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플레2021-07-04 20:31:43
잊고 있던 삶의 감각과 진중한 사유의 장, <트립 투 그리스>
마이클 윈터바텀, <트립 투 그리스>(2020)
잊고 있던 삶의 감각들
지금과 같은 팬데믹을 관통하는 시기에, 영화 <트립 투 그리스>(2020)는 잊고 있던 감각을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었나. 밥을 먹으며 나누는 사소한 대화들, 휴가철을 맞아 떠나는 타국으로의 여행.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삶의 일부는 어느덧 감각하기 어려운 낯선 무언가로 변모했다. <트립 투 그리스>에서 영국의 배우인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은 그리스 전역을 돌며 매일 레스토랑에 들러 열심히 대화를 나눈다. <트립 투 그리스>는 ‘트립’ 시리즈의 종착역이다. 2010년부터 시작된 ‘트립’ 시리즈는 영국-이탈리아-스페인을 거쳐, 그리스에서 10년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을 여행지로 초대한다. 롭과 스티브의 익살스러운 성대모사라든가, 수상 경력을 언급하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현실 속 배우들의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극영화의 허구성을 흐릿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정에 균열을 내는 순간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두 남자의 대화, 레스토랑의 고급스러운 음식들, 따사로운 그리스의 풍광들이 계속해서 감각기관을 자극한다. 오감을 건드리는 영화의 이미지들 가운데 낯선 무언가가 불쑥 끼어든다. 여행은 그 자체로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을 잠시 잊게 한다. 특히나 그리스와 같이 다층적인 매력들로 여행자를 매혹하는 도시에서는 더욱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뚜렷이 느껴진다. 롭과 대화를 나누던 스티브는 아들의 전화를 받는다. 할아버지가 위독하세요, 그래 알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렴. 비일상의 연속이던 여행지에서 스티브가 악몽을 꾸는 장면은 종종 흑백으로 처리된다. 죽음과 맞닿은 듯 보이는 아버지의 형상은 그를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한편으로 두 사람의 여정에 불쑥 누군가 끼어드는 상황 또한 영화를 흥미롭게 가공한다. 스티브와 함께 작업했던 난민 캠프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카림이 두 사람과 잠시 동행하면서 묘한 긴장감이 생성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관광지와 파인 다이닝을 곁들인 여행 코스에 난민 캠프라는 이질적인 공간이 은근슬쩍 편입된다. 카림은 자신이 하는 일을 상세히 설명한다. 카림에게 난민 캠프는 현실의 영역이자, 일상과 맞닿은 곳이다. 롭과 스티브에게 그리스는 잡지사의 미식 여행 기획안에서 비롯된 비일상의 여행지이지만, 카림의 현실이 은근슬쩍 개입되므로 두 사람의 여행이 함의하는 바를 어딘가 모호하게 만드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차에서 직접 내려 난민 캠프를 바라보는 롭과 스티브의 미묘한 표정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진중한 사유의 장을 환기하는
시청각적인 여행 대리 체험과도 같은 <트립 투 그리스>는 종종 방황한다. 서사성이 가미된 극영화의 리듬과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리얼리즘의 질감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 영화는 종종 균형감을 지키지 못하며 표류하기도 한다. 특정 대화 신(scene)에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구간들 말이다. 하지만 <트립 투 그리스>는 그런 한계를 두 남자의 서사를 대비시키면서 생성하는 텐션으로 극복해 나간다. 롭은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들은 스티브가 급하게 집으로 떠나자 때맞춰 오기로 한 아내와 함께 그리스에서의 일정을 스티브 없이 마무리한다. 롭은 친구를 떠나보낸 상황에서, 아내에게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의 감정에 관해 가볍게 언급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가벼운 스몰 토크가 지배하던 영화의 초반부는 후반부에 이르러 사뭇 진지한 태도로 여행이 곧 인생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표면과 심연,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된 그리스에서의 경험은 결국 두 남자의 분화된 서사로 귀결된다. 아름다운 이국의 휴양지에서, 휴식과 대화로만은 온전히 채워낼 수 없는 짙은 무게감이 영화를 감싼다. 잊고 있던 삶의 감각을 깨우던 <트립 투 그리스>는 여행지라는 비일상의 공간을 경유하여, 진중한 자세로 죽음과 맞닿은 일상의 단면을 환기하며 여운을 남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은 '영화 <트립 투 그리스>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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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뤽 다르덴 & 장 피에르 다르덴, 로제타 (1999)
뤽 다르덴 & 장 피에르 다르덴, 로제타 (1999)
- 와플 왕국 노동자의 평범한 삶
karenine
# 이야기를 시작하며
살면서 아주 가까운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어른다운 부모를 두어서 좋겠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대학생 때부터 집을 뛰쳐나가 그야말로 신입생 때부터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친구였다. 나는 그에 비해 관심도 애정도 통제도 많은 부모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사실은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 감각도 있으면서 아이를 적당히 외롭지 않게 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성실함은 할아버지로부터 왔다. 할아버지는 60대 초반이 될 때까지 일을 하셨고 65세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중간에 크게 아팠을 때 빼고는 한 번도 쉬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아버지가가 새벽에 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성실한 노동자 집안의 맏이인 나는, 고학력 실업자가 된 이후로 아무도 눈치 안주는 데도 눈치가 보인다. 예컨대 코로나 시대에 청년 취준생이 29만 명이라는 뉴스를 아버지와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에서 듣는 일은 참 불편한 일이다. 결국 다른 뉴스가 나올 때까지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오늘도 아침을 먹고 약간은 무거운 표정으로 출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무슨 부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누군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기도 했고 내가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없는 시간을 내서라도 열심히 쓸 것이다. 뿌듯함은 잠시였고, 앞으로 내가 벌린 일을 수습할 생각에 아찔했다. 어릴 적엔 작가, 글 노동이라 함은 멋들어진 서막을 열면서(예컨대 등단, 문학상 수상, 등등) 시작하리라 예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로제타가 뒷문을 통해 리케의 자리를 몰래 염탐하듯이 궁상맞고 은밀하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리케의 자리를 바라보는 순간에, 언젠가는 사장의 여러 와플 가게들 중 하나의 점장이 되리라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메이저 지면에 기고하리라는 섣부른 야망을 가지면서 내 기분은 점차 상승했다가, 다시 땅에 내려앉았다.
# 로제타가 겪는 윤리적 각성
딸에게 양육자 구실을 하지 못하는 엄마를 둔 로제타(에밀리 드켄)의 삶은 매일이 진창 같은 전쟁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맨몸으로 싸우는 육박전이다. 사실 로제타의 가장 큰 적군은 엄마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로제타가 남이 준 생선을 버리려고 할 때 딸에게 칼을 들이미는 '어미'다. 유아적이고 파렴치하며, 사창가의 여인 같기도 하고 돌아온 탕자 같기도 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로제타의 생모, 어머니, 엄마.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적이라는 사실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다.
