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샤2025-03-30 20:09:53
홋카이도의 봄을 가로지르는 진심과 결심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리뷰
기후 위기는 변덕스러운 날씨의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아오는 불청객인 모양이다. 3월 초만 해도 예년보다 빨리 봄이 오는가 싶더니 봄은 갑작스레 훌쩍 멀어졌고 3월 마지막 주말에는 때아닌 눈까지 휘날렸다. 그래도 기어이 봄이 왔고, 꽃이 피었다. 순식간에 여름에 자리를 내줄지라도 봄은 봄의 흔적을 남긴다. 마음은 왠지 몽글몽글해진다.
4월 2일(수)에 개봉하는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봄의 감성이 듬뿍 담긴 작품이다. 1977년에 일본에서 개봉했던 영화를 리마스터링한 덕분에 영화의 배경인 홋카이도의 봄이 또렷한 총천연색으로 재현되었다. 많은 영화 팬들에게 일본의 홋카이도는 영화 <러브 레터>의 겨울 설경으로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제1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8관왕을 달성한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홋카이도의 봄 풍경을 충실히 담아내 생경하면서도 친숙한 미감을 선사하는 로드 무비다.
실연의 아픔을 훌훌 털어 버리고자 여행길에 오른 두 젊은 남녀 하나다 킨야(타케다 테츠야)와 오가와 아케미(모모이 가오리)는 로드 무비에서 어느 정도 예상되는 조합이어서 두 사람이 주인공이었다면 이야기가 밋밋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갓 출소한 시마 유사쿠(다카쿠라 켄)가 두 청춘의 여정에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흥미로워진다(시마 역을 맡은 다카쿠라 켄은 영화 팬들에게 영화 <철도원>의 주인공으로 익숙하다.) 과묵한 시마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목적지를 자꾸 변경하면서 좀처럼 자신의 속사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던 시마가 마침내 직접 입을 열어 자신의 과거를 체념적 어조로 토로하자 하나다와 오가와는 시마의 진심에 완전히 공감해 자신의 일인 것처럼 시마를 도와준다.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갈팡질팡하던 시마는 하나다와 오가와의 응원에 힘입어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진심을 받아주었는지 확인하러 가겠다고 결심한다. 홋카이도의 봄은 푸른 생기를 잔뜩 내뿜으며 시마의 진심과 결심을 뒷받침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갱생, 구원, 사랑과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경칩에 개구리가 깨어나듯이 사라진 줄만 알았던 사랑의 감정이 돌연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
- 끝 -
* 씨네랩의 초청으로 3월 25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행복의 노란 손수건>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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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마면 여자, 바지면 남자? : 셀린 시아마의 <톰보이>
2021년 한국, 아무도 여자는 무조건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치마든 바지든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으면 된다고 말하고는 한다. 그러나 이 이분법이 정말로 없어진 것일까? 통계청은 2020년 한국의 혼인 건수가 21만 4000건이라고 발표했다. 식을 올린 결혼 중 여자가 드레스를 입고 남자가 턱시도를 입은 비율은 얼마나 될까? 혹은 여자와 남자 모두 정장 바지를 입은 결혼식은 몇 건이나 있었을까? 화장실 표지판은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픽토그램으로 구성되어있다. 흑백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치마를 입은 사람과 바지를 입은 사람이다. 교복을 입는 중‧고등학생 중 바지 교복을 입는 여학생은 몇 퍼센트일까? 치마 교복을 입는 남학생은 얼마나 있을까?
<톰보이>의 주인공 로르는 두 자매 중 언니이며 머리가 짧고 바지를 즐겨 입는 소녀이다. 이사를 자주 다니던 로르의 가족은 파리의 한 지역에 정착한다. 로르와 마주친 소녀 리사가 이름을 묻자, 로르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답한다. 또래 아이들이 로르의 외모를 보고 로르를 남자아이라고 오인했고 그 무리에서 리사가 여자라는 이유로 겉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동생 쟌을 돌보는 자상한 언니인 로르는 친구들과 노는 자리에 쟌을 데려가고, 쟌을 밀친 남자아이와 몸싸움을 한다. 이 때문에 화난 남자아이의 어머니가 집에 찾아와 로르가 남자아이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것이 들통난다. 로르는 아버지에게 다시 이사를 가고 싶다고 울먹인다. 로르와 쟌은 어른들의 사정에 따라 정착하지 못하고 이사를 다녔지만, 셋째가 곧 태어날 로르의 가정은 아이의 사정을 위해 이사를 가지는 않는다. 대신 어머니는 벌을 주듯이 로르에게 파란 원피스를 입힌다. 로르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다. 리사의 집에서 틀었던 노래처럼 ‘언제나 로르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손에 강제로 끌려가 로르는 자기가 때린 남자아이의 집과 자기에게 키스한 여자아이의 집에 원피스를 입고 방문하는 굴욕을 겪는다.
