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5-05-01 14:50:51
공허함을 가진 루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짭벤져스
– <썬더볼츠*>(2025)











삶에는 우울한 순간들이 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그런 우울한 순간들을 만난다면, 삶의 방향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건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그저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음 속에 답답함과 슬픔이 공존하게 된다. 그런 우울한 순간들이 쌓이면 마음의 응어리가 커지고, 그건 감정의 공허함으로 표출된다. 자신이 하던 일에 몰입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게 다 무슨 소용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영화 <썬더볼츠*>는 마블 영화의 분위기와 조금 다르게 진행된다. 중심인물은 1대 블랙 위도우인 나타샤(스칼렛 요한슨)의 동생인 옐레나(플로렌스 퓨)다. 옐레나는 나타샤의 죽음 이후 암살자 일을 계속하며, 누군가를 살상하거나 다치게 하는 임무를 반복한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자신을 죽이려는 또 다른 암살자들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옐레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그의 심리상태가 중심에 놓여 있으며, 특히 이번 영화의 빌런인 센트리/밥(루이스 풀먼)과의 연결을 통해 그 감정은 더 깊어진다.
[첫번째 감정] 옐레나의 공허함
옐레나는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언니를 잃었다. 타노스의 블립으로 몇 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그는, 블립 기간 중 나타샤가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존재와 이별할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상실한 것이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밝았던 부분이 언니와의 관계였을지 모른다. 그 외에는 옐레나에겐 밝음이 보이지 않는다. 아주 어린 시절, 같이 훈련받던 동료를 밖으로 유인해 죽게 만드는 일을 시작으로 그는 철저히 암살자로 교육받아 성인이 되었고, 그저 어둠 속에 숨어 살인을 수행하는 존재가 되었다.
정부는 옐레나를 언제나 암살자로만 대했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히어로들과의 거리는 멀었다. 그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는 전문가였지만, 그 가치는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다. 그 반복되는 인정받지 못함과 무력감이 결국 옐레나의 공허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아빠인 알렉세이(데이비드 하버)는 늘 엉뚱한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고, 나타샤의 죽음 이후엔 옐레나를 피하기까지 했다. 그는 의지할 가족조차 없었다.
그런 옐레나가 이번 영화에서 만난 건, 자신처럼 무너져본 사람들이었다. 존 워커(와이어트 러셀), 에이바(해나 존 케이먼), 버키(세바스찬 스탠), 그리고 밥은 모두 과거 루저였거나 현재 세상에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다. 옐레나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처음으로 공허함을 공유하고, 공감받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어둠을 직시하고, 비로소 그 안에서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는다. 어둠 속에 내리던 그림자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두 번째 감정] 밥의 공허함
밥은 영화 초반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아무도 그에 대해 아는 이 없이 등장한다. 사실 그는 과거 마약 중독자였고, 실험 지원자로 정부의 비밀 초능력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오랜 잠에 빠졌던 인물이다. CIA 국장 발렌티나(줄리아 루이스 드레퓌스)가 주도한 그 실험은 어벤져스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인간을 고려하지 않은 잔혹한 실험이었고, 결국 센트리라는 위험한 존재를 만들어냈다.
밥이 센트리로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가진 어둠이 드러난다. 그는 본래 순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물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된 공허함은 엄청난 초능력과 맞닿으면서 파괴적인 성향으로 변질된다. 센트리는 그 자체로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을 어둠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만든다. 결국 센트리는 밥이 만든 또 하나의 자아이자, 과거의 상처가 만든 괴물이다.
그 괴물과 싸우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건, 자신도 어둠을 품고 있는 옐레나와 썬더볼츠 멤버들이다. 그들은 누구도 완전한 영웅이 아니지만, 밥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그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과거가 어땠든,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 안의 어둠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밥은 그렇게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세 번째 감정] 루저들의 따뜻함
썬더볼츠의 멤버들은 사회로부터 버려진 존재들이다. 옐레나는 암살자였고, 존 워커는 캡틴 아메리카였지만 민간인을 살해해 사회에서 퇴출되었다. 알렉셰이는 레드 가디언으로 과거 러시아에서 슈퍼솔저로 활약했다. 과거 에이바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고스트 슈트를 만들었지만, 그것을 지키는 과정에서 빌런이 되었다. 버키는 오랜 세월 세뇌된 암살자 윈터솔저로 살았고, 자신의 의지로는 끊어낼 수 없는 과거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을 루저라고 생각했고, 세상 역시 그렇게 규정했다.
그들이 진짜 변하는 건, 부속품으로 쓰이던 자신들을 벗어나 서로의 공허함을 드러낸 순간부터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다. 썬더볼츠는 단순한 팀이 아니라, 서로를 보듬는 공동체가 된다. 영화에서 옐레나는 그 중심에 선다. 혼자 어둠을 통과했던 사람이, 다른 이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 변화가 영화의 감정을 이끈다.
무엇보다 <썬더볼츠*>가 특별한 건, 그 따뜻함이 조롱조차 품어 안는 데 있다. 영화는 스스로를 ‘짭벤져스’라고 비웃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둠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며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 그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가장 큰 선물이다.
‘성난 사람들’ 감독이 만들어낸 새로운 분위기의 마블 영화
<썬더볼츠*>는 마블의 기존 세계관 안에 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DC의 <수어사이드 스쿼드>나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액션보다는 심리적 서사에 집중한다. 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어두움, 외면당한 트라우마, 그럼에도 서로를 위로하려는 따뜻함이 중심이다. 어찌 보면 히어로물보다는 심리치료 영화에 가깝다.
타노스 이후, 계속 힘을 잃어가던 마블의 흐름을 바꿔주는 영화로 볼 수도 있다. 플로렌스 퓨는 블랙 위도우라는 새로운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감정 연기의 폭이 넓고, 이 역할을 아주 설득력 있게 완성해냈다. 플로렌스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스턴트도 직접 해냈고, 그의 얼굴이 화면에 자주 등장하면서 심리적 변화를 잘 보여준다. 세바스찬 스탠, 와이어트 러셀, 해나 존 케이먼, 루이스 풀먼도 자기 캐릭터의 무게를 단단히 지킨다.
이번 영화의 연출은 <성난 사람들>로 국내 팬들에게 인상 깊은 인장을 남겼던 제이크 슈라이어 감독이 맡았다. 과감하게 분위기를 달리한 이번 작품에서 그는 캐릭터의 내면과 심리를 차분하게 끌어올리며 이전 마블 영화들과는 다른 무드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블랙 위도우>와 <팔콘과 윈터 솔져>, <호크아이> 시리즈 등에서 활약한 에릭 피어슨이 각본을, <더 배트맨>, <듄> 등에서 감각적인 음악을 들려준 마이클 지아치노가 음악을 맡아 마블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도 감정에 집중한 새로운 결을 만들어낸다. 흔한 히어로 액션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인물들이 다시 살아가려는 이야기로 무게중심을 옮긴 선택이 반갑다.
