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6-15 19:51:54
6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2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7월에 제작 시작
📮 6월 2주차 2번째 씨네뉴스가 도착했습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7월에 제작 시작!
한 인터뷰에서 에밀리 블런트가 드디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에
관한 소식을 조심스럽게 밝혔는데요!
올해 7월부터 제작에 돌입한다고 합니다!
2026년 5월에 개봉 예정이니
20년만의 귀환인데요…
개인적으로도 너무너무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
🗞️
❶ 에밀리 블런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에 관해 이야기했다
❷ 호아킨 피닉스 주연, 아리 애스터의 ‘Eddington’ 예고편 공개
❸ 유현목 감독 탄생 100주년 기념 기획전, 영상자료원에서 개최
❹ 레나테 레인스베, A24 신작 공포 영화 ’The Backrooms‘ 합류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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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에 당위성을 부여하지 못하면 스토리는 무너진다
📽️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 (2025)
감독: 백승환
출연: 신승호, 한지은, 박명훈, 전소민 외
세상에는 두 가지의 영화가 있다. 무언가를 전하기 위한 영화와 이야기를 내뱉기 위해 도구로 선택받은 영화.
이 영화는 철저하게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도구로 선택되었다. 감독의 일기장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감독의 공상과 꿈일기처럼 꿈 속 무개연성을 그대로 옮겨적은 듯한 모양새였다.
<온리 갓 노우즈 에브리띵>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신과 관련된 영화이고, 이러한 류의 영화는 대부분 사이비와 연관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이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테리 영화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고 사이비 미스터리 영화들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영화라는 감상을 받았다.
희안한 건, 스토리적 서사가 특출나서 결이 다르다고 느낀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스토리적 공백이 너무 두드러져서 결이 다르다고 느꼈단 것이다.
이 영화의 문제점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주인공부터 이율배반적 서사를 가진다는 것이다.
신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는 고해성사를 듣고 사이비를 쫓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비밀을 엄수할지 말 것인지를 두고 고뇌를 거치는 과정도 없이 손쉽게 직업적 윤리를 저버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직업적 윤리를 저버리는 신부라니, 그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닌가?
후반부 백수연과 그 남편이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장면에서도 정도운은 직업적 윤리를 저버린다. 아니, 윤리성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있다.
살인이 벌어지는 순간까지 손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가 진정으로 신학을 공부해온 신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정도운을 어떤 유형의 인간으로 구분해야 하는가. 그가 복수에 미쳐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에 맞는 서사가 드러났어야 하고, 그가 분노를 종교로써 다스릴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러한 상황에서 신에게 물음을 구했어야 옳다.
그러나 우리는 기타 인물들을 차치하고 정작 주인공인 정도운의 서사마저 알지 못하니 스토리 속 그의 선택에 의문만 남을 뿐이었다.
자식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목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전생교. 영화 스토리를 본다면 그런 사이비의 교리는 주인공의 복수심을 유발하는 메인키가 되어야 했는데, 사이비의 규모 자체가 숨어버리면서 주인공의 복수심 역시 행방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무언가 쫓아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쫓긴 하는데, 뚜렷한 목적성은 없다. 정도운은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의미 없이 존재하는 캐릭터들이 난무한다는 것도 이 영화의 큰 단점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정도운의 가장 큰 조력자가 되어야 할 형사가 극중에서 하는 일이라곤 1)신부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2)신부가 얻어낸 정보를 받아먹는 것 밖에 없어 황당했다. 공권력이 힘을 쓰지 못하는 세상에 형사의 존재가 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동안 사이비의 제사에 동참했던 무당마저도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며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는데, 무당이 억지로 사이비에게 휘둘려야만 했던 계기가 드러나지 않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주장에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감독이 일부러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들이 왜 더 지독하게 사이비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결말부 경찰의 입을 통해서 줄줄 읊어진다. 결국 관객은 감독이 던져주는 퍼즐 조각에 의존해, 이 사건이 왜 이렇게 흘러가게 되었는지 추측하느라 머리가 깨져야만 하는 것이다.
감독은 영화로 말해야하는 직업이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어 영화를 만들든, 영화로 하고 싶은 말을 하든 그건 감독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그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거라면 관객을 설득시킬 힘이 있는 영화를 가져와야 한다. 적선하듯 퍼즐 몇 개 던져주는 게 아니라.
*해당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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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완전한 기억이 마주한 그날의 진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2012) – 불완전한 기억과 ‘나’
줄이언 반스,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
★★★
“야, 이 닭 대가리야!”
신입사원 시절 회식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다 선배 K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얼마나 화가나고 분통했던지 씩씩거리며 따져 들었다.
“내가 왜 닭 대가리요?, 그럼 선배는? 붕어 대가리처럼 생겨 가지고는…”
(물론 끝엣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추가하는 말임을 알아주기 바란다.ㅋㅋ)
내 기억의 저장소에 등록된 ‘특별한’ 순간들
사실 내가 그때 화가 났던 것은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주 오래 전 일을 눈앞에서 보듯이 선명하게 읊조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경멸하듯 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볼 때가 많다.
그러나, 아주 아주 가끔은 나에게도…
갑자기 반짝이는 번개 빛이 순간적으로 특정 지역을 훤히 드러내듯,
활짝 되살아 난 나의 기억이
과거의 특별 했던 그 순간의 의미를 떠오르게 해 줄 때가 있다.
‘하하, 나도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이지!’
그때마다 나는 나의 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을 그 ‘특별한’ 기억의 조각들이
어느 순간 적절한 타이밍에 되뇌임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사라지지 않고,
잘 보관되어 왔다는 점에 뿌듯함을 느낀다.
그 수많은 기억들 속에서,
그 선택된 기억의 조각은 나에게 의미 있는 특별한 삶의 순간이었겠지!
내 기억의 파편들, 그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이런 ‘특별한’ 기억에 관한 책/영화이다.
이제 책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중요한 질문을 해보자.
