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4-18 17:18:07
밴드 붐은 이미 시작되었어!
ROCK WILL NEVER DIE

콜드플레이 콘서트를 가는 이들을 영원히 시기하고, 질투하고…
밴드 콜드플레이가 지난 16일부터 내한해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죠!
역시 밴드 붐은 온 것 같습니다.
스크린으로도 우리가 사랑한 락 밴드들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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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일 순위는 나여야만 해
제목의 '위국(違国)'이라는 단어는 직역하면 '어긋난 나라'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어긋난 나라에서 쓰는 일기'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왜 어긋난 나라인지는 영화 속 마키오와 아사의 불편한 동거를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저 다른 것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도 끝까지 양보하려 들지 않는 양쪽의 지독한 고집이 서로를 끝끝내는 어긋나게 만들어 버린다. 보통이라면, 남들이라면 대체로 웃으면서 그러려니 넘어갈만한 지점들도 꼭 짚어내어 기어이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두 사람의 일반적인 생활 패턴이라 할 수 있다.
눈대중으로는 얼추 맞을 것 같은데, 기묘할 정도로 결정적인 곳에서 맞지 않는 이들의 성향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유발한다. 칼각으로 접히는 수건이나, 틈새에 딱 들어가는 청소기같이 어딘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영상들이 있다면, 이 영화는 그의 정 반대다. 항상 삐걱거리고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없는 둘의 사이는 그야말로 '위국'이다.
"어른이 친구가 있는 건 처음 봤어."
아사는 이모를 보며 자신이 알고 있던 어른의 범주가 굉장히 좁았음을 알게 된다. 어른이라면 응당 이럴 것이라는 기대감과 선망이 사라지자, 그들 역시 인간에 불과하다는 뻔하고 지루한 진실만이 남는다. 하지만 이모인 마키오는 그런 것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주거나, 어른의 위상을 돋보이게 해줄 만한 행동보다는 '모든 어른이 그렇지는 않다'라는 것을 쉽게 인정할 따름이다.
"이모가 반대할까 봐 그랬어."
자신의 친구조차 쉽게 대하지 못하고 버벅대는 이모를 보는 아사의 심리는 조금씩 바뀌어간다. 세상 모든 어른의 기준이 자기 엄마였기에, 처음에는 모든 행동거지를 조심하려고 애쓴다. 밴드부에 가입한다고 하면 혼날까 봐, 말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아사가 엄마에게 꽤나 압박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엄마나 선생님과는 다른 어른 군상을 통해 아사는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하는 쪽으로 변화되어 간다.
"나는 네 엄마가 될 수는 없어."
아사의 불안감과 외로움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마키오였지만, 정작 아사를 가장 불안하고 외롭게 하는 것도 마키오였다. 아사는 마키오에게 자신이 첫 번째이지 않은 것, 마키오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더욱 빛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빛나지 않더라도, 부모님과 있을 때는 언제나 자신이 우선순위였던 삶이 처참히 무너지면서 겪는 일종의 상실감일 것이다. 혼자가 될 때마다 '엄마였다면' 하고 되뇌지만 정작 그런 엄마가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죽어버린 것에 대한 원망이 뒤섞여 아사는 혼란스럽다.
"너와 나는 다른 주체니까. 네 인생은 네가 살아야 해."
그런 아사에게 마키오는 잔인하고 냉담하게 말한다. 엄마가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나 역시 마찬가지고,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는 것을. 그 말을 다르게 번역하면 '넌 결코 내 첫 번째가 될 수는 없어'라는 뜻과도 같다. 그리고 그건 모든 인물들에게도 통용된다. 마키오에게 첫 번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니까. 결국 마키오는 은연중에
"너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첫 번째로 사랑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너야."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가 남겼던 일기를 보고 아사는 학교도 빠지고 할머니 댁으로 도망가 버린다. 아사는 자신이 생각한 엄마와 남들이 알고 있는 엄마는 많이 달랐던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엄마'가 아닌 '코다이 미노리'라는 한 명의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아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에게도 결국 자신이 첫 번째는 아니었다는 것.
엄마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자신을 위했다기보다는 본인을 위한 것이었음을 느낀다. 그제야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슬퍼할 수 있게 된 아사. 마키오 이모의 품에 안겨 울면서 '과거가 바뀌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상상한다. 타임머신을 만들어보라는 마키오의 말에 아사는 질문을 던진다.
"그럼 만나지 못했으려나."
"누굴?"
표면적으로는 이모인 마키오를 두고 한 말이었겠지만, 더 깊숙이 파고든다면 말 그대로 '어긋난 나라'를 의미한다. 기묘하고 이상하게 어긋난 세상을 만났기에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한층 성숙한 '어른'으로 한 발자국 다가갈 수 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영화를 보며 아쉬웠던 것은 아사와 마키오의 이야기에만 집중하여 감정선을 끌어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부분이다. 물론 그 주변인들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불필요한 요소가 다소 존재한다고 느꼈다. 의도나 상징이 짙은 부분들에 있어서 영화의 맥락에 어긋나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한다고 느껴 약간 불편했던 것 같다. 그저 보여주기식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더 그랬던 것 같고.
