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수2021-04-23 08:29:13
추억을 아름답게만 기억하려는 시도
화양연화 리뷰
경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잠깐의 불장난, 평생의 추억
1962년 홍콩,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시작된다. 그 시작은 두 부부가 같은 곳으로 이사를 온 뒤에 찾아왔다. 이웃끼리 조성된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차우(양조위)와 쑤 부인(장만옥)는 서로 친분을 키워간다. 그런데 그들은 같이 밥을 먹는 중에 서로의 배우자가 그들끼리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즉 쑤 부인의 남편과 차우의 부인은 내연 관계였다. 그 때부터 차우와 쑤 부인도 똑같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다.
차우와 쑤 부인이 불륜을 시작할 때에도 이들은 각자의 배우자와 똑같은 길을 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몰래 사랑을 나누는 모습도 에로틱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차우가 신문에다 소설을 기고하면서 자신이 쓰는 작품에 대해 쑤와 이야기를 하거나, 그들이 헤어질 것을 대비해 연습하는 식의 장면이 보여지니 말이다. 그 속에서 이 둘이 주고받았던 쿨한 대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자신감은 사랑이 무르익음에 따라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이들이 끝내 자신의 배우자들이 왜 바람을 피우게 됐는지를 알아차린 것이다. 더 사랑에 빠져들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도. 끝내 차우와 쑤는 그들의 관계를 끝낸다. 그리고 에필로그. 배경은 어느 새 1966년으로 넘어가 있다. 그러나 쑤 부인은 차우와 사랑을 나누었던 아파트에 가서 차우의 부재를 그리워하고, 차우는 캄보디아의 어느 사원에 있는 나무 구멍에다 뭔가를 속삭인다.
차우의 행위는 쑤 부인과 저지른 잠깐의 불장난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즉 화양연화로 기억하고자 하는 그 나름의 방법이었다. 이처럼 <화양연화>도 차우와 쑤의 사랑을 다양한 방식을 이용해 관객에게 각인시키려 한다. <아비정전>에서도 강조되었던 시계, 차우의 잘 빠진 양복, 쑤의 아름다운 치파오, 차우와 쑤의 일상들, 그들과 함께 걸어다녔던 어두운 골목, 그리고 우아한 음악들을 동원해 영화의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화양연화에 끝내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
그런데 오감을 통해 만들어진 1960년대 홍콩의 아름다운 모습은 묘하게 현실의 홍콩과 대조된다. 실제로 홍콩에서는 1967년에 67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시위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 상황은 에필로그에서도 홍콩이 어지럽다는 이야기로 간접적으로 언급이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홍콩과 중국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홍콩 사람들은 최근에도 민주화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중국은 그걸 강제 진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는 의문. <화양연화>는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해서 현재를 잊어보려고 하는 영화가 아닌지. 물론 의도는 이해한다. 차우와 쑤 부인의 불륜이 그들의 상처 받은 마음 때문에 비롯된 것처럼 영화가 추억팔이를 하는 이유도 영화 밖의 아픈 현실과 관련이 되어 있으니. 그러나 그걸 위해서 불륜까지도 미화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또 시간이 지나면 이 추억이 전혀 반대의 평가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화양연화>가 보여주는 매혹적인 모습에 끝내 공감할 수가 없었던 이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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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여성 시인이 짊어진 삶과 예술의 무게
잉게보르크 바흐만: 사막으로의 여행/Ingeborg Bachmann-Journey into the Desert
마가레타 폰 트로타/스위스, 독일,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2023/114min/‘새로운 물결’ 세션
비범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자신의 시로 남성 지배적인 독일 문학계를 사로잡는다. 경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바흐만은 유명한 극작가 막스 프리슈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열정적이었으나 일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끝없이 부딪힌다. 지친 바흐만은 친구들과 사막으로 여행을 떠난다. 자기 자신, 무엇보다 자신의 시를 되찾기 위해.(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를 읽은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사막으로의 여행〉의 한 장면에서 그녀가 ‘독일 유일의 여성 순수 시인’이라 소개받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잉게보르크는 언어의 순수성과 관념성을 탐구한 시인이었다. 그 순수함에 대한 탐구는 그녀가 《삼십세》에서 보여주었듯, ‘순수’ 언어가 젠더화되어 있다는 깨달음과 연동되어 있다. 즉, 잉게보르크는 순수/보편/초월이 젠더 권력을 감추는 익숙하고도 권위 있는 개념임을 알고 있었다. 여성 시인이라는 정체성은 이 깨달음을 위한 토대였다.
영화는 그런 그녀의 삶‧사랑‧시 궤적을 좇는다. 특히 잉게보르크와 4년간 연애한 저명한 극작가 막스 프리쉬와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들은 금세 사랑에 빠지고 함께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잉게보르크는 이내 막스에게 ‘연인/뮤즈/가사노동자’의 역할을 요구받는다. 애초에 꿈꿨던 ‘연인/동반자/동료’의 이상은 점점 흐릿해진다. 오히려 잉게보르크의 명성이 쌓여갈수록 막스는 질투를 느끼며 그녀를 더욱 옥죄려 든다. 영화에는 잉게보르크가 막스와의 관계에서 쇠잔해가는 과정과 막스와의 관계가 종결된 후 그녀가 다른 친구와 함께 사막에서 친밀성과 시,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교차하여 등장한다. 사막으로의 여행은 잉게보르크에게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수용하는 법을 가르쳐줌으로써 그녀에게 구원을 선사했다.
영화가 끝난 후 진행된 라운드테이블에서 이경미 연극평론가는 영화가 잉게보르크에게 선물한 ‘구원’이 실제 그녀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막스는 잉게보르크과 결별한 후 그들의 관계를 소재로 작품을 썼고, 그 안에서 잉게보르크를 모욕적으로 묘사했다. 잉게보르크는 막스와 헤어진 후 오랜 기간 트라우마와 약물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잉게보르크의 말마따나 “결혼은 일하는 여성(예술하는 여성)에게 불가능한 제도”였다.