숲에 원피스를 벗어 걸어둔 로르는 또래 무리로 돌아가지만, 친구라고 생각하고 어울렸던 아이들은 로르의 성기를 확인해야겠다며 로르를 사냥하듯 뒤쫓는다. 로르가 소녀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소년은 로르가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여자애라고 말하며 부정하고 싶다면 옷을 벗어보라고 요구한다. 앞서 축구를 하고 수영을 할 때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며 로르는 쉽게 상의를 벗어던지고 풀밭에서 오줌을 누는 등 거리낌없이 신체를 노출해왔지만, 여성임을 확인받기 위해 탈의할 것을 요구받는 순간 노출은 수치가 된다.
<톰보이>는 프랑스라는 구체적인 장소성을 가지고 있으나, 톰보이 로르의 이야기는 많은 나라와 사회에서 통용될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어째서 신체적 특징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른 나이부터 여자는 운동을 하다 상의를 벗을 수 있는 특권을, 아무데서나 소변을 볼 수 있는 권리를, 치마를 입지 않을 자유를 박탈당하는가? 아직까지 여자는 바지를 입을 수 있으나 치마를 벗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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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적 썸머시점에서 바라본 <500일의 썸머>
(위 글은 결말을 포함한 영화 전반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대기업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마세요.' 나도 모르게 그 문구가 뇌리에 박힌 탓인지 이후 몇 번에 연애에서 종종 그 말이 떠올랐다. 처음엔 나를 보며, 다음엔 상대방을 보며. 영화 <500일의 썸머>는 한때 톰이었고, 썸머였던 우리들의 연애를 그린 로맨스 아닌 로맨스영화이다.
기념일에 흔히 쓰이는 카드를 만드는 회사에서 재직 중인 톰과 썸머. 톰은 그곳에서 카드에 들어갈 문구를 만들고, 썸머는 사장의 비서직으로 일하던 중 톰은 남몰래 썸머를 마음에 품는다. 그렇게 홀로 호감을 가졌던 톰은 우연찮은 기회에 썸머와 가까워지게 되고, 회식에서 그녀와 묘한 기류를 풍긴 그는 이후 썸머의 키스로 그녀와 한층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 썸머와 남몰래 비밀연애를 하는가 싶었던 톰. 그러나 썸머는 그에게 '나는 진지한 관계는 싫어'라며 선을 그어버리고, 데이트에 찐한 스킨십에 썸이라고 하기엔 다소 농도 짙은 두 사람의 관계가 톰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운명을 믿는 톰과 사랑을 믿지 않는 썸머의 불확실한 연애는 썸머의 이별선언으로 막을 내리는가 싶더니, 회사 동료의 결혼식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과연 도통 답을 내려주지 않는 썸머는 톰에게 있어 나쁜 여자이기만 한 걸까.
어느 댓글에서 영화 <500일의 썸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톰이 불쌍하다가도 영화를 두번째 볼 때에는 썸머가 이해된다고.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나도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던지라 도통 이 영화에 공감할 수 없었다. 200일에서 50일로, 300일에서 10일로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영화의 서사도 그러하였고, 톰에게 좀처럼 마음을 내주지 않는 썸머가 못내 야속하였다. 한마디로 이 영화를 호구 같은 한 남자가 어장관리녀에게 치이고 치이는, 여자가 쓰레기와도 다름없는 그저 그런 멜로 영화로 치부해부린 것이다. 영화의 첫인상이 그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좋아하는 이동진 기자가 뽑은 로맨스 영화 1위라는 것도 당최 이해되지 않았으며 종종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현실 연애라는 것도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른을 바라볼 즈음에 다시 본 톰과 썸머는, 꽤나 현실적이었다. 어릴 땐 보이지 않았던 톰의 우유부단함과 썸머의 이중적인 속마음. 그리고 그녀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까지. 어쩌면 어려서라기보다도 몇 번의 연애가 종지부를 맺으며 깨닫게 되는 일종의 연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나는 톰의 사랑보다 썸머의 자기방어에 공감이 가는 사람이 되고만 것이다.
