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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2025-08-11 20:11:30

코끼리는 그곳에, 나는 이곳에.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진학했을 때가 떠오른다. 주변 친구나 선생님들, 심지어 진학에 크게 압박을 주지 않으셨던 부모님조차 의아해했던 결정. 나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내새웠지만 돌이켜보면 도피였다. 웃긴 점은 특정한 환경 때문에 벗어나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향에서도 힘든 일은 딱히 없었다. 다만 여기를 벗어나면 조금은 더 성장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막연한 생각은 충동으로 번지고, 이내 나를 먼 곳을 가게 했다. 물론 후회는 없다. 부산에서 새로운 인연과 사건들이 끊임없이 지나쳤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레 잊고 있던 그때의 기대도 어느정도 충족되었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왜 대구를 벗어나려 했을까. 그곳에서도 인연과 사건들은 충분하다 못해 계속 재생산되지 않는가.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주인공은 4명이다. 이들은 각자 사연을 품고 있다. 친구를 우발적으로 죽였다거나, 원조교재 사실이 학교에 퍼졌다거나, 요양원에 끌려가게 생겼다거나, 자신의 잘못으로 친구가 눈 앞에서 투신자살을 하는 등. 누구도 쉽게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지극히 보통의 사람들이 짊어진다. 사회는 더욱 잔인하다. 사회는 보통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의 대가를 치루면서 형성된다고 한다. 하지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의미 없는 논의처럼 사회는 사람보다 서순이 앞서는 건 물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있다. 복지로 사람의 인생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는 반면 큰 대가를 요구하지만 울타리는 쇠창살에 가까운 부조리한 사회도 있다. 영화의 감독 후보가 묘사하는 중국 사회는 후자에 가깝다. 이들을 지켜주지 못할망정 더욱 몰아간다. 믿어왔던 사람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돌아선다. 본인의 욕심과 타인의 배려가 당연한 사회적 합의라고 우길 뿐이다.

 

 

이러한 통찰은 촬영 기법에서 잘 묻어나온다. 지극히 기다란 롱테이크와 핸드헬드 방식의 촬영은 배경과 맞아 떨어지며 현실감을 더해줌은 물론, 나아가 방관하는 사람의 시선이 되는 체험을 통해 사회뿐만 아니라 자신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초점을 극단적으로 인물에게만 사용했기 때문에 기존 영화들에 비해 이질적이다. 배경이 거의 보이지 않다는 뜻이다. 이는 누구를 탓하려 해도 대상이 뚜렷하지 못할 뿐더러 모든 결과에는 개인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인공들 역시 이기적이기 때문에. 고통보다 차라리 고립이 낫고, 타인과 사회도 결국 본인의 고통에 비해서는 안개처럼 흐릴 뿐이다.

 

아주 멀리에 있는, 소문으로만 듣던 어느 먼 동물원의 코끼리한테 가면 해결이 될까. 처음 코끼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황당함이 무색할 정도로 구석에 몰린 그들은 코끼리를 보러간다. 동물원에 가까워질 수록 생각은 차분해지고 점차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인생은 망할 대로 망했고 사회 탓만 하는 영혼이 보인다. 그들이 속박된 곳을 회피해서 기껏 가는 곳도 똑같이 철장에 갇혀있는 잿빛의 동물원이라는 것을. 쓰레기통이 더러운 게 아니라 쓰레기가 있는 곳이 더럽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감독 후보는 데뷔작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의 정식 개봉을 앞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데뷔작이자 유작인 셈이다. 단 한번의 우회나 철회가 없던, 매우 짧아서 역설적으로 매우 옳곧은 그의 세계관을 존경한다. 도피처조차 없는 사람이 사회만큼이나 도피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일말의 선택지라도 있는 그들이 조금은 부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후보는 코끼리를 보러갈 힘을 태워서라도 사회를 바꾸고자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4시간 가량의 영화의 러닝타임도 그의 사연을 접하면 초라해진다.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필름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가.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일보다 힘들 테다. 하지만 후보는 직접 고통을 피부에 새기며 이를 가능하게 했으니. 부디 후보가 발디딜 저세상에는 갇혀있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가는 코끼리가 있기를. 우렁찬 울음소리에 맞추어 마음껏 흐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작성자 . 뜬구름

출처 . https://blog.naver.com/qksksktbvj/223541349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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