예술가인 동시에 뮤즈여야만 했던 그녀 삶의 모순은 여성이 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케 한다. 우리는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그녀가 남긴 작품과 그녀 삶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를 통해서만 그녀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과 예술적 문제의식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른 누군가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순수’ 언어에 도전하는 역할을 기꺼이 떠맡는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잉게보르크에게 사막에서의 구원을 선물했듯,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와 우리 자신에게 구원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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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힐링이 된다면야
사실 이 드라마 볼 생각이 딱히 없었다. 잔잔하고 힐링되는 일본 특유의 감성 좋아하긴 하지만 워낙 많이 보고 살았어서 더 이상 구미를 당기는 장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꾸준히 이 드라마를 추천했으며 최근 심각한 서사만 봤었던 나는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볼 만한 장르를 찾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이 드라마가 눈에 띄었고 '보다가 중간에 이탈해야지' 하는 얄팍한 마음으로 이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했다. 보다보니 주인공 키요가 항상 웃으며 요리하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 없었다. 찾아보니 소재에 대해 논란이 좀 있었나 본데 결과적으로 난 힐링받았다. 그래서 리뷰를 좀 쓰려고 한다.
1. 과도한 판타지를 현실화하는 매개체, 음식
드라마의 실질적 주인공은 마이코 준비생 스미레와 함께 마이코가 되고자 교토에 왔지만 숙소의 요리사가 된 키요이다. 드라마의 주요 내용은 '두 사람의 우정'으로, 한 줄로 요약 가능하다. 스미레가 마이코로서 인정받는데도 키요는 질투하지 않는다. 키요는 무용에 몰두하는 스미레와 같이 요리라는 예술에 빠져들어 자신만의 길을 걸어나간다. 각자만의 열정을 쏟아부을 분야를 찾아냈기 때문에 누가 더 외적으로 빛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충분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스미레가 좀 더 화려해 보일 뿐, 키요에게는 소박하지만 내면이 단단한 차돌 같은 매력이 있다.
그들의 우정을 지켜보는 관찰자 역할의 사람들 또한 삐뚤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각자의 역할이 빛난다. 열등감에 매몰되어 남을 해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들 스미레와 키요의 우정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한다. 착한 사람들만 모여있는 기온이라는 동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일 만큼 판타지이지만 이 판타지를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착각하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음식이다. 모두가 키요가 만들어내는 맛있는 음식을 맛보며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을 통해 음식이라는 소재가 만들어내는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는 픽션이든 현실이든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당연한 행위이기에 이 드라마가 훈훈함을 보여주기 위해 버려진 현실성을 밥을 먹는 행위를 보여주며 '어딘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2. 전통과 폐습 그 어딘가에서
드라마에서 게이샤 문화가 가진 악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최근 마이코들의 착취 문제와 성 상품화, 희롱 문제 등이 대두된 것으로 보아 마이코, 게이코 소재는 분명히 미화할 만한 소재는 아니라는 점은 동의하기에 이 드라마가 일본의 전통 문화를 미화했다고 평가받을 소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우리 나라 드라마 중에서 '신기생뎐'이라는 드라마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성 상품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기생 문화를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기생 문화는 사라진 문화이기에 그 드라마는 픽션으로 문제를 가릴 수 있었지만 교토 기온 거리 속 마이코, 게이코는 여전히 실존하기에 조금 더 엄격한 잣대로 평가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본다. 시대가 변했으니 그 시대의 잣대에 맞게 어디까지가 전통이고 어디까지가 폐습인지를 정해야 할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도 그런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는 듯하다. 특히 눈에 띄는 캐릭터가 있다면 돌싱으로 다시 돌아온 요시노 캐릭터이다. 요시노는 특유의 오버와 너스레로 기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특별한 게이코라는 점을 보여준다. 모모코가 전통적인 게이코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요시노는 게이코, 마이코를 향한 답답한 폐습들을 타파할 혁명적 캐릭터인 것이다. 게이코들이 지켜나가야 할 전통을 상징하는 모모코와 전통의 답답함을 비판하는 요시노의 은근한 대립이 전통 문화가 가진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전통 문화도 이제는 조금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제안하는 듯하다. 요시노와 모모코의 다음 행보가 기대가 되는 것은 다음 세대인 스미레, 키요에게 전통 계승자와 현대인의 경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공연을 준비할 때에 마이코는 게이코들의 시중만 들고 무대에는 오르지 못한다는 규칙을 깨고 모모코가 모두 참여시키는 장면에서 모모코의 변화를 예감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최고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전통이 요구하는 답답함을 그저 참아온 모모코가 결혼이라는 중대 사안을 두고 자신의 미래를 고민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3.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선사하는 힐링 메시지
영화 '카모메 식당', '리틀 포레스트'와 같은 힐링 장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리틀 포레스트'보다는 밝고 '카모메 식당'보다는 어린 연령의 주인공이 등장해 발랄하기까지 하다. 경쟁, 질투 등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렁이는 현실 말고 긍정적인 관계들만이 가득한 동화를 보면서 잠시 정신에게 휴식을 주어도 될 듯하다. 그리고 보다보면 음식을 해먹고 싶은 욕구가 샘솟기도 한다. 뭐랄까 정성스레 음식을 해서 먹는 뿌듯함을 느끼고 싶다고나 할까. 그래서 난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또, 릴리 프랭키, 이우라 아라타 등 익숙한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의 단골 배우들인데 다보고 나서야 이 드라마가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들의 등장이 당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쯤되면 릴리 프랭키 배우는 거의 이 감독의 지문과도 같은 배우인 듯하다. 이 배우가 없으면 왠지 허전할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스미레 역할의 배우도 너무 예쁘지만 키요 역의 모리 나나 배우의 맑은 얼굴이 너무 매력적이다. '어느 가족' 속 아들 역할의 죠 카이리 배우의 폭풍성장도 반가웠다.
나도 키요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렇게 나만 느끼는 충만한 행복함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 지금도 충분히 순간의 행복함을 느끼면서 살지만 아직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만들진 못했기 때문에 키요에게 요리와 같은, 그런 일을 찾아내고 싶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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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이 넘는 여정을 끝낸 사람들의 이야기
이 글은 시사회 초대받은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흔히 삶을 여행에 비유한다. 탄생이라는 출발지에서 죽음이라는 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사건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축제 같은 순간을 경험하며 환상에 취하지만, 반대로 깊은 동굴 속에서 길을 잃은 듯 끝없는 좌절을 느끼는 순간이 생긴다. 그래서 세월을 막론하고 여행이 주제인 수많은 예술 작품은 사람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았다. 영화 '트립 투 그리스'도 주인공들의 여행이 이야기의 중심이지만, 평범한 여행 영화와 다른 약간의 독특함이 있다.
영화 '트립 투 그리스'
영화 '트립 투 그리스(The Trip to Grecce)'는 영국의 유명 배우 '스티브 쿠건(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롭 브라이든)'이 6일 동안 그리스에서 미식 여행을 즐기는 내용을 담았다. 2010년 (한국에서는 2015년) 개봉한 '트립 투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트립 투 이탈리아', '트립 투 스페인'으로 이어진 '트립'시리즈의 네 번째 이야기이자 마지막 시리즈이다.
