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2025-08-07 00:09:09
당연한 사랑이 부재한 자리에
영화 <수연의 선율>을 보고
영화 <수연의 선율>은 당연한 사랑을 바랐던 두 아이 수연과 선율의 이야기다. 영화는 수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나뿐인 가족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수연은 고아가 된다. 보육 시설에 보내질 위기에 처한 수연은 그것만은 피하고자 새로운 가족을 직접 찾아나선다. 그때 발견한 것이 또다른 주인공 선율을 입양한 가족의 유튜브 채널이다. 영상 속에서 선율을 입양하여 키우는 기쁨에 다른 아이를 입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에 수연은 이들의 가족이 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연은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한 선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수연은 선율과 점차 가까워지고 선율의 집에 초대받기에 이른다. 가족에 편입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수연. 어느새 네 사람은 가족의 형태를 갖춰나간다.
유튜버인 카메라에 담기는 네 사람의 행복한 이야기. 그러나 카메라 뒤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카메라 뒤에서 두 아이의 연기를 한다. 보호자의 존재가 절박한 수연의 경우 가족에 편입되기 위한 연기는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율의 연기는 분명 문제적이다. 선율은 유튜브 영상 속에서 표면성 언어장애를 앓는 아이로 등장한다. 주로 말이 없는 선율의 모습. 그러나 수연의 앞에서 선율이 보여주는 모습은 다르다. 선율은 언제나 자신의 의사를 뚜렷이 표현할 줄 아는 영리한 아이다. 수연이 왜 부모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냐고 묻자 선율은 간단히 대답한다. “엄마가 좋아하니까”. 선율은 자신을 입양한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 그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전략을 탐색하고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선율이 보이는 모습은 가족 내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그렇게 영상 속에서 선율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거둬키우는 부모의 선량함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결국 조건부로 주어지는 관심과 사랑 속에 아이들은 본모습을 잃어간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버려진다. 그렇게 남겨진 아이들. 수연은 선율의 보호자가 되고, 두 아이는 삶을 버텨나간다.
물론 두 사람의 위태로운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한다. 선율은 수연에게 언니가 엄마가 되어주면 되지 않느냐 애원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아이들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국가는 제도 속으로 두 아이를 포섭한다. 수연은 떠돌이 생활을 하던 할아버지의 가족으로 선율은 보육원에 맡겨진다. 이들은 국가가 허락한 보호자의 품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겪는 돌봄 공백은 여전해보인다. 가족이라는 형태에 우겨넣어진 수연은 외려 할아버지를 돌보고, 선율은 보육원에서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수연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수연의 선율’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어른들이 두 아이를 버리자 선율은 수연의 책임이 된다. 어른이 떠난 자리에서 수연은 선율을 키우고 지킨다. 그렇게 ‘수연의 선율’은 수연에 기대어 살아나간다. 그러나 또다른 어른들에 의해 두 아이의 삶은 재배치된다. 그들은 그것만으로 제몫을 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들은 외롭다. 이 상황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어른들일테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수연이다. 선율이 맡겨진 보육원을 찾아가 멀찍이 선율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수연. 어른들의 돌봄이 여전히 필요한 나이에 일찍이 철이 들어버린 수연은 자신을 탓하는 듯하다. 당연한 사랑이 부재한 자리에 외로이 남아있는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제도가 해결하지 못하는 돌봄의 공백. 이들이 사랑받을 권리를 지켜나갈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영화는 우리의 손을 떠난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작품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