①우리의 기억은 항상 올바른 것일까?
②우리의 기억은 올바른 것일까?
위 두가지 질문 중 어떤 것이 답하기 쉬운가?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대개 '항상'이라는 글자에 방점을 두고
'그렇지, 항상 올바르지는 않겠지, 한두번은 틀릴 수 있지 않겠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질문은 참으로 답하기 어렵다. 다시 두번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의 기억은 올바른 것일까?
더군다나 40년이나 지난 어떤 일에 대한 것이라면?
이제 60대 중반에 들어선 주인공 토니는
옛날 고등학교와 대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아 들고선,
과거의 잊어버렸던 기억을 소환하기 시작한다.
# 주인공 토니는 ‘평균치’ 삶을 살고 있는 카메라 수선공으로 나온다.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다시 마주한 옛 연인 '베로니카'.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기억은 고등학교 역사수업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선생님이 던졌던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두 주인공의 답변은,
‘기억의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이 책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33p, 토니)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34p, 에이드리언)
얼핏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의 엇갈린 답변은
이 소설의 결말을 예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책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이를 알게 된다.
그래서 다들 책을 두 번 다시 읽게 된다고 한다.)
구분하자면 토니는 역사(=기억)란 ‘의도적인 거짓말’일 가능성에,
에이드리언은 ‘부정확한 확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 에이드리언(좌) 과 토니(우)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이렇게 ‘특별한’ 기억의 핵심 사건은 주인공 토니의 대학시절,
자신과 결별했던 연인 베로니카가 그의 절친 4인방 중 하나인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아드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쉽게 말하자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 토니는 이미 헤어진 사이라며 쿨하게 둘 사이의 관계를 축복하는
엽서를 보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십일일자로 온 자네의 서신을 수령하면서,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명시하고자
상찬과 기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네, 벗이여.” (77p)
물론 그때 감정의 동요가 없진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감출 요량으로 엽서를 보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의 편지를 읽은 후에 내 본심을 감출 요량으로 보낸 엽서를 기억해 냈다.
모든 것이 다 좋아, 이 친구야 운운하며 평정을 가장했던 문장들을.
그것은 클리프턴 현수교 사진이 인쇄된 카드였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171p)
이 정도다.
여기까지 보면 토니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옛날 한 순간의 추억은
그리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기억을 다시 떠올려낸 순서는 뒤죽박죽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편집되었을지라도
크게 사실을 호도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토니는 지나온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볼 때,
누군가에게 크게 해악을 끼치지 않을 정도로
보통 사람들 수준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고 자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사랑에서 평균치, 섹스에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중략) 그러나 평균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평균치 인생. 평균치 진실. 평균치 윤리관.” (174p)
물론 그러한 평가 조차도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게 되고
고집불통이 되어 간다는 것을 인생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165p)
그렇기에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없다.
과거의 기억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우려했던대로
잊어 버렸던 아니, 애써 잊고 싶었던 기억에 대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 기억에서 사라졌던 장면들
그 당시 옛 연인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교제를 쿨하게 인정했었던 엽서에 대한 기억은
사실은 윤색되고 각색된 기억에 불과했던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뛰어넘어 사실을 보여준다.
아래 편지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왜곡이었던가?
“에이드리언에게, 아니,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베로니카, 개 같은 년. 잘 지냈나? 너도 이 편지를 읽도록) 내가 너희를 소개해 준 날을 저주하게 되길…
(중략) 각자의 인간관계에 독처럼 작용하는 고통이 평생 이어지길…
(중략) 너의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길 바라고 있어. 이유인즉 내가 시간이 대대손손 복수를 가한다는 걸 굳건히 믿는 인간이라 그래…
너도 이미 그 여자가 남자 잡아먹는 요물이라는 사실쯤은 알았겠지.
내가 너라면 ‘모친’에게 이런 사실들을 확인해 볼걸? 오래전에 그 여자가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중략) 에, 또, 허세 덩어리이기도 하니, 명심하라고… 그리고 기원컨대 너희의 관절과 성유를 바른 머리통에 산성비가 쏟아지기를 (토니)” (165p)
# 토니의 기억에 조차 남아 있지 않던 당시에 보낸 편지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내가 정말 이런 편지를 썼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두 사람에 대한 저주의 글을 보고 토니는 소스라치게 놀랄 뿐이다.
더군다나 40년이 지난 지금
그 편지가 불러일으켰던 후폭풍을 이제서야 마주하고서야
토니는 기억의 저편에 남아있는 진실과 그 결말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후회와 회한이 밀려온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럽다.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번도 없지 않았던가. 이 모든 일이 따져봐야 할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환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242p)
그 옛날 저주의 편지를 받아든 베로니카, 에이드리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다음 이야기는 '스포일러'에 해당하여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스틸컷
기억의 왜곡, 그것은 스스로의 존엄을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본능
이 책은 우리가 얼마나 기억에 대해 불완전한 존재인지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그 옛날의 기억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래 그림에서 A기억 저장소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은
A'라는 기억으로 대체된 지 오래지만
우리는 그 대체과정을 살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그 과정에는 나 자신의 존엄을 보호하고자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잠재된 윤리적 저항의식 보다는 강하게 작동하기에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의 작위적 기억의 편취에 대항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된 기억일수록 나 자신과 합의된 ‘합리화된’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림 – 기억이 왜곡되어져 가는 과정
저자는 이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를 통해
‘깊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억의 저편에 남아 있을 진실을 마주하자’는 식의
상투적인 교훈을 남기고자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인간은 기억에 한해서는
우리 모두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이던가?
자신만만해 하던 ‘내 기억’은 사실 짜집기된 나의 주장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그 기억의 왜곡도 심해진다.
혹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100% 순도의 기억을 남길 방법은 없다.
