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7-21 21:37:43
자기 세계를 빚어가는 사람에게
영화 <비밀의 언덕> 리뷰
DIRECTOR. 이지은
CAST. 문승아, 임선우, 장선, 강길우, 장재희 외
SYNOPSIS.
"가족은 무엇일까요? 저에게 가족은 물음표에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5학년 소녀 ‘명은’이 글쓰기 대회에 나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과 마주하는, 그 시절 나만 아는 이 여름 우리가 꺼내 보는 비밀스러운 이야기
POINT.
✔️ 유년기를 담은 성장영화로 한국 영화 계보에 길이 남을 사랑스러운 수작
✔️ 주인공 명은을 맡은 문승아 배우부터 엄마아빠의 장선/강길우 배우, 선생님 임선우 배우... 세상의 톤을 말갛고 자연스럽게 영화에 투영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나 훌륭합니다
✔️ 들꽃영화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부일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과 각본상을 쓸어담은 이지은 감독의 다음 또한 너무나 기대됩니다. 어떤 장르의 어떤 작품으로든 멋지게 뻗어나갈 수 있을 힘!
✔️ 자기 이야기로 자기 세상을 쌓아 올린,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영화입니다. 조 마치, 빨간머리 앤, 주디 애버트, 마틸다, 레이디 버드... 그리고 명은이!

명은이에게.
명은아. 그거 알아? 수전 손택이라는 작가가 있어. 미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엄청난 작가거든.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그냥 사진만 봐도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야. 이런 사람은 위대하게 타고나는 걸까 싶을 만큼 카리스마가 넘쳐. 근데 그 작가가 뭐랬게. "일기에서 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한다"라고 했대. 그토록 위대한 작가조차, 사실 '보여지는 내 모습'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거야. 책에서 그 얘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좀 웃었어. 이렇게 멋진 말을 잔뜩 하고, 현실 세계에 대해 자기 해석을 거침없이 내놓은 작가도... 사람이구나 싶어서.
네 이야기를 보고 나는 너에게 꼭 수전 손택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 어마어마한 작가도, 오늘 하루 멀쩡한 어른처럼 사회 생활을 끝내고 집에 온 나도 (이 점은 너희 선생님도 같지), 너도... 다 그래. 발돋움을 해서라도 더 좋은 자신이 되고 싶어서, 내 이야기를 척척 쌓아 올려 내 세상을 빚어가는 사람들은 다 그래.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이야.

너와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알아. 어린 시절부터 늘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왔어. <작은 아씨들>의 조,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마틸다>, 몇 년 전에는 <레이디 버드>도 만났고... 그리고 너를 만났지.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내가 너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정보다 감탄이 더 많이 섞였는데, 그건 네 어마어마한 결단력과 실행력 때문이야.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더 예쁜 선물을 드리고 싶고, 학교에서 배운 이상적인 내용을 잘 갖추고 살고 싶고,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도 보내고 싶고,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을 자꾸 깨닫게 만드는 엄마아빠의 말들이 싫게만 느껴지고, 그런 자신이 비참해 보여서 감추고 싶고... 그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많지만, 거기서 너처럼 결단력 있게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근데 있잖아, 명은아. 크면 알게 된다. 젓갈이 얼마나 비싸고 좋은 음식인지도, (네가 젓갈 버릴 때 나 눈물이 났다...) 마냥 게을러 보였던 아빠가 나름대로 너희 남매의 등하교 패턴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도, 가족들이 서로에 대해서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도. 그 역할 분담 안에서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는 것도.
근데 사실 너도 이미 조금 알지? 할아버지와 삼촌의 대화도 다 들었잖아. 누구에게나 장점도 단점도 있다는 걸, 그리고 삶은 결코 방학 숙제로 그린 원형 계획표대로 쳇바퀴 구르듯 굴러갈 수만은 없다는 걸. 살아가다 문득 삶이 갑자기 너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네 계획이 다 무력해지는 순간을 한 번은 맞닥뜨리겠지. 그때 비로소 빛이 날 거야.

엄마의 억척스러움, 아빠의 빤들빤들함... 네가 싫어했던 그런 면면들이 언제나 널 지켜준 일상의 씨실과 날실이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는 날도 올 거야. 엄마아빠가 만들어준 씨실과 날실 위로, 네가 부지런히 코를 뜬 일상이, 그렇게 쌓아온 것들이 너를 지켜주는 날이 올 거야.
