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2025-06-16 14:36:55
단어를 잊는 시인의 여백으로 매운 시
시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는 미자는
시를 써보고 싶다.
자꾸만 단어를 잊지만
단어들을 주섬주섬 기록한다.
병원에서 본 어떤 사건,
그녀의 손자가 저지른 어떤 사건,
이후 그녀가 해야 할 어떤 사건들이
겹쳐지며 이야기를 잇는다.
단어를 잊는 시인의
이야기는
끝내 함구하며 이어지는데,
그 여백이 만든 운율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시각적으로든, 청각적으로든 여백이 가득한 이 영화는 암울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반복되며 패러프라이징되는 이야기들은 또 다른 운율을 만든다.
예컨대, 병원에서 우는 여자와, 밭일을 하는 여자, 사과를 받는 여자의 세 이미지는 병치되고 반복되며,
같은 여자에게서 전혀 다른 얼굴들을 발견케 한다.
같은 현상을 다르게 보는 것
하지만 그에 딱 맞는 단어를 찾지 못하는 것
반복되는 시도와 실패는
이 영화를 시적이게 한다.
Relative contents
-
- ‘평범이’가 ‘퀸카’를 욕망하려면
5★/10★
모든 멜로, 로맨스 영화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격차’ 혹은 ‘차이’가 있다. 이들은 〈타이타닉〉에서는 신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가문, 〈엽기적인 그녀〉에서는 성격 등으로 나타난다. 격차와 차이가 클수록 두 주인공이 끝내 사랑을 이뤄냈을 때 생기는 감동의 크기가 커진다.
〈우리 사랑이 향기로 남을 때〉에서 두 주인공의 격차/차이는 외모와 성격으로 나타난다. 오지랖이 넓고, 산만하며, 평범한(?) 외모의 모태솔로 창수(윤시윤)는 예쁘고 똑 부러지는 퀸카 아라(설인아)를 짝사랑한다. 아라는 창수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창수는 매일 출근길 버스에서나마 아라를 볼 수 있다는 데 행복해 한다.
이제 문제는 둘 사이의 격차/차이를 메우는 방식이다. 멀게만 보이는 둘을 어떻게 가장 가까운 존재로 만들 것인지에서 멜로/로맨스 영화의 성패가 결정된다. 〈우리 사랑이 향기로 남을 때〉는 다소 판타지적으로 보이는 요소를 활용한다. 뿌리기만 하면 상대가 첫사랑으로 보이는 향수를 우연히 얻은 창수가 이를 활용해 아라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이를 알게 된 아라가 창수와 자신의 감정이 진짜인지를 고민하며 달달함과 긴장감이 고조된다.
다만 전반적으로 너무 전형적인 방식으로만 극이 흘러간다는 점은 아쉽다. 결말이 이미 정해진 장르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 가능한 장면만 이어져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캐릭터 설정과 관계, 갈등의 고조, 이야기 전개 등의 부분이 모두 그렇다. 영화가 특히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이는 코미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익숙함은 ‘편안함’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진부함’으로 독해될 수도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평범한 남자가 짝사랑한 퀸카는 사실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존재였다’라는 극의 흐름과 만났을 때는, 영화의 익숙함이 반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창수가 사용한 향수의 향이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 다른 버전의 내가 되고 싶어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나는 아직까지도 종종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도 '나'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생각하고 느끼는 내가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 있다니.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또 '나'라는 것으로 태어나서 지금과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무언가가 될까. 지금 나의 이 비루한 영혼(같은 게 있다면)이 다시 태어나도 또 내가 될까.
(이 주제와 관련하여 존 페리,『개인의 동일성과 불멸성에 관한 대화(2017)』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어릴 적에는 내가 갖지 못하여 소망했던 것들, '피아노를 가진 나'라든지, '공놀이를 잘하는 나'라든지, '가출한 나' 같은 모습들을 상상하곤 했다. 내 상상 속에서는 내가 빛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땡땡 치고 엄마는 옆에서 책을 읽고, 발야구를 할 때 저 멀리까지 공을 뻥 차고, 밤거리를 헤매는 내가 있었다. 현실의 나는 피아노도 없고 소위 말하는 '개발'이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는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수억 가지의 경우의 수를 보고 왔다. 그 이후로 각자의 유니버스에 살고 있던 스파이더맨이 어쩌다 한 자리에 모였고, 로키는 여러 모습의 로키를, 완다는 다른 삶을 사는 완다를 만났다. MCU는 멀티버스가 전 세계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하나씩 있었음을 간파한 듯하다.
그러나 나는 히어로도 아니고 초월적인 힘을 가지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다. 마블의 멀티버스는 특별한 존재들만의 우주이니 나같은 미물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특별한 존재들이 세상을 구할 때 나는 행인1로 지나갔다가, 우주가 뒤바뀔 때는 또 사라졌다가 하는 NPC에 불과하다.
한편, A24의 영화들은 그 행인1들을 조명한다. MCU에서 우주괴물이 지구를 괴롭힐 때 으악 소리 한번 못지르던 행인1들은 A24의 영화에서 방황하는 레이디 버드가 되기도 하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나리를 키우기도 하고, 집도 절도 없어 아이를 입양보내야만 하는 플로리다의 미혼모가 되기도 한다.
멀티버스가 이제는 흔한 소재가 되어버린 데다 너무 긴 제목 탓에 큰 기대 없이 영화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제 울어라!'하는 장치만 나와도 쉽게 울어버리는 울보긴 한데 멀티버스 액션 코믹 영화를 보면서 울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망한 버전의 나
미국에서 코인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과 웨이먼드 부부가 있다. 이들은 홍콩에서 무작정 이민을 온, 이를테면 <첨밀밀>의 소군과 이요 같은 사람들이다. 에블린의 앞에는 수만 개의 영수증이 펼쳐져 있다. 국세청에서는 이들의 비용처리를 문제삼아 세탁소가 문을 닫을 판이다.