이 영화는 2개의 쿠키 영상으로 마무리되며, 이후 등장할 <어벤져스: 둠스데이>를 암시한다. 뉴 어벤저스라는 이름이 어색할 정도로, 이 팀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진짜 같은 영웅들이 아닐까. 공허함과 상실, 어둠과 따뜻함. 이 감정들을 이토록 정밀하게 풀어낸 히어로 영화는 많지 않다. 공허한 마음에 묘한 울림을 남기고 싶다면, 이 ‘짭벤져스’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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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버전의 내가 되고 싶어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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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까지도 종종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도 '나'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생각하고 느끼는 내가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 있다니.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또 '나'라는 것으로 태어나서 지금과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무언가가 될까. 지금 나의 이 비루한 영혼(같은 게 있다면)이 다시 태어나도 또 내가 될까.
(이 주제와 관련하여 존 페리,『개인의 동일성과 불멸성에 관한 대화(2017)』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어릴 적에는 내가 갖지 못하여 소망했던 것들, '피아노를 가진 나'라든지, '공놀이를 잘하는 나'라든지, '가출한 나' 같은 모습들을 상상하곤 했다. 내 상상 속에서는 내가 빛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땡땡 치고 엄마는 옆에서 책을 읽고, 발야구를 할 때 저 멀리까지 공을 뻥 차고, 밤거리를 헤매는 내가 있었다. 현실의 나는 피아노도 없고 소위 말하는 '개발'이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는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수억 가지의 경우의 수를 보고 왔다. 그 이후로 각자의 유니버스에 살고 있던 스파이더맨이 어쩌다 한 자리에 모였고, 로키는 여러 모습의 로키를, 완다는 다른 삶을 사는 완다를 만났다. MCU는 멀티버스가 전 세계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하나씩 있었음을 간파한 듯하다.
그러나 나는 히어로도 아니고 초월적인 힘을 가지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다. 마블의 멀티버스는 특별한 존재들만의 우주이니 나같은 미물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특별한 존재들이 세상을 구할 때 나는 행인1로 지나갔다가, 우주가 뒤바뀔 때는 또 사라졌다가 하는 NPC에 불과하다.
한편, A24의 영화들은 그 행인1들을 조명한다. MCU에서 우주괴물이 지구를 괴롭힐 때 으악 소리 한번 못지르던 행인1들은 A24의 영화에서 방황하는 레이디 버드가 되기도 하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나리를 키우기도 하고, 집도 절도 없어 아이를 입양보내야만 하는 플로리다의 미혼모가 되기도 한다.
멀티버스가 이제는 흔한 소재가 되어버린 데다 너무 긴 제목 탓에 큰 기대 없이 영화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제 울어라!'하는 장치만 나와도 쉽게 울어버리는 울보긴 한데 멀티버스 액션 코믹 영화를 보면서 울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망한 버전의 나
미국에서 코인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과 웨이먼드 부부가 있다. 이들은 홍콩에서 무작정 이민을 온, 이를테면 <첨밀밀>의 소군과 이요 같은 사람들이다. 에블린의 앞에는 수만 개의 영수증이 펼쳐져 있다. 국세청에서는 이들의 비용처리를 문제삼아 세탁소가 문을 닫을 판이다.
아들을 원했던 에블린의 아버지는 에블린이 태어날 때부터 실망했다. 웨이먼드와 결혼한다 하여 또 실망했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그렇게 싫어했던 딸과 함께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에블린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사업가로 성공한 모습을 보이지도 못하고, 딸 조이는 몸에 문신이 있는 동성애자라 아버지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가 없다.
사업은 망하기 직전인데다 딸은 엇나가고, 에블린 혼자서 동분서주하는 마당에 웨이먼드는 왜 이리도 태연한가. 치열하게 사는 에블린의 눈에 허허실실 웃기만 하는 웨이먼드는 한심하기만 하다. 빨래주머니에 장난스럽게 눈알 스티커를 붙이는 것마저도 꼴보기 싫다.
이 부부와 달리 미국에서 나고 자란 딸 조이가 국세청에 따라가 통역을 해주기로 했는데, 할아버지 앞에서 애인과 자신의 관계를 '친한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을 보고 조이는 집을 나가버린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으면서 정작 자신도 딸을 인정하지 못하는 도돌이표.
불안한 마음으로 국세청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웨이먼드는 갑자기 에블린의 귀에 이상한 장치를 꽂고 핸드폰으로 뭔가를 설정한다. 이상한 행동을 하라는 쪽지까지 써서 준다. 쪽지를 쓴 종이는 사실 웨이먼드가 준비한 이혼서류였다. 웨이먼드도 에블린에게 상처를 받아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웨이먼드의 알 수 없는 행동, 깐깐하기로 소문난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의 으름장, 에블린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때, 웨이먼드는 자기가 남편 웨이먼드가 아닌 다른 우주에서 온 웨이먼드, '알파 웨이먼드'라고 밝힌다. 우주에는 수많은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있고, 다른 우주의 에블린에 의해 흑화된 '조부 투파키'가 우주를 망치고 있으니, 이 세계의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를 없애라는 것.
다른 우주의 에블린에게 접속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평소에 하지 않을 이상한 짓을 하는 것. 여러 멀티버스 영화에서 학습하였듯 멀티버스는 선택에 의해 갈라진다. 이후 등장인물들은 평소에는 죽어도 하지 않을 기묘한 짓거리들을 하며 다른 우주의 자신에게 접속한다.
다른 우주의 디어드리는 에블린과 웨이먼드를 공격한다. 알파 웨이먼드는 남편 웨이먼드와는 다르게 싸움도 잘하고 책임감도 있다. 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이 에블린이어야 했나. 그 질문에 알파 웨이먼드는 답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실패만 한 유일한 에블린이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의 가능성이 너무도 많은 에블린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다른 버전의 수많은 나
노벨문학상을 수상자인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쓴 <선택의 가능성들>이라는 시가 있다. '무엇보다 무엇을 더 좋아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는데, 선택이란 아주 작은 차이들과 아주 짧은 순간의 결정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때로 그 찰나의 순간들로 인한 나비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따라 가는 택시를 타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영화는 에블린이 했을지도 모를 수많은 선택의 가지에서 살아가는 에블린들을 소환한다.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은 에블린은 배우가 되고, 가수가 되고, 요리사가 되고 쿵후 마스터가 되고, 피자집 광고판을 돌리는 아르바이트생이 되고, 어떤 물건이 되고... '모든 것(everything)'이 된다.
