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인2025-07-10 22:24:23
감각과 외면 사이
<퀴어>(2024)
<퀴어(Queer)>(루카 구아다니노, 2024)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본문의 원작 인용들은 윌리엄 S. 버로스의 <퀴어> 2020년 번역본과 <정키> 2009년 번역본에서 가져옴 (모두 펭귄클래식 코리아 발행, 조동섭 옮김)
윌리엄 리와 윌리엄 리
안드레 예치먼이 <그해 여름, 손님>에서 엘리오 일인칭으로 서술하는 경험, 생각과 감정은 편견과 혐오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부모님도 완전한 안전지대는 아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엘리오의 심리나 올리버의 퀴어쉐임 등을 모호한 비언어적 표현에 함축하고 나머지는 미화하는 각색을 택한다. 영화의 엔딩, 모닥불 앞에 있는 엘리오가 회상하는 기억을 재현함에 가까워 보인다.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화면에는 풍화된 그대로 아름다운, 그 여름 두 사람이 본 유물 사진이 흐른다. 리와 유진의 흔적이 남은 소품을 나열하는 오프닝을 연출하는 <퀴어>는 언뜻 그와 유사한 방향을 따르려는 듯하다. 허나 그 사이에는 -윌리엄 버로스가 리의 공포를 은유하는 상징으로 사용했던- 지네가 기어다닌다. 실제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미화된 기억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환상과 환각을 구현해 수면 아래의 모순된 상태와 정서를 드러내는 <퀴어>는 어쩌면 처음부터 나란히 두고 보기 어려운 영화들인지도 모른다.
“너 퀴어 아니지? You’re not queer, right?” 화면에 등장한 리가 가장 처음 뱉는 대사다. 이미 스스로 부정의 답을 짐작하는 의문문에 담긴 단어, “queer”, 영화 <퀴어>에 대해 말하려면 이 표현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퀴어> 속 “퀴어”는 일단 게이를 일컫는 당시 멸칭, ‘남성을 사랑하는 남성’보단 ‘남성과 늘 자고 싶어하는 (비정상적인)남성’에 가까운 뉘앙스의 말이다. 허나 모욕하고 공격하려는 의도로 밖에서 안으로 꽂히는 언어와, 내가 그렇다고 드러내기 위해 발화하는, 혹은 커뮤니티 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아주 같지는 않을 테다. 남들이 아무리 ‘퀴어’가 무엇이라 떠들어도, 퀴어로 정체화했거나 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개인 각각의 경험은 다른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니 1950년대 멕시코시티에서 윌리엄 리와 그 친구들이 자신과 주변인을 일컫는 “퀴어”는, 말하자면 수치심, 혐오, 자기학대, 갈망와 미세한 자긍심의 꼭짓점을 이은, 회전하고 변형되는 비대칭의 도형 가운데에 놓인 복잡한 정체성의 언어다. 이를테면 조는 남성들과 맺은 관계를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자꾸 상대방이 물건을 훔쳐가게 (사실상) 내버려두고, ‘그린랜턴’의 “screaming fags”(이러한 표현들은 오히려 원작의 것을 순화한 편이다.)를 낮잡아 이른다. <퀴어>는 이런 상태와 감정, 역사를 숨기지 않는다.
