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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oDAY2025-07-11 08:00:02

슈퍼맨 | 신 대신 인간의 길을 선택한 희망의 영웅

<슈퍼맨>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토록 깔끔하고 희망찬 <슈퍼맨>이라니

 

제임스 건이 만든 슈퍼히어로 영화 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이들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등장인물이 많은데, 대부분은 선의로만 움직이지는 않는 악당이거나 안티히어로가 대부분이었다. 적재적소에 삽입된 음악, 기괴함과 과장됨 사이를 오가는 B급 유머와 연출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공통점은 따로 있다. 두 작품 모두 단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의도가 명확하다는 것.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키워드는 가족이었다. 1편에서 '스타로드'는 멤버들을 만나 엄마의 빈 자리를 채웠고, 2편에서는 바로 옆에 있었던 진짜 아빠 '욘두'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3편은 스타로드뿐만 아니라 로켓을 비롯한 모든 멤버들이 가족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평범함'이라는 키워드 하에서 나사 빠진 악당들이 가족이나 친구처럼 잊고 지내던 일상적인 가치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막 내린 DCEU을 대신하는 DC 유니버스의 첫 장편영화, <슈퍼맨>에서도 제임스 건의 역량은 빛난다. 모든 장면이 슈퍼맨 가슴에 새겨진 S라는 문양의 의미, 곧 '희망'이라는 가치를 구체화하기 위해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슈퍼맨과 떼놓을 수 없는 메타포를 영리하게 활용한 덕분에 부정 못 할 한계도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 결과 <슈퍼맨>은 DC 유니버스의 첫 비행으로서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희망차다.  

 

 

 

 

 

 


추락하는 슈퍼맨

 

<슈퍼맨>은 과감하다. 선택과 집중이 확실하다. MCU의 <스파이더맨>과 <더 배트맨>이 그랬듯이 영웅의 탄생과 성장, 역경과 각성이라는 기본적인 구조 중 앞의 두 장을 짧게 요약한다. '크립톤 출신 칼-엘이 지구로 보내졌고, 인간 양부모 밑에서 클라크 켄트로 큰 끝에 슈퍼맨이 됐다'라는 이야기는 자막 몇 줄로 대신한다. 그 대신 <슈퍼맨>은 처음으로 적에게 패배한 뒤 남극에 곤두박질친 슈퍼맨을 비추면서 막을 올린다. 

 

 

 

단순히 물리적인 추락만 보여주지 않는다. '슈퍼맨'(데이비드 코런스웻)을 정신적으로도 몰아붙인다. 그는 생물학적 부모인 '조-엘'(브래들리 쿠퍼)과 '라라'(안젤라 새러피언)의 메시지 덕분에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슈퍼맨은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지구에서 선을 행하며 그 희망을 보여주라는 것. 이는 '고독의 요새'에서 태양 빛을 받으며 치료받을 때마다 반복해서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 그의 초심이자 원동력이었다.   

 

 

 

제임스 건은 슈퍼맨의 초심을 짓밟는다. 슈퍼맨을 죽이기 위해 연구에 몰두한 '렉스 루터'(니콜라스 홀트)는 '울트라맨'과 '엔지니어'라는 메타 휴먼을 만들어 슈퍼맨을 궁지에 빠트리고, 그의 뒤를 밟아서 고독의 요새를 찾아낸다. 슈퍼맨의 반려견, '크립토' 등을 제압한 루터는 슈퍼맨 부모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지구로 오던 중 지워진 메시지의 뒷부분을 발견해 복원하는 데 성공한다. 

 

 

 

그 내용은 충격적이다. 조-엘과 라라가 말한 희망은 칼-엘이 이해한 바와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약하고 어리석은 종족인 인간을 짓밟고, 지구를 정복하고, 크립톤인의 유전자를 퍼뜨려서 새로운 크립톤인의 희망이 되라고 아들에게 요구했다. 이 메시지가 공개된 후 슈퍼맨은 남극에 추락할 때보다 더 크게 내려꽂힌다. 믿었던 부모님에게 배신당한 그는 더 이상 희망의 상징이 아니니까. 이제 그는 정복과 공포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믿음과 사랑의 비상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구석에 몰린 슈퍼맨. 그를 구덩이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바로 칼-엘이 아닌 클라크 켄트다. 크립톤인과 슈퍼히어로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를 구해내기 때문. 막 클라크와 연애를 시작한 '로이스 레인'(레이첼 브로스나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은 기자로서 반항적이고, 모든 사람과 세상을 의심하는 반면, 클라크는 세상과 인간을 일단 믿는다고. 