에블린은 빠르게 다른 에블린이 되는 방법을 습득한다. 이마에 검은 동그라미를 찍고 다니는 디어드리와 싸우며 배운 적도 없는 쿵후로, 요리사의 칼질로 악의 세력들을 무찌른다. 그리고 마침내 조우한 조부 투파키. 조부 투파키는 다름아닌 딸 조이였다.
아시아인인 엄마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딸이 참 착한데, 나쁜 것이 우리 딸을 조종하는구나!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의 혹독한 훈련으로 정신이 분열되면서 순식간에 이 우주, 저 우주로 다니며 모습을 바꾼다. 에블린은 딸의 모습을 한 조부 투파키를 없앨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싸워보자. 싸워서 설득하자. 원래의 착한 내 딸 조이로 돌아오도록.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의 정신이 깨진 방법과 동일하게 수없이 많은 나를 헤집고 다닌다. 정신을 분열하는 데 성공한 에블린은 이제 어떤 버전의 에블린도 될 수 있다.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에블린. 요리사 에블린은 부정하게 손님을 끄는 경쟁자를 고발하고, 다른 버전의 웨이먼드에게 상처주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을 데리고 '베이글'로 간다. 베이글이란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검은 원이다. 디어드리의 이마에 찍혀있던 검은 원은 베이글의 상징이었다. 조부 투파키가 우주를 어지럽힌 이유는 에블린을 만나서 같이 죽기 위해서였다. 죽고 싶은데 너무 많은 나로 살아가느라 죽지도 못했으니, 같이 사라지자고, 이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에서 이제 벗어나자고.
그러나 엄마 에블린은 딸을 보낼 수 없다.
할리우드식 인드라망
다시 원래의 세탁소 에블린. 한창 파티가 열려 흥겨울 때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가 찾아온다. 세탁소는 이제 압류될 것이다. 온갖 버전의 에블린이 되어 본 에블린은 모든 것이 환멸스럽다. 야구 배트로 창문을 때려 부수고, 될 대로 돼라 싶다.
웨이먼드는 디어드리와 몇 마디 나누더니 다 해결됐다며 에블린을 위로하는데, 어떻게 했냐고 하니 그냥 부드럽게 말했을 뿐이란다. 디어드리도 그의 방식대로 에블린을 위로한다. 아, 지금까지는 온갖 버전의 에블린이 되어 힘으로, 또는 분노로 일관했는데 싸움에서 이기는 다른 방법도 있었다. 마치 매서운 바람이 아닌 햇볕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처럼.
그토록 싫어했던 웨이먼드의 눈알 스티커를 이마에 붙인 에블린. 이 눈알 스티커는 '제3의 눈'이 되어 초월적인 힘을 발휘한다.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와 함께 모든 우주에서 싸우고 싸운다. 모든 생물 버전의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와 다 싸우고 나니 이제 무생물인 돌이 되기에 이른다.
돌이 된 조부 투파키는 절벽 끝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때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가 굴러떨어진 낭떠러지에 같이 떨어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에블린이 되어 선택한다. 에블린이 상처 준 웨이먼드, 경쟁자였던 요리사, 애인이었던 디어드리... 에블린 없이 혼자서 베이글로 들어가 소멸되고자 하는 조부 투파키.
조부 투파키는 묻는다. 이제 그 어떤 모습의 에블린으로 살 수도 있는데, 속썩이는 딸 조이도, 망하기 직전의 세탁소도, 답답한 웨이먼드도 없는 인생, 화려한 배우, 가수, 요리사, 쿵후 전문가, 무엇도 될 수 있는데 왜 다시 돌아왔냐고. 영화 포스터에 쓰인 문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 어떤 인생을 살아도 나는 너를 구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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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를 형상화한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무척이나 불교적이다. 멀티버스가 우주괴물의 싸움터가 될 수도 있는 한편 무척이나 철학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불교 용어인 인드라망은 우주의 무한한 하늘나라 중 제석천(인드라)에 쳐진 구슬 그물을 말한다. 구슬에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비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나는 하나의 내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유일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부처로 본다.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부처가 되어야 한다. 무아지경이라는 말처럼, 실체가 있는 '나'는 없다. 색깔도 모양도 형식도, 기쁨도 슬픔도 없다. 고로 나의 실체는 없고 세상 모든 것이 '나'이니, 타인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것은 결국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것과 같다.
나는 늘 내가 아니고 싶었지만 나는 내가 아닐 수 없었다. 뭔가를 잘하는 나, 바보같은 나, 칭찬받는 나, 못된 나, 괄시받는 나를 한 사람의 나로 통합하여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어떤 모습의 '나'는 갖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래도 어떤 우주에는 대학을 안 간 버전, 다른 전공을 한 버전, 취업을 한 버전, 결혼을 한 버전, 부자가 된 버전, 뭔가를 이뤄낸 버전,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는 버전 등등의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조금은 덜 외로워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모든 것, 모든 곳에 동시에 내가 있으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주연 :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제이미 리커티스
상영시간 : 139분
개봉일 : 2022년 10월 12일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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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으로도 채우기 힘든 사람의 마음
난 오늘도 크림 앱을 켜서 사고 싶은 물건을 구경했다. 보통이면 여러 개 찾아 보겠지만 근래의 나는 하나만 검색한다. 이제 물건은 나를 더 이상 기쁘게 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어느 신발은 당근에 내놓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신는 것은 덩크 2족과 컨버스, 로퍼 4켤레다. 살 필요가 없던 것에 돈을 써왔다. 아. 이럴꺼면 그냥 우리 엄마 가방이나 사 줄걸. 무엇이든 경험해 보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라곤 하지만 요즘 신발장만 보면 씁쓸하다. 결국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건 내면이었다. 최소한의 사람구실만 할 정도로,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TPO만 맞는다면 일상을 사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남들 사춘기때 하는 걸 안하고 살았으니 그 만큼의 댓가를 겪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이 합리화에 살을 더 붙힌다. 에잉. 그래도 뭐 먹는것보단 낫지. 물건이라도 남았으니까. 큰 손해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해본다.