이 영화를 전지적 썸머의 시점으로 본다면 이러하다.
회식에서 만취한 톰의 친구는, 톰이 썸머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썸머는 이를 다시 톰에게 물었지만, 톰의 대답은 어정쩡할 뿐이었고 그런 톰에게 '친구로서?'라고 되묻자 톰은 그렇다고 답해버렸다. 이후 썸머는 복사실에서 톰에게 먼저 키스를 했고,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연애는 그녀가 시작한 연애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둘이 레코드 가게에서 데이트를 하던 중 톰은 시종 링고스타를 좋아하는 썸머의 음악 취향을 장난삼아 웃어넘기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에 대해서 '나도 잘 몰랐어'라며 말하는 썸머에게 '내가 들려줬잖아'라며 답한다. 둘이 함께 영화 '졸업'을 보았을 때, 썸머는 극장에서 나와 그 영화를 보고 여운이 가시지 않아 울음을 멈추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보며 톰은 '괜찮아. 그냥 영화일 뿐이잖아.'라며 그녀를 달랜다. 썸머가 좋아하는 뮤지션을 톰은 시종 장난처럼 놀려댔고, 그녀가 영화를 보고 나와 울음이 멈추지 않았을 때 그는 맛있는 것을 먹자며 데려갈 것이 아닌 왜 그 영화가 그녀를 울게 만들었는지 물었어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밥맛이 없던 것은 배고프지 않아서가 아닌 함께 있어도 외로운 이 남자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그렇게 펑펑 운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은 결혼식장에서 여자 주인공을 데리고 도망쳐 나온 남자와 그런 그를 무작정 따라나온 여자. 그리고 두 사람이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듯 웃음기가 사라진 채 멍하니 정면만을 응시하던 순간이었다. 마치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 같던 찬란한 시기가 끝나고 서로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권태로워지는 연애의 말로처럼.
함께 싱크대며 가구들을 살펴보며 신혼부부처럼 장난을 치던 두 사람. 다소 들떠 보이는 톰에게 썸머는 나는 진지한 관계는 원치 않아라며 그에게 먼저 선을 그었지만, 그는 '알았다'라며 그녀를 이해하듯 넘어간다. 돌아서면 남인 연인 관계에서 우리는 헤어질 일 없다는 듯이 천진난만하게 구는 톰에게 그녀는 역설적으로 나는 진지해지고 싶지 않아라며 상대방에게 확신을 얻기 바랐지만, 톰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리 만무했다.
썸머와 술집에서 데이트를 하던 와중, 별안간 웬 남자가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고 옆에 있는 톰은 남자친구냐는 그 남자의 말에 그저 친구라며 그 상황을 나서지 못하고 방관할 뿐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톰이 그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는데 그 이유는 남자가 썸머에게 치근덕거려서가 아닌 톰 자신을 '찌질이'로 표현한 것에 분개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는 썸머에게 너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말하지만, 썸머는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라며 답한다.) 결국 크게 다투고 만 두 사람. 이후 썸머는 먼저 그의 집으로 찾아가 화해를 청하고 그 상황에서 톰은 '나는 너와 어떤 관계든 상관없어.'라며 마치 썸머를 배려하는 듯 말했지만, 이 시점에서만이라도 톰은 한발 더 나아가 그녀에게 직진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애인이랑 다름없어'라며 화를 내고 돌아간 남자의 집에 비를 뚫고 찾아간 여자가 들을 대답으로는 퍽 맘에 드는 대답은 아닌 것이다.
썸머는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그는 썸머와 다시 재회할 요량으로 회사까지 그만둬버린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지만 그녀는 '이제 정말 친구가 될 수 있겠지.'라며 답한다. 이후 직장동료 결혼식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다시 재회한 두 사람. 썸머는 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고, 건축가가 꿈이었던 톰이 읽고 있던 '행복한 건축'을 핑계 삼아 말을 붙인다. 이후 결혼식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두 사람. 썸머는 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톰은 운명처럼 썸머와 재회할 마음에 들떠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가 들고 간 선물은 그녀가 좋아한 뮤지션의 앨범도 아닌, 보고서 펑펑 울어버린 영화의 DVD 내지는 O.S.T 앨범도 아닌 자신이 읽고 있던(자신이 좋아한) '행복한 건축'이었다.
