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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인2025-06-05 23:17:34

<케빈에 대하여>에 없고 <침범>에는 있는 것

<침범>(2024, 김여정/이정찬)

 

 

* <침범>과 <케빈에 대하여>(2011)의 장면과 결말 묘사 포함

 

 

 

 

 

<케빈에 대하여>, 케빈이 아빠와 동생, 동급생들을 살해하고 청소년 교도소에 간지 2년이 되던 날, 그의 엄마 에바는 면회 자리에서 묻는다. “왜 그랬어?(Why?)” 케빈은 답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I used to think I knew, now I’m not so sure.)” 영화가 조명하는 그의 마지막은 에바의 포옹을 받는, 떨리는 뒷모습이다. ‘내 탓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서 해방된 에바가 빛이 쏟아지는 열린 문을 마주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그런데… 케빈은 왜 그랬을까. 작품이 ‘당연한, 타고난 모성’을 의심하는 것과는 별개로, ‘에바가 사랑을 주지 않아서’라는 단언은 부적절하고 부당하다. ‘원래 그렇다’는 설명은 어딘가 충분치 않다. 모든 기행은 ‘에바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 케빈이 비틀린 근친 이성애를 품고 성장하기를 거부한 탓이었을까? 허나 적의는 분명하지만 그 동기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케빈의 낯에 떠오른 혼란처럼 모호하다. <케빈에 대하여>에는 케빈의 언행을 관찰하거나 그가 의도적으로 전시하는 감정을 클로즈업하는 숏은 있어도, 그의 본성을 은유하는 숏은 없다. ‘악행의 원인’은 물음표로 남는다. 에바의 입장에서 이해를 시도하되, ‘안다’고 확언하는 오만은 보이지 않는다. 원제 “We need to talk about Kevin.(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해.)”은 에바가 남편에게 아마도 수 차례 했을 요청이자, 영화가 관객에게 건네는 제안으로 다가온다.

 

 

 

<케빈에 대하여>가 에바의 시선으로 케빈을 관찰하듯, <침범>의 전반부는 영은의 시선으로 소현을 관찰하며 관객이 영은과 호흡을 맞추도록 유도한다. 전개상 가장 먼저 등장하는 소현의 기행은 반려견 살해다. 영화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친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영은이 수영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는 모습, 아파트 앞에서 사람들 몇에게 둘러싸인 소현을 발견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영은의 허벅지에 흉터가 생긴 정황을 알려주는 과거 장면을 살펴보면, 잠에서 깬 영은이 문에 기대 기묘하게 웃으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소현을 목격한 후, 이내 허벅지의 상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는 순서로 전개된다. 이처럼 소현의 행위와 관찰자/화자인 영은의 인식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자리하고, 이 점은 효과적인 서스펜스를 구성한다. 소현은 끊임없이 통제를 벗어남으로써 영은의 일상을 침범한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 흉으로 남아 있듯, 그 영향력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까지 뻗는다.

 

 

 

<침범>은 영은에게 찍힌 낙인의 압박 또한 담아낸다. 미술관에서 영은과 그의 전남편이 소현에 관해 대화하다 언성을 높이는 씬, 영상 전시물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몸에는 스크린 이미지가 문신과도 같이 드리워져 있다. 장면의 끝에 전남편은 전화를 받겠다며 빠져나가고 영은은 그대로 남겨진다. ‘병원에 입원시키자’는 전남편의 제안은 영은에게는 아마 다른 무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공식적으로는 흩어졌으나 사회와 개개인에게 촘촘히 스며들어 있는 오래된 관습의 영향이다. 소현의 예외적이고 특수한 사고/행동 방식만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는 ‘일반적’ 관습과 시선 역시 영은의 삶에 침범한다. 영은이 엄마의 권유로 나간 교회에서 마주친 ‘소라 엄마’는, ‘소현이 때문에 소라는 아직 정신과를 다닌다’며 분노한다.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라는 지혜 엄마의 말이 상징적으로 나타내듯, 그 분노들은 자주 (‘미성숙하다’고 여겨지는) 소현이 아닌 영은을 향한다. 아빠들이 상냥하게 타이르거나 양해를 구하는 동안, 분노하거나 사죄하는 것은 엄마들의 몫이 된다. 이를 영화는 선명하게 짚어내기보단 은근히 암시한다.

 

 

 

그렇기에, ‘차라리 나만 해하면 좋겠다’던- 영은이 받는 극한의 스트레스가 결국 고립된 (엄마)자신에게로 수렴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다. 영은이 소현 담당 정신과 의사의 당부를 듣는 장면, 의사의 대사가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발화자가 아닌 영은의 얼굴만을 촬영한다. 의사는 ‘엄마가 지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영은은 키우던 강아지를 산에 묻은 날부터 이미 지쳐 보였다. “엄마가 왜 울까.”는 물음보단 새어나온 한탄으로 들렸다. 지친 영은의 방법은 설득과 사과에서 물리적 차단으로 기운다. ‘소현이 괴롭힌다’는 지혜의 고백을 듣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영은의 얼굴이, 지혜의 몸에 가려 극히 일부만 보이는 숏이 있다. ‘지친 상태’는 그의 균형을 흐트러트리고 시야를 좁힌다. 소현의 행위와 그로 인한 파장을 차단하려는 영은의 시도는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터, 이번엔 그의 시야 내에서 무력하게 실패한다.