근데 이 합리화도 얼마 못 갈거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금전감각이란 큰 돈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무뎌지기
때문이다. 난 머지 않아 요즘은 뭐가 나왔나? 하는 마음에 스니커즈를 보고 있을 것이다. 또 아직 사회인도 아닌데 단일품목에 그정도를 태우는건 선 넘었지 하며 그거보다 싼 것들을 위시리스트에 넣을 것이다. 그리고 돈을 쓴다. 담배를 안 피우고 밖에서 밥을 잘 안 시켜먹는 내 생활패턴이 이 돈을 마련해 주었다고 생각하며 내 자신을 속인다. 그리고 호구가 된다. 리셀가로 웃돈을 주고 산다. 이번엔 다를거라 생각하지만 여전히 마찬가지다. 이걸 산다는 의미가 나의 어떤 것을 증명해주는게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마음에 드니까 산다!라는 핑계로 난 나를 속인다. 이 세상은 내가 알아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남이 나를 만들어 주지 않는다. 되게 잘 아는 인생의 교훈인데 가끔 나는 알아서 멀리 돌아간다. 가끔 내가 하는 행동이 코미디같다.<블루 재스민>은 자아의 붕괴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재스민과 진저다. 진저와 재스민은 자매 사이다. 자매 사이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재스민의 남편이 진저의 돈을 갖고 사기를 친 것이다. 사실 사기꾼은 재스민의 남편 할이었어서 언니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구석이 있긴 하다. 이에 따라 언니를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지만 진저는 수천의 빚에 명확한 일자리도 없는 언니가 루이비통 가방과 일등석을 타고 왔다는 사실에 황당해한다.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재스민. 정신 차리기는 커녕 재스민은 과거 회상에 자주 빠진다.
과거 회상에 자주 빠진다는 것은 현재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재스민은 사실 오갈 데 없는 처지다. 동생 부부가 복권으로 딴 20만 달러를 사기당해 모두 날렸고 전남편은 남 등쳐먹은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기댈 가족이 없다. 심지어 이에 대한 충격으로 아들 대니와도 멀어졌으니 낙동강 오리알이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돈 흥청망청 쓰던 과거에서 돌아와 현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재스민은 드와이트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드와이트는 정계 입문에 관심이 있는 외교관으로 품격 있는 미모의 재스민과 완전 찰떡인 커플이다. 둘의 연애 초기는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근데 이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오래 못 갔다. 우연히 만난 진저의 전 남편(그러니까 남편 할의 사기 피해자)에게 재스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듣고 드와이트는 이별을 고한다. 어려운 이별을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재스민은 화를 불같이 낸다. 진저와 칠리가 깨를 쏟아내며 알콩달콩 사랑에 빠진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돌아버린 재스민은 진저 커플에게 악담을 내뱉고 밖으로 달려나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를 보자마자 '자아의 붕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지금 당장 네이버에 '자아'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과 관념이라는 뜻이 나온다. 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과 관념'은 구체적으로 딱 떨어지는 단어가 아니다. 그래서 각자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데, 나는 이 자아라는 단어를 삶의 기준이라고 적용하고 싶다. 내 자아가 무너졌을 때도 내 기준이 없어서 사람들이 규정한 것을 따라갔다. 재스민에게 있어 명품은 이 자아를 흐리게 만든 도구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나도 비싼 스니커즈들 좋아하고 아직도 신는 입장이라 잘 안다. 비싸다라는 기준은 애초부터 타인에게서 온다. 내가 싸다고 생각하면 싼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또 이것은 상대적이다. 내가 어떻게 목표를 설정했느냐에 따라, 또 현실 지갑 상황에 따라 갈리는게 싸다 혹은 비싸다라는 관념이다. 이런 식으로 타인이 설정한 기준이 부조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을때가 있다. 나는 내가 비싼 스니커즈들을 사면서 느꼈던게, 이것들을 사다보면 사람의 돈이 쉬워진다. 넷플릭스 구독료가 올라간다고 하면 '와 얘들 돈독 제대로 올랐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30~40만원대 스니커즈들은 '괜찮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건이 주는 기쁨이 되게 신선한 것이라서 사치품을 사는 것이 자아가 혼자 설 수 있는 환경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더 중요한건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일텐데. 그것들에게서 받는 기쁨보다 중요한 건 맛있는거 먹고 좋아하는 사람 만나며 영화 재밌게 보는, 그런 사람의 근본적인 지점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이란 이런 '나는 누구인가'를 채워과는 과정이었다.
재스민은 명확한 직업 교육도 못받았고 무너지는 현실에 대한 대처능력도 없어서 이런 것에 대해 탐구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자아가 붕괴됐다. 오갈데 없는 입장인데 자기가 부자라는 환상에 빠진 채로 끝나는 결말이 그 예시다. 원래 자기가 만든 자아라는게 있었다면 돈을 해프게 쓰지도 않았겠거니와 동생의 복권 당첨금을 다 날려버리는 결과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 뿐일까? 돈 많은 남자랑 연애한다고 몸을 움츠리며 울 일도 없었을 것이고 사기꾼 남편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화는 쉬운 구조를 통해 현실감각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우디 앨런식의 코미디가 아닌 현실의 한 단면을 잘라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내가 누구라는 물음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있게 도와준다. 물건? 있으면 좋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내 자신이 어떻게 서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앞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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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삶으로 '인간 대우'에 대해 돌아보다
모두의 삶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난 성매매와 노출될 일이 없다. 당연히 평범한 일반인들이 성매매를 할 일이 없지만 이건 나의 개인적 에피소드와도 관련이 있다. 어느 길거리를 걸어가다 어떤 할머니가 '학생! 여자 있어!'라고 한 걸 듣고 갑자기 겁이 나서 와다다 도망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성매매에 노출될 일이 없다기 보단 그때의 기괴했던 사건을 생각하면 가까이하기 싫은 게 정답이다.
그래서 성매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영화나 책에서 포르노 배우에 대한 묘사를 몇 번 보긴 했다. 당연히 이들도 사람이다. 뭐 인스타그램에 노출이 있는 사진을 올린다고 해서 이상한 일들을 겪어야 한다는 자격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보라고 올린 것 맞는데, 그걸 입 밖에 실제로 꺼내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또 다른 차원 아닌가? 이는 사실 외국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많은 유명 셀럽들은 매력 있는 남자, 여자라는 이유로 성희롱을 당한다. 당장 네이버에 'dm 성희롱'이라 검색하면 기사가 몇 개 보인다. '무언가를 선택해서(유명해져서) 나쁜 일을 겪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건 좀 잔인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들도 선택지를 고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인도에 한 여성 정치인이 이와 관련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고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컨텐츠로 가보자.