여기서 출발해 리를 이해해보자. 거의 모든 배경음악은 리의 심리를 반영한다. ‘이래서 퀴어와는 친구하기 어렵다’던 두 남자의 뒷말 후 늘어지던 음울한 음악은 곧 ‘Come As You Are’(Nirvana)로 이어진다. 이 강렬한 곡이 유진과 마주치기 이전부터 시작되는 까닭은, 그 찰나의 경험에서 발생한 에너지가 번져 리를 물들여서다. 유진과 함께 걷던 도중 흘러나오던 재즈(변주가 많은, 틀린 음은 없다는)는 리가 거실 전등을 켜자마자 뚝 끊겨버린다. 리가 테이블에 도구를 늘어놓고 익숙하게 약물을 준비하는 긴 숏에서 흐르는 것도 처음엔 정적이다. 약을 주사하면 들리는 것은 ‘Leave Me Alone’(New Order). (흥미롭게도 <본즈 앤 올>이 뉴 오더의 전신 조이 디비젼의 ‘Atmosphere’를 삽입한 것과는 사뭇 구별되는 쓰임이다.) 화면 사이드에 우울하게 머무르던 리의 얼굴이 컷된 후 뒤따르는 건 술병과 잡동사니가 널린 거실 전경. 인식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밀어내는, 자신을 돌보기를 거부하는 상태. 리의 손이 늘 지저분한 건 단지 ‘중독자라서 물을 기피하는 탓’(-<정키>)만은 아니다. 그가 자주 장황한 스토리텔링을 전시하는 건 나르시시즘보단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인다. 레스토랑에서 그가 뱉은 “homosexual”을 듣고 옆 테이블 여성이 기겁하는- 리는 그런 취급을 유도하며 자신을 공격한다. 한편으로 그는 교감을 바란다. 리가 ‘보보’를 인용한, “지식과 성실과 사랑으로 편견과 무지와 증오를 극복할 의무가 있다”는 말은 원작에서 보보의 끔찍한 죽음에 관한 묘사로 이어진다. 그 묘사를 잘라내고 인용하는 영화 <퀴어>가 다다르는 곳은 버로스의 자학적 ‘공연 무대’도 아니고 <네이키드 런치>(1991)가 같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이끄는 장소와도 다르다.
윌리엄 버로스가 쓴 ‘대사’의 상당부분을 그대로 가져온 <퀴어>가 추측하거나 각색하는 중요한 지점은 리와 유진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다. 먼저 버로스 자신은 리의 사랑을 의심했고 유진은 애초에 퀴어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는 1985년에 덧붙인 프롤로그에서 유진을 “유령 같은 존재”, 리가 고른 “실패할 대상”으로 묘사한다. “리가 앨러턴에게서 찾는 것은 다름 아닌 관객”, “앨러턴은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들에 찬성하는 뮤즈의 역할을 떠안은 채 그 안에서 당연히 불편해한다.” 버로스는 리의 갈망은 사실 유진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적는다. “자신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성적 접촉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리는) 기꺼이 어떤 일이라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p.14~19)
<퀴어> 이전 리의 약물 중독을 다룬 <정키>에서 버로스는 동성애를 은근히 그리고 꾸준히 약물 중독과 동일선상에 놓는다. 하지만 ‘나를 포함하지 않는 무리’를 관찰하듯 서술된 이 경멸들은 반사돼 그 자신을 겨냥하는 것처럼 읽힌다. 영화 <퀴어>, 리의 어떤 환각에는 팔에 주사를 꽂은 여성의 나체 상반신이 등장한다. 리의 손이 몸을 쓰다듬자 그는 비웃으며 묻는다, “당신 퀴어 아니야?”, 리의 손은 답한다, “난 퀴어가 아니야, 그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지.just disembodied.” 자신을 퀴어라고 전시하는 리는 내심 성적인 이끌림을 “정신과 분리된” 육체적 욕구로 좁혀 인식하며 약물중독에 비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리는 사랑을 느끼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동시에 제 사랑을 의심하고 그것을 깎아내리는, 모순된 상태에 놓여 있다. 초반 영화는 펍에서 조의 이야기를 듣던 리가 홀로그램화되는 초현실적 연출을 넣은 바 있었다. 이 꾸준한 disembodiment의 감각에 숨은 심리는 버로스 자신의 글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정키>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약의 효과는 특별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 어쩌면 나는 내가 마약과 대마초와 코카인에서 찾고 있었던 것을 야헤에서 찾을지도 모르겠다.”(<정키>, p.258) 구아다니노와 커리스케츠는 이 모호한 서술에 닿아 있는- 리의 동성애가 약물중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기성사회가 비정상으로 낙인찍은 자신을 달리 바라보려는 시도, 그리고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갈망의 발현 중 하나가 약물 사용이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다시 오프닝 크레딧으로 돌아가면, 그 마무리에 리가 쓴 글은 삼차원의 반투명한 결정으로 형상화된다. 평면 종이에 쓰인 소설 결말부에 위치한 입체적 미궁, 스스로도 ‘<퀴어>를 쓴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다’는 버로스의 고백, 영화 <퀴어>는 그런 실마리들을 발견하고 풀어내, 리와 유진을 어쩌면 원작자가 의도한 바와는 사뭇 동떨어져 있으나 그의 무의식과는 포개질지도 모르는 새로운 인물들로 재구성하고 있다. ‘퀴토에서 산 단검을 갈러 가는 길에 눈물을 흘린’(p.23) 버로스의 경험을 영화는 나체 여성 이전에 배치된 꿈 안에 레퍼런스한다. 하지만 버로스가 유진을 바로 그 (리가 자신을 찌르는) 칼에 비유했던 반면, 영화에서 리의 꿈은 상징들을 경유해 유진의 얼굴로 수렴한다.
