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글다2025-04-02 00:27:33
동심을 잃은 디즈니에 남은 것은 관객의 무관심뿐
영화 <백설공주> 후기
1937년 디즈니의 시작을 알린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를 재해석하며 야심 차게 준비한 영화 <백설공주>(2025)는 공개 전 배우 캐스팅으로 인한 잡음부터 개봉 후 영화 퀄리티 등 다양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전부터 디즈니 실사화의 새로운 공식은 ‘주인공의 미스캐스팅’인지 헷갈릴 정도로 주인공의 낮은 싱크로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악역인 그림하일드 역의 ‘젤 가돗’이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 것과 달리 백설공주역의 ‘레이첼 지글러’는 인종을 떠나 코스프레 같은 드레스는 물론이고 백설공주 스타일링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알라딘>, <위대한 쇼맨>의 파섹 앤 폴이 음악감독을 맡아 보여준 영화 속 OST는 원작에서 가지고 온 ‘하이 호(Heigh-Ho)’, ‘휘파람 불며(Whistle While You Work)’와 새롭게 추가된 메인 넘버 ‘간절한 소원(Waiting On A Wish)’ 등을 내세우며 준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야심 차게 준비한 빌런 송 ‘뭐든 돼(All Is Fair)’는 준수하지 못한 젤 가돗의 노래 실력으로 제대로 된 매력을 볼 수 없고, 그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연출과 더해져 이질적인 모습을 보인다. 메인 넘버이자 한국에서 수지를 주인공으로 공개한 뮤직비디오를 공개하기도 한 ‘간절한 소원(Waiting On A Wish)’은 많은 호평을 받고 있지만 <위대한 쇼맨>의 ‘Never Enough’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같은 음악감독이기에 유사성을 보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백설 공주>만의 고유한 매력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넘버 ‘휘파람 불며(Whistle While You Work)’에서 함께 청소하는 동물들이 사라진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외로웠던 백설공주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비록 혓바닥으로 그릇을 핥지만, 열심히 청소해 주는 동물들의 모습들은 <백설공주>에 등장하지 않는다. 동물들과 대화하고 상호작용을 하는 모습이 ‘백설공주’ 캐릭터의 정체성이 될 정도로 원작의 백설공주와 동물들의 유머러스하면서도 힐링되는 장면들이 중요한 요소였음에도 말이다. 준수한 CG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동물들이 등장하는 많은 장면을 삭제한 결과는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쳐 아무리 같은 드레스를 입고, 독사과를 먹어도 원작의 느낌이 나지 않았다. 영화는 동심을 잃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강조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고려하지 않고 욱여넣은 ‘원작의 순수하고 선한 모습’은 전혀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혁명군을 이끄는 지도자의 모습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선함을 강조한 연출은 어리석음을 부각하고 캐릭터의 정체성을 흔든다. 그로 인해 터무니없는 빌런의 죽음을 만들고 영화는 우스운 결말로 이어진다. ‘백설공주’라는 이름의 근간을 흔들어 놓으면서까지 만든 영화에서 여전히 왕비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움’ 하나에 집착하며 목숨을 잃어야 하는가?
동심을 지키는 것이 단 하나의 소명 같았던 디즈니는 PC(정치적 올바름)에 눈이 멀어 그것을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PC(정치적 올바름)에도 의문만이 존재할 뿐이고, 결국 디즈니에 남은 것은 관객들의 무관심뿐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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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내부를 관조하기에도 벅찼던 <지금 우리 학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때와 같이 평범하게 흘러가던 효산고등학교의 일상. '온조(박지후)', '청산(윤찬영)', '남라(조이현)', '수혁(로몬)'이 복잡한 애정전선을 형성하는 사이, 은지는 늘 그랬듯이 '귀남(유인수)'과 그 패거리에게 가혹하게 괴롭힘 당한다. 그러나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병찬의 과학 실험실에 감금되었던 '현주(정이서)'가 풀려나면서 효산고등학교의 일상은 파괴된다. 한 번 번지기 시작한 좀비 떼는 삽시간에 학교와 효산 시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하고, 가까스로 좀비들의 공격을 피해 교실로 되돌아온 온조와 청산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좀비들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는 방안을 찾는다. 그러나 '나연(이유미)'을 필두로 좀비보다 무서운 의심과 편견이 교실 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간신히 되찾은 안전마저 사라지기 시작한다.
