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5-06 10:24:44
[JEONJU IFF 데일리] 경계를 넘어, 지경을 넓히는
영화 <슈거랜드> 리뷰
DIRECTOR. 이자벨라 브루네커
CAST. 야나 맥키논, 빌 케이플
SYNOPSIS. 늦여름. 20대 후반의 젊은 여성 이가가 이상적인 행복을 꿈꾸며 공상에 잠기는 시기다. 그녀는 차를 몰고 스코틀랜드로 가기로 결심한다. 여행 중 이선이라는 서른 살의 영국 남자와 동행하게 되면서 이가는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목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연을 맺게 만드는 로드무비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을까. 2010년대에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나는 몇 번이나 생각했다. 얘들아 기차에서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면 위험해. 그리고 잔디밭에 누우면 쯔쯔가무시의 위험이 있단다… 하지만 애초에 내겐 그런 로맨스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차에서는 내가 예매한 자리에만 얌전히 앉아있을 것이며, 옆자리 사람들이 시끄러우면 조용히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이 차가운 시대에, 전주국제영화제에 도착한 자동차 로드무비 한 편. 영화 <슈거랜드>의 스토리라인은 자못 단순하다. 한 여자가 휴게소에 잠시 멈춰섰다가, 불을 빌리며 히치하이킹을 청하는 남자를 만난다. 내키지 않았지만 고민 끝에 여자는 남자를 태우고, 두 사람은 일련의 자잘한 사건들을 겪고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모르는 곳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수많은 이야기의 전형이고, 이 영화 속 사건들은 진폭이 크지 않음에도, <슈거랜드>는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물론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쯔쯔가무시를 우려하던 나의 마음은 <슈거랜드>를 보면서도 드러난다. 라이터 빌려주지 마! 모르는 남자 차에 태우지 마! 내릴 때 차키를 왜 두고 내리는 거야, 그 사람이 차 끌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러나 다행히 여정은 계속된다. <비포 선라이즈>의 시대를 지나버린 관객의 우려를 이해한 듯, 주인공 두 사람도 조금씩 쭈뼛거리고 망설인다. 단지 그 작은 망설임을 조금씩 넘기고, 서로의 친절함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심심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알아 가게 된다.

경계하고 벽을 세우는 게 자연스럽고 안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잊혔던 사실이, 그렇게 새삼스럽게 드러난다. 관계는 결국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쓰면서, 장벽이 낮아지면서 시작하는 거란 것. 그러다 보면 결국 상대를 버려두고 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의아해 한다. 친절이 사라지고, 그 냉기가 나의 숨통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답답한 세상.
그 시대는 에단(이라 불린 남성)의 입에서 “탈낭만주의” 시대라고 정리된다. 그 시대에도 여전히 진정한 사랑을 믿고 싶어하는 이가(Iga), 그리고 현실은 다르다고 말하는 에단(Ethan) 두 사람 모두 사실 본질은 비슷하다. 친절의 가치를 아직 믿고 싶어하는 서로를 알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서로를 “미쳤다”고 말하면서. 이런 시대에 사랑의 가치를 믿는다는 건 거의 종교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세속적인 풍경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작은 음악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노래”라며 벌떡 일어나 웃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같이 일어나 같은 동작으로 춤 출 때, 우스워질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때 그 음악이 선명해지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그런 용기가 없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용기, 서로의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망설임이 뒤섞이면서 그 안에서 무엇이 선명해지는지를 천천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은 우리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그때 설렘만큼 선명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서로에 대해 알아간 내용이 커지고 많아질수록, 유리창처럼 깨져 서로를 찌르는 파편들도 커질 수 있다. 어차피 모든 성향과 성격은 양면적으로 평가될 수 있기에.

사랑이라고 부르기에 아직 어린 감정이지만 힘이 세다. 잠시 내 경계를 잊게 하고,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데려가 준다. 사랑은 그래서 위험하다. 둘이 넘어선 경계는 단순히 행정구역의 경계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각자 뛰어넘고 싶은 삶의 경계와 고민을 가득 안고 있었다. 삶은 그런 곳이니까.
이 영화 속 날은 늘 흐리고 안개가 끼어 있다. 채도가 낮은 16mm 필름의 색감 안에서, 물기 어린 시각으로 우리는 두 사람의 세상을 본다. 삶은 쩌면 그토록 모호한, 미지의 세계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동차 한 대처럼 유유히 차곡차곡 나아간다. 가끔은 유리창도 깨지고, 가끔은 대화도 나누면서. 가본 적 없는 곳에도 거침없이 달려가면서.

그렇게 뛰어들었다가 돌아 나오면, 세상의 경계선은 한층 넓어져 있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이가의 앞에 해가 뜬다. 지난 시간을 딛고, 지금까지의 시간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힘. 푸르스름한 질감 너머 그 힘의 빛이 전해지는 영화였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2025.04.29-05.09) 상영일정]
2025.05.02 11:00 CGV전주고사 7관 (상영코드 209)
2025.05.05 14:30 CGV전주고사 7관 (상영코드 527)
2025.05.08 21:30 CGV전주고사 7관 (상영코드 837)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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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가족이란
이 영화는 부국제에서 봤던 영화인데, 생각보다 볼 만했어서 수면으로 끌어올려 볼까 한다.
마야는 오래 전 가족들과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덴마크의 한 섬을 친구 부부와 다시 찾는다. 가족간의 정을 다시 다독이기 위해서. 하지만 이들의 기대는 아들들이 친 사고로 한 순간에 무너지고야 마는데....... 이들은 산재해 있던 가족간의 갈등을 잘 봉합하고 온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부터 그녀의 심리를 세 번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1.문제의 발단
가족의 갈등은 마야 친구 부부의 아들이 마야의 막내 아들을 성추행하면서 발생한다. 마야는 이 일로 자신이 완벽을 기하며 살아온 엄마의 역할을 잘 수행해 왔는지에 대해 반추한다. 다들 그녀에게 진정을 요구하고 아이들의 성장의 일부로 치부하고 추궁하지 않았기에 초반에는 마야가 과민반응보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결혼 후 가정 주부로 살아온 그는 사회적 커리어를 완벽한 가족의 모습으로 대신했기에 자신의 가족에게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친구 부부의 재혼 문제 등 가정사로 인한 아이의 교육 문제인 줄 알았지만 그는 문제가 자신의 가정에 있음을 깨닫고 또 한 번의 무너짐을 겪는다.