자기 생존 방어 본능에 따라 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은 왜곡되고 윤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억에 한한 우리 자신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 만큼이나
‘불완전한’ 과거를 확신하는 것에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어쩌면 20년전 K선배가 말했다고 하는 ‘닭 대가리’에 대한 나의 기억도
나 자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자기방어적 편집된 기억일 수도 있겠다.
아무도 모르는 그날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 책 표지
#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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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렵다는 것 잘 알지만 그래도
별안간에 <어벤저스 : 엔드게임>이 생각난다. 한창 마블 유행할 땐 안 보고 재개봉판이 열릴 때 봤다.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이라. 다른 덕후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극후반부에선 눈물 날 것 같은 울컥함이 있었다. 근데 그건 그때 이야기고.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영화에 말 안 되는 게 몇 개 있었다. 앤트맨이 그렇게 해서 시간여행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그 양자역학? 다중우주(멀티버스)? 에 대한 연구가 너무 쉽게 착착 이뤄지는 거 아닌가? 아무리 브루스 배너랑 토니 스타크가 똑똑하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들여야 할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쉽게 나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의 인구가 반으로 접힌 것 치고는 문제 해결이 싱거웠던 셈이다. 그리고 마블도 이 작품 이후에 걸핏하면 '블립'을 들고 오니 마블빠인 나는 진작에 개연성이 헐거운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애써하는 인정에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에 대한 내 생각이 담겨있다. 우리, 살면서 시간을 몇 번이나 돌릴 수 있을까? 답은 불가능이다. 시간은 무슨 짓을 해도 돌릴 수 없다. 애써 과거의 나에게서 교훈을 얻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아로새길수록 공허함만 커진다. 내가 한국영화를 사랑하게 됐던 계기도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대사가 울림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나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좋아했던 분들은 다들 공감할 것 같다. 각자가 놓쳤던 너무 많은 것들이 마음이 아프거든. 이젠 그것들을 반성할 줄도 안다고 말하고 싶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계속해서 똑같은 일만 반복한다. 삶의 매 순간에 그것보다 나은 선택지만 고르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 여행하는 영화들을 알면서도 보게 되는 것 같다. 이 모든 게 저 여행처럼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때문이다. <프리 가이>를 연출했던 숀 레비 감독이 바로 다음 해에 신작을 갖고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깊다. 소재는 시간 여행이다.
미래에서 온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다
12살 소년 애덤은 별 볼일 없는 남자애다. 친구도 없어 보이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매일 같은 반 급우들을 두들겨 패거나 맞는 게 일상인 애덤. 여느 때와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던 도중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어딘가 부상을 입은 듯한 아저씨에게 말을 거는 애덤. 몇 마디 나눠보고 나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이 아저씨는 2050년의 나 자신이다.금세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저 여자랑 자게 되나요? 미래에는 이렇게 몸짱이 되나요? 누가 과거의 나 아니랄까 봐 쓸데없는 말이 많다. 어른 애덤은 금세 과거로 돌아온 이유를 말하게 된다. 시간 여행이란 게 생겼고 이것 때문에 현재의 많은 것들이 꼬여있다고 한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과거의 애덤과 현재의 애덤이 힘을 합쳐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성인 애덤과 어린이 애덤이 각자(애덤)의 삶에 중요한 변곡점으로 가는 내용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몇 개 있을 것이다. 모두의 마음 속에 있을 법한 감정들이다. 영화 안에서도 이에 대해 묘사가 있다. 당하기만 했던 나 자신에게 보내는 격려. 사랑하는 이에게 전해지 못했던 마음. 더 받고 싶었지만 허무하게 날 떠났던 사람. 뭐 그런 미련들이 영화 안에 제시된다.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주가 된다. 영화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동시에 등장시킨다. 이런 감정을 떠나보내지 못했기에 후회와 자기혐오로 가득 찼던 지난 세월에 대해 주인공이 코멘트하게 만든다. 이 코멘트 역시 영화의 주요 소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전개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던 것들이 맞다. 기존의 시간 역행영화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냐고 물으면 솔직한 대답은 아니오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이런 소재들이 숀 레비 특유의 유쾌한 감성과 잘 맞는 편이라 특별한 개성이 있다.
어떤 영화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후회와 자기혐오에 관한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자기혐오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간단히 자아를 싫어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자기혐오는 미련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 못한 말이 그 사람에게 돌아와서 미련으로 남으면 그게 자기혐오로 변하는 것이다. 청년 애덤은 사람들에게 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어머니에게 하고픈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청년 애덤이 소년 애덤에게 어머니에게 꼭 무언가 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영화 전부를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인물을 배치한 이유는 사실 되게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이에 이입하라고 만들어놓은 장치이다. 근데 이런 감정이입의 결말이 어떤 식으로 향하는가도 영화를 관통하는 주요 메시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 다 좋다 이거야.시간여행을 해서 과거의 나의 멍청함을 무찌를 수 있다고 쳐보자. 그래서,'과연 어떤 선택지를 골랐으면 무언가 달랐을까?'라고 자신에게 물을 수 있다.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 간의 처지를 통해 우리는 그 질문의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뭐 이런 귀결이 기존의 영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하면 사실 크게 할 말은 없다. 어느 정도는 클리셰를 따라간 게 맞으니까. 그런데 주인공 청년 애덤을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가 밝고 유쾌하지만 마음에 그늘이 진 인물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서 영화를 보는데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다른 장르물과 특별한 차이점을 갖는 영화
첫 번째. 영화 색감이다.전작 <프리 가이>에서는 게임을 영화로 옮겼었다. 그에 맞게 화사하고 비비드 한 색감이 기억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살짝 다르다. 소재의 특성상 좀 생각이 많아 보여야 하는 효과가 꼭 들어가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에 맞게 겨울에 찍은 듯한 시각적/시간적 배경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미장센이 잘 뽑혔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주인공 라이언 레이놀즈의 퍼포먼스다.이 인물 애덤은 내면에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고, 유년시절이 그렇게 밝지도 못했다. 근데 사람 자체가 근본적으로 밝은 구석도 있어서 유머감각도 탑재해야 한다. 이거 어렵다. 뭐 보편적으로 있는 인간형인 것도 맞지만 이 인물은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에 이걸 다 보여줘야 한다. 그에 맞는 눈빛 연기, 대사 치는 톤, 제스처 하나하나까지 사람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난 <데드풀> 시리즈도 안 본 사람이라 이 배우의 연기가 낯설었는데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다. 아. 액션 연기도 좋았다.
