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토로2021-04-17 15:47:59
이문세의 노래가 무서워지는 영화
우리 동네(2007)
그 당시 개봉작이었던 세븐데이즈와 고민하다가 고른 '우리 동네'. 나름 기대가 있는 영화였다.
뮤지컬배우 출신인 오만석과 개인적으로 목소리를 정말 사랑하고 있는 이선균, 그리고 그때의 기대주 류덕환.
특히 휴덕환이 기대가 됐던 것은 이 영화에서 역할인 살인자를 연기하기위해서, 그 느낌을 받기 위해서 머리맡에 칼까지 두고 잤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충무로의 기대주가 될 수 있을까? 에 대한 기대랄까?
영화가 시작되면 긴장의 연속이다. 하지만 실제로 놀라는 부분보다는 잔인한 부분이 많다고 해야겠다.
더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잠시 접어두고...
보고 나와서 이해를 잘 못했던 친구를 위해서 세 사람의 관계, 집의 관계에 대해서 얼마나 샅샅이 이야기 해 주었는지, 영화를 보고 나서 분석하고 있던 나 자신이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감탄사로 표현하자면 "역시 류덕환!"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아 이제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은 밤에 부르는 섬집아기처럼 섬뜩한 노래가 되겠구나 하는 것이다.
특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라는 가사는 효이(류덕환)와 경주(오만석)와의 관계를 대변해주는 듯 했다.
영화를 직접 보신다면 무슨 뜻인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문세 - 사랑이 지나가면 ♪
그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사람을 몰라요
두근거리는
마음은 아파도
이제 그대를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그렇게 보고싶던
그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면
그대의 허탈한
모습속에~
나 이젠 후회없으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그렇게 보고싶던
그얼굴을
그저 스쳐~ 지나면
그대의 허탈한
모습속에~
나 이젠 후회없으니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이 지나가면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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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들 <레이디 버드>, <프란시스 하>
떠나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들
프란시스와 레이디 버드
처음으로 <프란시스 하>를 본 건 입시 준비를 하던 여름이었다. 계속 이곳저곳을 방황하는 프란시스를 보는 게 정말 힘들었다. 같은 해, <레이디 버드>를 본 후에는 영화 말미에 대학에 들어가는 레이디 버드가 참 부러웠다. 수능 성적이 좋은 것도, 방과 후에 연극을 하고, 줄리와 대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전부 대단해 보였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당시에 느꼈던 무력감과 긴장감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새로운 고민이 생긴 후 두 작품을 다시 봤을 때 비로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레이디 버드가 새크라멘토를 그리워하듯, 프란시스가 방황하던 시간을 지나 ‘자기만의 방’을 찾듯 그레타 거윅이 그린 성장은 단순히 귀감이 되기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지나온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We were in one parking lot and we went to another parking lot.”
‘레이디 버드’는 고등학생인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직접 붙인 이름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부르면 반드시 고쳐 부르게 하고, 명단에 쓰인 이름은 새로 쓴 후 밑줄까지 그어 둔다. 반듯하게 인쇄된 글자 아래 적힌 손글씨는 어디서든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레이디 버드를 소개하는 듯하다. <레이디 버드>는 수십 벌의 예쁜 의상과 함께 밝은 미래를 노래하는 ‘하이틴’ 영화에서 벗어나 그 이미지를 보고 자란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이가 각기 다른 수많은 고민,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 결코 설명하지 못할 결정들, <레이디 버드>가 주인공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모녀의 이야기라는 점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관객에게도 호소력을 지닌다.
그레타 거윅이 공동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하>는 꼭 <레이디 버드>의 다음 이야기처럼 보인다. 프란시스는 여러 모로 불안정하다. 현대무용가가 되고 싶어하고, 뉴욕에 살며, 함께 살던 친구가 떠나며 갈 곳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어진다. 영화는 색조차 빼앗아 가며 복잡한 감정과 걱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레이디 버드처럼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원동력을 절실히 원하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프란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줄여 쓰지 않고 반 접어 우편함에 끼워 넣은 것처럼, <프란시스 하>는 때때로 한 발자국 물러나거나 타협하는 것이 결코 최악의 선택지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화려한 스토리와 미장센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프란시스 하>는 불완전한 삶과 끝나지 않은 성장으로 위로를 준다.
레이디 버드는 “우리 주차장에서 출발했는데 또 다른 주차장에 왔네.”라고 말한다. 주차장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출발해야 하는 장소이다. 스치듯 읊조린 대사지만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 하>의 정서를 모두 설명하는 것만 같다. 두 작품은 떠난 후에야 사랑하게 되는 것들, 다시 말해 과거의 경험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기까지의 성장을 담았기에 특별하다.
그레타 거윅이 그린 여성의 성장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 하>가 유독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두 이야기를 충분히 내면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 프란시스와는 공통점보다 다른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집에서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적도 없고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며, 태어난 연도와 사용하는 언어조차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서 위로를 받거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를 위한 영화다’라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레타 거윅의 캐릭터들이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정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는 섹슈얼한 관계를 쟁취하지 않는다. 단지 자연스러운 욕망과 꼬이고 풀어지는 관계들, 보편적이고 사소한 고민을 보여준다. 현실적이고 솔직한 모녀 관계와 친구 관계 또한 위와 같은 감상에 큰 영향을 준다.