좀비물은 기본적으로 사회비판적 요소를 갖는 장르다. 좀비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묘사하며 인간 본성에 대해 고민하고, 인간군상의 원인을 잘못된 사회적 시스템에서 찾아 비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각각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좀비 영화, 드라마라 할 수 있는 <부산행>과 <킹덤> 역시 좀비의 출현 원인을 사회적 모순으로부터 포착한다. <부산행>은 주인공 석우(공유)가 다니는 증권회사가 수익에만 집착해 되살린 부실기업이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었다는 진실을 통해 성장 중심 사회를 비판했고, <킹덤>은 <아신전>을 통해 조선이라는 국가의 모순이 어떻게 좀비 아포칼립스로 되돌아왔는지를 묘사한다.
특히 좀비에 대한 설정이 어느 정도 확립된 이상 좀비에 관한 드라마 파트의 중요도는 더욱 크다. 바이러스 형태로 전파되고, 소리에 민감하며 인육을 탐닉하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최근 좀비 영화의 트렌드는 수렴해 가고 있다. 따라서 아주 새롭거나 획기적인 볼거리를 보여줄 수 없다면, 좀비물은 감정적 측면에서 관객 혹은 시청자를 흡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동명의 웹툰 원작을 영상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안타깝게도 잠재력을 온전히 꽃 피우지 못한 유망주라고 할 수 있다. 학교라는 장소와 배경, 환경에 좀비물을 접합한 발상과 착안 자체는 (원작 웹툰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흥미롭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방법이 과하고 올드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학교와 좀비를 결합해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학교라는 공간 자체의 구조를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라는 공간 안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좀비와 인간의 싸움에 대입하는 것이다. 우선 드라마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일상적 풍경의 모습을 전환시켜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처절한 싸움을 만들어 낸다. 도서관, 과학실, 음악실, 강당 등 학교의 시설들을 이용해 펼쳐 보이는 액션은 <부산행>에서 KTX 속 액션신을 보는 듯 신선하게 다가온다. 초반 급식실에서의 대규모 감염이나 중반 이후 나오는 도서실 장면이 대표적이다.
다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한국 고등학교의 보편적인 구조를 활용한 연출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의 많은 학교는 넓은 운동장과 그 주위를 ㄱ자 내지는 ㄷ자로 감싸는 직사각형 건물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 외부와 내부를 이어주는 문은 극히 드물며, 문을 제외하면 많은 경우에 울타리나 담벼락으로 둘러쳐진 형태를 띤다. 쉽게 말해서 한국의 고등학교는 근본적으로 군대 건물이나 교도소 건물과 다르지 않다. 즉 탈출하기에 가장 어려운 형태를 띠는 건축물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학교 내에 출연한 좀비는 탈출할 수 있는 경로가 제한된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부지불식간에 습격할 수 있고, 이러한 연출은 좀비물로서 상당히 효과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학교 내부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판옵티콘이라는 사실 역시 엄청난 공포감을 자아내는 데 기여한다. 판옵티콘은 감시자가 고개만 돌려도 모든 수형자들의 방을 볼 수 있는 구조의 감옥이다. 한쪽 벽면에 쏠려 있고, 복도 쪽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교실로 가득한 학교는 복도에서 학생들을 감시하기에 최적화된 구조인 것이다. 이는 학교 내부에서 교실에 숨는 데 성공하더라도 언제든 들킬 수 있다는 급박함을 자아내며, 창문과 학교 외벽을 이용하는 등의 다채로운 액션을 가능케 한다.
또한 판옵티콘 형태의 학교 건물은 액션을 단순한 볼거리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교육 시스템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액션에 담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판옵티콘 구조는 수형자가 언제 어디서든 감시당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게 만들고,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든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첫 에피소드에서 학생들이 핸드폰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출하는 범주 내에서 꼼수를 부리는 것, 학교과 학생들이 구조의 최우선 대상이 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가운데 학생들이 학교를 탈출할지 말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과도 오버랩된다. 따라서 학생들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학교 내에서 펼쳐지는 드라마 속 액션은 몇십 년째 변하지 않는 구시대적이고 근대적인 교육관에 기반한 학교 시스템 그 자체에 대한 저항이자 사투로 볼 수 있다. 단지 그 형태가 좀비와의 싸움일 뿐이다.