아들을 원했던 에블린의 아버지는 에블린이 태어날 때부터 실망했다. 웨이먼드와 결혼한다 하여 또 실망했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그렇게 싫어했던 딸과 함께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에블린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사업가로 성공한 모습을 보이지도 못하고, 딸 조이는 몸에 문신이 있는 동성애자라 아버지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가 없다.
사업은 망하기 직전인데다 딸은 엇나가고, 에블린 혼자서 동분서주하는 마당에 웨이먼드는 왜 이리도 태연한가. 치열하게 사는 에블린의 눈에 허허실실 웃기만 하는 웨이먼드는 한심하기만 하다. 빨래주머니에 장난스럽게 눈알 스티커를 붙이는 것마저도 꼴보기 싫다.
이 부부와 달리 미국에서 나고 자란 딸 조이가 국세청에 따라가 통역을 해주기로 했는데, 할아버지 앞에서 애인과 자신의 관계를 '친한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을 보고 조이는 집을 나가버린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으면서 정작 자신도 딸을 인정하지 못하는 도돌이표.
불안한 마음으로 국세청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웨이먼드는 갑자기 에블린의 귀에 이상한 장치를 꽂고 핸드폰으로 뭔가를 설정한다. 이상한 행동을 하라는 쪽지까지 써서 준다. 쪽지를 쓴 종이는 사실 웨이먼드가 준비한 이혼서류였다. 웨이먼드도 에블린에게 상처를 받아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웨이먼드의 알 수 없는 행동, 깐깐하기로 소문난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의 으름장, 에블린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때, 웨이먼드는 자기가 남편 웨이먼드가 아닌 다른 우주에서 온 웨이먼드, '알파 웨이먼드'라고 밝힌다. 우주에는 수많은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있고, 다른 우주의 에블린에 의해 흑화된 '조부 투파키'가 우주를 망치고 있으니, 이 세계의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를 없애라는 것.
다른 우주의 에블린에게 접속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평소에 하지 않을 이상한 짓을 하는 것. 여러 멀티버스 영화에서 학습하였듯 멀티버스는 선택에 의해 갈라진다. 이후 등장인물들은 평소에는 죽어도 하지 않을 기묘한 짓거리들을 하며 다른 우주의 자신에게 접속한다.
다른 우주의 디어드리는 에블린과 웨이먼드를 공격한다. 알파 웨이먼드는 남편 웨이먼드와는 다르게 싸움도 잘하고 책임감도 있다. 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이 에블린이어야 했나. 그 질문에 알파 웨이먼드는 답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실패만 한 유일한 에블린이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의 가능성이 너무도 많은 에블린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다른 버전의 수많은 나
노벨문학상을 수상자인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쓴 <선택의 가능성들>이라는 시가 있다. '무엇보다 무엇을 더 좋아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는데, 선택이란 아주 작은 차이들과 아주 짧은 순간의 결정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때로 그 찰나의 순간들로 인한 나비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따라 가는 택시를 타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영화는 에블린이 했을지도 모를 수많은 선택의 가지에서 살아가는 에블린들을 소환한다.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은 에블린은 배우가 되고, 가수가 되고, 요리사가 되고 쿵후 마스터가 되고, 피자집 광고판을 돌리는 아르바이트생이 되고, 어떤 물건이 되고... '모든 것(everything)'이 된다.
에블린은 빠르게 다른 에블린이 되는 방법을 습득한다. 이마에 검은 동그라미를 찍고 다니는 디어드리와 싸우며 배운 적도 없는 쿵후로, 요리사의 칼질로 악의 세력들을 무찌른다. 그리고 마침내 조우한 조부 투파키. 조부 투파키는 다름아닌 딸 조이였다.
아시아인인 엄마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딸이 참 착한데, 나쁜 것이 우리 딸을 조종하는구나!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의 혹독한 훈련으로 정신이 분열되면서 순식간에 이 우주, 저 우주로 다니며 모습을 바꾼다. 에블린은 딸의 모습을 한 조부 투파키를 없앨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싸워보자. 싸워서 설득하자. 원래의 착한 내 딸 조이로 돌아오도록.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의 정신이 깨진 방법과 동일하게 수없이 많은 나를 헤집고 다닌다. 정신을 분열하는 데 성공한 에블린은 이제 어떤 버전의 에블린도 될 수 있다.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에블린. 요리사 에블린은 부정하게 손님을 끄는 경쟁자를 고발하고, 다른 버전의 웨이먼드에게 상처주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을 데리고 '베이글'로 간다. 베이글이란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검은 원이다. 디어드리의 이마에 찍혀있던 검은 원은 베이글의 상징이었다. 조부 투파키가 우주를 어지럽힌 이유는 에블린을 만나서 같이 죽기 위해서였다. 죽고 싶은데 너무 많은 나로 살아가느라 죽지도 못했으니, 같이 사라지자고, 이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에서 이제 벗어나자고.
그러나 엄마 에블린은 딸을 보낼 수 없다.
할리우드식 인드라망
다시 원래의 세탁소 에블린. 한창 파티가 열려 흥겨울 때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가 찾아온다. 세탁소는 이제 압류될 것이다. 온갖 버전의 에블린이 되어 본 에블린은 모든 것이 환멸스럽다. 야구 배트로 창문을 때려 부수고, 될 대로 돼라 싶다.