로제타가 "나는 엄마랑 달라 Moi, c'est pas toi (*직역하면 난 엄마가 아니야.)"라고 선언하며 만들어가는 삶의 궤적은 철저하게 스토익하고 윤리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영화는 카메라 기법부터 어지러울 정도로 현장감을 그대로 가져오는 리얼리즘(핸드-헬드) 기법을 쓰고 있다. 반면 로제타의 삶의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감독의 목소리를 은연중에 대변하는 것과 같은 교훈적일 정도로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인물은 마치 순교자의 일생을 기록한 것처럼 의지로 가득 차 있으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이 인물을 고지식하고 때로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게 하며, 로제타라는 인물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형성한다.
이 심리적 거리감이 철저히 전복되고 깨지는 것은 극 후반부이다. 영화 초반부부터 로제타는 이미 어떤 윤리적 각성을 한 소녀이다. 소녀는 엄마의 삶의 방식을 보고 겪으며 절대로 '엄마처럼 살아가는 건 안 된다'라는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사회로 나갔을 때 더 넓은 층위의 문제에 직면한다. 자신을 돕고자 하는 리케(파브리지오 롱기온)의 선의를 어디까지 받아야 하는지, 비슷한 처지나 좀 더 나은 처지인 그가 동료인지 잠재적 경쟁자이자 적인지를 로제타는 아직 판단하지 못한다. 동료 노동자는 그녀에게 자리를 뺏을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자 적이다. 지난 직장에서 경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동료의 모함 때문에 그렇게 허무하게 해고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J'ai une vie normale (나는 평범한 삶을 산다)
그런데 리케가 엄마와의 몸싸움 때문에 잃어버린 장화를 주었을 때, 로제타는 그날 밤 비로소 그를 '친구'라고 부른다. 머릿속에 생존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찬 소녀에게는 집에서 재워주는 것도, 오토바이로 태워서 데려다주는 것도, 토스트를 구워주는 것도 아닌, 자신의 생존품인 장화를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마운 사람일 것이다. 전쟁통에서 군화를 잃어버려 행군을 못하는데 군화를 도로 찾아준 이에게 느끼는 전우애랄까. 그런데 리케의 사정은 다르다. 로제타가 리케의 눈을 안 마주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 리케가 그녀에게 인간적인 호감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것을 로제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눈치를 챘을 것이다.
위에서 로제타에게 갖게 되는 이상한 심리적 거리감은 후반부에 가서 어떤 강렬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휘몰아치고 부서진다. 로제타는 장화를 준 리케가 물에 빠졌을 때 '나 말고 저 사람이 대신 물(진창)에 빠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을 잠시 한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현실인 것은 계산대에 있는 사장의 돈을 훔칠지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와플을 빼돌려서 수익을 남길지 고민하는 것도 아닌, 내 생존을 위해 다른 노동자를 그 자리에서 악의적으로 제거해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라는 점이다.
로제타는 남의 것을 훔치고 구걸하는 게 나쁜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철두철미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존엄을 해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의지로 투철하다. 또한 카라반(트레일러)의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보통의 삶으로 정착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정작 타인의 선의를 어떻게 돌려줘야 하는지, 같은 노동계급의 동료와 어떻게 공존하고 연대를 이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각성은 로제타가 한 번도 맞닥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늘 대체되는 사람이었으므로.
리케가 해고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로제타는 자신이 당했던 '부당한' 해고를 리케에게 덮어 씌움으로써 자신이 당했던 피해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다. 갑자기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 대사가 떠오른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그리하여 그녀는 꿈에 그리던 생산-판매라인의 가장 끝에 오르게 되고, 생전 가장 많은 돈을 만져보게 된다(갖게 된단 소린 아니다). 그러나 사장에게 얻은 신뢰도, 안정적이고 그럴듯한 직장도, 일하면서 그녀의 입가에 걸린 작은 미소도, 리케가 눈앞에 한번 나타나는 순간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 밥벌이의 즐거움과 슬픔
이 영화는 와플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벨기에 출신의 감독들이 만든 영화에 와플이 주연으로 나오는 것은 차라리 어떤 유머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감독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네 벨기에 하면 솔직히 와플밖에 모르지? 와플 말고 벨기에에 대해 아는 게 있나? 그런데 와플 왕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사실 이렇단다.'
와플은 영화 속 다양한 상황에서 등장한다. 첫 등장은 로제타가 해고당하고 얼굴이 벌게져서는 씩씩거리며 와플을 먹는 장면이다. 출근길에 사람들이 하나씩 사가는 아침 대용으로도 나오고, 직장에서 갓 잘렸어도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음식이 바로 와플이다.
영화는 특별할 때 먹는 디저트로서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와플을 보여준다. 이로써 관객들은 와플 생산-판매 라인에 대한 모든 것을 보게 된다. 나는 벨기에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왠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일상식인 김밥이나 토스트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벽부터 재료를 준비하고 김밥을 마는 분주한 아침. 출근하는 손님들의 손에 하나씩 들려가는 김밥들과, 철컥 소리가 나며 열고 닫히는 계산대의 소리. 이것은 벨기에식 밥(빵?)벌이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초상화이자 그 뒷단의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지에 대한 성찰과 고발이다.
호흡이 가빴던 도입부에 비해, 와플가게 사장(올리비에 구르메)이 로제타에게 일을 알려주는 장면은 평화롭기까지 하다. 어떨 때 우리는 지긋지긋한 집안에서 벗어나 노동의 리듬 안에서 가장 큰 평화를 찾기도 한다. 로제타의 경우, 그녀에게 버거 워보이는 밀가루 포대를 제법 잘 들어서 반죽에 능숙하게 섞는다. 언뜻 세대에서 세대로 전수되는 어떤 노동의 배움에 대해서 보여주면서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도 잠시, 로제타는 사장 아들에게 또 밀려나고 만다.
재미있는 점은, 영화는 로제타 눈에 비친 와플집 사장, 즉 소부르주아지의 고단함 또한 응시하고 있다. 이것이 다른 영화에서 굉장히 양극화된 계급 묘사와는 사뭇 달랐다. 이미 12개의 점포를 가지고 로제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 것 같은 사장도 실은 무거운 밀가루 포대의 무게 앞에서 쩔쩔맨다. 그 또한 매일같이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또한 사장은 부양 의무가 있는 책임감 있는 부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식을 위해 성실한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이렇듯 밥벌이에서 어떤 선택의 순간들은 매일같이 찾아온다. 마음이 불편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야 되는 선택들이 있고 그것이 우리를 지치고 찌들게 만든다.
참고로 올리비에 구르메는 몇 년 뒤 <아들(2002)>이라는 다른 다르덴 영화에서도 소년들에게 목공일을 가르치는 역할로 나온다. 이 때도 무뚝뚝하지만 은근히 마음은 약하고, 자신의 상처와 지친 삶을 내색하지 않고 내면에 간직한 사람의 역할이 정말 잘 어울렸다.