더 나아가 학교라는 건축물을 활용한 메시지는 학교라는 공간 속 학생들의 드라마와 더해지면서 그 강도가 더해지기도 한다. 학교는 지식 전달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사회화의 공간이기도 한데, <지금 우리 학교는> 속 좀비와 인간의 사투는 집단 괴롭힘을 비롯한 학생들 간의 갈등 및 충돌과 연계되어 과연 현재 우리 학교가 그 기능을 적절히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작중 좀비 바이러스가 단순한 재난, 혹은 우연한 재앙이 아니라 왕따 피해자로부터 발생한 것만 보더라도 이 작품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다. 또 일행 중 누군가가 좀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과 의심의 근간에 기초생활수급자의 준말인 '기생수'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편견과 차별 심리가 깔려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교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아야 하는 '희수'도 유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드라마는 학교의 사회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와 지식 전달이 더 강조되는 세태를 함께 지적한다. 그 중심에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으나 좀비가 되지는 않은 이른바 '절비(절반만 좀비)' 은지, 귀남, 남라가 있다. 작중 좀비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두려움으로부터 배양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들은 좀비보다도 학교 자체에 더 큰 두려움을 지녔기에 좀비가 되지 않는다.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인 은지는 좀비들보다도 자신의 치부가 주위에 전파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또 좀비가 된 다른 학생들을 내려다볼 때 이번에도 자신은 따돌림을 당했다면서 좀비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자조한다. 가해자인 귀남도 출몰하는 좀비보다 자신이 다른 일진들의 장기짝이나 다름없다는 열등감이 노출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남라도 좀비보다 학교라는 공간을 더 싫어한다. 전교 1등이고 반장이지만 정작 같은 반 학생들과 소통할 줄도 모르는 남라에게 좀비는 오히려 친구를 만들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좀비를 이용해 좀비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는 학교 시스템을 역설적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가까스로 학교를 탈출한 주인공들이 향하는 곳이 폐교도소에 마련된 임시 수용 시설인 것은 아이러니함을 배가한다. 좀비 떼보다도 끔찍한 학교라는 현실로부터 벗어난 주인공들이 다시금 학교와 다를 것 없는 공간에 갇히는 비극의 물레바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결말의 모닥불에 담긴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수용소를 벗어나 폐허가 된 학교로 다시 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학교라는 공간과 제도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다만 그 학교가 통제받고 감시당하고 사회로부터 묘하게 방치되며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좀비 아포칼립스 같은 학교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효산고등학교 옥상에 피워진 모닥불에는 진정으로 친구를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며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달라는 외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교는>이 보여주고자 하고, 들려주고자 하는 학교 제도에 대한 다양하고도 중요한 목소리는 단발적인 아이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 느껴진다. 드라마가 학교라는 염불보다 사회 풍자라는 잿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좀비물은 사회 비판과 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미 학교과 교육이라는 사회 시스템을 주된 타깃으로 설정한 상황에서 굳이 학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까지 스토리텔링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리 영리한 선택은 아니라고 보이는 것이다. 근래 재난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렉카 유튜버나 개인방송 이야기를 삽입한 것이나 사회 지도층의 모순, 왜곡된 개신교 및 님비현상을 비판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덕분에 전형적이고 진부한 캐릭터 클리셰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장점이 될 수는 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면서도 진짜 시민을 생각하는 정치인,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결정에 죄책감을 느끼는 군인처럼 기능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입체적인 캐릭터는 분명 극에 신선함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이는 각 부분을 조각으로 쪼개 볼 때의 장점일 수는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분량 및 비중 배분의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총 12개인 에피소드 개수를 절반 내지는 2/3 수준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아무리 고등학교가 배경이라고 해도 로맨스의 비중이 크고 삽입되는 타이밍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점, 비록 해외에서는 한국 콘텐츠의 특징이자 신선한 점이라 평가받는 대목이라 해도 거의 매 회차마다 신파적인 요소가 등장하는 것 역시 완주를 힘들게 만든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넷플릭스의 2022년 한국 콘텐츠 중 첫 스타트를 끊은 작품이자, <부산행>과 <킹덤>에서 촉발된 한국형 좀비물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실제로 설 연휴 직전에 공개된 후 플릭스 패트롤(FlixPatrol) 월드 랭킹에서 TV 쇼 부문 1위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흥행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확실하게 갈리는 장단점을 고려하면, <지금 우리 학교는>의 성공에 있어서 잠재력을 충분히 발현하지 못한 작품의 내용 및 결과물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P(Poor 형편없는)
선택과 집중의 실패. 학교 안에만 집중했으면 그래도 유의미할 뻔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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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스트리트 댄스라는 열정에 대한 헌사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킵 스텝핑(Keep Stepping)
Australia/2022/95min/루크 코니시 감독 작품
스트리트 댄서 문화를 담은 영화 〈킵 스텝핑〉은 세 인물의 서사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루마니아 출신의 브레이크 댄서 파트리샤, 칠레-뉴질랜드(사모아)인 부모를 둔 팝핀 댄서 개비, 스트리트 댄스 대회 ‘디스트럭티브 스텝스(Destructive steps)’를 조직한 한인 출신 조가 주인공이다.