<굿 윌 헌팅>, <죽은 시인의 사회>, <길버트 그레이프>, <바스켓볼 다이어리> 등은 모두 다양한 감상과 감동을 주는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영화와 소통하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자라면서 수도 없이 돌려 본 <금발이 너무해>, <클루리스>, <하이 스쿨 뮤지컬> 같은 작품들은 여성 제작자의 손을 거치거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것임에도 아름다우면서 유능한 캐릭터를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영화들을 수없이 본 경험 이후에 그레타 거윅이 참여한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 여성 제작자로서 그레타 거윅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이야기와 연출이 좋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나 다른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내면화하고, 다시 새로운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 개인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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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리뷰
켄 로치가 영화를 통해 전하는 미덕을 하나 꼽자면 바로 정직이 아닐까. 영화란 결국 각본에 의거한 허구이니 본디 있던 사건이라 할지라도 '살짝 비틀어' 손쉽게 관객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거나,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말랑한 요소를 가득 첨가하여 온갖 인기를 누려도 될 터인데 그는 언제나 각본의 기틀을 현실 위에 튼튼히 쌓는다. 그리고선 허상을 예리하게 벼려 관객의 마음을 후벼 판다. 그의 영화에는 대단한 시네마틱 수사가 가미되지 않곤 하지만, 나는 그가 일생을 던져 전하는 메시지가 여전히 푸르며, 흔들린 적이 없다는 사실에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그런 의미에서든 아니든, 잉글랜드인인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은 한국인인 내게 더더욱 특별하고도 놀랍다. 우리나라로 간단히 치환해 이야기하자면(굳이 ‘간단히’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사적 갈등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인 감독이 한국 독립운동 역사를 그려낸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래서일까. 켄 로치 역시 영국 내에서 반영주의자가 아니냐는 말을 꽤나(어쩌면 이골이 날 만큼일지도)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감독의 대답은 그의 신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왜 내가 조국을 싫어한다고 말하는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내 고향과 영국인들과 정부를 싫어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부를 비판하는 건 민주주의의 의무다" (최을영, 2013).이런 외골수 감독이 그려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감상하고 나면 심경이 절로 복잡해진다. 그 까닭은 침묵하는 아름다운 대지와 피 흘리는 전쟁의 괴리에서도 일부 빚어지며, 아일랜드에 주둔하는 영국군의 야만적인 지배를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인 데이미언과 테디(패드레익 딜레이니) 형제의 우애와 인생이 역사적 질곡에 빠지며 어떻게 변모하였는지를 목격하는 것, 외부적 조건으로 인해 치닫는 형제간의 파국을 통해 비극은 더욱 처절하고 절절해진다. 데이미언은 런던에서 의사로 지낼 수 있었던 삶을 접고 형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가로 변모하며 형의 사살명령에 삶을 마감했고, 테디는 IRA (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군)을 이끄는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시작하여, 자유국 육군 장교로 입지를 굳히나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처형해야만 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우리는 끝내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인데, 왜 가족이, 연인이, 민족이 와해되어야 하나? 정녕 우리는 희생 없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영화 도입부에선 적이 너무도 명확하다. 다름 아닌 영국군이다. 헐링을 하던 데이미언&테드 형제와 친구들의 인권은 순식간에 짓밟히고, 급작스레 수색당하며, 함께 게임을 즐긴 열일곱 살 미하일(로렌스 베리)은 자신의 이름을 게일어로 댔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초반의 데이미언은 그럼에도 영국 런던으로 향하고자 하는데, 아마 미하일이 영국군의 요구대로 이름을 게일어가 아니라 영어로 발음했다면 살 방편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데이미언은 곧 그러한 생生의 연장은 결국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차역에서 목격한다. 무기를 소지한 잉글랜드 군인은 기차에 탈 수 없다는 규칙을 말하는 무고한 기관사가 끔찍하게 구타당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인이 원하는 것은 생존이 아니라 삶이라는 깨달음은 의사 데이미언의 발걸음을 돌려놓는다.
그러하므로 데이미언이 지향하는 아일랜드는 처음부터 사람을 살리기 위한 장소여야 했다. 영국군을 몰아내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네이드(올라 피츠제럴드)가 외쳤듯 내 삶을 살 수 있는 터전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데이미언의 지향점이 더욱 명확하게 피어나는 장면은 그가 오랜 친구인 크리스(존 크린)를 밀고자라는 이유로 사살해야 했던 씬이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말에 따라 데이미언은 크리스를 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배운 지식으로 동포를, 그것도 피를 나눈 형제처럼 친했던 이를 죽여야만 한다. 데이미언이 지닌 의사라는 속성과 상극인 이 선택은 짙은 그림자가 되어 그를 끝까지 따라다닌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거대한 대전제가 짓밟은 친구의 대안적 인생을 떠올리는 행위는 데이미언이 테드와 달리 태생적으로 군인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고민이자 질문이다. 잠시 발을 헛디뎠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를 죽여야 하는 상황은 과연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일까? 데이미언은 동의하지 않는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에게, 아일랜드는 이제 크리스를 희생했을 만큼 가치 있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IRA는 부당한 고리대금업자에게 투자를 받지 않으면 이길 방법이 없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기아상태다. 아일랜드는 전쟁을 이어갈 체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기실,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영국에게도 1920년대의 상황은 그야말로 치킨게임이었다. 양국 모두에게 휴전이 절실했다. 양측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전 협정이 체결되는데, 문제는 협정 내용에서 비롯된다. 무수한 희생이 뒤따랐건만 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아야 했고 분단이 이뤄져야만 한다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이 내용은 납득하기 어렵기만 하다.