실제로 있었다고 하는 몇몇 사건들
1960년대 인도다. 변호사 아버지 아래에서 유복하게 자랐던 강가. 강가는 남자친구 한 명이 있다.. 영화배우가 꿈이었던 강가. 강가는 애인의 제안에 뭄바이로 향하게 된다. 근데 그것은 뭄바이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애인을 사창가로 팔아넘겼던 강가의 남자친구. 한 순간에 모든 게 사라졌다. 꿈과 목적까지 잃어버린 강가. 유곽에서 하고 싶지도 않았던 일을 하며 남자를 대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어쩔 때는 두들겨 맞기도 하는 강가. 그녀에겐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돌아갈 길 같은 건 없다. 이미 돌아가도 가족들에게 손가락질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멍투성이의 얼굴과 함께 지역 마피아에게 향한다. 복수를 원하는 강가. 복수는 보기 좋게 성공한다. 강가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 지역의 짱이 되겠다는 다짐을 아로새긴다. 많은 돈을 모으고, 같은 편의 사람들을 영입하며 점점 성장하는 강가. 영화는 강가라는 이름이 강구 바이가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한 여인의 성장과정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해가 되는 소재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야한 장면 안 나온다. 영화의 후반부에 특정 인물의 연설 장면을 말하기 위해서 불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사람과 사람을 때리는 장면은 몇 번 나온다. 이 외에는 잘 짜인 스릴러라고 생각이 들었다. 인도라는 낯선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가 잘 감겨서 촘촘했다. 그런데 앞에서 적었던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이 굳이 필요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며 들 수 있는 생각은 연대와 주체성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두 요소들을 낯설 수도 있는 인물을 통해서 무언가 뭉클하게 전달한다. 잘했다. 각본이나 디렉팅을 맡았던 제작진 분들은 좋은 선택을 골랐다. 그런데 굳이 그런 요소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지가 전부였을까? 싶다. 얼핏 보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세상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녀가 매력적인 정치인이고, 또 자기와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만 묘사해도 영화는 충분했다. 그런데 굳이 하이라이트 신에서 자극적인 단어가 나온다. 솔직히 불필요했다. 품위와 존엄성은 이 영화가 19금 코드를 적당히 묘사했다는 점에서 충분하다고 느낀다. 성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으니 나름의 품위가 생기는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 전개 상으로 후반부 한 10분은 컷 하거나 적당히 줄였다면 극을 보는데 깔끔했을 것 같다.
눈치 보며 춤추기
인도 영화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세 얼간이>이다. 알 이즈 웰! 잘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로 웃고 춤췄던 인도 영화. 그냥 뮤지컬 영화니까 이런 거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일부만 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도 영화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부분이 개연성 없이 마구 난사된다는 것들을 몇 번 읽었다. 인도 영화라는 넷플릭스의 분류 등급을 읽기 이전에 염려부터 했다. 마피아 퀸이라는 부제만 봐도 이 영화는 범죄/스릴러인데 갑자기 춤추고 노래할까 무서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 이런 요소들을 아예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있을 때 들어갔고, 없을 때 없다. 그러니까 극을 볼 때 나 같은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각본을 쓴 사람이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난다.
밝은 건 밝고 어두운 건 어둡게
또한 이 영화하면 생각나는 강점은 색감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와는 대조되는 흰 옷은 곳곳에 자주 쓰인다. 정치인으로 연설할 때, 최후 반부 엔딩신, 유곽에 잡혀온 애들을 해방해줄 때 등등 뭔가 감독이 인물들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이 들 때 흰 옷이 나온다. 감독이 인물의 의상으로 처지를 비유한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뒷배경에서 탁한 세트장을 고른 점이나 촬영했던 카메라 렌즈까지 색채 대비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연대로 함께 나아가다
앞에서도 썼듯 영화의 주요 소재는 연대다. 그리고 부제는 '마피아 퀸'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강구 바이는 마피아와 연대를 한다. 이 마피아는 주로 남자로 묘사된다. 만약 마피아까지 여성으로 묘사됐다면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마피아들의 성격이 나름 합리적인 부분이 있는 점이나 선한 남성 캐릭터도 출연했다는 부분은 감독이 단순히 여성 서사만을 중심으로 극본을 짜지 않았다는 것이 충분하다. 뭐 성매매 피해자들에 대한 묘사를 중심으로 쓰는 게 주요 플롯인 것은 맞다. 그러나 영화는 절대 이 사람들과의 연대가 현재 사회가 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전부 다 해결할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있다. 보시면 안다.
좋은 퍼포먼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도 배우다. 인도 여배우를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처음 봤다.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당차고 씩씩하게 여러 관문들을 격파하고 성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몰입이 되게 탁월한 묘사가 돋보였다. 만약 인도에도 영화 시상식이 있다면 상을 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엔딩의 눈빛 연기에선 뭉클함도 있다. 또 주조연으로 출연했던 다른 배우들도 당시 인도에 대한 묘사가 강점으로 잘 발휘되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 영화 자체가 1960년대 인도 묘사를 적절히 잘해놔서 그냥 무난하게 보기 좋은 영화다. <오징어 게임>이 성공한 것처럼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있으니 다른 나라의 창작물들을 보게 되니 이런 건 참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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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립과 외로움에 관한 엽기적인 고찰
스위스 아미 맨 (Swiss Army Man, 2016)
“고립과 외로움에 관한 엽기적인 고찰”
등급 : 15세 관람가
장르 : 모험, 코미디, 드라마, 판타지
러닝타임 : 98분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 : 폴 다노, 다니엘 래드클리프,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리처드 그로스
개인적인 평점 : 3.5/5
스위스 아미 맨 줄거리
행크는 외딴 섬에 표류 중으로, 집에 돌아갈 모든 희망을 포기한 상태. 하지만 어느 날 매니라는 이름의 시체가 해변으로 떠밀려 온 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둘은 빠른 속도로 친구가 되고, 행크의 이상형에게로 돌아갈 대모험을 시작한다.
이 괴랄하고 감동적이며 슬프기도 한 영화를 어떻게 포장해야 할까… 오래 고민했다.
<해리포터 시리즈>속 해리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며 ‘해리포터’라는 이미지에 갇혀있던 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가장 파격적인 일탈로 꼽히는 영화이자 이번에도 범상치 않은 폴 다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 그리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B급인듯한데 왠지 감동적이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 허? 이게? 대체? 싶어서 헛웃음이 나다가도 어느새 스며들어 버리는 영화. <스위스 아미 맨>은 대략 이런 영화다. (아, 그리고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시체 연기를 한... 파격적인 영화로도 유명하다...)