웨이먼드는 디어드리와 몇 마디 나누더니 다 해결됐다며 에블린을 위로하는데, 어떻게 했냐고 하니 그냥 부드럽게 말했을 뿐이란다. 디어드리도 그의 방식대로 에블린을 위로한다. 아, 지금까지는 온갖 버전의 에블린이 되어 힘으로, 또는 분노로 일관했는데 싸움에서 이기는 다른 방법도 있었다. 마치 매서운 바람이 아닌 햇볕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처럼.
그토록 싫어했던 웨이먼드의 눈알 스티커를 이마에 붙인 에블린. 이 눈알 스티커는 '제3의 눈'이 되어 초월적인 힘을 발휘한다.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와 함께 모든 우주에서 싸우고 싸운다. 모든 생물 버전의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와 다 싸우고 나니 이제 무생물인 돌이 되기에 이른다.
돌이 된 조부 투파키는 절벽 끝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때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가 굴러떨어진 낭떠러지에 같이 떨어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에블린이 되어 선택한다. 에블린이 상처 준 웨이먼드, 경쟁자였던 요리사, 애인이었던 디어드리... 에블린 없이 혼자서 베이글로 들어가 소멸되고자 하는 조부 투파키.
조부 투파키는 묻는다. 이제 그 어떤 모습의 에블린으로 살 수도 있는데, 속썩이는 딸 조이도, 망하기 직전의 세탁소도, 답답한 웨이먼드도 없는 인생, 화려한 배우, 가수, 요리사, 쿵후 전문가, 무엇도 될 수 있는데 왜 다시 돌아왔냐고. 영화 포스터에 쓰인 문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 어떤 인생을 살아도 나는 너를 구할 거야.
*
만다라를 형상화한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무척이나 불교적이다. 멀티버스가 우주괴물의 싸움터가 될 수도 있는 한편 무척이나 철학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불교 용어인 인드라망은 우주의 무한한 하늘나라 중 제석천(인드라)에 쳐진 구슬 그물을 말한다. 구슬에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비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나는 하나의 내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유일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부처로 본다.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부처가 되어야 한다. 무아지경이라는 말처럼, 실체가 있는 '나'는 없다. 색깔도 모양도 형식도, 기쁨도 슬픔도 없다. 고로 나의 실체는 없고 세상 모든 것이 '나'이니, 타인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것은 결국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것과 같다.
나는 늘 내가 아니고 싶었지만 나는 내가 아닐 수 없었다. 뭔가를 잘하는 나, 바보같은 나, 칭찬받는 나, 못된 나, 괄시받는 나를 한 사람의 나로 통합하여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어떤 모습의 '나'는 갖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래도 어떤 우주에는 대학을 안 간 버전, 다른 전공을 한 버전, 취업을 한 버전, 결혼을 한 버전, 부자가 된 버전, 뭔가를 이뤄낸 버전,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는 버전 등등의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조금은 덜 외로워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모든 것, 모든 곳에 동시에 내가 있으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주연 :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제이미 리커티스
상영시간 : 139분
개봉일 : 2022년 10월 12일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
- 침입한 것을 묻혀가며 배설하기
<발코니의 여자들(Les Femmes au balcon)>(2024, 노에미 메를랑)
* 영화의 장면과 결말 포함
<발코니의 여자들>에는 어지러운 클로즈업으로 가득하던 섹슈얼 코미디의 톤이 돌연 끊기는 순간이 있다. 어두운 화면, 정적 속에서 카메라 플래시와 셔터음만 터지는 숏. 이 연출이 서늘하게 와닿으며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까닭은 단지 분위기 전환으로 고요한 쇼크를 주어서가 아니다. 실제와 흡사한, 누군가는 겪어 알고 있을 공포를 불러일으켜 관객을 단숨에 현실로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영화 밖 현실, 구체적으론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됐고 현실에 닿으려 하는 영화다. 그렇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은 ‘과감하고 지저분하고 터무니없어지기’다. 로맨틱코미디에 범죄스릴러, 코미디호러까지 넘보며 이 영화는 일부러 온갖 분비물 속에서 나뒹군다.
엘리즈는 자주 방귀를 뀐다. 친구들과 있을 때는 물론 그날 처음 보는 마냐니나 의사 앞에서도 가스를 내보낸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가스만이 아니다. 시체를 보고 토하고, 임신중절 약을 먹고 낙태를 한다. 배우인 엘리즈에겐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요구되는 외형에 끼워맞춰야 하는 일이 자주 있다. 남편은 사랑을 속삭이며 시도때도 없이 성관계를 요구하지만, 매번 동의 없이 엘리즈의 몸을 만지고 콘돔을 끼우지 않고 삽입하는 그의 관심은 자신의 만족에만 있다. 엘리즈의 낙태는 그러한 원치 않는 관계에서 이루어진 임신을 중지하는 것, 그동안 몸에 강제로 주입되어 쌓인 것들을 해독하는 과정의 일환이다. 마침내 남편에게 쏟아내는 말과 루비와 나란히 의자 팔걸이 위에 앉아서 하는 자위, 꼭 맞는 드레스에 욱여넣었던 가슴을 내놓는 것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행위다.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캠걸” 루비는 언뜻 그러한 배출을 쉽게, 또 잘 하는 여자로 보인다. 과연 영화는 그가 라이브 방송 와중 오르가즘을 느껴 사정액을 내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엔 모순이 있다. 원하는 대로 스스로를 꾸미고 거리낌없이 전시하는 그의 자유로움이 직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은 그의 신체가 특정한 형태에 들어맞아서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신체는 캠을 끄고 있을 때조차 ‘언제든 구매가능한’ 상품으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와 무관하지 않게, 뱉고 내보내는 자로 그려졌던 루비의 입에는 곧 마냐니의 손가락이 들어온다. 루비는 자신의 몸에 폭력적으로 들어온 남자의 페니스를 뜯어버리고 그 시체를 처리하며 코피를 흘림으로써 들어온 것 일부를 내보낸다. 허나 이 주입과 배출은 일대일로 깔끔하게 교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침입한 손가락에 입이 막힌 루비의 얼굴이 사진으로 박제되었듯, 몸과 마음에 남은 흔적은 옅어질 수는 있어도 말끔히 지워질 수는 없다.