테디와 데이미언의 행보는 여기에서 갈라진다. 어쨌든 영국군이 머물지 않게 된 자유령을 수호하며 차근차근 완전한 독립을 이뤄낼 것인가, 혹은 협정을 인정하지 않고 완전한 독립을 이뤄낼 때까지 투쟁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각기 달랐던 탓이다. 형인 테디는 전자를, 동생인 데이미언은 후자를 선택한다. 영화가 데이미언의 시각을 주로 쫓아가기에 언뜻 테디의 선택이 그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실질적으로 전쟁을 이어가기엔 아일랜드 역시 너무도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테디가 데이미언을 이상주의자라 비난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다만, 테디의 편에 서지 않은 데이미언이 현실적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어떤 면에선 옳을지도 모른다. 일단 자유를 얻는다면 지쳐있는 사람들은 일시적인 평화에 젖어, 추구해야 하는 이상과 혁명을 잊기 쉽다. 또한 실질적인 독립이 아닌 만큼 언제 영국이 돌변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부분을 외면하고 어쨌든 완전한 독립이 훗날 분명 가능하리라 말하는 테디의 꿈이 과연 데이미언의 것보다 곱절은 더 현실적인가(2021 현재 북아일랜드가 여전히 영국의 구성국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더욱)?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1920년대 아일랜드 내전은 이미 지나간 역사다. 또한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식민지배와 저항, 내전의 비극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그저 픽션으로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기엔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시네이드의 목소리가 사무치게 남는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념이라는 이름 하에 지구 상에서 자행되는 여러 종류의 집단적 폭력이 개인의 상상력을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넘어서는 경우가 잦다는 것을. 그러하므로 아일랜드 내전과 동일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지언정 유사한 사건은 무수히 많을 것이고, 영화의 메시지는 시대를 뛰어넘어 유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소한 관객인 우리만큼은 앞으로 이러한 형제의 비극을 반복해선 안된다는 울림, 이러한 비극이 시작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정의로운 평화를 수호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담담한 목소리 말이다.
그렇기에 켄 로치의 힘은 영화 후에 더욱 극적으로 발휘되는 것만 같다. 아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감상한 관객이라면 형제의 비극을 멈출 수 있었을 법한 지점을 찾기 위해 저도 모르게 영화를 거슬러 올라갈 테니까. 상대방에게 이분법적인 꼬리표를 붙이고 배격하는 장소가 아니라, 궁극적인 지향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장소와 충분한 시간이 있었더라면 형제의 반목(확장하여 아일랜드 민족 간의 내전)은 최소화할 수 있었으리라는 가정을 한 번쯤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깨달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을 내가 얼마나 납작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어쩌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암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절, 독립을 위해 투쟁한 열사들이 이 정도의 대한민국에 과연 만족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의 말마따나 태어나려는 자는 언제나 (기존의) 세계를 깨뜨려야 하고, 이러한 부류의 투쟁은 언제나 지난하고 고단하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대한 청사진을 거듭 그려야 한다. 온 세상의 비극을 막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나 우리 주위의 비극을 최소화하는 데에 일조할 순 있을 테니.지치는가? 항상은 아니어도 좋으니 쉬엄쉬엄 힘을 내어 걸어가자. 도움은 되지 않겠다만 나는 내가 대단히 낙관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장기적 관점으론 언제나 긍정적이었다는 말을 덧붙여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뤄온 많은 발전도 이미 믿을 수 없는 성과가 아니었는가? 예술이 우리를 응원하는 한, 우리의 꿈은 언제나 무한할 것이고, 우리를 추동하는 동력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발굴해낼 것이다. 결국엔.
★★★★★
* 참고문헌
최을영 (2013). 켄 로치 :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싸우는 사회주의 영화 작가. 인물과사상, 6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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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영화 여배우들의 명과 암
최근 고전 영화에 심취하는 바람에 예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고전 로맨스 영화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영화들을 고르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아무래도 전설적인 여배우들의 출연 여부였다. 보다보니, 영화 내용과는 상관없이 궁금한 점이 생겼다. 요즘은 영화를 이끄는 남성 캐릭터가 많다고들 하고, 이런 현상은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캐릭터의 그늘 아래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드문드문 여성 서사의 영화들이 나오고 있고, 개인적으로 이런 흐름에 대해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뒤늦게 고전 영화들을 보니, 고전 영화들은 여성 캐릭터들을 오히려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주연 남자 배우들의 존재가 무색할 만큼 영화의 초점은 여자 캐릭터에 집중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때의 여배우들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를 긍정적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걸까.