<스위스 아미 맨>을 처음 봤을 때, 방구석에 앉아 혼자 몇 번의 헛웃음을 발사했다. “미치겠다…”는 말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부르륵 방귀를 뀌어대는 시체와 너무 오래 고립되어 미치기라도 한 건지 시체에게 말을 걸고 시체를 이용(?) 하기까지 하는 남자. 다르게 본다면 비위가 상하는 이 상황이 나에겐 웃기고도 슬프게 다가왔다면… 단박에 믿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영화의 표현법은 신박하다 못해 엽기적이다. 인류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된 것으로 보이는 무인도에 떨어진 남자 행크와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사람 ‘이었던' 존재 매니. 별별 형태의 우정을 다 봐왔지만 시체와의 우정은 또 처음이다. 대체 이걸 어떻게 풀어가려고 이러는 거지?싶었는데 이걸 또 그럴싸하게 풀어내는 재치에 난 모든 걸 다 내려놨다.
줄거리만을 보면 이게 대체 무슨 영환가 싶겠지만 놀랍게도 <스위스 아미 맨>은 사회에서 느끼는 열등감을 피해 스스로 고립된 사람의 모습을 그린 다소 씁쓸한 영화다. ‘그냥 미친 영화’가 아니라는 거다.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찾는다면 <캐스트 어웨이>와 우리 영화 <김씨 표류기>가 있겠다. 그중에서 <김씨 표류기>와 비교를 해보자면 이렇다.
<김씨 표류기>는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 승근이 운수 좋게(?) 살아남아 무인도에 갇힌 채 그 안에서 또 다른 외톨이 정연과 함께 삶의 목적을 찾는 여정을 보여주고, <스위스 아미 맨>은 앞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현재 무인도로 추정되는 곳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주인공 행크가 파도에 밀려온 시체 매니를 등에 업고 다시 도시로 가기 위해 벌이는 모험을 보여준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며 이들은 상처를 잔뜩 받고 ‘무인도’라는 분리된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바엔 차라리 혼자가 되어버리는 게 편하다며 스스로 고립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모습과 닮은 모양새다.
그렇게 고립된 주인공들이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서 다시 삶의 희망과 우정을 찾는 외톨이들의 여정은 희망과 씁쓸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다만 <김씨 표류기>는 희망 쪽에 가까웠다면 <스위스 아미 맨>은 씁쓸함에 좀 더 가까운 영화다. 줄거리만 보면 전혀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쓸모없는 사람
행크가 어떤 방법으로 무인도에 들어왔는진 확실히 나오지 않지만, 그가 무인도로 들어오게 된 이유는 확실하다. 매니와 행크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행크는 어릴 적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고 아버지와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다. 그는 짝사랑하고 있는 대상에게 말 한번 제대로 걸지 못하고 늘 조용히 바라보기만 한다. 어디에도 진하게 속하지 않고, 어디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 사회에서 행크는 딱 이런 사람이다. 행크는 그렇게 흘러 흘러 사회와 담을 쌓고 무인도에 이른다.
매니가 행크에게 왜 이 물건들이 버려졌는지 이유를 묻자 그것들은 텅 비고 쓸모를 다했기 때문에 버려진 것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어쩌면 이 쓸모없어서 버려졌다는 대답은 쓰레기가 아닌 자신을 주체로 하는 답변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립된 무인도에서 자살까지 결심했던걸 보면 말이다.
쓰임새가 너무 다양한 시체와의 만남
파도가 잔잔하게 들이치고 있는 해변가. 꾀죄죄한 몰골을 한 행크가 자살을 시도한다. 이 풍경도 이제 끝이겠구나-하며 마지막으로 바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해변에 누워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놀라는 바람에 얼떨결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가 되어버린 행크는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매니의 등장은 죽음만을 바라던 행크가 살길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행크는 자살을 위해 묶어뒀던 밧줄을 주워 매니의 몸에 감고 집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처음엔 살아있는 사람인 줄 알았고, 그다음엔 시체인 것까지 알았는데…? 어째 이 시체는 기능이 너무 다양하다. 매니는 말도 하고, 빗물을 받아 정수기처럼 쓸 수도 있고, 무기가 되기도 하고, 건축 장비가 되기도 한다. 매니는 마치 맥가이버 칼같다. 남자들의 로망 그 자체인 만능 맥가이버 칼 말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스위스 아미 맨>인지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선 맥가이버 칼로 불리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와 매니의 특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만능 칼이라 불리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처럼 매니는 행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위에 말한 것처럼 생존을 위한 기능들부터 자신의 상처들을 털어놓는 말벗과 의지가 되는 친구로서의 역할까지. 모든 걸 뚝딱 해내는 행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만능 칼. 그게 바로 매니다. 매니는 행크에게 생존 도구와 말벗이 되어주고 행크는 매니에게 인간으로서의 삶을 알려주며 돈독한 우정을 쌓아간다.
사실 이 만능 시체, 매니의 존재가 너무 비현실적이지만 그저 웃음만 날뿐, 그의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었다. 또 행크가 매니를 의지하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매니의 존재가 이상한 것이 아닌 소중한 것으로 다가오는데… 나는 이렇게 조금씩 매니의 존재에 스며들었다. <캐스트 어웨이>엔 배구공 윌슨, <김씨 표류기>엔 허수아비가 있다면 <스위스 아미 맨>엔 시체 매니가 있다. 뭐…그런 거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인정하게 됐다.
의외의 곳에서 얻은 위로
행크는 매니와 함께 모험을 하며 매니의 말에 위로를 받는다. 상황은 조금 웃기지만 행크를 위로하는 매니의 말들은 시체답지 않게… 따뜻한 구석이 있다.
“나도 너랑 똑같이 하면 넌 이상하지 않잖아.”
“엄마는 행크가 행복하길 바랄 텐데..”
“우린 서로가 있잖아!”
지칠 때마다 듣고 싶은 간단하지만 가장 강력한 위로의 말들. 행크는 매니의 위로를 등에 업고 용기를 내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슬프게도 잠시 그리워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큰 관심이 없고, 짝사랑한 그녀는 연인과 아이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매니를 그저 오래된 시체로 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행크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행크가 바란 건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함께해 주는 것뿐이었는데 그 작은 바람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희망을 잃은 행크는 겨우 돌아온 도시를 등지고 매니와 함께 바다로 향한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도시보다 차라리 시체와 함께 바다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선택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씁쓸해진다. 영화의 마지막엔 모두 보란 듯 매니가 방귀를 이용해(…) 넓은 바다로 떠나는 모습을 꽤나 희망차게 담아내긴 하지만, 결국 그곳에 혼자 남겨질 행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되어 마냥 유쾌하게 느껴지진 않는 엔딩이었다.