한 걸음 물러서 관찰하는 니콜에게 주입되는 것은 언어와 이야기들이다. 그는 이웃 여성 드니즈와 친구들이 겪은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듣는다. 그의 배설 역시 언어와 이야기, 소설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헌데 니콜이 보는 것엔 유령도 포함된다. 성범죄나 가정폭력을 저지르고 피해 여성들에 의해 살해당한 남자들의 유령. 이 트릭과 함께 영화의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서부터가 니콜의 소설/상상의 재현인지가 모호해진다. 니콜이 유령을 보는 까닭은 이야기를 쓰는 자여서다. 관찰자이자 매개자, 화자인 그는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그 중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체다. 유령들은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억울함을 토로하지만, 이 남자들이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억울해서가 아니라 ‘억울하다고 착각’해서, 즉 범죄를 인정하지 않아서다. 이 법칙은 아마도 니콜이 정한다. 스토리텔링의 주도권이 사진작가 마냐니와 같은 가해 남성이 아닌 목격자 여성 니콜에게 있다는 점, 이것이 <발코니의 여자들>의 핵심이다. 여자가 전하는 이 이야기에서 가정폭력범과 성폭행범은 죽는다, 아니 죽‘인’다. 여기서 무게는 ‘그 남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보단 ‘이 여자들이 더불어 꺼내고 뱉어냈다’는 것, 결과보단 행위 자체에 실린다. 영화는 그 배설과 발화의 힘을 더럽고 유쾌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루비를 강간한 남자의 ‘인정’은 오로지 니콜에게만 보이는 일이(거나 니콜의 상상이)다. 하지만 영화는 니콜의 소설에 서술된 이 장면을 루비가 읽고 ‘좋았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잠깐 되돌아가, 구독자들과 일종의 심리상담까지 해주었던 루비가 라이브 스크린 안에 지쳐 널브러져 있을 때 걱정하는 자는 한 명 뿐, 나머지는 루비에게 끊임없이 뭔갈 요구하며 지루해한다. 성폭행당한 사건에 관해 털어놓을 때 시청자는 단 한 명도 없지만, 루비는 계속해서 방송을 켜 놓는다. 관음하는 자들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섹시한’ 모습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모습, 해골 무늬가 그려진 옷을 입고 음산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는 모습도 루비 자신이어서다. 그런 루비에게 위로를 건네는 이들은 화면 건너편에 있지 않다. 아무도 시청하지 않는 방송 화면 이쪽에 침범해 루비를 끌어안는 니콜과 엘리즈, 친구들이다.
케이크를 손에 묻혀가며 먹는 니콜, 흰 옷에 온통 피를 묻힌 엘리즈, 화분의 시원한 흙을 손에 묻히며 황홀해하는 엘리즈와 루비, 폭염의 날씨에서 그 모든 행위는 땀으로 젖은 채 이루어진다. 이곳에는 실내온도를 적당히 조절할 에어컨이 없다. 한계까지 뜨거워진 몸에서 솟아나는 땀을 여기저기 묻히고 씻어내는 수밖에. 이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짙은 땀으로 노폐물을 배출하는 일과 비슷하다. 노에미 메를랑은 관객에게 일단 범벅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 여자들이 당한 입막음은 겉을 감싸 압박하는 종류의 것보단 몸 안쪽으로 강제로 들어와 숨구멍을 틀어막는 것에 가까웠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그렇게 침입한 것들을 단숨에 깨끗하게 털어내거나 날려보내는 것이 아닌, 온몸에 묻혀가며 함께 쏟아내고 또 닦아내는 과정이다.
-
- 쥬라기 월드 4 | 미래로의 쇄신 대신 전통의 되풀이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룡들이 '쥬라기 월드'를 탈출한 뒤 5년이 지나자, 공룡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빠르게 식는다. 달라진 환경과 공기로 인해 공룡들이 적도 인근에만 정착했기 때문. 그러나 '파커-제닉스 제약회사'는 여전히 공룡에게 주목한다. 육지, 하늘, 바다를 지배하는 가장 거대한 공룡들의 DNA를 이용하면 심장병을 치료할 신약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이에 파커-제닉스 소속의 '마틴 크렙스'(루퍼트 프렌드)는 미 해병대 특수작전부대 출신 용병 ‘조라‘(스칼렛 요한슨)에게 공룡들이 남아있는 적도 인근의 세인트 휴버트 섬으로 가는 원정대를 이끌어달라고 부탁한다. 고민 끝에 제의를 수락한 조라는 옛 동료이자 선장인 '킨케이드'(마허샬라 알리), 고생물학자 ‘헨리 박사’(조나단 베일리) 등과 함께 모험을 떠난다. 폐쇄된 쥬라기 공원의 연구소와 함께 그 섬에 감춰진 진실은 모르는 채로.
퇴보해 버린 새로운 시작
<쥬라기 공원> 삼부작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특히 <쥬라기 공원>이 보여준 충격적인 시각효과는 그 자체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눈만 즐거운 작품도 아니었다. 유전 공학과 생명 과학 기술의 가능성을 조명하면서도 자본주의와 결합한 비윤리적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시각효과로 구현해 내며 SF 영화의 정수를 보여줬다.