거기서 시간이 더 흐르면 네 시각이 달라질 거야. 서로 달라 티격태격하는 엄마아빠의 모습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고, 그런 엄마아빠 모습이 문득 귀여워 보이는 날이 오고, 그러다 눈물 나게 그리워지는 날도 오겠지.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브러쉬 업 라이프>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알게 된 건데 말이야. 그 정도 나이일 때 누구나 한 번쯤 자기 가족이 싫어지기도 하나 봐. 어쩌면 호르몬 아닐까. 오래 전 인류는 십대 중반쯤이면 부모에게서 독립을 했을 테니까. 가족을 사랑하고 싶고 착한 아이가 되고 싶고 잘 하고 싶은데, 엄마아빠가 날 위해 애써주는 걸 너무 잘 아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이 불편한 날들이 쌓이는 건, 어쩌면 그 시절의 불가항력일 수도 있어.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질 테니까. 지금은 그냥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줘.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네 친구들도, 내 친구들도, 네 눈이 너무 눈부셔 보이는 사람들, 부족함 없이 당당해 보이는 사람들도. 어떤 식으로든 그런 시기를 겪게 되나봐. 그러니까 우리 내일부터는 우리를, 또 주변을 조금 더 너그럽게 볼 수 있게 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또 하루 열심히 잘 살아가 보자.

물론 매일 어렵겠지. 어떨 땐 솔직한 게 유리하고, 또 어떨 땐 솔직이 능사도 아니야.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 또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숨기는 게 방법일 때도 있는 것처럼. 어떤 이들에게는 솔직함이 무기처럼 쓰이는 것처럼. 갈팡질팡하다 보면 내 마음을 전혀 돌보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흐르기도 하고, 가족을 배려하지 못한 채 할퀴는 말이 툭 나올 때도 있어. 우리는 그렇게 갈지자로 휘청휘청거리면서 균형을 잡을 듯 말 듯 살아가겠지. 그건 말로 포착되기 정말 오묘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던 너처럼.
앞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휘청거릴 거야. 실수도 하고 상처도 낼 거야. 더 좋은 자신이 되고 싶어서 까치발을 들지만, 누구도 평생 까치발을 든 채 살아갈 순 없다는 걸 깨닫고 눈물로 무너지는 날도 있지.
그래도 괜찮아. 시간을 따라 부지런히 걷다 보면 그런 날들은 어느새 저기 멀리 모자이크화의 한 조각처럼 작아져 보일 거거든. 그렇게 언덕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그 언덕이 꽤나 완만하고 다정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멀리서 볼 땐 너무 높아 보였던 언덕이더라도.

그리고 명은아. 헤맨 만큼 네 땅이 되는 거래. 네가 오르내린 언덕은 다 네 거야.
너 자신에 대해 거침없이 쓸 수 있었던, 자신감으로 빛나던 네 얼굴. 거기서 보였던 맑은 기쁨이 어떤 감각인지 나도 알고 있어.
나는 그 길들을 거쳐서 영화에 이르렀고, 그렇게 너를 만났어. 너는 그 길에서 무얼 만날까?
Relative contents
-
- 의도와 메시지까지 잡아먹은 장르영화로서의 실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재벌 그룹 회장의 혐의를 수사하던 서울중앙지검 검사 '한지훈(박해수)'은 원하던 결과를 내는 데 실패하고, 그 대가로 국정원 파견 검사로 좌천된 후 국정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그에게 원대 복귀의 기회가 찾아온다. 전 세계 스파이의 최대 접전지 선양에서 활동하는 국정원 해외 비밀공작 전담 블랙팀의 보고서가 전부 가짜인 것으로 밝혀지고, 한지훈은 내막을 파악할 특별감찰관으로 파견된다. 선양에 도착한 그는 임무 완수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일명 ‘야차’로 불리는 '지강인(설경구)'과 그의 팀을 의심하며 감시하고, 강인과 블랙팀은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임무를 진행한다. 그러던 중 지훈은 보고서에 기재될 수 없었던 블랙팀의 진짜 임무를 알게 되고, 동북아 첩보전의 중심에 발을 내딛는다.