그날 썸머의 결혼반지를 발견한 톰은 시간이 흘러 회사를 그만둔 후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언덕에서 머리를 식히던 중, 자신을 기다리던 썸머와 재회한다. 톰은 썸머에게 '그날 결혼식장에서 왜 나랑 춤췄어?'라고 묻지만 썸머는 '그냥 그러고 싶었어.'라며 답한다. 그런 그녀에게 톰은 '그냥 춤이 추고 싶었구나.'라며 대답해버리지만, 썸머가 단순히 '춤'이 추고 싶어 이미 남이 돼버린 그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고, 결혼식장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썸머가 톰에게 그리고 톰에게 미련이 남은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는 아니었을까.
이처럼 전지적 썸머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되려 썸머를 욕하던 관객들은 절로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굳이 이처럼 세세하게 이럴 땐 이러했고 저럴 땐 저러했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톰이 건축가의 꿈을 잊지 않도록 응원해준 썸머와 그런 썸머를 마냥 괴짜로만 바라보는 톰의 시선은 이 연애가 왜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썸머의 파티에 초대되어 그녀의 친구들과 합석한 자리에서 친구는 톰에게 꿈을 물었고, 자신의 하는 일은 비록 카드에 문구를 쓰는 일이지만 사실 건축가가 꿈이라는 말 대신 마치 자신의 현재 직업에 대해 굉장히 만족해하는 듯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런 그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던 썸머. 그녀에게 있어 '건축가를 꿈꾸는 톰'은 톰의 어린 시절 로망이 아닌, 그녀가 그에게 쏟은 마음 중 일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썸머대신 톰을 나무라며 욕을 해야 옳은 것일까. 마지막 썸머의 말처럼 그저 톰과 썸머는 서로가 서로의 짝이 아니었을 뿐이다. 사랑에 있어 확신이 없는 썸머와 순수하게 운명을 믿는 톰. 사랑에 있어 상처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공허함과 허전함을, 사랑은 그저 아름답다고 믿는 톰이 알리는 만무했고 그런 톰에게 있어 쉽게 확신을 내주지 않는 썸머 역시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톰은 사랑이 아름답다고 믿었지만 그 사랑을 쟁취하는 것에 있어서는 운명보다는 행동이 먼저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썸머는 사랑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해주기를 바라며 애매하게 톰을 밀쳐냈다. 어쩌면 연애도 싫다던 썸머가 자신이 무슨 책을 읽는지 물어봐 주는 낯선 남자와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톰과의 연애를 통해 그녀가 느낀 어떤 무엇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실 '난 사랑은 믿지 않아'라며 톰을 밀쳐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며 사랑이 있다고 믿고 만 것은 아닐까. 썸머는 톰을 사랑하지 않아서라기보다, 톰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썸머는 일찌감치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톰이 사랑한 것은 자신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 내지는 그저 '여자친구' 혹은 '연애 상대'일뿐이라는 것을. 그가 술집에서 낯선 남자와 주먹다짐을 하던 날, 그와 영화를 보던 날, 그가 그녀가 초대한 파티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그녀에게 선물로 준 그 순간, 그녀는 서서히 마음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썸머가 괴짜였기 때문에 둘의 연애가 끝이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듯 그녀가 서운해했을 모든 장면들을 영화의 엔딩으로 공을 들인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나레이션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톰은 더 이상 운명을 믿지 않기로 했다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 선선한 가을이 오듯 톰이 용기 내어 데이트 신청을 건넨 여자의 이름이 'fall(가을)'인 것은 단순한 각본가의 재간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500일의 썸머>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톰이었다가, 썸머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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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 확장하고픈 욕망만 한가득
'스위트홈 2'를 정주행 한 감상평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즌 1 성공에 힘입어 세계관을 확장하고픈 욕망만 가득한 반면, 어디 하나 쉽게 몰입할 구석 없이 산만하기만 하다.
3년 만에 시즌 2로 돌아온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은 욕망이 괴물을 만드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을 삼고 있다. 시즌 1에서는 생존을 위해 그린홈 아파트에서 정체불명의 괴물과 사투를 벌이던 차현수(송강)와 그린홈 주민들에게 포커싱 했다면, 시즌 2에선 그린홈 밖으로 나온 이들의 생존기와 또 다른 존재의 등장,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현상들까지 드러난다.