내용을 그대로 적은 영화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트립' 시리즈의 구조는 단순하다. 중년의 두 남자는 '옵저버' 매거진의 제안으로 여행을 하며 현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영화의 대부분은 여행 도중 스티브와 롭이 자연스럽게 나누는 대화 내용이다. 그들의 대화는 멈추지 않고 오디오는 비어있을 틈이 없다. 롭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노래를 부르고 스티브는 여행지와 연관된 해박한 지식을 풀어낸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할 때도 음식에 대한 감탄보다 누가 더 비슷하게 유명인을 성대모사하는지 경쟁하기에 바쁘다.
이처럼 방대한 분량의 대사를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트립 투 그리스'는 대본이 없다. 인물의 장소와 상황만 정해져 있고 감독과 상의 하에 배우가 현장에서 즉흥으로 대사를 내뱉는다. 또한 두 사람은 극 중 이름을 자신의 본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트립' 시리즈의 감독 '마이클 원터바텀' 인터뷰에 따르면 배우들의 원래 성격을 과장하여 캐리커처같이 묘사했다고 설명한다. TV 다큐멘터리로 연출을 시작한 '마이클 원터바텀' 감독은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자연스러움과 현실감을 강조한다.
트립 투 그리스를 영상으로 미리 만나보세요!▼
긴 여행을 끝내는 지혜로운 마무리
그들이 여행한 그리스는 지중해 연안의 국가로 에메랄드 빛 바다가 둘러싼 아름다운 섬들이 많아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영화 속 그리스의 잔잔한 바다와 노천 식당에서 즐기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휴양지의 여유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스티브와 롭이 자유롭게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 당장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고 싶은 충동마저 든다.
영화는 아름다운 풍경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에 집중한다. 이전부터 '트립 투 잉글랜드'는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를, '트립 투 이탈리아'에서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셀리', 마지막으로 '트립 투 스페인'을 통해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의 발자취를 따라갔었다. 스티브와 롭이 그들과 관련된 여행지를 둘러보며 직접 언급하거나 영화의 상황이 그들과 비슷하게 연출되었다.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Odyssey)'의 내용에 따라 터키 아소스부터 그리스 이타카까지 여행한다. '오디세이'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자 이타카의 왕인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을 그린 작품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라는 뛰어난 전략으로 10년 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이타카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아들 '아이아스'의 소행과 포세이돈의 아들인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했다는 이유로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된다. 오랫동안 전해진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다양한 문학 작품에 영감을 주었으며, '오디세이'라는 단어는 여정, 모험 여행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영화 곳곳에 '오디세이'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스티브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이혼한 부인과 아들이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행을 먼저 마무리한 스티브와 달리 롭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오디세우스를 닮았다. 또한 40대에 잉글랜드를 여행한 그들이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긴 여행을 끝낸다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거기에 그리스에서 탄생한 '희극'과 '비극'의 개념이 더해진다. 스티브와 롭은 6일 동안 각자 기쁜 일과 암울한 일을 모두 겪는다. 예를 들어 롭은 아내가 늦은 저녁에 아이를 두고 홀로 영화를 보러 갔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지만, 결말에 이르러 그리스로 찾아온 아내와 사랑을 속삭인다. 영화는 롭의 해피엔딩과 스티브의 안타까운 결말이 번갈아 보여주며 희극과 비극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고전의 현대적 해석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트립 투 그리스'를 보통의 여행 영화가 아니라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트립 투 그리스'는 시리즈를 사랑한 관객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마무리였다.
우리의 오디세이는 어떻게 쓰일까?
영화를 보고 나니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오디세이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이 든다. 퇴근시간, 발걸음을 바삐 옮기는 사람들은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내일의 고난과 역경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을까?
주인공이 이제 막 여정을 시작했는지, 거의 끝나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은 여정 동안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이야기는 새롭게 쓰일 것이다. 오디세우스처럼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감동 스토리도 가능하다. 롭처럼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스티브처럼 멋진 모습을 스스로 자랑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람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마음이 내키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여행하자. 언젠가 끝날 우리의 오디세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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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각과 확신, 그 사이에서 <퍼스널 쇼퍼>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 2016
프랑스 / 미스터리 외 / 105분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착각과 확신, 그 사이에서 <퍼스널 쇼퍼>
주인공 모린은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저마다 뽐내기 좋은 취향과 유일무이한 개성조차 없는 인간이란 얘기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녀에겐 '단단하고 확실한 나만의 가치관'이 없다.
모린은 이란성쌍둥이 형제, 루이스와 같은 영매지만 오빠와 정반대의 삶을 선택했다. 루이스는 자신이 영매란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이를 부끄럽게 여기거나 바보 같은 행위라 여기지 않았다. 내세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죽은 자들의 메시지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인생관은 모린보다 뚜렷했으며 무엇보다 미래를 꿈꿀 줄 알았다. 그는 내일을 생각하며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남들처럼', 또 '보통으로서의 개인'처럼.
내가 개인이고, 네가 개인이며, 동시에 우리까지도 '개인'이 될 수 있는.
그리하여 익숙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남들. '사람들이 다 똑같지 뭐' 할 때의 그 사람들 같은.
루이스는 영매(남들과는 다른 인식을 가진 개체)였으나,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단지 사는 방식과 추구하는 사고가 바로 옆에 사는 이웃과 구분됐을 뿐이다. 누구든 그런 것처럼.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반면, 모린에게 영매는 삶에 혼란과 혼동만 불러올 뿐 특별한 힘이 아니었으며, 중요한 가치는 더더욱 아니었다. 특이한 이력을 가진 평범한 인간, 루이스가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죽기 전까지 모린은 갖고 있던 이력(영매)을 내세우긴커녕 보통 사람인척 살고 있었다.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일상을 보냈지만, 그녀는 사실 홀로 다른 가면을 쓴 '진짜 타자'였다. 어렵지 않게 무리에 소속되고, 일하다가도, 혼자가 될 때면 홀린 듯 스스로를 타자화했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배 한 척처럼, 숨 막히는 공허와 고독의 파도에 삶을 맡겼다. 그리곤 당연하게 삶에 관한 질문들을 모른 척 흘러 보냈다. 모린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떻게 되는 내버려 둔 것이다. 루이스는 그런 모린의 실체를 사람들에게서 숨겨주고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린 채로, 배에 구멍이 난 채로 그녀가 침몰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루이스 덕이었다.