냉전 시기에도, 냉전이 끝난 후에도, 그리고 신냉전의 초입에서도 남한과 북한은 언제나 갈등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쉬리>, <의형제>, <베를린>, <용의자> 등과 같은 한국 첩보 영화는 남북 관계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남침한 북한 스파이와 남한 정보 요원 간의 치열한 액션과 정보전, 그리고 쉽사리 형언하기 힘든 우정의 형성은 마치 하나의 클리셰처럼 굳어졌다. 그래서일까? 최근 한국 첩보 영화는 새로운 매력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를 해 왔다. 남침한 북한 스파이가 아닌 북침한 남한 스파이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공작>), 남과 북 사이의 첩보전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관계국 간의 이해타산을 냉정하게 그려내는 것(<강철비>)도 그 일환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야차>도 궤를 같이한다. <프리즌>을 연출한 나현 감독의 신작은 전 세계 스파이의 최대 접전지로 설정된 중국 선양을 배경 삼아 남다른 스케일과 이국미를 뽐낸다. 또 남북 관계를 탈피해 한반도 정세에 영향을 끼칠 다른 국가들의 첩보전에도 상당한 비중을 부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 국가의 권한을 위임받아 활동한다고 볼 수도 있는 스파이와 검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통찰도 담고 있다. 다만 변화를 위한 <야차>의 노력은 그저 제자리걸음 하는 데 그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포부에 걸맞지 않은 허술한 디테일과 짜임새가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우선 제목이자 모티브인 '야차'의 의미를 살펴보면, <야차>가 첩보영화로서 풀어내고자 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인도 신화와 불교에 나오는 귀신 중 하나인 야차(夜叉)는 사람 잡아먹는 추악하고 잔인한 귀신이지만, 한편으로는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사실 작중 야차는 지강인의 별칭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야차>가 첩보 영화라는 점과 지강인과 한지훈이 각각 국가의 권한을 일부 위임받아 활동하는 스파이이자 검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야차'는 마치 토마스 홉스가 국가 권력을 성경 속 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한 것처럼 국제 관계 속 국가에 대한 은유 같기도 하다. 국가는 야차의 추악한 면과 선한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주인공의 조합은 국가의 이중성을 의인화하고 있다. 지강인은 제임스 본드로 대표되는 기존 첩보 액션 장르의 젠틀한 주인공들과 달리 무자비하고 잔혹하며, 거칠고 무례하다. 임무를 위해서라면 폭력과 협박도 불사하는 그는 의인인지 악인인지 분간이 어려우며, "정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지켜내야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국제 질서 속 국가들의 모습을 의인화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강제력이나 구속력 있는 규범이 현실적으로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각 국가들의 정의는 결국 자국의 이익 추구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강인과 같은 첩보요원, 스파이는 이익이라는 정의를 쫓는 야차의 추악한 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한지훈은 야차의 고고한 면, 원칙과 명분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의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첫 등장만 봐도 알 수 있다. 한지훈 검사는 뇌물 공여 및 주가 조작 혐의로 소환된 재벌을 수사하면서 반드시 혐의를 밝혀내겠다고 벼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욕과는 별개로 휘하 수사관들이 위법한 방식으로 증거 수집을 했음을 알게 되자 수사를 포기한다. "도둑놈 잡으려고 도둑질했어. 저것들이랑 다를 게 없잖아. 정의는 정의롭게 지켜야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는 그가 판사 대신 사회 질서와 원칙, 법, 정의를 파괴하는 이들을 직접 심판대에 올리는 검사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특별감찰관으로서 지강인과 그의 팀이 사용하는 수단이 정당한 지를 거듭해서 감시한다.
야차의 이중적 의미는 이 작품이 첩보물이자 동시에 버디 영화인 이유이기도 하다. 지강인과 한지훈의 대립 구도는 본질적으로 야차의 이중성이 충돌하는 것이고, 결국 국가의 역할과 기능 앞에 놓인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어 첩보물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둘의 관계와 관계성이 바뀌는 과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강인과 지훈의 육탄전이 되기도 하고, 코미디에 가까운 기싸움이나 대화 장면에서 은연중에 가치관의 대립이 드러나기도 하고, 아예 정보전의 양상을 뒤바꾸는 결정적인 계기이자 복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야차>는 이를 정석적으로, 또 정반합적으로 풀어낸다. 우선 초반부는 지강인과 블랙팀을 만난 지훈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지훈이라는 인물의 신념은 정당한 수단이 정당한 결과를 낳는다는 통념과 상식에 보다 부합한다. 그래서 영화는 그가 선양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의 시선으로 작전 내용이나 인질 대우 방식, 블랙팀의 운영 체계를 살펴보게 하면서 강인과 지훈 간의 갈등과 서스펜스를 점진적으로 고조시킨다. 하지만 중반부 이후부터는 오프닝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드러난 지강인의 과거, 그리고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강인과 팀원들의 치열한 사연을 토대로 물음을 던진다. 정의라는 목적만큼이나 수단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지훈의 시각에 거듭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강인과 지훈이 서로의 비판과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 속에서 영화는 상반된 가치관을 지닌 두 인물이 파트너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실제로 한지훈은 잡아넣는 데 실패했던 재벌 그룹 회장을 기어코 구속 수사하는 데 성공하는데, 이를 두고 동료 검사는 명분 만을 강조하던 지훈이 마침내 변했다고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지강인 역시 지훈에게 법과 원칙을 개뼛다구로 보는 놈들을 찾았다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건다. 두 인물은, 곧 야차는 합동 작전을 수행한 끝에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을 두고 마침내 합의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야차>는 제목과 모티브에 버디 영화와 첩보물이라는 장르적 재미를 더해 큰 그림을 그려낸다.