# 다르덴 영화가 유머를 다루는 방식
슬프고 처참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임에도, 나는 이 영화가 유머를 잃지 않았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 유머는 아주 머쓱해지는 뚝 끊김, 갑작스러운 포즈(pause)에서 나온다.
리케네 집에 갔을 때 리케는 그 어색한 공기 속에서 어떻게든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보려 하지만 좀처럼 로제타는 장단을 맞춰주지 않는다. 리케는 음악을 연주하고 들을 만큼 아주 약간은 숨 쉴 틈이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주 법대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한다.
하지만 이윽고 우리는 그에게 변변한 진짜 음반도 하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인이 직접 녹음한 연주 테이프를 들으며 어떻게든 흥을 돋우려는 이 남자아이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로제타는 못 이기는 척 리케가 연주한 이상한 드럼 곡에 맞춰 춤을 춘다. 흥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할 찰나, 갑자기 음악이 뚝 끊긴다. '어, 내가 여기서 틀린 것 같아.' 그리고 연주는 다시 시작되지만 한번 끊긴 '무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베스트 3 안에 꼽을 수 있다.
로제타가 진 삶의 무게는 밀가루포대-엄마-가스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무거운 것들 앞에서 로제타는 한 번씩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마지막 결말 부분의 그 안타까운 순간마저도, 영화는 절묘한 순간에 포즈(pause)를 주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로제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갑자기 가스가 끊기는 장면이다. 죽으려고 할 때까지 가스통을 사서 끌고 와야 한다니. 영화는, 죽을 권리도 돈을 지불해야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강렬한 쓴웃음을 짓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리케의 얼굴을 정면으로 안 보여주는 것은, 로제타를 구원한 사람이 리케, 즉 남성-노동자라는 메시지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로제타가 마지막으로 삶은 달걀의 껍질을 깨듯, 그녀의 내면에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엔 후회의 쓴맛과 현실에 대한 절망이 뒤따른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깨짐을 통해서 로제타는 자신의 과거와, 또 타인인 리케와도 화해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로제타의 두 눈빛을 통해 그녀가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음을, 아직 자신만의 무인도에서 죽을 힘을 다해 구조 신호를 쏘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마치며
<로제타> 영화가 나온 이후 벨기에 정부의 로제타 플랜은 반짝 효과를 내고 몇 년 만에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정부가 청년 정책 하며 내놓는 취업지원금이나, 이런저런 임시변통의 대책들도 저렇게 별 효과 없이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질 게 뻔하다.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는 각자가 견디고 자구책을 만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까진 이 광활한 진창을 없애기 힘드니 최대한 덜 빠지도록 조심하고 자신의 몸과 정신을 드라이로 말리듯이 항상 건조하게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가 준 가장 큰 교훈이 그것이 아니던가. 극악한 환경을 만들어놓았으니, 알아서 생존하시오.
가끔 현실이 팍팍할 때 이 영화를 꺼내어 볼 것 같다. 그 이유는? 에밀리 드켄의 출중한 연기나 블랙 유머 코드 때문에? 아니면 나를 물웅덩이에 밀쳐버리는 엄마가 없으니 차라리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왠지 '진짜 일을 하고 싶어'라는 그녀의 대사를 되새기기 위해 이 영화를 다시 볼 것 같다.
'진짜 일'이란 당최 무엇인가. 최근에 친구랑 통화를 하다가, 친구가 너는 사랑에 있어서 더 원(the one), 일종의 운명적인 사랑이 있냐고 물은 적 있다. 나는 속으로 워너원도 아니고 그게 뭐냐고 생각했으나, 내 속마음은 반반인 것 같다.
친구 말마따나 일에도 나만의 더 원이 있을까? 일찌감치 어떤 직업에 소명 의식을 찾은 사람들이 갑작스레 부럽다.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일'을 찾느라 분투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 어떨 때는 아무 일이든 좋으니 일감만 달라고 하다가도 일하게 되면 좀 더 큰 욕심을 품는다. 아무리 같은 돈을 받아도 뒷단의 구질구질한 일은 하기 싫고, 내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고,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 운명적인 사랑을 찾는 것보다 차라리 그런 일을 찾는 것이 어렵겠다 싶다.
덧, 글을 쓴다고 아직 집에다 말하지 않았다. 그 돈을 버느니 본업에나 충실하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걸 상상하니 욱하는 마음이 들지만 로제타의 구제불능 엄마를 생각하면서 참아야겠다.
[Eurofilm 6. 벨기에, 프랑스]
<이미지 출처>
www.bonjourtristesse.net/2010/12/rosetta-1999.html
www.simbasible.com/rosetta-movie-review/
https://www.etsy.com/listing/192831475/rosetta-limited-edition-movie-poster
https://www.ioncinema.com/reviews/criterion-collection-rosetta-blu-ray-review2020년 11월 23일 감상 / 2020년 11월 25일 씀.
* 본 콘텐츠는 브런치 karenine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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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볼 수 없는 친구를 위한 번쩍번쩍 대작전.
제25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만난 기억에 남고 재미있는 영화를 하나 꼽으라면 이 영화를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영화 귀신 친구다. 영화 포스터나 첫 장면을 보기만 해도 공포스러운 분위기 그 자체를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랄 수도 있지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다. 이렇게 유쾌한 단편 영화를 처음 경험해봐서 더욱 재미있게 영화제를 즐길 수 있었는데, 이 영화를 티빙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4개의 단편을 묶어놓은 영화 우스운 게 딱! 좋아! 에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여 관람하길 바란다.
'퉁퉁 퉁퉁퉁 퉁퉁 퉁퉁 퉁퉁!' 하는 둔탁한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친구 지혜가 서 있었다. 소연에게 찾아와 무언가를 부탁하지만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소연은 지혜의 집에 방문하게 되고 방을 둘러보다 이 방에서 함께했던 그들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다 문득 지혜가 부탁했던 그 무언가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친구를 위한 친구에 의한 '성'스러움 지키기 대작전이 시작된다. 감추면 감출수록 드러나는 지혜의 비밀을 소연은 지킬 수 있을까.
상영시간 30분 내내 이렇게 웃기면서 몰입감까지 좋은 영화는 드문데, 내겐 이 영화가 그랬다. 비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뒷배경의 숨 막힘으로 인해 더욱 긴박함이 더해지는 과정이 공감성 수치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유쾌하게 풀어나가 재미있었다. 즐거움으로 시작해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 짓는 영화의 흐름은 형형색색의 불과 진동소리로 감동과 재미를 더한다. 적어도 마지막은 "다시 보지 못할 나의 친구야, 안녕."이라는 말로 맞아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위잉 위잉 번쩍번쩍!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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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과 긍정 사이, 작별과 만남 사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유난을 떨어?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반문할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찬란했던 순간, 나 역시 있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내 글을 옮기고 싶었다는 메일을 봤을 때나 선거에 참여했던 기억은 그 누구의 것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것이다. 또 있다. 정신병에 신음하던 순간. 이걸 이겨내기 위해 했던 노력들. 그것도 나의 기억 속에서 빛나는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아무와도 맺지 않은 약속에 관한 것이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이 따르는 대로. <시네마 천국>을 쓰려고 했던 본래의 계획을 부숴 새롭게 다른 걸 쓰고자 한다. 난 21살이 돼도, 22살이 돼도, 23살이 되고 만남은 쉬운데 이별은 너무나도 어렵다. 떠나보낸다는 건 필연적으로 많은 후회를 풀게 되니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으니 나를 더 괴롭게 만든다. 난 그래서 약속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하는 걸로. 그게 어떤 방식이든, 또 무엇이든.