그렇게 이것저것 다 뒤섞은 바람에 영화를 보고 나서도 큰 주제와 메시지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았다. 원작이 10권으로 구성된 순정만화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내용적으로 각색이 있어야 할 터인데, 곁가지들을 애매하게 남겨놓은 것이 영화 감상 방해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일본 특유의 감수성만큼은 잘 살린듯한 영화였다.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 받아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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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고 있던 삶의 감각과 진중한 사유의 장, <트립 투 그리스>
잊고 있던 삶의 감각들
지금과 같은 팬데믹을 관통하는 시기에, 영화 <트립 투 그리스>(2020)는 잊고 있던 감각을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었나. 밥을 먹으며 나누는 사소한 대화들, 휴가철을 맞아 떠나는 타국으로의 여행.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삶의 일부는 어느덧 감각하기 어려운 낯선 무언가로 변모했다. <트립 투 그리스>에서 영국의 배우인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은 그리스 전역을 돌며 매일 레스토랑에 들러 열심히 대화를 나눈다. <트립 투 그리스>는 ‘트립’ 시리즈의 종착역이다. 2010년부터 시작된 ‘트립’ 시리즈는 영국-이탈리아-스페인을 거쳐, 그리스에서 10년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을 여행지로 초대한다. 롭과 스티브의 익살스러운 성대모사라든가, 수상 경력을 언급하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현실 속 배우들의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극영화의 허구성을 흐릿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정에 균열을 내는 순간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두 남자의 대화, 레스토랑의 고급스러운 음식들, 따사로운 그리스의 풍광들이 계속해서 감각기관을 자극한다. 오감을 건드리는 영화의 이미지들 가운데 낯선 무언가가 불쑥 끼어든다. 여행은 그 자체로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을 잠시 잊게 한다. 특히나 그리스와 같이 다층적인 매력들로 여행자를 매혹하는 도시에서는 더욱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뚜렷이 느껴진다. 롭과 대화를 나누던 스티브는 아들의 전화를 받는다. 할아버지가 위독하세요, 그래 알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렴. 비일상의 연속이던 여행지에서 스티브가 악몽을 꾸는 장면은 종종 흑백으로 처리된다. 죽음과 맞닿은 듯 보이는 아버지의 형상은 그를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한편으로 두 사람의 여정에 불쑥 누군가 끼어드는 상황 또한 영화를 흥미롭게 가공한다. 스티브와 함께 작업했던 난민 캠프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카림이 두 사람과 잠시 동행하면서 묘한 긴장감이 생성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관광지와 파인 다이닝을 곁들인 여행 코스에 난민 캠프라는 이질적인 공간이 은근슬쩍 편입된다. 카림은 자신이 하는 일을 상세히 설명한다. 카림에게 난민 캠프는 현실의 영역이자, 일상과 맞닿은 곳이다. 롭과 스티브에게 그리스는 잡지사의 미식 여행 기획안에서 비롯된 비일상의 여행지이지만, 카림의 현실이 은근슬쩍 개입되므로 두 사람의 여행이 함의하는 바를 어딘가 모호하게 만드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차에서 직접 내려 난민 캠프를 바라보는 롭과 스티브의 미묘한 표정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진중한 사유의 장을 환기하는
시청각적인 여행 대리 체험과도 같은 <트립 투 그리스>는 종종 방황한다. 서사성이 가미된 극영화의 리듬과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리얼리즘의 질감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 영화는 종종 균형감을 지키지 못하며 표류하기도 한다. 특정 대화 신(scene)에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구간들 말이다. 하지만 <트립 투 그리스>는 그런 한계를 두 남자의 서사를 대비시키면서 생성하는 텐션으로 극복해 나간다. 롭은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들은 스티브가 급하게 집으로 떠나자 때맞춰 오기로 한 아내와 함께 그리스에서의 일정을 스티브 없이 마무리한다. 롭은 친구를 떠나보낸 상황에서, 아내에게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의 감정에 관해 가볍게 언급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 아니겠는가. 가벼운 스몰 토크가 지배하던 영화의 초반부는 후반부에 이르러 사뭇 진지한 태도로 여행이 곧 인생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표면과 심연,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된 그리스에서의 경험은 결국 두 남자의 분화된 서사로 귀결된다. 아름다운 이국의 휴양지에서, 휴식과 대화로만은 온전히 채워낼 수 없는 짙은 무게감이 영화를 감싼다. 잊고 있던 삶의 감각을 깨우던 <트립 투 그리스>는 여행지라는 비일상의 공간을 경유하여, 진중한 자세로 죽음과 맞닿은 일상의 단면을 환기하며 여운을 남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은 '영화 <트립 투 그리스>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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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에서 영웅으로
<트랜스포머> 영화 시리즈의 첫 편이 나온 지 15년이 넘었다. 하지만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이야기의 초점은 흐려지고, 오로지 파괴적인 액션 장면들이 나열되는 느낌을 준다. 초기의 신선했던 감동은 점차 사라지고,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 시리즈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포머의 세계관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그들의 고향인 사이버트론이라는 행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애니메이션 영화 <트랜스포머 원>은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사이버트론의 기원을 다루며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단순히 로봇 전투 액션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들의 정치적 성장과 계급 갈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사이버트론의 노동자 계급을 전면에 내세우며, 각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감정을 통해 관객에게 정치적 함의를 전달하는 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이제, 이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주요 캐릭터들의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첫 번째 감정] 오라이온 팩스(옵티머스 프라임)의 자유