2.남편의 배신
그런 성적인 것들을 어디서 보고 배웠느냐는 추궁에 아이들은 사건의 첫 제안은 마야의 첫째 아들이 주도했고, 마야의 남편의 야한 동영상에서 찾아 봤다고 털어놨다. 이렇게 마야의 남편은 아이들의 교육에도 무심한 데 이어 친구 와이프를 탐하는 등 점점 찌질한 모습들로 명치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하지만 마야에게 실패한 자식 교육의 원인을 몰아세워 다시 한번 완벽한 가족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가스라이팅으로 마야의 마음을 계속 긁는다. 도대체 너는 뭔데 아빠 소리를 듣고 싶은 거냐 싶었다. 거기에 이혼 경험이 있는 그의 친구는 그를 '완벽한 엄마'로 추켜세우면서도 사랑을 갈구한다. 이 영화 속 남자들은 정말 가관이다. 해야할 의무는 안하면서 우쭈쭈안해줬다고 삐지는 아이 같은 인간들.
이 시점을 기점으로 마야는 돌아버리겠는 상황에서 탈피한다.
3. 그녀의 해방
그는 친구의 아내와 함께 근처 바에 가서 낯선 남자와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온 마야를 이해하지 못하고 밥 안차려줬다고 징징대는 그를 보며 마야는 한 차례 더 그 남자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진 것이다. 엄마라는 그늘에 갇혀 분출하지 못한 감정을 표출하며 바다가 만들어내는 파도에 몸을 맡긴다. '자유 여인'이 된 마야는 해방을 맛보며 자신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와이프 없이는 등신이신 남편께서는 마지막까지 차는 마야 것이지만 텐트는 자신 것이란 유치한 의견 충돌을 벌이다 마야에게 버림받는다. 결국 마야는 남편과 함께 끔찍한 기억이 담긴 모든 것을 섬에 버리고 온 것이다. 끝내 배에 타지 못한 그의 처량함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4. 총평
이로써 마야는 인생 공부를 한 셈이다. 결혼한 여자는 나를 지켜줄 남자가 있는 여자가 아니라 결혼 생활 중에도 여자도 자신을 지켜내야한다는 것을. 욕망을 억누르고 엄마라는 잣대에 가려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건 남자들이 만들어낸 아내, 엄마라는 판타지에 굴복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그녀도 뼈저리는 시간을 통해 경험한 것이다. 그러니 '빌어먹을 휘게'가 아니라 '신이 주신 귀한 깨달음'인 셈 치자. 그러니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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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라는 자리에 대하여
김남길과 손예진 주연의 해적을 정말 재밌게 봤던 터라 이번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 역시 괜찮겠거니 했는데 잘못된 기대였다. 영상미와 영화음악은 박진감 넘치고 압도적이었으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이 그 재미를 깎아내린 작품이었다.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 시놉시스
가자, 보물 찾으러!
해적과 의적, 그리고 역적
사라진 보물! 찾는 자가 주인이다!
자칭 고려 제일검인 의적단 두목 무치와 바다를 평정한 해적선의 주인 해랑. 한 배에서 운명을 함께하게 된 이들이지만 산과 바다, 태생부터 상극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며 바람 잘 날 없는 항해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왜구선을 소탕하던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왕실의 보물이 어딘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적 인생에 다시없을 최대 규모의 보물을 찾아 위험천만한 모험에 나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라진 보물을 노리는 건 이들뿐만이 아니었으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역적 부흥수 또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영화의 분위기 다 살린 bgm과 영상미
음향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준 영화 <해적: 도깨비 깃발>. 이 작품은 음향이 반을 먹고 들어간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bgm을 잘 쓴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안타까운 연기력을 보면서 산만해질 때마다 긴박함, 웅장함, 서늘함 등 다양한 영화 속 분위기를 자아내고 국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영화 속에서 즐길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더불어 한국의 CG가 정말 많이 발전했다는 사실도 한 번에 느낄 수 있었다. 해저 지진으로 인해서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갈뻔한 마지막 장면을 보면 손에 땀이 다 날정도로 엄청난 생생함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바다라는 특성상 CG작업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텐데 티가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웅장한 바다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는 점은 칭찬할만했다.
왜 그랬을까,,, 대사 톤이 왜 그럴까
하지만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한효주와 권상우. 한효주의 삑사리 나는 듯한 대사톤과 권상우의 혀짧은 발음이 유독 거슬리는 작품이었다. 정말 차리리 표정 연기와 bgm만 남기고 대사를 다 없애버렸을면 참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효주와 권상우가 입을 열 때마다 몰입이 방해가 돼서 왜 감독을 오케이컷을 했는지 보는 내내 궁금하고 답답했다. 권상우의 발음 문제는 그동안 많이 지적되어 왔던 문제기에 어느정도 감안은 했지만 사실 한효주가 이렇게 대사톤이 어색했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어서 그동안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 작품에서 유독 튄다는 느낌을 받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영화를 보며 의도치 않은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 고심을 했던 순간이었다.
대가리라는 자리가 원래 그래
“단주라고 챙겨주는 거 하나 없잖아! 고생만 다하고!” 번개섬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을 아는 막이가 사람들을 향해 단주가 되어서 부려먹기만 하는 선원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단주 해랑이 막이에게 임시적으로 단주의 자리를 내어주면서 권력욕과 감투욕이 있었던 막이는 세상 행복해한다. 하지만 단주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쉬운 것이 아니었다. 단주에 올랐다고 해서 사람드리 무조건 따르고 위신을 세워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잘난 맛에, 그리고 자신의 이득만 취해서도 안되고, 선원들의 가족까지 생각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단주라는 자리만 가지면 자신이 원하는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막이는 생각보다 넘쳐나는 책임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단주자리를 내려놓으려 한다. 그와 반대로 의적대장과 단주였던 무치ㅘ 해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부하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따르는 리더는 그 방법이 다를지라도 마음만큼은 자신의 부하들의 안전과 행복을 지극히 바라고 노력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리더라는 자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력에 한숨이 나오긴 했지만 타임킬링용으로 그리고 영화음악을 즐기는 용도로는 나쁘지 않을 작품 <해적: 도깨비 깃발>. 하지만 개연성이나 연기력이 중요한 분들에게는 딱히 추천하지는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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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죽어도 그 욕망은 남을지니
들어가며
지난주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 <귀신들> 시사회에 초청을 받아 개봉전에 미리 만나보고 왔다.
AI가 상용화된 근미래 세대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다섯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였다. 제목이 <귀신들>이지만 정말 귀신이 나오지는 않는다. 공포영화도 아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디스토피아적인 부분에서 공포감을 느낄 수도 있음.) 그렇다면 제목을 왜 귀신들로 지었을까? 리뷰와 함께 살펴본다.