<졸업>은 이별에 관한 영화다. 러닝타임이 22분 정도인 짧은 단편영화다. 또, 제주대학교 영화동아리 <시네필>이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멀쩡히 돌아가는 메가박스도 영업 종료시킬 정도로 제주는 영화를 제작하기에 그렇게 원활한 곳이 아니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작품 중에 기억에 남는 거 그나마 <낙원의 밤> 정도? 근데 그것도 올해 나와서 그렇지 대부분 해녀에 횟집에 썼던 소재만 써서 영화 소개에 '제주'만 들어가도 접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같이 스무스하게 녹아들게 만들 순 없는 걸까?
이 작품 <졸업>은 제주라는 장소적 특성을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제주라는 장소가 영화와 찰떡이다. 뭐 이건 필연적으로 이 사람들이 제주대학교 재학생들이니까 제주에 대한 이해도가 높겠지? 그리고 텀블벅으로 150만 원인가 받고 제작한 작품인데 비행기 타고 장소 섭외하고 그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것이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자는 이런 장소를 활용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를 십분 잘 활용한다. (물론 이것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상실의 이미지'가 제주의 바닷소리, 풍광과 함께 시너지가 잘 나는 편이다. 혼자서 바다를 걸어본 적이 있는가? 바다는 넓고 행복한 사람들은 주위에 한가득인데 나 혼자만 덩그러니 있으면 외로움이 심해진다. 이렇게 낯이 애매하게 진 바닷가에서 두 친구가 손을 잡고 걷는 장면이 있다. 그 대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내가 그렇게 행동했으면 달라졌을까?' 하는 가정일 것이다. 친구 중 한 명인 예원이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대화는 현실성이 없다. 대사만 봐도 현실의 허전함을 강조할 수 있는데, 바다는 보여주고 배경은 페이드 아웃하는 연출법으로 통해 인물들이 상실로 인해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연출이다. 이렇게 이런 처연함이라는 핵심 키워드를 제주라는 장소적 특성(바다, 일몰의 아름다움)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결합해 영화의 무거운 정서를 이끌어나간다.
또 이 영화는 성숙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이별. 어렵다. 이 '이별, 어렵다.'라는 말을 쓰자마자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었다. 근데 진짜 그 사람들이랑 이별한다고 하면 인생이 어려워질 것 같다. 이 이별이라고 하면 사별도 있고 결별도 있고 뭐 가지각색으로 있겠지. 근데 이별이 정말 아픈 이유는 행복했던 추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떻게 잊어. 난 그것들을 잊으라고 한다면 격하게 싫다고 반응할 자신 있다. 가슴에 품어라. 마음으로 잊어라. 말은 쉽지. 근데 그게 쉽게 되면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쉽게 잘라낼 수 있으면 기계지 그게. 내 주치의 선생님도 '생각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니 정신건강의학적으로도 보장된 사실인 것이다. 물론 나는 '잊으라'라고 독려하는 이별에 관한 영화들을 좋아한다. 잊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잊으라는 뭐 그런 거. 그중에 내가 좋아하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와 같이 '이젠 정말 앞으로 나아가는 거 어때?'라는 말은 나에게 또 다른 힘이 되었다. 반대의 맥락에서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 <매그놀리아>인데, 이 작품은 인물이 완벽하게 잊어서 성장하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엔딩신에 여자 주인공이 빙긋이 웃는 장면으로 영화를 끝낸다. 이 <졸업>은 후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순간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물을 수밖에 없다. 그게 최선이었니? 그게 됐다면 넌 내 옆에 있었을까?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리움이 심해져 사람을 더 아프게 할 것이다. 그 상처들을 무조건 잊는다는 게 과연 능사일까. 아닐 것이다. 돌아본다는 건 완벽하게 지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매일이 고통스러운 인물에게 어려운 문제다.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으니까 그렇게 자주 뒤를 돌아볼 것일 테니까. 아쉬우니까 미련이 생기는 것이니까. 이 영화는 삶에서 계속되는 난제에 대해 '니 잘못 아니야. 고마웠어'라는 말 한마디를 건넨다. 단적으로 딱 잘라서 잊으라는 말보다 더 사람 냄새가 나는 화법을 쓰는 것이다. 나는 상실의 아픔을 잊기에는 너무 어리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 아주 소중한 원동력이 되는 것인데, 그걸 다 잊기에는 나는 여전한 애새끼다. 이런 나 자신을 긍정해줘서 좋았다.
물론 아쉬운 지점이 있다. 중반부 와랑와랑에서 두 주인공이 술 마시는 장면에서 남자가 '너 그거 정신병이야'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근데 내가 아는 정신질환 중에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며 힘들어하는 병 같은 건 없다. 각본의 사려 깊음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얼핏 보면 디테일이 부족해 보인다는 지적사항이나 호흡이 느리다는 호불호 갈림의 요소도 영화의 진정성을 살린다는 점에서 왜 단점으로 지적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강점이 되는 부분인 것이다. 좋은 예술이 뭘까? 나는 영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것에는 재주가 없다. 그냥 좋으면 좋다고 감상을 풀어쓰는 사람이다. 이 <졸업>은 풀어서 쓰기 좋은 작품이다. 사람의 마음도 분석적으로 다 보기엔 어렵지 않나.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디테일한걸 굳이 풀지 않는다. 애초부터 어렵기 때문이다. 이별, 작별. 뭐 그런 순간들을 풀어쓰기에는 다들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날 것의 대사들과 이미지들로 인물들의 내면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근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게 우리가 뭘 보고 좋다!라고 느끼는 이유 아닌가? 이런 연출법은 <메기>나 <꿈의 제인>에서 봤던 방식이다. 따라서 한국 독립영화들을 많이 봐 자연스레 배운 연출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누구나 마음속에 잊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것에 비해 사소한 것들을 놓쳤다는 회한에 사실 일상이 많이 아쉬운 사람이다. 그래서 아직 몇 가지를 이별하지 못했다. 또 내가 정말 사랑했던 순간들이 나를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불안한 게 많은 내 성격이라 지레짐작으로 겁을 먹은 것일 수도 있겠지. 근데 점점 예감이 현실이 된다는 생각은 나를 더 괴롭게 만든다. 이런 나에게, 또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나는 '그냥 그것들 다 잊지 말아라'라고 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단적으로 잊고 산다는 것은 더 비현실적인 것 같다. 그러니까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 정말 그 회한이 필요한 순간이 올 때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쓰면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픔을 아픔이라고 생각하면 아픔이겠지. 난 근데 그것 때문에 내 즐거운 시간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잊고 싶지 않다. 정해종 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엑스트라>에서 이 시인은 '더 이상 지나간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라'라고 썼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지나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라. 그 대신, 지금 나와 함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라. 그게 우리를 만드는 모든 것이겠지. 난 정말 멀어지고 싶지 않은 것들이 분명해서, 아직도 여기서 살고 이곳에서 행복함을 느낀다. 이별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고 싶다. 그게 만남과 이별을 긍정하는 아주 좋은 방식이 될거라고 믿으니까. 뭐 확신할 순 없지만 각본가가 이 극을 썼던 방식이자 내가 글을 쓰는 이유고 이 뭐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바탕이다.