영화 <트랜스포머 원>에서 오라이온 팩스는 사이버트론 행성에서 평범한 노동자 계층에 속하는 광부로 등장한다. 그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깊었으며,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가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사이버트론의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오라이온 팩스에게 큰 충격을 주며, 그는 시스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진실을 알게된 그 순간은 그의 내면에서 자유를 향한 열망이 싹트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오라이온 팩스는 시스템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는 자유를 위해 싸우되, 과격한 방법 대신 온건한 접근을 택한다. 그의 목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부패한 체계를 개선하고 바로잡는 것이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비둘기파에 가까운 온건한 이상주의자적 태도이며, 사이버트론에서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영웅으로 성장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오라이온 팩스가 선택하는 길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타협과 대화를 중시하는 방식이다. 그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 안에서 변화를 모색하는 리더로 성장한다. 이는 그의 차분하고 이성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단순한 전투영웅을 넘어선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이후 옵티머스 프라임으로 거듭나며 사이버트론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두 번째 감정] D-16(메가트론)의 분노
오라이온 팩스와 대조적으로 D-16, 즉 메가트론은 같은 노동자 계층에 속해 있지만, 그가 택한 길은 완전히 다르다. 메가트론은 처음에는 규칙과 질서를 중시하는 성향을 보인다. 오라이온 팩스와 함께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메가트론은 체제의 틀 안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내면에서는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메가트론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 체제를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변모한다. 그는 현재의 사회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고 믿는다. 메가트론의 이 파괴적인 성향은 그를 강경한 매파로 만든다. 그는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오직 새롭게 탄생할 세계를 꿈꾸며 폭력적인 혁명을 추진한다. 이는 그가 오라이온 팩스와 갈등하게 되는 핵심 원인이 된다.
하지만 메가트론의 분노는 단순한 파괴적 욕구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기존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그가 오라이온 팩스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며, 이 영화는 메가트론이 가진 복잡한 감정을 더 깊이 파고들며 그의 폭력적 성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메가트론은 단순한 악역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인물로서 그의 캐릭터가 확립된다.
[세 번째 감정] 사이버트론 고대 조상들의 믿음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사이버트론의 노동자 계급에서 시작한 두 인물이 결국 각기 다른 정치적 길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사이버트론의 고대 조상들은 영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들은 각 영웅들에게 지혜와 힘을 부여하며, 그들의 성장과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흥미롭게도, 고대 조상들은 자유와 정의를 상징하는 오라이온 팩스, 즉 비둘기파의 손을 들어준다. 그들은 사회를 파괴하기보다는 개선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개혁하는 것을 지지한다.
이러한 조상들의 믿음은 오라이온 팩스와 메가트론이 상징하는 두 가지 정치적 이념, 즉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을 더욱 부각시킨다. 영화는 결국 이 두 인물의 갈등을 통해 자유와 분노, 개혁과 혁명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들은 사이버트론의 미래를 두고 서로 대립하며, 그 과정에서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이라는 두 영웅의 정치적 성장과 충돌을 보여준다.
조상들의 역할은 단순히 전설 속의 존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혜가 현대의 갈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이 남긴 유산은 두 인물의 행동에 방향성을 제시하며, 영화 속에서 사회적 진화와 혁신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제공한다. 사이버트론의 고대 조상들은 이 갈등의 심오한 철학적 배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깊이
<트랜스포머 원>은 단순한 액션 애니메이션 이상의 깊이를 가진 작품이다. 영화는 사이버트론의 계급 갈등과 노동자 계층의 정치적 성장 과정을 그리며, 자유와 정의, 분노와 혁명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주제를 다룬다. 오라이온 팩스와 메가트론의 대립은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니라, 각기 다른 정치적 이념이 충돌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정의를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 영화는 특히 사이버트론이라는 세계의 기원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을 세밀하게 다룬 점에서 주목받는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단순히 로봇들의 전투 장면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에서 영웅으로 성장하는 인물들의 정치적 여정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논쟁이 되는 정치적 주제들을 트랜스포머 세계를 통해 풀어내며, 관객들에게 깊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번 영화의 감독은 애니메이션계에서 유명한 조시 쿨리다. 그는 <토이 스토리 4>를 통해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은 감독으로, <트랜스포머 원>을 통해 트랜스포머 세계관의 깊이를 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이클 베이가 이끌었던 실사판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달리, 조시 쿨리는 이번 애니메이션에서 서사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특히 캐릭터들의 내면을 탐구하며 그들의 성장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목소리 연기도 눈길을 끌었다. 옵티머스 프라임, 즉 오라이온 팩스의 목소리를 맡은 크리스 햄스워스는 특유의 남성적이고 강렬한 목소리로 프라임의 리더십과 결단력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메가트론의 목소리를 맡은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는 그의 분노와 카리스마를 잘 전달하며 메가트론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했다. 두 배우의 목소리 연기는 영화의 감정선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트랜스포머 원>은 트랜스포머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서사적으로 깊이가 있는 작품이다. 단순한 로봇 전투를 넘어, 정치적 성장을 그린 이 영화는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의 기원을 탐구하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트랜스포머 팬뿐만 아니라, 정치적 서사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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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라이트만 담백하고 나머지는 어수선한