루이스가 모린을 보호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린이 루이스의 존재를 자신의 편의대로 '등대'로 정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굳이 만들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린의 등대엔 불빛이 없었다. 암흑 속에서 꼭 죽은 것처럼 빛 없이 선 등대만 있었을 뿐이다. 현실에서 그 등대의 가치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그녀는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안정'이라 여겼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란 근본적인 물음보다 이미 벌어진 사태를 관망하는 걸 택했다. 그게 더 편했기 때문이다. 모린은 자신을 아는 일을 묻어두는 것으로 삶의 고통을 피해 가려했다. 그리고 그건 루이스가 정말 죽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나'를 아는 것만큼 괴롭고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그녀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과거를 어떻게 기록하고, 내일은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은 뒤로 미뤄두는 일, 모린은 가장 중요한 나를 확립하는 일을 딱 그 정도로 여겼다.
영매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부터 그녀에겐 어려운 문제였다. 모린은 루이스와 달랐으니까.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루이스'는 그의 의사와 별개로 모린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문젠 '모린의 루이스'가 의사의 언어 그대로 '예외적인 사례'(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사례란 말은 모린의 일상을 마구잡이로 흔들어놓는다.
잔잔했던 수면 위로 떨어지는 돌 하나. '예외'적인 '사례'.
마치 신이 이미 결정한 일에 딴지를 걸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되면, 다음은 쉽다.
예외에 희망을 붙이는 거다. 이 작업이 편해질수록 마음의 안정은 빨리 찾아오게 되어있다.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나 '예외를 획득한 생'은 '사'를 피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린 이 착각을 불안해하면서도 굳게 믿음으로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그게 보통 사람들이 가진 불안과 안정의 저울이니까.
물론 이미 깊은 자기 비관에 빠져있던 모린에겐 통하지 않는다. 희망을 품겠다는 선택지조차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심장기형'은 의사가 말한 '예외'에 꼭 맞는 결괏값이다. 루이스의 죽음이 예외적인 사례가 된 순간, 모린의 삶 역시 예외적인 죽음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6개월 후에 보자는 의사의 말에 자조적인 눈빛으로 "글쎄요, 가능할지 모르겠어요"라 대답한다. 내일 죽을 확률이 이미 나왔는데 어떻게 죽지 않을 희망을, 아니 아직은 죽지 않을 희망을 어떻게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쉽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희망을 노래하고 싶어도, 모린의 희망은 찬란한 빛이 제거된 흑백이었다. 모린은 자기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어른인 동시에 루이스의 죽음으로 분열되어버린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분열된 자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스스로를 거부하는 일이었다.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먼저 죽은 사람이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어요."
죽은 오빠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파리에서 키라의 퍼스널 쇼퍼로 일하는 모린. 하루에 몇 번이고 기차를 타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키라의 취향에 꼭 맞는 옷과 신발, 액세서리를 구한다. 일이지만, 틈만 나면 반납해야 할 옷을 갖겠다 통보하고, 유명 연예인답게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통제하려는 키라 때문에 모린은 견딜 수 없는 피곤과 빠져나올 수 없는 억압에 허덕인다. 그나마 그녀를 숨 쉬게 하는 건 루이스의 집에서 오빠의 신호를 기다리는 일이다.
모린은 오빠의 영혼을 느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직접 영혼의 신호를 포착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루이스에게 더 확실한, 더 강력한 신호를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유령에게 자신을 어필하란 기이하고도 이상한 모린의 요구. 그녀에게 오빠와의 약속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같은 영매로서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오빠가 정말 옳았다는 걸 증명할 기회를 주고 싶다는 모린의 진심이 결정적으로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침묵하는 영혼에 소리를 지르는 그때, 루이스의 집엔 불안해진 자신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모린, 자신의 울부짖음만 울려 퍼진다.
모린의 거짓말엔 이유가 있다. 그녀가 (분명 원하지 않았지만) 그제야 자신의 눈앞에 있던 검은 장막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눈을 뜬 순간 모린은 자신이 봐왔던 등대가 빛을 내뿜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내 세계에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확인한 모린은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그녀는 누구인가?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모린이 불안을 없애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욕망을 해방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는 키라가 입을 옷을 자신이 먼저 입으며 금기를 깨트린다. 고용주의 옷을 입으면서 자신의 직업적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모린. 묘한 쾌락과 심리적 떨림을 느낀 그녀는 점점 더 과감해진다.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키라의 옷과 신발을 탐한다. 익명이 보낸 문자가 모린의 고삐를 푼 결정적 계기로 이용된다. 마침내 그녀는 키라의 집에 들어가 키라의 옷을 입고, 키라의 사적인 공간을 자연스럽게 이용한다. 그러나 모린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루이스의 신호를 부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키라가 누리는 모든 것을 누려도 모린은 불안해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별 짓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안정감 때문이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루이스와의 이상적인 이별을 원한다. 그러나 모린에겐 오로지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는 이름도 얼굴도 없는 모린만 존재한다. 모린은 스스로를 '모린'이라 말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그런 와중에 삶의 목적이 확고했던 루이스와 같은 결말을 맞아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억울함이 아니었다.
모린은 언제든 예외적인 사례로 치부될 수 있는 현실에서 차라리 내가 아닌 '완벽한 타자'가 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키라의 퍼스널 쇼퍼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녀는 매번 실패한다.
하지만 모린은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고된 일상에도 틈틈이 심령 주의와 영매에 관한 정보를 찾고 습득한다. 자신이 영매이면서, 영매를 공부하는 아이러니라니.. 이는 모린이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믿고 써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역시 루이스와 비교되는 지점이다. 어떻게든 "끝을 보고 싶다"는 말과 다르게 모린은 루이스의 집에서 오빠가 아닌 다른 영혼을 마주하자 도주한다. 공포에 휩싸인 채 자신이 영매란 사실에 섬뜩함을 느끼며 도망친다. 루이스의 신호를 정말 받고 싶으면서도, 그 메시지가 정말 루이스의 것이라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도 역시 같다.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뭐 하나 확실한 믿음을 가져본 적 없는 모린에게 충분한 만족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결국 모린은 영매의 입으로 사후세계를 의심하며 금기를 또다시 어긴다. 나아가 누군지도 모르는 익명의 문자에 더욱 주도권을 뺏긴 채 질질 끌려다닌다.(그러나 모린은 그것을 위험하다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녀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으나, 매번 흑백 프레임에 들어가 죽음과 죽은 자가 보내는 신호에 몰두한다.