세 번째. 균형감각이다.각본이 균형을 잘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가령 소년 애덤의 어머니와 청년 애덤이 술집에서 대화하는 신이 있다. 여기서 감독은 아이가 괴롭힘 당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남편이 세상을 떠났던 이유에 대해서도 깊게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은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했다'식의 말을 던지고 홀연히 사라진다. 뭐 시간여행이라고 하는 것의 암묵적 룰을 지키기 위해 이랬다고 하기엔 역시 감독의 연출 의도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2번에서 언급한 것과 닿아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과거의 부채의식에 '그게 무엇이든 괜찮아'라고 위로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사실보다 그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청년 애덤이 그 대사를 한 것이겠지. 그리고 그게 곧 감독의 연출 의도일 것이고. 영화는 이렇게 드라마틱한 처지 변화보다 적당히 선을 긋는 스탠스를 보인다.
극의 개성을 살리는 좋은 퍼포먼스
배우들의 연기는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정도다. 주인공 라이언 레이놀즈의 연기는 3번에서 적었기에 더 쓸 필요 없을 것 같다. 다른 역의 조 샐다나나 마크 러팔로도 탁월했다. 조 샐다나는 뭔가 레이놀즈보다 나이 더 들어 보이는 비주얼인데 은근히 어울려서 놀랐다. 또 마크 러팔로는 멀티버스 유경험자다운 연기가 보였다. 지금 저 역할이 브루스 배너라고 해도 이질감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봤던 느낌이긴 해도 실제 있을법한 아버지이자 과학자 느낌이 나서 좋았다. 다음은 소년 애덤을 맡은 워커 스코벨이다. 이거 데뷔작이라고 하던데, 어색한 티가 안 났다면 거짓말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대사 많았는데 외우느라 어려웠을 듯.
적당히 얕은 영화의 농도
감독의 전작 <프리 가이>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사실 가벼운 영화다. 그러라고 만든 영화기도 하고.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가볍지는 않다. 적당한 농도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쉬운 것도 있다. CG 액션 연출을 좀 더 멋있게 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너무 뿅뿅하는 시각효과에 엔딩부도 슬로모션이라던가 예전 티 나는 연출을 쓴 게 아쉽기는 하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대사의 톤이나 청년 애덤의 행적이라던가 중후반부까지 끌고 가는 메시지가 생각을 많이 하게 해서 너무 밝고 유치한 느낌은 아니다. 20대 중반의 남성이 보기에 무리 없었다.
누가 이 영화를 봐야 할까?
무난한 액션/SF물이다. 넷플릭스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떠나보내지 못했던 마음의 부채의식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난 이 영화를 보고도 다 보내지 못했다. 아직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근데, 조금은 그 생각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러분도 그런 것들을 좀 지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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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트맨 3년차, MBTI가 바뀌었다.
이 글은 영화 [더 배트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난은 늘 낯설고 새로운 것의 그림자 역할을 자처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처음 007이 되었을 때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여태까지 이런 007은 본 적이 없다며 비난과 험담의 벽을 쌓아 올렸으니까.
그러나 첫 작품이었던 [카지노 로열]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미움의 벽을 시원하게 밀어버렸다. 덕분에 다니엘은 시리즈 사상 가장 마초적이면서 인간적인 요원으로 자리 잡았고. 15년 동안의 임무를 완수하고 기꺼이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참고 1) DC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배트맨 시리즈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손에서 가장 완벽한 3부작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희대의 악역인 조커를 낳았다.
이런 시리즈에 아직 물음표가 가득한 배우인 로버트 패틴슨을 앞세운 새 배트맨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매우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영화 [더 배트맨]의 시작은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고. 덕분에 그림자인 비난 역시 짙게 깔려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더 배트맨]은 이런 비난의 색을 가득 담았다. 어둡고 또 무겁다. 로버트 패틴슨은 우울하고도 생각으로 가득한 배트맨 역할을 여태 해 온 역할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풀어내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
제작진이 비난에 대처한 방식은 영화의 색깔과 같았고. 비난은 슬그머니 배트맨이 가진 고뇌의 무게에 합쳐져 긴 러닝타임 내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9회 말 2아웃 상황의 DC가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이면 가벼운 마음만큼이나 영화 속 배트맨의 마음도 조금은 밝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3,6,9는 진리다.;배트맨도 피할 수 없는 3년 차 성적표
사진 출처:다음 영화
3년 차. 일반 회사로 친다면 이제 슬슬 대리 달아야지?라는 덕담 같은 압박이 귓가에 쌓이기 시작할 때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업무 짬도 차기 시작하고 전체적인 일의 그림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익숙해져 버린 자리 덕에 슬슬 회사 전체에 대한 불만도, 그리고 이직을 했을 경우의 "조건"들에 대해 점치기도 시작한다. 또한 근원적으로 내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심과 물음도 하나둘씩 마음을 채운다.
올해 3년 차에 들어선 고담 시 (명예) 공무원인 배트맨의 위치가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이제 고담 시 전체도 제법 눈에 익었고. 모든 범죄에 출동할 수 없으니 Priority를 세워 선택적으로 야근할(?) 줄도 안다. 그럼에도 고담 시의 경찰들에게는 가면을 쓴 자경단들 중 하나 정도라는 생각에 그칠 뿐이지만.