전설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 우승자 서윤복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부분이다. 세계 신기록을 세운 손기정. 하지만 우승의 기쁨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시상식에 올라가는 손기정. 입고 있던 옷에 그려있는 일본 국기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다. 뒤집힌 조선 총독부. 손기정을 겁박한다.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닌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는 말을 마지못해 기록한다. 손기정의 육상선수 커리어는 그때 끝났다.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1947년에서 시작된다. 냉면집에서 서빙 일을 하는 서윤복은 돈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손기정은 나라가 일제에게 벗어났다 하더라도 영 즐거운 일이 없다. 아들과 떨어진 일상. 매일을 술로 보낸다. 국민적인 영웅이라 ‘손기정 상’ 같은 시상식에 초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그가 친한 동료 남승룡, 냉면집 아르바이트생 서윤복과 함께 보스턴 마라톤 대회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강제규 감독은 충무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한 강제규 감독은 3년 후의 <쉬리>로 당시 한국영화 관객 신기록을 경신한다. <쉬리> 이후 4년이 지난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로 11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실미도>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일이라 당시의 충무로도 반향이 컸다. 이렇게 강제규 감독이 상업영화라는 분야에 있어 두각을 드러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감정적으로 진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고, 큰 규모의 신을 찍을 때 인물들을 깔끔하게 정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묘사하는 끔찍한 전쟁의 참상은 영화의 후반부를 위해 필수적이다. 격렬하고 광폭한 전쟁이 이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는 걸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몇 인물들은 전쟁의 광기에 혹해버렸다. 광기에 취한 인물들이 전투 도중이나 군 막사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 장면을 시각화하는 방식에도 감독의 장기가 들어가 있다. 이 <태극기 휘날리며>의 전투 장면은 좋은 의미에서 너절하다. 후반부 진태(장동건)가 피 흘리며 전투를 벌이고 난 후 다음 장면은 깔끔하게 씻은 진석(원빈)이다. 심지어 진태가 처절하게 싸우는 반면 진석은 누군가와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화한다. 당연히 진태의 상황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데, 두 인물 간의 시각적인 대비로 전쟁의 속성을 묘사한 것이다. 이렇게 <태극기 휘날리며>는 칙칙한 색감, 깔끔한 인물 동선, 처절한 전장의 분위기를 카메라로 담으며 한국전쟁이라는 지옥도를 구현한다. 이 지옥도가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후반부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신이 감동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번 강제규 감독의 신작 <보스턴 1947>는 강제규 감독의 장기들이 알차게 들어가 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하이라이트 신은 당연히 마라톤 장면이다. 이 장면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핵심이 되어 한국사회의 강인함과 서윤복의 단단한 내면을 상징한다. 인물이 뛰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방식이 영화의 몇 사건을 비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는 주인공 3인방을 보스턴에 곱게 보내지 않는다. 몇 가지 위기를 만드는데, 그 위기 이면에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1947년은 미군정이 한반도를 통치하는 시기였다. 한국정부가 들어서기 전이라 대회 참여의 금전적, 행정적 부분에서 지원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대응하는 과정은 혼자 하는 스포츠라는 점에서 마라톤과 유사하다. 사실상 1부의 초중반부와 2부의 후반부가 반복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암시하는 서윤복의 마라톤은 영화의 웅장함에 안성맞춤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이전에 글쓴이를 포함한 적지 않은 관객들이 '또 억지로 눈물 쥐어짜는 요소 넣었겠네' 우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는 이 우려를 무색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인간의 결기와 의지를 영화 후반부에 방점 찍어 마무리했다. 이 장중한 하이라이트를 위해 강제규 감독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보스턴의 날씨를 구현하기 위해 호주에서 촬영한다거나, 임시완, 배성우 배우가 러닝 연습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는 것이나 400여 명의 외국 배우와 함께했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실화라는 양날의 검
이 영화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세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이를 경제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야기 안에서 한국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라는 설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1,2부의 이야기 이면에 깔려있는 시한폭탄임과 동시에 강제규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국민성을 보여주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 설정이 정직하게 작동하는 경우도 있다. 초반부 주인공 3인방은 선수 엔트리 등록을 위해 관련 부처를 찾아간다. 이 장면에서 담당 공무원이 손기정 일행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은 사실적이다. 영화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손기정 선수와 관련한 부분이 몇 등장하는데, 이 문제와 1947년의 보스턴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정부의 지원 없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만 봐도 비슷한 예시가 몇 있다. 또한 궁핍한 한반도를 보여주는 방식도 극 중 등장인물들이 마라토너라는 점에 잘 어울린다. 신발은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영화는 신발을 수급하는 문제를 무작정 으쌰 으쌰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길 만큼 합리적으로 해결한다. 이 현실성과 관련한 부분은 2부에서도 마찬가지다. 2부에는 역사의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은 꼼꼼함이 느껴진다. 영화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후일담을 찾아보면 이 인물들을 꽤나 잘 살렸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마라톤 장면에서 특정 사건이 약간 영화적인 왜곡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장면 역시 1947년의 보스턴에서 실제로 이뤄졌던 일이라는 것이 놀랍다. 영화가 실화라는 점을 잘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실화라는 틀에 안주한 흔적이 아쉽다. 