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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을래2025-08-14 10:04:34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미야케 쇼, 2022)에 관한 단상

우리는 감각하고 그녀는 투쟁한다

우리는 감각하고 그녀는 투쟁한다

 미야케 쇼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감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따뜻하다”일 것이다. 후끈한 열기라기보단 딱 체온 정도의 따스함. 세상을 향한 의심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을 때, 마음의 온도가 식었을 때라면 혹은 그런 누군가를 만난다면 미야케 쇼의 영화를 찾고 싶어진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필자가 본 미야케 쇼의 영화 3편(<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 중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보는 내내 ‘케이코’(키시이 유키노 분)의 투쟁을 지켜보면서도 스크린이 그 생동감 넘치는 세계의 따뜻한 온기를 관객에게 실어 나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각: 흐르는 이미지와 부산한 사운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극장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영화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청각장애인 복서의 드라마를 따라가지 않는 이야기, 관객은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다루는 영화 속 시간의 케이코만 만날 수 있을 뿐 그녀의 전사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카메라는 필요 이상으로 케이코에게 다가가려 하지도 않고, 때론 그녀의 아주 개인적인 부분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케이코를 계속 지켜보지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읽을 수가 없다. 이야기 자체도 그렇지만, 이미지와 사운드 측면에서도 다르다. 작품의 배경은 분명 도쿄다. 그러나, 우리가 ‘도쿄’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번화가의 이미지가-이를테면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 같은- 아니라 케이코가 냄새난다고 했던 강변과 평범한 골목길,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은 복싱 체육관이 주 무대다. 16mm 필름의 따뜻하고 생생한 질감과 빛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한겨울에 온기를 가득 부여한다. 로케이션만 생동감 넘치게 담아냈을 뿐 아니라,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복싱의 운동성, 특히 케이코와 관장, 또는 동생 커플이 함께 섀도복싱을 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사운드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도시의 온갖 소음, 엠비언트 사운드를 영화의 후반 작업에서 누르지 않고 가능한 살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청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함과 동시에 대단히 소란스럽다. 상대적으로 적은 대사량과 달리 영화 내내 극장을 가득 메우는 소음은 거부감이 들기보단 오히려 작품의 세계를 더 생동감 있게 느껴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 영화엔 음악이 거의 삽입되지 않는다. 음악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체육관에서의 훈련에서 반복적인 소리다. 줄넘기, 미트, 운동기구의 반복적인 소리가 씬에 독특한 리듬감을 부여한다. 반드시 주목할만한 점은 주인공 케이코는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사운드를 듣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평소보다 더 생동하는 세계를 체감함으로써 케이코의 불편을 인식한다.

투쟁: 작고 느리지만, 꾸준한

 

 케이코는 소음뿐 아니라 경기 중의 코칭과 공이 울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다. 복서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그녀는 어쩌다 복싱에 빠졌을까. 이 영화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가 왜 복싱을 그만두려 하는지도 명확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내가 아는 (좋은) 영화에서의 복싱은 경쟁이라기보단 투쟁이다. 나 자신과의, 혹은 세계와의 투쟁. 이 영화는 케이코의 승패엔 별로 관심이 없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케이코가 세계를 제대로 대면하고 자세를 고쳐잡아 투쟁해나가는 성장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케이코에게 복싱은 어떤 동기나 목표라기보단 그녀가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케이코는 아픈 게 싫다. 그녀가 링 위에서 상대에게서 물러나고, 달려드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아픈 게 싫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번째 경기(케이코에겐 2번째)와 두 번째 경기의 양상은 상당히 다르다. 첫 번째 경기에서의 케이코는 승리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케이코가 상대보다 유효타를 더 많이 넣어 이긴 판정승이다. 경기 후 체육관에서 코치 ‘하야시’는 “두려우니까 앞으로 달려드는 거지?”라고 묻는다. 그리고 이어진 훈련에서 물러나지 말라는 말에도 케이코는 자꾸만 물러나 프레임 바깥으로 프레임아웃 한다. 영화 중반부에서 관장은 케이코에게 “복싱은 싸울 마음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 싸울 마음이 없어지면 상대에게도 실례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후반부 두 번째 경기에서는 케이코는 패배하지만, 케이코는 상대에게 전력으로 달려든다. 브레이크 이후에 그녀가 내지르는 기합은 그녀가 상대에 대한 태도, 혹은 세계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순간이다. 그때 비로소 케이코는 상대의 ‘눈을 들여다본다’. 복싱을 계속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강변에서 상대를 만나 감사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언덕을 뛰어올라 로드워크를 시작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영어 제목은 <Small, Slow but Steady>다. 작고 느리지만, 꾸준한. 케이코는 관장이 인터뷰에서 밝히듯 복싱에 재능이 있는 선수는 아니다. 다만 그녀는 ‘인간적인 기량’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케이코는 작고 느리지만, 솔직하고 정직하다. 그녀는 이제 세계와 제대로 대면함으로써 꾸준히 나아갈 것이다.


