌아다니며 처음 연습했을 때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아무런 보상이 없는 연습을 계속한다.
10대 시절 황폐한 내 마음속은 보상 심리로만 가득했다. 지금 아무리 삶이 남루해도 조금만 견디면 더 나은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확신하며 모든 행복을 미래로 미뤘다. 성인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장된 행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내가 10대 시절을 회한으로만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한 순간도 현재를 즐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참고 견뎌야 했던 그 시기에 내가 얼마나 빛났는지 너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스윙걸즈>의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연습한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지. 그 시절의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든 상관없다.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가장 빛나는 선물을 얻었다. 추억이라는 선물.
영화의 제목에 들어있는 단어 ‘스윙’은 재즈 연주의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리듬감을 말한다. ‘흔들거리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에서 유래된 ‘스윙’이라는 말이 이 영화와 참 어울린다. 아이들은 계속 흔들거린다. 처음엔 소리조차도 내지 못하고 간신히 실력을 키웠더니 연주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악기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연습할 공간도 변변치 않다. 하지만 그 모든 흔들거림이 곧 리듬이다.
회한에 젖은 꼰대처럼 글을 쓰긴 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오히려 내가 전혀 늦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순간을 즐기지 못한 10대 시절이 아쉬우면 지금부터라도 즐기면 된다. 영화를 보고 나니 ‘달라도 돼, 틀려도 돼, 엇박자로 OK~?’라는 포스터 문구가 뭉클하다. 좋아하는 마음은 늦을 수 없다.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어떠한 종착지에도 다다르지 못해도 빛날 수 있는 유일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스윙할 수 있다면 나의 매 순간도 청춘물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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