어쭙잖은 신파극을 가볍게 벗어난 후반부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더라도 플롯의 나머지 부분들은 예상가능하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인물들이 납작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박은빈 배우가 맡은 역할은 이야기에서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단지 서윤복에게 특정 행동을 반복하는 데에만 그치고 있다. 박은빈 배우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기 전의 작품이 아니었어도 이 인물에 대한 아쉬움은 남을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어렵게 대회에 참여해서 상을 받았어. 그럼 곱고 순한 여성 캐릭터는 영화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할 것 같은가? 이 문제의 답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또 영화 1, 2부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무례하다. 구체적으로 2부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어떤 두 미국인이 갖고 있는 비중이 크다. 이 두 인물은 관객들에게 '빨리 화 내!' 겁박하는 느낌마저 든다.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1947년이라지만 현실감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더 차갑고 냉정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 서윤복이 어떤 모습으로 달리기를 했는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차라리 이 부분을 구현하는 게 이야기의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보인다. 영화의 기획의도에 희생된 인물들이 아쉬웠다.
슬렁슬렁 넘어가다
영화는 인물들의 욕망과 관련한 문제를 손쉽고 전형적으로 해결한다. 먼저 이야기할 것은 주인공 서윤복이다. 서윤복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어머니다. 서윤복은 아픈 어머니를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초반부에서 영화는 서윤복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하지만 서윤복은 실행력이 있는 사람이다. 서윤복이 초반부에 달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몇 번 대사를 치는 부분에서 주인공이 마냥 이상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준다.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영화의 1부가 가진 큰 과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화는 이 문제를 굉장히 쉽게 해결한다. 물론 그 사건이 이 인물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그건 인물의 동기부여에 대한 문제인거지 실제 이 인물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과는 좀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 사실 이 문제는 2부에서 원인만 달라진 채로 반복된다. 영화 2부에서도 이 부분을 다루기 때문에 1부의 어설픈 마무리가 더 아쉽게 느껴진다. 남승룡의 경우에도 문제를 맺고 끝는것이 불확실하다. 이 인물은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하지만 이 욕망을 가진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남승룡은 이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단 조금의 과정도 없이.
영화가 가진 아쉬운 점 중 하나는 통일성이다.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가장 큰 이물감 두 개는 배성우와 하정우 배우다. 우선 배성우 배우와 하정우 배우는 다른 연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정우 배우가 맡은 손기정 역은 <수리남>의 강인구와 별 차이가 없다(심지어 헤어스타일도 비슷하다). 이러다 보니 손기정과 남승룡이 아니라 하정우와 배성우 배우 각자가 대화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는 임시완 배우 역시 마찬가지다. 달리는 신이 아닌 선에서, 이 영화에서 본 임시완 배우는 어쩐지 <미생>과 <불한당>에서 본 기시감이다. 김상호 배우도 이 배우가 등장했던 사극의 어느 장면처럼 연기한다. 대표적으로 이 인물들이 2부에서 밥을 먹는 신이 있다. 배우들의 일상연기에서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더 두드러져 강제규 감독의 역량을 생각한다면 아쉽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비단 연기 말고도 편집에서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신파극에 대한 반발심리를 너무 의식해서인지 이야기는 생략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특히 남승룡의 서사에서 더 느껴진다. 아마 배성우 배우의 개인적 에피소드 때문인 듯). 이것 덕분에 뚝뚝 끊긴다. 심지어 인물이 오롯이 대사를 칠 때에도 컷전환이 캐릭터를 방해한다는 느낌마저 든다. 대표적으로 손기정이 남승룡, 서윤복과 대화하는 장면들이 그렇다. 서로 대화하는 신인데 말 중간에 시점이 바뀐다. 그동안 강제규 감독이 규모가 큰 신을 깔끔하게 연출했다는 점과 반대로, 소수의 인원이 대화하는 신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밑반찬이 아쉽네
앞에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기획의도에 충실하다. 스포츠 신파극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관객들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 장면은 멋진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변 등장인물을 콘셉트 아래에 가둬놓은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큰 덩어리들은 있는데 중간단계들이 좁고 얕다. 이 얕은 깊이 덕에 영화 자체가 올드하게 느껴진다. 정작 영화가 우려하는 점은 다 보완했지만 이를 덮기 위한 수가 반대로 단점이 되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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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의 일상화
미국이 '인디언'이라 부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내쫓아 땅을 빼앗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은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그런 이야기들 중에 <포카혼타스>나 <늑대와 춤을>, <라스트 모히칸>과 같이 잘 알려진 영화와 애니메이션도 있다. 차별받고 학살당하는 그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나아가서 그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싸워주는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물론, 그것들이 품고 있는 무서운 '내적 식민지화'를 몰랐을 때의 이야기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은 미국의 원죄나 다름없다. 위의 이야기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어떻게 학살되고 차별받고 쫓겨났는지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거기에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구원하려던 백인들이 그들을 구원했다'라는 메시아적 서사를 덧씌운다. 이 개념은 정말 여러 군데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비단 아메리카 원주민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일본에 대한 이야기도 <타잔>과 <라스트 사무라이>등으로 그려지고 최근엔 <아바타>까지 그 서사를 이어간다. 그리고 백인들은 '자신들의 제국주의 역사'를 비판한다며 열광한다. 결국 그 식민지도 백인이 구원한다는 이야기인데. 한국으로 비유해 보자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해 일본과 싸우던 항왜를 주인공으로 해서, 항왜가 조선 여인과 사랑도 하고 조선을 구했다는 식의 스토리가 되는 셈이다.