문제는 가치관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이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고, 차이 대신 공통점을 인정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매력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없다는 점이다. 일단 한 인물에게만 무게감이 쏠린 나머지 매력적인 버디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목적의식, 사건에 뛰어드는 동기의 층위가 불균형하기 때문이다. 한직인 국정원 파견 검사에서 벗어나 본청으로 복귀하겠다는 목적을 지닌 한지훈의 각오에 비해, 첩보 임무와 개인적인 복수를 함께 실행에 옮기려는 지강인의 목적은 한에 사무쳐 있다. 이처럼 감정선의 차원이 다르다 보니, 필연적으로 균형추는 지강인에게 쏠리고 만다.
또 한지훈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도구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다 보니 마지막 반전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지 않다. 그가 거듭 명목적으로 옳은 길을 추구하는 이유는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으며, 그는 사건을 주도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사건에 휩싸이는 인물이다. 그래서 한지훈은 지강인의 카운터 파트너로 활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된 캐릭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그간 <슬기로운 감빵생활>, <오징어 게임> 등에서 선악이 공존하는 인물로 분했을 때 박해수라는 배우가 빛났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운 측면이다. 그 결과 러닝타임 내내 지강인의 존재감은 확실하지만, 다른 캐릭터와의 합에서 느껴져야 할 영화적인 시너지는 찾기 어렵다. 양동근, 이엘, 송재림, 박진영이 연기한 블랙 팀의 존재감도 미미한 나머지 <야차>는 마치 설경구의 솔로 무비 같다.
첩보 액션 영화로서도 만족스럽지 않다. 오프닝을 장식하는 과감한 카레이싱과 대만 로케이션은 인상적이지만, 그 이후에는 눈을 사로잡을 만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연이은 총격전과 육박전은 비슷한 시퀀스들의 연속과 반복에 불과하다. 중국 공안과의 총격전처럼 사실적이기보다는 다소 과장된 모습의 액션 연출은 액션의 밀도나 강렬함을 역으로 떨어뜨린다. 또한 익숙하고 안전한 클리셰들의 반복은 고조되던 긴장감을 되려 약화시킨다. 김씨 일가의 자산관리 담당자 혹은 그 담당자의 자녀가 망명을 요청한 것이나, 두더지라고 불리는 정보기관 내 이중첩자의 존재, 남북한의 화합을 가로막는 제3 국의 방해 공작 등은 꼭 첩보 영화가 아니더라도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 같은 작품에서 이미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설정이다.
심지어 <야차>는 조악한 화법 때문에 한 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야차>는 두 주인공을 내세워 정의를 이루는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서 논하는 작품이며, 그 정당성을 둘러싼 이견은 이야기 전개의 주된 동력이 된다. 반면에 두 주인공, 곧 국가가 추구해야 할 정의와 첩보 영화의 측면에서 보면 국가가 국제적으로 추구해야 할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작중 남북의 화합과 협력은 이익이고, 이를 방해하려는 일본의 공작은 정의에 반하는 것이며, 이는 마땅히 수용되어야 할 전제로 여겨진다. 일본의 공작을 전범 기업 및 국내 재벌 기업과 관련지으면서 손쉽게 '악'으로 단순화하는 마무리가 대표적이다.
이는 정치적 방향성이나 호불호와는 별개로 영화적으로 아쉬움을 남기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익숙한 구도와 손쉬운 전개, 감정에 호소하는 접근법을 통해 메시지나 주제의식을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인상이 남기 때문이다. 선악의 구분 없이 국익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정세를 다각도로 포착하려던 시선이 돋보였던 <강철비>, 동포로서의 동질감이나 일체감에 기대는 감정적 호소 대신 남과 북의 특수한 외교적 관계를 스토리텔링의 동력으로 삼았던 <모가디슈>와 비교해보면 <야차>의 아쉬움은 더욱 크다.
결과적으로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끌며 순항 중인 <야차>는 버디무비의 묘미도, 액션 영화의 짜릿함도, 첩보 영화의 긴장감도 보여주지 못한다. 첩보 영화이기에 시도할 수 있었던 깊은 사회적 통찰도 그 한계만 보여줄 뿐 이렇다 할 감흥을 남기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본래 극장 개봉을 계획했으나 끝내 넷플릭스로 향한 <야차>의 선택은 상업적 측면에서 볼 때 최선의 선택 같아 보인다.