티파니에서 아침을, Funny face,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등의 전설적인 여배우들의 히트작에서 공통적으로 그 시대의 보통의 여자는 태생적으로 보석을 좋아하고, 부자 남자를 낚아 인생 피는 것이 목표이며, 그런 여자들은 일정 부분 멍청한 데가 있을 수도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물론, Funny face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의 캐릭터는 여자의 치장과는 거리가 먼, 책벌레 여자로 등장하지만 그런 여자는 흔치 않기 때문에 별난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그 시대의 여성들의 캐릭터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도 되지만 자신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성 캐릭터들의 패션이 정말 화려하다. 아마 고전 영화에 대한 선호도는 현대의 사람들이 봐도 촌스럽지 않은, 클래식한 세련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롯될 것이다. 필자도 영화의 비주얼적인 면에서는 정말 감탄하면서 보게 된다. 하지만 관객의 만족스러운 눈요기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뿌리박힌 고정관념도 함께 보이기 때문에 화려함 이면의 숨겨진 상품적 시선에 대해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마릴린 먼로를 봐도, 그 상품적 시선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대중이 원하는 여성성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명성은 얻었지만 진짜 그녀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은 없었던 시대에서 그녀의 몸부림은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만 해도 배우의 역할과 실제 성격이 동일시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과거의 영화들을 보면, 정말 완벽한 스타일링, 고급스러운 느낌이 정말 눈길을 사로잡지만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일종의 광고, 화보에 등장하는 모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당연한 여성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현대를 살고 있는 필자는 왜 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현대의 영화 속 여성들은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사실 여성 중심 영화라고는 했지만 주인공이 여자일 뿐이지 그저 사회 속에서 어떤 사건에 휘말리는 한 인간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여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고전 영화들의 캐릭터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여성을 사람이기 전에 여성미가 필수적으로 가미되어야 하는 사람에서 여성미 같은 거 없어도 되는 사회로 오는 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이 요구받았던 가이드라인에서 자유로워지기까지 영화 속 캐릭터도 그만큼 다양해졌다는 점에서 정말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다만, 그 시간에는 많은 이들의 거침없는 표현이 필요했음은 잊지 않아야 하지만 말이다.
뜬금없지만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다분히 주관적인 이유 때문이다. 나는 너무 현재와 미래에만 집중하는 삶을 살다 보니, 과거의 어른들이 너무 당연하게 요구하는 여성적인 모습에 불만을 가진 적이 많았었다. 장녀이니 남동생의 끼니를 책임져야 한다느니, 뭐 여자애니까 이런 행동 거지를 해야 된다는 둥 은근히 느껴지는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그러려니 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적이 많았었고, 지금도 그 스트레스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예전의 나는 그런 어른들의 사고방식의 편협함을 깨려고 했었고, 내 문제보다는 어른들의 문제에 꽂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옛날 영화를 보았을 때에 느껴지는 화려함 이면의 불편한 느낌은 내가 기성 세대에게서 느꼈던 기시감과 맥을 같이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다.과거를 살아온 그들에게는 여자에게서 여성성은 당연한 것이었을 테니까. 내가 어른들이 살아온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현대의 잣대로 그들의 과거를 재단하려고 했기 때문임을 알았고, 그 부분은 어른들을 탓하고자 했던 나의 문제도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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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타쿠 콜렉션] 이토록 황당하고 찬란한 우리의 삶을
2025년쯤 되면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하늘을 뒤덮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닥쳐보니, 우린 여전히 축축한 길을 걸으며 불평하고 있습니다. 걸으며 우린 여전히 오늘 하루 먹고 살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인터넷 창을 10개씩 띄워둔 것처럼 병렬로 염려합니다. 말끔히 끝맺지 못한 문제들과 새로이 피어나는 일들은 생경합니다. 해가 바뀔 때 다졌던 마음은 그새 조금 닳았습니다.
이 복잡하고도 허망한 시기, 우리는 무엇으로 이 혼란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내 모든 선택이 최선이었을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내 주변 사람들도 이런 후회를 할까?”