하지만 공룡들도 이제는 서서히 생명력을 잃고 있다. 후속 시리즈인 <쥬라기 월드> 삼부작만 해도 개봉할 때마다 흥행 성적이 3억 달러씩 우하향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공룡에 열광하지 않는다"라는 대사가 영화 안팎을 모두 대변하는 셈이다. 더 화려한 블록버스터에 비해 매력을 잃은 공룡 영화는 결국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이하 <쥬라기 월드 3>)이 <쥬라기 공원>의 주역들을 복귀시켰듯이 과거의 영광에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이하 <쥬라기 월드 4>)은 부제에 걸맞게 시리즈가 앞으로도 존속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해야 했다. 이는 <고질라>(2014)로 할리우드 괴수물을 되살려냈던 가렛 에드워즈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긴 이유이자, 기대한 바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지는 했다. 퇴보한 주제 의식과 편의적인 서사로 채워진 각본 앞에서는 백약이 무효하기 때문이다.
선지가 두 개뿐인 시험
유전공학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거대 기업들에 대한 비판. 돈과 명예를 좇아 경쟁적으로 발전할 뿐 자기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대 과학에 대한 경고. 인간이 자연을 제어한다는 것은 카오스 효과에 의해 불가능하다는 통찰.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관통하는 이 모든 메시지는 결국 한 가지 딜레마로 귀결된다. “복원된 공룡은 하나의 생명인가, 아니면 거대 자본이 투입된 자산인가?”
<쥬라기 월드 4>도 마찬가지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한 조라 일행이 모사사우스를 눈앞에 둔 순간, 영화는 그들을 선택의 기로에 세운다. 대서양 횡단 중 배가 뒤집힌 '델가도 가족'의 조난 메시지가 세인트 휴버트 섬 정반대 방향에서 잡힌 것. 즉, 섬은 시험장이고, 조난한 가족은 출제 문제이며, 출제 의도는 조라 일행의 양심과 윤리관을 시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결정해야 한다. 돈과 생명 중 무엇을 먼저 챙길 것인가?
세 주인공은 제각기 답을 내놓는다. 그중 두 명의 입장은 확고하다. 헨리 박사는 사람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채취한 공룡 혈액도 파커-제닉스 제약회사에 넘길 게 아니라 연구 및 공익 목적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고생물학자다운 선택이다. 크렙스도 망설이지 않고 답을 찍는다. 파커-제닉스 제약회사의 대리자인 그는 거액이 걸린 공룡 혈액을 채취하는 임무가 우선이니 다에 조난자들을 태워도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시리즈의 전통을 잇는 정답
그에 반해 조라는 그 둘 사이에서 표류한다. 그녀의 본래 가치관은 크렙스와 비슷하다. 약속된 돈만 주면, 도덕과 법을 신경 쓰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용병답다. 그러나 새로운 임무 도중에 조라는 내적으로 깊이 갈등한다. 그녀는 돈만을 쫓다가 다른 가치를 수없이 놓쳤고, 그로 인해 PTSD에 시달리니까. 바로 직전 임무 도중에 동료를 눈앞에서 잃었고, 다른 작전에 투입된 사이에는 투병 중이던 어머니의 장례식도 놓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조라가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쥬라기 월드 4>는 돈만을 쫓던 그녀가 어떤 이유로 생명 존중이라는 정답을 찾게 되는지 그 과정을 는 작품이나 다름없다. 그 중심에는 옛 동료 킨케이드와 헨리 박사가 있다. 돈을 아 용병 생활을 했지만, 아들도 잃고 아내와도 이혼한 킨케이드는 자기 경험을 살려 그녀에게 충고한다. 돈이 아닌 가치를 추구할 때 비로소 삶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헨리는 돈만으로 그녀의 트라우마를 고칠 수는 없다면서 아픔을 승화할 다른 길을 제시한다. 파커-제닉스 제약회사에 혈액 샘플을 넘기면 소수의 사람만 이득을 보는 고가의 치료제가 개발되겠지만, 그녀가 샘플을 오픈 소스로 공개하면 그녀의 어머니처럼 고통받던 더 많은 이들이 수혜를 입을 수 있다고. 옛 동료와 새 동료의 조언과 설득 끝엔 조라는 <쥬라기 공원> 시리즈에서 기대하는 답, 돈보다 중요한 생명이라는 정답을 찍는다.
전통을 반복할 뿐인 정답
문제는 조라의 정답이 반복일 뿐, 쇄신은 될 수 없다는 것. 30여 년간 이어진 전통은 유지해도 시리즈에 새 활력을 불어넣을 주제 의식이나 소재,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편인 <쥬라기 월드 3>보다도 퇴보했기 때문이다. 그간 <쥬라기 공원> 시리즈는 인간 중심적 관점을 견지했다. 다른 생명을 조작하고 생태계에 개입한 대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만의 몫이었다.
<쥬라기 월드 3>는 달랐다. 벨로시랩터 '블루'는 제약회사 바이오신에게 납치당한 새끼 '베타'를 구하기 위해 친구인 '오웬'(크리스 프랫)을 이용한다. 그는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베타를 되찾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블루에게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이 장면은 공룡들이 전 세계에 퍼진 이상, 인간이 지구의 유일한 주체는 아니며 비인간 존재도 인간처럼 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관점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쥬라기 월드 3>의 시도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 일환으로 등장시켰던 메뚜기의 존재감이 공룡을 압도한 나머지 '메뚜기 월드'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쥬라기 월드 3>라는 실험은 시리즈의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수도 있었다. 공룡을 공포의 존재나 테마파크의 볼거리로만 소비하지 않고, 공룡에게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선사하거나 그들을 이야기의 주체로 끌고 오는 식으로.