<퀴어>(2024)
윌리엄 리와 유진 앨러턴
<퀴어>의 베드신들은 리의 심리, 리와 유진의 관계 역학을 드러낸다. 전갈 목걸이를 한 젊은 남자는 리를 바라보며 옷을 벗지만, 리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옷을 벗는다. 섹스 후 남자가 ‘가봐야 한다’고 말하자 리는 주저하며 몰래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가 다시 넣는다. 남자는 인사를 건넨 후 망설임 없이 방을 나간다. 서로 원해서 보낸 하룻밤인데 리는 상대방과 자신이 동등하지 않다고 느낀다. 첫눈에 반한 유진을 대할 때도 이런 감각은 늘 자리한다. 리는 유진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유진은 나와의 관계를 원치 않는다'고 어느 정도 단정한다. ‘유진을 어루만지는 상상의 손길’은 이미 일부 단념한 와중 어쩌지 못하는 이끌림을 시각화한다. 이들이 실제로 닿는, 유진이 리에게 기꺼이 응하는 섹스들은 유진이 술이나 잠에 취해 있을 때 이루어진다. 두 사람의 첫 베드신엔 이들의 관계 역학이 묻어난다. 리는 유진을 올려다보며 오럴 섹스를 해주는 반면, 유진은 리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애무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유진이 담배를 물자 리가 성냥을 긋고, 유진이 리의 바지 지퍼를 천천히 열면, 얼어 있던 리가 끝까지 탄 성냥을 서둘러 끈다. 리는 늘 어쩔 줄 모르고, 먼저 스킨십을 주도하더라도 유진의 눈치를 보며 불붙인 성냥을 쥔 듯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다른 장면에서 유진은 리가 키스하려 하자 초연하게 응한다.(“If you insist.”) 이들이 키스한 직후 영화는 행위의 묘사를 생략하고 리가 기다리는 가운데 유진이 이를 닦는 숏으로 넘어간다. 리와 키스했기 때문에 이를 닦는 듯한 편집, 이는 아마도 리의 관점이다. 여행중 관계 후 “너도 이 모든 걸 조금은 즐기는 거지?”라고 물으며 흐느끼는 리와 “그럼요, 물론이죠.”라고 답하며 몽롱하게 미소짓는 유진, 영화는 그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해 맞닿은 시선을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마주놓인 얼굴들은 어쩐지 어긋나 있는 것 같다. ‘사랑을 나눈’ 후에 리는 늘 유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려 하지만 유진은 둘만의 공간을 기피하거나 리의 손을 걷어내곤 한다.
허면 리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유진 앨러턴은 무엇을 느끼는가. 앞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대부분 미화된 엘리오의 기억이라고 적었다. 허나 영화에는 그 ‘대부분’에 해당하지 않는, 엘리오의 시선 사각지대에 머무는 올리버의 순간들이 있다. 올리버, 그리고 <본즈 앤 올>의 리, 이들은 일인칭의 소설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독립된 상대방의 자리를 얻는다. 약혼으로 인해 관계는 종료되지만 올리버는 엘리오의 기억으로 흡수되고, 자신의 요청으로 먹힌 리는 매런 안에 상징적으로 살아남는다. 리의 시야를 벗어나 사라지는 <퀴어>의 유진은 이들과도 구별되는 위치에 있다. 전지적 작가가 서술하는 원작의 유진은 리가 그 심리를 파악하는 자, 리의 반영이고 자기학대 수단이었던 반면, 영화 속 유진은 모를 존재다.