D(Dreadful, 끔찍한)
무거운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지탱하기에는 한없이 빈약했던 장르적 완성도
-
-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놀라운 세계
내가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에서 잠시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순간이 좋아서다. 2시간으로 옆 동네에서 저기 먼 우주까지 가 볼 수 있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다양한 세계의 이야기 속엔 아름다운 사랑도, 가늠할 수 없는 슬픔도, 소소한 행복도 있고…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들도 존재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가질 수 있는 일상의 환기성에 큰 기쁨을 느끼다 보니, 영화를 보는 동안 긴장하고 있는 상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돈을 내고 왜 고통을 당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스릴러나 공포물을 극장에서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내가 <메멘토>를 극장에서 본 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영화가 있을 수 있다니.’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며 받았던 충격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걸 만든 감독은 천재구나.”
당시만 해도 배우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감독까지 찾아보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천재적인 신인 감독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십년 뒤, 나의 인생 영화를 만났다. <인셉션>
무더운 여름, 등골이 서늘해진 느낌으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와 ! 이거 만든 사람 천재구나”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감독을 검색해 보며, <인셉션>을 만든 감독이 <메멘토>를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입에서 천재구나라는 말이 두 번 나오게 한 감독. 아…뭔가 반가웠다. <다크 나이트> 자칫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히어로물까지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사람.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라는 메멘토의 대사처럼, 깊은 인상을 남겨준 그 두 번의 강렬한 경험의 기억은 <인셉션> 이 후, 나에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모든 작품을 믿고 보는 영화계의 최애 브랜드로 만들어 주었다. 좋아하지 않는 소재의 영화를 만들더라도 보고 싶은 감독.
솔직히 <인셉션> 이 후 나의 최애 감독이 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모든 작품이 다 최고였다고 말할 수 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전쟁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덩케르크>를 보게 만들고, 그가 만든 영화를 잘 이해 하고 싶어서 물리학 책을 찾아 보게 되는 것. 그리하여 내가 잘 안다고 생각 했던 것에서 낯섦을 발견하는 일 뿐만 아니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의 관심사가 뻗어나가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나의 세계관이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라는 매개로 나에게 선물 한 것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그의 신작 <오펜하이머>를 기다리는 이유는 그런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만들어 주는 2시간의 경험을 넘어 영화 이후, 나는 어떤 인사이트를 받게 될지, 그래서 나는 또 어떤 것을 탐구하게 되고 관심사를 확장해 나가게 될지 … 영화로 인해 내가 만나게 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
- [30th BIFF 데일리] 떠나간 그대를 그리워하며
감독 이광국(Lee Kwang-kuk)
출연진 이지현(Ji-hyun Lee), 홍승희(Seung-hee Hong), 이주원(Zoo-won Lee)
시놉시스
한 남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수연에게는 아버지였고, 인선에게는 남편이었던 사람. 일상의 틈새와 관계의 미묘한 감정을 포착해 온 이광국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단잠>은 상실을 마주하는 법을 묻는다. 세 번째 기일이 다가오는 계절에도 남겨진 이들은 여전히 불면에 시달린다. 같은 사람을 잃었으나 같은 사건을 겪은 것은 아니라서, 감정의 무게는 갈수록 버거워서 수연과 인선 사이에도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단잠>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드리운 공백 속으로 걸어 들어가 애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색한다. 인물들은 그 구멍에 몇 번이고 발이 빠지지만, 우연한 만남과 애써 붙잡은 인연, 그리고 수없이 되감기 하는 추억이 그들을 더디게나마 “평범하고 좋은” 자리로 이끈다. 슬픔과 울분이 고여 있는 곳에서 웃음이 재탄생하는 회복의 기록.(차한비)
_
‘단잠’은 자살 유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감독은 당사자를 의식하여 그들을 일반화하거나 고통을 전시하지 않도록 자기검열을 거치며 최대한 절제된 표현 방식을 택했다. 평소에는 특정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지만, 이번 작품만큼은 자살 유가족분이 보았을 때 ‘괜찮았다’고 느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렇게 단정한 슬픔이 있을까. 영화는 일관된 톤으로 상실의 슬픔을 그려낸다. 오히려 보여주지 않을 때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법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픔을 드러내며 살지 않는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어제 누군가를 잃었더라도 오늘은 밥을 먹을 수 있고, 오늘은 괜찮았다가 내일은 하루 종일 죽고 싶을 수도 있다. 영화 속 슬픔은 꾸며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기에 설득력이 있다.
영화의 절제된 연출은 배우들의 진솔한 연기와 맞물리며 깊은 울림을 준다. 관객들은 단순하지 않고 수많은 겹으로 층층이 쌓인 상실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꿈과 현실을 오가고,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흐릿하게 표현하는 장면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오히려 더 정확히 전달한다.
영화 속 인선과 수연은 현재를 살아가지만 이미 떠난 남편이자 아버지는 여전히 같은 공간에 남아있다. 회복되지 않은 상처와 잊히지 않는 장면들, 그들 사이 어떤 신호를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인선과 수연을 억누른다. 사랑의 크기가 클수록 상실의 아픔도 크다.