그럼에도 경찰들이 이 혼돈의 배트맨을 잡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기대하는 "능력"이 (연차 대비) 출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뛰지 않는다.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현란하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배트맨은 자신의 정체가 그들의 코앞에 다가갈 때까지 천천히,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밤이 만들어 낸 안개가 걷히면서 배트맨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범죄자들은 그제서야 허공을 향해 빛나고 있는 박쥐 모양의 경광등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어진다. 물론 그 마른침이 다 넘어가기도 전에 얻어맞고 바닥에 뻗어 있겠지만. 영화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위압감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분명 다른 히어로들보다 휘황 찬란하다거나, 빠르지도 않지만. 배트맨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오는 압박감만은 매우 대단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집념을 느낀 악당들에게 배트맨은 훌륭하고도 끔찍한 악몽이며.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만나보고 싶기도 한 빌런이다.
세례 받은 배트맨;자신 스스로도 구원해 내기.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 배트맨은. 마치 자신의 진정한 MBTI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행하던 것이 복수였는지. 혹은 정의였는지에 대해 생각하듯이.(참고 2)
리들러의 공격은 너무도 현실에 착 붙어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점을 파고들었다. 덕분에 외면하고 싶은 연좌제에 대한 이슈를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또한 뒷골목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 것만 같아서.
셀리나는 자신이 드러낼 수 없는 마음속 분노의 모습과 닮아있어 더 이상의 고아가 탄생하는 것도. 고아가 저지르는 잘못도 없기를 바라는 배트맨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막아야 했다.
여기까지면 좋으련만.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삶은 일찌감치 박살 난 지 오래라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인데. 배트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고 정확하게. 게다가 늦지 않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담 시 사람들이 사상을 입을 수도 있는 그 순간에. 배트맨은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기꺼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마치 영화의 진행 내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복수와 정의 중 후자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임과 동시에. 여태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고뇌를 세례를 통해 씻어내린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의 MBTI는 결정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배트맨이 되었다. 그리고 배트맨은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좀 더 가까이서 직접 돕는 것을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는 이 역할에 당위성을 고쳐 붙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가 건져올린 것들에 자신도 있음을 알아주는 날이 오기를 빈다.
과연 이직에 성공할 수 있을까?;일단 야근부터 좀 어떻게 해보자.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의 말미에. 배트맨은 아주 잠깐이지만 그 지독한 어둠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도우는 일에 합류한다. 마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 모습마저도 먼지 구덩이에서 한 번은 구르고 나온 것 같은 모습이지만. 배트맨의 눈길과 몸짓은 경직되어 있던 영화의 초반과는 조금은 달라 보이기까지 한다. 그전까지 자신에게는 어둠만 허락된다고 생각했다.
어둠을 먹고 사는 자들을 처리하는 것이 자신의 복수이자 고담 시의 질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밤의 지배자들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바이러스를 뿌려댈 수 있지만. 낮의 주인들에게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낮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희망이 전염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제 배트맨은 고담 시를 떠날 수 없다. 3년 차가 갖고 있던 고민도 사라졌고, 자신의 MBTI도 명확해졌다. 그리고 야근만 하던 삶을 주간 근무로 바꿀 수 있는 희망도 이젠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각오가 무색하게 6년 차의 헛바람은 찾아올 것이고. 이 도시는 여전히 자신을 배신하겠지만. 게다가 잊고 있었던 야근도 종종 하게 될 테지만. 이제 배트맨의 눈은 바뀌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는 매일 다른 것을 하며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닌. 똑같은 일상을 견뎌내는 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이 초보 공무원이 고담에서 보낼 영원한 시간들 중 딱 오늘 하루만이라도 부디 평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야근도 안 하면 더 좋고.
마치면서
호불호가 매우 강할 영화다. 액션이나 최첨단 무기, 혹은 브루스 웨인의 어마 무시한 부(Richness)를 기대한다면 한없이 지루할 것이고. 지울 수 없는 이름인 히스 레저를 떠올린다면 더더욱 실망할 영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을 지우고 새로운 배트맨에 집중한 것이 좋았다. 배트맨의 탄생이나 고담 시 7급 공무원 정도의 짬을 가진 타이밍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겨우 병아리 티를 벗고 뭔가 해보려고 하는 의욕은 많지만 처음 접해보는 문제들에 부딪쳐 시무룩해지기 쉬운 딱 3년 차의 모습이라서. 그냥 응원해 주고 싶었다.
최근 영화가 길어지는 추세에 대한 큰 반감이 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이 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까 같은 쓸데없는 잡생각 없이 그저 이 야근만 하는 공무원의 고군분투 일처리를 보다 영화관을 나왔다. 그가 아주 조금은 행복.. 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벼워진 게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좋아한 장면]
중간에 나오는 자동차 추격전 장면과 천장을 박살 내면서 떨어져내리는 장면은 뭐 말할 것도 없지만. 글에도 쓴 홍수 난 광장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그냥 자꾸 눈물이 났음. 기꺼이 고난으로 뛰어드는 자 만이 얻을 수 있는 재탄생을 잘 살린 것 같았음.
참고 1
007시리즈 말고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007에 대해 쓰다가 저장해둔 글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금 갖고 옴. 개인적으로 크리스찬 베일의 엄청난 팬이기 때문에 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을 한다고 했을 때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던 사람이었으나. 이 영화 보고 나서 영원히 입다물기로 함.
참고 2
내 MBTI도 제대로 못 외우는 주제에 리뷰 쓰겠다고 찾아봄. 실제로 배트맨의 MBTI는 INTJ이며. 나는 INFJ임. 문제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직도 잘 모름.
[이 글의 TMI]
1. 영화는 (너무 무거워서) 내 취향이지만. 리뷰는 좀 가볍게 쓰고 싶었음.
2. 어두운 영화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내 OTT 서비스 보고 싶어요 한 목록 보니까 이건 뭐. 아포칼립스던데.
3. 샐러드 먹고 16시간 금식은 내가 봐도 너무 힘들다. 근데 그걸 두 달째 하고 있지.