셋 모두에게 춤은 치유와 열정의 계기였다. 파트리샤는 서른셋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낯선 나라에서 경제 활동을 하면서도 춤 연습을 이어간다. 개비는 남들과 다른 피부색과 체형으로 위축된 적이 있고, 조 역시 백인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그러나 스트리트 댄스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의 불리한 조건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춤에 진심인 구성원을 보듬고 춤 실력으로만 사람들을 평가한다. 즉 춤에 쏟는 열정을 순수히 보상받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도달 불가능한 욕망을 양산하여 개인에게 좌절을 안기지만 스트리트 댄스 신(scene)은 누군가의 욕망과 노력을 착취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금지만 당하지만 댄스 배틀에서 주어진 45초의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라는 한 댄서의 말이 이를 증언한다.
파트리샤와 개비는 모두 오랫동안 춤을 출 수 있을지, 경제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불안해하며 고민한다. 춤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고민이 있다. 파트리샤는 윈드밀 기술을 익히는 것, 개비는 사모아 전통 춤을 팝핀과 결합해 자신만의 춤을 선보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조는 자신을 키워준 스트리트 댄서 친구들과 커뮤니티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적자를 내면서도 대회를 꾸려왔다.
‘무용’해 보이는 것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자신만의 길을 닦아 나가는 자들이 뿜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움이 현실에서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사그라들 때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처음부터 ‘실패’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 태도가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를 ‘실패’를 하찮게 만든다. 누군가가 부여한 욕망이 아닌 자기 내면에서 솟은 욕망을 따라 조금씩 나아가는 이들의 여정이 비슷한 상황의 많은 이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 연대로 다가가리라 확신한다.
*이 글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 받아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기자단으로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제는 9월 29일까지 이어지며 상영작은 온오프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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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쾌한 건 옛말, 이제는 귀여워
'마요미' 마동석이 다시 돌아왔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마동석의 통쾌한 액션과 경찰 수사원들의 케미, 사악하지만 매력 있는 빌런의 존재 등으로 <범죄도시>, <범죄도시2>까지 이른바 '쌍 천만'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영화 시리즈다. 이번 영화도 천만 영화를 달성하기 위해 '각'잡고 만든 영화라고 단번에 느껴진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범죄도시3> 스틸컷
<범죄도시> 시리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걸 꼽는다고 한다면, 빌런의 매력도 일부일 것이다. <범죄도시>(2017) 장첸(윤계상), <범죄도시2>(2022) 강해상(손석구)이 등장한다. 돈이라면 사람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판단하는 극악무도한 절대악을 표현하기에 관객은 마동석이 그들을 정의구현하는 스토리에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범죄도시3>는 빌런의 매력이 전작들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마약 밀매 비리 경찰 주성철(이준혁)의 이중적인 생활이 약하게 작용한다. 충분히 매력적인 설정을 부여하고 있으나 절대악이라고 단언하기에 어딘가 아쉬운 빌런이다. 주성철의 마약을 회수하기 위해 찾아오는 또 다른 빌런 일본의 야쿠자 리키(아오키 무네타카)도 상당의 빌런 역할을 맡고 있지만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절대악 2명의 파트 분배가 빌런의 매력을 떨어트리는 작용을 해버린다.