남편이자 아버지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남겨진 사람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살아있는 상태가 당연하다고 살아온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직접 경험하고부터 자살 충동을 종종 느끼게 된다.
인선은 운전을 할 때나 까마득한 아래를 바라볼 때 현기증을 느낀다. 아마 수연도 그러한 시기를 지나왔을 것이다. 남편이자 아버지를 보내기로 결심하기까지 그들은 수많은 순간들을 극복해왔을 것이다.
이광국 감독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자살 유가족을 향한 사회의 시선과 불편한 말들, 자살 유가족이 느끼는 다층적인 상실의 아픔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그는 영화를 보고 어딘가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루기 어려운 소재를 성실하게 고민하고 담아낸 감독과 배우들에게 감사하다.
언제나 다정한 사람들이 가장 유약하고 고통받기 쉬운 위치에 있는 거 같다. 다정한 사람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상영시간표]
2025.09.21. 16:1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상영코드 290)
2025.09.22. 19:30 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상영코드 397)
2025.09.23. 19:30 CGV센텀시티 3관 (상영코드 428)
2025.09.24. 17:3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10관 (상영코드 542)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9월 17일 ~ 9월 26일까지
-
- 대단히 슬픈 결말, <프리가이>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가이>의 결말은 대단히 슬프다. 이야기의 끄트머리까지도 유쾌함을 잃지 않다가 이토록 급하게 씁쓸함을 선사하는 영화도 흔치 않을 것이다.
<프리가이>의 결말이 왜 철저한 새드엔딩인지 설명하기에 앞서, 이 영화의 장점부터 언급해보고 싶다. <프리가이>는 유명 배우와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치고 놀랍도록 매니악하고 젊은 언어로 만들어졌다. 나이 든 관객들을 완전히 배제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이 정도는 네가 이해할 것이라 믿어!’라는 듯이, 여러 게임의 설정, 아이템, 용어 등을 뒤섞어 놓으면서도 특별한 설명 없이 지나간다.
허나 이렇게 선택과 집중을 확실하게 해 둔 덕으로, 영화는 매우 뚜렷한 컨셉을 얻게 되었다. 유머는 타율이 높고, 어색함 없는 CG와 빵빵한 사운드, 질척거리지 않는 전개로 지루해질 여지도 없이 오감만족을 선사한다. 확실히 재미있다.
<프리가이>를 보다 보면 이 영화가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은근한 메시지까지 담으려 했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에는 얼핏 주연과 조연이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것. 누군가가 자신에게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하더라도 언제나 주체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라는 것. 단순한 교훈이지만 생각해볼 만한 지점인 것도 맞다. 코미디에도 최소한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다만 그 메시지들이 이야기와 결정적으로 불협하고, 심지어 불쾌함까지 전해준다면 어떨까.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리가이>는 여러 영화를 연상케 한다. 나열해보자면 <트루먼쇼>, <그녀>, <매트릭스>, <13층>, <주먹왕 랄프>,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작품들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프리가이>를 <트루먼쇼>와 비교하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인공이 의문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본인도 모르는 새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존재라는 점. 중요하게 반복되는 대사가 있다는 점(“Don't have a good day! Have a Great day”,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사랑하는 여인이 조력자로 등장한다는 점, 클라이막스에 바다를 건넌다는 점, 목숨을 걸고 세계의 끝에 도달하여 탈출한다는 점 등. 공통점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왜 <트루먼쇼>가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것과 달리 <프리가이>는 씁쓸한 결말의 영화가 되었을까.
두 영화의 결말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은 결국 주체적인 존재로서 자유를 얻지만, <프리가이>에서 ‘가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도, 주체적인 존재가 되지도 못한다. 만약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이 속편 <트루먼쇼2>를 통해 제2의 세트에서 다시 한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영화를 기쁘게 반길까? 이 세상이 세트이며,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트루먼이 다시 한번 관음의 대상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그 모습에서 감동할 수 있을까? 트루먼이 아무리 행복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이’는 트루먼과 다르게 목숨을 건 도전 이후에도 ‘프리가이’가 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게임 속 관찰의 대상이다. 자신의 사랑을 창조주에게 양보했다. 사랑을 잃고 친구와 재회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가이’는 정작 직업마저 잃은 백수 광대로 남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한량으로 사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이고, 행복일까? 적어도 나는 설득되지 않았다.