 작고 느리지만 꾸준한 것은 안타깝게도 성장하는 케이코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관장 부부에게 설명하듯 “작은 빗방울이 긴 시간 동안 단단한 돌을 뚫는 일”이 있다. 이 영화의 훌륭한 점은 단순히 케이코라는 인간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라져가는 것들에게도 주목한다. 뇌 질환을 앓는 관장, 낡은 체육관, 오래된 골목의 풍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사라지게 될 운명이기에 그 역시 작은 존재일 것이다. 케이코가 이 체육관을 떠나기 싫어함은 짐작해보건대, 그 공간에서 관장과 사제 이상의 가족애와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케이코가 세상을 제대로 대면한다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사라지게 두어야 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라지는 것들을 처연하게 섣부르게 연민하지 않는다. 병색이 짙어져 병원에 입원한 관장은 케이코의 경기를 보고 나서 만족한 듯 힘겨워 보이지만 천천히 휠체어를 끌고 간다. 미야케 쇼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히길 이 영화의 콘셉트는 “우리가 바라봐야 했던 것은 아마도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 그 작은 존재를 쌓아나가서 큰 영화로 만드는 게 아니었을까.”라고 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분명 작은 존재들을 긍정한다. 그 긍정의 힘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필자의 생각엔 그 힘은 연대에 있다. 작중 시간적 배경은 오래되지 않은 코로나 시절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은 온라인을 통한 범세계적 연결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오프라인에서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시기다.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은 수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 모양을 통해 소통해야 하므로,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코로나 사태는 소통의 어려움을 증폭시켰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케이코를 포함한 농인들이 수어로 대화할 때 자막을 삽입하지 않았다. 관객들도 그 소통의 어려움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연대는 언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으로 하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섀도복싱 장면들에선, 나란히 선 사람들이 비언어적인 제스처로 마치 합일되는 것만 같다. 언어로 말하기보단 눈을 맞추듯 몸짓을 맞추는, 따뜻하고도 놀랍도록 시네마틱한 그 순간들. 케이코는 “결국 사람은 혼자야”라고 말했지만, 그녀가 세상과 제대로 대면할 힘을 얻은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연대의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엔딩 쇼트에서 그녀는 혼자 달려 나가지만 두 번째 복싱 경기에서 사람들이 멀리서 함께했듯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싶다. 두 번째 경기에서 케이코를 지켜본 사람들은 가족과 체육관 사람들 뿐만이 아니다. 스크린을 통해 바라본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그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생생하게 느꼈던 세계 속에서 진심으로 투쟁하기 시작하는 케이코를 모두가 응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엔딩크레딧은 그 소란스러운 엠비언트 사운드와 함께 도쿄의 풍광이 하나씩 지나간다. 엔딩크레딧이 끝나고 상영이 종료되기 직전, 작게 줄넘기 소리가 들린다. 우리가 오프닝이 끝나고 체육관에서 들었던 첫 번째 소리다. 아무래도 케이코는 복싱을 그만두지 않은 것 같다.




+) 올해 초에 작성했던 이 글을 일부 수정하고 문장을 추가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필자가 동시대 감독 중 최고로 여기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많이 떠오른다. 시네필 책방 ‘코프키노’의 대표님과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는 “하마구치 류스케는 22세기 영화로 가고, 미야케 쇼는 20세기로 돌아가는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그 둘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고, 동료애를 쌓아나가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연대의 가치를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작성자 . 누워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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