 

 

 

클라크의 믿음은 다양한 형태의 사랑으로 발현되며 그를 다시 슈퍼맨의 길로 이끈다. 로이스와의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다. 클라크와의 관계를 끝내려고 결심했던 로이스. 하지만 궁지에 몰린 클라크가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신뢰를 보내자,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은 뒤 루터의 음모를 파헤치고, 슈퍼맨을 위기로부터 구해낸다. 그녀의 취재가 없었다면 슈퍼맨은 루터가 만든 주머니 우주 감옥으로부터 지구로 귀하지 못했을 테니까.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결정적이다. 영웅 겸 기자로 지내며 양부모에게 전화 걸 시간도 없었던 클라크. 하지만 크립토나이트에 중독된 그가 기댈 곳은 결국 엄마 아빠뿐이다. 아빠 '조나단'은 그런 아들을 격려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터전을 마련해 줄 뿐이라고. 또 그 위에서 어떻게 성장할지, 루터가 찾아낸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너의 몫이라고. 그 덕분에 클라크는 여전히 슈퍼맨을 믿는 이들을 위해 싸울 힘과 의지를 되찾는다. 

 

 

 

선의와 우정의 역할도 크다. 클라크는 '그린랜턴'(네이선 필리언), '호크걸'(이사벨라 메르세드), '미스터 트래픽'(에디 가테지)이 자신을 '저스티스 갱'의 일원으로 안 받아주는 와중에도 그들에게 신뢰를 보냈다. 그들은 슈퍼맨이 나설 수 없는 순간에 그의 손과 발이 되어줌으로써 믿음에 보답한다. 함께 투옥된 '메타몰포'(앤서니 캐리건)도 마찬가지다. 그는 소형 인공 태양을 만들어서 슈퍼맨을 일시적으로 회복시켜서 탈옥시키고, 슈퍼맨은 그의 아들을 구해준다. 이 묘사 또한 선의에 기반한 상호 신뢰가 곧 슈퍼맨의 힘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S라 쓰고 희망이라 읽다

 

사람과 세상을 향한 클라크 켄트의 믿음은 곧 슈퍼맨이 상징하는 희망이라는 가치로 발전한다. 루터가 그를 정치적 곤경 빠트린 덕분이기도 하다. 루터는 보라비아의 '구르코스'(즐라트코 버릭) 대통령과 손잡고 자한푸르를 침략하여 슈퍼맨의 국제 분쟁 개입을 유도한다. 이때 슈퍼맨은 미국 정부와의 어떤 협의도 없었기에 정치적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고, 루터가 고독의 요새에서 찾아낸 메시지는 여기에 기름을 붓는다.

 

 

 

이 논란의 핵심은 로이스와의 인터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토록 강력한 외계인이 정부의 뜻을 따르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행동하도록 방치해도 되는가?' '누가 슈퍼맨에게 그러한 권리와 책임, 권한을 주었는가?'와 같은 질문이 바로 핵심이다. 비록 세계관은 다르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의회 청문회까지 불려 나갔던 헨리 카빌의 슈퍼맨과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윽박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정부로부터 슈퍼맨 사살 권한을 위임받은 그는 슈퍼맨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을 위협하는 외계인은 마땅히 시기, 의심, 경계의 대상이라고.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게 무책임한 태도라고. 이때 슈퍼맨의 답이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 아닌 인간이라고 답한다. 자신도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한 인간이기에 자기가 옳다고 믿는 정의를 따를 자유를 마땅히, 또 당연히 가진다는 것. 

 

 

 

그의 답은 미국적인 의미의 자유와 일맥상통한다. 총기 규제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인들에게 자유는 상당히 폭넓은 범주의 권리다. 한 인간의 이성 및 비판적 사고에 대한 확신, 개인이 개인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하는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유로운 인간이 결국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자, 자유로운 인간을 향한 기대와 희망, 곧 슈퍼맨의 S가 뜻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미래지향적이거나, 구시대적이거나

 

물론 슈퍼맨이 상징하는 희망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보라비아와 자한푸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가자 지구의 직유처럼 보인다는 점에서는 국제 정치적 맥락과 떼놓고 보기 어렵다. 미국 패권주의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신념대로 자한푸르 시민들의 자유를 지키려 했다는 슈퍼맨의 대사에서는 세계 경찰로서 전 세계에 자유 민주주의를 전파해 왔다고 자부하는 미국 근현대사가 겹쳐 보인다.

 

 

 

슈퍼맨의 S가 과연 현시점에 유효한 가치일지도 물음표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제 현대 사회와 떼놓을 수 없는 표현이다. SNS와 알고리즘에 중독된 사람들이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으니까. 극 중 렉스 루터가 슈퍼맨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입히려고 원숭이들을 동원해 SNS 댓글 조작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에게 인간의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기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슈퍼맨의 인간 찬가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인간의 창의력, 가능성, 절제력을 그래도 한 번 더 믿어보자'라는 미래적이고 희망적인 격려 내지는 다짐의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철 지난 구시대의 믿음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결국 이 딜레마는 제임스 건의 <슈퍼맨> 시리즈와 DC 유니버스가 더 많은 관객을 근본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앞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아닌 인간을 선택하다

 

흥미롭게도 제임스 건은 <슈퍼맨>의 한계를 역이용한다. 익숙한 종교적 메타포로 한계를 감싸면서 슈퍼맨의 이미지와 가치를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메시지로 승화한다. 예수가 바로 그 메타포다. 현재로부터 30년 전에 칼-엘이 지구에 도착했고, 3년 전부터 슈퍼맨 활동을 시작했다는 오프닝 자막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30살에 공생활을 시작해서 3년 만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의 인생과 몹시 유사하다.