'스위트홈 2' 스토리 초반은 다양한 이야기 갈래로 나눠서 조명한다. 정의명(김성철)에게 몸을 탈취당한 편상욱(이진욱)은 군인들에게 잡혀가던 차현수를 빼돌려 신인류가 되어보자며 자신의 편이 되길 회유하고, 임신한 서이경(이시영)은 남편을 찾기 위해 밤섬특수재난기지에 숨어들어 진실에 접근한다.
그리고 이은유(고민시)와 윤지수(박규영)를 비롯한 그린홈의 나머지 생존자들은 군인들을 따라 안전캠프로 가는 길에서 예상치 못한 역경을 겪는다. 여기에 탁상사(유오성)가 이끄는 까마귀 부대와 괴물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임박사(오정세)의 이야기가 맞물린다. 그러면서 주무대는 그린홈 아파트가 아닌 안전 대피소 스타디움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이야기와 갈등으로 엮어낸다.
시즌 1이 공개될 당시 시청자들에게 혹평을 받았던 '몰입도 빌런' OST 삽입은 말끔하게 해결됐다. 최대한 극에 집중하게끔 최대한 잔잔한 톤으로 깔아 두면서 자신들의 장기인 '한국적 정서'로 끌어들인다. 이번 시즌에선 가족애, 모성애로 시청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려는 게 보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링크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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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도경수,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연 발탁!
출처: SM 엔터테인먼트
국내에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리메이크 작품 제작을 확정지으며 많은 국내 팬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고 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지난 2008년 개봉한 동명의 대만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작품으로 피아노 천재인 전학생이 오래된 연습실에서 신비스러운 음악을 연주하던 여학생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판타지 로맨스 영화다. 개봉 당시 시공간을 초월한 풋풋한 첫사랑과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이 잘 어우러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레전드 청춘멜로’로 지금까지도 관객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 새롭게 리메이크되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도경수는 원작에서 주걸륜이 맡았던 남자주인공 역할을 맡는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영화 <스윙키즈> <신과 함께> <형> 등에 출연해 스펙트럼 넒은 연기를 인정받으며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공고히 한 도경수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통해 한층 깊어진 눈빛과 감성 연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도경수와 호흡을 맞출 여자 주인공 역은 추후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할 계획이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 굵직한 작품들을 선보여온 하이브미디어코프가 제작하며, 연출은 허진호 감독의 <행복>과 <외출>을 비롯해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등의 각본을 집필하고, 개봉 예정인 서예지와 김강우 주연의 <내일의 기억>으로 데뷔한 서유민 감독이 맡았다.
강렬한 피아노 씬과 첫사랑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음악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 도경수 배우가 보여줄 강렬한 피아노씬을 기대하며, 과연 한국에서는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풋풋한 첫사랑을 그려나가고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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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킷> 로맨스, 액션, 정치 스릴러의 무색무취한 만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애인 '에이프릴(알리시아 비칸데르)'과 함께 휴가를 보내던 미국인 관광객 '베킷(존 데이비드 워싱턴)'. 그는 숙소로 이동하던 중 졸음운전으로 인해 차가 전복되어 추락하는 교통사고를 일으킨다. 애인과는 달리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비탄에 잠긴 채 사건 경위에 대한 조사를 받고, 그리스 경찰에게 차가 추락한 주택 안에서 한 남자아이를 봤다고 진술한다. 그러자 친절하던 그리스 경찰들은 사건 현장을 찾은 그를 향해 느닷없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베킷은 공격을 피해 도망친다. 아테네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베킷은 나라를 가로지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그는 그리스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의 거미줄에 빠져든다.
13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베킷>은 평범한 미국인 베켓이 갑작스럽게 그리스 경찰에게 쫓기는 추격전을 크게 세 개의 플롯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다이아키>와 <안토니아>로 이름을 알린 페르디난도 시토 필로마리노 감독은 우선 베킷과 에이프릴의 로맨스로 문을 열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처럼 갑작스럽게 베킷과 그리스 경찰 간의 추격전과 액션으로 노선을 선회한다. 이후 베킷이 자신을 둘러싼 음모에 대한 단서를 맞춰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두 개의 플롯을 포괄하는 그리스 경제위기와 관련된 국내외적 정치 스릴러의 면모를 선보이고, 영화는 윌 스미스 주연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연상시키며 마무리된다.
문제는 <베킷>이 선보이는 세 개의 이야기가 전혀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다는 점이다. 각각의 플롯은 그 자체의 매력이 부재하며, 상호 간의 연결고리도 느슨하다. 즉, <베킷>은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려 했는지 의도는 어렴풋이 보일지언정, 손으로 만져지지는 않는 영화다.