현재 '시네필'의 유투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EWNJ4JOK5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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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렌필드>가 드라큘라의 가스라이팅을 극복한 방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라큘라’(니콜라스 케이지) 성을 방문했다가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 직속비서가 되기로 결심한 ‘렌필드’(니콜라스 홀트). 인간을 뛰어넘는 괴력과 반사신경을 갖게 된 것도 잠시, 그는 밤낮없이 찾아오는 흡혈귀 사냥꾼을 격퇴하고, 드라큘라 입맛에 맞는 순결한 제물을 찾으며 정신없이 살아간다. 어느 날, 드라큘라는 사냥꾼과 싸우다가 햇빛에 쬐여 큰 부상을 입고, 렌필드는 그를 미국으로 옮겨 간호한다. 여느 때처럼 술집에서 제물을 찾으며 시간을 보내던 렌필드는 마피아의 협박에 주눅 들지 않는 경찰 ‘레베카’(아쾨피나)를 만나고, 한 가지를 결심한다. 자기도 레베카처럼 당당하게 살겠다고. 드라큘라와의 관계를 마침내 끊겠다고.
드라큘라가 주인공 아닌 드라큘라 이야기
흡혈귀 중 가장 유명한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드라큘라 백작. 그는 소설에서 처음 등장했고, 100개가 넘는 영화로 재해석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토드 브라우닝 감독의 1931년 영화 <드라큘라>다. 이 작품에서 그는 '깃을 세운 망토를 입은 채 여자를 꼬시는 흡혈귀'와 같은 이미지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많았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처럼 진중한 다크 판타지 장르로 각색하거나, 넷플릭스와 BBC가 협업한 시리즈 <드라큘라>처럼 그를 현대로 불러왔다.
크리스 맥케이 감독은 <렌필드>로 더 과감하게 드라큘라를 재해석했다. 드라큘라를 현재 시간대로 불러왔고, 배경도 루마니아(왈라키아)나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이번 주인공은 드라큘라가 아니다. 원작 소설 속 정신병자, 렌필드가 주인공이다. 그는 다른 생명을 먹으면 장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레를 잡아먹는 기괴한 인물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드라큘라를 돕는 부하 역할로 자주 등장한다. 영화는 아랫사람인 그의 시점에서 드라큘라를 묘사한다. 그러다 보니 한 번도 생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드라큘라의 면모가 드러난다. 아랫사람을 교묘히 조종하는 악덕 상사의 모습이다. <렌필드>는 이 기괴한 갑을관계에 주목해 고전을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재해석한다.
드라큘라의 '가스라이팅'
영화는 드라큘라에게 붙잡힌 채 그의 뒤치다꺼리를 맡은 렌필드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고성(古城)을 파는 부동산 거래로 큰돈을 벌기 위해 드라큘라에게 접근한 렌필드. 그는 큰 힘을 주겠다는 드라큘라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그의 비서가 됐다. 벌레를 먹으면 괴력이 생기는 능력을 얻은 후, 렌필드는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허드렛일을 맡았다. 뱀파이어 사냥꾼으로부터 드라큘라를 지키는 건 기본이다. 드라큘라가 햇빛 때문에 크게 다친 후로는 깨끗한 피를 가진 사람을 제물로 바쳐 회복을 도왔다.
물론 렌필드도 고민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 건지. 드라큘라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 수는 없을지. 하지만 그의 고민은 항상 같은 곳으로 귀결한다. 그는 드라큘라를 거스르지 못한다. 그에게서 능력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다. 렌필드에게 드라큘라는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드라큘라는 렌필드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제물을 데려오면 그를 일부러 공격한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렌필드가 용서를 구하면 그제야 자기 피로 치료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렌필드는 드라큘라의 요구나 명령을 거절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처럼 의존적이고, 또 자기 파괴적인 인간관계는 사실 낯설지 않다. 데이트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사례에서 '가스라이팅'이 활개 치는 뉴스는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 <렌필드> 속 드라큘라와 렌필드의 관계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어딘가 씁쓸한 갑을관계 탈출기
그런데 <렌필드> 속 피해자 모습은 단순하지 않다. 렌필드는 단순히 조종당하는 게 아니다. 자기 처지가 당연하다고 자조하며 동조한다. 드라큘라에게 의존하는 악순환을 렌필드 본인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저버린 채 드라큘라를 만나러 떠났다. 부와 권력을 원했기 때문에. 드라큘라의 제안도 받아들였다. 더 강한 힘과 능력을 탐냈기 때문에. 이 찰나의 선택 때문에 그는 스스로 퇴락했다. 즉, 자발적인 굴종이 렌필드와 드라큘라의 진짜 관계인 셈이다. 이는 렌필드만의 문제도 아니다. 영화에는 다른 악역도 있다. 마피아가 활개를 치고, 경찰은 그들로부터 돈을 받고 눈감아준다. 그런데 이들과 렌필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힘을 쫓아 권력자에게 스스로 굴복하고 의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굴복이 드라큘라보다 더 위험한 악인 셈이다.
실제로 영화가 자기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자기가 시작한 악순환과 인간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본인뿐이니까. 렌필드에게 레베카와의 만남이 전환점인 이유이기도 하다. 작중 레베카는 마피아의 외압과 회유에 굴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경관이다. 그녀는 마피아에게 아버지를 잃었지만, 아버지처럼 마피아와 싸우겠다는 경찰다운 소신을 잃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렌필드는 큰 충격에 빠지고, 자기 합리화를 그만두고 드라큘라와의 관계를 다시 맺으려 한다.
드라큘라에게 데려갈 제물을 물색하려고 나가던 집단 심리 치료 모임이 기회다. 렌필드를 비롯한 참석자는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외치며 서로를 격려한다.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 패션이나 헤어 스타일, 집 인테리어처럼 세세한 것까지 직접 바꿔주며 서로 자존감을 높여준다. 하지만 렌필드의 탈출기는 어딘가 씁쓸하다. 그 안에도 갑과 을이 있기 때문이다. 모임을 주도하는 강사는 피해자에게 자기 책을 판다. 그 책이 마치 성경 마냥 구원을 약속한 것처럼. 이 또한 낯설지 않다. 피해자를 이용하는 두 번째 가해자도 손쉽게 접할 수 있으므로. 이처럼 <렌필드>는 인간관계로 인한 현대인의 고민을 정확히 지적한다. 주인공을 바꾼 고전의 재해석이 인상적인 이유다.