하지만 <쥬라기 월드 4>는 전작의 변화를 계승하거나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생태적으로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의 믿음을 비판하는 헨리 박사의 대사 몇 줄이 전부일 뿐이다. 그보다는 시리즈의 일원으로서 최소한의 자격요건을 충족하는 선에서 만족한다. 이처럼 30여 년 전의 담론에만 의존하는 이상, <쥬라기 월드 4>로부터 시리즈의 활력이나 미래를 낙관할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편의적이고 얄팍한 도구의 향연
안정적이고 검증된 흥행 공식만 찾는 태도는 각본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쥬라기 월드 4>는 메시지와 볼거리를 구분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조라 일행이 전자를 맡는다면, 델가도 가족은 후자를 담당하는 식이다. 델가도 가족은 티라노사우루스나 뮤타돈 같은 공룡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조라 일행은 특정한 윤리적 입장과 가치를 평면적으로 대변하는 졸일 뿐이다.
그 결과 인상적인 캐릭터를 찾아보기 어렵다. 섬에 도착한 이후로 델가도 가족은 없어도 전개에 문제가 없고, 헨리 박사와 크렙스도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적 갈등을 겪는 조라, 동료들을 하나씩 잃으며 애통해하는 킨케이드가 그나마 예외일 뿐이다. 공룡도 철저히 도구적으로 활용된다. 티라노사우스와 새로운 돌연변이 공룡 모두 블록버스터다운 스케일의 볼거리를 선사하는 역할만 맡고 퇴장한다.
공룡들로부터 메시지나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쥬라기 공원에 제공될 예정이었던 기괴한 모습의 돌연변이 공룡도 단지 '이중 교배 실험의 실패작'이라고만 언급될 뿐, 과학 기술 윤리와 관련된 담론으로 나아가는 계기는 되지 못한다. 이에 더해 공룡과 인간 주인공 간의 유대도 없고, 공룡들에게 특별히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영화는 전반적으로 휘발성이 강하다. 중간중간 놀라운 순간은 있다. 조라 일행이 티타노사우루스를 마주했을 때는 주인공도 관객도 모두 경탄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공룡들이 한순간의 볼거리로 소비되는 이상, 이 감정에는 말초적인 자극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자연히 이를 계기로 돈보다 공룡이나 생명의 가치를 더 무겁게 여기게 된 조라의 변화도 다소 얄팍해 보여서 이해는 하나 공감하기는 어려워진다.
눈은 즐겁다
한 번 허점을 노출한 각본은 연쇄적으로 문제를 드러낸다. 우선 작위적인 장면이 많다. 위기를 만들려고 등장인물들의 실수를 일부러 유도하기 때문이다. 굳이 디스토르투스 렉스의 실험실 출입구 앞에서 버려진 초코바 포장지가 연구소를 마비시키고, 그 틈에 공룡이 탈출하는 오프닝이 대표적이다. <쥬라기 월드>에서 사람들의 심리까지 역이용해서 우리에서 탈출한 인도미누스 렉스에 비하면 지나치게 허술해 보인다.
억지로 위기를 만들었다 해도 긴장감이 고조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구성 때문이다. 배우의 명성, 인물의 나이와 역할 등을 고려하면 생존 여부가 너무 명확하고, 실제로 영화는 예상으로부터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더 다양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상황도 살리지 못한다. 수심이 깊은 강이나 사람 키보다 수풀 속에서 공룡이나 다른 생명체를 갑자기 등장시키는 식의 기회가 있지만,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술적인 탁월함은 인상적이다. 특히 공룡들에게 쫓기다가 안전해졌다고 생각한 캐릭터가 한숨 쉬고 공룡에게 잡아먹히는 연출과 편집 덕분에 서스펜스는 비교적 꾸준히 유지된다. 그 덕분에 해변가에서는 스피노사우루스에게, 절벽에서는 케찰코아틀루스에게, 강가에서는 티라노사우스에게 습격당하는 장면 모두 상당한 긴장감과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묘사도 적나라해서 잡아먹히는 순간의 충격과 공포도 극대화된다.
다른 영화들을 오마주한 액션 장면도 인상적이다. 모사사우스의 신체 일부만 보여주면서 긴장감을 쌓다가 기습적으로 그 전모를 드러내는 연출은 <고질라>가 고질라의 전체 모습을 마지막 순간에야 보여주면서 시각적 충격을 극대화한 연출과 유사하다. <쥬라기 공원>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랩터와의 주방 추격전도 장소만 편의점으로 바꿔서 오마주 한다.
최소한의 블록버스터
그렇기에 <쥬라기 월드 4>는 최소한의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 있다. 각본의 짜임새는 실망스럽다. 매력적인 캐릭터도 없고,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공룡의 활약도 많지 않다. 그 와중에도 가렛 에드워즈는 관객들을 쫄깃하게 애태우면서 꼭 필요한 재미만큼은 가까스로 지켜냈다.
하지만 그렇기에 <쥬라기 월드 4>는 실패한 작품이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부제에 걸맞은 메시지도, 다음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는 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쥬라기 월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4번째 작품인데도 길을 못 찾은 채 헤매고 전작으로부터도 퇴보하고 있으니, 문제가 더 크다.