먼저 도입부를 장식하는 베킷의 사랑 이야기를 보자. 상대적으로 보다 주관적 감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배우 간의 호흡은 차치하더라도, 영화는 좀처럼 베킷의 심정에 빠져들어갈 계기나 동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이 커플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두 남녀가 그리스에 여행을 왔고, 시위로 혼란스러운 아테네를 떠나 비교적 한적한 관광지를 돌아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 베킷이 죄책감에 매우 고통스럽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영화는 이들의 현재와 상황을 제시할 뿐,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피 흘리는 와중에도 베킷을 끊임없이 뛰고 구르도록 만드는 동기 중 하나인 죄책감 혹은 상실감은 마치 타인의 부고 기사를 읽는 듯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만약 둘이 어떻게 만났고, 어떤 추억을 공유했으며,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강한 지를 알려줄 장면이 짧게나마 있었다면 이러한 감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위의 내용만 있어도 베킷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영화의 구조상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베킷이 유일한만큼, 주인공에게 공감할 여지를 주지 않는 로맨스는 도입부로서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베킷과 그리스 경찰 간의 추격전 역시 기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일단 긴장감이 없다. 사실 한 남자가 갑자기 표적이 되고, 정신없이 쫓기는 와중에 자신을 죄어오는 올가미를 하나둘씩 알아챈다는 전개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클리셰다. 그렇기에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라는 상황만으로는 더 이상 서스펜스를 자아낼 수 없다.
따라서 <베킷>과 같은 영화는 주인공을 다양한 변칙적인 상황 속에 던져 놓아야 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베킷>은 잘못된 선택을 한다. 경찰에 의해 곤경에 처한 베킷이 그리스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도주하고, 이에 경찰들은 현지인들을 위협해 얻은 정보에 기반해 그를 다시 추격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암석으로 가득한 그리스의 산을 비롯해 좁은 공간 그 자체로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집 내부나 기차 칸 같은 다양한 환경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도 이들을 베켓의 추격전에 유의미한 변수로 작용시키지는 못한다. 단지 그리스어 대사에 해당하는 자막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불안함과 초조함을 가중시키는 재치만이 잠시 빛날 뿐이다.
또한 중간중간 삽입되는 액션 역시 흥미를 돋우는 데 실패한다.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액션 시퀀스는 신선하지 않다. 단적인 예로 주차장 건물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는 시간대만 낮으로 다를 뿐,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처음 등장하는 주차장 장면과 유사하다. 유사한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도 한다. 액션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베킷의 능력 역시 몰입을 방해한다.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거나 건물 3층 높이에서 보어내려도 좀처럼 지치지 않고 고장 나지 않는, 슈퍼 히어로에 필적하는 그의 내구성과 신체적 능력은 영화의 개연성을 과하게 파괴한다. 특히 그리스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비현실적인 액션은 영화의 전반적인 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베킷>은 이 작품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와 유렵연합, 미국이 뒤얽힌 정치 스릴러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지 못했다. 영화는 그리스에서 급진좌파연합(시리자, SYRIZA)이 정권을 잡고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를 시행한 2015년 전후를 배경으로 삼은 듯 보인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세 번째 구제금융의 대가로 유럽연합에서 제안한 긴축재정 시행을 두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급진좌파연합은 그리스의 경제 주권을 침탈한다는 이유로 긴축안을 거부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를 경험한 후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 미국은 그리스가 유럽 연합 대신 러시아 혹은 중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나토의 방어체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를 걱정 중이었다.
문제는 영화의 불친절함 때문에 이러한 그리스의 국내외 정치적 배경을 좀처럼 알아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영화는 철저히 베킷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그 결과 그리스의 정치 상황도 그저 외국인이자 관광객의 시점에서 묘사될 뿐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스,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가 얽히고설킨 국제정치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미국 대사관에 걸린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에 모두 함축되어 암시되는 것이 그 예시다. 베킷이 그리스 정치와 관련된 정보를 미국 대사관과 좌익 활동가로부터 각각 입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베킷이 발견한 어린 남자아이의 중요성을 정반대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해석한 정보는 필연적으로 상충될 수밖에 없고, 이는 베킷과 시청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그리스의 현실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경우, 영화의 흐름과 전개를 쫓는 것도 녹록지 않다.