#1. 보이스피싱 Boy's fishing
체감상 가장 인기가 많았던 에피소드였다. 첫번째 에피소드이기도 했고 아이돌 출신 배우 찬희와 고인이 되신 이주실 배우의 유작으로 알려진 보이스피싱은 영어제목대로 voice가 아닌 boy's라는 점이 반전이었던 이야기였다. 드라마적으로도 연출적으로도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에피소드가 아니었나 싶다.
첫 장면에서 엄마와 아들의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는 그림부터 이들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더니 1억이나 되는 돈을 달라는 아들의 재촉에 결국 노모는 그 돈을 주고 만다. 아들이 피싱 AI였다는 설정은 반전이 되지 못한다. 진짜 반전은 그녀가 아들을 닮은 피싱 AI를 이용해 사실 가장 바라왔던 일을 해내려고 하는 순간 벌어진다. 그녀에게는 오래전 실종된 아들이 있었고 평생을 그 집에서 혼자 아들을 기다렸다는 사실은 설정을 넘어서는 비통함이 있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기술이 사실은 그녀를 영원히 상처입힌 세상 속에 가두어버렸다는 사실도 많은 생각이 들게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죄와 상처, 욕망을 밸런스 있게 그려낸 좋은 작품이었다.#2. 모기지 Mortgage
원본인간의 AI로 남아 새 아파트로 이사오기 위해 자신의 사후(비활성화 이후) 일할 또 다른 AI를 만들까말까한 딜레마에 처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에피소드도 재미있었다. 그와 시종일관 다정하게 대화하던 분양사무실 직원도 사실은 키오스크 AI였다는 사실도 소소한 반전으로 재미를 더 했다.
부동산 신화가 건재한 대한민국에서 집을 사기 위해 인생 몽땅을 저당잡히는 것도 모자라 죽은 뒤의 자신의 분신에게까지 빚을 연대하게 만드는 설정에서 집이 인간을 사는건지, 인간이 집을 사는건지 모르는 아이러니를 깔끔하게 잘 풀었다. 다만 재밌는 설정을 전달하는 정도로 싱겁게 끝나버리는 점이 아쉬웠다.
#3. 음성인식
반려 동물처럼 반려 AI를 맞이하는 세계라면 유기동물처럼 버려지는 AI도 있는 법. 이 에피소드에선 진짜 자식이 생긴 뒤 버려진 아이AI가 등장한다. 아이는 유기된 아파트 단지에 남아 계속해서 혼잣말을 해댄다. 이 설정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A.I.>가 떠오르기도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그런 AI들을 찾아다니는 여자(이요원)이 주인공이라는 점인데 사실 이요원이 맡은 캐릭터는 명확하게 설명되진 않지만 아마 애니멀 호더의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불명확한 스토리라인에도 불구하고 이 에피소드는 이 영화의 중심이다. 영화의 제목이 <귀신들>인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 때문이다. 귀신 역시 누군가의 '한'으로 만들어져 인간세상을 떠도는 존재라 생각하면 귀신과 버려진 AI의 유사성을 쉽게 연결지을 수 있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탄생된 AI는 인간이 프로그래밍한 대로 말하고, 생각하며 평생을 인간 맞춤형으로 살지만 시효가 끝나고 나면 간단하게 버림받게 된다.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남아 끊임없이 사람을 부르고, 애정을 갈구하는 설정은 작가이자 감독이 AI의 정체성을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남을 욕망의 헌신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었다.*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외간 찻집에서 첫사랑을 기다리는 남자. 드디어 그녀가 오고 두 사람은 함께 했던 예전의 이야기를 나눈다. 여전히 말이 잘 통하는 두 사람. 남자는 어렵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는 이미 죽었고 그녀 역시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AI였기 때문. 뒤늦게 나마 서로의 마음을 안 그들은 이제 행복해졌을까?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대사만으로 전달하기에는 핍진성이 떨어지는 점이 아쉬운 에피소드였다.
#5. 업데이트 update
정경호 배우의 1인 2역이 돋보이는 <업데이트>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설가 위기찬이 죽고난 뒤에서 그의 정신과 성격을 이어받아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 보험사는 위기찬의 AI를 보내며 시작된다. 외모가 똑같은 두 사람. AI는 빠른 속도로 위기찬의 학습하며 그가 남들 앞에서 얘기하지 않은 욕망을 드러내게끔 하는데.... 드러나는 충격진실은? 그 역시 AI였다는 것.
이건 창작자라면 여러가지 생각이 들만한 에피소드였다. <모기지>의 예술가 버전이라고 해야할까? 직장인은 AI로 대출금을 갚는 노동자 복제를 남기고, 예술가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미완으로 남을 소설 끝까지 써줄 창작자 복제를 남긴다. 마지막 에피소드 <업데이트>는 앞에 나온 네 개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는 책이었고 영화의 에피소드는 모두 위기찬이 상상한 미래사회의 AI에 대한 허구의 소설이었던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귀신들> 총평! 추천? 비추천?
이 영화는 확실히 호불호가 나뉠 듯 하다. 평소 기승전결의 짜임에서 깊이 있는 스토리나 영상미, 캐릭터의 변화와 성장을 즐기는 관객분들이라면 불만족스러우실 것 같고. 가볍게 친구들과 영화관 나들이를 하면서 새로운 소재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관객분들 또는 배우분들의 팬들이라면 소소하게 즐거운 관람을 하실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영화개봉이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이다. 참고하셔서 즐거운 관극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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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서의 페이스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
<사막의 왕>(2022)
<그녀의 취미생활>(2023, 하명미)
<살인자ㅇ난감>(2024)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 포함.
3주 내리 <헤어질 결심>을 보러 극장으로 향하던 2022년, 나는 예감했다. 배우 정이서를 좋아하게 되리란 것을. 영화 속 하고많은 신스틸러 중 가장 눈에 밟혔던 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망설임 없이 ‘일하는 경찰 미지’, 정이서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는 입체적일 필요가 없는 기능적 조연이었다. 고경표처럼 적극적으로 캐릭터를 어필하지도 않았고, 김신영처럼 배우 자신의 이미지를 인물에게 그대로 덧씌우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미지의 개성은 톡톡히 빛났다. 정이서는 작품이 인물에게 부여한 테두리를 철저히 지켰다. 테두리를 철저히 지키는 자, 그게 미지다. 눈치 빠르고 칼 같이 선을 긋고 제 할 일을 다하며 불쾌를 숨기지 않는. 능숙하게 일하는 제스처, 찰나의 눈빛, 독특한 효과음만으로 캐릭터가 파악되었다. 미지처럼 야무진 연기였다. 자잘한 디테일이 살아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가 깔끔했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다. 주변 인물들의 사연에 관심이 없는 영화 속에서, 미지는 사연 따위 없어서 더 매력적이었다. 화면을 벗어난 그에게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화면에 잡히면, 해준을 뚫어져라 보면서도 곁눈질로 미지의 움직임을 붙들게 되는 것이었다. ‘오늘도 일하는 미지’ 초단편 외전 같은 것을 슬며시 그려보며, 스크린 속 정이서를 향한 갈망을 느꼈다. 유사하거나 색다른 톤의 조연도 고팠고, 제 1화자가 되어 내면을 모조리 꺼내는 역할을 맡아줬으면 싶기도 했다.