장르를 넘나드는 피 칠갑 코미디
이러한 메시지와 주제 의식은 영화 전반에 넘쳐흐르는 B급 정서 덕분에 더욱 빛을 발한다. 액션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 액션은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다. 원래 렌필드는 드라큘라를 보호할 때만 자기 능력을 활용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는 다른 목적을 위해 자기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액션이 과격하고 피가 많이 튈수록 드라큘라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의지는 더 잘 전달된다. 만화처럼 뻔뻔하게 피를 튀기다 보니 오히려 거부감이 덜한 셈이다. 실제로 절단된 팔과 다리를 무기처럼 활용하거나, 시체 위에서 키스하는 장면은 잔인하거나 기괴하지 않다. 그저 유쾌하다.
액션 외의 대목도 다르지 않다. 사실 <렌필드>에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불편한 점이 있다. 과거 이야기가 현대 배경으로 옮겨오면서 필연적으로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일례로 드라큘라가 렌필드에게 '순수한 여성의 피'가 필요하다고 닦달하는 장면은 지금의 젠더 관점에서는 이상한 뉘앙스로 전달될 수 있다. 드라큘라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들도 어색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과거와 달리 추적이 용이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여러 의문점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렌필드>는 B급 감성을 한껏 활용하면서 위와 같은 의문점이 뇌리조차 스치지 못하게 한다. 노예 계약과 싸우는 렌필드의 모습을 제4의 벽을 깨는 연출을 통해 보여주며 B급 코미디를 선사한다. 마피아와 부패된 경찰조직을 등장하면서 누아르처럼 보일 때는 돌연 분위기를 바꾼다. 망상에 빠진 드라큘라를 활용해 호러와 스릴러적 요소는 코미디로 전환하는 게 대표적이다. 드라큘라의 설정을 역이용한 장면도 웃음을 자아낸다. 기독교적 요소가 가미된 퇴마의식을 정작 마약 가루를 이용해 치르거나, 치유력이 있는 드라큘라 피를 이용해 드라큘라가 죽인 사람을 되살리는 식이다.
물론 <렌필드>에도 여러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마무리가 성급하다는 인상이 짙다. 호러, 코미디, 액션, 누아르 등 워낙 많은 장르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데 러닝 타임은 93분으로 꽤 짧다. 달리 말해 레베카 가족과 마피아 간의 악연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생략하거나 일부러 지나칠 수밖에 없다. 결말로 갈수록 캐릭터가 편의적으로 퇴장하는 이유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속도감은 빠르되, 다소 급하게 전개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더해 호불호도 극명히 나뉠 수밖에 없다. <데드풀>과 같은 작품처럼 미국식 유머가 워낙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반적인 한국 영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나 톤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익숙한 소재를 설득력 있게 재해석한 <렌필드>의 매력도 장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Acceptable 무난함
가장 세련된 형태의 재해석 중 하나. 취향만 맞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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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불처럼 뜨거운 마감 직전의 마음
본 리뷰는 독립예술영화 활성화 캠페인인 '인디플렉스 시즌4'에서 제공된 관람권으로 관람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의 고민에 완전히 빠질 때가 있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큰 문제가 눈앞에 있을 때 주변을 바라보기 힘들다. 주변 사람이 건네는 도움의 손길도 귀찮은 손길로 보이고, 좋은 조언도 잔소리로 들린다. 그렇게 눈앞의 고민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이 하나 둘 왜곡된다.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 문제는 문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주변과의 관계는 흔들림의 진폭을 늘려간다.
뭔가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더 시야는 좁아진다. 글을 쓰는 작가도 있겠지만 우리가 학교 다닐 때 해야 할 다양한 과제들과 시험들을 떠올리면 그런 일들이 무척 많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많은 사람이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그 문제가 다가올 때면 여유를 잃고 감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이런 히스테리컬 한 반응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나타나지 않고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이다.
마감을 위해 시골 별장에 방문한 레오와 펠릭스
영화 <어파이어> 속 주인공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은 글을 쓰는 작가다. 새로운 책을 쓰고 있는 그는 최종적으로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조용한 곳에 있는 펠릭스(랑스톤 위벨) 부모님의 별장으로 함께 간다. 별장의 분위기는 무척 조용하고 경관은 아름답다. 바닷가가 근처에 있어 수영을 하고 돌아오기도 무척 좋은 위치다. 그래서 그 별장은 레온이 글을 마무리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여기에 불청객이 있다. 먼저 여행객으로 머무르고 있던 나디아(파울라 베어)는 레온이 방문한 첫날부터 큰 소음을 내고 음식 먹은 그릇을 치우지 않은 채 생활하고 있다.
사실 레온과 펠릭스의 별장 방문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차가 고장 나서 먼 거리를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야 했고 편하게 쉬어야 하는 첫날밤에 나디아가 내는 소음 때문에 편안하게 푹 자지 못했다. 여기에 꼭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할 원고는 손도 대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시종일관 주변에 짜증을 부리는 건 당연할 것이다.
영화 초반 차가 고장 나 산길로 걸어가다가 친구 펠릭스가 길을 확인한다며 먼저 뛰어갔다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레온은 산 중간에서 한참을 기다린다. 그러다 펠릭스가 소리 없이 다가와 레온을 놀라게 한다. 레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펠릭스의 목을 조른다. 한 편으론 장난처럼 보이지만 몇몇 순간에 레온의 얼굴에서 엄청나게 화난 모습이 보인다. 그건 실제로 놀라게 한 펠릭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그때도 레온의 마음에는 그런 장난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레온은 주변을 세심하게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고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레온은 별장에 도착한 이후 며칠이 지나서야 나디아를 만나 인사하게 된다. 그리고는 나디아, 펠릭스와 별장 근처에 사는 데비트(엔노 트렙스)와 함께 식사도 하면서 관계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레온은 그들이 제안하는 대부분의 놀이나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는 반복적으로 일이 많아서 못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흥미로운 건 그가 혼자 남았을 때, 일을 진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혼자 공놀이를 하고 집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낸다.
일도, 노는 것도, 인간관계도 망치게 만드는 레온의 불안
영화 속 레온의 모습은 점점 지질해진다. 주변 사람에게 틱틱 쏘아붙이듯 말을 하거나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는 분명 비호감이다. 하지만 그의 그런 삐딱함은 이해할만한 범위에 있다. 마감을 앞두고 있는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집필이 거의 완료된 초고의 완성도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은 산불처럼 그의 마음속을 빨갛게 채우면서 불길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마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산불로 빨개진 하늘처럼 레온의 마음도 빨갛다.