 

 

 

이 관점에서는 <슈퍼맨>을 칼-엘/클라크 켄트의 겟세마니 동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잡혀가기 전날 밤, 예수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성부에게 기도하며 갈등한다.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갖춘 그는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라는 의무감과 죽음을 앞둔 인간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두려움 사이에서 고뇌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예수는 긴 고뇌의 끝에 신의 뜻을 따른다. 

 

 

 

슈퍼맨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믿고 따랐던 친부모의 유언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순간, 그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갈등한다. 친부모의 뜻대로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월한 능력을 지닌 일종의 '신'으로서 그들을 지배할지, 아니면 지금껏 그래왔듯이 인류의 수호자이자 희망의 상징으로 거듭날 것인지. 슈퍼맨은 신성을 선택한 예수와는 다른 길을 간다. 그는 크립톤인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루터의 계략에 맞선다.  

 

 

 

<슈퍼맨>의 후반부는 다양한 장면을 통해 그의 선택을 드러낸다. 루터와의 전투를 끝난 뒤 고독의 요새에서 태양 빛을 쬐며 치료받는 슈퍼맨. 이제 그는 친부모의 메시지 대신 인간 부모님과 시간을 보냈던 어릴 적 영상을 틀어놓는다. 이에 더해 전투가 끝난 직후 그의 정체를 숨겨주는 최면 안경을 쓰지 않은 상태로 로이스와 키스하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선택한 슈퍼맨을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액션이 덜 화려해도 임팩트 있는 이유

 

신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슈퍼맨의 이미지는 시각적으로도 구현된다. 그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 슈퍼맨 힘의 근원이 노란 태양인만큼 그간 슈퍼맨 영화에서는 슈퍼맨의 초인적인 능력, 곧 신성을 상징하는 도구로 태양을 활용하곤 했다. 잭 스나이더가 묘사한 슈퍼맨도 그가 자기 소명을 깨닫고 처음으로 비상할 때, 또 한 번 죽었다가 부활했을 때 그는 언제나 태양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슈퍼맨이 칼-엘이 아니라 클라크 켄트가 되기로 한 이상, 태양 역시 그 결심을 직관적으로 제시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루터가 만들어낸 차원의 틈이 메트로폴리스 도시를 둘로 쪼갤 때, 슈퍼맨은 무너지는 건물 밑에 깔릴 뻔한 여성을 구해낸다. 이때 먼지를 뚫고 나온 슈퍼맨에게 태양 빛이 내려 꽂히는 장면은 언제나 밝게 빛날 인류의 보호자이자 인간의 희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액션 연출도 그 연장선에 있다. 중반부까지는 기대를 어긋난다. 압도적인 위력도 못 보여주고, 크립토나이트 때문에 힘을 못 쓰는 슈퍼맨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의 의도에는 더 잘 부합한다. 정신적으로 회복한 뒤, 곧 인간의 정체성을 선택한 후에야 각성하는 슈퍼맨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이시키니까.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사방에서 밀려든 루터의 비행 군단을 초토화하는 클라이맥스는 그 정점이다.  

 

 

 

 

 

 


인간 영웅이 막을 연 '신들과 괴물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다. 제임스 건 특유의 b급 유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아닌 <슈퍼맨>이다 보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효과적인 유머일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극의 흐름을 끊는 장애물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에 더해 DC 유니버스의 첫 영화라는 점을 고하더라도 세계관에 대한 별다른 설명 없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빌런과 히어로의 향연은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니콜라스 홀트의 연기력과는 별개로 렉스 루터도 아쉽다. 캐릭터 자체는 입체적으로 구축했다. 슈퍼맨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를 질투한 나머지 그를 죽이려는 찌질한 악당이자, 과학 기술로 슈퍼맨에 대항할 메타 휴먼을 만들어낸 천재 과학자이고, 미국 국방부의 협력사를 이끄는 유능한 CEO다. 하지만 분량이 부족했던 나머지 비인간성의 총집합이자 슈퍼맨의 아치에너미라는 루터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한 듯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앞으로 DC 유니버스가 소개하고 풀어낼 이야기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길을 선택한 슈퍼맨이 '신들과 괴물들'인 부제가 붙은 DC 유니버스 챕터 1의 시작을 끊은 게 퍽 의미심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적당히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진중한 희망의 메시지로 무장한 제임스 건 표 <슈퍼맨>보다 더 나은 새출발, 새 비상도 상상하기는 어렵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신이 아닌 인간을 선택한 영웅의 희망찬 비상

작성자 . KinoDAY

출처 . https://blog.naver.com/potter1113/223929490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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