그해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사막의 왕>은 그 갈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정이서의 넘치는 재치를 비격식적이고 입체적인 모양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이상한 회사에 떨어진 ‘앨리스’ '이서'. 그는 시청자가 픽션의 세계에 입장하도록 돕는 평범한 화자다. 면접관의 질문에 허허 웃으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라고 답했기에 회사에 최종으로 합격했다. 멍하고 느린 표현법은 뒤에서 다룰 <그녀의 취미생활> 초반의 정인과 닮은 데가 있으나, 그 기반이 다르다. 정인은 살아남기 위해 연기로 무장했다. '이서'는 특수한 상황에 던져졌고, 진심으로 얼떨떨해 하는 중이다.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물음표는 크기를 달리하며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서'는 연기를 잘 못하는 이다. ‘척’을 하면 다 티가 나고, 속마음도 대부분 읽힌다. 그것이 장면의 재미다. 알아들은 척 하는 함박웃음, 신나 날뛰는 실루엣. 은은하게 배어 있는 사투리가 맛깔나는 말투를 완성한다. 이름도 비슷한 ‘이서’는 작가가 점찍어 두고 쓰기라도 한 듯 정이서와 어울리는 캐릭터다.
납득하기 힘든 일을 반복하던 '이서'는, 팀장에게 언어폭력 섞인 질책을 듣는다. 그 순간 정이서의 신체 표현이 압권이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내 잘못인 것 같고, 억울한데 까닭을 모르겠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데 내 의지로는 불가능하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안 나오는’ 상태. 머리 꼭대기부터 혀, 발끝까지 얼어서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움츠러들어 쭈뼛거린다. 정이서는 <사막의 왕>이 다크코미디임을 잊지 않는다. 속내를 겉으로 다 드러내면서도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연기는 지양한다. 그 덕에, 월급 액수를 보고 필터없는 감탄사를 토하며 기뻐하는 씬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쯤 ‘이서’의 인물됨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는 ‘세계’에 혼입되어 안주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의미없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없음’의 정체를 깨달았다면, 참을 수 없다. 태도가 달라지니, 진정으로 정인이 겹쳐 보였다. 북받치는 분노와 모멸감을 다 터트리는 대신 꾹꾹 누르며 표출한다. 그의 결심이 ‘순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서'가 “사막”을 밟고 당당하게 오피스를 퇴장하며 1화가 끝나고,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이서는 작품의 장르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면, 연기 톤을 바꾸어 장르를 뒤집어 놓는 데에 한몫을 한다.
<사막의 왕>은 원톱 주인공을 둔 장편 시리즈보단 리미티드 연작에 가깝다. 라스트 에피소드에서 대놓고 말해주듯- (대부분) 돈을 둘러싸고 갈등하다 언젠가 엇갈렸던 자들의 이야기다. 개중 가장 평범해 보였던 ‘이서’는, 돈을 버린 자이기에 특별했다. 그는 3화의 엔딩 무렵 자그마한 회오리를 몰고 재등장한다. 쫓아오는 엄마를 피해 낯선 차에 덥석 올라 고개를 한껏 숙이고 ‘빨리 출발하라’고 하는 이 인간을 어찌할 것이냐. 그 다급함은 진심인 것을. 그의 꽁트 같은 끼어듦과 이후의 능청스러운 태도는 서은과 해일 사이 흐르던 불안한 코미디의 기운에 안정감(?)을 불어넣는다. 얼떨결에 ‘강원도로 일출을 보러 가는 핵가족’의 그림을 구성하게 된 젊은이 둘과 어린이 하나. 그 기이한 동행을 마지막으로 셋 모두 카메라에서 벗어난다. 어쩌면 서은과 닮아 있는 ‘이서’의 눈빛을 보며, 이번엔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사막의 왕>을 통해 정이서의 꾸밈없고 다채로운 표정들을 목격했고, 거대한 가능성을 확신했다.
<사막의 왕>(2022)
이듬해, <그녀의 취미생활> 포스터를 본 나는 곧 극장으로 가야만 함을 깨달았다. 저리도 사연 많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니. 본격적으로 좋아할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인물을 한계까지 몰아가 폭발을 유도해 관객을 빠르고 시원하게 만족시키지 않는다. 정인이 제 페이스대로, 즐기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도록 돕는다." 당시 리뷰에 적었던 내용을 옮겼다. 정이서는 서두르거나 과시하지 않았다. 작품에 어울리는 저만의 페이스(face/pace)를 찾아 신중하게 자리 잡았다. 드라마틱한 ‘각성’ 연기가 요구되었다면 그또한 가능했을 터이나, 정인에게 안 맞는 옷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작품과 배우는 클리셰의 울타리에서 탈출했다.
오프닝은 정인의 뒷모습이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곧 땅으로 꺼지기라도 할 것처럼 터덜터덜 밤길을 걷는다. 몸의 피로와 더불어 과거와 생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걷는 방법을 고민해 결정한 최선의 결과물이라기보단 체화한 인물이 자연스레 발현된 걸음걸이일 테다. 정인에게 실려 있던 그늘의 무게는 날이 밝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일상적인 질책과 조롱에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반응하거나 들릴 듯 말 듯 ‘에’라고 답하는 정도로 존재감을 지우며 살아남았다. 조용해 보이는 그의 내면엔 톡 건드리면 터질 듯한 울분이 있고, 커다란 가위를 옆에 두고 선잠을 자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날 만큼의 불안과 공포가 있다. 그 원인은 그가 위치하는 공간과, 그곳을 채운 특정한 타인들이다.