<범죄도시3>는 메인 빌런의 매력이 떨어지고, 서브 빌런의 매력이 올라간다. <범죄도시>, <범죄도시2>에서 서브 빌런이자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 장이수(박지환)의 부재로 이번 영화에서는 서브 빌런의 매력도 분할한다. 마약 밀매 운반을 맡고 있는 김양호(전석호)와 중고차 딜러 초롱이(고규필)이다. 둘의 엄청난 매력은 <범죄도시3>의 유머를 확실하게 책임진다. 거기에 마석도(마동석)만 할 수 있는 유머까지 더하니 빌런 등장을 제외한 장면들은 라이트하고, 유머러스하게 흘러간다. 모텔 침대 회전 장면이나 자동차 3천 원 거래 장면은 서브 빌런과 마석도의 유머러스를 극치에 달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액션은 전작들보다 섬세해졌다. 어렸을 때 권투를 배웠다는 설정이 더해져 마석도가 펼치는 권투 주먹 액션이 액션의 타격감을 강하게 만든다. 액션의 클리셰를 역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흥미롭다. 마석도가 악당을 물리치고, 이후에 경찰이나 동료들이 찾아오는 장면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연출이 솔직하다. 그리고 액션 이전에 <범죄도시> 시리즈에 등장했던 대사들이 나온다. <범죄도시2>보다 다양한 장면에서 많이 드러내 재미를 더한다. <범죄도시3>는 피가 솟구치거나 신체 상해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지난 시리즈에서 무섭거나 잔인하다고 말한 반응들이 있었기에 이번 영화는 그러한 요소를 상당히 뺀 티가 난다. 그리고 유머에 더 취중을 두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개그나 유머가 재밌다는 반응이 많았기 때문이다. <범죄도시3>는 관객의 피드백을 수렴한 장점만을 가지고 만든 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간 빌런과의 액션보다 코미디에만 신경 쓰는 결과가 벌어지지 않게끔 조심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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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곳적 복수 신화를 지금 소환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기 895년, 해외 정복을 마치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온 '아우반디르(에단 호크)' 왕은 왕비 '구드룬(니콜 키드먼)'과 어린 암레스 왕자와 재회한다. 그러나 막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해주기도 전에 그는 동생 '푤니르(클라에스 방)'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다. 푤니르는 구드룬 왕비와 왕국을 차지하고, 암레스는 바다 건너로 도망간다. 이후 세월이 흘러 바이킹의 일원이 된 '암레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는 왕국을 잃은 푤니르가 망명지인 아이슬란드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노예로 신분을 위장한 그는 노예선에서 만난 마녀 '올가(안야 테일러 조이)'의 도움을 받아 푤니르의 땅으로 들어가고, 아버지의 복수를 준비한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신작 <노스맨>은 바이킹 왕자 암레스의 사랑과 복수를 노래하는 영화로, 중세 시대극이자 근래 할리우드에서 보기 힘들었던 에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피비린내 나는 10세기 북유럽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그린 나이트>처럼 상징적이고 시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며 신화적 영웅의 비현실적 여정을 압도적인 분위기와 미장센으로 녹여낸다. 주술사가 이끄는 암레스의 성인식이나 피 튀기는 바이킹의 전투 장면은 거칠고 잔혹하다. 폭풍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거친 바다부터 아이슬란드의 화산에 이르는 웅장하면서도 잔인한 자연의 풍광이 더해지면 그 시대의 야만성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심심찮게 등장하는 절단 장면은 '이 정도로 잔인할 필요가 있나?'라는 의문을 자아낸다.
하지만 강렬한 영상에서 눈을 돌려 주인공 암레스의 여정에 빠져들다 보면 그 의문은 자연히 답을 찾는다. 특히 중세 스칸디나비아 전설 속 영웅인 암레스 왕자가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의 원형이라는 점, 하지만 암레스와 햄릿의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그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에게 복수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다 풀어내지도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혼란 속에서 그는 미친 듯 보이는 현실과 미쳐 가는 자아를 화해시키지 못하고, 복수마저도 온전히 끝내지 못한 채 죽는다.
햄릿의 복수는 허망하다. 복수심이 도리어 파국을 가져온다는 것을 복수가 결코 건강한 선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사실 복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일리아스>만 해도 그렇다.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아버지를 만난 후 그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동한 아킬레우스를 비추며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분노에 가득 찬 야수였던 아킬레우스가 복수심을 버리고 사랑, 희생, 용기를 아는 고결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인 것이다. 비록 그 끝은 조금 달라도 햄릿과 아킬레우스는 모두 복수의 무용함을 이야기한다.
<노스맨>과 암레스는 다르다. 영화는 햄릿, 아킬레우스와는 달리 복수의 완성을 통해 생명력을 되찾고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암레스를 보여준다. 복수와 삼촌의 죽음을 다짐하며 바다를 건넌 간 암레스는 바이킹의 배를 탄 채로 다시 등장한다. 배에서 내려 한 마을을 공격하는 바이킹들 사이에서 암레스는 다른 바이킹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 몰두한다. 적군을 죽이고 그 몸을 입으로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에서는 목적 없이 배회하는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가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마녀의 환시를 보고, 자신이 복수를 완수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은 후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삼촌의 땅인 아이슬란드로 향하기 위해 인간 대우도 받지 못하는 노예로 위장한 암레스는 가장 낮은 계급이지만 오히려 가장 살아있어 보인다. 집을 나가 떠돌던 외로운 늑대는 이제 무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눈이 이글거린다. 복수를 통해 암레스의 인생이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되는 이야기는 영화의 결말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용암이 치솟는 화산에서 삼촌을 죽임으로써 마침내 꿈꾸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 암레스. 그는 삼촌과의 결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클로즈업되는 그의 표정은 환희와 평화로 가득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지켰고, 아버지와 자신의 왕통을 이을 아이들도 남겼으면, 응어리 진 분노도 온전히 터뜨린 후 해소하여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의 서사 역시 복수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 보인다. 당장 푤니르만 하더라도 그는 단순히 복수의 목표물이 아니다. 왕의 배다른 동생이자 사생아인 그는 자신의 삶을 무시한 이복형에게 복수한 인물로, 비록 영지를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따뜻한 삶을 영위한다. 그래서 암레스에게 가족을 한 명씩 잃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간악함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진다. 그의 어머니인 구드룬 왕비가 마찬가지다. 삼촌 푤니르에 인해 강제로 결혼하여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알고 보니 푤니르를 추동한 만악의 근원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노예로 팔려와 강제로 결혼하고 후사를 낳아야 했기에 증오 가득 찬 결혼 생활을 끊기 위한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그래서 구드룬은 분노하는 암레스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고 지금의 삶이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일갈한다.