서양의 이런 메시아 서사는 기독교의 예수 스토리에서 영향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간의 편에서 구원을 돕는다. 결국, 신인 자신을 희생해 인간을 구원한다. 이 기독교식 구원 이야기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인간은 신이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다. 헐리우드의 많은 영화는 이런 메시아 서사를 백인과 식민지의 관계로 풀어놓아서, 얼핏 보면 식민지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구원하는 이야기 같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식민지인 자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짙게 깔려있다. 결국 그들을 구원하는 건 그들에게 감화된 제국인, 백인이니까.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기존의 '백인이 식민지를 구원한다'는 서사를 깔지 않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흑역사와 원죄를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만든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뉴욕 백인들의 끔찍한 과거까지. 그는 그것을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평단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상과 이상하게 인연이 없는 감독이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흔한 '인디언에 대한 차별과 학살'에 대한 스토리가 아니다. 이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그동안 백인 구원서사로 점철되어 왔던 이야기들의 민낯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살인의 일상화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 족은 백인들에 의해 바위 투성이인 오클라호마로 쫓겨가 어쩔 수 없이 그곳에 터전을 잡는다. 하지만 거기에서 석유가 터지며 상황은 반전된다. 백인들이 내쫓고 그들의 땅이라고 이름 지어준 곳에서 석유가 터졌으니, 백인들의 법으로 오세이지족의 석유가 된다. 여타 영화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무조건 백인의 법을 무시하고 무식하게 싸우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렸던 것과 달리, 오세이지족은 그 법을 살려 석유가 자신들의 돈이 되도록 한다. 물론, 그 돈을 온전하게 다 쓰지 못하도록 백인들이 또 복잡한 절차를 만들긴 했지만.
영화에서 계속 그려지는 풍경은 굉장히 기이하다. 개척시대에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족과 백인들이 너무 즐겁게 융화되어 잘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세이지족이 백인들을 하인으로 부리고 있다. 백인들은 친절하고, 그들의 말을 배우고 같이 사업을 하며 술도 마시고 결혼도 한다. 오세이지족도 마냥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백인들의 집, 문화와 많이 동화되어 있다. 이런 풍경을 그리는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정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에서, 오세이지족은 너무 일찍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이 그냥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백인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 부분이 <플라워 킬링 문>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 중 하나인데, 끔찍한 연쇄살인이 너무도 평범한 일상과 평화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를 연상시킨다.
<큐어>는 아주 일상적인 장면에서 끔찍한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기에 굉장히 섬뜩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물론 그것이 최면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모두가 살인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살인의 일상화'로 공포를 주는 작품이다. 발랄한 아침음악과 함께 아침 일상을 하는 도중, 마치 옷을 개듯 사람을 죽이고 다음 일을 이어가는 사람들. 하지만 <플라워 킬링 문>은 더욱 무섭다. 왜냐하면 여기서 살인을 저지르는 백인들은 최면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최면
사람들은 보통 권력이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권력은 오히려 그 힘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힘을 드러낸다. 언론은 무언가를 일부러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그 힘을 과시한다. 검찰은 기소하지 않음으로 그 힘을 과시한다. 촌지를 받은 선생님은 잘못한 학생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보여준다.
오클라호마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집단 중 하나가 된 오세이지 족이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백인들이 세운 거대한 미국이라는 국가 안에 속해있기 때문에 사실상 권력은 백인들이 쥔 셈이었다. 그곳의 백인들은 모두가 한통속이다. 특히 오세이지족과 가장 친한 그들의 대변자 윌리엄 킹(로버트 드니로)부터, 그곳 보안관까지. 그 마을의 백인들은 범죄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권력을 드러낸다.