홀로 풀숲에 숨거나 사람들 가운데 섞여 말없이 관찰하는 정인, 그의 응시는 자체로 그의 언어다. 흐엉에게 달라붙는 재순을 정인은 먼발치에서 노려본다.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준다. 목표물에게 효과적으로 가닿는 감시와 경고의 응시다. 창수는 어떤가, ‘응시하지 못함’에 가깝다. 산속에서 그를 마주치자 정인은 필요 이상으로 놀란다. 상대가 몸을 기울이거나 손을 들 때마다 소스라치고, 극도로 움츠러들어 겨우 견딘다. 다음, 그다음 조우에서도 그렇다. 불투명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도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고, 입보다 눈물샘이 먼저 열린다. 창수는 정인의 숨을 틀어막고 피를 굳히는 인간이라고, 정이서가 말해주고 있었다. 관객은 정인의 수많은 사연 중 하나가 거기 얽혀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혜정에겐 자꾸 시선이 간다. 상대가 알아챘으면 하는 마음으로 훔쳐보는 듯하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건 매한가지이나, 창수에게 보이던 두려움 대신 조심스러운 호의와 관심이 감지된다. 만남 후엔 여운을 돌이킨다. 순수한 호기심과 동경, 그리고 앞으로 풍부한 정서들로 채워질 빈칸이 느껴진다. 영영 벗어난 줄 알았던 고향에 붙들린 정인에게 혜정은, 지긋지긋한 공간에 신선한 공기를 끌고 온 존재다. 웃는 둥 마는 둥, 긍정을 하는 둥 마는 둥. 그건 익숙한 가면이다. 느릿하고 분명한 말투, 배시시 흩어지는 미소는 정인의 캐릭터다. 혜정과 함께 생계 외 삶에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며 정인의 얼굴에선 점점 그늘과 주저가 걷힌다.
작품은 종종 혜정의 대사로 정인을 묘사한다. “다 알고 있는” 사람,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 혜정은 정인을 구하는 자 보다는 정인이 스스로를 구하도록 돕는 자다. 정인은 원래 품고 있던 강함을 꺼내는 법을 배운다. 혜정과 가까워지기 전 시작된 첫 번째 ‘행동’은 충동적이지만 계획적이기도 했다. 가위를 툭 떨어뜨리는 차분한 손놀림, 서늘하게 다물린 입과 내리깔린 눈꺼풀. 후에 일련의 복수를 실행하고 참을성 있게 지켜볼 때도 유지되는 온도다. 느닷없이 내려앉은 온도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나 전남편 광재를 대하며, 정인은 무표정 아래 켜켜이 쌓인 응어리 사이로 차가운 혐오를 언뜻 내비치곤 했다.
정인의 응어리는 원인을 제공한 대상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며 뜨겁게 터지기도 한다. 부녀회장이 집에 찾아왔을 때, 한계에 다다른 정인은 불덩이를 내뿜는다. 정이서는 인위적으로 발산하려 애쓰기보단, 최대한으로 눌러담아 저절로 폭발하도록 유도한다. 이후 정인은, 다시는 그렇게 터져 버리지 않는다. 창수와의 독대에서 다시금 분노를 표출하나, 이번 덩어리는 서릿발 같다. 오래된 가해자를 내려다보며 열 여섯 살에 느꼈던 그대로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수 년 동안 압축된 무게를 얹어서. 모조리 쏟아내는 대신 저쪽이 알아들을 만큼만, 눈물이 흐르고 몸이 떨려도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로. 그것은 상대를 겨냥한 독백, 복수의 마무리였다. 이와 같이 복수의 단계들은 대개 차갑고, 한 치의 어긋남이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불안과 공포는 필연적이다. 혜정이 재순을 ‘실종’되게 만든 것이 그러했듯, 정인이 광재에게 독을 먹이고 총을 쏘는 행위는 적극적인 자기방어다. 작품과 정이서는 그역시 놓치지 않았다.
정인처럼 절제의 미학을 체화한 영화, ‘광재의 최후’는 그것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장면 중 하나다. 정인은 공격적으로 죄다 발산하는 대신, 뿌리깊은 분노와 삶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총 끝에 단단히 드리운다. 광재는 엉망으로 망가지기보단, 그저 늘어져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된다. 정이서와 우지현, 대단한 집중력을 지닌 두 배우가 곤조 있는 연출과 만나 완성한 씬이다. 주연 배우의 무한한 잠재력을 가늠해보(지조차 못하)게 하는 작품- 우지현에게 <더스트맨>이 있다면 정이서에게는 <그녀의 취미생활>이 있다. 정이서는 능히 홀로 극을 이끌며 상대 배우와 화면을 나누거나 포커스를 적절히 넘겨주기도 했다. 거세게 덮쳐오는 파도가 되기도, 고요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흩어지는 물결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취미생활>(2023)
싱그럽다. 티없이 활짝 웃는 정인을 보니 그 표현이 절로 적혔다. 비슷하게 씩 웃는데, 선여옥은 징그럽다. 한 번 더 우지현과 나란히 두어 보자. 우지현이 <그녀의 취미생활>을 통해 해냈듯, 정이서는 <살인자ㅇ난감>으로 ‘빌런력’을 증명한다. 빗물과 핏물로 범벅이 된 골목, 원피스를 입고 부드럽게 안내견을 이끄는 선여옥의 목소리는 이질적이다.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입체적이라기보단 반전을 숨긴 인물, 그의 꿍꿍이가 드러나며 정이서가 보였다. 출연진을 훑어보지 않고 시청한 내게 있어서는, 하상민의 첫등장과 더불어 일종의 서프라이즈적 모먼트였다. 선여옥은 단순히 이기적인 것을 넘어 선악에 무관심하다. 제 욕망에만 충실하며 타인을 도구삼는다. 뻔뻔하고 염치없고 눈치는 있다. 괜찮은 사람인 척할 생각도 없어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정이서 특유의 미소는 음흉하게 발현된다. 딜리셔스하고 분명한 말투는 주인공과 시청자의 신경을 긁는 방향으로 던져진다. 문장을 새되고 짧게 끊어 뱉으며 분리된 음절을 효과음처럼 사용하는 정이서. 다른 인물이었다면 매력포인트로 작용했을 디테일은 선여옥과 만나 비호감의 요소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기생충>에서 거리를 두고 화면을 공유했던 최우식과의 재회다. 최근 정이서의 필모그래피에서 ‘피자 사장’을 발견한 후 해당 클립을 검색했고, ‘아!’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게 당신이었구나. 여러 해가 지난 현재, 밀접한 긴장감을 주고받으며 훌륭한 다이내믹을 형성하는 두 배우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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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쯤 나는 배우로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나의 이상과 실제 내 그릇의 차이가 크게 느껴져 몹시 불안했다. 그럴 때 <그녀의 취미생활>이 내게 왔다. 정인으로 사는 동안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한 인물에게 집중하다 보면 느릴지언정 조금씩 나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이 작품이 정말 소중하다.” - 정이서, [씨네21]
세 해에 걸쳐 있는 네 작품을 다루며 정이서의 일부를 담아보려고 시도했다. 정이서는 천연덕스럽고 능숙하다. 바른 중심 주위로 자잘한 디테일을 자아내, 군더더기 없는 짜임으로 완성한다. 모호하게 머물러야 한다면 그렇게 하며, 그 얼굴에 관객의 시선이 머무르게 한다. 이해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배우인 그는, 매번 작품의 결을 찾아내 적절하게 녹아들거나 성공적으로 엇갈렸다. 그 개성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정 반대의 모습을 꺼내며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그 잠재력을 엿보았다고 여기자마자, 아직 보지 못한 깊이가 어마어마함을 깨닫게 했다. 흰 원피스와 장총이 각각 또 함께 어울리는 정이서. 그는 마치 정인처럼, 자신의 페이스대로 신중하게, 범상치 않은 걸음을 떼는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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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이 정도면 신카이 마코토의 이름값은 한 거겠지
푸른빛을 잘 담아내는 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돌아왔다. 사실 '날씨의 아이'가 기대 이하였기 때문에 이번 영화마저 별로라면 굳이 영화관 가서 이 감독의 영화를 볼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별점 5점 만점에 3.5점은 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리뷰를 남긴다. 깎아버린 1.5점은 결국 영화의 개연성 때문이었다.