그러다 보니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시리즈처럼 한순간 관객의 외면을 받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설령 당장의 흥행 성적은 기대 이상이더라도, 만듦새를 봤을 때 그 추세가 다음 시리즈에도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Acceptable 무난함
최소한의 재미로도 못 가리는 매캐한 진부함
-
- 손을 내밀 용기와 그 손을 맞잡을 다정
수능이 끝난 후 코끝에 맴돌던 쨍한 공기는 내게 냄새처럼 기억되곤 한다. 계절의 냄새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난 그날의 공기로 이제 ‘진짜’ 겨울이 왔음을 느낀다. 수험장을 나서던 순간 코끝이 찡했던 건 찬 바람 때문인지, 내 학창 시절이 끝났다는 허무함 때문인진 모를 일이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수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수능은 사실 내게 그리 중요한 시험은 아니었다. 수시 원서를 모두 작성하고 수능을 기다리던 그 애매한 3개월 동안,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월플라워>만큼은 그 시기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친한 친구의 ‘너의 바탕화면에 나오는 영화가 궁금하다’는 한 마디로 금세 무너지고 말았다. (학창 시절 내내 나의 노트북 바탕화면은 월플라워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월플라워>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어쩌다 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건 가끔 내가 초라하고 작아질 때 속으로 떠올리는 대사 중 하나가 ‘We accept the love we think deserve’가 되었다는 것. 그렇게 마음속에 묻어두고 다시 보게 된 이 영화는 새삼 충격적이었다. ‘이게 10대들의 이야기라고…? 역시 미국은 좀 다르다’라는 시시한 생각들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든 생각은 결국 용기와 사랑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주인공 ‘찰리’의 인생을 뒤바꾼 ‘패트릭’, '샘'과의 만남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홀로 팝콘을 들고 경기를 보러 갈 용기, 옆자리 친구에게 한 마디 걸어볼 용기로 시작되었다. 누구나 시작은 두렵다. 그 시작에 결국 끝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는 더 두렵다. 그러나 그래도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용기 없이는 아무것도 변할 수가 없다. 어쩌면 <월플라워>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건 나 역시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보았고, 덕분에 20대의 시작을 조금은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도전이 좌절되고, 사랑에 실패하고, 친구가 떠나가며, 믿음이 배신당하는 아픈 사건의 연속이다. 그래도 주인공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용기 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듬고,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발버둥 친다.
“In this moment, I swear. We are infinite.” 10대의 끝자락. 이 대사의 모든 단어를 꼭꼭 씹어 삼켜 내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했다. 순간에 충실할 것. 우리의 무한함을 단언할 것. 비록 현실이 가끔 따갑고 아릴지라도 결국엔 그 시간도 흐르고 지난다. 버거운 하루에도 내일이라는 다음이 다행스럽게 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버텨낸 시간이 나에게 좋은 흔적으로 남기를 바라며 오늘도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 용기와 누군가의 손을 맞잡아 줄 다정이 충분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을 읽을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설 모든 청춘들 앞에 무한한 도전과 반짝이는 기쁨이 함께하길, 가끔 찾아오는 아픔을 담대하게 마주할 용기가 함께하길 바란다.
Editor.Iris
-
- 사랑에 대한 공감으로 만들어낸마블 영화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아주 형편없는 생활을 하던 사람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면서 생각을 다시 잡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가려 노력한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전체 인생에서 보면 아주 짧은 순간이다. 그 기쁜 순간을 지나고 화학물질이 만드는 인체의 사랑 호르몬 분비가 끝나는 시기가 되면 열정적인 사랑도 시들어간다. 하지만 그 사랑을 위해 뛰어든 두 사람의 삶은 이미 꽤 많은 변화를 이룬 후일 것이다. 정말 상대방을 위하는 존재를 만났다면 두 사람은 자신의 바뀐 삶에 적응하며 열정적인 사랑 대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자신의 동반자의 손을 잡고 같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두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가족을 통해 그들의 삶의 에너지를 그다음 세대로 서서히 내린다. 그렇게 아주 완벽한 모습의 가족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서로 불만이 쌓여 다투기도 하고, 서로에게 아쉬움을 토로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부부가 된 두 사람 중 한 명이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로 인한 그늘은 다른 어떤 상황에서보다 어두울 것이다. 남은 사람은 그 자신이 운명을 다할 때까지 상대방을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또 남은 가족들을 챙겨갈 것이다. 두 사람이 만들었던 그 가족이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할지 아니면 깨져버릴지는 순전히 남은 가족들의 몫으로 남는다.
한 가족의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마블 영화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마블 히어로 영화지만 한 부부의 사랑이야기에서 파생된 이야기다. 웬우(양조위)는 수세기 동안 텐 링즈를 이끌며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열 개의 팔찌를 낀 그는 팔찌의 힘으로 다양한 조직과 싸우면서 자신의 조직인 텐 링즈를 운영하고 있다. 어찌 보면 세상의 어두움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탈로라는 신비한 세계의 힘을 빼앗기 위해 그곳에 갔다가 입구에 지키고 있던 여인 리(진법랍)을 만난다. 팔찌의 힘을 이용해 싸우는 웬우를 막기 위해 맞서 싸우는 리는 아주 부드럽고 우아하게 웬우를 막아선다. 그 둘은 한동안 매일 서로 만나며 대결을 벌이다가 결국 사랑에 빠진다.
웬우와 리는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들의 기존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웬우는 팔찌를 빼고 악행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았다. 리는 탈로에서 나와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아들 샹치(시무 리우)와 딸 샤링(장멍)을 낳았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는 듯했지만 아내 리의 죽음으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들이 만들었던 사랑은 아주 따뜻하고 밝은 에너지를 만들어냈지만 한 순간에 큰 그늘이 지고 말았다. 영화는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가족 가운데 아들 샹치의 시점을 중심으로 하여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어쩌면 마블 영화 시리즈 중에서 가장 사랑에 집중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주인공 샹치의 가족 이야기가 기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모든 일이 발생한 것은 웬우가 가진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때문이다. 그는 영화의 가장 강력한 빌런이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가 가진 감정을 완전히 공감할 수 있게 되어 있어 그가 행하는 악행은 결국에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온다. 웬우는 영화의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등장하는 장면들에 그의 표정은 우리가 흔히 보던 악당의 모습이 아닌 우울하고 의욕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그가 행하는 악행의 이유가 드러나는 후반부가 되면 관객은 더욱 그의 감정에 공감하고 몰입하게 된다.