이에 더해 올가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신화 속 여성은 남성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 남성은 상처를 치유하고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반면, 여성은 분기점 외의 특별한 역할을 맡지 못한 채 해피 엔딩 속에서 존재감을 잃는 경우가 많다. <노스맨>은 다르다. 암레스는 올가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복수를 함에 있어서 적잖은 도움도 받고, 또 서로의 목숨도 구해준다. 하지만 올가는 암레스의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다. 암레스는 사랑을 통해 복수심을 잊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대신 목숨을 걸고 복수하는 늑대로 남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쌍둥이를 잉태한 채 그 관계가 끊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암레스는 온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을 기회를 잡고, 올가는 노예에서 벗어나 위대한 왕통을 이어갈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간다. 이처럼 <노스맨> 속 복수는 단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싸움이 아니라 바람직하고 정당하며 옳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물론 혹자는 <노스맨>의 복수극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햄릿과 암레스가 복수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는 2시간을 넘는 137분의 러닝타임 동안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에 꽤나 지루한 인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멋지게 복수하는 쾌락을 선사한다는 특징은 고전 중의 고전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특출 난 게 아닐 수 있다.
이에 더해 신화 원전의 분위기를 재현하는데만 집중한 것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일례로 작년에 개봉한 <오필리아>는 햄릿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햄릿의 아내인 오필리아를 전면에 내세워 햄릿의 비극을 여성의 시선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바 있다. 그에 반해 죽음과 폭력, 예언과 마법으로 가득한 <노스맨>의 세계는 굳이 이 신화를 지금 이 시점에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레스의 세계를 잘 살펴보면 <노스맨>에 숨겨진 시의성이 그 모습을 찬찬히 드러낸다. 화산을 배경으로 암레스는 복수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지막 결투에 임한다. 바이킹에게 정당한 복수를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은 그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죽을힘을 다해 속에 가득한 울분을 온전히 표출하면, 전장에서 죽은 후 발할라에 들어가 라그나로크가 올 때 오딘의 옆에서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복수를 긍정하며, 오히려 되갚아주지 못하는 이들이 손해를 본다는 믿음이 지배적인 세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스맨>의 현대적 맥락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사회는 외관만 다를 뿐 암레스의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SNS 상에서 오가는 설전, 리벤지 포르노의 등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모습까지.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 모든 현상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과거의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변주일 따름이다.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엄벌주의에 대한 갈망 역시 국가나 사법 제도가 복수를 대신한다는 믿음이 약해졌음을 방증한다. 암레스처럼 직접 당한 만큼 돌려주고 정의를 바로잡는 복수의 욕구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충실한 재현 같아 보이는 <노스맨>의 접근법은 결코 과하지 않다. 태곳적 복수 신화를 성공적을 소환하는 심장 박동을 닮은 북소리와 극한의 현실 고증을 통해 신화에 설득력을 더하는 비주얼이 인상적이다. 암레스의 세계와 그의 행적이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실감 나게 느껴질수록 관객 역시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커져가지만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욕망을 분출하는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암레스가 발할라에 들어가는 결말이 대표적이다. 화산에서 죽어가는 그의 앞에 하늘이 열리고, 발키리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내려와 그를 발할라로 이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환상이다. 하지만 이는 복수를 통해 평화를 찾은 암레스의 심정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훌륭하게 반영하는 연출이기도 하다. 성인식부터 전설 속의 검을 얻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복수에 미친 그가 다양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습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나치게 재현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는 동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노스맨>에서는 원형적인 복수 신화를 통해 현대 사회를 반추하게 만드는, 단순한 영화적 재현 이상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A(Acceptable, 무난함)
태곳적 복수 신화를 재소환하는 현대의 야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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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어?