1. 일본의 자연에 진심인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무래도 작화이다. 그의 강점이기도 한데, 일본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수려하게 그려내었다. 그의 영화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자연 요소는 아무래도 물일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작화는 물이 가진 수려함을 잘 그려내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시퀀스 초반에 스즈메가 등교하던 중 보이는 바다는 참 아름다워 단번에 와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역시 그는 이런 푸르름을 극대화하는 작화를 그 어떤 애니 감독보다도 잘 그려내는 것 같다. 그가 그려내는 푸르른 작화는 왠지 모르게 투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는 일본의 재난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고 왔다. 그는 일본의 자연 환경에 참 관심이 많고, 그에 따라 그의 영화의 주제는 대체로 일본의 재난이다. 그를 유명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했던 '너의 이름은' 또한 영화의 스토리의 배경은 재난으로 폐허가 된 한 마을이었고, '날씨의 아이' 또한 해일이 덮쳐 물바다가 되어버린 일본을 그려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일본의 지진에 집중했다. 일본의 지진을 막아내는 초월적인 존재가 있고, 그 초월적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남주 소타와 같은 토지시가 등장하며 일본의 재난을 관리하는 인간이 있다는 설정으로 이번에도 그는 일본의 자연 환경과 무속적인 존재와 결부시켜 이야기를 끌어나갔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그의 영화들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영화에 대해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일본의 자연 환경, 재난을 무속적인 기질을 타고난 인간이 막아내고, 그 인간을 사랑한 또다른 인간이 등장해 이들의 로맨스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그만의 클리셰라면 클리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런 클리셰에 질리진 않았겠지만 추후 만들 영화도 비슷한 이야기라면 이젠 조금 질리기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주 살짝 우려된다.
2. 일본의 폐허들과 그 폐허에 있었던 사람들을 추모하는 마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문, 재난으로 폐허가 되어 더이상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무관심의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토지시들은 이런 버려진 장소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재난이 문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관리한다. 그 재난을 막아내는 요석이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요석이었던 다이진이 더이상 재난을 막아내는 일을 버텨내지 못하고 도망다니는 점만 봐도 일본은 기본적으로 재난이라는 개념을 필연적으로 견뎌내야할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고, 누군가는 그 재난을 책임지고 막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무관심으로 도배된 세상에서 나혼자 나라의 안녕을 위해 외로움을 견뎌내야 한다면 그 누군가가 초월적 존재, 혹은 신이더라도 얼마나 인간들이 괘씸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다이진의 행동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고, 서사의 가장 큰 빌런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정리될수록 어쩌면 제일 외로운 존재였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사람들 사이에 산재해 있는 재난에 대한 관점, '슬픈 일이긴 하지만 내 일은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다이진으로 하여금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서 도망치고 싶어지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모를 위해서도 일종의 책임자를 만들어낸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추모인지 보여주는 존재가 아닐까. 추모는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감독은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영화의 제목은 '스즈메의 문단속'이 아니라 '다이진의 일탈'이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스즈메와 소타는 일본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폐허가 된 마을 속에서 떠다니는 저 세상의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다. 참 일상적인 문장인데, '다녀오겠습니다'가 '다녀왔습니다'로 바뀌지 못한 그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인생에서 어떤 이유로든 어떤 사람이 사라졌는데, 그 사람을 기억할 때 의외로 그런 일상적인 문장들이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 사람을 기억할 때, 그 사람이 대단한 말을 해서라기보다는 어떤 음식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이 했던 '밥 먹어'라는 말이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대단한 사람들의 연설을 듣거나 유명한 상담가의 상담을 받아보는 것보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일상적인 말이 오히려 더 치유에 도움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스즈메와 소타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들려주기 위해, 그래서 이들의 한이 다음 세대에게 전이되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3. 결국은 직면해야 한다.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재난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고 다음에는 어떤 재난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이미 발생한 재난이 인간에게 남긴 상처에 대해 그저 묻으려고만 하는 일본인들에게 그러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다수가 재난의 상처에 무관심하고 그저 상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고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람들은 당신의 상처에 대해 티를 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곪아가고 있는 사회를 꼬집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란 직면해내고, 몰아치는 수많은 감정을 감당해내고, 어떻게든지 표현을 해내어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표면적으로 동일본 지진 생존자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지만 감독은 재난을 겪었든 관망했든 우리 모두 당신의 기억에 직면하고 맞서 다시 제로 베이스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 어쩌면 냉정하게 들릴 수 있는 충고를 사회에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다 받아내고 막아내고 있는 다이진이나 소타 같은 토지시들이 나라의 대의를 위해 힘써줄 동력이 생겨날 것이다. 그저 기억하고 직면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4. 총평
사실 영화의 개연성이 아주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소타와 스즈메의 로맨스 라인이 뜬금없는 감이 있고, 이렇게까지 이 두 사람이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가 치유와 위로인 만큼 로맨스를 일종의 양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정도 개연성 부족은 약간 흐린 눈 해줄 수 있다. 그 외에 영화의 메시지가 관객들을 이해시키기에 충분히 명확했고, 충분히 제작 의도가 보여서 좋았다. 역시 서사가 있는 모든 작품들은 약간의 단점이 보이더라도 말하고자 바가 명확한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개연성을 개나 주면 안되겠지만 메시지가 곧 개연성일 때도 있는 것이다.