주인공 상치보다 공감 가는 캐릭터 웬우
물론 영화의 주인공은 샹치다. 영화 초반은 샹치가 미국에서 일을 하며 혼자 생활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가장 친한 친구인 케이티(아콰피나)와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그는 아버지 웬우가 보낸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예전 삶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어 나간다. 동생 샤링과 다시 만나고 결국에는 웬우와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다시 만난 아버지 웬우와 같이 앉은 샹치와 샤링의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영화는 한 가정의 그늘이 만들어진 이후, 각자가 짊어지고 있던 그늘이 그들을 어떤 식으로 변하게 했는지를 재회한 그날 이 가족의 식사 장면으로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웬우는 자신에게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가며 좋지 않은 선택을 하지만 자신의 자녀인 샹치와 샤링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웬우가 샹치와 샤링을 볼 때 나타나는 단호한 눈빛에는 따뜻한 연민이 잠깐 머물다 사라진다. 웬우가 샹치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애증일 것이다. 아내의 죽음의 순간에 함께 있었던 아들에 대한 원망과 그래도 사랑했던 아들에 대한 애정을 가진 웬우의 감정은 배우 양조위의 눈빛과 몸짓으로 훌륭하게 표현된다. 그래서 적어도 샹치 캐릭터의 첫 영화인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샹치가 아닌 웬우가 진정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격투 액션 장면은 마치 중국 무협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빠른 속도감과 타격감을 통해 중국 무협 영화들에서만 보던 화려한 격투 액션을 마블 세계관 안에 훌륭하게 가지고 왔다. 때론 빠르게, 때론 부드러운 액션 장면으로 강약 조절을 해나가던 영화는 후반부에는 마블 히어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CG 액션과 화려한 무기들을 등장시켜 시선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번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액션 장면들은 그동안 마블 영화들에서 볼 수 없는 종류의 무협 액션이 다채롭게 담겨있다는 것이다.
샹치가 활용하는 무술은 강력한 동작으로 강하게 타격하는 형태다. 이는 아버지인 웬우와 텐 링즈의 고수들에게 배운 스타일이다. 반면에 어머니인 리와 탈로를 지키는 사람들이 쓰는 무술은 부드럽게 상대의 힘을 이용해 반격을 가하는 스타일이다. 완전히 상반되는 격투 스타일은 캐릭터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웬우와 리가 만나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서로 완전히 상반된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상대방의 스타일에 끌려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상반된 스타일의 두 사람이 만나 어찌 보면 완벽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샹치도 아버지의 격투 스타일로 시작했지만 탈로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무술을 배우면서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의 스타일을 모두 받아들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정통 무협 스타일과 마블 히어로 액션 스타일의 성공적인 조화
마블은 새로운 페이즈를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얼마 전 개봉했던 <블랙 위도우>에서는 러시아 국적이나 배경을 가진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이번에는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또한 많은 대사를 실제 중국어로 구사하게 하여 더욱 해당 문화를 표현하려 노력했다. 아마도 향후 개봉하게 되는 마블 영화들에는 더욱 다양한 국적의 히어로나 인물들이 포함되고 해당 문화권의 특징들도 영화에 담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마블 영화에서 한국어가 들리거나 그 외의 나라 언어들이 높은 비중으로 포함된다면 마블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샹치가 처음 소개되는 영화다. 그래서 샹치의 캐릭터의 특성과 격투 스타일이 어디서 왔는지, 그 근원에 대해 알려주고자 구상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샹치가 대부분의 장면에 등장하지만 이번 영화는 샹치의 윗 세대의 이야기가 끝맺어진다. 샹치의 아버지 웬우와 어머니 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두 사람의 죽음으로 그 사랑이 끝나는 순간까지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샹치 캐릭터의 모험은 그가 등장할 다음 마블 영화부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많은 대사가 중국어로 이루어지지만 정작 중국 본토에서는 이 영화의 개봉이 금지되어있는 상황이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개봉을 하지 못하는 이 영화는 중국 이외의 국가에서 극장 개봉에 들어갔으며 꽤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마블 영화를 보여준 마블 스튜디오는 이 영화를 시작으로 새로운 페이즈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11월에는 <이터널스>, 12월에는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이 시리즈의 이야기를 이어받을 것으로 보인다.
-
-
-
- 영화 <블러드 비스트> 예고편
붉은 보름달이 뜨는 특별한 저녁,
새로운 공포 게임 앱 "Werewolves Awaken"의 화려한 런칭 파티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천재적인 젊은 개발자 어거스트는 회사에서 떠밀리다시피 파티에 참석한 상황.
게임을 "야수의 표식"으로 비난하는 로만 신부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어수선해지고,
더구나 잔인하게 훼손된 시체가 발견되면서 파티는 아수라장이 된다.
마침내 살인자는 무시무시한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생존자들과의 처절한 살인게임이 벌어진다.
-
- 디즈니+ <폭군> 캐릭터 예고편
누구보다 먼저 마지막 샘플을 차지해야 한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인 네 사람🔥 청소부 '임상' 설계자 '최국장' 추격자 '폴' 기술자 '채자경' [신세계] [마녀] 박훈정 감독 작품 [폭군] 8월 14일 디즈니+ 단독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