셀린 시아마 감독의 지난 주인공들이 성적 끌림을 발견하고 내면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면, <쁘띠 마망>은 엄마와 딸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자신이 어떤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지에 눈뜨기 전부터 형성된 '엄마와 딸'의 관계는 여자의 생애에 근본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 <톰보이>(2011) 속 로레를 자신의 관점에 맞추려는 어머니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속 가부장적 시선을 재현한 어머니를 지나 <쁘띠 마망>에 이른 셀린 시아마 감독의 어머니는 딸과 정면으로 마주하여 소통을 시도한다.
쁘띠 마망
넬리(조세핀 산스)는 엄마를 보고 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시골집에 온 엄마 마리옹(니나 뫼리스)이 무척 슬퍼 보이기 때문이다. 마리옹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혼자 도시로 돌아간다. 밖에서 혼자 놀 수 있는 방법을 찾던 넬리는 우연히 동갑내기 친구를 마주친다. 마리옹(가브리엘 산스)은 엄마와 같은 이름을 쓰고, 예전 엄마처럼 오두막을 짓고 있다. 처음 만났지만 익숙한 친근함을 느끼며 넬리와 마리옹은 빠르게 친해진다.
넬리는 집이 정리되는 대로 돌아가야 하고, 마리옹은 다리 수술을 위해 3일 후면 병원으로 가야 한다. 헤어짐이 예견된 두 친구의 짧은 만남은 "진짜 얘기"와 그들만의 놀이로 채워진다. 영화 <쁘띠 마망>은 관객의 눈높이를 여덟 살에 맞춰 그들만이 말할 수 있는 진실을 그들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가장 사랑스럽고 순수한 방식으로 세대와 세대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닮은 듯 다르지만
넬리는 주로 파란 옷을 입는다. 잠옷이며 이불, 점퍼까지 파란색이다. 반면 마리옹은 붉은 점퍼를 즐겨 입는다. 넬리는 낱말퍼즐을 잘하고 철자도 잘 알지만 마리옹은 철자에 약하고 그림을 잘 그린다. 마리옹은 배우가 되고 싶고 넬리는 연기를 잘한다. 다르다고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조금씩 다르기에 그래서 서로가 궁금하고 그렇게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다른 상대방의 '다름'이 궁금하지조차 않다면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넬리와 마리옹은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궁금해한다. 두 친구의 협업은 그래서 빛이 난다. 마리옹은 오두막의 골조를 튼튼하게 세우고 넬리는 낙엽과 천으로 장식한다. 우유를 가득 부어 이리저리 튀겨도 그럴듯한 케이크를 만들어낸다. 형사와 백작부인이 나오는 연극의 배역 분배는 어떤가. 분량이 많은 백작부인을 연기하는 마리옹은 넬리에게 훨씬 많은 배역을 배정한다. 소꿉놀이는 양보와 배려 창의력이 없으면 안 되는 놀이다. 사랑과 죽음이 담겨 있는 이 놀이는 현실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렇게 서로를 닮은 배역과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두 아이 간에 재현되면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엄마의 우울은 딸의 숙제
딸을 향한 엄마의 마음에 죄책감과 사랑이 섞여 있다면 엄마를 향한 딸의 마음은 그보다 간절한 사랑이다. 외면받는 딸의 사랑은 때로 모성애보다 강해진다. 마리옹은 다정하게 아이를 챙긴다. 하지만 영화는 넬리가 엄마를 아껴주는 방식에 주목한다. 간식 시간이 되자 운전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 과자 세 번과 음료 한 번을 먹여주는 장면으로도 넬리의 배려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두 모녀는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한다. 그런데도 엄마를 향한 딸의 사랑이 짝사랑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리옹은 이른 나이에 배우의 꿈을 접고 넬리를 낳았다. 엄마의 우울의 이유가 자신 때문인 것 같다고 느끼는 넬리의 감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작은 마리옹은 "너 때문은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엄마의 우울'은 언제나 딸의 숙제로 남는다.
눈을 맞추면 보이는 것
넬리의 부모님은 아이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아빠는 넬리에게 담배를 피워도 될지 묻고, 면도를 부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이 아이를 위해 무릎을 굽혀주지 않으면 이들의 시선은 정확하게 맞닿을 수 없다. 식탁에서 넬리는 엄마를 올려다봐야 하지만 마리옹과는 바로 옆에서 수프를 가지고 장난치며 눈을 맞추고 웃는다. 두 아이는 눈을 맞추고 어른과 아이는 나눌 수 없는 "진짜 얘기"를 나눈다. 두려움에 대한 얘기다. 놀랍게도 어른이 눈높이를 맞춰주면 어른이 아이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어른을 이해하게 된다. 넬리는 엄마의 마음이 아니라 마리옹을 이해하게 되었다.