특히 영화의 음악이 영화의 작화와 아주 잘 어울린다. 요새 내 최애 플레이리스트가 될 정도였다. 일본어는 모르지만 적당히 몽환적인 것이 멜로디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이미 보신 분들이라면 나처럼 음악만 n차 감상하고 계실 것이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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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후회, 미련, 아쉬움, 기대, 그리고 헤어질 결심
어느덧 꾸준히 글을 쓰기로 한 지 1년 가까이가 되고 있다. 어찌 보면 영화평론가라면 평론가인 나다(무려 내가 쓴 글로 돈 받아본 적 있음). 사실 이 아이디어를 주위의 그 누구에게도 받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덧붙여서 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난 세상이랑 대화하려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 영화라고 하는 것이라면 꾸준히 뭔가 세상과 대화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그래도 세상 사람들 다수에게 설명할만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있구나!'라는 걸 눈으로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가끔 이야기보다 영화가 더 중요한 작품을 몇 번 만난다. 작년엔 <드라이브 마이 카>, <노매드랜드>, <당신얼굴 앞에서>, <소울>이 그랬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소설가의 영화>나 <우연과 상상>이 그럴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사실 수다 떠는걸 더 좋아하는 쪽에 가까운 나. 장르적으로 엄청난 영화를 보고 느끼는 소름보다 반응이 좋은 것에 행복해지는 나라 가끔은 이게 일 같이 느껴진다. 뭐 실제로 그런 축에 속하기도 하겠지? 회사도 잘되고 나도 잘되면 그게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일일 테니.
그리고 2022년 6월 29일, <헤어질 결심>의 개봉날이 왔다. 어떤 말을 해야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뭐 영화에 대한 불호 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 강하게 압박하는 듯한 영화였다.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 치밀한 감정, 각본의 완성도까지 이 영화는 글로 쓰는 게 두렵다고 느껴질 정도로 걸작 중 걸작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그렇게 느꼈었다. 근데 이 영화는 그 마음이 더 커진 채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글 쓰는 게 무섭다. 내가 다 담아내지 못할까 봐; 또 이 영화를 보고 먼저 생각나는 것은 주위 사람들과 감동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먼저 생각난 셈이다. 2022년 여름, 칸을 경유해 우리나라에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깐느박'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산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 살인 사건에 형사가 출동했다. 동료이자 부하인 수완과 함께 등장한 해준. 피해자는 등산을 좋아하는 공무원 출신의 아저씨다. 높은 바위에서 몸이 두 번 부딪혀서 사망한 게 사인이었다. 수사를 지속하는 해준과 수완. '굳이 이렇게 해야 할까?'라는 말이 무색하게 해준은 우직한 사람이다. 무얼 하든 책임감이 있는 해준. 경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용의자를 하나둘씩 찾아보려 한다. 그런데 막상 용의자라고 할 사람도 한 명 밖에 없었다. 피해자 기도서의 아내였던 서래. 기도서는 서래에게 그렇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도서는 자기 물건에 이니셜을 새기곤 했는데, 아내 서래의 몸에도 그 인장을 박아놓았다. 또 가끔 손찌검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이유인가? 서래는 남편의 죽음에 단 조금도 개의치 않는 느낌이다. 무덤덤한 서래. 해준은 이상함을 느낀다. 베테랑 형사의 촉이 발휘되는 것 같다. 이상한 게 있어. 용의자 심문을 통해 한 두 마디 나누는 서래와 해준. 해준은 다시 한번 촉이 왔다. 이 여자, 뭔가 있다.
이 '뭔가 있다'라는 촉은 금세 행동으로 이어졌다. 차와 망원경 하나를 가지고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 먼발치의 아파트 밖에서, 그리고 차 안에서 서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수면장애가 있는 게 도움이 됐나? 밤에 잠들 틈도 없이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 원전에서 일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해준은 미행에 형사 일에 몰입하게 된다. 이 호기심과 관심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스마트워치에 일기처럼 서래의 행보를 저장하는 해준. 근데 서래도 이상하다. 해준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놔두기 시작한다. 마치,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이 둘의 사랑은 그렇게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진행됐다. 멈추기엔 너무나도 멀리 온 상황 속에서.
필모그래피가 갖고 있는 장점 그대로
박찬욱 감독이 워낙 유명하신 분이다. 한국영화의 팬이 아니더라도 <올드보이>는 한 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작품으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으니 <기생충> 이전에 한국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어느 정도 이끌었다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왜 인기가 많았나?라고 생각하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초반부 특정 인물의 자해, <올드보이>에서 장도리 액션신, <친절한 금자씨>에서 '너나 잘하세요', <박쥐>에서 '해피 버스데이, 태주 씨'까지 박찬욱은 아름다운 장면을 넣어 관객의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게 하는 것에 특화된 인물이다. 이때 기억에 남게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올드보이>처럼 인물에게 감정 이입시켜 후반부에 폭발하는 에너지도 가능할 것이다. 또 <박쥐>처럼 색감을 잘 활용할 수도 있고 <복수는 나의 것>처럼 무미건조함으로 극을 시종일관 이끌 수도 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이영애 배우에게 그런 에너지를 만든 것도 감독의 장점을 새기는 훌륭한 디렉팅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장기가 전부 들어갔다. 우선 대사를 잘 썼다. 일단 이 영화를 다양한 매체에서 검색하면 '마침내'라는 단어가 주요 한줄평에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 처음 서래의 입에서 나올 때 이질감 느껴진다. 금세 <종이의 집 : 공동 경제구역>이 생각난다. 직접적인 대사와 이질감이 드는 대화 톤이 단점으로 발현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닌데 아쉬운 감은 있다는 뜻이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는 위 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영화 이야기 전개는 익숙하면서도 굉장히 색다른 방식이라 '마침내'라는 결론을 내기 충분하다. 어찌 보면 엥? 싶은 대사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 셈이니 정서경-박찬욱 두 사람의 설계가 꼼꼼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엔딩으로 달려가는 힘은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썼지만 '마침내'라는 단어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그렇게까지 이야기 전개가 빠른 편은 아니다. 얼핏 보면 서래와 해준이 알듯, 말듯하게 마음을 꺼내 보이는 장면의 연속이다. 이 두 사람의 미묘하게 꺾이는 감정선의 힘이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잉크가 서서히 퍼지듯 영화에 녹아들게 된다. 뭐 사람에 따라 어떤 영화의 이야기가 빠르다 느리다 주관적으로 갈릴 순 있겠으나, 중후반부까지 달달했던 영화의 이야기가 후반부까지 전력질주로 달리며 강력한 에너지로 치환되는 느낌마저 든다. 이는 <올드보이>에서 하이라이트 신을 위해 오대수의 입장이 변화되는 부분이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잔잔하고 심심한 듯 하지만 오히려 이게 관객에게 압박 비슷하게 작용하는 지점이 감독의 특장점이 발휘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해일-탕웨이 두 배우의 퍼포먼스 역시 탁월했다. 