레온은 시종일관 그 불안을 보고 있다. 주변에서 불쏘시개로 그 불안을 찌르면 과민반응을 한다. 그의 불안은 그가 쓴 초고에 대한 평가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 더욱 커진다. 영화 후반부 출판사 사장(매티아스 브랜트)과 나디아가 초고에 대한 평가를 할 때 레온의 마음의 불은 커지고 그 주변까지 태워버린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산불은 마치 레온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산불은 갑작스럽게 레온 일행에게 다가와 레온의 주변을 망쳐버리고 떠난다. 레온은 그 산불에 집중하다 주변의 불행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불안을 가지고 있는 히스테리컬 한 레온의 주변 인물들은 대체로 따뜻하다. 그의 짜증을 받아주면서 그에게 휴식을 자꾸만 권하는 그들 속에서 레온의 모습이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결국 뒤늦게나마 자신이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를 알게 된다. 영화의 전반적인 전개 과정은 레온의 불안에서 짜증으로 넘어가 슬픔과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에는 우리의 젊은 시절 성장하는 과정도 떠오르게 하고, 어떤 일이 해결되기까지 겪는 심리적인 상태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레온은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야 주변 인물들의 진심을 보기 시작한다. 그건 마감과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압박을 잠시 내려두고 자신의 작품을 봤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주변 인물의 상실이라는 큰 트라우마도 큰 영행을 주었다. 큰 산불이 만들어낸 폐허가 된 산의 모습과 큰 불행이 겹쳐지면서 레온에게는 다시 온전한 상태가 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산불로 인한 붉은 노을처럼 위험해 보이는 레온의 복잡한 마음
영화 <어파이어>는 4명의 젊은 인물이 자신의 앞에 당면한 문제나 시험을 대하는 태도를 상반적으로 보여준다. 레온은 모든 일에 예민하고 시니컬 하지만 펠릭스는 놀면서 생각하고 영감을 받으려 애쓴다. 서로의 방법이 다를 뿐 두 사람 모두 무언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직면한 상태는 동일하다. 나디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졸업을 위해 논문을 준비해야 하지만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쉬고 있는 상태다. 그 역시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있지만 긴 호흡으로 그 과제에 천천히 정리하며 접근한다.
그들이 보는 빨간 하늘은 아름다운 노을 같기도 하지만 뜨거운 젊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뜨거운 산불이 위험한 것처럼 그들의 젊음이 가져다주는 감정도 무척이나 뜨겁고 위험하다. 이 영화를 연출한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이 영화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받았다. 과거 <운디네>, <트랜짓>, <파닉스> 같은 사회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영화를 주로 연출했는데, 이번 <어파이어>는 좀 더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들어 가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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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디 에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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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끝까지 다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저서 <인간은 모두 혼자다>와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라는 두 책의 제목이었다. 이 역설적인 두 제목을 합쳐보면, 영화 <인 디 에어>의 역설적인 이야기와 삶의 모순을 담고 있는 이 영화의 주제가 쉽게 드러난다. 물론, 좋은 작품이 언제나 하나의 주제만을 말하고 있지 않듯이, 이 영화 역시 인간의 고독과 삶의 의미 뿐만아니라,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2009)가 덮친 미국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자본주의의 비정함과 우리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고용자의 퇴직 이후의 보장되지 않는 삶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 때문에 다양한 주제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시사점이 많은 영화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해당분야의 전문가의 몫으로 넘기고, 이 글에선 인간의 오래된 고독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인간은 결국 홀로 남겨진다
<인 디 에어>는 해고 전문가 라이언 빙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라이언은 미국 각지를 비행기로 돌아다니며(그래서 제목이 업 인 디 에어인 것), 다른 회사의 직원들에게 그 회사의 경영진 대신 해고 사실을 통보하는 베테랑 해고 전문가다. 어려서부터 노인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결국 사람은 혼자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라이언은 누군가와 오랜 시간 함께 하는 삶을 꺼려한다. 그때문에, 가족인 누나와 동생과도 자주 연락하지 않고 1년중 집에 있는 날이 고작 43시간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일과 삶에 편안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이렇듯 영화 <인 디 에어>속에서 보여지는 라이언의 행동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추적해가는 일은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어차피 홀로 남겨질 삶이라면, 누구와 이별하는 아픔도 없이 혼자 살다가 조용히 떠나자, 인연이란 어떤 의미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일 수도 있다” 라이언은 대략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은 어떤 면에선 타당해보인다.
그의 확고해보이는 생각과는 다르게, 라이언은 인간은 결국 혼자 남겨지게 되고, 때문에 홀로 떠나는 일이 자신에게 훨씬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고독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작중 초반에 오랜만에 만난 이웃과 저녁 약속을 제안하는 부분이나, 알렉스와의 첫 만남에서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 거추장스러운 후배라고 생각했던 나탈리를 떨쳐내지 못하고 신경쓰는 부분들, 그리고 결국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오는 모습, 결정적으로 업무적인 관계에 불과한 수많은 해고자들에게 신경쓰는 부분들로 보아 감정과 공감능력이 풍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선택을 하는데, 아마도 그건 그가 여지껏 숱하게 겪어온 이별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수많은 고용자들을 만나서 해고 사실을 수없이 통보해야 하는 직업적 특성과 어느 한 곳에 오래 정착할 수 없는 여건 탓이리라고 예상된다.
어차피 홀로 남겨질 운명이라면.
넓다면 넓고 작다면 작고,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또 짧은 이 세상속에서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와 만나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내며 언젠가는 이별한다. 만남은 정해져있지 않지만, 이별은 분명하게 정해져있다. 그리고 만남은 행복하고 이별의 때에는 언제나 슬프고 아픔을 동반한다. 그러니, 애초에 누군가와 만나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이별로 인한 아픔과 슬픔을 겪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또한 어차피 헤어질 상대와의 만남이라면 나 자신에게 더욱 많은 시간을 쏟고 나의 삶에 충실한 편이 낫지 않을까. <인 디 에어>의 라이언은 바로 그런 입장에 서있다. 그는 공항수색대에서 보내는 시간들을 환산하여 최대한 경제적으로 시간을 쓰는 한편, 마일리지를 꾸준히 적립하고 아껴서 항공사로부터 최고 등급의 회원이 되고자 한다. 그의 시간속에는 그 어디에도 타인이 끼어들 틈이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으로 가득하다.
그런 라이언의 앞에 나타난 두 사람으로 인해서, 라이언은 변하게 된다. 먼저 알렉스와의 만남을 통해서 라이언은 외로움과 고독감을 채워간다. 단순히 외로움과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만남을 유지하려 했으나, 라이언은 알렉스에게 빠져들고, 알렉스 역시 라이언에게 빠져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라이언 자신은 본인은 이제껏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알렉스를 만나기 이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라이언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가면서 그와 함께하는 여생을 그려본다. 처음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그토록 부정적이었던 라이언이었지만, 이제 라이언은 알렉스를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그의 집을 찾아갈 정도로 마음을 열었다.