아직 밤이 긴 계절, 도저히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들이 줄을 잇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날이 밝을 때까지 천장에 그간 했던 모든 선택을 쏟아놓는 당신을 위한 영화입니다. 혼란스럽고 화려한, 분주하고 반짝이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목도 기나긴 이 영화는, 1인분을 하며 살기에도 버거운 주인공 에블린이 다중우주의 운명을 짊어진 알파 세계의 남편 웨이먼드와 만나며 시작됩니다. 빨래방을 운영하던 에블린은 한순간에 무수히 많은 다중우주를 거대한 악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죠. 에블린은 자신이 일생동안 했던 선택들로부터 수많은 다중우주가 파생되었으며, 각 우주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후회합니다.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일을 맡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에블린 역시 이러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죠. 에블린은 이혼 서류를 내미는 남편, 멀어져가는 딸, 압류 직전의 빨래방으로 구성된 자신의 세계를 위태롭게 움켜쥐고 있습니다. 분명 매순간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 에블린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중우주를 넘나드는 법을 가장 먼저 깨달은 우주인 알파버스의 웨이먼드, 즉 알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당신은 내가 여태 본 수천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에블린으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들은 에블린이 어째서 자신이 최악이냐고 되묻자, ‘당신은 이 우주에서 마치지 못한 목표, 이루지 못한 꿈이 너무 많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우주 중 바로 이 우주에서의 우리는 어쩌면 최악의 선택지만을 골라왔을지도 모릅니다. 비가 올 날에 우산을 챙겨 나가지 않았던 것, 뚜껑을 제대로 잠그지 않은 물병을 가방에 집어넣었던 것, 한 잔 더 마셔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던 것부터, 어떤 갈림길에서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를 결심한 것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최악이기에 괜찮습니다.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그 어떤 존재들처럼 판단하고 결정해도 됩니다.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고, 가져본 적 없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도 됩니다. 내민 적 없는 손으로 누군가를 붙들고, 끌어안아도 됩니다. 지금의 내가 최악이라면, 모든 우주를 뒤져도 이곳의 나보다 큰 잠재력을 가진 존재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에블린이 수많은 우주의 자신과 조우하고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한편, 모든 우주를 집어삼키려 하는 거대한 악, 조부 투바키는 이미 판단을 내렸습니다. Nothings matter.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는 것이죠. 조부는 알파버스에서 받은 과도한 차원 이동 훈련으로 인해 분열되어 하나의 존재인 동시에 모든 존재가 되었고, 모든 우주의 힘을 지니게 되어 도덕적 기준조차 잃고 말았습니다. 조부가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아등바등 살려고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으니, ‘베이글’ 안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죠.
조부가 발견한 진리, ‘베이글’은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그 안에선 어떠한 기준도, 성취도 필요치 않습니다. 조부는 무수히 많은 우주를 넘나들며, ‘허무’를 경험했습니다. 삶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니며,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조부 세력과의 전투 속에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던 에블린 역시 이에 반박할 수 없었고, 조부의 논리에 수긍합니다. 이때 남편인 웨이먼드가 에블린을 붙듭니다. Please be kind! 이해할 수 없는 웨이먼드의 말을 통해 에블린은 깨닫습니다. 늘 실없고 바보같았던 남편, 에블린 없이는 꼼짝없이 굶어죽었을 것만 같은 남편 웨이먼드는 놀랍게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었다는 점을요. 손님의 빨랫감에 장난스레 붙여놓던 장난감 눈알, 에블린이 타박하던 그의 순진하고 물러터진 성정은 실상 세계를 끌어안는 가장 강한 힘이었으며 세상과의 기나긴 사투를 승리의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제 3의 눈이었던 것입니다.
Nothings matter. 웨이먼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아무것도 중요치 않습니다. 여태 어떤 일을 망쳤든,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든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들과 진심을 나누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게 각자의 생에서 단단히 지켜낼 수 있는 가치이고, 삶이 가지는 의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 세상에게 더 친절해짐으로써 길지 않은 일평생을 더 나은 선택으로 꾸려갈 수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합니다.
삶과 허무, 선택과 사랑이라는 굵직한 주제를 관객에게 쥐어줌과 동시에, 영화는 온갖 패러디와 농담으로 러닝타임을 가득 채웁니다. 어쩌면 이가 ‘인생에 대한 고민은 그리 진지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다 본 후의 당신이, 우리가 마주친 이 우주의 사랑스러운 점을 가득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021년에 세상에 처음 나온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국내 팬들의 꾸준한 성원에 힘입어 지난 2월 14일에 재개봉했습니다. 3월 1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되기도 했죠. 이 영화를 언제든 접할 수 있는 우주에 살고 계신 점을 축하드려요.
기회가 되실 때, 에블린의 멀미 나는 여정을 함께할 수 있길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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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트맨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다
더 배트맨 (The Batman, 2022)
“배트맨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내다”
개봉일 : 2022.03.01.
감독 : 맷 리브스
출연 : 로버트 패틴슨, 폴 다노, 조 크라비츠, 앤디 서키스, 제프리 라이트, 콜린 파렐, 피터 사스가드, 존 터투로
쿠키영상 : 1개
개인적인 평점 : 4/5
더 배트맨 줄거리
지난 2년간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범법자들을 응징하며 배트맨으로 살아온 브루스 웨인. 알프레드와 제임스 고든 경위의 도움 아래, 도시의 부패한 공직자들과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활약한다. 고담의 시장 선거를 앞두고 고담의 엘리트 집단을 목표로 잔악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수수께끼 킬러 리들러가 나타나자, 최고의 탐정 브루스 웨인이 수사에 나서고 남겨진 단서를 풀어가며 캣우먼, 펭귄, 카마인 팔코네, 리들러를 차례대로 만난다. 사이코 범인의 미스터리를 수사하면서 그 모든 증거가 자신을 향한 의도적인 메시지였음을 깨닫고, 리들러에게 농락 당한 배트맨은 광기에 사로잡힌다. 범인의 무자비한 계획을 막고 오랫동안 고담시를 썩게 만든 권력 부패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만,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밝혀지자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려 세 번째 리부트 작품이자 배트맨의 또 다른 시리즈의 탄생을 알리는 영화 <더 배트맨>이 드디어 개봉했다. <스파이더맨>이 리부트 될 때마다 생각했던 것처럼 처음 본, 나의 첫 배트맨 (크리스찬 베일)이 내 최고의 배트맨일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는데 <더 배트맨>을 보면서 그 믿음이 깨져버렸다.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이 밀렸다는 건 아니고,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이 또 내 마음속에 살포시 안착했다는 거다.
