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비됴2025-05-15 00:18:36
시대의 불안을 넘어선 찬란한 10대의 시간
<해피엔드> 리뷰
관객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그 진원지는 다름 아닌 <해피엔드>. 지진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은 물론, 저항심 가득한 10대의 마지막을 다루는 영화는 계속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청춘을 대변하는 반항과 자유의 에너지가 이곳저곳에서 뿜어지고, 이를 더 극대화하려는 듯 사회의 억업과 차별, 인권 침해 등의 강도를 세게 가져가는 이 작품은 마음을 흔드는 것도 모자라 테크노 사운드가 이끄는 비트로 계속해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리고 향수 어린 씁쓸함, 그럼에도 피어나는 희망이란 여진을 잊지 않고 전하며 끝내 벅차오름을 전한다.
근미래지만 현재처럼 보이는 도쿄. 공부보다 음악이 좋은 유타(쿠니하라 하야토)와 불알친구 코우(히다카 유키토), 그리고 음악 동아리 친구들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학교에 잠입한 이들은 일생일대의 장난을 친다. 교장이 애지중지하는 노란색 스포츠카를 세워 놓은 것. 이후 학교는 발칵 뒤집어지고, 범인을 잡고 싶어 안달 난 교장은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다. 학생 인권이 무시된 이 일 이후, 유타와 친구들은 점점 그들이 원했던 자유와 멀어진다. 이 상황에서 재일한국인 4세인 코우는 비로소 불합리한 세상에 눈을 뜨고, 절친했던 유타와의 관계는 멀어진다.
| 붉은빛의 실체는?
<해피엔드>의 중요 키워드는 균열이다. 극 중 지진으로 인해 땅이 갈라지고, 관계가 갈라지는데, 중요한 건 이 균열이 잉태하는 것이다. 바로 불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과 그동안 맺어왔던 관계가 끊어진다는 그 불안은 시나브로 영혼을 잠식해 버린다. 영화는 이 과정은 물론, 이후 두 주인공이 개인과 사회의 불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이에 대한 힌트를 첫 장면에 배치한다.
영화의 시작은 붉은빛들의 일렁거림이다.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관객은 서서히 그 불빛의 근원지를 알게 된다. 바로 건물 옥상에 설치된 점멸등이다. 야간이나 안내, 비, 눈이 많이 오는 경우 비행 물체가 건물을 인지하도록 표시하는 빛인데, 이 장면에서는 위험 신호로 보인다.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불안 요소들이 즐비한 일본 사회가 더 큰 문제로 빠질 수 있다는 경고등인 셈. 억압과 혐오 등으로 점철된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리는 영화는 이를 방증한다.
또 하나는 두 10대 소년의 시선과 이들의 미래다. 아름다운 불빛이 건물의 점멸등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은 다양한 사건을 겪으며 더 넓어진 주인공들의 시선처럼 보인다. 그동안 아름답게만 보였던 세상(붉은빛)의 진실(건물의 점멸등)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20대가 되기 전인 10대의 마지막 시기에 두 소년의 변화하는 시선을 상징하는 듯한 이 장면은 영화가 끝난 후 재차 곱씹게 된다.
| 흔들린다! 땅도, 사회도, 관계도
극 중 지진을 통한 균열은 땅은 물론, 사회와 관계를 뒤흔든다. 감독은 이 균열의 틈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것들을 주목한다. 학교 내 지진이 발생한 이후 교장의 자동차가 크게 망가지는데, 이를 빌미로 교장은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한다. 도에 지나친 장난일 수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게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벌점을 부여하는 시스템인 것은 너무 과한 처사다. 교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들의 보금자리였던 음악 동아리방을 빼앗고, 일본인만 참여할 수 있는 자위대 관련 설명회를 열며 다른 나라 출신 학생들을 보란 듯이 차별한다.
영화는 학교라는 주요 공간을 일본 사회로 연결시켜,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불안을 미끼로 전체주의적 사고를 넓혀 이를 권력화하는 교장과 그를 추종하는 선생들의 모습은 마치 일본 내 우익 세력처럼 느껴진다.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행동의 당위성을 찾는 이들은 나라를 위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과거 군국주의 일본 수뇌부들과 오버랩된다. 감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TV를 통해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총리의 모습, 이를 통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데모 현장을 그리며, 혼란스러운 일본 사회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환경 속에서 10대 끝자락에 놓인 주인공들의 관계는 흔들린다. 특히 코우와 유타는 서로 대척점에 서는데, 같은 나이, 같은 교복,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이지만, 그동안 이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진실(국적 등)들이 올라오면서 서로 각자의 길을 가는 위치에 놓인다. 다른 동아리 친구들도 각자의 길을 떠날 계획을 앞둔 상황. 이 사실이 가진 불안감에도 10대의 마지막까지 친구로 지내며 서로 웃고, 울며, 모든 에너지를 발산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리고 불안함 속에서도 진실을 향해 손을 뻗고 행동하며 성장하는 이들의 변화는 그 자체로 긍정성을 전한다.
후반부 이 변화의 힘으로 교장과 충돌하고 불합리함을 바로잡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누구나 관통했던 시기였지만,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을 사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아련함도 느껴지는데, 엔딩에서 유토와 코우가 헤어지는 뒷모습을 정지 화면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엔딩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 네오 소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해피엔드>의 원래 제목은 ‘지진’이었다. 너무 직접적인 제목이라 <해피엔드>로 바꿨다는 감독은 극중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보여주는 ‘엔드’와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우정을 쌓는 이들의 감정인 ‘해피’를 접목했다고. 이 이질적인 두 단어가 착붙하며 멋진 엔딩까지 보여주는 영화의 힘은 차세대 일본 감독인 네오 소라에게 기인한다.
姑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인 네오 소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콘서트 필름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로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는 등 한창 주목 받는 감독이다. 일본보다 해외에서 더 오래 살며 제3자로서 본국을 바라보는 그의 객관적 시선은 영화를 지탱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더불어 자신의 경험은 물론, 일본 내 벌어지는 사회 문제를 극영화로 잘 담은 연출력은 첫 장편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 등 일본 영화 산업에서 긍정적(?) 균열을 일으키는 장본인답다.
연출과 더불어 영화의 매력에 영향을 주는 건 음악이다. 지진의 진동처럼 인물들의 마음속 비트를 일깨우는 테크노 사운드는 물론, 클래식 영화 작곡부터 테크노, 엠비언트 뮤직 등 다방면의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음악을 선보이는 리아 우양 루슬리의 음악도 한몫한다. 그는 '젊음에 대한 향수'와 '언젠가는 세상의 억압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느린 깨달음'을 OST의 주요 테마로 잡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맞춰 유토와 코우의 만남처럼 피아노 멜로디와 신시사이저 사운드의 절묘한 만남으로 탄생한 곡들은 영화의 매력을 살린다. 특히 오프닝, 클로징 테마는 무조건 강추다.
영화의 제목처럼 유토와 코우의 작별은 ‘해피엔드’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작별 이후 이들은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시절을 관통한 각자에게 물어보면 다 알 것이다. 당시에는 죽고 못 살았던 친구들이 지금은 그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건 본인뿐만은 아닐 터. 하지만 그 순간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균열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연히 과거의 친구를 만난다면 겨드랑이를 꼬집으며 말하고 싶다. 이게 우리의 해피엔드라고. 그리고 고맙다고.
사진제공: 영화사 진진
평점: 4.0 / 5.0
한줄평: 시대의 불안을 넘어서는 찬란한 10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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