영화의 결말과 주제가 일치하려면, 가이는 누구의 간섭이나 관찰도 허용하지 않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했다. 밀리와의 사랑 또한 이루어졌어야 했다. (어떤 방식으로 ai와 인간이 사랑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키스는 밀리와 동업자이자 좋은 친구로 자신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달려가야 했다. 마지막 커플의 키스신이 야동을 보다 들킨 것처럼 황급히 끝나버리는 이유는, 어긋난 결말을 깨달아버린 감독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빵이야 어떻게 만들었든 생크림을 잔뜩 발라놓으면 입에 넣고 씹을만하듯이 유쾌한 상상력의 오락영화 자체로 본다면 <프리가이>는 그럭저럭 탑승해볼 만한 어트랙션이다. 하지만 <프리가이>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했다면, 정교한 방식이라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재미와 의미를 양손에 쥐고 가는, 좋은 영화들의 사례를 많이 만나왔다. 그런 면에서 <프리가이>는 재미는 잡았지만 의미는 잡지 못한 반쪽짜리 영화라고 평할 수밖에 없겠다. 프리도 되지 못하고 가이도 되지 못한 프리가이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극장의 불이 켜질 때, 나에게 남은 것은 그 질문이었다.
-
- 우리도 34년으로 갈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쿵쿵 울리는 비트, 깜빡이는 조명과 함께 요란한 생일파티가 벌어지며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 날 잠에서 깨어 숙취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집이 아닌 집에 돌아가면 비키는 어제 입었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을 것이다. 둘 사이 대화는 없고, 다음 날과 또 그 다음 날도 이들은 계속 이 집에만 살고 음악만 듣고, 담배를 피우기만 할 것이다.
비키는 노동조차 클럽에서 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그곳은 파티장이 되어 시끌벅적하다. 하오하오와 그녀는 서로를 사랑한다면서 서로에게 관심은 없다. 그래도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같은 집에 붙어 산다. 오늘과 내일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 버리고, 밤 밖에 남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밤, 마시고 피우고 일어나면 또 밤이다. 비키는 멍해져 있다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마주하고, 점점 해가 뜰 때 일어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그러나 쉽지 않다. 해가 뜨면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밤에 번 돈을 생존에 다 써야 하고, 전날 마신 것을 게워 내야 하고, 훔친 물건을 물어내야 한다. 영화의 후반에 가서야 그녀는 말한다. “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라고. 그러나 관객은 그녀가 당장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안다. 떠나는 것.
비키가 자유가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90년대의 낭만, 음악, 술과 마약도 다 흰 눈에 덮여 사라진다. 그녀는 90년대를 떠나 겨울로 갔다. 그리고 무사히 2011년에 도착했다. <밀레니엄 맘보>가 낭만으로 남아 반짝일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거기에 도착하여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서사시나 스펙터클이 아니라, 한 세대가 통과해 나온 터널처럼 보인다. 비키는 통과해 나왔지만, 돈도 음악도 뭣도 선택 못하는 하오하오는 낭만 속에 빠져 허덕이다 그 안에 영영 갇혔을지도 모른다. 혹은 몸만 2011년으로 옮겨와 회의주의에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밀레니엄 맘보>의 색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2024년의 관객이 결코 쥘 수 없는 멋진 낭만이다. 그리고 우리가 겨울로 나아가든, 24년도에 갇혀 있든 계속 달아오른 채 깜빡일 과거의 불빛이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
- 엉망진창이어도 괜찮아
당신의 마지막 마블 영화가 무엇인가? 대부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끝으로 마블과 작별했을 것이다. 워낙 많은 팬들이 타노스를 이기는 결말을 보기 위해 달려왔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이후 등장한 마블 작품들이 팬들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두 번째 이유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그래도 십 년을 마블 팬으로 살아온 시간이 있으니 한 번에 포기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나오는 영화마다 굳이 감상하며 불만만 쌓여가고 있을 때쯤 마블의 마지막 희망이라 부를 수 있는 영화가 개봉했으니 그게 바로 <썬더볼츠*>다.
물론 <썬더볼츠*> 역시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초기 마블 영화의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고 보면 적잖이 실망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꽤 많은데 이들을 모두 알아보려면 섭렵해야 하는 영화와 드라마도 많아 마블 입문자들은 물론, 엔드게임 이후 탈주한 팬들 역시 가볍게 접근하긴 쉽지 않다. 아마 나 역시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마블과 작별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마블의 마지막 희망이라 부르려는 이유를 몇 가지 설명해 보려고 한다. 마블을 사랑했던 한 팬의 (구구절절하게 작성한) 부치지 않을 편지라고 생각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1. 매력적인 캐릭터의 조합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이렇다. 블랙 위도우의 뒤를 잇는 나타샤의 동생 '옐레나', 윈터 솔저 '버키', 전 캡틴 아메리카 '존 워커', 러시아 슈퍼솔저 '레드 가디언', 앤트맨에서 빌런으로 등장했던 '고스트', 정체불명의 존재 '밥'까지 총 6명이다. 태스크 마스크는 등장하자마자 퇴장하니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이 6명의 조합은 도무지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각양각색의 조연들이다. 주연 급이라곤 그나마 마블 영화에 다수 출연해 이름 정도는 알려진 윈터 솔저뿐이다. 특출난 인물이 없어서일까? 이들의 시너지는 생각보다 괜찮은 맛을 만들어냈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만났지만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기도 하는 그야말로 생존 우선주의 인물들이다. 틱틱 대면서도 기꺼이 서로의 등을 맞대고 싸우는 익숙한 모습에 옛 마블의 향수가 가끔 아른거리기도 한다. 이처럼 잘 만든 조연들, 열 주연 안 부럽다! (티켓 파워가 적은 건 슬프긴 해도 말이죠.)