그러다 보니 <베킷>의 주제의식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영화는 미국 대사관의 도움에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베킷과 자국민 보호라는 의무를 저버린 대사관 직원을 대비시키면서 국민의 보호라는 국가의 윤리적 의무와 현실적 이익의 충돌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리스의 정치적 배경이 작중 가상의 그리스 우익 정권을 미국 정부가 돕고, 미국 대사관 측에서 교통사고로부터 그리스 정치계를 뒤흔들 단서를 발견한 평범한 미국 시민을 제거하려는 동기로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자국의 이익과 반대로 행동하며 미국을 공격하는 캐릭터인 베킷,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의 변화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신뢰를 저버릴 때 초래할 나비효과를 상징한다. 잘못된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으로 인해 국가가 국민을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메시지는 분명 의미심장하다. 단지 명료하게 전해지지 않을 뿐이다.
<베킷>의 실패는 영화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주연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모습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베킷보다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침착한 톤을 유지하며, 주인공을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 빠트린다는 흐름 상의 유사점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킷이 <테넷> 속 '주도자'로 보인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영화가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베킷이라는 인물을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극의 완성도가 높지 못했기에 영화의 얼굴인 주연 배우에게 다른 얼굴이 온전히 덧입혀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베킷 혼자 나오면 무색무취하던 영화가 에이프릴과 레나가 등장할 때 잠시 생동감을 되찾는 것만 보더라도 <베킷>이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펼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P(Poor, 형편없음)
설렘 없는 로맨스, 지루한 추격전, 이해가 되지 않는 정치극이 빚어낸 총체적 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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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밸리 오브 러브’에서 찾는 진정한 균형의 의미
균형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균형에 관심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 규칙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추구하는 갓생 같은 키워드 속에도 균형이 숨어있다. 추구하는 방향이나 목적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은 같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상태를 이상적으로 보는 것이다.
기실 우리가 이상향으로 삼는 이들도 균형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린다. 그들은 사회적인 성공을 이루었으나 이에 집착하지 않고, 지나친 감정의 증폭을 느끼거나 부정적인 에너지에 몰두하지도 않는다. 이성적이고 긍정적이며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는다. 반면 ‘균형’을 잃어버린 이들에 대한 시선은 냉정에 가깝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고 자신을 잘 컨트롤해야지”라는 말들이 이러한 사회적 시선과 심리를 대변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균형에 몰두하게 된다. 그것만이 옳은 길 같이도 느껴진다.
하지만 때로는 의문이 든다. 부정적인 감정, 일상의 파괴 등 여러 형태의 불균형은 그저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찾는 균형이란 결국 무엇일까? 우리 삶에 존재하는 불균형과 균형의 의미를 영화 <밸리 오브 러브>와 함께 찾아보고자 한다.
세 사람 사이엔 없는 것,
<밸리 오브 러브>영화 <밸리 오브 러브>(Valley of Love, 2015)에는 이혼한 부부 이자벨과 제라르가 등장한다. 오래전에 이혼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왕래하지 않고, 그사이에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아들 마이클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이클은 죽기 전 두 사람에게 “두 분이 같이 있으면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알쏭달쏭한 메시지를 담은 유언 같은 편지를 남긴다. 아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데스밸리를 여행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그들이 지키고 싶던 삶의 균형이 깨졌음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 균형의 상실, 부모와 아들
이미지 출처: 영화 <밸리 오브 러브>(Valley of Love, 2015)첫 번째 균형의 상실은 부모와 아들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복잡하지만, 양육과 자립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축약된다.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상호 존중과 교감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과 관심으로 양육하고, 자식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만,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자벨과 제라르, 마이클의 관계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소통의 부재다. 부부가 이혼한 후 마이클은 7살까지 어머니와 살고, 이후에는 아버지에게 보내진다. 이후 제라르가 마이클을 기숙학교로 보내며 세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된다. 데스밸리를 돌아보던 중 이자벨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어떻게 안 볼 수 있을까?”라고 자책하고, 제라르는 마이클의 친구조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마이클이 부모와 만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제라르는 말하지만, 세 사람 사이에는 이미 모든 애정과 관심이 균형을 잃고 망가졌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아들의 죽음까지도 타인에게서 전해 듣는다. 틈틈이 자신의 또 다른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거나, 딸들의 소식을 전달하는 두 사람 의 현재 모습과 극명한 대비를 준다.