생각해 보면 행크는 매니를 만나기 전까진 무인도를 탈출할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매니에게 여러 도움을 받긴 했지만, 사실 혼자서도 탈출할 수 없을 만큼 바다와 마을의 거리가 엄청 멀거나 위험한 요소가 많지도 않았다. 행크가 적극적으로 탈출에 나선 이유는 그가 짝사랑한 새라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매니를 통해 얻은 희망과 용기가 더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묵묵히 나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함께해 주는 친구. 이런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용기를 내어 살아가기엔 충분한데 내가 이런 친구가 되어주기도, 이런 친구를 만나기도 참 어려운 게 문제다.
영화의 초반만 해도 이럴 줄 몰랐다. 그냥 이마를 짚으며 하…방귀 ㅋㅋ……하며 한숨을 쉬던 내가 이렇게 이 영화에 진심으로 몰입하게 될 줄은. 분명히 호불호가 심하게, 그것도 불호가 꽤 많을듯한 영화지만 비위가 강한 편이라면, 병맛 코드를 좋아한다면,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폴 다노 두 배우를 좋아한다면 도전해 볼 가치가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말하는데… 방귀의 모멸감과 어이없음을 참고 넘길 참을성과 비위가 없다면 슬쩍 까치발 들고 피해 가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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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화학물질로부터 대탈출 중
2019년에 우리는 괜찮은 코미디 영화들을 많이 만났다. 연초에는 이병헌 감독의 <극한직업>이었고, 중반에는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였다.
<엑시트>라는 영화는 대학생 때 산악 동아리에서 이름 좀 떨쳤지만 이제는 만년 취업준비생인 용남과 용남의 옛 짝사랑이자 용남 어머니의 칠순 잔치의 웨딩홀에서 일하고 있는 의주가 알 수 없는 유독가스를 피해 탈출하는 영화다. 장르는 액션과 코미디. 분명히 무섭고 진지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과 해학으로 풀어나가는 감독님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유독가스는 '화학물질'이다. 화학물질이라는 말이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화학물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즘은 일반적으로 공업용으로 쓰이는 것들을 화학물질이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화학물질의 결합이나 화합을 통해 발견된 대표적인 물질은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은 셀룰로스에 질산과 황산을 가해서 얻어진 물질이기 때문이다.
온 도시를 유독가스로 뒤덮은 범인은 어떤 기업의 연구자였고, 연구 결과를 빼앗긴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 행위로 가스를 살포한 것이었다. 실제로 악덕 기업에서 연구자의 특허권을 빼앗든지, 연구 결과를 훔쳐 가는 사건은 종종 발생한다.
영화에서 유독가스라고 불리는 그 화학물질은 호흡을 곤란하게 하고 피부에 기포를 생기게 했으며 종례에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아주 독한 물질이다. 우리는 이런 화학물질을 '유해화학물질'이라고 부른다. 유해화학물질은 독성이나 발암성을 띠고 있어서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화학물질인데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아서 노출되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이 직접 닿거나 섭취하였을 때 건강과 관련된 부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유출되어 공기 중의 물질과 반응하여 폭발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끝까지 이 물질의 정체는 나오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 부분은 아주 현실적인 부분이다. 왜 현실적일까?
많은 기업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화학물질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 화학물질들을 혼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생각보다 우리나라에는 화학물질과 관련된 법들이 많이 있다.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 「화학물질 관리법」 이 두 가지 법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간단히 '화평법', '화관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래는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이었는데 2012년 휴브글로벌의 불산(불화수소산) 가스 누출사고와 2013년 삼성반도체 화성공장의 불산 누출사고를 계기로 법을 분리하여 관리하게 된 것이다. 화평법은 국내에 들어오는 화학물질을 안전하게 사용하도록 정보를 만드는 것이고, 화관법은 화학사고 문제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시행 이후에도 사고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나쁘게 말하면 <엑시트>에 나오는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환경부의 화학물질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동안 2만여 개의 사업장에서 화학물질 5억 5천만 톤을 유통했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화학산업이 세계 2위 규모이고 국내 최대 수출 분야로서 매년 400여 종의 새로운 신규 화학물질이 제조되고 수입될 만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에 반해 화학물질 취급 시설은 점차 낡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화학단지 대부분이 7~80년대 가동되기 시작해서 적게는 20년, 많게는 50년 이상 가동된 시설이라고 한다. 실제로 2014년에서 2020년 4월 사이에 발생한 화학 사고의 522건 중 취급시설 관리를 소홀하게 해서 발생한 사고가 전체 화학사고 중 46%나 차지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고의로 살포한 것이었지만 노후 시설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 노후시설을 관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고의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영화에서 이 물질이 어떤 물질인지 정확히 말해줄 수 없는 것은 정말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해화학물질을 관리하는 곳은 환경부와 그 산하기관인데 화관법이 시행된 지 5년이 지났음에도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시설의 수, 규모, 업종 등 전체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법이 바뀌면서 영업허가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시설이 정기 검사와 안전진단을 받아야 하는데 영업 허가가 면제된 시설은 신경 쓰지 않고 있기도 하다. 감사원 감사 결과 정기검사를 받지 않는 곳이 39%나 되었고 정기검사를 받지 않고 영업하다가 적발된 곳도 있었다. 사업자가 영업허가를 신청하지 않는 이상 영업허가가 면제된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에 대해 정부도 지자체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원주의 경우도 문막 공단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약품 냄새가 나는 경우가 있는데 원주시에 문의하면 강원도와 원주지방환경청에 문의하라고 민원을 돌린다. 하지만 돌려받은 두 곳도 대답해 주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강릉의 수소 폭발 사고가 있었을 때는 관리·감독에 대한 책임을 서로 미루기도 했다. 이처럼 유해화학물질과 관련해서 법적으로는 명확한 관리 주체가 있지만 현장에서는 적용되지 못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사고가 터지면 책임 공방을 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는 사람을 구조하는 중에 끝이 났지만 이런 현실이 있기 때문에 과연 도시가 회복될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정말 모르기 때문인 이유는 또 있는데 이는 기업의 '영업비밀' 때문이다. 화학물질을 제조하거나 다루는 회사에서 어떤 물질을 사용하고 있는지 공개하면 문제가 터졌을 때 빨리 대비할 수 있게 되는데 이를 영업비밀로써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인들이나 다른 회사에 공개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공개 시 정말 영업상 손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에까지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가 있다니… 우리나라는 기업의 이득과 국민의 안전을 동일 선상에서조차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그 물질을 사용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탄올 대신 '메탄올'을 사용하여 실명한 노동자들에 대해 뉴스를 통해 보신 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고가 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 2020년에 들어서야 사업장의 잘못이 인정되었다. (참조: KBS 뉴스7, '메탄올 실명' 파견노동자들 4년 만에 손배 인정..."안전관리 방치 책임") 우리는 또 하나의 가족을 외치는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도 마주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화학물질은 하나의 물질일 때는 문제가 없을 수 있으나 다른 물질과 만나서 반응하면서 문제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루하루 새로운 화학물질이 나오고 있고, 현시점에 있는 모든 화학물질의 특성도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정말 조심히 다뤄야만 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불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 바로 화학물질이다.