2. 완벽한 영웅은 이제 없다
안타깝지만 이젠 완벽한 영웅은 나오기 힘들다. 왜냐하면 아무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제작자도, 팬들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은 엄청 착하거나 나쁜 놈도 아니고, 범접할 수 없는 초능력을 가진 이도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함을 가진 이다. 마블 세계관 속에서도 블립 이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서로에 대한 갈등이 높아진 설정을 사용하고 있다. 영화 밖에서만 봐도 참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현실로 돌아와서, 우리 역시 코로나로 인해 우울감이 높아졌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코로나가 끝나고 일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듯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텅 빈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 마블도 새로운 영웅 하나를 만들어 냈다. 바로 슈퍼맨처럼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지만 멘탈이 약한 인물 '밥'이 그리는 '센트리'와 '보이드' 캐릭터다.
영화 속 보이드의 능력은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강력하다. 사람을 그림자 형태로 만들어 각자의 고통이 담긴 공간(셰임룸)으로 보내버리는 능력을 가졌다. 영화 속에서는 옐레나의 레드룸과 밥의 다락방이 나왔지만 윈터 솔저의 공간이 나왔다면 더욱 끔찍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보이드가 폭주해 모두를 가둬버리기 전, 썬더볼츠*는 합심해 그를 제어한다. 평생 누군가를 죽이거나 고통을 주었던 이들이 정반대의 방법을 통해 모두를 구출해낸다. 실은 모두가 누군가가 자길 멈춰주길 바랐기 때문일 테고, 결국 그들은 밥을 보이드로부터 구해내면서 그들 스스로도 구원받았다. 오늘날의 영웅은 이처럼 과거를 받아들이고 다시 나아가는 이들로 다시금 탄생했다.
3. 어벤져스를 놓지 못하는 자는 누구인가
<썬더볼츠*> 제목 뒤의 *의 의미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는 애스터 리스트(asterisk)로, 표시나 수정이 필요한 단어에 붙는다. 그리고 나는 발렌티나의 '뉴 어벤저스' 소리를 듣자마자 마블과의 영원한 작별을 선언했다.
이미 팬들 입장에서는 엔드게임 이후 어벤져스는 끝났다. 잘 보냈다고는 말 못 해도 어벤져스는 누군가가 대체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모아놓고 '뉴'어벤저스 명칭을 붙인다 한들 누가 인정이나 할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영화에서도 어벤져스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썬더볼츠는 썬더볼츠로 남겨놓고, 어벤져스는 어벤져스로 남겨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박수 칠 때 떠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건 마블을 보면 뼈저리게 알 수 있다. 이젠 수습할 수도 없는 방대한 마블 세계관 속에서 그들도 언젠가 그들만의 길을 찾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
-
-
- 영화 <나이트 레이더스> 메인 예고편
- 서기 2043년, 새로운 전쟁을 일으켜 대제국을 세우려는 국가 에머슨.
인간병기를 양성하기 위해 모든 아이들을 납치하고,
외딴 숲에서 칩거하던 ‘니스카’도 결국 사랑하는 딸을 빼앗긴다.
10개월 후, 예기치 못한 비밀이 하나둘 드러나고,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던 ‘니스카’는
딸을 되찾고자 국가의 중심부를 습격하기로 결심하는데…
-
- 영화 <더 스파이> 메인 예고편
전운이 감도는 1960년 냉전시대, 소련 군사정보국 ‘올레그 대령’은
정부의 눈을 피해 핵전쟁 위기를 막을 중대 기밀을 CIA에 전하고자 한다.
CIA는 MI6와 협력하여 소련의 기밀 문서를 입수하기 위해
영국 사업가 ‘그레빌 윈’을 스파이로 고용해 잠입에 성공한다.
정체를 감춘 채 런던과 모스크바를 오가는 ‘그레빌 윈’과 ‘올레그 대령’의
은밀하고 위험한 관계가 계속될수록 KGB의 의심은 커져가는데...
가장 평범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첩보 실화
때론, 한 사람의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