"금기 없이는 욕망도 없지."
그녀는 사실 첫 번째 금기를 깨기 전까지 무엇이 금기이고 욕망인지 소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키라의 옷을 입고 키라의 침대에서 누운 순간, 그녀는 달라졌다. 그러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을 휘감고 있는 불안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위한다. 모린에게 자위는 원초적인 욕망을 채우는데 제일 효과적인 도구로서, 허덕이는 정신을 대신하는 신체의 유일한 방식이었고,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타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애도만 하는 거 싫어.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이젠 내 삶을 찾고 싶어."
루이스의 연인이었던 라라는 새로 생긴 남자 친구의 존재를 모린에게 밝히며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를 보인다.
모린의 남자 친구 역시 전과 다른 태도를 취한다.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는 모린을 응원하고 위로했던 그는 단호하게 사후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그들은 모린을 현실로 데려올, 루이스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 삶을 찾고 싶다는 라라의 고백에 모린은 묘한 낯섦과 해결되지 못한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이를 비난하자 않는다. 라라의 걱정과 달리 모린에게 중요한 건 루이스의 죽음이 아니었으니까.
모린은 애도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게 목표였다. 루이스가 평안을 찾길 바란다는 그녀의 속삭임은 자신을 위한 반복된 주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라라의 남자 친구에게 죄책감을 갖지 말라 당부한다. 라라의 남자 친구는 모린이 자신과 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생각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일 뿐이다. 정작 모린은 루이스에게 느꼈던 역량의 차이를 고백하며 자신이 부단히 오빠를 따라가려 노력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끝내 오빠와 같은 속도로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었던 결말까지.
모린은 자신이 벅찰 정도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시간을 넘어 죽음에 돌진해버린, 나와 같은 심장기형을 갖고 있던 존재로 루이스를 기억한다. 따라서 "이제 그만 벗어나야죠." 란 말속에, '벗어나야 하는 것'은 루이스를 향한 감정들이 아니라 모린, 자신이 망가트린 마음인 셈이다.
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끝없던 모린의 고뇌와 방황은 키라의 죽음으로 멈춘다. 자신을 흔들어놓던 익명의 존재가 키라를 죽인 내연남이었다는 사실에 모린은 곧장 남자 친구가 있는 오만으로 떠난다. 지금까지 자신이 원했던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이제 더는 어떠한 효과도 얻을 수 없었으며, 사실적으로 그 효력 또한 모린을 드라마틱하게 바꿔주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닌 존재였고, 확신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은 건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죽은 키라의 시신과 키라를 죽인 내연남의 도주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명백한 사실로 무장한 진짜였다.
오만에 도착한 모린. 현실로 복귀한 그녀에게도 드디어 자신만의 공간이 생기는 걸까?
타인이 되고 싶은 욕망은 사라졌을까? 이젠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전부 확신할 수 없다.
모린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진실과 거짓을 섞어 말하고 있었고, <퍼스널 쇼퍼>는 그녀의 언어를 분석해 진위를 가리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택했다.
마지막 남은 질문의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정말 루이스는 모린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걸까?
"루이스 너야?"
마침내 오만의 한 고택에서 루이스로 추정되는 영혼과 모린은 교감한다. 그녀는 루이스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과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영혼에게 계속해서 질문한다. 긍정을 의미하는 "쿵!" 소리에 힘입어 영혼의 주인이 루이스라고 확신하는 모린. 그러나 그녀는 또다시 질문하는 실수를 범한다. 같은 질문을 또 하고 또 하면서 스스로에게 의심을 주입하는 걸 멈추지 못한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자동차처럼 그녀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듯 군다. 결국 영혼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침묵.
무엇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말아야 할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른 모린은 결국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아니면 그저 내 상상인 건가?"
"쿵!"출처: 영화 <퍼스널 쇼퍼> 스틸컷 (다음)
모린의 인생은 온통 흑백이며, 그 안엔 대답 대신 물음이 가득하다.
우린 대답을 찾는 걸 더 선호한다. 대답을 갈구하는 일은 질문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린 의문과 의문이 만든 모호함과 괴이함으로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질문에 정답을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영화는 루이스의 죽음으로 시작된 모린의 물음표가 꼿꼿하게 세워질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아무도 모르게 방향을 뒤집는다. 모린이 틈만 나면 찾아봤던 심령 주의 다큐나, 영매 작가의 전시회, 빅토르 위고의 작품 등이 이에 해당한다. 손수 조각난 이야기를 삽입해 관객이 착각과 확신 사이에서 길을 잃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우린 루이스가 모린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지, 정말 모린의 신호에 응답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나아가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전부 모린의 착각일 수도 있다. 모린의 뒤로 둥둥 떠다니던 유리컵을 든 영혼이 루이스가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확신할 수 없기에 확신할 수 있는다는 것이다. 답을 요구하지 않고, 먼저 질문하는 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안전한 수단이자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방식이다.
<퍼스널 쇼퍼>가 모린을 나무라지도 답답해하지도 않는 건, 물음을 가진 것 역시 그녀이고, 의심을 멈추지 못하는 것 역시 그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품은 물음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 방식이 또 물음표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은 '생'의 문제이기에 '사'가 관여할 수 없다.
<퍼스널 쇼퍼>는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여 모린의 마지막 질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난 그게 불편했으나 고마웠다.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영화는 질문하는 것이다"라고.
질문하는 것. 그의 말이 맞다. 영화는 끝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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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감독: 김철민 | 출연: 강종헌, 김창오, 박금숙, 서원수, 부만수, 이동석, 이철 외 | 제작: ㈜엠앤씨에프, 다큐창작소, ㈜영화사 진 | 배급: ㈜인디스토리, ㈜엠앤씨에프 | 러닝타임: 94분 | 관람등급: 12세이상관람가 | 극장개봉: 2021년 12월 9일]
재일조선인은 그간 <우리학교>(2007) 등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영화 속에서 종종 다뤄졌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은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는 한국사람,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사람으로 여겨지며 차별과 편견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는 김철민 감독이 18년간의 취재로 시대가 외면하고 이념이 가두었지만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온 사람들, 재일조선인 76 년의 역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재일조선인은 일본 식민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후손들을 일컫는 말이다. 해방 후 여러 사정 때문에 일본에 남게 된 그들은 ‘조선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재일조선인 1 세대는 무엇보다 후손들의 민족성 고양을 가장 중시했다. 우리 말과 역사,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가장 먼저 학교를 세웠고, 조선학교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식민 지배 35 년간의 뼈아픈 역사를 지나자마자, 그들이 맞닥뜨린 비극은 남과 북의 분단과 이념 대립의 냉혹한 시간이었다.