일단 해준 역을 맡은 박해일 배우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서래가 중국인이고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대가 말을 이해하기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패널티가 있다. 근데 이건 우리 관객에게도 적용된다. 관객이 보기에도 '이 사람이 정말 서래에게 마음을 열고 있구나'라고 느낄만한 순수한 비주얼이 장점이 되어 극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눈빛 하나, 행동 하나가 정말 사랑에 빠진 인간이라고 보기 충분하다.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 사람의 입장 헤처 나가기는 점점 난이도가 올라간다. 이를 소화하는 좋은 연기였다. 또 탕웨이 배우의 연기는 전 세계에서 이 사람만 가능한 연기다. 목소리 톤,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맞이하는 인간, 역시 로맨스 영화의 여주인공까지 우리가 탕웨이라고 기억하는 이미지에서 한 단계 스탭업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아마 우리나라 영화 팬들에게 탕웨이 배우의 인생작으로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는 연기였다. 이 부분(서래의 캐릭터성)을 설명하는 건 영화에 굉장히 중요해서 직접 보시는 걸 추천한다. 그녀의 입장을 견지한 채로 그에 맞게 영화를 봐도 이 작품은 걸작이다. 아, 두 배우 말고 다른 분들도 연기 잘했다. 특히 김신영 배우 인상깊었다. 취조하는 신 멋있었다. 일단 표정부터 '나 이 영화 피해 안 끼치게 잘해야 함'이 묻어나와서 귀엽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이 천재는 영화 판에서 자주 쓰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중요한 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수도 없이 봤던 미장센의 힘이다.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의 3색이 영화의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산속에서 낑낑대며 등산하는 장면, 서래의 집 벽지, 해준의 집 벽지, 바다 두 곳, 석류 자르는 모습, 통역 앱 등등 영화 장면 장면마다 장인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들어가 있다. 또 메타포도 적절히 들어간다. 일단 위치에 의한 비유다. 위에 누가 있고, 아래에 누가 있는지를 염두하고 보시면 영화의 감상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언어에 대한 비유도 상징적이다. 언어가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감독이 뭘 보여주고 싶었을까?를 생각해보시라. 이 아이러니에서 오는 감정이 여러분도 마음속에 깊이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님은 갔지만 난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영화가 탁월한 또 다른 지점은 제목에서 온다. 제목을 잘 짓기도 했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헤어질 결심>이라는 마음 그 자체다. 내가 경험하거나 주변인에게 들었던 사랑 이야기는 참 헷갈린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날 사랑했을까? 아닌가? 그 사람에게 나는 도구였던 걸까? 아니면 잠깐 불탔던 무책임함일까? 이 얄궂은 마음의 엇갈림은 인간에게 오랜 과제처럼 남는다. 정말 사랑했을까?
이 영화는 이 엇갈림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강점이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이거 설명할 수 있을까? 할 수는 있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 공통점이라는 것도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022년 6월 29일 18시 10분에 사랑에 빠짐'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공통점이 이거여서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말할 수는 있겠지. 근데 둘의 입장이 정확히 딱 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서로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 심지어 첫눈에 반한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공통점을 보고 사랑이 깊어지는 경우가 다수였다. 그 깊어진 사랑을 재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 맞지?' 식의 배타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근데 무슨 솔로몬도 아니고 그걸 일일이 직접 다 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모호함이 사랑이 주는 낭만과 비극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이 알듯 말듯한 마음의 차이점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어떻게? 듬성듬성 설명하는 방식으로. 가타부타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설명을 일일이 다하고 서래가 얼마큼 이쁘고 해준이 얼마나 착하고 구구절절이 다 쓰면 재미가 없다. 영화에서 해준-서래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영화에 제시되는 장면이 전부다. 그냥 단지 감정선만 따라가는 형식으로 오히려 영화가 완벽한 설명을 성사시키는 셈이다. 이 '듬성듬성 보여줘서 완벽한 설명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지 않은 분들이 극장에서 확인하시면 좀 더 폭넓은 감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마음의 엇갈림'이라는 모티브를 작품이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는 각자가 보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다.
찰싹 달라붙는 각본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미장센의 힘을 강점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느꼈다. 실제로도 장면 전환이나 촬영 구도나 우리나라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 함이었다. 그러나 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직도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왜 <헤어질 결심>일까. 이 영화는 굉장히 외로운 방식으로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해낸다. 그리고 그 외로운 설명 방법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마침내 행복한" 결론으로 마무리짓는다. 이 아름답고 품격 있는 사랑 이야기는 여러분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서래의 사랑에 빠져버렸다. 난 이 영화를 나이가 들어서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각본이 갖고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카데미에서 볼 수 있기를
이 영화로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의 팬으로서 경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오래 기다려서 봤다. 솔직히 아쉽다. 감독상도 큰 상인데, 심사위원대상이나 황금종려상까지 받을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아카데미를 기대하고 싶다. 글쓴이는 충분히 국제영화상을 비롯해 작품상이나 감독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걸작이라고 봤다. 이 영화는 사랑했기 때문에 남겨있던 감정 모든 것을 괄호 치기의 미학으로 설명한다. 이런 사랑영화는 본 적이 없다. 걸작이다. 내가 생각하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다. 그리고 이는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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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운드 오브 데스> 메인 예고편
실험적인 음악과 소리를 연구하는 알렉시스.
폭력의 소리를 수집하는 그녀는 끊임없이 목마름을 느낀다.
어느 날, 행인의 우연한 죽음을 목격한 그녀,
죽음의 소리만이 자신의 쾌감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후 죽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한 살육을 시작한다.
노숙자, 레코드 샵 오너, 하프 연주자…
알렉시스는 죽음의 비트를 찍어 나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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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클리포드 더 빅 레드 독> 공식 예고편
올 가을, 세상에서 가장 큰 강아지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