로버트 패틴슨의 새로운 모습
<트와일라잇> 시리즈 이후, 그만큼 국내 시장에서 크게 성공한 작품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로버트 패틴슨을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남주, <해리 포터와 불의 잔>에 나온 세드릭…으로 기억하는 관객들이 꽤 많다. 나 또한 2년 전쯤까진 로버트 패틴슨이 그간 다양한 필모를 쌓아왔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파격적인 금발 스타일도 멋지게 소화했던 영화 <굿 타임>, 데인 드한과 함께 인생을 담아내는 진실한 사진작가 데니스 스톡을 연기한 영화 <라이프>, 윌렘 대포와 함께 제대로 된 광기를 보여줬던 충격적인 영화 <라이트하우스>, 로버트 패틴슨이 가진 매력을 최대로 끌어냈던 <테넷>까지.
매번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던 이 배우가 ‘배트맨’이라는 히어로를 연기하게 된다는 소식 자체만으로도 기대감과 궁금증이 끓어올랐다. 과연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로버트 패틴슨의 이미지가 배트맨과 부합할 것인가. 싶었는데 이 모든건 기우였다. <더 배트맨>을 통해서 알았다. 로버트 패틴슨의 하관이 아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거기에 코믹스에 나오는 배트맨의 옆모습과 그의 옆모습은 상상 그 이상으로 싱크로율이 높다.
<더 배트맨>의 강점
같은 주인공과 배경을 활용한 시리즈물을 ‘이전과 다르게’만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더 배트맨>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이 영화는 지금껏 보아온 배트맨 시리즈 중에 가장 박력이 넘친다. 웅장한 OST, 위엄이 느껴지는 배트맨의 발걸음, 어둠과 대비되는 강렬한 붉은색, 속도감을 제대로 담은 카 체이싱 장면과 명암, 가까운 거리에서 오는 타격감을 제대로 활용한 액션신들. 분명 ‘액션이 주’가 되는 영화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액션신들이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더 배트맨>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설정
<더 배트맨>은 역대 배트맨 시리즈 중에 가장 어둡고 진중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은 더 초췌하고 지쳐있으며 예상외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려준다. 영화에 나오는 고담시는 그 어느 때보다 눅눅하고 어두우며, 전체적인 분위기는 히어로물보단 추리+누아르물에 가깝다. 어두침침한 배경이 대부분의 시간을 채우고, 러닝타임은 역대 배트맨 영화 중 가장 긴 176분이다. 가볍게 찾아볼만한 히어로물의 조건을 과감하게 제외한 이 영화는 히어로로서의 활약하는 배트맨의 모습보단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 사이의 간격, 밝혀진 진실과 지금껏 믿어왔던 것의 괴리감 사이에서 고민하고 변화하는 배트맨의 모습에 무게를 둔다.
영화의 시점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활동한지 약 2년이 지난 시기다. 브루스는 악당들을 처치하는 게 아버지가 남겨준 ‘웨인 가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며, 밤낮을 바꾼 채 그림자처럼 고담시를 배회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시는 더 썩어들어가기만 하고, 급기야는 시장 선거를 앞두고 ‘리들러’라는 정체불명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브루스는 배트맨을 자경단이라 칭하며 배척하는 경찰들 사이에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차근차근 수수께끼를 풀어나가고, 그 과정에서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알게 된다.
곪아버린 도시. 두 개의 복수심
배트맨의 첫 등장 후 잠시 줄었던 범죄율은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시장의 뒤에 있었던 마피아 팔코네와 그 밑으로 쭈욱 이어져있던 부패한 경찰, 정치인들. 복수심 하나만으로 버티기엔 너무 힘든 싸움이다.
브루스가 한껏 지쳐있던 타이밍에 등장한 리들러는 부정한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해간다. 두 사람은 배트맨과 리들러라는 가면을 통해 얻은 새로운 인격으로 각자의 정의를 행한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죽는 게 정당화 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리들러가 정의를 추구한다는 말에 조금씩 수긍하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리들러의 행동마저 ‘괜찮은 것’이라고 일부 인정하게 될 만큼 고담시의 상태는 정말 처참했고 브루스는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다.