'무엇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라는 생각은 그 어떤 최면보다도 더 강력하다. <뜨거운 녀석들 -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란 무엇인가> 글에서도 언급했듯,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며 스스로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는 인식조차 없어진다. 처벌받지 않는 권력은 그래서 무섭다. 오세이지 족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일상 속에서 죽이는 백인들은 그들이 사이코패스라서가 아니라,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최면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처벌받지 않는 권력은 현대에도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사실 영화라는 미디어 역시 최면이다. 사람을 이야기에 빠트리고, 훌륭한 외모를 가진 배우들이 서사의 당위성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해진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영화라는 최면 안에 녹여서, 그것이 '영화를 즐기는 재미'속에 들어가도록 두지 않는다. 이 사건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또 범죄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당혹스러울 정도로 영화라는 형식을 깨고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최면에서 깨는 '레드선' 주문을 들은 것처럼, 이것이 영화가 아니라 실제 역사였고 현실이라는 것을 마주한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하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피지배자
오세이지 족은 힘없는 피해자가 아니라, 스스로 살 길을 개척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사람들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그들을 구하러 오는 FBI가 주인공처럼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오세이지 족과 결혼하는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주인공으로 했다. 더군다나 '잘생김의 서사'를 피하기 위해,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의치를 넣고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가며 열연을 했다. 덕분에 이 영화에선 오세이지족의 억울함, 스스로 개척하고 구원하는 힘이 더욱 강조되었다. 영화 내내 오세이지 족은 그저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가 아니다.
이 영화가 오세이지 족과 미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 이 세상의 모든 피지배층을 대변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미국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은 지배층인 백인이었지만, 미국 흑인들의 목숨을 건 꾸준한 저항이 없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여성운동 또한 권력층인 남성들이 변화해야 하지만,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지금과 같은 정도라도 변화가 일어났을까? 한국이 1919년 독립선언을 한 이후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백인에 의해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었을까? 피지배층은 권력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그것이 스스로를 구원해왔던 길이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여도, 당장은 힘이 없는 자의 몸부림으로 보일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기존의 메시아 서사처럼 지배층의 누군가가 감화되어 싸워주지 않아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현대의 오세이지 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원작의 저자 인터뷰에 따르면 오세이지 족의 석유는 고갈되었지만, 7개의 카지노를 운영하며 자체 헌법으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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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얼핏 보면 '이전에 하던 백인이 인디언 죽이는 이야기네'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무섭고 끔찍한 역사의 이야기며, 그동안 백인 구원 서사를 통해 백인들이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다. 자신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달하는 거장의 발걸음도 묵직하고, 범죄의 희생자였지만 피해자처럼 살지 않고 백인에게 무릎 꿇지 않는 오세이지 족의 당당함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한국 제목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는데, 원작 소설의 첫 페이지를 보고 이해하게 되었다. 원작 소설인 <플라워 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불안할 정도로 커다란 달 아래에서 코요테들이 울부짖는 5월이 되면 자주달개비, 노랑데이지처럼 키가 좀 더 큰 식물들이 작은 꽃들 위로 슬금슬금 번지면서 그들에게서 빛과 물을 훔쳐가기 시작한다. 작은 꽃들의 목이 부러지고 꽃잎들은 팔랑팔랑 날아간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땅속에 묻힌다. 그래서 오세이지족 인디언들은 5월을 '꽃을 죽이는 달 Flower-killing moon'의 시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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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가 말하는 '민족'
켄 로치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보여주듯, 민족은 단결의 이름이자 분열‧적대의 이름이다. 먼저 단결이다. ‘민족’은 아일랜드인들이 독립이라는 공동의 꿈을 가졌음을 표지하는 범주다. 아일랜드인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독립을 꿈꾸며 ‘하나’가 된다. 하지만 민족은 아일랜드인 사이의 차이를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아일랜드인에게는 독립 이후에 대한 다양한 꿈이 있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누군가는 전통적 권위에 기댄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꾸는 동안 이 차이는 논의되지 않는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는 치열하게 조정‧경합되었어야 할 차이들이 민족이란 이름 아래 억눌린 채 쌓여 있다가 끝내 폭발해 버리고 마는 과정이 담겼다. 우리와 비슷한 아일랜드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민족’이 무엇을 가능케 했고 또 무엇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난민, 이주민 혐오의 시대에 굉장히 시급한(혹은 이미 늦은) 작업이다.
1920년대 아일랜드의 한 마을. 영국 군인이 불시에 들이닥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하키를 치는 게 집회를 금지한 조치에 위반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과정에서 17살 청년 미하일이 영국군에게 반항하다가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하일의 죽음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공통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모두의 슬픔 속에서 주인공 데미엔의 고민은 깊어진다. 데미엔은 의사 자격증을 딴 시골 마을의 드문 엘리트인데, 이제 막 런던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곧 마을을 떠날 참이었기 때문이다.
고민을 품은 채 런던행 기차를 기다리던 기차역에서, 데미엔은 영국군에게 두드려 맞는 아일랜드인 기관사를 본다. 그리고 미하일과 기관사, 자신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아일랜드가 자유를 얻지 못하는 이상, 아일랜드인은 어디서든 구타당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이 데미엔의 인생 경로를 바꾼다. 데미엔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아일랜드인의 ‘공통의 비애’를 극복하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기로 한다. 마을 청년들과 함께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든 데미엔은 게릴라 부대를 꾸려 영국과 치열하게 싸운다.