라이언이 알렉스와 관계가 깊어진 것은 서로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빠져들어간 것도 있으나, 무엇보다 나타샤의 영향이 컸다. 당돌한 신입사원 나타샤는 유능하고 똑똑한 직원이지만, 아직 실무경험이 부족한 라이언의 후배 직원이다. 영화 <인 디 에어>속 라이언은 자신의 오랜 실무 경험을 토대로 신입사원인 나타샤를 교육하고 이끌며, 수많은 일상속 문제들속에서도 나타샤를 이끌지만, 반대로 사랑의 문제 앞에서는 나타샤에게 배워야하는 입장이었다. 나타샤는 알렉스에 대한 마음을 라이언에게 묻고, 라이언은 그저 가벼운 사이라고 대답한다. 나타샤는 가벼운 사이라는 말에 분노하며 라이언에게 왜 상대방을 격하시키냐고 따져 묻는다. 이 순간이 라이언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타샤가 이때 강조한 진심(real)은 후에 라이언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고, 알렉스를 진심으로 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알렉스의 진심(real)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코 혼자만은 아니다.
라이언은 그런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를 속박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반감과 가족마저도 등지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서로의 진심과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데에 인간관계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있다. 결국 인간관계도 자신이 가진 시간과 기회비용으로 일종의 투자를 하는 셈인데, 깊이있게 투자하기 전까지는 상대방의 정확한 진심을 알 수 없고, 때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없을 때도 많다. 인간관계란 우선 비용을 지불하고 그 가치를 알아가는 투자방식인데, 주식 투자를 이렇게 한다면 분명 주변에선 미쳤냐고 물어볼 것이다. 라이언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렉스에게 자신의 진심과 기회비용을 투자했음에도 알렉스의 진실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지 않았나. 때문에, “어차피 홀로 남겨질 삶이라면, 누구와 이별하는 아픔도 없이 혼자 살다가 조용히 떠나자, 인연이란 어떤 의미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일 수도 있다”는 나름대로 라이언을 표현한 문장이 일견 타당해보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선 그의 말은 옳지 않다. 인간은 홀로 남겨지게 된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평생을 혼자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인간은 어느순간 홀로 남겨지기 때문에, 함께라는 이유로 행복했던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후에 찾아올 긴 고독의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사회적 동물로 태생적으로 고독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수많은 인간관계의 바깥에서 고립되어 평생을 살아가는 것은 절대다수의 인간들에겐 힘든 일이다. 영화 <인디에어>는 라이언의 입을 통해서 인간은 결국 혼자라고 말하는 한편으로 이 영화는 라이언, 알렉스, 나타샤 모두가 결국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연애를 하고(나타샤), 잠깐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목적없이 만나고(라이언), 불륜 생활을 이어가며(알렉스), 저마다의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긴 고독의 시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특히나 라이언은 자기 입으로 인간은 결국 홀로 죽게된다고, 낯선 비행기와 기내식이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깊은 고독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역설적으로 라이언은 고독을 자처하고 있는 한편으로 영화 전반에서 자신이 자처한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라이언은 해고 사실을 전달하는 베테랑 해고 담당자로 누구보다도 스스로의 감정을 잘 관리하고 있는 강인한 사람일 것 같고, 실제로 나름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강인한 사람이지만, 강인한 그 역시도 고독앞에서 수없이 무너져내리고 갈팡질팡한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영화속에서 해고된 직원들의 마지막 인터뷰 장면을 빌려서 대답하자면, 인간은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죽는다는 라이언의 가정이 옳다고 치자. 하지만, 그 짧은 마지막 순간에만 사람은 홀로 남겨지며, 우리는 삶속 대다수의 시간들을 서로 교류를 맺으며 살아간다. 물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언제나 슬프고, 오랜 여운을 남긴다.
이별과 죽음을 앞둔 순간은 분명 길고 슬프다. 하지만, 우리 삶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이별의 순간과 죽음을 앞둔 순간은 얼마나 짧은 찰나와 같은 순간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그 짧은 순간을 피하고자 삶 전체를 고독하고 칙칙하게만 살아가겠다는 계산은 누가보아도 손해다. 애초에 수지가 맞질 않는다. 또한, 이별의 순간과 죽음을 앞둔 짧은 순간, 아주 힘겨운 시기를 지나가는 순간에, 힘이 되어주는 것은 사회적 고립이 아니다. 누군가가 뻗어준 손을 잡아야만 일어날 수 있는 순간도 있고, 몸은 노쇠해져 초라하게 홀로 남겨지는 순간에, 그대로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만하게 보낸 어느 한 시절의 기억들 덕분일 것이다.
나만의 별을 찾아서
영화속 라이언은 그 의미를 아주 뒤늦게서야 깨닫는다. 실무 경력은 라이언에 비할바가 못되지만, 누군가와 열렬하게 사랑해보고, 미친듯이 울어보기도 한 나타샤는 라이언보다 먼저 그 의미를 깨닫고, 라이언에게 진실된 마음과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 똑똑하고 젊은 여성인 나타샤는 첫 직장생활도 실패했고, 첫사랑도 실패했지만, 왠지 그녀는 그 실패를 딛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갈 것만 같다. 라이언은 여전히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밟고, 기약없는 비행편에 올라탄다. 그의 목적지는 정해져있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의 마음이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가족과도 연을 끊고, 직장 동료들과의 연결도 최소한으로 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는 일은 더더욱 싫었던 그였지만, 그는 이제 결혼한 동생 부부를 위해 자신의 항공사 마일리지를 양도하고, 나탈리를 위해 추천서를 써주고, 알렉스를 향한 마음으로 그녀의 집앞까지 찾아간다.
그가 탄 비행기는 미국 전역을 떠돌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언제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의 마음만은 아무런 정처없이 떠돌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가족에게로 되돌아오고, 사랑에 실패도 해보고, 한참 어린 후배에게 철 좀 들라고 한 소리도 들어본 라이언은 이제 이전과는 다르다. 라이언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누나와 동생의 가정도 그의 마음이 머무를 목적지일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헤매고 다닐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제 그의 여행은 정처없는 비행에 그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별을 찾아 헤메는 비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날아 오르기를, Up in the air
영화 <인디에어>는 21세기에 들어서 경제적으로 가장 곤란한 시기에 직면한 미국 내부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어려움을 견딜수 있는 힘이란 가족이나 친구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하는 영화로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수많은 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머지 않은 곳에 있고, 언젠가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있다. 해고 통보를 아웃소싱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해고 절차마저도 비용의 문제로 간소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비정함도 엿보이는데, 이렇듯 엿보이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이 주제의식을 더 강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회가 그렇게나 비정하기 때문에 비정한 사회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마음이 머무를 곳이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만들어지고, 개봉해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날아오르기를 권유하고 있는 영화 <인디에어>였다.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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