재일조선인 사회는 대한민국(남한)을 지지하는 재일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로 크게 양분되었다. 이승만 정권을 지나 박정희, 전두환 정권까지 ‘냉전’의 격화로 자본주의, 사회주의 진영간 신경전이 극렬했기에 남한은 ‘민단’만을 동포로 여겼고, 북과 교류하는 ‘총련’계는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철저히 외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독재정권은 국내에 유학 온 민단의 청년들을 체제 강화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에 암약해 온 ‘유학생 간첩단’으로 조작한 1975 년의 간첩조작사건이 바로 그것. 이들 130 여 명의 희생자 중 재일조선인 2 세인 강종헌, 이동석, 이철 등이 영화에 등장해 당시를 증언한다.
재일조선인 3 세 박정임과 박금숙 씨는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낸 학부모로 수년간 감당해야했던 트라우마를 떨리는 목소리로 전한다.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를 위시한 습격 데모 단체들이 조선학교를 수시로 찾아와 벌이는 헤이트 스피치가 학부모는 물론 학생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상상 이상의 강도임을 느낄 수 있다. 재특회는 2007 년 혐한과 극우의 정서를 등에 업고 발족한 시민단체로 욱일승천기를 들고 폭력적인 언행을 동반한 재일조선인 특권 반대 가두 시위를 주로 벌였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 조선학교를 찾아가 폭언과 협박, 기물파손을 일삼는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이들의 만행은 일본 사회 내에서도 사회 문제로 인식되어 2016 년, 일본 거주 본국 외 출신자에 대한 차별적 언동을 금지하는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 시행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나는 조선사람입니다>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마주하는 차별과 혐오는 사실 그들만의 일상도 아니고 일본 사회만의 이슈도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15 년째 국회에서 표류중인 ‘차별금지법’의 사례를 보더라도 작금의 우리나라에 전하는 메시지도 남다르다. 우리 사회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백래시와 혐오 정서가 사그라들기는 커녕 날로 거세지고 있어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인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유린되고 있다. 이들에게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는 그 모든 혐오와 차별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재일조선인들의 눈부시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힘찬 연대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의 말과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자립적으로 조선학교를 세웠던 선대 재일조선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끔 평화적으로, 하지만 또렷한 음성으로 학부모와 학생들은 민족성을 보장받기 위한 목소리를 이어간다. 이렇듯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미움만이면 증오심만이면 원동력은 되지만 쭉 싸우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재일조선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
재일조선인은 한반도의 밖에서 한반도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고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단초를 제공한다. 영화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속 재일조선인들이 한국의 관객들을 만나는 것처럼 이들이 한반도를 자유롭게 오가고 즐겁게 소통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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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더> - ‘아주 평범한 기적이 깃든 우주’
원더 (Wonder)
개봉일 : 2017.12.27
감독 : 스티븐 크보스키
출연 : 제이콥 트렘블레이, 줄리아 로버츠, 오웬 윌슨, 이자벨라 비도빅, 노아 주프, 브라이스 게이사르
‘아주 평범한 기적이 깃든 우주’
“나는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 거다.” 이제 5학년이 되는 작은 덩치의 남자아이 ‘어기’가 말한다. 어기에 대해 말해주자면 이런저런 할 말이 많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나 첫 숨을 내뱉고, 건강히 자라기 위해 27번의 수술을 거친 아이. 다른 이의 시선이 불편해 집안에서 쉽게 나가지 못하는 아이. 커다란 우주 헬멧을 쓰고 우주비행사가 되는 걸 꿈꾸는 아이. 누구보다 총명하지만 자만하지 않는 아이. 하지만 아직 많은 이가 알아주지 못한, 숨어서 빛나고 있는 아이. <원더>를 보면서 내내 마음속으로 외쳤다. “사랑스러운 우리 어기. 사랑스러운 아이들. 너무 예쁘다.” 어기를 포함해 등장하는 여러 아이들의 모습 또한 정말 사랑스러워서 중간중간 절로 웃음이 났다.
태어나자마자 갖게 된 상처들은 어기의 얼굴에 흔적을 남겼고, 어기는 그 흔적들을 가리고 싶어 한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라기보단, 남들의 시선이 부끄러워서. 가족들은 밖으로 나가길 꺼리는 어기를 위해 많은 걸 배려한다. 엄마 이자벨은 석사학위를 잠시 내려놓고 어기를 위해 홈스쿨링을 했으며 누나인 비아는 어릴 적부터 어기를 챙기며 엄마 아빠를 걱정시키지 않는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어기의 가족들은 태양처럼 빛나는 어기를 중심으로 도는 하나의 우주다.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나의 단점으로 비칠 수 있는 시간의 흔적을 가려야 한다는 부담감, 남들의 시선 앞에서 선뜻 용기를 낼 수 없었던 상황을 마주하고, 그것에 좌절해본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나는 평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그 무엇도 아니라는 우울한 마음이 들 때 <원더>를 추천한다. 당신이 굉장한 우주를 갖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도 충분히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
각자의 고민과 아픔 앞에서 좌절하고 무릎 꿇는것이 아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끝없이 날갯짓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예뻤다. 그리고 아이들의 힘의 원천인 가족애와 우정이 눈부시게 빛나는 영화였다.
원더 시놉시스
누구보다 위트 있고 호기심 많은 매력 부자 ‘어기'. 하지만 남들과 다른 외모로 태어난 ‘어기'는 모두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대신 얼굴을 감출 수 있는 할로윈을 더 좋아한다. 10살이 된 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엄마 ‘이사벨’과 아빠 ‘네이트’는 ‘어기'를 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동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왔지만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는 누나 ‘비아'도 ‘어기'의 첫걸음을 응원해준다.
그렇게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기'는 처음으로 헬멧을 벗고 낯선 세상에 용감하게 첫발을 내딛지만 첫날부터 ‘남다른 외모'로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사람들의 시선에 큰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어기'는 27번의 성형(?)수술을 견뎌낸 긍정적인 성격으로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변하기 시작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이륙 준비 완료”
5학년이 될 때까지 또래 친구를 사귀거나 학교를 다녀본 적 없는 어기를 위해 엄마 이자벨과 아빠 네이트는 큰마음을 먹고 어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집안에서 아빠와 광선검으로 칼싸움을 하고, 엄마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자신만의 우주인 작은 방 안에서 뛰놀기만 했던 어기에게 또래 친구들이 가득한 학교에 간다는 건 또 다른 행성에 착륙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외모가 눈에 띈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어기에게 다양한 눈빛으로 쳐다볼 불특정 다수 사이로 들어간다는 건 두렵고, 겁나는 일이었다.