복수와 정의 그 사이에서
이 영화보다 앞선 타임라인을 그린 <배트맨 비긴즈>와 그 이후의 이야기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된 이유는 표면적으론 ‘도시를 위협하는 악당을 소탕하는 것’이다. 하지만 브루스의 과거를 파고 들어가 보면 그의 주된 목적은 ‘악을 처단하는 것’, ‘악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다 도둑의 총에 부모님이 피살당하고, 범인이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는다는걸 알게 된 순간부터 브루스는 악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그는 레이첼과 알프레드의 도움으로 마음을 다잡고 배트맨이 되지만 진정한 히어로로서의 자세를 갖게 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더 배트맨>에 나오는 브루스는 딱 이러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보통 직장도 2-3년쯤이 가장 권태로울 때인것처럼 그 또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의미가 있을까?”고민하기 시작한 거다. 분명 범죄자들을 잡는 게 내 일, 가족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시간을 투자했는데 도시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본인의 마음 또한 전혀 편안하지 않다. 네 정체가 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복수다.”라고 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정의감보단 진한 분노, 권태 같은 것이 느껴진다.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보면 그저 온갖 감정에 찌들어 지친 사람 같기도 하고 말이다.
브루스는 매일같이 정의를 행한다며 사용했던 복수라는 단어와 복수심이란 감정이 자신의 마음에, 이 도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제는 복수심과 분노를 극복하고 도시를 되살릴 방법을 찾아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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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다.
영화에선 어린 브루스를 닮은 미첼 시장의 아들이 나온다. 리들러의 첫 살인 대상이자 이번 시장 선거의 후보였던 미첼 시장. 브루스는 사건 현장에서 방 안에 앉아있는 시장의 아들을 발견하게 된다. 브루스 또한 미첼 시장의 아들과 같은 일을 겪었다. 시장에 출마한 토머스(아버지). 눈앞에서 목격한 부모의 죽음.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아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브루스의 렌즈에 담긴 영상을 보면 그가 시장의 아들을 꽤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장례식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리들러의 추종자들과의 전투를 마친 브루스는 직접 물에 뛰어들어 시민들에게 향하고, 그가 제일 먼저 손을 내민 인물 또한 미첼 시장의 아들이다.
브루스는 가면을 벗게 된 리들러의 추종자가 “나는 복수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결국 복수는 도시를 변화시키는 게 아닌 붕괴시킬 뿐이란 걸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질긴 복수의 끈을 끊고, 도시의 희망이 될 시민들의 손을 잡는다. 악당들과 맞서는 게 아닌 시민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앞에 서는 행위 자체에서도 브루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지만, 특히 브루스가 자신과 닮은 어린 미첼 시장의 아들을 구하는 장면은 그가 복수를 꿈꾸던 옛날의 자신을 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배트맨>은 배트맨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여정이다. 반복되는 그날 밤의 기억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복수심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던 배트맨. 브루스 웨인의 삶을 잊고 살던 배트맨은 이제 복수가 아닌 희망을 꿈꾼다. 그의 곁엔 소중한 사람도 있고, 새로운 희망이 될 청렴한 시장 벨라 레알도 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토머스는 브루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브루스, 왜 우리가 넘어지는 걸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스스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더 배트맨>에서 브루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필요한 건 희망이다. 흉터가 남을 수도 있지만 이를 이겨내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같은 시리즈는 아니지만 두 캐릭터의 대사가 묘하게 이어진다. 브루스는 드디어 희망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 대사가 나오는 순간부터 영화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밝아진다.
기대되는 속편
들리는 이야기로는 로버트 패틴슨이 워너와 3편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놀란 감독의 트릴로지처럼 <더 배트맨>또한 3부작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속편은 5년 내’에 제작된다는 말을 들어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지만… 이 영화의 속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복수심 대신 희망을 찾은 브루스 웨인의 변화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더 큰 기대 포인트는 이 시리즈의 빌런들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리들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신원 미상의 감옥 동료’. 거의 조커로 확정된 배리 케오간의 등장이 정말 기대된다. 그가 <더 배트맨>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에 조커로 나오는 건 아닐까 은근히 기대했는데, 기대가 실제가 되었다. 엔딩 크레딧엔 정확히 적혀있지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조커 같은 웃음소리와 얼핏 보이는 입, 코믹스에 나온 조커와 비슷한 헤어스타일. 2편에선 배트맨의 영원한 숙적인 조커를 만날 수 있을듯하다. 거기에 이번 영화에서 엄청난 포스를 보여준 리들러, 폴 다노와 함께 나오게 된다면 시너지 효과가 엄청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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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규정될 때
‘나’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규정될 때
<톰보이>에는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들어진 지점들이 존재한다. 첫 장면부터가 그렇다. 영화는 '로레'의 뒷모습으로 시작된다. 로레는 차 위로 상반신을 내밀고 팔을 뻗어 바람을 느낀다. 영화의 초반부까지 영화가 로레의 성별에 대해서 관객에게 알려주는 단서는 없다. 관객은 그저 파란색 벽지를 좋아하고, 런닝티와 반바지를 좋아하는 짧은 머리의 아이와 마주할 뿐이다. 로레는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한다. 친구들은 그의 성별을 묻지 않을뿐더러 그의 외형과 이름을 통해 그가 남자라 생각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로레가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했지만, 자기 자신이 남자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로레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백히 말하자면 로레는 그들을 의도적으로 속인 것이 아니다. 로레는 단지 남자아이처럼 하고 다녔으며,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했을 뿐이다.