두 번째 균형의 상실, 이자벨과 제라르
오래 전에 이혼한 이자벨과 제라르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관계처럼 보인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큰소리로 다투는 대신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평화롭게 보였던 관계는 여행을 거듭할수록 점차 변한다.
처음부터 아들의 요구에 따라 데스밸리를 여행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제라르는 약속했던 일주일을 채우지 않겠다고 선언해 이자벨의 분노를 산다. 이자벨은 제라르와 다투던 중 “나쁜 놈”, “알코올 중독자”라며 거침없이 힐난한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직접적인 이혼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지만, 이러한 모습에서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오래된 갈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상호 존중하며 서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을 많은 이들이 이상적인 부부로 이야기한다. 이자벨은 “우리도 마찬가지야. 각자 살기 바쁘니까.”라는 말로 자신들의 과거를 축약한다. 하지만 최소한의 교류도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모습에서 균열만 남았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균형의 상실, 삶과 죽음
이미지 출처: 영화 <밸리 오브 러브>(Valley of Love, 2015)아들 마이클의 죽음을 뒤따르는 만큼, 영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와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이자벨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내 잘못인가?” 묻고, 제라르는 “우리가 낳았으니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고 답한다. 이성을 찾으려 하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자책하고 괴로워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이자벨은 좀처럼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들이 살아있을 것이라 믿는 이자벨의 바람처럼 영화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를 흐릿하게 연출한다. 아들 마이클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보여주지 않아, 관객들까지 ‘죽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주인공들이 겪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이자벨은 혼자 호텔 방에 있던 중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소리를 지른다. 놀라 달려온 제라르에게 이자벨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며 그것이 마이클일 것이라 확신하지만, 제라르는 이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날 이자벨의 발목에 붉은 자국이 남는 둥, 이자벨이 겪은 일이 단순한 환상이나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두 사람이 겪은 일은 마이클이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실의 아픔에 무너진 두 사람이 여전히 아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바라고,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잊고 싶어하는 갈망을 드러낸다.
우리가 찾는 균형이라는 환상
이미지 출처: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
<밸리 오브 러브>의 두 사람이 여행을 통해, 자신들의 삶의 균형이 무너졌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5)은 기억 삭제라는 장치를 통해 균형을 재조명한다.
오랜 연인이었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를 상처 입히며 이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고통을 잊기 위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게 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물론, 추억까지 사라지는데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을 유지하기 위해 기억 삭제를 멈추려 한다. 하지만 조엘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두 사람은 서로를 잊게 된다. 기억을 잃었지만 두 사람은 다시 사랑에 빠지고, 기억을 지웠던 과정까지 떠올리게 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억 삭제는 보편화된 것으로, 상처, 단절 등 여러 부정적인 상황과 이로 인한 감정의 불균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시 관계를 이어가기로 결정하며 과거의 고통까지 받아들인다. 이는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불균형의 반복과 갈등 사이, 우리가 찾던 균형이라는 이상이 진정 무엇인가 되묻게 한다.
‘진짜’ 균형을 찾는 방법
이미지 출처: 영화 <밸리 오브 러브>(Valley of Love, 2015)
제라르와 이자벨은 아들의 요구대로 데스밸리를 여행하던 중, 아들의 죽음이 현실임을 알게된다. 제라르는 마이클의 환상을 만나고 “우리를 용서한다고 말했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두 사람이 아들의 죽음과 깊은 깊은 상실감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순간, 완전히 끊어졌던 부모와의 연을 다시 잇고자 했던 마이클의 마지막 부탁이 이행되고 깨어진 세 사람 사이의 균형이 맞춰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찾고자 했던 삶의 균형은 아픔을 외면하고 억지로 만들어낼 때가 아니라, 모든 상실과 불균형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회복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여러 상처를 입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성을 잃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그럴 때 스스로를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 삶은 억지로 꾸며낼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불쾌한 감정과 상황을 잘라내면 우리의 삶은 완전한 균형을 찾는 것일까? 그 감정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기 때문에 행복도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수없이 이야기한다. 상실은 치유의 시작이 되고, 개인은 다시 우리가 된다고.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 이 글은 문화예술 플랫폼 안티에그(Antiegg)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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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포와로가 돌아왔습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후속영화인 나일 강의 죽음이 개봉했는데요.
이번 작품에서도 포와로의 활약이 돋보이는데요.
호화 유람선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됩니다.
부유한 상속녀 리넷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보여지게 되는데요.
진정으로 리넷을 위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가려내는 것도 포와로가 할 일이 되겠네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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