#더배트맨 #맷리브스 #로버트패틴슨 #앤디서키스 #조크라비츠 #폴다노 #DC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인플루언서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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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이 있다는 행복과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
영화 <말모이>의 배경이 일제강점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조선어학회의 사전만들기 과정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어서 약간 흔히 말하는 국뽕의 노선을 타거나 신파로 흐르면 어쩌나 굉장히 걱정했으나, 평론가들의 ’착한 영화‘라는 평답게 그런 요소들은 잘 걷어낸 작품이었다.
영화 <말모이> 시놉시스
까막눈 판수, 우리말에 눈뜨다! vs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 ‘우리’의 소중함에 눈뜨다!
우리말이 금지된 시대, 말과 마음이 모여 사전이 되다.
1940년대 우리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경성. 극장에서 해고된 후 아들 학비 때문에 가방을 훔치다 실패한 판수. 하필 면접 보러 간 조선어학회 대표가 가방 주인 정환이다.
사전 만드는데 전과자에다 까막눈이라니! 그러나 판수를 반기는 회원들에 밀려 정환은 읽고 쓰기를 떼는 조건으로 그를 받아들인다. 돈도 아닌 말을 대체 왜 모으나 싶었던 판수는 난생처음 글을 읽으며 우리말의 소중함에 눈뜨고, 정환 또한 전국의 말을 모으는 ‘말모이’에 힘을 보태는 판수를 통해 ‘우리’의 소중함에 눈뜬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바짝 조여오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말모이’를 끝내야 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말모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글을 읽는 즐거움을 표현하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판수는 조선어학회의 일원이 되면서 글을 배우게 된다. 처음에 이걸 왜 하나 싶으면서도 우선은 아들의 학교 회비를 내기 위해 꾸역꾸역 공부를 이어나간다. 억지로 시작한 공부였지만 조금 익힌 글자만으로도 길거리의 간판을 읽으며 신나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아이들이 차를 타고 갈 때마다 간판을 읽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내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괜한 뿌듯함이 들었다.그리고 <운수좋은날> 소설을 읽으면서 펑펑 우는데, 정말 슬픈 소설을 읽으며 펑펑 우는 판수를 보면서 되려 웃음코드로 이용하는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연출의 센스에 박수를 쳤다. 그만큼 글을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판수를 통해서 너무나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우리의 가치
영화 <말모이>는 초반 엘리트주의적인 조선어학회의 수장인 정환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민중보다는 전문지식인의 말을 더 귀기울이는 편이다. 엘리트들의 참여가 더디게 흐르자 판수는 자신의 지인을 통해 정환에게 큰 도움을 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환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의 의미를 확신하고, 판수와 함께 사전 편찬에 몰두한다.
사투리를 몹기 어려울 때 판수의 도움을 받으면서 잘난 것 없는 민중의 도움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잡지의 광고물을 보고 쌈짓돈과 단어의 풀이를 편지로 보낸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보면서 백성의 힘이 얼마나 큰지 ’우리의 가치‘를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 중 거의 유일하게 자국어를 회복한 나라
사실 몰랐다. 영화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우리나라는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 중 거의 유일하게 자국어를 회복한 나라라는 글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사실 한국어를 쓰고 있으니 다른 식민지배를 당한 국가들도 자연스럽게 자국어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거의 없었다. 필리핀의 공식언어는 영어고, 인도 역시 공용어는 영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각각 지배를 받았던 포르투갈어과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뭉클하면서도 뿌듯했달까? 영화의 마지막 글가지 이렇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할 줄 몰랐다.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을 당연하게 생각해썼는데 일제 지배 기간 동안 사라졌던 언어였고, 그걸 회복하기 위해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선조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줘서 이 영화를 착한 영화라 모두들 평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 <말모이>는 잔잔한 감동과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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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왜 우리는 살면서 잔인한 기억을 한 번쯤 겪게 될까요? 월요일에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금새 나는 한 가지의 끔찍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 주의 내가 그 시간에 고통받았냐? 아니다. 지금의 나는 19과 20에 겪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다.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생각을 한 300번째 한 후, 내가 겪었던 고통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실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니었다는 결론에 달한 것이 나의 트라우마 극복의 전부다. 이겨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머릿속에 새기는 것일 거다. 근데 이것과 별개로 내가 무언가에 휘둘려 살았던 기억은 나의 행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대체 왜 그랬지. 이 트라우마가 만든 창피한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난 누군가를 생각하는 법 자체를 몰랐다. 사랑받는 법도 주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방황했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바보 같은 순간이 머릿속에 스쳐가는 오늘이다. 그때의 시간은 어리다는 말로 전부 수식할 수 없으니 오늘 밤도 이불을 뻥뻥 차게 생겼다.