 

 

 

소현을 포기하며 스스로를 포기한 영은이 수영장에 가라앉으며 하나의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영화는 20년 후로 점프해 ‘민’을 따라간다. 전반부가 영은의 관점으로 진행되며 소현을 침입자로 다루었다면, 후반부는 민의 관점으로 진행되며 해영을 침입자로 다룬다. 영화는 민이 ‘소현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면회하는 ‘엄마’의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가려 볼 수 없게 하고, 습관적 절도와 날카로운 태도를 강조한다. 허나 캐릭터성의 차이는 금방 드러난다. 어린 소현은 민과 같이 일관성 있게 방어적이기보단, 해영과 같이 사회적 연기를 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피곤 했다. 해영이 소현이라는 반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영화도 딱히 숨겨놓지 않았다.

 

 

 

헌데 이 반전이 공개되는, 그리고  이후 영화가 소현을 다루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침범> /후반부에는  차례씩 CCTV 화면이 삽입된다.   번째 특성은 객관적 증거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거기 찍힌 소현을 관리자가 목격하고 집단에서 내보내겠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  번째 특성은, 촬영된 소현이 뭉개져 실루엣에 가깝게 보인다는 점이다. 소현이 유치원을 옮기는 계기로 작용하는 전반부 CCTV 씬은, 소현이  속의 상처럼 영은에게 흐릿하고 낯선 존재라는 은유로 읽히기도 한다. 이때 소현은 영은과 관객에게서  멀어진다. 후반부의 CCTV 화면도 전반부와 유사하게 팀장의 판단 근거로 쓰인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해영이 찍힌 영상을 보는 자는 다름아닌 해영 본인이다. 이즈음부터 연출 선택들은 대체로 해영-소현을 선명하게 밝히는’, 관객에게로 가까이 가져다주는 방향을 바라본다. 팀장과 해영의 대면은 민과 소현 할머니의 대면과 교차편집된다. ‘해영이 소현임을 민이 알게 되며 소현이 팀장을 해한 상황이 공개된다. 소현은 스스로 무엇인지 강조하듯, 피범벅이  팀장의 몸을 과격하게 발로 찬다. ‘해영이 소현임이 밝혀지며, 소현의 (본질적인) 정체가 밝혀지는 듯한 연출이 아닌가. 그는 이제 CCTV  실루엣처럼 흐리고 낯설어 두려운 형상도, 자꾸만 거리를 벌리고 예상을 벗어나므로 매번 새로 파악해야 하는 캐릭터도 아니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를수록 무르익어야 할 서스펜스는, 민과 영화가 해영-소현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단정을 내보이면서 설익은 채 사그라든다. 전반부가 훌륭하게 쌓은 물음표의 집은 무너진다. 이제 소현의 폭력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전시되며, (그 정도가 아니라 패턴의 측면에서)예측 가능하다. 기대를 뛰어넘는 것은 오로지 이설의 어마어마한 퍼포먼스 뿐이다. 표면적으로 유사한 성장 배경을 지닌 민을 후반부 화자로 택한 까닭은 일단, 그를 소현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민이 소현과 몸싸움을 하는 와중 자신이 ‘해석한’ 소현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그와 소현을 철저히 분리/비교하기 위해서’라는 또다른 까닭이 드러난다.

 

 

 

결국 <침범>은 ‘소현이 왜 그랬는지 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정확히는, ‘그럴듯한/인간적인 이유 따위는 없으며 그는 원래 그런 자’라고 못박는다. 거기엔 인물의 ‘본질’에 대한 평가, 악행의 악마화가 수반된다.(준섭이 지닌 ‘비교적 평범한’ 폭력성이 그가 소현의 피해자가 되며 묻히는 것은 덤이다.) 시냇가에 있는 소현을 조명하는 엔딩은 어린 소현의 뒷모습을 보여주던 오프닝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씬이다. 영화는 여기서 영은의 환영을 등장시킨다. 포옹과 ‘왜’의 답까지, <케빈에 대하여>의 엔딩이 겹치지만 전하는 바는 완전히 다르다. 영은과의 대화는 사실상 소현의 독백이다. ‘고통이 좋다’는 고백은 소현과 민이 대립하는 장면의 지난한 대사들처럼, 인물의 언어보다는 작가의 언어로 들린다. 이해의 시도보다는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제스처, 심층적 탐구보다는 표면적 규정이다. 영화는 물에 비친 소현의 상을 어린아이로 그리며, 그의 내면이 일곱 살 때와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다. ‘성장하지 못했다’보다는 ‘완성된 악으로 태어났다’는 관점으로 읽힌다. 소현은 관객에게 공포와 고민을 동시에 선사하는 복잡한 악인에서, 자체적으로 결론과 해석을 지닌 ‘악마’로 변한다. 마지막 숏은 엄마의 환영을 돌로 찍어 ‘죽인’ 소현의 정면 클로즈업, 그 낯은 거의 결연하다. ‘나는 앞으로도 타인의 고통을 즐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도 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침범>은 소현을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정해 놓은 채로, 그 (일종의, 이를 테면)‘순수악’이 주변을 잠식하는 과정을 그려내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관점은 ‘교회에 데려가자’에서 ‘걔는 사람이 아니야’로 옮겨가는 소현 할머니의 것과 비슷하다. 제가 낸 불을 후광으로 두르고 무감정하게 서 있는-‘머물렀던 곳을 깡그리 불태우는 존재’-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전하는 소현의 이미지와 가장 가깝지 않은가. <케빈에 대하여>는 케빈의 정체를 모르고, <침범>은 소현의 정체를 안(다고 말한)다. 영화가 알려주므로, 관객은 사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

 

부정적인 내용으로 글이 모였으나, “20년 후” 이전 파트는 매우 좋았다. 곽선영 배우의 서서히 가라앉는 연기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아쉬웠음에도 이설 배우의 연기만큼은 다시 관람하고 싶다.

 

 

 

 

 

 

작성자 . 않인

출처 . https://brunch.co.kr/@yonnu2015/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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