<엑시트>에서 유독가스로부터 피해를 받는 존재는 '인간'으로 한정되어 있다. 사람이 그렇게 죽을 정도라면 나무와 동물은 분명한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불산 누출의 피해가 있었던 동네의 사진을 보면 나무들이 붉은색으로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아주 힘겹기는 하지만 사람은 두 다리가 있어서 도망이라도 갈 수 있는데 나무는 그러하지 못하니 얼마나 애석했을까.
그리고 걱정이 되었던 것은 하천이었다. 영화에서 유독가스는 결국 물을 뿌려서 잡는다. 물에 녹는 성질을 가진 수용성 화학물질이었던 것이다. 물과 비로 눈에 보이는 가스상 화학물질을 잡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화학물질의 성격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물질이 하천으로 유입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될지는 정말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떼죽음 맞을 수도 있고, 시간이 걸려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도 있고, 식수로 활용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생태계는 연결되어 있고, 눈에 보이는 위험이 사라졌다고 해서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낙동강에서 과불화화합물과 1.4-다이옥산이 검출되어서 식수로서의 기능을 의심받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화학물질로부터의 위험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공단이나 화학물질을 다루는 사업장에서만 사고가 일어난다는 법은 없고, 우리의 삶의 모든 곳에 화학물질과 유해화학물질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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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밤마다 다른 사람 같은 남편의 낯선 모습.
2023년 9월 6일에 개봉한 장편 영화<잠>는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이다.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 제56회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토론토 미드나잇 매드니스 섹션, 판타스틱 페스트와 같은 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 영화는 일상에서 가질 수 있는 공포를 극대화하여 차별화된 공포를 선보인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공포의 주체가 됐을 때의 상황 포착하여 더욱 몰입감 있게 다가온다. 과연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게 된다.
자다 깬 현수가 내뱉은 혼잣말은 정말 누군가가 들어온 것처럼 일상을 공포로 가득 메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들이 점차 크기를 키워 가기 시작하는데, 몽유병을 진단받으며 치료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무색하게 밤마다 낯선 사람이 된 것 같은 현수의 이상 행동은 점차 더 위험해진다. 심지어는 곧 태어날 아이까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두려워진다. 믿기 힘든 광경은 온갖 노력을 하는 수진에게 있어서 몽유병인지 현수 안에 깃든 초자연적인 존재인지 알 수 없어지게 만들기 시작한다. 과연 수진과 현수는 그 상황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 폭력의 주체로 변해갈 때, 마주하는 공포를 포착한다. 그 대상이 결코 나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함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찾아오는 신뢰였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상행동을 하는 현수보다 더 두렵게 다가오는 건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수진이었다.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힘을 빌리기까지 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인데, 그 과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굉장히 광기 어리다. 몽유병 당시 자기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수와는 다르게 수진은 현수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랬기 때문에 설명되지 않는 것을 증명하고 이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발버둥을 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봤던 현수가 수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준 것 또한 '함께' 상황을 견뎌줬던 수진 때문이었다. 정말 이 영화의 결말 뒤엔 극복한 두 사람이 서 있을까.
영화를 보고 나면 '잠'이 두려워진다. 편안한 공간에서 잠을 깊이 자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 밤이 오지 않길 바라는 상황으로 이어져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극 중 현수가 앓고 있는 몽유병은 수면장애이기 때문에 잠이 든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이상행동을 보이는 증상이다. 걸어 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을 공격하는 행동을 하므로 더욱 위험할 수 있다. 당사자가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과 주변 사람에게 남는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그 부분이 잘 드러났다. 잠과 관련된 영화가 많기 때문에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잠과 그 과정을 다뤄낸 이야기 전개 또한 예상을 뛰어넘는다. 가장 익숙하고 필수적인 '잠'을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낯설게 만드는 영화의 화법이 신선하면서도 또 색다르게 느껴졌다. 결말 부분은 상당수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감독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정유미 배우와 이선균 배우의 연기가 너무 인상 깊게 남았다.
영화의 결말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쉽게 풀리지 않은 부분을 해석의 여지로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열린 결말에 3가지 가설을 세워봤다.
첫 번째, 수진의 망상이었다.
우선, 수진의 망상이라고 생각하게 된 부분은 몽유병을 앓는 현 수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지며 받게 되는 스트레스로 인해 본인 또한 수면에 상당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있지 않았던 일을 착각하는 일도 상당해 병원에도 가게 된 것 같다. 현수는 노력하는 수진을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말에 따라줬고 그 끝에도 점점 심해져 가는 수진을 위해서 '연기'한 것이다.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잠들지 못해 눈이 새빨개지고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것을 보면 망상의 일부분처럼 여겨진다.
두 번째, 진짜 빙의된 상황이었다.
실제로 현수가 밑의 집 할아버지에 빙의됐다. '누가 들어왔어요'라는 말은 정말 빙의가 돼서 한 말이다. 또한, 할아버지 사망 후 귀신이 된 날짜와 현수의 몽유병 증상이 나타난 날짜가 동일하다. 또한 특히 '개', '아이'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할아버지가 틀림없다. 부적을 붙이고 굿을 하는 행위를 통해서 악영향을 모두 막았고 수진의 모든 행위가 할아버지가 무사히 정각 전에 성불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특히 딸을 말을 듣고 현수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통해서 현수의 몸에 할아버지가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 그저 몽유병이다.
현수는 심각한 수면장애인 몽유병을 앓고 있었다. 오래된 단역 배우 생활을 전전하며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누가 들어왔어요'라는 말은 드라마 대본의 대사였다. 치료를 받아 봤지만 어려움을 겪었고 마침내 치료에 성공하게 된다. 반면, 수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설명되지 않는 것을 납득하기 쉬운 것을 믿게 되었다.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일들을 생각하고 행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수진을 통해 드러났다. 현수는 그런 수진을 위해 그녀가 믿고 싶은 현실을 '연기'한다. 의사가 말했듯 이상 행동이 늘 일어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미신과 관련된 행위는 우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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