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I2025-06-29 20:35:24
흔들리며 타오르다, 연기처럼 흩어지다
영화 <버닝> 리뷰
! 이 글은 영화 <버닝>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감독) 이창동
출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시와 닮아있다. 행이 모여 열이 되는 것처럼 장면이 모여 하나의 영화를 이룬다. 그의 영화에서 각각의 장면 속 미학 또는 의미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의 영화는 시처럼 흘러간다. 그렇게 끝에 다다르면 그제야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의 휘발성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결국 다 타버린 잿더미 속 잔열을 통해 불꽃이 존재했음을 느끼고 믿는 것이다. 영화 <버닝>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이창동’스럽다. 지금부터는 희미해진 기억을 붙잡고 <버닝>을 감각해보고자 한다.
존재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
작가 지망생 ‘종수(유아인)’는 우연히 동창인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같이 술을 먹던 중, 해미는 귤을 까먹는 판토마임을 선보인다. 무얼하냐고 묻는 종수에게 귤이 있다고 믿지 말고, 없다는 걸 잊어버리라는 말을 한다. 엉뚱하게도 느껴지는 해미의 대사는 종수의 머릿속에 맴돈다.
해미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에게 밥을 줄 것을 부탁하고 아프리카로 떠난다. 종수는 해미의 집을 찾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종수는 꾸준하게 빈 그릇에 밥을 채워준다. 그는 부재의 망각에 점차 익숙해진다.
얼마 뒤, 해미는 돌아온다. 의문의 남성과 함께. 그의 정체는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사귄 친구 ‘벤(스티븐 연)’이다. 벤은 종수, 해미와 다르게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금전적으로나 태도적으로나 상류층의 기운이 그를 감쌌다. 셋은 그렇게 어울린다. 그러나 벤은 왠지 모르게 해미를 얕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종수, 해미와는 다르게 그는 재미만을 추구한다. 종수는 그런 벤이 달갑지 않다.
영화 <버닝>은 존재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이 우물에 빠진 것을 종수가 구해줬다는 해미의 이야기를 종수는 기억하지 못한다. 우물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동네사람들의 기억 또한 엇갈린다. 이후 사라지는 해미와 벤에 대한 종수의 의심 또한 확신할 수 없다. 결국 무엇을 믿고 믿지 않을지, 그리고 그에 따른 존재에 대한 물음이 이 영화 전체에 깔려있다.
비닐하우스 태우기
종수의 집을 찾은 벤과 해미. 그들은 마당에 앉아 저무는 노을을 바라본다.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배운 춤을 춘다. 의미를 찾는 행위인 그의 몸짓을 카메라는 응시한다. 피곤해진 그녀는 방에 들어가 잠에 들고, 종수와 벤이 대화를 나눈다.
벤의 취미는 비닐하우스 태우기다. 그는 그렇게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단지 재미있기 때문에. 그것을 종수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사전답사를 온 것이라는 께름칙한 말을 하고는 벤은 해미와 다시 떠난다. 그 날 이후로 해미는 사라진다.
어린 종수는 불에 타는 비닐하우스를 지켜본다. 누가 언제 어떻게 태웠는지도 모르는 불길을 목도하는 어린 종수. 이는 물론 종수의 꿈이었다. 그럼에도 해미가 사라진 후 처음으로 ‘버닝(Burning)’의 장면이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무언가가 타버린 뒤, 그 흔적을 통해 사건 이전의 상태를 유추할 수는 있으나 이전의 상태를 복원할 수는 없다. 똑같은 것을 갖다놓더라도 그것은 이전의 것과 분명히 다르다. 결국 발화 이전의 존재에 대한 믿음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앞서 이 영화가 존재와 믿음의 이야기라고 해두었다.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는 벤의 모든 행동을 의심한다. 벤이 해미가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말했을 때, 종수의 머릿속에는 사라지기 이전의 해미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분명히 벤이 있었다.
연소되는 것들
그렇다면 종수는 왜 그렇게 벤을 의심하는 것일까? 그리고 종수에게 해미는 어떤 존재였을까? 종수와 해미는 비슷한 점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둘은 동갑이며, 20대 청춘이다. 그들은 각각 단순 노동을 하고 있으나 소설을 쓰고, 의미를 찾고자 하는 방향성이 존재한다. 이 점은 재미만을 추구하는 벤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과 벤의 관계는 나이, 출신, 사회적 위치, 삶의 태도 등 수많은 기준에서 양면성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진다. 해미는 과거이자, 좋아하는 사람이자, 의미이자, 청춘이자, 예술이다.
그러나 벤이 해미를 태워버렸다. 과거는 현재에 의해, 좋아하는 사람은 더 멋있는 사람에 의해, 의미는 재미에 의해, 청춘은 시간에 의해, 예술은 대중에 의해 불타버렸다. 최소한 종수의 머릿속에서는 말이다.
벤의 화장실 선반에서 발견된 해미의 것으로 ‘추측’되는 시계,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해미의 고양이로 ‘추측’되는 벤의 새로운 고양이 등 의심의 정황은 많으나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턱이 없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해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종수의 확대해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벤이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다. 하지만 종수에게 불확실성은 큰 고통일 것이다. 그는 소설을 써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결국 그는 벤을 살해하면서 혼란에서 벗어난다.
<버닝>은 보는 사람에 따라 정말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영화이다. 2시간 반 가량의 이 영화가 다 타버린 뒤, 아무 생각 없이 뒤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자리를 끝없이 응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양쪽 모두를 쉽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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