영화가 의미심장해지는 건 이 공통의 비애가 위기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다. 첫 번째 사건은 어릴 때 함께 자란 동네 꼬마 크리스를 밀고자란 이유로 처형한 일이다. 망설임‧괴로움 끝에 크리스를 총으로 쏜 데미엔은 이 사실을 직접 크리스의 어머니에게 전한다. 데미엔 일행에게 줄 음식을 만들고 있던 크리스의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다시는 너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어리숙하고 순박한 동네 소년이었던 크리스의 죽음은 모든 아일랜드인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묶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드러낸다. 크리스 총살과 그 어머니의 슬픈 눈빛은 모든 아일랜드인의 자유를 위한다는 데미엔의 정당성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두 번째는 고리대금업자와 가난한 노파의 대립이다. 둘은 모두 아일랜드인이다. 하지만 계급이 다르다. 마을 사람들은 고리대금업자가 노파를 착취하도록 둬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고리대금업자가 독립군에 무기 자금을 대는 사람이기에 그의 이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으로 나뉘어 갈등한다. 데미엔과 그의 동지이자 친형인 테디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데미엔은 가난한 노파의 편에, 테디는 고리대금업자의 편에 선다. 아일랜드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적 조건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민족이라는 ‘동질적’ 집단이 무엇을 배제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인지를 고민케 한다.
가장 결정적인 세 번째 사건은 아일랜드의 자유국 지위 확보 이후에 일어난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평화 협정을 맺고 아일랜드의 자유국 지위에 합의했다. 아일랜드가 일정 정도의 자치를 보장받은 것이다. 평화협정 이후, 데미엔과 테디 그리고 아일랜드인들은 둘로 쪼개진다. 제한된 자유나마 수용하자는 사람과 완전한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자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된다. 둘 사이의 대립은 격화되어 영국군이 아일랜드인을 핍박할 때와 다름없는 정도의 폭력이 오고 간다. 아일랜드인들은 절망한다. 어제까지 밥을 지어 주고 무기를 숨겨 주었던 자국의 군대가 둘로 나뉘어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 그들이 느낀 분노와 슬픔, 좌절의 크기가 얼마나 큰 것일지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다.
급진적 자유를 갈망하던 데미엔은 결국 온건한/제한된 자유에 만족하자는 테디의 군대에 붙잡히고, 무기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살당한다. 데미엔 총살 명령을 내리는 건 그의 친형 테디다. 영화는 테디가 죽은 데미엔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같은 꿈'을 꾸던 형제가 정작 ‘내부’의 차이를 조율하지 못해 마주한 비극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역사의 특정한 국면에서 민족은 분명 저항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정치적 범주가 된다.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이 모이고, 경험‧감정을 공유하며, 투쟁할 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면이 전환되고 민족이 더 이상 저항의 범주로만 작동하지 않을 때, 문제는 시작된다.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 담론이 내부의 차이를 삭제하고 진압하는 폭력의 명분이 되는 것이다.
폭력을 극복하자는 명목하에 부상한 민족 범주가 폭력의 주체가 된다는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테디와 데미엔의 갈등이 본격화되기 전, 데미엔은 연인 시네드가 영국군에게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데미엔은 시네드를 구하려 하지만 테디가 막는다. 위치가 노출될 경우 전 부대원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데미엔은 결국 형 테디의 말을 따른다. 그리고 주저앉아 “느끼는 법을 잃었다”며 오열한다. 데미엔의 눈물은 위기에 빠진 연인을 향한 공감보다 ‘합리적 선택’을 우선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이다.
앞서 언급했듯, 데미엔은 마을 청년 미하일의 죽음과 아일랜드인 기관사가 영국군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며 분노와 슬픔을 ‘느꼈고’ 이를 동력 삼아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정작 투쟁의 과정에서 그는 느끼는 방법을 잃고 말았다. 이는 데미엔만의 문제가 아니다. 데미엔이 동네 청년 크리스를 총살한 후 괴로워했듯, 테디도 친동생 데미엔을 총살한 후 눈물을 흘린다. 분명하게만 보이던 자유의 길이 점차 어렵고 불투명해진다.
이 모든 비극과 혼란은 느낌에 기반한 열린 공동체가 민족이라는 이름의 닫힌 공동체로 전환될 때 일어난다. 느낌의 공동체는 포용적이다. 아일랜드인을 향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분노한다면, 영국인도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민족 공동체는 이 분노한 영국인을 포용하지 못한다. 나아가 ‘민족적 대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는 내부 구성원들을 ‘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민족 범주는 저항의 공동체로 출발한 스스로가 억압의 이름이 되는 모순을 피할 수 없다. 데미엔과 테디가 비극을 비껴가지 못한 건 모두 이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슬펐던 건,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익숙해서였다. 지금 우리의 민족 담론은 어디에 와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도 힘든데 무슨 난민이고 이주민이냐는 말이 횡행하는 지금, ‘한민족’의 서사에 이 슬프다는 ‘느낌’의 자리가 보장되길, 그럼으로써 열린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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