다행인 점은 있다. 내가 미쳤지 싶었던 때에서 얻은 건 있으니 말이다. 이 얻은 것은 두 가지다. 사랑받는 인생은 무엇이고, 그걸 주는 삶이란 또 어떤 것인가? 에 관한 것이다. 이건 살면서 굉장히 중요했다. 내 정신연령이 죽을 때까지 10대에 머무를 순 없잖아? 세상의 모든 애정이 이성 간의 사랑과 그것이 아닌 무언가로 나뉜다면 삶이 퍽퍽해질 것이다. 물론 선을 넘는 건 나 역시 부담스럽겠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무언가를 잘 보듬으려고 한다. 살다 보니 정말 사랑이 전부였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때는 보통 내가 좋아하는 타인에게 더 당당해지기 위함이었다. 또 언제는 그가 한 말 한마디가 내 동기부여의 전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이성 간의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누구에게 진심인 편이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았다. 진정성은 사소한 것에서 왔었다. 내가 지키는 소소한 것에서 섬세함이 생기고 그 사람의 말에 설득력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상대방은 보통 '이 사람이 진정성을 갖고 행동하는구나'라고 느껴 나를 좋아해 준다. 보통 그런 지레짐작은 맞는 말이다. 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없이 나 스스로의 이미지를 속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싫다.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에 유달리 집착했던 나는 앞과 뒤가 다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태도에는 단점이 있다.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짝사랑을 심하게 한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에 취해있으면 그 사람에게 맞춰진다. 그러면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진다. 사랑받기 위해서다. 정서적인 무언가를 받기 위해 계속해서 어떤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다가 크게 다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점점 뒤가 없어진다. 모 아니면 도인 내 방식이 가끔 질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음을 막을 수 있느냐. 글쎄. 아마 아닐 것이다. 지극히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나는 진정성을 위해 내 언어로만 행동하고 말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이 사람이 언젠가 날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떠나간 후의 기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잃고 나서 난 이런 것들을 배웠다고 자위하는 건 이제 질렸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무서운 게 많아지는 셈이다. 차라리 누군가를 아껴주지 않는다면 다칠 일도 없을 텐데. 난 오늘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무서워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필연을 운명에 빗댄 영화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이유에는 인생에 대한 절묘한 비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좀 심각하게 극단적이다. 아버지에게 알맞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로 자란 마츠코. 시크한 아버지가 웃음을 주지 않은 것에 마음이 답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마츠코는 일찍 취업에 성공해 선생님이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다. 교사로서의 일과 도중, 마츠코가 재직하던 중학교 제자가 누군가의 돈을 훔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츠코는 이 사건으로 인해 억울하게 학교를 떠나게 되고 작가 지망생인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믿었던 학교에서까지 배신당한 마츠코. 이번에는 정말 날 사랑해주는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근데 그건 잠깐 뿐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재림이라는 말과 함께 미래가 밝았던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예술가의 지나친 우울함 때문인지 자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두 번째 남자 친구는 첫 번째 남자 친구에게 열등감이 가득했던 인물이었다. 마츠코를 얻음으로써 이 열등감을 해소하려 했었다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한다. 자기 내적의 무언가 때문에 마츠코를 이용한 것이다. 연이은 이별 후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츠코. 새로운 일터는 마사지방이었다. 업계 톱으로 잘 나갔던 그녀지만 이내 회사가 무너지게 되고 다시 위기에 봉착한다. 이 시기에 원래 살던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마츠코 연락 없음'이란 글을 읽게 된다. 아버지의 애정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홀로 집을 나와 독립을 시작하고 세 번째 남자 오노 데라를 만나게 된다. 이 남자의 정체는 사기꾼이었다. 후에 마츠코를 배신하자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네 번째 남자를 만나 삶을 살던 도중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8년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로 나온 마츠코.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는 교사 시절 도둑 누명을 쓰게 만든 제자였다. 제자 류와의 사랑에 빠지는 데는 성공하지만 정작 끝은 좋지 못했다.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마츠코를 돌보기를커녕 주먹 한대 쳐버리고 류는 도망친다. 결국 버림받게 되는 마츠코. 히키코모리처럼 집에서 은둔하며 TV만 보다가 우연히 본 아이돌에게 빠지게 된다. 하는 거라곤 그 아이돌에게 편지 보내는 것 빼곤 아무것도 없던 마츠코. 감옥 동기가 재기할 수 있을 거라며 건넨 명함에 행복 회로를 돌리다 후반부에 허무하게 객사하게 된다. 그게 영화의 끝이다.
이 영화는 많이 비극적이다. 선생님이란 좋은 직업으로 시작해서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과할 정도로 사랑을 찾는다. 2021년의 우리가 보기엔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보와 같은 질문을 우리의 삶에 던질 수 있다. 과연 사랑이 그렇게나 중요할까? 주인공의 자존심까지 다 팔아가며 받고 싶을 만큼 관심과 애정이 우리 삶에서 중요할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거 말고 하나 더 있다. 그거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극적으로 나아진다는 보장이 있는가? 어차피 누군가는 어떤 인물의 삶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다. 겉보기엔 오해로 멀어지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당연하다. 모든 영화에는 엔딩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불륜이든 풋풋한 첫사랑이든 우리는 끝이 어떤 결말로 이뤄질지 뻔히 아는데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연인이 아니고 친구관계이거나 형이나 누나로 불려지는 사이여도 마찬가지다. 단 한 가지의 예외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잘 알면서도 우리는 운명을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단지 섹슈얼한 무언가가 아니라 존경과 우정, 공감의 의미여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감정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전부다. 내가 느끼기엔 -내 기준- 이성 간의 사랑보다 이 감사함의 표시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준 형들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난 게이가 아닌 것처럼 세상은 다양한 감정들로 이뤄져 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존경이라는 말이 식상해질 때 누군가에 대해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봐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순수한 동기부여는 이런 것들이다.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내 모습을 사랑해줄 인간이 있다면 그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이 소중한 이유가 이거 아닐까? 거의 대다수에게 가족이란 어떤 일을 겪어도 내 편인 존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잘하는 것일 테지.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근데 난 이기적 이게도 이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싶다. 가족이 주는 무언가는 항상 고마운데. 나는 그 외에서도 쓸모를 찾고 싶다. 난 개 같던 20대의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다. 그 뭐 같던 순간에서 제일 찌질한건 나였단 걸 깨달은 후에도 다른 뭔가를 찾았던 것 같다. 이런 인간관계의 결말? 항상 같았다. 난 정말 나밖에 모른다. 친해지는 걸 못해 별것 아닌 것에도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던 기억이 생생하고, 또 정신상태가 무너져 있을 때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던 모습이 선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나란 걸. 남 탓 열심히 해도 어차피 원인은 나에게도 있다. 정말 타인이 100% 잘못해서 무언가 발생한 경우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 경우가 절대다수라고 하면 그건 추한 남 탓이 될 것이다. 과연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인가.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외부에서 우리의 쓸모를 증명받고자 한다. 우리 엄마나 아빠만 해도 자기 직업에 진심인 사람이다. 심지어 아빠는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고 몇 박사들의 책에도 참여한 바 있다. 단순히 엄마 아빠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 걸 하는 건 아닐 것 같다. 대학생 때 보이는 학생회, 대외활동 뭐 이런 것들도 그 예시다.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회 활동과 여의도 중앙정치는 사실 (물리적으로만) 거리가 멀고, 대외활동과 같이 외부의 일은 끝이 다 정해져 있다. 해단식 하면 자주 못 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활동을 한다고 해서 취업문이 활짝 열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시시하고 재미없게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정해져 있는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이 모든 걸 벌였고 또 넘어지며 좌절한다. 같은 행동을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되고 비슷한 순간을 마주한다. 씨발. 왜 나는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지. 나의 출생만으로도 세상에게 사과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잠수 타다 죽을 때가 되면 내 머리를 방망이로 쳐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근데 우리 거의 대부분은 이 미련을 잊어버린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이제 그런 필연이 중요해지지 않아 진다는 뜻이다. 왜? 그게 행복하기 때문이다. 자주 못 보는 사람이더라도, 애초에 표현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산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약하며 말이다. <중경삼림>과 <노매드 랜드>를 봤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난 항상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름다웠던 순간을 다시 돌이키는 것만큼 인생에서 즐거운 건 없다. 토익 공부를 해도, 유럽에 가도, 사고 싶었던걸 사도 항상 무언갈 상상하고 있었다. 현실은 아니었다. 어떤 선택지를 골라서 내 결과 중 아무것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난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마음 한편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자. 영원한 건 없다. 뭔 선택지를 골라도 나는 아팠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줄 몰랐고 하는 것도 서툴렀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영원히 혼자 사는 것이다. 그럼 외롭기만 하지 사람에게 상처 받는 일은 없어 좋을 것이다.