앞서 언급한 첫 베드신엔 다른 포착도 있다. 리는 유진이 침대 가에 놓아둔 안경을 저도모르게 떨어뜨리게 만드는 자다. 영화는 이렇듯 작은 언행들을 섬세하게 각색하고 추가하며 원작과 별개의 유진을 쉐이핑한다. 원작 속 여행 중에 찾은 해변에서 유진은 물에 들어가길 거부하지만, 영화에서 누워 있는 리를 물로 끌어들이는 건 유진이다. 원작에서 리가 춥지 않냐고 묻자 유진은 춥다고 답한 후 (자신도 추우므로, 마지못해) 곁으로 오라고 하지만, 영화에서 유진은 춥지 않음에도 리를 곁에 오게 해준다. 저절로 움직인 다리로 건드리는 안경, 미처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 언어로 설명되지 않고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찰나들을 영화는 포착한다. 유진이 리를 만날 때 곧잘 느끼는, “기분이 나쁜데도 그 이유를 꼬집을 수 없는”(p.47) 상태를 영화는 리의 탓이 아니라고 재해석한다. 리에 대한 유진의 맞사랑을 증명하려는 것이라기보단, 유진이 계속해서 낯선 감각을 느끼면서도 부정하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육체이탈/불일치”로 투명해지는 느낌, 그것은 야헤를 흡입한 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거울처럼 마주보는 리와 유진에게서도 관찰된다. 유진 역시 리에게 “Lee, I’m not queer, just disembodied.”라고 말한다. 이것은 리의 내면의 반사일까, 아니면 리가 겪은 것과 유사한- 유진의 모순된 심리일까. 시청각이 차단된 채 춤추는 그들을 담는 화면에는 다만 시각화된 촉각만이 남는다. 살이 엉겨붙고 유기체처럼 움직여, 이내 각자의 심장을 뱉어낸 두 사람은 심장 모양으로 웅크린 한 덩어리가 된다. 이 “talking without speaking”은 앞서 바다에 들어간 두 사람이 물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접촉해, 입을 열지 못하는 상태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 직후 베드씬을 삽입했고, 그 다음으로는 유진이 리를 밀쳐내는 상황을 이은 바 있었다. 이 흐름처럼, 야헤에서 깨어난 리가 눈물을 흘리며 유진을 부르자 유진은 ‘자라’며 대화를 차단한다. 유진의 감은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리에게 닿지 못한다. 유진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은 그의 시점숏도, 텔레파시 고백도, 어쩌면 그들의 초현실적 댄스조차 아니다. “네가 어젯밤 널 봤어야 했는데”라며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는 닥터 코터의 시선을 받아내는 얼굴. 늘 여유로운 미소만 짓던 그가 불안과 경계심을 내비치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퀴어>가 원작을 초월해 짐작한 유진의 솔직한 ‘목소리’다. 영화는 무방비한 유진을 잠깐 화면에 묶어두었다가 이내 놓아준다. 정글에서의 모호한 분리 이후 등장하는 유진 혹은 유진에 관한 말들은 실제의 유진이 아니다.
본인조차 스스로를 완전히 모르는 자이기에, 유진은 무언가의 투영이 아닌 온전한 상대방이다. 그는 리의 환상이 건축한 폐쇄된 공간에서 리가 쏜 총에 맞아 죽고 나서조차 증발한다. 허나 좀처럼 파악되지 않던 상대방이 건넨 실제의 터치 하나, 그것만은 리에게 남는다. <퀴어>가 주목하는, ‘리가 죽을 때까지 살아남는’ 촉각은 오히려 성적인 의도가 그다지 없는 접촉에 의한 것이다. 금단현상 탓에 덜덜 떨던 리의 가장 못난 찰나를 감쌌던 유진의 다리. 남성들과 맺는 관계를 일종의 ‘중독’과 연결지었던 리의, (애초에 분리돼 있지 않았던)‘정신’과 ‘육체’를 이어주는 매개가 그 사소한 접촉이었던 게 아닐까. 화면에서 사라진 유진 안에 어떤 감각이 살아남아 있을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퀴어>의 엔딩은 리에게 있어서는 꼭 비극인 것만은 아니고, 유진에게는 열려 있다. “한 번 문을 열면 돌이킬 수 없어. 외면하는 수밖엔 없지. 그런데 그럴 이유가 있어?But why would you?”(-코터) 어떤 ‘인정’은 안락함에서 벗어나는, 불편함을 응시하는 행위다. 사랑과 욕망을 인지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꾸 괴롭히고 부정하게 되는 리와, 감정과 정체성을 외면하기에 편안하게 존재하는 동시에 ‘까닭없이 불편해지곤’ 하는 유진, 일치와 불일치 사이 간극에서 방황하는 두 인물을 탐구하는 <퀴어>는 사실 영원히 완결되지 않는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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