어기는 얼굴에 난 상처들을 가리고 싶을 때, 혼자 있거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헬멧을 쓴다. 또래보다 조금 왜소한 어기의 어깨를 꽉 채운 채 얹혀있는 헬멧은 어기를 잠시나마 우주로 보내준다. 어기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우주에서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이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헬멧을 내려놓고 우주가 아닌 지구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이미 서로 아는 아이들, 끼리끼리 모여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 쭈뼛쭈뼛 등장한 어기에게 아이들은 여러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낸다. 어기는 자신을 지구에 내려온 츄바카 같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얼굴에 흔적이 있어.”
신발을 물려신는 집안의 아들 잭, 잘 사는 집안의 아들 줄리안, 이상한 애 샬롯. 어기는 처음 본 친구들의 눈빛과 신발을 보며 그들에 대해 추측해본다. 어기가 여느 아이들에 비해 눈치와 상황 판단이 빠른 건 어기가 총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는 반증 같아서 마음 한편이 아렸다. 첫 등교 날 줄리안과 몇몇 친구들에 의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어기는 소중히 길러온 머리를 자르고 헬멧을 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소답지 않게 말없이 헬멧을 벗지 않는 어기를 걱정하던 이자벨은 어기의 옆에 앉아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누구나 얼굴에 흔적이 있어. 얼굴은 우리가 갈 길을 보여주는 지도이자 우리가 지나온 길을 보여주는 지도야.”
어기의 얼굴에 생긴 흔적들은 흉한 흉터가 아닌 수많은 위기와 아픔을 견뎌낸 어기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가족들의 사랑이 담긴 지도다. 이 지도는 어기가 기적과도 같은 아이임을 말해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앞으로 어기가 걸어갈 수많은 길을 안내한다. 어기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사랑을 통해 우주가 아닌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무사히 찾게 된다.
“한 번만 그 눈으로 날 봐주길 바랄 뿐이다.”
어기가 엄마 아빠의 사랑을 잔뜩 받으며 침대에서 잠들 때, 어기의 누나 비아는 다정한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홀로 방으로 들어간다. 동생을 갖고 싶다는 소원을 빈 끝에 얻은 소중한 동생 어기는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파 매일같이 엄마 아빠를 걱정시켰다. 비아는 엄마 아빠만큼 동생을 사랑하기에 엄마 아빠가 아픈 동생을 더 신경쓰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이 집의 주인공이 동생이어도 괜찮았고, 엄마 아빠의 문제를 하나 더 늘리지 않도록 노력해 야했다. 아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비아는 첫재로서, 아픈 동생의 누나로서 책임감을 갖고 부정적인 말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어기를 챙긴다.
어기가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 비아도 새로운 학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새 학기 첫날이 이렇게 엉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 아빠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절친 미란다가 자신을 모르는척하기 시작했고, 드넓은 우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든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비아에게 친절한 말씨를 뽐내는 저스틴이 다가오고, 비아는 새로운 친구 앞에서 공통점을 어필하기 위해 얼떨결에 외동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항상 어른스럽게, 괜찮은 척 지내왔지만 어기의 누나이기 전에 비아도 이자벨과 네이트의 어린 딸이다. 비아도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고, 엄마 아빠의 우주에 중심에 있고 싶었을것이다. 비아는 아픈 동생을 위해 어기의 누나 역할을 집어 들고, 어린 딸의 역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기라는 우주를 따라 돌거나 그 뒤로 숨는 위성이 되어 살아간다.
저스틴은 비아의 말에 진심으로 집중해 주는 친구다. 저스틴은 자기 얘기하기에 바쁜 연극부 아이들과는 달리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무대 앞이 아닌 무대 뒤가 좋다고 말하는 비아를 신기해하며 만일 비아가 무대에 오른다면 혼자라도 박수를 쳐주겠다고 약속한다. 비아는 저스틴의 말에 용기를 내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고, 미란다의 양보 덕분에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서게 된다. 엄마, 아빠,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무대를 마친 비아는 벅찬 표정으로 가족의 품에 안긴다.
“넌 너무 신비로워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야.”
비아가 연기했던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대견한 자신에게, 그리고 비아의 연극과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아가 전하는 마음처럼 느껴진 대사였다. 만일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장 그 생각을 저 멀리 우주로 날려버리길 바란다. 당신이 너무 빛나고, 신비롭기에 남들이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니까 절대 실망하지 말라고, 낙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기는 5학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교에 간다. 그전까지는 또래 친구들을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었기에 어기에게 친구는 비아와 강아지 데이지가 전부였다. 잭을 만나며 드디어 나에게도 친구가 생기나-싶었지만, 줄리안과 함께 뒷얘기를 하고 있는 잭을 보고 어기는 크게 실망한다. 우주복을 입고 달 위를 뛰어다니는듯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어기는 다시 헬멧 속에 숨어버린다.
잭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계속해서 어기를 놀리는 줄리안과 한판 싸움을 한다. 잭도 처음엔 그저 선생님, 엄마의 부탁으로 인해 어기와 함께 어울렸지만, 어기의 친절함과 재치 넘치는 모습에 반해 진심으로 어기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잭은 선생님에게 사과 편지를 쓰고 근신 처분을 받지만, 다시 용기를 내 어기에게 다가간다.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땐 친절함을 선택해라.”
초등학교 고학년쯤부터 많은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다.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은 가족보다는 친구들과의 소속감을 중요시하게 된다. 나와 다른 것이 있다면 틀린 것이고, 친구가 맞다고 하면 쉽게 휩쓸리기도 하는 것이 그때의 아이들이다. 소위 잘 사는 집안의 아들이자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줄리안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아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교실의 실세랄까. 아이들은 낯선 모습의 어기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고, 어기를 괴롭히는 줄리안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한다.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줄리안처럼 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옳은 일’축에 끼는 분위기였으니까.
브라운 선생님은 매주 아이들에게 새로운 격언을 가르친다. 가장 먼저 가르친 격언은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땐 친절함을 선택해라.”였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이 알려준 격언을 따라 행동한다. 잭과 썸머는 다수의 시선이 만든 ‘옳은 배척’이 아닌 친절함을 베풀었고, 나는 그 아이들의 용기가 정말 대단한 것이라 칭찬하고 싶다.