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이 당연한 정답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건넨다. 과연 그게 맞아?라고 말이다.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한심한 순간을 반복한다. 나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홍상수나 윤종신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우리 인생에서 이것에 공감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생인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갈 것인가. 우리는 실패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퍼주지 말걸. 비극적인 사건에 놓인 우리를 위로하기보단 학대한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극도로 비극적인 인물 설정? 현실적이지 않은 게 맞다. 근데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것에 공감한다. 상처 투성이에 그 아무도 찾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현실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아 사과받으면 그게 다 없던 일이 되나? 또 그 사람들이 사과를 과연 몇 번이나 했나? 또, 뮤지컬을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한 이유? 비비드한 색감? 우리에게 이 마츠코의 삶을 비극이라고 재단할 권리가 있을까? 그 때 만큼은 행복했을텐데. '왜 굳이 3자 주인공이 나왔는가'나 '뮤지컬+색감배치'의 이유는 우리의 인생을 대변한다. 우리는 원래 이 모양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다. 근데 이런 영화와 현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왜?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무얼 주느냐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비록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겹쳐 좌절하는 삶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극단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근데 어떻게 전개하나? 도 중요하다. 바로 주인공을 따로 설정해 그 인물로 하여금 마츠코의 일대기를 좇게 만든 것이다. 이럼 뭐가 되냐? 어느 정도 객관화가 된다. 극한의 비극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 마츠코가 어떤 인물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너무 타인의존적인 측면도 있었던 건 맞지만 당연히 좋은 부분도 많이 볼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원인이 사랑의 결핍이더라도 괜찮다. 마음의 구멍 한 구석을 인정하게 되는 것도 다 좋으니까, 무서워서 숨지는 말자. 그게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병의 마수에 빠져 방황하고 나서 얻은 결론도 이와 비슷하다. 어차피 결론이 똑같다면 한 번쯤 또 한 명에게 모든 사랑을 다 가져다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 자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이 옳다는 증명이 된다면 그 나름대로 성공한 삶일 것이다. 난 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의 이 문장을 이루기 위해 그 20대를 보내왔고, 한 번도 진정성이 없었던 적 없었으며 나름대로 행복했다. 그래서 난 내가 한 말에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이 혐오스럽게 느껴지더라도 한 번쯤은 필연에 부딪히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난제를 돌파하는 방식일 것이다. 영원한건 없다 하더라도 그 순간 만큼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마음이 괴롭다면 병원에라도 꼭 가자. 그것이야 말로 구멍이 난 사람에게 좋은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400% 확신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모름지기 이 영화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뭘 해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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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주 최신 개봉영화(베놈2, 졸트, 실: 인연의시작, 십개월의 미래, 푸른호수)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0월 2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베놈2 #졸트 #실 인연의 시작 #십개월의미래 #푸른호수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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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이세계 삼촌> 공식 예고편
《이세계 삼촌》, 7월 일본에서 넷플릭스 스트리밍 시작. 전 세계 공개 결정! 2017년 가을...... 열일곱 살 때 트럭에 치인 뒤로 17년간 쭉 혼수상태였던 삼촌이 눈을 떴다. 그리고 병실을 찾은 조카 타카후미가 만난 것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자신이 이세계 '그란바하마르'에서 돌아왔다는 삼촌이었다. ......그렇다, 삼촌은 머리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할 말을 잃은 타카후미. 하지만 삼촌은 마법을 사용해 이세계에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고, 타카후미는 그런 삼촌의 능력을 활용해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도움을 청할 다른 친척도 없는 처지라, 삼촌을 한집에 받아들이고 함께 살기 시작한다. 타카후미는 삼촌과 함께 살면서 삼촌의 이세계 모험은 물론 세가 게임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 대해 알게 된다. 고독하고 가혹했던 삼촌의 지난 세월을 들을 때면 내심 즐거워하면서도 마음 아파하고. 이제, 세대가 다른 이 두 남자가 동영상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고, 평범한 아파트 단지 한구석에서 신감각 이세계 코미디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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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호빗 3부작> 리마스터링 예고편
4K 리마스터링으로 돌아온 판타지 마스터피스 '호빗: 뜻밖의 여정' 절찬상영중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 11월 24일 대개봉 '호빗: 다섯 군대 전투' 12월 2일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