로레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어쩌면 로레는 단순히 남자아이들과 놀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리사의 말처럼 남자아이들은 여자라고 껴주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과 놀길 바라는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남자 이름을 말한 것일 뿐인데 일이 예상과 다르게 커졌는지도 모른다. 혹은 로레는 정말 남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동생 '잔'과 목욕한 후, 로레는 그만 씻고 나오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도 욕조에 앉아 잠시 동안 나가기를 주저한다. 욕조에서 일어나서 몸을 타올로 닦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등과 팔의 근육을 살피고 침을 뱉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웃통을 까고 침을 뱉으며 축구를 하는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똑같이 행동하기도 하고, 자신의 수영복을 잘라 남자 팬티 수영복으로 만들어 입기도 한다. 로레가 남자아이처럼 보이도록 행동한 이유는 뭘까. 남자아이들과 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남자가 되고 싶어서였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점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다. 로레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그런 로레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에 더 관심을 보이며 그 본질에 대해 묻는 것처럼 보인다. 로레는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의해 남자아이가 된다. 그가 자신의 성별이 무엇이라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외형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된 것이다. 모두가 당연하게 그를 남성이라 여겼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영화를 카메라의 초점이 두드러지게 찍었다. 카메라가 캐릭터에 초점을 맞출 때 배경은 흐리게 처리되며, 카메라의 초점 이동이 분명하게 드러나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을 명확히 비춘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은 더욱 인물과 인물이 느끼는 감정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감독은 이런 촬영 방식과 더불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모범적으로 만드는 방식을 지양했다. 그래서 주인공 로레를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다소 서툴다. 로레의 엄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는 아마 로레에게 이전보다 덜 신경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아이를 때린 '미카엘'을 찾기 위해 한 아이와 그 엄마가 집으로 찾아온 것으로 모자라,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동네 아이들 모두가 자신의 아이가 남자아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상당한 충격과 당혹감을 안겨줬을 것이다. 엄마는 순간적으로 로레의 뺨을 때리는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로레의 엄마는 로레에게 파란 원피스를 입으라 건네고, 로레가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로레를 억지로 끌고 가던 중에 멈춰 로레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본인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서 로레 엄마의 결정은 그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로레는 로레가 때렸던 아이의 집을 들러 로레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린 후, 곧장 리사의 집으로 향한다. 리사는 모든 사실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로레는 리사의 집에서 뛰쳐나가 숲을 향해 달린다. 숲은 리사와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레는 입고 있던 파란 원피스를 벗어던진다. 로레가 나무 위에 올려둔 파란 원피스가 카메라에 비춰지고, 로레는 그 자리를 떠난다. 로레는 친구들에게로 간다. 자신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겁이 나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으며 접근한다. 친구들은 로레를 발견하고 도망가는 로레를 쫓아가 붙잡는다. 남자아이들은 로레가 여자인지 사실 유무를 확인하려 하고, 리사가 그들을 제지하자 여자인 리사가 직접 그것을 하도록 만든다. 그 과정에서 수치심을 느낀 로레는 그 자리를 뛰쳐나간다. 그리고 리사는 로레를 찾아온다. 창밖을 보고 있는 로레의 눈에 나무 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리사가 보인다. 둘은 다시금 서로를 마주한다. 마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같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자못 다르다. "넌 이름이 뭐야?"라는 리사의 물음에 로레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한다. "로레"라고. 그러고는 살짝 웃는다.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로레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 스스로가 규정한다. 영화는 거기에서 끝나지만 우리는 이들의 관계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비로소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이들이 함께 춤출 때 들렸던 곡 "널 사랑해, 언제나(I Love You Always)"가 들려온다. 로레와 리사는 춤을 춘 후 서로를 꼭 붙잡던 두 손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우정을 계속 키워가지 않을까. 비슷한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로레는 더이상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로레를 사랑해줄 리사와 잔 그리고 엄마, 아빠가 있기에.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영시코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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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 가족 -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 한 스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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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2만 원만 빌려주시겠어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텐트를 집, 밤하늘의 달을 조명 삼아 살고 있는 기우(정일우)와 가족들.
다시 마주칠 일 없는 휴게소 방문객들에게 돈을 빌려 캠핑하듯 유랑하며 살아가던 이들이
어느 날, 이미 한 번 만난 적 있는 영선(라미란)과 다른 휴게소에서 다시 마주친다.
인생은 놀이, 삶은 여행처럼 살아가던 고속도로 가족과 그들이 신경 쓰이는 영선.
이 두 번의 우연한 만남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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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정우, 김남길 주연 범죄 스릴러 "브로큰" / 동생이 살해된 밤의 비밀 / 적절한 액션과 반전이 살아있는 결말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브로큰"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따로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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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압꾸정> 런칭 예고편
이번엔 주먹 대신 말이다! 뷰티도시로 화려하게 컴백한 마블리 ✨ 대국이형 오지라퍼 모먼트에 '꾸'며드는 [압꾸정] 런칭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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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티탄> 리뷰 예고편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여성이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슬픈 아버지와 조우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