“이겼니?”
수학여행에서 싸움을 했다는 어기의 말에 걱정하던 네이트가 뒤이어 묻는다. 그 싸움에서 이겼느냐고. 네이트는 어기의 첫 등교 날, 아는 것이 있어도 한 번만 손을 들고 과학시간엔 모두 밟아버리라고 말하며 어기에게 힘을 실어준다. 어기는 아빠의 말대로 과학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수업을 들으며 즐거움을 찾는다.
어기가 처음 학교를 구경하던 날, 줄리안은 어기를 한껏 내려다보며 과학은 선택과목이라 어려울 것이라고 무시했지만 어기는 과학경진 대회에서는 줄리안의 팀을 가볍게 재끼고 당당히 1등을 차지한다.
“넌 기적 같은 아이야.”
어기는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도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특별함으로 빛나고 있으니 우리는 평범하기보단 각자 다른 형태의 특별함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내 우주의 중심이다. 난 하나의 태양을 두고 돌고 있는 가려진 위성이 아닌 다른 우주의 옆에 머물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다른 이의 우주도 나의 우주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자.
상대의 외적인 형태가 아닌 그의 눈과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바라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그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며 살아왔는지 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지. 그의 우주엔 어떤 것들이 가득 차있는지.. 그리고 나의 우주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남들에게 말해주고 싶은지에 대해 천천히 살펴본 게 언제였는지.. 부끄럽지만 너무 멀어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내가 부끄러웠고, 평범함이라는 단어조차 뚫고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원더>는 이런 나의 부끄러운 우주에 대해,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에 대해, 우리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선물한 영화였다.
나는 여전히 어기처럼 커다란 헬멧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꺼내 쓰고 있다. 생각 한번, 다짐 한 번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만큼의 긍정적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여전히 용기 내는 것이 어렵지만, 언젠가는 이 헬멧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만일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의 어기와 나처럼 무거운 헬멧을 쓰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이 영화를 보고 있다면 당신도 충분히 특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마음껏 사랑하고 믿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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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질라 vs 콩」 7시간 시리즈 20분 요약 + 7분 설명ㅣ결말포함 영화리뷰ㅣ고질라 대 콩ㅣ고질라 킹콩ㅣ고질라 대 킹콩ㅣ몬스터버스ㅣ건데ㅣ
? '고질라 vs 콩 (Godzilla vs. Kong, 2021)' 고질라 대 콩 예고편 분석
그리고 몬스터버스(몬스터 유니버스, Monsterverse) 시리즈 요약 정리
1. "고질라"(2014)
제작사: 레전더리 픽처스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장르: 모험, 액션, SF
감독: 가렛 에드워즈
제작: 존 제시니, 메리 패런트, 토머스 툴
각본: 맥스 보런스틴, 프랭크 대러본트, 데이비드 캘러햄 외
출연진: 에런 테일러존슨, 엘리자베스 올슨, 브라이언 크랜스턴, 와타나베 켄,
샐리 호킨스 외
촬영 기간: 2013년 3월 18일 ~ 2013년 6월
개봉일자: 대한민국 2014년 5월 15일. 미국 2014년 5월 8일
음악: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러닝 타임: 123분
제작비: 1억 6,000만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 $200,676,069 (최종)
월드 박스오피스: $529,076,069 (최종)
한국 총 관객수: 709,734명 (최종)
2. "콩:스컬 아일랜드(2017)
제작사: 레전더리 픽처스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장르: 모험, 판타지
감독: 조던 복트-로버츠
제작: 존 제시니, 메리 패런트. 토머스 툴
각본: 맥스 보런스틴. 데릭 코널리, 존 개틴스, 댄 길로이
출연진: 톰 히들스턴, 브리 라슨, 사무엘 L. 잭슨, 존 굿맨, 존 C. 라일리 외
촬영 기간: 2015년 10월 19일 ~ 2016년 3월 18일
개봉일자: 대한민국 2017년 3월 8일, 미국 2017년 3월 10일
음악: 헨리 잭맨
러닝 타임: 118분
제작비: 1억 8,500만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 $168,052,812 (최종)
월드 박스오피스: $566,152,812 (최종)
한국 총 관객수: 1,689,717명 (최종)3. "고질라:킹 오브 몬스터(2019)
감독: 마이클 도허티
제작: 메리 패런트, 알렉스 가르시아, 토머스 툴, 존 자시니, 브라이언 로저스
각본: 마이클 도허티, 잭 쉴즈
원안: 맥스 보런스틴, 마이클 도허티, 잭 쉴즈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토호(도호) 영화사
장르: 모험, 액션, SF
출연진: 밀리 바비 브라운, 카일 챈들러 외
촬영 기간: 2017년 6월 19일 ~2017년 9월 27일
개봉일자: 미국 2019년 5월 31일. 대한민국 2019년 5월 29일
음악: 베어 맥크레리
주제곡: 일본 [ALEXANDROS] - Pray
러닝 타임: 132분
제작비: 1억 7,000만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 $109,432,609
월드 박스오피스: $384,232,609
한국 총 관객수: 359,041명 (2019년 7월 4일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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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흥신소 - 알고보면 쓸데없이 재밌는 영화리뷰
'이스케이프 룸2 : 노 웨이 아웃' 관람에 앞서 복습하는 '이스케이프 룸'입장료 없다는 말에 덜컥 들어와버린 방탈출게임장
우승하면 만달러의 상금을 받지만
실수하면 목숨을 받아가는 곳#출구가_입구 #원룸_데쓰매치
과연 이들은 이곳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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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스믹 씬> 메인 예고편
인류가 우주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서기 2524년,
연맹의 장군 ‘제임스 포드’는 무리한 작전으로
행성 하나를 파괴하고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된다.
인류를 지배하려는 외계 함대의 공격이 발생하자
‘제임스 포드’ 장군은 정예 부대와 함께
이들을 제압하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외계 함대와 접촉하며 이미 조종된 인류는
연맹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외계 종족의 인간 재배를 피해 맞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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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개그 더 크라운> 메인 예고편
그린베이에 신원미상의 누군가가 광대 복장을 한 채 거리를 배회해 주목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이 악의 없는 장난이라 여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섬뜩하고 무서운 행동이라 비난한다.
특종을 찾는 기자와 겁 없는 아이들, 그리고 팟캐스트의 진행자까지 '개그'라고 불리는 광대를 찾아다니고,
결국 마주한 공간에서 섬뜩한 모습을 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