넬리는 엄마가 무서워했다던 흑표범을 본다. 그 심장소리를 듣는다. 마침내 두 사람의 주파수가 맞추어져 태초의 하나였던 심장소리로 돌아가듯이,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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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하는 아버지를 향한 집요한 물음
6★/10★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김창열 화백은 1971년부터 50여 년간 물방울만 그렸다. 한두 번이면 “구도”지만, 50년이면 “계획”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로 하여금 단 하나의 대상만 그리게 만들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이라는 대상에 도달한 과정을 담았다. 화자는 아들이다. 아들은 늘 과묵한 아버지의 내면이 궁금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추억, 일화뿐 아니라 그의 그림과 사회 활동을 고루 재료 삼아 그 중심에 가 닿고자 한다.
영화에 담긴 김창열 화백은 늘 느리게 움직이며 대부분 침묵한 상태다. ‘추상적이면서도 내밀하다’는 이유로 노자의 《도덕경》을 늘 가까이하고 깨달음을 향한 집요함을 보인 달마대사의 다소 섬뜩한 일화를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신비롭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김창열 화백이 관(官)이 기획한 행사, 즉 명예와 관련된 일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도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브리지트 부이오 감독과 영화를 공동 연출한 아들 김오안 감독은 아버지가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버지를 안전한 공간에 모셔두고 성역화하는 대신, 설령 불경스럽더라도 아버지의 침묵을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했다는 소리다.
그리하여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도달한다. 북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던 김창열 화백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쓴 후 고향을 떠나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뉴욕으로 건너갔으나 팝아트와 소비문화가 만연한 거대 도시는 그에게 지독한 피곤함만 남겼다. 또 한 번의 이동. 그가 새로이 정착한 파리에서 김창열 화백은 마침내 물방울을 만났다.
김창열 화백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꽃, 여자의 나체, 풍경”을 그렸을 시대에 태어났으나 바로 눈앞에서 누군가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그는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가 ‘소명’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살아남았다는 '우연'을 '필연'으로 전환하기 위해 물방울에 천착한 것이다. 즉 그에게 물방울은 치유와 화해, 초탈을 위한 수단이자 과정 그리고 목적이었다. 김창열 화백이 작업한 수많은 물방울 그림에는 그가 오랜 시간 물방울을 그리며 품은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에 이름과 설명을 덧붙이는 아들의 내레이션은 아들이 끝내 아버지의 침묵을 해석했음을, 마침내 아버지를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남다른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5년여의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든 김오안 감독에게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품는 태도를 배운다. 한 사람은, 그가 품은 세계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좇을 만큼 거대하기도, 물방울 하나에 응축될 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에는 조화롭게 공존하는 두 모순이 담겼다.
*김창열 화백은 2021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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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th JIMFF 이은정 감독님 interview ?♀️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작 #오랜만이다 의 #이은정 감독님 본격 탐구! ?♀️
? JIMFF X HISTRANGER ?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HISTRANGER가 떴다!
JIMFF 공식 웹 데일리팀이 직접 취재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현장을
지금부터 살펴볼까요?
한국경쟁 상영작 [오랜만이다]의 이은정 감독님을
하이스트레인저 웹 데일리 팀이 직접 만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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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픽 매주 목요일 밤 11시 59분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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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작은 방안의 소녀> 메인 예고편
친구의 괴롭힘에 못견딘 희주는 자퇴하고 집에서 히키코모리 생활을 한다. 그리고 인터넷 라이브 방송에서 만난 동하를 통해 자신감을 얻는 방법을 배운다. 동하는 펜둘럼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최면을 스스로 걸기를 알려준다. 그리고 채팅으로 만난 자신과 같은 히키코모리들을 격려한다. 1년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던 희주는 점점 자신감을 얻으면서 드디어 방을 탈출한다. 그리고 희주모와 화해도 하며 사회로 나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이때 1년전 희주를 괴롭혔던 해영은 그녀의 집주소를 찾아내서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괴롭힘이 시작된다. 희주는 사회에 복귀하려고 하지만 해영이라는 장애물을 만난다. 결국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 싫은 희주는 동하에게 배운 펜둘럼을 통한 최면을 해영에게 이용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해영을 스스로 자살하도록 최면을 걸고 자신은 사회에 온전하게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